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남포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문
藍浦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文
있는 곳: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성주사지
세운 때:추정 신라 진성왕 4년 경술(890)
所在:忠淸南道 保寧市 聖住面 聖住里 聖住寺址
年時:推定 新羅 眞聖王 4年 庚戌(890)
당(唐) 신라국(新羅國) 고(故) 양조국사1) 교시대낭혜화상(敎諡大朗慧和
尙) 백월보광지탑비명(白月葆光之塔碑銘)과 서(序)
有唐新羅國, 故兩朝國師, 敎諡大朗慧和尙, 白月葆光之塔碑
銘, 幷序.
1) 양조국사(兩朝國師):양조(兩朝)는 신라의 두 임금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기서
의 양조는 제48대 경문왕(景文王)과 제49대 헌강왕(憲康王)을 말하는데, 무염
(無染)스님이 이 두 임금대에 국사(國師)를 지냈기 때문이다.
회남(淮南)에서 본국(本國)에 들어올 때 국신과 조서 등2)을 보내 온 전
동면도통순관 (前東面都統巡官) 승무랑(承務郎) 시어사(侍御史) 내공봉(內
供奉)으로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신(臣) 최치원(崔致遠)이 왕명
을 받들어 찬하다.3)
淮南入本國, 送國信詔書等使, 前東面都統巡官, 承務郞, 侍御
史, 內供奉, 賜紫金魚袋, 臣, 崔致遠, 奉敎, 撰.
2) 송국신조서등사(送國信詔書等使):당(唐) 희종(僖宗)이 신라 헌강왕에게 보내는
예물과 조서를 가지고 온 사신이 최치원(崔致遠)이라는 의미에서 나온 호칭이다.
3) 최치원(崔致遠):「진감국사대공영탑비문眞鑒國師大空靈塔碑文」주4)최치원崔
致遠 본서(本書) p.82에 그의 생애가 정리되어 있다. 그런데 그가 왕명으로 쓴 4
개의 비문에는 각기 다른 직함으로 쓰여져 있는데, 여기서는 그가 조서를 가지
고 돌아오는 사신의 직함을 띠고 있으므로 그의 귀국경로만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884년 당을 출발한 최치원은 풍랑으로 이듬해인 885년 3월에 신라로 오게
되는데, 장안(長安)을 출발한 그는 회남원주(淮南沅州)를 거쳐서 태주영파부(台
州寧波府) 정해현(定海縣)에서 배를 타고 가가(可佳), 홍의(紅衣), 흑산(黑山)을
거쳐 영암(靈巖)에서 묵은 후 신라의 수도로 돌아오고 있다.
당나라가 황소(黃巢)의 난(亂)을 무력(武力)으로 평정하고4) 연호(年號)
를 바꾸어5) 문덕(文德)으로 한 그 해(888) 11월6) 22일7) 오후 4시 경8)에 신
라의 양조국사(兩朝國師)를 지낸 선화상(禪和尙)이 목욕재계한 뒤9) 가부
좌10)한 채 입멸11)하였다. 온 나라 사람들이 마치 두 눈을 다 잃은 것 같았
는데 하물며 그 문하의 여러 제자들이야 오죽했겠는가. 슬프도다. (대사
가) 신라에 태어난 지12) 89년이요, 구족계를 받은 지13) 65년14)이었다. 세상
을 떠난 지 3일이 됐는데도 자리15)에 기대어 있는 모습이 엄연(儼然)하여
얼굴빛이 살아 있는 듯하였다. 문인인 순예(詢乂) 등이 울부짖으며 유체
를 받들어 임시로 선실(禪室)에 빈소(殯所)를 정하였다.16) 임금17)께서 부음
을 듣고 몹시 슬퍼하며 사신을 보내 글로써 조문하고 곡식으로 부의하니,
청정한 공양18)을 마련하여 명복19)을 빌고자 함이었다.
帝唐揃亂以武功, 易元以文德之年,19) 暢月月 20)之七日, 日蘸
咸池時, 海東兩朝國師禪和尙, 盥浴已, 趺坐示滅. 國中人, 如
喪左右目, 矧門下諸弟子乎. 嗚呼. 應東身者, 八十九春, 服西
戒者, 六十五夏. 去世三日, 倚繩座儼然, 面如生. 門人詢乂等,
號奉遺軆, 假肂禪室中. 上聞之震悼, 使 弔以書, 賻以穀, 所
以資淨供而贍21)玄福.
4) 제당전란(帝唐揃亂):당 나라 말기인 제18대 희종(僖宗)대에 일어났던 황소(黃
巢)의 난(875~884)이 평정된 것을 말한다.
5) 역원이문덕지년(易元以文德之年):역원(易元)은 원년(元年)을 바꾸었다는 말로,
연호를 광계(光啓)에서 문덕(文德)으로 개원(改元)한 것을 말하는데 이는 888년
이다. 그 해 희종(僖宗)이 죽고, 소종(昭宗)이 즉위하여 계속 문덕의 연호를 사용
하다가 이듬해(889) 연호를 용기(龍紀) 로 바꾸었다.
6) 창월(暢月):음력 11월을 말한다. 창은 충(充)의 뜻이니 『예기禮記』「월령月令」에
“仲冬之月 … 地氣沮泄 是謂發天地之房 諸蟄則死 民必疾疫 又隨以喪 命之曰暢
月”이라 하였는데, 이에 대한 공영달(孔穎達)의 소(疏)에는 “言名此月爲充實之月
當使萬物充實 不發動故也”라고 하였다. 『여씨춘추呂氏春秋』「중동기仲冬記」에
도 “仲冬之月 日在斗 昏東壁中 旦軫中 … 又隨以喪 命之曰暢月”이라 하였다.
7) 월결지칠일(月缺之七日):달이 기우는 15일부터 7일 후인 22일로 보나, 달이 이지
러지기 시작한 뒤 바로 오는 7일인 17일로 보기도 한다. 『동사열전東師列傳』권1.
27일로 보는 기록도 있다. 『조당집祖堂集』권17「성주무염국사비聖住無染國師碑」.
8) 일잠함지시(日蘸咸池時):일출(日出)을 양곡(暘谷)이라 하고 일몰(日沒)을 함지
(咸池)라 하므로 음력 11월에 해질 무렵인 오후 4~5시인 신시(申時)경을 말함.
『회남자淮南子』「천문훈天文訓」, “日出于暘谷 浴于咸池”.
9) 관욕(盥浴):손을 씻고 목욕함을 말한다.
10) 부좌(趺坐):결가부좌(結跏趺坐)했다는 뜻인데, 오른쪽 다리를 아래에 두고 왼
쪽다리를 위로 올려 포개서 앉는 방법으로 입선(入禪)할 때의 자세로서 좌불(坐
佛)의 앉아 있는 다리의 모습이 그것이다.
11) 시멸(示滅):열반을 보였다는 말로, 스님의 죽음을 의미한다.
12) 동신(東身):동토(東土)인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세속의 몸을 말한다.
13) 복서계(服西戒):서계(西戒)는 불교의 계율을 말하므로, 비구계(比丘戒)를 받음
을 말한다.
14) 하(夏):스님들은 여름결제(夏安居:음력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의 안거)를 끝
내야 1년의 법랍으로 헤아려지는 데서 해(年)를 의미하는 말로 쓰인 것이다.
15) 승좌(繩座):스님들이 거처하는 방에는 목상(木床)이나 승상(繩床)을 사용하는
데, 승좌는 자리에서 상탑(床榻)을 기대고 앉는다는 뜻으로, 윗부분을 노끈으로
얽어 매어 승좌라 한다.
16) 가사(假肂):임시로 영구(靈柩)를 모셔 두는 것으로, 임시로 치루는 장례절차이
다. 대중이 수행정진하는 결제 중에 입적할 경우는 해제할 때까지 임시로 가장
례(假葬禮)를 한다는 말로, 가빈(假殯)과 같은 뜻이다.
17) 상(上):이 때가 888년(진성여왕 2년)이므로, 상은 진성여왕을 가리킨 것이다.
18) 정공(淨供):청정한 공양이니 대중공양, 또는 불공을 말한다.
19) 현복(玄福):죽은 뒤의 명복을 말한다.
20) [全文][總覽][苑]의 자는 缺의 本字임.
21) [全文]의 瞻은 贍의 오자임.
2년 후에 돌을 다듬어 탑을 세우게 되니22) 소문이 서울에까지 들렸다.
보살계23)를 받은 제자인 무주도독24) 소판25) 김일(金鎰)과 집사시랑26) 김관
유(金寬柔), 패강도호27) 김함웅, 전주28) 별가29) 김영웅(金英雄)은 모두 왕손
이다. (이들은) 왕족으로서30) 임금의 덕을 보좌하고, 험난한 지경에서는 대
사의 은혜를 입었거늘, 어찌 반드시 출가한 연후라야 입실제자라고31) 하
겠는가. 드디어 문인 소현32)대덕33) 석34)통현과 사천왕사35) 상좌36) 석신부
(釋愼符)와 의논하기를 “스님께서 돌아가시매 임금께서도 슬퍼하거늘 어
찌 우리들이 차마 무심하게37) 입을 다물고 스님에게 은혜를38) 갚기 위한
일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승·속39)이 서로 호응하여
시호를 내려 줄 것과 탑비에 새길 글을 청하니 교지(敎旨)를 내려 ‘허락한
다’고 하였다.
越二年, 攻石封層冢, 聲聞王40)京. 菩薩戒弟子武州都督蘇判
鎰, 執事侍郞寬柔, 貝江都護咸雄, 全州別駕英雄, 皆王孫也.
維城輔君德, 險道賴師恩, 何必出家, 然後入室. 遂與門人, 昭
玄大德釋通賢, 四天王寺上座釋愼符, 議曰, “師云亡, 君爲慟,
奈何吾儕, 忍灰心木舌, 緣飾在弎41)之義乎.” 迺白黑相應,
請贈諡曁銘塔, 敎曰, “可.”
22) 층총(層冢):조사(祖師)의 부도(浮屠)를 말한다. 탑(塔)은 불사리(佛舍利)를 봉
안한 것이고, 부도는 조사의 사리를 안치한 것이다.
23) 보살계(菩薩戒):4부대중(四部大衆;比丘, 比丘尼, 淸信士, 淸信女)인 불자는 누구
나 다 받는 대승계로서 십중대계(十重大戒)와 사십팔경계(四十八輕戒) 등을 계
목(戒目)으로 한다.
24) 무주도독(武州都督):신라 9주의 하나인 무주(武州:지금의 광주)의 장관(長官)
을 말한다. 도독은 군주(軍主)에서 총관(摠管)을 거쳐 도독으로 변한 명칭으로,
급찬(級飡)부터 이찬(伊飡)의 관등에 있는 이가 임명되었는데, 신라 원성왕 이
후의 호칭이다. 『삼국사기』권40「잡지雜志」9 직관지職官志‘외관外官’ 참조.
25) 소판(蘇判):신라 17관등(官等)의 제3관등인 잡찬의 별칭이다. 『삼국사기』권38
「잡지」7 직관지상
26) 집사시랑(執事侍郞):신라 집사성(執事省)의 차관직으로, 전대등(典大等, 진흥왕
16년)에서 시랑(侍郞, 경덕왕 6년)으로 바뀌었는데, 나마(奈麻)부터 아찬(阿飡)까
지의 위계(位階)에 있는 사람들이 임명되었다. 『삼국사기』권38「잡지」7 직관지
‘집사성執事省’ 참조.
27) 패강도호(浿江都護):신라 패강진(浿江鎭)의 두상대감(頭上大監)을 가리킨
다. 신라의 북방진출 변경개척사업의 한 성과로서 패강진을 개척하여 선
덕왕 3년(782)에는 패강진 장관 이하 각급 장관의 직제를 제정하였다. 이기
동,「신라 하대의 왕위계승과 정치과정」『신라 골품제 사회와 화랑도』,일조
각,1984,pp.148~149. 그런데 선덕왕 때 제정된 두상대감은 본비를 비롯한 9세기
무렵의 금석문에는 도호(都護)로 나타나고 있어 신라가 어느 시기에 가서 당제
(唐制)를 모방하여 이름을 고친 것으로 판단된다. 또 이에 임명된 인물들의 행
적으로 보아, 패강진 도호직은 6두품이 임명될 수 있는 외관(外官)의 최고직으
로서 중앙의 집사시랑에 대응하는 직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기동,「신라 하대
의 패강진」,앞의 책, pp.217~225.
28) 전주(全州):신라 9주(州) 하나로, 본래 백제의 완산(完山)이었던 것이 신라 신문
왕 5년에 완산주로 되었다가 경덕왕 16년에 전주로 되었다. 『삼국사기』권36「잡
지」6 지리地理3 참조.
29) 별가(別駕):각주(各州)의 도독을 보좌하는 주보(州輔) 혹은 주조(州助)의 다른
이름으로 당나라 제도를 모방한 것이다. 이 이름은 문성왕 17년(855)에 만들어
진 「창림사무구정탑원기」에 최초로 보이는데, 일찍이 쓰에마쓰 캬즈요시(末松
保和)는 주조(州助)의 다른 이름으로 추정하였다(「창림사무구정탑원기昌林寺無
垢淨塔願記」『新羅史の諸問題』,1954,p.472). 이와는 달리 후지다 료사쿠(藤田亮策)
는 주조 아래의 장사(長史)가 아닐까 하고 추측하였지만(「신라구주오경고新羅九
州五京考」『조선학보』5,1953;『조선학논고』,1963, p.362), 「창림사무구정탑원기」에
명주별가(溟州別駕)와 나란히 무주장사(武州長史)가 보이고 있어 후지다의 견해
는 잘못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기동,「신라 하대의 패강진」,앞의 책, p.219.
30) 유성(維城):태자나 왕족을 이른다. 『시경詩經』「대아大雅」, “懷德維寧 宗子維
城”.
31) 입실(入室):스승에게서 오의(奥義)를 전수받을 수 있을 만한 경지에 이른 것을
말한다.
32) 소현(昭玄):소현서(昭玄署)를 말하는 것으로 소현정서(昭玄精署)라고도 하니
후위(後魏) 소현시(昭玄寺)에서 비롯된 승니(僧尼)의 총관소이다. 『수서隋書』
「백관지百官志」.
33) 대덕(大德):신라의 대덕은 공(功)이 있을 때 왕이 임명하는 것으로, 신라 최초
의 대덕은 지명(智明)이었다는 설(『삼국사기』권4「신라본기新羅本紀」4 진평왕眞平
王)과 선덕왕대에 지영(智潁)·승고(乘固)를 최초의 대덕으로 발탁하였다는 설
(최치원,「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新羅迦耶山海印寺善安住院壁記」『동문선東
文選』권64)이 있다. 최치원에 의하면 대덕의 연령은 50세 이상으로 7년의 기한
이 정해져 있었는데 노성한 덕을 지닌 사람을 별대덕(別大德)으로 하였고, 법상
종(法相宗)과 화엄종(華嚴宗)에서 배출되었다고 한다.
34) 석(釋):석씨(釋氏)는 스님들이 출가 이후 속성(俗姓)을 버리고 석가모니(釋迦
牟尼) 부처님의 성(姓)을 따라 쓴 성씨로, 중국의 석도안(釋道安)이 스님의 성을
석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래 쓰여져 왔다.
35) 사천왕사(四天王寺):신라 문무왕 19년(679)에 창건한 사찰로, 사천왕사성전(四
天王寺成典)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 성전은 신라 중대의 7개의 사원성전 가운데
가장 격이 높은 성전으로 되어 있어 이 시기 사천왕사의 위상과 사격(寺格)을
알려 주고 있다.『삼국사기』권38「잡지」7직관지상 ‘사천왕사성전四天王寺成典’
참조. 경주시 배반동(排盤洞)에 그 사지(寺址)가 남아 있다.
36) 상좌(上座):스님들의 직책의 하나로, 삼강(三綱:상좌, 寺主, 都維那)의 하나이다.
37) 회심목설(灰心木舌):회심은 무관심한 마음을, 목설은 입을 다물고 말이 없는
것을 말한다.
38) 재삼지의(在參之義):재삼지절(在三之節)의 뜻으로 군(君)·사(師)·부(父)에게
은혜를 갚는 것을 말한다. 『문선文選』환온桓溫의‘천초원언표薦焦元彦表’, “亦有
秉心矯跡 以敦在三之節”.
39) 백흑(白黑):백(白)은 백의(白衣)를 입은 사람이니 속인(俗人)인 신도(信徒)를
말하고, 흑(黑)은 치의(緇衣)를 입는 자이니 승가(僧伽)를 뜻한다. 흔히 치백(緇
白)으로 표현하며, 승(僧)과 속(俗)을 말한다.
40) [全文] [苑]의 玉은 王의 오자임.
41) [全文]의 參, [苑]의 弎, [總覽]의 三 모두 무방하나 碑에는 弎임.
곧 왕손 병부시랑42) 김우규(金禹珪)에게 명하여 계원행인43) 시어사(侍御
史) 최치원을 부르게 하였다. (최치원이) 봉래궁44)에 이르러 기수45)와 나란
히 섬돌46)에 올라 꿇어 앉아 주렴 밖에서 명령을 기다렸다. 임금께서 “돌
아가신 성주대사(聖住大師)는 진실로 한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신 것이
다. 옛날에 돌아가신 부왕[경문왕]과 헌강왕47)이 모두 스승으로 섬겨 나라
를 복되게 한 것이 오래되었도다. 내가 처음 왕위를 이어 선대의 뜻을 그
대로 계승코자 원하였으나, 하늘이 어진 인물을 오랫동안 남겨 두지 않으
니48) 나의 마음을 더욱 애석하게 하는도다. 나는 큰 덕행이 있는 사람에게
큰 이름을 주는 것이므로, 시호를 추증하여 대낭혜49)라 하고 탑은 백월보
광50)이라 한다. 그대는 일찍이 중국에서 벼슬하여51) 금의환향52) 하였도다.
돌이켜 보건대 돌아가신 부왕께서 국자(國子)로 선발하여 배우도록 명하
고,53) 헌강왕은 국사54)로서 예우하였으니 그대는 마땅히 국사의 비문을 지
어 이에 보답토록 하라”고 하였다.
旋命王55)孫夏官二卿禹珪, 召桂苑行人侍御史崔致遠. 至蓬萊
宮, 因得竝琪樹上瑤墀, 跽竣命珠箔外. 上曰, “故聖住大師, 眞
一佛出世, 昔文考康王, 咸師事, 福國家爲日久. 余始克纉56)承,
願繼餘先志, 而天不愸57)遺, 益用悼厥心. 余以有大行者, 授大
名故追諡曰大朗慧, 塔曰白月葆光. 乃嘗西宦絲染錦歸. 顧文
考選國子命學之, 康王視國士禮待之, 若宜銘國師以報之.”
42) 하관이경(夏官二卿):『설문해자說文解字』묘부卯部‘경卿’에 “六卿 天官冢宰 地
官司徒 春官宗伯 夏官司馬 秋官司寇 冬官司空”이라 하였다. 천관(天官)은 현재
의 이부(吏部), 지관(地官)은 호부(戶部), 춘관(春官)은 예부(禮部), 하관(夏官)은
병부(兵部), 추관(秋官)은 형부(刑部), 동관(冬官)은 공부(工部)이다. 하관은 『주
례周禮』 육관(六官) 중에 대사마(大司馬)에 속하며 군정병마(軍政兵馬)의 임무
를 맡았다. 이경(二卿)은 아경(亞卿)으로 차관(次官)을 말하므로 병림원(兵林苑)
을 가리킨다.
43) 계원행인(桂苑行人):계원은 학자나 문인이 모인 곳을 이르는데 한림원(翰林苑)
을 말하며, 행인은 통사사인(通事舍人)으로 사자(使者)를 의미한다.
44) 봉래궁(蓬萊宮):진성여왕 당시 궁중에서 가장 중심되는 건물.
45) 기수(琪樹):옥같이 아름다운 나무. 전(轉)하여 재능이 뛰어난 사람을 가리킨다.
46) 요지(瑤墀):옥같이 아름다운 섬돌.
47) 문고강왕(文考康王):문고는 망부(亡父)의 존칭으로 신라 진성여왕의 아버지인
제48대 경문왕을 말하며, 강왕은 헌강왕을 가리킨다.
48) 정유(愸遺):억지로 남겨 둠. 『시경』「소아小雅」‘시월지교十月之交’, “不愸遺一老
守我王”.
49) 대낭혜(大朗慧):크게 밝은 지혜를 의미한다.
50) 백월보광(白月葆光):밝은 달이 그 빛을 크게 비춘다는 뜻이다.
51) 서환(西宦):서는 중국으로, 중국에서 벼슬한 것을 말한다.
52) 사염금귀(絲染錦歸):벼슬 없는 백의로 중국에 들어갔으나, 비단옷을 입고 고향
에 돌아온 것을 말한다.
53) 문고선국자명학지(文考選國子命學之):국자(國子)는 본래 공경대부(公卿大夫)
의 자제라는 뜻이다. 본비에서 “돌아가신 부왕(父王:경문왕)께서는 국자로 선
발하여 배우도록 명하였다”라고 한 말은, 최치원이 경문왕대에 공경대부의 자
제로 뽑혀 배움에 나아가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되는데, 이것은 바로 최치원
이 12세 때인 경문왕 8년(868)에 당으로 유학을 떠났던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한다. 만일 그렇다면 지금까지 최치원을 사비유학생으로 이해하여 온
것과는 달리 국비유학생일 가능성이 높아지므로 보다 구체적인 검토가 필요하
리라 생각된다.
54) 강왕시국사예대지(康王視國士禮待之):국사(國士)는 본래 국중(國中)에서 가장
뛰어난 선비를 뜻한다. 최치원은 28세 때인 헌강왕 11년(885)에 귀국하여 ‘시독
겸한림학사수병부랑지서서감(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郎知瑞書監)’에 임명되었는
데 본비에서 “헌강왕은 (최치원을) 국사로서 예우하였다”는 말은 바로 이 때의
사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55) [全文]의 土는 王의 오자임.
56) [全文] [總覽]의 纉는 纘의 속자임.
57) [全文]은 , [苑]은 , [總覽]은 愸. 과 은 愸의 오자임.
(최치원이) 사양하여 “황공하옵니다58)만 전하께서 보잘 것 없는 사람59)
을 보살펴 주셔서 중국에서 배운 문장의 남은 향기60)로 저로 하여금 글로
써 임금의 덕을 갚게 하시니 진실로 매우 천행이옵니다. 다만 대사는 유
위의 말세61)에 무위의 신비한 종지62)를 가르치셨으니, 소신의 유한하고
잔재주63)로 스님의 무한하고 큰 덕행64)을 기록하는 것은 약한 수레에 무
거운 짐을 싣고 짧은 줄의 두레박으로 깊은 우물물을 퍼 내려는 것65)과
같습니다. 만일 돌(비석)이 이상한 말을 한다거나66) 거북이가 돌아다 보
는 선고67)가 없게 된다면 결코 산을 빛나게 하고 냇물을 아름답게68) 할 수
없으니 도리어 숲과 시내에 부끄러움만 당하게 될 것이니,69) 청컨대 비문
글짓는 것70)을 사양합니다”고 말하였다.
謝曰, “主臣, 殿下恕粟饒浮秕, 桂飽餘馨, 俾報德以文, 固多
天幸. 第大師於有爲澆世, 演無爲秘宗, 小臣以有限麽才, 紀無
限景行, 弱轅載重, 短綆汲深. 其或石有異言, 龜無善顧, 決叵
使山輝川媚, 反贏71)得林慙澗愧, 請笔72)路斯避.”
58) 주신(主臣):신하가 임금에게 아뢸 때 쓰는 황공하다는 발어사(發語辭).
59) 속요부비(粟饒浮秕):벼에 빈 쭉정이가 많다는 뜻으로, 실속이 없고 겉치레만
한 사람을 비유한 것이다.
60) 계포여형(桂飽餘馨):계수나무에 남은 향기가 가득하다는 것으로, 최치원이 중
국에서 활약하던 문사로서의 명성이 그대로라는 뜻이다.
61) 유위요세(有爲澆世):생멸변화(生滅變化)하며 부침하는 세간(世間)이라는 뜻으
로, 무위비종(無爲秘宗)의 대구(對句)로 쓰였다.
62) 무위비종(無爲秘宗):생주이멸(生住異滅)의 경계를 벗어난 선종(禪宗)종지를 말
한 것이다. 무위(無爲)는 “본무행위(本無行爲)”의 준말이니 유위(有爲)에 대한
상대어이다.
63) 유한마재(有限麽才):한계가 있는 하찮은 재주를 말한다.
64) 무한경행(無限景行):끝이 없는 훌륭한 덕행을 말한다.『시경』「소아」‘거할車舝’,
“高山仰止 景行行止”.
65) 단경급심(短綆汲深):재주가 적어 큰일을 감당해 내기 어렵다는 뜻. 『장자莊子』
「지락至樂」, “褚小者不可以懐大 綆短者不可以汲深”, 『순자荀子』「영욕榮辱」, “綆
短者不可以汲深井之泉 知不機者不可與及聖人之言”, 『회남자』「설림훈說林訓」,
“短綆不加以汲深 器小不可以盛大 非其任也”.
66) 석유이언(石有異言):돌이 이상한 말을 한다 하여 진후(晋侯)가 물으니, 궁실 짓
는데 민원(民怨)이 많자, 돌이 스스로 말한다는 것에 빙자하여 경계하는 뜻이라
하였다. 『춘추좌전春秋左傳』「소공昭公」8년, “八年春 石言于晉魏楡 晉侯問於師
曠曰 石何故言 對曰 石不能言 或馮焉 不然 民聽濫也 抑臣又聞之曰 作事不時 怨
讟動于民 則有非言之物而言 今宮室崇侈 民力彫盡 怨讟並作 莫保其性 石言 不
亦宜乎’”.
67) 구무선고(龜無善顧):거북이가 돌아본다는 말이니, 거북 등위에 새겨진 비문을
돌로 된 거북이 돌아다 본다는 뜻이니, 비문에 감격한 귀부(龜趺)의 신조(神助)
함을 뜻한다.
68) 산휘천미(山輝川媚):돌이 옥(玉)을 감추고 물이 구슬을 품고 있으면 산이 빛나
고 시내가 아름답다는 말로, 학덕을 갖춘 이는 저절로 밖에 드러나 문장을 이룬
다는 뜻이다. 『문선文選』「논문論文」‘문부文賦’, “石 玉而山暉 水懷珠而川媚”.
69) 임참간괴(林慙澗愧):절조가 없는 사람이 은사(隱士)로 위장하고 산 속에 있으
면 숲이나 시내가 모두 수치로 여긴다는 말로, 재주가 없는 사람이 있는 척 가장
하여 남에게 부끄러움을 당한다는 뜻이다.『문선』「서하書下」‘북산이문北山移
文’, “其林慙無盡 澗愧不歇”.
70) 필로(筆路):글을 짓는 필법(筆法). 『옥해玉海』, “爲文之法 有筆力有筆路”.
71) [全文][總覽]에는 贏, [苑]의 은 贏의 오자임.
72) [全文]의 筆은 [苑] [總覽]의 笔과 같은 글자임.
임금이 “사양하기를 좋아 하는 것73)은 대개 우리나라의 풍습으로 좋기
는 하지만 진실로 이 일을 하지 못한다면 과거에 급제한 것74)을 어디에 쓰
겠는가. 그대는 힘쓰도록 하라” 하고는 문득 한편의 두루마리를 꺼내니 마
치 크기가 나무토막만 하였다. 내시75)로 하여금 주게 하니 이는 문하의 제
자들이 바친 행장 줄거리였다.
上曰, “好讓也, 蓋吾國風, 善則善已, 然苟不能是, 惡用黃金
牓爲, 爾勉之.” 遽出書一編, 大如椓76)者. 俾中涓授受, 乃門弟
子所獻狀也.
73) 호양(好讓):사양하기를 좋아함이니 신라인의 성품을 가리킨 말. 『산해경山海
經』, “君子國 在其北 衣冠帶劍 食獸 使二大虎在旁 其人好讓不爭”.
74) 황금방(黃金牓):과거 시험 때 급제한 사람의 이름을 적어 내거는 패로, 문과는
금방, 무과는 은방을 사용하므로, 문과에 급제한 것을 의미한다.
75) 중연(中涓):본래 천자(天子)를 측근에서 모시는 사람을 뜻하는데, 본비에서는
국왕이나 왕태자를 시종(侍從)하면서 조고(詔誥)를 전장(專掌)하는 중사성(中事
省) 소속의 국왕 근시직을 가리키는 듯하다. 이들은 신라 하대 금석문 등에 ‘내
양(內養)’ ‘중사인(中舍人)’ 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기동,「나말려초 근시기구
와 문한기구의 확장」,앞의 책, pp.236~240.
76) [全文]의 椽은 椓의 오자임.
다시 생각해 보건대, 중국에 들어가 배운 것77)은 대사나 나나 다 같이
하였는데 스승이 되어 찬양을 받는 이는 누구이며 부림을 받는 사람은
누구인가. 어찌 심학자78)는 높고 구학자79)는 수고로움을 당해야 하는 것
인가. 그러므로 옛날의 군자는 배우는 바를 삼가하였다. 그러나 심학자는
덕을 세우고 구학자는 말을 세운 것인 즉 저 덕도 말을 의지하고서야 일
컬어질 수 있으며, 이 말은 또한 덕에 의지하여야 없어지지 않는다. 일컬
어질 수 있어야 마음을 멀리 후세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고, 없어지지
않아야 말도 옛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할만한 일은 할 수 있
을 때에 하는 것이니, 다시 어찌 감히 비문 짓기를80) 굳이 사양하기만 하
겠는가.81)
復惟之, 西學也彼此俱爲之, 而爲師者何人, 爲役82)者何人. 豈
心學者高, 口學者勞耶. 故古之君子, 愼所學. 抑心學者立德,
口學者立言, 則彼德也, 或憑言而可稱, 是言也, 或倚悳83)而不
杇. 可稱則心能遠示乎來者, 不杇則口亦無慙乎昔人. 爲可爲
於可爲之時, 復焉敢膠讓乎篆刻.
77) 서학(西學):중국에 유학가서 공부한 것이다.
78) 심학(心學):불교를 비유한 말이다.
79) 구학(口學):유학을 비유한 말이다.
80) 전각(篆刻):전서(篆書)로 새긴다는 뜻. 또는 비문의 전액(篆額)이란 뜻이니, 즉
비문 찬술을 가리킨다. 본 비문의 경우 비석의 머릿돌인 이수( 首)의 비제(碑
題)를 비문찬자인 최치원이 썼다.
81) 교양(膠讓):아교처럼 굳이 사양하는 것을 말한다. 『시경』「소아」‘습상隰桑’, “旣
見君子 德音孔膠”에서 그 주에 이르기를 “膠 固也”라 하였다.
82) [全文] [苑]에 모두 役이고 [總覽]에는 伇이나 같은 글자임.
83) [全文]의 德은 悳과 같은 글자임.
비로소 나무토막같은 행장을 풀어 보니 대사가 중국에 유학하고 신라
에 돌아온 해, 구족계84)를 받고 선리(禪理)를 깨달은 인연,85) 공경(公卿)과
관리86)들이 귀의하여 우러르던 일, 불전87)과 영당88)을 창건한 일 등은 고
한림랑89) 김입지90)가 찬술한 성주사비91)에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부처
님을 받들고 법손을 위하여 편 덕화와 임금을 돕고 스승을 위했던 명성,
92)세속을 진정시키고 마구니를 항복시킨 위력, 붕새처럼 떠나고93) 학처럼 돌
아온94) 자취 등은 태부95) 헌강왕96)이 친히 지은 심묘사비97)에 갖추어 기록
되어 있다. 돌아보건대 내가98) 이제 짓는 것은 다만 우리 스님께서 열반99)
에 드신 시기와 임금께서 탑100)호를 내리신 것을 나타내는 데 그칠 뿐이다.
始繹如椓101)狀, 則見大師西遊, 東返之歲年, 禀戒悟禪之因緣,
公卿守宰之歸仰, 像殿影堂之開 , 故翰林郞金立之所撰, 聖
住寺碑, 叙之詳矣. 爲佛爲孫之德化, 爲君爲師之聲價, 鎭俗降
魔之威力, 鵬顯鶴歸之動息, 贈太傅獻康大王親製深妙寺碑,
錄之備矣. 顧腐儒之今作也, 止宜標, 我師就般涅盤之期, 與吾
君崇窣堵婆之號而已.
84) 품계(稟戒):계(戒)는 비구계(比丘戒)이니 즉 비구계를 받는다는 말이다.
85) 오선(悟禪):선(禪)의 요지를 깨달은 것이다.
86) 수재(守宰):태수(太守)와 재상(宰相)이니 관리를 가리킨다.
87) 상전(像殿):불상을 봉안한 불전(佛殿)을 말한다.
88) 영당(影堂):조사(祖師)의 영정을 모신 당(堂)을 말한다.
89) 한림랑(翰林郞):신라 하대 근시기구인 한림원의 학사이다.『삼국사기』권39「잡
지」8 직관지중에 따르면, 상문사(詳文師)를 성덕왕 13년(714)에 통문박사(通文
博士)로 바꾸었다가 경덕왕 때 다시 한림(翰林)으로 고쳤으며, 다시 학사(學士)
를 두었다고 한다. 경덕왕대의 한림기구는 당나라 제도를 모방한 관부였지만,
당나라의 경우 한림원학사직이 특정한 품질(品秩)이 없는 영외관(令外官)이었
던 데 비해, 신라에서는 일정한 관등을 부여하고 있어 골품제 사회의 성격을 드
러낸다. 한림대(翰林臺)는 880년 무렵에 서서원(瑞書院)으로 이름을 고쳐 학사·
직학사제를 설치함으로써 신라 말기 문한기관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기동,「나말려초 근시기구와 문한기구의 확장」,앞의 책, pp.247~255.
90) 김입지(金立之):헌덕왕 17년(825) 입당사(入唐使) 김흔(金昕)을 따라 당나라에
들어간 12명의 숙위학생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당 빈공과에 합격했을 것으
로 추측되는데, 신라에 귀국하여 855년에 한림랑으로서 추성군 태수에 임명되
었고, 9세기 중엽 문한 계통에서 크게 활약하였는데, 「창림사무구정탑원기」와
「성주사비문」을 제찬한 것으로 이름이 높다. 이기동,「나말려초 근시기구와 문
한기구의 확장」,앞의 책, p.250.
91) 성주사비(聖住寺碑):김입지가 찬(撰)한 무염화상(無染和尙)의 비(碑)로, 충청남
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사지에 얼마간의 비편(碑片)만이 잔존하고 있다(황수영,
『한국금석유문』,pp.86~91;[全文]고대편,p.263).
92) 성가(聲價):좋은 평판 또는 명성을 말한다.
93) 붕현(鵬顯):청운(靑雲)의 뜻을 품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떠난다는 뜻으로,『장
자莊子』「내편內篇」‘소요유逍遙遊’에 “北冥有魚 其名爲鯤 鯤之大 不知其幾千里
也 化而爲鳥 其名爲鵬 鵬之背 不知其幾千里也 怒而飛 其翼若垂天之雲 是鳥也
海運則將徙於南冥 南冥者 天池也”에서 따온 말이다. 무염화상이 당으로 유학
떠난 것을 비유한 것이다.
94) 학귀(鶴歸):학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한대(漢代)의 요동인(遼東
人) 정령위(丁令威)가 선술(仙術)을 배워 학이 되어 승천(昇天)한 고사(故事)에
서 따온 말로, 『수신후기搜神後記』에 “丁令威 本遼東人 學道于靈虛山 後化鶴歸
遼 集城門華表柱 時有少年 擧弓欲射之 鶴乃飛 徘徊空中而言曰 有鳥有鳥丁令威
去家千年今始歸 城郭如故人民非 何不學仙塚纍纍 遂高上衝天 今遼東諸丁云 其
先世有升仙者 但不知名字耳”라 되어 있다. 무염화상이 당 유학을 마치고 신라
에 돌아왔다는 뜻이다.
95) 태부(太傅):『삼국사기』권11「신라본기」11 진성왕즉위년眞聖王卽位年에 인용
된 『최치원문집崔致遠文集』권2「사추증표謝追贈表」에는“臣坦言伏奉制旨 追贈
亡父臣凝爲太師 亡兄臣晸爲太傅…”라고 하여 태부는 진성여왕(坦) 때에 당나
라에서 정(晸), 즉 헌강왕에게 추증한 시호임을 알 수 있다.
96) 헌강대왕(獻康大王):신라 49대 임금으로 875년에서 886년 사이에 재위한 경문
왕의 아들이다. 휘는 정(晸)이고 헌강왕이라고도 쓴다.
97) 심묘사비(深妙寺碑):경상북도 상주 심묘사에 있던 무염화상의 비로, 헌강왕이
직접 찬술한 것인데, 최치원의 이 기록으로 무염화상의 비가 3기(基)였다는 것
이 알려지게 되었다.
98) 부유(腐儒):썩은 선비라는 뜻이니, 필자 자신을 겸사(謙辭)한 말이다.
99) 반열반(般涅槃): parinirvāna의 음사어. 완전한 열반을 뜻하며, 열반에 들어간
다는 말이다.
100) 솔도파(窣堵婆): stūpa의 음사어로 탑을 말한다.
101) [全文]의 椽은 椓의 오자임.
생각에 따라서 스스로의 뜻대로 글을 쓰고자 하였는데102) 마침 제자103)
인 비구104)가 와서 좋은 글105)을 부탁하였다. 그의 말과 뜻은 이러한 뜻에
까지 미치었다. 곧 말하기를 “김입지(金立之)가 찬한 비는 세운 지 오래되
어 오히려 그 후 수십년간 남기신 아름다운 행적이 빠져 있고,106) 태부왕
이 신필(神筆)로 기록한 것은 대개 각별히 대우했음을 드러내 보였을 뿐
입니다. 선생107)은 입으로 옛 현인들의 책을 맛보았고 면전(面前)에서 금
상(今上)의 명도 받았으며 귀로는 국사의 행적을 실컷 들었고 눈은 문생
(門生)들이 지은 행장에 취할 정도입니다. 널리 기록하고 갖추어 서술하
여 장차 후생에게 전해 주어108) 일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잘 알게 해야 합
니다.109) 만일 선사를 선망하는 자가 이를 간직해 두었다가 중국인의 비웃
음을 면한다면110) 매우 다행이니 내가 감히 더 이상을 구하겠습니까. 선생
은 번거로움을 꺼리지 말고 엄광(嚴光)과 같은 태도로 사실대로 써 주시
오”111)라 하였다. (치원이) 이에 얼른 대답하여 “나는 이엉을 엮는 자112)처
럼 간결한 것이 좋은데, 스님은 채소 파는 사람과 같이113) 많고 적음을 따
지겠습니까”라고 하였다.
口將手議, 伇114)將自適其適, 這有上足苾芻, 來趣韲臼語及斯
意. 則曰, “立之碑, 立之久矣, 尙闕數十年遺美, 太傅王神筆
所紀, 盖顯示殊遇云爾. 吾子, 口嚼古賢書, 面飮今君命, 耳115)
飫116)國師行, 目醉門生狀. 宜廣記而備言之, 殆貽厥可畏, 俾原
始要終. 脫西笑者, 或袖之脫西人笑則幸, 甚吾敢求益, 子無憚
煩, 狂奴態餘.” 率爾應曰, “僕編苫者, 師買采乎.”
102) 자적기적(自適其適):자기의 뜻에 맞는 바를 즐김. 『장자莊子』「대종사大宗師」,
“適人之適 而不自適 其適者也”.
103) 상족(上足):제자. 신족(神足), 고족(高足)이라고도 하는데 모두 제자를 지칭한
말이다.
104) 필추(苾芻):비구. 북인도 쪽의 bhiksu의 음사어로, 비구는 남인도 쪽의 말이
다. 출가하여 불제자로 구족계를 받은 자의 이름으로, 스스로 경영하는 것이 없
고 대중의 신시(信施)를 빌어 청정하게 살아가기 때문에 걸사(乞士)라고도 하며
성도(聖道)를 닦아 번뇌를 파하므로 파번뇌(破煩惱)라 하기도 한다.
105) 제구(虀臼):사(辭)자의 은어(隱語)로 절묘호사(絶妙好辭), 즉 뛰어난 명문(名文)
을 가리킨다. 『후한서後漢書』「열녀전烈女傳」‘효녀조아孝女曹娥’에 의하면 조
아의 아버지는 소경으로 현가(絃歌)를 부르면서 무당노릇을 하였는데, 143년 5
월 5일 강물을 거슬러 오르면서 파신(波神)을 부르다가 익사(溺死)하였다. 시신
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를 지켜본 14살의 딸 조아는 물가에서 17일 동안 울다
가 마침내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이에 관에서는 조아의 장례를 치러주고 열
녀비(烈女碑)를 세웠다. 채옹(蔡邕)이 이 조아의 열녀비를 보고 ‘黃絹幼婦外孫虀
臼’라 찬제(讚題)하였다고 한다. “孝女曹娥者 會稽上虞人也 父盱 … 溺死 不得
屍骸 娥年十四 乃沿江號哭 晝夜不絶聲 旬有七日 遂投江而死” 『세설신어世說新
語』「첩오捷悟」에 ‘황견(黃絹)은 색깔 있는 실(色絲)이니 절(絶; 色+絲)자가 되고,
유부(幼婦)는 소녀(少女)의 뜻이니, 묘(妙; 少+女)자가 된다. 외손(外孫)은 여자
(女子)를 가리키니, 호(好; 女+子)자가 되고, 제구(虀臼)는 매운 음식을 담는 그
릇(受辛)이니, 사(辤; 受+辛)자가 된다. 바로 “絶妙好辤”이다’라고 ‘黃絹幼婦外孫
虀臼’ 여덟 글자의 뜻을 풀이하고 있다. “魏武嘗過曹娥碑下 楊脩從 碑背上見題
作‘黃絹幼婦外孫虀臼’八字 魏武謂脩曰 解不 … 脩曰 黃絹 色絲也 於字爲絶 幼
婦 少女也 於字爲妙 外孫 女子也 於字爲好 虀臼 受辛也 於字爲辤 所謂‘絶妙好
辤’也”. 여기에서 辤와 辭는 동자이고, 虀는 齏와 동자이다.
106) 성주사 비편이 남아 있다.
107) 오자(吾子):서로 친한 남자끼리 부르는 말로 그대 혹은 너의 뜻이다.
108) 가외(可畏):『논어論語』「자한子罕」의 “후생가외後生可畏”에서 나온 말로 후생
이 두려워 진실대로 기록하는 것을 말하는데, 불교에서는 같은 표현으로 “식법
자구(識法者懼)”라는 말을 쓴다.
109) 원시요종(原始要終):일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살핀다는 뜻으로, 『주역周易』「계
사繋辭」‘상’에는 “原始反終”으로 되어 있다. 의광기(宜廣記)부터 원시요종(原始
要終)까지는 두예(杜預)가 『춘추좌전』「서序」에서 한 말이다. “必廣記而備言之
其文緩 其旨猿 將令學者 原始要終”.
110) 탈서소자(脫西笑者):도를 닦은 것을 이름. 입당구법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111) 광노태여(狂奴態餘):“광노고태(狂奴故態)”의 고사에서 비롯된 말. 광노는 엄광
(嚴光;자는 子陵)의 어릴 때의 이름으로, 『후한서後漢書』「일민전逸民傳」‘엄광嚴
光’에 의하면 후한의 세조 광무제(光武帝;劉秀)가 즉위 후 성명을 바꾸고 숨어
지내던 옛친구 엄광에게 세 번이나 사인(使人)을 보내 조정에 나오도록 청하였
으나 번번이 거절당하자 웃으면서 “광노의 옛모습”이라고 말하고는 그날로 친
히 그를 찾아가 나오게 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로 광노태여는 엄광과 같이 꾸
밈이 없는 태도를 말한다. “司徒侯霸與光素舊 遣使奉書 使人因謂光曰 公聞先生
至 區區欲即詣造 迫於典司 是以不獲 願因日暮 自屈語言 光不答 乃投札與之 口
授曰 君房足下 位至鼎足 甚善 懷仁輔義天下悅 阿諛順旨要領絶 霸得書 封奏之
帝笑曰 狂奴故態也”.
112) 편점(編苫):지붕을 튼튼히 하기 위해 새끼로 졸라 매듯이 글도 줄여서 간단히
지으려 한다는 약술(略述)의 의미이다.
113) 매채(買采):앞의 ‘광노태여(狂奴態餘)’와 같은 고사에서 비롯된 말로, 채소 파
는 사람이 이익의 많고 적음을 따지듯이 글의 분량을 따지는 것을 비유한 말이
다. 즉 많고 적음을 따지는 것은 채소를 사고 팔 때나 하는 것이지 글을 쓸 때에
따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 상대방이 엄광의 고사를 인용하여 의견을 표시하자
최치원도 엄광의 말로써 자신의 심정을 대답한 것이다. 황보밀(皇甫謐), 『고사
전高士傳』「엄광」, “嚴光字子陵 㑹稽餘姚人也 少有髙名 同光武遊學 及帝即位 光
乃變易姓名 隠逝不見 帝思其賢 … 光曰 卿言不癡是非癡語也 天子徴我三乃來人
主尚不見當見人臣乎子道求報 光曰 我手不能書 乃口授之 使者嫌少 可更足 光曰
買菜乎 求益也”. 여기서 采와 菜는 통한다.
114) [全文]의 役은 [總覽]의 伇과 같음.
115) [全文]의 再는 耳의 오자임.
116) [全文]의 飯은 飫의 오자임.
마침내 산란한 마음117)을 붙잡고 억지로 붓118)을 움직이는데『서한서西
漢書』119) 유후전120) 말미(末尾)의 “장량이 임금과 더불어 조용하게 천하의
일을 말한 것이 매우 많았으나 120)천하의 존망에 대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쓰
지 않는다”121)는 귀절이 떠올랐다. 그러한 즉 대사께서 왔다 가신 사이122)
의 사적 중에 뛰어난 것이 별처럼 많지만123) 후학들에게 경계할 바가 아
닌 바가 아닌 것은 또한 쓰지 않는다. 스스로 반고『한서漢書』124)의 일부를
엿보았다고 자부하면서 이에 관견(管見)으로 기술한다. 빛이 왕성하고 충
실하여 천하125)를 비추는 바탕이 있는 것으로 새벽해보다 고른 것이 없고,
기가 온화하고 융섭하여 만물을 기르는 공효에 미더움이 있는 것으로 봄
바람보다 더 넓은 것이 없다. 큰바람과 아침해는 모두 동방으로부터 스스
로 나온 것이니, 즉 하늘이 이 두가지 남은 경사126)를 모으고 산악이 한 영
특한 정기를 내려 군자국127)에 태어나게 하여 불교128)에 우뚝 선 이가 있으
니 그분이 바로 우리 스님이시다.
遂絆猿心, 强搖兎翰, 憶得, 西漢書留侯傳□云, “良所與上從
容言, 天下事甚衆, 非天下所以存亡, 故不著.” 則大師時順間
事蹟, 犖犖者星繁, 非所以警後學, 亦不書. 自許窺一班於班
史, 然於是乎管述曰, 光盛且實, 而有暉八紘之質者, 莫均乎曉
日, 氣和且融, 而有孚萬物之功者, 莫溥乎春風. 惟□風與旭
日, 俱東方自出也, 則天鍾斯二餘慶, 嶽降于一129)靈性, 俾挺生
君子國, 特立梵王家者, 我大師其人也.
117) 원심(猿心):산란(散亂)한 마음을 원숭이의 부산한 움직임에 비유한 말이다.
118) 토한(兔翰):붓의 다른 이름. 조식(曹植),『고낙원古樂苑』‘악부樂府’, “墨出靑松煙
筆出狡兔翰”.
119) 서한서(西漢書):반고(班固)의 『한서漢書』를 말한다. 서한이란 전한(前漢:
B.C206~A.D.8)의 별칭으로 이 시기의 내용을 썼기 때문에 서한서로 명칭이 붙여
졌는데, 전한 12세의 230년을 기전체(紀傳體)로 서술한 총 100권의 역사서이다.
후한의 반표(班彪)가 착수한 것을 그 아들 반고(班固)가 대성시켰으며, 미완의
부분은 반고의 누이동생인 반소(班昭)가 보충하였다. 『사기史記』·『후한서』·
『삼국지』와 함께 전4사(前四史)로 일컬어진다.
120) 유후전(留侯傳):유후는 한(漢) 장량(張良)의 봉작(封爵)이다. 즉 유후전은 장양
전(張良傳)을 말한다. 『사기史記』권55「유후세가留侯世家」, “高帝曰 運籌策帷帳
中 決勝千里外 子房功也 自擇齊三萬戶 良曰 始臣起下邳 與上會留 此天以臣授
陛下 陛下用臣計 幸而時中 臣願封留足矣 不敢當三萬戶 乃封張良爲留侯 與蕭何
等俱封”.
121) 『한서』권40「장진왕주전張陳王周傳」, “良從上擊代 出奇計下馬邑 及立蕭相國 所
與從容言天下事甚衆 非天下所以存亡 故不著 良乃稱曰 家世相韓 及韓滅 不愛萬
金之資 爲韓報仇彊秦 天下震動 今以三寸舌爲帝者師 封萬戶 位列侯 此布衣之極
於良足矣 願棄人間事 欲從赤松子游耳 乃學道 欲輕擧 高帝崩 呂后德良 乃彊食
之曰 人生一世間 如白駒之過隙 何自苦如此 良不得已 彊聽食 後六歲薨 諡曰文
成侯”.
122) 시순(時順):적절한 때에 태어나서 할일을 다하고 천명대로 살다가 떠나는 것.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 “適來 夫子時也 適去 夫子順也 安時而處順 哀樂
不能入也 古者謂是帝之 懸解”.
123) 낙낙(犖犖):뛰어나고 밝은 모양. 한유(韓愈),「대장적여이절동서代張籍與李浙
東書」, “惟閣下心事犖犖 與俗輩不同”.
124) 반사(班史):반고가 저술한 『한서』를 가리킨다.
125) 팔굉(八紘):온누리. 동서남북의 사방(四方)과 사간방(四間方)을 합한 팔방(八
方)을 말함. 굉은 유(維)의 뜻으로 천지(天地)를 얽는 강기(綱紀)이니, 동북(東
北)의 굉을 황토(荒土), 동방(東方)의 굉을 상야(桑野), 동남(東南)의 굉을 중녀
(衆女), 남방(南方)의 굉을 반호(反戶), 서남(西南)의 굉을 염토(炎土), 서방(西方)
의 굉을 옥야(沃野), 서북(西北)의 굉을 사소(沙所), 북방(北方)의 굉을 위우(委
羽)라고 하니, 전세계(全世界)를 뜻하는 것으로 쓴다.
126) 여경(餘慶):적선여경(積善餘慶)의 준말. 선조의 유덕(遺德)이 자손에게 미치는
경사. 『주역』‘곤괘 坤卦’, “積善之家 必有餘慶 積不善之家 必有餘殃 臣弑其君 子
弑其父 非一朝一夕之故 其所由來者漸矣 由辯之不早辯也”.
127) 군자국(君子國):신라를 지칭한다.
128) 범왕가(梵王家):범왕은 석가모니를 비유한 말로 사찰 즉, 불교계를 말한다.
129) [全文]의 二는 一의 오자임.
대사는 법호가 무염(無染)이며 원각조사130)인 달마(達磨)의 10세손131)이
다. 속성(俗性)은 김씨로 무열왕이 8대조132)가 된다. 할아버지133) 주천(周
川)은 품은 진골134)이고 위(位)는 한찬135)이다. 고조와 증조가 모두 안팎으
로 장수와 재상을 역임하여 집집마다 이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136) 아버지
김범청137)은 그 족보(族譜)가 진골에서 한등급 떨어져138) 득난139)이 되었다.
[나라에 5품이 있는데 ‘성보(聖譜)’라 하고 ‘진골(眞骨)’이라 하며 ‘득난’이라 하
니 (득난은) 귀성(貴姓)얻기 어려움을 말한 것이다.『문부文賦』에 “혹 구하기는
쉬워도 얻기는 어렵다”고 하였는데, 따라서 6두품을 말하는 것이다. 수가 많은
것을 귀히 여기는 것은 마치 일명(一命)에서 구명(九命)에 이르는 것과 같다.
그 4, 5두품은 족히 말할 바가 못된다.] 만년(晚年)에는 검술140)을 즐겼다. 어
머니 화씨(華氏)가 꿈속에서141) 긴 팔을 지닌 호법천142)인이 연꽃을 내려
주는 것을 보고 임신하였다. 얼마를 지난 뒤 자칭 법장143)이라고 하는 스
님이 거듭 꿈에 나타나 열 가지 호지법을 일러주었으니 충실히 이를 태
교144)로 삼았다. 그로부터 12달이 지나 대사가 태어났다.145)
法號146)無147)染, 於圓覺祖師爲十世孫. 俗姓金氏, 以武烈
大王爲八代祖. 大父周川, 品眞骨, 位韓粲. 高曾出入皆將
相, 戶知之. 父範淸, 族降眞骨一等, 曰得難[國有五品, 曰聖
而曰眞骨曰得難,148) 言貴姓之難得. 文賦云, 或149) ‘求易而得難,’ 從
言六頭品. 數多爲貴, 猶一命至九, 其四五品不足言]. 149)晩節, 追蹤
趙文業. 母華氏, 魂交, 覩脩臂天垂授 150)花, 因有娠. 幾
踰時, 申夢胡道人自稱法藏授十護, 充胎敎. 過朞而誕
大師.
130) 원각조사(圓覺祖師):중국 선종(禪宗)의 개조(開祖)인 달마대사(達磨大師)를 말
한다. 달마는 원래 남천축(南天竺) 향지국(香至國)의 제3왕자로서 양(梁) 무제
(武帝) 때 금릉(金陵)에 갔다가 뒤에 숭산(崇山)의 소림사에서 9년 동안 면벽(面
壁) 좌선(坐禪)한 끝에 오도(悟道)하여 선종을 열었는데 뒤에 당의 대종(代宗)이
‘원각’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고 탑명은 공관(空觀)이라 하였다.
131) 십세손(十世孫):무염화상은 달마로부터 법계(法系)로 10세의 법손인데 그 법계
를 보면, 달마 → 혜가(慧可) → 승찬(僧璨) → 도신(道信) → 홍인(弘忍) → 혜능
(慧能) → 남악회양(南嶽懷讓) → 마조도일(馬祖道一) → 마곡보철(麻谷寶徹) →
성주무염(聖住無染)의 계보가 된다.
132) 팔대조(八代祖):무염화상의 8대의 선조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으로부터 그
제3왕자인 문왕(文王)의 계파이다.
133) 대부(大父):조부(祖父).
134) 진골(眞骨):신라의 골품제는 왕족의 골제(骨制)와 6두품에서 1두품에 이르는
두품제(頭品制)가 결합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진골은 『신당서』권 220「동이열
전東夷列傳」의 “其建官 以親屬爲上其族名第一骨·第二骨爲自別 兄弟女姑姨從
姉妹 皆聘爲妻 王族爲第一骨 妻亦其族 生子皆爲第一骨 不娶第二骨女 雖娶 常
爲妾媵”의 제1골에 해당하는 왕족으로서 혼인에 있어서도 다른 신분과 구별하
였다. 또 대아찬 이상의 관직에 올라 중앙관서와 지방행정구역의 장관이나 장
군 등의 관직을 독점하였을 뿐만 아니라 색복(色服)·거기(車騎)·기용(器用)·
옥사(屋舍)에 이르기까지 다른 두품 신분층과 구별되는 사회적 특권을 누렸다.
『삼국사기』권33「잡지」2.
135) 한찬(韓粲):신라 제5관등인 대아찬(大阿飡)으로, 진골만이 이 등급에 제수될
수 있다.
136) 호지지(戶知之):너무나 유명하여 집집마다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137) 김범청(金範淸):『최문창후전집崔文昌侯全集』의 주석에서는 그가 만년에 검술
을 좋아하였는데 헌장공(憲章公)이 모반으로 주살되는 것을 보고 곧 머리를 깍
고 불도에 들어가자 칙명으로 골품대덕(骨品大德)의 호를 주고 한주승통(漢州僧
統)을 맡겼다 한다.
138) 족강진골일등(族降眞骨一等):골품관계의 내용을 알려 주는 사료로 신라 하대
의 진골족이 포화상태에서 자기도태를 하고 있는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139) 득난(得難):신라 시대의 골품제도의 하나인 6두품의 이칭(異稱)이다. 성골·진
골에 이어 그 위(位)를 차지하였으므로 득난이라 하였다.
140) 조문업(趙文業):조(趙)나라 문왕(文王)이 칼쓰기를 좋아한 고사를 인용한 것.
『장자』「설검說劍」, “趙文王喜劍 劍士夾門而客三千餘人”.
141) 혼교(魂交):잠을 잔다는 것으로, 『장자』「제물론齊物論」, “其寐也魂交 其覺也
形開”.
142) 수비천(脩臂天):삼두(三頭)와 육비(六臂)를 가진 호법천(護法天). 『조당집』권17
「성주무염국사」, “脩臂天人垂授藕花”.
143) 법장(法藏): Dharmākara로 담마가류, 담마가라의 번역. 아미타불이 부처가
되기 전 보살 때의 명칭이다. 아미타불은 본래 국왕으로서 발심 출가하여 스님
이 되어 법장이라 하였다.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에게 48원을 세우고 조재영
겁의 수행을 성취하였으며 드디어 현재의 아미타불이 되어 지금 극락세계에서
중생을 교화하며 항상 법을 말씀하고 있다고 한다.
144) 수십호(授十護):꿈에 나타난 자칭 법장(法藏)이라는 스님이 10가지 태교에 대
한 가르침을 주었다는 말이다.
145) 과기이탄대사(過朞而誕大師):기(朞)는 1년이므로 12개월 만에 대사가 탄생하
였다는 말로, 애장왕(哀莊王) 2년인 801년에 탄생한 것을 말한다.
146) [全文]의 天은 號의 오자임.
147) [全文]의 鍾은 無의 오자임.
148) [全文]은 曰眞骨 曰得難 曰聖而라 하고, [總覽]은 曰聖而 曰眞骨 曰得難 言貴姓
之難得으로 되었으니 [總覽]이 옳음
149) [全文] [苑]의 或이고, [總覽]에는 결락임.
150) [全文] [苑]에는 , [總覽]에는 으로 되어 있다. 蓮자로 보는 사람도 있으나
상세하지 않다.
어려서부터 다니거나 앉을 때 반드시 합장하거나 가부좌를 하고 대하
였으며 여러 아이들과 더불어 놀면서 벽에 그림을 그리거나 모래를 쌓을
때에는 반드시 불상이나 탑의 모양을 본떴지만, 하루도 부모의 슬하를 떠
나지 않았다. 9세에 비로소 공부하기 시작하였는데 눈으로 한번 본 것은
반드시 입으로 외웠으므로 사람들이 해동(海東)의 신동(神童)이라고 칭송
하였다. 12세를 넘어서는151) 9류152)가 비좁다고 하면서 뜻을 불교에 입문
(入門)하는 데 두었다. 먼저 어머니께 여쭈니 어머니는 이미 전에 꾸었던
꿈을 생각하고 울면서 “허락한다”153)고 하였다. 뒤에 아버지를 뵈오니 아
버지는 후회해도 이미 늦은 것을 깨닫고는 기꺼이 허락하였다.
阿孩時,[方言謂兒與華无154)異] 行坐必掌合趺對, 至與群兒戱,
畵墁聚沙, 必模樣像塔, 而不忍一日違膝下. 九歲始鼓篋, 目
所覽, 口必誦, 人稱曰海東神童. 跨一星終, 有隘九流, 意入道.
先白母, 母念已前夢, 泣曰, 䚷.155) [方言許諾] 後謁父, 父悔已
晩悟, 喜曰譱.156)
151) 과일성종(跨一星終):1성종은 세성(歲星)이 한차례 끝나는 것을 말하는데 그 기
간이 12년이 걸리므로, 12세를 의미하는 말로 쓰였다.
152) 구류(九流):중국 한대(漢代) 학문의 9개의 유파(流派). 『한서』「예문지藝文志」
의 내용에 따르면, 공자가 죽은 후 그 제자들이 흩어져 각각의 일파를 이루는데,
「예문지」는 이를 크게 아홉으로 나누어 분류하였다. 1. 유가류(儒家流), 2. 도가
류(道家流), 3. 음양가류(陰陽家流), 4. 법가류(法家流), 5. 명가류(名家流), 6. 묵가
류(墨家流), 7. 종횡가류(縱橫家流), 8.잡가류(雜家流), 9. 농가류(農家流)
153) 혜(䚷):방언이니 허락한다는 뜻. 허락할 혜자(字).
154) [全文] [苑] [總覽]의 无는 無의 고자(古字)임.
155) [全文]의 誇는 䚷의 오자임.
156) [全文] [苑] [總覽] 모두 譱이니 善의 古字임.
드디어 오색석사(五色石寺)에서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다.157) 경을 읽
어 뜻을 잘 이해하였고,158) 진여의 마음을 회복하고자 힘썼다. 법성선사
가 있었는데 일찍이 중국에서 능가문159)을 배웠던 분이다. 무염대사가 스
승으로 수년간 모시면서 남김없이160) 다 배웠다. 법성선사가 찬탄하여 “빠
른 걸음으로 달리면 뒤에 출발해도 먼저 이른다고 한 것을 내가 그대에게
서 경험하였다. 나는 생각하니 그대에게 가르칠 만한 더 이상의 것이 없
다. 그대와 같은 사람은 마땅히 중국으로 가야 한다”고 말하였다. 대사가
“예” 하고 대답하였다. 밤의 새끼줄은 뱀으로 속기 쉽고161) 허공의 실오라
기는 분간하기 어렵다.162) 또한 물고기는 나무로 인해서 구하는 것이 아니
고163) 토끼는 그루터기만 지킨다고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164) 그러므로
스승께서 가르친 바와 내가 깨달은 바에는 서로 증장하는 바가 있다. 진실
로 구슬이나 불을 얻었다면 조개나 부싯돌을 버릴 수 있으니,165) 무릇 도
에 뜻을 둔 사람에게 어찌 일정한 스승이 있겠는가166) 생각하였다.
遂零染, 雪山五色石寺. 口精嘗藥, 力銳補天. 有法性禪師, 嘗
扣騣伽門于中夏者. 大師師事數秊,167) 撢索無孑遺. 性歎曰,
“迅足駸駸, 後發前至, 吾於子驗之. 吾悏矣, 無餘勇可賈於子
矣, 如子者, 宜西也.” 大師曰, “惟.” 夜繩易惑, 空縷難分. 魚
非緣木可求, 兎非守株可待. 故師所敎, 己所悟, 互有所長. 苟
珠火斯來, 則蛖168)燧可弃, 凡志於道者, 何常師之有.
157) 영염(零染):삭발(削髮)과 염의(染衣)라는 말로, 출가했다는 뜻이다.
158) 구정상약(口精嘗藥):경(經)의 뜻을 잘 이해한다는 뜻으로, 신농씨(神農氏)가 일
찍이 백초의 맛을 보고 그 독성을 알아본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159) 능가문(騣伽門):중국 초기선종의 능가선을 말한다.
160) 혈유(孑遺):약간의 나머지. 조금의 남김. 『시경』「대아」‘운한雲漢’, “周餘黎民 靡
有孑遺”.
161) 야승이혹(夜繩易惑):밤의 새끼줄은 뱀으로 속기 쉽다는 말로, 소승법은 비근하
여 이해가 빠르다는 뜻이다.
162) 공루난분(空縷難分):허공과 실은 분간하기 어렵다는 말로 대승법은 그 이치나
경지가 고상 심원하여 체득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163) 어비연목가구(魚非緣木可求):『맹자』「양혜왕梁惠王」‘상’, “緣木求魚 雖不得魚
無後災 以若所爲 求若所欲 盡心力而爲之 後必有災 曰可得聞與”.
164) 토비수주가득(兎非守株可得):『한비자韓非子』「오두五蠹」, “宋人有耕田者 田中
有株 免走 觸株折頸而死 因釋其耒而守株 冀復得免 免不可復得 而身爲宋國笑”.
165) 구주화사래 즉방수가기(苟珠火斯來 則蚌燧可弃):방(蚌)은 조개이니, 진주를
얻으면 조개를 버리는 것이고, 불을 받으면 부싯돌을 버린다는 뜻이니, 법성
선사에게 수학할 것을 다했으면 굳이 있어도 이익이 없으므로 떠나야 한다는
말이다.
166) 상사(常師):한 스승만 영원히 모신다는 말이다.
167) [總覽]의 䄵은 秊의 오자이니 秊은 年의 古字임.
168) [全文]의 蚘은 오자이고, [苑] [總覽]의 蛖은 蚌과 같은 글자임.
이윽고 그 곳을 떠나 부석산의 석등대덕169)에게 화엄170)을 배웠는데 하
루에 서른 사람의 몫을 감당할 재주가 있었으니, 남초(藍草)와 천초(茜
草)가 본래의 빛깔을 잃은 것 같았다.171) 요당과 배수의 비유를 돌이켜 보
고172) “동쪽만 바라보면 서쪽은 보지 못할 것이다. 저 건너 중국이 멀지 않
은데 어찌 고토(故土)만 생각할 것인가”173)라 하고는 급히 산을 나와 바다
에 이르러 서쪽으로 가는 배를 탈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마침 국사(國使)
가 서절174)을 지니고 천자에게 바칠 일이 있었으므로175) 그 배에 함께 타고
서쪽으로 향하니 대양의 복판에 이르러 풍랑이 성난 듯 일면서 뒤집혀 큰
배는 무너지고 사람들은 다시 떨쳐나가지 못하였다. 대사는 심우(心友)인
도량(道亮)과 함께 쪽 널판지를 걸터 타고 업보(業報)의 바람에 모두 맡
겼다. 밤낮없이176) 약 15일 동안 표류하여 검산도177)에 도착하였다. 무릎걸
음으로 굽어진 언덕에 올라 실의에 빠져 “물고기 뱃속에서는 다행이 몸을
벗어났으나, 용의 턱 밑에 거의 손을 잡힐 뻔하였다. 내 마음이 돌이 아니
거늘178) 어찌 물러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尋迻179)去, 問驃訶健拏于浮石山釋燈180)大德, 日181)敵三十夫,
藍茜沮本色. 顧坳盃之譬曰, “東面而望, 不見西墻, 彼岸不遙,
何必懷土.” 遽出山並海, 覗西泛之緣. 會國使歸瑞節象魏, 下
仛足而西, 及大洋中, 風濤欻 怒巨艑 182)人不可復振. 大師
與心友道亮, 跨隻板, 恣業風. 通星半月餘, 飄至劒山島. 183)
行之碕184)上, 悵然甚久曰, “魚腹中幸得脫身, 龍頷下185)庶幾
攙186)手, 我心匪石, 其退轉乎.”
169) 석등(釋燈):[總覽]에는 석등(釋燈)으로, 『최고운문집崔孤雲文集』에는 석징(釋
澄)으로 되어 었는데, 석등(釋燈)이 옳다.
170) 표하건나(驃訶健拏):『화엄경華嚴經』에 대한 범음(梵音)인 마하비불략발타건나
표하수다라(摩訶毘佛略勃陀健拏驃訶修多羅 mahāvaipulya-buddha-ganda-vyūhasūtra;
대방광각자잡화엄식경大方廣覺者雜華嚴飾經)를 한역(漢譯)한 것인데, 마하비불략
(摩訶毘佛略 mahāvaipulya)은 대방광(大方廣)으로, 발타건나(勃陀建拏 buddha-ganda)는
불 잡화(佛 雜華)로, 표하(驃訶 vyūha)는 엄식(嚴飾)으로, 수다라(修多羅 sūtra)는 경(經)
으로 번역되므로, ‘표하’는 엄식이고 ‘건나’는 잡화의 뜻이 된다. 따라서 표하건나란
엄식잡화라 번역되므로 찬자가 (잡)화엄(식)인 건나표하의 순서를 바꿔서 인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171) 남천저본색(藍茜沮本色):푸른 물감은 쪽풀(藍草)에서 나왔지만 남초보다 더 푸
르고, 붉은 물감은 꼭두서니(茜草)에서 빼냈지만 천초보다 더 붉다는 말로 제자
가 스승보다 더 뛰어나다는 뜻이다. 『순자』「권학편勸學篇」, “學不可以已 靑取之
於藍而靑於藍 冰水爲之而寒於水”.
172) 고요배지비(顧坳盃之譬):잔의 물을 당(堂) 가운데 움푹 패인 곳에 부으면 겨자
는 배가 되어 뜨지만, 거기에 잔을 놓으면 땅에 닿고 만다는 뜻이니 여건이 조성
되지 않은 곳에서는 뜻을 이룰 수 없다는 비유, 곧 좁은 곳에 있지 않고 넓은 중
국으로 유학갈 계획을 세운다는 비유이다. 『장자』「소요유逍遙遊」, “覆盃水於坳
堂之上 則芥爲之舟 置杯焉則膠 水淺而舟大也”.
173) 피안불요 하필회토(彼岸不遙 何必懷土):피안은 중국을 가리키는 것이고, 회토
는 살고 있는 곳을 말한다. 중국이 그리 멀지 않은데 어찌 고토인 좁은 본국에만
얽매이는가의 뜻. 『논어』「이인里仁」, “君子懷德 小人懷土”.
174) 회국사귀서절(會國使歸瑞節):당나라 목종의 생일에 축하차 보내는 신라의 사
신을 만났다는 말로, 무염화상이 그 배를 동승할 기회를 얻는 것을 말함. 서절은
옥(玉)으로 만든 부절(符節)인데 천자가 제후를 봉할 때 신표로 주는 것으로 제
후가 천자를 직접 조회하거나 사신을 통해 알현할 때는 반드시 지참해야 했다.
175) 상위(象魏):천자의 궁궐을 말하는 것으로, 교지(敎旨)를 상위(궐문)에 걸었던
고사에서 유래함. 『춘추좌전』「애공哀公」3년, “季桓子至 御公立于象魏之外 命救
火者 傷人則止 財可爲也 命藏象魏曰 舊章不可亡也”.
176) 통성(通星):주야(晝夜)이니 밤낮으로 계속 항해한다는 뜻이다.
177) 검산도(劒山島):흑산도(黑山島)이니 섬의 모양이 칼과 같이 생겼으므로 검산도
라고도 한다.
178) 아심비석(我心匪石):내 마음은 돌이 아니라는 말로, 마음이 돌과 같이 구르지 않
고 결심이 굳은 것을 말한다. 『시경』「패풍邶風」‘백주柏舟’, “我心匪石 不可轉也”.
179) [全文] [苑] [總覽]의 迻는 移와 같은 글자임.
180) [全文] [苑]에는 燈. [總覽]의 登은 燈의 오자임
181) [全文] [苑] [總覽]의 曰은 日의 오자임.
182) [全文] [苑]의 은 의 오자이니 는 壞와 같은 글자임.
183) [全文] [苑]은 이니 [總覽]의 는 오자임.
184) [全文] [苑] [總覽]의 碕는 埼와 같음.
185) [總覽]의 下頷는 頷下의 倒置임.
186) [全文]의 搦은 攙의 오자임.
장경 2년(822)에 이르러 조정사187) 왕자 흔188)이 당은포189)에 배를 댔다.
함께 태워 줄 것을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이미 산동의 지부산190) 기슭에
도달하고 나서 지난번의 어려웠던 것과 나중의 쉬움을 돌아보고 해신191)에
게 합장하고는 “큰 파도 속에서 몸을 잘 보존했고 풍마와 잘 싸워 이겨냈
다”고 말하였다. 이어 대흥성 남산 지상사192)에 이르러 화엄경193) 강설하는
사람을 만났는데 부석사(浮石寺)에 있을 때와 같았다. 얼굴이 검은 한 노
인을 만났는데 대사에게 말하길 “멀리 모든 물건(諸物)에서 취(取)하려 하
니 어찌 불(佛)을 알 수 있으랴.”하였고, 대사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크게
깨우쳤다. 이로부터 필묵을 놓고 돌아다니다가 불광사194)에서 여만(如滿)
에게 도를 물었다. 여만은 강서(江西) 마조(馬祖)에게 심인(心印)을 받았
으며195) 향산거사(香山居士) 상서 백락천196)과 속가의 벗이었는데, 응대하
면서 부끄러운 빛을 띠고 “내가 사람을 많이 보았지만 이 신라인과 같은
이는 드물었다. 뒷날 중국이 선(禪)을 잃는다면 장차 동이(東夷)에게 묻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洎長慶初, 朝正王子昕, 艤舟唐恩浦. 請寓載, 許焉. 旣達之罘
山 ,197) 顧先難後易, 土揖海若曰, “珍重鯨波, 好戰風魔.” 行
至大興城南山至相寺, 遇說雜花者, 猶在浮石. 時有一䃜顔耆
年, 言提之曰, “遠欲取諸物, 孰與認而佛.” 大師舌底, 大悟.
自是, 置翰墨, 遊歷佛光寺, 問道如滿. 滿佩江西印, 爲香山白
尙書樂天, 空門友者, 而應對有慙色曰, “吾閱人多矣, 罕有如
是新羅子, 他日中國失禪, 將問之東夷耶.”
187) 조정(朝正):고대에 제후와 신하들이 정월에 천자를 알현하는 것. 새해 인사를
보내는 사신을 조정사(朝正使)라고 한다.
188) 왕자 흔(王子 昕):김흔(金昕 803~849)을 가리킨다. 당시의 조공사나 숙위학생
가운데 왕자로 지칭된 인물들이 반드시 왕자가 아닌 경우가 많았는데, 김흔도
이와 마찬가지로 왕자가 아닌 무열왕 9세손으로 김양(金陽)의 종부형(從父兄)
이었다. 그는 장경(長慶) 2년(822)에 조공사로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하였다. 귀
국하여 남원태수(南原泰守)·강주대도독(康州大都督) 등을 역임하였고, 마침내
이찬이 되어 상국(相國)에 보임되었다. 개성(開城) 4년(839) 대장군이 되어 청해
진의 군대를 대구에서 방어하다가 패함으로써 치사(致仕)하여 소백산(小白山)
에 들어가 은거하다가 대중(大中) 3년(849) 47세의 나이로 죽었다. 『삼국사기』
권44「김양전金陽傳」부(附) 김흔(金昕);이기동,「신라 하대의 왕위계승과 정치
과정」,앞의 책, p.159.
189) 당은포(唐恩浦):경기도 화성시 남양동에 있던 포구이다. 『삼국사기』권35「잡
지」4 지리2, “唐恩郡 本高句麗唐城郡 景德王改名 今復故”.
190) 지부산(之罘山):산동성(山東省) 복산현(福山縣) 동북부에 있는 산. 지부산 또는
속칭(俗稱) 지부도(芝罘島)라고도 한다.
191) 해약(海若):바다신의 이름. 하백(河伯), 영이(永夷)와 같은 류이다. 『초사梵辭』
「원유遠遊」, “使湘靈鼓瑟兮 今海若舞馮夷”.
192) 지상사(至相寺):중국 섬서성 장안의 종남산에 있는 화엄종 사찰. 중국 화엄종의
제2조인 지엄(智儼 600~668)이 이 절에 주석한 까닭에 그를 지상이라고도 한다.
193) 잡화(雜華):『화엄경』을 말한다.
194) 불광사(佛光寺):낙양(洛陽)에 있던 사찰로, 『조당집』권17에서는 불상사(佛爽
寺)라 한다.
195) 패강서인(佩江西印):인(印)은 심인(心印)을 말하고, 강서(江西)는 마조도일을
가리킴. 남악회양에게서 심인을 인가받고, 강서에서 교화에 종사하여 강서의
마조라 하였으므로, 패강서인은 마조에게 심인을 받은 것을 말한다.
196) 백상서낙천(白尙書樂天):중당(中唐)의 시인 백거이(白居易 772~846). 자(字)는
낙천(樂天), 호(號)는 향산거사(香山居士)로 벼슬이 형부상서(刑部尙書)를 지냈
으므로 백상서라 한 것이다. 「장한가長恨歌」와 「비파행琵琶行」의 대표작이 있
으며, 『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 75권중 71권이 전한다.
197) [全文] [苑] [總覽] 모두 같으니 麓과 같음.
길을 떠나 마곡사(麻谷寺)의 보철화상198)을 뵈었다. 일을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힘쓰며, 남들이 어렵다고 하는 바를 스스로 쉽다고 하니, 대중들
이 지목해서 “선문(禪門)의 유검루(庾黔婁)라 할 만큼 남달리 실천하는 사
람이다199)”고 말하였다. 보철스님이 대사의 고생스러운 수행을 갸륵하게
여기고 일찍이 어느 날 대사에게 일러 “옛날 나의 스승 마조화상이 나에
게 결별하시며 말씀하시기를 ‘봄꽃만 번성하고 가을 열매가 적은 것은 보
리수에 오르려는 자들이 슬퍼하고 탄식하는 바이다. 이제 너에게 심인(心
印)을 주니200) 훗날 대중 가운데 뛰어난 공로가 있어 봉할 만한 자를 봉하
여 끊어지지 않도록 하라’고 하셨다. 다시 또 ‘대법(大法)이 동(東)으로 흐
른다는 말201)은 대개 예언202)에서 나왔은 즉 저 해뜨는 곳 신라의 선남자들
의 근기가 거의 무르익은 듯하니, 네가 만약 동방 사람으로서 마음으로 통
할 만한 자를 얻으면203) 잘 지도하라. 지혜의 물이 바다 건너 구석진 곳에
까지 크게 뒤덮도록 한다면 덕이 얕지 않을 것이다’라고 당부하였다. 스
승의 말씀이 귀에 쟁쟁하니 나는 네가 온 것을 기뻐하노라. 이제 인가하여
너로 하여금 신라에서 선사로 으뜸가게 할 것이니 가서 공경히 하라. 그러
면 즉 나는 지금 강서 마조의 대아(大兒)이지만 뒷날에는 해동(海東)의 대
부(大父)가 될 것이니 스승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으라”고 말하였다. 머무
른 지 얼마 안되어 스승이 열반에 드셨다. 검은 수건을 머리에서 벗고 “뗏
목을 이미 버렸는데 배를 어디에다 매려 하는가204)”라고 말하였다.
去謁麻谷寶澈和尙. 服勤無所擇, 人所難, 己心205)易, 衆目曰,
“禪門庾異行.” 澈公賢苦節, 嘗一日告之曰, “昔吾師馬和尙,
訣我曰, ‘春蘤繁, 秋實寡, 攀道樹者所悲吒, 今授若印, 異日徒
中, 有奇功可封者, 封之無使刓.’ 復云, ‘東流之說, 盖出鉤讖,
則彼日出處, 善男子根殆熟矣, 若若得東人, 可目語者, 畎道
之, 俾惠水, 丕冒於海隅, 爲德非淺.’ 師言在耳, 吾喜若徠.
206)今印焉, 俾冠禪侯于東土, 往欽哉. 則我當年, 作江西大兒, 後
世爲海東大父, 其無慙先師矣乎.”㞐207)無何, □師化去. 墨巾
離首, 乃曰, “筏旣捨矣, 舟何繫焉.”
198) 마곡보철화상(麻谷寶澈和尙):마조도일의 제자로 소주(蕭州)의 마곡사(麻谷寺)
에 주석하고 있었던 데서 나온 명칭. 『조당집』권15.
199) 유이행(庾異行):유검루(庾黔婁)의 남달리 지극한 효행(孝行)을 말한다. 남제(南
齊)와 양(梁)에 출사(出仕)한 이로 역(易)의 아들인데, 자(字)는 자정(子貞)이다.
유검루가 잔능령(孱陵令)에 재직할 때, 그의 아버지가 병을 앓게 되자, 천륜(天
倫)의 감득인지 유검루는 마음이 뛰고 온몸에 땀이 흘렀다. 그는 그날로 관직을
사임하고 귀가하여 보니 아버지의 병이 위독하였다. 몸소 간호하면서 “똥맛이
달면 생명이 위태롭다”는 의원의 말을 듣고 아버지의 분(糞)을 받아 단지 쓴지
맛을 보며 향을 사르고 하늘에 기도하였지만 오래지 않아 아버지 ‘역’은 죽었다.
유검루는 장례후 3년상을 지켰다. 무염화상의 수행을 유검루에 비견하여 칭찬
한 것이다. 『양서梁書』권47 「효행전孝行傳」 ‘유검루庾黔婁’.
200) 금수약인(今授若印):약(若)은 너로, 이제 너에게 조사심인(祖師心印)을 준다는
말이다.
201) 동류지설(東流之說):부처님의 교법이 동쪽으로 흐른다고 한 육조혜능의 예언
을 지적한 것으로,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혜능惠能」에 의하면 혜능은 입적
하기 전에 두 가지 예언을 남긴 것으로 되어 있다. 하나는 사후 5, 6년이 지나
“만(滿)”이라는 이름을 지닌 이가 자기의 두골을 훔쳐 가리라는 것과, 또 하나
는 70년이 지나면 동방에서 두 보살이 와서 자기의 법통을 이을 것이라는 것이
다. 그런데 첫번째 예언은 김대비(金大悲)라는 도당유학생(渡唐留學生)이 722년
홍주(洪州) 개원사(開元寺)에서 역사(力士) 장정만(張淨滿)에게 돈 2천냥을 주
고 조계사 육조탑에서 육조의 두골을 훔쳐내게 한 뒤 이를 가지고 신라로 돌아
와 쌍계사의 육조정상탑에 안치함으로써 회자가 되고 있고(『조당집』권18「앙산
仰山」), 두 번째 예언은 무염화상과 범일화상이 850년 경에 그의 법통을 잇고 있
으므로 그의 예언은 대개 맞은 것으로 보고 있다.
202) 구참(鉤讖):원래 구참이란 현기(懸記), 참기(讖記)와 같은 뜻으로 장래에 일어
날 어떤 일을 미리 예언한 것을 일컫는다. 신라의 구참설은, 석가모니불이 마하
가섭에게 부촉한 정법안장(正法眼藏)이 서천(西天) 28조(祖), 동토(東土) 6조를
거쳐 신라에 들어옴으로써 석가불 정법(正法)의 주처(住處)를 회복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본 낭혜화상비의 구참설은, 신라 선종의 입장에서 불법동류의 역할
을 담당한 무염의 출현과 활약을 조사선(祖師禪)의 조인 마조의 권위를 빌려 표
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마곡보철을 중개시켜 마조의 유훈(遺訓)으로서
의 구참설로 불법동류(佛法東流)의 사실을 설하려는 기법을 흡사 『동림전東林
傳』이 반야다라의 참게(讖偈)로써 마조계의 정법의 유래와 역사를 기술하는 방
법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본 비문에 보이는 불법동류의 구참설은 무염을 중
심으로 한 신라 선종의 새로운 움직임을 전하는 것으로서 신라 선종의 주장이
었으며, 『보림전寶林傳』의 여러 참게에 의한 정법상승적 편성을 참조한 기상의
참기를 마조의 입을 통하여 구참설로써 그 근거를 설정하여 불법동류를 뒷받침
하고자 한 의도로 창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정성본,「신라 선종과 구참설」『석산
한종만박사화갑기념 한국사상사』, 1991.
203) 약약득동인 가목어자(若若得東人 可目語者):“네가 만약 눈으로 보기만 하고, 말
을 않더라도 이심전심할 수 있는 근기를 가진 자를 얻으면”이라는 뜻이다.
204) 벌기사의 주하계언(筏旣捨矣 舟何繫焉):스승이 이미 죽었는데 배가 어찌 항상
매여서만 있겠는가의 뜻이다.
205) [全文] [苑]에는 心이고 [總覽]에는 必이니, 뜻으로는 心과 必이 모두 통한다.
206) [全文] [苑] [總覽]의 徠는 還의 뜻이니, 인연이 되어 돌아왔다는 뜻. 徠와 來는
同字이다.
207) [全文]의 㞐는 居의 고자(古字)임
이로부터 유랑함을 바람에 나부끼듯이 하였는데 그 기세를 막을 수 없
었으며 그 뜻은 뺏을 수 없었다. 분수208)를 건너고 곽산209)을 오름에 있어
옛 자취는 반드시 찾아보고 진실한 스님은 반드시 만나 보았다. 무릇 머무
른 곳은 사람과 떨어져 있으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마음의 위태로
움을 편안히 여기고 고생을 달게 여기는 것이었으니 사체210) 부리는 것을
종처럼 하였으나 마음은 임금처럼 받들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오로지 위
독한 병자를 돌보며 고아(孤)와 자식 없는 늙은이(獨)를 구휼하는 것을 스
스로의 임무로 삼았다. 지독한 추위나 혹심한 더위가 닥치고 열이 나고 가
슴이 답답하거나 손이 트고 발에 얼음이 박히더라도 일찍이 게으른 기색
이 없었으니, 이름을 듣는 사람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멀리서 예경을
표하며 떠들썩하게 동방의 대보살(東方大菩薩)이라고 칭송하였다. 그가
30여년 동안 한 일은 이와 같았다.
自爾浪遊, 飄飄然, 勢不可遏, 志不可奪. 於渡汾211)水, 登崞
山, 跡之古必尋, 僧之眞必詣. 凡所止舍, 遠人煙火,212) 要在安
其危, 甘其苦.213) 伇214)四體爲奴虜, 奉一心爲君主. 就是中, 顓
以視篤癃, 恤孤獨, 爲己任. 至祁215)寒酷暑, 且煩暍, 或皸瘃侵,
曾無 216)容, 耳名者, 不覺遙禮, 囂作東方大菩薩. 其三十餘年
行事也, 其如是.
208) 분수(汾水):중국 산서성(山西省)에서 나와 황하(黃河)로 들어 가는 강이다.
209) 곽산(崞山):중국 산서성 곽현 서남에 있는 산이다.
210) 사체(四體):두 팔과 두 다리를 말한다.
211) [全文]의 冷은 汾의 오자임.
212) [全文] [苑]은 火. [總覽]의 大는 火의 오자임.
213) [全文]의 若은 苦의 오자임.
214) [全文]의 役은 伇과 같은 글자임.
215) [全文] [苑]은 祁이니 [總覽]의 祈는 오자임.
216) [全文]의 勸은 의 오자임.
회창 5년(845)에 귀국하니 당제(唐帝)의 명에 의한 것이었다.217) 나라 사
람들이 서로 기뻐하며 “연성의 벽옥(璧玉)218)이 다시 돌아오니 실로 하늘
이 한 일로 이 땅의 행복이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법문을 청하는 이가 이
르는 곳마다 가득하였다. 왕성(경주)에 들어가 어머니를 뵈오니 크게 기뻐
하며 “내가 전일에 꿈을 꾼 것을 돌이켜 보면 곧 우담화219)가 한번 나타난
것이 아니겠는가. 내세(來世)를 제도해 주기를 원하며 나는 다시는 문에
기대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어미의 정220)에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고 말
하였다.
會昌五年來歸, 帝命也. 國人相慶曰, 連城璧復還, 天實爲之,
地有幸也. 自是, 請益者, 所至稻麻矣. 入王城, 省母社, 大歡
喜曰, “顧吾疇昔夢, 乃非優曇之一顯耶. 願度來世, 吾不復撓
倚門之念也.” 已矣.
217) 회창오년래귀 제명야(會昌五年來歸 帝命也):회창은 당 무종(武宗)의 연호
(841~846)로, 회창 5년인 845년에 도교의 도사(道士) 조귀진(趙歸眞)이 당시의
국가 재정난이 불교 탓이라고 무종을 설득하여 불교와 유교를 탄압한 회창폐불
(會昌廢佛)을 단행하였다. 이에 사찰 4만여 개를 파괴하고, 승니 26만명을 환속
시켰으며, 외국 스님는 모두 본국으로 돌아가라는 황제의 명이 내려진 사실을
말한다.
218) 연성벽(連城璧):화씨옥(和氏玉), 형산옥(荊山玉)이라고도 한다. 『한비자』「화씨
和氏」에 나오는 유명한 고사이다. 초나라(楚) 사람 변화가 초의 산중에서 박옥
(璞玉)을 얻어 초의 려왕(厲王)에게 바쳤다. 왕이 옥인(玉人)에게 감정을 시켰더
니 돌이라 판정하므로 왕은 그가 거짓말을 한다 하여 그의 왼쪽 다리를 끊었다.
무왕이 등극하자 변화는 다시 바쳤으나 또다시 거짓이라 하여 그의 오른쪽 다
리마저 끊어버렸다. 문왕이 즉위함을 들은 변화는 옥을 안고 초의 산 밑에서 3
일간 밤낮으로 통곡하였다. 왕이 사람을 보내어 물으니 그는 “나는 양쪽다리를
베인 것이 아까워 우는 것이 아니라 보옥을 돌이라 하고, 정사(貞士)를 광자(誑
者)라고 하는 것이 안타까워 슬피운다”고 말하자, 왕이 그 옥을 세밀히 감정하
여 보옥인 것을 알아내어 화씨벽이라 이름하였다. 그 뒤 이 옥이 조나라 혜왕의
소유가 되었는데, 진나라 소왕이 15성과 바꾸자고 하였으므로 이로 인해 연성
벽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219) 우담(優曇):우담발라화(優曇跋羅華)로, 인도 전설의 꽃. 삼천년에 한번 피며, 이
꽃이 필 때 금륜명왕(金輪明王)이 나타난다고 한다.
220) 의문지념(倚門之念):어머니가 문에 기대어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 『전국책戰國策』권13 「제책齊策」, “王孫賈年十五事閔王 王出走 失王之
處 其母曰 女朝出而晚來 則吾倚門而望 女暮出而不還 則吾倚閭而望 女今事王
王出走 女不知其處 女尚何歸”.
이에 북쪽으로 가서 몸을 마치도록 있을 곳을 눈여겨 골랐다. 마침 왕자
(王子) 흔(昕)이 벼슬을 그만두고221) 산중의 재상222)처럼 지내고 있었는데
우연히 만나 바라는 바가 합치되었다. 왕자 흔은 “선사와 나는 같이 용수
을찬223)을 조상으로 하는데 선사는 안팎으로 용수의 후손이 되시니224) 참
으로 놀라와 미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푸른 바다 밖에서 소상의 고사225)
를 이루었으니 친구의 인연이 참으로 얕지 않을 것입니다. 한 절이 웅천주
서남쪽 모퉁이226)에 있는데 그 곳은 나의 선조 임해공227)[조(祖)의 휘는 인
문(仁問)인데 당이 예맥을 정벌한 공의 대가로 봉하여 임해군공으로 봉하였다]
이 봉지(封地)로 받은 곳입니다. 중간에 재해를 입어 절이 반쯤 재가 되었
으니228) 어질고 명철한 분이 아니라면 누가 능히 없어져 버린 것을 일으키
고 끊어진 것을 이어지게 하겠습니까. 억지로라도 이 늙은이229)를 위해 머
물러 주십시오”하고 청하니, 대사가 “인연이 있으면 머물게 되겠지요”라
고 대답하였다.
廼北行, 擬目選終焉之所. 會王子昕, 懸車爲山中宰相, 邂逅
適願, 謂曰, “師與吾俱祖龍樹乙粲, 則師內外爲龍樹令孫, 眞
瞠若不可及者. 而滄海外躡蕭湘故事, 則親舊緣, 固不淺. 有一
寺, 在熊川州坤隅, 是吾祖臨海公[祖諱仁問唐醻伐獩貊230)功封爲
臨海郡公], 受封之所. 間刦燼231)流232)菑, 金田半灰, 匪慈哲, 孰
能興滅繼絶, 可强爲杇夫住持乎.” 大師答曰, 有緣則住.
221) 현거(懸車):치사(致仕). 벼슬을 그만두는 것. 『한서』「설광덕전薛廣德傳」에 한
의 설광덕이 관직을 사퇴하고 은거한 이후 패(沛)에 돌아가 임금이 하사한 안거
(安車)를 매달아 놓고, 자손에게 전하여 광영을 보인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222) 산중재상(山中宰相):산중에 은거하면서 국정의 자문에 응하는 현사(賢士). 『양
서』, 『남사南史』권76 「도홍경전陶弘景傳」에 의하면 양나라의 도홍경이 구곡산
(句曲山)에 은거하면서 여러번의 초빙에도 나오지 않았으므로 양무제가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그를 찾아가 물었으므로 당시 그를 산중재상이라 한 고사
에서 나온 말이다.
223) 용수을찬(龍樹乙粲):용수는 신라 진지왕(眞智王 576~579)의 아들 용춘(龍春)이
고, 을찬은 이찬(伊飡)이다. 진지왕이 왕위에 오른 지 4년만에 폐위되어 그는 왕
위에 오르지 못하였으나, 이찬으로 많은 공을 세우고 뒤에 문흥대왕(文興大王)
으로 추봉되었다.
224) 사내외위용수령손(師內外爲龍樹令孫):무염화상이 용춘인 용수의 10세손인 동
시에, 용수보살의 후손이므로 내외에 다 용수의 후손이 됨을 이르는 말이다.
225) 소상고사(蕭湘故事):중국에서 소상강을 구경하면서 우연히 만난 것을 말한다.
상수(湘水)와 소수(蕭水) 근처의 경치가 매우 아름다워서 소상팔경(蕭湘八景)이
다. 남조(南朝) 양(梁)의 유운(柳惲)의 『강남곡江南曲』 에 “洞庭有歸客 蕭湘逢故
人”의 구절이 있다.
226) 웅천주곤우(熊川州坤隅):웅천은 공주(公州)로, 공주 서남쪽지방이라는 뜻.
227) 임해공(臨海公):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제2자인 김인문(金仁問)의 봉호(封
號). 신라와 당을 잇는 외교로 삼국통일에 큰공을 세워 태대각간(太大角干)이 되
었는데, 신라와 당과의 전쟁이 벌어지자 문무왕 대신 신라왕에 봉해졌으나, 신
라의 사죄로 곧 취소되었다.『삼국사기』권1「신라본기」1 ‘태종춘추공太宗春秋
公’에 의하면 신라에 돌아와서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228) 겁신류치금전반회(劫燼流菑金田半灰):화재가 일어나 사원이 반이나 소실되었
다는 뜻. 겁신은 괴겁때의 불이니 화재를 뜻하고, 유치(流菑)란 재앙이 흐른다는
뜻이며, 금전(金田)은 수달장자가 금을 땅바닥에 깔아 기타태자(祇陀太子)의 공
원을 매입하여 기원정사(祇園精舍)를 지은 데서 따온 말로 사원을 말한다.
229) 오부(杇夫):나이들어 쓸모없는 사람.
230) [全文]의 貌은 貊의 오자임.
231) [苑]의 은 燼과 같음.
232) [全文]의 㳅은 流의 古字임.
대중년초233)에 처음으로 나아가 거처하면서 말끔히 정제(整齊)하고 꾸
미니, 얼마 안되어 도가 널리 행해지고 절이 크게 이루어졌다. 이로 말미
암아 사방에서 진리를 묻는 사람들이 천 리를 반걸음으로 여기고 찾아오
니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문도(門徒)들이 번성하였다. 대사는
종(鍾)이 두드림을 기다린 것처럼 하고, 거울이 고달픈 줄 모르는 것과 같
이 하였으니,234) 찾아오는 자는 지혜로 그 눈을 뜨게 하고, 법열[法喜]로 그
배를 채워 주었으며, 뜻을 정하지 못한 무리들235)을 깨우쳐 주고, 무지한
습속236)을 변화시키지 않음이 없었다.
大中初始就居, 且肹237)飭之, 俄而道大行, 寺大成. 繇是238)四遠
問津輩, 視千里猶䞨步, 其 不億, 寔繁有徒. 大師, 猶鍾待扣
而鏡忘罷, 至者, 靡不以慧炤噵其目, 法喜娛其腹, 誘憧憧之
躅, 變蚩蚩之俗.
233) 대중초(大中初):대중은 당나라 선종(宣宗)의 연호(847~859)로, 대중 초는 847년
경으로 신라 문성왕 9년 무렵이다.
234) 유종대구이경망파(猶鍾待扣而鏡忘罷):무염화상이 마치 범종이 크게 치면 크게
울리고, 작게 치면 작게 울리듯이 하였으며, 『예기』「학기學記」의 “善待問者如撞
鐘 叩之以小者則小鳴 叩之以大者則大鳴”같이, 거울이 만물(萬物)이 와닿는대로
비추듯 법문을 묻는대로 척척 대답하였다는 뜻이다.
235) 동동지촉(憧憧之躅):동동은 뜻이 바로 잡히지 않아 머뭇거리고 방황하는 모양.
『주역周易』「함괘咸卦」의 “憧憧往來 朋從爾思”에 대해 『석문釋文』은 “뜻이 정해
지지 않은 것이다. 意未定也”라고 하였다. 또는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무리들의
끊임없는 발자취.
236) 치치지속(蚩蚩之俗):어리석고 저속한 풍속을 이른다
237) [苑]에는 肹. [全文]에는 盻이나 肹의 오자임.
238) [全文]은 是以四遠으로 되었는데 이(以)는 없애야 함.
문성대왕(文聖大王)이 그 교화함을 듣고, 임금의 덕화를 돕지 않음이 없
다고 하면서, 매우 본받을 만하다는 편지를 보내 크게 위로하였다. 대사가
산중재상에게 답한 네 마디239)를 아름답게 여겨 사찰의 이름을 바꿔240) 성
주(聖住)라 하고, 대흥륜사(大興輪寺)에 예속시켰다. 대사가 사자(使者)에
게 대답하되 “절을 성주로 이름한 것은 사원으로서는 참으로 영광스럽고,
지극한 총애가 될 것입니다. 용렬한 소승이 재능도 없으면서 높은 자리에
있으니,241) 이는 바람을 피한 새가 안개 속에 숨어 있는 것과 같이 부끄러
울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文聖大王, 聆其運爲, 莫非裨王化, 甚㤎之. 飛手敎, 優勞且多,
大師答山相之四言, 易寺牓爲聖住, 仍編錄大興輪寺. 大師醻
使者曰, “寺以聖住爲名, 招提固所爲榮, 至寵. 膚僧濫吹高藉,
寔避風斯媲242)而隱霧, 可慙矣.”
239) 산상지사언(山相之四言):유연즉주(有緣則住)란 네글자를 말한다.
240) 역사방(易寺牓):본래 오합사(烏合寺)였던 옛이름을 성주사로 사액(寺額)을 고
쳤다는 말이다.
241) 부승람취고자(膚僧濫吹高藉):못난 승이 외람되게 높은 자리를 차지하였다는
말.
242) [全文]의 은 媲의 오자임.
그 때 헌안대왕243)이 단월244)이며 동생인 서발한245) 위흔246)과 더불어 남
북상247)이 되었다[각기 그 관직을 두는데 좌·우상이 있는 것과 같다]. 멀리서
제자의 예248)를 행하고 차와 향249)을 가지고 매달 찾아보니250) 명성이 동국
(東國)에 자자하게 퍼지자, 사류(士類)들이 대사의 선문(禪門)을 알지 못
하는 것을 일세의 수치로 여겼다. 선사를 뵈온 자는 물러 나오면 반드시
탄식하면서 “직접 뵙는 것이 귀로 듣는 것보다 백 배나 낫다. 입에서 말씀
이 나오기도 전에 마음에 이미 와 닿았다”고 말하였다. 또한 원숭이같이
교활하고 호랑이같은 사나운 성질을 가진 사람251)이라도 그 조급함을 멈
추었고 사나움을 고치어 마침내 착한 길로 다투어 나아갔다.
時, 憲安大王, 與檀越季舒發韓魏昕, 爲南北相[各居其官猶左右
相]. 遙展攝齋禮, 贄以茗馞, 使無虛月, 至使名 東國, 士流,
不識大252)師門, 爲一世羞. 得禮足者, 253)必唶曰, “面謁倍百
乎耳聞, 口未出而心已入.” 抑有猴虎而冠者, 亦熄其趮諽,
254)其虣而傹犇馳善道.
243) 헌안대왕(憲安大王):신라 제47대 임금(857~860)으로 휘(諱)는 의정(誼靖:祐靖)
이다. 전왕(前王)인 문성왕이 숙부로 신무왕(神武王)의 이모제(異母弟)인데, 문성
왕의 유조(遺詔)로 왕위에 올랐으나, 재위 5년만에 사위인 응렴[景文王]에게 왕
위를 물려주고 병사(病死)하였다. 『삼국사기』권11「신라본기」11 ‘헌안왕憲安王’.
244) 단월(檀越):김흔을 가리킨다. 김양의 종부형(從父兄)이다. 『삼국사기』권44「김
양전」부 김흔. 주 188) 참조.
245) 서발한(舒發韓):신라 17관등의 최상위관등인 이벌찬(伊伐飡)의 다른 명칭. 주
다(酒多)에서 유래되어 각우(角于), 이벌찬(伊伐飡), 우벌찬(于伐飡), 각찬(角粲),
서벌감(舒伐邯) 등으로도 쓰인다.
246) 위흔(魏昕):김양(金陽 808~857)의 자(字)이다. 그는 무열왕 9세손으로서 증조
(曾祖)는 주원(周元), 조(祖)는 종기(宗基), 부(父)는 정여(貞茹)이다. 흥덕왕 3년
(828) 고성군(固城郡) 태수(太守)에 부임한 이래로 중원대윤(中原大尹), 무주도
독(武州都督) 등을 역임하였다. 개성 원년(836) 흥덕왕이 죽자 그 후사를 놓고
왕의 당제 균정(均貞)과 당제의 아들 제륭(悌隆)이 다투게 되었는데, 김양은 균
정의 아들 우징(祐徵)과 균정의 매서(妹壻) 서징(舒徵)과 함께 균정을 옹립코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마침내 개성 4년(839)에는 청해진 장보고의 도움으로 우
징(신무왕)을 옹립하였으며, 신무왕의 태자 문성왕이 왕위를 이으면서 소판(蘇
判)이 되어 병부령(兵部令)·시중(侍中) 등을 역임하였고, 대중(大中) 11년(857)
50세의 나이로 죽자 서발한(舒發韓)에 추증되었다. 『삼국사기』권44「김양전」.
247) 남북상(南北相):구체적으로 어떤 관직을 가리키는지 확인할 수 없으나, 위흔
(魏昕:金陽)이 소판겸병부령을 거쳐 847~848년간 시중을 역임하였던 것으로
보아 헌안왕은 적어도 위흔과 대등하거나 혹은 그 이상의 관직 아마도 병부령
직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문성왕 11년(849) 상대등이 된 이찬 의정(義
正)은 훤정(諠靖:헌안왕)과 동일 인물로 판단되어, 여기에서의 남북상이란 상대
등과 시중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이기동,「신라하대의 왕위계승
과 정치과정」,앞의 책, pp.170~171.
248) 섭재(攝齋):제자가 스승 앞에서 공손히 하는 태도로,『논어』「향당鄕黨」에 “攝齊
升堂鞠躬如也”라 한다.
249) 명발(茗馞):차와 향을 말한다.
250) 사무허월(使無虛月):빈 달이 없이 매월 끊이지 않고 계속 찾아온다는 뜻이다.
251) 후호이관자(猴虎而冠者):원숭이같이 교활하고, 호랑이같이 사나운 성질을 가
진 이라는 뜻이다.『사기』「항우본기項羽本紀」, “楚人沐猴而冠耳”.
252) [全文]에는 大師門이라는 三字가 탈락됨.
253) [全文]의 , [苑] [總覽]의 이니 어느 것이 옳은지 未詳함.
254) [全文]의 는 諽의 오자임.
헌안왕이 왕위를 계승하고 교서를 내려 도움의 말씀을 청하니, 대사가
답하여 “주풍(周豐)이 노공(魯公)에 대하여 한 말255)에 뜻이 담겨 있습니
다. 『예기』에 드러나 있으니, 청컨대 좌우명을 삼으소서”라고 하였다. 태
사(太師)에 추증된 선대왕256)이 즉위함에 공경하고 존중함이 선조257)의 뜻
과 같으면서도 날로 더욱 두터워서 무릇 시행할 것은 반드시 달려가 물은
후에 거행하곤 했다. 함통 12년258) 가을에 교서를 보내어259) 전령으로 부르
며 “산림(山林)은 어찌 가까이 여기시며 성읍은 왜 소원한가”라고 하였다.
대사가 생도(生徒)에게 일러 “급히 백종(伯宗)을 부르듯 하시니260) 깊이 혜
원공(慧遠公)에게 매우 부끄럽도다.261) 그러나 도가 장차 행해지려 하는데
때를 잃을 수 없으니 (부처님의) 부촉262)을 생각하기 때문에 내 가리라” 하
였다. 홀연히 서울263)에 이르러 배알하니 선대왕(先大王)이 면복264)차림으
로 절하고 스승으로 삼았다. 군부인(君夫人:왕비), 세자(世子) 및 태제상국
(太弟相國)265)[추존하여 혜성대왕], 여러 공자(公子), 공손(公孫)들이 둘러싸
고 우러르는 것이 한결같았다. 하나 같이 옛사찰의 벽에 서방(西方)의 여
러 국장(國長)들이 부처님266)을 모신 모습을 그려 수놓은 것 같이 하였다.
曁, 憲王嗣立, 賜書乞言, 大師畣267)曰, “周豐對魯公之語, 有旨
哉. 著在禮經, 請銘座側.” 逮贈太師先大王卽位, 欽重如, 先
朝志, 而日加厚焉, 㝡所施爲, 必馳問然後擧. 咸通十二年秋,
飛鵠頭書, 以傳召曰, “山268)林何親, 城邑何踈.” 大師謂生徒
曰, “遽命伯宗, 深慙遠公. 然道之將行也, 時乎不可失, 念付
囑故, 吾其往矣.” 欻爾至轂下, 及見, 先大王, 冕服拜爲師. 君
夫人, 世子, 旣太弟相國[追奉尊謚惠成大王], 群公269)子公孫, 環
仰如一. 一如古伽藍, 繢壁面, 寫出西方諸國長, 侍勃陁樣式.
255) 주풍대노공지어(周豊對魯公之語):주풍은 노나라 애공(哀公) 때의 은사(隱士)인
데, 임금에게 예의(禮義)와 충신(忠信), 성실(誠實)이 있어야 백성이 믿고 따른
다고 대답한 말을 뜻한다. 『예기』「단궁檀弓」‘하’, “魯人有周豊也者 哀公執摯請
見之 而曰 不可 公曰 我其已夫 使人問焉 曰 有虞氏未施信於民而民信之 憂后氏
未施敬於民而民敬之 何施而得斯於民也 對曰 墟墓之間 未施哀於民而民哀 社稷
宗廟之中 未施敬於民而民敬 殷人作誓而民始畔 周人作會而民始疑 苟無禮義忠
信誠慤之心以泣之 雖固結之 民其不解乎”.
256) 증태사선대왕(贈太師先大王):신라 제48대 경문왕으로, 증태사는 당이 경문왕
사후(死後)에 내린 시호(諡號)이고, 진성왕(眞聖王)의 부왕(父王)이다.
257) 선조(先朝):문성왕과 헌안왕.
258) 함통 십이년(咸通十二年):함통은 당나라 의종(懿宗)의 연호(860~873)로, 함통
12년은 신라 경문왕 11년(871)이다.
259) 곡두서(鵠頭書):왕의 교서(敎書)이다. 천자(天子)의 조서(詔書)는 자니색지(紫
泥色紙)로써 봉(封)하여 단봉두(丹鳳頭)를 그린 다음 오색사(五色絲)로 묶고, 왕
의 조서는 황니색지(黃泥色紙)로써 봉하여 황곡두(黃鵠頭)를 그린 다음 채사(綵
絲)로 묶었던 데서 나온 고사이다.
260) 거명백종(遽命伯宗):급히 진후(晉侯)가 백종(伯宗)을 부르듯하였다는 말로,
『춘추좌전』「성공成公」5년에 양산(梁山)이 무너지자 진후가 백종을 불러 일을
수습하려 한 사실을 인용한 것이다. “梁山崩 晉侯以傳召伯宗 伯宗辟重 曰 辟傳
重人曰 待我 不如捷之速也 問其所 曰 絳人也 問絳事焉 曰 梁山崩 將召伯宗謀之
問將若之何 曰 山有朽壞而崩 可若何 國主山川 故山崩川竭 君爲之不擧降服乘縵
徹樂出次 祝幣 史辭以禮焉 其如此而已 雖伯宗 其若之何 伯宗請見之 不可 遂以
告 而從之”.
261) 심참원공(深慙遠公):무염 자신이 왕의 부름에 나아간 것이 비록 국가(國家)와
불법(佛法)을 위한 것이지만, 혜원법사(慧遠法師)가 세 번이나 천자의 소명(召
命)을 받고도 30년간 여산에서 내려오지 않았던 것에 비해 심히 부끄럽다는 뜻
으로 쓰인 말로 “慧遠卜居廬阜影不出山 迹不入俗”이라는 말로도 쓰인다. 『양고
승전梁高僧傳』권6「석혜원전釋慧遠傳」(대정장50, p.357c23);『불조역대통재佛祖
歷代通載』권7(대정장49, p.526a23).
262) 부촉(付囑):부처님의 설법 후에 청중 가운데 어떤 이를 가려내어 그 법의 유통
(流通)을 촉탁하는 것이 상례였는데, 이것을 부촉, 촉루(囑累), 누교(累敎)라 하
며, 경(經)에 부촉을 말한 부분을 촉루품(囑累品) 또는 촉단(囑段)이라 한다. 부
촉의 대의(大意)는 중생 또는 세간 교화이다.
263) 곡하(轂下):임금의 슬하라는 말로 수레가 많이 다니는 왕도(王都)를 말한다.
264) 면복(冕服):면류관과 예복을 말한다.
265) 태제상국(太弟相國):경문왕의 아우로 재상을 지낸 김위홍(金魏弘:?~888)을 말
하는데, 죽은 후에 혜성대왕(惠成大王)으로 추증되었다.
266) 발타(勃陀): buddha. 한역(漢譯)하여 부타(浮陀), 부도(浮圖), 발타(勃陀), 부타
(部陀), 발태(跋駄) 등으로 음사(音寫)되는데 각자(覺者)로 번역되며 부처님을
말한다.
267) [全文]에는 答. 畣은 答의 고자(古字)임.
268) [全文]의 琦는 山의 오자임.
269) [全文]에는 群公의 公字 다음에 公자가 하나 더 있으니 이는 없애야 함
임금이 “제자는 재주가 없지만, 글짓는 것을 조금 좋아하였습니다. 일찍
이 유협270)의 『문심조룡文心雕龍』271)을 보니 ‘유(有)에만 머물거나 무(無)
만을 지키면 한갓 편벽된 견해에만 치우치게 된다. 진리의 본원(本源)에
나아가고자 하면 그것은 반야(般若)의 끊어진 경지이다’는 말이 있었습
니다. 경지가 끊어졌다(絶境)는 것을 혹 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
니, 대사가 대답하되 “경지가 이미 끊어졌으면 진리(眞理)도 없는 것입니
다. 이것은 심인(心印)이니 묵묵히 행할 뿐입니다”고 말하였다. 임금이 “과
인이 진실로 조금 더 나아가기를 청합니다”라고 하니, 이에 문도 중 쟁쟁
한 이에게 명하여 교대로 설법하도록 하여272) 조용히 법문을 다하니273) 막
힌 것을 뚫고, 번거로운 것은 사라져, 마치 가을 바람이 음애(陰靄)한 구름
을 보내듯 하였다. 이에 임금이 크게 기뻐서 대사를 늦게 보게 된 것을 한
하면서 “몸을 공손히 남면(南面)한 이에게 선종(禪宗)을 가르쳐 주시니,274)
순(舜)은 어떤 사람이고, 또한 나는 어떤 사람인가”275)라고 말하였다.
上曰, “弟子不侫, 小好屬文. 嘗覽劉勰文心, 有語云, ‘滯有守
無, 徒銳偏解. 欲詣眞源, 其般若之絶境.’ 則境之絶者, 或可
聞乎.” 大師對曰, “境旣絶矣, 理無矣, 斯印也, 行爾.” 上曰,
“寡人, 固請少進.” 爰命徒中錚錚者, 更手撞擊, 舂276)容盡聲,
剖滯祛煩, 若商飆之劃陰靄然. 於是上大喜, 懊見大師晩曰,
“恭已南面, 司南南宗, 舜何人哉, 余何人也.”
270) 유협(劉勰):465~520.양나라 거현(莒縣:지금의 산동성 일조시) 출신으로 자(字)
는 언화(彦和)이다. 일찍 부모를 잃고 집이 가난하여 사문(沙門)에 의해 의식(衣
食)을 해결하였고, 널리 경론에 통달하였다. 천감년간(天監年間:502~519)에 보
병교위(步兵校尉)의 벼슬을 지냈다. 혜진(慧震)과 함께 정림사(定林寺)에서 경
을 연구하다가 후에 출가하여 혜지(慧地)라는 법명을 받았다. 저서는 문집 이외
에 『문심조룡文心雕龍』이 있다. 『양서』권50, 『남사南史』권72.
271) 문심(文心):유협의 『문심조룡』이니 10권으로 된 문학이론서이다
272) 경수당격(更手撞擊):왕이 무염대사에게 법문을 청하니, 그는 제자 가운데 쟁쟁
(錚錚)한 자에게 미루어 법문(法門)하게 하자, 제자가 왕이 묻는대로 척척 대답
하여 마치 번갈아 종을 치듯 설법해 주었다는 말이다.
273) 용용진성(舂容盡聲):용용은 종을 계속 거듭친다는 뜻으로 설법한다는 말이다.
『예기』「학기學記」에 “善學者師逸而功倍 又從而庸之 不善學者師勤而功半 又從
而怨之 善問者如攻堅木 先其易者 後其節目 及其久也 相說以解 不善問者反此
善待問者如撞鐘 叩之以小者則小鳴 叩之以大者則大鳴 待其從容 然後盡其聲 不
善答問者反此 此皆進學之道也”라 하였다.
274) 사남남종(司南南宗):육조혜능을 이은 남종선의 종지를 가르쳐 준다는 말이다.
275) 순하인재여하인야(舜何人哉余何人也):누구라도 순과 같은 성인의 경지에 도달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 『맹자』「등문공滕文公」‘상’에 “成覸謂齊景公曰 彼丈
夫也 我丈夫也 吾何畏彼哉 顔淵曰 舜何人也 予何人也 有爲者亦若是 公明儀曰
文王我師也 周公豈欺我哉”라한 안연(顏淵)의 말이다.
276) [全文]의 春은 舂의 오자임.
물러나온 후 경상(卿相)들이 맞이하여 더불어 이야기 하느라 겨를이 없
었고, 사인(士人)과 서인(庶人)들이 마음을 기울여 받드니 떠나려 하나 갈
수 없었다. 이로부터 나라 사람들이 모두 옷 속의 구슬(衣珠)을 알았고, 이
웃의 노인도 처마 밑의 보배를 엿보는 것을 그만두게 되었다.277) 조금 있
다가 새장 속에 있는 것과 같은 고통을 느껴278) 곧 도망하듯 가버렸다. 임
금이 억지로 할 수 없음을 알고, 이에 교서279)를 내리니 상주(尙州)의 심
묘사(深妙寺)가 서울에서 멀지 않으므로 선나별관(禪那別館)으로 할 것을
청하였다. 스님은 굳게 사양했으나 할 수 없어 그 곳으로 가서 머물게 되
었다. 하루를 머물더라도 반드시 수리하였으니, 엄연하게 훌륭한 절이 되
었다.
旣出卿相延迓, 與謀不暇, 士庶趍承, 欲去不能. 自是, 國人皆
認衣珠, 隣叟罷窺廡玉焉. 俄苦樊280)笯中, 卽亡去. 上知不可
强, 迺降芝檢, 以尙州深妙寺, 不遠京, 請禪 281)別舘. 辭不獲,
往㞐之.281) 一日必葺,282) 儼若化城.
277) 인수파규무옥(隣叟罷窺廡玉):사랑채 마루밑에 방치된 귀중한 보옥(寶玉)을 아
무도 몰랐는데, 이웃사람이 알아냈다는 뜻으로, 중생들이 자성(自性)의 진보(眞
寶)를 알지 못하였는데 무염화상이 깨우쳐 주어 알게 되었으므로, 이웃집 노인
이 알려줄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윤문자尹文子』「대도大道」, “魏田父有
耕於野者 得寳玉徑尺 弗知其玉也 以告隣人 隣人隂欲圖之 謂之曰 怪石也 畜之
弗利其家 弗如一復之 田父雖疑 猶錄以歸置於廡下 其夜玉明 光照一室 田父稱家
大怖 復以告隣人 曰 此怪之徵 遄棄殃可銷 於是遽而棄於遠野 隣人無何 盜之以
獻魏王 魏王召玉工相之 玉工望之 再拜而立 敢賀曰 王得此天下之寳 臣未甞見
王問價 玉工曰 此玉無價以當之 五城之都 僅可一觀 魏王立賜獻玉者千金 長食上
大夫祿”.
278) 아고번노중(俄苦樊笯中):번노는 새 기르는 도구로서, 무염화상이 비록 왕의 간
곡한 부탁에 의해 궁중에 주석하고 있었지만, 마치 새장에 갇힌 것과 같다는 말
이다.
279) 지검(芝檢):왕의 친서이니, 수결(手結)과 같은 것이다. 『서명기瑞命記』, “王者德
仁 則芝草生 故王之手書 謂芝檢”.
280) [全文]의 은 樊의 오자임.
281) [全文] [苑] [總覽]의 郍은 那의 오자임.
282) [全文]의 芍과 [苑] [總覽]의 는 葺의 오자임.
건부 3년283) 봄에 선대왕이 몸이 편치 않아 근시(近侍)에게 명하기를 “빨
리 우리 대의왕(大醫王)을 모셔 오라”284)고 하였다. 사자(使者)가 심묘사
(深妙寺)에 이르니 대사가 “산승(山僧)의 발이 대궐에 닿는 것이 한번도
지나치다 할 것인데,285) 나를 아는 자는 성주(聖住)가 무주(無住)로 바뀌
었다 할 것이고, 나를 모르는 사람들은 무염(無染)이 유염(有染)이 되었다
할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우리 임금과 더불어 향화인연286)이 있는데
세상 떠날 날287)이 기약되어 있으니, 어찌 나아가 한번 작별하지 않으랴”
고 말하고는, 다시 궁궐에 이르렀다. 약언(藥言)인 법문과 잠계288)를 베푸
니 곧 병이 나았으므로 온 나라가 신비하게 여겼다. 그러나 달을 넘겨 (임
금이 죽으니)289) 헌강대왕(獻康大王)이 익실(翊室)에 거하게 되었다.290) 울
면서 왕손 훈영291)에게 명하여 뜻을 알리되 “내가 어려서 부친상292)을 만나
정치는 잘 알지 못하지만 임금이 되어 부처님을 받들어 널리 많은 사람을
구제하는 것은 홀로 자기 몸만을 착하게 하는 것과 같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대사는 멀리 가지 마시고 거처할 곳을 마음대로 택하
십시오” 하였다. (대사가) 대답하여 “옛날의 스승으로 6경293)이 있고 지금
보필하는 신하로는 3경(卿)이 있습니다. 늙은 산승이 무어라고 앉아서 누
리와 좀벌레처럼 땔나무와 좋은 음식을 좀먹겠습니까.294) 세 마디가 있사
오니,295) 어찌 더 드릴 말씀이 있겠습니까. ‘능관인296)’입니다”라고 하였다.
乾符三年春, 先大王不預, 命近侍曰, “亟迎我大醫王來.” 使
至, 大師曰, “山僧足及王門, 一之謂甚, 知我者, 謂聖住爲無
住, 不知我者, 謂无染爲有染乎, 然顧與吾君, 有香火因緣, 忉
利之行, 有期矣, 盍就一訣.” 復步至王㞐. 設藥言施箴戒, 覺
中愈, 擧國異之. 旣踰月, 獻康大王, 居翌室. 泣命王孫勛榮,
諭旨曰, “孤, 幼遭閔凶, 未能知政, 致君奉佛, 誧濟海人, 與獨
善其身, 不同言也, 幸, 大師, 無遠適, 所㞐唯所擇.” 對曰, “古
之師則六籍在, 今之輔則三卿在. 老山僧, 何爲者, 坐蝗蠹桂玉
哉. 旣297)有三言, 庸可留獻. 曰, ‘能官人’.”
283) 건부삼년(乾符三年):건부는 당나라 희종(僖宗)의 연호(874~879)로, 건부 3년은
신라 헌강왕 2년인 876년이다.
284) 영아대의왕래(迎我大醫王來):왕이 아파 누워서 우리 대의왕이신 무염화상을
빨리 모셔오라는 뜻이다.
285) 일지위심(一之謂甚):왕의 청(請)으로 왕성(王城)에 한번 나가는 것도 본의가 아
니었는데, 또 어찌 나가겠느냐는 뜻이다.
286) 향화인연(香火因緣):불교와 관련한 인연을 말한다.
287) 도리지행(忉利之行):여기서는 임금의 죽음을 말하는데, 도리(忉利)는 욕계육
천의 두 번째 하늘인 도리천(忉利天)이다. 승천(昇天) 또는 빈천(賓天)이라고도
한다.
288) 잠계(箴戒):국정(國政)에 대한 여러 가지 좋은 정책을 자문해 주는 것이다.
289) 『삼국사기』권11「신라본기」11 경문왕景文王에는 경문왕의 죽음을 건부 2년 7월
8일이라 하니 앞의 건부 3년과 1년의 차이가 있다.
290) 거익실(居翌室):경문왕이 돌아가시자 헌강왕이 상주(喪主)로 곁방에 거하게 된
것을 말한다.
291) 훈영(勛榮):훈영(勳榮)으로도 쓴다. 「창림사무구정탑원기昌林寺無垢淨塔願
記」, “監修造使從叔新授康州泗受縣令金勳榮”.
292) 민흉(閔凶):헌강왕이 어려서 부모의 상을 당하였다는 뜻이다.
293) 육적(六籍):① 유교의 육경(六經)은『시경』,『서경書經』,『역경易經』,『예기禮
記』,『춘추春秋』,『악경樂經』이고, ② 불교의 육종경(六種經)은 『대반야경大般若
經』,『금강경金剛經』,『유마경維摩經』,『능가경楞伽經』,『원각경圓覺經』,『능엄
경楞嚴經』이다.
294) 황두계옥(蝗蠹桂玉):황(蝗)은 곡식의 싹을 먹는 벌레이고, 두(蠹)는 좀벌레이
며, 계옥(桂玉)은 땔나무와 식량을 말한다. 『전국책戰國策』「초책楚策」, “蘇秦之
楚 三日乃得見乎王 談卒 辭而行 楚王曰 寡人聞先生若聞古人 今先生乃不遠千
里而臨寡人 曾不肯留 願聞其說 對曰 楚國之食貴於玉 薪貴於桂 謁者難得見如鬼
王難得見如天帝 今令臣食玉炊桂 因鬼見帝 王曰 先生就舍 寡人聞命矣”.
295) 기유삼언(旣有三言):부왕이 자신에게 정치는 능관인(能官人)이라는 삼자(三
字), 즉 정치는 정치에 능한 사람에게 맡기라는 유훈(遺訓)을 남겼다는 말이다.
296) 능관인(能官人):“능력있는 관리”, 즉 “능력있는 이를 관리로 등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능력’이란 유학적인 능력과 실무적인 행정능력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그것은 신분과는 거리가 먼 요소들이다. 따라서 6
두품 출신인 낭혜는 신분에 의하여 모든 특권과 제약이 가해지던 신라의 골품
체제 아래에서 신분보다는 능력에 따라 관리를 등용할 것을 주장하였다고 볼
수 있다. 전미희,「신라 경문왕·헌강왕대의 ‘능관인’ 등용정책과 국학」『동아연
구』17, 1989.
297) [全文]의 就는 旣의 오자임.
이튿날 (대사는) 산으로 가는 행장을 꾸리어 새처럼 가버렸다. 이로부
터 역마가 소식을 전하느라 그림자가 산중에 줄을 이었다. 역졸들은 가는
곳이 성주사인 것을 알면 모두 뛸듯이 기뻐하며 손을 모아 말고삐를 고쳐
잡고 왕사(王事)를 위한 노정이 조금이라도 막힐까 염려하였다. 이로 말
미암아 기상시298)의 무리들은 임금의 급한 명령을 받아 쉽게 거행하였다.
당 희종(僖宗)이 (헌강왕을) 책봉하던 해299)에 국내에서 도를 말할 수 있는
자에게 이로움을 늘리고 해로움을 없앨 방책(方策)을 바치도록 하고, 특
별히 만전300)에 글을 써보내니 “하늘의 총애를 입었음은 그럴 만한 까닭이
있어서이다.” 나라에 도움이 되는 물음을 내린데 대해 대사는 하상지301)가
송문제(宋文帝)에게 좋은 일을 하도록 권하고, 나쁜일은 하지 않도록 간하
던302) 말303)을 인용하여 대답하였다. 태부왕304)이 이를 보고 동생인305) 남궁
상306)에게 이르기를 “삼외307)는 삼귀의308)에 비견되며, 오상309)은 오계310)와
같다. 능히 왕도를 실천하는 일, 이는 바로 불심(佛心)에 부합된다. 대사의
말씀이 지극하시니, 나와 너는 마땅히 삼가하여 노력하도록 하자311)”고 하
였다.
翌日, 挈山裝鳥逝. 自爾, 騎置傳訊, 影綴巖溪. 遽人, 知往抵
聖住, 卽皆雀躍, 叢手易轡, 慮滯王程尺寸地. 由是騎常侍倫
伍, 得急宣, 爲輕擧. 乾符帝錫命之歲, 令國內舌杪有可道者,
貢興利, 除害筞, 別用蠻牋書言, “荷天寵, 有所自因.” 垂益國
之問, 大師, 引出何尙之, 獻替宋文帝心聲爲對. 太傅王覽, 謂
介弟南宮相曰, “三畏比三歸, 五常均五戒. 能踐王道, 是符佛
心. 大師之言, 至矣哉, 吾與汝, 宜惓惓.
298) 기상시(騎常侍):임금을 시종(侍從)하는 관명(官名)으로 선전관(宣傳官)과 같은
직책의 관. 『통전通典』「직관지職官志」.
299) 건부제석명지세(乾符帝錫命之歲):건부 5년인 헌강왕 4년에 당 희종이 헌강왕
을 ‘사지절개부의동삼사검교대위대도독계림주제군사신라왕(使持節開府儀同三
司檢校大尉大都督鷄林州諸軍事新羅王)’에 책봉한 사실이 있었던 해인 878년을
말한다.
300) 만전(蠻牋):고구려에서 생산되던 종이인 소지(蕭紙)로 우리 나라 종이를 일컫
는다.
301) 하상지(何尙之):남조(南朝) 송인(宋人). 자(字)는 언덕(彦德)이고 시(諡)는 간목
(簡穆)으로 상서령좌광록개부의동삼사(尙書令左光祿開府儀同三司)에 이르렀다.
『송서宋書』권66;『남사南史』권30.
302) 헌체(獻替):헌가체부(獻可替否)의 준말. 신하가 정책에 대한 의견을 왕에게 상
소하면, 왕은 이를 받아 옳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정책에 반영하고, 부당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버린다는 말. 『후한서』권44「호광胡廣」, “廣復與敞虔上書駮之 曰
臣聞君以兼覽博照爲德 臣以獻可替否爲忠”.
303) 심성(心聲):언어란 마음의 소리이라고 한 양자(揚子)의 말에서 나온 용어이다.
『법언法言』「문신問神」,“言心聲也 書心畵也”.
304) 태부왕(太傅王):헌강왕이 태부에 추증된 데서 붙여진 명칭이다. 최치원,「사추
증표謝追贈表」, “臣坦言 伏奉制旨 追贈亡父臣凝爲太師 亡兄臣晸爲太傅”;『삼국
사기』권11「신라본기」11 진성왕즉위.
305) 개제(介弟):동생 중에 큰 동생을 말한다.
306) 남궁상(南宮相):예부령(禮部令).
307) 삼외(三畏):군자가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세 가지로 천명(天命), 대인(大人), 성인
(聖人)의 말씀을 지칭한다.『논어』「계씨季氏」, “君子有三畏 畏天命 畏大人 畏聖人
之言”.
308) 삼귀의(三歸依):삼보(三寶)인 불보(佛寶)·법보(法寶)·승보(僧寶)에 귀의(歸依)
한다는 말로, 귀의불(歸依佛), 귀의법(歸依法), 귀의승(歸依僧)이다.
309) 오상(五常):유교(儒敎)의 덕목인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을 말
한다.
310) 오계(五戒):불교의 계율로 불살생(不殺生)·불투도(不偸盜)·불사음(不邪淫)·
불망어(不妄語)·불음주(不飮酒)이다.
311) 권권(惓惓):조심하며 정성스러운 태도로 진심을 다하는 것을 말하는데, 충근
(忠謹)이라고도 한다.
중화연간 황소의 난으로 인해 천자가 서쪽으로 몽진하던 해(881) 가을312)
에 임금이 시자에게 “나라에 큰 보배가 있으니, 죽을 때까지 궤 속에 감
추어 두는 것이 옳은가” 하고 물으니,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 한번 나와
서 많은 이의 눈을 뜨게 하며, 사방 이웃 사람들의 마음을 감화시키는 것
만 같지 못합니다”고 하였다. (임금이) “나에게 여의주313)가 있으나, 빛을
숨기고 숭엄산314)에 있다. 만약 비장(秘藏)을 연다면 마땅히 삼천대천세계
(三千大千世界)를 비추어 뚫을 것이니, 어찌 12승315)으로써 족히 말할 수
있겠는가. 돌아가신 선친 경문왕께서 간절히 맞아들여 일찍이 두 번 드러
내었다. 옛날에 찬후316)가 한왕(漢王)이 대장(大將)을 임명하는데 어린아
이 부르는 것 같이 한 것을 나무랐는데, (한왕이) 상산의 사노인317)을 불러
내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지금 들으니 천자가 몽진318)을 했다 하므
로, 재촉하여 달려가 관리들을 위문해야 하나319) 천자를 섬기는데 가장 돈
독히 할 것은 부처님께 귀의함을 먼저 할 일이다. 장차 대사를 맞는데 반
드시 공론에 부합하고자 하니, 내가 어찌 감히 권력 하나만을 의지하고 그
나이와 덕망인 둘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320)”라고 하였다.
中和西狩之年秋, 上謂侍人曰, “國有大寶珠, 畢世 321)而藏之,
其可耶.”322) 曰, “不可, 不若時一出, 俾醒萬戶眼, 醉四隣心.”
曰, “我有末尼323)上珍, 匿曜在嵩嚴山, 脫闢秘藏, 宜照透三千
界, 何十二乘, 足之道哉. 我文考懇迎, 嘗再顯矣. 昔酇侯, 譏
漢王拜大將, 召小兒, 不能致商於四老人, 以此. 今聞, 天子蒙
塵, 趣令奔問官守, 勤王加厚, 歸佛居先. 將邀大師, 必叶外議,
吾豈敢倚其一, 慢324)其二哉.”
312) 중화서수지년추(中和西狩之年秋):881년 가을에 황소가 당의 장안(長安)을 점
거하므로 희종(僖宗)이 촉(蜀)으로 피난하였던 때로, 신라 헌강왕 7년을 말한다
(‘황소의 난’, 875~884).
313) 말니(末尼):마니(摩尼)와 같은 말로 여의주(如意珠)라 번역한다.
314) 김입지 찬(撰) 「사적비평」에는 암(巖)으로 되어 있다.
315) 십이승(十二乘):직경이 일촌(一寸)인 큰 구슬이 전차(戰車) 12승(乘)을 비추었
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 『사기』「전경중완세가田敬仲完世家」, “尙有徑寸之珠 照
車前後各十二乘者十枚”.
316) 찬후(酇侯):한(漢)의 소하(蕭何 ?~B.C. 193)로 한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인 찬후
(酇侯)에 봉해졌다.『사기』「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
317) 상어사노인(商於四老人):진(秦)나라 말에 세란(世亂)을 피하여 상산(商山)에 숨
어 살았던 4명의 노인인 동원공(東園公), 하황공(夏黃公), 녹리선생(甪里先生),
기리계(綺里季) 등으로 모두 눈썹과 머리카락이 희었으므로 상산사호(商山四
皓)라 하였다.『사기』「유후세가留侯世家」.
318) 천자몽진(天子蒙塵):황소의 난으로 당 희종이 촉으로 피난간 것을 말한다.
319) 분문관수(奔問官守):달려가 천자의 관리들을 위문하는 것을 말한다. 『춘추좌
전』「희공僖公」24년.
320) 의기일만기이재(倚其一慢其二哉):기일(其一)은 벼슬인 작(爵)이고, 기이(其二)
는 치(齒)와 덕(德)이니, 작을 가진 왕이 나이와 덕망을 지닌 무염화상을 소홀히
할 수 있겠느냐는 뜻이다. 『맹자』「공손추公孫丑」‘하’, “天下有達尊三 爵一齒一
德一 朝廷莫如爵 鄕黨莫如齒 輔世長民莫如德 惡得有其一以慢二哉”.
321) [全文]의 과 [苑] [總覽]의 는 㔶의 오자임.
322) [全文]의 乎는 耶의 오자임.
323) [全文] [苑] [總覽]의 는 尼자임.
324) [全文] [苑]의 熳은 慢의 오자임.
이에 그 사신을 정중하게 부르고 말을 겸손히 하여 불렀다. 대사가 “외
로운 구름이 산의 암굴(岩窟)에서 나오는 것이 어찌 마음이 있어서이겠는
가, 대왕의 덕풍(德風)에 인연이 있으니 고집하지 않는 것325)이 곧 상사(上
士)의 도일 것이다”고 말하고 드디어 가서 뵈었다. (임금이) 인견(引見)하
기를 선조(先朝) 때의 의례(儀禮)와 같이 하였으나, 예는 더욱 빛났다. 손
꼽을 만한 것으로는, 대면해서 공양을 올리는 것이 하나요, 직접 향을 전
한 것이 둘째요, 삼례(三禮)를 세 번 한 것이 셋째요, 작미향로(鵲尾香爐)
를 들고 세세생생(世世生生) 동안 인연을 맺은 것이 넷째요, 법명(法名)
을 인(印)하여 광종(廣宗)이라 한 것이 다섯째요, 이튿날 어진 이들326)에게
궁궐의 스님 계신 곳에 나아가 기러기처럼 열을 지어 하례(賀禮)토록 명
한 것이 여섯째요, 나라 안의 시327)를 잘 짓는328) 사람에게 귀산(歸山)을 전
송하는 시를 짓게 하였는데, 재가제자(在家弟子) 왕손(王孫)인 소판(蘇判)
억영(嶷榮)이 먼저 지어 읊고 시를 모아 두루마리를 만들었으며 시독겸
한림(侍讀兼翰林)으로서 재주가 뛰어난 박옹(朴邕)이 서329)를 지어, 돌아
가는 길에 증정한 것이 일곱째이며, 거듭 장차330)에게 명하여 정결한 방을
마련하고 작별을 나눈 것이 여덟째다.
乃重其使, 卑其辭徵之. 大師云, “孤雲出岫, 寧有心哉, 有緣
乎大王之風, 無固, 乃上士之道.” 遂來見. 見如先朝禮, 禮之
加焯然. 可屈指者, 面供饌, 一也, 手傳香, 二也, 三禮者三, 三
也, 秉鵲尾爐, 締生生世世緣, 四也, 加法稱曰廣宗, 五也, 翌
日, 命振鷺趍鳳樹鴈列賀, 六也, 敎國中磋磨六義者, 賦送歸之
什, 在家弟子王孫蘇判嶷榮, 首唱, 斂成軸, 侍讀翰林才子朴
邕, 爲引而贈行, 七也, 申命掌次, 張淨室, 要叙別, 八也.
325) 무고(無固):공자절사(孔子絶四) 중의 하나이니, 무의(無意:自意가 없고), 무필
(無必:기필이 없고), 무고(無固:고집이 없고), 무아(無我:독존이 없다). 무고란 고
집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논어』「자한」. “子絶四 毋意 毋必 毋固 毋我”.
326) 진로(振鷺):해오라기가 떼로 나는 것으로 결백한 어진이를 말한다. 『시경』「주
송周頌」‘진로振鷺’, “振鷺于飛 于彼西雝”.
327) 육의(六義):중국 고대의 시론(詩論)으로 풍(風), 아(雅), 송(頌), 부(賦), 비(比),
흥(興)인데, 주례(周禮)의 춘관(春官)인 종백(宗伯)과 시전(詩典)의 대서(大序)
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모시毛詩』의 「대서大序」에 “先王 以是經夫婦 成孝敬 厚
人倫 美敎化 移風俗 故詩有六義焉 一曰風 二曰賦 三曰比 四曰興 五曰雅 六曰
頌”이라고 하였다.
328) 차마(磋磨):절차탁마(切磋琢磨)로 갈고 닦는다는 뜻이다. 『시경詩經』「위풍衛
風」‘기오淇奧’, “有斐君子 如切如磋 如琢如磨 瑟兮僩兮 赫兮喧兮 有斐君子 終不
可諼兮”라 하였고, 『대학』에서는 이에 대해 “如切如磋者 道學也 如琢如磨者 自
修也”라고 설명하였다.
329) 위인(爲引):인(引)은 서(序)와 같은 뜻으로 위인은 서문을 삼았다는 뜻이다.
330) 장차(掌次):왕실에 관계된 일을 맡아 하는 관청. 『주례周禮』「왕환王宦」‘장차
掌次’.
고별에 다달아 묘한 말씀을 구하니 (대사가) 이에 따라온 제자들에게 눈
짓을 하여 요긴한 법문을 베풀게 하니 순예(詢乂), 원장(圓藏), 허원(虛源),
현영(玄影) 등인 네 사람은 모두 사선중(四禪中)에서 청정함을 얻은 자로,
그 지혜를 북실처럼 뽑아 섬세한 뜻을 나타내었으며, 마음을 다하여 게으
르지 아니하니 왕의 마음을 깨우치고도 남음이 있었다. 임금이 매우 기뻐
하며 읍하여 절하면서331) “옛날에 선친께서는 비파를 버린 현인332)이었지
만, 지금 과인은 자리를 피하던 331)아들을 욕되게 하고 있습니다.333) 왕위를
이어 도를 물었고334) 이를 마음에 새겨서 혼돈의 근원을 깨우치게 되었습
니다. 저 위수가의 노인335)은 참으로 명예를 구한 사람이고 이상의 유자336)
는 대개 전인(前人)의 자취를 밟았을 뿐이므로 비록 왕자(王者)의 스승이
되었다 하나 한갓 세 치의 혀만 놀린 것이니, 어찌 우리 스님께서 가만히
일편심(一片心)을 전한 것과 같겠습니까. 받들어 모든 행동에서 감히 실추
시키지 않겠습니까”고 하였다. 태부왕은 본래 중국말337)을 잘해서 그 소리
가 금옥(金玉) 같았는데, 많은 사람이 떠드는 것을 개의치 않고 말을 하기
만 하면 변려체(騈儷體)의 문장이 되어 마치 미리 문장을 지어 놓고 말하
는 것과 같을 정도였다.
臨告別, 求妙訣, 乃眴從者, 擧眞要, 有若詢乂, 圓藏, 虛源, 玄
影, 四禪中, 得淸淨者, 緖抽其慧, 表纖旨, 注意無怠, 沃338)心
有餘. 上甚悅撎拜曰, “昔文考爲捨瑟之賢, 今寡人, 忝避席之
子. 繼體得崆峒之請, 服膺開混沌之源. 則彼渭濱老翁, 眞釣名
者, 圯上孺子, 盖履迹焉, 雖爲王者師, 徒弄三寸舌也, 曷若吾
師語密, 傳一片心乎. 奉以周旋, 不敢失墜.” 太傅王, 雅善華
言, 金玉音, 不患衆 339)聒, 而能出口, 成儷語, 如宿構云.
331) 대배(擡拜):손을 읍하여 절을 하는 것으로 예배(禮拜)의 지극함을 나타낸 것
이다.
332) 사슬지현(捨瑟之賢):슬(瑟)은 금슬(琴瑟)이니 처(妻)를 뜻하므로 나라를 위해
처를 버릴 수 있는 지사(志士)라는 뜻이다.
333) 첨피석지자(忝避席之子):피석(避席)은 증자(曾子)가 공자(孔子)에게 고(告)할
때 피석하는 태도로써 하였다는 것에서 나온 말로 스승에 대한 지극함을 가리
킨 것인데, 임금은 자신이 이를 욕되게 한다는 뜻으로 말하였다.
334) 공동지청(崆峒之請):공동은 산의 이름이니, 황제(黃帝)가 광성자(廣成子)로부
터 도(道)를 물었던 장소인 전설의 산인데,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공동(空同)과
통한다.『장자』「재유在宥」, “黃帝聞廣成子 在於空同之上 故往見之”;「지증대사
적조탑비문智證大師寂照塔碑文」 주408)공동지미崆峒之美 [신라편] p.336참조.
335) 위빈노옹(渭濱老翁):위수(渭水)에서 항상 곧은 낚시를 드리우고 세월을 보냈던
강태공(姜太公)을 말한다.『사기』「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
336) 이상유자(圯上儒子):다리위의 선비라는 말로써 장량(張良)을 가리킨다. “다리
위의 만남(圯上之會)”이라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장량이 젊었을 때, 하비(下
邳;江蘇省 북부에 위치한 邳州의 옛 이름) 땅의 다리 위에서 도사(道士) 황석공
(黃石公)을 만나 『태공병법太公兵法』을 전해 받고, 이 책을 익힘으로써 유방을
도와 한(漢)나라를 건국할 수 있었던 일을 말한다. 『사기』「유후세가留侯世家」.
337) 화언(華言):화려한 말 또는 중국말의 뜻인데, 여기서는 중국말의 뜻. 『고운최선
생문집孤雲崔先生文集』「사사조서양함표謝賜詔書兩函表」에 ‘아선진언雅善秦
言’이란 말이 있다.
338) [全文] [苑]의 泼은 沃의 오자임.
339) [全文] [總覽]의 咻는 啉의 오자임.
대사가 물러나오면서 왕손인 소판 일(鎰)을 만나 몇마디 이야기를 나누
고는 곧 감탄하여, “옛날의 임금들 중에는 법통은 이었지만 그 정신을 잇
지는 못한 이들이 있었는데 이제 우리 임금은 이 둘을 다 갖추었고, 신하
들이 공재340)는 있지만 공망(公望)이 없는 이들이 있었는데, 그러나 당신
은 모두 갖추었으니 나라가 잘 될 것 같다. 마땅히 덕을 숭상하고 스스로
사랑하라”하고는 하직하고 돌아갔다.
大師旣退且往, 應王孫蘇判鎰, 共言數返, 卽歎曰, “昔人主有
有遠躰而無遠神者, 而吾君備, 人臣有341)有公才而無公望者,
而吾全, 國其庶乎. 宜好德自炁.”342) 及歸謝絶.
340) 공재(公才):재상이 될 만한 재주.
341) [全文]의 有公有才는 有有公才의 오식(誤植)임.
342) [全文]에는 爰. [苑]의 炁는 愛의 고자(古字)임.
이에 사자(使者)를 보내 방생장계(放生場界)를 표하니343) 새와 짐승들이
기뻐하였고, 은구344)를 얽어 성주사라는 제액(題額)을 썼는데 용과 뱀이
살아 있는 듯하였다.345) 훌륭한 일을 마치고 (헌강)왕이 홀연히 돌아가셨
다.346) 정강대왕이 왕위를 계승하여서도 양조347)에 은총을 입었던 것을 본
떠서 행하였다. 스님(緇)과 신도(素), 그리고 중사(重使)로 하여금 모셔오
게 하였으나 (대사께서)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를 들어 사양하였다.
於是, 遣348)輶軒標349)放生場界, 則鳥獸悅. 紐銀鉤札350)聖住寺
題, 則龍虵活. 盛事畢矣, 昌期忽兮.351) 定康大王莅阼, 兩朝寵
遇師352)而行之. 使緇素重使迎之, 辭以老且病.
343) 표방생장계(標放生場界):국가에서 유명한 사찰에 대해 주위 사방(四方)에 경계
를 설정하고 그 안에서는 살생(殺生) 즉 사냥 등을 금하는 게시판과 같은 표시
를 세우는 것을 말한다. 장생석표(長生石標)와도 같다.
344) 은구(銀鉤):은(銀)으로 만든 갈쿠리 또는 은제의 발고리(簾鉤)로, 여기서는 공
교한 필적(筆跡)의 뜻이니 은자(銀字)로 하사(下賜)한 성주사(聖住寺)라는 편액
(扁額)을 말한다.
345) 용사활(龍蛇活):성주사라고 쓴 어필편액(御筆扁額)의 글자획이 마치 살아서 꿈
틀거리는 용과 뱀같다는 말이다.
346) 창기(昌期):성한 시기로, 헌강왕의 치세(治世)를 뜻한다.
347) 양조(兩朝):신라의 제48대 경문왕과 제49대 헌강왕.
348) [全文] [總覽]의 遺는 遣의 오자임.
349) [苑]의 摽는 標의 오자임.
350) [苑] [全文] [總覽]의 扎은 札의 오자임.
351) [全文]의 焉은 兮의 오자임.
352) [全文] [總覽]의 帥는 師의 오자임.
태위대왕353)이 은혜를 내림이 바다와 같았으며, 덕을 우러르는 것이 높
은 산과 같았는데, 왕위를 이은 지 90일 동안 서신을 보낸 것만도 무려 열
번이었다.354) 얼마 후 허리가 아프다는355) 소식을 듣고 급히 국의(國醫)에
게 가서 치료하도록 명령하였다. 국의가 이르러 괴로운 상태를 물으니356)
대사가 빙그레 웃으며 “노병(老病)일 뿐이니 번거로이 치료하지 말라”고
하였다. 죽과 밥의 두끼를 먹는데357) 반드시 공양 종소리를 들은 후에 올
렸다. 그런데 제자들이 기력이 약해질까 걱정하여서 북을 치는 공양주에
게 가만히 부탁해서 거짓으로 시간 전에 치게 하였다. 이에 (대사가) 들창
밖을 내다보고 점심시간이 안되었으니 거둘 것을 명하였다.358)
太尉大王, 流恩表海, 仰德高山, 嗣位九旬, 馳訊十返. 俄聞
359)腰之苦, 遽命國醫往爲之. 至則請苦狀, 大師微破顔曰,
“老病耳, 無煩治.” 糜飱二時, 必聞鍾後進. 其徒憂食力虧, 陰
戒掌枹者, 陽密擊. 乃目牖而命撤.
353) 태위대왕(太尉大王):태위(太尉)는 진대(秦代)에 대사마(大司馬)를 고쳐 설치한
관직이다. 본래는 무사(武事)를 담당한 관(官)이었지만 3공(公)의 하나로서 대
사도(大司徒:丞相)를 보좌하였다. 한대(漢代)에도 이 제도를 답습하였는데 무제
(武帝) 때 대사마로 이름을 고쳤으며,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 다시 태위의
이름을 회복하였다. 그 지위는 3공의 으뜸이었는데 후일 그 실권을 잃었다고 하
지만 3공의 하나로서 명초(明初)에 폐지될 때까지 존속하였다. 『구당서』「신라」
에는 중·하대 무렵 신라 국왕들이 당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을 때에 ‘검교태위(檢
校太尉)’의 관직을 아울러 제수받았던 사례를 많이 보여준다. 본비에서 태위대
왕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문맥상 무염이 입적할 때의 신라
국왕을 지칭한 것으로 판단되므로 진성여왕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354) 사위구순 치신십반(嗣位九旬馳訊十返):정강왕이 즉위한 지 3개월 동안에 무염
화상에게 문안편지를 보낸 것이 열 번이라는 뜻이다.
355) 개요지고(䐴腰之苦):허리 아픈 병인 요통(腰痛)을 말한다.
356) 청고상(請苦狀):의사가 환자에게 병고(病苦)의 증상을 묻는 것이다.
357) 미손이시(糜飱二時):불교의 식사 규정이니 아침에는 죽을, 점심에는 밥을 먹고
오후 불식으로 저녁은 먹지 않으므로 미손이시라 말한다.
358) 음계장포자양밀격내목용이명철(陰戒掌枹者陽密擊乃目牗而命撤):무염화상이
공양시간을 알리는 운집종과 북을 친 연후에야 공양을 받으므로 제자들이 북을
치는 사람에게 비밀히 미리 치게 하였으나, 이를 알아차린 스님은 문 틈으로 내
다보고 대중들의 공양시간이 될 때까지 수공(受供)을 거부한 것을 말한다.
359) [全文]의 曁는 䐴의 오자임.
장차 열반(涅槃)에 들려고 할 때 시자(侍者)에게 명하여 유훈(遺訓)을
대중360)에게 내려 경계하기를 “이미 여든 살이 넘었으니361) 죽음을 피하기
어렵다.362) 나는 멀리 가려 하니363) 너희들은 잘 있거라. 강(講)하기를 한결
같이 하며, 잘 지켜 잃지 않도록 하라. 옛날 관리들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
였으니, 오늘의 선승들도 마땅히 힘쓰도록 하라”고 당부하는 마지막 말씀
을 하고는364) 꼼짝하지 않고365) 입적하였다.
將化往, 命旁侍, 警遺訓于介衆曰, “已過中壽, 難逃大期. 我
儂遠遊, 爾曹好住. 講若畫一, 守而勿失. 古之吏, 尙如是, 今
之禪, 宜勉旃.” 告訣裁罷, 慹366)然而化.
360) 개중(介衆):개는 대(大)의 뜻이므로 대중이라는 뜻이다.
361) 이과중수(已過中壽):상수(上壽)는 100세, 중수(中壽)는 80세, 하수(下壽)는 60세
인데(『장자』「도척盜跖」), 무염스님은 88세를 살았으므로 이미 중수를 지났다고
표현한 것이다.
362) 난도대기(難逃大期):태어남이 있는 자는 누구나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말로 생
자필멸(生者必滅)과 같은 뜻이다.
363) 아농원유(我儂遠遊):아농은 나란 뜻으로, 곧 이세상을 떠나 멀리 간다는 것으
로 열반에 들겠다는 뜻이다.
364) 고결재파(告訣裁罷):마지막 임종 때 후사를 당부하는 유언을 끝내자마자라는
의미이다.
365) 집연(慹然):안정된 모습.
366) [全文]의 熱은 慹의 오자임.
대사는 성품이 공손하고 삼가하며 말로써 화합의 기운을 상하게 하지
않았으니,『예기禮記』에 “사람과 상대할 때는 몸을 겸손하게 하고, 말은 삼
가하였다367)”고 이른 사람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배우는 동료들이 반드시
그를 ‘선사(禪師)’로 지목하였다. 빈객(賓客)을 대함에는 일찍이 존비(尊
卑)의 차별을 두지 않은 까닭에, 방에는 가득이 자비가 넘쳤으며 훈도368)들
이 즐거이 따랐다. 5일을 기한으로 삼아서 법을 구하는 자로 하여금 질의
하게 하였다.
大師性恭謹, 語不傷和氣, 禮所云, “中退然, 言吶吶然者乎.”
黌侶必目以禪師. 接賓客, 未嘗殊敬乎尊卑, 故滿室慈悲, 烝徒
悅隨. 五日爲期, 俾來求者質疑.
367) 중퇴연언눌눌연(中退然言吶吶然):모든 사람과 사물을 대할 때 겸손하고 조심
스럽게 하며, 말은 과묵하게 한다는 말. 『예기』「단궁」‘하’. “文子其中退然如不勝
衣 其言吶吶然如不出其口”.
368) 증도(烝徒):무염화상으로부터 훈습(薰習) 즉 지도를 받은 도중(徒衆)이라는 뜻
이다.
생도를 가르침에 있어서는 “마음이 비록 몸의 주인이지만, 몸이 마음의
사표가 되어야 한다. 너희가 도를 생각하지 않는 것을 근심할 것이지, 어
찌 도가 너희를 멀리 하겠는가. 설사 농부369)들일지라도 속세의 얽매임에
서 벗어날 수 있다. 내가 가면 반드시 마음도 따라 오니, 도사(道師)와 교
부(敎父)같은 위대한 사람인들 어찌 종자가 따로 있겠는가”라고 말하였
다. 또 “저 사람이 마신 것으로 내 목마름을 해소할 수 없고, 저 사람이 먹
은 밥으로는 나의 굶주림을 구하지 못한다. 어찌 노력하여 스스로 마시고
먹지 아니하느냐. 어떤 이는 교(敎)와 선(禪)이 같지 않다고 하나, 나는 그
러한 종지(宗旨)를 보지 못하였다. 말은 본래 많은 것이라 내가 알 바 아
니다. 대략 같다 해도 허여할 만한 것이 아니요, 다르다 해도 그른 것은 아
니다. 이 고요히 앉아 참선하여 마음의 근본을 쉬는 것이 성인(聖人)에 가
까울진저370)”라고 하였다. 그 말씀은 분명하고 순하였으며 그 뜻은 심오하
고 믿음직하여 상(相)을 찾는 이로 하여금 상이 없음을 알게 하였으니, 길
을 가는 사람이 부지런히 나아감에 갈래길 속에 갈래길이 있음을 보지 않
는 것과 같았다.
諭生徒則曰, “心雖是身主, 身要作心師. 患不爾思道, 豈遠.
而設是田舍兒, 能擺脫塵覊. 我馳則必馳矣, 道師, 敎父, 寧有
種乎.” 又曰, “彼所啜, 不濟我渴, 彼所噉, 不救我餒. 盍怒力
自飮且食.” 或謂, “敎禪爲無同, 吾未見其宗. 語本夥頤, 非吾
所知. 大較同弗371)與異弗. 非晏坐息機, 斯近縷褐被者歟.” 其
言顯而順, 其旨奧而信, 故能使尋相爲無相, 道者勤而行之, 不
見有岐372)中之歧.
369) 전사아(田舍兒):전사 즉 농장에서 일하는 농부
370) 누갈피자(縷褐被者):피갈회옥(被褐懷玉)에서 나온 말로, 외모는 천인(賤人)의
옷을 입었지만, 내면은 옥을 품은 것을 말한다. 『노자도덕경』제70장, “是以聖人
被褐懷玉”.
371) [全文]의 不은 弗의 오자임.
372) [全文]의 政은 岐의 오자임.
장년으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낮추는 것을 생활의 기틀로
삼았고, 밥먹을 때는 양식을 달리 하지 않았으며, 옷도 반드시 똑같이 입
었다. 절을 짓거나 고칠 때에는 대중에 앞서 하면서 항상 “불조(佛祖)께서
도 일찍이 진흙을 밟으셨는데373) 내가 어찌 잠깐이라도 편히 쉴 수 있으
랴”고 말하였으며, 물을 긷고 땔나무를 나르는 일까지도 때로는 몸소 친히
하였다. 또한 “산이 나를 위해 흙이 되어 주리니 내가 어찌 편안하게 지
내리요”라고 말하였다.374) 그 자기의 사심(私心)을 극복하고 남을 격려한 것
이 모두 이와 같았다.
始壯及衰, 自貶爲基, 食不異糧, 衣必均服. 凡所營葺, 伇375)先
衆人, 每言, “祖師嘗踏 , 吾豈蹔安栖.” 至摙水負薪, 或躬親.
且曰, “山爲我爲塵, 安我得安身.” 其剋己勵物, 皆是類.
373) 조사상답니(祖師嘗踏泥):기원정사(祇園精舍)를 지을 때, 부처님께서 사리불(舍
利弗)과 가섭(迦葉) 등과 함께 진흙을 밟아 이겼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374) 산위아위진(山爲我爲塵):산이 나를 위해 먼지가 되어 준다는 것은 내가 죽으면
흙이 된다는 말로 명산이지만 내가 그 산중에 삶으로써 오염시킨다는 뜻을 내
포하고 있다.
375) [全文]의 役은 伇과 같은 글자임.
대사가 어릴 때 유가(儒家)의 글을 읽었는데, 남은 맛이 입에 남아 있어
응대할 때에 운어(韻語)가 많았다. 이름을 들 만한 문하 제자가 2천명에
달하였고, 자리를 잡아 도량을 열었다고 일컬음을 받은 제자로는 승량(僧
亮), 보신(普愼), 순예(詢乂), 심광(心光) 등을 들 수 있다. 손상좌(孫上座)
도 많았는데 그 무리들도 모두 위의를 갖추었다.376) 실로 마조가 용의 새
끼를 길러 신라가 중국을 뒤덮었다377)고 이를 만하다.
大師少讀儒家書, 餘味在脣吻, 故醻對多韻378)語. 門弟子名可
名者, 厪379)二千人, 索居而稱坐道場者, 曰僧亮, 曰380)普愼, 曰
詢乂, 曰心光. 諸孫詵381)詵, 厥衆濟實. 可謂, ‘馬祖毓龍子, 東
海淹西河焉.’
376) 궐중제제(厥衆濟濟):그 무리들이 위의(威儀)를 갖추었다는 말로, 제제(濟濟)는
『시경』「대아」‘문왕文王’에“濟濟多士 文王以寧”이라 하고, ‘전傳’에 “濟濟 多威儀
也”라 하였다.
377) 동해엄서하(東海掩西河):자공(子貢)의 제자인 전자방(田子方)이 서하(西河)에
서 제자를 교육하였는데, 학인(學人)이 무려 수천명에 이르렀다고 하는 고사에
서 나온 말로, 무염선사도 제자 가운데 이름을 헤아릴 만한 자가 2,000여명에 달
하였으므로 이를 비유하여 쓴 말이다.
378) [全文]의 䪨은 韻과 같은 글자임.
379) [全文]의 僅은 厪과 같은 글자임.
380) [全文]은 曰이 탈락(脫落).
381) [全文]의 諸孫濟濟 厥衆詵詵은 諸孫詵詵 厥衆濟實의 오식(誤植)임.
평하노니,『춘추春秋』382)에 이르지 않았는가. “공후(公侯)의 자손은 반드
시 처음으로 복귀한다”383)고 하였으니, 옛날 무열대왕384)이 을찬385)이었을
때 예맥(獩貊)을 치기 위해 군사를 빌릴 계책으로 진덕여왕의 명을 받들
고 소릉황제386)를 뵈었다. 대면하여 이야기하면서 정삭(正朔)을 받고 복장
을 바꿀 것을 진술하니, 천자가 기꺼이 허락하고 뜰에서 중국 의복을 하사
하고 특진(特進)의 위계(位階)를 주었다.387) 천자가 어느 날 여러 번국(蕃
國)의 왕자388)를 불러 연회를 베풀 때에 많은 술과 보화를 쌓아 놓고, 갖고
싶은대로 마음껏 가지게 하였다. 왕은 이에 술을 마시는 것은 예절을 지켜
어지러움을 막았고,389) 비단은 지혜롭게 많이 얻었다. 하직하고 물러 나오
는데 문황390)이 멀리 갈 때까지 바라보며 “나라를 맡을 만한 그릇이로다”
라고 탄복하였다. 떠날 때에 임금이 짓고 쓴 온탕비와 진사비의 두 비문391)
과 직접 찬술한 『진서晉書』392)를 한 질 하사하였다. 이 때 봉각393)에서 이
글을 베껴서 두 본으로 만들어 올리니 하나는 저군394)에게 하사하고, 하나
는 우리에게 주었다. 다시 화자관395)에게 명하여 청문(靑門) 밖에서 전송
하게 하였는데, 넘치는 총애의 우대함과 예의의 후덕함에 설혹 무지몽매
한 이396)까지도 눈과 귀가 놀랄 정도였다. 이로부터 우리나라가 일변하여
노나라와 같은 예의국이 되었다.397) 그로부터 8세대가 지난 후에 대사가
중국에 유학하고 귀국하여서는 나라를 교화시켜 또 한번 변화시킴으로써
도에 이르렀으니, 이보다 더 비교할 만한 것이 없으니398) 우리 이외에 누
구를 위대하다고 할 것인가.
論曰, 麟史不云乎. “公侯之子孫, 必復其始, 則昔武烈大王,
爲乙粲時, 爲屠獩貊乞師, 計將, 眞德女君命陛覲昭陵皇帝. 面
陳, 願奉正朔, 易服章, 天子嘉許庭, 賜華裝受位特進. 一日,
召諸蕃王子宴, 大置酒, 堆寶貨, 俾恣滿所欲.” 王乃杯觴則
禮以防亂, 繒綵則智以獲多. 臮399)辭出, 文皇目送而歎曰, “國
器.” 及其行也, 以御製幷書溫湯晋祠二碑, 曁御撰晋書一部.
賚之時, 蓬閣寫是書, 裁竟二本, 上一錫儲君, 一爲我賜. 復命
華資官, 祖道靑門外, 則寵之優, 禮之厚, 設聾盲乎智者, 足
亦400)駭耳目. 自玆, 吾土一變至於魯. 八世之後, 大師西學而東
化, 加一變至於道, 則莫之與京, 捨我誰謂傳矣哉哉.401)
382) 인사(麟史):인사는 『춘추』를 가리킨다.
383) 『춘추좌전』 민공 원년조.
384) 무열대왕(武烈大王):태종 무열왕인 김춘추(金春秋)를 말한다.
385) 을찬(乙粲):신라 17관등의 두 번째인 이찬(伊飡)의 별칭이다.
386) 소릉황제(昭陵皇帝):당 태종으로, 김춘추가 이찬 당시 진덕여왕의 명을 받아
당에 사신으로 가서 당태종을 배알한 사실을 가리킨다. 『삼국사기』권5「신라본
기」5 진덕왕眞德王2년;『구당서舊唐書』권199「동이열전東夷列傳」‘신라’.
387) 천자가허 정사화장 수위특진(天子嘉許 庭賜華裝 受位特進):진덕여왕이 즉위 후
김춘추는 당에 가서 태종에게 군사를 빌려줄 것을 청하였는데, 태종이 동감하
여 군사를 내줄 것을 승낙하였다. 또한 김춘추가 관리들의 복식을 고쳐서 중국
의 제도를 따르겠다고 청하자, 당태종은 진귀한 복장을 내다가 김춘추 등에게
주고 김춘추를 삼공의 아래인 특진으로 삼고 그의 아들 문왕(文王)을 좌무위장
군(左武衛將軍)으로 삼은 사실을 말한 것으로, 『삼국사기』권5「신라본기」5 진덕
왕2년에 자세히 나와 있다.
388) 제번왕자(諸蕃王子):천자의 산하에 있는 외방(外邦)의 제후 왕자를 말한다.
389) 왕내배상즉례이방난(王乃杯觴則禮以防亂):황제가 술을 권함에 한잔에 백배(百
拜)를 하여 종일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일지록
日知錄』「잡사雜事」‘주금(酒禁)’, “一獻之禮 賓主百拜 終日飮酒 而不得醉焉”.
390) 문황(文皇):당 태종으로, 당 고조(高祖)의 둘째 아들인 이세민(李世民)을 말하
는데, 문황은 그의 시호(諡號)이다.
391) 어제병서온탕진사이비(御製幷書溫湯晉祠二碑):당의 고조가 여산(驪山) 온천에
가서 세운 온탕비(溫湯碑)와 당태종이 정관(貞觀) 2년(628~)에 산서성(山西省)
태원현(太原縣)에 있는 사당(祠堂)에 가서 세운 진사비(晉祠碑)를 말한다.
392) 『진서晉書』:당 태종이 방현령(房玄齢), 이연수(李延壽) 등에 명하여 편찬하게 한
사서(史書)로 서진과 동진의 역사를 기록한 130권의 기전체(紀傳體) 사서이다.
393) 봉각(蓬閣):국가의 귀중문서와 도서(圖書)를 보관하는 관서(官署)로 비서감(秘
書監)혹은 비서성(秘書省)을 말한다. 봉래각(蓬萊閣)이라고도 한다.
394) 저군(儲君):황태자.
395) 화자관(華資官):높고 귀한 자리에 있는 벼슬아치.
396) 농맹호지자(聾盲乎智者):지혜에 귀먹고 눈먼 사람이란 뜻이니, 무지몽매한 사
람을 말한다.
397) 오토일변지어노(吾土一變至於魯):신라가 한번 변하여 예교(禮敎)있는 노나라
와 같이 되었다는 말. 『논어』「옹야雍也」, “子曰 齊一變 至於魯 魯一變 至於道”.
398) 막지여경(莫之與京):이보다 더 큰 경사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399) [全文]의 泉은 臮의 오자임. 臮는 曁의 고자(古字)임.
400) [全文] [苑]의 足亦과 [總覽]의 亦足 중 足亦이 옳은 것 같음.
401) [全文]의 或은 哉의 오자임.
선조402)는 두 적국을 평정하고403) 백성으로 하여금 복식을 변하게 하였
는데404) 대사는 육마적405)을 항복시키고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의 덕을 닦
게 하였다. 그러므로 임금406)은 양조(兩朝)에 걸쳐 존경하였으니, 사랑방
의 백성들도 멀리서 분주히 쫓아왔는데, 움직이면 반드시 자기의 턱을 움
직이는 것 같이 쉬웠고,407) 가만히 있어도 속으로 그르다고 하는 이가 없
었다.408) 어찌 후후(後後) 오백년만인 말세에 삼천대천세계에 몸을 나타
내신 이가 아니겠으며, 그 처음으로 복귀한다는 말도 참으로 옳다고 하겠
다.409) 저 문성후410)가 한고조부의 스승이 되어 크게 만호(萬戶)에 봉해지
고, 제후의 반열에 들어서서 한(韓)나라 재상의 자손의 극치411)를 과시하
였으나 보잘 것 없는 일이라 하겠다. 가령 선(仙)을 배우는 것에도 처음과
끝이 있으니, 과연 대낮에 하늘로 올라갔다 하더라도 중도에 그만두면 한
낱 덧없는 몸일 뿐이다.412) 또한 어찌 우리 대사가 처음에는 세속을 벗어
나고, 중간에는 중생을 구제하였으며, 마지막에는 몸을 깨끗이 한 것과 견
줄 수 있겠는가. 훌륭한 덕을 지닌 모습을 찬미하는 것은 옛날부터 송(頌)
으로 하였으니, 곧 게송(偈頌)과 같은 것이다. 고요함을 두드려 명을 지으
니 그 찬사(讚詞)에 말하기를,
先祖, 平二敵國, 俾人變外 413), 大師降六魔賊, 俾人修內德.
故得千乘主, 兩朝拜起四方民, 萬里奔趍, 動必頤使之, 靜無腹
非者. 庸詎非應半, 千而顯大千者歟, 復其始之說, 亦何慊乎
哉. 彼文成侯爲師漢祖, 大誇封萬戶位列侯, 爲韓相子孫之極
則㑋矣. 假學仙有終始, 果能白日上昇去, 於中止得爲鶴背上,
一幻軀爾. 又焉珿, 我大師, 拔俗於始, 濟衆於中, 潔己於終矣
乎, 美盛德之形容, 古尙乎頌, 偈頌類也. 扣寂爲銘, 其詞曰,
402) 선조(先祖):태종무열왕
403) 평이적국(平二敵國):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했다는 말이다.
404) 비인변외식(俾人變外飾):국민들로 하여금 외식(外飾)인 복장을 중국식으로 변
화시켰다는 것을 말한다.
405) 육마적(六魔賊):육근(六根:안眼 이耳 비卑 설舌 신身 의意)의 대상인 육경(六境)
즉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 육근이 육경을 만나 육식(六識)
을 일으키니 허공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이 번뇌의 구름이 일어난다.
406) 천승주(千乘主):제후 즉 왕을 말하는 것으로, 주(周)나라 제도에 천자의 경우는
기내(畿內)의 사방천리의 영토에서 전쟁을 할 때, 병거만승(兵車萬乘)을 출동시
켜야 했고 제후는 병거천승(兵車千乘)을 동원하였다. 이 때문에 왕을 천승주라
고도 하였다. 일승(一乘)에는 갑사(甲士) 3인, 보졸(步卒) 72인, 거사(車士) 25인
이 속하게 되어 있다.
407) 이사지(頤使之):음식을 먹을 때 자신의 턱을 사용하는 것과 같이 쉽게 순종한
다는 말로, 활동함에 모든 조건이 손쉽게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408) 정무복비자(靜無腹非者):고요한 가운데에서 수도 정진하므로써 마음에 전혀
걸리는 것이 없고 편안하다는 뜻이다.
409) 하겸호재(何慊乎哉):무엇이 부족하다고 하겠는가라는 말로, 『맹자』「공손추」
‘하’, “吾何以慊乎哉”.
410) 문성후(文成侯):장량(張良)을 말하는데 자(字)는 자방(子房)이고 문성은 시호
이다.
411) 한상자손지극(韓相子孫之極):장량(張良)의 조상이 한(韓)나라에서 오대(五代)
에 걸쳐 승상(承相)을 역임하였으므로, 한상자손의 극이라 한 것이다.
412) 지득위학배상(止得爲鶴背上):장량(張良)이 하비(下邳)에서 도사(道士) 황석공
(黃石公)을 만나 신선술(神仙術)을 배웠으나, 환구(幻軀)인 육신(肉身)은 영원히
유지할 수 없다는 말이다.
413) [全文]의 飾과 [苑]의 餝은 같은 뜻. [總覽]에는 飭이나 飾의 오자임.
도(道)라 할만 하여도 상도(常道)되기는 풀 위의 이슬을 꿰는 것414)과
같고,
불도(佛道)에 나아가도 진불(眞佛)이 되기는 물속에 비친 달을 잡는
것415)과 같다.
상도와 부처님의 진리를 얻은 이는, 해동(海東)에 있는 김씨(金氏) 큰스
님이니,416)
본가계(本家系)는 성골(聖骨)에 뿌리하였고, 상서로운 연꽃417)의 징조가
보신(報身)을 도왔음이라.
오백년 만에 이 땅을 가려418) 열 세살에 속세를 떠났으니,
화엄경을 배우다가 조상의 덕으로 붕새의 길을 인도받아, 배를 타고 큰
바다를 건넜다.419)
可道爲常道, 如穿草上露,
卽佛爲眞佛, 如攬水中月.
道常得佛眞, 海東金上人,
本枝根聖骨, 瑞蓮資報身.
五百年擇地, 十三歲離塵,
雜花引鵬路, 窾木浮鯨津.[其一]
414) 천초상로(穿草上露):풀잎 위에 맺힌 이슬.
415) 남수중월(攬水中月):물속에 비친 달을 건지려고 하는 것을 말한다.
416) 해동금상인(海東金上人):상인은 큰스님의 뜻으로, 신라의 김씨스님이라는 말
이니 무염스님을 지칭한다.
417) 서련(瑞蓮):무염화상의 어머니 화씨(華氏)의 태몽에 수비천(修臂天)으로부터
연꽃을 받은 사실을 말한다.
418) 오백년택지(五百年擇地):무염화상과 같은 위인(偉人)은 500년만에 한 사람 정
도 출현한다는 말이다.
419) 관목부경진(窾木浮鯨津):입당 유학을 위해 조각배를 타고 항해하다가 경진(鯨
津)인 흑산도에 표류하였다는 말이다.
중국을 두루 돌아다니면서420) 큰 스승들을 다 찾아다녔으니,421)
선배들이 모두 찬탄하였고, 고행(苦行)으로도 미칠 자가 없었다.422)
법란(法亂)이 일고 또 일어나423) 동쪽인 본국으로 귀국할 수 있었던 것
은 하늘의 도움이요,
마음의 구슬은 마곡(麻谷)을 빛냈고, 혜안(慧眼)의 거울은 신라를 밝
혔도다.424)
觀光堯日下, 巨筏悉能捨,
先達皆歎云, 苦行無及者.
沙之復汰之, 東流是天假.
心珠瑩麻谷, 目鏡燭桃野.[其二]
420) 관광요일하(觀光堯日下):중국 땅을 돌아다닌 것을 말한다.
421) 거벌실능사(巨筏悉能捨):마곡보철(麻谷寶徹) 회하에서 수도하다가 그가 입적
하자, 그 곳을 떠나 유행(遊行)하였다는 말이다.
422) 고행무급자(苦行無及者):무염화상이 마곡회상(麻谷會上)에 있을 때 궂은 일을
도맡아 하였으므로, 대중들이 선문(禪門)의 유검루(庾黔婁)라 칭찬한 일을 말한
다. 본비문주199)유이행庾異行 p.143.
423) 사지부태지(沙之復汰之):당의 무종 회창 5년(844)의 불교 사태를 말하는 것으
로, 이때 외국 스님는 모두 본국으로 축출되었으므로, 사태(沙汰)에 사태가 더해
진 것으로 표현하였다.
424) 도야(桃野):동국(東國)인 신라를 가리킨다.『고수본기高受本記』, “東海桃索山
根盤五千里 東西南北枝 長各三千里 是以 東土謂之桃也”.
이미 봉황이 돌아오니 많은 새들이 다투어 따르고,
시험 삼아 용의 변화를 보였으나, 범부의 생각으로 어찌 헤아려 감당할
수 있으랴!
온 나라에 방편으로 보이시며, 왕명으로 성주사에 머무시니,
송문(松門)에는 육환장이 나란히 걸려 있고, 산길엔 사람이 많아 발디
딜 틈조차 없도다.
旣得鳳來儀, 衆翼爭追隨,
試覰龍變化, 凡情 425)測知.
仁方示方便, 聖住强住持,
松門遍掛錫, 巖徑難容錐.[其三]
425) [全文] [總覽]의 郍과 [苑]의 는 那임
우리 스님은 삼고(三顧)를 기다리지 않았으며426) 또한 칠보(七步)로 걸
어 나가 왕을 맞이하지도 않았으니,427)
때가 도를 행할만한 즉 나간 것이니, 부촉을 인연한 까닭이다.
두 임금이 스님의 도풍(道風)에 절하였고, 온 나라가 은혜로운 감로(甘
露)에 젖었으니,
학이 동천(洞天) 가을에 나왔음이요, 구름은 바다와 산이 저뭄에 돌아
왔음이로다.
我非待三顧, 我非迎七步,
時行則且行, 爲緣付囑故.
二王拜下風, 一國滋甘露,
鶴出洞天秋, 雲歸海山暮.[其四]
426) 아비대삼고(我非待三顧):나는 삼고초려(三顧草廬)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세
번이나 궁중으로 갔다는 것으로, 삼청(三請)을 거절하지도 않았다는 말이다.
427) 아비영칠보(我非迎七步):왕이 찾아옴을 영접하기 위하여 일곱 걸음를 걸어 나
갔다는 말이니, 세 번이나 왕궁에 갔었지만, 이는 오로지 국민과 불교를 위한
것이지, 결코 왕에게 아첨한 것은 아니라는 말. 『불조역대통재』권9(대정장49,
p.533b11), “及宣帝卽位 謁稠 稠床坐不迎其徒有勸迎者 稠曰 昔賓頭盧尊者 迎阿
育王 起行七步 致王失國七年 貧道 雖寡德 冀帝獲福耳”.
나와서는 엽용(葉龍)보다 귀하였고, 돌아가서는 붕새보다 높았으며,
물을 건너서는 소부(巢父)를 협소(狹小)하게 만들었고428) 골에 들어옴에
는 낭공(朗公)보다 빼어났도다.429)
신라에 돌아온430) 이후 세 번이나 궁중에 들었으니,431)
중생들은 부질없이 옳으니 그르니 하나, 극치(極致)에 이르면 무엇이
다르고 같으리요.
來貴乎葉龍, 去高乎冥鴻,
渡水陿巢父, 入谷超朗公,
一從歸島外, 三返遊壺中,
群迷漫臧432)否, 至極何異同.[其五]
428) 도수협소부(渡水陿巢父):스님이 왕의 청에 나아간 것은 소부(巢父)의 정신에
견주어 보면 비난의 대상이 된다는 뜻으로, 이는 요임금이 왕위를 허유(許由)에
게 전하려 하였을 때, 허유는 이를 거절하였을 뿐 아니라, 도리어 더러운 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영수(潁水)에 귀를 씻었는데, 소부는 자기의 소가 이 물을 먹자
더러운 귀를 씻은 물이라 하여 물먹이던 것을 중지시킨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429) 입곡초낭공(入谷超朗公):무염화상이 왕궁에서 물러나와 산곡(山谷)에 들어간
것은 항상 장안(長安) 부근에서만 걸식하고 다니던 승랑법사에 비하면 훨씬 초
월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뜻이다. “釋僧朗 常在京洛 乞飯饍 未嘗入山 今師則 還
山故超也”.
430) 귀도외(歸島外):무염화상이 중국 유학을 마치고 중국으로부터 해외인 신라에
돌아왔다는 말이다
431) 삼반유호중(三返遊壺中):세 번이나 호중인 궁중에 왕의 청을 받아 갔었다는 말
이다.
432) [全文]의 藏은 臧의 오자임.
이 도는 담담해서 맛이 없으나, 모름지기 억지로라도 마시고 먹어야 하니,
다른 이가 마시는 술은 나를 취하게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먹는 밥
이 내 배를 부르게 할 수 없음이라.
대중에게 경계하되 마음에서 물리치라고 한 것은 무엇인가.433) 명예를 겨
처럼 이익을 쭉정이와 같이 여기라 하셨으며,
중생들에게 몸가짐을 갖추라고 한 것은 무엇인가. 인(仁)을 갑옷으로
하고 의(義)를 투구로 삼으라 하셨도다.434)
是道澹無味, 然須强飮食,
他酌不吾醉, 他飱不吾飽.
誡衆黜心何, 糠名復粃利,
勸俗飾435)身何, 甲仁復冑義.[其六]
433) 권속식신하(勸俗飾身何):세상 사람들에게 수신제가함을 어떻게 권하는가의 뜻
이다.
434) 갑인복주의(甲仁復胄義):인(仁)을 갑옷으로 한 위에, 의리(義理)를 투구로 삼아
불의(不義)와 싸워야 한다는 말. 최사현정(摧邪現正)과 같은 뜻이다.
435) [總覽]의 飭은 飾의 오자임.
(중생을) 교화하는데 남김이 없으셨으니 하늘과 인간세상의 스승이로다.
옛날 생존해 계실 때에는 온 나라가 유리같이 환하였더니,
열반에 드신 후부터는 간 곳마다 가시덩쿨만 가득하구나.
열반이 어찌 그리 빠르신가라 하면서 예나 지금이나 모두 슬퍼하도다.
汲引無弃遺436), 其實天人師.
昔在世間時, 擧國成瑠璃,
自寂滅歸後, 觸地生蒺䔧,
泥洹一何早, 今古所共悲.[其七]
436) [全文]의 遣은 遺의 오자임.
탑을 세우고 또 비문을 새기니, 모습은 감추었지만 자취는 드러났도다.
높은 탑437)은 푸른 산에 우뚝하고 구비438)는 푸른 벽에 버티고 있는데,
사모하는 마음을 어찌 한갓 헛된 문자로 보일 수 있으리요.
후인에게 지금의 사실을 알리고자 하니, 지금 사람들이 옛일을 보는 것
과 같게 함이로다.
甃石復刊石, 藏形且顯跡,
鵠塔點靑山, 龜碑撑翠壁.
是豈向來心, 徒勞文字覛,
欲使後知今, 猶如今示昔.[其八]
437) 곡탑(鵠塔):사리탑(舍利塔)을 말한다.
438) 구비(龜碑):비석(碑石)을 말한다.
임금의 은혜는 천년에 깊고, 스승의 교화는 만대에 흠모되리니,
누가 자루 있는 도끼를 가질 것이며, 어떤 사람이 줄 없는 거문고에 화
답(和答)하겠는가.439)
선경(禪境)은 비록 지킬 것이 없다하나, 번뇌가 침노함을 어찌 용납하
리오.
계족산(雞足山) 봉우리에서 미륵불을 기다리니, 장차 동방의 계족산이
바로 이곳이로다.
君恩千載深, 師化萬代欽,
誰持有柯斧, 誰倚無絃琴.
禪境雖沒守, 客塵寧許侵,
鷄峯待彌勒, 將在東鷄林.[其九]
439) 수지유가부 수의무현금(誰持有柯斧 誰倚無絃琴):누가 이 사람의 학덕을 자로
잴 수 있으며, 어떤 이가 이 스님의 마음에 통하겠는가의 뜻으로, 무염화상의 무
생설법(無生說法) 무언설법(無言說法) 무애설법(無礙說法) 등이 구름이나 비와
같이 자재함을 비유한 말이다
종제 조청대부 전수집사시랑이며 자금어대를 하사받은 신 최인연이 교
지를 받들어 쓰다.
從弟朝請大夫, 前守執事侍郞, 賜紫金魚袋, 臣, 崔仁 440), 奉
敎, 書.
440) [苑] [全文] [總覽]의 는 渷의 오자임.
[비신(碑身)의 높이(高)는 8척3촌(八尺三寸), 폭(幅)은 4척9촌5분(四尺九寸五分), 글자의 간
격은 5분(五分)이며 해서(楷書)이다. 제액(題額)은 늑멸(泐滅)되었다.]
[揭載]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 上, pp.123~151.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上, pp.72~83.
『한국금석전문韓國金石全文』 古代, pp.212~223.
[출처] 03.남포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문|작성자 실론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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