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산 <불교 용어 해설, ㅅ ― 30>
---------------------------------------------------------------
*선시불심(禪是佛心)ㆍ교시불어(敎是佛語)ㆍ계시불행(戒是佛行)---서산대사 휴정(休靜, 1520-1604)은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 “세존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신 것[三處傳心]이 선지(禪旨)가 되고, 부처님께서 일생에 말씀하신 것이 교문(敎門)이 됐다. 그러므로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계행(戒行)이 계시불행이다.
그리고 선과 교의 근원은 부처님이시고 선과 교의 갈래는 가섭(摩訶迦葉) 존자와 아난(阿難陀, Ananda) 존자이고 계행은 우팔리(優婆離, Upali) 존자이다. 말 없음으로써 말 없는 데 이르는 것은 선이요, 말 있음으로써 말 없는 데 이르는 것은 교이다. 또한 마음은 선법(禪法)이요, 말은 교법(敎法)이다. 법은 비록 일미(一味)이지만 뜻은 하늘과 땅같이 동떨어진 것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내용을 미루어볼 때, 휴정의 선교관은 선이 주(主)가 되고 교는 종(從)이 돼, 깨달음에로 나아간다고 봤고, 선을 교보다 우위에 두고 있다. 또한 선교의 관계에 대해서 교는 부처님 가르침으로 먼저 모든 법을 가려서 보이고, 다음에 공(空)의 이치를 가르친 것인데, 이 공의 이치에 곧바로 들어가서 체득하는 것이 선이며, 특히 조사선(祖師禪)은 그 자취가 뜻의 자리에서 끊어지고 이치가 마음의 근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다. 선교일치의 입장보다는 사교입선(捨敎入禪)을 고수하한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처음부터 선종이나 교종을 말씀하셨을 리는 없을 것 같다.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와 같은 원칙을 가지고 대중의 입장에서 그들의 근기에 맞게 설하신 것이 법문의 주요핵심이었다. 그리고 알아듣기 쉽게 예를 많이 들었고, 그 예를 든 사례는 누가 들어도 금방 알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잘 알아듣기 힘들 때에는 ‘이렇게 해보라 저렇게 해보라’고 해서 실천을 통해 깨닫게 하셨다. 때문에 교종이다 선종이다 하는 것은 훗날 구분된 것이고, 결코 부처님 뜻과는 다른 것이다. 때문에 양종의 구분은 종에 대한 집착이나 좁은 마음에서 큰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난 배타적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한쪽으로만 치우쳐서는 안 되고, 서산대사의 본의도 깨달음에 이르는 순서를 말한 것이지 결코 한쪽으로 치우치라는 말은 아니다. 그런 위대한 도인이 한 법에 치우치기를 가르쳤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헌데 범부 중생은 한쪽 면만 보는 독선적인 안목을 가지고 꼭 자기방식만 옳다고 하는 것이 문제이다.
*선어(禪語)---선어란 선사들이 쓰는 용어이다. 그런데 선사들의 용어에는 일반 용어와 달리 특이한 데가 있다. 선사들의 선어(禪語)나 선문답(禪問答)엔 비유가 많이 들어 있다. 처음 들어 보면 엉뚱한 말같이 들린다. 이것은 선어 혹은 선문답이 몇 단계를 생략한 언어, 비유, 지시 등으로 이루어져 있어 일반인들에게는 마치 암호와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언어나 명칭은 사람이 사용하는 도구이다. 도구는 쓰다보면 망가지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 필요 없으면 버린다. 영원한 것이 될 수도 없다. 언어도 필요 없는 것은 생략한다. 진실은 언어와 문자를 떠나서 있다.
깨달음을 얻는 사람도 말을 해야 하고 질문에 답변도 해야 한다. 문자의 개념과 습관과 가치를 떠나서 말을 해야 하기 때문에 어떤 때에는 비유로 대답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엉뚱한 듯한 말을 한다. 이들 선어(禪語)들은 보통 사람의 관념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은 서로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게 돼있다. 바로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의 대화가 선어(禪語)이다.
일반인이 듣기엔 수수께끼 같지만 선어와 수수께끼는 다르다. 언의 쓰임을 고의적으로 왜곡한다는 점은 비슷하지만 선어를 수수께끼라 할 수는 없다. 수수께끼는 객관적으로 인정하는 정답이 있지만, 선문답은 정답이 없다. 정답이 없다는 것은 질문에 적합한 대답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같은 말이라도 어떤 경지에서 하느냐, 답하는 사람에 따라 답이 달라지므로 수수께끼처럼 누가 답을 하더라고 답이 되는 객관적인 답이 없다는 말이다.
“현재를 즐겨라”라는 말이 있다. 생각하기에 따라 이 말을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가 있다. ‘순간의 쾌락을 즐겨라’는 말이 되기도 하고, ‘순간에 최선을 다하라’는 말이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선어엔 완벽한 선택(답)이란 없다.
“세상이 시들해 보인다”는 말이 있다. 그 이유는, 세상이 시들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자신의 일과 삶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없기기 때문일 수도 있다. 세상은 늘 거기에 그렇게 눈부시게 서 있다. 세상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느끼느냐 하는 것은 자신에게서 모든 것이 비롯된다. 때문에 수수께끼처럼 정답이 없다. 이와 같이 선어란 꼭 절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에도 있다.
인간은 결코 하나의 의미와 목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도구가 아니다. 스스로 욕망을 갖고 끝없이 그 용도를 변경하고, 어떤 의미를 향해서 끝없이 움직이고 있는 존재이므로 사상(事象)에 대한 해석과 의견이 다를 수도 있고, 인생의 진로가 여러 가닥일 수도 있으므로 선어도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 일상의 예를 들어보자, 어느 날 저녁 엄마가 현관문을 열고 거실에 들어서서는 발로 쓱쓱 바닥을 문지르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집구석이 더러운 건 발바닥이 먼저 안다니까!”
딸은 엄마의 이런 호통을 듣고 정신이 퍼뜩 들었다. 저 어머니 말씀은 너는 온종일 집구석에 들어앉아 청소도 안하고 뭐 하냐, 눈알은 얼굴에만 박혀 있는 줄 아느냐는 힐난이었다. 바닥에는 아버지가 쏟아놓은 모래와 눌러 붙은 밥풀 등이 널려 있었다.
“집구석이 더러운 건 발바닥이 먼저 안다!”
눈은 얼굴만이 아니라 발바닥에도 달린 것이다. 아니 온 몸에도 눈이 달린 것일지도 모르는 일. 엄마는 일상적인 몇 단어만으로도 화두(話頭)처럼 선시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언어는 체화된 언어로서 삶의 진정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런 문답 전통은 불교에서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문명의 발상지, 이를테면 그리스 소피스트들, 인도 베다 혹은 우파니샤드 전통, 중국 제자백가들 문헌에서도 나타나는 공통된 현상들이다. 하지만 위와 같은 대화를 선문답이라 하지는 않는다. 그저 수준 높은, 의미 깊은 대화 정도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선문답이나 선어가 되려면 항상 명확한 주제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불교의 진리를 체득하는 것에 관한 것과 불교의 진리, 즉 선종에서의 선(진리) 그 자체라야 한다. 이러한 선의 진리를 서로 묻고 답하는 것이 선어이고 선문답이다.
그렇다고 선어가 절간에서 선승들만 쓰는 것은 아니다. 일상에서도 불심이 깊고 식견이 깊은 분들, 혹은 평범한 아낙들도 쓸 수가 있다. 생각이 깊으면 그 사람이 뱉는 말은 곧 선어일 수 있다. 육조 혜능(慧能) 선가가 어디 유식해서 그런 차원 높은 선어를 쏟아냈겠는가. 혜능은 글을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어느 날 한 비구가 혜능에게 물었다.
“글을 모르면서 어찌 그대가 진리를 안단 말이오?”
“진리는 하늘의 달과 같다. 문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달을 보는데 손가락을 거칠 필요는 없다.” 혜능은 이 한 마디로 상대를 제압했다. 이것이 선종의 유명한 불립문자(不立文字)이다.---→선문답(禪問答), 선(禪)과 언어 참조.
*선어록(禪語錄)---부처님을 믿고 수행하는 역대 조사나 선승들이 남긴 법어, 편지, 일생을 살면서 겪었던 일화, 선문답, 수행하는 방법, 가르침 등을 담은 것을 선어록이라 한다. 경전이 부처님 말씀을 담은 것이고, 논이 그러한 경전에 대한 주석서라면, 선어록은 선의 길을 간 선지식들의 깨달음의 소식이요, 그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깨침의 길을 보여주고 삶의 이정표를 제시해주기 때문에 경전의 범주에 들어간다.
선승들이 실제 수행에서 생기는 문제를 일상 회화를 통해서 설하게 된다. 선승들은 자신이 법상에 올라 이른바 상당설법(上堂說法)을 한다. 이런 것들이 본인 내지는 제자들에 의해 기록된 것이 선어록이다. 선사들도 초기에는 경전을 상당히 많이 인용했다. 그런데 이러한 기풍에 변화가 일어났다. 당나라 말기를 전후로 해 경전 인용의 빈도가 점점 줄어들고, 선사들이 경전과는 무관하게 설법을 진행하는 경향을 띠었다.
그리고 선어록이 편집되고 나면, 그 선어록을 교과서로 삼아 선사들이 강의를 한다. 이것이 이른바 송고(頌古)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설두(雪竇:980∼1052) 스님의 <설두송고(雪竇頌古)>이다. 송고란, 말 그대로 옛 선사들의 깨달음에 대한 기연들을 운문체로 ‘코멘트’한 것이다. 송대에 이르러서는 ‘송고’를 ‘코멘트’하면서 선 수행자를 지도하는 이른바 ‘평창(評唱)’이라는 강의 형태가 생겼다. 대표적인 예로 원오(圓悟, 1063~1135)의 <벽암록(碧巖錄)>이라든가 만송(萬松, 1166∼1246)의 <종용록(從容錄)> 등이다.
그리고 굉지(宏智, 1091~1157) 선사가 고칙(古則: 후인의 수행의 규범이 될 만한 옛 사람(古人)의 언구) 100칙을 골라 여기에 송고(頌古)를 붙였는데, 이것이 〈굉지송고(宏智頌古)>이다. 한편, 개별적인 선서의 출현과 더불어 족보(=선종의 역사서)가 등장하게 된다. 이것들이 바로 ‘등사(燈史)’로서 <조당집(祖堂集)>이나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등이다.
이 외에 다음과 같은 선오록 등이 유명하다.
• 달마(菩提達磨, ?~528)의 <달마혈맥론>과 <달마관심론>,
• 육조 혜능(慧能, 638~713)의 <육조단경(六祖壇經)>,
• 마조(馬祖道一, 709∼788)의 마조록(馬祖錄),
• 황벽(黃壁希運, ?~850)의 〈전심법요(傳心法要)>,
• 조주(趙州從諗, 778~897)의 조주록(趙州錄),
• 규봉(圭峰宗密, 780년~841년)의 <도서(都序)>,
• 임제(臨濟義玄, ?~867)의 임제록(臨濟錄)>,
• 대혜(大慧宗杲, 1089~1163)의 <서장(書狀)> 등이 유명하다.
그리고 우리나라 선사들의 선어록으로는,
• 진각혜심(眞覺慧諶 1178~1234)의 <진각어록(眞覺語錄)>
• 백운경한(白雲景閑 1298~1374)의 <백운어록(白雲語錄)>
•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의 <태고어록(太古語錄)>
• 나옹혜근(懶翁惠勤 1320~1376)의 <나옹어록(懶翁語錄)>
• 서산대사 휴정(西山大師休靜, 1520~1604)의 <선가귀감(禪家龜鑑)>
• 성철(性徹, 1912년~1993) 스님의 <선문정로(禪門正路)> 등이 있다.
이러한 선어록은 스님이 비유와 재치로써 사람을 깨닫게 하려했던 지시가 많이 들어있어 선사들의 정신과 다양한 선의 표현법 등을 체험할 수 있고, 선어록에 흐르는 선의 묘리를 체득할 수 있다.
*선업(善業, 산스크리트어 subhūti)---업이란 어떤 행위의 결과(果報)가 나타날 때, 그 결과의 원인이 된 행위이다. 선업이란 자신과 남에게 이익이 되는 청정한 말과 생각과 행위, 궁극적인 진리에 따르는 좋은 과보를 받을 청정한 행위와 말과 생각을 말한다. 따라서 탐욕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이 없는 행위와 말과 생각과 행위, 이러한 것이 선업에 해당한다.
그런데 <아함경>에 “선업으로 과거를 갚는 자는 무서운 인과(因果)라 할지라도 능히 단절시킬 수 있어 마치 구름 사이에서 나온 달처럼 세상을 비출 것이다.”라고 했다. 이 말을 얼핏 들으면 비록 악업이 있다고 해도 선업으로 갚을 수 있는 것처럼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인과응보(因果應報)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이치는 엄하고 피할 수 없어 별개로 받는 것이므로 더하기 빼기의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
조상 대대로, 그리고 태어나면서부터 이어져온 삶의 체험들이 단 한 순간도 놓침이 없이 그대로 우리들 몸속에 기억돼 있어, 그것이 곧 업습(業習), 즉 의식ㆍ무의식의 관념들이다.
불교에서는 3업이라 해서, 신(身-몸)ㆍ구(口-입)ㆍ의(意-마음)로 지은 죄를 업이라 하지만, 그것은 편의상 이해하기 좋도록 말한 것일 뿐, 사실은 시각ㆍ청각ㆍ후각ㆍ미각ㆍ촉각 등 5감으로 체험하는 일체가 다 업이 된다.
그리고 선업(善業)도 업이라 한 말을 기억해야 한다. 선업은 좋고 악업은 나쁘다가 아니다. 선업이든 악업이든 모든 업은 마찬가지로 자신의 본래, 즉 자신의 진면목을 가리는 장애가 되는 것으로 모든 업, 즉 5감으로 지득한 모든 관념들은 다 지워 없애야만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며, 모든 업습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비로소 자신의 진면목을 보게 되며, 그것과 다시 하나가 되는 소위 원시반본(原始反本)이 된다.
내가 지은 선업(善業)은 그림자같이 따라다니고, 내가 지은 악업(惡業)은 메아리같이 돌아온다. 선업 역시 또 하나의 업이기 때문이다. 선업에 묶이는 것은 명주실로 부드럽게 잘 짠 밧줄로 나를 묶어놓은 것과 같고, 악업에 묶이는 것은 가시가 촘촘히 박힌 철조망으로 나를 묶어 놓은 것과 같다. 선업이든 악업이든 업은 업이다. 그래서 모든 업을 소멸하는 것이 해탈의 길이다.
“그러나 사람들을 잘 살펴보면, 업습(業習)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 수 있다. 자기 생각, 자기주장은 죽어도 버리지 못한다. 무지한 사람일수록 더욱 더 자기 고집이 세다. 삶이 고달프고 어려운 사람일수록 고집이 세다. 마음의 여유가 그 만큼 없는 것이다. 마음의 여유가 없는 만큼 삶의 지혜 또한 적어, 무엇이든 어거지로 덤빈다. 이치나 원리 따윈 따지지 않는다. 그냥 막무가내 식으로 우겨댄다. 그러고는 최선을 다해도 안 된다고 말한다.
최선이란 이치에 맞게 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 하는 것을 말한다. 이치에 맞지 않는 노력은 최선이 아니다. 누구든 마음의 여유로움이 있고, 무슨 일이라도 이치를 따져, 순리를 쫓아 정성을 다하면 결코 되지 않을 일이 없는 법이다. 아주 간단한 원리이자 진리이지만, 이 말을 믿고 실행하는 사람이 드물다.“ - 옮겨온 글
※원시반본(原始反本)---처음 출발한 근본원점으로 되돌아온다는 뜻. 무왕불복(無往不復)이라고도 한다. 우주의 진리가 무시무종, 불생불멸로 무한히 돌고 도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다.---→십선업(十善業) 참조.
*선업(善業)과 불선업(不善業)---업이라고 했을 때에 일반적으로 죄를 지은 것(죄업)을 먼저 떠올리곤 하지만 그것은 업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행위를 크게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나눌 수 있어서, 이것을 선업(kusala-karma)과 불선업(akusala-karma, 악업)이라 하는데, 업이란 선업과 불선업, 즉 좋고 나쁜 행위를 다 포함한다. 그리고 불선업을 흔히 악업(惡業)이라 한다. 내가 행한 선행은 선업이 되고, 악행의 과보는 악업이 된다.
그런데 맺힌 것이 많은 사람은 말 한마디에 상처 받는 경우가 있다. 상대방이 무심코 던진 말일지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그 말은 마치 독화살과도 같이 치명적일 수 있다.
그런데 그 말을 던진 상대방은 쉽게 금방 잊어버린다. 그러나 그 말을 받은 당사자는 좀처럼 잊지 않는다. 그래서 가슴에 묻어두고 그 사람을 볼 때마다 그 말이 생각나 다시 꺼내 보곤 한다. 가슴에 맺혀 있는 것이다.
똑 같은 원리로 돈을 빌려간 사람은 쉽게 잊어버리는데 빌려준 사람은 ‘언제 주려나’ 하고 기다리는 것과 같다. 또 어렸을 적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매를 맞은 경우도 이에 해당 될 수 있다. 매를 때린 사람은 까맣게 잊고 있으나, 맞은 사람은 가슴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또한 사람의 마음을 맺히게 만든다. 맺힌 것이 많으면 한이 되기 쉽다. 그 한을 안고 죽으면 어떻게 될까. 결코 좋은 곳에 태어나지 못하게 된다.
비록 상대방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당해서 맺힌 것이 있다고 할지라도 자꾸 생각 한다는 것은 ‘불선업’을 짓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이 뱉은 말에 대해 ‘후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면서 계속 후회한다. 자신이 뱉은 말로 인해 상대방이 얼마나 고통을 받았을까 하는 후회의 마음이다. 이런 후회가 계속된다면 이 또한 불선업을 짖는 것이라고 본다. 이런 현상에 대해 묘원 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미 지나간 말을 후회하는 것은 내가 말을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말은 그 순간의 마음이 했지 내가 한 것이 아니다. 말은 그 순간에 일어나서 사라졌다. 단지 기억 속에 저장돼 있지만 이것은 과거의 일일 뿐이다. 이 말은 자기가 한 말에 책임지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말의 실재라는 것이 그렇다는 것이다.
지나간 말이나 잘못을 자꾸 후회하는 것도 불선업을 쌓는 것이다. 그래서 그 잘못한 것을 알아차리고 참회를 하면 된다. 왜냐하면 알아차림과 참회는 선업이기 때문이다. 선업과 불선업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후회하면 불선업만 쌓이게 되고, 참회하고 알아차리면 선업을 쌓게 된다. - 진흙속의 연꽃
*선오후수(先悟後修)---돈오(頓悟) 이전에 점수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과, 돈오 후에 점수한다[先悟後修]는 주장이 있다. 당(唐)나라 신회(神會)의 남종선(南宗禪) 계통은 후자를 강력하게 주장해 이후의 선종은 주로 ‘선오후수(先悟後修)’의 입장을 취했다. 고려시대 지눌(知訥)의 ‘돈오점수론’도 그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는 ‘오(悟)’를 햇빛과 같이 갑자기 만법이 밝아지는 것이고, ‘수(修)’는 거울을 닦는 것과 같이 점차 밝아지는 것과 같다는 비유를 들면서, 만일 깨우치지 못하고 수행만 한다면 그것은 참된 수행이 아니라 해서 선오후수의 입장을 강조했다.
*선요(禪要)---중국 원나라시대의 고봉(高峯原妙, 1238~1295) 선사가 선법(禪法) 요의(要議)에 대해 20여 년간 설법했던 것을 적은 책이다. 고봉의 시자 지정(持正)이 기록하고 홍교조(洪喬祖)가 엮어서 펴냈다. <선요(禪要)>의 핵심 내용은 참선 삼요(三要)이다. 즉, 화두를 들고 수행하는 간화참선(看話參禪)에서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요건이 ①큰 신심(大信心), ②큰 분발심(大憤志), ③큰 의심(大疑問), 셋을 말한다.
*선용기심(善用其心)과 항복기심(降伏其心)---<화엄경>에서는 ‘선용기심(善用其心)’이라 했고, <금강경>에서는 ‘항복기심(降伏其心)’이라 했다. 마음을 두고 한쪽은 잘 쓰라 하고 한쪽은 항복시키라 했다.
‘선용기심(善用其心)’은 마음을 선하게 쓰라는 말이고, ‘항복기심(降伏其心)’, 마음을 항복 시킨다는 것은 망심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무아(無我)의 이치를 모르고 관념적인 고집 따위를 일으키는 마음을 내지 말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어디에도 머무는 바가 없는 마음을 내라는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중요한 것은 용심공부(用心工夫)다. ‘선용기심’과 ‘항복기심’은 바로 용심공부의 핵심이다. 선업을 짓고 악업을 짓는 것 역시 용심(用心)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선용기심’은 선한 의지가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요, ‘항복기심’은 악한 의지가 일어나자 않게 하는 것이다. ‘선용기심’은 이타(利他)이고, ‘항복기심’은 자리(自利)이다.
‘선용기심’은 진여훈습(眞如薰習)에 의한 남을 위한 좋은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요, ‘항복기심’은 무명에 의해 훈습된 마음을 억제해서 나쁜 생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향을 쌓던 종이는 향내를 풍기고 썩은 생선을 묶었던 새끼에는 비린내의 악취가 난다”고 했다.
*선원(禪院)---선(禪)을 교육하고 실수(實修)하는 전문교육기관. 우리나라의 선원은 통일신라 말에 선종(禪宗)이 전래된 이후 설치돼, 승려 양성에 중요한 수행기관으로서 큰 구실을 해왔다. 사찰 내에서는 선당(禪堂)ㆍ선방(禪房)ㆍ좌선당(坐禪堂)이라고도 한다.
그 유래는 석가모니 당시의 비구(比丘)들이 우기(雨期) 이외에는 한 곳에 살지 않고 탁발(托鉢)을 계속하다가, 우기가 되면 작은 벌레나 초목들을 밟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외출을 금하고 한 곳에 머물며 안거(安居)한 것에서 연유한다. 당시에는 여름 우기 3개월 동안 좌선(坐禪)을 하거나 교리(敎理)를 연구하게 돼 있었다. 그 뒤의 부파불교 및 중국불교에서는 불교교단이 일정한 사원과 토지 등을 소유하고 그 재산으로 생활할 수 있게 됨에 따라 탁발을 꼭 하지 않아도 됐고, 연중 사원에 상주하며 선(禪)과 경론(經論) 등을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게 됨에 따라 겨울 동안거(冬安居)를 실시하게 됐다. 선종에서는 안거의 전통을 이어받아 승려 수행기관으로서의 구실을 하게 됐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 말에 선종이 생겨남과 동시에 전국에 수많은 선원이 세워졌고, 여름과 겨울의 안거를 실시하되 하안거(夏安居)를 정법(正法)이라 해서 승려의 나이를 뜻하는 법랍(法臘)은 이로써만 인정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선원의 교육목표는 불교의 진리를 좌선을 통해서 내관(內觀)하고 스스로 살펴 자기의 심성(心性)을 철견(徹見)함으로써 자증삼매(自證三昧)의 묘한 경지를 체달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며 중생제도를 하는 데에 있다. 따라서 일정한 교육기간이 정해져 있는 강원(講院)과는 달리 선원은 평생교육기관으로서의 의의가 더 크다.--→선찰(禪刹) 참조.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줄여서 ‘도서(都序)’라고 한다. <선원제전집도서>는 중국 당나라시대 화엄종 제5조인 규봉 종밀(圭峰宗密, 780~841) 선사가 자신의 저서 <선원제전집>에 대해 서문을 지은 것이다. <선원제전집도서> 내용이 우리나라 선교겸수(禪敎兼修) 정신과 잘 어울려 중국에 못지않게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유통돼, 조선 중기 이후 전통적인 전문 강원에서 이수하는 기초 교과목의 하나이다.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다(禪是佛心 敎是佛言)"---→선교결(禪敎訣) 참조.
*선(禪)의 기원---선은 고대인도 브라만교의 명상법인 요가(yoga)에서 비롯돼, 이를 불교에서 받아들여 발전시켜 붓다의 명상과 정각(正覺)을 통해 불교의 실천수행법으로 정착됐다. 요가의 기원은 BC 3000년 경 고대인도의 원주민들에 의해 실시됐다. 따라서 요가 명상의 일종인 선(禪)은 약 5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요가라는 말은 사유(思惟) 혹은 명상(冥想)이라는 의미인데. ‘명상을 통해 오감(五感)을 제어하고 산란한 마음을 정지시키는 것, 즉 모든 감각기관을 움직이지 않게 마음을 집중 통일시켜 적정상태에 머무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브라만교의 요가 명상이 불교에 받아들여져서 발전해 선나(禪那)라 하다가 선(禪)이라는 말로 일반화됐으며, 대승불교에서는 선바라밀(禪波羅蜜)이라고 했다. 고대인도의 <우파니샤드>에서 설하는 브라만교에서는 요가 명상을 통해 브라만과 아트만이 본래 하나라고 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경지를 체득함을 목적으로 했다.
그러나 붓다의 선정(禪定)은 제법의 본질인 연기(緣起)의 법을 깨닫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 붓다는 출가해 여러 수행자를 찾아 수행하는 가운데 수정주의(修定主義) 사상가를 찾아가 선정법을 닦았다. 이들의 주장은 요가의 선정을 통해 정신집중을 이루어 일체의 정신적인 작용이 정지돼 적정(寂靜) 상태에 도달함으로써 고(苦)에서 해탈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붓다는 이 선정법을 차례로 닦아 최고의 경지인 무소유처(無所有處) 선정과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선정에 도달했다. 그러나 선정 상태에 있을 때는 일체의 고에서 해탈된 경지를 얻을 수 있으나 선정에서 벗어나면 또 다시 이전과 마찬가지로 괴로움 상태로 돌아오게 됨을 알고, 이러한 수정주의 수행으로는 결코 완전하고 안온무고(安穩無苦)한 해탈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닫고 수정주의를 버렸다.
그리고 다시 고행주의(苦行主義) 수행자를 찾아가 정신적 자유를 얻기 위한 혹독한 고행을 닦았다. 고행주의자들은 인간이 고를 느끼는 것은 육체가 있기 때문이므로, 육체를 괴롭혀 최극한의 경지에 이르면 정신적 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붓다는 어려운 최고의 고행을 모두 경험했으나 육체적인 고행으로는 정신적 해탈을 얻을 수 없다고 결론내리고 고행주의를 버렸다.
그리고 네란자라 강물에서 목욕한 후 수자타(Sujata)에게 우유죽을 공양 받고 보리수나무 아래 금강보좌를 만들어 깊은 선정에 들어갔다. 생로병사 근본고통의 원인은 무엇인지, 이러한 인간의 근본적인 괴로움에서 해탈하는 길을 깊이 명상하기 시작해, 마침내 새벽하늘의 샛별을 보고 연기의 법을 깨달았다.
붓다는 선정의 실천구조를 지(止, Samatha)와 관(觀, vipasana)으로 설명하고 있다. 보통 ‘지관(止觀)’이라 하는데, 사마디(samadhi) 즉 삼매(三昧)로서 마음을 집중해 산란함이 없는 경지를 말한다.
지(止)는 번뇌가 없는 정적(靜的)인 마음상태인 사마타(Samatha)를 가리키는 말이며, 관(觀)은 위빠사나(팔리어 vipassanā)로서 만법의 근원인 진리[緣起]를 관찰해 깨닫는 것을 말한다. 즉 관은 선정에서 일어나는 동적(動的)인 상태인 지혜를 나타내는 말이다.
사마타(止, Samatha) +위빠사나(觀, vipasana) = 사마디(三昧, samadhi)이다.
붓다가 수정주의의 선정설(禪定說)을 버렸다는 것은 그것이 지의 상태에 머물러 버리는 선정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이다. 고(苦)에서 해탈을 얻기 위해서는 지(止)의 선정에서 더 나아가 연기의 법을 관찰하는 지혜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깨달음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지관쌍수(止觀雙修)의 선정설을 확립했다.
초기불교의 주요한 선정설로는 사선(四禪), 팔등지(八等持), 구차제정(九次第定)을 들 수 있다. 이것들은 사선을 중심으로 해 새로운 선정이 가미돼 성립된 것으로 다음과 같이 서로 관련돼 있다.
① 사선(四禪) : 초선(初禪), 제이선(第二禪), 제삼선(第三禪), 제사선(第四禪)
② 팔등지(八等持) : 사선+사무색정(四無色定 : 공무변처(空無邊處), 식무변처(識無邊處), 무소유처(無所有處),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③ 구차제정 : 팔등지+멸진정(滅盡定)
부파불교의 대표적 선정설로는 사념처관(四念處觀)과 오정심관(五停心觀)을 들 수 있다. 여기에서 염처(念處)란 곧 정신통일을 말한다.---→선(禪, 빠알리어 Jhāna, 산스크리트어 Dhyana) 참조.
*선(禪)의 종류---선의 종류를 분류하는 방식은 여럿 있다. 크게는 인도선 중국선 등으로 나누기도 하는데, 이럴 경우, 중국선은 법화종 계통의 천태선과 달마선(達摩禪)으로 구분한다. 인도선의 기원은 요가(Yoga) 명상에 있다. 요가는 인도 고유의 수련법으로서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부터 있었다. 불교의 선과 불교 이전의 요가의 다른 점은, 불교의 선은 해탈 돈오(頓悟)를 추구하는데 비해 인도 전통의 요가는 생천(生天)을 도모하는데 있다. 생천(生天)이란 살아 있을 때의 공덕에 의해 사후에 좋은 세계에 태어난다는 업설(業說)에 근거한 인도 전통사상이다.
그리고 천태선은 중국에서 천태대사 지자(智者, 538~597)가 세운 천태종에서 강조 됐는데, 천태선은 <법화경> 사상과 인도의 요가 형식이 한데 어울려져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달마선은 부처님의 삼처전심(三處傳心)이 그 기원이라고 보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의 염화미소(拈華微笑)이다. 소위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비법에 의해 미묘법문(微妙法門)이 마하가섭(摩訶迦葉) 존자에게 전해진 것이 달마선 성립의 기원이다.
이러한 초기 선이 좀 더 발전해서 구체화된 것이 한국을 비롯한 중국, 일본 등 북방 불교권에서 이루어지는 조사선(祖師禪), 간화선(看話禪), 묵조선(黙照禪) 등이다. 그리고 태국, 스리랑카,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의 남방불교 권에서 실시하는 위빠사나(vipassana)와 사마타(Samatha) 수행, 그리고 대승불교에서 수행하는 관법(觀法)도 선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선이라고 하면 조사선, 간화선, 묵조선을 지칭하며, 이것들이 선종의 주요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위빠사나는 선과 구별해 관법(觀法)이라고 한다. 위빠사나에는 오정심관(五停心觀)을 비롯한 여러 종류가 있다. 대승불교의 관법은 일상관, 일몰관, 일자관, 천태지관 등 다양하다.
선(禪)에도 간화선, 묵조선뿐만 아니라 염불선(念佛禪)도 유행하고 있다. 간경과 주력 등도 선의 연장에서 바라보면 간경선(看經禪), 주력선(呪力禪)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여러 명칭의 선이 있다.
<선(禪)의 종류>
① 외도선(外道禪)…인과(因果)를 믿지 않고 유루공덕(有漏功德)을 위해 닦음.
② 범부선(凡夫禪)…인과(因果)를 믿고 유위공덕(有爲功德)을 위해 닦음.
③ 소승선(小乘禪)…아공(我空)을 믿고 해탈을 위해 닦음.
④ 대승선(大乘禪)…아공(我空)및 법공(法空)을 믿고 해탈을 위해 닦음.
⑤ 최상승선(最上乘禪)…여래선(如來禪) 혹은 조사선(祖師禪)이라고도 하며, 본래부처로서 일체무루공덕(一切無漏功德)이 원만히 구족함을 믿고 닦는 선.
<격외선(格外禪)>
1) 여래선(如來禪)---지(智) 위주, 생각과 알음알이가 아주 끊어지지 않아서, 말 자취가 있고 이치의 길이 남아 있어서, 마치 인장을 물에 찍은 것과 같다. →여래선(如來禪) 참조.
2) 조사선(祖師禪)---이(理) 위주, 말 자취와 생각의 길이 함께 끊어져, 이치나 일에 다 걸림이 없는 것이 마치 인장을 허공에 찍은 것과 같다. 달마(達磨, ?~528) 대사에 의해 전수된 달마선(達磨禪)을 말한다. →조사선(祖師禪) 참조.
※원래는 고하우열의 뜻이 아니었으나 특히 한국의 간화선자들이 여래선을 교내미료(敎內未了)한 선이라 하고 조사선을 교외 조조상전(祖祖相傳)하는 진선(眞禪)이라 망설함.
• 간화선(看話禪)---당 말 이래에 임제종(臨濟宗)에서 주창. 화두(話頭)를 들고 참선하는 선으로 조사선의 일종이다. 대혜 종고(大慧宗杲, 1089~1163) 선사가 확립했다. 참구적(參究的)인 선.
• 묵조선(黙照禪)---조동종(曹洞宗)에서 주창. 의지적(意志的). 묵조선은 스스로의 자성(自性)이 본래부터 청정하다는 자성청정(自性淸淨) 원리를 기본으로 한 수행법으로, 관심선(觀心禪)의 다른 이름이다. 따라서 묵조선의 시조는 달마(達磨) 대사이다. 달마에서 5조 홍인((弘忍, 601~674)까지는 오랫동안 조용히 앉아 호흡을 고르고 마음을 관하는 정좌간심(淨坐看心) 선수후오(先修後悟)의 초기 묵조선이었다.
※ 염불선(念佛禪)---통불교적(通佛敎的)인 정통선법. 지ㆍ정ㆍ의(知情意)의 조화적인 선.
그밖에 위빠사나(vipassana)를 계승한 대승불교의 관법수행도 선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 의리선(義理禪) ―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을 하는 선을 말한다. 마치 인장으로서 진흙에 찍으면 인발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것과 같다.→의리선(義理禪) 참조.
※관심선(觀心禪)--마음을 관하는 선으로, 달마(達磨) 대사가 중국에 전한 선(禪)이 순수한 인도의 관심선(觀心禪)이었다. ‘마음의 문제를 잘 관찰하는 것, 이것이 모든 수행을 다 포섭하고 있다’, 이런 기치 아래 선불교를 주창한 것이 관심선(觀心禪)이다. 관심선이 초기 선불교이다. 그리고는 거기에서 간화선도 생기고, 염불선도 생기고, 관조선도 생겼다.
<선의 방법상 종류>
크게 소승(小乘)의 선과 대승(大乘)의 선으로 나눌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남방불교의 4선, 4무색정, 9차제정 등이 유명하다.
• 4선(四禪)은 8정도(八正道) 중 정정(正定)의 구체적 내용으로서 의의를 지니는데, 곧 붓다 생존 시 사문(沙門)이라 불린 자유사상가들이 실천하고 있던 선정이 그 원형으로, 이것을 불교의 관념적 세계관인 삼계(三界)에 적용시켜 수정해 편성한 것이 4선이며, 이는 색계(色界)에 해당된다.
제1선(初禪)은 온갖 욕구를 버리고 불선법(不善法)을 떠나 기쁨과 안락을 느끼지만, 분별과 사려가 남은 상태이다.
제2선(二禪)은 분별과 사려가 가라앉고 마음이 통일돼 기쁨과 안락을 느끼는 상태이며,
제3선(三禪)은 기쁨과 안락도 버려서 마음이 평정하게 되고 정념(正念)과 정지(正知)가 작용해 몸에 안락을 받은 상태이다.
제4선(四禪)은 몸의 안락도 없게 되고, 고락을 초월해 마음의 평정에 의해 염(念)이 청정하게 된 상태이며, 이 단계에 이르러 마음의 안정과 지(知)의 활동이 동등하게 돼 해탈을 얻는다.
• 4무색정(四無色定)은 삼계 중의 무색계(無色界)에서의 선정이다.
제1의 공무변처(空無邊處)는 허공이 끝이 없음을 관찰하며,
제2의 식무변처(識無邊處)는 마음의 작용이 허공과 마찬가지로 끝이 없다고 관찰한다.
제3의 무소유처(無所有處)는 아무것도 대상이 없다고 관찰하며,
제4의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는 상념(想念)도 없고 무상념(無想念)도 없다고 관찰하는 수행이다.
• 9차제정(九次第定)은 당초에 서로 관계없이 설해졌던 4선ㆍ4무색정(八等至)에 멸진정(滅盡定)을 더한 것이다. 멸진정이란 마음의 작용도 완전히 없게 된 삼매를 말한다.
• 5정심관(五停心觀)---남방불교에서는 선의 방법도 다양하게 제시하는데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 것이 부정관ㆍ자비관ㆍ인연관ㆍ계분별관ㆍ수식관이라는 5정심관이다.
부정관(不淨觀)은 외관의 부정한 양상을 관찰해 탐하는 마음을 바로잡는 관법이고,
자비관(慈悲觀)은 일체중생을 관찰해 자비의 마음을 일으키고 노여움을 가라앉히는 관법이며,
인연관(因緣觀)은 온갖 사물의 현상이 인연에 의해 생긴다는 도리를 관찰해 어리석은 마음을 바로잡는 관법이고,
계분별관(界分別觀)은 5온ㆍ18계 등을 관찰해 사물에는 실체가 있다는 견해를 바로잡는 관법이며,
수식관(數息觀)은 호흡을 헤아려 산란한 마음을 다스리는 관법이다.
한편 남방 상좌부에서는 10변처(十遍處)ㆍ10부정관ㆍ10수념ㆍ4범주ㆍ4무색정ㆍ식염상관(食厭想觀)ㆍ사계차별관(四界差別觀)이라는 40업처(四十業處)를 제시한다.
대승불교에서의 선정은 6바라밀 가운데 제5의 선정바라밀(禪定婆羅密)에서 설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원칙적으로 대승의 선은 소승불교와 같은 번쇄한 체계화를 피하고, 단계적인 실천을 내적으로 통일하는 근거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그래서 선은 번뇌를 끊지 않고서 깨달음을 얻는 근거이며, 어디에도 머무는 곳 없이 그 마음을 낳게 할 수 있는 원리가 된다. 그러나 선의 종류로는 엄청난 수에 이르는 대승경전이 제각기 선정에 대해 설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하다.
그 중에서 유명한 것은 〈능가경(楞伽經)〉에서 설하는 '4선'이다. 즉,
우부소행선(愚夫所行禪):소승불교도 및 외도의 선정
관찰의선(觀察義禪):의미를 관찰하는 선정으로서 공관의 선정
반연여선(攀緣如禪):진리에 안주해 망상을 낳지 않는 선정
여래선(如來禪):모든 삼매를 포괄하는 최고의 선정이다,
*선인선과(善人善果)---선업(善業)을 닦으면 좋은 과보를 받게 된다는 말. 악인악과(惡因惡果)에 상대되는 말이다. 선인선과(善人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는 인과론의 기본 원칙이다. 또 다른 표현으로 사필귀정(事必歸正), 인과응보(因果應報), 자업자득(自業自得) 등의 말이 있다. 다 같은 맥락의 말로서 시대가 변하고 사회가 바뀌더라도 ‘뿌린 대로 거둔다’는 영구불변하는 진리를 말하고 있다.
*선자화상(船子和尙)---중국 당나라 때 고승인데, 생애는 알려진 바가 없다. 약산(藥山)에 들어가 약산 유엄(藥山惟儼, 745~828) 스님의 불법을 계승해 법명을 덕성(德誠)이라 했다. 이후 화정(華亭)의 오강(吳江)에서 배 한 척을 띄워놓고 뱃사공이 돼, 노를 두드리며 유유자적 사람들을 건네주면서 인연 따라 설법했다. 그래서 뱃사공이란 뜻의 선자(船子)화상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깨우친 뒤 홀연히 배를 엎고 종적을 감췄다고 한다. 법을 전하기 위해 스님이 지은 <발도가(撥棹歌)> 가운데 다음 구절이 널리 애송된다.
천척사륜직하수 일파재동만파수(千尺絲綸直下垂 一波纔動萬波隨)
야정수한어불식 만선공재월명귀(夜靜水寒魚不食 滿船空載月明歸).
천길 낚싯줄 곧게 드리우니, 한 물결 일어남에 수많은 물결이 따라 인다.
고요한 밤 물 또한 차가와 고기가 물지 않아, 배에 달빛만 가득 싣고 돌아온다.
위 선시는 송나라시대 선(禪)의 대의를 밝힌 입문서라 하는 대천 보제(大川普濟, 1179~1253)가 편찬한 <오등회원(五燈會元)>에 실려 있다.
*선재(善哉, 빠알리어, sadhu, 산스크리트어 Sadha)---보통 빠알리어로 “사두! 사두! 사두!” 하는 말을 한역한 말이다. ‘선재(善哉)’는 좋다!, 좋구나!, 옳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선(善)’은 착하다ㆍ좋다ㆍ훌륭하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고, ‘재(哉)’는 감탄을 나타내는 어조사의 뜻과 의문사와 함께 쓰이며, 의문이나 반문(反問)을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상대방의 말에 대한 칭찬이나 찬성을 나타내는 말로 쓰이고 있다. 음역해서 ‘사도(娑度)’라 하기도 한다. 옛날 부처님도 설법을 할 때 좋은 질문을 하면 선재! 선재! 라 하시면서 질문자를 칭찬하고 설법을 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대개 ‘선재 선재(善哉善哉)’라고 해서 두 번 반복한다.
*선재동자(善財童子, 산스크리트어 수다나/Sudana)---<화엄경> ‘입법계품’에 나오는 구도자 이름. 53선지식을 차례로 만난 뒤, 맨 마지막으로 보현보살을 만나서 대행원(大行願) 10가지[십대원(十大願)]을 듣는다. 그 공덕으로 아미타불 국토에 왕생해 입법계(入法界)의 큰 뜻을 이루었다고 한다. 선재동자 구법행로는 대승보살 구도행을 대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불경전의 무대에 등장하는 문수동자 등 많은 동자들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이라면 당연히 선재동자를 들 수가 있다.
선재동자는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 힘차고 당당하게 남쪽으로 여행하면서 53명의 선지식들에게 법(法)을 찾아 구도의 길을 떠나는 인물이다. 그러나 선재동자는 경전 상의 인물일 뿐 실존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우리 마음속에 고동치고 있는 진리를 향한 힘찬 발걸음이므로 오히려 나 자신일 수도 있다. 복성장자(福城長者)가 그의 아버지이고, 남쪽으로 여행했으므로 남순동자(南巡童子)라고도 부른다.
『2008년은 <어린 왕자>를 쓴 생 텍쥐페리(SaintExupéry, Antoine de)가 태어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이다. 그의 고향인 프랑스 리옹 시가 공항 이름을 ‘생 텍쥐페리 공항’으로 정하는 등, 탄생 100주년을 맞아 전 세계적으로 추모 열기가 이어지고 있다.
생 텍쥐페리는 그의 나이 43살, 죽기 1년 전에 <어린 왕자>를 발표했다. 국내에서 번역된 판본이 무려 92종에 이르는 이 동화책은 지금까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가장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한 책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어린 왕자>가 이렇듯 한국인들에게 특별히 사랑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린 왕자>에는 다분히 동양적 감수성이 짙게 배어있다. 그 동양적 요소란, 한마디로, ‘마음(心)에 대한 통찰’이다. 이심전심의 세계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어린 왕자의 여행이야기는 그대로 선재동자의 구도 이야기와 겹쳐지면서 우리의 마음에 쉽게 다가오는 것이다.
팔만대장경 중에서 한국불교가 소의경전으로 삼는 것은 <화엄경>인데, 방대한 이 경전의 결론에 해당하는 마지막 부분인 ‘입법계품’은 난해한 이론이 아니라 선재라고 불리는 동자의 순례 이야기이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 순례의 길 끝에 깨달음을 성취한다는 소년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도 구도의 길에 동참할 수 있다는 희망과 불교의 진리에 쉽게 다가가는 길을 터 주었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생 텍쥐페리가 어린 왕자의 순례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사람들에게 전하고자한 의도와, AD 2~4세기경에 편찬한 것으로 보이는 <화엄경>의 편자가 결국 마지막에 가서 선재동자의 구도기를 통해 화엄사상을 요약해 보인 의도가 서로 일치한다는 점이다. 진리의 두 얼굴인 ‘빛’과 ‘힘’ 즉 지혜와 행동의 조화를 역설하고 그 중에서도 특히 후자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에는, 그 본보기로서 ‘구도자의 순례’라는 주제를 실제 모델을 통해 제시하지 않을 수 없다.
<화엄경>이 이렇게 ‘행동’을 중시하는 이유가 있다. 이 경이 바로 초기 대승불교의 탄생을 합리화하는 배경이 되기 때문이다. 개인의 깨달음에 집착하는 장로(長老) 중심의 소승불교에 반발해 개인보다는 전체, 소극적인 개인 수행보다는 적극적인 대사회적 실천을 주장하며 탄생한 대승불교는 ‘행동하는 보살’이라는 이상형을 내세웠고, 그 대표적인 인간형이 바로 자신의 성불 전에 다른 중생들을 먼저 성불시키겠다는 서원을 세운 보현보살이었다.
선재동자는 보현보살의 분신 같은 존재로 구도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개인적인 구원보다는 사회 속의 연대를 강조하는 대승불교의 대표적 경전인 <화엄경>의 대단원이, 어린 선재동자가 53인의 선지식을 만나면서 성장해 마침내 정각을 이룬다는 순례 이야기로 그 막을 내리는 것은 필연적인 전개과정이면서도 매우 의미심장해 보인다.
‘행동의 작가’ 혹은 ‘실천의 인간’이라 불리던 생 텍쥐페리가 자신의 전 생애를 압축해 생전의 마지막 작품으로 펴낸 <어린 왕자>의 이야기 구조가 묘하게도 선재동자 구도기와 일치하는 것은 흥미롭다. ‘행동’을 강조하는 작가로서는 결국 자신의 분신인 어린 왕자의 순례라는 서술구조 속에다 하고 싶은 말을 풀어낼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이 점은 <화엄경> 편자의 경우와 같다. 대승불교를 처음 주창하고 나선 사람들처럼, 생 텍쥐페리도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추구했다.
<어린 왕자>가 어딘지 동양적 느낌을 주는 것은 ‘마음’이란 주제가 그 이야기를 철저하게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어린 왕자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고 싶었던 것은 ‘마음을 깨닫는 것’ 즉 ‘심안(心眼)을 뜨는 것’이다. 생 텍쥐페리가 불교를 잘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 전반에 불교적인 예지가 번득이는 것은 그의 체험이 불교 수행자의 체험과 근본적으로 유사하기 때문이다.』- 김홍근.
*선정(禪定, 빠알리어 jhāna, 산스크리트어 dhyāna)---선(禪)과 같은 말. 선(禪)은 빠알리어 자나(jhāna), 산스크리트어 디야나(dhyāna)에서 전환된 음이고, ‘정(定)’은 그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삼매(三昧)라는 것은 정(定)을 말하는 것으로서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선정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을 고요하게 한 곳에 모아서 마음이 고요한 가운데서 세밀하게 살피는 것이다. 움직이지 아니하는 정(定)과 말끔한 혜(慧)가 균등하게 살아있는 상태를 선정이라고 한다. 반야(般若)의 지혜를 얻고 성불하기 위해 마음을 닦는 수행이다. 인간은 잡다한 생각을 그치지 못하고 집착하기 때문에 불만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망념과 사념(邪念)을 버리면 이 세상이 곧 극락이고 이 마음이 곧 부처라 했는데,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인 선정을 연마해야 한다. 선정의 깊이 정도에 따라서 사선팔정(四禪八定)이라고 하는 천상에 태어나는 도(道)가 있다.
예를 들어 책을 읽는 데 독서삼매라든가, 어떤 사람은 술 마시는 데 삼매가 돼서 밤이 가는지도 모르고 집안이 어떻게 되는지도 몰랐다고 하지마는 이것도 삼매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술 마시는 삼매는 옳은 삼매가 못 되고 그르치는 데 빠지는 데 외곬으로 가는 삼매이다. 삼매는 마음을 맑고 고요한 데에 모으는 것으로 삼매도 여러 종류가 있다. 경을 보면 부처님께서 무슨 삼매에 드셨다 하는 것이 있지마는 그 깊은 마음 경계에 머물러 계신 것을 말한다.
그래서 선정의 다른 이름이 초집중이다. 숨은 그림 찻기를 하려면 집중력이 필요 하다. 어떤 숙련된 작업을 하려면 집중이 필요 하다. 팔정도와 화두와 관찰은 집중을 하기위한 방편이다. 내면을 보기 위해선 걱정이 없어야 한다. 탐심 화냄 어리석음을 제거를 해야 내면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불교에서의 선정법은 이러한 것만 아니라 각자의 근기에 맞추어서 행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예를 들면,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에서 말하는 반주삼매, <법화경>에서 말하는 무량의처삼매(無量義處三昧), <화엄경>에서 말하는 해인삼매(海印三昧), 천태종의 <마하지관(摩訶止觀)>에서 말하는 사종삼매(四種三昧)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리고 선정에 들기 위한 마음집중의 방편으로 붓다 당시 가장 흔히 썼던 방법이 호흡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삼매(三昧, 入定)를 개발하는 체계적 방편이 호흡 수련법이다.
불교에서의 선정은 이처럼 지(止, Samatha)나 관(觀, vipasana), 혹은 삼매(三昧, samadhi)라는 이름을 붙여서 지혜를 개발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으로 활용되고 있다. 다른 종교나 사상 등에서는 불교에서와 같은 체계적이고 다양한 선정 수행법을 찾아보기기 힘들다. 불교에서는 지혜를 개발하기 위해 일상생활에서의 여러 가지 윤리적인 차원에서의 실천방도도 설하고 있지만, 선정을 활용한 더욱 깊고 구체적인 실천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고등종교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좋은 실천방법을 잘 활용하지 못하고 많은 불자들이 기복(祈福)의 차원에만 머물러 진정한 해탈의 길로 들어서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우리 불교도들이 다 함께 반성해야 할 문제다.
요는, 선정(禪定)이란 참선(參禪)을 하는데 다른 생각 하나도 없이 화두(話頭)만 뚜렷한 그것을 선정이라 하고 삼매에 들었다고 한다.
염불이나 참선이나 진언 등의 공부를 해서 내 몸뚱이도 없고 생사도 없고 그렇다고 자는 것도 아니며 허망한 환상에 빠진 것도 아닌 깨끗한 정신, 이럴 때 성성(惺惺)하다고 한다. 우리는 동서남북으로 마음이 갈가리 찢겨서 잠도 못자고 마음도 편치 못한데, 이 마음이 딱 정립이 돼서 가장 깨끗한 기분, 잡념이 하나도 없는 또렷한 마음만 남아 있을 때, 마음이 정립돼 선정삼매에 들어섰을 그때에는 사람의 마음이 가장 안락할 때이기도 하다. 잡념 때문에 잠을 못자고 음식을 먹어도 소화가 안 되고 그랬는데 이제 삼매에 들어서 망상이 끊어졌으니, 성인의 지위에 처음 들어섰다고도 하고, 참여했다는 뜻으로 초과(初果)라도 하고, 입류(入流)라고도 하며, 이것을 수다원(須陀洹, 豫流)이라 한다.
<육조단경>에서는 선정을 이르되, 외이상왕선(外離相曰禪)이요, 내불란왈정(內不亂曰定)이라 했다. 바깥 경계에 꺼들리지 않고 ― 밖으로 상을 떠남이 선이요, 안으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 정이라 했다. 이와 같이 안팎으로 마음이 같아야 한다. 사람들은 좌선이라고 하니 가부좌를 틀고 앉아 고요히 움직이지 않음이(모양만 취함이) 좌선인 줄 여기고, 입만 열면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마음도 끊임없이 분별에 허덕이고 있으니 어찌 선정이라 하겠는가라고 했다. 실제로 초기불교 교단에서 하루 생활의 대부분을 선정수행으로 짜인 환경이었고 모든 불교의 가르침은 선정론으로 귀결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교의 전통적인 수행방법으로는, 이무심정(二無心定), 사공정(四空定), 사정(四定), 팔정(八定), 구차제정(九次第定) 등이 있으나, 한국에서는 원효(元曉) 대사가 주창한 구심주(九心住)와 좌선의 수행법이 채택됐다. 구심주는 사람들의 마음이 외부세계로부터 받는 자극과 유혹 등으로부터 동요됨이 없이, 고요하고 평안한 상태를 이루게 되는 경지를 9가지로 나눈 것이다. 구심주를 닦기 전에는 고요한 곳에 머무를 것, 계(戒)를 청정하게 지킬 것, 의복과 음식에 부족함이 없을 것, 선지식(善知識)을 만나야 할 것, 모든 연(緣)이 되는 사무를 쉴 것 등 5가지 환경에 대한 선행조건이 제시됐다.
그리고 구심주는 ① 내주(內住;내면적이 됨) ② 등주(等住;평등하게 됨) ③ 안주(安住;평안하게 됨) ④ 근주(近住;가까이 머무름) ⑤ 조순(調順;조절하여 순하게 됨) ⑥ 적정(寂靜;고요함) ⑦ 최극정(最極靜;지극히 고요함) ⑧ 전주일취(專住一趣;오로지 한 가지 길에 머무름) ⑨ 등지(等持;한결같이 마음을 유지함)이다.
이와 같은 선정을 닦는 과정에서는 번뇌를 철저하게 억눌러 법계(法界)가 진여(眞如)의 한 가지 모습을 지니고 있음과 모든 중생이 진리의 몸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이를 일상삼매(一相三昧)라 한다. 그리고 수행 도중에 적지 않은 마(魔)가 나타나지만, 이러한 장애를 지혜롭게 관찰해 집착하지 않으면 장애들을 멀리할 수 있다. 선정에 들기 전에는 반드시 좌법(坐法)에 따라 몸을 단정히 하고, 진여와 상응해 자기를 제도하고, 다른 이를 제도해 무상도(無上道)에 이르겠다는 원(願)을 바르게 세워야 한다.---→선(禪) 참조.
[출처] 아미산 <불교 용어 해설, ㅅ ― 30>|작성자 아미산
'불교용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미산 <불교 용어 해설, ㅇ ― 14> (0) | 2023.09.24 |
---|---|
아미산 <불교 용어 해설, ㅂ - 33> (1) | 2023.09.17 |
아미산 <불교 용어 해설, ㅇ ― 33> (1) | 2023.08.27 |
아미산 <불교 용어 해설, ㅂ ― 3> (1) | 2023.08.13 |
아미산 <불교 용어 해설, ㅂ - 26> (0) | 2023.08.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