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승비문

01.장흥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문(長興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文)

수선님 2023. 9. 3. 14:17

01.장흥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문1)

長興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文

1) 본비(本碑):신라 헌강왕 10년(884)에 세웠다. 번역문으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이종찬,「신라보림사보조선사영탑비명新羅寶林寺普照禪師靈塔碑銘」,동국대박

물관,1985, pp.136~141.

홍순석,「한국의 고비명 탐방-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비」『동양학간보』10,단국

대 동양학연구소,1990.4, pp.48~53

있는 곳: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보림사

세운 때:신라 헌강왕 10년 갑진(884)

所在:全羅南道 長興郡 有治面 鳳德里 寶林寺

年時:新羅 憲康王 10年 甲辰(884)

신라국(新羅國) 무주2) 가지산3) 보림사4) 시보조선사(諡普照禪師) 영탑비

명(靈塔碑銘)과 서(序)

新羅國, 武州, 迦智山, 寶林寺, 諡普照禪師, 靈塔碑銘幷序.

2) 무주(武州):지금의 광주광역시를 중심으로 한 전라남도 일대 지역이다. “무주

는 본래 백제의 땅으로 신문왕 6년(686) 무진주(武珍州)라 하였다가 경덕왕 때

무주로 고쳤으니 지금의 광주(光州)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권36「잡지雜志」5

지리地理.

3) 가지산(迦智山):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에 위치한 산으로, 보조체징선사(普照

體澄禪師)가 이곳 보림사(寶林寺)에서 도의국사(道義國師)를 종조(宗祖)로 삼아

선종구산문(禪宗九山門)의 하나인 가지산파(迦智山派)를 열었다.

4) 보림사(寶林寺):조선 세조 3년(1457)~9년(1463) 무렵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신라국무주가지산보림사사적기新羅國武州迦智山寶林寺事蹟記」『고고미술』84,

한국미술사학회,1967.3에 따르면, “원표대덕선사(元表大德禪師)가 월지국(月氐

國)에 있을 때 한 선아(仙娥)의 원(願)에 따라 창건했는데, 가람은 동서에 법당을

만들어 불좌를 그 상면에 모시고, 계속하여 천자각(天子閣)·불자각(佛子閣)·운

자각(雲子閣)을 배치했으며 양 법당 좌우에 요사(寮舍)·낭상(廊廂)·누문(樓門)·

문당(門堂)을 세워, 서역·중국의 보림사와 같은 모습이었다”고 한다. 지금의 보

림사는 6·25동란 때 전소(全燒)된 것을 다시 세운 것으로 원표대덕의 초창지(草

創地)는 그 북쪽에 있다. 유물로는 「보조선사창성탑비普照禪師彰聖塔碑」를 비롯

한「재명철불좌상在銘鐵佛坐像」, 삼층석탑 2기, 석등, 동·서부도 등이 있다.

조청랑5)수정변부사마(守定邊府司馬) 사비어대6)신(賜緋魚袋臣) 김영7)

왕명을 받들어 찬(撰)하고 유림랑8) 수무주곤미현9)령(守武州昆湄縣令) 김

원(金薳)이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쓰다.

朝請郞, 守定邊府司馬, 賜緋魚袋, 臣, 金 , 奉敎, 撰,

儒林郞, 守武州昆湄縣令, 金薳, 奉敎, 書.

5) 조청랑(朝請郞):당(唐)·송대(宋代) 정7품상(正七品上)의 문산관위(文散官位)이다.

6) 비어대(緋魚袋):당나라 관리들은 관품(官品)의 고하에 따라 관복의 색깔과 허

리에 차고 다니던 어대의 종류가 달랐다. 3품 이상은 자색(紫色)에 금어대(金魚

袋), 4·5품은 비색(緋色)과 은어대(銀魚袋), 6·7품은 청색(靑色)과 동어대(銅魚

袋), 8품 이하는 황색(黃色)의 관복을 입고 철어대(鐵魚袋)를 찼다.

7) 김영(金穎):진성여왕 4년(890) 조청랑수금성군태수(朝請郞守錦城郡太守)로서

왕의 교지를 받들어 「원랑선사대보선광탑비문圓朗禪師大寶禪光塔碑文」 [신라

편]을 찬술하기도 했다. 정변부사마(定邊府司馬)는 당대의 관직으로 풀이되고 있

어 당(唐) 빈공과(賓貢科) 출신으로 보인다. 이후 897년 무렵 수창부시랑(守倉部

侍郞) 급찬(級飡)으로서 하정사(賀正使)에 선발되었으며, 그 찬술 연대와 찬술자

가 분명하지 않은 「운봉심원사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雲峰深源寺秀澈和尙楞伽

寶月塔碑」를 찬술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기동,「나말려초 근시기구와 문한기

구의 확장」『역사학보』77,1978;『신라골품제사회와 화랑도』,일조각,1984, p.262.

8) 유림랑(儒林郞):수(隋)·당(唐)·송대(宋代) 문관(文官) 정9품상(正九品上)의 관

위이다.

9) 곤미현(昆湄縣):지금의 전라남도 영암군(靈巖郡) 미암면(美巖面) 일대로 당시에

는 무주 반남군(潘南郡)에 속해 있었다. “본래 백제의 고미현(古彌縣)으로 경덕왕

때 이 이름으로 고쳤는데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삼국사기』권36「잡지」5 지리.

무릇 선의 경지는 그윽하고 고요하며 바른 깨달음은 깊고 오묘하여10)

헤아려 알기 어려우니 허공과도 같고 바다와도 같다. 그러므로 용수11)

사자존자12)는 서천13)에서 파초14)에 비유하여 중생을 깨우쳤고, 홍인15)

혜능조사16)는 진단17)에서 제호18)를 설명하였다. 대개 인과(因果)의 자취를

쓸어버리고 색상(色相)의 세계를 떠나 대승(大乘)의 수레를 타고19) 망상의

경지20)에 들어감으로써 지혜의 빛을 멀리 비추고 은혜로운 덕택을 널리

입히며 불법(佛法)의 비를 미혹의 세계에 뿌리고 자애스러운 구름을 깨달

음의 길에 베푸는 것이다.

聞夫禪境玄寂, 正覺希夷, 難測難知, 如空如海. 故龍樹師子之

尊者, 喩芭蕉於西天, 弘忍惠能之祖師, 譚醍醐於震旦. 盖掃因

果之跡, 離色相之鄕, 登大牛之車, 入罔象之域, 是以, 智光遠

照, 惠澤遐流, 灑法雨於昏衢, 布慈雲於覺路.

10) 희이(希夷):불교에서 이르는 언어도단(言語道斷)하고 심행처멸(心行處滅)의 경

지와 상통하는 의미로서 노자(老子),『도덕경道德經』「상上」에 “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 此三者 不可致詰 故混而爲一 其上不曒 其下

不昧 繩繩兮不可名”이라 하였으니, 도(道)란 형체가 없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므로 견문(見聞)으로서는 터득할 수 없기 때문에 “무성왈희

無聲曰希 무색왈이無色曰夷”라고 했다.

11) 용수(龍樹): Nāgārjuna. 불멸(佛滅) 후 600~700년 무렵(B.C. 2~3세기)의 남인

도(또는 서인도) 사람으로 대승불교를 크게 중흥시켜 제2의 석가, 팔종(八宗)의

조사(祖師)라고 일컬어진다.

12) 사자존자(師子尊者): Āryasimha. 인도의 28조 중 제24조이며, 3세기 무렵의 중

인도 사람으로 학륵나존자(鶴勒那尊者)에게 법을 받았다. 계빈국(罽賓國)을 교

화하고 바사사다(婆舍斯多 Basiasita)에게 법을 전수하였으며, 그 후 문도들이

외도들에게 몰살당했다.

13) 서천(西天):서역(西域), 곧 인도를 일컫는 말이다.

14) 파초(芭蕉): kadali. 속이 없이 큰 잎으로 겹겹이 채워진 나무. 나뭇잎의 겉껍

질을 끝까지 벗겨도 씨앗 등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음을 비유함이니 사물의 실체

가 없음을 비유한다.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권16(대정장30, p.363b21). 또한 허

망하여 깨어지기 쉬운 이 세상을 파초포말(芭蕉泡末)의 세상이라고 비유하기도

한다. 『잡아함경雜阿含經』권10(대정장2, p.69a19), 『오음비유경五陰譬喩經』(대정

장2, p.501b19).

15) 홍인(弘忍):602~675. 당나라 황매현(黃梅縣) 사람으로 중국 선종의 제5조이며 4

조 도신(道信)에게서 심인(心印)을 받고 671년 6조 혜능(慧能)에게 법을 전하였다.

대종(代宗)이 대만선사(大滿禪師)란 시호를 내리고 황매산 동산에 탑을 세웠다.

16) 혜능(慧能):638~713. 당나라 선승으로서 중국 선종의 제6조이다. 5조 홍인에게

서 심인을 전수받고 676년 남방으로 가서 교화하다가 조계산(曹溪山)에 들어가

보림사를 세워 불법을 폈다.

17) 진단(震旦):인도에서 중국을 가리키는 말로 진단(眞丹) 또는 진단(振旦)이라고

도 한다. 곧 진(震)은 팔괘(八卦) 중에 동방을 상징하며 해가 돋는 쪽을 일컫는다.

18) 제호(醍醐): manda. 우유를 정제한 정도에 따라 오미(五味) 즉 유(乳)·낙

(酪)·생소(生酥)·숙소(熟酥)·제호(醍醐)로 나누니 그 중 최고의 유제품을 일컫

는다. 불성(佛性), 진실의(眞實義) 또는 열반(涅槃)의 경지를 비유함이다. 『벽암

록碧巖錄』권1(대정장48, p.142b1), 『관약왕약상이보살경觀藥王藥上二菩薩經』

(대정장20, p.665b21),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대정장33, p.698b18·p.709a3).

19) 대우지거(大牛之車):대승(大乘)의 수레란 뜻이니 이타정신(利他精神)의 심도에

따라 소승(小乘)을 양거(羊車), 중승(中乘)을 녹거(鹿車), 대승을 우거(牛車), 일

승(一乘)을 백우거(白牛車)라 한다.

20) 망상지역(罔象之域):정각(正覺)의 경지를 이른다.

공(空)을 깨달은 사람은 한숨에 저 사산(邪山)을 넘지만 현상(現象)에

얽매이면 영겁토록 어두운 업에 머무르게 된다. 하물며 말법의 세상21)

상교22)가 어지러워 진종23)의 부합함에 드물며 서로 편견을 가지고 있으니,

마치 물을 쳐서 물 속에 비친 달을 구하고 줄을 꼬아 바람을 묶어 두려는

것처럼 한갖 육정24)을 수고롭게 할 뿐이거늘 어찌 그 지극한 이치를 얻을

수 있겠는가.

見空者, 一息而越彼邪山, 有爲則永 而滯于黑業. 矧乎末法

之世, 像敎紛紜, 罕契眞宗, 互持偏見, 如擘水求月, 若搓繩繫

風, 徒有勞於六情, 豈可得其至理.

21) 말법지세(末法之世): saddharma-vipralopa. 불법이 쇠락하는 시기. 삼시(三時)

곧 정법시(正法時)·상법시(像法時)·말법시(末法時) 중 한 시기. 부처님께서 열

반하신 때로부터 1,000년까지를 정법시대(正法時代), 이후 1,000년 동안을 상법

시대(像法時代), 또 그 이후 10,000년 동안을 말법시대(末法時代)로 구분한다. 이

말법기는 교법(敎法)이 쇠퇴한 시기로서 교법만 있고 수행 또는 증과(證果)하는

자가 없는 시대라고 말한다.

22) 상교(像敎): saddharma-pratirūpaka. 상법시대의 불교를 말함이니, 불멸 후

1,000년으로부터 2,000년까지의 1,000년 동안을 상법시대라고 한다.

23) 진종(眞宗):참된 종지(宗旨). 본래 불성(佛性) 또는 일여(一如)한 법계의 이치를

밝히는 정법(定法)을 말하는 것이나, 여기서는 선종을 가리킨다.

24) 육정(六情):육근(六根)이라고도 한다. 육식(六識)이 육경(六境)을 인식하는 경

우 그 소의(所依)가 되는 여섯 개의 뿌리, 곧 안(眼)·이(耳)·비(鼻)·설(舌)·신

(身)·의근(意根)을 이른다. 근(根)에 정식(情識)이 있는 까닭에 구역(舊譯) 경·

론에서는 육정(六情)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중생(衆生)이 노사나불[舍那]이 되고 노사나불이 중생이 되는 것인데

도, 중생은 노사나불의 법계 가운데 있음을 알지 못하고 종횡으로 업을 지

으며, 노사나불 또한 중생을 그 속에 품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잠잠히 항

상 고요하게 있으니 어찌 미혹한 일이 아니랴. 이 미혹함을 아는 사람은

크게 미혹한 것이 아니리라. 그 미혹함을 아는 사람은 오직 우리 선사뿐이

로다. 어떤 이는 한갓 헛된 이야기라고 하니, 슬프도다.『도덕경道德經』에

“상사(上士)는 도를 들으면 숭상하여 받들고, 중사(中士)는 도를 들으면

보존한 듯 잃은 듯하며, 하사(下士)는 도를 들으면 손바닥을 문지르며 웃

으니, 웃지도 아니하면 족히 도라 여길 수 없다”25)라 한 것은 이를 말한다.

其於衆生爲舍那, 舍那爲衆生, 衆生不知在舍那法界之中, 縱

橫造業, 舍那亦不知衆生在苞含之內, 湛然常寂, 豈非迷耶. 知

此迷者, 大不迷矣, 知其迷者, 惟我禪師乎. 或謂此說爲濩落之

言, 吁. 道經云, “上士, 聞道崇而奉之, 中士, 聞道如存若亡,

下士, 聞道撫掌而笑, 不笑不足以爲道也.” 此之謂矣.

25) 상사(上士) … 부족이위도(不足以爲道):『도덕경』「하下」에 “上士聞道 勤而行之

中士聞道 若存若亡 下士聞道 大笑之 不笑不足以爲道 建言之 明道若昧 進道若

退 夷道若類 上德若谷 大白若辱 廣德若不足 建德若偸 質眞若渝 大方無隅 大器

晩成 大音希聲 大象無形 道隱無名 夫唯道善貸且成”이라고 하였으니, 곧 대기만

성(大器晩成)을 뜻한다.

선사의 이름은 체징(體澄)이요 종성(宗姓)은 김씨(金氏)이며 웅진26)

람이다. 집안은 대대로 명망과 어진 가풍을 이어왔다. 이로써 즐거운 일이

하늘로부터 모이고 덕이 큰 산으로부터 내려와, 효의가 향리에 기려졌고

벼슬에 나아가서는 예악이 뛰어났다.27)

禪師, 諱體澄, 宗姓金, 熊津人也. 家承令望, 門襲仁風. 是以,

慶自天鍾, 德從嶽降, 孝義旌表於鄕里, 禮樂冠盖於軒裳者也.

26) 웅진(熊津):지금의 충청남도 공주 지방이다. “본래 백제의 옛 도읍으로 당나라

고종(高宗)이 소정방(蘇定方)을 보내어 이를 평정하고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었는데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그 지역을 취하여 소유하였고 신문왕(神文王)이

웅천주(熊川州)로 고쳐 도독(都督)을 두었다. 경덕왕(景德王) 16년에 다시 이를 웅

주(熊州)로 고쳤으니 지금의 공주(公州)이다.” 『삼국사기』권36「잡지」5 지리.

27) 헌상(軒裳):사대부(士大夫)의 복장을 일컫는 말로서 귀한 지위를 뜻한다.

선사를 잉태하던 해 어머니의 꿈에, 둥근 해가 공중에 떠서 빛을 내려

배를 뚫고 지나갔다. 이 때문에 놀라 깨어 문득 임신하였음을 깨달았다.

달이 차도 태어나지 않으니, 어머니가 상서로운 꿈을 미루어 살펴 좋은 인

연이 이루어지도록 빌고, 식사에 고기를 멀리하며 술을 금하고 계율로써

태교하면서 복전28)을 섬겼다. 이로 말미암아 해산의 괴로움을 이기고29)

들을 낳는 경사를30) 맞았다.

禪師託體之年, 尊夫人夢, 日輪駕空, 垂光貫腹. 因之驚寤, 便

覺有懷. 及逾朞月, 不之誕生, 尊夫人追尋瑞夢, 誓禱良因, 膳

徹腵脩, 飮斷醪醴, 胎訓淨戒, 騭31)事福田. 由是克解分蓐之

憂, 允叶弄璋之慶.

28) 복전(福田):불법을 장양하는 터전으로서의 삼보(三寶)를 말한다.

29) 분욕지우(分蓐之憂):욕(蓐)은 해산할 때 까는 자리이니, 난산(難産)의 고통을

뜻한다.

30) 농장지경(弄璋之慶):아들을 낳은 기쁨을 농장지경이라 하고, 딸을 낳으면 농와

지사(弄瓦之事)라고 한다.

31) [全文] [總覽]의 騭자가 옳으며 [苑]의 는 오자임.

선사는 체모가 커서 산이 우뚝 선 듯하고 기색이 윤택하여 하백(河伯)

과 같았으며, 치아가 고르고 금발이 특이하여 마을 사람들이 찬탄하고 친

척들이 모두 놀라와 했다. 갓난아이 때부터 세속을 떠나고자 하는 뜻이 뚜

렷했고 7, 8세32)가 되어서는 길이 세속을 버리려는 반연(攀緣)을 품으니,

양친이 부귀로써 붙잡아 두기 어렵고 재색으로써도 얽맬 수 없음을 알아

출가하여 유학할 것을 허락했다.

禪師貌雄岳33)立, 氣潤河靈, 輪齒自然, 金髮特異, 閭里聲歎,

親33)4)戚咸驚. 從襁褓之年, 宛有出塵之趣, 登齠齔之歲, 永懷捨

俗之緣, 二親知其富貴難留, 財色莫繋, 許其出家遊學.

32) 초츤지세(齠齔之歲):남자아이는 생후 8개월만에 이가 나서 여덟살 때 이를 갈

고 여자아이는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이가 나서 일곱살 때 이를 간다 하여 7~8

세의 어린 때를 말한다.

33) [全文]의 악(嶽)과 [苑]의 악(岳)은 서로 통함.

34) [全文]의 戚은 親의 오자임.

(이에) 지팡이를 짚고 스승을 찾아 나서 화산35) 권법사의 문하에 들어갔

다. 경을 듣는 것으로 일을 삼고 옷을 여미어36) 법문을 청하여 아침저녁으

로 열심히 정진하였으며, 한번 본 것은 잊어버리지 않고 한번 들은 것은

반드시 기억했다. 항상 마음의 때를 씻고 닦으며 스님로서의 몸가짐을 익

히고, 어질고 순함을 쌓아 번뇌를 없애며 항상 마음을 비우고 고요하게 하

여 신통묘용(神通妙用)하니, 초연함이 무리 중에서 뛰어나고 우뚝함이 견

줄 사람이 없었다. 그 후 태화 정미년37)에 가양협산 보원사38)에 이르러 구

족계(具足戒)를 받을 때 한번은 계단장(戒壇場)에 들어가 7일동안 도를 닦

는데, 문득 어떤 이상한 꿩이 갑자기 순하게 날아들었다. 어떤 옛일을 잘

아는 사람이 “옛날에는 진창39)에서 패왕의 도40)를 드러냈는데, 오늘은 절

에 날아드니 장차 불법을 일으킬 큰스님이 나타날 징조일 것이다”라고 말

했다.

策杖尋師, 投花山勸法師座下. 聽經爲業, 摳衣請益, 夙夜精

勤, 觸目無遺, 歷耳必記. 常以陶冶麤鄙, 藻練僧儀, 積仁順而

煩惱41)蠲除, 習虛靜而神通妙用, 超然出衆, 卓爾不群. 後以大

和丁未歲, 至加良峽山普願寺, 受具戒,42) 一入壇場, 七宵行道,

俄有異雉, 忽爾馴飛. 有43)稽古者曰, “昔向陳倉, 用顯覇王之

道, 今來寶地, 將興法主之徵者焉.”

35) 화산(花山):7세기 건립된 인각사(麟角寺)가 소재한 경북 군위군 고로면의 화산이

아닌가 한다.

36) 구의(摳衣):옷을 여미고 경예(敬禮)한다는 뜻이니 불교의 편단우견(偏袒右肩)

과 같은 뜻이다.

37) 태화정미년(太和丁未年):827, 흥덕왕(興德王) 2년

38) 보원사(普願寺):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성왕산에 있던 절로 신라말 고려초

기에 활약했던 법인국사(法印國師)탄문(坦文:900~975)의 비(碑)가 있다.

39) 진창(陳倉):중국 춘추시대의 진(秦)나라가 설치했던 현(縣)의 이름으로 한(漢)·

위(魏)·진(晉) 때까지 있었으나 북주(北周) 때에 폐지했다. 수(隋)나라 때에 다

시 설치했으며 당(唐) 지덕(至德) 2년(757) 진문왕(秦文王)의 고사(故事)에 따라

보계현(寶鷄縣)으로 고쳤으니 오늘날의 섬서성(陝西省) 보계시(寶鷄市)이다.

40) 패왕지도(霸王之道):『사기史記』권28「봉선서封禪書」에 “B.C. 754년 진문공(秦

文公)이 야석(若石)을 얻어 진창북판성(陳倉北阪城)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그 신

(神)이 어느 해에는 오지 않고 또 어느 해에는 자주 왔다. 항상 밤에만 빛을 뿌리

면서 유성(流星)처럼 동남쪽으로부터 사성(祠城)에 모여들었다. 그 오는 소리가

수탉처럼 우렁차니, 문공(文公)이 뇌(牢)로써 제사하고 진보(陳寶)라 일컬었다”

라고 전한다. 사마정(司馬貞)이 『열이전列異傳』을 인용하여, “진창 사람이 기이

한 물건을 얻어 이를 바치러 가다가 두 동자를 만났다. 두 동자가 ‘이 물건의 이

름은 위(媦)인데 땅 속에서 죽은 사람의 뇌(腦)를 먹는다’라고 일렀다. 이에 위

가 ‘저 두 동자의 이름은 진보인데 수컷을 잡은 사람은 왕(王)이 될 것이며, 암컷

을 잡은 사람은 백(伯)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동자들을 쫓으니 꿩으로

변하여 날아갔다. 진목공(秦穆公)이 사냥하러 갔다가 그 까투리를 잡아 사(祠)

를 세우고 제사를 지냈더니, 어떤 빛이 우뢰 소리를 내더니만 장끼가 10여장의

붉은 빛을 내며 남양(南陽)에 이르러 진창의 사(祠) 안으로 들어왔다”라고 색은

(索隱)하였다.

41) [全文]에는 , [苑][總覽][拓本](동대박물관,1985)에는 이니, 이는 惱字의 오자

인 듯하다.

42) [全文]에는 戒. [苑]의 과 [總覽]의 戎은 戒의 오자임.

43) [全文]에는 有. [苑] [總覽]의 ナ는 有의 古字임.

처음 도의선사44)가 서당45)에게서 심인(心印)을 전수받고 후일 우리나라

에 돌아와 그 선(禪)의 이치를 가르쳤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경의 가르

침과 관법을 익혀 정신을 보존하는 법46)만을 숭상하여 무위임운의 종47)

모이지 아니하고 허탄한 것으로 여겨 높이어 중히 여기지 않았으니, 마치

달마조사가 양 무제를 만났음에도 뜻이 통하지 못한 것48)과 같았다. 이로

말미암아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함을 알고 산림에 은거하여 법을 염거선

49)에게 부촉했다.

初道儀大師者, 受心印於西堂, 後歸我國, 說其禪50)理. 時人雅

尙經敎, 與習觀存神之法, 未臻其爲任運之宗, 以爲虛誕, 不之

崇重, 有若達摩不遇梁武也. 由是知時未集, 隱於山林, 付法於

廉居禪師.

44) 도의선사(道儀禪師):『조당집祖堂集』「진전사원적선사전陳田寺元寂禪師傳」에

따르면, 도의선사는 북한군(北漢郡) 사람으로 호(號)는 명적(明寂)이다. 784년

당나라에 건너가 오대산(五臺山) 광부(廣府)의 보단사(寶檀寺)에서 비구계를 받

고, 조계산 육조(六祖)의 영당에 참배했다. 강서 홍주 개원사(開元寺)에서 서당

(西堂) 지장선사(智藏禪師)에게 법을 전수받고 821년 귀국하였으나, 아직 때가

아님을 알아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서 40년을 수도하다가 염거(廉居)에게 법

을 전하고 입적했다. 염거의 제자 체징(體澄)이 크게 종풍(宗風)을 떨침으로써

가지산파의 제1조로 숭앙되었다.

45) 서당(西堂):지장선사(智藏禪師 735~814)를 가리키는데, 그는 마조도일(馬祖道

一)의 수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강서 홍주 개원사에 머물렀다. 신라스님 가운데

도의를 비롯하여 혜철(惠哲)·홍척(洪陟) 등이 그의 심인을 받고 귀국하여 선문

(禪門)을 개창했다. 최병헌,「신라 하대 선종구산파의 성립」『한국사연구』7, 1972.

46) 존신지법(存神之法):교종(敎宗)을 가리킨다.

47) 무위임운지종(無爲任運之宗):선종(禪宗)을 가리킨다.

48) 달마불우양무(達摩不遇梁武):달마대사가 양나라 보통(普通) 1년(520) 10월 광

주자사 소앙의 소개로 금릉(金陵)에 가서 무제(武帝)와 문답하다가 기연이 맞지

않음을 깨닫고 돌아선 고사를 이른다.

49) 염거선사(廉居禪師):도의의 법을 이은 가지산파의 제2조로서 문성왕 6년(844)

에 입적했다. 탑은 원주 흥법사지(興法寺址)에 있었는데 탑지(塔誌)는 국립중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50) [全文] [苑]에는 禪. [總覽]의 裨는 禪의 오자임.

이에 염거선사가 설산51) 억성사52)에 머물면서 조사의 마음을 전하고 스

승의 가르침을 여니, 체징선사가 가서 그를 섬겼다. 선사가 맑게 일심을

닦고 삼계53)에서 벗어나기를 구하여 목숨을 자기의 목숨으로 여기지 아니

하고 몸을 자기의 몸으로 여기지 않았다. 염거선사가 그 뜻과 기개에 짝할

만한 이가 없고 그 타고난 바탕이 범상치 않음을 알아, 현주(玄珠)를 부촉

하고 법인(法印)을 전해 주었다.

居雪山億聖寺, 傳祖心, 闢師敎, 我禪師往而事焉. 淨修一心,

求出三界, 以命非命, 以軀非軀. 禪師察志氣非偶, 素槩殊常,

付玄珠, 授法印.

51) 설산(雪山):설악산을 이른다.

52) 억성사(億聖寺):지금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본비가 세워져 있었던 강

원도(江原道) 양양군(襄陽郡) 서면(西面) 황이리(黃耳里)의 이른바 사림사지(沙

林寺址) 혹은 선림원지(禪林院址)를 억성사지(億聖寺址)로 추정한 견해가 있다.

권덕영,「홍각선사비문의 복원 시도」,역사학회 월례발표회 요지, 1992.4.11.

53) 삼계(三界):끊임 없이 생사유전(生死流轉)하는 중생미계(衆生迷界)를 세 갈래

로 나누어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라 이른다. 이 삼계를 다시 6

도(途)·25유(有)·9지(地)로 나누기도 한다.

개성 2년54) 정사에 동학인 정육(貞育)·허회(虛懷) 등과 함께 바닷길로

서쪽 중국에 들어갔다. 선지식을 찾아 삼오주55)를 편력하면서 온누리가

좋아하고 하고자 함이 같으며 성상(性相)이 다르지 않음을 알았다. 이에

“우리 조사께서 말씀하신 바에 더할 것이 없는데 어찌 수고로이 멀리 가

겠는가”라고 이르며, (구법의) 발길을 멈추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至開成二年丁巳, 與同學貞56)育虗懷等, 路出滄波, 西入華夏.

叅善知識, 歷三五州, 知其法界, 嗜欲共同, 性相無異. 乃曰,

“我祖師所說, 無以爲加, 何勞遠適.” 止足意興.

54) 개성(開成) 2년:희강왕(僖康王) 2년(837).

55) 삼오주(三五州):『신당서新唐書』권37「지志」27지리(地理)1에 따르면, 당나라가

일어나면서 고조(高祖)가 군(郡)을 주(州)로, 태수(太守)를 자사(刺史)로 고치고

도독부(都督府)를 설치하여 전국을 다스렸다. 그 후 태종원년(627)에 전국을 10

도(道)로 나누었으며, 경운(景雲) 2년(711)에 천하를 군현(郡縣)으로 나누고, 24

도독부를 설치했다. 개원(開元) 21년(733)에는 전국을 다시 15도로 나누고 각 도

에 채방사(採訪使)를 두었으며 건원년간(乾元年間 758~759) 이후에 각지에서 병

란이 일어나자 이를 폐지하고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 본 비문에서 체징이 편

력했다는 삼오주란 중국전역을 뜻하는 것으로 판단되므로, 신라의 ‘9주’와 같은

의미의 ‘15도’를 일컫는 것으로 풀이된다.

56) [全文]의 眞은 貞의 오자임.

5년57) 봄 2월에 평노사(平盧使)를 따라 신라에 돌아와 고향을 교화했다.

이에 단월들이 마음을 불교에 기울여 발길을 잇는 것이, 수백의 내가 오

58)에 모이듯 수많은 계곡과 산들이 영취산을 우러르듯 했다고 이르더라

도 충분한 비유가 아니될 정도였다. 드디어 무주 황학(黃壑)의 난야(蘭若)

에 머무르니 때는 대중 13년59) 용이 석목의 진60)에 모인 무인년 헌안대왕

즉위 이듬해였다.

五年春二月, 隨平盧61)使, 歸舊國, 化故鄕. 於是檀越, 傾心釋

敎, 繼踵百川之朝, 鼇壑群嶺之宗, 鷲山未足爲喩也. 遂次武州

黃壑蘭若, 時大中十三 , 龍集于析62)木之津, 憲安大王卽位

之後年也.

57) 개성 5년:문성왕(文聖王) 2년(840).

58) 오학(鼇壑):오산(鼇山)과 같은 말. 큰 바다 거북이 떠받치고 있는 바다 가운데

의 산으로 신선들이 거처하고 있는 곳인데, 『열자列子』 「탕문湯問」에 “발해(渤

海)의 동쪽에 대학(大壑)이 있어 그 가운데 오산(五山)이 있다. 오산의 밑둥지는

서로 연결되어 지탱하는 곳이 없는 까닭에 파도에 따라 오르내리는데, 천제(天

帝)가 서쪽 끝으로 떠내려 갈 것을 염려하여 15마리의 큰 거북으로 이를 떠받치

게 했다. 渤海之東不知幾億萬里 有大壑焉 … 其中有五山焉 … 而五山之根 無所

連著 常隨潮波上下往還 不得暫峙焉 仙聖毒之 訴之於帝 帝恐流於西極 失羣聖之

居 乃命禺疆使 巨鼇十五擧首而戴之”고 이르고 있어, 오산 아래의 대학을 가리

키는 듯하다.

59) 대중(大中) 13년:헌안왕(憲安王) 2년(858).

60) 석목지진(析木之津):황도십이궁(黃道十二宮)의 인마궁(人馬宮), 곧 미수(尾宿)를

가리키며 12지(支)의 인(寅)에 해당한다. 이는 동궁(東宮) 곧 창룡(蒼龍)에 속하는

별자리인 까닭에 ‘용이 이에 모였다’함은 인의 세(歲)임을 말한다. 특히 석목지진

이라 이른 것은 『춘주좌전春秋左傳』「소공昭公」‘금재석목지진今在析木之津’의 주

석 “箕(龍尾)斗(南斗)之閒有天漢 故謂之析木之津”에서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61) [全文]의 廬는 盧의 오자임.

62) [全文] [苑]의 㭊는 析의 오자임.

대왕이 소문을 듣고 도를 우러러 꿈속에서조차 사모하여, 선문을 열고

자 선사에게 서울로 들어오기를 청했다. 여름 6월에 장사현63) 부수 김언

64)을 보내어 차와 약을 가지고 가서 맞이하게 했다. 선사는 구름과 바위

를 벗삼아 지내는 것을 편안히 여겼고, 또 결계의 달65)이었으므로 정명의

66)을 핑계대고 육조(六祖)처럼 사양했다.67) 겨울 10월에 왕이 다시 명을

내려 스님과 속인 사신인 영암군 승정 연훈법사68)와 교지[宸]를 받든 풍

선(馮瑄) 등을 보내어 왕의 뜻을 전해 가지산사(迦智山寺)로 옮겨 거처할

것을 청했다. 드디어 마지못해 석장을 날려 가지산문(迦智山門)으로 옮겨

들어가니, 그 산은 곧 원표대덕69)이 옛날에 거처하던 곳이었다. 원표대덕

은 법력으로써 정사에 도움을 주었으므로, 건원 2년70) 왕이 특별히 명하

여 장생표71) 기둥을 세우도록 하였는데 그 표주(標柱)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72)

大王聆風73)仰道, 勞于夢魂, 願闢禪扉, 請入京轂. 夏六月, 敎

遣長沙縣副守金彥卿, 賷茶藥迎之. 師以處雲巖之安, 兼屬結

戒之月, 託淨名之病, 陳六祖之辭. 冬十月, 敎又遣道俗使, 靈

巖郡僧正連訓法師, 奉宸馮瑄等, 宣諭74)綸旨, 請移居迦智山

寺, 遂飛金錫, 遷入山門. 其山則元表大德之舊居也. 表德以法

力, 施于有政, 是以, 乾元二年, 特敎植長生標柱, 至今存焉.

63) 장사현(長沙縣):오늘날의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茂長) 일대이며, “본래 백제의

상노현(上老縣)으로 경덕왕 때 이 이름으로 고쳐 무령군(武靈郡)의 영현(領縣)

으로 삼았다.” 『삼국사기』권36「잡지」5 지리3‘무령군武靈郡’.

64) 김언경(金彦卿):헌덕왕 13년(821) 신라인으로서 최초로 당의 빈공과에 합격한

김운경(金雲卿)과 같은 사람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신형식,「숙위학생고」『역사

교육』11·12, 1969,pp.70~72. 한편 문성왕 3년(841) 당 무종(唐 武宗)의 칙사로

귀국한 김운경의 경우 중국의 치주장사(淄州長史)란 관직에 있었고 본비를 건

립한 헌강왕 10년(884) 김운경의 나이가 이미 80여 세를 넘었을 것이라 생각하

여, 오히려 「동보림사석탑지(북)」와 「동비로자나불조상기」 명문의 김수종(金遂

宗)과 동일인이거나 아니면 김수종의 후임으로 장사현령(長沙縣令)에 부임하여

건탑에 참여한 것으로 짐작되기도 한다. 이기동,「나말려초 근시기구와 문한기

구의 확장」『신라골품제사회와 화랑도』, p.258;「신라금입택고」『진단학보』 45,

1978:『신라골품제사회와 화랑도』, pp.188~190.

65) 결계지월(結戒之月):계율을 결성하고 수행하는 하안거(夏安居)의 기간을 가리

킨다. 매년 4월 16일부터 7월 15일에 이르는 대중수행 기간을 말한다. 인도의 우

기(雨期)에 당하여 스님들이 한 곳에 모여 정진하던 기간에서 유래했다. 경계를

정하여 출입을 자제하고 공동의 규범을 준수하는 기간으로 결계(結界)라고도

한다.

66) 정명지병(淨名之病):유마거사(維摩居士)는 인도 비야리성에 살았던 장자(長者)

로서 재가에 있으면서 보살행을 닦았다. ‘정명淨名’이란 유마힐(維摩詰

Vimalakīrti)을 의역한 이름이다. 그는 많은 사람을 접촉하여 불법을 가르칠 방편

(方便)으로 거짓으로 병을 앓으며 문병차 온 사람들을 상대로 설법하였으니,

‘정명의 병’은 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67) 육조지사(六祖之辭):당나라 무태후가 효화황제의 글을 보내어 육조혜능을 초

청했으나 혜능이 병을 핑계로 사양한 고사이다.

68) 연훈법사(連訓法師):「황룡사구층탑찰주본기黃龍寺九層塔刹柱本記」‘도감전道

監典’에 보이는 황룡사 상좌승(上座僧) 연훈(然訓)과 같은 사람이 아닌가 한다.

69) 원표대덕(元表大德):『송고승전宋高僧傳』권30「당고려국원표전唐高麗國元表

傳」(대정장50, p.895b5)에 따르면, 그는 본래 삼한인(三韓人)으로 천보년간(天寶

年間 742~756)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인도를 순례하고 『화엄경』80권을 가지고

중국으로 다시 돌아왔다고 하는데, 회창년간(會昌年間:841~846)의 훼불(毀佛)

때까지 중국에서 활동한 것처럼 나타나 있어 그 내용이 자못 의심스러우며, 본

비에 보이는 원표(元表)의 행적은 759년 경에 신라에서 활동하였음을 말해준다.

70) 건원(乾元) 2년:경덕왕(景德王) 18년(759).

71) 장생표(長生標):사격(寺格)을 정하거나 사령(寺領)의 사계(四界)를 표지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보림사의 장생표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고려

시대 사원의 장생고(長生庫)에 딸린 사전(寺田)의 표지를 이른다. 김삼수,「삼국

유사에 나타난 소유권 사례에 관한 고찰」『숙명여대논문집』19,1979,p.68.

72) 지금존언(至今存焉):6·25 동란 때 보림사가 전소하였으니 이 장생표(長生標)

도 함께 타 사라졌다.

73) [全文]의 龍은 風의 오자임.

74) [苑]의 와 [全文][總覽]의 諭는 같은 자임.

선제 14년75) 2월에 부수 김언경이 일찍이 제자의 예를 표하며 선사의 문

하에 들어갔는데, 청봉(淸俸)을 덜고 개인의 재산을 내어 철 2,500근을 사

서 노사나불 1구를 주조하여 선사가 거처하는 절을 장엄했다. 또 왕이 망

수택·이남택76) 등에게 금 160분, 조 2,000곡을 내게 하여 절을 장식하는

공덕의 비용에 충당토록 하고 사찰을 선교성77)에 예속시켰다. 함통 신사

78)에는 시방에서 시주한 재물로써 절을 넓히고 그 낙성일에 선사가 사

찰에 이르니, 암수무지개가 법당 안으로 뚫고 들어와 갈라진 빛이 방안을

비추고 반짝이는 빛이 사람을 비추었다. 이는 견뢰79)와 사가80)가 상서로움

을 알려 표하는 것이었다.

宣帝十四年仲春, 副守金彦卿, 夙陳81)弟子之禮, 嘗爲入室之

賓, 減淸俸, 出私財, 市鐵二千五百斤鑄盧82)舍那佛一軀, 以莊

禪師所居梵宇. 敎下望水里南等宅, 共83)出金一百六十分, 租

二千斛, 助充裝 84)功德, 寺隸宣敎省. 咸通辛巳歲, 以十方施

資, 廣其禪宇, 慶畢功日, 禪師莅焉, 虹之與蜺, 貫徹堂內, 分

輝耀室, 渥彩燭人. 此乃堅牢告祥, 娑迦表瑞也.

75) 선제(宣帝) 14년:헌안왕(憲安王) 4년(860).

76) 망수택·이남택(望水宅里南宅) 『삼국유사三國遺事』권1「기이紀異」진한(辰韓)에

보이는 35금입택(金入宅) 가운데 수망택(水望宅)·이남택(里南宅)이 본비의 망

수택·이남택이며, 두 금입택에서 기부한 조곡(租穀) 2,000곡(斛)은 답(畓) 1,333

결(結)에 해당하며 특히 불사(佛事)의 기용(器用)을 만드는데 금은(金銀) 사용

을 금지한 애장왕(哀莊王) 7년(806) 이후에 두 금입택에서 금 160분(分)을 기부

한 사실이 주목거리라고 한다. 이기동,「신라금입택고」『신라골품제사회와 화랑

도』, pp.203~204.

77) 선교성(宣敎省):「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 [신라편]에도 선교성이

보이는데, 국왕의 교서(敎書;詔書)를 선포하는 국왕 직속의 관부로서 발해(渤

海)의 선조성(宣詔省)이나 당(唐)의 문하성(門下省)에 상당한 기구로 추정된다.

또한 신라하대 집사성(執事省)의 장관인 시중(侍中)이 상대등(上大等)과 동질

화되는 경향과 관련하여 중사성(中事省)과 함께 나타난 기구로서, 이러한 중사

성·선교성의 성격은 태봉·고려초의 내봉성(內奉省)으로 계승되는 것으로 짐

작된다. 이기동,「나말려초 근시기구와 문한기구의 확장」『신라골품제사회와 화

랑도』, pp.240~246.

78) 함통 신사년(咸通辛巳年):경문왕(景文王) 1년(861).

79) 견뢰(堅牢):낙가라 곧 견뢰지신(堅牢地神)으로 대지(大地)를 담당하는 신(神)

을 이른다. 이 신은 능히 대지를 견고하게 하므로 이와 같이 일컬으며, 항상 교

법이 유포되는 곳에 나아가 법좌 아래에서 설법하는 이를 호위한다.

80) 사가(娑迦):사가라(娑迦羅 Sāgara)용왕을 가리키니, 사가라는 큰 바다란 뜻으

로 바다의 용왕을 이른다.

81) [全文]의 棟은 陳의 오자임.

82) [全文]의 廬는 盧의 오자임.

83) [全文]의 其는 共의 오자임.

84) [全文]의 飾과 [苑] [總覽]의 餝은 모두 서로 통함.

광명 원년85) 3월 9일 여러 제자들에 “나는 현생의 보업(報業)이 다하여

나무가 재가 되듯 사라지려니, 너희들은 마땅히 불법을 잘 지키고 게으르

지 말라”고 일렀다. 4월 12일 유시(酉時)부터 술시(戌時)까지 천둥·번개가

온 산을 울렸다. 13일 한밤중에 상방(上房)의 땅이 진동하더니 날이 샐 무

렵 오른쪽으로 누운 채로 임종했다. 향년 77세로 승랍 52세였다. 이에 제

자 영혜(英惠)·청환(淸奐) 등 800여인은 의리가 어버이를 잃은 듯 깊었고

정이 하늘과 땅에 사무쳐 추모하여 울부짖으니 그 소리가 계곡을 울렸다.

그 달 14일에 왕산송대(王山松臺)에 장사지내고 탑을 쌓아 안치했다.

廣明元年三月九日, 告諸依止曰, “吾今生報業盡, 就木乖成,

汝等, 當善護持, 無至隳怠.” 至孟夏仲旬二日, 雷電一山, 自

酉至戌. 十三日子夜, 上方地震, 及天曉, 右脇臥終. 享齡七十

有七, 僧臘五十二. 於是, 弟子英惠, 淸奐等, 八百餘人, 義深

考妣, 情感乾坤, 追慕攀號, 聲動溪谷. 以其月十四日, 葬於王

山松臺, 壘塔安厝.

85) 광명 원년(廣明元年):헌강왕(憲康王) 6년(880).

오호라, 선사의 이름은 여기에 남아 있건만 혼백은 어느 곳으로 가 태어

났는가. 5탁86)을 떠나고 18공87)을 뛰어넘어서, 적멸(寂滅)을 기꺼워하여 돌

아오지 않고 법림(法林)을 남겨 길이 빼어났으니, 어찌 오로지 법계에서

생령을 구제했을 뿐이었겠는가. 실로 또한 삼한에서 임금의 교화를 도왔

도다. 『예기禮記』에서 “별자(別子)가 조(祖)가 된다”라고 하였는데, 강성88)

이 주를 달아 “네가 만일 처음으로 이 나라에 왔다면 후세에 조라 여길 것

이다”89)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달마는 당나라의 제1조이며, 우리 신라에서

는 도의대사(道儀大師)가 제1조, 염거선사(廉居禪師)가 제2조, 우리 보조

체징선사가 제3조이다.

嗚乎, 禪師名留於此. 魂魄何之生, 離五濁, 超十八空, 樂寂滅

而不歸, 遺法林而永秀, 豈唯濟生靈於沙界. 實亦裨聖化於三

韓. 禮云, “別子爲祖.” 康成注云, “子若始來在此國者, 後世

以爲祖.” 是以, 達摩爲唐第一祖, 我國則以儀大師, 爲第一祖,

居禪師爲第二祖, 我師第三祖矣.

86) 오탁(五濁):말세(末世)에 일어나 피하기 어려운 사회적·정신적·생리적인 다

섯가지 혼탁함으로 전쟁·질병·기아 등으로 물든 겁탁(劫濁), 사상(思想)의 혼

란기인 견탁(見濁), 신체가 허약하고 번뇌가 많아 인간의 자성이 흐려지는 번뇌

탁(煩惱濁), 중생(衆生)의 수명이 짧아지는 중생탁(衆生濁), 탐·진·치가 치성하

고 악덕이 판을 치는 명탁(命濁) 등이니, 오재(五滓)라고도 한다.

87) 십팔공(十八空):공(空)을 바탕[體]과 작용[用]으로 관찰하여 구분한 것으로, 내

공(內空)·외공(外空)·내외공(內外空)·공공(空空)·대공(大空)·제일의공(第一

義空)·유위공(有爲空)·무위공(無爲空)·필경공(畢竟空)·무시공(無始空)·산공

(散空)·성공(性空)·자상공(自相空)·제법공(諸法空)·불가득공(不可得空)·무법

공(無法空)·유법공(有法空)·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을 이른다. 『대지도론大智

度論』권31(대정장25, p.285b1).

88) 강성(康成):후한(後漢)의 대표적인 고문학자인 정현(鄭玄:127~200)의 자(字)

이다. 북해(北海) 고밀현(高密縣) 사람으로 장공조(張恭祖), 마융(馬融) 등에게

수학하였으며,『모시毛詩』『삼예三禮』『주역周易』『상서尙書』『논어論語』『효

경孝經』 등을 주석하고『육예론六藝論』등을 찬술했다.

89) “자약子若 … 위조爲祖”:『예기禮記』「대전大傳」10.

중화 3년90) 봄 3월 15일에 문인 의거(義車) 등이 행장을 엮어 멀리 왕경

에 나아가 비명을 세워 빛나게 할 것을 청했다. 임금이 진종(眞宗)의 이치

를 흠모하고 스승을 높이는 마음을 갸륵히 여겼다. 이에 담당 관사에 명하

여 시호를 정하여 보조(普照), 탑호를 창성(彰聖), 절이름을 보림(寶林)이

라 하니, 이는 그 선종을 포상하는 예에서이다. 다음날에 또 미천한 신에

게 비문을 지어 뒷날의 사람들에게 알리도록 명하니, 신이 삼가 두려이 왕

명을 받들어 사실대로 글을 짓는다. 다만 왕의 충정을 공손히 받들 뿐이니

문사들의 비웃음을 감히 피할 수 있겠는가. 송사(頌詞)에 이르되,

中和三年, 春三月十五日, 門人義車等, 纂輯行狀, 遠詣王居,

請建碑銘. 用光佛道, 聖上慕眞宗之理, 憫嚴師之心. 敎所司

定, 諡曰 普照, 塔號彰聖, 寺額寶林, 褒其禪宗禮也. 翌日, 又

詔微臣, 修撰碑讚, 垂裕後人, 臣兢惶承命, 直筆爲詞. 但以91)

供奉, 宸衷敢避文林嗤哂. 詞曰,

90) 중화(中和) 3년:헌강왕 9년(883).

91) [全文]의 下는 以의 오자임.

선의 마음은 정해짐이 없음이여! 지극한 이치가 공에 돌아감이여.

살아 있는 동안이 유리와 같음이여! 유와 무 가운데에 있음이로다.

신이함이 두루 통하여 비추지 않음이 없음이여! 귀신인들 감히 부딪치

랴!

지킴에 부족함이 없음이여! 베푸심이 끝이 없도다.

항하사겁92)을 다함이여! 묘용의 다함이 없도다.

禪心不定兮, 至理歸空.

如活瑠璃兮, 在有無中.

神莫通照兮, 鬼其敢衝.

守無不足兮, 施之無窮.

劫盡恒沙兮, 妙用靡終.[其一]

92) 항하사겁(恒河沙劫): gangā-nadī-vāluka-kalpa. 항하사(恒河沙 gangā-nadīvāluka)란

보통 항사(恒沙)라고 이르는데 인도 갠지스강의 모래란 뜻으로, 곧 갠

지스강의 모래처럼 많은 수량을 비유하여 무수무량(無數無量)의 대수(大數)를

일컫는 것이고, 겁(劫 kalpa)이란 또한 무한(無限)의 시간, 영원(永遠)의 시간

을 이름이니 끝이 없는 세월을 말한다.

넓고 넓어 한이 없는 노사나(盧舍那)여! 만물을 감싸 기르며,

꿈틀거리는 중생이여! 노사나의 율동(律動)을 어김이로다.

두 몸이 이미 한 몸이거늘, 다시 누구를 부처라 하랴!

미혹하고 또 미혹함이여! 도가 이에 마침이로다.

寥廓舍那, 苞育萬物,

蠢蠢衆生, 違舍那律.

二旣同體, 復誰是佛.

迷之又迷, 道乃斯畢.[其二]

위대하신 선사여! 신라에 태어났도다.

능히 보리를 익힘이여! 지혜의 덕을 힘써 닦았도다.

공을 관하여 공을 초월했음이여! 형상[色]을 보되 모양[色]이 아니며,

억지로 인(印)이라 일컬으나, 얻은 바를 이름하기 어렵도다.

大哉禪師, 生乎海域.

克鍊菩提, 精修惠德.

觀空離空, 見色非色,

强稱爲印, 難名所得.[其三]

얽매인 유위(有爲)의 세계여! 무수한 인연이로다.

밖으로 경계가 닥치니 정신이 움직이며, 바람이 일어나니 파도가 일렁

거리도다.

말처럼 달리는 의식93)을 다스려야 함이여! 원숭이 같은 마음94)을 조복

시켰으니,

이 선법으로써 보배 삼아 후세의 어진 이에게 베풂이로다.

有爲世界, 無數因緣.

境來神動, 風起波翻.

須調意馬, 勤伏心猿,

以斯爲寶, 施于後賢.[其四]

93) 의마(意馬):외경(外境)을 쫓아 일정한 곳에 안주하지 못하는 인간의 의식을 날

뛰는 말에 비유하였으니, 『조주록유표趙州錄遺表』에 “심원(心猿)은 뛰기를 그

치고, 의마(意馬)는 날뛰는 것을 쉬어라”고 하였다.

94) 심원(心猿):하염없이 흔들리는 마음을 분주하게 움직이는 원숭이에 비유한 말

로써, 『대승본생심지관경大乘本生心地觀經』권8에 “마음이 원숭이와 같아서 오

욕(五欲)의 나무에 놀면서 잠시도 쉬지 않는다”라 한 것이 그것이다.

반야95)의 배를 잡아타고, 애욕의 강물을 건넜으며,

피안에 이미 오름이여! 부처님만이 헤아릴 수 있음이로다.

대승의 경지에 도달함이여! 불난 집96)이 타는 것을 내버려 두었으며,

법상은 비록 남아 있으나, 스님은 이미 떠나셨도다.

乘波若舟, 涉愛河水,

彼岸旣登, 唯佛是擬.

牛車已到, 火宅任燬,

法相雖存, 哲人其萎.[其五]

95) 반야(般若): prajñā. 사물(事物)과 우주의 실상을 꿰뚫어 보는 깊은 지혜를 일

컫는다.

96) 화택(火宅): ādipta-agāra. 『법화경法華經』「비유품譬喩品」에서 이르는 일곱가

지 비유 가운데 번뇌와 고통의 세상을 ‘불타고 있는 집’에 비유한 것이다. 삼독

(三毒)의 화염에 싸인 미혹의 세계를 일컫는다.

총림(叢林)에 주인이 없음이여! 산문이 빈 듯하고,

석장(錫丈)으로 뭇 호랑이를 내쫓음이여! 발우(鉢盂)로 뭇 용(龍)을 항

복받음이로다.97)

오직 남은 향불로 선사의 소리와 모습을 그릴 뿐이니,

이 정석98)을 새김이여! 불법이 장차 웅장하도록 기원함이로다.

叢林無主, 山門若空,

錫放衆虎, 鉢遣99)群龍.

唯100)餘香火, 追想音容,

刊此貞石, 紀101)法將雄.[其六]

97) 발견군룡(鉢遣群龍):부처님께서 조로아스터교, 즉 배화교도(拜火敎徒)의 신앙

대상인 독룡(毒龍)을 항복(降伏)시킨 고사. 이후 배화교도인 우루빈라가섭(優婁

頻螺迦葉)·나제가섭(那提迦葉)·가야가섭(伽耶迦葉) 등 삼형제와 그들의 제자

일천명이 모두 불타(佛陀)에게 귀의하였다.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권41「가섭

삼형제품迦葉三兄弟品」(대정장3, p.843a5).

98) 정석(貞石):비석(碑石)의 미칭(美稱).

99) [全文]의 遺는 遣의 오자임.

100) [全文]의 惟는 唯의 오자임.

101) [全文]의 祀은 紀의 오자임.

중화 4년102) 갑진(甲辰) 가을 9월 무오(戊午) 19일 병자(丙子)에 세우다.

제7행 ‘선’자 이하는 제자 전병부시랑(前兵部侍郞) 입조사(入朝使) 전중

대감(殿中大監)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김언경이 글을 쓰고, 흥륜

103) 승 석현창(釋賢暢)이 글을 새기다.

中和四年, 歲次甲辰季秋九月戊午朔, 旬有九日丙子建. 從頭

第七行禪字已下, 弟子前兵部侍郞, 入朝使, 殿中大監, 賜紫金

魚袋, 金彦卿書, 興輪寺僧, 釋賢暢, 刻字.

102) 중화(中和) 4년:헌강왕(憲康王) 10년(884).

103) 흥륜사(興輪寺):신라 칠처가람(七處伽藍)터 가운데 하나인 천경림(天鏡林)을

베어내고 진흥왕 5년(544)에 창건했다고 하는데 경주에 있었던 절이다.

[비신(碑身)의 높이(高)는 8척2촌(八尺二寸), 폭(幅)은 4척5촌(四尺五寸), 글자의 간격은 8

분(八分), 1항부터 7항의 선(禪)자까지는 해서(楷書)이며, 그 이하는 행서(行書)이다. 이수

(螭首)와 제액(題額)은 늑멸(泐滅)되었다.]

[揭載]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 上, pp.95~105.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上, pp.60~64.

『한국금석전문韓國金石全文』 古代, pp.198~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