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산 <불교 용어 해설, ㅇ ―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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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공(緣起空)---우주 공간에 연기를 벗어나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인드라망 생명공동체”이다. 학문도 세분화 돼 있을 뿐, 원리적으로는 하나로 연결돼 있다. 수행 방편 역시 많으나 원리적으로 보면 「견성(見性)」을 체득하고자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깨달음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로 연결돼 있어 이 또한 연기법을 벗어날 수는 없다. 만상이 연기로 관계성을 맺고 있기 때문에 연기공(緣起空)이라하며, 공(空)의 논리와 무아(無我)사상도 연기법에서 나오고, 불교의 모든 논리는 중(中道)사상으로 모아진다. 그래서 “연기를 보면 공(空)을 보고, 공을 보면 여래를 본다.”라고 붓다는 말씀하셨다.
즉, 모든 존재는 서로 주고받는 상호의존의 관계로 연기(緣起)돼 있기 때문에 그 성품이 공(空)하다. 이를 ‘연기공’이라 한다. 모든 존재는 서로 주고받으면서 잠시도 쉬지 않고 변하기(바뀐다) 때문에 그 성품이 공하다. 이를 ‘무상공(無常空)’이라 한다. 모든 것은 고정돼 있는 실체로 존재하지 않고 매 순간 바뀌고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모든 것은 항상 하지 않다.’라고 하며, ‘무상(無常)’이라고 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학설, 모든 물질 등 어느 것 하나 연기하지 않는 게 없고,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은 없다.
여기에 하나의 컵이 있다고 하자. 우리들의 눈에는 어제도 오늘도 똑같은 모양으로 보이겠지만, 물리적으로는 약간의 화학 반응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매 순간 미세하게나마 변하고 있다. 다만,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 고정불변은 아니다. 지금 보고 있는 컵은 어제 보고 뇌에 인식된(기억) 컵을 보고 있을 뿐, 매 순간 변하고 있는 지금의 컵은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눈으로는 그 실상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원리를 통해서 마음으로는 볼 수 있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실상이 아닌 허상을 보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매 순간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꿰뚫어 보아 언젠가는 사라진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는 것을 공(空)을 봤다고 한다. 이것은 ‘모든 존재는 변하기 때문에 항상 하지 않다(영원하지 않다). 그래서 공하다’라는 의미의 공이므로 ‘무상공(無常空)’이라 한다.
만약에 고정불변의 실체가 있다면 어떠한 경우에도 변하지 않아서 어떤 물리적인 힘을 가해도 부서지지 않아야 하고 없어지지 않아야 한다. 따라서 오늘날 ‘물체는 물체가 아니라 하나의 사건event이다.’라고도 한다. 이것은 ‘모든 존재는 이것과 저것이 서로 연결돼 생겨나고 없어진다.’라는 뜻으로서 ‘모든 것은 전체로서 하나이기 때문에 공하다.’라는 의미의 공이므로 ‘연기공(緣起空)’이라고 한다.
한 송이 꽃을 예로 들더라도, 한 송이 꽃이 피어나기 위해서는 첫째 씨앗이 싹이 돼 뿌리를 내려야 하고, 그러려면 대지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라나려면 물과 공기, 햇볕과 온 우주가 다 함께 모여야 한다. 즉, 한 송이 꽃 속에 온 우주가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꽃 한 송이만이 아니라 나무 한그루, 벼나 보리 모든 식물도 또한 이와 같다. 새나 곤충 모든 생명 또한 모두가 다 그렇다. 이렇게 모든 것은 인연이 모여서 생겼기에 인연이 흩어지면 꽃은 떨어지고 죽어간다. 이러한 이치는 사람이라고 해서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지(地), 수(水), 화(火), 풍(風) 사대(四大)가 모여 인연이 되면 태어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죽는 거다. 그러나 그 인연법 자체는 영원하다. 이치가 이러하기에 연기법(緣起法)을 보는 자는 바로 부처를 본다고 하셨다. 그리하여 나는 물론이요, 온갖 우주만유가 연기공성(緣起空性)임을 깨달은 자리가 바로 비어있는 밝은 자리이다.
만물의 근본물질은 소립자(미립자)다. 소립자는 무한한 가능성(전지전능)을 지닌 최소한의 알갱이며, 진여의 작용에 의해 만들어졌다. 소립자는 입자와 파동의 성질을 다 지니고 있다(이중성/二重性, 유즉무/有卽無 무즉유/無卽有,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그래서 만상은 고정불변의 자성이 없기 때문에 ‘무자성(無自性)’이고 ‘무아(無我=非我)’가 진리다.
그리고 현상적으로 드러난 모든 존재는 원인(因)에 의한 결과(果)의 나타남이다. 이 모든 것을 ‘업(業)’이라 하고, 업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순환(윤회, 無始無終)한다. 따라서 만상을 존재하게 하는 주재자(主宰者)는 없다. 다만 모든 것은 진여(眞如)의 작용에 의해 일어나고 사라질 뿐이다. 이것이 깨달음의 대상인 원리(진여의 성품)의 전부다. 하나하나가 의미하는 깊은 뜻을 가슴에 새겨 체득하고 하나로 융합(회통)시켜 자유자재하게 사용할 줄 알면 해탈(열반)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 양철곤
육조 혜능 선사가 지은 <단경>의 대의(大意)를 개략적으로 요약하면, 모든 생명들에게 불성이 있고 반야의 자연지(自然智)가 구족돼 있다. 이러한 사실을 자각하면 곧바로 돈오(頓悟)이기에 진여법계엔 무타무자(無他無自)인 참된 진아(眞我)의 세계를 체득하므로 원만한 수행인 보살의 삶으로 회향할 수밖에 없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삶이 실행된다. 이것은 본래부처가 부처로써 연기공(緣起空)을 사실 대로 알고 사실 대로 보고 사실 대로 삶을 사는 것을 선(禪)이라고 정의 하는 것이 남종선의 선사상(禪思想)이다. - 설우 스님
*연기법경(緣起法經)---<잡아함경> 제12권 제299경 <연기법경(緣起法經)>에서 고타마 붓다는 연기법(緣起法)은 자신이나 다른 깨달은 이[如來]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며 법계(우주)에 본래부터 항상 존재하는[常住] 법칙[法]이라고 말했다.
*연기법(緣起法)과 존재론(存在論)---연기(緣起)는 영어로 ‘어라이징(Arising)’으로 번역한다. 그리고 서양에서는 모든 존재를 ‘비잉(Being)’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고정적인 존재라는 뜻이다. 동양의 어라이징은 생겨난다는 뜻으로 동사적인 의미이다. 그러나 서양의 비잉은 존재한다는 뜻으로 고정적인 의미이다. 여기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동양과 서양의 차이를 볼 수 있다. 이는 다름 아닌 ‘연기법’과 ‘존재론’에 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연기법과 존재론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부처님이 연기법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초기경전에서는 “여래가 출현하거나 여래가 출현하지 않거나 그 세계는 정해져 있으며 원리로서 확립돼 있으며(S12:20),”라고 돼 있다. 연기법은 부처가 출현하든 하지 않든 이미 원리로서 확정돼 존재하고 있는 법(dhamma)이라는 것이다.
연기론을 현대적인 표현으로 말하자면 '상대주의적 존재론'이다. 당연히 절대적인 것, 영원한 것, 무조건적인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절대적 존재란 다른 것들로부터 완전히 독립해 그 자신만으로 존재하며, 다른 조건에 제약받지 않는 존재다. 불교는 그런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연기법은 철저하게 관계성에 있다. 이는 상호의존발생과 조건발생으로 설명된다. 이런 연기법을 제대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은 정형구가 된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若有此卽有彼)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若生此卽生彼).
이것이 없을 때 저것도 없어지며(若無此卽無彼)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도 사라진다(若無此卽滅彼).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라는 구절은 상호의존적 연기를 말하고,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라는 구절은 조건발생적 연기를 말한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若有此卽有彼)”라는 구절은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기관(六根)이 생겨나며(S21.65)”처럼, 식과 명색이 상호의존해 발생함을 말한다.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도 생겨난다.(若生此卽生彼)”라는 말은 조건발생연기로서,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 명색을 조건으로 육근(六根)이 생겨나며(S21.65)…”와 같이 12연기 정형구로 설명된다. 그래서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라는 연기의 정형구는 상호의존연기와 조건발생연기 모두를 만족한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이다.
그런데 상호의존과 조건발생으로 설명되는 연기법에서는 존재론은 설자리가 없다. 어느 것도 연기의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연기법으로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를 논파하셨다. 그런데 명사 중심의 서양의 사고방식은 철저하게 존재론적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비잉(Being)’으로 설명된다. 비잉(Being)이라는 말 자체가 존재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존재론을 부정한다. 연기의 법칙으로 봤을 때 스스로 홀로 존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서양인들은 만물에 대해 왜 존재론으로 볼까? 그것은 서양 종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서양 종교는 유일신교로서 창조주를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 창조주가 만물을 만들어 냈다고 보기 때문에 존재론적 세계관을 갖게 됐다.
연기법(緣起法, pali. paticcasamuppada, skt. pratītyasamutpāda)에 따르면 창조론은 설자리가 없다. 어느 것 하나 관계 속에서 상호의존과 조건발생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연기적 관계성으로 봤을 때 ‘절대로 있다’는 ‘존재론’은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불교경전 번역을 보면 존재론에 입각한 번역을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비구들이여, 세상에서 현자들이 없다고 동의하는 것을 나도 역시 없다고 말한다. 세상에서 현자들이 있다고 동의하는 것을 나도 역시 있다고 말한다(꽃경, 상윳따니까야 S22:94)」
이에 대해 어떤 분은 다음과 같이 견해를 제시한다. “위의 <꽃경(S22:94)>에서 보듯이 부처님께서는 세상(오온으로 구성된 고성제)이 분명히 있다(有)고 말씀하시고 계신다. 세상이 있다(有)는 것을 분명히 긍정하고 계신다.” 즉, 경험 가능한 것은 존재로 인정할 수 있다는 말이다. 설령 그것이 연기적으로 무상하다고 할지라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으로 본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실재성 부여는 자칫하면 ‘유아론(有我論)’으로 흐르기 쉽다. 유아론은 무아론에 반대 되는 말이다. 자아(自我), 개아(個我), 영혼 등은 실체가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나’를 찾는 수행, 또는 존재의 근원을 찾는 수행으로 발전될 수 있다. 이렇게 존재의 근원을 찾다 보면, 결국 궁극적 실재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오온은 무상한 것이다. 제행무상에 어느 것 하나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존재론적으로 번역하면 물질은 ‘있는 것(有)’이 돼버린다.
불교는 존재론을 말하지 않는다. 만일 불교가 존재론을 이야기 한다면 더 이상 불교라고 볼 수 없다. 왜? 불교는 존재의 근원을 밝히는 종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불교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통해서 현상을 인식하고, 그 현상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는 것을 통찰하는 종교이다. 이렇게 ‘실체 없음’을 강조하는 ‘무아’의 가르침인 불교에서 존재론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존재론 자체는 서양철학의 산물이다. 대표적으로 데카르트(1596-1650)를 들 수 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라고 말했다. 이 말은 “존재하지 않는 다면 의심할 수 없기 때문에 그가 의심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다.”라는 말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의심하고, 의심하고 있다는 그 사실 때문에 결국 존재하는 것이라 했다. 이런 데카르트의 존재론적 사유는 서양철학의 바탕에 깔려 있다.
불교에서는 존재론을 말하지 않는다. 존재론은 유일신교처럼 궁극적 실재를 가정해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근거로 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인식론으로 말한다. 인식론은 다름 아닌 연기법이다. 모든 현상이 상호의존하고 조건 발생함을 말한다. 그래서 현상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통찰하는 것이다. 이렇게 통찰했을 때 지혜가 생겨나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결코 존재의 근원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연기법의 존재방식을 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에서는 차연(差延, difference)이라 부른다. 차연은 차이(差-異)와 연기(延-期) 또는 연장(延-長)의 두 뜻을 합쳐서 줄인 말인데, 예컨대 나무는 물과 다르면서(차이) 물의 힘이 거기에 시간적으로 약간 연기돼 작용하거나 공간적으로 연장돼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상징한다.
철학적 차연(差延)과 불교적 연기(緣起)는 같은 뜻이다. 연기법은 이 세상 모든 만물의 존재방식이 서로 다양한 차이 속에서 연계돼 있음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왜 위와 같은 존재론적 현상이 있는 것일까. 그것은 번역이 잘못돼서 그런 것이다. 인식론적으로 번역을 해야 할 것을 존재론적으로 번역을 했기 때문에 위와 같은 현상이 생겼다. 부처님은 결코 존재론을 설하시지 않았다.
존재론은 결국 ‘나’를 찾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의 근원을 찾는 수행으로 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존재의 근원을 찾다 보면 결국 “이 세상은 영원한가?”라든가 “나는 과거세에 있었을까?” 등으로 의심하게 된다. 이런 의심을 부처님은 번뇌의 온상으로 보셨다. 부처님은 존재의 근원을 찾는 것에 대해, “정신을 쓰지 말아야 할 것들에 정신을 쓰고, 정신을 써야 할 것들에 정신을 쓰지 않음으로써, 아직 생겨나지 않은 번뇌가 생겨나고, 이미 생겨난 번뇌가 성장한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연기의 가르침이 자아(自我)니 진아(眞我)니 주인공이니 하는 존재론적인 실체를 상정하고 그것을 찾아들어가는 것쯤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흔히 여래장(如來藏)이나 진여(眞如), 불성(佛性), ‘참 나’ 등을 논하면서 자칫 존재론적 논리로 빠지곤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어떤 것이든 존재론적인 실체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다. 존재론적인 실체는 어떤 경우라도 부처님 법에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하겠다.---→인과(因果, 산스크리트어 hetu-phala) 참조.
*연기법(緣起法, pali. paticcasamuppada)과 중도(中道, pali. majjhima patipada)의 관계---부처님의 모든 교설은 연기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수행의 첫 출발은 괴로움을 인식하고 그 괴로움의 원인을 알고 괴로움을 벗어나 해탈을 얻기 위한 실천적 수행의 방법으로 중도를 이해하는데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중도 가운데 구체적 수행실천 법으로 8정도를 제시하고 있는데, 연기법과 중도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연기법 속에 중도와 중도 속에 연기법의 상호관계는?
연기와 중도의 관계를 바르게 파악하는 것은 초기불교 아니 불교 전반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핵심중의 핵심이다.
일단 연기와 중도의 관계는 상응부 <가전연경(迦旃延經)>을 이해하는 것이 그 출발점이다. <가전연경>은 있다(有, atthi)ㆍ없다(無, natthi)는 단정적 견해로 이 세상을 파악하지 말고 일어나고(samudaya, 起)ㆍ사라짐(norodha, 滅)이라는 연기적 사유로 세상을 꿰뚫어 보라고 하는 중요한 경이다. 이 경은 용수(龍樹, 나가르주나)의 <중론(中論)>의 근거가 되기도 하듯이 대승불교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가전연경>의 내용을 일단 보도록 하자.
『<가전연(깟짜야나 곳따 숫따, Kaccaayanagotta Sutta, S.12.15))>
•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사왓티 제따와나의 급고독원에 머무셨다.
• 그때 깟짜야나 곳따 존자가 세존을 뵈러갔다. 뵈러가서 세존께 큰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 한 곁에 앉아서 깟짜야나 곳따 존자는 세존께 이와 같이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올바른 견해[正見], 올바른 견해라고들 합니다. 무엇이 올바른 견해입니까?
• 깟짜야나여, 이 세상은 거의가다 둘을 의지하고 있나니 '있다(atthi)'거나 '없다(atthi)'는 것이다.
• 세상의 일어남(samudaya)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洞察智)로 보는 자는 세상들이 없다는 그런 [견해가] 없다. 세상의 소멸(nirodha)을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는 자는 세상들이 있다는 그런 [견해가] 없다.
• 깟짜야나여, 세상은 대부분 끌림과 취착 때문에 독단적 해석에 계박이 돼버린다. 그리고 그런 끌림과 취착, 마음의 고집, 독단적 신조(편견), 잠재성향을 ‘나의 자아이다(attaa me)’라고 따라가지 않고, 취착하지 않고, 고집하지 않는다. 고(苦)가 생겨나면 생겨나는구나, 고가 멸하면 멸하는구나 라고 해서 의심하지 않고 혼동하지 않는다. 여기서 [이런 것이] 그가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은 지혜이다. 이런 것이 참으로 바른 견해[正見]이다.
• 깟짜야나여, ‘모든 것은 있다’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모든 것은 없다는 것은 두 번째 극단이다. 깟짜야나여, 여래는 이들 두 극단을 따르지 않고 중간에 의해서 법(dhamma)을 설한다.
• 무명을 반연해 [업]형성들(상카라)이 있고, [업]형성들을 반연해 알음알이가 있고, 알음알이를 반연해 정신-물질이 있고, 정신-물질을 반연해 여섯 감각장소가 있고, 여섯 감각장소를 반연해 감각접촉이 있고, 감각접촉을 반연해 느낌이 있고, 느낌을 반연해 취착이 있고, 취착을 반연해 존재가 있고, 존재를 반연해 태어남이 있고, 태어남을 반연해 늙음과 죽음과 근심ㆍ탄식ㆍ육체적 고통ㆍ정신적 고통ㆍ절망이 있다. 이것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가 일어남이다.
무명이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하면 [업]형성들이 소멸하고… 이것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가 소멸하는 것이다.』
경의 인용에서 보듯이 바른 견해가 없으면 인간들에게 있다(有) 없다(無)는 양 극단이 생기지만 여래는 이런 양 극단을 따르지 않고 중(中, majjha)에 의해서 법을 설한다고 하셨다. 여기서 보듯이 중(中)은 단순히 중간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유무의 양 극단을 여읜 것이다. 그래서 중국의 선사들은 이어양변(離於兩邊, 양 극단을 떠난 것)을 중으로 봤다. 그리고 너무도 분명하게 부처님께서는 이 <가전연경>에서 12연기의 순관과 역관이 중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처럼 연기야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중이다.
이 중에다가 ‘도 닦음’이 붙으면 저 중도(中道, majjhima patipada)가 된다. 그러므로 중도는 연기적 사유나 관찰이나 통찰을 ‘도 닦음’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실제로 중도의 내용인 팔정도의 처음인 정견(바른 견해)의 내용은 사성제(연기의 순관 역관)를 통찰하는 것, 혹은 연기를 통찰하는 것으로 경에서는 정의한다. 중도는 그래서 바로 팔정도라고 <초전법륜경>을 위시한 모든 초기경에서는 강조하는 것이다.
이처럼 중도인 팔정도의 정견은 바로 연기를 통찰하는 것이고, 다시 연기의 통찰은 이어양변의 중과 그에 바탕한 8중정도의 실천으로 다시 서로 침투돼 있다. 이것을 "연기법 속에 중도와 중도 속에 연기법의 상호관계"라 할 수 있겠다.
<초전법륜경>에서는 감각적 욕망에 탐닉하는 것과 고행에 빠지는 두 극단을 넘어서서 부처님께서는 중도를 설한다고 천명하고 계시며, 그 중도로서 저 팔정도를 설하셨다. 이것이 부처님의 최초의 설법이라고 빠알리 삼장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거듭 말하자면, 중은 연기요 중도는 다름 아닌 저 팔정도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중도는 그냥 중간의 개념이 아니라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수단,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라는 여덟 가지 바른 도 ― 연기의 통찰에 바탕한 바른 ‘도 닦음’ ― 를 실천하는 실천임을 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런 실천은 초기경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바로 지금 여기(現今)에 충실함이다. 지금 여기를 놓쳐버리면 과거나 미래로 얽혀들고 그런 태도로는 모두 있다 없다는 존재론적 가설에 함몰돼버린다. 그러므로 중도는 연기를 지금 여기에서 여실지견해 매 찰나 올바름을 행하는 실천수행이라 할 수 있다.
다시 62견을 설하는 <범망경(장부 제1경)>에서도 62견을 과거와 미래로 나누고 다시 이들을 유무단상으로 나누어 관찰하고 있다. 그리고 결론으로 지금 여기의 촉-수-애-취-유-생-노사ㆍ우비고뇌로 아는 것이 바로 여실지견이라고 지금 여기서의 연기로 결론짓고 있다.
이런 것을 중론에서는 일이거래유무단상(一異去來有無斷常)의 팔부중도(八不中道)로 설명한다. 물론 연기와 중도는 기존 인도사상과 실천관인 소위 말하는 전변설(轉變說) 적취설(積聚說)의 극복으로도 설명할 수 있고, 다른 모든 부처님 가르침에 적용할 수 있다.
거듭 말하지만 초기ㆍ남ㆍ북의 모든 불교 가르침은 연기ㆍ무아ㆍ중도를 바탕으로 한다. 이것을 망각하면 불교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교 역사에 존재했던 모든 가르침과 지금의 모든 가르침이 과연 연기ㆍ무아ㆍ중도에 바탕하고 있는가를 철저하게 검증해 봐야 할 것이다. 그래서 연기와 중도에 바탕하고 있지 않다고 판단되면 가차 없이 도려내는 결단을 해야 한다. - 각묵 스님
*연기법((緣起法, pali. paticcasamuppada, skt. pratītyasamutpāda)도 버려야 한다---불교의 연기법이란 마음에 대한 사유이다.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고 우리가 어떻게 사물을 인지하게 되는지에 대한 하나의 심리학이다. 또한 중요한 것은 연기법 역시도 연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제법무아이다.
연기법으로 깨달음의 방향을 설정했다면 연기법 역시 놓아버릴 필요가 있다. 그것 역시 연기로 존재하는 것일 뿐 홀로 존재하는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이 법이라는 것이 다른 어떤 법하고 다를 수 있는 이유는 제법무아 때문이다. 법 역시 연기로 존재하기에 홀로 있는 법이란 없다.
이렇게 되면 논리적으로 무한 소급(?) 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연기법 역시 연기적으로 존재한다, 연기법 역시 연기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연기적으로 존재한다, 이와 같이 되니까.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 법을 끝까지 논리적으로 살필 수는 없다. 그래서 부처님 법도 배와 같아서 강을 건너면 버리라고 하는 것이다. 즉, 연기법도 연기적이므로, 계속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는 이 연기법이란 개념을 마음에서 아예 내려놓아야 한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
*연기법((緣起法, pali. paticcasamuppada, skt. pratītyasamutpāda)의 생활화---연기법이란 곧 나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오로지 타인의 힘에 의지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항상 배려하고 남을 존중하는 마음을 잊지 않는 것이 곧 자신의 행복을 위한 길이라 할 수 있다.
연기법은 이론적, 종교적인 측면을 뜻하고, 연기설(緣起說)은 실행적, 철학적인 측면을 말한다. 부처님 법은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며, 앞으로 잘 인도하는 것이며, 지혜에 의해 스스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듯이 부처님이 연기법을 말씀하셨는데, 인간의 삶에서 어느 한순간도 연기적으로 이뤄지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내 존재, 내 역할, 내 정체성을 여러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찾는 삶이 이뤄진다면 정말 잘 사는 것이 된다. 반면 연기법 따로, 내 삶 따로, 이렇게 산다면 아무리 연기법을 공부하고 외우고 경전 필사를 많이 해도 결코 삶을 바꾸지 못한다. 삶을 바꾸는 것은 연기법에 입각한 생각과 말과 행위이다. - 미산 스님
‘나’라는 존재는,
첫째, 시간적으로 나를 낳아주신 부모와 조부모 등 무수한 조상님들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둘째, 공간적으로 지구촌이라고 하는 공간에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이다.
셋째, 외부세계에서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온 정보와 의식 공간에 존재하는 기존의 개념, 관념, 가치 등 무수한 심리적 정보들과 결합해 연기적으로 형성된 ‘나’이다.
넷째, 이런 상호작용을 통해서 생겨난 상대적 개념이 만들어낸 ‘나’에는 온갖 종류의 욕망과 집착, 그리고 생각과 앎의 거품이 가득하다. 이와 같은 ‘나’는 연기적 존재라는 것을 정확히 인지하는 것이 연기법 수행의 출발이다.
연기법의 이런 의미를 음미해 보면 모든 존재에 대한 경의와 공경의 태도를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공경은 ‘나’라는 존재를 지금 여기에 있게 한 웃어른들을 올려다보는 것이요, 내 마음이 위로 향하는 행이다.
이런 연기의 원리를 모르면 일상의 삶에서 남을 존중하고 공경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잘 났어 정말!”이라는 어느 연예인의 말처럼, 우리 개개인 모두가 다 잘났다고 생각한다면, 남에게 고개 숙이고 남을 잘 모시기는 힘들게 된다. 누구나 윗사람으로 대접받고 싶어 하지, 자신이 상대를 공경하고 대접하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공경에서 명심해야 할 것은, 공경이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나이 적은 자가 많은 자에게 일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공경은 신분, 나이, 계급 및 서열의 고하에 관계없이 누구나 서로에게 해야 한다. 예절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서로 지켜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웃어른이란, 나이만 많은 거만한 어른이 아니라 자비하고 지혜로우며 인자한 마음을 가진 이를 말한다.
모든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모든 관계 속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인간관계이다. 인간관계를 쉽고 부드럽게 만드는 윤활유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공경이며 감사이다. 즉, 공경은 만행의 근본이며, 인간관계, 개인의 성장, 자연과의 친화는 바로 감사에서 시작된다. 감사하는 마음은 공경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감사하는 마음이 있으면 부처님과 부모님을 모시듯, 소중한 친구를 대하듯, 그 어느 것 하나도 소홀할 수 없고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지극한 정성으로 공경하게 된다. 공경과 감사의 생활로 연기법을 실천하게 되면, 자연히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공간은 공경하고 감사할 대상들로 가득함을 깨닫게 된다.
마찬가지로 자연을 정복하려는 인간 중심의 태도를 버리고 산하대지와 공존하고 더불어 살아갈 때 자연은 우리에게 기쁨과 환희로 보답해 준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인간과 동물 등과의 더불어 사는 것 또한 기쁨을 주는 생활이다. 아무리 힘들고 고달픈 인생이라 하더라도 혼자가 아니라 많은 고마운 이들이 함께 하고 있음을 깨달을 때 삶이 신나고 즐거운 것이다. 그러나 생존경쟁이 치열한 사회생활에서 연기법을 잊고 살면 그 즉시 즐거움이 괴로움으로 바뀐다.
‘나’라는 존재는 찰나찰나 연기적으로 변하고 있어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는 ‘무아’라는 사실을 늘 깨어 있는 마음으로 알아차려야 한다. 연기법 수행자란 순간순간 연기적 삶의 태도를 잃지 않는 자이다.
연기적 삶의 태도란 무엇인가? 예컨대, 화를 내는 순간 연쇄적으로 일어날 상황들을 미리 간파해 몸과 입과 뜻을 조절하는 것이다. 연기법 수행자는 어떤 경우에도 이런 실체관념의 늪에 빠져들지 않고 성성하게 깨어있는 자이다. 외부에서 그 어떤 경계가 그를 휘젓더라도 경계에 따라 마음이 천차만별로 흐트러지지 않아야 한다. 참된 연기법 수행자의 면목은 어떤 경계에 닥쳤을 때 여실히 드러나는 법이다.
연기법 수행의 목적은 우리의 의식 속에 깊게 뿌리내린 ‘자아’라는 강한 철옹의 벽을 녹여 없애는 데 있으며, 자아중심의 분별심에서 생긴 좋고 싫음의 두 극단을 지양하고, 지혜의 발현과 자비의 실천을 꽤하는 데에 있다. 연기법(緣起法)은 어떤 형태의 불교전통에서도 공유하고 있는 공통의 수행원리이다. 이 원리의 특징은 행복으로 가는 길을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해 행복한 삶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다. 행복은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소멸되면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 허당
조건 지어져 형성된 것은 조건이 다하면 소멸한다. 즉, 이 말씀은 모든 것은 조건 지어져 일어나니까 급하게 욕심을 내거나 내 뜻대로 안 된다고 분노를 할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내가 욕심을 내든, 조급해 하든, 또는 성질을 내든지 간에… 조건에 따라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나고, 또한 조건이 다하면 반드시 소멸한다. 내 뜻대로 무언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건 분명히 그 뜻에 맞는 조건이 아직 지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만 자각해도 조급해 하거나 분노할 명분이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조건이 지어져 성취될 때까지 차분하게 그리고 꾸준히 선업과 공덕을 쌓고, 과보의 조건이 지어질 때까지 기다리며 꾸준히 수행해나가야 한다.
다만 올바르게 조건이 지어져야 올바른 과보를 얻게 되기 때문에 꾸준함의 정진에다가 올바른 방향을 볼 수 있는 정견(正見) 또한 필요하다. 그래서 올바른 길을 걸어가신 선지식에게 배워야 한다.
연기의 일반적인 원리는 전형적인 12연기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다른 일반적인 인과원리에도 적용될 수 있다. 실제로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그것이 우주론적이든 사회적이든 심리적이든 생물학적이든 모두 이 원리에 따르고 있다.
경험철학자 영국의 데이비드 흄(David Hume)의 인과율에 관한 공식은 ‘만일 C이면 언제나 E이다’인데, 그것은 연기의 일반원리의 첫 번째 명제인 “이것이 있다면, 저것이 있다.”는 원리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 원리의 맹점을 보완한 과학철학자 마리오 붕게(Mario Bunge)의 인과성의 원리는 ‘만일 C가 생겨나면 그것에 의해 언제나 E가 생겨난다’인데, 그것은 연기의 일반원리의 두 번째 명제인 ‘이것이 생겨나면 저것이 생겨난다.’는 원리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첫 번 째와 두 번째의 존재론적 명제와는 달리 세 번째와 네 번째는 해탈론적인 것이다. 이 네 가지 일반원리는 각각 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의 바탕이기도 하다.” - 상윳따니까야 2권 해제, 전재성
연기의 일반적 원리는 모든 분야에 적용될 수 있다고 했다. 과학의 분야에도 예외가 아니다. 컴퓨터프로그래밍 언어 중에 ‘C언어’가 있다. 주로 ‘if’로 시작되는 조건문으로 구성돼 있다. 이렇게 본다면 연기법은 현대과학과도 매우 밀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연기는 크게 일반연기와 조건발생연기로 나뉜다.
일반연기는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라는 구조로 돼 있고, 조건발생연기는 “이것이 생겨나면 저것이 생겨난다.”라는 구조로 돼 있다. 대승에서는 두 연기 중에 전자, 즉 일반연기만을 취해 법계연기(法界緣起)로 설명하고 있다. 단멸론자들 역시 전자만 취해 몸과 정신이 의존해 있으므로 ‘몸이 죽으면 정신도 죽어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부처님은 분명히 조건발생연기도 설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처럼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일반연기)”라고 하신 다음에, 반드시 “이것이 생겨나면 저것이 생겨난다(조건발생연기)”라 하신 것이다.
---우리 몸과 마음에서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원리를 봐야---
부처님이 일반연기와 조건발생연기를 설하신 것은 사성제의 구조와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사성제는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 구조로 돼 있기 때문에 네 구절로 돼 있는 연기송과 일치한다. 즉,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면 저것이 생겨난다.”라는 문구는 사성제에서 고성제와 집성제에 해당된다. 그리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이 소멸한다.”는 사성제에서 멸성제와 도성제에 해당된다.
부처님은 연기의 조건발생과 조건소멸을 통해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윤회에서 벗어나게도 해 주셨다. 윤회에서 벗어나는 구조는 12연기로 설명된다. 그래서 연기송 이후에 이어지는 가르침은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로 시작 되는 12연기정형구가 뒤따른다.」- 진흙속의연꽃
*연기성공(緣起性空)---연기성공이란 일체 사물은 인연화합에 의해 생기(生起) 하므로 어떤 실체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 본성은 공한 것이라는 말이다. 대승불교는 연기의 도리에 근거해 사물의 본질, 즉 법의 성품[法性]이 공함을 설하서 있다. 이것은 곧 일체법이 인연화합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그 어떤 실체도 없다는 말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일체법은 모두 인연화합의 현상일 뿐이며, 이 현상 속에서 주재하는 어떤 본체도 찾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불경에서는 ‘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空不異色)’이라고 한다. 이것은 바로 일체법의 연기성공을 말하는 것이다. 색이란 바로 색ㆍ수ㆍ상ㆍ행ㆍ식의 오온 중의 색으로서 물질을 말한다. 어떠한 물질 현상이라도 모두 조건의 화합에 의해 생기하는 것인바, 비록 고유의 모양새와 기능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들의 모양새와 기능 안에 영원불변하는 주재자가 없으므로 공이라는 것이다.
소위 공이라고 함은 색 밖의 공(色外空-물체 이외의 공)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고, 색 뒤의 공(色後空-물체가 멸한 후의 공)을 일컫는 것도 아니다. 바꾸어 말하면 색을 떠나 또 다른 하나의 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현상 그 자체, 즉 당체가 바로 공[當體卽空]이라는 것이다.
색은 조건의 화합에 의해 일어나는 바[緣起所起], 색법(色法) 상에 어떤 불변하는 실성이 있을 수도 없으므로 색즉시공이라고 하는 것이며, 실성이 없기 때문에 조건을 만나면 곧 일어날 수 있으므로 공즉시색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 空不異色)의 간단한 해석이다.
수ㆍ상ㆍ행ㆍ식 등의 정신 현상도 역시 연기성공이다. 연기성공이란 우주만유의 진실한 모습, 이른바 제법실상(諸法實相)이다. 대승불교는 실상(實相)으로 법인(法印)을 삼는데, 이를 일법인(一法印)이라고 한다. 일체 대승불교의 경전과 교리는 모두 이 실상의 도리로서 인증되는 것이다. 무주열반(無住涅槃)과 보살, 육바라밀, 사섭(四攝) 등의 교의는 모두 이 연기성공의 이론을 기초로 하고 있다.
*(용수의) 연기성공(緣起性空)---연기(緣起)란 세간의 일체 사물이 인연의 화합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고, 성공(性空)이란 인연이 합해 모든 법을 이루는 것이지만 그 성은 본래 비어서 진실한 자체가 없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연기나 제법은 모든 인연이 화합해 이루어진 것들이기 때문에 그 성이 본래 비어서 진정한 자체(自體)를 얻을 수가 없다는 의미이다. 연기설은 연기를 연기 그 자체로 본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연기의 본성은 공(空)한 것이다. 연기성공(緣起性空)의 의미는 연기의 배후나 초월한 곳에 어떠한 존재도 없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용수(龍樹)는 <중론>에서 ‘공성(空性)의 논리’로서 부처님교설의 중심사상인 ‘연기(緣起)’임을 분명히 밝히려고 했다.
그는 부처님의 깨달음이 연기와 관련이 있다고 보고, 부처님이 당시의 정통 바라문교의 수정주의가 자아의 실체를 전제로 주창하는 전변설(轉變說)과 신흥사상가들이 주창하는 쾌락주의와 금욕주의의 근거가 되는 유물론적 적취설(積聚說)을 극복하기 위한 중도로서 제시한 것이 바로 연기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중론>의 귀경게(歸敬偈)에서 「연기는 소멸하는 것이 아니며, 생기하는 것도 아니며, 단절되는 것이 아니며, 상주하는 것도 아니며, 동일한 것이 아니며, 다른 것도 아니며, 오는 것이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니다. 모든 희론을 적멸시키신 이러한 연기를 설하신 정각자, 설법자 중 가장 뛰어난 분, 그 분(부처님)에게 나는 귀의하고 예경한다.」고 설했다.
외도의 사견(邪見)과 불교내부의 사견을 대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사견들을 연기가 공이라는 중도로서 바로 잡는 것이 <중론>의 근본과제이다.
이와 같이 용수사상의 독자성은 부처님의 중도를 반야사상을 통한 공관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중론>에서 ‘모든 존재에 자성이 없다’는 것을 ‘모든 존재는 공이다’로 표현했다.
*연기 조사(緣起祖師, 8세기경)---신라 경덕왕 때 승려, 생몰연대 미상. <화엄사 사적>에 의하면. 흥덕현(興德縣, 현재의 전북 고창군) 사람으로 출가해 여러 산을 편력했다고 한다. 지리산 화엄사(華嚴寺)를 창건했으며, 그 외 전설적인 기록들이 적지 않게 보이고 있는데, 실제 인물임에는 틀림없으나 사적 상황이 확실치 않다.
그의 생존 시기에 대해서도 신라 진흥왕 때라는 설과 경덕왕 때라는 설이 있으나 경덕왕 때가 맞는 것 같고, 심지어 인도 출신이라는 말도 전한다. 화엄사 외에도 지리산 천은사(泉隱寺)와 연곡사(鷰谷寺)를 창건했다고 하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지대인 지리산 해발 1,400m에 위치한 법계사(法界寺)도 신라 진흥왕 때인 AD 544년에 연기 조사가 창건했다고 하나 시대가 맞지 않는다.
최근에 경덕왕 때 제작된 <화엄경> 사경(寫經)이 발견됨으로써 그의 행적이 일부 확인됐다. 이 사경의 발문에 의하면, 그의 주재 하에 754년(경덕왕 13) 8월 사경을 조성하기 시작해 그 이듬해 2월에 완성했음을 알 수 있다.
*연꽃(蓮花)과 불교---연꽃은 불교의 이상를 상징하는 꽃으로 처염상정(處染常淨)의 꽃이다. 즉, 연꽃은 더럽고 추하게 보이는 물에 살지만, 그 더러움을 조금도 자신의 꽃이나 잎에는 묻히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불자(佛子)가 세속에 처해 있어도 세상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오직 부처님 가르침을 받들어 아름다운 신행(信行)의 꽃을 피우는 것과 같다.
그런데 연꽃은 원래 인도 신화에서 창조와 관련되는데, 창조주 브라흐마가 바로 연꽃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따라서 불교에서 연꽃을 숭상하는 것은 인도 전통종교인 브라만교의 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밀교에서의 얀트라(yantra ; 圖象)는 연꽃을 이용한 연꽃무늬들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리하여 얀트라의 시스템에서도 연꽃은 우주를 전개한 힘을 나타낸다.
또한 보살이 홀로 자신의 안락만을 위해 열반의 경지에 머물지 않고 중생구제를 위해 온갖 죄업과 더러움이 있는 세계로 뛰어드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설법하실 때에도 연꽃을 비유로 많이 들었다. 그리고 연꽃이 막 피어오르는 봉오리는 마치 불교 신도가 부처님 앞에 경건히 합장하고 서 있는 모습과 흡사하다.
<연꽃의 열 가지 의미>
1) 이제염오(離諸染汚) - 연꽃은 진흙탕에서 자라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는다. 주변의 부조리와 환경에 물들지 않고 고고하게 자라서 아름답게 꽃피우는 사람을 연꽃같이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2) 불여악구(不與惡俱) - 연꽃잎 위에는 한 방울의 오물도 머무르지 않는다. 물이 연잎에 닿으면 그대로 굴러 떨어질 뿐이다. 물방울이 지나간 자리에 그 어떤 흔적도 남지 않는다. 이와 같아서 악과 거리가 먼 사람, 악이 있는 환경에서도 결코 악에 물들지 않는 사람을 연꽃처럼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3) 계향충만(戒香充滿) - 연꽃이 피면 물속의 시궁창 냄새는 사라지고 향기가 연못에 가득하다 한 사람의 인간애가 사회를 훈훈하게 만들기도 한다.
4) 본체청정(本體淸淨) - 연꽃은 어떤 곳에 있어도 푸르고 맑은 줄기와 잎을 유지한다. 바닥에 오물이 즐비해도 그 오물에 뿌리를 내린 연꽃의 줄기와 잎은 청정함을 잃지 않는다.
5) 면상희이(面相喜怡) - 연꽃의 모양은 둥글고 원만해 보고 있으면 마음이 절로 온화해지고 즐거워진다. 얼굴이 원만하고 항상 웃음을 머금었으며, 말은 부드럽고 인자한 사람은 옆에서 보아도 보는 이의 마음이 화평해진다.
6) 유연불삽(柔軟不澁) - 연꽃의 줄기는 부드럽고 유연하다. 그래서 좀처럼 바람이나 충격에 부러지지 않는다. 이와 같이 생활이 유연하고 융통성이 있으면서도 자기를 지키고 사는 사람을 연꽃처럼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7) 견자개길(見者皆吉) - 연꽃을 꿈에 보면 길(吉)하다고 한다.
8) 개부구족(開敷具足) - 연꽃은 피면 필(必)히 열매를 맺는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꽃피운 만큼의 선행(善行)은 꼭 그만큼의 결과를 맺는다.
9) 성숙청정(成熟淸淨) - 연꽃은 만개했을 때의 색깔이 곱기로 유명하다. 사람도 연꽃처럼 활짝 핀 듯한 성숙감을 느낄 수 있는 인품의 소유자가 있다. 이런 분들과 대하면 은연중에 눈이 열리고 마음이 맑아진다.
10) 생이유상(生已有想) - 연꽃은 날 때부터 다르다. 넓은 잎에 긴 대, 굳이 꽃이 피어야 연꽃인지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다. 연꽃은 싹부터 다른 꽃과 구별된다. 장미와 찔레는 꽃이 피어봐야 구별된다. 백합과 나리도 마찬가지다. 이와 같이 사람 중에 어느 누가 봐도 존경스럽고 기품 있는 사람이 있다. 옷을 남루하게 입고 있어도 그의 인격은 남루한 옷을 통해서도 보인다. 그러나 연꽃은 진리 자체는 아니고, 어디까지나 진리를 나타내는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화과동시(花果同時)라는 말이 있다. 일반적으로 모든 꽃은 꽃이 지면 열매를 맺지만 연꽃은 꽃과 열매가 동시에 맺혀 화과동시라 한다.
<법화경>에 의하면, 부처님이 일찍이 <법화경> 설법을 마치고 나서 삼매에 들어가 신심(身心)이 부동하던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만다라화(曼陀羅華), 마하만다라화(摩訶曼陀羅華), 만수사화(曼殊沙華), 마하만수사화(摩訶曼殊沙華) 등 네 종류의 천화가 내려 부처님과 여러 대중의 몸 위에 두루 흩어서 공양했다고 한다. 여기서 만다라화는 흰 연꽃이고, 마하만다라화는 큰 흰 연꽃이며, 만수사화는 붉은 연꽃이고, 마하만수사화는 큰 붉은 연꽃이다.
*연등(燃燈)의 유래---아사세왕(阿闍世王)은 붓다 생존 당시 마가다국(摩揭陀國, Magadha) 왕으로서 빈비사라(頻婆娑羅)왕 아들인데, 천성이 난폭하고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사정없이 욕하고 벌을 주었고, 심지어 그의 아버지도 죽였다. 그런 그가 인도를 통일했지만 수많은 전쟁을 하다가 보니 많은 악업을 짓게 됐고, 그 죄업으로 등창이 나서 고생을 하게 됐다. 그때 어느 불자의 권유로 붓다께 귀의해 참회의 기도를 했더니 등창이 나았다. 이에 붓다의 가피에 감사하는 뜻으로 등불을 밝혔는데, 이때부터 연등 달기가 시작됐다고 한다.
*연등불(燃燈佛)---과거불인데, 석존께 수기(授記)를 주신 부처님이다. 석존께서 전생에 수메다(Sumedha)라는 이름의 청년으로서 수행을 하고 있을 때, 그에게 훗날 석가모니라는 부처로 성불할 것이라고 수기(授記)를 준 부처이다.---→정광불(定光佛) 참조.
*연려(緣慮)---인연의 얽힘. 생각하는 마음. 바깥 사물을 보고 생각하는 마음을 말한다. 대경(對境), 즉 바깥 사물에 반연해 상념(想念)을 굴리는 작용, 혹은 심식(心識)이 객관의 대상을 생각해서 아는 것을 말한다.
*연려심(緣慮心)---불교에서는 중생의 마음을 연려심(緣慮心), 육단심(肉團心), 진여심(眞如心)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육단심은 만용을 부려 억지로 하는 것으로 보통 때는 일어나지 않다가 큰 욕심이 일면 생겨나게 되는 마음이고, 진여심은 우리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참되고 한결같은 마음자리이다. 그리고 연려심은 다가온 인연을 따라 일어나는 평소의 마음상태, 바로 중생심을 말한다. ‘연려’란 말은 거기에 반연해 생각해서 분별을 내는 것이다. 따라서 통상 보고 듣는데 따라 일어나는 분별하는 마음으로서 중생의 마음을 일컫는다.
이와 같이 바깥 사물이나 상황을 대상을 인연으로 해서 일어나는 마음 혹은 생각으로서, 연려심(緣慮心)이라하는 것은 선과 악, 그러고 순(順)과 역(逆)의 모든 경계(境界)를 여러 가지로 분별하는 것이다. 따라서 6식, 제7 말나식, 제8 아뢰야식 등 팔식(八識)에 두루 해당되는 마음이다.
누가 칭찬을 하면 기분이 좋고, 누가 욕을 하면 기분이 나쁘다.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이 생각나고, 몸이 피곤하면 누워 쉬고 싶다. 주지 스님의 법문이 재미가 없으면 자꾸 다리가 저리고 지루하기도 하다. 이렇게 세상 인연과 조건에 따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연려심(緣慮心)이다.
누가, 우리 오늘 절에 가자고 해서 따라갔거나, 생전 절이라고는 찾지 않다가 무슨 행사가 있다니까 구경 간 김에 기도를 하고, 혹은 자신이 몹시 힘들 때만 기도하며, 갑자기 자식이 어렵다고 기도하고, 그러다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지나가면 언제 내게 그런 일이 있었느냐 하는 듯 잊어버리는 그런 마음이다. 따라서 그런 연려심으로 기도를 해 봤자 기도로 인한 부처님의 가피는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연비(燃臂)---승려가 되기 위한 득도의식 때 행하는 삭발과 함께 신체 일부를 태우는 의식. 불가(佛家)에 출가해 승려가 되기 위해 치르는 의식이다.
*연생법(緣生法)---인연법(因緣法)은 ‘연기법(緣起法)’을 말하고, 연생법(緣生法)은 ‘연기된 법’을 말한다. 여기서 ‘연기된’ 것이란 ‘조건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한역에서는 연이생(緣而生)이라고도 한다.
연기법은 붓다가 세상에 출현하거나 출현하지 않거나 항상 머물러 있으며, 법이 항상 머무는 곳을 법계(法界)라고 한다. 여래는 이것을 깨달아 등정각(等正覺)이 되어서 사람들을 위해 설했다. 연생법(緣生法)은 이와 같은 연기법을 그대로 따르는 것을 말한다. 즉, 부처님이 밝힌 연기법에 수순하는 것을 연생법이라고 한다.
<잡아함경> 제12권 대정장(大正藏) 제2권과 남전대장경13, <상응부경전> 2권에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하고 있다.
"어떤 것을 연생법이라 하는가? 무명이 지어짐을 말하느니라.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거나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지 않거나 이 법은 항상 머물며 법은 법계에 머무느니라. 그것을 여래가 스스로 깨달아 알아서 등정각(等正覺)을 이루고 사람들을 위해 연설해 열어 보이고 드러내 밝히니 무명(無明)을 연(緣)해 행(行)이 있고, 내지 생(生)을 연(緣)해 노사(老死)가 있다고 하느니라.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거나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지 않거나 이 법은 항상 머물러 법은 법계에 머무느니라. 그것은 여래가 스스로 깨달아 등정각을 이루고 사람들을 위해 연설해 열어 보이고 드러내 밝히니, 생(生)을 연(緣)하므로 노(老) 병(病) 사(死)와 우(憂) 비(悲) 뇌(惱) 고(苦)가 있다고 하느니라.
이들 모든 법은, 법이 머무르며(法住), 법이 공하며(法空), 법이 여여하며(法如), 법이 그러하며(法爾), 법이 여여함(如)함을 떠나지 아니하며, 법은 여여와 다르지 아니하며, 참으로 진실해 전도되지 아니하니, 이와 같이 연기에 수순하는 것을 연생법이라고 하느니라.
*연생성해(緣生性海)---<화엄경>에 나오는 말이다. 인연으로 생기는 성품의 바다라는 말이다. 이 세상 모든 현상, 그리고 우리 인간들의 모든 삶의 모습들은 전부 성품의 바다에서 일어나서 영위 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모두가 인연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연생성해라 한다.
그리고 바다에 별의별 물결이 일어나지만 그것은 하나의 바다에 바람에 의해서, 바람이라고 하는 인연에 의해서 생기는 물결이라는 사실을 깊이 이해해야 된다.
우리가 어떤 삶을 살든지 그 삶은 전부 우리 한 마음의 작용으로, 그것도 한 마음의 어떤 인연의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는 하나의 작용이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이해해야 된다. 모두가 성품의 한 작용이라는 사실을 알면 제대로 아는 거라는 뜻이다.
[출처] 아미산 <불교 용어 해설, ㅇ ― 14>|작성자 아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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