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산 <불교 용어 해설, ㄱ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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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실도인(空室道人, ?~1124)---중국 송나라 때 임제종 양기파의 효영 중온(曉塋仲溫) 스님이 1155년경 지은 <나호야록(羅湖野綠)>에 나오는 비구니 이름이다.
공실도인은 명문 범(范)씨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부귀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고요히 참선하는 것을 즐겼다. 젊은 날, 하루는 소양 운암사의 황룡 사심(黃龍死心, 1044~1115) 선사를 찾아뵈었는데, 한마디 말끝에 요체를 깨닫고 게송을 지어 사심 선사를 찬탄했다.
“소양의 사심 선사 신령한 근원 매우 깊어
귀로는 색을 보고 눈으로 소리 듣는다.
범인은 명철하고 성인은 혼매하며 뒤로는 부귀하나 앞으로 가난하여
중생에 이익 되고 만물을 제도하니 쇠를 녹여 황금을 만드는데
단청의 겉모양은 옛 것도, 지금 것도 아니로다.”
이에 사심 선사가 그녀에게 물었다.
“‘죽은 마음(死心)’은 참이 아닌데 어디에다 찬양하는가.
죽은 마음을 찬양한다면, 죽은 마음이란 형상이 없다.
허공을 찬양한다면, 허공은 자취가 없다.
형상과 자취가 없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만일 말을 할 수 있다면 친히 사심(死心)을 보리라.”
이에 공실도인이 응대했다.
“죽은 마음은 참이 아니요, 참은 죽은 마음이 아닙니다.
허공이란 형상이 없고 묘유(妙有)는 형체가 없습니다.
기절했다가 다시 소생하면 친히 사심을 볼 수 있겠지요.”
이에 선사는 미소를 지었다. 선문답의 차원이 매우 높다.
영원(靈源惟淸:?∼1115) 선사가 그녀에게 공실도인(空室道人)이라는 법호를 지어주었는데, 이때부터 그녀의 이름이 알려지게 됐다.
그녀가 금릉에서 살 때(1111~1117년), 원오(圓悟克勤, 1063~1135) 선사는 장산사의 주지로 있었고 불안(佛眼淸遠, 1067~1120) 선사도 그곳에 있었다. 거기서 기연이 맞아 두 선사가 칭찬했지만, 그녀는 마치 말을 못하는 사람 같았다. 도(道)의 운치는 매우 담담했으나 바른 견해를 드러낼 때는 치밀하고 엄격했다.
그녀의 게송 중에 <법계관(法界觀)>을 읽고 쓴 구절이 있다.
“사물과 나는 원래 둘이 아니니 삼라만상이 거울에 비친 상처럼 똑 같구나.
밝고 밝아 주체와 상대를 초월하고 분명하고 분명해 진공(眞空)을 깨쳤네. 한 몸에 많은 법을 지님은 제석천의 법 그물에 얽힌 듯한데,
겹겹이 쌓인 끝없는 뜻은 움직임과 고요함에 모두 통하는구나.”
또한 그녀는 보령사에서 목욕탕을 마련하고 문 위에 글을 지어 붙였다.
“한 물건도 없는데 무엇을 씻는단 말인가.
티끌 하나라도 있다면 그것은 어디서 생겨났을까.
오묘한 이 하나를 말해내야 모두가 목욕할 수 있으리라.
옛 신령스런 이는 등을 문지를 줄만 아는데,
보살은 언제 마음 밝힌 적 있었던고.
‘때 묻지 않은 곳(離垢地)’을 깨닫고자 하면 온몸에서 흠뻑 땀을 빼야 하리라. 물은 때물과 때를 한꺼번에 없앤다 해도 여기에 이르러 또 한 번 씻어야 하리라.”
뒷날 고소산 서축원(西竺院)에서 삭발을 하고 비구니가 돼 승려 생활에 전념했으며, 1124년 가부좌한 채 좌탈입망(坐脫立亡)했다.
효영 스님은 그녀를 이렇게 평했다.
“공실도인은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부귀에 얽매이지 않았고, 미련 없이 월상녀(月上女: 유마거사의 딸)를 뒤따라 ‘위없는 깨달음(無上菩提)’으로 달려 나갔다. 또한 비구니로서 철마(鐵磨 : 위산 선사와 선문답했던 유철마 비구니) 스님과 쌍벽을 이루었다.
*공심(空心)---자기고집에 집착하지 않는 텅 빈 마음. 아무런 욕심도 없고, 사량 계교 번뇌 망상도 없이 순수하고 청정한 본래마음을 말한다. 물 흐르고 바람 불듯 자연과 하나 된 마음이다. 이와 같이 공심은 천지자연의 운행과 같다. 공심은 조급하게 서두르기보다 그저 노력한 만큼, 정성들인 만큼 자연스럽게 되는 마음이다.
부처님께서는 일체가 모두 공하다[一切皆空]고 말씀하셨다. 지ㆍ수ㆍ화ㆍ풍 사대(四大), 색ㆍ수ㆍ상ㆍ행ㆍ식 오온(五蘊)이 모두 공하고, 만법이 모두 공하다. 우리의 육체 또한 공하고, 각 사람 사람이 모두 공하므로, 현재 이 자리의 모든 것이 공하다. 그리고 우리 마음이 바로 그러한 자리에 있을 때, 산하대지 일체가 모두 공심이고, 이것이 바로 부처님 마음이다.
따라서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반야 지혜로써 살아가고 바라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우리의 육체와 온 우주 또한 그와 같이 관찰해 고정된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하며, 이것이 바로 공심(空心)이고 불심(佛心)이다.
*공안(公案)---공안은 공부안독(公府案牘)의 약칭으로서, 공안(公案)의 사전적 의미는 관청에서 사용하는 문서라는 뜻이며, 공정해서 범치 못할 법령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법과 사회적 규범이 명확하게 자리 잡지 않았던 고대에는 관청의 문서 자체가 공정한 법령이어서 이에 따라 시비를 판단하는 표준규범이며 법이었다. 그런 관공서의 문서를 가리키는 말이 공안이다.
이것이 선가(禪家)에 받아들여져서 선가에서 사용하는 특유의 용어로서 참선 수행자가 궁구하는 문제를 말하게 됐다. 즉, 선종에서 조사(祖師)가 깨달은 기연(機緣)이나 학인을 인도하던 사실을 기록해 후세에 공부하는 규범이 되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공문서란 뜻에서 유래된 이 공안은 참선수행에 있어서도 절대적인 규범성과 판단의 준칙이 되는 핵심적인 명제를 의미하게 됐다.
선(禪)을 시작하는 제자들의 정진을 돕기 위해 스승이 과제로 제기하는 파격적인 선문답(禪問答)으로서 간결하고도 역설적인 문구나 물음인데, 주로 우주와 인생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이다. 한국불교의 참선수행도 공안참구를 통해서 이루어질 정도로 공안은 선의 핵심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이 공안을 화두(話頭)라고도 한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화두와 공안은 약간 다르다. 화두는 공안보다 좀 더 간결하고 핵심적이다. 즉, 공안은 선문답 전체를 가리키지만 화두는 그 가운데 핵심이 되는 한 구(句)를 뜻한다.
결국 공안은 간화선(看話禪) 또는 공안선(公案禪)의 수행에서 화두(話頭)로 사용하는, 뛰어난 선(禪) 수행자의 깨달음이나 인연 또는 언행으로서,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참선하는 수행자에게 해결해야 할 과제로 제기되는 부처나 조사의 파격적인 언행(言行)으로서, 큰 의심을 일으키게 하는 부처나 조사의 역설적인 말이나 문답을 말한다.
공안에는 고칙공안(古則公案)과 현성공안(現成公案)이 있다. 공안을 일명 고칙(古則)이라고 하지만 고칙공안은 고래로부터 전해 오는 지난날의 옛 조사 선사들이 남긴 공안을 말하며, 현성공안은 현재 생성돼 있는 것은 모두 움직일 수 없는 진리라는 입장에서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모두 공안으로 보는 것이다. 모든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곧 진리 그 자체이므로 그것을 참선하는 수행자에게 제시된 과제로 한 것을 말한다. 꼭 ‘무(無)’자나 ‘이 뭣고’만이 화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바른 마음에서 보면 우주만유가 다 화두라는 것이다.---→화두(話頭), ‘공안(公案)과 화두(話頭)의 차이’, 현성공안(現成公案) 참조.
*공안(公案)과 화두(話頭)의 차이---간화선에 있어서 그 핵심인 공안(公案)과 화두(話頭)를 두고 그동안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이 둘은 엄격히 다르다. 본래 공안이란 관공서의 문서를 가리켜 부르는 말로서, 위반해서는 안 되는 공정한 법령을 말했으며, 그 법령에 따라 시비를 판단하는 표준이 됐다. 이후 이러한 공안의 의미가 선종에 채용돼 깨달음의 정도를 판정하는 규범의 뜻으로 쓰였다. 공안은 중국에서 선종이 성립된 이후에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특히 <전등록(傳燈錄)>에 수록된 1,700 공안은 이후로 선종의 가풍을 주도하는 핵심이 되기도 했다.
공안은 당대에 옛 선사들이 제자들을 일깨우기 위해 흔히 사용했던 선문답(禪問答)이라는 점에서 과거의 사건 사례에 불과하지만, 화두는 공안 가운데 핵심이 되는 언구(言句)를 참구(參究)하는 것으로 비록 공안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현재 시점에서 나에게 적용되는 공부법인 것이다. 즉, 공안집(公案集)에 수록된 공안들은 과거사건으로 나의 삶과는 무관하게 ‘저기에 놓인 것’이지만 화두는 내게 직접적으로 대답을 요청하는 절박한 실존적 과제이다.
화두(話頭)란 참선수행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참구(參究)함에 있어서 스승이 제자에게 제시되는 문제(주제)를 일컫는다. 즉, 수행하는 과정에서 본질에 대한 의구심을 이끌어내기 위한 질문이나 핵심주제이다. 그리하여 화두를 통해 ― 화두를 들고 수행자가 큰 의심을 일으키고[참구(參究)], 스스로 그 의심삼매에 들어 무심의 경계에 든 후, 홀연히 무엇을 보거나, 혹은 무엇을 듣는 찰나에 화두를 타파(打破-깨달음)하게 되는데, 그런 수행법을 간화선(看話禪)이라 한다.
간화선을 확립시킨 중국 남송(南宋) 시대 대혜 종고(大慧宗杲, 1089~1163) 선사는 “화두에서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지, 공안에서 의심을 일으키는 것은 삿된 마귀다.”라고 할 정도로 화두와 공안을 엄격히 구별하고 있다.
여기서 다시한번 화두와 공안(公案)의 개념을 간단히 정리해보자. 예를 들어 조주(趙州779-897)의 무자(無字)에서 “어떤 스님이 조주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이에 조주가 답했다. 없다.”라는 대화가 있다.
위에서 어떤 스님이 묻고 조주가 대답한 대화 전체는 공안이고, 이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대답인 ‘없다[無]’는 화두이다. 그래서 화두는 질문이든 대답이든 공안에 포함된 핵심 어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상에서는 공안과 화두를 혼용하지만 엄격한 의미에서는 화두를 의미한다.---→화두(話頭) 참조.
*공안집(公案集)---공안을 모은 저서를 말하며, 유명한 공안집으로는 중국 측에는 <벽암록(碧巖錄)>, <종용록(從容錄)>, <무문관(無門關)> 등이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편찬된 것으로는 <선문염송(禪門拈頌)>이 있다. 선문염송은 고려시대 수선사(修禪社-지금의 송광사)의 제2조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 1178~1234) 선사가 1226년(고종 13년)에 편찬 간행한 선문공안집(禪門公案集)이다.
*공양(供養, 산스크리트어 pujana)---공양은 보통 음식ㆍ의복 등을 삼보(三寶)에게 공급해 자양(資養)한다는 뜻을 지닌다. 불공(佛供)을 ‘붓다 뿌자(Buddha-puja)’라 한다. 부처님에게 올리는 공양을 말한다. 마성 스님의 글에 따르면 공양이 다음과 같이 정리 된다. 공양이란,
첫째, 불(佛)·법(法)·승(僧) 삼보에 음식·옷·꽃·향 등을 바치는 것이다.
둘째, 공경함, 찬탄함, 칭송함, 예배함이란 뜻이다.
셋째, 봉사함을 말한다.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도 포함된다.
넷째, 절에서 음식을 먹는 일 등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절에서 음식을 먹는 것을 공양이라 한다. 그런 공양개념을 빼면 세 가지이다.
첫 번 째 의미는 삼보에 음식·옷·꽃·향 등을 바치는 것이다. 이는 남방 테라바다 불교와 의미가 다르다. 한국불교에서는 육법공양이라 해 향·등·차·과일·꽃·쌀 이렇게 여섯 가지를 부처님 전에 올리는 것을 말하지만, 남방 테라바다 전통에서는 단지 향과 꽃을 올릴 뿐이다. 특히 꽃의 경우 핀 꽃을 꺾어서 올리는 것이 아니라 땅에 떨어진 꽃을 주어서 바치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일까 스리랑카의 불상 앞을 보면 매우 소박하다.
공양의 두 번째 의미는 공경함, 찬탄함, 칭송함, 예배함의 뜻이다. 테라바다 불교의 경우 오로지 부처님 한분만을 믿기 때문에 불공의 의미는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공경과 찬탄, 칭송, 예배가 될 수밖에 있다.
그리고 세 번 째 공양의 의미는 봉사이다. 이는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세 가지가 진정한 공양이라 볼 수 있다. 이는 다름 아닌 불 ․ 법 ․ 승 삼보에 대한 공양이다. 이런 공양에는 기대하고 바라는 기도가 있을 수 없다.
공양은 불 ‧ 법 ‧ 승 삼보나 사자(死者)의 영혼에게 공물을 바치는 일로서, 원래는 주로 신체적 행위를 말해 왔는데, 나중에는 정신적, 물질적인 것까지를 포함하게 됐다. 즉, 독경과 예불을 함으로써 숭경(崇敬)의 뜻을 나타내는 공경공양의 정신적 태도 외에 시주(施主)하는 것까지 포함하게 됐다.
불교경전에 나오는 공양은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① 이종공양(二種供養) ― 향화ㆍ음식 등 재물(財物)을 공양하는 이(利)공양과 교설(敎說)과 같이 수행해 중생에 이익을 주는 법(法)공양.
② 삼종공양 ― 향화ㆍ음식을 바치는 이공양, 찬탄 공경하는 경(敬)공양, 불법을 받아서 수행하는 행(行)공양.
③ 사사공양(四事供養) ― 음식ㆍ의복ㆍ와구(臥具)ㆍ탕약공양.
④ 오공양(五供養) ― 등(燈), 다(茶), 화(花), 병(騈:떡), 과(果)를 차례로 부처님 전에 올린다. 이는 밀교의 공양방식으로서, 이와 관련해서 오공양작법무(五供養作法舞)라 해서 나비춤 형태의 춤사위가 펼쳐지기도 한다. 즉, 오공양(五供養)은 몸으로 다섯 가지를 부처님께 공양하는 춤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춤 혹은 불교 무용을 작법(作法)이라고 하며, 불교의식(영산재, 수륙재 등)에 등장하는 행사 중에 하나이다. 이때 사용되는 음악을 범패(梵唄)라고 한다. 이러한 불교 무용(작법)에는 나비춤, 바라춤, 법고춤이 있다. 바라춤은 양손에 큰 바라를 들고 추는 춤이고, 법고춤은 양손에 방망이를 들고 법고를 치면서 하는 작법이다. 그 외에 육종공양, 십종공양 등도 있다.
*공양구(供養具)---공양구는 불ㆍ보살전에 공양의식을 행할 때 사용하는 법구(法具)와 스님에게 올리는 반승(飯僧) 행사에 이르기까지, 널리 쓰이는 매우 중요한 불교용품으로서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한 공양구로는 촛대, 향로, 다기, 화병(꽃병), 정병(물병), 발우 등이 있다.
*공양주(供養主)---공사(供司) 혹은 반두(飯頭)라고도 한다. 원래는 절에서 음식을 짓는 소임을 맡은 행자나 스님을 지칭하는 말이었으나 지금은 식사를 준비하는 여자신도를 가리키는 말로 보편화돼 있다.
또 공양주는 삼보에 재물을 시주하는 불자 또는 시주하기를 권하거나 공양을 받는 이를 이르기도 한다. 그러다가보니 "공양한다"란 용어도 음식을 드는 것으로 쓰이고 있으나 이렇게 쓰이게 된 어원이 음식 준비하는 공양주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이다.
*공업(共業)---부파불교시대 <구사론>에서부터 공업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개인적으로 받는 업을 별업(別業)이라 하고, 집단으로 받아내는 업을 공업(共業)이라 한다. 즉, 사회구성원들이 함께 짓는 업을 공업이라 하는데, 사회분위기라든가 어떤 집단의 독특한 문화유형이나 그 집단의 통념 등이 이에 해당한다. 예컨대, 이민자 집단을 차별하고 괴롭힌다든지, 외국인 노동자를 혹사하는 인종차별 따위가 대표적 공업이다. 그리고 사주팔자는 별업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헌데 같은 사주를 가진 자라도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사람과 부유한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은 공업이 다르기 때문에 비록 사주가 같다 하더라도 성취의 정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대개 같은 지역 같은 시기에 태어나면 공업에 휘말리기 쉽다. 우리 민족이 겪은 6ㆍ25 세대가 그렇다.
또 별업의 대표적인 것으로 자업자득(自業自得)이란 말이 있다. 자기가 저지른 과보가 자기에게 돌아간다는 말이다. 헌데 장마 때 한강에 흙탕물이 내려가고, 온갖 쓰레기가 쓸려 내려간다고 할 때, 이것은 어느 개인이 저질은 것이 아니라 사회공동의 책임, 곧 공업이다.
공업에 관한 것이 <화엄경> 여래출현품에도 나온다. “이런 것이 모두 중생들의 공업과 보살들의 선근으로 일으키는 것인데, 그 가운데서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저마다 마땅한 대로 받아쓰게 된다.” 여기서 ‘이런 것’이란 삼천대천세계가 한량없는 인연과 한량없는 사실로 이루어진 것을 말한다. 그리고 공업에 대해 법정 스님은 ‘공동으로 선악의 행위를 하고, 공동으로 고락의 과보를 받는 것’이라고 했다.
*공업(功業)---공업이란 어떤 목표를 설정하고 그를 향해 꾸준히 한 발 한 발 다가가서 의미 있는 결과를 이룩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공업을 이루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목표를 설정하고 그를 향해 꾸준히 한 발 한 발 다가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업(功業)이란 몸이 수고를 하지 않으면 결코 이뤄지지 않는다.
큰 공업(功業)을 이루려면 기본이 30년이다. 반평생이 걸린다. 그렇게 할 것 같으면 각자 나름대로 반드시 공업을 달성하는 법이니 이를 운이 좋으니 나쁘니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옛 어른들이 공업(功業)은 착실 절묘하다고 설파했다. 노력과 정성에 비례한다는 말이다.
공(功)이 높음은 뜻 때문이요, 업(業)이 넓음은 부지런함 때문이니, 공력을 들임이 없는 공(無功之功)은 과실을 얻기 힘들지마는 공력을 들이는 공(有功之功)은 덧없지 않아서 훌륭한 공업으로 결실을 맺게 된다.
공업(功業)의 용례를 보자, 전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왕(王)’이란 칭호가 자신의 공업(功業)을 나타내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왕’은 자신에게 정복된 지배자들이었으므로, 그런 왕을 정복한 자신은 왕과 구별되는 특별한 칭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진시황은 자신의 칭호를 ‘황제(皇帝)’라 하고, 자신이 첫 황제라 해서 시황제(始皇帝)라 했던 것이다.
*공왕(空王)---부처님의 다른 명호. 부처님 법(法)을 공법(空法)이라 하고, 불타를 공왕(空王)이라 하는데, 모든 잘못된 집착을 여의고, 열반에 들어가는 요문(要門)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공용(功用)---불교 용어에는 유달리 ‘공(功)’자가 들어간 말이 많다. 공덕(功德), 공능(功能), 공용(功用), 공효(功效) … 그런데 이들 공(功)자가 들어간 말들이 많지만 대개 그 뜻이나 쓰임이 명확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으나 ‘공용’만은 의미와 쓰임이 다양해서 잘 살펴봐야 한다.
공용(功用)이란 말의 쓰임은 일반적으로 기능, 효능, 용도, 작용, 효험, 공덕, 애써 노력함, 공 들인 보람, 의식적인 노력 등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인다.
따라서 공용(功用)이란 공부의 작용을 말한다. 수행승이 힘써 경전을 공부하고 기도를 하고 참선을 하는 일들을 공용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공용은 인식주관의 작용, 분별하고 차별하는 의식작용, 분별과 망상을 일으키는 마음 작용으로서,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 즉, 신(身)ㆍ구(口)ㆍ의(意) 3업(三業)의 작용을 말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공용(功用) 또는 공용행(功用行)은 모든 동작과 말 그리고 생각 등으로 짓는 것을 더욱 노력해 행한다는 뜻도 있다. 정행(正行)에 대한 준비수행으로서, 이렇게 해 얻어지는 것을 가행득(加行得)이라 한다.
그래서 선가(禪家)에서는 수행에 노력하는 것, 혹은 수행한 효과를 말한다. 수행으로 마음의 힘을 얻으면 반드시 현실적으로 공용의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다음에 불교에서 ‘공용(功用)’이란 말이 쓰이는 용례를 보자.
• 수도하는 사람은 이런 말(글) 저런 말(글)을 듣고 사량분별로써 이리 저리 맞추고 따져서 알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공용(功用)이 없어야 한다. 화두가 적적(寂寂)한 중에 성성(惺惺)하고 성성한 중에 적적해서 성성불매(惺惺不昧)로, 가거나 오거나 앉으나 누우나 한결같고, 오매(寤寐)에도 한결같아서 이렇게 일주일만 연속되면 홀연히 화두가 타파되는 동시에 문득 자기의 본래면목을 깨닫게 된다.
• 적정(寂靜)은 마음(6식 또는 8식)에 번뇌가 없고, 몸에 괴로움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리하여 무공용(無功用) - 공용(功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즉 힘써 노력함[功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언제나 사(捨-평등함)의 상태에 머무르게 된다.
• 공용(功用) 또는 공용행(功用行)은 의식적인 노력을 뜻한다. 유식유가행파의 수행론에 따르면, 보살이 공관(空觀)을 닦음에 있어서 초지(初地)에서 제7지(地)까지는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공관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이유로 제7지까지를 유공용지(有功用地) 또는 간단히 공용(功用)이라 한다. 반면, 제8지(地)부터는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공관(空觀)이 이루어지며, 이러한 이유로 제8지 이상을 무공용지(無功用地) 또는 간단히 무공용(無功用)이라 한다.
• <화엄경> ‘현수품[賢首品)’은 문수보살의 요청으로 현수보살이 장장 357개의 게송을 통해 믿음에 대한 공덕을 찬탄하는 품이다. 이 품은 본문 없이 전부 게송으로 돼 있어서 더욱 신심이 솟아나는 아름다운 품이다.
3보를 믿는 방법,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믿음의 공덕과 처음 발심할 때의 공덕, 이어서 갖가지 광명과 삼매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법을 설하고 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면서 드는 생각 하나는 하루 속히 내 희망이 저절로, 인연 따라 이루어지길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는 생각에 맥이 풀리기도 한다. 이처럼 열심히 노력해서 이루어지는 우리들 인생을 공용(功用)이라 한다면, 무엇을 하든 저절로 잘 이루어지는 멋진 삶을 무공용(無功用)이라 부른다. 중생은 공용이고 불보살은 무공용이다.
무공용의 물 흐르듯 저절로 이루어지는 부처님의 일들도 예전에 공용의 수행을 많이 했기 때문에 공덕이 돼 무공용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공용의 마음이 불자의 기본자세인 셈이다. 공용(功用)은 유위법(有爲法)이고, 무공용(無功用)은 분별이나 사량심이나 조작이나 작위나 유위심이 없다는 말이다. 사량계교나 인위적인 조작을 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진리의 작용을 말한다.
• <화엄경> ‘현수품(賢首品)’에 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혹 어떤 찰토(刹土-國土)에 부처님이 안 계시거든 거기에 정각(正覺)을 이루어 나타내 보이며, 혹 어떤 국토에 법을 알지 못하거든 거기서는 묘한 법을 연설하시니라. 분별도 없고 공용(功用)도 없어 ‘한 생각’ 동안에 시방에 두루 하되 달빛 그림자 두루 하지 않음이 없음과 같이 한량없는 방편으로 중생을 교화하나니라.”
• 공능(功能), 공용(功用), 공덕(功德)의 비교
ㆍ공능(功能) ; 공(功)의 힘, 보람, 공용(功用)과 능력(能力)이란 뜻으로, 공을 들인 보람을 나타내는 능력, 또는 결과를 일으킬만한 법의 힘 또는 능력을 말한다.
ㆍ공용(功用) ; 공들임, 하는 일, 수행한 효과, 작용 등을 말하는데, 신ㆍ구ㆍ의(身口意)로 짓는 모든 동작과 말과 생각 등을 말한다.
ㆍ공덕(功德) ; 쌓은 덕, 좋은 덕, 복덕을 말한다.---→공능(功能, 산스크리트어 samartha) 참조
*공(空)의 종류---크게는 18공(十八空)까지 나누어진다. 18공은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 제3권 및 <대집경(大集經)> 제54권에 나오는 말이다.
내용은 1) 내공(內空), 2) 외공(外空), 3) 내외공(內外空), 4) 공공(空空), 5) 대공(大空), 6) 제일의공(第一義空), 7) 유위공(有爲空), 8) 무위공(無爲空), 9) 필경공(畢竟空), 10) 무시공(無始空), 11) 산공(散空), 12) 성공(性空), 13) 자상공(自相空), 14) 제법공(諸法空), 15) 불가득공(不可得空), 16) 무법공(無法空), 17) 유법공(有法空), 18)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 등으로 나눈다.
*공이불공(空而不空)---<휴휴암좌선문〉에 나오는 말로서,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으나 가득 차서 없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진리는 텅 비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으나, 공적영지(空寂靈知)의 광명과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조화에 따라 무궁무진한 조화가 나타나 천차만별의 현실세계가 전개되는 것이다. 유이비유(有而非有)와 상대되는 말이다.
*공작명왕(孔雀明王, 산스크리트어 Mahamayun-vidyarajni)---밀교의 독특한 명왕 중 하나이다. ‘명(明)’은 진언, 다라니를 가리키고, 명왕(明王)은 주문(呪文)을 관할하는 왕자(王者)로서 지혜의 작용에 의해 중생을 구제하는 방편불(方便佛)이다. 명왕은 교화하거나 구제하기 어려운 중생을 깨우치기 위해 여래나 보살이 무서운 형상으로 변신해 나타난 화신이다.
명왕은 밀교가 성립하면서 등장했고, 5세기경 공작명왕이 최초로 등장했다. 공작명왕은 독초나 해충, 독사를 잡아먹는 공작을 신격화한 것으로 모든 중생의 정신적인 번뇌를 제거해 안락함을 주는 명왕이다. 원래 명왕은 분노형으로 표현하지만 공작명왕 형상은 분노형이 아니고 자비로운 보살형으로 공작을 타고 있다.---→명왕(明王) 참조.
*공작명왕경(孔雀明王經, Mahanayuri-Vidyarajni)---<불모대금요공작명왕경(佛母大金耀孔雀明王經)>의 약칭으로 밀교경전인데, 당나라시대에 인도 출신 승려 불공금강(不空金剛)이 한역했다. 경전에는 뱀에 대한 공작의 적개심이 담겨 있다. 예로부터 전래돼 온 <자타카(Jataka, 本生譚)>에는 금색공작의 호신주(護身呪)가 독사를 비롯한 갖가지 재앙을 제거하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에 밀교적인 요소가 더해져 완성된 것이 <공작명왕경>이다.
※호신주(護身呪)---빠알리어로 ‘빠릿따(paritta)’라 한다. 호신주를 외면 자신의 안녕을 지켜 주고 모든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줄 뿐만 아니라 사고와 불행으로부터 자신을 구제해 줄 수 있는 신성한 문구(주문)이다.
공작새가 공작명왕으로 불교에 등장하는데 아열대 지방인 인도엔 독사가 많으므로 독사 잡아먹는 공작새가 모토다. 불모대공작명왕보살이라고도 한다. 기원이 오랜 밀교인 잡밀(雜密)에서 말하는 불존(佛尊)이다. 명왕이지만 분노형은 아니다. 공작명왕 대다라니를 수지독송하면 독사 맹독이나 재앙, 질병을 쫓아버릴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얘기가 전한다. 한 스님이 나무를 하다 뱀에게 엄지발가락을 물려 고통 받고 있을 때 부처님이 ‘불모공작명왕대다라니’ 설법을 했다고 한다. 다라니가 독은 물론 모든 병을 낫게 했단다. 한국불교 대표 밀교종단 진각종은 매년 부처님오신날 제등행렬에 불 뿜는 공작 등으로 장식한다.
*공적(空寂)---공공적적(空空寂寂)의 준말.---→공공적적(空空寂寂) 참조.
*공적영지(空寂靈知)---불교적 진리를 표현하는 말로서, 진공묘유(眞空妙有)와 함께 불교진리의 본질적 속성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텅 비우고 알아차릴 때 지혜가 드러난다. 텅 비움은 공적(空寂)이요 알아차림은 영지(靈知)라고 할 수 있다. 신령스런 알아차림 그것을 곧 영지라고 표현하고, 텅 비우고 알아차리는 것은 곧 지혜요 전지전능(全知全能)이다. 마음이 고요해지면 밝게 알게 된다 -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공적(空寂)’은 텅 비어서 고요한 상태를 묘사한 말인데, 적적(寂寂)ㆍ적정(寂靜)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리고 ‘영지(靈知)’는 문자 그대로 신령스러운 지혜광명을 표현한 말이다. 따라서 공적영지(空寂靈知)란 텅 비고 고요해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 밝고 신령스럽게 나타나는 지혜의 작용을 말한다. 이는 진리의 본체를 설명하는 말이다. 그리하여 <육조단경>에서는 정혜일치(定慧一體)라고 정리했다. 고요함은 정(定)이고 신령스럽게 아는 앎은 혜(慧)이다.
그런데 교학(敎學)에서 말하는 공적영지(空寂靈知)를 선종(禪宗)에서는 성성적적(惺惺寂寂)이라고 하고, 원효 대사는 성자신해(性自神解-성품이 스스로 신비롭게 풀리다)라 했으며, <단경>에서는 정혜일체(定慧一體) 또는 무념(無念)이라고 했다. 그리고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知訥, 1158∼1210)은 그의 저서 <수심결(修心訣)>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법은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으므로 번뇌 망상도 본래 고요하고 티끌세상도 본래 비었다. 모든 법이 다 비어 고요한 곳[空寂]에서는 신령스러운 앎[靈知]이 어둡지 않다. 그러므로 텅 비어 고요하고 신령스럽게 아는 마음이 바로 그대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며, 또한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의 조사들과 천하의 선지식이 은밀히 서로 전수한 법인(法印)이다. 이 마음만 깨달으면 참으로 단계를 밟지 않고 바로 부처의 경지에 올라 걸음걸음이 삼계를 뛰어넘고 본집에 돌아가 단박 의심을 끊는다. 그리하여 인간과 천상의 스승이 되고……”
모든 법이 다 공한 곳은 모든 개별적 사물이나 개체의식의 경계가 사라진 곳을 뜻한다. 모든 개체의 경계를 넘어선 무한과 공이 그것이다. 불교는 이 공이 추상적인 빈 공간이어서, 순수 질료와 같은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신령한 앎인 영지(靈知)가 빛나고 있다는 것, 그 점에서 마음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공(空)은 영지(靈知)의 마음이다.
이처럼 무한의 공이 ‘스스로를 신령스럽게 아는 것’을 원효는 ‘성자신해(性自神解)’라고 하고, 지눌은 ‘공적영지(空寂靈知)’라고 했다. 그러니 공적영지가 온전치 못하면 불안이 싹트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공적(空寂)과 영지(靈知)에, 어느 쪽 하나라도 결하면 온전하다 할 수 없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새들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지저귄다. 망울 튼 버들가지는 싱그럽고 시냇물은 졸졸졸 소리를 내면서 흘러간다. 농부는 밭을 갈고 아낙네들은 봄나물을 뜯고 있다.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이런 광경을 순수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빈 마음으로 보라는 말이다. 물이 있으면 물을 보고 꽃이 있으면 꽃을 본다는 것. 이게 바로 공적영지(空寂靈知)이다. 텅 비어 고요하되 신령스러운 앎의 이 자리가 본심(本心)의 자리인 참 마음, 본래면목(本來面目)이다.
*공종(空宗)---→상종(相宗)ㆍ공종(空宗)ㆍ성종(性宗) 참조.
*공중무색(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반야심경(般若心經)>에 나오는 말이다. 그런데 원래 ‘공중무색(空中無色)’ 앞에 공불이색(空不異色)과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는 말이 있었다. 공불이색(空不異色)은 공과 색이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그리고 공즉시색(空卽是色)에서 즉(卽)은 똑같다는 뜻이 아니고, 분리할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공과 색을 분리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공이 곧 색의 실상, 본래 모습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 와서는 공중무색(空中無色)이라 해서 공은 실체가 없는 텅 빈 것이라고 해서, 공불이색(空不異色)과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는 말을 부정하는 것이다. 앞의 논리와 맞지 않는다. 왜 앞의 논리를 부정해버리는 것일까?
<반야심경(般若心經)>은 공사상(空思想)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이는 경전이다. 그리하여 <반야심경> 서두에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라 해서 오온이 모두 공하다고 했다. 즉, 오온(五蘊)인 색ㆍ수ㆍ상ㆍ행ㆍ식(色受想行識)이 모두 공하다는 말이다.
오온도 공하고, 색도 공하다. 다 공하니 공불이색(空不異色)이요,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공즉시색이란 공이 곧 색의 실상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공과 색이 다르지 않다. 공과 색이 같다는 말이다. 다 공하다는 말이다.
‘공중(空中)’ ― 공(空) 가운데라는 말은 공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은 어떤 실체가 없이 텅 빈 것이다.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공(空)이 아니다. 그러므로 공(空) 그 자체엔 실체라고 여길 만한 것이 그 무엇도 없다. 따라서 공(空) 그 자체에는 색도 없고 수ㆍ상ㆍ행ㆍ식도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왜 이걸 따지느냐 하면, 공에도 뭐가 있는 줄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고정관념을 박살내기 위해 공 가운데는 그 무엇도 없다는 걸 줄줄이 길게 설명하는 것이다.
불교에는 진리를 나타내는 방법에 두 가지가 있다. 진리의 가르침에 대해서 하나하나 자세하게 설명을 해줘서 진리에 좀 더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긍정적인 방법이 있고, 다른 방법은 공이라고 하는 부정(否定)을 통해서 진리가 스스로 드러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 있다. 바로 후자의 방법이 대승의 공사상이다.
따라서 우리는 불교 가르침의 방편(方便)을 이해 할 수 있어야 한다. 불교에서 방편이라 함은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쓰는 묘한 임시수단’이다. 진실한 교법(敎法)을 설명하기 위해 끌어들이는 가설(假說)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방편적 가설에는 반드시 의중(意中)이 있으므로 그것을 꿰뚫어 봐야한다.
‘공즉시색’이라 해서 공이 색을 떠나 있지 않다 ― 공은 색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했지만, 공은 속성상 색을 본질로 가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즉, 색(rupa, 물질계) 그 자체를 분석해보면, 색이 공의 논리에 기초하고 있는 만큼, ‘공중무색’이라는 말이다. 공 가운데는 물질적 존재인 색(色)의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색이 아주 없다는 말이 아니라 색은 인연 따라 일어나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말한다. 모든 법이 공(空)하므로 공한 가운데 색을 찾으려 하나 찾을 수 없고, 색(色) 뿐만 아니라 수ㆍ상ㆍ행ㆍ식(受想行識)이라는 의식작용 역시 없다. 즉, 존재의 본래 모습은 텅 빈 것이어서 색도 없고, 수ㆍ샹ㆍ행ㆍ식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 가운데는 색도 없고, 수ㆍ상ㆍ행ㆍ식도 없지만, 인연이 결합하는 순간 색도 될 수 있고, 수ㆍ상ㆍ행ㆍ식도 될 수 있다.
불가(佛家)에서는 이 우주의 모든 존재를 영원불변의 '실체'로 보는 것이 아니고 일시적 가합에 의한 '현상'으로 바라본다. 즉, 색으로 본다는 말이다.
왜 모든 존재는 실체가 아닌 현상일 수밖에 없는가.
그것은 모든 존재가 연기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연기적 존재란 외부로부터 완전히 그리고 스스로 독립한 존재가 아닌 수많은 외부의 인(因)과 연(緣)에 의해 상호의존(相依性) 돼 있는 존재를 의미한다. 따라서 수많은 인과 연은 서로에게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서로 조건 지워져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 수많은 인과 연 중에서 단 하나라도 영원불변하지 않다면, 그 모두가 영원불변하지 못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럼 모든 존재가 연기적 존재라면 그들의 속성은 반드시 공하다. 즉, 작용(현상)은 있지만 실체는 없다. 공한데, 즉 실체가 없는 현상만이 존재하는 세계에 무슨 생(生)이 있고 멸(滅)이 있으며, 더럽고 깨끗함이 있겠는가. ― 그래서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이라 했다.
그리고 <반야심경>에서 이 문장 이후부터 본격적인 ‘무(無)’의 행렬이 시작된다.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이라 햇다. 즉, 공 가운데 색의 실체는 없으며, 수상행식도 안비설신의도 색성향미촉법도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즉, 눈앞에 보이는 세계, 내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의식의 세계도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반야심경>에서는 이 모두를 ‘없다[無]’고 부정한다. 여기서 부정은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없다 ― 그래서 틀렸다”가 아니라 있다는 것에 머물지 말고 초월하라(뛰어넘어라)는 뜻이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모두 포용하라는 말이다.
즉, 초기불교의 핵심교리를 대승불교 관점에서 모두 부정하고 있지만,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부분은 이러한 부정은 소승불교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대승의 공사상(空思想)이라는 큰 진리 속에 모두를 부정함으로써 그 핵심교리를 새로운 각도에서 계승하고 확대 발전시키고자 한 것이다. 모두 부정한 것은 방편이었고, 그 방편을 통해 진실을 드러내고자 했다.
‘없다’고 하는 무(無)의 나열법으로 불필요한 부분을 모두 제거하고 마지막에 정말 필요한 것만 남기기 위해서이다. 아함부 경전에서 붓다는 진리의 가르침에 대해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했다면, <반야심경>에서는 공이라는 부정을 통해 진리가 스스로 드러날 수 있도록 했다. 진짜 진리는 공(空)뿐이라고 말하고자 한 것이다. 진짜 진리인 공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공중무색(空中無色)’에 담겨있는 두 갈래의 의미를 잘 이해해야한다.
공(空)은 색(色)의 본질이고 색은 공이 인연 따라 그 자리에 특정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와 같이 공의 세계는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이다. 그것은 시간적으로 영원할 뿐 아니라 더럽혀질 수도 늘고 줄 수도 없는 청정무구한 부처님 성품자리이다. 그에 비해 색은 찰나적으로 머물다 갈 것이므로 공의 존재성에 비교하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마치 태양빛 앞에서 반딧불은 빛이라고 할 수 없듯이 말이다. 공은 색을 본질상 떠나 있지만(空中無色), 공이 색을 아주 멀리하는 것도 아니라(空卽是色)는 점을 잘 생각해 본다면, 공과 색은 묘한 관계이다. 즉 ‘진공묘유(眞空妙有)’의 관계인 것이다. ‘비어 있지만 있는 것’, 그 이상의 설명을 불교에서 아직 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언어가 말할 수 있는 한계이기도 하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사고(思考)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리고 본질의 껍데기인 겉모습은 그 순간 그 상황에 가장 맞는 모습을 띠지만, 그것이 본질의 영원한 껍데기(모습)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색(色)은 그때그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공(空)에는 정해진 색이 없고 정해진 모습이 없다[空中無定色]. 예를 들어 컵에 물을 떠 놓았을 때는 물이 그 컵의 모양을 띠지 않으면 안 되지만, 그 컵에 담긴 물의 모양이 그 물의 정해진 모양은 절대 아니다. 그 순간의 상황에 맞는 어떤 모양이라도 다 드러낼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모양이 정해진 모습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 그것이 바로 세상에서 그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가장 값지고 귀한 것이므로, 그렇게 매 순간 열심히 살아가라는 말이다. “세상엔 진리 아닌 것이 없다. 그래서 따로 찾을 진리가 없다.”는 말처럼, 어떤 것은 좋아서 취하고, 어떤 것은 싫어서 버리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분별하지 말고, 바깥의 삶이나 내면의 생각을 내치거나 따지지 말고, 있는 그대로 모두를 포용해서 살아가는 것이 공중무색(空中無色)의 삶이다.
*공즉시색(空卽是色)---<반야심경>에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란 말이 나온다.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라는 말이다.
물질(색)이 알고 보면 공이요, 아무것도 없이 비어 있는 공이 곧 물질(색)이라는 말로서 물질과 비어 있는 공의 세계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뜻이다. 색과 공이 따로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말이다. 색과 공의 관계는 물과 파도의 관계처럼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이고, 하늘은 텅 빈 것 같지만 그 속에는 해와 달과 구름이 있어 이 모두가 한 덩어리로 얽혀 있다. 마찬가지로 공과 색도 한 덩어리란 말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형상 없는 것이 되고(색즉시공), 형상 없는 것은 다시 형상 있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공즉시색)는 말이다. 따라서 색즉시공의 이치를 깨치면 형상 있는 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고, 공즉시색의 이치를 깨치면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지지 않아서 현실세계는 존재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임을 알게 된다. 현실세계가 무질서한 것 같지만 모두가 상의상관 관계 속에 나름대로 질서를 지니고 있기에 이사무애(理事無碍)의 모습이다.
상대적인 현실을 버리고 곧바로 절대적인 공(空)만 쫓으면 환상 속에 빠지기 쉬우므로 현실을 굳건히 한 상태에서 절대적인 진리를 찾으라 ― 단계를 밟아서 차근차근 가라는 말이다. 그래서 절대의 바탕인 공을 깨달으면 상대적인 이 세상이 가(假, 거짓)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런 다음 다시 이 상대적인 세상마저도 공과 분리가 되지 않고 하나라는 것을 아는 것이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진정한 의미이다. 그리하여 색은 공을 통해서 완전함을 얻고, 공은 색을 통해서 아름답게 피어나게 된다.
그리고 공즉시색(空卽是色)은 세상만물이 비어있지만, 즉 절대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래도 상대적으로는 다양한 모양으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절대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래도 모양(색)은 엄연히 존재하며 자아에게는 분명한 현실임을 강조한다. 현실에서 출발해 현실을 바탕으로 사물의 공성 ― 혹은 절대바탕인 공을 깨달으라는 의미로 본다. 일체중생이나 우주 만물이 모두 인연화합으로 생긴 일시적 존재이기는 하나, 인연의 상속(相續)에 의해서 공(空) 자체 그대로가 색(色)으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색물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란 원리가 지금은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즉,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 등가원리가 이를 말하고 있다.---→ ‘불생불멸과 중도(性徹 스님 법문)’,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참조.
*공포경(恐怖經)---초기경전인 <잡아함경 845경>으로 윤회문제에 대해 설하고 있다. 그리고 <공포경>이란 이름은 중생들이 죽음이 두려워 벌벌 떨고 있음에서 유래한 것이다. 다음은 <공포경>의 일부이다.
『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비구로서 다섯 가지 두려움과 원한을 없어지게 하고, 세 가지 일을 결정해 의혹이 생기지 않으며, 성현의 바른 도를 사실 그대로 알고 보면, 그런 거룩한 제자들은 스스로 수기해 “지옥ㆍ축생ㆍ아귀 등 나쁜 세계가 이미 다하고, 수다원(須陀洹)이 돼, 나쁜 세계의 법에 떨어지지 않고, 결정코 바르게 삼보리(三菩提)로 향해, 일곱 번 천상과 인간 세계를 오가며 태어났다가 마침내 괴로움을 완전하게 벗어나리라.”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어떤 것이 다섯 가지 두려움과 원한을 없어지게 하는 것인가?
혹 살생(殺生)을 하면 그 죄의 인연으로 원한과 두려움이 생기지만, 만일 그가 살생을 여의면 저 살생한 죄로 인한 원한과 그 인연으로 생겨난 두려움이 없어지게 된다. 만일 도둑질ㆍ삿된 음행ㆍ거짓말ㆍ술 마신 죄가 있으면 원한과 그 인연으로 두려움이 생기지만, 만일 그가 도둑질ㆍ삿된 음행ㆍ거짓말ㆍ술 마신 죄로 생기는 원한을 여의면, 그 인연으로 생기는 두려움이 없어질 것이다. 이것을 죄로 인한 원한과 그 인연으로 생기는 두려움을 없어지게 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이 세 가지 일을 결정하면 의혹이 생기지 않는 것인가?
부처님에 대해 결정해 의혹을 여의고, 법과 승가에 대해 결정해 의혹을 여의는 것이다. 이것을 세 가지 법을 결정하면 의혹을 여의게 되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어떤 것이 거룩한 도(道)를 사실 그대로 알고 보는 것인가?
이것은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苦聖諦]임을 사실 그대로 알고,
이것은 괴로움의 발생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苦集聖諦]이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이며,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苦滅道聖諦]라고 사실 그대로 아는 것이다. 이것을 거룩한 도를 사실 그대로 알고 보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니라.
만일 이 다섯 가지 죄로 인한 두려움과 원한을 없어지게 하고, 세 가지 법을 결정해 의혹을 여의며, 거룩한 도(道)를 사실 그대로 알고 보면, 이러한 거룩한 제자는 스스로 수기해 “나는 지옥의 고통이 다하고, 축생ㆍ아귀 등 나쁜 세계에 태어남이 다했으며, 수다원이 돼 나쁜 세계의 법에 떨어지지 않고, 결정코 바르게 삼보리로 나아가 일곱 번 천상과 인간 세계를 오가며 태어났다가 마침내 괴로움을 완전하게 벗어나리라”고 말할 수 있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했다.』
이와 같이 다섯 가지 두려움과 원한을 없어지게 하고[오계(五戒)를 확실히 지키고], 세 가지 일을 결정해 의혹이 생기지 않으며[불ㆍ법ㆍ승 삼보(三寶)를 의심하지 않으며], 성현의 바른 도[사성제(四聖諦)]를 사실 그대로 통달하면, 윤회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했다.
*공한처(空閑處, 산스크리트어 araṇya/阿蘭若)---세상과 동떨어져 시끄러운 소음으로부터 떠난 조용한 곳, 한적한 삼림 속, 마을에서 떨어져 수행자들이 머물기에 적합한 빈터를 말한다. 결국 암자를 지을 만한 터와 같은 곳이다. 이를 아란야(阿蘭若) 혹은 원리처(遠離處)라 번역하기도 하고, 아란야(阿蘭若)를 줄여서 난야(蘭若)라고도 한다.
*공혜(空慧)---좋은 의미로는, 공(空)의 이치를 관하는 지혜를 말한다. 예컨대, <금강경>은 대승과 소승이 대립하기 이전에 형성됐는데, ‘공혜(空慧)’를 근본으로 삼고 ‘일체법무아(一切法無我)’의 이치를 요점으로 해서 성립된 경전이다.
그러나 알아서 쓸데없는 지혜를 공혜(空慧)라고도 한다. 이럴 경우, 완전히 잘못된 지혜를 일컫는다. 공의 이치에 들어가려 하다가 공과는 거리가 먼 공혜에 빠지고 만다. 이것이 공부하는데 가장 큰 병통이다.
*공화(空華)---공화(空花), 환화(幻華)라고도 하는데, 번뇌로 생기는 온갖 망상을 공화라 한다. 본래 실체가 없는 현상세계를 그릇된 견해에 사로잡혀 실체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 - 눈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때로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마치 꽃이 퍼져있는 것처럼 허상이 난무하는 것과 같이 잘못 보는 일, 혹은 사람이 어떤 딱딱한 물건에 머리를 강하게 부딪쳤을 때 눈앞에 순간적으로 번쩍 하고 일어났다 사라지는 허공 꽃을 비유하는 말이다. 즉, 눈병 든 사람의 눈에 보이는 그 무엇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눈병이 들었기 때문에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존재의 실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환각으로 보고 있는 그 무엇과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화는 실재가 아니고 거짓이라는 말. 인간세상의 부귀영화 희로애락도 다 몽환공화 같은 것이므로 거기에 속거나 집착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지혜가 어두운 사람은 몽환공화를 실재로 잘못 알아서 그것을 붙잡으려고 헛수고를 하는 것이다.---→허공 꽃(幻華) 참조.
*과거불사상(過去佛思想)---석가모니 그 이전 세상에 출현했다고 하는 여섯 부처님과 석가모니불을 합쳐 과거칠불(過去七佛)이라 하는데, 석가모니 이전에도 깨달음을 얻은 불타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상에서 나온 말이다.---→과거칠불(過去七佛) 참조.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과거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마음도 얻을 수 없다는 말로서, <금강경(金剛經)> 제18 일체동관분(一體同觀分)에 나오는 말이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저 세계 가운데 있는바 모든 중생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가 다 아느니라. 왜 그러냐 하면 여래가 말한 모든 마음은 다 마음이 아니고 그 이름이 마음이기 때문이니, 그것은 수보리야, 지나간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이를 이해하기 위해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여기 한 사람이 있다. 아침이 밝아서 일어나 세수하고, 밥 먹고, 출근을 한다.」
이것은 일상으로 행하는 자연스런 행동이다. 그러므로 이때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다. 이처럼 별일이 없을 때는 우리 마음은 없다. 이것이 우리들의 본래 모습이고, 본래 마음이고, 본성이다. 이와 같이 최초의 우리 마음은 텅 빈 무심(無心)이고, 무위(無爲)이며, 무작(無作)이고, 무주(無住)이다.
그러던 것이 상황이 바뀌면 돌변해서 문제가 생긴다. 없던 마음이 일어난다.
「어제, 하루 종일 분주히 일하다가 퇴근 무렵, 친구하고 약속 시간에 쫓겨 미처 처리하지 않은 계약에 관한 건에 문제가 생겼다. 출근해서 보니까. 미처 처리하지 않은 그 건을 눈치 챈 다른 회사 직원이 약삭빠르게 비집고 들어와서 그 계약 건을 그 회사 쪽으로 가져가버린 것이다. 이런 일이 터져 회사에 적지 않은 손실을 입히게 됐고, 그래서 상사에게 야단맞고, 시말서까지 썼다.」
이렇게 되고나니, 자리에 와 앉아 있어도 안절부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하루 종일 번뇌 망상에 시달렸다. 별별 생각을 다 했다. 심지어 사표 내고 그만둘까 하는 생각까지도 했다. 이처럼 엉뚱한 사단이 생기니, 이런 조건이 발생하니, 온갖 마음이 함께 일어난다. 마음이란 이런 것이다.
그런데 퇴근 무렵에 경사가 터졌다.「며칠 전 처리했던 건에 대박이 터졌다. 아침에 야단맞은 그 계약 건보다 훨씬 큰 계약 건에 대박이 터진 것이다. 회사에 막대한 이익이 생기는 경사였다. 과내에 소동이 벌어지고, 과장이 불러서 갔더니 아침에 썼던 시말서를 되돌려주며 함박웃음이다.」 일이 역전된 것이다.
그러니 마음도 덩달아 가벼워진다. 마음이란 게 이와 같다. 조건과 상황에 따라 온갖 마음이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이와 같이 마음은 독자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조건적이다. 그리고 이렇듯 마음엔 실체가 없다. 현재 이 순간에 일어나는 마음조차 고정된 실체가 없는 찰나 생 찰나 멸하는, ― 상황과 조건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러니 내 마음, 현재의 내 마음조차 내가 잡을 수가 없다. 그런데 과거에 이미 지나간 일을 가지고 지금까지 붙잡고, 그 과거의 마음에 얽매이고 집착하며 괴로워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마찬가지로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의 일을 지레 분별하고 상상하고 추측하면서 울고 웃는다면 얼마나 공허한 일인가.
이미 지나가 흘러가버린 마음을 붙잡아서 그 마음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가 없고, 아직 오지도 않은 마음을 미리 붙잡아서 그 마음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가 없으며,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일어난 마음도 찰라 멸하는지라 이미 흘러 지나가버린 과거 마음이 돼버리기 때문에 그 마음도 붙잡아서 그 마음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도 없다.
그래서 과거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마음도 얻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즉, 공연히 마음을 스스로 만들어 내어, 그 마음에 빠지고, 집착하며, 또한 그 마음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즐거워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래서 <금강경>에 마음이 만들어낸 것은 개시허망(皆是虛妄)이라 했다. - 법상 스님의 <금강경과 마음공부>에서 요약.
결국 <금강경>에서 말하는, “과거심도 얻을 수가 없으며, 현재심도 얻을 수가 없고, 미래심도 얻을 수가 없다”고 설한 것은, 마음은 모양도 형체도 색깔도 없기 때문에 그 마음의 본체는 얻을 수가 없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의 작용으로 나타낸 것이 중생의 삼계이니, 삼계도 불가득인 것이다. 즉, 일체의 모든 존재나 삼라만상은 텅 비어 공(空)한 것이기 때문에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모든 모양이 있는 것을 모양이 아닌 것으로 본다면 여래를 친견하리라”라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일체의 차별경계를 초월한 무심의 경지에서 지금 여기 자기의 일을 지혜롭게 하고 있는 그 당체가 여래이며 법신이라는 사실을 체득하도록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달마(達磨) 대사가 혜가(慧可)에게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오라! 내가 그대를 위해 안심시켜 주마!”라고 말하자 혜가는 “불안한 마음을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다(不可得)”라고 대답하고 있다. 그래서 달마는 “내가 그대를 안심시켜 주었다”고 해, 혜가는 얻을 수가 없는(不可得) 그 마음이 안심을 체득한 경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유명한 안심법문을 전하고 있다. 반산 화상이 “삼계에 무법(無法)인데 어디서 마음을 구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마음은 어느 곳에서도 구할 수 없는 것이다. 일체가 텅 비어 공(空)한데 어디서 얻을 수가 있겠는가? 구하고 얻을 수도 없는 마음을 구하려고 하는 것은 물 속에 비친 달을 주우려고 하는 것과 같이 착각과 환상에 떨어지게 된다. 불법은 심법(心法)이다. 마음 밖에서 불법이나 진실을 추구하고 불도를 구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이다. 그래서 “마음 밖에 법은 없다” “마음 밖에서 불도를 구하는 것은 외도”라고 선승들이 강조하고 있다.
중국 당나라시대에 임제 의현(臨濟義玄, ?~867) 선사가 말했다. “즉시현금 갱무시절(卽時現今 更無時節)”이라고, 한번 지나가 버린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아직 오직 않은 미래에 기대를 두지 말며,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자신답게 주인답게 최선을 다해 살라는 말이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두가 한때일 뿐인데, 그 한때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삶의 빛깔이요 무게다. 당신은 무엇이 되고 싶은가. 그리고 나는 지금 무엇이 돼가고 있는가. 바로 지금 현재만 있을 뿐, 또 다른 시절이란 없다. 이처럼 자신답게 산다면 지금 이 순간 성불할 수 있다는 말이다.
과거의 마음은 이미 지나갔고, 현재의 마음은 순간순간 흐르고 있으며, 미래의 마음은 아직 오지 않았는데, 그러면 어느 마음에 점을 찍어야[點心] 할까?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과 점심(點心)에 얽힌 덕산 선감(德山宣鑒, 782~865) 선사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덕산 선감(德山宣鑒, 782~865) 참조.
*과거2인(過去二因)---12연기(十二緣起)를 태생학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열두 가지 가운데 무명(無明)ㆍ행(行)이 과거세의 2인(因)이 돼 식(識)ㆍ명색(名色)ㆍ육처(六處)ㆍ촉(觸)ㆍ수(受)라는 현재세의 5과(果)를 초래하고, 다시 애(愛)ㆍ취(取)ㆍ유(有)가 현재세의 3인(因)이 돼, 생(生)ㆍ노사(老死)라는 미래세의 2과(果)를 초래해 괴로운 생존을 되풀이 한다는 견해이다. 이는 삼세에 걸쳐 인과가 겹침으로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라고 한다. 즉, 괴로움을 멸해 해탈로 향하는 과정―삼세양중인과를 설명함에서 나오는 말이다. 이 열두 가지 가운데 무명(無明)과 행(行)은 과거세의 번뇌와 선악의 행위, 식(識)은 수태(受胎)하는 찰나, 명색(名色)은 수태 후 약 1개월 사이, 육처(六處)는 태내에서 눈ㆍ귀ㆍ코 등의 기관이 완성되는 단계, 촉(觸)은 출생해서 단순한 감각 작용을 일으키는 단계, 수(受)는 단순한 괴로움이나 즐거움을 느끼는 단계, 애(愛)는 재물이나 애욕에 집착하기 시작하는 단계, 취(取)는 집착이 증대하는 단계, 유(有)는 집착으로 그릇된 행위를 일으키는 단계, 생(生)은 미래세에 태어나는 단계, 노사(老死)는 미래세에 태어난 후 죽음에 이르기까지로 해석한다.
*과거칠불(過去七佛)---과거칠불은 석가모니까지(석가를 포함해) 등장한 7명의 부처를 말한다.
불교의 교리에 따르면, 누구든지 깨달음을 얻어서 불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석가모니 이전에도 깨달은 불타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실재하였던 불타는 오직 석가모니 한 사람일 뿐이며, 나머지 6명의 불타는 과거불 사상이 전개됨에 따라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과거불 사상은 불타의 본생담 및 미래불 사상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으며, 대승불교에서 전개된 불타관의 원천이 됐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석가모니불이 불교라는 종교를 이룬 것은 단지 석가모니 일대만의 사업이 아니고, 과거에서 이미 성도해 성불한 전생의 공덕이 누적한 결과라고 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불국토설(新羅佛國土說)과 관련해 과거칠불에 대한 신앙이 전개됐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는 과거칠불을 각기 모시는 가람이 있었다고 한다.
과거의 부처님은 무수히 많지만 불전에서는 그 중에서도 비교적 가까운 시기에 출현하신 일곱 부처님을 과거불로 정리하고 있다. 그러고 이러한 부처님들의 일대기를 모은 경전이 바로 초기경전 쿳다까 니까야(Khuddaka-nikaya, 소부)에 포함돼 있는 <불종성경(佛種姓經, Buddhavaṃsa)>이다. 과거칠불은 아래와 같다.
➀ 비바시불(毘婆尸佛, Vipassi Buddha)-위빠시불,
➁ 시기불(尸棄佛, Sikhi Buddha)-시키불,
➂ 비사부불(毘舍浮佛, Vessabhu Buddha)-웨사부불,
④ 구류손불(拘留孫佛, Kakusandha Buddha)-까꾸산다불,
⑤ 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 Konagamana Buddha)-코나가마나불,
⑥ 가섭불(迦葉佛, Kassapa Buddha)-까사빠불,
⑦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Sakyamuni) = 구담불(瞿曇佛, Gotama Buddha).
이 중에서 ①비바시불(毘婆尸佛), ②시기불(尸棄佛), ③비사부불(毘舍浮佛), 세 분은 장엄겁(莊嚴劫)에 나타나신 부처님이라 해서 과거삼불이라 한다,
그리고 현겁에 출현하신 부처님은 ④구류손불 ⑤구나함모니불 ⑥가섭불 ⑦석가모니불, 네 분이다. 그리고 현겁이 아직 끝나지 않은 미래에 오실 부처님은 미륵불(彌勒佛, Metteyya Buddha)이다.
주석서에 따르면 미륵불을 포함해서 다섯 분 부처님들께서 출현하시어 장엄하시는 멋진 겁이요, 핵심이 되는 겁이라고 세존께서 칭찬하셨기 때문에 현재의 겁을 ‘행운의 겁(賢劫, bhadda-kappa)’이라고 한다. 즉, 부처님이 출현하시는 겁보다 출현하시지 않는 겁이 훨씬 더 많은데, 현재 겁에 무려 다섯 분의 부처님들이 출현하셨고 또 출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교리에 따르면 누구든지 깨달음을 얻어서 불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석가모니 이전에도 깨달음을 얻은 불타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불타는 오직 석가모니 한 사람일 뿐이며, 나머지 6명의 부처님은 대승불교에서 과거불사상이 전개됨에 따라 창작된 부처이다.
※장엄겁(莊嚴劫)---과거ㆍ현재ㆍ미래의 3대겁(三大劫) 가운데서, 현재를 현겁(賢劫), 미래를 성수겁(星宿劫)이라함에 대해 과거의 대겁을 장엄겁이라 함.
*과거칠불(過去七佛) 성립 배경---과거칠불의 성립 배경에 대해서는 붓다시대의 종교사상계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
기원전 6세기 정통 바라문 사상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신흥 사상가였던 사문 그룹에서 자이나교의 개조였던 니간타 나따뿟따(Nigantha Nataputta)와 사캬무니 붓다(Sākyamuni Buddha)는 당대 최고의 라이벌이었다. 두 종교의 조직이나 운영 체제 등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니간타 나따뿟다가 사캬무니 붓다보다 12년 정도 선배로 알려져 있다. 두 사람의 출신 성분과 행적도 거의 비슷하다.
객관적으로 말해서 자이나교의 제도를 불교가 모방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자이나교에서 먼저 여성을 출가시켰다. 그것을 본 붓다도 여성의 출가를 허락했다. 불교의 칠불사상도 자이나교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다.
니간타 나따뿟따는 붓다와 같은 시대 왓지(Vajji)의 웨살리(Vesali) 부근에서 왕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32세에 출가해 사문이 되어 12년간 고행한 끝에 마침내 완전지(完全智)를 얻었으며, 그 후 30년간 교화활동을 하다가 72세에 입멸했다.
니간타 나따뿟따는 자신이 자이나교를 최초로 개창한 것이 아니라 과거부터 있던 니간타의 전통을 계승한 자라고 했다. 이를테면 자이나교의 중흥조라고 자처한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교설에 대한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자기 자신이 최초로 자이나교를 창시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이 니간타의 제22대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니간타의 영향을 받아 붓다도 자신이 불교의 개조가 아니고, 그 이전에 이미 여섯 명의 붓다(비바시불, 시기불, 비사부불, 구루손불, 구나함불, 가섭불)가 있었다고 말하게 됐다. 불멸후에는 제자들이 석가모니불까지 포함시켜 과거칠불이 있었다고 주장하게 됐다. 세상 사람들이 붓다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붓다가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이루고 다섯 고행자들을 교화하기 위해 바라나시로 가는 도중에 아지비까 교도였던 우빠까(Upaka)를 만났지만, 그는 붓다의 말을 믿지 못하고 수행하다가 정신 착란을 일으킨 사람으로 취급해 버렸다.
인지가 발달하지 않았던 기원전 6세기에 붓다의 사성제나 연기법을 그들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붓다는 그 연기법은 내가 발명한 것이 아니고 발견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가르쳐주는 대로 그 길(팔정도)을 따라가기만 하면 옛 궁전(열반)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인도에 과거불의 스뚜빠(stupa, 塔)가 존재하고 있지만, 그것은 과거불을 추모하기 위해 후대에 조성한 것일 뿐, 실제로 과거불이 실존했었다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다. 자이나교의 과거 니간타도 마찬가지이다. 모두 가공의 인물을 등장시켜 자신의 교설이 틀림없는 진리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이해해야만 한다. - 마성 스님
*과거현재인과경(過去現在因果經)---줄여서 <인과경>이라고도 한다. <과거현재인과경>은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가 송(劉宋)나라 때인 444년~453년경에 총 4권으로 번역했다. 경전의 명칭은 과거의 원인과 현재의 결과를 설명한다는 뜻이다. 붓다가 스스로 자신의 전기(傳記)를 이야기하는 내용으로 꾸며졌다. 붓다 자신이 과거세에 보광여래(普光如來) 밑에서 선혜선인(善慧仙人)으로 태어나 출가해 득도했으며, 그 인연이 영겁의 세월이 흘러서도 사라지지 않아 현세에서 부처로 태어났다는 내용이다. 선혜선인의 출가와 득도, 보광여래의 예언, 도솔천에 태어난 일 등 전생 이야기에서 시작해 이 세상에 태어난 뒤에 일어난 여러 일화들을 나열했다. 전생의 이야기는 과학적으로는 근거 없는, 완전히 창작된 내용이다.
그리고 서역 출신의 축대력(竺大力)과 강맹상(康孟詳)이 공동 번역한 <수행본기경>, 월지국 출신의 지겸(支謙)이 번역한 <태자서응본기경>, 서진의 섭도진(攝道眞)이 번역한 <보살본기경> 등도 같은 경으로 무두 <과거현재인과경>의 다른 번역이라고 한다.
이 경은 문장이 유려하고 때로는 대승적인 사상도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 경은 붓다 자신이 설한 형식을 갖춘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기이지만, “너희들은 마땅히 알라. 과거의 종자 인연은 무량겁을 지날지라도 마침내 멸하지 아니함을 알아야 한다.”고 설함으로써 과거의 종자 인연으로부터 현재의 과보를 얻는다고 강조한 데서 <과거현재인과경>이란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경은 중생이 받고 있는 현재의 과보가 천차만별한 것은 다 전생의 업인이라고 설한 점으로 달리 <선약인과경>이라고도 한다.
*과문(科文)---과문(科文)에 관한 유학(儒學)에서 개념과 불교에서 개념이 완전히 다르다.
• 유학 입장에서 ‘과문(科文)’이란 고려ㆍ조선시대 과거 문과(文科)에 통용되던 여러 가지 문체의 글을 말한다. 과문의 주종은 시(詩)ㆍ부(賦)ㆍ표(表)ㆍ책(策)ㆍ의(疑)ㆍ의(義)로서 흔히 ‘과문육체(科文六體)’라 불렀다. 이 가운데 의(疑)ㆍ의(義)는 경서에 대한 논문을 작성하는 것으로 특별한 정식(程式-표준방식)이 요구되지 않는 고문체이다. 그러나 표(表)ㆍ책(策) 등은 주로 내용이 시무(時務)에 관련된 것이고, 일정한 정식이 요구되고 격률의 형식이 까다롭고, 전고(典故)를 많이 사용하므로 특별한 훈련 없이는 쉽게 지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과거시험에 응시하는 유생들은 과문법을 익히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과문에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따라서 과거시험 때 응시자가 제출하는 답안지를 과문이라 하기도 했다.
• 불교에서 ‘과문(科文)’이란 경론(經論)을 구조적으로 분석해 도표 등 시각적으로 표시하는 것을 말했다. 이를 위해 경론을 내용에 따라 단락을 나누어 경전 해설의 이해를 돕기도 했다. 그리고 경전(經典)이나 논서(論書)를 해석함에 있어서 내용에 따라 문단(文段)을 짓는 것을 과문(科文)ㆍ과장(科章)ㆍ과절(科節)ㆍ과단(科段)ㆍ분과(分科) 등의 용어를 썼다.
형식은 간단한 어구와 줄을 그어 그 내용을 도표ㆍ그림 등으로 나타내기도 했다. 따라서 과문이란 경론을 구조적으로 분석해 시각적으로 표시하든가, 또는 알기 쉽게 해석하기 위해 내용에 따라 문단을 나누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아시아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실행되면서 불교의 학문전통과 교육전통 전승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하여 과문은 현재 한국 강원에서 실행되고 있는 불교의 살아있는 전통이기도 하다.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해 ‘불교의 문헌해석학과 과문(科文)의 전통’이라는 주제로 열린 학술대회에 관한 불교신문 기사를 일부를 소개한다.
『‘과문’이란 경론의 해석을 위해 구조를 장절(章節)로 분석해 트리(tree) 구조로 시각적으로 표시하는 것으로, 아시아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실행되면서 불교의 학문전통과 교육전승에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과문을 통한 해석학 전통은 10세기 후반 이후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현재 그 명맥을 한국의 일부 강원교육 등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이날 불교학연구회장 조은수 서울대 교수는 과문이 디지털 불교문헌연구의 지평을 넓히고 전통 불교문헌의 활용도를 높이는 실험의 시금석이 될 것 이라고 강조했다.
조은수 교수는 “과문에 대한 구조적 연구는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인문학 문헌전산화를 위해 좋은 모델이 된다”며 “아시아 각국이 경쟁적으로 문헌전산화를 추진하는 현실에서 과문과 장소에 대한 구조적 연구는 불교 문헌 및 인문학 문헌 일반의 전산화를 위한 새로운 지평을 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과문의 방법과 체계가 독창적인 특성과 장점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조 교수에 따르면 과문은 대량의 주석문헌이 생산됨에 따라 그 문헌을 읽고 연구ㆍ비교하는 중요한 도구이자 문헌간의 관계를 정하고 평가하는 일종의 표준으로서 역할을 했다. 대규모 원전과 다층의 장소들을 수십 단계에 달하는 구조로 분석하고 이를 다시 하나의 체계로 묶어 통합시키는 방법을 통해 주석문헌을 체계화 한 일종의 ‘문헌분석시스템’이라는 것이다.』- 2014,5,3 불교신문기사
결국 과문(科文)이란 경론을 구조적으로 섬세하게 분석하는 것으로 불교의 문헌분석 방법론의 백미라고 하겠다. 그리고 경전 해석학으로서 동양에서도 분석적 사유를 했다는 증거로서, 과문의 존재는 불교의 종교전통으로서 뿐만 아니라 동양의 대표적인 학문전통으로서도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고 했다.
*과보(果報)---인과응보(因果應報)의 줄인 말이다. 과보(果報)란 앞서 한 행동에 대한 결과로 나타나는 열매를 말한다. 즉 선한 행동을 했으면 선한 열매를 얻는 것이고, 악한 행동을 했다면 악한 열매를 얻는 것이니[善因善果 惡因惡果], 행동과 결과에는 연관이 있는 것으로 이를 통틀어 과보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제가 저지른 일의 과보(果報)를 제 스스로 받음을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 한다.
과보는 어느 때 어떻게 받을 것인지 다 확정돼 있어 도저히 면(免) 하려야 면할 수 없는 강력하고 무서운 과보로써 오직 순응하고 감수해야 한다. 과보는 정해져 있으나 받을 시기는 기연에 따라 갚아야 한다. 어떤 과보를 어떻게 받으라는 것은 이미 결정돼 변경할 수 없으나, 어느 때 받아야 될 것인가의 문제만 미정(未定)돼 있는데, 과보(果報)에는 현보(現報)ㆍ순보(順報)ㆍ순후보(順後報)가 있다.
과보는 인을 심어서 곧바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만, 사람의 환경이나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무거운 쪽부터 먼저 실현된다고 본다. 짓는 그 즉시로 받게 되는 것을 순현보(順現報), 짓는 즉시 받지 않고 그 다음 시기에 받는 것을 순생보(順生報), 받기는 받되 언제 받게 될지가 일정하지 않은 순후보(順後報)로 구분한다.
*과보심(果報心)---마음은 있지만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 나의 마음이 아니고 무아(無我)다. 마음은 매순간 조건에 의해 일어나고 사라지므로 나의 것이 아니며, 나의 소유가 아니고, 나의 자아가 아니다. 마음은 현재의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니고 과거에 행위를 원인으로 인해서 생긴 결과의 마음도 함께 있다. 이것을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마음이라고 하는데 이를 줄여서 과보심(果報心)이라고 한다.
그런데 선심은 선 과보심(善果報心)과 어울리고 불선심은 불선 과보심(不善果報心)과 어울린다. 선심을 갖고 싶어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불선 과보심이 많으면 선심이 있어도 불선심으로 바뀐다. 불선심을 갖지 않으려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나 선 과보심이 많으면 불선심이 있어도 선심으로 바뀐다. 과보심은 조건에 의해서 생긴 인과응보의 마음이다. 과보심은 과거에 행위를 한 원인으로 인해 생긴 결과의 마음으로 자신의 그림자와 같다. 이처럼 마음은 현재의 마음만 있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과보심이 있어서 항상 영향을 미친다.
과보심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습관적인 마음으로 자신의 축적된 성향이다. 선 과보심이 생기도록 하려면 수행을 해서 선업을 쌓아야 한다. - 묘원
*과분불가설(果分不可說)---→‘인분가설(因分可說)과 과분불가설(果分不可說)’ 참조.
*과성삼매(果成三昧)와 인행삼매(因行三昧)---염불을 함에 있어서 일심으로 부처님 이름을 외운다든지, 또는 일심으로 부처님의 상호를 관찰한다든지, 또는 일심으로 법신불(法身佛)을 실상으로 관조하는 수행법을 인행(因行)의 염불삼매[인행삼매]라 한다. 그리고 인행의 염불삼매가 성숙되면 마음이 선정에 들어가고 혹은 시방불(十方佛)이 현전(現前)하며, 혹은 법신(法身)의 실상에 계합되는데 이를 과성의 염불삼매[과성삼매]라 한다.---→인행삼매(因行三昧) 참조.
*과위(果位)---과위는 수행에 의해 증득된 결과로서의 불위(佛位), 즉 부처의 지위ㆍ경지 또는 계위(階位)를 말한다. 과지(果地)라고도 한다. 불과(佛果)란 부처라는 결과라는 뜻이며, 부처 또는 여래의 계위 또는 지위라는 뜻에서 불지(佛地) 또는 여래지(如來地)ㆍ불과위(佛果位)라고도 한다. 여기서 지(地)와 위(位)는 모두 수행상의 지위 또는 경지, 즉 수행 계위를 뜻한다.---→인위(因位) 참조.
*과정(果定, 빨리어 Phala-samāpatti)---팔라(Phala)는 열매(果)를 뜻하나 여기서는 열반(닙바나)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 열반을 완성한 것을 말한다. 삼마빠타(samāpatti)는 도달, 성취, 입정(入定)을 즐기는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팔라삼마빠타(果定-팔라삼마빠타)는 과(果)에 도달한 상태의 의미를 지닌다. 즉, 바른 과정(過程)을 거쳐 궁극의 열반을 성취하는 도의 과정(果定)에 이른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과정(果定)은 열반을 성취한 상태를 말한다. 열반에는 도와 과의 단계가 있는데, 도(道)는 지향하는 것이고, 과(果)는 성취하는 것이다. 열반의 과정(果定)에 이르러야 비로소 번뇌가 소멸한다. 과정(果定)에의 입정 수행자가 그렇게 관찰하는 일을 하는 동안, 그의 위빠사나 지혜는 점점 향상될 것이며, 머지않아 “형성평온의 지혜-촤상의 위빠사나”의 단계에 도달할 것이다.
*과해(果海)---붓다의 경지, 즉 불과(佛果)의 덕이 넓고 큰 것을 바다에 비유한 말이다. 중국 화엄종 제4조인 청량 징관(淸凉澄觀, 738~839) 조사는 붓다의 깨달음은 말을 떠나있다고 했고, 또 “성해(性海)의 과분(果分)은 마땅히 가히 설할 바 없다”고 했으며, “과해(果海)는 생각을 떠나있으면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이다”라고 했다.
※성해(性海)---변하지 않는 진리나 청정한 본성을 바다에 비유한 말. 진리의 세계.
*과현인과경(過現因果經)---과거현재인과경(過去現在因果經)의 줄인 말이다.---→과거현재인과경(過去現在因果經) 참조.
*곽시쌍부(槨示雙趺)---중인도(中印度) 쿠시나가라(kuśinagara)라는 도시의 성(城)밖에 있는 발제하(跋提河)라는 언덕에는 사라(sala)나무 네 쌍이 있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사라수가 둘씩 쌍으로 네 쌍이 서 있었다고 해서 사라쌍수(娑羅雙樹)라 한다. 붓다는 그 나무 사이에서 열반에 드셨다.
이 무렵 부처님 수제자인 가섭(迦葉) 존자는 여러 제자들과 함께 중인도 마가다국 왕사성의 동북쪽에 있던 기사굴산(빠알리어 기자쿠타/Gijjhakūṭa, 耆闍崛多山-영축산)이라는 곳에서 선정을 닦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천지가 어두워지고 해와 달빛이 없어졌으며 동시에 새와 짐승들이 슬프게 울고 있었다. 가섭 존자는 이러한 광경을 보고 이것은 부처님께서 몸이 쇠약해서 입적을 알리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섭은 바로 신통력으로 곧 달려가고 싶었으나 경망스럽게 행동을 할 수가 없어 7일간을 걸어서 발제하에 도착했다.
부처님이 열반하신 지 칠일이 지난 뒤라서 이미 입관이 이루어진 후였는데, 가섭이 늦게야 와서는 관 주위를 세 번 돌면서 슬피 울며 경례를 드리고 말하기를 “이제 부처님을 대하니 어떤 면으로 봐도 열반하신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원하옵건대 제가 경례를 드린 것에 대한 표시를 해 주소서.”라고 발원을 했다. 그 때 부처님 두 발이 널 밖으로 나왔다. 그 발에서는 천개의 해가 환하게 조명한 것과 같이 밝게 빛났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두 발이 관 속으로 들어갔다고 전한다.
이러한 부사의한 경지를 곽시쌍부(槨示雙趺)라 하고, 이에 대해 <선문염송(禪門念誦)>에서는 다음과 같이 찬탄하고 있다. “영혼의 근원은 본래 담적(湛寂)한 것이기 때문에 과거가 없고 현재도 없다. 마음의 묘체(妙諦)는 신령스럽고 밝은 것인데 어찌 생(生)과 사(死)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이 발제하 언덕에서 부처님이 널 밖으로 두발을 보이실 수 있었느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 ‘두 발을 관(棺) 밖으로 내보인 것[槨示雙趺]’은 부처님 마음을 가섭에게 전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따라서 이는 선종에서 가섭 존자가 부처님 법을 이어받았다고 인용되는 삼처전심(三處傳心) 가운데 하나이다.
*곽연무성(廓然無聖)---당나라시대 도선(道宣, 596~667)에 의해 645년에 쓰여진 <속고승전(續高僧傳)> 속의 <달마전(達磨傳)>에 보면,
“성제제일의(聖諦第一義)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곽연무성(廓然無聖)” 드넓게 트였으니 성스러운 것도 없다고 답했다.
'곽연(廓然'이란 드넓게 트여 한 점도 걸릴 장애가 없고, 모든 대립이 사라진 대오(大悟)의 경계를 말한다. 따라서 ‘곽연무성(廓然無聖)’이란 그렇게 드넓게 트인 경계에는 성스러운 것도 없다는 말이다. 최고의 진리는 일체의 분별을 넘어선 것으로 성ㆍ속(聖俗) 또는 성ㆍ범(聖凡)의 분별이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성과 속을 분명하게 나누는 양무제(梁武帝)의 집착을 타파하는 법문이다.
불교 원리가 공(空)을 밝힌 것이고, 현상은 공에서 나타난 것이며, 그 현상은 다시 공으로 사라지는 것이므로, 성스러운 진리마저 따로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부처와 법을 밖으로만 구하지 말고 자기 스스로를 향해 본래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至公無私)한 자성불(自性佛)을 회복하라는 것이다.
우주의 분별없는 자리를 깨쳐 아는 것을 부처의 지견을 얻었다 하고, 우주의 분별 있는 자리를 알아서 천만 경계에 그와 같이 행하는 것을 부처의 행을 한다고 한다. 따라서 수행 정진하는 이는 모두 분별을 넘어서 둘이 아닌 불이문(不二門)의 이치를 체득해 생활에서 심법과 행동으로까지 나타나도록 정진해야 한다고 했다.
*관(觀)---불교에 있어서 ‘관(觀)’의 의미는 특별하다. 단순히 ‘본다’는 차원을 넘어서 보고, 듣고, 공감하고, 심지어 겉으로 드러난 것을 초월해 본질과 핵심을 꿰뚫어본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리고 들고나는 생각을 마음 한자리에 놓고, 무(無)의 상태로 집중해, 산란을 멈추고 평온하게 된 상태에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응시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어떤 현상이나 진리를 마음속으로 떠올려 그것을 자세히 주시하되, 관(觀)은 자기 생각을 떨쳐버리고 염(染)이 없는 지혜로써 대상을 있는 그대로 주시함을 말한다.
본래 ‘관(觀)’은 중국 고전에서는 황새를 의미하는 관(鸛)과 보는 것을 의미하는 견(見)이 합쳐진 형성문자라 한다. 그리하여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을 본다는 견(見)의 의미가 아니라 신비의 새라고 할 수 있는 관(鸛)이 들려주는 신령스런 소리까지 듣고 보는 형이상학적 행위를 말한다. 이러한 관(觀)의 의미를 제대로 보여주는 말로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에서의 ‘관(觀)’을 들 수 있다.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大慈大悲)해서 세상 모든 존재가 토해내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소리를 단지 듣는 것만이 아니라 직접 보고 듣고, 심지어 그 고통을 함께 하며, 해탈에 이르도록 보살펴 준다.
<주역(周易)>에서는 관(觀)할 때는 몸을 씻고도 감히 두려워 제사를 올리지 못하듯, 그렇게 경건하고 엄숙하게 하라고 말하고 있다. 관(觀)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처럼 경건하고 엄숙하게 하라는 것인가. 그것은 생각이 행동을 만들고 행동이 습관을 만들며, 그렇게 만들어진 습관이 인생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관(觀)에는 본다는 뜻뿐만 아니라 반복된 생각과 행동으로 만들어진 정신의 습관까지 포함하며, 일관성 있는 생각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역사관(歷史觀)이라든가 인생관(人生觀), 세계관(世界觀) 하는 경우의 ‘관(觀)’이 그것이다. 그리고 어떤 인생관, 어떤 세계관,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행위가 결정되고, 결국엔 그 사람의 인격과 인생이 결정된다.
그런데 불교에서 ‘관(觀)’은 위빠사나(vipasyna, 毘鉢舍那)의 의역이다. 지관(止觀) 수행에서 지(止) 수행을 통해 마음이 지의 상태에 이르면 자신의 마음속에 왔다 갔다 하는 마음의 움직임을 스스로 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관을 통찰명상(洞察瞑想)이라 하며, 통찰명상을 하면 자신이 그동안 무엇에 마음이 흔들리고 욕심을 부리고 조급해 했는지 알게 된다. 즉 관(觀)은 대상의 변화를 지켜봄으로써 그 사물의 본질을 통찰하는 수행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이에 의해 얻은 앎은 자신을 지혜의 세계로 이끌고 간다. 즉, 관(觀)은 있는 그대로의 진리인 실상(實相)을 관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위빠사나란 법(法)을 사유(思惟)하는 것을 말한다. 위빠사나를 하기 위해서는 일단 찰나삼매, 즉 순간적인 고요한 마음의 집중을 얻어야 한다.
삼매(三昧)는 산스크리트어 사마디(Samādhi)의 음사로서 자신의 마음을 보는 지혜가 깊어져서 외부의 어떠한 소리나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고 집중하고자 한 대상에 마음이 일심불난(一心不亂)하게 몰입한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참선하는 사람은 참선삼매, 염불하는 사람은 염불삼매에 들었다고 말하고, 또는 무아지경에 빠졌다고 한다. 이와 같이 마음을 한곳에 모아 움직이지 않는 것을 정(定)이라 한다.
그리하여 불교에서 지(止)는 정(定)에, 관(觀)은 혜(慧)에 해당한다고 한다. 즉, 지는 주체의 확립, 관은 이 주체의 확립에서 모든 현상을 전체적 ‧ 객관적으로 관찰해 정확히 판단하고 자유로이 대처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지관(止觀)은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균등하게 담는 수행법으로서, 지(止)는 멈추어 모든 번뇌를 그치는 것이고, 관(觀)은 자신의 본래마음을 관찰하고, 사물의 본성을 꿰뚫어보는 것이다. ---→지(止)와 관(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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