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산 <불교 용어 해설, ㅇ ―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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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위법(有爲法)과 무위법(無爲法)---유위(有爲)란 위작(爲作), 조작(造作)의 뜻으로 ‘만들어 진 것’이라는 의미이고, 바로 ‘연기(緣起)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우주의 일체 존재는 모두가 연기된 것이다.
이와 같이 갖가지 인연에 의한 결과로 이루어지는 모든 현상을 유위라 일컫는다. 즉,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모두가 유위법이다. 우리의 몸을 위시해서 언어, 교육, 창작, 학문, 정치, 경제 등 인위적인 활동과 그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 그리고 4계절의 변화 등의 자연현상까지도 유위법이다. 우리가 만들고 표현하는 것, 현실적으로 보고 들으며, 느끼고 아는 것 등 사람이 하는 것이나 자연이 하는 변화는 모두 유위이다. 결국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유위법이다.
이에 비해 무위법(無爲法)이란 말로 나타낼 수 없는 법의 본성으로서, 인연의 지배를 받지 않는, 인연에 의해 형성되지 않는, 생멸변화 등의 작용을 갖지 않는 상태, 생멸변천 현상을 초월한 상주불변(常住不變)하는 절대의 법을 말한다. 이는 탐(貪) ‧ 진(瞋) ‧ 치(癡)가 소멸돼 온갖 분별 망상과 번뇌가 끊어진 상태이며, 윤회로부터 해탈한 열반의 경지를 의미한다. 따라서 유위법은 번뇌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하는 일체법을 뜻하는 이름이고, 무위법은 번뇌가 하나도 없이 하는 일체법을 뜻하는 이름이다.
• 불교도 유위법이다.
― 불교 자체도 유위법이고, 사찰의 전각, 그 안의 불상, 심지어 부처님의 설법 또한 유위법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뗏목처럼 너희들도 내가 말한 가르침의 뜻을 안 연후에는 그 말과 문자를 버려야지 결코 거기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하시면서, 남의 말이나 문자에 끌려 다니지 말라고 하셨다.
부처님 자신의 말 또한 유위법이고, 불교도 유위법이므로 언젠가는 세상에서 사라진다. 불교나 설법도 연기적 이치에 의해 생성된 것이기에 소멸의 법칙을 따르게 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무렵 그동안 45년간 행한 설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찍이 한 마디로 안 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동안 행하신 설법은 모두 유위법이란 말씀이다.
• 유위법과 무위법은 상대 개념이다.
― 유위는 작위(作爲)가 존재한다는 뜻이며, 무위는 작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로서 무위법은 유위법의 상대개념이다. 즉, 유위법이 조작되고 만들어진 법이라면 무위법은 유위법의 그 속에 숨겨진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그 무엇’을 의미한다. ‘그 무엇’을 공(空)이니, 열반(涅槃)이니, 진여(眞如)니 하는 표현을 빌리기도 하나 실은 무위법이라는 말조차 필요 없다. 무위법이기 때문에 말로써 생각으로써 가늠할 수 없는 것이다. 무위법은 경전의 말씀처럼 불가설 부가량(不可說不可量)이다. 어째서 말로써 표현할 수 없고 양(量)으로 가늠할 수 없는 것인가, 무위법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무위법은 깨달은 상태에서 드러낸 법을 말하고, 유위법은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드러낸 법을 말한다. 즉, 무위법(無爲法)은 본래 성불의 깨달음에서 드러난 법이고, 유위법(有爲法)은 본래 무명(無明)에서 미혹함으로 드러난 법이라 할 것이다.
비유컨대 무위법은 진리의 바다라고 하는 바닷물 속에서 드러난 법이고, 유위법은 진리의 바다라고 하는 바닷물 수면 위에서 드러난 법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눈에 보이는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 눈에 보이는 세계를 파도라고 한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세계는 파도 밑에 있는 깊은 바다이다.
• 유위법은 생주괴멸(生住壞滅)한다.
― 유위법의 현상들은 반드시 생(生) ‧ 주(住) ‧ 괴(壞)/이(異) ‧ 멸(滅)의 단계를 거치므로 생멸하는 모든 법이 이에 포함되며, 다음과 같은 성질을 지닌다.
첫째,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연기된 것이다).
둘째, 생겨나서 변화하고 소멸해 가는 것이다.
셋째, 시간과 공간 혹은 인과법칙에 속박되는 것이다.
유위의 세계는 생멸변화가 격심한 무상의 세계인 데 반해, 이를 초월한 무위의 세계는 인연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영구불변한 세계, 즉 깨달음의 세계이다.
• 유위법은 여러 인연에 의해 이루어진다(연기된 것이다).
― 유위법(有爲法)이란 다양한 원인과 조건에 따라 생성된 존재, 인연에 의해 생멸하는 일체 현상계의 사물, 이러한 것들이 여러 연(緣)에 의해 집합돼 만들어진다. 어떠한 것도 하나의 인연에 의해 생겨나는 법은 결코 없다. 즉, 유위법은 열등하므로 여러 인연의 힘을 빌리지만, 무위법은 강렬한 작용이므로 인연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 마치 열등한 사람은 남에게 자꾸 의지하려고 하지만, 자신감이 있는 사람은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때문에 유위법이란 갖가지 인연에 얽혀 있는 것이고, 사람의 일생 또한 각가지 인연에 얽혀서 한 평생을 살아간다. 무릇 중생은 돈, 권력, 명예, 직위, 출세 따위의 탐욕과 집착에 매여 있거나 아니면 부모형제와 자식, 학연, 지연, 조직 등에 얽혀 이에 집착하거나 그에 의해 지배당하며 유위의 일생을 살다가 간다.
• 유위법은 허망하다.
― 금강경 사구게(四句偈)에는,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모든 조작이 있는 것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 같으니, 응당히 이와 같이 관찰하라.”고 했다.
이처럼 일체 유위법은 꿈과 같고 그림자와 같아서 허망하므로 속지 말라고 했다. 유위법에 속으면 집착하게 되고 집착하면 고통이 따르게 된다. 반야의 안목을 가지고 존재의 실상을 바로보고 살라는 의미다.
우리들의 삶은 허망한 유위법이다. 그런데 흔히 무위법이라 하면 마치 아무 것도 안하는 행위의 포기인 양 착각하는 이들이 있으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비록 유위법은 허망하지만 또한 열심히 살아야 한다. 열심히 살면서 또한 허망한 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은 이치가 존재의 실상을 바로 본 중도적 삶의 모습이다.
• 유위와 무위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 무위법은 무상하지 않고 유위법은 무상하다고 해서 무위법만 옳고, 유위법은 잘못이고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무위법은 진리의 세계이고, 유위법은 현상계이지만 현상계에는 악을 일삼는 무리들도 있지만 진리를 추구하는 옳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많이 있다. 수많은 의인(義人)과 의사(義士), 열사(烈士)와 같은 애국자들이 있고, 열심히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 등 양심적으로 사는 성직자 등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므로 유위법과 무위법은 결코 별개의 것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파도와 물이 함께 있는 것과 같이 유위법과 무위법도 함께 있다. 유위법과 무위법의 분류는 있는 그대로의 객관 세계를 두 가지 측면으로 구분해서 본 철학적 분류법일 뿐이다.
무위법이라고 함은 생멸변화가 없는 것 자체를 의미하지만 무위라고 해도 그것은 유위를 배제하거나 부정할 수는 없다. 또한 유위라는 것과는 별도로 무위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유위법은 무위법으로 인해 세우고 무위법은 유위법으로 인해 드러난다. 본디 유위법을 세우지 않았다면 어디에서 무위법이 생겨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참 무위법을 논하는 것이라면 유위법을 취하지 않고 또한 무위법도 취하지 않는다. 즉, 유위법은 당연히 버리는 것이고, 무위법도 끝내 생각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참 무위법이다.
수행을 처음 발심해서 시작할 때는 상(相)을 가지고 시작하지만 점차 수행이 깊어질수록 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이 소멸되고, 그러면서 자연 유위법에서 무위법 들어가는 수행이 된다. 그래서 유위법과 무위법은 하나이면서 다만 구분을 할 때 둘로 표현이 된다고 하겠다.
• 유위의 세계는 생사거래, 생멸, 흥망성쇠가 물결치는 세계이다. 그래서 행복도 불행도 슬픔도 기쁨도 함께 난무한다. 그 반면, 무위의 세계는 그러한 것이 없는 세계이다. 생사(生死)도 거래(去來)도 행복도 불행도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인위적인 그 모든 것이 없는 세계가 무위의 세계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이 없기 때문에 사실은 모든 것이 가능한 세계이기도 하다. 사실 알고 보면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세계'란, '모든 것이 일어나는 세계'이다. 우리가 단지 이 사실을 지금까지 모르고 무심히 지내왔을 뿐이다.
*유위법(有爲法) 81가지---유위법이란 글자 그대로 함이 있는 법이라는 뜻이다. 다른 말로하면 차별상, 속제법을 의미한다. 이것은 조건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삼라만상이 다 어떤 조건에 의해서 존재하게 된다. 상대적이며 인연화합으로 생겨나고 인위적인 것도 있으며 분별상을 갖게 된다.
반면에 무위법(無爲法)이란 글자 그대로 함이 없는 법이라는 뜻이다. 차별이 없고 조건이 없는 절대적인 진리 그 자체를 의미한다. 상대적인 것을 떠나 있으며 집착이나 인연에 상관없이 여여부동한 것으로, 다른 말로 무상의 도리라고도 하며, 생겨나거나 없어지거나 하는 것이 아닌 공적한 상태, 최고의 경지를 의미한다. 이는 오로지 치우친 소견을 버려야 알 수 있는 것이다.
상(相)에 집착하면 삿된 소견을 길러 실상을 모르게 되며, 그렇다고 공(空)에 집착하면 아예 없다고 알게 돼버리니 이것도 어리석음을 기르게 된다.
부파불교에서 의미하는 유위법은 마음속에 있는 세속적인 의식작용들을 의미하며, 그것이 81가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념처경>에 나오는 것에 근거해서 하는 말이다. 하지만 부파에 따라서는 89가지로 나누기도 하고 120가지로 나누기도 한다.
설일체유부에서는 다르게 분류하는데 설일체유부는 일체법을 색법(色法) 11가지, 심법(心法) 1가지, 심소법(心所法) 46가지, 불상응행법(不相應行法) 14가지, 무위법(無爲法) 3가지의 5위 75법으로 분류했고, 이 분류에서 3가지 무위법(無爲法)을 제외한 나머지 4위(位), 즉 색법(色法) · 심법(心法) · 심소법(心所法) · 불상응행법(不相應行法)의 총 72가지 법은 모두 유위법(有爲法)이다.
*유위사상(有爲四相)---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 사람이 생하고(生), 늙고(老), 병들고(病), 죽는(死) 변화를 유위사상(有爲四相)이라 한다. 마찬가지로 모든 자연의 존재도 우주 공간으로부터 먼지에 이르기까지 모든 자연물을 포함해 과거, 현재, 미래세의 삼세(三世)를 통해 모든 존재는 생하고(生), 머물고(住), 무너지고(壞-異-달라지고/變), 없어지고 마는(滅) 사상법칙(四相法則)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유위사상이라 한다. 따라서 생ㆍ로ㆍ병ㆍ사와 생ㆍ주ㆍ이(괴)ㆍ멸이 곧 유위사상이다.
즉, 유위법(有爲法)은 인연으로 인해 생겨나서 일시적인 현상으로 존재하며, 끊임없이 변화해 마침내 생·주·이·멸로 없어지게 된다.
*유위상(有爲相, 산스크리트어 samskrta-laksana)---유위법을 유위법으로서 성립하게 하는 특질을 말한다. 발생하고(生), 소멸하고(滅), 머물고(住), 변화하는(異) 모습을 말한다. 유위(有爲)는 꾸미거나 조작하는 것, 인위적으로 만든 것 등을 말하는데, 생 · 주 · 이 · 멸(生住異滅)의 네 가지 모양을 유위사상(有爲四相)이라 한다.
유위(有爲)의 법은 인연으로 인해 생겨나고, 일시적인 현상으로 존재하며, 그 사이에도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드디어는 없어져 버린다. 그것을 4상(四相)이라고 한다. 4상(四相)은 생멸(生滅)하는 존재, 보다 정확히는 생멸변천(生滅變遷)하는 존재로서의 모든 유위법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4가지 성질인 생(生) · 주(住) · 이(異) · 멸(滅) 또는 생(生) · 주(住) · 노(老) · 무상(無常)을 말한다.
<구사론>에 따르면 이 4가지 성질은 유위법으로 하여금 유위법이게 하는 유위법의 본질적 성질로서 어떤 법이 이 4가지 성질을 갖추고 있으면 그것은 유위법이다. 그리고 이 4가지 성질이 없으면 그 법은 무위법이다. 이러한 유위법을 유위상(有爲相) · 4유위(四有為) · 4유위상(四有爲相) · 유위4상(有爲四相)이라고도 한다.
*유위전변(有爲轉變)---세상의 사물은 모두 상주불변한 고정적 실체를 가지지 않으며, 인연에 의해 생기고 또 없어진다. 이것을 유위라고 하며, 그 무상변화하는 것을 유의전변이라 한다.
*유유상종(類類相從)과 수행---세상에는 「공명(共鳴)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이 우주는 같은 주파수의 파장은 같이 공감한다는 것이다. 같은 주파수의 파장은 함께 공명을 한다는 말이다. 비유를 들어보면, 벽에다가 자명종 시계를 이쪽 벽에 하나 저쪽 벽에 하나, 또 다른 벽에 하나, 이런 식으로 벽면마다 시계추가 움직이는 자명종 시계를 갖다 놓고, 전부 다 다르게 추를 움직이게 한다. 어떤 건 왼쪽으로 가고 어떤 것은 오른쪽으로 가게하고 왔다 갔다 다르게 움직이게 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 그것들을 살펴보면 자명종의 추가 모두 다 정확히 같은 방향, 같은 움직임을 한다고 한다. 물론 같은 자명종이고 시계추의 무게라거나 길이 등이 동일한 같은 조건이라면 말이다. 처음에는 다르게 시작했더라도 그 작은 떨림의 파장이 서로에게 전달이 돼 공명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 속에서도 그 공명이라는 것은 아주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다. 예를 들어 ‘활자’가 개발된 시점을 보면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전혀 연결 고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비슷한 시기에 활자가 계발되었다거나, 비슷한 발명품이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거나 한다. 또 다른 예로 세계사에 「축의 시대」라고 하는 부처님 당시의 시기에 붓다와 노자, 공자,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등이 함께 정신사의 축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것 등도 그와 비슷한 역사 속의 공명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집에서 혼자 기도할 때 기도의 힘을 받는 에너지와 절에 가서 많은 사람이 모여서 함께 동일한 기도를 함으로써 동일한 주파수의 파장을 일으켰을 때, 그 기도의 힘이라는 것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내 힘이 별로 없더라도 기도 열심히 하는 도량에 가서 힘 있는 도반들, 법력이 센 스님을 모시고 기도를 하고 수행을 한다고 했을 때, 그 에너지, 그 주파수와 공명을 하게 되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자, 법이 선 자가 가까이 함께 있다면, 혹은 같은 시기를 살고 있다면 그 정신적인 공명의 힘을 우리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부처님 같은 큰 스승이 몇 분 계신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한국이라는 전체 땅 덩어리의 어떤 에너지의 힘이 전혀 다른 전환을 맞이하게 될 수 있다. 그래서 깨달은 자가 하나 있는 그곳은 아주 수승한 파장, 깨달음의 파장과 서로 공명을 하기 쉽다. 시계추가 다르게 움직였지만 하나로 움직이듯이 하나로 결속해서 몰아가듯이 그 밝게 깨어있는 자의 파장이 있었을 때 그 주변은 그 파장과 일치를 이루게 된다, 쉽게 말해서, 깨닫기가 쉽다고 하는 것이다.
성격 나쁘고 아주 욕도 잘하고 화를 내기 좋아하고 이런 사람과 함께 지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닮아 간다. 파장이 같아지는 것이다. 파장의 주파수가 같아지는 것이다. 나는 그걸 배우고 싶지 않아도 욕을 그냥 맛깔나게 입에 딱 붙게 하는 사람 옆에 가서 며칠만 살게 되면 나도 모르게 그런 똑같은 욕이 툭툭 튀어 나온다. 의지하지 않았지만 그 파장이 나한테 공명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파장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수행하는데 있어서는 나와 동등하거나 나보다 나은 도반과 함께 가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내가 어떤 한 가지 생각을 일으키면, 그 한 생각은 우주 전체와 공명한다, 그 생각 하나는 우주 끝까지 일시에 전파 돼서 우주 전체에서 그 생각과 비슷한 주파수를 가진 에너지와 공명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와 비슷한 생각, 비슷한 주파수, 비슷한 파장을 가진 에너지를 끌어당기게 된다. 비슷한 것들은 서로 모인다고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 한다. 비슷한 것들 끼리 모이게 된다, 공명을 한다, 내가 기대를 하고 어떤 바람을 가지고 있게 되었을 때, 그 강력한 에너지를 보내게 되면 내 안에 있는 이 주파수 이 에너지와 동일한 주파수대의 사람, 동일한 주파수대의 물질, 상황, 조건들이 나와 함께 공명을 하고 그것이 나에게 힘을 보태주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내가 기도를 하게 되면 내 주변에 있는, 내 지구상에 있는 기도하는 자의 주파수가 나에게 힘을 보태준다는 말이다. 내가 짜증을 내고 화를 내고 욕을 하게 되고 범죄를 저지르게 되면 범죄를 저지를 자들의 주파수가 나와 일치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때때로 수행을 하다보면 어떤 경계를 경험하게 된다. 혹은 어떤 경우에는 어떤 존재, 어떤 정신적인 존재를 만나게 되기도 하고, 다양한 어떤 경계를 만나는데, 그건 어떤 파장이 일순간 맞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우리가 수행 정진을 통해서 우리의 기운 - 주파수가 수승해지면 저 천상 세계의 아주 맑은 정신들과 어떤 공명을 가져올 수가 있게 되기도 한다.
그만큼 내가 생각하는 그 의업(意業), 어떤 하나의 의업을 일으키는 것, 그것은 이 우주 전체와 공명을 하게 되기 때문에, 그 힘을 주고받기 때문에 에너지의 엄청난 힘으로서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러니 쉽게 화를 내고 욕을 하고 짜증을 내고 욕심을 내고 이런 일들을 함부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 법상 스님
*유유일불승 무이역무삼(唯有一佛乘 無二亦無三)---<법화경>에 나오는 말로서, <법화경>의 종지(宗旨)이며, 불교의 최고 종지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는 오직 부처님만 있을 뿐, 이승(二乘)도 없고, 삼승(三乘)도 없다는 뜻이다.
부처님은 때로는 살아가면서 스스로 겪는 온갖 경험들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연각의 길도 설하신다. 사성제나 십이인연(十二因緣)의 설이 그것이다. 불교에는 가르침이 참으로 다양하다. 흔히 표현하기를 8만 4천 근기에 따른 8만 4천 법문이라고 한다. 불교경전을 8만대장경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바로 그래서이다. 하지만 수많은 가르침도 결국은 깨달음이라고 하는 하나의 종점에 귀결된다. 어쩔 수 없어서 근기를 따라 각양각색의 법을 펼쳐놓지만 사실인즉 모두가 부처님이라는 하나의 사실을 깨eke는 것이 그 종점이다. 그리고 알고 보면 또 그것이 출발점이기도 하다.
무수한 생을 거듭하면서 수행한다는 것은 부처님으로 출발해 끝내 부처님으로 돌아오는 일이다. 달리 다른 일은 없다. 처음도 부처님이요, 중간도 부처님이요, 끝도 부처님이다. 오직 부처님만이 있을 뿐이다. 그야말로 부처님 위에 부처님 없고 부처님 밑에 부처님 없다. 데바닷다도 부처님이요, 석가모니도 부처님이다. 이것을 <법화경>은 ‘유유 일불승 무이역무삼(唯有一佛乘 無二亦無三)’이라고 한다. <법화경>의 종지(宗旨)이며, 불교의 최고 종지이다.
이 세상에는 오직 부처님만 있을 뿐 이승도 없고 삼승도 없고 팔만 사천이라는 각각의 다름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을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겨야 한다. 빼앗거나 침범하거나 살상을 하거나 하는 일을 없애고 전쟁도 없애서, 전 인류를 행복하고 평화롭게 하는 길은 오직 이 한길뿐이다. 다른 길은 없다. 인류는 행복을 위해, 평화를 위해 온갖 분야에서 각양각색의 노력을 쏟고 있으나 최종적으로는 오직 이한 길, 사람을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는 길뿐이다. ‘유유일불승 무이역무삼(唯有一佛乘 無二亦無三)’이라는 말이 이것을 의미한다.
<법화경>에서 ”삼승은 곧 일불승“이라는 교설은 단순히 대ㆍ소승의 교단적 분열 대립을 지양하기 위해 출현한 것에 불과하다기보다는, 붓다의 본회(本懷-속마음)를 서술한 것이요, 대ㆍ소승의 분별은 그런 본원(本願)에 입각한 방편시설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법화경>은 이러한 뜻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법화경>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무수한 중생이 수행한다는 것은 부처님이 되기 위해 출발을 해 끝내 부처님이 돼서 돌아오는 일이다. 달리 다른 길은 없다. 처음도 부처님이요, 중간도 부처님이요, 끝도 부처님이다. 오직 부처님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법화경>에서 말한 ‘유유일불승 무이역무삼(唯有一佛乘 無二亦無三)’의 일불(一佛)사상이다.
*유작(唯作, kiriya)-유작심(唯作心, kiriyacitta)---부파불교시대에 남방 상좌부에서 마음을 분석할 때 쓴 용어인데, 단지 기능만 하고, 업을 만들지 않는 것을 말한다. 유작심은 아라한(阿羅漢)의 마음이다. 아라한이 된 성자들이 무색계의 선정에 들면 유작심이라 한다. 위빠사나 명상으로 아라한이 돼도 보통의 세계에서는 보통의 지식으로 살고 있으므로 몸에 괴로움이나 통증, 병이 생기기도 해서 매우 어렵다. 그래서 선정에 들어 있는 쪽이 편하다. 선정에 들면 번뇌가 완전히 사라지기 때문에 업(kamma)이 되지 않는다. 재생도 하지 않는다. 선정에는 들어 있지만 아라한이 된 사람들의 명상은 업(業)을 만들지 않으므로 유작심(唯作心)이라 한다. 업이 되지 않는, 다시 태어나지도 않는 단지 행위로서 끝난다.
*유작사유(有作思惟)---<원각경>에 나오는 말로서, 짓는 것이 있는 생각을 말한다. 유작(有作)의 사유(思惟)는 유위(有爲)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어서, 진실한 심체(心體)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므로 이러한 사유를 이용해서 부처님 경계를 찾는다면, 마치 허공의 꽃이 다시 허공의 열매를 맺는다고 하는 것과 같아서 망상만 더해간다고 한다.
*유전문(流轉門)---12연기를 순차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순관(順觀)이라고도 한다.---→십이연기(十二緣起) 참조.
*유전연기(流轉緣起)---연기설에 있어서 선ㆍ악업과 그 과보의 관계에서, 고(苦)가 생기(生起)하는 연기관계를 유전연기(流轉緣起) 혹은 연기의 순관(緣起의 順觀) 혹은 순연기(順緣起)라고 한다.
연기의 순관의 구체적인 모습은, 「무명(無名)에 연(緣)해서 행(行)이 있고, 행에 연해서 식(識)이 있으며, 식에 연해서 명색(名色)이 있고, 명색에 연해서 6입(六入)이 있으며, 6입에 연해서 촉(觸)이 있고, 촉에 연해서 수(受)가 있으며, 수에 연해서 애(愛)가 있고, 애에 연해서 취(取)가 있으며, 취에 연해서 유(有)가 있고, 유에 연해서 생(生)이 있으며, 생에 연해서 노사(老死) · 우비고수뇌(憂悲苦愁惱)의 갖가지 고(苦)가 생긴다.」고 하는 정형적(定型的)인 글로 표현된다.
무시이래로 무명(無明)으로 인해 고통 받는 연기는 유전연기(流轉緣起)이다. 반면 수행해서 해탈하는 연기는 환멸연기(還滅緣起)이다.---→환멸연기(還滅緣起) 참조.
*유정(有情, 산스크리트어 sattva)---생명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 감정이나 의식을 가진 존재를 말한다. 옛날에는 중생이라 번역했고 현장(玄裝) 이후의 새로운 해석에서는 유정(有情)이라 한역했다. 정은 마음이란 뜻이고, 무감각한 초목과 산하를 비정(非情)이라던가 무정(無情)이라고 하는 것에 반대되는 말이다. 즉, 마음을 가진 살아 있는 중생(衆生)을 뜻하며, 인간도 물론 유정이다.
‘보리살타(보살)-bodhisattva’에서 보리(bodhi)는 깨달음, 살타(sattva)는 살고 있는 존재, 즉 유정(有情)을 뜻한다. 따라서 ‘보리살타’란 깨달은 유정, 깨달은 사람이란 말이고, 무정(無情)이란 돌멩이 같이 정신작용이 없는 무생명체의 총칭이다. sattva를 처음 한역할 때 구마라습은 중생이라 번역했고, 현장은 유정이라 번역했다. 유정은 움직이는 생명체고, 무정은 움직이지 못하는 물체이다.
다르게 설명하면, 유정(sattva)이란 정(情)이 있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 정이란 정식(情識)이나 업식(業識)을 지칭한다. 정식(情識)은 일반적으로 감각적인 수용능력을 의미하고, 업식은 업상(業相), 즉 무명업상(無明業相-헛된 생각이 일어남)을 의미한다. 이를 풀어서 설명하면 유정이란 ‘감각적 수용능력을 지니고 맹목적인 삶의 의지에 따라 행위 하는 것’, 즉 감수성(情)과 의지성(行)과 행위성(業)을 특징으로 하는 존재를 의미한다.
*유정(惟政, 1544년(중종 39)∼1610년(광해군 2)---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활약한 승병장. 서산대사 휴정(西山大師休靜)의 제자. 속명은 임응규(任應奎). 호는 사명당(四溟堂) 또는 송운(松雲), 법명은 유정(惟政). 경남 밀양 출신. 14세에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해, 임진왜란 때에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으로 승병을 이끌고 전공을 세웠으며, 전란 후 일본과의 외교 및 부국강병책에 의해 국가에 크게 기여했다. 1604년 일본과 강화를 맺기 위한 사신으로 파견돼 1605년, 왜군이 강탈해간 통도사 진신사리를 돌려받고, 포로로 잡혀갔던 조선인 3,000여 명을 데리고 귀국했다.
*유정천(有頂天)---비상비비상천(非想非非想天)의 다른 이름이다. 무색계 4천(四天) 가운데 가장 위에 있는 비상비비상천(非想非非想天)을 말한다. 삼계(三界)의 가장 위에 있으므로 유정천(有頂天)이라고 한다.
*유진 부르누(Eugne Burnouf, 1801~1852)---프랑스대학 산스크리트어 담당교수였다.
부르누는 영국 동인도회사 직원이었던 브라이언 호튼 헛즈슨(Brian Houghton Hodgson, 1800~1894)이 네팔에서 수집한 산스크리트어 불교문헌들을 검토한 후, 그 중요성을 알아채고 이 문헌들을 연구해 1844년에 <인도불교사개론>을 출판했다. 이 책은 유럽의 불교연구 기초를 놓은 저작으로 평가된다. 따라서 부르누는 19세기 유럽 산스크리트학의 연구체계를 확립한 인물이라 하겠다. 부르누는 또한 아소카왕 석주에 관해 자세한 연구를 한 최초의 학자였다. 그리고 그는 <법화경> 번역에 착수했으나 그의 <법화경> 번역본은 사후에 출간됐다.
*유체이탈(幽体離脱, Out-of-Body Experience)---유체이탈은 영혼이 자신의 신체를 빠져나온 상태에서의 감각 체험을 일컫는 말이다. 영혼이 빠져나온다는 점은 임사체험(臨死體驗-Near-Death experience)과 유사하나 사후세계와 관련된 장소에 다다르지 못한다는 점에서 다소 차이가 있다. 유체이탈은 잠재의식 속에서의 경험이다. 일방적으로 꿈에 휩쓸리는 상태보다는 유체이탈 상태는 비교적 의식이 잘 깨어있고 이성적으로 상황판단이 가능한 상태이기 때문에 경험의 연속성이 꿈 상태보다는 더 의미가 있고, 선명도도 꿈보다는 좋다고 한다. 유체이탈을 하더라도 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부족하다면 언제 어느 때라도 꿈 상태가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요즘은 언론이나 네티즌들을 통해서도 '유체이탈'이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말과 행동이 다른 정치인에게는 '유체이탈 화법'이라는 말을 한다. 이러한 유체이탈에 대해, 위키백과사전에는 '유체이탈(幽体離脱, Out-of-Body Experience)은, 영혼이 자신의 신체를 빠져나와 육체의 바깥에서 세계를 바라보거나 경험하는 일' 이라고 돼 있다.
그런데 '유체(幽体)'라는 말이 애매하다. 한자로 '유(幽)' 자가 '그윽하다, 숨다, 멀다, 아득하다'는 뜻인데, '유체(幽体)'를 한자로만 봐서는 이게 무슨 뜻인지 알기가 어렵다. 그래서 한쪽에서는 '체외이탈(體外離脫)' 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유체이탈은 사람이 기절하거나 죽은 상태, 즉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의식(영혼)이 몸 바깥으로 빠져나간 걸 자신이 인식하는 상태를 말한다. 쉽게 말해 영혼이 몸 바깥으로 빠져나가 영혼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상태이다. 즉, 자신의 몸에서 또 다른 자신이 몸에서 빠져나가 공중에 떠 있거나 옆에 서서 의식이 없는 자신의 육체를 보고 있는 현상이다.
유체이탈은 흔히 교통사고, 병원에서 혼수상태일 때 많이 일어난다고 한다. 그런데 관련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실제로는 한창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경우 100명 중 1~2명은 유체이탈 경험을 한다고 한다. 제법 흔한 현상이라는 뜻이다.
또 기(氣) 수련이나 명상 수련자들, 깊은 잠을 잘 때, 수술을 위해 마취중일 때, 굉장히 피곤해서 비몽사몽일 때, 극도의 공포심을 느낄 때, 극도의 영양실조일 때, 마약에 취했을 때, 이러할 때도 유체이탈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반대 입장에서는, 특히 뇌 과학자들은 유체이탈 현상이 두뇌의 측두엽을 자극하면 인공적으로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실험을 통해 증명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유체이탈에 대해서 명확한 설명을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면, 유체이탈을 경험한 사람이 자기가 의식이 없을 때 건물 옥상 위에 떠 있었는데, 그곳에서 본 옥상의 모습을 깨어난 뒤 상세하게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 옥상 모습이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의식이 없던 환자가 병원 옥상에 직접 가봤을 리가 없는데 말이다.
이렇게 유체이탈 현상이 자주 일어나자 관련 학자들은 어떤 경우가 유체이탈 현상인지 그 기준을 정하기도 했다. 꿈이나 단순 환상과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첫째, 자신의 의식(영혼)이 공중으로 떠오를 것.
둘째, 자신의 육체를 자신의 바깥쪽에서 볼 수 있을 것.
셋째, 생각만으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순간 이동을 할 수 있을 것.
넷째, 꿈이 아니라는 걸 본인이 인식할 것 등이다.
유체이탈이 실재한다면 그 말은 곧 영혼이 존재한다는 의미가 된다. 문제는 유체이탈(체외이탈) 현상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다만 자신이 그런 일을 겪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거나 혹은 자기 자신도 자신이 경험한 그 일을 믿지 못하고 헛것을 봤다고 생각해버리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뿐이다.
어찌됐든 유체이탈 현상에 대해선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유체이탈 현상이 영혼의 존재를 증명하는 현상인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다.
헌데 불교에서는 자기 자신을 관찰함에 있어서 자기를 객관화시켜서 바라보라고 한다. 수행의 한 방편이다. 이것이 유체이탈이라 할 수는 없으나 일종의 유체이탈 현상을 모방해서 스스로를 관찰하는 기법이라 하겠다.
*유학(有學, 빠알리어 sekha, 산스크리트어 śaikṣa)---소승불교에 있어서는 아라한과(阿羅漢果)에 이르면 무학위(無學位)로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고, 번뇌는 다했으며, 해야 할 바를 다했고, 윤회에서 해탈해서 열반에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그 무학위를 간단히 무학(無學)이라 하고, 아라한과 이전의 단계를 통칭해 유학위(有學位: 배울 것이 있는 계위) 또는 유학(有學)이라고 한다. 즉, 유학은 이미 불교의 진리인 사제법(四諦法)의 이치를 알고는 있으나 아직 번뇌를 다 끊지 못해 누진 즉 번뇌를 아주 끊어 깨침을 얻기 위해 즐겨 계ㆍ정ㆍ혜 삼학을 수학 하는 이를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더 수행해야 하는 삼도(三道), 즉 견도(見道) ․ 수도(修道) ․ 무학도(無學道) 중에서 견도ㆍ수도를 닦은 성자를 말한다. 그리고 초기불교 성문(聲聞)의 수행 단계인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사과(四果=사향사과, 성문사과) 중 예류자, 일래자, 불환자에 이른 성자, 즉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를 유학(有學, sekha/sekkha)이라 한다.
즉, 불교교학에서는 성인을 예류ㆍ일래ㆍ불환ㆍ아라한의 사위(四位)로 나누어 아라한을 최고의 자리에 놓고 있다. 아라한과(果)는 더 이상 배우고 닦을 만한 것이 없으므로 무학이라고 하며, 그 이전의 계위는 아직도 배우고 닦을 필요가 있는 단계이므로 유학이라 한다. 하지만 <능엄경>에 유학이승(有學二乘)이란 말이 나온다. 이럴 경우, 성문과 연각을 지칭한다.
*유학정견(有學正見)---3정견(三正見)의 하나. 유학위(有學位)의 정견을 유학정견이라 한다. 세친(世親, 바수반두)이 지은 <구사론>에 따르면, 견(見)은 유신견(有身見) ․ 변견(邊見) ․ 사견(邪見) ․ 계금취견(戒禁取見) ․ 견취견(見取見)의 5염오견(汚染五見: 5종의 그릇된 견해)과 세간정견(世間正見) ․ 유학정견(有學正見) ․ 무학정견(無學正見)의 3정견(三正見: 3종의 바른 견해)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을 통칭해 8견(八見)이라 한다.
여기서 특기할 사항은 <구사론>에 따르면 8정도의 정견(正見: 바른 견해)이 곧 세간정견 ․ 유학정견 ․ 무학정견의 3가지로 세분돼 정의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세간정견은 유루혜에 속하고 유학정견 ․ 무학정견은 무루혜에 속한다. 불교에 따르면, 무루혜의 일부라도 성취하면 성자가 된다.
*유행(遊行)---불교에서 유행은 놀러다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 제도와 포교를 위해 다니는 것을 말한다. 즉, 부처나 비구나와 같은 수행자가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불법을 펴는 것을 유행(遊行)이라고 했다.
초기 인도불교승단에서는 6월 초부터 9월까지 약 3ㆍ4개월 동안 몬순기(monsoon期, 우기)가 지속되기 때문에 그 기간 동안 바깥출입을 금하고 한 곳에 정주(定住)해 수행에 전념토록 한 승단의 법규를 정했는데, 이를 안거(安居)라 했다. 비가 내리면 저지대에 있는 개미, 파충류들이 모두 고지대로 이동하기 때문에 수행자들이 유행(遊行)하게 되면 본의 아니게 생명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하므로 바깥출입을 못하게 한 것이다. 이러한 안거 기간을 제외하고는 유행을 많이 했다.
*유행경(遊行經)---빠알리어 디가니까야(長部) 제16경을 일컫는 말인데, 원명은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Mahaparinibbana-suttanta)>이며, <장아함경(長阿含經)>의 제2경으로 한역한 것이 <유행경>이다. 이는 열반경 중 소승열반경에 속한다.
이역본으로는 4세기 초 서진(西晋)의 백법조(白法祖)가 번역한 <불반니원경(佛般泥洹經)>과 418년 동진(東晋)의 법현(法顯)이 9권으로 번역한 <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이 있다.
<유행경>은 붓다 최후의 법문으로 붓다가 열반을 앞두고 아란 등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행길에 올라 여러 곳에 다니실[유행(遊行)] 때 일어난 온갖 사건을 인연으로 해서 가르침을 설하신 것이다. 그러니 붓다 열반 직전의 모습이 묘사돼 있는 경전이다.---→불반니원경(佛般泥洹經), 대반열반경, 열반경 참조.
*유행기(遊行期)---브라만교에서는 바라문이 평생 동안 밟아야 할 단계가 규정돼 있는데.
• 학생기[범행기(梵行期), 25세 이전],
• 가주기[(家住期, 가장기(家長期), 26세-50세)],
• 임서기[(林棲期, 51세-75세)],
• 유행기[(遊行期, 76세 이후)]의 네 가지 시기로 구분했다.
앞의 세 시기를 통해 인생의 필요한 수행과 의무를 다했을 때 그들은 머리를 깎고 누더기를 걸치고 지팡이와 물통을 차고 목에는 두타(頭陀) 주머니를 걸고, 몸을 운수(雲水)에 맡기고, 유유자적(悠悠自適) 여행을 즐기는 생활로 들어가는 시기를 유행기라 한다.
*유화질직자(柔和質直者)---부드럽고 정직한 이를 말한다. 부드럽고(柔和)란, 성품이 부드럽고 온화한 것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아집(我執)의 생각이 전혀 없게 되는 것을 말한다. 현재의 자기라는 것에 집착하는 마음이 없어진 상태이다. 그러니까 자기중심의 좁은 생각에 집착해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입장을 고려하지 아니하고 자기만을 내세우는 그런 아집이 없이 남의 입장도 배려해, 대승적(大乘的) 관점에서 전체를 보고, 바르게 인도하는 승승(勝勝)의 사람의 품성을 <법화경>에서는 유화(柔和)라고 한다.
*유희(遊戱)---일반적으로는 즐겁게 노는 오락을 의미하지만, 불교에서는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러 걸림이 없고, 자유자재 함을 뜻한다. 그리하여 부처님의 자유자재한 일대기를 기술한 <대장엄경(大莊嚴經)>을 <신통유희경(神通遊戱經)>이라고도 한다.
*유희삼매(遊戱三昧)---부처의 경지에서 노닐며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음을 말한다. 유학을 전공한 옛 선비들도 불교에서 말하는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유희삼매의 경지, 세상사에 초탈한 경지를 즐겼다.
*유희신통(遊戱神通)---신통유희(神通遊戱)라고도 한다. 불교에서 신통이란 붓다의 초자연적 능력을 가리키며, 유희란 어느 것에도 걸리지 않는 자유자재한 활동을 나타내는 말이다. 신통에는 삼통(三通)이 있으며, 삼명(三明)이라고도 한다. 이 유희신통의 출전은 <유마경(維摩經)>이다.
• 숙명통(宿命通) - 자기와 남의 무한한 과거로부터 생사의 모습을 두루 알 수 있는 능력.
• 천안통(天眼通) - 자기와 남의 무한한 미래에 되풀이 될 생사의 모습을 두루 예견할 수 있는 능력.
• 누진통(漏盡通) - 현재의 인생의 고뇌를 남김없이 관찰해서 번뇌를 완전히 없애는 능력.
*유희야경(蕤呬耶經, 산스크리트어 구히야/guhya)---<유희야경>은 만다라 작법(曼陀羅作法 - 불교 춤인 나비춤의 하나)에 대한 근거를 제공하는 경전으로 매우 중요한 밀교경전이다. 그러나 이 경에 관한 연구가 전무한 상태라서 그 성립시기를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단 경전구성으로 볼 때 <대일경(大日經)>보다 약간 빠른 7세기 초반에 성립된 것으로 보이며, <대일경>의 선구적 경전이라 할 수 있다. 이 경이 언제 중국에 전해졌는지 확실치 않으나 당나라시대 중국밀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불공(不空, 705~774)에 의해 한역됐다.
*육가칠종(六家七宗)---중국 동진(東晋)시대 반야학의 파별을 말한다. 동한(東漢-후한) 말기 지루가참(支累迦讖)이 <도행반야경>을 번역한 이래 인도 반야경전이 중국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위진(魏晉) 때에는 불교학자들이 현학(玄學)의 관점에서 반야경을 이해하고 논석(論釋)하는 과정에서 여러 파가 생기게 됐다.
6가(六家)란 도안(道安, 314-385)의 본무종(本無宗), 지도림(支道林, 314-366)의 즉색종(卽色宗), 우법개(于法開)의 식함종(識含宗), 도일(道壹)의 환화종(幻化宗), 우도수(于道遂)의 연회종(緣會宗), 지민도(支愍度)의 심무종(心無宗)이고, 7종이란 위의 육종과 본무종(本無宗)에서 갈라져 나온 축법심(竺法深; 竺法汰)의 본무이종(本無異宗)을 합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본무종(本無宗), 즉색종(卽色宗), 심무종(心無宗) 3가(家)가 가장 유력했다.
*육감(六感, 영어 Sixth Sense)---불교용어는 아니다. 분석적인 사고에 의하지 않고, 직관적으로 사태의 진상을 파악하는 정신작용을 말한다. 즉, 이치나 경험으로부터의 지적 판단을 통한 결론에서가 아니라, 직입적(直入的)인 감성, 즉 직감을 의미한다. 육감은 어설픈 분석에 의하지 않고 직관적으로 상황을 파악하는 정신 작용이다.
“사람의 감각작용은 오감(五感)을 통해 이루어진다. 오감은 시각ㆍ청각ㆍ후각ㆍ미각ㆍ촉각의 다섯 가지다. 오감을 맡은 다섯 감각기관, 즉 오관(五官)은 눈ㆍ귀ㆍ코ㆍ혀ㆍ피부 등이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이것 말고도 여섯 번 째 감각이 있다. 이른바 제육감(第六感)이다. 육감이 어디서 어떻게 나오는가는 지금까지도 신비에 싸여 있다. 모든 심리학자들을 괴롭히는 연구과제의 하나가 바로 육감의 정체를 푸는 문제다. 그래서 일부 과학자들은 육감의 존재에 의문을 나타내기도 한다. 최근 외신보도에 따르면 미국의 한 대학 연구 팀이 육감은 뇌의 전두대피질(前頭帶皮質)에서 나온다고 발표했다. 과학잡지 사이언스에 게재된 이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육감이 나오는 곳은 구체적으로 좌뇌반구와 우뇌반구를 가르는 부분이라고 한다. 정신질환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전두대피질의 바로 이 부분이 정신분열증과 강박신경장애를 일으키는 곳임을 일찍이 밝혀낸 바 있다. 그래선지 육감의 본래 기능도 ‘위험을 사전에 알아채는 능력’이라고 연구팀은 밝히고 있다. 이 보고서는 “우리의 뇌는 미묘한 경고신호를 포착하는데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능숙하다”고 설명한다. 또 “예전에는 실수를 저지른 뒤에야 전두대피질의 활동을 발견했지만 이번 연구결과를 잘 이용하면 실제로 실수를 저지르기 전에 미리 위기를 감지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볼 때 육감은 오감을 뛰어 넘는 정신작용이라고도 볼 수 있다. 감각이 아니라 사유와 추리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심리학에서는 육감을 ‘초감각적지각(extrasensory perception)’으로 분류하고 연구를 진행해왔다. 육감을 직각, 직관(intuition), 예감 심지어는 영감과도 동일시하게 됐다. 때문에 그 성격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 설명할 수 없는 앎의 상태’ 정도로 제한하자는 움직임도 있다. - 김성호
그런데 이 육감은 손오공의 여의봉과 같아서 자유자재로 변화 할 수도 있다. 자기암시로 모양을 만들 수도 있으며, 잠재의식으로 숨겨놓을 수도 있고, 때로는 음흉하게 내흉(내숭)으로 비밀병기를 만들기도 한다. 그런데 오감이 어떻게 기억되느냐에 따라서 그 육감의 감성은 조삼모사(朝三暮四)로 달라지기도 한다. 육감의 감성은 자연의 원리로는 이해가 어렵고 그 결과 또한 상상을 초월한다.
육감에 관해서는 요즘 과학적으로도 효모나 화초 등을 “예쁘다, 예쁘다, 사랑한다.”는 말을 들려주는 것과 “미워, 미워 싫어”를 들려주는 것은 확연히 생육과 부패의 차이를 보인다고 한다. 심지어 물건이나 연장에도 그러한 효과가 나타난다는 연구 결과도 나오고 있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인류끼리 시비(是非)만 따지다가 육감철학에 눈을 뜨지 못하면 그 끝은 누구도 장담하지 못할 것이다.
종교에서는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몇 몇의 국가들은 지금도 악마보다도 더 철저히 복수에 복수를 다짐하는 경우도 있다. 예수는 “검을 가지는 자는 검으로 망한다.”고 했다. 사람은 사람을 존중해야 되는 것이다. 타인을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면 자신에게서 악마의 육감이 자라고, 타에게 자비(측은지심)의 마음을 가지면 참지혜의 육감이 떠오른다. 육감의 요소에는 ‘마음(心)’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어지러운 이 난세에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이 절실하다. 세상에 성자는 많았지만 남아있는 성자는 없다. 세상은 언제나 내 탓은 사라지고 남의 탓만 남는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아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것이 육감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육감이라 하겠다. 육감으로 볼 수 있어야 적을 동지로 만들 수 있고, 육감으로 대화할 줄 알아야 평화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육감(영감)으로 보는 세상의 상(象)은 모두가 하나이기 때문이다. - 전기종
*육경(六境, 산스크리트어 sad-visayah)---6진(六塵), 6망(六妄), 6적(六賊), 6쇠(六衰)가 다 같은 말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6개의 인식기관(六根)에 각기 대응하는 6개 범주의 인식대상을 말한다. 6경이란,
눈(眼根)의 대상인 색(色境),
귀(耳根)의 대상인 소리(聲境),
코(鼻根)의 대상인 냄새(香境),
혀(舌根)의 대상인 맛(味境),
몸(身根)의 대상인 감촉(觸境),
의지(意根)의 대상인 법(法境)을 합해서 말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 주변 환경이 바로 육경이다. 우리 중생은 육경에 끌려 다닌다.
6가지 감각의 대상은 먼지처럼 사람의 마음을 더럽히기 때문에 6진(六塵)이라고도 하고, 사람을 미망(迷妄)에 빠뜨리기 때문에 6망(六妄)이라고도 하며, 선(善)을 쇠멸시키기 때문에 6쇠(六衰)라고도 한다. 또 모든 선법(善法)을 핍박하기 때문에 6적(六賊)이라고도 한다.
*육계(六界 산스크리트어 sad-dhātava)---계(界, 산스크리트어 dhātu)는 요소를 뜻함.
① 모든 현상을 구성하고 있는 여섯 가지 요소(六大라고도 한다).
1) 지계(地界). 견고한 성질.
2) 수계(水界). 축축한 성질.
3) 화계(火界). 따뜻한 성질.
4) 풍계(風界). 움직이는 성질.
5) 공계(空界). 공간. 허공.
6) 식계(識界). 분별하는 마음 작용. 분별 작용. 인식 작용.
② 인식계(眼識界), 이식계(耳識界), 비식계(鼻識界), 설식계(舌識界), 신식계(身識界), 의식계(意識界)를 말한다.
③ 모든 중생이 선악의 업인(業因)에 따라 윤회해서 가게 되는 6가지 세계. 곧 삼악도(三惡道)인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과 삼선도(三善道)인 수라(修羅), 인간(人間), 극락(極樂, 천상(天上)를 합친 여섯 세계를 말한다. 육도(六道). 육범(六凡)과 같은 말이다.
[출처] 아미산 <불교 용어 해설, ㅇ ― 33>|작성자 아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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