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용어

아미산 <불교 용어 해설, ㅂ - 33>

수선님 2023. 9. 17. 13:14

아미산 <불교 용어 해설, -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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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깨달음①---붓다의 깨달음의 요체는 인연법이다. 인연법을 발견하신 분은 붓다이다. 아래 이야기를 통해 확인해보자.

사리풋타(Sāriputta, 사리불)는 산자야(刪闍耶, Sanjaya Belatthiputta)란 스승을 따르는 제자였다. 이때 목갈라나(Moggalāna, 목건련)도 그의 도반이었다. 이들 두 명이 각각 100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왕사성에 머물러있었다. 둘은 절친한 친구로 청정한 수행을 하고 있었으며, 서로 약속을 하기를 누구든지 먼저 불사(不死)의 경지에 도달하거나, 수승한 진리를 배우면 알려주기로 했다.

하루는 사리풋타가 왕사성 거리에서 탁발하는데 한 사문을 만났다. 그는 부처님의 제자 다섯 비구중 막내인 앗사지(Assaji, 마승/馬勝)였다.

그때 앗사지 비구가 가사를 단정하게 입고 발우를 들고 왕사성으로 탁발을 가게 됐다. 그는 걷고, 서고, 멈추고, 굽히고, 펴는 모습이 너무도 의젓하고 당당하며 걷는 모습도 위의와 기품이 있어보였다.

사리풋타는 혼자서 생각을 했다. ‘세상에서 아라한이 있고, 아라한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있다면 저 스님이야말로 그중에 하나일 것이다. 가서 물어봐야겠다. 누구에게 출가를 했고, 누구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으며, 누구의 법을 믿고 있는지

사리풋타는 다시 생각을 했다. ‘지금은 물을 때가 아니구나, 저분은 지금 걸식을 하고 있으니 따라가서 적당할 때 물어봐야 하겠구나.’

앗사지가 탁발을 마치고 돌아가자 앗사지를 따라가던 사리풋타는 적당한 시간과 장소에서 앗사지에게 다가서 인사를 하고 한쪽으로 물러나 물었다.

벗이여, 그대는 안색이 고요하고 엄숙하면서도 깨끗하고 밝습니다. 벗이여, 그대는 누구에게 출가를 했으며, 누구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으며, 누구의 법을 믿습니까?”

벗이여, 샤카족의 후예로 세속을 떠나 출가한 위대한 사문이 있습니다. 그분은 붓다이십니다. 나는 붓다에게 출가를 했고, 그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으며, 그분의 법을 믿고 따릅니다.”

붓다라니요? 깨달은 분요?”

그렇습니다.”

그 분은 무엇을 깨달으셨지요?”

벗이여, 나는 아직 어리고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붓다의 가르침을 자세히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제가 알고 있는 대로 간략하게 이야기 해 드리겠습니다.”

오 벗이여, 좋습니다. 무엇이라도 좋습니다. 그대가 알고 있는 대로 그렇게 설명해 주시면 됩니다.”

이 세상 모든 이치는 인연 따라 생겨나고 인연 따라 소멸됩니다. 우리 붓다께서는 이 연기법을 깨달아 우주 삼라만상을 꿰뚫어 보십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잡아함경, 30335, 제일의공경).”

앗사지의 말이 끝나는 순간 사리풋타는 지혜의 눈이 열려 깨달음 얻었다. 모든 일어난 것(發生)은 모두가 사라진다(消滅)고 하는 연기(緣起)의 법칙을 깨달은 것이다.

사리풋타는 앗사지와 헤어져 목갈라나가 있는 곳으로 갔다. 목갈라나는 사리불이 오는 것을 보고 물었다.

벗이여, 그대는 오늘따라 얼굴이 고요하고 엄숙하며, 깨끗하고 밝습니다. 벗이여, 그대는 혹시 불사(不死)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 아닙니까?

벗이여, 나는 깨침을 얻었습니다.”

벗이여, 어떻게 깨침을 얻었습니까?”

그러자 사리풋타는 목갈라나에게 앗사지를 만난 이야기를 해주었다. 목갈라나도 사리풋타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지혜의 눈이 열려 청정한 깨달음을 얻게 됐다. 그 역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사라진다는 연기의 법칙을 깨닫게 된 것이다.

사리풋타는 목갈라나와 더불어 산자야를 작별하고 길을 떠나는데, 이때 이들을 따르던 제자 200명도 모두 두 사람을 따라 붓다의 가르침을 받겠다고 나섰다. 이에 충격을 받은 산자야는 피를 토하며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사리풋타와 목건련은 부처님께 귀의해 부처님의 오른팔ㆍ왼팔의 역할을 하게 된다.

특히 사리풋타는 부처님의 제자 다섯 비구중 막내인 앗사지(Assaji) 비구의 늠름한 모습에 매료된 것이 인연이 돼 앗사지의 인도로 불교에 귀의하게 됐는데, 그는 평생을 두고 부처님께로 인도해준 앗사지에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앗사지가 있는 쪽을 향해 머리를 두고 잠을 잤다고 한다.

아래는 잡아함경 제12299경에 나오는 <연기법경(緣起法經)> 일부다.

이 때 어떤 비구가 고타마 붓다가 있는 곳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그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물러나 앉아서 고타마 붓다에게 물었다.

세존이시여, 이른바 연기법(緣起法)은 당신께서 만든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깨달은 이가 만든 것입니까?” 붓다는 이 비구에게 답하였다.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요, 또한 다른 깨달은 이가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연기법은 다른 여래들이 세상에 출현하거나 세상에 출현하지 않거나 항상 법계(法界)에 존재한다.

나의 경우에는 12연기설의 형태로 이 우주 법칙을 분별해 연설하고 드러내어 보이는데,

나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고 말하고,

무명(無明)을 인연해 행()이 있고 ……(내지)…… 완전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5]가 발생하며, 무명이 소멸하기 때문에 행이 소멸하고 ……(내지)…… 완전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5]가 소멸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내용 ― 연기법이다. 붓다가 왜 인연법을 깨달음의 실체라고 말씀하셨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붓다의 깨달음②---붓다의 깨달음은 사성제(四聖諦)를 말한다. 붓다는 과연 무엇을 깨달았을까. 우리는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 말한다. 또한 불교는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깨달음을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왔다. 그렇다면 깨달음이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이 분명할 때 올바른 실천에 전념할 수 있다. 물론 깨달음의 문제를 놓고서 입으로만 왈가왈부하는 태도는 지양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이 무엇인지조차 모른다면 바른 실천이란 아예 존재할 수 없다.

붓다는 스스로의 깨달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점진적 과정으로 언급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완전한 지혜(anna)의 성취가 단번에 이루어진다고 말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그와 반대로 점차적으로 배우고 점차적으로 실천하고 점차적으로 발전하여 완전한 지혜의 성취가 있게 된다.”

이와 같이 붓다는 점차적으로 무르익는 깨달음을 가르쳤다. 이러한 가르침은 우리에게 깨달음에 관한 경직된 태도들로부터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상상을 초월하는 극단적인 고행이라든가, 전문적인 요가수행을 하지 않더라도 깨달음에 접근할 수 있다는 희망을 지녀야 한다. 우리는 일상의 삶과 더불어 깨달음에 관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깨달음의 내용은 과연 어떠할까. 초기경전에서 중도(中道)를 깨달았다고도 하고, 연기(緣起) 혹은 사성제(四聖諦)를 언급하기도 한다. 이들은 다소 전문적인 용어들로서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다지 어려운 내용이 아니며 또한 서로 중복되는 특성을 지닌다. 예컨대 중도란 바른 견해(正見)ㆍ바른 의향(正思惟)ㆍ바른 언어(正語)ㆍ바른 행위(正業)ㆍ바른 삶(正命)ㆍ바른 노력(正精進)ㆍ바른 마음지킴(正念)ㆍ바른 삼매(正定)로 구성된 팔정도(八正道)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팔정도는 사성제의 마지막 항목인 도성제(道聖諦)의 실제 내용을 구성한다. 한편 모든 현상이 서로 의존해 발생하고 소멸한다는 연기의 교설 또한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 과정을 밝히는 것에 다름이 아니며, 결국 사성제의 집성제(集聖諦)와 멸성제(滅聖諦)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전법륜경>에는 이러한 사성제에 대해 12차례에 걸쳐 반복적으로 깨달음을 심화해 나가는 양상(삼전십이행상/三轉十二行相)이 묘사된다. 예컨대 모든 존재가 괴로움에 노출돼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해했고(苦聖諦), 그것의 원인인 갈망을 끊었으며(集聖諦), 그렇게 해서 소멸된 경지를 실현했고(滅聖諦), 거기에 이르는 길은 닦았다(道聖諦)는 네 과정이 세 차례씩 반복적으로 언급된다. 이것은 붓다의 깨달음이 일회적으로 단박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또한 해당 경전에서는 바로 그러한 과정을 걸친 연후에 비로소 위없는 바른 깨달음(anuttaram sammasambodhi)’을 선언했다는 언급도 나타난다.

초기경전에서 위없는 바른 깨달음(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혹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는 주로 사성제와 관련해서 등장한다. 이점은 불교의 궁극 목적이 다름 아닌 사성제의 깨달음과 실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불어 우리는 이러한 사성제가 반드시 점진적인 과정으로 묘사된다는 점에 다시 한 번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 초기불교의 여러 경전에서는 사성제를 사다리에 오르는 과정 혹은 계단에 오르는 과정에 비유한다. 그리하여 괴로움의 현실을 밝히는 고성제로부터 시작해서 차례대로 하나씩 깨달아 나갈 것을 가르친다.

불교라는 종교에서 깨달음이란 최고의 과제이며, 그 구체적 내용은 다름 아닌 사성제이다. , 모든 존재가 괴로움에 종속돼있다는 것, 괴로움의 원인은 탐욕이라는 것, 괴로움은 극복될 수 있다는 것, 괴로움을 극복하는 길은 존재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렇듯 깨달음이란 현실과 유리된 고립무원의 초월적 경지가 아니며, 단박에 성취하고 나면 그것으로 그만인 그 무엇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이 순간부터 실현해 나갈 수 있는 것이며, 또한 탐욕과 집착이 남아있는 한에서 끊임없는 반성과 닦음을 요구하는 그러한 과제이다. - 임승택

 

 

*붓다의 깨달음③---붓다의 깨달음은 바로 사성제(四聖諦)이다. “붓다의 정각은 무엇인가라고 했을 때, 혹자는 연기라고 하고, 무상ㆍ고ㆍ무아라고도 하고, 팔정도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사성제라고 하고, 심지어 윤회라고 하는 사람… 등 의견이 구구하다.

이에 대해 "붓다의 깨달음은 바로 사성제(四聖諦)"라는 것이다(권오민). “사성제를 체험적으로 아는 것이 곧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불교의 가장 중요한 문제이면서도 논의의 핵심에 서지 못했던 것이 깨달음과 수행의 문제였다. 불교가 깨달음을 추구하는 가르침이라면 이 문제에 대한 바른 인식이야말로 불교수행에 아주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동안 이 문제를 논하지 않고 침묵속에 덮어두었던 것이 사실이다.

다음은, 이 문제에 대해 김재성 님의 글을 중심으로 간추린 내용이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깨달음이라는 말에 가장 가까운 말은 빠알리어와 산스크리트어 보디(菩提, bodhi)이다. 보디라는 말은 알다라는 의미의 budh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여성명사이다. 붓다의 깨달음은 완전한 깨달음(sammaa-sambhodhi) 혹은 최상의 바른 깨달음인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anuttara-sammaasambodhi)이다. 여기서 깨달음(bodhi)의 의미를 경전을 통해 살펴보고, 그 과정에 이르는 수행을 정리해본다.

먼저 깨달음에 대한 초기경전의 내용 몇 가지를 살펴본다.

비구들이여, 이 네 가지 고귀한 진리[사성재(四聖諦)]에 대해 있는 그대로의 앎과 봄(如實知見)’이 나에게 아주 분명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천신, 마라(), 범천(梵天), 사문과 바라문, 인간, 천인(天人)의 세계에서, 위없는 완전한 깨달음[無上正等覺]을 깨달았다고 공언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비구들이여, 이 네 가지 고귀한 진리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의 앎과 봄이 나에게 아주 분명하게 됐기 때문에, 나는 천신(天神), 마라(), 범천(梵天), 사문과 바라문, 인간, 천인(天人)의 세계에서, 위없는 완전한 깨달음을 깨달았다고 나는 공언했다(여래의 말씀-SN V, 422-3).”

심오하며,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고요하며, 수승하며, 단순한 논리적 사유로는 얻을 수 없는, 현자들에 의해서 이해되는 이 법을 나는 증득했다. 하지만 세간 사람들은 감각적 욕망에 머물러 감각적 욕망에 집착하고, 감각적 욕망을 즐기고 있다. 감각적 욕망에 머물러 감각적 욕망에 집착하고 감각적 욕망을 즐기고 있는 이러한 세간 사람들은 이 법, 이것을 조건으로 하고 있음(此緣性)’ ‘조건에 의존된 발생(緣起)의 법을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이 법, 즉 모든 지음()의 소멸, 모든 윤회의 뿌리(upadhi)를 끊어버리는 것, 갈애(渴愛)의 소멸, 이욕(離欲), (), 열반을 이해하기 어렵다(성스러움을 찾아서-聖求經-MN I, 167-168).”

비구들이여, 청정한 범행(梵行)의 목적은 재물, 명예, 명성을 얻는 것이 아니며, (), (), ()를 얻는 것이 아니다. 비구들이여, 흔들림이 없는 마음의 자유[부동의 심해탈]가 청정한 범행의 목적이며, 핵심이며, 궁극의 도달점이다(핵심의 비유라는 큰 경-心材喩大經-MA I, 197).”

이 외에도 깨달음에 대해서는 많은 설명이 있지만, 핵심적인 내용은 네 가지 고귀한 진리(四聖諦)에 대한 체험적인 이해가 곧 붓다의 깨달음의 내용이며, 제자들에게 지도한 가르침임을 알 수 있다. 네 가지 고귀한 진리에 대해 있는 그대로의 앎과 봄(如實知見)’이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이었다. 오로지 부처님의 관심사는 괴로움의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그 해결에 있었고, 스스로 이룬 그 깨달음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어 제자들이 자신의 노력으로 그러한 깨달음에 도달하도록 했다. 이러한 사실이 말하듯, 초기불교에서 사성제가 지니는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팔정도 수행해서 탐ㆍ진ㆍ치를 제거해야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 항상 깨어있는 마음으로 계ㆍ정ㆍ혜 삼학을 실천해야 한다.

깨달음의 포괄적인 내용이 네 가지 고귀한 진리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앎과 봄(如實知見)이라면, 그 깨달음에 이르는 길, 즉 수행법은 사성제의 네 번 째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苦滅道)일 수밖에 없다.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은 팔정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 고귀한 여덟 갈래의 길(八支聖道=八正道)이 여래(如來)가 발견한, 보는 눈을 주고, 앎을 주는, 평온에 이르게 하고, 뛰어난 앎을 얻게 하며, 깨달음을 이루게 하고, 열반을 얻게 하는 중도이다(전법륜경-SN V, 42).”

이 길은 괴로움이 없고, 피해를 받지 않고, 번거로움이 없고, 실의에 빠지지 않는 올바른 길이다(무쟁분별경-MN III, 231).”

지견(知見)을 청정하게 하기 위한 다른 길은 없다. 그대들은 이 길을 따라라. 이 길이야말로 악마를 어지럽힐 것이다. 그대들이 이 길을 가면 괴로움의 화살을 빼게 되리라. 나는 괴로움의 화살을 뺄 줄 알고, 그대들에게 이 길을 설한 것이다. 그대들은 부지런히 정진하라. 여래들은 길을 설해주는 사람일 뿐, 마음을 집중해서 길을 가는 사람은 악마의 속박에서 벗어나리라(법구경-274-276).”

깨달음은 정확한 현실 인식과 그 해결법을 이룬 상태이다. , 괴로움을 완전히 이해하고, 그 원인을 제거하는 길을 따라서 괴로움의 소멸을 직접 체험한 내적인 사건이다. 깨달음은 따라서 흔들림 없는 마음의 자유(不動心解脫)’라고도 한다. 깨달음을 이루면, 탐ㆍ진ㆍ치라는 근본번뇌가 완전히 사라진다. 이 경지에 도달한 이를 초기경전에서 아라한(阿羅漢/Arahan)이라 했다. 부처님도 아라한이었으며, 제자들도 아라한이 되는 것을 최상의 목적으로 부처님의 제자가 돼 수행했다. 부처님 당시 수많은 제자들이 법을 듣고 수행을 해 탐ㆍ진ㆍ치가 완전히 소멸한 깨달음에 도달해 아라한이 됐다.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현재 우리에게도 가능한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초기경전에 나타난 아라한들은 빠르면, 법을 듣고 수행한 바로 그 날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하기도 했고, 7, 15일 동안 정진해 아라한의 깨달음에 이른 경우가 많이 있었다. 이러한 선례가 있으므로 수행 정진의 강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타고난 소실이나 능력이 좌우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깨달음은 수행의 조건이 충족될 때 자연스럽게 펼쳐진다고 한다. 그리고 수행자들은 언제 그 순간이 경험될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깨어있는 마음으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살피라고 한다. 실제로 깨달음의 내용이 탐ㆍ진ㆍ치라는 근본적인 번뇌의 소멸이라면, 수행이란 바로 이러한 탐ㆍ진ㆍ치를 덜어내는 작업일 뿐이다. 실제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 팔정도는 계ㆍ정ㆍ혜(戒定慧)라는 세 가지 수행(三學)으로 분류되며, 이 수행은 다름 아닌 몸과 입과 마음(身口意)에서 일어나는 탐ㆍ진ㆍ치라는 번뇌를 제거하는 일일 뿐이다. 이렇게 깨달음과 수행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몸과 입과 마음으로 끊임없이 탐ㆍ진ㆍ치를 제거하는 계ㆍ정ㆍ혜 삼학의 수행을 언제나 실천하는 길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몸과 입으로 하는 행위를 조심하고(正語, 正業, 正命), 내 마음에서 생겨나는 탐ㆍ진ㆍ치의 번뇌와 좋은 법을 놓치지 않고 열심히(正精進) 마음챙겨 알아차리고(正念), 마음을 집중(正定)하는 것이 바로 이 번뇌들을 끊어내고 좋은 법을 더욱 닦아내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 정확하게 집중해 알아차려진 번뇌는 지혜(正見)의 칼에 의해 잘려지고, 좋은 법은 더욱 향상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팔정도를 실천하는 것이며, 이렇게 이 길을 따라간다면, 부처님이 보증한 괴로움의 소멸, 번뇌의 소멸, 흔들림 없는 해탈이라는 궁극의 깨달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수행도 지금 여기 깨어있는 마음으로 하는 일이며, 그 결과인 깨달음도 바로 이 삶에서 체험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경전에서 말하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체험되는 법(dhamma)이다.

 

 

*붓다의 깨달음④---붓다는 중도(中道)를 깨달았다. 그렇다면 붓다가 말한 깨달음이란?

우리가 현실에서는 욕구와 마주치면 대개 따라가든지 참든지, 두 가지의 길밖에 생각하지 못한다. 가령 명상을 하다가 다리가 아프면 다리를 펴든지 참든지 둘 중 하나를 한다.

그런데 알아차림이라는 것은 그렇게 다리에 통증이 생길 때 다리에 통증이 있구나하고 통증을 느끼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통증이 싫다고 다리를 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통증을 억제하지도 않는다. 물론 현실에서는 잘 안 된다. 그래서 연습이 필요하다. 이렇게 욕구에 끌려가지도 않고 욕구를 참지도 않는 제3의 길이 중도(中道)’.

욕구를 따라가는 쾌락주의도 아니고, 욕구를 억제하는 고행주의도 아닌, 이 새로운 길이 부처님께서 발견하신 중도.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제자들에게 하신 첫 번째 말씀도 수행자는 쾌락의 길을 가도 안 되고, 고행의 길을 가도 안 된다. 양 극단을 버리고 중도의 길을 가라고 하셨다.

 

 

*붓다의 네 가지 대답 방법[사기답(四記答)]---붓다는 상대와 토론이나 또는 상대방의 질문에 대해 왜 그런가, 왜 그렇게 생각되는가 하고 차례차례로 그 근거를 따지고 논리를 추구해 가서 상대로 하여금 스스로 자기의 모순을 깨닫게 하는 방법을 쓰셨다. 따라서 붓다는 다른 사람의 질문에 대해 네 가지 방법으로 대답했다고 한다. 이것을 한문으로 사기답(四記答)’이라 번역했다.

① 일향기(一向記, ekamsavyakarana) ― 결정답(決定答)이라고도 했다. 질문이 이치에 맞고 도리에 맞을 경우 주저함이 없이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을 말한다.

② 분별기(分別記, vibhajya vyakarana) ― 해의답(解義答)이라고도 했다. 질문 내용이 일부는 이치나 도리에 맞고 일부는 바르지 못할 때 그것들을 구별해 가면서 조건적으로 답변을 주는 것을 말한다.

③ 반문기(反問記, pariprccha vyakarana) ― 반힐기(反詰記)라고도 했다. 질문의 뜻을 되묻는 것, 즉 반문에 의해 질문의 뜻을 확인한 다음에 대답을 하는 것을 말한다.

④ 사치기(捨置記, sthapaniya vyakarana) ― 치답(置答)이라고도 했다. 질문에 대해 대답하지 않는 것이다. 이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질문이 유치해서 대답할 만한 가치가 없을 때와 하나는 질문이 이치나 도리에 벗어나 있어서 대답할 것이 못되는 경우이다. 후자는 수행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형이상학적인 질문인 경우로서, 십무기(十無記)로 널리 알려져 있다. - 실론섬

 

 

*붓다의 스승---부처님의 스승참조.

 

*붓다의 유훈(遺訓)---붓다의 유훈에 대해서는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등 경전 여러 곳에 나타나 있다. 그런데 붓다의 마지막 가르침은 어떠했을까. 그는 스스로의 임종을 어떻게 받아들였고 또한 어떤 자세로 임했을까. 우리는 붓다의 마지막 모습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으며, 그가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수행을 해야 할까. 붓다의 최후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붓다의 마지막 모습부터 보자. 다음은 <대반열반경(디가 니까야16)>을 축약한 내용이다.

「벨루와가마(Veluvagama)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이제 그대들은 도반을 따르거나 지인을 따르거나 후원자를 따라서 웨살리 전역으로 흩어져서 안거를 하여라. 나는 여기 이 벨루와가마에서 안거를 할 것이다.”

그런데 세존께서는 벨루와가마에서 안거를 하시는 도중에 혹독한 병에 걸려서 극심한 고통이 생기셨다. 세존께서는 마음챙기고 알아차리시면서 흔들림 없이 그것을 감내하셨다. 그때 세존께 이런 생각이 드셨다. “내가 신도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비구 승가에게 알리지도 않고 반열반에 드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이 병을 정진으로 다스리고 생명의 상카라(sankhara-)를 굳세게 하여 머무르리라.” 그리고 세존께서는 그 병을 정진으로 다스리고 생명의 상카라를 굳세게 하여 머무셨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그 병을 가라앉히셨다.

세존께서 병이 나으시자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서 인내하시는 모습을 보고, 세존께서는 비구 승가를 두고 아무런 분부도 없으신 채로 반열반에 들지는 않으실 것이라 안심했습니다.”

아난다여, 그런데 비구 승가는 나에 대해서 무엇을 [] 바라는가? 아난다여, 나는 안과 밖이 없이 법을 설하였다(즉 법을 남김없이 드러내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법을 설하셨다는 말). 아난다여, 여래가 가르침에 아무것도 숨긴 것이 따로 없다.

아난다여, 그러므로 여기서 그대들은 자신을 섬으로 삼고[자등멸(自燈明)],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자귀의(自歸依)] 머물고, 남을 의지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법으로 섬을 삼고[법등명(法燈明)], 법을 귀의처로 삼아[법귀의(法歸依)]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셨다.

붓다의 열반은 그가 가르친 무상(無常)의 진리처럼 육신의 덧없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참된 진리란 결코 단절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우기도 했다. 우리는 이천오백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대반열반경>3개월에 걸친 붓다의 마지막 행적을 소상하게 전하고 있다. 벨루와가마에서 위중한 병에 걸려 고통을 겪던 붓다는 비구 승가에게 알리지도 않고 반열반에 드는 것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마음지킴()과 알아차림()으로 동요 없이 머물면서 견디어 냈다고 한다. 그때 붓다는 아난에게 말했다.

나는 안과 밖이 없이 가르침을 설했다. 여래의 가르침에는 비밀스러운 것이 없다.”라고, 따라서 비구들이여, 자등명(自燈明)하고, 법등명(法燈明)하라. 그대들이여, 내가 더 이상 이 땅에 머무는 것은 그대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측면이 있음을 나는 안다. 그대들이 나에게 의지함으로 인해 그대들의 마음이 밖을 향하기 때문이다. 깨달음과 나는 그대들의 자신 속에만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육신이 이곳에 있고 없음이 그대들의 깨달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자등명(自燈明)하고, 법등명(法燈明)하는 자는 내 가까이 있는 자이고, 그러하지 못한 자는 나에게서 멀리 있는 자이니라.

그리고 다음과 같은 자상한 말씀도 하셨다.

아난다여, 아마 그대들은 스승의 가르침은 이제 끝나버렸다. 이제 스승은 계시지 않는다는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난다여, 그대들은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아난다여, 내가 입멸한 후에 내가 지금까지 너희들에게 설하고 천명한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② 비구들은 서로 도반(avauso/아부소-그대, 벗이여)이라는 말로 불렀던 것을 이후에는 장로비구가 신참 비구를 부를 때는 이름이나 성 또는 도반(그대, 벗이여)이라고 불러도 좋지만, 신참 비구가 장로비구를 부를 때는 존자(bhante/반떼) 또는 장로(아야스마/aysma-대덕/大德, 구수자/具壽者)라고 불러야 한다.

③ 필요하면 사소한 계(小小戒)는 비구모임에서 상의해 폐지해도 좋다. (여기에 대해서 어떠한 것이 소소계(小小戒) 속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좀 더 질문을 해서 명쾌하게 하지 않았다고 해 아난다 존자는 훗날 비난을 받게 되며, 이후 불교는 소소계에 대한 논쟁으로 분파와 혼란을 겪기도 한다.

④ 찬나(Channa) 비구에게 최고의 처벌[브라흐마-단다(brahma-danda, 梵壇罰)를 내리라 하셨다.---찬나(Channa) 비구참조.

⑤ 모인 비구들에게 마지막으로 의문점이 있으면 질문하라고 했으나 모두다 침묵으로 일관했다. 즉 의문점이 없다는 것이다. 이에 붓다는 500여명의 비구들 모두가 예류자이니 나쁜 세계에 떨어지지 않고 바른 법을 가지고 해탈이 확실하며 정등각으로 나아가는 자들이라고 격려와 칭찬을 하셨다.

비구들이여, 참으로 이제 그대들에게 당부하노니 형성된 것들은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 방일하지 말고 열심히 정진해서 너희들의 수행을 완성하라.” 이것이 여래께서 남기신 최후의 말씀이었다.

 

 

*붓다의 입멸---붓다는 벨루와가마에서 위중한 병에 걸려 고통을 겪고, 일어난 후, 붓다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훈을 남기고, 곧바로 선정(禪定)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초선정(初禪定)에 들고, 초선정에서 일어나 제2선정에 들고, 다시 제3선정을 거쳐 제4선정으로 명상을 높여 갔다. 그리고 제4선정에서 일어나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으로, 공무변처정에서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으로, 식무변처정에서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으로, 무소유처정에서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으로, 비상비비상처정에서 상수멸정(想受滅定)에 들어갔다.

이때 아난다 존자는 아누룻다(Anuruddha, 阿那律) 존자에게 붓다께서 벌써 입멸하셨는지 물었다. 그러자 아누룻다 존자는 붓다께서 입멸하신 것이 아니라 상수멸정에 드신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붓다께서는 반대로 상수멸정에 잠시 머문 다음, 비상비비상처정에 들고, 무소유처정, 식무변처정, 공무변처정, 4선정, 3선정, 2선정, 초선정에 이르렀다. 그리고 다시 초선정에서 제2선정으로, 2선정에서 제3선정으로, 3선정에서 제4선정으로 들어갔다. 4선정에서 나오자 곧 입멸하셨다.

붓다께서 입멸하시자 대지는 크게 진동하고 천둥이 울렸다. 그 모습은 매우 두려워 털끝이 곤두설 정도였다. 그때 범천 사함빠띠(Brahma Sahampati)가 게송을 읊었다.

이 세상에서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은

마침내 육신을 버리게 되리라.

마치 세상에서 비할 바가 없는 사람,

이와 같은 스승, 힘을 갖춘 수행실천자,

정각(正覺)을 얻은 그 분이 사라지듯이.

 

또한 신들의 왕인 삭까(Sakka, 帝釋天)도 게송을 읊다.

아아! 모든 현상은 무상하다.

생멸의 성질로 이루어진 것은 생하고 멸한다.

이것들의 진정이 평온이다.

아누룻다 존자와 아난다 존자도, 신들에게 화답하여 각각 게송을 읊었다. 그런데 아직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한 비구들은 스승이 너무나도 빨리 세상을 떠난 것을 보고 슬퍼하며 울부짖었다. 그러나 이미 탐욕을 떠난 비구들은 정념(正念), 정지(正智)하고 슬픔을 견디며 모든 것은 무상하다. 어떻게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붓다의 출가---출가하기 전의 고타마 붓다는 늙음과 병듦과 죽음이라는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찾고자 결심하며, 젊음, 건강, 수명에 대한 도취를 버리고, 스물아홉 살이 되었을 때, 아내와 아들, 아버지 그리고 권력과 세속적인 영화가 약속되어 있는 왕좌를 모두 떨쳐버리고 선(, kusala)을 구하기 위해서 출가를 한다. ()이란 최상의 행복, 안온, 괴로움의 소멸인 열반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고타마 붓다는 죽음이라는 한계 상황에 대한 극복을 최대과제로 생각했으며, 출가한지 6년이 되던 35세 나이에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면서 그 문제를 해결했다고 선언하였다. 즉 죽음을 포함한 모든 괴로움을 극복한 것이다.

 

*붓다(佛陀, Buddha)의 특징---붓다는 어떤 분이었는가. 신격 아미타불처럼 신적 존재였던가. 신통을 부려 악을 물리치던 전지전능한 분이었던가. 아니면 추종자들과 더불어 탁발을 하고, 허리가 아프다면서 좀 누워서 쉬어야 하겠다고 하시던 평범한 자연인이었던가. 불교에서 말하는 붓다는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신과는 그 개념이 전혀 다르다.

• 붓다는 천지창조의 절대자가 아니다. 그는 평범한 자연인의 한 사람일 뿐이다.

• 붓다는 최고 유일한 존재도 아니다. 그는 많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다.

• 붓다는 신적(神的) 속성을 지녔다든지 구제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든지 하는 그런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평범한 자연인의 한 사람일 뿐이다.

교리적으로 말하는 붓다는 초역사적 존재로 생로병사도 없고 깨달음의 극적인 순간도 없다. 그러나 불교가 역사에서 벗어나면 신학화(神學化) 된 불교에 지나지 않으며, 신학화 된 불교에서 승려는 붓다의 뒤를 잇는 수행자가 아니라 사제로 전락하고 만다. 붓다에 대한 신학적 접근은 신앙심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나 불교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이르는 길은 아니다. 한국 불교에는 역사적 의미가 빠지고 신격화된 붓다만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이 땅의 불자들은 역사적 존재로서 붓다가 가르친 삶의 방식을 체험을 통해 자기화하기보다 신격화하고 초인적인 붓다를 믿고 의지하려는 모습을 보여 왔다. 역사적 존재인 붓다를 인간적인 측면에서 사실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올바른 신심을 세우는 길이다.” - 성열 스님

• 인간에게 절대 타자(絶對他者)’도 아니다. 다소 뛰어난 자연인의 한 사람일 따름이다. 붓다 자신도 상대주의를 지향했다. 연기론(緣起論)이 상대주의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다.

• 붓다는 결코 윤회(輪廻)를 말하지 않았다. 윤회는 당시 인도에 보편화된 상식이었고, 후세 불교인들이 그것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리고 열반(涅槃)도 타생(他生)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해탈(解脫)을 의미했고, 해탈은 해방과 자유의 개념을 나타낸 말이다.

• 붓다는 리얼리스트(realist)였다. 붓다는 그의 가르침을 현실적으로 증명되는 것,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 붓다 가르침은 천상의 일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지상의 문제, 내세의 운명에 관한 것이 아니라 현실의 인간 문제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붓다는 결코 신비주의를 용납하지 않았다.

• 붓다는 휴머니스트(humanist)였다. 불교는 인간을 중심으로 하고 인간에 초점을 둔 신() 없는 종교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신격화를 거부했다. , 그에게 예배하고자 하는 것을 거부하고, 나를 보려고 하지 말고 법을 보라고 했다. 붓다는 사람이지 신의 아들이 아니며, 신과 인간의 중재자이거나 속죄자도 아니다. 더구나 신판자도 신도 더욱 아니다. 붓다는 어디까지나 선각자이고, 지도자일 뿐이다. - ‘마스타니 후미오지음 <불교개론>에서 발췌.

• 붓다는 평화ㆍ평등주의자였다. “2,500년전 카스트 제도가 엄격한 불평등 계급사회였던 인도에서 만인의 평등을 주장한 붓다의 평등사상은 오늘날은 상식이지만 당시는 상식이 아니었다. 붓다는 인간을 고정된 인격이 아니라 환경 속에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만들어지는 존재로 봤다.

붓다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려면 그가 살았던 정치, 경제, 사회가 어떤 변동기에 있었으며, 붓다가 어떤 사람들과 교유했는지 알아야 한다. 붓다는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가 그리스와 마라톤 전쟁을 벌였던 시기에 살았으며, 붓다는 출가하기 전 서역출신의 스승으로부터 통치자로서의 교육을 받아 국제정세를 비롯한 세상사에 매우 밝았으며 이는 경전에 잘 나타나 있다. 붓다는 웨란자 지역에 안거하면서 서역의 말 장수들도 만났다. 그런 점에서 붓다는 페르시아는 물론 아라비아나 이집트, 지중해 및 에게해 동쪽 해안지방인 레반트에 이르기까지 국제 정세에 상당히 밝았다.“ - 성열 스님

흔히 사람들은 붓다는 인간평등과 계급을 타파한 혁명가처럼 묘사한다. 그리고 여성들에게 출가를 허용했다고 하면서 남녀 간의 불평등을 혁파한 것처럼 호도한다. 하지만 이건 크게 잘못된 견해이다.

붓다는 결코 무정부주의자도 아니었으며 계급타파를 주장했던 사람도 아니었다. 또한 현실세계를 무시하거나 법질서나 사회체계를 무너뜨리려는 혁명가도 아니었다. 그는 다만 승가 내에서는 출신성분 구분 없이 평등을 실현했다. 하지만 결코 사회 전체적으로 계급을 타파하고자 했던 혁명가는 아니었다. 오히려 왕권을 인정했다.

그리고 중생들의 세간사를 절대로 간과하거나 무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세간사를 그대로 둔 채 조화롭고 평화로운 인간사를 추구했다. 붓다의 가르침은 오직 여기 현재 이곳에서 살아가는 중생(인간)들을 위한 법문이었다. 중생들이 모두 다 서로서로 자비를 베풀고 보시를 하며 평화롭고 안락하고 편안하게 사는 사회를 이루기를 염원했다. 훗날 대승불교에서는 이를 불국토 불국정토라고 표현했지만 붓다는 사회의 각 계층들이 조화롭게 살기를 원했다. 그 방법으로 그는 오계(五戒)를 세웠으며 또한 비폭력을 주장했다. 우리 사회가 오계만 제대로 지켜지고 폭력만 사라져도 사회계급과 상관없이 얼마나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는 굳이 두 말할 필요가 없다.

• 붓다의 특징으로 상주성을 들 수 있다. <열반경>여래상주무유변역(如來常住無有變易)”이라 했다. 여래(如來)란 진리 그대로 조금도 보탬도 없고 조금도 흠이 없는 진리 그대로를 깨달은 성자를 말한다. 그리고 상주(常住)라 그런 부처님은 항시 계시고 무유변역(無有變易)이라, 조금도 변함이 없이 있다는 말이다. 조금도 변함없는 자세로 영원히 상주한다는 말이다. 중생들은 현상적(現象的)인 자기 인식능력의 한계, 그 밖에는 모른다. 인식하지 못한다. 내가 있으면 남이 있고 또는 좋은 것이 있으면 나쁜 것도 있고 그러한 현상적(現象的) 상대적인 것밖에는 모른다는 말이다. 이른바 시간, 공간의 그런 범주 내에 것만 우리 중생들은 알 뿐이다.

그러나 성자들은 근원적이고 근본적인 그런 도리를 훤히 아신다. 그 게 성자와 중생의 차이이다. 이러한 성자의 특징은 상주성이다. 2600년 전의 부처님이 지금도 우리 마음속에 살아계신다. 이게 범부에게는 없는 성자의 상주성이다. 붓다의 특징이다.

붓다의 특징은 위와 같다.

따라서 위와 같지 않게 서술된 것은 진실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삼신불(三身佛)사상과 정토(淨土)사상을 비롯한 대승불교의, 붓다 당시에 비해 확장된 교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 초심자들에겐 큰 과제가 아닐 수 없다.

• 붓다는 스승(導師)일 따름이다. <숫따니빠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훌륭한 말씀이십니다, 고타마시여. 훌륭한 말씀이십니다, 고타마시여. 마치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주듯이, 덮인 것을 벗겨 주듯이, 길 잃은 자에게 길을 가리켜 주듯이, ‘혹은 눈이 있는 사람들은 빛을 볼 것이다하고 어둔 밤에 등불을 비춰 주듯이

위의 비유들,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주듯이” “덮인 것을 벗겨 주듯이” “길 잃은 자에게 길을 가리켜 주듯이” “어둔 밤에 등불을 비춰주듯이가 의미하는 바는 모두 스승으로서의 붓다이다. 붓다는 사람들을 직접 구제해 주는 신도 아니고 신적 존재도 아니다. 붓다는 길을 가리키는 안내자요, 병을 처방하는 의사며 중생을 가르치는 스승일 뿐이다.

그는 스스로 깨닫고 증명하여 천신과 악마를 포함한 이 세계와 사문, 바라문, 인간을 포함하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가르침을 베푼다. 붓다는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마지막도 좋고, 말과 뜻이 잘 갖추어진 가르침을 설한다.

• 붓다의 신격화---역사적인 인물로서 석가모니 붓다는 위대한 스승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에게 차츰 초인적(超人的)인 성격이 부여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은 같은 초기불교경전이라도 후기로 갈수록 그러한 성격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석가모니 붓다의 초인화는 지적ㆍ도덕적 그리고 신체적 모든 부분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것이 결국 그를 인간을 뛰어 넘은 존재, 신성(神性)을 가진 어떤 존재로 비춰지게 됐다.

초기불교경전 가운데 이러한 경향의 진행은 궁극적으로 화현설(化現說)로 마무리됐다. 결국 후기 불교 종파에 있어 이러한 화현설의 최종적인 전개는 형이상학적인 붓다 개념으로, 붓다를 이 세계의 궁극적인 실재로 본 것이다. , 붓다로 예정된 단 하나의 보살만이 도솔천에서 세계의 모든 존재의 구제를 위해 머무르다 강림한다는 것으로 마치 오랫동안 준비되고 계획된 전 우주 역사의 특수한 임무나 사명을 띤 것으로 묘사되는 것이다. 그래서 단 한 보살만으로 예정된 성불은 같은 세계, 같은 시간에 다른 붓다들이 같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한정된 붓다 개념을 일국토 일불설(一國土 一佛說)’이라한다. 한 세상에 두 명의 아라한이며 정등각자(正等覺者)인 사람이 함께 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대승불교 <법화경(法華經)>에서 붓다는 지상에서 80평생의 삶으로 마감할 수 없는 존재로 선언하기에 이른다. 붓다는 결코 죽을 수 없는 존재로서 영원히 사는 생명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가 보여준 반열반은 단지 중생들을 이끌기 위한 방편(方便)으로의 화현(化現)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결국 붓다는 죽을 수 없는 영원한 존재로 간주된 것이다. 색신(色身)을 가지고 이 세상에 출현했던 석가불의 80 평생은 결국 가상(假想)의 존재였다는 말이다.

<법화경>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에 나타나 있는 구원실성(久遠實成) 사상은 바로 모든 붓다의 수명 또한 끝이 없다는 입장을 보여준다. <법화경>에서 말하는 영원한 불타관으로서 구원실성 또는 구원성불(久遠成佛)은 붓다는 아득한 옛날에 이미 성불해있다는 것이고, 이는 <법화경>의 중심사상의 하나로 역사적 붓다의 성불에 대비해 영원불멸의 불타론을 보여준다. 석가모니불은 누구나 볼 수 있는 색신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법신이 변화해 모습을 나타낸 것으로 본다. 다른 말로 바꾸면, 법신이 화현한 것이다. 그리하여 법신(法身)ㆍ보신(報身)ㆍ응신(應身) 또는 법신(法身)ㆍ응신(應身)ㆍ화신(化身)3신 또는 자성신(自性身 = 法身)ㆍ수용신(受用身)ㆍ변화신(變化身)이라고 하는 3신설이 성립돼 대승의 기본 불신론이 됐다. - 실론섬 ---부처란 - 부처님의 정체성’, ‘불교의 특징참조..

※절대타자(絶對他者)---인간이나 이 세계와는 절대적으로 다르며 독립된 초월적 존재자. 종교에 있어서, 신비적인 실재(實在)가 인간성을 초월해 인간과는 전혀 질적으로 다름을 표현하는 말이다.

※헌데 후세 불교에서는 붓다를 신격화해서 마치 절대자인 것처럼 추켜세우는 종파(정토종 등)나 불교인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붓다의 성격을 완전히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붓다의 평등사상---'불교의 평등사상' 참조.

 

 

*브라흐만(Brahman, )---브라만, 바라문이라고도 하며, 브라흐만(Brahman)은 우주의 진리 또는 우주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힌두교의 최상위 목표는 참된 나인 아트만(atman)우주의 진리인 브라흐만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카스트 제도의 가장 상위계층을 브라만이라고 칭한 것은 이들이 스스로 우주의 지혜를 구하는 것이 자신들의 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아트만이 개인의 진정한 자아(自我)를 뜻하는 개별적 ․ 인격적 최고원리인 반면에 브라흐만은 우주적 ․ 중성적인 원리이다. 한자로는 범()으로 음역된다.

브라만은 온 우주의 영적인 단 하나의 본질, 모든 것은 이 브라흐만에 의존하고 있다. (God)이라는 말로도 브라흐만을 표현할 수 없다. ()도 다만 브라흐만의 일부분만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브라흐만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을 비롯한 모든 물건들도 서로 얽혀 있다. 모두 내면적으로 연결돼 있으므로 서로 사랑과 동정과 친절로서 대해야 한다. 우주는 물질적, 정신적, 영적 요소를 다 갖추고 있다.

브라흐만은 원래 <리그베다>에서 찬미가(讚美歌) 또는 제사(祭詞)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브라만계급에 의해 제사만능(祭祀萬能)시대가 되자 브라흐만이 거기에 간직된 신비한 힘으로 간주됐다. 이후 창조신 창조물의 하나가 됐다가 결국 창조신과 동일시됐다.

그러다가 마침내 브라흐만은 우주 창조의 이법(理法)이 됐다. , 브라만교 교의에서 최고원리이고, 우주를 창조하고 일체를 지배하는 원동력이라 해서 세계의 근원적 창조원리로 봤으며, 우주 일체는 모두 브라흐만으로부터 발생한다고 했다.

이러한 만유(萬有)의 근원인 중성(中性)의 브라흐만()은 많은 사상가들의 사유대상이 됐다. 그런 후 브라흐만은 남성적인 인격신 브라흐마(Brahma=범천/梵天 神)로 인격화됐다. 이 신은 우주 최고신으로 일체를 창조 ․ 지배한다고 했다. 이것이 불교에 들어와서는 불교 수호신인 범천(梵天)이 됐다.

힌두교 역사에서 베다시대 말기인 AD 500~700년 사이에 우주의 궁극적인 실재인 브라흐만과 개인의 진정한 자아인 아트만이 하나라는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을 주창한 신비적 문헌인 <우파니샤드>가 집성됐다. 이후 우파니샤드 사상이 발전적으로 전개돼 힌두교 육파철학이 성립됐고, 우파니샤드의 범아일여 사상은 후대 힌두교철학과 종교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범아일여(梵我一如) 참조.

 

*브라만(Brahman, 婆羅門) 계급---카스트의 가장 높은 계층으로 주로 브라만교 성직자 계층을 일컫는다. 이들은 사상계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주술적(呪術的) 제사를 주관한다. 이러한 종교적 지도자로서 세습에 의해 지위를 부여받으며, 혈통을 중시한다.---→바라문 참조.

 

 

*브라만교(婆羅門敎, 바라문교/Brahmanism)---고대 인도에서 불교가 생겨나기 전에 <베다(Veda)> 성전에 의거해 브라만계급을 중심으로 발달한 종교를 말하는데, 특정한 개조가 없다.

BC 1,500년 무렵 인도아리아인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힌두쿠시산맥을 넘어 인더스강 유역 펀자브지방에 진입하고, 더욱 동쪽으로 진출, 도아브지방을 중심으로 브라만문화를 확립한 뒤, 브라만계급을 정점으로 하는 4계급으로 이루어진 4성제도(Caste)를 발달시켰다.

그들은 인도에 진입할 때 그들의 종교를 가지고 와서 발전시켰는데, 그때부터 BC 500년 무렵에 이르는 동안 <리그베다>를 비롯해 <브라흐마나><아라냐카(Āranyaka)>를 포함하는 방대한 근본성전 <베다>를 편찬했다. 그 내용은 복잡하고 다양해 자연신숭배, 종교의례, 주술은 물론, 높은 철학적 사변까지 담고 있다. 이 종교의 본질은 다신교이며, <리그베다>에서 발단한 우주 유일한 근본원리를 탐구하는 <우파니샤드>에서 그 정점에 이르렀다.

우주 유일의 근본원리로서 브라흐만(/brahman)과 개인 존재의 본체인 아트만(/ātman)이 상정됐으며, 결국 이 두 가지는 동일한 것이라고 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이 표명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힌두교는 BC 3세기 무렵부터 브라만교를 기반으로 해서 인도 토착적인 여러 요소를 흡수하면서 이룩됐는데, 이 힌두교와 구별하기 위해 서양학자들이 브라만교라 이름 붙인 것이다. 이처럼 브라만교는 힌두교의 기반을 이루고 있어서, 넓은 뜻으로 힌두교라고 하면 브라만교도 포함된다.

※아라냐카(āranyaka)---비밀의 제식이나 신비적 교의를 수록한 문헌으로, 마을에서 떨어진 삼림에서 전수되는 것으로 이 명칭은 삼림을 의미하는 말 〈아라냐(araṇya)〉에 유래한다.

※브라만교의 발전시기

1기 리그 베다 시대(B.C.1500-1000) 신화적인 우주관

2기 야쥬르 베다에서 브라흐마나 시대(B.C. 1000-800) 신지학적인 제의 중심

3기 우빠니샤드 시대(B.C.800-500) 자아 철학

4기 갠지스강의 하류로 그 중심이 이동한 시대 끄샤뜨리야 계급이 중심이 된 시대

 

 

*브라흐마(Brahma, 梵神, 梵天)---브라흐마(梵神 혹은 梵天)는 브라만교 주()신이며, 창조신이다. 힌두교에 있어서 비슈누(비쉬누), 시바(쉬바)와 함께 힌두교 세 주신(Trimurti, 三主神)이다. 만유(萬有)의 근원인 중성(中性) 브라만()이 후에 남성적인 브라흐마(Brahma=梵天 神)가 됐다. 이 신은 우주 최고신으로 일체를 창조 ․ 지배한다고 한다. 브라흐마신이 우주를 생성하고 비슈누신이 우주를 유지, 발전시키며 시바신이 우주를 소멸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도에서 그리 대중적인 신은 아니다. 브라흐마 신전은 전 인도를 통틀어 두 곳밖에 없다. 인도인들에게 어째서 브라흐마가 인기가 없는지를 물어보면 그들 말은 이렇다, 이미 창조가 끝났으므로 창조신으로서 역할이 현시대에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브라흐마는 4개의 팔과 4개 얼굴을 가지고 있는데, 그 각각 4개의 얼굴에서 4개의 베다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브라흐마가 불교에 받아들여져서 불교 수호신 범천(梵天)이 됐다. 따라서 불교에서 말하는 브라흐마는 다음의 두 가지 사례로 볼 수 있다.

첫째 브라흐마가 신을 나타낼 때는 색계 초선천의 세 가지 범천을 뜻한다. 즉 범중천(Brahma-pārisajjā)과 범보천(Brahma-purohitā)과 대범천(Mahā-brahmā)을 말한다. 아시다시피 색계는 삼매를 닦아서 태어나는 곳이기는 하지만 윤회하는 세상이지 범아일여(梵我一如)의 범()의 개념은 아니다. 범아일여는 힌두교 사상이다. 부처님께서는 인도전통의 브라흐마의 경지를 이처럼 색계 초선천의 경지로 간주하셨다.

두 번째로 보통명사로 쓰이는 경우이다. 이 경우엔 신성함, 거룩함, 고귀함, 최상, 위대함 등의 뜻이다. 이 경우는 대부분 합성어로 쓰이는데 우리에게 청정범행으로 알려진 brahma-cariya, 범천의 세상으로 옮기는 brahma-loka, 거룩한 마음가짐 혹은 사무량심으로 옮기는 brahma-vihaara 등이 있다. 이와 같이 브라흐마는 보통명사일 때 모두 예외 없이 신성함, 위대함, 거룩함, 완전함, 최고, 최상을 뜻하지 결코 힌두의 브라흐마나 범아일여의 브라흐마를 뜻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