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산 <불교 용어 해설, ㄴ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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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연(能緣)과 소연(所緣)---능연과 소연이라는 단어는 유식에서 많이 사용되는 단어인데, ‘연(緣)’은 서로 인연을 맺는다는 말이고, 인연을 맺어야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유식에서는 우리 마음은 능동적이고 주관적으로 사물의 가치를 좌지우지하며 판단한다고 보고 있으며, 외부대상은 수동적이며 객관적으로 존재하게 된다고 본다. 그래서 인식대상[대경(對境)]을 소연(所緣)이라하고 대상을 보고 아는 것을 능연(能緣)이라고 한다. 능견(能見)과 소견(所見)의 관계와 같다.
유식불교에서는 주관과 객관을 능연과 소연으로 말하는데, 이 둘은 상호의존적인 관계로 파악된다. 인식이 성립되는 조건으로 인식대상은 인정하나 주관과 객관이 독립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인식대상은 ‘의존되는 것’이며, 대상을 인식하는 작용은 그 대상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니 소연(객관)이 없으면 능연(주관)도 없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대상은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으며[공(空)], 동시에 주관도 실체가 아니다.
한편 불교에서는 사물을 인식하는 것을 반연(攀緣)이라고 한다. 그리고 반연하는 인식작용을 능연이라 하고, 반연된 인식대상을 소연이라 한다. 그래서 근본지(根本智)를 진리에 계합해 능연과 소연의 차별이 없는 절대의 참 지혜라고 했다.
*능인(能仁)---능히 인(仁)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석가모니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능인적묵(能仁寂默)---부처님의 이름 산스크리트어 Sakyamuni의 한자식 표기음을 석가모니(釋迦牟尼)라 한다. 석가는 종족의 이름이고, 무니는 성자라는 존칭이다. 그러므로 석가종족에서 태어난 거룩한 성자란 뜻이다.
그리고 부처님 이름을 뜻으로 옮겨 능인적묵(能仁寂默) 또는 능적(能寂)이라 한다. 즉, 일체의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인 능인(能仁)과 부처님의 절대의 진리를 깨달은 경지인 적묵(寂默), 이 두 가지를 합쳐서 능인적묵(能仁寂默)이라 한 것이다.
천태 대사는 ‘적묵(寂默)’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능인(能仁)’으로 해서 열반(涅槃)에 머무르지 아니 한다고 했다. 즉, 적묵, 곧 진실로 절대의 진리를 깨달았으므로 깨달은 몸으로써 열반 속에 가만히 있지를 않고, 능인, 곧 세상의 미혹한 인간 가운데 들어가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을 구원하는 인간불사에 애쓴다는 뜻이다.
*능입(能入), 능도(能度)---용수(龍樹, 나가르주나)는 <대지도론>에서 말하기를, “불법대해 신위능입 지위능도(佛法大海 信爲能入 智爲能度) - 불법(佛法)의 대해(大海)는 믿음(信)을 능입(能入)으로 하고 지혜(智)를 능도(能度)로 한다. 즉, 불법이라는 큰 바다에는 믿음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고, 지혜가 있어야 건너갈 수 있다.”고 했다.
• 능입(能入)이란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 능도(能度)란 능숙하게 건너간다는 말인데, 능숙하게 제도한다는 말로도 쓰인다. 즉, 제도를 하는 자와 제도를 받는 자 모두 일승(一乘) 안에 있으므로 능히 제도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여기서 능은 보살, 도는 중생에 해당한다고 했다.
*능작인(能作因, karana-hetu)---<구사론(俱舍論)에서는 인과 연을 다시 자세히 분류해 육인사연(六因四緣)의 이론을 전개했다. 육인은 능작인(能作因) ․ 구유인(俱有因) ․ 상응인(相應因) ․ 동류인(同類因) ․ 편행인(遍行因) ․ 이숙인(異熟因)을 말한다.
능작인이란 어떤 결과를 성립시키기 위해 자체를 제외한 적극적으로 또는 소극적으로 조력하는 모든 조건의 총칭이다. 이를테면 A라는 법이 생겨날 때 A를 제외한 다른 모든 법은 직 ․ 간접으로 A법의 생기에 영향을 미친다는 말이다. 즉, 다른 법의 생기를 장애하지 않는 원인을 말하는 것으로, 일체의 유위법은 그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유위 ․ 무위법을 능작인으로 삼는다. 결국 능작인이란 직접적인 원인과 보조적이며 간접적인 원인을 총칭한다. 예를 들어, 씨앗은 식물의 직접적 원인인 반면 햇빛과 물, 흙은 식물의 보조적 원인이다.
능작인에는 직접적인 원인과 결과를 낳는 힘을 가진 유력능작인(有力能作因)과 간접적인 원인인 무력능작인(無力能作因)이 있다. 유력능작인은 적극적으로 작용해 결과를 낳게 하는 인(因)을 말하고, 무력능작인은 소극적으로 결과의 발생을 방해하지 않는 인이다. 그러니 직 ․ 간접의 원인 모두를 통틀어 능작인이라 한다. 예를 들면, 축구시합에서 이겼다면, 선수들 실력은 직접적인 원인, 즉 유력능작인이고, 선수들의 체력관리를 위한 써비스, 혹은 상대방의 실력, 그날의 컨디션 등은 간접적인 원인, 즉 무력능작인이 된다.
일체 유위법은 오로지 그 자신을 제외한 그 밖의 일체법에 대해 능작인이 된다고 하는 말은 직접으로 결과를 낳게 하는 유력능작인과 결과를 낳는데 장애하지 않는 무력능작인 두 가지 모두에 대한 설명이라는 뜻이고, 이는 증상연(增上緣)과 동일한 개념이다.---→육인(六因), 증상연(增上緣) 참조.
*능전(能詮)과 소전(所詮)---여기서 ‘전(詮)’이란 경전의 문구를 설명하고 해석한다는 뜻이니, 경전의 뜻과 이치를 능히 풀이해 드러낼 수 있다고 해서 능전(能詮)이라고 부른다. 이에 비해서 해석돼 드러내어지는 뜻과 이치를 소전(所詮)이라고 부른다.
즉, 문자가 뜻을 발생하는 것을 능전(能詮)이라 하고, 문자에 의해 나타나는 뜻을 소전(所詮)이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주관 ․ 객관’이라 하지 않고, 능(能-주된 것)과 소(所-객인 것)라는 말을 많이 쓴다. 모든 경전에서는 법(法)과 의(義)를 통해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는데, 법은 언설로 표현되는 것이라면 의는 언설의 표현을 통해 전달하는 근본 뜻이다. 따라서 법이 없이는 뜻이 드러나지 않고, 뜻이 없는 법은 단순한 음향에 불과하다. 여기에서 법(法)은 가르침 내지 진리를 설명하는 주체이므로 능전(能詮)이라 하고, 의(義)는 법을 통해서 드러나는 객체라서 소전(所詮)이라 한다.
<화엄경>을 예로 든다면, <화엄경> 원 제목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인데, 경 자체는 능전(能詮)이고, 경에 담긴 내용인 대방광불화엄을 소전(所詮)이라 한다. 즉, <화엄경>에서 능은 <화엄경>이고, 소는 법계이며 진리다.
그러니 소전(所詮)은 설명된 것. 경문(經文)을 통해 나타내는 문구 속의 뜻을 이른다. 가르칠 전(詮)자를 써서 능전은 능히 가르친다, 능히 말한다, 능히 표현한다는 뜻이다. 능전의 상대는 소전(所詮)인데 이것은 가르쳐질 것, 설명되어질 것이고, 법계 즉 진리를 말한다.
교리(敎理)상으로는 능전(能詮)은 교화(敎化)의 주체이고, 소전(所詮)은 교화의 대상이다. 그리고 문법적으로는 명사 그 자체를 능전의 명(名)이라 하며, 명사가 가리키는 존재(법)을 소전의 법(法)이라 한다.
중(中)은 소전(所詮)의 이(理), 즉 불교의 근본원리를 표방한 것이고, 논(論)은 능전(能詮)의 교(敎), 즉 그 근본원리를 부연 설명하는 것이다.
※능전(能詮)---이치나 의미를 나타낸 글귀 혹은 문장을 말한다.
※소전(所詮)---글귀나 문장으로 나타낸 이치 혹은 의미. 경문(經文)을 통해 나타내는 문구 속의 뜻을 이른다. 따져서 알아낸 바, 설명되는 쪽, 문(文)에 의해서 드러나게 된 의미를 말한다.
*능지(能持)ㆍ능차(能遮)---총지(總持, 산스크리트어 dharani)와 같은 말이다. 짧은 말 속에 모든 의미가 다 담겨있다는 다라니(陀羅尼)를 의역해서 총지 혹은 능지(能持)ㆍ능차(能遮)라고도 한다. 다라니는 신비한 힘을 가진 주문이라는 뜻인데, 한역해서 능지ㆍ능차ㆍ총지라고 한 것은, 다라니가 곧 마음인데, 이 마음엔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는 뜻이다. 지옥이나 극락도 마음에 들어있고, 불성, 여래장도 마음에 들어있으며, 그 외에 온갖 선악도 다 마음에 깃들어있어서 능지ㆍ능차ㆍ총지라고 고 하는 것이다.---→총지(總持, 산스크리트어 dharani) 참조.
*능행자(能行者)---6조 혜능(慧能) 선사의 다른 이름. 5조 홍인(弘忍, 601~675)의 문하에서 행자로 수행했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한다.총지(總持, 산스크리트어 dharani)
*니간타 나따뿟따(Nigantha Nataputta)---불교도들이 부르는 자이나교의 개조 이름이다. 니간타(Nigantha)는 속박을 벗어난 자라는 뜻이고, 나따뿟따(Nataputta)는 나따(Nata)족 출신 사람이라는 뜻이다.
본명은 왓타마나(Vatthamana, Vardhamina, 增長, 번영하는 자)이지만 자이나교도들은 그가 크게 깨쳤다 해서 마하위라(Mahavira, 大雄, 위대한 영웅) 혹은 지나(Jina, 勝者, 수행을 완성한 자)로 존칭했다. 그의 가르침과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을 자이나(Jaina)라고 부르므로 자이나교라 한다. 그는 붓다와 같은 시대 왓지(Vajji)의 베살리(Vesali) 부근에서 왕족 아들로 태어났다. 32세에 출가해 사문이 돼 12년간 고행한 끝에 마침내 완전지(完全智)를 얻었다고 하며, 그 후 30여 년간 교화활동을 하다가 72세에 입멸했다.
자이나교는 불교와 거의 같은 시대에 개창돼 니간타는 부처님에 대해 항상 열등의식을 가지고 경쟁적인 입장을 취했던 인물이다. 니간타는 산자야(Sanjaya)의 회의론을 극복하기 위해 상대주의(相對主義)적 인식론(認識論)을 수립하고 여기에 입각해서 이원적(二元的) 우주론을 제시했다. 즉, 자이나교의 중심사상은 이원론적 체계로서, 고대 애니미즘을 계승한 이 사상은 세계를 생명체와 비생명체의 두 범주로 이루어진 것으로 봤다. 불교에서는 추상적인 개념으로 보는 업(業, karma)을 자이나교에서는 물질적인 실체로 간주해 이것이 생명체에 개입해 윤회에 얽매이게 한다고 여겼다. 따라서 업의 개입을 막기 위해서 참회와 고행이 필요하고 이를 통해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즉, 자이나교에서는 영혼(Jiva, 命)은 물질(Pudgala)의 업(業)에 속박돼서 현실과 같은 비참한 상태에 빠졌다고 파악했다. 그러므로 순결한 영혼인 지바를 끈적끈적한 물질로부터 해방시켜야 하는데 그 방법을 고행이라고 봤다. 그래서 자이나교에서는 극심한 고행이 행해졌다. 심지어 고행을 하다가 죽게 되면 성자로까지 추앙받았다고 한다.
이들의 종교생활은 불살생(不殺生), 불도(不盜), 불음(不淫)과 같은 철저한 계율을 지키는 한편 철저한 무소유(無所有)의 삶을 실천했다. 그들은 살생을 엄격히 금했기 때문에 농사마저 짓지 않았다. 농사를 짓다보면 작은 곤충들을 죽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들은 주로 상업에 종사했다. 실제로 이들로 인해서 인도의 상업이 발달했다는 학설도 있다. 이들은 무소유를 철저히 실천하다 보니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알몸으로 고행을 하기도 했는데, 그래서 이들을 나형외도(裸形外道)라고 불렀다. 후대에 와서는 흰옷을 입어도 된다는 백의파가 나타나기도 했다.
*니까야(Nikaya, 尼柯耶)와 북방 아가마(Agama=아함경/阿含經)와의 관계---최초의 공식적인 성문불전은 마우리아 왕조 아소카왕 때 이루어진 제3차 불전결집에서의 일이다. 따라서 그때까지 약 200여년은 구전기간이었다.
이 구전기간동안 부처님 가르침에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교리 상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 남아있는 자료가 없으므로 알 수가 없다. 다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부처님의 생생한 모습과 가르침은 기억의 한계와 논사들 개인적 관심과 기호에 따라 많은 변질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아소카왕 때 성문화가 이루어지고, 각부파마다 경전의 기초적인 성문화가 진행됐으나 20여개 부파가 치열한 논쟁을 벌임으로써 거기서도 많은 변질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각 부파들은 자신들이 전승해온 교법을 기초로 경전을 만들어 나갔다. 그래서 각 부파마다 경전이 있었으며 부파별, 특징에 따라 경전내용에 차이가 있었다.
세친(世親)과 논쟁을 벌인 중현(衆賢, 상가바드라/Samghabhadra)은 “각 부파에서 전승한 교법에 따라 서로 다른 경을 부정하게 되면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그만큼 각 부파, 특히 상좌부와 대중부의 대립은 부처님 법에 대한 입장 역시 크게 달랐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렇게 각 부파별로 경전이 있어 그 종류가 많았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남아있는 것은 상좌부계통 남전 <니까야>와 설일체유부의 북전 <아가마>만이 전해지고 있다.
이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현존하는 초기경전(4아함과 5니카야)과 율장(여섯 부파의 廣律)은 각각의 부파에 의해 찬집(纂集, 편찬 결집) 전승된 것으로, ‘아함(āgama)’과 ‘니카야(nīkāya)’라는 말 자체가 ‘전승돼 온 것’, ‘부파 혹은 부파에 의해 결집된 성전’이라는 뜻이다. 즉, 부파불교시대 조성된 것이란 말이다.
그리고 성전 결집의 기준은, <대반열반경>에서 설한 이른바, ‘4대교법(mahā apadesa)’이었다. 즉, “어떤 비구가 어떤 법문(경․율․교법)을,
① 불타로부터 직접들은 것이라고 말할 경우,
② 대다수 박식한 장로들로 구성된 승가로부터 직접들은 것이라고 말할 경우,
③ 경과 율과 논모(論母, 주석)를 지닌 다수의 비구로부터,
④ 혹은 그러한 한 명의 비구로부터 직접들은 것이라고 말할 경우, 그의 말을 잘 듣고 단어와 문장을 잘 파악한 다음 경에 포함되어 있는지 율(vinaya, 調伏)을 드러내는지를 검토하여, 만약 그렇지 않다면 비불설로 판단하여 버려야 하고, 그러하다면 불설로 취해야 한다.”
그런데 <니까야>의 경우, 인도 대륙에서 떨어진 섬나라 스리랑카에 전해져, 인도의 정치적 변화에 의한 영향을 비교적 받지 않아 고스란히 전승될 수 있었고, <아가마>는 북인도에서 번성한 쿠샨왕조에서 편찬 보존되다가 북방 및 중국으로 전래돼 오늘날 동아시아에서 <아함경>으로 자리 잡아 온전히 전승되고 있다. 그 외 나머지 경전들은 인도의 정치적 격변기에 이슬람세력의 침입과 힌두교에 흡수돼 불교가 소멸함으로써 사라졌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경은 BC 3세기 아소카왕의 제3차 불전결집 때 상좌부가 주도해 공식적으로 만들어 남방에 전한 <니까야>와 AD 2세기 카니시카왕의 제4차 불전결집 때 설일체유부 중심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아가마(아함경)> 뿐이다.
상좌부계통 분별설부(分別說部)가 스리랑카에 전한 <니까야>는 오늘날 남방경전으로서 근본경전인 <빠알리어 삼장(빠알리어 대장경)> 안의 경(經) 부분을 뜻한다. 빠알리어로 적힌 <니까야(Nikaya)>는 ‘5 니까야’로 구성돼 있다. 그리고 북방경전이라 할 산스크리트어 경전인 <아가마(agama)>는 중국에 전해져서 <아함경(阿含經)>이라 하며, ‘4 아함(阿含)’으로 구성돼 있다.
그런데 엄격히 구분하자면, 아가마(Agama, 阿含)와 니까야(Nikaya, 部)는 차이가 있다. 니까야는 상좌부에서 전승한 것이고, 아가마는 유부를 비롯한 다른 부파에서 전승한 것이다. 당시 부파 간에 불설ㆍ비불설 논쟁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아가마와 니까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남방경전 속의 쿳다까 니까야(Khuddaka Nikaya, 小部)는 북방경전인 <아함경>에는 빠져있다. 그리고 <니까야>와 <아함경> 모두 그 하나하나가 하나의 경(1經)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많은 경(經)으로 집성돼 있다. <니까야>나 <아함경) 각 경전 하나에 다시 많은 경이 실려 있다는 말이다.
— 빠알리어 <5부 니까야>와 북방 한역 <4 아함(阿含)>의 비교 —
① 디가 니까야(Digha Nikaya - 장아함(長部阿含) - 길이가 긴 경을 모은 것.
② 맛지마 니까야(Majjhima Nikaya - 중부아함(中部阿含) - 중간 정도 길이의 경을 모은 것.
③ 상윳따 니까야(Samyutta Nikaya - 상응부아함(相應部阿含) - 주제가 분명한 경들을 주제별로 모은 것. 잡아함(雜阿含)이라고도 한다.
④ 앙굿따라 니까야(Anguttara Nikaya - 증지부아함(增支部阿含) -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이라고도 하는데, 부처님이 남기신 가르침 중 주제의 법수가 분명한 말씀을 숫자별로 모아 결집한 경으로 하나부터 열하나까지 모두 11가지 모음으로 분류했다.
⑤ 쿳다까 니까야(Khuddaka Nikaya, 小部) - 위 분류에 들어가지 않는 나머지 짧은 경들을 모은 것으로, <쿳다까 니까야> 안에는 법구경, 자설경, 본생경, 수타니파타(경집/經集), 장로게(長老偈) 등 15개의 중요한 소경이 들어있다. 이 쿳다까 니까야(소부)가 한역 <아함경>에는 없다. 그리고 상윳따 니까야(상응부)와 북방경전의 잡아함(雜阿含) 사이에도 다소 차이가 있어서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빠알리어 경전이라는 것은 결국 18-20여개의 부파불교 중의 하나였던 상좌부의 전승에 불과한 것이다. <청정도론>도 상좌부라는 부파의 논서일 뿐이다. 각 부파는 각자의 전승경전이 별도로 있었고 그리고 논서도 방대한 량이 각 부파가 개발해 있었다.
그리하여 인도에서는 부파불교가 모두다 소멸을 했으나 스리랑카 섬으로 전래된 상좌부의 전통이 그나마 오늘날까지 살아있어서 현재 니까야 경전을 붓다의 원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청정도론>도 일개 상좌부라는 부파불교의 논서에 불과할 뿐이다. 오히려 철학적 사상적인 측면에서는 인도에 있던 부파들이 남겨놓은 방대한 논서가 월등하다고 볼 수 있다.
니까야든 아함경이든 경전이란 것도 결국 기록물인데, 후대의 우리들은 경전의 글자에 국한해서 맹목적으로 그것만 신봉할 것이 아니라 경전의 숨은 내용이나 행간을 잘 파악하고 공부해야 일개 부파의 불교를 넘어선 불교 전체를 볼 수 있을 것이다.---→아함경(阿含經), 잡아함(雜阿含) 참조.
*‘니까야(Pāli Nikāya)’의 절대성---오늘날 남방불교를 공부하는 일부 인사들은 남방불교만이 정통이고, 그 외의 것은 모두 잘못 변질된 불교로 매도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의 한국불교를 마치 사교(邪敎) 집단의 하나로 몰아가는 극단적인 모습조차 보이고 있다. 물론 한국불교에 많은 문제점이 있음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1600년 한국불교역사를 송두리째 부정하고, 심지어 원효 대사까지도 길을 잘못 든 인사로 폄하하고 있으니, 이런 편협한 시각에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에 대한 다른 시각도 있음을 인지해야 하겠다.
「남방의 테라와다(Theravāda) 불교도들이 사용하고 있는 빠알리 니까야(Pāli Nikāya)가 불설(佛說)을 비교적 잘 보전하고 있다는 것은 공히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빠알리어가 바로 고타마 붓다께서 사용했던 언어고, 그러니 오직 빠알리 니까야만이 정전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 점은 율장 <소품(Cullavagga)>에 전하는 기사를 보면 자명해질 것이다.
바라문 출신 형제 비구들(Yamelu & Tekula)이 붓다께 다가가 예를 올리고 말했다.
“우리는 지금 출신 지역, 가문, 카스트가 다른 사람들이 출가해 모여 살고 있습니다. 이들이 각각 자기네 방언을 씀으로써 붓다의 가르침을 훼손하고 있습니다. 붓다의 말씀을 베다 언어(chando)로 바꿔 놓으면 어떻겠습니까?”
이에 붓다께서 심히 꾸짖어 나무라셨다.
“이 어리석은 자들아,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내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나 아직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미 내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조차 등을 돌리고 말 것이다.” 이렇게 꾸짖고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붓다의 가르침을 베다 언어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 누구라도 그리하면 ‘dukkaṭa(突吉羅, 惡作)’를 범한 것이다. 각기 자신의 방언으로(sakāya niruttiyā) 붓다의 가르침을 익힐 것을 허락하노라!” [Cullavagga II-33.]
이 기사를 단순히 고타마 붓다의 베다 언어(산스크리트)에 대한 반감으로 해석하거나, 빠알리 니까야의 정통성을 입증하는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너무 단편적이다. 앞뒤 정황과 문맥을 살펴보면 오히려 붓다의 가르침을 어떤 특정 언어로 고착시켜 정전(正典)으로 삼는 것을 경계하신 것이라고 봐야 한다.
오늘에 전하는 불전은 여러 방언으로 암송되던 가르침이 몇 차례의 결집을 통해 승가의 대다수가 사용하던 언어로 정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여기서 챙겨야 할 것은 ‘가르치는 사람이 아닌, 배우는 사람의 언어’를 사용하게 한다는 고타마 붓다의 열린 사고와 실천이다. 나아가 번역의 당위를 주장할 수 있는 전거(典據)가 된다.
세상만사 변하게 마련이다(aniccā sabbe saṅkhārā). 불교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무상과 연기의 원리야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 작동하고 있다 해도 우리가 수용하고 실천하는 불교가 고타마 붓다의 본래 메시지의 깊이와 무게에서 동일한 것이라고 장담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빠알리 경전 역시 이 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겠고, 전혀 다른 문화 배경과 고유의 문자와 언어 전통을 가진 옛 중국인들이 받아들인 불교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 외래 사상을 수용하는 고대 중국인들이 상당부분 도가(道家)와 유가(儒家)의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사정과 함께 문화민족으로서의 자존감도 함께 작용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한역 경전이나 중국인들의 수행이 불교의 정체성을 훼손했다고는 할 수 없다. 중국 대륙에서 벌어진 다수의 교종(敎宗)과 율종(律宗)의 부단한 활동은 그 내용에 있어 무상, 무아, 공, 연기의 바른 이해와 거기에 따르는 개인적 사회적 적용과 실천에 관한 집단 지성의 고뇌이자 결실인 것이다. 또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고 변화한 것이 선종(禪宗)이다. 이것이 오직 불교 내부의 일로 그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불가와 도가, 유가가 영향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키우고 때로는 깎아 다듬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중국 선종은 정교하고 치밀한 교학과 도덕적 바탕에서 제 고유의 모습과 색깔을 가지고 부화한 자유분방한 나비요, 중국 불교의 꽃인 셈이다.
불교는 발상지인 인도에서 이미 여러 부파의 발생과 성쇠를 거쳤고, 인도 밖으로 퍼져나가면서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다. 처음부터 불교는 중도임을 표방하고 나섰지만 늘 중심을 곧게 유지했던 것은 아니다. 긴 불교 역사에서 중대한 전환점의 핵으로 기억하는 용수, 무착, 세친, 보리달마, 혜능 등 옛 스승들의 업적은 다름 아닌 고타마 붓다의 연기, 중도의 정신, 현실 세계로의 복귀였다. 어느 한쪽으로 심하게 치우쳤을 때, 대사회적 유연성을 잃고 굳어 갈 때, 혹은 전통이라는 장애물에 걸려 흐르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을 때, 둑을 뚫고 새물을 끌어들인 것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분들이 끌어들인 새물은 이미 거기 있었던 우물, 고타마 붓다의 연기, 중도에서 퍼 올린 것이다. 가장 오래된 샘에서 새물을 길어 냈다는 것은 역설적이기도 하다. 우리가 파야 할 우물도 바로 그 자리다.
그러므로 특정 전적(典籍)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나머지를 폄하하는 흐름은 학문적이라기보다는 세속적 편 가르기로 보이기도 한다. 한역경전과 빠알리어, 범어(梵語, Sanskrit) 경전을 비교하면서 읽은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역과 인도 원전의 상호 보완성을 절감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역 가운데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인도어 원전을 통해 쉽게 풀리기도 하고, 역으로 인도 원전의 모호한 부분이 한역을 통해서 분명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역 전적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연구와 인도 전적 중심의 연구 성과 역시 배척과 질시가 아닌 상호 존중과 보완의 자세가 필요하다. 한 예로 초기경전의 눈으로 후기 경전을 점검하고, 대승경전의 입장에서 초기경전을 재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각 개인, 지역사회, 한 나라, 나아가 전 세계 인류가 마주하고 있는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는 연기(緣起)의 세계관이다. 몸소 앞서서 그것을 보이고 퍼뜨려야 할 사회적 의무를 자진해서 짊어진 승가는 연기의 바른 이해와 실천, 곧 지혜와 자비의 두 날개로 날아가는 나비다. 그것이 바로 승가의 굳건한 뼈대요 따뜻한 피인 것이다.」 - 재연 스님
*니다나카타(Nidanakatha, 인연담/因緣談)---빠알리어로 된 초기 붓다 전기인데, 5세기경 붓다고사(Buddhagosa)가 정리했다고 하며, 빠알리어 문헌 중에서 가장 체계적인 붓다 전기라 평가된다.
니다나카타(인연담)는 <자타카(Jataka, 본생경)>의 주석서인 <자타카 앗타카타(Jataka-attakatha)>의 일부인데, 초기경전 여기저기에 산만하게 흩어져 있던 단편적인 붓다에 관한 전기를 시기별로 붓다 일생을 일관되게 정리했다고 하는 점에서 최초의 불타전(佛陀傳)이라 할 수 있다. ‘먼 인연담’, ‘멀지 않은 인연담’, ‘가까운 인연담’의 3부로 이루어져 있다. 제1부는 연등불로서 천상계에서 수행하고 있던 시대, 제2부는 도솔천에서 하생해서 탄생과 성도까지, 제3부는 기원정사(祇園精舍)의 건립까지의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니뎃사---→닛데사(Niddesa, 義釋) 참조.
*나렌드라 자다브(Narendra Jadhav, 1953년~)---인도 불가촉천민 출신으로, 1953년에 태어난 나렌드라 자다브는 인도 뭄바이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를, 미국 인디애나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했다. 여러 국제무대에서 인도를 대표하는 그는 인도중앙은행 수석 경제보좌관으로 근무했고 국제통화기금과 에티오피아, 아프가니스탄의 중앙은행 자문관 등 국제기구에서 많은 활약을 했다. 또 대중 연설가 및 사회 활동가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현재 인도 최상위 랭킹 대학인 푸네 대학의 총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에 <인도의 금융 경제학>, <암베드카르 박사> 등이 있으며, 특히 <신도 버린 사람들(Untouchables)>은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 소개되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지금도 그는 많은 저술활동을 통해 신불교운동을 지원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 다무는 달리트 운동을 일으킨 빔라오 람지 암베르카르 박사에게 영향을 받아 자식 교육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자신이 받은 천대를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 암베르카르 박사가 달리트들에게 ‘교육하고, 단합하고, 궐기하라’고 한 가르침을 따랐다. 그리고 힌두교도로 죽지 않겠다는 암베르카르 박사를 따라 자신도 가족도 모두 불교로 개종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평등사상이 이들에게 새로운 삶의 의미를 주었던 것이다.
따라서 나렌드라 자다브는 이러한 신분적인 한계를 뛰어넘은 사람이다. 태어난 신분을 절대 바꿀 수 없는 인도의 절대적 신분제도를 무너뜨리면서 전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인도의 살아 있는 영웅이다.
*니련선하(尼連禪河)---니련하(尼連河)라고도 한다. 나이란자나(Nairañjanā, 네란자나강)강을 음역해 니련선하라 한다. 중인도 마가다국 가야성 동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강 이름으로, 항하(恒河, 간지스강)의 한 지류이다. 석가모니가 출가 후 6년 동안 고행한 뒤, 니련선하 강물에서 목욕을 하시고 우루벨라 촌장 딸 수자타(Sujata)가 바친 영양이 풍부한 우유죽(유미죽/乳米粥) 한 그릇을 공양 받고 기운을 차려서 니련하강가 보리수 아래 앉아서 정각을 얻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마지막에도 니련하 부근 사라(Salā, 沙羅) 쌍수(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다. 현재 파트나(Patna) 지역의 팔구(Phalgu)강을 말한다.
*니밋따(빠알리어 nimita)---니밋따란 어떤 물체나 호흡현상을 지속적으로 응시한 결과 마음에 나타나는 그 물체나 현상의 모양을 말한다. 예를 들면, 적색이나 청색의 원반을 계속 응시하고 있은 후, 그 물체를 더 이상 보고 있지 않아도 그것의 모양과 색이 마음속에 선명하게 나타나는데 이것을 심상(心象), 즉 니밋따라고 한다.
호흡관 수행에서 호흡 자체는 기체라서 그 색과 모양을 육안으로 불 수 없다. 그러나 호흡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어느 한 지점을 정하고 호흡을 계속 관찰하고 있으면 호흡이 미세하고 깊어지면서 그 곳에서 호흡의 상(象)이 나타난다고 했다.
<청정도론>의 호흡관 수행에서는 니밋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별빛처럼, 마니주처럼, 진주처럼 나타나고,
어떤 사람에게는 거친 촉감을 가진 목화씨처럼, 거친 촉감을 가진 자료로 만든 못처럼 나타나고,
어떤 사람에게는 긴 허리끈처럼, 화환처럼, 한 모금의 연기처럼 나타나고,
어떤 사람에게는 퍼진 거미줄처럼, 구름의 장막처럼, 연꽃처럼, 수레바퀴처럼, 일륜처럼, 월륜처럼 나타난다.
이처럼 니밋따가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호흡에 대한) 인식(想, sanna)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니밋따는 이 인식에서 생겼고, 인식이 그 근원이고 원천이라고 했다.
그러면 니밋따는 어디서 오고, 무엇이 니밋따를 나타나게 하는가?
미얀마의 사야도 책에서 말하기를, 니밋따는 집중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심장토대에 의존해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마음상태는 호흡을 불러일으키며, 이 호흡으로부터 실제의 아나빠나 니밋따(anapana-nimitta)가 나온다. 모든 마음상태가 다 니밋따를 생성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집중된 마음만이 니밋따를 나타나게 한다고 했다.
상(相, sañña)의 여러 개념들 중에 하나가 니밋따이다. 니밋따는 형상, 겉모습이란 뜻이다. 어떤 대상을 만났을 때, 자기가 겪은 과거로부터의 많은 경험, 기억의 총합에 의해 그 대상으로부터 생겨난 ― 얻은 인상(표상, 영상, 전체적인 첫 인상)을 말한다. 중생의 경험이란 오염된 경험들이기에 오염된 눈에 나타난 인상이라는 말이다. 즉, 니밋따(相)는 감각기관으로 대상을 감각할 때, “탐ㆍ진ㆍ치에 오염된 마음에 비친 ― 나타나는 모습”이라고 하겠다.
<금강경>에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 -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라고 했는데, 여기서 상(相)이 니밋따에 해당한다.
그리고 무상삼매(無相三昧) 할 때의 무상(無相)은 'animitta'이다. ‘nimitta'에 부정접두어 ’a'를 붙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무상(無相)을 ‘니밋따가 없다’ ― ‘어떤 대상도 없다’는 뜻이 아니다. 무상삼매에서의 무상(無相)은 ‘탐ㆍ진ㆍ치가 없는 마음 ―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마음에 나타난 대상을 말한다.---→상(相, 빠알리어 산냐/sañña, 산스크리트어 samjna) 참조.
*니야야(산스크리트어 Nyaya)학파---니야야(尼夜耶)로 소리 번역한다. 고대 인도 육파철학의 하나로서, 논리학(因明, Hetu-vidyā)을 연구한 정리파(正理派)를 말한다. 산스크리트어 Nyaya는 원래 이론(理論)ㆍ정리(正理)를 뜻하는 말인데, 후대에 내려와서 논리학적 연구 일반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됐다. 그리하여 인도논리학은 니아야학파와 불교에 의해 체계화됐다고 볼 수 있다. 이 학파를 창시한 사람은 공교롭게도 부처님과 성이 같은 가우타마(고타마/Gautama)로서 생몰연대가 확실치 않아서 BC 1~2세기, 혹은 AD 1~2세경 사람이라 한다. 이 학파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괴로움의 원인은 그릇된 인식에 있으므로 그릇된 인식을 제거하고 계율을 지키고 요가수행을 하면 해탈에 이른다고 했다.
그리고 올바른 인식에 이르는 추론의 방법으로 오지작법(五支作法) ― 오분작법(五分作法)라고도 함 ― 을 내세웠다. 이들의 주된 목적은 합리적인 이론과 현상의 분석을 통해 진리를 탐구하는 데에 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인식방법으로 직접지각, 추론, 유비(類比, 비슷한 사물과 비교해 판단하는 것), 성언(聖言, 베다에 쓰여 있는 성스러운 말이 진리의 기준이라는 것)의 네 가지를 내세웠으며, 추론(추리 판단)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3단 논법과 비슷한 오지작법(五支作法)을 만들어 낸 것인데, 종(宗)ㆍ인(因)ㆍ유(喩)ㆍ합(合)ㆍ결(結)의 다섯 부분으로 된 논식의 예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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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宗) - 주장 - 말은 무상하다.
인(因) - 이유 - 지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유(喩) - 비유 - 예를 들면, 병(甁)과 같다.
합(합) - 적용 - 병과 같이, 말도 지어낸 것이다.
결(結) - 결론 - 그러므로 말은 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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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宗) - 주장 - 나는 학생이다.
인(因) - 이유 - 공부를 하기 때문이다ㅣ.
유(喩) - 비유 - 공부하는 사람은 학생이다. 예를 들면, 수능을 대비하는 수험생과 같이.
합(合) - 적용 - 나는 공부한다.
결(結) - 결론 - 그러므로 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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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 주장 - 산에 불이 났다.
인(因) - 이유 - 왜냐하면 연기가 나기 때문이다.
유(喩) - 실례 - 마치 아궁이에 불을 때면 연기가 나듯이.
합(合) - 적용 - 이처럼 산에서 연기가 난다.
결(結) - 결론 - 그러므로 산에 불이 난 것이다.
----------------------------------- 이 논식에서 종(宗)은 주장ㆍ명제ㆍ판단 등을 말하고, 인(因)은 이유, 유(喩)는 구체적인 예(例), 합(合)은 유(喩)를 기반으로 해서 종(宗)과 인(因)을 결합한 것, 결(結)은 종(宗)을 되풀이한 결론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3단 논법은 대 전제를 먼저 제시하지만 니야야학파는 결론을 먼저 제시하는 연역추론을 했다. 그런데 5지작법은 연역추리와 귀납추리를 둘 다 포함하고 있다. 종(宗)ㆍ인(因)은 귀납이고, 유(喩)ㆍ합(合)ㆍ결(結)은 연역추리인 셈이다.
인도인들도 참다운 삶에 대해 논리적으로 의미를 파악하고 증명하려고 노력했다. 이것이 바로 Nyaya 철학이다. AD 2∼3세기에 니야야학파의 기초가 마련되고, 논리학에 관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를 집대성시켜나갔으며, 특히 진보적인 지식과 논리를 구사하는 불교도들과 많은 논쟁을 했다. 그리고 그것을 채용한 불교논리학과 니야야학파의 끊임없는 논쟁 결과 인도 논리학이 발달했다. 그리하여 대승불교의 미륵(彌勒)ㆍ무착(無着)ㆍ세친(世親) 등도 이 논리학을 사용했는데, 이때의 논리학을 인명(因明, Hetu-vidyā)이라 했다. 여기서 인(因, hetu)이란 논증의 형식에서 결론을 이끌어내는 원인을 뜻하며, 명(明)은 학문이란 뜻으로서, 인명이란 이유나 근거[因]를 해명한다, 인(因)을 밝힌다[明]는 뜻을 가지고 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논리학을 인(因)을 밝히는 학문이라는 뜻으로 인명이라 했으며, 인명을 불교에사 받아들여 파사현정(破邪顯正)하는데 활용했다.
인도철학의 각 학파들은 자신들 교리를 널리 인식시키기 위해 자신들의 인식론을 발전시켰던 것으로 보이는데, 고대인도 논리학은 형식 논리학인 서양 논리학에 비해서 실질적인 내용을 가지며, 실생활에서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 특히 그 추론식에서 그 특징이 잘 드러난다.
이와 같이 고대인도 논리학은 추리논리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5세기에 등장한 진나(陳那, Dignaga)는 종(宗)ㆍ인(因)ㆍ유(喩)의 세부분으로 된 삼지작법(三支作法)을 완성했다. 그리하여 진나(陳那)가 등장하기 이전 논리학을 고인명(古因明), 진나 이후에 완성된 논리학을 신인명(新因明)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종(宗)과 결(結)은 똑같은 명제이고, 서양 논리학의 결론에 해당한다. 그리고 인(因)은 소 전제, 유(喩)는 대 전제에 해당한다.---→인명(因明, 산스크리트어 hetu-vidya), 진나(陳那, 디그나가/Dignāga) 오지작법(五支作法), 삼지비량(三支比量), 불교와 정반합(正反合), 삼량(三量), 정리철학(正理哲學, 니야야/Nyaya 철학) 참조.
*니치렌(日蓮)---일본 카마쿠라시대(12C말~14C초)의 고승으로 불교개혁의 지도자, 일련종(日蓮宗)의 시조이다. 12세에 천태종을 배우고 16세에 출가했다. 일본 천태종의 성산 교토의 히에이산(比叡山, 848.3m), 나라, 와가야마의 고야산(高野山) 등에서 11년간 수행하고 나서 <법화경>이야말로 최고의 경전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1253년 ‘나무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를 외치고 <법화경> 신앙인 일련종을 창시했다. 1260년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을 저술했다. 그는 이 책에서 몽골의 침입을 예언했으며, <법화경>만이 말세의 국가에 평안을 가져올 수 있다고 했으며, 정토교 등 다른 종교를 강하게 비난했기 때문에 두 번이나 유배를 당했다. 한번은 막부에서 다른 종교를 비판한 죄로 니치렌을 잡아들여 참수하려고 했으나, 강한 광선이 나타나서 사형 집행인의 눈에 반사돼 쓰러지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처형은 중단되고 니치렌은 ‘사도’라는 섬으로 유배당했다.
그는 범부가 <법화경>의 제목인 ‘나무묘호렌게쿄’를 제창하면 나무묘호렌게쿄의 일곱 자에 포함돼 있는 석존의 공덕을 자연히 물려받게 된다고 주장했다.
근대에 들어서 니치렌의 종교가 다시 주목받게 되고, 일본에서 국가주의 부흥의 기운 속에서 정치적 역할을 했다. 또한 근대에 있어서 니치렌의 사상이 많은 신흥종교에게 사상적 소재를 제공한 것도 간과할 수 없다. 창가학회(創価學會) 등의 여러 교단에서 니치렌을 조사(祖師)로 받들고 있다. 일본 정계에서도 창가학회는 자신들을 기반으로 한 독자적인 종교정당인 공명당을 창당하는 등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으며, 외국에의 전교 사업이 활발한 편이다.
한 가지 염려스러운 것은 창가학회(創価學會) 계통의 일련종(日蓮宗)은 벨기에, 프랑스, 독일 등에서는 정부에서 '사이비종교'로 지정하고 있는데, 오히려 한국에서는 일본 천리교(天理敎)와 함께 이 땅에 뿌리내리며 점점 퍼져가고 있다. 2013년 100만 명이 넘는 신자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불교를 기반으로 한 신흥종교다가 보니 기존의 불교교세가 강한 영남권에서 교세가 강한 것으로 추측된다. 매주 한 번씩 화광신문(和光新聞)이란 기관지와 월마다 법련이란 책을 발행하고 있다. 원만치 못한 한일관계를 고려할 때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다.
*닛데사(Niddesa, 의석/義釋)---쿳다까니까야/Khuddaka Nikāya, 소부/小部)에는 법구경(法句經), 본생경(本生經), 여시어경(如是於經), 숫타니파타(경집/經集), 닛데사(Niddesa;義釋) 등 15개의 경문이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닛데사이다.
닛데사는 수타니파타(Sutta Nipata) 제1장의 ‘외뿔소의 뿔’과 마지막 두 편인 제4장 ‘여덟 장’과 제5장 ‘피안으로 가는 길의 장’에 대한 완벽한 주석서이다. 사리풋타(sāriputta)의 작품으로 생각되는 이 경은 빠알리어 삼장의 니까야(經) 가운데 유일하게, 그리고 가장 초기, 부처님 당시의 주석서인 논장 형태를 띠고 있다.
이 경은 대의석(Mahaniddesa)과 소의석(Culaniddesa)으로 나뉘어진다. 그리고 닛데사는 우빠세나(Upasena)의 Saddharmmapajjotika라는 자체의 주석서가 있는데, 거기에 사리풋타의 작품이라 돼있다. ※의석(義釋, niddesa)---옳은 해석이라는 뜻임.
• 대의석(大義釋) - 마하 닛데싸(Maha Nidessa) - 수타니파타(經集)의 의품(義品)에 관한 주석서.
• 소의석(小義釋) - 쭐라 닛데싸(Cula Nidessa) - 수타니파타(경집)의 피안도품(彼岸道品)과 서각경(犀角經)에 관한 주석서.
다음은 대의석(大義釋)의 내용에 관한 해설이다.
과거와 미래에 대해 집착하지 말라는 것은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렵다. 현재의 삶에 충실하라고 하니까 현재의 바깥 경계[外境]에 집착하라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현재의 외경을 인식 경험하고 있는 경우에도, 그것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경전에서는 경고하고 있다. 특히 <대의석(大義釋)>에서는 이에 대해 명쾌하게 해석하고 있다.
“눈으로 색을 보아도 탐할 것을 탐하지 않으며, 성낼 것을 성내지 않으며, 혼미한 데에 속지 않으며, 노여워할 것에 노여워하지 않으며, 더럽힐 것을 더럽히지 않으며, 교만히 할 것에 교만하지 않는다. 귀로 소리를 들어도, 코로 냄새를 맡아도, 혀로 맛을 느껴도, 몸으로 부딪치는 것에 닿아도, 의식으로 법을 인식해도 탐할 것을 탐하지 않으며, 성낼 것에 성내지 않으며, 혼미한 데에 속지 않으며, 노여워할 것에 노여워하지 않으며, 더럽힐 것을 더럽히지 않으며, 교만히 할 것에 교만하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보이는 대로 하고, 들리는 것은 들리는 대로 하고, 깨달아지는 것은 깨달아지는 대로 하며, 인식되는 것은 인식되는 대로 해, 보이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들리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깨달아지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인식되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보이는 것에 얽매이지 않고, 의존하지 않고, 속박되지 않고, 그것에서부터 벗어나고 풀려나 무애자재(無碍自在)의 마음을 가지고 산다. 들리는 것, 깨달아지는 것, 인식되는 것에 얽매이지 않고, 의존하지 않고, 속박되지 않고, 그것에서부터 벗어나고 풀려나 무애자재의 마음을 가지고 산다.“
이러한 경지가 곧 깨달음을 이룬 선사(禪師)들의 삶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불교도들의 이상이기도 하다. 따라서 불교의 초심자는 우선 과거와 미래의 일로 자신을 괴롭히지 말고, 현재의 삶에 충실하라고 권하는 바이다.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열심히 생활하되,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모든 집착과 번뇌로부터 자유로울 때 비로소 대자유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불교도들이 바라는 이상이다. 현재의 삶에 충실하라, 그러면 생사에도 걸림이 없을 것이다. - 마성스님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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