[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71. 백련암 찾은 서정주 “성철 스님 뒤에 어린 분홍꽃빛 후광을 봤다”
『“저는 육십이 멀지 않은 나이인데도 이쁘게 보이는 여자를 만나면 연연한 마음이 생기는 걸 아직도 끊지 못하고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어떠신지요?” 서정주의 능글맞은 고백이었다. 성철은 소리 내어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서정주씨는 큰 시인이라고 듣고 있었는데, 그것도 아직 모르시오? 아 그러니까 중들은 날이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부처님께 예불도 하고, 불경도 배워 읽고, 참선도 하고, 마음을 바로 닦으며 지내는 것 아니요.”』
백련암은 가야산의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백련암(白蓮庵)은 이름처럼 흰 연꽃으로 피어 있었다. 성철의 법문과 오도(悟道) 후 불사가 향기롭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그 향기를 좇아 숨을 헐떡이며 백련암을 찾아갔다. 종교계, 학계, 정계 그리고 예술계 사람들이 성철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자기 분야에 일가를 이룬 이들은 잘사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성철에게서 자신의 인생을 검증받고 싶어 했다. 세속에서 이름이 높을수록 붙들고 있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숨겨놓은 것들, 말할 수 없는 것들을 꺼내 성철 앞에 펼쳐보였다. 성철은 그들에게 ‘불교’를 얘기했다. 간결하면서도 쉬웠다.
하지만 성철의 말은 간결하기에, 또 쉽기에 깊었다. 어떤 때는 경(經)이었고, 어떤 때는 잠(箴)이었다. 사람들은 성철에게서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시인 서정주도 1973년 봄 백련암의 성철을 찾아갔다. 농익은 시어로 절창을 뽑아내던 시기였다.
서정주는 19세에 박한영 스님을 만나 머리를 깎고 불경을 공부했다. 박한영은 유불선(儒佛仙)에 통달한 학승이었다. 이광수, 최남선, 신석정 등도 그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서정주는 동대문 밖 개운사에서 절밥을 먹었다. 그러면서도 연애소설을 읽고 기생집도 드나들었다. 1934년 6월 서정주는 참선을 하겠다며 홀연 금강산 장안사를 찾아갔다. 장안사에는 당대의 고승 만공 스님이 주석하고 있었다. 만공이 보기에 서정주는 중이 될 인물은 아니었던 듯하다.
“선을 하려면 거사로는 안 되고 아주 중이 돼야 한다. 뒤에 후회하지 않겠는지를 많이 생각해보라.”
만공은 여승들과 어울릴 뿐 서정주는 본체만체했다고 한다. 서정주는 이튿날 금강산을 떠나왔다.
‘대선사 만공의 눈에도, 석전(박한영)의 눈에도 수행은 않고 절간 처마 밑에서 담배나 피우고 연애소설이나 읽는 서정주가 선이나 중과는 거리가 멀게 보였을 것이다.’ (이경철 ‘미당 서정주 평전’)
서울 거리를 배회하며 김동리 등 문우들과 어울리던 서정주는 신식 여성 임유라를 사랑했다. 그것은 짝사랑이었고, 실연은 그를 방랑으로 내몰았다. 서울을 떠나기로 작정했다. 서정주는 시인 이상과 서울에서의 마지막 술잔을 기울였다. 초저녁부터 마신 술은 새벽까지 이어졌다. 청진동 해장국집에서 이상과 헤어진 서정주는 서울역에서 기차를 탔다. 서정주는 1936년 4월 해인사 일주문을 넘었다. 주지를 찾아가 김동리가 써준 소개장을 내밀었다. 그렇게 해인사 품에 들었다. 마음 속 울화와 근심을 씻으려 했지만 젊은 시인의 눈에는 젊은 아낙들만 눈에 들어왔다.
“몹쓸 마군이여, 무명의 혼돈이여.”
머리를 흔들었지만 여인들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고, 소쩍새가 길게 우는 밤에는 수음(手淫)을 했다. 해인사 주변 여관에서 여류화가의 유혹을 받고 시 ‘대낮’을 쓰고, 몸뚱이가 울긋불긋한 꽃뱀을 보고 ‘화사(花蛇)’를 썼다.
‘절 근처 밀주집에 안주로 북어를 쫙쫙 찢어 다시 살생해 가며 도무지 여자답지 않은 주모를 희롱하기도 하고 총각 머슴과 안주인이 땀 뻘뻘 흘리며 하는 그 짓거리를 훔쳐보기도 했다. 그러다 성이 안 차면 불경 공부하러 온 거사들과 어울려 절 아랫마을 색싯집으로 내려가 술을 고래로 마시고 색시들을 꼬여내 혼숙하기도 했다.’ (이경철 ‘미당 서정주 평전’)
서정주가 해인사 산문을 넘기 한 달 전 성철은 해인사에서 삭발을 했다. 1936년은 성철과 서정주 모두에게 평생을 걸어가야 할 길이 열렸다. 서정주는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시인이 되었고, 성철은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그해 늦봄과 초여름을 성철은 해인사 선방에서, 서정주는 해인사 사하촌에서 보냈다. 서정주가 들었던 소쩍새 울음을 성철도 똑같이 들었을 것이다. 같은 햇살과 바람을 맞았지만 두 사람이 길러낸 것은 물론 달랐다. 시인은 방황의 탈출구를, 선승은 영원히 사는 새 길을 찾았을 것이다. 성철은 그 유명한 출가시를, 서정주는 관능의 이불 위를 맨몸으로 뒹구는 시를 썼다.
‘따서 먹으면 자는 듯이 죽는다는/ 붉은 꽃밭새이 길이 있어// 핫슈 먹은 듯 취해 나자빠진/ 능구렝이 같은 등어릿길로,/ 님은 달아나며 나를 부르고……// 강한 향기로 흐르는 코피/ 두 손에 받으며 나는 쫓느니// 밤처럼 고요한 끓는 대낮에/ 우리 둘이는 웬몸이 달어……’ (서정주 시 ‘대낮’)
‘머리도 식힐 겸 서울서 합천 해인사로 내려가 구상한 작품. 그러나 실연(失戀)의 터질 듯한 아픔, 번열기를 삭히려 들어간 한갓진 산속이기도 했다. 못 이룬 사랑 때문인가. 대낮에 펼쳐지는 육욕(肉慾)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 몸으로 달아오르고 있다. 형용사의 꾸밈이 아니라 동사로 육욕과 관능과 원초적 생명을 향하여 100미터 달리기 경주하듯 온 몸이 터질 듯 달려나가고 있는 시가 ‘대낮’이다.’ (이경철 ‘미당 서정주 평전’)
거의 같은 시기에 승려와 시인이 되어 해인사의 품에 안겼던 두 사람은 그 후 37년 만에 백련암에서 만났다. 1973년 초파일이었다. 서정주는 큰절을 올린 다음 무릎을 꿇었다. 젊은 날에는 서로 존재조차 알지 못했지만 백련암에서 마주 앉은 두 사람은 그 명성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성철 62세, 서정주 59세였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섰을’법한 서정주는 그때 이런 질문을 했다.
“저는 육십이 멀지 않은 나이인데도 이쁘게 보이는 여자를 만나면 연연한 마음이 생기는 걸 아직도 끊지 못하고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어떠신지요?”
서정주의 능글맞은 고백이었다. 시로써 젊은 날의 바람기를 잡았지만 아직 욕심의 꿈틀거림이 남아있음을 숨기지 않았다. 고도의 농일 수도 있었다. 성철은 소리 내어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서정주씨는 큰 시인이라고 듣고 있었는데, 그것도 아직 모르시오? 아 그러니까 중들은 날이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부처님께 예불도 하고, 불경도 배워 읽고, 참선도 하고, 마음을 바로 닦으며 지내는 것 아니요.”
서정주는 이때 구도자의 솔직한 모습을 발견했다고 술회했다. 시인은 선승을 친견한 소감을 이렇게 남겼다.
“참 이상했던 것은 이때 그의 상반신의 주위에서는 아련한 후광(後光)이 일어나서 비치고 있던 일이다. 그 빛은 아주 엷은 분홍빛이었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이 빛깔은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 온 성인화(聖人畵)들에 나타났던 그 후광들의 빛깔과는 다른 빛이어서 아직껏 그것이 신비스럽기만 하다. 성철 큰스님의 앉으신 몸 뒤에 어리었던 그 영원히 청정하게 꽃다운 정신생명을 느끼게 하던 엷은 분홍꽃빛이 실제 후광의 본색이고, 지금까지 화가들의 성인화에 나타났던 그것들은 상상으로만 그럴싸하게 덧붙여 놓은 장식일 뿐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두 사람의 인연에서 영감을 얻어 시인이며 평론가인 송희복은 이런 시를 지었다.
‘한 편의 시(詩)를 쓴다는 것/ 말(言)이 절(寺)을 만나는 일 아니랴.// 서정주 시인이 성철 스님을 만났을 때/ 백련암 선방에서 보았다는 보랏빛 후광처럼// 거침없이 말하고 때로 웃음을 터뜨리며/ 천진한 표정을 짓고 하던// 성철 스님의 배경에/ 드러난 보랏빛 후광처럼// 흰 빛이나 금빛이 아니라/ 석산(石山)의 해돋이와 해질녘에// 엷은 보랏빛으로/ 둥두렷이 어리는 그 빛처럼// 신기한 일 아니라// 한 편의 시를 쓴다는 것/ 마음속의 절 한 채/ 저마다 짓는 일 아니랴. (송희복 ‘보랏빛 후광’)
우리네 삶과 우리 고유의 것들, 그리고 사람들을 담아온 사진작가 육명심도 성철을 찾아갔다. 그는 사진에 관한 통념을 깨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온 독보적인 인물이었다. 사물의 본질을 ‘마음으로 찍는’ 육명심에게 성철은 독특한 존재였을 것이고, 그래서 자신의 렌즈에 담고 싶은 대상이었을 것이다.
육명심은 특유의 배짱으로 해인사 백련암을 향해 무조건 ‘진격’했다. 삼천배를 하지 않으면 누구도 만나주지 않던 성철이 웬일로 그를 맞았다. 육명심은 성철을 친견하는 순간 엄청난 기운을 느꼈다. 눈앞의 선승이 태산 같은 기세로 자신을 압도했다. 평생 수많은 인물들을 찍었지만 그런 경우는 없었다.
“사진은 뭐 하러 찍을라 하나?”
“스님, 만약 부처님 생전에 사진술이 있었더라면 세상의 불상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성철이 씨익 웃었다.
“그럼 한번 찍어봐라.”
육명심의 ‘작전’은 성공했다. 그런데 막상 성철의 얼굴을 살피던 육명심은 생각이 달라졌다. 성철의 눈두덩이 좀 부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되겠습니다.”
“그렇다고 사진을 안 찍어?”
“안 찍는 게 아니라 못 찍겠습니다.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장이 좋지 않아서 겨울철이면 가끔 그렇게 눈두덩이 부어올랐다. 성철은 날이 풀리는, 부처님오신날쯤 다시 오라고 말했다. 하지만 육명심은 가지 않았다. 결국 성철의 사진은 다른 작가가 찍었다. 성철의 사진을 모아 ‘포영집’을 출간한 주명덕 작가였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육명심은 내심 다행이라 여겼다. 카메라로 찍는 사진이 아니고 자신의 눈으로, 마음으로 찍은 사진이 훼손되지 않고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천하무구(無垢)의 사진 한 장이 남은 셈이었다. 육명심은 이런 글을 남겼다.
“누군가가 그 사이 스님을 찍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누가 찍었든지 일단 찍었으면 되었다. 그 모습은 앞으로 기록으로 남을 테니까. 어떤 점에서 사진은 꼭 카메라로만 찍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오히려 내 육안의 망막으로 찍는 무집착의 촬영법이 이 선승이 두는 단수 높은 인생의 바둑 한 판의 대국이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육명심은 성철을 친견했던 그날, 그 순간을 이렇게 기억했다.
“사진작가로서 욕심과 집착을 버리고 마음으로 사진을 찍었던 내 생의 최고의 순간이었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46호 / 2016년 6월 8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72. 속가 아내도 출가 “전생 승려들이 모여있다 흩어진 것 아닌지”
『“‘내가 낳았지만 독사보다 지독하다.’ 이렇듯 산으로 들어간 남편을 원망하며 홀로 한 서린 세월을 삼켰지만 이덕명에게도 출가의 인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석남사에서 윤회와 인과응보에 대한 인홍 스님의 법문을 듣고 마음이 움직였다. 마침내 성철의 도반 자운 스님으로부터 계를 받았다. 법명은 일휴(一休)였다.”』
시부모가 세상을 뜨자 고향집은 며느리 이덕명이 지켰다. 덕명은 출가한 딸을 기다렸다. 그러나 수경(불필 스님)은 오지 않았다. 성전암에 있는 성철을 찾아가 딸을 돌려달라고 악도 써보고 애원도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성철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산청 묵곡리에 홀로 남겨진 덕명은 외로웠다. 그 많던 식솔들은 흩어져갔고 경호강은 그저 무심했다. 숲속에서 떨어진 바람이 담을 넘어와 감히 방문을 흔들었다. 유림의 당당했던 며느리는 갈수록 작아졌다. 눈 오는 밤이면 딸이 그립고, 달 밝은 밤이면 보고 싶었다. 덕명은 딸을 찾아 나섰다. 마지막 인사를 받은 지 10년 만이었다. 짐작은 했지만, 가지산 석남사에서 만난 수경은 딸이 아닌 스님이었다. 세속 인연을 끊어버린 불필에게서는 찬바람이 일었다.
‘비련의 여인이 따로 없었다. 사십 대에 딸을 절로 보내고 오십대 후반에 이른 어머니에게서는 벌써 노년의 체취가 묻어났다. 소쩍새처럼 그리움을 노래해도 받아줄 사람 하나 없이 세월이 너무나 쓸쓸했을 나의 어머니. 그러나 나는 10년 만에 찾아 온 어머니를 지나가는 행인보다 더 무심히 대했다.’ (불필 스님 ‘영원에서 영원으로’)
불필은 곁을 내주지 않았다. 딸은 아버지의 길을 걷고 있었다. 세속은 윤회의 길이요 출가는 해탈의 길이었으니, 혈육이란 아무 의미도 없었다. 정(情)이라는 보따리를 이고 딸을 찾아간 어머니는 매번 눈물바람을 하면서 돌아섰다.
“내가 낳았지만 독사보다 지독하다.”
이렇듯 산으로 들어간 남편을 원망하며 홀로 한 서린 세월을 삼켰지만 이덕명에게도 출가의 인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석남사에서 윤회와 인과응보에 대한 인홍 스님의 법문을 듣고 마음이 움직였다. 마침내 성철의 도반 자운 스님으로부터 계를 받았다. 법명은 일휴(一休)였다. 유림 이상언의 속가를 벗어나 남편과 딸이 있는 불가(佛家)에 들었다. 이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휴는 16년 동안 불필 곁에서 기도하며 절밥을 먹었다. 그리고 1981년 여름 저녁에 떡국 한술을 뜨고 입적했다. 성철이 막 종정에 추대되어 한국불교의 상징이 되어 있을 때였다. 고단하고 쓸쓸했던 생이었지만 마지막 모습은 사뭇 달랐다.
‘가신 모습에서는 모든 상이 다 떨어져서 그리움도 애착도 기다림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사흘 후, 장작더미에 불이 활활 타고 육신은 한 줌의 재가 되었다. 다시 그 재를 동서남북으로 뿌리니 사람의 한 생이 허무하였다.’ (불필 스님 ‘영원에서 영원으로’)
그날 불필은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슬픔은 법랍 25년의 비구니를 더 이상 흔들지 못했다.
불필은 이미 법력이 깊었다. 20대에는 성철이 써준 법문노트를 품었고, 30대에는 ‘운달산 법문’과 해인사에서 들은 ‘백일법문’을 받들었다. 아버지 성철처럼 곁눈 팔지 않고 수행에 전념했다.
백일법문을 들은 후 1년쯤 지났을 때 불필은 은사인 인홍 스님이 이끄는 석남사에서 대중과 3년 결사를 했다. 장우, 성우, 혜관, 혜춘 등 원로와 법희, 법용, 백졸, 혜주 등 젊은 비구니들이 마음을 모았다. 석남사는 성철의 가르침을 가장 반듯하게 실천하는 비구니 도량이었다. 선방을 지었을 때도 성철은 심검당(尋劍堂)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지혜의 검을 찾아서 어리석음을 베라’는 시퍼런 원이 서렸을 것이다. 이후 심검당은 비구니들의 수행 명소가 됐다.
3년 결사가 시작되자 성철은 이들을 격려하는 법문을 했다.
“사력을 다한 노력으로 열심히 공부하라. 그렇지 않고 방일(放逸)하면 미래겁이 다하여도 공부는 성취하지 못한다. 정진은 일상과 몽중, 숙면에 일여가 되어야 한다. 잠시라도 화두에 끊어짐이 있어서는 안 된다.”
결사는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진행됐다. 하루 300배 참회기도를 하고 능엄주를 독송하고 모두 좌복을 떠나지 않았다. 도량 전체에 사람 소리가 끊겼다. 말이 필요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선방에 든 사람이나 이를 외호하는 대중이나 모두 비장했다. 결사에 참여한 비구니는 3년 동안 석남사 일주문 밖을 나가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내일은 없었다.
“온 도량의 분위기가 칼날처럼 살아있어 누구 하나라도 태만하면 스스로 살이 베일 것 같은 긴장감이 감돌던 시간이었다.” (불필)
결사의 끝이 보이자 마지막으로 100일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100일 동안 한 순간도 눕지 않고 정진한다는 것은 죽을 각오 없이는 할 수 없었다. 불필은 밤에 졸음이 오면 밖에 나가 산길을 걸었다. 짐승이 나타나도 피하지 않았다. 용맹정진은 듣고 보는 것조차 없어야 했다. 치열하게, 아니 그 치열함도 지워지도록 정진했다.
마침내 100일 용맹정진을 마쳤다. 3년 결사를 해냄은 조계종 전체에서도 드문 일이었다. 13인의 비구니는 회향 법문을 들으러 성철을 찾아갔다. 성철은 겉으로는 무심하게 공부의 경계를 물었지만 속으로는 대견해했다. 음성에 칭찬과 격려가 녹아있었다. 대중은 그걸 간파했다. 비구니들의 3년 결사는 실로 장엄했다. 우리 불교사에 아로새겨야 할 쾌거였다.
불필은 출가 이후 해인사 청량사, 태백산 홍제사, 문경 대승사 윤필암, 해인사 국일암, 지리산 도솔암과 대원사, 오대산 지장암 등 제방에서 수행했다. 그리고 석남사 심검당을 선(禪)의 본향으로 삼아 정진을 거듭했다. 불필은 성철에게 필요 이상 다가가지 않았다. 또 다가갈 수도 없었다. 수행을 거듭할수록 성철은 경외의 대상이었다.
“나는 지중한 인연으로 큰스님의 딸로 태어났지만 단 한 번도 아버지라 불러보지 못했다. 그리고 열여덟 살에 안정사 천제굴에서 뵌 순간부터 큰스님은 내게 아버지가 아니라 스승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주변 분들은 나를 큰스님의 딸로만 바라보는 듯하다.”
열세 살 때 묘관음사에 찾아가 처음 아버지 얼굴을 보았지만 아버지는 인사조차 받지 않았다. 만나자마자 소리쳤다.
“가라 가.”
불필은 성철의 성정을 많이 닮았다. 맺고 끊는 게 분명했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못했다.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굳건했지만 그럼에도 아버지의 길을 걸어야 했다. 출가 이후 불필은 성철만을 바라보며 살았다. 속세의 인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불가의 인연이었다. 성철의 법문은 밥과 같은 것이었다. 먹지 않으면 죽어야 했다. 그래서 꼭꼭 씹어서 삼켜야 했다.
불필은 성철이 호랑이로 버티고 있는 가야산에 들었다. 권속이 늘어나니 떠돌 수만은 없었다. 36세에 첫 상좌를 받은 불필은 20여 년 동안 24명의 제자를 두었다. 손상좌까지 따르는 무리가 70여명이었다. 불필은 가야산에 금강굴을 지었고, 이 사실을 성철에게 3년 동안 숨겼다. 못난 중으로 숨어서 공부만 하겠다는 다짐을 어겼기 때문이었다. 성철은 금강굴 옆을 지나가지도 않았다.
불필은 금강굴에서 성철의 가르침을 실천했다. 석남사의 수행가풍을 이어 봉암사의 공주규약을 지켰다. 또 삼천배로 상징되는 절 수행을 철저하게 시켰다. 절은 절하는 곳이었다. 성철은 이렇게 말했다.
“죄업이 멸하면 그 자리에 복이 생긴다. 그러니 참회정진으로 복을 지어야 한다.”
“절하다 죽은 사람은 없다. 누구든 참회의 절을 해야 한다.”
성철의 법문을 듣고 불필은 석남사에서 만배를 한 적이 있었다. 만배를 마쳤을 때 불필은 사람에게는 퍼내도 퍼내도 다 쓸 수 없는 무한 능력이 있음을 알았다.
불필은 일찍이 절을 해서 몹쓸 병이 나은 기적을 지켜봤다. 지리산 도솔암에 있을 때였다. 초등학교 친구가 중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 집을 찾아갔다. 눈썹이 하나도 없는, 의사들도 고개를 젓는 희귀병이었다. 불필은 문득 친구에게 삼천배를 시켜보고 싶었다. 삼천배를 하면 업력을 벗어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스럽게 유교 집안의 친구는 불필의 말을 믿고 따랐다. 100일 동안 하루 천배씩 절을 시켰다. 아무도 없는, 침묵의 공간에서 친구는 홀로 엎드렸다. 거친 숨소리가, 때로는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백일기도 회향을 21일 앞두고서는 하루에 삼천배씩을 하도록 했다.
친구는 점차 기력을 회복했다. 친구는 내친김에 기도를 더해보겠다고 했다. 불필은 그런 친구에게 도솔암 근처의 응석사에서 삼천배 100일기도를 하도록 했다. 친구는 하루에 삼천 번을 엎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온 몸에서 흰 벌레가 빠져나가는 꿈을 꾸었다. 100일 기도 후 친구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사람들은 불필을 ‘절 시키는 선수’라고 했다. 불필은 성철이 왜 그렇게 삼천배를 시켰는지 몸소 깨달았다. 자꾸 엎드리다 보면 하심이 되고 참회가 되어 자신을 돌볼 수 있는 힘이 생김을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참회기도의 으뜸은 삼천배다. 몸을 엎드리면 마음도 엎드려진다. 몸과 마음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내 몸을 상대방의 발 아래로 낮출 때 진정 참회가 되는 것이고, 그 참회 위에 세상과 사람에 대한 감사 그리고 부처로 살아가겠다는 발원이 선다.” (불필 스님 ‘영원에서 영원으로’)
불필은 성철의 딸이 아닌 제자로 엎드리고 또 엎드렸다. 성철이 열반한 후에도 성철의 사상을 전파하고 유지를 기리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고 보면 이제 세상에는 불필만이 노승으로 홀로 서있다. 할아버지 이상언은 ‘성철 스님에게 간다’며 세상을 떴고, 할머니 강상봉은 보살 초연화로 평생 성철 곁을 맴돌았다. 또 아내 이덕명은 일휴라는 법명으로 딸 곁에 머물다 떠났다. 그렇다면 전생의 승려들이 모여 있다 흩어진 것은 아닌지.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47호 / 2016년 6월 15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73. 소박한 일상이 곧 법문이었다
『“‘종단이 이만큼 안정되었으니 우승(愚僧)은 종정직에서 사퇴합니다. 앞으로 부처님의 법에 의하여 종단이 운영 발전되기를 바랍니다.’ 앞뒤가 분명하다. 성철이 종정을 사퇴하겠다고 하면 주변에서 종단이 안정 될 때까지만 머물러 달라고 했을 것이다. 이로 미루어 성철은 부단히 종정이란 고깔을 벗어버리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성철의 장좌불와와 동구불출 같은 초인적인 수행은 생전에 이미 전설로 회자됐다. 그렇다면 깨친 이후의 하화중생은 무엇인가. 성철은 불교를 기복신앙에서 참회와 발원의 신앙으로 바꿔놓았다. 불교 안의 비불교적 요소를, 선종 안의 비선종적 요소를 걷어냈다. 승려들이 신도의 복을 빌어주는 것은 절집이 굿집이나 다름없음이었다. 성철은 ‘부처님 법대로’ 이런 일체의 행위를 추방하라 일렀다. 봉암사에서부터 천제굴, 성전암, 금룡사, 백련암에 이르기까지 성철의 사자후는 변함이 없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달마대사도 우리 자성이 부처라는 것을 알렸을 뿐이다. 천불이 나타나 도와주어도 중생을 부처로 만들 수는 없다. 그러니 승려들이 초능력을 지닌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만일 초능력을 득했다 해도 자신의 도력이라 뽐낼 것이 아니라 이를 중생 제도에 활용해야 할 것이다. 승려는 부처와 통하는 사람이 아니라 중생을 부처의 길로 인도하는 사람이다. 어설픈 신비에 기대니 불교가 ‘산속의 무속’쯤 으로 치부되고 낡고 색이 바랜 종교로 인식되는 것 아닌가.
성철에게도 물론 신비스런 이야기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신도의 금목걸이가 눈에 거슬려 방안에서 키우던 산비둘기를 불러 계곡에 버리게 했다.”
“오늘 누가 온다고 말하면 어김없이 손님이 찾아왔다.”
“6·25전쟁을 미리 내다보고 봉암사의 장서를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성철이 초능력을 지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입으로는 어떤 얘기도 하지 않았다. 깨친 후에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니었다. ‘남’이었다. 성철의 일상은 지극히 평범했고, 가르침 또한 경(經)을 벗어나지 않았다. 도란 일상 속에 있었고, 고명한 진리는 평범했다. 평범한 것이 제일 위대했다. 노자도 ‘크게 지혜로운 사람은 마치 어리석은 사람 같다[大智若愚]’고 했다. 지혜의 최고 단계에 이르면 지혜의 경계도 없어져야 했다. 성철은 백일법문에서 노자의 말을 인용했다.
“도를 위해서는 날마다 덜고, 배움을 위해서는 날마다 더한다(爲道日損 爲學日益).”
성불해서 도를 보는 것은 스스로를 끊고 다시 소생하는 것이었다. 낭떠러지에서 손을 놓아 버림이니, 그것은 모든 것을 버림이었다. 높은 것에서 손을 놓아 떨어지면 그 어떤 것도 남을 수 없음이었다. 일체의 것을 버려서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경계는 자기 자신만 알 수 있다. 그래서 성철은 ‘자기를 속이지 말라[不欺自心]’고 했다. 실로 벼락같은 경책이다.
산책길의 성철에게 누군가 물었다.
“스님은 이 길에서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겨울에는 춥고 여름엔 덥지.”
너무 단순해서 그 의미를 되새김질했음직하다. 하지만 산책을 할 때면 산책만을 했기에 가능한 답이다. 산책을 하면서 수많은 분별을 따지고, 숱한 망념이 떠오른다면 이런 답을 할 수 없다. 모든 것을 비웠기에 가능한 것이다.
성철은 새벽 2시쯤 일어나 3시에 백팔참회를 했다. 정해진 시간에 공양을 하고 하루 두 번 산책을 했다. 또 삼천배를 마친 신도와 공부를 점검받으러 오는 스님들을 접견했다. 그 외는 종일 참선과 독서로 소일했다. 3평 넓이의 거처도 소박했다. 석굴암 부처님 사진 한 장이 걸려있고, 경상(經床)과 좌복뿐이었다. 화분이나 그림 한 점도 없었다. 성철의 이런 생활은 살아있는 법문이었다. 성철은 식생활에서도 수행자의 본분을 잃지 않았다.
“아침은 현미죽을 들고 점심과 저녁은 현미밥을 들었다. 버섯을 물에 담가 우려낸 국물에 감자와 당근을 약간 썰어 넣은 것이 국 겸 찌개였다. 반찬은 솔 잎 가늘게 썬 것 한 숟가락, 검은 콩 삶은 것 한 숟가락, 곰취나물 조금, 마와 더덕을 소량 섭취했고, 계절별 반찬으론 쑥갓이 날 땐 쑥갓 세 줄기, 복숭아가 나올 땐 복숭아 반 쪽, 가을과 겨울에는 사과 반쪽이 반찬으로 나왔다. 여름에 아주 더울 때 수박을 조금 먹었고, 평소에 몸이 냉하여 가끔씩 설사를 했기 때문에 식후에 곶감을 하루 한 개씩 먹었다. 차는 인동과 대나무잎, 녹차를 넣어 삶은 물을 갈증이 나면 한 잔씩 마셨고, 피곤할 땐 차에 꿀을 넣어 마시기도 했다. 식사량은 아주 소량이었으며 간식은 전혀 하지 않았다. 반찬에 소금과 간장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무염식을 하였다. 출가 이후 술이나 고기를 전혀 드시지 않았다.” (원소 스님 ‘성철선사의 접인지도법(接引指導法)’)
성철은 대중법어를 통해 크게 세 가지를 강조했다. 몸을 받고 살았던 이 세상에 남긴 유언 같은 것이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남을 위해 기도합시다. 남모르게 남을 도웁시다.”
그 속에 불교의 핵심이 녹아있었다. 그것은 자기 견성, 공덕 회향, 이타행 실천이었다. 깨닫고, 그 깨달음을 나눠주고, 마침내 깨달음 속에 녹아듦이었다. 그 가르침은 지금도 우리 가슴을 적시고 있다. 성철은 불도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불교는 세상과 거꾸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은 전부 내가 중심이 되어 남을 해치려고 하는 것이지만, 불교는 나를 완전히 내버리고 남을 위해서만 사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한국불교는 세상과 거꾸로 살지 않았다. 세상과 타협하며 속세에 물들어갔다. 자기 자신에 감탄하고, 자신을 숭배했다. 성철이 종정으로 있던 10년 동안 총무원장이 10번이나 바뀌었다. 조계종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1983년 8월 ‘신흥사 사건’이 터졌다. 설악산 신흥사에서 신임 주지 부임을 둘러싸고 유혈 난투극이 벌어졌다. 승려 1명이 흉기에 찔려 사망하고 여러 명이 다쳤다. 대처승들이 물러갔지만 절 뺏기 싸움은 끊이지 않았다. 설악산 입구에 있는 신흥사는 문화재 관람료를 받아 돈이 쌓여있었다. 그 돈을 차지하려 싸웠다. 폭력배를 동원한 계획된 범행에 국민들은 경악했다. 종정 성철은 교시를 내려 통탄했다.
“꿈결에서도 생각할 수 없는 신흥사 사태는 종단 미증유의 참사이며, 천인이 공노할 비극입니다. 자비로 생명을 삼는 불문에서 이러한 불상사가 발생한 것은 누구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국민이 들끓고 있으며, 곤충미물들도 조계종단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는 일시적 돌발사고가 아니요, 오랫동안 계속된 종단 분쟁의 결말이며, 조계종단이 극도로 타락한 증좌입니다.”
이 사건으로 종단 집행부가 퇴진하고 종회 또한 해산했다. 그해 9월 소장파 승려들이 중심이 된 이른바 ‘비상종단’이 발족됐다. 이들은 비상종단운영회의를 설치해 개혁을 추진하지만 이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반대 세력이 승려대회를 열어 비상종단 해체를 결의하고 폭력배들을 동원해 조계사 총무원을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런 사태를 지켜보던 성철이 종정직 사퇴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조계종은 성철을 대신할 만한 인물을 찾지 못했다. 성철은 1984년, 86년, 88년 세 차례 사퇴서를 제출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특히 1986년 4월에 제출한 사퇴서는 그 이유가 ‘종단 안정’이었다.
“종단이 이만큼 안정되었으니 우승(愚僧)은 종정직에서 사퇴합니다. 앞으로 부처님의 법에 의하여 종단이 운영 발전되기를 바랍니다.”
앞뒤가 분명하다. 성철이 종정을 사퇴하겠다고 하면 주변에서 종단이 안정 될 때까지만 머물러 달라고 했을 것이다. 이로 미루어 성철은 부단히 종정이란 고깔을 벗어버리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고깔을 쓰고 산 속에만 있더라도 한국불교는 성철이 필요했다. 세속의 눈으로 보면 욕심은 없되 의지가 부족한 허수아비였고, 무능한 노승일 수 있었다. 그래도 한국불교에 큰일이 생기면 달려갈 곳이 딱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성철이 있는 해인사 백련암이었다. 여기에 종정으로서의 존재 이유가 있었다.
1991년 1월 종정의 임기가 만료되었다. 성철은 이제는 제발 그만 ‘종정 고깔’을 벗겨달라고 했다. 이에 1월23일 종정직을 맡을 생각이 없다는 통고문을 보냈다. 하지만 종단 일각에서 성철의 연임을 요청했다. 그러자 다른 문중에서 새로운 종정을 내세우겠다며 조직적으로 반발했다. 종정 추대를 둘러싸고 문중 다툼 양상을 보이자 성철은 다시 7월5일 통고문을 보내 종정직을 맡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10일에는 ‘종도에게 보내는 글’까지 발표했다. 그럼에도 사흘 후 해인사에서 열린 전국승려대표자회의에서 성철을 종정에 추대하기로 결의했다. 이어서 8월22일 조계종 원로회의에서 성철을 종정으로 추대했다. 이때는 성철의 몸이 많이 쇠약해 있었다. 옛날 같으면 주장자를 내치며 고깔을 팽개쳤겠지만, 10년 동안 쓰고 있던 고깔은 옛날의 고깔이 아니었다. 이미 자신의 의지대로 쓰고 벗을 수 없게 되었다. 이듬해 초파일 법어를 발표함으로써 종정직을 수락했다.
성철이 종정으로 있는 동안 많은 고승이 입적했다. 성철과 동시대를 살며 치열하게 수행하고 불교의 새 길을 찾았던 이들이었다. 시대는 험했지만 삶은 향기로웠다. 성철은 종정으로서 추도사를 발표했다. 추도사는 스님의 법맥과 행적을 살펴 직접 작성했다. 성철이 글을 바친, 한 시대를 밝혔던 고승들을 살펴보자.
경봉 정석(1892~1982), 탄허 택성(1913~1983), 동헌 완규(1896~1983), 구산 수련(1909~1983), 혜암 현문(1885~1985), 일우 종수(1918~1985), 벽초 경선(1899~1986), 석암 혜수(1911~1987), 영암 임성(1907~1987), 벽안 법인(1901~1988), 고암 상언(1899~1988), 성운 지효(1909~1989), 자운 성우(1911~1992)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48호 / 2016년 6월 22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74. 병중일여(病中一如)
『“성철은 견성에 대한 그릇된 견해와 망설이 퍼져있음을 가장 우려했다. 그것은 선종의 종지(宗旨)를 흐리고 정맥(正脈)을 끊는 일이었다. 성철은 이를 바로잡는 데 일생을 바쳤다. 견성이 곧 성불임을 밝히는 것이 깨침의 회향이었고, 오도(悟道) 후의 불사였다. 돈오돈수 사상도, ‘자기를 바로보자’로 상징되는 법어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
상대적이고 유한한 세계를 넘어 절대적이고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종교다. 그렇다면 그 영원한 세계는 어디에 있는가. 불교에서는 바로 마음속에 있다고 한다. 그러니 마음을 보라고 했다. 마음을 보면 자기 자신이 절대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중생의 근본자성은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하지만 번뇌망상이란 먼지가 끼어 있어서 스스로를 보지 못하니 자신의 본래면목을 보기 위해서는 마음을 닦는 공부를 해야 했다. 여러 가지 공부가 있겠지만 성철은 마음을 보는[見性] 가장 수승한, 가장 빠른 길이 참선이라 일렀다. 부처님도 성불하기 전에는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음을 알지 못했다. 깨닫고 보니 중생이 빠짐없이 불성을 갖추고 있었고, 그래서 “신기하고 신기하다”고 감탄했다. 그런 만큼 자기 마음속에 부처가 있음을 믿고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
하지만 한국불교는 견성에 대한 설이 분분했다. 성철은 견성에 대한 그릇된 견해와 망설이 퍼져있음을 가장 우려했다. 그것은 선종의 종지(宗旨)를 흐리고 정맥(正脈)을 끊는 일이었다. 성철은 이를 바로잡는 데 일생을 바쳤다. 견성이 곧 성불임을 밝히는 것이 깨침의 회향이었고, 오도(悟道) 후의 불사였다. 돈오돈수 사상도, ‘자기를 바로보자’로 상징되는 법어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사실 경향각지의 선방마다 견성했다는 승려들이 넘쳐났다. 하지만 성철이 보기에는 어림없었다.
“견성했으니 인가해달라고 찾아오는 이가 일 년에 수십 명이 넘는데 태반이 견성은커녕 몽중일여도 되지 않은 자들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견성이란 동정일여·몽중일여를 넘어 숙면일여가 되고 나서 얻는 것이라고 설명해주면 ‘아, 견성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었습니까?’ 하고 순순히 돌아가곤 하는데, 간혹 막무가내로 고함을 치며 법담(法談)해보자고 달려드는 이들도 있다. 또 자기는 몽중일여 숙면일여를 넘어 완전히 무심경계에 들었다고 억지를 쓰는 이들도 있는데 그건 완전 거짓말이다. 천하 사람을 다 속인다 해도 자신은 속일 수 없다. 그렇게 거짓말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간혹 숙면일여를 지나 묘각을 성취했다고 착각하는 사람도 있다.
예전엔 이런 이들을 물리치지 않고 일일이 만나줬지만 아무리 일러줘 봐야 소용이 없다. 그래서 근간엔 시자를 시켜 만나보게 하는데 그런 이들이 한둘이 아니라 도처에 가득하다.” (성철 ‘선문정로’)
성철의 몽둥이질이 차츰 뜸해졌다. 고희를 넘기면서부터는 찾아오는 선승들을 아예 만나주지도 않았다. 성철은 탄식을 쏟아냈다.
“‘성철은 너 성철이고 나는 나다. 긴 소리 짧은 소리 무슨 잠꼬대가 그리 많으냐’ 하면서 달려드는 진정한 공부인이 있다면 내가 참으로 그 사람을 법상에 모셔놓고 한없이 절을 하겠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출격 대정부이며 시퍼렇게 살아있는 사람이다.”
기어이 성철이 혼잣말을 했다.
“그놈이 그놈이구나. 내 말 듣는 놈이 아무도 없어.”
성철은 눈 푸른 납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달마의 푸른 눈을 닮은, 깨친 선승은 오지 않았다. 성철은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팔순이 다가오자 기력이 눈에 띄게 쇠해졌다. 관절염으로 거동이 불편해졌고, 무엇보다 가슴 부위가 아팠다. 심장질환이 분명했다. 제자들이 스승을 모시고 심장 전문의 서정돈 박사를 찾아갔다. 진찰 결과 부정맥을 앓고 있음이 밝혀졌다. 서 박사는 심장조절박동기를 심장에 부착해야한다고 했다. 성철은 몸속에 기계를 박아야한다는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냥 죽지, 그래 살아서 뭐하겠나.”
서 박사는 그런 성철을 곡진하게 설득했다.
“부정맥은 흔한 병입니다. 심장조절박동기 부착은 간단한 시술입니다. 눈 나쁜 사람이 안경을 쓰는 것과 같습니다. 말하자면 심장에 안경 하나 얹는 것입니다.”
박사의 ‘안경론’을 성철은 묵묵히 들었다. 제자들도 입원을 간청했다. 성철은 이내 수술대 위에 누웠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제자 원택이 서 박사에게 은밀하게 물었다.
“큰스님께서 치료를 받으셨는데, 제가 어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겠습니까?”
“다른 이상은 없으시니 앞으로 건강하실 것입니다. 그래도 각오는 하셔야 합니다.”
원택은 안심이 되면서도 등골이 서늘했다. 제자는 ‘각오’란 말을 그냥 삼켜버릴 수 없었다. 스승이 없는 백련암, 가야산, 해인사, 한국불교를 떠올려봤다. 1987년 봄날의 일이었다.
언제부턴가 성철은 추위를 무척 탔다. 백련암은 가야산의 한기가 그대로 몰려왔다. 백련암에서 겨울나기가 힘들어졌다. 제자들은 노승 성철을 따뜻한 남쪽으로 모셨다. 제자들은 부산에 거처를 마련했다. 부산 중심가에서 대형목욕탕과 숙박업을 하고 있던 이용수, 최봉순 부부는 자신의 건물 맨 위층에 별실을 만들어놓고 성철을 맞았다. 부부는 성철을 6·25전쟁 직후부터 극진하게 섬겼다. 훗날 자신의 업소를 절터로 기증했다. 또 구봉 현승훈 거사, 정행인 보살 부부도 부산 선동 화승원 안에 성철의 처소를 마련했다. 성철은 이곳에서도 바랑을 풀었고, 그 공간을 ‘시간 밖’이라는 뜻의 겁외사(劫外寺)라 이름 지었다. 열반 후 제자들이 성철의 생가 터에 지은 절 겁외사는 여기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성철은 부산 해운대 근처에 있는 해월정사에도 머물렀다. 바다를 좋아하는 스승을 모시기 위해 맏상좌 천제가 바다가 보이는 곳에 절을 지었다. 성철은 사찰이름도 바다 해(海)자를 넣어 직접 지었다. 넓은 바다와 밝은 달빛(月)은 부처님의 법과 지혜를 뜻했다. 해월정사에 머물 때에는 일체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바다만을 바라보며 마음을 씻었다. 가끔 송정, 기장 해변과 장안사 등을 둘러봤다.
가야산 호랑이로 살아온 지 30년, 성철도 노인이 되어야 했다. 늘 다니던 포행길도 힘겨웠다. 그런 성철에게 병이 들어왔다. 폐렴으로 부산 동아대병원에 입원하여 한 달 넘게 고생하고 있었다. 성철이 제자 원택을 찾았다. 열반하기 1년10개월 전이었다. 초췌해진 얼굴로 제자를 쳐다보던 성철이 한마디 했다.
“똑같다.”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제자가 눈만 끔벅거렸다.
“이놈아, 똑같다 이 말이다.”
“무엇이 똑같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성철은 제자를 한참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옛날 젊었을 때나, 장좌불와할 때나, 지금이나 다 똑같다는 말이다. 너는 벽창호를 언제 면할 것이냐. 그 말도 못 알아들어. 쌍놈 아닌가.”
그때서야 제자는 스승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성철의 법문이 머리를 스쳤다.
“숙면일여, 즉 오매일여의 경지를 넘어서야 비로소 안과 밖이 투철해지고(內外明徹) 무심(無心)을 얻어 큰 깨달음을 이룬다.”
성철은 죽음을 넘나드는 와병 중에도 ‘일여’의 경지를 잃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제자에게 확인하여 전하고 있음이었다. 병세가 위중했음에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깨달음의 마음이 한결같았다. 원택은 문득 스승이 지월 스님을 병문안했을 때의 장면이 떠올랐다.
지월 스님은 그 누구를 만나도 하대하지 않아서 ‘가야산의 인욕보살’로 추앙받고 있었다. 그러던 스님이 몸져누웠다. 원택은 산문에 든 지 얼마 되지 않은 1973년 초봄, 성철을 모시고 병문안을 갔다. 이때 스승의 병문안이 자신의 생각과 사뭇 달라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성철은 다른 일체의 말은 하지 않고 오직 화두만을 챙겼다.
“성성합니까? 화두가 끊어지지 않고 잘되지요?”
“그렇습니다.”
“똑같다 이 말이지요?”
“일여합니다.”
“그러면 됐습니다. 화두만 끊어지지 않고 잘되면 됐습니다.”
성철은 곧바로 일어섰다. 화두를 들고 있기에 더 붙들 이유도 슬퍼할 이유도 없었다. 불생불멸, 부증불감이었다. 지월 스님은 성철과의 선문답을 나눈 그날 밤 열반에 들었다.
▲ 성철 스님이 병중에 쓴 게송. 원택 스님이 처음 공개했다.
그렇게 지월 스님을 보냈던 성철이 병상에서 자신을 점검하고 있었다. 원택은 병중일여(病中一如)에 든 성철이 새삼 경이로웠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감이 솟구쳤다. 이때 스승이 불쑥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백일고고벽소중 白日杲杲碧霄中
천심해저어생각 千深海底漁生角
조주운문각미로 趙州雲門却迷路
만타산호광찬란 萬朶珊瑚光燦爛
-1992년 1월28일, 동아병창(東亞病窓)에서
쨍쨍한 해가 푸른 하늘에 빛나고 빛나며
천 길 바다 밑에서 고기는 뿔이 돋아나네
조주 운문 스님은 도리어 길을 헤매고
만 갈래 산호가지는 그 빛이 찬란하네.
종이를 받아든 원택은 깜짝 놀랐다. 불길한 생각이 엄습했다.
‘정녕 떠나실 준비를 하시는 것인가.’
하지만 글을 꼼꼼하게 읽어보니 열반송은 아니었다. 열반송이라면 굳이 ‘동아병창’이라는 장소를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스승 성철이 병중일여의 심경을 표출한 것이었다.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고 있음이었다. 일테면 ‘병중일여 게송(偈頌)’이었다. (원택 스님은 취재차 만난 평전 작가에게 성철이 힘들게 쓴 병중의 글씨를 처음 공개했다.)
몸은 쇠약해도 글은 기운찼다. 해는 푸른 하늘에서 빛나고 고기는 뿔이 돋고 있었다. 조주 스님은 성철 앞에서 쩔쩔 매고 있음이니, 이를 보며 산호가 만 갈래의 가지를 흔들며 깔깔거리고 있음이었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49호 / 2016년 6월 29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75. 열반 <끝>
『“성철이 자주 눈을 감았다. 제자 원융은 스승이 혼침에 빠진 줄 알고 여쭈었다. ‘큰스님, 지금 경계가 어떠하십니까?’ 그 말에 성철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원융의 뺨을 후려쳤다. 열반에 들기 3일 전 일이었다. ‘가야산 호랑이가 죽지 않았구나.’ ”』
성철은 출가 후 줄곧 가슴에 쇠말뚝 하나를 박고 살았다. 거기엔 패(牌) 하나가 붙어 있었다.
‘영원한 진리를 위해 일체를 희생한다.’
세속적인 명리를 버리고 영원히 사는 길을 찾아 나섰다. 그 길을 불교에서 찾았고, 부처가 열었던 길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 길은 곧잘 끊기고 어둠에 잠겨있었다. 성철은 육조 혜능이 밝혔던 횃불을 들고 길 위에 섰다. 분명 옛길이었지만 구도자에게는 전혀 새로운 길이었다. 문 없는 문이었고, 길 없는 길이었으니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야 비로소 열렸다.
세상에 나와서 진리를 본 것은 축복이었다. 그 축복은 쌓아 놓으면 사라져갔다. 축복은 남을 위해 사는 것으로 완성되었다. 남을 위해 기도하고 중생을 돕는 것이 최고의 불공이었다.
성철은 일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가난이 참다운 자유임을 실증해보였다. 성불하기 위해서는 밥그릇 하나에 옷 한 벌이면 되었다.
최소의 생활이 최대의 자유였다. 도를 이루기 위해서는 가난부터 배우라 일렀다. 성철의 누더기 옷은 치열한 수행으로 대자유를 얻은 사람의 징표였다.
가을이었다. 그해 가을은 해인사 퇴설당에 맨 먼저 찾아왔다. 해인사 방장이, 조계종단 종정이, 가야산 호랑이가 ‘떠날 시간’을 부르고 있었다. 해인사 사람들이 퇴설당을 기웃거렸다. 그리고 한 마디씩 했다.
“벌써 가을인가.”
성철은 버릴 것은 모두 버렸다. 기력 또한 쇠잔했다. 제자들과 절 식구들은 일거수일투족을 점검했다. 성철이 자주 눈을 감았다. 제자 원융은 스승이 혼침(昏沈)에 빠진 줄 알고 여쭈었다.
“큰스님, 지금 경계가 어떠하십니까?”
그 말에 성철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원융의 뺨을 후려쳤다. 열반에 들기 3일 전 일이었다. 이 소식은 빠르게 제방선원에 알려졌다.
“가야산 호랑이가 죽지 않았구나.”
성철이 제자 원택을 찾았다. 달리듯 걸으면서도 경내에 떨어진 나뭇잎이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제자는 불길했다. 퇴설당에 들어선 원택을 스승은 물끄러미 바라봤다. 성철이 이내 희미하게 웃었다.
“내 이제 갈란다. 너희를 너무 괴롭히는 거 같아.”
청천벽력이었다. 하지만 올 것이 왔음이었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겨우 말을 꺼내 올렸다.
“시자들이 또 스님의 마음을 거슬렸나 봅니다. 부디 고정하시고 노여움을 푸시지요.”
“아니다. 이제 갈 때가 다 됐다. 내가 너무 오래 있었다.”
제자는 다시 엎드렸다.
“불교를 위해서나 해인사를 위해서나 좀 더 계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니다. 인제 가야지. 내 할 일은 다 했다.”
성철은 말을 마치고 눈을 감았다. 소식을 들은 제자와 노장들이 퇴설당으로 달려왔다. 제자들은 성철의 열반송을 이미 받아놓고 있었다.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 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데
둥근 한 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생평기광남녀군 미천죄업과수미
(生平欺誑男女群 彌天罪業過須彌)
활함아비한만단 일륜토홍괘벽산
(活陷阿鼻恨萬端 一輪吐紅掛碧山)
일체 중생이 부처였다. 그럼에도 방편을 내세워 진리를 찾으라고 수없이 설했으니 그 죄업이 수미산만큼 컸다. ‘백일법문’ ‘선문정로’ ‘본지풍광’도 결국 달은 아니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질에 불과했다. 육조는 ‘나의 허물만 보고 세상의 허물은 보지 않는다’고 했건만 부처를 보고도 중생이라며 허튼 소리를 했다. ‘설할 수 없는 불법의 진리를 설한 죄업’으로 지옥에 빠져야 했다. 중생을 속였으니 중생과 고통을 함께 해야 했다. 중생이 아프니 성철도 아픈 것이다.
하지만 함께 지옥에만 있을 수는 없었다. 해가 붉은 빛을 토하며 푸른 산에 걸려있음은 부처의 지혜광명이 만물에 생명을 나눠주고 있음이었다. 그런 만큼 성철은 남은 이들에게 수행에 전념하여 그 실상을 보라고 당부했다. 시절인연에 따라 선승의 본분사로 회향하지만 부디 ‘상구보리 하화중생하라’고 이 땅의 승려들에게 주는 유언이었다. 성철의 열반송은 절망이면서 희망이었고, 그 절망과 희망마저 떠난 중도법문이었다.
어떤 무리들은 이를 문자만으로 따져서 종정 성철이 평생 남녀 무리들을 속여 왔고, 결국 그 죄가 무거워 지옥으로 떨어졌다고 저주를 퍼붓는다. 마지막까지 말에 속지 말라는 본분종사의 가르침을 조롱했다. 그들은 말에 갇힌 채 실상과 진실을 보지 못했다. 불교에 대해서, 선에 대해서, 선승에 대해서 무지한 자들이었다. 몰라서 가여운 자들이었다.
가을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여명이 밝아오자 성철이 눈을 떴다.
“나 좀 일으켜 다오.”
성철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시간이 새벽 5시를 지나고 있었다. 성철이 다시 말했다.
“답답하구나. 나를 안아라.”
원택은 스승을 끌어안았다.
“새끼야, 편하게 좀 해봐라.”
지상에서의 마지막 꾸중이었다. 원택은 성철을 고쳐 안았다. 성철은 제자의 가슴에 몸을 기댔다. 성철의 몸은 가벼웠다. 창밖이 설핏 환했다.
1993년 11월 4일, 오전 7시 30분.
“새벽인가?”
“네.”
“그럼 나도 가야겠다. 다들 못보고 가겠구나.”
제자는 울음을 삼켰다.
“참선 잘하그래이.”
그러고는 말이 없었다.
‘성철 스님 평전’ 연재를 마칩니다.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50호 / 2016년 7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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