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산 <불교 용어 해설, ㅅ ―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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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론(實相論)---불교에서 모든 사물의 실상을 위주로 모든 존재의 본체를 해명하려는 사고방식을 말한다.
부처님 가르침을 크게 실상론과 연기론으로 나눈다.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법화경> 이전의 경전은 바로 우리가 존재하는 세계를 연기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곳이 우리가 경험하고 숨 쉬고 머물고 있는 세계, 곧 유위법의 현실세계이다. 이 현실세계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생멸한다는 것이다. 모든 존재가 끝없이 생하고 사라지고 생하고 사라지고 그러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제행무상이요, 제법무아이며, 일체개고의 연기 법칙이 적용되는 유위의 세계인 것이다.
그러나 실상론에 이르면,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세계는 생의 윤회가 끊이지 않는 그런 세계이지만 이것은 허상이고, 이슬 같고, 번개 같고, 꿈과 같음을 지적해주고, 그럼으로써 헛된 이상의 소견으로부터 벗어나 참나, 참 존재의 세계인 실상으로 인도해주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법화경>에서는 진리의 요체가 제법실상으로 바뀐다. 이 제법실상이야말로 바로 진리의 궁극이요 당체이며, 부처님 가르침의 골수이다. 이러한 제법실상을 등지고 인과율로 엮여진 우리의 현실은 꿈과 같으며, 이슬과 같고, 환상에 불과한 가상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가상이라는 말은 진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즉, 우리가 유(有)라고 여기는 우주만물 두두물물이 모두 가유(假有)다 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진짜 존재하는 유(眞有)이냐를 밝히는 것이 바로 실상론이다. 우리가 이러한 실상을 접할 때 비로소 유(有), 무(無), 단(斷), 상(常)이라는 중생의 4대 망견이 모조리 깨지고 생, 사가 모두 사라지게 된다고 했다.
연기론을 현상세계의 모든 존재에 대한 시간적 관찰로 존재의 생성과 전개를 밝히는 이론으로 이해할 경우, 실상론은 모든 존재의 본래 모습을 공간적으로 관찰하는 이론으로서 연기론에 대응한다.
근래의 불교학에서는 이런 구별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다. 이는 실상론이라 해도 그것은 연기의 이치를 전제하고 성립하므로 연기론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아서 연기론과 구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며, 실체론으로 이해될 경우의 실상론은 연기·무아설에 어긋나게 고정된 실체를 인정하는 것으로 오해될 우려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상론으로는 천태종(天台宗)과 삼론종(三論宗)의 제법실상론(諸法實相論)이 있다. 선종(禪宗)과 염불종(念佛宗) 등도 이 계통에 속하는 것이다. <구사론>이 모든 사물의 체성을 시간적으로는 실재하고[삼세실유(三世實有)], 공간적으로는 항상 있다고[법체항유(法體恒有)] 해서 철저히 유(有)를 주장했던 것에 반해 그 후에는 대체로 공(空)을 제창해 왔는데, 이제 다시 유(有)의 입장으로 되돌아가서 제법의 실상을 설명하는 것이 천태의 제법실상론이다.
실상론(實相論)에는 ①삼세실유론(三世實有論) ②무상개공론(無相皆空論) ③유공중도론(有空中道論) ④제법실상론(諸法實相論) 등이 있다.
삼세실유론(三世實有論) - 구사론 - 소승의 여러 종파(특히 설일체유부)
무상개공론(無相皆空論) - 삼론(三論:中論, 百論, 十二門論) - 삼론종
유공중도론(有空中道論) - 유식론 - 법상종
제법실상론(諸法實相論) - 법화경 - 천태종
*실상무상(實相無相)---불변의 진리를 말한다. 실상(實相)의 의미는 본체(本體)ㆍ진상(眞相)ㆍ본성(本性)을 뜻하며, 무상(無相)은 결정되고 제한된 일체의 차별상이 없는 무한 절대적인 것, 무아(無我)ㆍ진아(眞我)을 말한다. 실상무상(實相無相)은 불교 최고 이상 경지인 “정법안장(正法眼藏)의 열반묘심(涅槃妙心) 실상무상(實相無相) 미묘법문(微妙法門)”으로, 세존께서 십대제자 중 두타제일(頭陀第一)의 마하가섭(摩訶迦葉)에게 깨달음의 정법(正法)을 부촉하신 전법(傳法)에 내용에 나오는 말이다.
*실상반야(實相般若)---‘반야(般若)’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 ‘프라즈냐(Prajna)’라고 하며, 빠알리어로는 ‘빤냐(panna)’라고 한다. 반야는 바로 팔리어 ‘빤냐’의 음역어로서, 마하와 같이 그 발음만 따서 옮긴 또 다른 예이다. 이 또한 ‘마하’에서와 같이 그 의미가 퇴색됨을 우려해 따로 번역하지 않고 ‘반야’라고 쓰고 있다.
불경에서 반야지혜라고 하는 것은 보통의 총명함과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이는 도를 알고, 도를 증득해 깨닫고, 생사번뇌를 해탈하고, 득도해 성불하는 지혜를 가리키며, 도(道)의 본체(本體)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지혜에 속한다.
근본적인 지혜란 바로 일반적인 총명함과 보통의 지혜를 초월해 생명의 본원과 본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지혜가 반야이다. 따라서 '지혜"라는 두 글자는 결코 반야가 내포하고 있는 완전한 의미를 나타내지 못한다.
대승 불법은 반야를 문자반야(文字般若), 관조반야(觀照般若), 실상반야(實相般若)의 세 가지로 분류했다.
대체로 언어문자를 가지고 설명한 반야의 이치를 문자반야라고 칭한다. 본질적으로 말하면 반야는 문자의 상(相)을 떠난 것으로 곧 문자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만약 언어문자를 가지고 설명하지 않으면 근기가 다소 부족한 일반 수행자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도리를 이해하기 매우 어렵다. 일체의 모든 경전이 문자반야에 해당하므로 이것이 직접적으로 반야는 아니지만, 반야지혜를 이끌어 내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방편이 되는 것이므로 반야라고 한다. 따라서 문자반야는 부처님과 범부를 연결하는 매개이다.
다음 관조반야는 문자반야로 깨달은 지혜에 의해 선정(禪定) 수행을 하는 가운데 감지(感知)하고 관찰해 가는 것을 관조반야라고 일컫는다. 관조반야는 진리를 관찰하는 지혜로, 이것은 일체의 현상계를 바로 비추어보는 정견(正見)하는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선정 가운데 이러한 관찰을 십년 혹은 몇십년을 지속하다가 보면 마지막에 결국 궁극을 성취히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관조반야를 오랜 기간 수행하면 홀연히 불법의 실상을 증득해 깨닫게 되는 경지를 실상반야라고 한다.
실상반야는 제법(諸法)의 실상, 즉 있는 그대로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편견 없이 고정된 바 없이 비춰 보는 지혜를 말한다. 제법의 실상이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 세계의 모습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상 삼종의 반야는 부처님의 지혜인 깨달음의 실상반야에 이르기 위한 세 가지 단계라고도 할 수 있는데, 흔히 우리가 부처님의 지혜라고 일컫는 것은 진리의 당체(當體)인 실상반야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실상반야에 이르기 위해서, 실상반야를 체득하기 위해서 우리는 단계를 밟아야 한다. 우선 우리는 부처님의 말씀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경전을 읽고 공부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방편반야, 즉 문자반야이다. 이렇게 방편반야로 공부를 한 뒤에는 반드시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그 실천이 바로 관조반야이다. 관조반야란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편견, 고정관념 없이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보는 실천 수행법이다. 이렇게 방편반야로 부처님의 법을 이해하고, 그 후 관조반야를 실천했을 때 나타나는 진리의 실상이 바로 실상반야인 것이다.---→‘반야(般若)의 종류’ 참조.
*실상법(實相法)---실상(實相)은 법의 진실한 모습, 본래성품의 진실한 모양을 일컫는 말이다. 즉, 실상은 허망하지 않고 변하지 않는 체성, 진리의 참모양이라는 말과 같으며, 무상(無相)ㆍ공(空)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와 같이 내가 인식한 세상과 물리적으로 본래 존재하는 세상이 조금도 다르거나 차별이 없는 있는 그대로 실상(實相)의 세상을 추구하는 게 실상법이다. 욕심에 의해 대상(사물)을 왜곡하거나 변형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맞이하고 걸림 없이 살자는 것이다. 세상에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인식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 좁은 소견으로 실상을 왜곡시키지 말자는 것이다.
색(色)에 물들어 마음의 중심을 잡지 못하면 무량한 부처님의 지혜를 얻을 수 없다. 내 것을 바로 보고 실상법(實相法)을 닦아 깨끗한 마음의 눈을 얻어야 한다. 욕심과 번뇌 없이 청정하게 보살도를 행해 세상법(世上法)에 물들지 말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마음자리 찾는 데 정진하는 것이 수행이다.
여기서 말하는 실상(實相)이란 가상(假相) 밖에 실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중생에게 상(相)이라 하면 가상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부득이 실상이란 이름을 사용한 것이다. 즉, 중도(中道)의 실상은 생멸을 떠나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천차만별 하는 이 경계 가운데 선과 악, 천당과 지옥 할 것 없이 천경계(千境界) 만차별(萬差別)이 중도 아님이 없고 진실해, 일념 이대로가 법계이고, 하나의 색 하나의 향이 모두 중도이며, 자기의 세계나 부처의 세계나 중생의 세계도 또한 그러하다. 모두가 원용하며 중도이고 부사의한 해탈경계인 것이다.
*실상염불(實相念佛)---실상염불이란 불(佛)의 법신이 무량무변(無量無邊)하고 만공 덕(萬功德)을 갖춘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리(理)를 관조(觀照)함을 말한다. 즉, 실상염불은 부처님 진리 자체를 상상하는 것이다. 부처님 진리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실상염불은 우리 눈에 보이는 대상이 아니다. 보이지 않지만 이 우주는 부처님 생명이다. 그래서 <관무량수경>에 “시방여래(十方如來)는 법계신(法界身)이다.”라고 했다. 모든 부처는 우주를 몸으로 하고 있다는 말이다. 때문에 부처님 진리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주 자체를 부처님 진리로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상을 떠나서, 이름도 떠나서, 부처님 진리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 이른바 우주에 두루 해 있는 부처님 참다운 생명의 실상, 그 자리를 놓치지 않고 하는 염불이다. 따라서 실상염불이 되면 그때는 바로 염불참선(念佛參禪)이 된다. 실상염불은 염불선(念佛禪)과 둘이 아니다. 이와 같이 실상염불은 부처님의 법신이 무량무변(無量無邊)하고 만공덕(萬功德)을 갖춘 중도실상의 원리를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실상이언(實相離言) 진리비동(眞理非動)---고려 말의 선승 야운(野雲) 스님의 <자경문(自警文)>에 나오는 말이다.
실상(實相)은 이언(離言)이요, 진리(眞理)는 비동(非動)이라. 실상은 말을 떠나있고 진리는 움직임이 없다는 말이다. '이언(離言)'은 말을 떠나 있다, 말 넘어 있다는 말인데, 말로써는 표현할 수 있는 경계가 아니라는 말이다. 실상은 실다운 모습, 진실의 모습이니, ‘실상이언(實相離言)’은 말로써 진실을 다 말할 수 없다, 실상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진리비동(眞理非動)’은 진리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이니, 진리는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사람 따라 이렇게 해석되고, 저렇게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실상인(實相印)---참된 불법임을 증명하는 인(印), 또는 표치(標幟). 모든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이에 대해 설하는 것이 불교의 특징이므로 인(印)이라 한다. 소승에서는 삼법인(三法印)을 이르고 대승에서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의 이치를 이른다.
<대지도론>에 이르기를, “소승경에서는 무상(無常), 무아(無我), 열반(涅槃)의 삼법인이 있어서 이를 찍으면 이것은 불법이고, 이를 닦으면 도를 얻으나 삼법인이 없으면 마구니설이라고 한다.”고 했다. 헌데 대승경에는 단지 일법인(一法印)만 있으니, 이른바 제법실상(諸法實相)인데 이것이 요의경(了義經)이다. 따라서 대승에선 실상인(實相印)이 없으면 그것은 마구니설이다.
※요의경(了義經)---진실하고 극진한 뜻을 분명하게 말한 경전이란 뜻.
*실유법(實有法)---실유법(實有法)이란 실재로 존재하는 법이란 말이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실유법이 아니다. 마음은 본래 공한 것이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른 것에 의해 이루어졌는가 하고 구체적으로 찾아봐도 그것도 아니다. 과거의 의식과 현재의 의식과 미래의 의식과 마음과 마음작용(心所)으로 나누어 생각하고 관찰해 봐도 의식이라는 것을 찾아내기란 어렵다.
그런데 의식(意識)의 흐름을 ‘흐름이 있는 실재로 존재하는 법[실유법(實有法)]’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흐름이 있는 실유법’은 다른 것-다섯 무더기(오온五蘊)-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라 한다. 하지만 다른 것의 흐름을 없애면 의식의 흐름은 있을 수도 없으며, 찾아낼 수도 없다. 어떤 물건이 그것을 이루고 있는 각각의 부분에 의해서 생겼다고 가정하면, 그 각각을 떼어내어 버리면 그 물건을 찾아볼 수 없는 것처럼 의식의 흐름이 되는 그 각각의 것을 없애버리면 그 의식의 흐름이 없고, 의식의 흐름이 없으면 그것에 대응하는 의식의 흐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복잡하거니와 어떻게 말을 해도 어색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이 의식 자체도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공한 것임을 알 수 있다.---→삼세실유 법체항유(三世實有 法體恒有) 참조.
*실제이지(實際理地)---진리의 땅, 실제적인 진리의 자리, 진실한 본바탕, 본질이란 말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실제적인 진리란 이면(裏面)의 세계이며 본질의 세계를 말한다.
“실제이지 불수일진(實際理地不受一塵) 불사문중 불사일법(佛事門中不捨一法)”
<능엄경> 제10권에 나오는 구절이고, <능엄경> 전체를 간추린 말이다.
실제이지(實際理地)란 평등무차별한 진여(眞如)의 경계를 일컬음인데, 절대의 경지, 진정한 진리, 즉 진제(眞諦)를 말한다. 진정한 진리의 경지란 본질의 세계다. 본질의 세계란 본체이기에 텅 비어 공적한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 텅 비어 공적한 자리만 취한다면 실은 아무 것도 붙을 수 없고 남겨둘 것도 없다. 그래서 먼지 하나 필요한 것이 없다. 사람이 털어도 먼지 하나 날 것 없이 깨끗하면 유(類-어울릴 무리)가 없다는 것이 그래서 하는 말이다.
불사문중(佛事門中)이란 속제(俗諦)를 말한다. 청정한 이치에서 본다면 한 티끌도 받아들이지 않지만 불법에서는 한 법도 소홀히 다루어 버리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의 삶이란 본질과 본체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세계가 엄연히 존재하므로 일상사가 형성되고, 일상사가 형성됨에 따라 만 가지 일이 벌어지지만 한 가지 일도 버릴 것이 없다는 말이다. 불사(佛事)란 다름 아닌 사람들의 일상사(日常事)이다. 사사불공(事事佛供)이라고 했듯이, 우리들이 사는 일상사 하나하나가 다 불공 아닌바가 없다는 말이다. 사찰에서 불사(佛事)라 하면 전각을 건립한다든지, 불상을 조성한다든지, 탑을 세운다든지, 방생을 한다든지… 등 많은 불사들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런 좁은 의미의 불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보다 넓은 의미의 불사, 바로 ‘부처님께서 이루시고자 한 일’들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 뜻을 따라 수행자들이 이루어야 할 일은 부처님이 되기 위한 공부와 수행, 그리고 다른 중생들까지 부처님이 되도록 하기 위한 전법(포교)의 두 가지이다. 공부와 포교 두 가지를 이루기 위해 참선도 하고, 경전도 읽고, 염불도 하며, 학교도 다니고, 절을 짓거나 사회복지 활동도 해야 한다.
그러므로 불사란 깨달음을 얻기 위한 모든 행위와 깨달음을 얻게 하는 모든 일들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불사를 하려면 계획을 세우고, 권선을 하고, 설계를 하며, 건물을 짓거나 불상을 조성하거나, 불화를 그리고 탑을 조성하고, 염불 기도를 하는 등 모든 일들이 깨달음을 향한 거대한 꽃송이의 아름다운 꽃잎이어야 한다. 그래서 불사하는 곳에는 한 가지도 버릴 것이 없고 못 쓸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필요하다는 말이다(여기서 법은 사물을 뜻한다). 집을 짓는 데는 들보나 기둥과 같이 굵직굵직한 것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서까래도 필요하고, 기왓장도 있어야 하고, 자갈, 모래, 물, 시멘트도 필요하다. 이와 같이 있어야 할 것은 다 있어야 집이 이루어진다. 어디 집뿐이랴. 모든 사물이 하나의 꼴로 등장하기까지는 숱한 인연들이 다 모이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필요치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푸른 하늘 뭉게구름, 햇살, 공기, 쏟아지는 빗줄기, 산, 들, 강, 바다, 이 모두가 필요한 것이다. 장미가 아름답다고 하여 장미만 피어 있는 것보다는 들국화, 패랭이도 함께 어우러져 피어있는 것이 더욱 자연스럽다.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한 점 있다면 더욱 아름다운 것이다. 노을은 구름과 석양과 산들이 함께 만들어 낸 예술품이다.
그리고 보다 큰 틀에서 보면, 정치개혁은 실제이지(實際理地)의 바탕에서 사람의 생각을 바꾸고 제도를 고치자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들이 사는 삶, 일상사 그대로 다 불사로 이루어질 수 있겠기 때문이다. 불사(佛事)란 중생을 제도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중생(衆生)이란 우리들과 함께하는 모든 이웃(생명)들이다. 그래서 참된 지도자, 좋은 리더는 그 구성원(국민) 누구도 구경에는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버릴 수 없다는 여기에서 통합정치가 시작된다.
그리고 법문을 들을 때에 스님이 실재이지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느냐, 불사문중 입장에서 이야기하느냐를 판단해야 한다. ‘스님마다 왜 말이 다르냐?’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법문하는 스님이 실재이지의 입장에서 말하느냐, 불사문중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느냐, 즉 진제(眞諦)의 입장이냐 속제(俗諦)의 입장이냐에 따라 말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판승(理判僧)인 조실 스님은 주로 실재이지의 입장에서 법문을 하시고, 사판승(事判僧)인 주지 스님은 불사문중 입장의 말을 많이 한다. 속제의 입장에서 보면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다 있다. 전부 갖추고 있어 없는 게 없다. 그래서 매사가 다 불사라는 말이 있다. 사사(事事)가 모두 불공이라는 말도 있다.
그러므로 양면을 잘 이해해서 어디에도 치우치거나 집착하지 않는 삶이 불교적 삶이며 중도적인 삶이다. 수행이란 이와 같이 양면으로 치우치지 않고 집착하지 않아서 원융하고 자재한 생활태도를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금강경>에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이란 장(章)은 '이치와 같이 진실을 보라'는 장이다. 부처와 중생이 본질 면에서 모두가 공(空)이요 평등(平等)하다. 즉 실제이지의 입장에서 보면, 제도할 이도 제도 받을 이도 없음을 일깨워 주신 것이다.
<법화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부처님이 위음왕불(威音王佛, 산스크리트어 아디붓다, Adi Buddha)이다. ‘위음(威音)’이란 법화(法華)를 직접 설하는 음성을 표현한 것이며, 왕이란 이 부처님의 위풍과 음성에서 위대한 국가를 통솔하는 왕의 위력이 있음을 나타낸 말이다. 위음왕불이 출현했을 당시 겁명은 이쇠(離衰), 국명은 대성(大成)이었는데, 고대(古代)를 나타내는 비유로 ‘위음이전(威音已前=威王以前)‘ 혹은 ’위음왕불 이전’이라 하기도 하고, 하늘과 땅이 나누어지기 전, 혹은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이라 하기도 한다. 그리고 위음왕불을 경계로 해 그 이전을 실제이지(實際理地)라 하고, 이후를 불사문중(佛事門中)이라 한다. 비슷한 말에 개화천지미분전(開花天地未分前)란 말도 있다.
*실지(實智)---모든 존재의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모습을 밝게 아는 지혜, 모든 분별이 끊어진 진실한 지혜, 모든 법계가 공적(空寂)임을 깨닫는 참된 지혜, 분별이나 추리에 의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직관하는 지혜를 말한다. ---→공적(空寂) 참조.
*실차난타(實叉難陀, 산스크리트 명 시크샤난다/śikṣānanda, 652~710)---당(唐)나라시대 우전국(于闐國) 출신 역경승. 중국명 학희(學喜). <대승입능가경(大乘入楞伽經)>, <80 화엄경> 등을 한역했다. 695년에 범본(梵本) <화엄경>을 가지고 와서 남인도 출신인 보리유지(菩提流支, ?~725) 스님과 인도를 구법(求法) 여행하고 돌아온 의정(義淨, 635~713) 스님 등과 함께 699년에 80권으로 번역 완성해, 그가 한역한 <화엄경>에는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서문을 썼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이 보는 <80권본 화엄경>이다. 새로 번역했다고 해서 <신역 화엄경>이라고도 하고, 당에서 번역했다고 해서 <당역 화엄경>이라고도 한다. 당시 중국에는 이미 <화엄경 60권본>이 번역돼 있었지만 <화엄경>을 좋아했던 측천무후의 명으로 보다 완전한 <화엄경>을 번역하기 위해 <80권본 화엄경>을 실차난타가 번역했다.
※우전국(于闐國)---타클라마칸(Taklamakan) 사막의 남서쪽, 지금의 중국 위구르 자치구에 속한 화전(和田) 지역에 있던 고대 국가. 당나라 때는 이 지역이 모두 서역으로 표시되던 곳이었다.
*실참수행(實參修行)---실참수행은 실지체험으로 닦아나간다는 뜻이다. 참선을 할 때 진여자성(眞如自性)을 깨쳐 알게 하기 위해 선사들이 화두(또는 공안)를 만들어 제시하고, 수행자는 그것을 간절히 의심하고, 끊이지 않게 의심해 가다보면 확연히 알게 되는, 그런 깊은 뜻이 감춰진 말이다.
용례, 실참수행(實參修行)으로 성숙되지 않는 교리(敎理)는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 불교대학들이 이 점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에 발전이 없고 심지어는 금방 문을 닫는다.
팔정도에서 정(正)자는 바르다는 뜻으로 실참수행(實參修行)에서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 결과로 오는 正(바른 것)이다.
*실참실오(實參實悟)---실참실오란 말과 글을 익히는데 있어서 알음알이가 아닌 실지로 참구(의심)해 참답게 실상을 체인(體認) 체달(體達)해 증오(證悟)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비슷한 말로 실참수행(實參修行)이란 실지체험으로 닦아나간다는 뜻이다. 중국 원나라시대의 고봉(高峯, 1238~1295) 선사는 참선수행의 지침서라 할 수 있는, 조사선과 간화선의 요지를 밝힌 최초의 강설서 <선요(禪要)>에서 실참실오(實參實悟)하는 조사선과 간화선의 요체를 설했다.
*실천적 중도(實踐的中道)와 사상적 중도(思想的中道)---중도(中道)는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실천적 중도이고 다른 하나는 사상적 중도다.
① 실천적 중도(實踐的中道)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첫 설법에서 가르치신 쾌락과 고행을 배격하는 중도의 수행, 즉 팔정도의 수행이다. 여기서 말하는 쾌락에는 세속적인 쾌락, 동물적인 쾌락은 물론이고 ‘종교적 쾌락’인 ‘삼매의 즐거움(三昧樂)’ 역시 포함된다. 싯다르타 태자는 출가 후 알라라 칼라마(Alara Kalama)라는 수행자에게서 ‘무소유(無所有)삼매’를 배우고, 웃다카 라마풋타(Uddaka Ramaputta)라는 수행자에게서는 ‘비상비비상(非想非非想)삼매’를 배웠지만 그 모두 태자가 추구하던 궁극적 깨달음이 아니었다. 마음이 편안한 것은 삼매에 들었을 때일 뿐이고 삼매에서 깨어나면 다시 번뇌가 일어나기 때문이었다. 삼매의 수행을 버린 싯다르타 태자는, 굳은 결심으로 다섯 친구들과 함께 고행에 들어갔다. 번뇌의 뿌리인 육체를 괴롭히면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루에 깨 한 톨과 쌀 한 톨만 먹으며 연명하기도 했다. 손으로 배를 만지면 등뼈가 닿을 정도로 피골이 상접했다. 황금빛이었던 몸은 검게 변했다. 그 모습은 노인과 다를 게 없었다. 죽음을 각오한 처절한 고행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고행을 해도 번뇌는 사라지지 않았다. “태어난 존재는 왜 모두 죽어야 하는지?” “모든 생명은 어째서 약육강식의 고통 속에 살아가야 하는지?”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고행이 결코 궁극에 이르는 길이 아님을 알고, 싯다르타 태자는 고행을 중단했다.
그리곤 강가로 내려가서 수자타 여인이 바친 유미죽으로 기운을 차리고 보리수 아래에 마른 풀을 깔고 앉아 선(禪) 수행을 시작했다. 극단적인 삼매도 아니고 처절한 고행도 아닌 중도의 수행이었다.
② 사상적 중도(思想的中道) - 고행과 삼매를 배격한 실천적 중도의 수행이 선이라면, 사상적 중도는 이런 선 수행을 통해서 얻어진 통찰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흑백논리에 대한 비판’이다. 있음과 없음(有, 無), 이어짐과 끊어짐(常, 斷), 같음과 다름(一, 異) 등과 같은 이분법적(二分法的) 사유에 대한 비판이다.
이런 통찰은 “모든 것이 의존적으로 발생한다.”는 연기(緣起)의 가르침에 근거한다. 예를 들어서 씨앗에서 싹이 나올 때 싹은 씨앗에 의존(緣)해 발생한다(起). 연기하는 것이다.
이때에 애초의 씨앗과 나중의 싹이 완전히 동일한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不一不異), 씨앗이 싹으로 그대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단절된 것도 아니며(不常不斷), 싹 속에 씨앗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도 아니고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非有非無). 씨앗에서 싹이 나올 때 양자의 관계는 이렇게 중도적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체험하는 세상만사는 모두 연기한 것이며 중도적이다. 내가 경험하는 행복과 불행은 원래 세상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나 전생에 지었던 선업이나 악업의 결과다. 행복과 불행이 나중에 발아한 ‘싹’이라면 선업이나 악업은 앞서서 심었던 ‘씨앗’에 해당한다. “착하게 살면 행복이 온다.”는 선인락과(善因樂果), “악하게 살면 불행이 온다.”는 악인고과(惡因苦果)의 가르침은 ‘씨앗에 해당하는 업’과 ‘싹에 해당하는 과보’ 사이의 중도적 관계, 즉 연기 관계에 근거한다.
그런 연기관계를 보다 상세하게 풀어놓은 가르침이 바로 12연기설(十二緣起說)이다. 12연기설의 열두 가지 항목들 각각에서 앞과 뒤의 관계는 이어진 것도 아니고 끊어진 것도 아니며(不常不斷),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不一不異). 그래서 12연기설을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을 떠난 중도의 설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실천적 중도인 선 수행을 통해서 생명과 세계의 실상에 대해 있는 그대로 관찰할 때, ‘흑백논리에 의해 작동하는 우리의 생각이 모두 잘못된 것’이라는 사상적 중도의 통찰이 얻어진다. 또 ‘괴로움과 즐거움 등 우리가 체험하는 모든 것들이 확고불변한 것이 아니라 조건이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연기(緣起)의 이치를 자각하게 된다. 그 전까지 실재라고 생각되었던 인식과 존재에 대한 모든 고착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 때 우리의 인지(認知)와 감성은 이분법에서 벗어난다. 선불교에서는 이런 자각을 견성(見性)이라고 부른다. “불성(佛性)을 봤다(見).”는 뜻이다. - 김성철
*실크로드(Silk Road, 비단길)---실크로드는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과하는 교역로로, 이는 실크로드’(silk road)이자 불교가 전래된 다르마로드(dharma road)이기도 한데, 실크로드라는 말은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Wilhelm Richthofen, 1833~1906)이 처음 사용했다. 실크로드는 중국 중원 지방의 장안(長安, 현 시안/西安)에서 시작해, 둔황(敦煌)을 거치는데, 둔황 서쪽에서 파미르 고원 동쪽까지인 중앙 부분은 타클라마칸 사막에 막혀 사막 남쪽과 북쪽으로 가는 두 길로 나뉜다.
그리하여 북실크로드, 중부실크로드, 남실크로드로 구분됐으나, 그 중에 중부실크로드는 6세기경에 쇠퇴했다.
북실크로드(=천산남로)는 타림분지 북부를 지나는데, 이에는 아커쑤, 투르판, 가오창(고창), 쿠차(龜玆國) 등의 고대 도시들이 위치하고 있었다. 현재 타림분지 북부 중심도시는 우루무치이다.
남실크로드는 타림분지 남부를 지나는데, 이에는 누란(樓蘭-선선국/鄯善國) 미란(Míran), 호탄(和田-옛 우전국/于闐國), 카슈가르(소륵국/疏勒國) 등의 고대 도시들이 위치하고 있었다.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가 이 길을 통해 중동지역과 유럽으로 전해졌고, 옛날 구법승들이 서역으로 갈 때도 이 길을 이용했다.
중국에선 장안(長安-현 시안/西安)을 출발해 간쑤성 북서부의 둔황(敦煌)에 이르는데, 둔황은 사막 내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이다. 둔황은 중앙아시아와의 교역에서 중요한 대상도시(隊商都市)이자 상업 중심지였다. 둔황에는 대상교역의 대부분을 담당하던 소그디아나인과 중앙아시아의 상인들이 살던 마을이 있었다. 여기서 실크로드가 시작됐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동양학자들은 오아시스로를 통한 동서교류 연구를 심화해, 중국에서부터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를 지나 터키의 이스탄불과 로마까지 연결하는 장장 1만 2천km(직선거리 9,000km)에 달하는 이 길을 동서간의 문화통로와 교역로로 규정했다.
그리고 실크로드에 북방 초원지대를 지나 유라시아 대륙으로 이어지는 초원로(草原路, Steppe Road, 스텝로=천산북로)와, 중국 남해에서 인도양 홍해(紅海) 지중해로 이어지는 남해로(南海路, Southern Sea Road)까지 포함시켰다.
실크로드가 처음 열린 것은 전한(前漢, BC 206~AD 25) 때이다. 한 무제(武帝)는 대월지(大月氏), 오손(鳥孫)과 같은 나라와 연합해 중국 북방의 변경지대를 위협하고 있던 흉노(匈奴)를 제압하고 서아시아로 통하는 교통로를 확보하길 원했다.
그리하여 BC 139년 장건(張騫)은 100여 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장안을 떠났지만 얼마 가지 못해 흉노에게 붙잡히고 만다. 그는 그곳에서 약 10년 동안 허송세월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탈출해 파미르 고원 넘어 당초 목적지인 대월지국(大月支國)에 도착했다. 하지만 많은 세월이 흘러 대월지국은 동맹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대월지국에 머무는 1년 동안 여러 가지 자료를 수집한 후 본국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장건이 서역으로 갈 때는 타클라마칸 사막 북쪽 길을 이용했지만 돌아올 때는 그 남쪽 길을 택했다. 도중에 티베트족에게 붙잡혀 1년 동안 고생하기도 했지만 BC 126년에 돌아왔다. 이와 같은 장건의 서역원정이 실크로드의 시작으로 본다.
*심(心, 빠알리어 찌따/citta)---빠알리어 찌따(citta)는 보통 ‘마음’으로 옮긴다. 주로 우리의 생각이나 사고의 일반을 나타내는 술어로 사용된다. 그런데 아비담마에서 찌따는 마노(mano-意)와 윈냐나(vinnana-識)를 다 아우르는 광의의 개념으로 쓰인다.---→마음(빠알리어 citta) 일반론, ‘심(心, 빠알리어 찌따/citta), 의(意, 마노/mano), 식(識, 위냐나/vinñāṇa)’ 참조.
*심과 사(尋ㆍ伺, 산스크리트어 vitarka-vicāra)---심(尋)과 사(伺)는 마음작용을 통칭하는 불교 용어로서 당나라 현장(玄奘) 이후 등장한 말인데 지금은 잘 쓰지 않는다. 두 마음작용에는 다소 차이점이 있다.
• 심(尋, vitakka, 향하는 마음) ― 명상 주제에 대해 거듭 거듭 생각을 일으키는 것으로, 사유(思惟)라고 하며 사유에는 바른 사유와 그릇된 사유가 있다. 다만 심(尋)은 거칠고 개괄적으로 사유하는 마음작용, 얕은 사유 말한다. 이와 같이 심(尋)이라는 마음작용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사량 분별과 논리적으로 따지고 생각한다는 의미가 있다.
• 사(伺, vicāra, 지속적 고찰, 머무는 마음) - 일으킨 생각이 지속되는 것으로, 명상 주제에 지속적으로 마음을 머물게 하는, 주시하는 마음작용이다. 사(伺)는 세밀하게 고찰하는 마음작용, 깊은 사유를 말한다.---→부정심소(不定心所) 참조.
*심견(心見)---심견(心見)은 마음으로 보는 것,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곧 심안(心眼)의 작용을 심견이라 한다. 심안(心眼)은 심근(心根)을 바탕으로 하는 눈을 말한다. 그러니 심근을 바탕으로 한 심안의 작용이 심견인 셈이다.
물질에만 밝은 색견(色見)으로는 몸 안에 있는 마음을 보지 못한다. 심견(心見)은 마음이 열림에 있다. 먼저 자신의 마음이 열려야 남의 마음도 열 수 있는 것이다. 너와 나를 구분 짓고는 이심전심의 묘연한 법이 전해질리 없지 않은가. 다음은 <능엄경>에 나오는 말이다.
「사리불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에 이마를 대어 절하고 부처님께 사뢰었다. “저는 광겁이래(廣劫以來)로 심견(心見)이 청정해 이와 같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항하의 모래와 같았으며, 세간과 출세간의 가지가지 변화를 한 번 보고 통달해 장애가 없었습니다.
제가 거리에서 가섭파(迦葉波) 형제가 인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마음이 끝이 없음을 깨달아 부처님에게 출가해 보고 깨닫는 것이 명원(明圓)해지고 크게 두려움 없음을 증득해 아라한을 이루고, 부처님의 장자(長子)가 됐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부처님의 입으로부터 태어나고, 법으로부터 화생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원통을 물으시니 제가 증득한 바로는 심견(心見)이 지혜의 광명을 발해 그 광명이 극에 달한 그 지견(知見)이 제일(第一)인가 합니다.“」---→이십오원통 참조.
*심념(心念)---마음속에 생각하는 것. 사람에게 여러 근기가 있으므로 여러 가지 방편을 두어 공부를 이끄는 것이다. 그 방법에 관심법(觀心法)이 으뜸이다. 관심법 가운데는 각찰법(覺察法)과 휴헐법(休歇法)이 있다. 이것은 중지상(中之上)이나 대근기가 아니면 나아가 합하기 어렵다. 시험해 이르건대, 잠시 동안에 심념(心念)을 수습하여, 잡념(雜念)이 말끔히 사라지는 자(者)라면 능히 이 문(門)에 들 수 있으나, 그 나머지 사람들은 염불(念佛), 기도(祈禱), 위빠사나 등에 의지해 공부해야 한다.
*심념처(心念處)---사념처(四念處, cattāro sati-paṭṭhānā)의 하나. 심념처(心念處) 수행은 생각은 무상(無常)하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있는 그대로 통찰해 마음 챙김을 하는 것, 나의 마음은 늘 대상 따라 변화하고 생멸하는 무상(無常)한 것임을 알아차림으로써 마음 세계에 대한 탐욕과 혐오를 극복하는 수행법이다.
특히 심념처(心念處)란 마음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포착해 알아차리는 것인데, 심념처 마음(心, citta)은 순간순간 마음에 생겨난 갖가지 상태를 그때그때 그대로 정확히 인지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그 대상은 모두 아래와 같이 열여섯 가지에 이른다. 여기서는 변화무쌍하게 마음속에서 전개되는 갖가지 양상이 어떻게 발생하고 소멸하는지를 관찰함으로써 마음 상태에서 ‘늘 그러하지 않음(無常)’을 발견해내는 능력의 갖춤을 지향하는 것이다.
① 탐욕이 있는 마음 ② 탐욕이 없는 마음
③ 성냄이 있는 마음 ④ 성냄이 없는 마음
⑤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 ⑥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
⑦ 위축된 마음 ⑧ 산만한 마음
⑨ 커진 마음 ⑩ 커지지 않은 마음
⑪ 향상된 마음 ⑫ (더 이상) 향상될 수 없는 마음
⑬ 집중된 마음 ⑭ 집중이 안 된 마음
⑮ 자유로워진 마음 ⑯ 자유로워지지 않은 마음---→‘사념처(四念處, 빠알리어 cattāri sati-paṭṭhānāni) 수행’ 참조.
*심독(心讀)---<법화경>을 읽는 방법에는 ①구독(口讀)ㆍ②심독(心讀)ㆍ③색독(色讀)의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다. 여기서 심독(心讀)은 입으로 읽고 뜻을 알면 존귀한 교라는 것을 굳게 마음으로 믿는 것을 말한다.---→색독(色讀) 참조.
*심로절(心路絶)---사량분별로 이리저리 따지고 헤아리는 마음[心]으로 모색할 길[路]이 끊어졌다[絶]는 말이다. 사량분별이나 이치로 따져서는 될 일이 아니란 말이다.
*심마물 임마래(甚麽物 恁麽來)---‘심마물은 무엇이란 뜻이고, ’임마‘는 어떻게 어찌해서란 뜻으로, ’심마물 임마래‘는 “무엇이 이렇게 왔는가?”, “무엇이 어떻게 왔는가?”하는 말이다.
중국 당나라시대 형주(衡州) 땅에 남악 회양(南岳懷讓, 677∼744) 선사가 살았었는데, 그는 경학(經學)에 조예가 탁월했으나 정법(正法)을 증득치 못했는지라, 남쪽 광동 땅 소주(韶州)에서 당시 선풍을 드날리며 ‘불립문자 직지인심(不立文字 直指人心)’의 법을 가르치는 육조 혜능(慧能) 대사께 법을 구하기 위해 불원천리로 찾아갔다. 원거리 여행의 피로함에도 굴하지 않고 육조 대사가 계신 조실(祖室) 방으로 안내받아 들어가, 오체투지(五體投地)해 절을 올리고 공손히,
“소승은 법을 배우러 왔습니다. 원컨대 법을 설해 주옵소서.”하고 말씀 드렸다. 그런데 육조 대사께서는 “그런가, 어데서 왔는고?”하며 반문을 하셨다. 회양 선사는 “네. 형주 땅 숭산이라는 데서 왔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이에 육조 대사께서 하신 말씀이,
“심마물(甚麽物) 임마래(恁麽來)오?“였다. ’어떠한 물건이 이와 같이 왔는고?’ 하는 말이다. 무엇이 어떻게 왔는고? 네가 무엇인가? 네 본래면목이 무엇인가? 이 뭣고? 이런 물음이 다 담긴 말이다.
ㆍ심(甚) ― 심할 심, 중국 방언으로 ‘무엇, 무슨’이라는 뜻.
ㆍ마(麽) ― 작을 마, 가늘다는 뜻, 속어에 쓰이는 의문 조사.
ㆍ심마(甚麽) ― 무엇, 무슨, 어떻게.
ㆍ임(恁) ― 생각할 임, 여기서는 부사로 ‘이같이, 이렇게’의 뜻.
ㆍ임마(恁麽) ― 이같이, 이렇게.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습마물 임마래(什麽物 恁麽來)라 쓰고 읽는다. 습마(什麽)는 무엇이란 뜻이고, 임마(恁麽)는 어떻게, 어찌해서란 뜻으로, 습마물 임마래란, 곧 “무엇이 어떻게 왔는가?”라는 말인데, “너의 본래면목은 무엇인가?” “대체 너는 무엇인가?” “왜 왔는가?”하는 의미가 다 포함돼 있는데, '이 무엇'이란 문제는 따지고 보면 선불교 전부를 들어서 얘기하는 말이나 같다.
회양 선사가 말문이 꽉 막혀 답변할 바를 몰라 망연히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나 조실 스님 방을 나왔다. 그리고 곧장 먼저 있던 형주로 돌아와 매일 어묵동정(語黙動靜) 일체시에 언어도단(言語道斷) 하고 심행처멸(心行處滅)한 그 의단(疑團)을 가지고 “심라래(甚麽來=是甚麽 - 이것이 무엇인고?)” 하고 정진해 나아갔다.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무상한 시간은 쉬지 않고 흘러갔다. 여러 가지 번뇌와 마장이 생기나 생사를 결단하고 하루 한날 같이 정진에 정진을 거듭해 나아갔다. 일 년, 이 년, 삼 년, 있는 힘을 다해 용맹 정진해 드디어 팔 년 만에 한 생각이 궁글러 대우주와 불이(不二)인 자기의 본래면목을 깨쳐 환희에 넘쳐 법열삼매 속에서 곧장 육조 대사를 찾아가 뵈었다.
육조 대사께서는 전날과 다름없이 ‘심마물이 임마래오?’ 하고 물으셨다. 이에 회양 선사는 서슴지 않고 답했다.
“설사일물(說似一物)도 즉부중(卽不中)입니다(설사 한 물건이라고 해도 맞지 않습니다)” 하고 답했다.
육조 스님께서는 벌써 공부가 다 됐음을 살피어 인가하시니 이로써 육조 스님의 적자(嫡子)가 됐다고 한다.
나의 본래면목을 찾는 것, 그리하여 시간과 공간과 명상을 초월해 절대적인 적멸처(寂滅處)로 돌아가, 함이 없는, 즉 무위지행(無爲之行) 속에서 역력히 적백(赤白) 고하(高下) 선악시비(善惡是非)를 분명히 가리어 일체에 무애한, 자유자재한 것이 선(禪)이라 하겠다. “시심마(是甚麽)?” 하는, 당장 그 자리가 바로 선(禪)이라고 하겠다.
조그만 티끌 하나도 잘 보면 반야지혜(般若智慧)고, 바로 부처님의 청정법신(淸淨法身)인 것이고, 잘못 보면 하나의 티끌에 불과하다. 이것은 하나의 티끌에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중생이 잘못 보는가, 잘 보는가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깨닫는가 깨닫지 못하는가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본래 물(物) 자체에는 조금도 차이가 없다. 따라서 ‘나’란 대체로 무엇인가? 이것만 해답을 바로 내려버리면 모든 문제풀이가 다 된다는 말이다.
“무엇이 어떻게 왔는고?” “이 뭣고”, 이는 선불교에서 가장 많이 드는 화두(話頭) 중의 하나로 “이 뭣고” 화두는 그 연원이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무엇인가?”, “내가 무엇인가?”에는 나(我) 자체가 천지우주와 같이 연기법으로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 무엇인가?”에 일체존재가 다 들어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뭣고”라는 화두에는 “오고 가고, 앉고 서고 하는 이것이 바로 무엇인가?” “부모님께서 아직 나를 나아 주시기 전의 내 본래면목(本來面目)은 무엇인가?” 라는 의심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금강경오가해서(金剛經五家解序)>에서 육조 혜능 대사는,
“나한테 한 물건이 있는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으며, 이름도 없고 자(字)도 없다. 위로는 하늘을 바치고 아래로는 땅을 괴고, 밝기는 해와 같고 검기는 칠과 같은데, 이러한 것이 항상 일상생활해 나아가는 가운데 나와 더불어 있지만, 일상생활해 나아가는 가운데 거두어들이고자 해도 할 수가 없다. 이것이 무엇인가?' (有一物 無頭無尾 無名無字 上柱天下柱地 明如日黑似漆 常在動用中 動用中 收不得者 是甚麽)”라고 했다.
이와 같이, 본래면목이 무엇인가? 해야지, 그냥 상대 유한적인 것을 가지고서 이것인가 저것인가 하면은 그때는 화두가 못되고 참선이 못되는 것이다. 분명히 심마물 임마래가 돼야 화두라고 할 수 있다.
말문이 막힌 남악 회양은 그 후 8년을 수련한 끝에 다시 육조 혜능 대사를 만난 즉, 다시 심마물 임마래(甚麽物 恁麽來) 하는지라 이에 남악이 대답하기를,
“설사 한 물건이라고 해도 맞지 않습니다(說似一物卽不中).” 했다. 이에 육조가 물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더 닦고 증득할 만한 것이 있는가(還可修證否)?” 이에 회양이 말했다.
“닦고 증득할 것이 없지는 않으나, 물들여 더럽힐 수는 없습니다(修證不無 染汚卽不得).”
이번에는 육조 대사가 말했다.
“다만 이 더럽히고 물들이지 못함이 모든 부처님께서 호념(護念)하시는 바이니 너 또한 이와 같고 나 또한 이와 같다(只是不染汚 諸佛之所護念 汝亦如是 吾亦如是).”고 했다.
불법에서 말하는 진리란 시공(時空)을 초월하는 것이고 인과율(因果律)을 넘어선 것이므로 제한된 인간의 말로써는 표현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남악 회양은 “설사 한 물건이라고 해도 맞지 않습니다.” 라고 대답한 것이다.
이에 육조 혜능 대사는 다시 “그렇다면 앞으로 더 닦고 증득할 만한 것이 있는가?”라고 질문한 것인데, 일반인의 상식으로 생각한다면 이미 본래성품을 보고 깨달았으므로 다시 닦을 것이 없다고 대답할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남악의 대답은 “닦고 증득할 것이 없지는 않으나, 물들여 더럽힐 수는 없습니다.”라고 했다. 아직은 완벽한 깨달음이 못됐기 때문에, 닦음은 또다시 있어야 하고, 또한 수증(修證)에 깊고 옅은 심천(深淺)이 있기 때문에 마땅히 닦음이 있긴 있지마는, 그것을 높다 낮다 또는 보살 몇 지(地)라든가 하는 것을 관념에 두어서는 참다운 무염오수행(無染汚修行)이 못됨을 말한 것이다.
*심명(心銘)---당나라 시대 우두법융(牛頭法融, 594~658) 선사의 저작이다. 법융 선사는 사조(四祖) 도신(道信) 대사의 방계 제자이다. <심명>은 사언절구 운문체로 선의 요체를 풀이한 글로서 삼조 승찬(僧璨) 대사의 <신심명(信心銘)>과 비슷하다. 아래는 <심명>의 일부이다.
『心性不生(심성불생) - 마음의 참 성품은 생기는 것도 아닌데
何須知見(하수지견) - 어떻게 알려고 하고 보려고 하는가.
本無一法(본무일법) - 본래 한 법도 없거늘
誰論熏鍊(수론훈련) - 닦으며 익힌다고 하는 자는 누구인가.
往返無端(왕반무단) - 오고감은 아무 까닭 없이 저절로 그렇거든
追尋不見(추심불견) - 아무리 찾아보려 해도 보이지 않다네.…
生死忘懷(생사망회) -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마저 모두 잊어버린 무심경지,
卽是本性(즉시본성) - 바로 이것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참된 성품이라네.
至理無詮(지리무전) - 지극한 이치는 말로 설명할 것이 전혀 없으며,
非解非纏(비해비전) - 풀리는 것(해탈)도 아니고, 얽히는 것도 아니네.…』
*심문(心聞)--- 마음의 소리를 듣다. 혹은 마음으로 듣는 것을 말한다. 다음은 <능엄경>에 나오는 말이다.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발에 정례하고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드렸다. “제가 이미 일찍이 항사의 여래와 더불어 법왕자가 됐으니 시방여래가 그 제자로서 보살의 근성(根性)이 있는 자를 가르칠 적에 보현행(普賢行)을 닦으라 하심은 저를 따라 세운 이름입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심문(心聞)을 써서 중생이 가지고 있는 지견(知見)을 분별해 만일 타방의 항사 같은 세계 밖에 한 중생이라도 마음에 보현행(普賢行)을 발명한 자가 있으면 그때 육아백상(六牙白象)을 타고 몸을 백 천으로 나누어서 다 그 곳에 이르며 설사 그가 업장이 깊어서 저를 보지 못할지라도 저는 그 사람에게 어둠 속에서 마정(摩頂)을 주고 옹호(擁護)하며 안위(安慰)하여 그로 하여금 성취케 했나이다. 부처님께서 원통을 물으시니 제가 본인(本因)을 말씀드리건대 심문(心聞)이 발명하여 분별이 자재(自在)함이 제일이 되겠나이다.“
※마정(摩頂)---부처님이 제자에게 교법을 전수할 때와 수기(授記)할 때에, 제자의 정수리를 손으로 만지는 일.
다음은 좀 더 현실적인 용례이다.
“우리 00신문은 앞으로 일반적인 신문(新聞)의 개념을 넘어 독자들의 마음까지 읽어내는 심문(心聞)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도록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신문에 대해 변함없는 관심과 애정을 부탁드립니다.”
*심미세(甚微細)---<화엄경>에 나오는 말인데, 많고 많은 사연이라는 뜻.
*심법(心法)---심법에는 두 부류가 있다. 하나는 불교에서 말하는 심법이고, 또 하나는 불교 밖의 일반에서 이해하는 심법이다.
불교에서 이해하는 심법은 우주 만유(宇宙萬有)를 물질적 존재와 마음의 이원(二元)으로 나눌 때에, 물질적 대상에 대해 인식작용을 하는 것이 심법이다. 즉, 정신, 사물을 의식하는 마음, 주관적 인식을 말한다.
불교에서 심법은 오위(五位)의 하나다. 불교에서 5온(五蘊)은 심법(心法, 마음)과 색법(色法, 물질) 2분법으로 나누어진다.
부파불교 설일체유부에서는 자신들의 5위 75법의 법체계에서 5그룹[位]을 색법(물질) · 심법(마음) · 심소법(마음작용) · 불상응행법 · 무위법(열반)의 순으로 나열했고, 유식유가행파에서는 자신들의 5위 100법의 법체계에서 5그룹[位]을 심법(마음) · 심소법(마음작용) · 색법(물질) · 심불상응행법 · 무위법(진여, 법성)의 순으로 나열했다. 여기에서 심법(心法)은 심왕(心王)과 심소(心所)로 구분한 마음작용을 말한다.
불교에서 법이라고 할 때 그것이 지칭하는 범위가 색법(色法)이냐, 아니면 심법이냐이다. 색법은 우리에게 보이는 물질적인 것이고, 그것에 대한 주관적인 판단이 심법이다. 꽃은 색이다. 그러니 색법 자체에는 선도 악도 없다. 다만 ‘있을 뿐’인데, 보는 사람이 마음에 들면 좋다하고 그렇지 않으면 나쁘다고 한다. 그런데 그 꽃을 바라보는 각자의 마음은 다 다르다.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주관적인 생각을 개입해서 본다. 그처럼 생각이 들어가서 판단하는 것이 심법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이다. 일체의 모든 것을 마음이 만든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속에 색법까지 들어가면 곤란하다. 천 길 낭떠러지 앞에 서서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다며 한 발 내 딛는다면 큰일이다. 한 발 내딛으면 떨어져 죽는다. 여기서 일체의 범위는 심법에 한정된 것이다. 즉, 주관적 판단을 할 때를 말한다. ‘달마어록’ 중에 ‘안심법문(安心法門)’이라는 것이 있다. 거기에 보면 ‘예쁘다, 밉다에 객관적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밉다고 생각하는 순간 미운 것이다’고 했다. 그래서 심법은 내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불교 밖의 일반에서 이해하는 심법(心法)은 마음을 쓰는 법을 말한다. 그래서 심법(心法)을 도법(道法)이라 한다. 심법(心法)은 나의 심력(마음의 힘), 믿음을 도와주고 키워주는 하나의 방편으로, 나의 의지를 더욱 강하게 해주는 힘이 있다. 심법(心法)을 글이나 학문으로 논하려 하면 참 법을 알지 못한다. 학문이 아닌 마음으로, 체득해야 알 수 있는 것이 심법(心法)이다. 그래서 심법을 익히기란 어렵다. 심법은 마음을 아는 법이 아니라, 마음의 실체를 보고 그것을 바탕으로 마음을 쓰는 법을 말한다. 모든 운동은 심법이 뒷받침돼야 발전이 있다. 모든 운동에서 강조하는 집중력도 심법의 하나이다.
심법(心法)에서의 고요함이란 시끄러운 곳에서도 고요함이 흐트러지지 않고, 생멸심을 여읜 흔들림이 없는, 집중력을 말한다. 이에 비해, 관법(觀法)에서의 고요함이란 조용한 고요함을 일컫는 일시적인 현상을 뜻한다.
무의식적 호흡과 의식적 호흡에서 밝힌 것과 같이 호흡을 의식하는 것과 의식하지 않는 것의 차이가 크다. 합기도(合氣道)의 심법이란 곧 마음을 이르는 것이다. 몸은 마음에 따라 움직인다고 하며. 우리는 흔히 마음은 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마음이 시켜도 몸이 움직여주지 못함을 뜻한다. 꾸준한 연습으로 기술이 몸에 배어 있어야 마음에 따라 움직일 수 있다.
운동은 생리학적인 신체구조가 역학적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힘은 훈련의 양과 질에 따라 강화되게 마련이며, 고도의 훈련을 쌓아도 실제로 경기할 때 자기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마음의 힘이 따라오지 않기 때문이다. 심리학적으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는데, 특히 격투기(格鬪技)는 이 심리적 표출이 승패를 좌우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중요하게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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