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하동쌍계사진감국사대공영탑비문
河東雙谿寺眞鑒國師大空靈塔碑文
있는 곳: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쌍계사
세운 때:신라 정강왕 2년 정미(887)
所在:慶尙南道 河東郡 花開面 雲樹里 雙谿寺
年時:新羅 定康王 2年 丁未(887)
당해동( 海東) 고(故) 진감선사비문(眞鑑禪師碑文)
당(唐) 신라국(新羅國) 고(故) 지리산(智異山) 쌍계사(雙谿寺) 교시(敎
諡) 진감선사비명(眞鑑禪師碑銘)과 서(序)
1)海東, 故眞鑑禪師碑[題額]
有唐新羅國, 故知異山, 雙谿寺, 敎諡眞鑒禪師碑銘, 并序.
전(前) 서국(西國)2) 도통순관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으로 자금어대3)를
하사받은 신 최치원4)이 왕명을 받들어 찬하고 아울러 전자(篆字)로 제액
(題額)을 쓰다.
前西國都統巡官, 承務郎侍御史內供奉, 賜紫金魚袋, 臣,
崔致遠, 奉敎, 撰, 幷書篆額.
2) 서국(西國):당나라(唐)를 가리킨다.
3) 도통순관승무랑시어사내공봉사자금어대(都統巡官承務郞侍御史內供奉賜紫金魚
袋):최치원이 당나라 말엽 황소의 난 때에 진압 책임자인 도통(都統) 고병(高
騈)의 종사관으로 재임 중, 고도통의 주천(奏薦)에 의해 당의 희종으로부터 특
별히 받은 것이다. 정식 호칭은 도통순관승무랑전중시어사내공봉사자금어대
(都統巡官承務郞殿中侍御史內供奉賜紫金魚袋)이다.
4) 최치원(崔致遠):신라말의 유학자이며 대문호이다. 문성왕 19년(857)에 왕경(王
京:경주)의 사량부(沙梁部)에서 태어나 12세에 중국(당)에 들어가 18세인 874년
에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였다. 그 후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를 거쳐
고병(高騈)의 종사관으로 있다가 885년에 신라로 돌아와 헌강왕으로부터 ‘시독
겸한림학사수병부시랑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를 제
수 받았다. 이후 신라의 문병(文柄)을 장악하면서 많은 저술을 남겨 놓았다. 『계
원필경桂苑筆耕』등은 당에서 지은 시문(詩文)이고,「사산비명四山碑銘」,「법장
화상전法藏和尙傳」,「지엄화상보은사회원문智儼和尙報恩社會願文」, 시(詩)·
표(表)·장(狀)·계(啓)·기(記)·원문(願文) 등은 신라로 돌아온 후에 지은 불교
관계 저술과 외교 문서들이다. 최치원은 얼마 후 중앙에서 물러나 태산군(太山
郡:전북 태인)·천령군(天嶺郡:경남 함양)·부성군(富城郡:충남 서산) 등의 태수
(太守)를 지냈다. 진성왕 8년(894) 2월에 시무10여조(時務十餘條)의 정치 개선안
을 올렸으나 아찬(阿飡)에 제수되는데 그치자, 42세 때인 898년경에 해인사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그는 이곳에 머물면서 해인사 관계 저술을 여러 편 남겨 신
라말의 상황을 알려 주고 있다. 이 「진감선사비명眞鑑禪師碑銘」은 사산비명의
하나로 왕명(王命)에 의해 찬술한 것이다.
무릇 도(道)가 사람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요,5) 사람에 있어서도 다른 나
라(異國)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나라의 자제들이 스님도
되고 유학자도 되어 서쪽으로 큰 바다를 건너가 이중의 통역을 거쳐 학
문에 종사하려 함에는 목숨은 배6)에 맡기었지만, 마음은 중국으로 향하
였다. 빈 채로 갔다가 채워서 돌아오고 고생한 후에 얻었으니,7) 마치 옥을
캐는 사람이 곤륜산의 높음8)을 꺼리지 않고, 구슬을 찾는 자가 여룡이 있
는 바다의 깊음9)을 마다하지 않는 것과 같다.
夫道不遠人, 人無異國. 是以, 東人之子, 爲釋爲儒, 必10)也11)西
浮大洋, 重譯從學, 命寄刳木, 心懸寶洲. 虛往實歸, 先難後獲,
亦猶釆玉者, 不憚崐丘之峻, 探珠者, 不辭驪壑之深.
5) 도불원인(道不遠人):『중용中庸』13장에 “曰 仁者 道不遠人 人之爲道而遠人 不
可以爲道”라 하였고 야운비구(野雲比丘)의 「자경문自警文」에는 “古曰 道不遠人
人自遠矣”라고 하였다.
6) 고목(刳木):배를 일컫는다. 『주역周易』「계사繫辭」‘하’, “刳木爲舟”.
7) 선난후획(先難後獲):『논어論語』「옹야雍也」, “問仁 子曰 先難而後獲 可謂仁矣”.
8) 곤구(崑丘):『치수경治水經』에 나오는 높이 5만 리의 곤륜산으로 옥이 많이 나
온다고 한다.
9) 여학(驪壑):검은 용(驪龍)이 있는 깊은 바다.
10) [總覽]은 결락이나 [全文] [拓本]에는 必임.
11) [總覽]은 결락이나 [全文] [拓本]에는 也임.
드디어 지혜의 횃불을 얻으니 오승12)을 두루 비추었고, 좋은 음식(嘉肴)
으로 비유해 말한 즉 맛이 6적13)을 깊이 맛보았다. 다투어 천문(千門) 만호
(萬戶)로 하여금 선(善)에 들게 하고, 한 나라로 하여금 인(仁)을 행하도록
하였다.
遂得慧炬, 則光融五乘, 嘉肴則味飫六籍. 競使千門入善, 能令
一國14)興15)仁.
12) 오승(五乘):각각의 근기에 따라 사람을 각 과지(果地)에 이르게 하는 교법(敎
法)을 승(乘)이라 하며, 1승에서 5승까지의 구분이 있다. 5계(戒)·10선(善)·4제
(諦)·12인연(因緣)·6도(度)의 소승법(所乘法)으로, 인간에 나는 인승(人乘), 천
상에 나는 천승(天乘), 아라한과(阿羅漢果)에 이르는 성문승(聲聞乘), 벽지불과
(辟支佛果)에 이르는 연각승(緣覺乘), 불과(佛果)에 오르는 보살승(菩薩乘) 등으
로 구분하나 종파(宗派)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다.
13) 육적(六籍):육종경(六種經)을 가리킴이니 당대 선종의 소의(所依)가 되는 『대
반야경大般若經』·『금강경金剛經』·『유마경維摩經』·『능가경楞伽經』·『원각경
圓覺經』·『능엄경楞嚴經』으로 본다. 유교의 6경(經)인 시(詩)·서(書)·예(禮)·
역(易)·악(樂)·춘추(春秋) 등이라는 주장도 있다.
14) [總覽]은 결락이나 [全文] [拓本]에는 國임.
15) [總覽]은 결락이나 [全文] [拓本]에는 興임.
배우는 사람 중에 어떤 이는 “석가[身毒]16)와 공자[闕里]17)가 가르침을
베풂에 그 흐름이 나뉘고 체(體)가 다르니 동그란 구멍을 네모난 마개로
막는 것과 같아서18) 서로 어긋나서 한쪽만을 잡아서 고집한다”고 하였다.
시험삼아 논해 본다면, 시를 논하는 사람이 글자로써 말을 해쳐서는 안되
고, 말로써 뜻을 해쳐서도 안되는 것이다.19)『예기禮記』에 이른바 “말이 어
찌 한 갈래뿐이겠는가. 각각 타당한 바가 있다”20)고도 하였다.
而學者, 或謂, “身毒與闕里之設敎也, 分流異體, 圜鑿21)方
枘,22) 互相矛楯, 守滯一隅.” 嘗試論之, 說詩者, 不以文害辭,
不以辭害志. 禮所謂, “言豈一端而已, 夫各有所當.”
16) 신독(身毒):신독(身篤)으로도 음사하며 인도의 옛 이름인 천축(天竺)을 일컫는
다. 때로는 석가(釋迦)를 일컫는다.
17) 궐리(闕里):중국 산동성 곡부현(曲阜縣)에 있는 공자(孔子)의 탄생지로 여기서
는 공자를 지칭한다.
18) 환조방예(圜鑿方枘):네모진 자루를 둥근 구멍에 끼우면 맞지 않는다는 ‘조예불
상용鑿枘不相容’의 뜻으로, 송옥(宋玉)이 지은 『초사楚辭』「구변九辯」의 “환조이
방예혜圜鑿而方枘兮”란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19) 이사해지(以辭害志):『맹자孟子』「만장萬章」‘상’, “說詩者不以文害辭 不以辭害
志”.
20) 각유소당(各有所當):『예기禮記』「제의祭義」.
21) 조(鑿):‘뚫다’ ‘깍다’는 뜻으로 쓰일 때는 ‘착’으로 발음하고, ‘구멍’이라는 뜻으
로 쓰일 때는 ‘조’로 발음한다.
22) [總覽] [拓本]에는 枘. [全文]에는 柄이나 枘의 오자임.
그러므로 여산(廬山)의 혜원(慧遠)23)이 논24)을 지어 말하기를 “여래가
주공·공자와 더불어 드러낸 이치는 비록 다르지만, 돌아가는 바는 한 길
이다. 각각 자교(自敎)에 국집(局執)하여 겸응(兼應)하지 못하는 자는 만
물을 능히 전체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故廬峯慧遠, 著論25)謂,26) “如27)來之與周孔, 發致雖殊, 所歸一
揆, 體極不兼應者, 物不能兼受故也.”
23) 여산혜원(廬山慧遠):335~417.중국 동진(東晉) 때의 스님. 여산 동림사(東林寺)
에 주석(住錫)하였으므로 여봉혜원(廬峰慧遠)이라고도 한다. 13세에 이미 6경을
연구하고 그 후 노장학에도 정통하였는데, 21세에 도안(道安) 문하에 들어가 수
행하였다. 381년 제자 수십인과 함께 여산에 들어가 동림사를 짓고, 그의 덕을
사모하여 모여든 123인과 함께 백련사(白蓮社)를 창설하고 염불수행하였다. 30
여 년간을 여산에 있으면서 법정(法淨)·법령(法領) 등을 멀리 서역에 보내어 범
본(梵本) 불경을 구하고, 승가파제(僧伽婆提)에게 청하여『아비담심론阿毘曇心
論』과『삼법도론三法度論』을 담마류지(曇摩流支)에게 청하여『십송율十誦律』
을 번역하는 등 불교학계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에 당의 선종(宣宗)은 변각대사
(辨覺大師)로, 송 태종(太宗)은 원오대사(圓悟大師)로 추시(追諡)하였다. 저서로
는『대지도론요약大智度論要約』20권,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법성
론法性論』2권, 『사문단복론沙門袒服論』1권이 있다. 불교의 혜원(慧遠), 유교의
도연명(陶淵明), 도가(道家)의 육수정(陸修靜)과의 인연으로 전하는 호계삼소
(虎溪三笑)에 대한 고사(故事)는 유명하다.
24) 논(論):『사문불경왕자론』으로, 여래(如來) 이하의 내용은「체극불겸응體極不
兼應」제4에 있다. 세속의 왕에게 사문(沙門)이 예경하지 않는 것을 비리(非理)
라 하여 임금을 공경하라고 명하였으나 시행되지 않았다. 다음 원흥(元興) 2년
(403) 재상 환현(桓玄)이 다시 명을 내리자 혜원은 원흥 3년(404)에 이 논을 지어
반박하였다.
25) [總覽]은 결락이나 [全文] [拓本]에는 論임.
26) [總覽]은 결락이나 [全文] [拓本]에는 謂임.
27) [總覽]은 결락이나 [全文] [拓本]에는 如임.
심약28)은 “공자는 그 실마리[四端]를 논했고 석가모니는 그 극치를 다
하였다”고 말하였으니, 참으로 그 큰 뜻을 안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며, 비
로소 함께 지극한 도를 말할 만하다. 부처님께서 심법29)을 말씀하신 데에
이르러서는 심오하고 또 심오해서 이름하고자 하나 이름을 붙일 수 없으
며 설명하고자 해도 설명을 할 수 없다. 비록 달을 보았다고 하나, (달은
물론) 달을 가리킨 손가락까지도 곧 잊어버려서 마침내 바람을 얽어 매고
그림자를 잡기 어려운 것과 같다. 그러나 멀리 높은 데를 오르자면 가까운
데서부터 시작하여야 하나니 비유를 취한들 무슨 해로움이 있겠는가.
沈約有云, “孔發其端, 釋窮其致.” 眞可謂識其大者, 始可與
言至道矣. 至若佛語心法, 玄之又玄, 名不可名, 說無可30)說.31)
雖云得月, 指或坐忘, 終類係風, 影難行捕. 然陟遐自 , 取譬
何傷.
28) 심약(沈約):441~513.양(梁)나라 시인이며 음운학자(音韻學者)였던 정치가. 자
는 휴문(休文)이고 오흥무강(吳興茂康:지금의 浙江德淸) 사람으로 육조시대의
굴지의 학자이며 양무제 때 상서령(尙書令)까지 오른 정치가이다. 4성(聲)의 구
별을 세우고 시(詩)의 8병(病)을 들은 것으로 유명하며, 불교에도 통하여 범문
음악인 실담음악(悉曇音樂)에 의하여 깊이 성운(聲韻)을 연구하였다. 저서로
는『진서晉書』111권·『사성보四聲譜』·『송서宋書』·『제기齊記』·『양무기梁武
記』·『심휴문집沈休文集』 등이 있다.
29) 불어심법(佛語心法):『능가아발다라보경楞伽阿跋多羅寶經』권1「일체불어심품
一切佛語心品」(대정장16, p.480a16 참조).
30) [總覽]은 결락이나 [全文] [拓本]에는 可임.
31) [總覽]은 결락이나 [全文] [拓本]에는 說임.
또한 공자가 제자들에게 “나는 말 없고자 한다. 하늘이 무슨 말이 있는
가”32)라고 말하였으니, 저 유마거사(維摩居士)가 묵묵히 문수를 대한 것33)
과 부처님34)께서 가섭(迦葉)에게 가만히 전한 것35)과 같이, 수고로이 혀를
움직이지 않고 능히 통해서 마음에 새기게 함인 것이다. 하늘이 말하지 않
는다고 말하였으니 이것을 버리고 어디에 가서 얻을 수 있겠는가. 멀리서
묘한 도를 전해 와서 널리 우리나라를 빛나게 한 것이 어찌 다른 사람이
겠는가, 선사가 바로 그 분이다.
且尼父謂門弟子曰, “予欲無言, 天何言哉.” 則彼淨名之默對
文殊, 善逝之密傳迦葉, 不勞鼓舌, 能叶印心. 言天不言,36) 捨37)
此奚適而得. 遠傳妙道, 廣耀吾鄕, 豈異人乎. 禪師是也.
32) 여욕무언 천하언재(予欲無言 天何言哉):『논어論語』「양화陽貨」, “子曰 予欲無言
子貢曰 子如不言 則小子何述焉 子曰天何言哉 四時行焉 百物生焉 天何言哉”. 즉
말을 떠나서 통하는 자리로 공자와 온백설자(温伯雪子)의 ‘목격이도존目擊而道
存’의 해후와 에머슨과 카알라일의 무언(無言)의 해후와 모두 같은 의미이다.
33) 정명(淨名):정명은 유마거사(維摩居士 Vimalakīrti)의 별칭이다. 법자재보살
(法自在菩薩)과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법문(法門)함에 유언(有言)으로 논의할
때 유마거사는 무언(無言)으로 상대(相對)하였다. 문수가 이를 칭찬하니 문자와
언어의 길이 끊어진 자리로서 참다운 불이법문(不二法門)이라 하였다.
34) 선서(善逝): sugata. 불타(佛陀) 즉 여래(如來)를 부르는 10호(號)의 하나로 수
가타(須伽陀)라 음사(音寫)하기도 한다. 여래·응공(應供)·정변지(正遍知)·명
행족(明行足)·선서(善逝)·세간해(世間解)·무상사(無上士)·조어장부(調御丈
夫)·천인사(天人師)·불세존(佛世尊)의 10가지 명칭 가운데, 부처님은 여실히
열반의 저 언덕에 이르러 다시 생사해(生死海)에 빠지지 않기 때문에 붙여진 별
명이다.
35) 밀전가섭(密傳迦葉):석가세존이 가섭에게 은밀히 마음을 전한 세 번의 고사인
삼처전심(三處傳心). 그 중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염화시중(拈華示衆)을 본 가
섭이 파안미소(破顔微笑)함으로써 법이 전해졌으니, 이심전심(以心傳心) 고사
(故事)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36) [總覽]은 결락이나 [全文] [拓本]에는 言임.
37) [總覽]은 결락이나 [全文] [拓本]에는 捨임.
선사의 법휘(法諱)는 혜소(慧昭)이며, 속성(俗姓)은 최씨(崔氏)이다. 그
선조는 한족(漢族)으로 산동지방의 벌족(閥族)이었다.38) 수(隋)나라 군사
가 요동 정벌에 여맥(고구려)에서 많이 몰살당하였는데39) 항복하여 백성이
되었다. 그러다가 당나라가 전부 뭉쳐서 사군(四郡)을 통괄하였을 때40) 금
마41) 사람이 되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창원(昌元)으로 재가(在家)신도이면
서도 출가한 스님과 같이 수행하였다. 어머니42) 고씨(顧氏)가 어느 날 잠
깐 낮잠이 들었는데, 꿈에 한 범승(梵僧)이 나타나 “내가 어머니의 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이르고 나서 유리항아리를 주었다. 그 후 얼마 안되
어 선사를 임신하였다.
禪師法諱, 慧昭, 俗姓崔氏. 其先漢族, 冠盖山東. 隋師征遼,
多沒驪貊, 有降志而爲遐甿者. 爰及聖唐, 囊括四郡, 今爲全
州43)金44)馬人也. 父曰昌元, 在家有出家之行. 母顧氏, 嘗晝假
寐, 夢一梵僧, 謂之曰, “吾願爲阿㜷[方言謂45)母]之子.” 因以瑠
璃甖爲寄. 未幾娠禪師焉.
38) 관개산동(冠蓋山東):산동지방의 명문가를 일컫는다. 관개는 옛날 귀족이나 높
은 관리가 타던 네필의 말이 끄는 수레인데 명문을 가리키기도 한다. 사신 왕
래가 끊어질 사이 없이 이어질만큼 번성하다는 말. 『전국책戰國策』「위책魏策」,
“魏使人 求救于秦 冠蓋相望 秦救不出”.
39) 다몰려맥(多沒驪貊):612년 수나라는 제2차 고구려전에 113만 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는데, 요동성공격에 시일을 많이 소모하자 우중문(宇仲文)과
우문술(宇文述)에게 따로 30만명의 군사를 주어 평양을 직공(直攻)하게 하였다.
이때 을지문덕은 종심방어전략(縱深防禦戰略)을 구사하여 칠전칠패(七戰七敗)
로 적군을 평양으로 끌어 들인 후 그들의 양식이 동이 난 것을 알고 지구전(持
久戰)으로 적군의 공격역량을 소모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후퇴하는 수나라군을
살수(薩水)에서 공격하여 거의 전멸시킨 사실을 말한다. 수나라는 이 전역(戰
役)으로 결국 쇠망하게 되었다.
40) 낭괄(囊括):자루에 넣고 주둥이를 동여 매는 것으로 전체를 차지한 것을 말하
는데,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당과 외교 관계가 재개되면서 당의 주민국으로서
의 신라를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41) 금마(金馬):지금의 전라북도(全羅北道) 익산(益山)으로, 신라 문무왕 10년(670)
에 고구려 보장왕(寶藏王)의 서자(庶子) 안승(安勝)이 4천여 호를 이끌고 신라
에 투항하자, 신라는 이를 받아들여 그들을 금마저(金馬渚:익산)에 있게 하였
다. 이로 볼 때 진감선사의 선조가 이 때 안승과 함께 금마로 와서 살았던 한족
(漢族)으로 생각된다.
42) 아미(阿㜷):어머니. 초(楚)와 제인(齊人)은 모(母)를 미(㜷)라 하고, 강남인(江南
人)은 아구(阿區)라 한다고 한다. 어미 또는 어머니란 말이 여기에서 온 것 같다.
43) [總覽]은 결락이나 [全文] [拓本]에는 州임.
44) [總覽]은 결락이나 [全文] [拓本]에는 金임.
45) [總覽]은 결락이나 [全文] [拓本]에는 謂임.
태어나면서부터46) 울지 않았으니, 곧 일찍부터 빼어나 소리를 녹이고
말이 없는 도의 싹을 드러낸 것이다. 7, 8세가 되어47) 밖에 나가 아이들과
놀 때에는 반드시 나뭇잎을 사루어 향을 삼고 꽃을 따서 공양을 올리었다.
때로는 서쪽을 향해 꿇어앉아 해가 저물어도 움직이는 기색조차 없었다.
이에 선의 뿌리가 진실로 백천겁 전에 심어진 바여서, 발돋움을 하여도 따
라갈 수 없음을 알겠다. 어려서부터 성인이 되어서까지 효도의 뜻이 간절
하여 잠시도48) 잊지 못하였다. 그러나 집에는 한말의 곡식도 없었고, 또한
한 자의 땅도 없었다. 천시49)를 이용하여 가족을 봉양하니 오직 힘닿는 대
로 노력을 다 하였다.50) 이에 생선51) 장사를 하여 부모에게 봉양할 좋은 음
식52)을 넉넉히 마련할 수 있었다. 손으로 수고로이 그물을 짜지 않았지만,
마음은 이미 통발을 잊은 것에 부합하였다.53) 콩죽을 끓여 먹어도 부모의
기쁨을 다할 수 있었고,54) 진실로 난초를 캔다는 시를 읊으며55) 어버이를
화하게 하였다.56) 이미 부모가 돌아가시자57) 흙을 져다 무덤을 만들고는
“길러주신 은혜를 오로지 힘으로써 보답하였으니, (이제) 도의 뜻58)을 어
찌 마음으로 구하지 아니하랴. 내가 어찌 매달려 있는 박과 같이59) 나이가
들도록 지나온 자취에만 머물러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生而不啼, 迺夙挺銷聲, 息言之勝牙也. 旣齔從戱, 必燌葉爲
香, 釆花爲60)供. 或西嚮危坐, 移晷未61)嘗動容. 是知善本, 固
百千劫前所栽植, 非可跂而及者. 自丱臮62)弁, 志切反哺, 跬步
不忘. 而家無斗儲, 又無尺壤63). 可盜天時者, 口腹之養, 惟力
是視. 乃裨販娵隅, 爲贍64)滑甘之業. 手非勞於結網. 心已契於
忘筌. 能豐啜菽之資, 允叶采蘭之詠. 曁鍾囏棘, 負土成墳, 迺
曰, “鞠育之恩, 聊將力報希微之旨, 盍以心求, 吾豈匏爪, 壯
齡滯跡.”
46) 생년(生年):대중(大中) 4년(850)에 입적했을 때 나이가 77세였으므로 진감선사
는 774년에 출생하였다.
47) 기츤(旣齔):남녀아동(男女兒童)들이 7·8세에 이를 갈므로 비유하여 어릴 때를
가리킨다.
48) 규보(跬步):1거족(擧足)을 규(跬), 2거족을 보(步)라 하므로 규보란 즉 한 발자
국(반걸음)을 뜻한다.
49) 천시(天時):자연의 순리를 뜻하며 천시를 훔쳤다는 것은 인간이 천시를 잘 알
아 지혜롭게 삶을 영위함을 말한다.
50) 유력시시(惟力是視):『춘추좌전春秋左傳』「희공僖公」24년의 “除君之惡 唯力是
視”에서 따온 말이다.
51) 취우(娶隅):청어(靑魚) 또는 물고기의 이칭(異稱).
52) 활감(滑甘):부모에게 봉양하는 매끄럽고 맛있는 음식.
53) 심이계어망전(心已契於忘筌):마음은 이미 통발을 잊은 것에 합하였다 하였으
니, 고기를 잡으면 통발을 이미 잊음에 비유함이다. 선리(禪理)를 깨달았음에 비
유하는 말이나, 여기서는 일상을 영위함에 작위함이 없이 여여하였음을 뜻한다.
『장자莊子』「외물外物」, “筌者所以在魚 得魚而忘筌 蹄者所以在兎 得兎而忘蹄
言者所以在意 得意而忘言”.
54) 철숙지자(啜菽之資):콩죽을 끓여 먹어도 그 즐거움이 다하게 하는 것으로 효도
를 뜻한다. 『예기』「단궁檀弓」‘하’, “孔子曰 啜菽飮水 盡其歡 斯之謂孝 斂手足形
還葬 而無槨 稱其財 斯之謂禮”.
55) 채란(采蘭):효자가 부모를 잘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문선文選』「보망시補亡
詩」‘남해南陔’에 “循彼南陔 言采其蘭 眷戀庭闈 心不遑安”이라 하였는데, 이에
대해 이선(李善)이 “采蘭 以自芬香也 循陔以采香草者 將以供養其父母 喩人求珍
異以歸”라고 주해하였다.
56) 윤협(允叶):윤협(允協)과 같은 말로, 뜻에 잘 맞추어 편안케 함이다.
57) 간극(囏棘):부모의 상(喪)을 말한다. ‘囏’은 ‘ ’의 古字이다.
58) 희미(希微):『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 14장, “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 此三者不可致詰 故混而爲一”이라 하였는데, 여기서는 가히
볼 수도 들을 수도 없고, 이름 붙일 수도 없는 최상승(最上乘)의 선리(禪理)를
뜻한다.
59) 오기포과(吾豈匏瓜):『논어』「양화」의 “吾豈匏瓜也哉 焉能繫而不食”에서 온 말
이니 좁은 곳에 매어 있지 않고 중국(中國)으로 유학(遊學)하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60) [總覽]은 결락이나 [全文] [拓本]에는 爲임.
61) [拓本]에는 未. [總覽] [全文]에는 末이나 未의 오자임.
62) [全文]의 角은 臮의 오자임.
63) [全文] [拓本]에는 壤. [總覽]의 壞는 壤의 오자임.
64) [全文]의 瞻은 贍의 오자임.
드디어 정원 20년65)에 세공사(歲貢使)에게 가서 뱃사공이 되기를 청하
여 배를 타고 서쪽으로 항해하였다. 비루한 일에 너그럽고 험한 것 보기를
평이(平夷)한 것 보듯이 하여, 자비의 배를 노저어 고통의 바다를 건넜다.
중국에 이르러 국사(國使)에게 고하여 “사람마다 각각 뜻이 있는 것이니,
여기서 서로 헤어지기를 청합니다” 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목적의 길을 떠
나 창주(滄州)에 이르러 신감대사66)를 뵈었다. 몸을 던져 절하고67) 반쯤 일
어서려는 순간 대사가 기꺼워하면서 “반갑다. 이별한 지 얼마 되지 않았
는데 기쁘게 다시 서로 만났구나”라고 하고는 곧바로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게 하였다.68) 갑작스레 인가를 받으니 마치 불을 마른 쑥에 대는 듯, 물
을 낮은 데로 쏟아 붓는 듯하였다. 이때 제자들도 서로 “동방의 성인을 여
기서 다시 뵙게 되었구나”라고 하였다.
遂於貞元廿年, 詣歲貢使, 求爲榜人, 寓足西泛. 多能鄙事, 視
險如夷, 揮楫慈航, 超截苦海. 及達彼岸, 告國使曰, “人各有
志, 請從此辭.” 遂行至滄州, 謁神鑒大師. 投體方半, 大師怡
然曰, “戱別匪遙, 喜再相遇.” 遽令削染. 頓受印契, 若火沾燥
艾, 水注卑邍.69) 然徒中相謂曰, “東方聖人, 於此復見.”
65) 정원(貞元) 20년:애장왕(哀莊王) 5년(804).
66) 신감대사(神鑑大師):?~844. 당대(唐代) 마조도일(馬祖道一:709~788)의 선맥을
이은 선승.
67) 투체(投體):오체투지(五體投地)의 줄인 말. 두 다리와 두 팔, 머리의 오체를 땅
에 대고 절하는 것을 말한다.
68) 삭염(削染):삭발(削髮)과 염의(染衣)의 줄인 말로 출가하여 스님이 된다는 말
이다.
69) [總覽]에는 , [全文]에는 邃, [苑] [拓本]에는 邍이니, 邍는 邃의 고자(古字)임.
선사는 얼굴이 검어서 대중들이 이름을 부르지 않고 지목하여 흑두타
(黑頭陀)라고 하였다. 이는 곧 진리를 찾고 묵묵(默默)한 것에 처함이 참
으로 칠도인70)의 후신이기도 한 때문이니, 어찌 읍중(邑中)의 검은 사람인
자한(子罕)이 뭇사람의 마음을 위로한 데에 비할 수 있겠는가.71) 길이 붉
은 수염의 불타야사72)나 푸른 눈의 달마73)와 더불어 색상(色相)으로서 나
타내 보인 것이다.
禪師形貌黯然, 衆不名, 而目爲黑頭陁. 斯則探玄處默, 眞爲漆
道人後身, 豈比夫邑中之黔, 能慰衆心而已哉. 永可與74)赤頿
靑眼, 以色相顯示矣.
70) 흑두타(黑頭陁):동진(東晉)의 도안법사(道安法師:314~385)로 12세에 출가하였
는데 얼굴이 검고 너무 못생겨서 그때 사람들이 그를 흑두타(黑頭陁) 또는 칠도
인이라고 하였다. 그는 불도징(佛圖澄)을 스승으로 섬기고 법제(法濟)·지담(支
曇) 등에게 배웠다. 이후 불법을 선양하기 위해 문인들을 양주(凉州)·촉(蜀)·나
부산(羅浮山) 등지에 보내고 그는 혜원 등 40인을 거느리고 양양(襄陽)에서 포
교하였다. 여러 불전 가운데 잘못된 곳의 문구를 비교하여 밝히고, 모든 경전의
역자와 번역, 연대가 미상인 것을 상고하여 경록(經錄)을 작성하였다. 또한 경전
해석에 서분(序分), 정종분(正宗分), 유통분(流通分)의 삼과목(三科目)을 창설하
고, 승가생활의 규범 및 석씨(釋氏)를 스님들의 성(姓)으로 해야 할 것을 주장하
였으니, 그로부터 중국인에 의한 중국불교가 발흥하는 계기가 되었다.
71) 위중심(慰衆心):춘추(春秋)시대 송자한(宋子罕)이 평공(平公)의 별장을 농한기
로 미루어 지으려 하자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인부들이 “택문(澤門)의
흰사람은 실로 우리를 부리고, 읍중(邑中)의 검은이는 우리의 마음을 위로한다
“宋皇國父爲大宰 爲平公築臺 妨於農收 子罕請俟農功之畢 公弗許 築者謳曰 澤
門之晳 實興我役 邑中之黔 實慰我心”고 한 『춘추좌전』「양공襄公」17년의 내용
을 인용한 것이다.
72) 적자(赤髭):북천축(北天竺)의 계빈국(罽賓國) 사문(沙門) 불타야사(佛陀耶舍
Buddhayaśas)는 수염이 붉어 적자라고 불렀다.
73) 청안(靑眼):중국 선종(禪宗)의 초조(初祖)인 달마(達磨)의 눈이 파란 것에 비유
한 말이니 벽안(碧眼)이라고도 한다.
74) [苑] [拓本]에는 與. [全文] [總覽]에는 興이나 與의 오자임.
원화 5년75)에 숭산(嵩山) 소림사의 유리계단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니,76)
어머니77)가 전에 꾼 꿈과 완연히 부합하였다. 계를 받고나서 다시 학사78)로
돌아가 경을 배웠는데,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니, 꼭두서니보다 붉고 남빛
보다 푸르러79) 가르쳐 준 스승보다 나았다.
元和五年, 受具於嵩山少林寺瑠璃壇, 則聖善前夢. 宛若合符,
旣瑩戒珠, 復歸橫海, 聞一知十, 茜絳藍靑.
75) 원화오년(元和五年):헌덕왕(憲德王) 2년(810).
76) 수구(受具):비구계인 250계(具足戒)를 받은 것을 말한다.
77) 성선(聖善):어머니. 『시경詩經』「패풍邶風」‘개풍凱風’, “母氏聖善.”
78) 횡해(橫海):橫은 黌과 通함. 학사(學舍)란 뜻이다.
79) 천강람청(茜絳藍靑):붉은 빛은 꼭두서니에서 취하는 것이나 꼭두서니보다 더
붉고, 푸른 빛은 남초에서 얻지만 남초보다 더 푸르다는 말로, 제자가 스승보다
뛰어남을 비유한 말이다.
비록 고요한 물처럼 마음이 맑았지만 조각구름(斷雲)과 같이 찾아 다니
면서 묻고 배웠다. 그때 마침 우리나라의 스님인 도의80)가 먼저 중국에 와
서 도를 구하던 중이었는데 우연히 만나 반가워 하니 서와 남에서 친구를
얻은 것이다.81) 서방으로 찾아 다니면서 부처님의 지견82)을 증득하였다.
의공(義公)이 먼저 고국으로 돌아오고83), 선사는 곧 종남산(終南山)으로
들어가 높은 봉우리에 올라, 소나무 열매를 먹으면서 선정과 지혜[止觀]
를 닦으며 고요히 있기를 3년 동안 하였다. 그 후 자각84)으로 나와서 네거
리 길에서 짚신을 삼아 널리 보시하며 왔다갔다 하기를 또 3년 동안 하였
다. 이에 이미 고행(苦行)도 닦았고 타국의 지방도 다 유람하였으니, 비록
공(空)을 관(觀)한다고 하지만, 어찌 본국을 잊을 수 있겠는가.
雖止水澄心, 而斷雲浪跡. 粵有鄕僧道義, 先訪道於華夏, 邂逅
適願, 西南得朋. 四遠叅尋, 證佛知見. 義公前歸故國, 禪師卽
入終南, 登萬仭之峯, 餌松實而止觀, 寂寂者三年. 後出紫閣,
當四達之道, 織芒屩而廣施, 憧憧者又三年. 於是, 苦行旣已
修, 他方亦已遊, 雖曰觀空, 豈能忘本.
80) 도의(道義):신라에 선종을 최초로 전한 선승(禪僧). 신라 선덕왕(宣德王) 5년
(784)에 입당(入唐)하여 서당지장선사(西堂智藏禪師)의 심인(心印)을 전수받고,
헌덕왕(憲德王) 13년(821)에 귀국하였다. 선리(禪理)가 아직 미개한 신라에서 ‘마
어(魔語)’를 한다고 비난하자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 은거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심인은 염거(廉居)를 거쳐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에게 이어졌고 그
는 선종 9산문(禪宗 九山門)의 하나인 가지산파(迦智山派)의 개조(開祖)로 추앙
되었다. 『조당집祖堂集』17에는 그의 탑비로 여겨지는 「설악산진전사원적선사비
문雪岳山陳田寺元寂禪師碑文」이 인용되어 여러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81) 서남득붕(西南得朋):동류(同類)와 같이 간다는 뜻이다. 『주역』「곤坤」, “西南得
朋 乃與類行.”
82) 지견(知見): jñāna-darśana.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남김 없이 깨달아 조견
(照見)하는 부처님의 지혜를 말한다.
83) 821년에 돌아왔다.
84) 자각(紫閣):중국 하남성 북서쪽에 있는 함곡관(凾谷關) 밖의 지명이다.
이에 태화 4년85)에 귀국하여86) 불교의 최상승(最上乘) 도리로 우리나라
를 비추었다. 흥덕대왕이 편지를 보내 환영하고 위로하며 “도의선사가 전
날에 이미 돌아왔고, 스님께서 이어 돌아오시니 두 보살이 되었도다. 옛적
에는 흑의이걸87)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이제는 누더기 입은 뛰어난 스님
을 친견하니, 하늘에까지 이름이 가득하고88) 자비스런 위엄이 있어 온 나
라가 기쁘게 기대는구나. 내가 장차 동쪽 계림 땅에 상서로운 곳을 만들겠
다”고 하였다.
乃於大和四年來歸, 大覺上乘, 照我仁域. 興德大王, 飛鳳筆迎
勞曰, “道義禪師, 曏已歸止, 上人繼至, 爲二菩薩. 昔聞黑衣
之傑, 今見縷褐之英, 彌天慈威, 擧國欣賴. 寡人行當以東雞林
之境, 成吉祥之宅也.”
85) 태화(太和) 4년:흥덕왕(興德王) 5년(830).
86) 대화사년래귀(大和四年來歸):진감(眞鑑)은 804년에 중국에 들어갔으므로 26년
간 머물다가 귀국한 셈이다.
87) 흑의이걸(黑衣二傑):중국 남조 제(齊)의 무제(武帝)가 현창(玄暢)·법헌(法獻)
두 법사를 승주(僧主)로 삼아서 강남과 강북의 일을 나누어 맡기었으므로 당시
인들이 흑의이걸이라 불렀다. 『불조통기佛祖統紀』권36(대정장49, p.347a1).
88) 미천(彌天):도안이 중국 양양에 있을 때 재사(才士) 습착치(習鑿齒)가 와서 “나
는 사해습착치(四海習鑿齒)요”하니, 도안은 “나는 미천석도안(彌天釋道安)이
요”라고 응대하였다. 『고승전高僧傳』권5「석도안전釋道安傳」(대정장50, p.352c5
참조).
비로소 상주의 노악산(露嶽山) 장백사89)에 주석하였다. 의원의 문에 병
자가 많듯이 오는 자가 구름과 같아, 방장(方丈)은 비록 넓었으나 형편이
어려워 드디어 보행으로 진주90)의 지리산에 이르렀다. 호랑이91) 몇 마리
가 포효하면서 앞을 인도하여 위태로운 곳을 피해 평탄한 곳으로 가게 하
니 앞에서 이끄는 기병92)과 다름이 없었다. 따라가는 사람도 두려워하는
바가 없어 집에서 기르는 개와 같았다. 그러한 즉 선무외삼장93)이 영산(靈
山)에서 여름결제94)를 할 때 맹수가 길을 인도하여 깊이 산 속의 굴로 들
어가 석가모니의 입상을 보았다는 사적과 꼭 같았다. 또 저 축담유95)가 조
는 호랑이의 머리를 쳐서 경을 듣게 하였는데, 또한 그것만이 오로지 승사
(僧史)에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이에 화개곡96)의 고 삼법화상97)이 남긴 절
터에 절98)을 지으니 마치 꿈속의 궁전[化城]처럼 장엄하게 이루어졌다.
始憩錫於尙州露岳長栢寺. 毉門多病, 來者如雲, 方丈雖寬, 物
情自隘, 遂步至康州知異山. 有數於菟, 哮吼前導, 避危從坦,
不殊兪騎. 從者無所怖畏, 豢犬如也. 則與善无畏三藏, 結夏靈
山, 猛獸前路, 深入山穴, 見牟尼立像, 宛同事跡. 彼竺99)曇猷
之扣睡虎頭, 令聽經, 亦未專媺於僧史也. 因於花開谷, 故三法
和尙蘭若遺基, 纂100)修堂宇, 儼若化成.
89) 장백사(長栢寺):지금 상주 노음산(露陰山)의 남장사(南長寺).
90) 강주(康州):『삼국사기』권34「잡지」3 지리, “신문왕(神文王) 5년(685)에 거타주
(居陀州)에서 분리되어 청주(菁州)가 되었다가 경덕왕(景德王) 6년(747)에 강주
(康州)로 고쳤으니, 지금의 진주(晉州)이다.”
91) 어토(於菟):호랑이의 별칭(別稱)이다.
92) 유기(兪騎):유아기(兪兒騎)의 줄임말. 황제가 출행할 때, 의장대(儀仗隊)를 선
도하는 기병(騎兵)이다.
93) 선무외삼장(善无畏三藏): Śubhakara-simha. 637~735. 중국에서 밀교를 조직적
으로 해석한 인도스님. 인도 마갈타국의 불수왕(佛手王)을 이어 13세에 왕이 됐
으나, 형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출가하여 나란다사의 달마국사를 스승으로 하여
밀교의 법등(法燈)을 이었다. 뒤에 중국으로 들어와(716) 현종의 보살핌 속에 역
경(譯經)에 힘쓰고 금강지삼장(金剛智三藏)과 함께 밀교 전파에 노력하였다. 밀
교의 근본경전인 『대일경大日經』7권 등을 번역하고(725), 그 요지를 보강하여
부족한 것을 보충한 『대일경소大日經疏』가 일행(一行:673~727)에 의해 편찬되
었다. 홍려경(鴻臚卿)에 추증되었다.
94) 결하(結夏):삼하안거(三夏安居)로 4월 16일부터 7월 15일까지 3개월간의 우기
(雨期)에 대중이 한 곳에 모여 수행하는 행사. 결제(結制)라고도 한다.
95) 축담유(竺曇猷):진(晉)나라 때 강거국(康居國)에서 온 스님. 일명 법헌(法憲)이
라고도 한다.
96) 화개곡(花開谷):경상남도 하동군 화개읍 운수동 쌍계사가 있는 곳.
97) 삼법화상(三法和尙):신라시대의 스님. 「지리산쌍계사기智異山雙谿寺記」에 의
하면 육조정상(六祖頂上)을 김대비(金大悲)와 함께 훔쳐 지리산 화개곡에 육조
정상탑(六祖頂上塔)을 세우고 오직 선정(禪定)에 침잠했던 내용을 전하고 있다.
98) 난야(蘭若): āranyaka. 적정처(寂靜處)라고도 번역. 조용하고 자그마한 수도처
로 절을 일컫는다.
99) [全文]에는 竺. [總覽] [苑] [拓本]에는 笁이니, 竺과 笁은 同字임.
100) [拓本]에는 纂. [全文] [總覽]에는 簒이나 纂의 오자임.
개성 3년101)에 이르러 민애대왕102)이 갑자기 임금의 자리에 올라 깊이
불교103)에 의탁하였다. 명령을 내려 재(齋)의 비용을 준비하고 따로 친견
하기를 구하였다. 선사가 “부지런히 선정(善政)에 힘쓰는데 있는 것이지,
어찌 만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사자(使者)가 왕에게 복명하자 왕
이 듣고 부끄러워하며 깨닫고, 선사는 색과 공을 다 초월하고 선정과 지혜
를 함께 원만히 갖추었다고 하여 사신을 보내어 호를 내려 혜소(慧昭)라
하였는데, 소(昭)자는 성조104)의 묘휘(廟諱)를 피해서 바꾼 것이다. 이에
승적을 대황룡사105)에 올리고 서울로 나아오도록 청하였다. 사신들이 오
고 가고 해서 말고삐가 길에서 엉길 정도였으나 산처럼 우뚝 서서 그 뜻
을 굽히지 않았다. 옛날에 승조법사106)가 원위107)의 세 번 부름을 거역하며
“산에 있으면서 도를 행하여 크게 통하는데 어긋나지 않으려 한다”고 하였
으니, 깊은 산에 있으면서 높은 뜻을 기르려는 것이 시대는 다르지만 뜻은
같다고 하겠다.
洎開成三年, 愍哀大王, 驟登寶位, 深託玄慈. 降璽書餽齋費,
而別求見願. 禪師曰, “在勤修善政, 何用願爲.” 使復于王, 聞
之愧悟, 以禪師色空雙泯, 定惠俱圓, 降使賜號爲慧昭, 昭字避
聖祖廟諱易之也. 仍貫籍于大皇龍寺, 徵詣京邑. 星使往復者,
交轡于路, 而岳立不移其志. 昔僧稠拒元魏之三召云, “在山行
道, 不爽大通.” 棲幽養高, 異代同趣.
101) 개성(開成) 3년:민애왕(閔哀王) 원년(838).
102) 민애대왕(愍哀大王):신라 44대 왕으로 838년부터 839년까지 재위하였다. 휘
(諱)는 명(明). 시중(侍中) 이홍(利弘)과 함께 희강왕(僖康王)을 핍박하여 자살케
하고 왕위에 올랐으나, 김우징(金祐徵) 일파인 김양(金陽)에게 살해되었다. 민
애왕(敏哀王) 또는 민애왕(閔哀王)으로도 쓴다.
103) 현자(玄慈):깊고 그윽하며 자애로운 불교의 교리.
104) 성조(聖祖):39대 소성대왕(昭聖大王).
105) 대황룡사(大皇龍寺):경주시 구황동에 사지(寺址)가 남아 있으며, 진흥왕 14년
(553)에 공사를 시작하여 17년만인 같은 왕 30년(569)에 완성하였다. 신라 삼보
(三寶) 가운데 장육상(丈六像)과 9층탑인 이보(二寶)가 있던 호국 사찰로, 신라
하대의 보수 기록인 「황룡사구층목탑찰주본기皇龍寺九層木塔刹柱本記」가 발
견되어 창건연기(創建緣起)와 황룡사성전(皇龍寺成典)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었
다. 이기백,「황룡사와 그 창건」『신라시대의 국가불교와 유교』, 1978.
106) 승조법사(僧稠法師):480~560. 북제(北齊)의 고승으로 경사(經史)에 통하여 태
학박사(太學博士)가 되었다. 후에 출가해서 선정을 얻고 위 효명제(魏 孝明帝)의
존숭을 받았다. 천보(天保:550~559) 중에 운문사(雲門寺)에 주석하다가 건명(乾
明) 원년에 입적하였다. 『속고승전續高僧傳』권16(대정장50, pp.553~555).
107) 원위(元魏):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467~499)가 낙양(洛陽)으로 천도하면
서 본래의 성(姓)인 탁발(拓跋)을 원(元)으로 고쳤다. 그래서 원위라고도 부른
다. 다시 말해 별칭으로 효명제를 가리킨 것.
그 곳에서 여러 해를 머무니 법문 듣기를 청하는 이가 벼(稻)와 삼대
(麻)처럼 줄을 지어 거의 송곳 꽂을 곳도 없을 정도로 많았다. 드디어 좋
은 경계를 돌아다니며 찾아 남령의 산기슭을 얻으니, 상쾌하고 앞이 탁 트
여서 거처하기에 으뜸이었다. 이에 선려(禪廬)를 지으니108) 뒤로는 안개
낀 높은 봉우리를 의지하였고, 앞으로 내려다보면 구름 덮인 시내를 누르
고 있었다. 눈을 맑게 하는 것은 강 건너 먼 산이요, 귀를 상쾌하게 하는
것은 돌에서 솟는 흐르는 여울물 소리였다. 봄 시내에 피는 꽃, 여름 길가
에 있는 소나무, 가을 산골에 비치는 달, 겨울 산등에 덮여 있는 눈의 경치
로 사철마다 모습이 변하고 만상(萬象)이 빛을 바꾸니 온갖 소리가 화음
을 이루며 수많은 바위들은 다투어 빼어났다. 일찍이 중국에 다녀온 사람
들이 이곳에 이르러서는 모두 깜짝 놀라면서 보고 “혜원공(慧遠公)의 여
산(廬山) 동림사(東林寺)109) 경치를 바다 밖 신라에 옮겨 왔도다. 연화장
세계는 범부의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지만, 항아리 속에 별천지(別天地)가
있다고 한 것은 정말인가 한다”라고 하였다. 대나무통을 거쳐 물을 끌어와
집 둘레사방으로 물을 대고 나서 비로소 옥천(玉泉)으로써 현판의 제목으
로 삼았다.
居數年, 請益者, 稻麻成列, 殆無錐地. 遂歷銓奇境, 得南嶺之
麓, 爽塏居㝡. 經始禪廬, 却倚霞岑, 俯壓雲澗. 淸眼界者, 隔江
遠岳, 爽耳根者, 迸石飛湍. 至如春谿花, 夏徑松, 秋壑月, 冬嶠
雪, 四時變態, 萬象交光, 百籟和唫, 千巖競秀. 嘗遊西土者, 至
止咸愕, 視謂, “遠公東林, 移歸海表, 蓮花世界, 非凡想可擬,
壺中別有天地則信也.” 架竹引流, 環階四注, 始用玉泉爲牓.
108) 경시(經始):절(禪廬)을 짓기 시작하는 것.
109) 원공동림(遠公東林):혜원(慧遠)이 머물던 여산(廬山)의 동림사(東林寺)를 가리
킨다.
법손(法孫)을 손꼽아 헤아려 보니 선사는 조계110)의 현손(玄孫)이었다.
이에 육조혜능(六祖慧能)의 영당(影堂)을 세우고, 채색 단청하여 널리 중
생제도에 이바지하였으니 경111)에 이른바 “중생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비
단에 여러 상을 섞어 그린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屈指法胤則, 禪師乃曹溪之玄孫. 是用建六祖影堂, 彩飾紛墉,
廣資導誘, 經所謂, “爲悅衆生故, 綺錯繪衆像者也.”
110) 조계(曹溪):육조혜능(六祖慧能)은 중국 광동성 곡강현(曲江縣) 소주(韶州)의 동
남쪽 계곡인 조계산에 있던 보림사에서 불법(佛法)을 크게 선양하였다. 이로 인
해 붙여진 육조혜능의 별칭.
111) 경(經):『불상조성경佛像造成經』을 가리킨다.
대중 4년112) 정월 9일 이른 아침 문인에게 “만법(萬法)이 모두 공(空)하
니 내가 장차 가려 한다. 일심(一心)으로 근본을 삼아 너희들은 힘써 노력
하라. 탑을 만들어 형상을 보존하지 말고 명(銘)으로써 행적을 기록하지
도 말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고 앉아서 엄연(奄然)히 입적(入寂)하니 금
생의 나이 77세이고 법랍113)이 41세였다. 이때 하늘에는 잔구름도 없는데
바람과 천둥소리가 갑자기 일어나고 호랑이와 이리가 울부짖었으며, 삼나
무와 향나무도 변하여 시들어졌다. 조금 뒤에 자주빛 구름이 하늘을 가리
더니 공중에서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났는데, 장례에 모인 이들의 귀에 들
리지 않음이 없었다. 곧 『양사梁史』114)에 “시중 저상115)이 일찍이 사문(沙
門)을 청하여 어머니의 병을 위해 기도하다가 공중에서 손가락 튕기는 소
리를 들었다”고 실려 있는데 성스러운 감응이 그윽히 나타난 것이니 어찌
거짓이겠는가. 무릇 불도에 뜻을 둔 사람들은 부음을 듣고 서로 조의를 표
하였으며 정을 잊지 못한 이들은 슬픔을 머금고 울었으니, 하늘과 사람들
이 비통하게 애도한 것을 단연코 알 수 있다. 널리 무덤길을 미리 갖추어
준비하였으니 제자 법량(法諒) 등이 울면서 시신을 받들어 날을 넘기지
않고 동쪽 봉우리 언덕에 하관하여 유언을 따랐다.
大中四年正月九日詰旦, 告門人曰, “萬法皆空, 吾將行矣, 一
心爲本, 汝等勉之, 無以塔藏形, 無以銘紀跡.” 言竟坐滅, 報
年七十七, 積夏四十一. 于時, 天無纖雲, 風雷欻起, 虎狼號 ,
杉栝變衰. 俄而紫雲翳空, 空中有彈指聲, 會葬者無不入耳. 則
梁史載, “褚侍中翔, 嘗請沙門, 爲母疾祈福, 聞空中彈指.” 聖
感冥應, 豈誣也哉. 凡志於道者, 寄聲相弔,116) 未亡情者, 銜悲
以泣, 天人痛悼, 斷可知矣. 靈函幽隧, 預使備具, 弟子法諒等,
號奉色身, 不踰日而窆于東峰之冢, 遵遺命也.
112) 대중(大中) 4년:문성왕년.(文聖王) 12년(850).
113) 적하(積夏):구족계(具足戒)를 받은 해로부터 세는 법(法)의 나이. 하안거(夏安
居)의 횟수에 의거하여 수를 세는데 법랍(法臘)이라고도 한다.
114) 『양사梁史』:당 태종 때 요사염(姚思廉)과 위징(魏徵)이 칙명(勅命)으로 남조(南
朝) 양(梁)의 4대의 역사를 기록한 정사(正史). 전 56권.
115) 저상(褚翔):505~548. 시중인 저상(褚翔)은 양나라 사람으로 자(字)는 세거(世
擧)이며 의여태수(義與太守), 이부랑(吏部郞), 시중(侍中),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는데 공정하고 청렴하며 혜정(惠政)이 많았다. 어머니상을 당하여 피곤해
하다가 마침내 사망하였다 한다. 『양서梁書』권 47 「효행孝行」.
116) [拓本]의 吊는 弔와 同字임.
선사는 성품이 꾸밈이 없고 말을 꾸며하지 않았으며 옷은 삼베라도 따
뜻하게 여겼고 음식은 겨와 싸라기라도 달게 여겼다. 도토리와 콩을 섞은
밥에 채소 반찬은 항상 두 가지가 없었다. 귀인들이 때때로 이르러도 일찍
이 다른 반찬이 없었다. 문인들이 거친 음식을 가져다 드리기 어려워 하
니, 선사께서 “마음이 있어 여기에 왔으니 비록 거친 밥인들 무엇이 해롭
겠는가”라고 하시며,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 나이 많은 이나 어린애를
접대함이 한결같았다.
禪師性不散樸, 言不由機, 服煖緼黂, 食甘糠麧.117) 茅菽雜糅,
蔬佐無二. 貴達時至, 曾不異饌. 門人以墋腹進難, 則曰, “有
心至此, 雖糲何害.” 尊卑耋穉, 接之如一.
117) [全文]의 麭는 麧의 오자임.
사자가 말을 타고 임금의 명을 전하여 멀리서 법력(法力)을 구할 때마
다 “무릇 왕토118)에 거주하면서 불일(佛日)을 이고 있는 자로서 누군들 마
음을 기울이고 생각을 다해서 임금을 위해 복을 빌지 않겠습니까. 또한 어
찌 멀리서 마르고 썩은 나무119)에 윤언120)을 더럽히려 하십니까. 전하고 이
르는 무리들이 굶주려도 먹지 못하고 목말라도 마시지 못함이 걱정입니
다”고 하였다. 혹시라도 외국 향을 가져다 드리는 사람이 있으면 곧 질그
릇에 잿불을 담아 환을 만들지 않고 태우면서 “나는 이것이 무슨 냄새인
지 알지 못하겠다. 다만 마음을 정성스럽게 할 뿐이다”고 하였다. 또한 중
국차를 공양하는 사람이 있으면 돌솥에 섶으로 불을 지펴 가루로 만들지
않고 끓이면서 “나는 이것이 무슨 맛인지 알지 못하겠다. 배를 적실 뿐이
다”고 하였다. 진(眞)을 지키고 속(俗)을 거스리는 것이 모두 이러하였다.
每有王人, 乘馹傳命, 遙祈法力, 則曰, “凡居王土而戴佛日者,
孰不傾心護念, 爲君貯福. 亦何必遠汚綸言於枯木朽株. 傳乘
之, 飢不得齕, 渴不得飮, 吁可念也.” 或有以胡香爲贈者, 則
以瓦載煻灰, 不爲丸而 121)之曰, “吾不識是何臭, 虔心而已.”
復有以漢茗爲供者, 則以薪㸑石釜, 不爲屑而 122)之, 曰, “吾
不識是何味, 濡腹而已.” 守眞忤俗, 皆此類也.
118) 왕토(王土):『시경』「소아小雅」‘북산北山’, “溥天之下 莫非王土”의 개념으로, 이와
같은 구절에 근거하여 우리 나라의 고대(古代)에 사전(私田)이 존재하지 않은 것
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이는 의제적(擬制的)인 개념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
우성,「신라시대의 왕토사상과 공전」『조명기화갑기념 불교사학논총』, 1965.
119) 고목후주(枯木朽株):진감선사 자신을 겸하(謙下)하여 마르고 썩은 고목에 비유
한 말.
120) 윤언(綸言):임금이 아랫사람에게 내리는 말이다. 『예기禮記』「치의緇衣」, “王言
如絲, 其出如綸 王言如綸, 其出如 ”.
121) [全文] [總覽]의 은 焫의 오자임.
122) [全文]의 焫은 煑의 오자임.
평소 선사는 범패123)를 잘하여 그 소리가 금옥 같았다. 구르는 곡조와
날리는 소리가 상쾌하면서도 슬프고 우아하여 모든 천상 사람들을 기쁘
게 할 만하였고, 길이 멀리까지 전해지니 배우려는 자가 당에 가득 찼으나
가르치는 것을 권태로워하지 않았다. 지금 신라에서는 어산124)의 묘음을
익히려는 사람들이 다투어 콧소리를 내는 것125)처럼 옥천의 남긴 음향을
본뜨려 하니, 어찌 소리로써 제도하는 교화가 아니겠는가.
雅善梵唄, 金玉其音. 側調飛聲, 爽快哀婉, 能使諸天歡喜, 永
於遠地流傳, 學者滿堂, 誨之不倦. 至今東國, 習魚山之妙者,
競如掩鼻, 效玉泉餘響, 豈非以聲聞度之之化乎.
123) 범패(梵唄):사법요(四法要)의 하나로 법회를 시작할 때 여래묘색신(如來妙色
身)의 게송(偈頌)을 읊으며 부처님의 큰 덕을 찬양한 것인데, 보통 불교음악을
지칭하며 우리 나라에서는 진감선사(眞鑑禪師)에 의해 널리 보급된 것으로 알
려져 있다.
124) 어산(魚山):중국 위(魏)나라 조자건(曹子建:192~232)이 어산(魚山)에 가서 놀
다가 바위 골짜기에서 송경(誦經) 소리가 맑게 흘러 나오는 것을 듣고 감동
되어 그 곡조에 따라 지은 범패를 말한다.『법원주림法苑珠林』권49(대정장53,
p.576a03), “陳思王曹植賞遊魚山 忽聞空中梵天之響 淸雅哀婉 其聲動心 獨聽良
久 … 乃摹其聲節 寫爲梵唄 撰文製音 傳爲後式 梵聲顯世 始於此焉.”
125) 비성(鼻聲):중국 동진(東晉)의 사안(謝安:320~385)이 낙하서생영(洛下書生詠)
이라는 가곡을 즐겨 부른 탓으로 코병이 생겨 코먹은 소리를 하게 되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 음성을 모방하느라고 손으로 코를 쥐고 코먹은 소리를 한 데
서 나온 고사이다.『진서晉書』권79「사안전謝安傳」.
선사께서 열반하신 것은 문성대왕 때였는데, 임금이 진정으로 슬퍼하며
청정한 시호를 내리려다 남기신 훈성[遺戒]을 듣고서 부끄러워 그만두었
다. 36년126)이 지난 뒤에 문인들이 언덕이 골짜기로 변할 것을 걱정하여 법
을 사모하는 제자에게 영원히 썩지 않을 방법을 물으니, 내공봉 일길간127)
인 양진방(楊晉方)과 숭문대128) 정순일(鄭詢一)이 쇠를 끊을 정도의 하나
된 마음129)으로 돌에 새길 것을 청하였다. 헌강대왕이 지극한 덕화를 넓히
고 불교를 우러러 받들어, 시호를 진감선사(眞鑑禪師), 탑호를 대공영탑
(大空靈塔)이라 추증하고, 이에 새김(刻)을 허락하니 길이 영예가 오래도
록 하였다.
禪師泥洹, 當文聖大王之朝, 上惻僊襟, 將寵淨諡, 及聞遺戒,
愧而寢之. 越三紀, 門人以陵谷爲慮, 扣不朽之緣於慕法弟子,
內供奉一吉干楊晉方, 崇文臺鄭詢一, 斷金爲心, 勒石是請. 獻
康大王恢弘至化, 欽仰眞宗, 追諡眞鑒禪師大空靈塔, 仍許篆
刻, 以永終譽.
126) 삼기(三紀):일기(一紀)가 12년이므로 삼기는 36년이다.
127) 일길간(一吉干):신라 17관등(官等)의 하나인 제7관등으로 일길찬(一吉飡)이라
고도 쓴다.
128) 숭문대(崇文臺):신라 하대 문한기구(文翰機構)의 하나로 낭(郞) 2인, 리(吏) 4
인, 종사지(從舍知) 2인을 두었는데 낭 2인은 학사(學士)와 직학사(直學士) 2인
으로 보이며, 당제(唐制)의 예로 보아 동궁 직속의 문한기구였을 것으로 추측된
다. 이기동,「나말려초 근시기구와 문한기구의 확장」『신라 골품제사회와 화랑
도』, 1980.
129) 『주역』「계사」‘상’, “二人同心 其利斷金”.
아름답구나, 해가 동쪽에서 나오니130) 어느 어두운 곳에 비추지 않음이
없고, 바닷가에 향나무를 심으니 오래도록 더욱 꽃답다. 어떤 사람이 “선
사께서 명도 하지 말고 탑도 하지 말라는 훈계를 내렸는데 후대에 내려와
우리 제자131)들에 이르러서는 확실히 선사의 뜻을 받들지 못했으니 그대
들이 구하였는가, 아니면 왕이 하라고 명하였는가. 바로 백옥의 티132)라 할
만하다”고 하니, 아! 그르다고 하는 사람도 또한 그르다. 명예를 가까이 하
지 않아도 이름이 드러나니 수행133)의 남은 보답이다. 재처럼 없어지고 번
개처럼 끊어지는 것보다는 할 때에 할 만한 일을 하여 명성을 대천세계
(大千世界)에 떨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러나 귀부(龜趺)가 비신(碑
身)을 짊어지기도 전에 임금이 갑자기 돌아가시고 새 임금(定康王)이 이
어 즉위하시니, 질나발(塤)과 저(篪)가 서로 응하듯이134) 의리로 부촉한 것
에 화합하여 좋은 것은 좇아 하시었다. 이웃 산의 절135)도 옥천(玉泉)이라
일컬었으므로 이름이 겹쳐져서 백성들의 귀를 미혹하게 할까 염려하였다.
같은 이름을 버리고 달리하려 한 즉 마땅히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좇아야
하는데, 그 절이 자리잡은 곳을 살펴보게 하니 동구(洞口)에 두 시냇물이
마주 대하고 있었으므로 이에 제액(題額)을 내려 쌍계사라고 하였다.
懿乎, 日出暘谷, 無幽不燭, 海岸植香, 久而彌136)芳. 或曰, “禪
師, 垂不銘不塔之戒, 而降及西河之徒, 不能確奉先志, 求之
歟,137) 抑與之歟, 適足爲白珪之玷.” 嘻, 非之者, 亦非也. 不近
名而名彰, 盖定力之餘報. 與其灰滅電絶, 曷若爲可爲, 於可
爲之時, 使聲震大千之界. 而龜未戴石, 龍遽昇天, 今上繼興,
塤138)篪139)相應, 義諧付囑, 善者從之. 以隣岳招提, 有玉泉之
號, 爲名所累, 衆耳致惑. 將俾弃140)同卽異, 則宜捨舊從新, 使
眎141)其寺之所枕倚, 則以門臨複澗爲對, 乃錫題爲雙溪焉.
130) 양곡(暘谷):해돋는 곳. 『서경書經』「요전堯典」, “宅嵎夷 曰暘谷”.
131) 서하지도(西河之徒):제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132) 백규지점(白珪之玷):흰구슬의 흠결. 『시경』「대아大雅」‘억抑’, “白圭之玷 尙可磨
也 斯言之玷 不可爲也”.
133) 정력(定力):수도하는 사람이 선정(禪定)을 닦아서 얻은 법력(法力)을 말한다.
134) 훈지(塤篪):고대의 악기이름으로 질나발(塤)과 저(篪)를 가리킨다. ‘壎篪’또는
‘塤竾’라고도 쓴다. 훈지상응(塤篪相應)은 형제가 서로 화목함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시경』「소아」‘하인사何人斯’, “伯氏吹塤仲氏吹篪”.
135) 초제(招提):초투제사(招鬪提舍)의 약칭. 사방(四方)이라 번역하여 사방승(四方
僧)이 거주하는 곳을 초제승방(招提僧坊)이라 한다. 위 태무제(魏太武帝)가 가람
(伽藍)을 지어 초제사(招提寺)라 이름한 후 사원의 이칭(異稱)이 되었다.
136) [苑] [拓本]에는 彌. [總覽] [全文]의 爾는 彌의 오자임.
137)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 [拓本]은 歟임.
138)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 [拓本]은 塤임.
139)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 [拓本]은 篪임.
140) [苑] [全文] [拓本]의 弃은 棄의 古字임.
141) [苑] [全文] [拓本]의 眎는 視의 古字임.
다시 신에게 명을 내려 “전사는 수행으로써 드러났고 그대는 문장(文
章)으로 이름을 떨쳤으니 마땅히 비명(碑銘)을 지으라”고 하셨다. 신이 절
을 하며 “예 예” 하고는 물러 나와 생각하니, 얼마 전에 중국에서 이름을
얻었고 책 속에 기름지고 살찐 것을 맛보았다고는 하지만, 아직 성인의 경
전142)에까지 흠뻑 취하지 못하였고 오직 깊이 우물에 빠져 헤어나지 못함
이 부끄러울 뿐인데, 하물며 불법은 문자를 떠났기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임에 있어서랴. 굳이 혹 말하게 되면 수레를 북으로 향하면서 남방인 영
나라로 가려는 것과 같다.143) 다만 임금의 보살핌과 문인들의 큰 바램으로
문자가 아니면 많은 사람들의 눈에 밝게 보여 줄 수가 없어서, 드디어 감
히 몸으로는 유교와 불교를 겸하고144) 힘으로는 오능145)을 본받으려 하니
비록 돌에 의탁한다 할지라도 부끄럽고 두렵다. 그러나 도는 억지로 붙인
이름이니146)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겠는가! 석각으로 새길 만한 글인 즉
신이 어찌 감당하리오마는 거듭 명령하신 임금님의 뜻을 거역할 수 없어
삼가 아래와 같이 명을 짓는다.
申命下臣曰, “師147)以148)行149)顯, 汝以文進, 宜爲銘.” 致遠拜手
曰, “唯唯.” 退而思之, 頃捕名中州, 嚼腴咀雋于章句間, 未能
盡醉衢罇, 唯愧深跧泥甃, 況法離文字, 無地措言, 苟或言之,
北轅適郢. 第以國主之外護150), 門151)人152)之153)大154)願, 非文字,
不能昭昭乎群目,153)154) 遂敢身從兩役, 力效五能, 雖石或憑焉, 可慙
可懼. 而道强名也, 何是何非, 掘笔藏鋒, 則臣豈敢重宣前義,
謹札155)銘云.
142) 구준(衢罇):길거리에 개방되어 누구나 마실 수 있는 술항아리. ‘衢尊’이라고도
쓴다. 선인(善人)이면 누구나 탐독(耽讀)할 수 있는 성인의 도(道), 즉 성인의 경
전을 비유한 것. 『회남자淮南子』, 「무칭훈繆稱訓」, “聖人之道 猶中衢而致尊邪
過者斟酌 多少不同 各得其所宜 是故得一人 所以得百人也”.
143) 북원적영(北轅適郢):남쪽 초(楚)나라의 도읍인 영(郢)으로 가려고 하면서 수레
는 북쪽을 향하였으니, 본지에 어긋나는 행위를 말한다.
144) 양역(兩役):최치원이 유학자이면서 불승(佛僧)의 비명(碑銘)을 짓는 것을 말
한다.
145) 오능(五能):날다람쥐인 오서(鼯鼠)는 오능과 오불능(五不能)이 있는데, 최치원
은 이 가운데 오능을 본받아 유학자이지만, 불승(佛僧)의 비명을 지으므로 글을
짓기는 하여도 깊은 뜻은 다 표현하지 못한다는 뜻을 말하고 있다. 『설문해자說
文解字』서부鼠部, “鼫 五技鼠也 能飛 不能過屋 能緣 不能窮木 能游 不能渡谷 能
穴 不能掩身 能走 不能先人”.
146) 도강명야(道強名也):도(道)라는 이름도 부득이하여 억지로 붙인 이름이라는 뜻
이다. 『도덕경』제25장, “吾不知其名 字之曰道 强爲之名曰大”.
147)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 [拓本]은 師임.
148)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 [拓本]은 以임.
149)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 [拓本]은 行임.
150)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 [拓本]은 護임.
151)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 [拓本]은 門임.
152)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 [拓本]은 人임.
153)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 [拓本]은 之임.
154)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 [拓本]은 大임.
155) [全文]의 礼은 札의 오자임.
입을 다물고 선정을 닦았으며,
마음은 불타에 귀의했도다.
근기가 익은 보살이라,
넓힘이 다른 것이 아니로다.
杜口禪那,
歸156)心157)佛158)陀.159)
根160)熟161)菩162)薩,
弘之靡它.
156)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 [拓本]은 歸임.
157)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 [拓本]은 心임.
158)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 [拓本]은 佛임.
159)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 [拓本]은 임. 그러나 ‘불타’는 ‘佛陀’라고 쓰는
것이 옳다.
160)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 [拓本]은 根임.
161)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 [拓本]은 熟임.
162)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 [拓本]은 菩임.
용맹스럽게 호랑이굴을 찾아,
멀리 바다를 건넜도다.
가서는 정법안장(正法眼藏)인 비인(秘印)을 전해 받았고,
와서는 고국인 신라를 교화했도다.
猛探虎窟,
遠泛鯨波.
去傳秘印,
來化斯羅.
그윽한 곳을 찾고 좋은 곳을 가려서,
바위등성이에 터를 잡아 절을 지었도다.
물에 비치는 달이 마음을 맑게 했고,
구름과 도랑물이 흥을 붙였도다.
尋幽選勝,
卜築巖磴.
水月澄懷,
雲泉寄興.
산은 성(性)과 더불어 고요하였고,
골짜기는 범패와 더불어 응하였도다.
닿는 대상마다 걸림이 없으니,
삿[邪]된 마음을 끊은 것이 이를 증명함이라.
山與性寂,
谷與梵應.
觸境無硋,
息機是證.
도는 오조163)의 찬양을 받고,
위엄은 뭇 요망함을 다 꺾었도다.
묵묵히 자비한 음덕을 드리웠고,
아름다운 초청을 거역하였도다.
道賛五朝,
威摧衆妖.
默垂慈164)蔭,
顯拒嘉招.
163) 오조(五朝):진감선사(眞鑑禪師)를 존숭하고 의지한 다섯 임금. 즉 흥덕왕, 희강
왕, 민애왕, 신무왕, 문성왕이다.
164) [拓本][全文]에는 수자(垂字) 이하에 “慈蔭 顯拒嘉招 海自飄蕩 山何動搖 無思無
慮 匪斲匪雕 食不兼味”인 26자(字)가 있으나 [總覽]에는 이 26자가 모두 결락되
었고, [苑]에는 “無慮 匪斲匪雕 食不兼味”인 10자가 결락되었음.
바다는 스스로 움직일지언정,
산이야 어찌 움직이겠는가.
생각도 없고 분별도 없으며,
깎는 것도 없고 새기는 것도 없었도다.
海自飄蕩,
山何動搖.
無思無慮,
匪斲匪雕.
음식에는 맛을 겸(兼)함이 없고,
옷은 갖추어 입지 않았도다.
바람과 비가 그믐밤165)과 같아서,
처음과 끝이 한결같았도다.165)
食不兼味,
服不必備.
風雨如晦,
始終一致.
165) 풍우여회(風雨如晦):아무리 폭풍우가 몰아치는 캄캄한 그믐밤일지라도 닭은
때를 어기지 않고 정해진 시간에 반드시 운다는 말이니 시종(始終)이 여일(如
一)함을 뜻한다. 『시경』「정풍鄭風」 ‘풍우風雨’, “風雨如晦 雞鳴不己”.
지혜의 가지가 바야흐로 빼어나려는데,
법의 기둥이 문득 무너졌도다.
깊은 골짜기는 처량하고,
연기와 칡덩굴이 초췌함이로다.
慧柯方秀,
法棟俄墜.
洞壑淒涼,
煙羅憔忰.
사람은 갔으나 도는 남아 있으니,
끝내 잊을 수가 없도다.
상사(上士)가 소망을 펴니,
임금이 은혜를 내리셨도다.
人亡道存,
終不可諼.
上士陳願,
大君流恩.
법등(法燈)은 신라에 전해지고,
탑은 산 속에 우뚝하도다.
천의(天衣)에 의해 반석(盤石)이 다 닳도록,166)
영원토록 불문(佛門)에 빛나기 바라노라.
燈傅海衣,
塔聳雲根.
天衣佛石,
永耀松門.
166) 천의불석(天衣拂石):불교의 시간 개념을 나타내는 말로 오랜 세월을 뜻한다.
소겁(小劫)·중겁(中劫)·대겁(大劫)·대아승기겁(大阿僧祇劫)의 개념과 반석겁
(盤石劫)·개자겁(芥子劫) 등의 개념이 있다. 반석겁은 넓이와 높이가 각 40리씩
되는 큰바위를 천인(天人)이 100년마다 한 번씩 지나가면서 가벼운 옷자락으로
스쳐 이 바위가 닳아 없어지는 동안의 긴 세월을 말한다.
광계(光啓) 3년(887) 7월일에 세우고 환영(奐榮)스님이 글자를 새기다.
光167)啓三年,七月日, 建, 僧, 奐榮, 刻字.
167) 光啓三年七月日建이란 8字가 [拓本] [全文]에는 있으나 [總覽]에는 결락되었음
[비신(碑身)의 높이(高)는 6척7촌(六尺七寸), 폭(幅)은 3척3촌(三尺三寸), 글자의 간격은 7
분(七分)이며 해서(楷書)이다. 제액(題額)의 글자 간격은 3촌2분(三寸二分)이며 전서(篆書)
이다.]
[揭載]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 上 pp.105~119.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上, pp.66~72.
『한국금석전문韓國金石全文』 古代, pp.204~211.
[출처] 02.하동쌍계사진감국사대공영탑비문(河東雙谿寺眞鑒國師大空靈塔碑文)|작성자 실론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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