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공간

선불교(禪佛敎) 법맥(法脈)으로 살펴보는 선차(禪茶) 계보(系譜)

수선님 2023. 10. 22. 13:16

[선(禪)과 차(茶)] 책 리뷰를 쓰려고 하다보니 차 계보를 정리해서 보는 편이 수월할 것 같아서 역대 차 계보를 정리해 보았다. 차는 선불교와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어서 이다. 동양의 선불교가 없었다면 선차(禪茶)역시 없었을 것이다. 선차문화가 발전해오고 계승되어온 것을 기본상식으로 알고 있어야 오늘날 차문화가 좀 더 풍성해질 것이라고 여겨진다.

아래에 선불교 법맥과 함께 차계보를 정리한 이유는 역사적 맥락에서 한눈에 차문화의 흐름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하여 법맥이나 차맥을 따지고자 함이 아니라 시기별로 시대별로 차문화의 이어짐을 보고자 함이지 파벌을 짓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이다. 다만 선차문화의 특성은 지역 혹은 하나의 일가를 이루어 발전해 왔다는 것에서 스승과 제자가 이어 달리기를 하듯이 흘러 왔고, 시간이 지나서도 그 맥의 흐름을 다시 찾아서 잡는 이가 다시 차문화를 일으켰다는 것은 우리가 눈여겨 볼만하다고 생각된다.

[선과 차]의 리뷰를 역사적 맥락의 흐름으로 설명하고자 했고, 이러한 역사적 흐름으로서의 선차문화를 이해한다면 이러한 선차 문화가 우리나라 차문화의 뿌리이자 근간을 이루고 있다라는 것에서 자부심을 가질 수도 있다고 여겨진다. 차문화는 차역사의 끊어진 고리들을 이어내고, 사료와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발굴하여 그 끊어진 문화를 메꾸고 복원하는 과정에서 발전하여 왔다고 보인다.그동안 천년의 차문화라고 알고 있었지만, 선차문화에서 무상선사의 선차지법(禪茶之法)을 발굴함으로서 우리나라 차문화의 기원은 13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뿌리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하여 선차 문화의 시작은 1대조사 달마대사를 기점으로 하고 있다. 선차문화 1500년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여겨진다.

무상선사에 대해서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을 감안하여 무상선사에 대해서 먼저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졌다. 역사적 흐름으로서의 차계보를 먼저 습득하는 것이 '선과차'를 읽기에 편하리라 생각하였다. 무상선사가 역사적으로 어디에 어느 시대에 위치하고 있는지 알아야 우리나라 차문화가 갖는 위상이나 선차가 흘러오게 된 역사적 배경에 있어서도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선불교는 중국에서 시작되어 고려후기에 우리나라에서 법맥을 이어가게 되었고, 그리고 그 안에 선차가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에 대하여 역대 조사들 활동시기와 맞춰서 살펴보았다. 선종의 맥과 차의 흐름을 같이 살핀 이유는 역사적 흐름으로 살펴보기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시대를 기점으로 그 시기와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다승들과 다인들의 면모도 대략적으로 끼워 넣어서 같이 살펴 보았다. 선종 맥의 부활은 스승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제자가 결정하는 셈이라고 하는데, 조선시대에 와서는 선맥이 중간중간 끊기다 보니 독학으로 깨우친 선사들도 있어서 그러한 선사들의 정신과 맥이 살아 있기에 한국 차문화가 정신이나 혹은 깨달음을 중시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국차에 있어서 이러한 정신으로 흐르는 문화를 알지 못하고서는 차를 제대로 알았다고 할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 같다. 하여 한국차문화에는 아직도 선차의 정신이 흐르고 있고, 한국차를 알려면 선차를 알고 있어야 하고, 우리의 일상의 차생활 그 자체에 깨달음을 추구하게 되는 이유도 선차의 정신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인 것도 같다. 우리나라 차문화의 정신이 왜 자연스럽게 그렇게 형성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에 선불교 정신이 아직도 흐르고 있고, 선불교의 맥을 우리나라에서 이어갔기 때문이며, 그 문화가 우리안에 스며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나라 차문화를 공부하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따라서 역사적 맥락으로 차문화의 흐름을 이해하고 그러한 문화가 우리의 정신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우리의 차생활에도 그러한 영향을 알게모르게 체감한다는 것에 대해서 잘 살펴보면 왜 이러한 역사적 흐름을 알아야 하고, 이해가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래서 정리한 이 글을 읽어 보아도 좋고, 그냥 흐름이 그렇구나..하는 정도로만 가볍게 죽죽 넘어가도 좋으나..차문화 1500년의 정신을 우리가 한잔의 차를 마실 때 같이 마시고 있다라는 것에 대하여 우리의 정신문화가 그리 가벼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만은 꼭 알고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한잔의 차를 마시는 그 무게감이 그리 녹녹한 것만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문화가 있으면 그 문화를 알고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그 문화의 깊이만큼 무게감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에서 역사의 흐름을 보는 시선이기 때문에, 현재에서 역사를 보는 시선은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역사는 계속 전진하고 있으므로 앞을 보아야 함은 당연한 것일 것이다.

차의 역사는 계속 앞으로 흐르고 있고 우리는 그 흐름에 발 담구고 있다. 우리가 있는 이 시점에서 무엇을 하는가? 그것이 또한 역사가 될 것이고 한단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일 것이다. 이렇게 역사를 통하여 앞을 보는 시야를 가진 자기만의 관점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 관점은 역사적 관점과 맞물리고 있으므로 객관적 보편적 시선이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이들은 모두 그 시대에서 자기가 할 바를 찾았고 자기답게 살았다고 보인다. 때로는 시대가 어두워서 불빛이 없는 시대를 살기도 하였으나 그들은 자신들의 시대를 살아내었고, 역사의 전진하는 흐름을 저버리지 않았던 것 같다.

기록이 없어서 알려지지 않는 다승이나 다인들도 많겠지만, 현재 알려진 다승과 다인들의 기록을 간략하게 간추려서 올렸으나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길어졌다. 현대의 차는 대중문화이자 대중의 차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여 특정하게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다수가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 가는 문화의 흐름이 있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한 나라의 생활양식적 문화에서 다시 세분화되어 음차문화를 보자면 이러한 문화는 특정한 다수의 문화라고 볼 수도 있을 듯 하다. 김치처럼 식생활 전체의 문화가 아니라 매니아적 문화라고 볼 수도 있을 듯하다. 하여 전체의 문화가 되지 않더라도 반드시 전체를 모두 다 차문화에 포섭한다라기 보다는 다양한 음차문화 속에서 특정한 다수의 문화여도 상관없을 듯 하다. 애초에 식생활이 아닌 이상 전체가 다 같은 문화를 공유한다는 것을 전제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하여 차문화의 흐름을 이어가는 선에서 최대한도치가 분명히 있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그 문화의 깊이는 깊고도 넓다고 볼 수 있다. 능히 다양한 것을 포용하고도 남는다고 보인다. 그러니 그 최대한도치에 도달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여유를 갖고 보자면 차문화의 장대한 흐름은 계속된다고 확신은 할 수 있을 듯하다.

한권의 책으로 역사를 알고 흐름을 알고 가치를 알 수 있지만, 한권의 책을 읽기 위해서는 그 배경이 되는 역사와 흐름을 또한 알고 있어야 진정으로 아는 것이 되고 지식이 되고 가치를 재생산 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여겨서 정리를 하게 되었다.

 

선차의 흐름을 간략히 간략히 정리하면...

염화미소 - 달마 - 무상 - 마조 - 백장.남전.서당 - 조주 .임제- 황룡- 양기방회- 백운수단 - 원오극근

 

자장율사 김지장스님 진감국사 의천.지눌 구큐조류

 

호구소륭 - 석옥청공 - 태고보우 - 매월당 김시습 - 휴정 - 편양언기 - 풍담 - 월담 - 환성 - 호암 -

- 허당선사 - 원통대응국사(난포조묘)

(일본에 경산다연 전래) ㅣ

초암차가 일본 유입

연담유일 - 완호윤우 - 초의. 아암. 정약용. 김정희. 홍현주 등 - 경봉. 응송. 효당. 금당 -

(보라색: 선차 중국 맥, 청록색: 선차 한국 맥, 연고동색: 선차 일본 맥)

 

* 중국 선차의 맥

염화미소(가섭) - 달마 - 무상 - 마조 - 백장.남전.서당 - 조주 .임제- 황룡- 양기방회- 백운수단 - 원오극근 - 호구소륭 - 석옥청공 및 허당선사로 이어졌지만 그 이후에는 연결맥을 잘 알 수가 없고, 고려로 이어져서 선차는 오늘날까지 명백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 한국 선차의 맥

한국은 삼국시대부터 중국으로 승려들이 유학을 갔다. 이미 달마로부터 시작된 선불교가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종파의 불교들이 있었지만 선차는 선불교로부터 시작되었으므로 자장율사 김지장스님이 있지만 선차의 비조(鼻祖)는 무상선사를 기점으로 한다. 그 뒤로 진감국사 - 의천, 지눌로 이어지기도 하고, 석옥청공에게 법맥을 인가받은 태고보우로부터 본격적인 선차문화가 이어지게 되었다고 보인다. 많은 알려지지 않은 선사들이 있겠지만 드러나 있는 자료들로만 흐름을 구성해본다면 다음과 같다. 태고보우 - 매월당 김시습 - 휴정 - 편양언기 - 풍담 - 월담 - 환성 - 호암 - 연담유일 - 완호윤우- 초의. 아암. 정약용. 김정희. 홍현주 등 - 경봉. 응송. 효당. 금당 - 현대의 차인들은 모두 이러한 선차문화가 포함된 차문화를 이어가고 있다고 여겨진다.

 

* 일본 선차의 맥

원오극근의 다선일미(茶禪一味) 법어를 일본 승려 구큐조류가 받아서 돌아갔고, 백운수단의 법손자인 허당선사가 이은 화경청적(경산차=경산다연)을 일본 승려 원통대응국사(난포조묘)가 가지고 돌아갔다. 이 두개의 선차어가 만나서 근세 일본다도가 완성되게 되었다. 또한 여기에 매월당의 초암차가 일본에 건너가서 무라다슈코(1422~1502)가 초암다법을 창안하면서 그 정신을 다케노죠오(1502~1555)와 센 리큐(1522~1591)가 이어 와비차로 대성하면서 오늘날까지 그 정신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현재 초암차 전래를 부정하고 있는 상태며, 원오극근 선사의 묵적(墨籍)이 법어(法語)가 아니라 인가장이라고 하고 있는 중이며, 중국은 인가장이 아니라 단순히 법어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드는 생각은 일본다도는 다선일미와 화경청적으로 정신적 충족을 채웠다면 그 다도를 구현할 문화적 형태의 완성인 다실은 초암차와 조선의 차문화를 받아 들였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즉 조선의 정신적 차문화가 스며들어 구형된 초암과 기물을 통하여 정신과 물질이 결합된 다실을 구현한 것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참고>

* 무상선사 평전, 禪과 茶, 다음백과, 위키백과, 인터넷 카페와 블로그에서 복사가 허용된 자료들(출처가 스크랩으로 되어 있는 것들이 많아서 출처는 따로 표기하지 않았음. 따라서 출처는 인터넷)

* 서적에서 그대로 인용한 것이 많고, 부분적으로 생각을 넣은 부분도 있으나 대체로 나와 있는 자료를 그대로 인용하였다. 역사적 사실을 정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글은 그동안 나와 있는 자료들을 활용하여 역사적 시대별로 재구성하여 정리한 것이다. 선차의 역사를 한눈에 보기 위함, 즉 흐름을 파악하기 용이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이미 역사를 잘 알고 있는 분들은 별 상관이 없겠으나 차의 역사를 이해하기 어려운 분들에게는 나름대로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정리한 것이다.

* 혹여 연도나 자료가 잘못된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찾아서 제대로 끼워 맞춘다고 맞췄지만 오류가 생기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정확한 자료를 가지고 계신 분은 자료를 올려주시면 수정을 할 것임.

 

* 자료를 인터넷에서 가져온 것이 많으므로 복사는 금지하여 놓았다. 원본 출처(본 바탕이 된 서적이나 사람 등)를 다 확인 할 수도 없고, 또한 일부만 출처를 표기한다는 것이 무의미하기도 하여서 복사를 금지한 것이다.

 

<위에 요약된 것을 다시 풀어 대략적으로 내용을 채우고 시대별로 정리한 것이다.>

 

본사(本師) 석가모니(釋迦牟尼, Sakyamuni)

BC 6~4세기경에 인도에서 활동한 불교의 창시자로 남방의 불교에서는 BC 624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1대(BC4세기) 마하가섭(摩詞迦葉)

선(禪)의 출발점으로 보는 붓다와 가섭존자(迦葉尊者)의 염화미소(拈華微笑). 이로서 선이 세상에 등장하게 되었고, 선(禪)의 존재를 알 수 있게 되었던 사건이다. 선의 발견으로 선차(禪茶)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는데 선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선차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것이다. 선이란 깨달음을 의미한다. 선차(禪茶)란 선다일미(禪茶一味), 다선일미(茶禪一味)로서 차로써 깨달음을 얻는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로서 차(茶)는 하나의 도(道)가 되어 길을 내었다.

염화미소(拈華微笑) : 꽃을 손에 들고 미소를 짓는다.

붓다는 영산(靈山)에서 자주 설법(說法)을 하셨다. 어느 날 대중(大衆)의 한 사람이 석존에게 한 송이의 꽃을 드렸다. 그러자 붓다는 그 꽃을 들어 대중들 앞에 보여 주시고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다. 대중이 영문을 알지 못해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딱 한 사람 마하가섭(摩訶迦葉) 존자(尊者)만이 혼자서 빙그레 웃었다. 이것을 보시고 붓다가 말씀하시기를 “나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 실상무상(實相無相), 미묘법문(微妙法門),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이 있으니 이를 가섭(迦葉)에게 전하노라.”라고 하셨다. 여기 붓다의 마음에서 가섭 존자의 마음에 세상의 이치가 전해진 것이다. 그것이 ‘염화미소(拈華微笑)’의 뜻이다. ‘염화(拈華)’란 꽃을 손에 드는 것을 말한다. 이 꽃에 어떤 다른 신비적인 존재는 아니다. 붓다는 손에 꽃을 갖게 되어 그것을 대중들에게 단지 보여 주었을 뿐이다. 꽃이 아니라도 그 무엇이라도 상관없다. 부처의 마음을 알아들은 가섭이 마음이 있을 뿐이다. 곧 이심전심 통하는 깨달음만이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2대 아난타(阿難陀) / 3대 상나화수(尙那和修) / 4대 우바굽다(優婆毬多) / 5대 제다가(提多迦) / 6대 미차가(彌遮迦) / 7대 바수밀다(婆修蜜多) / 8대 불타난제(佛陀難提) / 9대 불타밀다(佛陀蜜多) / 10대 협(脇) / 11대 부나야사(富那夜奢) / 12대 마명(馬鳴) / 13대 가비마라(迦毘摩羅) / 14대 (AD 150경~ 250경) 용수(龍樹) / 15대 가나제바(迦那提婆) / 16대 나후라다(羅喉羅多) / 17대 승가난제(僧迦難提) / 18대 가야사다(伽耶舍多) / 19대 구마라다(鳩摩羅多) / 20대 사야다(奢夜多) / 21대 바수반두(婆修盤頭) / 22대 마라나(摩羅那) / 23대 학륵나(鶴勒那) / 24대 사자(師子) / 25대 가사사다(伽舍斯多) / 26대 불여밀다(不如蜜多) / 27대 반야다라(般若多羅)

 

28대(선불교 1조)AD 6세기경 보리달마(達磨)

달마(達磨)는 중국 선종(禪宗)의 개조(開祖)로 9년간 동굴에서 면벽수행(面壁修行), 보리달마는 부처의 심적 가르침에 돌아가는 방법으로 선(禪)을 가르쳤기 때문에 그의 일파를 선종이라고 하게 되었다. 선을 구체화시켜 중국에서 선불교가 시작되게 된 계기를 마련한 개조이다. 어느 날 그는 선정 도중에 잠들어버린 것에 화가 나서 자신의 눈꺼풀을 잘라내버렸다. 그런데 그 눈꺼풀이 땅에 떨어지자 자라기 시작하더니 최초의 차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이 전설은 선사(禪師)들이 선정 중에 깨어 있기 위해 차를 마시는 것에 대한 전통적인 근거를 제시해준다. 그만큼 졸음은 수행에 방해가 되고, 차나무의 잎은 정신을 맑게 하여 수행에 도움을 준다. 선불교의 시작인 달마대사에서부터 불교에 차는 등장한다. 이로서 선불교의 선차의 시작이 이루어졌다.

초조(初祖)에서28대까지는 인도스님, 29대부터 56대조사까지는 중국스님이다.

* 달마조사는 불교로는 28대이고, 선불교로는 1대 조사가 된다. 선불교(禪佛敎)의 1조인 달마는 인도스님이고, 29대(2조)부터 56대까지는 중국 스님이다.

* 단, 예외가 있는데 34대 조사(선불교 7조)인 남악회양 자리에 신라스님 무상선사가 자리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고 있으며, 아래에 차차 설명하기로 한다.

불교의 법맥(法脈)은 붓다로부터 1~28대 까지는 인도스님, 29~56대까지는 중국스님, 57~79대까지는 한국스님이다.

29(선불교 2조) 二祖 慧可(혜가) / 30대(선불교 3조) 三祖 僧燦(승찬) / 31대(선불교 4조) 四祖 道信(도신) / 32대(선불교 5조) 弘忍(홍인, 601~674), 홍인선사는 혜능(남종선), 신수(북종선), 지선(검남종-남종도 북종도 아닌 별도의 종파 - 후에 정중종으로 무상이 이음)이라는 세 제자가 있었는데 선불교를 반석(磐石) 위에 올려놓은 이들이다.

 

** 자장율사(慈藏律師, 590∼658)

신라(新羅) 선덕여왕 때 승려로 636년(선덕여왕 5) 승실(僧實) 등 제자 10여명과 함께 당나라로 가서 먼저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머물러 있다는 청량산(淸凉山)의 문수보살상에 은밀한 감응을 기도하였다. 7일 동안의 기도 후 꿈에 대성(大聖)이 나타나 사구게(四句偈)를 주었다. 아마도 그는 이곳에 머무는 동안 화엄사상의 묘지(妙旨)를 터득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즉, 이곳 문수보살상 앞에 기도하여 꿈에 얻은 게송이 비로 화엄의 내용을 천명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통도사 금강계단 앞의 차나무는 흥덕왕 3년(838) 대렴이 중국에서 가져온 것보다 180년이 앞선다. 180년이 앞서면 무열왕 때이면서 자장율사가 열반(涅槃)에 든 해이기도 한 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1354년이 되었으며, 신라 땅에 이미 차문화가 사찰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는 방증(傍證)이다. 통도사 <사적약록>을 보면 ‘다소촌(茶所村)’이 기록되어 있다.

 

33대(선불교 6조) 육조 혜능(六祖 慧能, 당나라, 638~713) 전법종(傳法終)

혜능선사는 남방에서 활동했다. 혜능은 즉각적인 깨달음, 곧 돈오(頓悟)에 대한 혁명적인 선언을 하여 온갖 전통적인 불교개념·경전·수행법 등을 철저히 배척함으로써 점진적 깨달음, 곧 점오(漸悟)를 옹호하는 신수의 북종선과 그의 남종선의 차이가 발생하게 되었다. 선(禪)은 혜능 때에 집대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 여기서 혜능이 전수받았던 마납가사가 무상에게 전달되는 계기와 무상선사에 대해서 알아보자.

6조 혜능선사는 선이 깨달음이라는 선불교를 완성했다. 혜능은 마납가사를 제자에게 전달하지 않고 측천무후(則天武后)에게 맡겼는데 측천무후는 가사를 지선선사에게 전달한다. 하지만 지선선사는 조사(祖師)의 법맥(法脈)을 이은 선사(禪師)는 아니지만 이 지선선사는 제자 처적에게 마납가사를 전달했고, 처적선사는 신라의 구법승 무상선사를 제자로 받아들여 마납가사를 전승하게 된다. 무상선사는 신라에서 당(唐)으로 구법하러 왔는데 혜능의 제자를 찾아가지 않고 지선의 제자인 처적선사를 찾아가서 법호를 받는다. 무상선사가 당나라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혜능선사는 열반에 든 뒤였다. 여기서 무상선사는 왜? 혜능의 제자를 찾아가지 않고 처적선사를 찾아갔을까? 의문이 들었으나 그 당시 지선선사는 측천무후가 법력에 감복해서 마납가사를 전달했던 시기여서 아마도 그 당시는 지선선사와 처적선사가 널리 이름이 나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기록상으로 지선선사는 조사 법맥에 포한되지 않는다. 이때까지 법맥은 마납가사의 전승으로 법맥을 이었다는 것을 상징성을 가졌지만 마납가사를 둘러싸고 암투(暗鬪)와 질투(嫉妬)와 시기(猜忌)도 많았던 것 같다.

혜능은 측천무후가 자기를 보러 오라고 하는데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찾아가지 않았다. 측천무후가 그러면 혜능선사를 본 것과 같은 마납가사를 자기에게 보내달라고 하자 마납가사를 측천무후에게 보냈다. 그것을 측천무후가 보관하고 있다가 지선선사에게 전달한 것이다. 이를 처적이 물려받고 후에 무상이 물려받았으나 생명의 위협도 느꼈다. 무상은 자신의 제자 무주에게 마납가사를 넘겼으나 그 이후로 마납가사의 행방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이 이후로 마납가사의 전달로서 법맥을 잇는 풍조는 사라지고 스승이 제자를 인가(認可)하여 법맥을 잇거나 법맥을 이을 만한 법을 지닌 사람이 잇게 되었다.

무상선사는 정중종을 개창하여 법을 설파하였는데 염불선이지만 나무아미타불을 불러 서방극락정토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염불선과 다르다는 사실이다. 무상의 인성염불은 범패의 짓소리처럼 소리를 길게 내뱉은 뒤 그 소리가 메아리처럼 작아지는 순간을 화두를 붙잡듯 수행하는 독특한 수행법을 말한다. 소리로 염불을 외면서 들어가는 수행법이 아니라 화두를 붙잡듯 들어가는 수행법이라고 한다. 무상의 사상은 인성여불로 요약되는데 그 정신을 마조(馬祖)가 계승하면서 평상심의 도로 발전시켰다. 이 마조선은 해동으로 전해져서 신라 말기에 태동한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7개파가 마조의 법 제자들인 서당지장, 남전보원, 연관제안, 마곡보철, 장경회휘 선사로부터 법맥을 이음으로서 마조선이 해동으로 흐르는 계기가 되었다. 무상선사의 선법은 혜능과는 다른 독창적인 선법으로 중국초기 선종을 일으킨 위대한 선사로 평가되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이때 현재 간화선 수행의 형태적 모태가 되는 수행방식이 아닌가 추측된다. 혜능의 남종선이 바로 즉각적인 깨들음이라면 무상의 선법은 화두를 들듯이 깨닫는 수행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훗날 이 두 방식을 결합한 것이 간화선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는 부분이다.

마조도일은 무상스님의 제자였다. 남악회양이 현재 7대조사로 되어 있지만 이 자리에 무상선사가 자리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돈황석굴(敦煌石窟)에서 두루마기가 발견되면서 무상선사가 세상에 다시 나타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차의 세계 발행인 최석환님이 최초로 이를 확인했다. 그리고 조사의 법맥을 제대로 찾으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그러나 워낙 오랜 시간 남악회양이 7조로 되어 있어서 순탄치는 않은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이 조사의 반열에 무상선사도 동시에 등재되기를 바래본다. 무상선사는 신라 구산선문의 원조다. 무상선사는 자신의 수행법이 지선과 처적에게서(당화상, 법호를 내린 스님)온 것이 아니라 달마로부터 이어져 온 것이라고 밝혔다. 그것은 철두철미한 두타수행관이었다.

무상선사는 무억(無憶), 무념(無念), 막망(莫忘)으로 가르침을 폈다. ‘무억은 일체 기억하지 말고, 무념은 일체의 망념을 없애며, 막망은 일체를 망각하지 않아야 한다. 이를 계정혜라고 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후에 무상의 뒤를 이은 무주는 무상과는 다른 견해를 가졌다. 762년에 무상선사가 열반에 들자 보당종을 개창하고 무상의 삼구를 다르게 해석하였다. ‘백천만명이거나 한 명이거나 시간을 정하는 일이 없이 의문이 있는 대로 마음을 놓고 질문하라고 하였고, 그 자리에서 견성(見性)시켜 주겠노라고 직심(直心)이 도이며 수행이 도량이며, 심심(深心)이 도량이며, 무염(無染)이 도량이며, 가지지 않는 것이 도량이며, 버리지 않는 것이 도량이라고 설파했다. 그리고 일체중생은 본래 청정하다고 말했다.’ 무상의 삼구인 무억, 무념, 막망에서 막망(莫忘)을 막망(莫妄)으로 고쳐버렸다. 즉 무상이 기억까지도 잊어버리라고 한 것을 무주는 망령될 망(妄)으로 바꾸어서 ‘망령되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무상선사가 말했듯이 보당종은 오래지 않고 소멸하였다. 무상선사가 우려를 하면서도 왜 무주를 법제자로 택하였는지 의문이 드는 부분이다.

쓰촨성의 청두 대지사에 전해오는 기록에 따르면 당대에 무상선사가 대지사에 주석하여 선다법을 행한 이래로 선과 차는 한 몸이라고 설하였다고 전해져 온다고 한다. 선차지법(禪茶之法)을 설하고 행함으로서 선차라는 말이 나오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선차가 훗날 다선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우리나라 선차의 뿌리를 1300년으로 끌어 올렸다.

중국의 오백나한에 무상선사가 모셔져 있는데 석가모니가 첫 번째이고, 달마대사는 307번이고, 6조 혜능선사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무상선사는 455번째에 모셔져 있다. 중국불교의 특징은 부처님의 제자 500나한상을 조성한 것이 아니고, 중국인들이 존경하는 혹은 알려진 인물들을 끼워서 500나한상을 조성한다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34대(선불교 7조) 남악회양(南嶽懷讓, 677~744)

自稱傳愛傳授(자칭전애전수)

소주(韶州:지금의 광둥[廣東] 사오관[韶關])의 조계산(曹溪山)에서 혜능(慧能)을 찾아 돈오법문(頓悟法門)을 받았다. 혜능이 죽은 후 당나라 현종(玄宗) 때인 713년(先天 2)에 남악(南嶽) 반야사(般若寺) 관음대(觀音臺)에 머물면서 혜능 일파의 학설을 널리 폈다. 제자 마조도일(馬祖道一)을 후계자로 법을 전하여 남악 일파를 형성해서 보통 ‘남악회양’이라고도 불린다. 죽은 후 당나라 경종(敬宗)이 '대혜선사'(大慧禪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 무상선사(684~762)

현재 선불교 7조에 무상선사가 자리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그 당시 상황을 보자면 무상의 자리를 남악회양이 차지하고 있다는 얘기인데 무상이 덕순사에서 수행하고 있을 때 마조(馬祖)가 처적을 찾아와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게 되면서 무상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두 사람은 한 스승 밑에서 동문수학한 도반(道伴)이었다. 그리고 도반이면서 무상은 마조의 스승이었다. 마조가 후에 혜능의 법을 이은 남악회양의 법맥을 이어 받아 일부러 지선-처적-무상의 문하임을 알리지 않은 것인지는 모르나 최근에 중국과 한국 불교계가 세운 <무상선사행적비>에서 마조를 남악회양계가 아닌 무상계통으로 인정하였다. 마조가 무상계임을 증명한 문헌은 규봉종밀의 <원각경대소초>이다.

황벽의 제자인 배휴가 쓴 <규봉선사비명병서>를 비판적으로 검토한 후스박사가 있는데 규봉종밀은 원래 법계가 정중무상계의 5세 법손이었는데 하택종의 5세 전승자로 바꾼 것이라고 하였다. 규봉종밀을 자신을 하택종의 5세임을 내세우기 위해 마조를 무상의 제자라고 밝히고 있는데 오히려 이러한 사료(史料)가 무상과 마조의 관계를 밝혀주는 근거가 되어 버렸다. 규봉종밀은 혜능과 하택신회로 이어지는 하택종의 정통성을 내세우고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마조를 무상의 제자로 오히려 사실을 밝히고 있다. 자신도 무상계이나 하택계임을 더 강조하기 위해 마조의 근거를 밝힌 것이다. 하여 오히려 무상의 존재를 알려주는 자료로서 가치를 가지게 되어 버렸다.

 

선차지법(禪茶之法)

2004년 ‘무상선사 학술 연토회’에서 대자사 방장 따이은 스님은 선차지법의 비조가 무상선사라는 사실을 밝혔다. 따이은 스님은 <신선소각사지>를 들어 이와 같이 말했다.

“청두 대자사의 조사는 신라(新羅)의 왕자로서 출가한 무상 선사이다. 참선(參禪)과 품차(品茶)를 하는 기나긴 과정에서 ‘무상선차지법’을 개창(開創)하였으며, 선차문화에 매우 큰 공헌을 하셨다. 대자사에서 참학과 강경을 한 송대의 원오극근 선사는 선차문화를 간접적으로 일본에 전했다. <신선소각사지>의 기록에 의하면 일본승인 무라다슈코(1402~1502)가 중국에 와서 원오극근 선사를 참배하니 선사는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전하고 ‘다선일미(茶禪一味)’라는 묵보(墨寶)를 증송하였다.” 선차의 개조로서 무상은 선차지법을 창안하였다. 혜능에 의해 조사선의 실체를 파악하였다면 무상은 선과 차의 결합으로서 선차를 열었다.

 

35대(선불교 8조)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

무상의 도반이자 제자로 무상의 법을 이어 받고 남악의 법도 이어받음.

마조의 입실제자는 139인이었다. 선종사에서 유래가 없을 정도로 교화방편이 수승(殊勝)했던 선의 대가이며, 큰 교육자였다. 마조의 문하에는 서당지장, 백장회해, 남전보원, 대주혜해, 흥선유관, 장경회해, 대매법상, 석공혜장, 분양무업, 방온거사 등 기라성 같은 선장들이 망라되어 있다. 재전제자로는 위산영우, 황벽희운, 조주종심 등이 있다. 마조의 문하에서 선종 오가(五家) 가운데 위앙종(仰宗) 임제종(臨濟宗) 2파가 분등(分燈)되어 조사선 불교의 중심을 이루게 된다.

마조선사의 선법은 조사선의 사상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 주요 사상으로는 즉심시불(卽心是佛), 도불용수(道不用修),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등을 들 수 있다. ‘마음이 부처(卽心是佛)’라고 하는 것은 마조에 의해 처음으로 설해진 것은 아니다. 이미 선종 초기 혜가와 도신의 설법에 <마음이 곧 부처>라는 표명이 있었다. 즉심즉불(卽心卽佛)이라는 관점은 혜능의 남종선의 핵심법문이었다. 마조는 보다 적극적으로 즉심시불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마조는 홍조종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데 규봉종밀은 마조계의 홍주종에 대하여 아주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종밀은 신회계의 하택종(荷澤宗)을 조계혜능(曹溪慧能)의 정계(正系)로 하고, 마조계의 홍주종은 방계(傍系)로 배척했다.(규봉종밀은 하택종의 5세임을 내세우기 위하여 마조를 공격하는 형세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위에 설명한 바와 같이 오히려 그런 기록이 무상의 존재를 증명해주고 있다.)

“홍주종의 법계(法系)는 육조 혜능(慧能)의 방출(傍出)이다. 한 선사가 있었으니 그의 성은 마(馬), 이름은 도일(道一)이다. 검남(劍南) 김화상(金和尙)의 제자이다. 높은 뜻을 세워 제방을 주유하다가 남악(南嶽)에 이르러 남악회양선사를 만나 종교를 논의했지만 회양에 미치지 못했다. 전의부법(傳衣付法)은 조계(曹溪)를 적사(嫡嗣)로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곧 회심하여 회양의 법을 품승(稟承)했다. 처주(處州), 홍주(洪州)에 머물며 성이나 산을 가리지 않고 법문(法門)을 열어 도류(道流)를 이끌었다. 홍주 개원사(開元寺)에서 회양의 언지(言旨)를 홍전(弘傳)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홍주종(洪州宗)이라고 불렀다. 회양(懷讓)은 조계문하(曹溪門下)의 방출(傍出)의 파도(派徒)로서 조계에는 이와 같은 사람이 수천에 달한다. 하택(荷澤)의 동학이다. 스스로 수행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을 뿐 개당하여 법을 펴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조화상(馬祖和尙)은 크게 그의 교단을 구성하였기 때문에 일종(一宗)의 원천을 이루었다.”

 

** 김지장(김교각, 696~794)스님

아쉽게도 한국에서는 스님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을 뿐더러 그에 대한 연구마저 미흡하다. 중국에 여러 자료가 존재하는데 그 중 813년에 비관경이 편찬한 <구화산 화성사기>가 스님의 열반(涅槃) 20여년 후의 기록으로 가장 신뢰할 수 있겠다.

김지장으로 알려진 김교각스님은 신라 33대 성덕왕(聖德王)의 장자(長子)로 알려져 있다.(신라 왕국의 계보는 무열왕을 거쳐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신문왕-효소왕-성덕왕으로 이어지는데 성덕왕은 신문왕의 둘째아들로 흥광대군 효명. 그의 이복동생 김승경과 김현영이 후에 제34대 효성왕과 경덕왕으로 계보를 잇게 된다.) 지장은 그의 법명이며, 교각은 깨달은 자란 의미로써 후대에 중국에서 추존된 명칭이다. 속명은 김수충(守忠)으로 696년(효소왕3년)에 태어났다.

김지장스님은 신라에서 중국으로 건너 갈 때 ‘차종자(金地茶)와 황립도(黃粒稻-볍씨), 오차송(五叉松) 그리고 선청(善聽)이란 개를 데리고 갔다.’고 한다. 죽을 때까지 스님을 모셔 이 삽살개도 나중에 구화산 수호신으로 동상이 세워졌다. 구화산에서의 김지장스님의 행적은 낡은 베옷 한 벌과 작은 솥 하나로 산중의 추위에 초탈한 심오한 구도의 생활과 당시 피폐(疲弊)한 민중을 위한 중생구제의 몸소 실천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주는 구제의 도를 보임으로서 당시 동민들과 제자들의 존경과 추앙의 대상이 된 것이다. 794년 7월 30일, 좌탈열반에 드시면서 “3년 후 내 시신이 썩지 않았다면 내 육신을 보전토록 하라”는 제자들의 당부와 실제로 썩지 않은 육신을 보여줌으로써 지금까지도 <육신보전>으로 구화산의 지장성지의 표상이자 존경의 대상이 되신 것이다.

차에 대한 기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개옹다사(介翁茶史)>, 작자 유원장(1669년경), 구화산에 공경차(空梗茶)가 있는데 이는 김지장이 심은 바이다(是金地藏所植)... 김지장은 신라스님으로 당나라 지덕(至德) 연간 바다를 건너와 구화산에 거처하며 이 차를 심었다(植此茶).

② <구화산지(九華山志)>, 중화민국 67년 영인본 발행. 금지차(金地茶)는 나무줄기가 속이 비어 작은 대나무와 같다(梗空如). 전하는데 김지장이 신라로부터 가져온 차씨였다고 한다(相傳金地藏携來種).

지금도 구화산의 차와 술이 유명한데 그 찻잎은 김교각 스님이 신라에서 가져간 것으로 전통재배방법으로 키운 것을 지금에서도 그 방법 그대로 전래된다고 하니 중국 속의 우리 문화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 <구화산록>에 김지장 차나무는 김지장 스님이 남대에 살았을 때 심었다는 ‘남대공심차’로 알려져 있다. 그곳은 오늘날 소천태의 남대암이라고 불린다. 안후이농업대학의 왕젠항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지금도 약 10그루의 차나무가 있는데 높이가 약 160cm, 나무 폭은 130cm이며, 잎의 길이는 11.5cm라고 한다. 지금까지 밝혀진 김지장의 차나무 중 최고의 기록이다. 이 차나무는 지장스님이 고배경대에서 은거하고 천태동굴에서 수행하면서 차를 달여 먹었다는 설득력 있는 장소에 자생하고 있어 지금까지 가장 오래된 차나무로 인정받아왔다. 그러나 이번에 노호동에서 발견된 금지차는 김지장 스님이 제일 처음 구화산에 은거하면서 수행했던 동굴 정상에 남아 있어 설득력이 더욱 강하다. 차나무의 높이가 230cm나 되고, 차나무의 둥치는 사람 팔뚝보다 굵다.

노호동에 관한 역사 기록은 <구화산창건화성사기>에 자세히 전해 온다. 노호동은 김지장 신앙의 핵심체요. 지장사상의 발원지이다. 김지장은 구자산 구자암에서 일차적인 좌선수행을 접고 동굴수행의 단계로 접어들기 위해 은거할 수 있는 동굴을 찾아 나섰다. 여기서 만난 이가 바로 청양 고을의 거사 제갈절이라는 사람이다. 제갈절은 우연히 구화산에 올라왔다가 지장 스님이 혹독하게 수행하는 모습을 보고 그 모습에 감화하여 뒷날 화성사를 창건하기에 이른다.

노호동이 주목받는 이유는 제갈절 뿐만 아니라 지장의 법력에 감화된 산신이 샘물을 솟아나게 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샘물과 차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금지차나무는 노호동굴의 산 능선을 타고 바위틈에 자생하고 있다. 지장불차의 제다비법을 이어 온 노호동의 노비구니스님의 말에 의하면 지장불차는 반발효차였다. 지장스님의 이름을 붙인 구화산의 불차들은 녹차류에 속한다. 그러나 지장스님이 마셨던 지장차는 우롱차류였다. 노호동의 노비구니 스님은 지장스님이 만들었던 구중구포 방식을 그대로 재현한 지장불차를 내놓으면서 수행인은 차와 선을 가까이해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말했다.

 

36대(선불교 9조) 백장회해(百丈懷海, 749~814)

찻잎을 따는 그 자체가 수행임을 간파. 선다일미가 유행하기 전에 체(體-조사선)와 용(用-여래선)이란 화두가 선가에 유행, 백장회해 선사의 두 제자 위산과 앙산에 의해 계승(위앙종 탄생. 앙산혜적) 훗날 원오극근 선사의 다선일미로 이어지고, 다선일미 정신을 일본인 승려가 이어감.

“하루 지음(作)이 없으면 하루 먹지 아니한다.”라고 하는 백장의 말은 그의 선풍(禪風)을 나타내어 주는 유명한 말이다. 그는 백장산에 율원(律院)으로부터 독립한 선원(禪院)을 창설하고 다시 율전(律典)의 규정에 구애받지 않는 선종 독자의 규율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백장청규(百丈淸規)>이다. 많은 수도승이 일정한 장소에 모여 자급자족하는 집단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는데 <백장청규>는 이러한 변화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 남전보원선사(748~834)

조주선사의 스승인 남전 보원선사는 즈차취(喫茶去)를 대중화 시킨 조주의 스승으로 그는 제자 조주 종심을 통해 ‘선(禪)과 차(茶)는 같다’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마조의 다선일여 정신을 이어온 백장은 ‘일일불작이면 일일불식’을 외쳤고, 남전은 ‘이류중행(異類中行)’사상을 외쳤다. 문혁(文革)의 회오리바람에서도 선차가 뚜렷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남전의 이류중행 사상에서 비롯되었다. 이어 조주가 츠차취라는 공안을 통해 남전의 즉여 도리를 실천한 것이다. 마조의 법을 잇는 남전이 ‘소가 되고 말이 되라’고 평생을 질타한 이류중행의 외침은 바로 다선일여의 경계를 직관적으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남전의 속성은 왕씨이고 신정현에서 태어나 10세 전후에 출가하였다. 30세가 되어서 회선사에서 호율사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장시로 가서 마조 문하에서 수선 안거 이후, 마조의 800여 문도 중 으뜸가는 법제자가 되었다. 마조 선사의 3대 제자는 백장, 남전, 서당선사를 가리킨다. 마조로부터 사물 밖으로 벗어났다는 평가를 받은 남전은 정원 11년(795)에 지양 남전산에서 선지를 드노폈을 뿐 아니라 30여년간 소에게 풀을 먹이고 논밭을 갈며 산에서 내려오지 않고 차나무를 경작하며 대중을 교화했다.

남전의 법은 한 줄기는 철감도윤에 의해 해동(신라, 그 차맥은 남전선사의 탑비가 부도가 있는 화순 쌍봉사에서 계승되었다.)으로 갔고, 또 한 줄기는 조주종심 선사와 함께 허베이성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다선일여 정신을 이어갔다. 서여 민영규 선생은 남전이 외친 이류중행 사상이 고려 일연선사가 1260년 <중편조동오위>를 지으면서 경초선으로 되살아났다고 했다. ‘경초’란 마우가 먹는 풀을 가리킨다. 남전의 ‘수고우’공안을 생각한 것이다.

 

** 서당지장선사와 선불교의 동류지설

서당지장이 중요한 것은 그의 문하에서 도의, 혜철, 홍척 등의 구산선문 중 3문이 발원하기 때문이다. 홍척(洪陟)의 실상산문(實相山門, 남원 실상사)과 체공혜철(體空慧哲, 785∼861)의 동리산문(桐裏山門, 곡성 태안사) 그리고 보조체징(普照體澄, 804∼880, 도의선사의 손자상좌)의 가지산문(迦智山門, 장흥 보림사)이 서당지장의 직계라 하겠다. 아홉 산문 중 세 산문이 지장의 법손인 것이다. 서당이 동이족이기 때문에 중국 선종사에서 점차 사라졌다기보다는 후대에 제자들이 받쳐주지 않고, 그나마 훌륭한 제자들은 모두 신라로 돌아갔기 때문이었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서당은 도의에게 인가를 하면서 “진실로 법을 전한다면 이런 사람 아니고 누구에게 전하랴”라면서 법명을 ‘도의’(道義)라고 한다. 이때 도의라는 이름이 세상에 드러난다. 도의는 다시 두타행을 벌이던 중 마조(馬祖)의 선(禪)을 이어받은 백장회해(百丈懷海)를 만난다. 백장은 그를 보자마자 “강서(江西)의 선맥이 모두 동국으로 가는구나”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백장은 서당에 비해서는 중국 쪽의 안타까움을 대변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백장의 문하에서는 나중에 중국 남종선을 짊어지는 선승들이 이어진다. 백장의 선문은 황벽희운, 임제의현 등으로 이어져 오늘날 한국 조계종의 임제종 득세의 바탕을 마련하게 된다. 도의는 마조의 뛰어난 제자 두 분을 만난 셈이다. 흔히 서당지장이 마조의 경(經)을 이었고, 백장회해는 선(禪)을 이었고, 남전보원은 사물을 보는 법(사물에서 깨달음을 얻는 법)을 이었다고 한다

가지산 보림사는 보조체징 이전에 화엄종의 큰 승려인 원표대덕(元表大德)이 절을 세워 ‘가지산 보림사’라고 하였다. 신라 경덕왕은 원표대덕의 공을 기려 왕명으로 1,000칸의 불궁을 짓게 하고, 장생표주(長生標柱)를 세워(경덕왕 18년·759년) 성역으로 지정했다. 보조국사 체징에 이르러 전라남도 장흥 가지산에 보림사(寶林寺)가 들어서고 본격적인 해동선맥을 형성하게 된다. ‘보림’이라는 이름은 바로 선종의 법계를 뜻하는 것으로 중심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보림사와 차와 관련 대목은 ‘보조선사창성탑비(普照禪師彰聖塔碑)’에서 엿볼 수 있는데 차는 당시에 이미 국왕의 하사품으로 많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보림사 차는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1814∼1888)의 [임하필기(林下筆記)]가 발견됨에 따라 유명해졌다. 이유원은 여기서 보림사의 제다법을 ‘구중구포’ 방식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구중구포는 그동안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나 이 기록으로 인해 사실임이 증명됐다.

초의 의순이 서울의 양반들에게 차를 선물할 때 보림사 차를 선물하였다는 기록이 [임하필기] (32권) ‘삼여탑(三如塔)’에 나온다. “대둔사(大芚寺) 승려 초의(草衣)가 그의 선사인 완호(琓虎) 대사를 위하여 삼여탑을 건립한 다음 도위(都尉) 해거(海居) 홍현주(洪顯周)에게 명(銘)과 시(詩)를 부탁하고 자하(紫霞) 신위(申緯)에게 서문을 부탁하면서 보림차(寶林茶)를 선물하였다. (중략) 보림차는 강진(康津)의 죽전(竹田)에서 생산되는데 우리나라 최고의 품질이다.” “강진 보림사 대밭의 차는 열수 정약용이 체득하여 절의 승려에게 아홉 번 찌고 아홉 번 말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 품질은 푸얼차 못지않으며 곡우 전에 채취한 것을 더욱 귀하게 여긴다. 이는 우전차(雨前茶)라고 해도 될 것이다.”

보림사 차 맛은 대단한 명성을 누렸던 것 같다. 초의는 자신이 직접 차를 재배하고 법제했는데 왜 자기 차는 그만두고 보림사 차를 한양으로 가져갔을까? 적어도 자신이 만든 차보다는 보림차의 명성이 높았던 것 같다. 보림사는 태고보우 국사와도 인연이 깊다. 아래 한국선불교 1조인 태고보우선사편을 참고하면 된다.

 

37대(선불교 10조) 황벽희윤(黃檗希運)

 

38대(선불교 11조) 임제의현(臨濟義玄, ?~866)

선불교의 흐름은 임제종(臨濟宗)으로 대체로 정리됨.

<전등록>에 임제가 황벽의 문하를 떠날 때 황벽선사가 시자를 불러 “백장화상의 선판(禪板)과 궤안(机案)을 가지고 오라!”고 하였다. 선사는 곧바로 “시자야! 불을 가지고 오너라!”고 했다. 황벽화상은 “비록 그렇긴 하나 자네는 그냥 가져가도록 하라! 이것이 이후 뒷날 천하 사람들의 쓸데없는 잔소리를 차단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임제는 인가증명으로 주는 선판과 궤안을 황벽화상이 전해 주려고 하는 그 장소에서 스승의 말이 끝나자마자 당장 불태워 버리겠다고 하는 임제의 모습에서 어떤 모양과 형상(有相)으로 증명을 하려고 하는 것을 철저히 부정하며, 어떠한 깨달음의 자취나 흔적에 떨어지지 않는 무상과 무사(無事)의 입장임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임제의 모습을 지켜본 황벽화상은 미래에 임제의 활약에 대하여 ‘이후에 천하 사람들의 잔소리를 완전히 차단시켜 버릴 것이다’라고 예언적인 기대를 한마디로 언급하고 있다. 이 말은 이후에 임제선사가 활약하게 되면 반드시 불법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시비 분별을 완전히 차단시켜 버리고 올바른 정법을 펼치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스님은 조주종심(趙州從諶)스님과 동향(同鄕)일뿐만 아니라 두 분은 모두 당말(唐末)이라고 하는 격변의 시대를 산 동시대인이기도 하다. 그런데 같은 산동 사람이지만 북방인(北方人)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분은 조주스님이 아닌 임제스님이다. 조주스님은 오히려 온화한 남방인(南方人)의 기질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조주스님의 선법을 여성적이라 한다면 스님의 선법은 남성적이며, 조주스님의 선법을 언설적(言說的)이라고 한다면 스님의 선법은 행동적(行動的)이고, 조주스님의 선법을 섬세하다고 한다면 스님의 선법은 거칠며, 조주스님을 기지(機智)의 인간(人間)이라고 한다면 스님은 우직(愚直)의 인간(人間)이다.

주지하다시피 중국의 선종인 오가칠종(五家七宗)은 송대(宋代)에 이르면 임제일종(臨濟一宗)을 제외하고는 모두 쇠미해진다. 오직 임제종 이외로는 조동일파(曹洞一派)가 송말(宋末)에 잠깐 빤짝였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중국선의 독자적인 개성과 가치를 구현한 스님의 선법은 중국불교가 개척해 온 장구한 역사적 발전 단계 가운데에서도 가장 특징적이고 진보적인 정점에 속한다. 스님은 형해화(形骸化)된 전통이나 사상적 권위, 형식과 타성의 굴레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인간해방의 근본 문제를 참신하게 제기하고 선체험(禪體驗)의 가치를 소리 높여 외친 선승(禪僧)이며, 지금까지도 강렬한 안광(眼光)을 내뿜고 있는 정신세계의 거인이다.

스님은 마조도일(馬祖道一)스님에 의해 대성된 남종선의 대기대용(大機大用)의 선법을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고 하는 절대주체 확립의 도로 완성했고, 매우 날카롭고 명료한 언어와 행업(行業)으로 독자적인 선풍(禪風)을 선양하였으며, 이후 그 문하(門下)가 결국 송대(宋代) 이후 중국불교의 주류를 형성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후대에 우리가 선종을 말하면 그것은 모두 스님이 개조(開祖)인 임제종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부처란 바로 면전(面前)에서 법을 듣는 이 사람이고, 깨달음이란 바로 이 사람을 깨닫는 것이다. 스님의 이처럼 지금 여기에서 살아 움직이고 인식한다는 말은, 심성설(心性說)의 측면에서는 마조스님의 평상심(平常心)을 친근하게 표현한 것이 되며, 공부법(功夫法)의 측면에서는 마조스님의 돈오(頓悟)를 더욱 생생하게 나타낸 것이 된다.

또한 마조스님은 평상심(平常心)을 조작(造作), 시비(是非), 취사(取捨), 단상(斷常), 범성(凡聖)이 없는 것이라고 다분히 소극적이고 부정적이며 관념적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스님은 지금 여기서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라 하여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결국 스님의 선법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선의 요체를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조계 조사선법의 한층 더 발전 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임제선의 특징은 마음 또는 불성(佛性)을 ‘사람(人)’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데 있다.

임제스님은 마음의 작용성을 극대화하고 그 모든 것을 하나로 모아서 ‘사람(人)’이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선법을 개척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마조스님이 자성(自性)의 추상성을 극복하면서 일심(一心)이라는 평상심(平常心)의 선을 만들어서, 조사선을 보다 현실적인 종교로 만들었다면, 스님은 마음이라는 말조차도 극복하고 ‘지금 여기서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라고 하는 지극히 평범한 언어를 구사하면서, 선법을 더욱 구체화, 일상화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대들이 선조이신 부처와 다름이 없고자 한다면 밖으로 구하지 않기만 하면 된다. 그대들의 한 생각 마음속의 청정한 빛은 그대 집 속의 법신불(法身佛)이며, 그대들 한 생각 마음속의 분별없는 빛은 그대 집 속의 보신불(報身佛)이며, 그대들 한 생각 마음속의 차별없는 빛은 그대 집 속의 화신불(化身佛)이다. 이 세 가지 부처는 그대들이니, 즉 지금 눈앞에서 법을 듣는 여러분 자신이다. 다만 밖으로 치달려 구하지 않기 때문에 비로소 그런 능력(功用)이 있는 것이다. 그대들이 참다운 견해를 얻고자 할진대 오직 단 한 가지, 세상의 속임수에 걸리는 미혹함을 물리쳐야만 한다. 안으로나 밖으로나 만나는 것은 모두 죽여 버려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야만 비로소 해탈하여 어떠한 경계에서도 투탈자재(透脫自在)하여 얽매이지 않고 인혹(人惑)과 물혹(物惑)을 꿰뚫어서 자유자재하게 된다. 그대들은 석가세존과 다름이 없으니, 오늘 이 많은 작용들에 무슨 모자람이 있는가? 여섯 갈래(六根)의 신령스런 빛이 한 순간도 끊어진 적이 없으니, 만약 이런 줄 알면 그저 한평생 아무 일 없는 사람(無事人)이다.”

 

임제스님은 어디에도 구속 안 받고 자신만의 언어로 ‘선’을 표방.

“부처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임제선은 한마디로 살아 움직이는 선이다. 이것은 스님이 ‘마음’이라는 비교적 정태적(靜態的)인 용어보다는 ‘청법인(聽法人)’이라든지 ‘무의도인(無依道人)’이라든지 ‘지금 눈앞에서 듣고 있는 것’이라든지 하는 훨씬 동태적(動態的)이고 현용(現用)의 의미가 있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점을 보아서도 알 수가 있다. 결국 임제선법은 바로 ‘이(살아 움직이는) 사람’을 파악하는 것이 목적인 선(禪)이다.

임제스님은 어디에도 구속받지 않으면서 철저히 자신의 언어만으로 자신이 체험하는 선을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점에서 스님이야말로 가장 ‘중국식(中國式) 선법(禪法)’에 철저했던 선사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스님은 마조계 조사선의 전통 아래에서, 심즉시불(心卽是佛)의 일심법(一心法)을 말하고, 허공(虛空)인 마음의 무한한 작용성과 만법(萬法)을 인식하는 작용을 표방한다. 그렇지만 스님의 위대성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근원자인 마음을 ‘바로 지금 여기에서 설법을 듣고 있는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우리는 “안으로나 밖으로나 만나는 것은 모두 죽여 버려라”고 설파하면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고 사자후(獅子吼)를 토하는 임제스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중국선(中國禪)’이 완성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 조주종심선사(778~897, 끽다거(喫茶去, 츠차취) 공안)

조주선사는 조사가 아니다. 임제선사와 같은 시대 사람으로 북쪽에서 차를 가지고 끽다거(喫茶去)의 창시자이고, 그것을 후에 임제선사의 제자들이 이어가서 다선일미가 되었다.

120세를 살다간 조주선사는 40년은 참선(參禪), 40년은 운수행각(雲水行脚), 그리고 나머지 40년은 제자 지도로 일생을 보낸 당대 최고의 선승(禪僧)이다. 14세의 나이로 남전보원 선사의 문하에 들어간 이후 40년 동안 시봉을 하였다고 한다. 이후 834년에 남전스님이 돌아가시자 56세의 늦은 나이로 행각을 시작하여 80세의 나이로 관음원에 머무르기 전까지 남방과 북방을 두루 돌아다니셨다. 행각시절에 스님은 늘 “7살 먹은 아이라도 나보다 나은 자라면 내가 물을 것이요, 80먹은 노인이라도 나보다 못한 이라면 내가 가르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혈혈단신(孑孑單身) 주장자(拄杖子)와 바리때 하나에 의지한 채 자연과 중생을 벗 삼아 적막하고도 힘겨운 행각을 하셨다고 한다.

조주선사는 크게 선도(禪道)를 펼쳐 일가(一家)의 계보(系譜)를 세우지 않은 채 독자적으로 선풍(禪風)을 날리셨다. 종파를 초월하여 납자들과 세속인들의 존경을 받으셨고, 120세의 나이로 돌아가실 때에는 사리를 수습하는 등의 일을 일체 금하시고, 단정히 앉아서 입적하셨다고 한다. 방(棒)과 할(喝)을 쓰는 대신 평상적인 가운데 간결하고도 소박한 언어로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 조주선사는 대표적인 화두공안(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무’자 화두, 뜰 앞의 잣나무, 끽다거 등)과 함께 수많은 일화를 통해 특유의 선사상을 확인할 수 있다.

 

** 진감혜소국사<774(혜공왕 10)~ 850(문성왕 12>.

신라의 승려

속성(俗姓)은 최씨(崔氏)로 전주 금마 출신이며, 어렸을 때 집이 가난해 생선장사를 했다. 804년(애장왕 5) 뱃사공이 되어 당(唐)나라 창저우[滄州]에 가서 신감(神鑒)에게 출가했는데 얼굴이 검다고 흑두타(黑頭陀)로 불렸다. 810년(헌덕왕 2) 충산[崇山] 샤오린사[小林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앞서 당나라에 와있던 도의(道義)를 만나 함께 다니다가 도의가 귀국하자 종남산에서 3년 동안 지관(止觀)을 닦은 뒤 길거리에서 짚신을 삼아 3년 동안 오가는 사람들에게 보시했다. 830년(흥덕왕 5) 귀국하니 왕이 조서를 내려 위로했다.

상주 노악산의 장백사(長栢寺)에 있다가 지리산으로 가서 삼법화상(三法和尙)이 세운 절의 남은 터 위에 절을 지었다. 838년(민애왕 1) 민애왕이 즉위하여 만나기를 청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이에 왕은 선사가 색과 공을 초월하고 선정과 지혜를 모두 원융했다고 하여 사신을 보내 혜조(慧照)라는 호를 내렸으며, 후에 소성왕의 이름을 피하여 혜소로 고쳤다. 그뒤 지리산 남령(南嶺)에 옥천사(玉泉寺:지금의 쌍계사(雙磎寺)임)를 짓고 조계(曹溪) 육조(六祖)의 영당을 세웠다. 성품이 질박하고 기교를 부리지 않았으며, 범패(梵唄)를 도입하여 널리 보급하기도 했다. 시호는 진감(眞鑑), 탑호는 대공영탑(大空靈塔)이며, 최치원(崔致遠)이 글을 지은 비가 경상남도 하동군 쌍계사에 있는데 이 비에는 ‘한명(漢茗)’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39대(선불교 12조)흥화존장(興化存獎) / 40대(선불교 13조)남원도옹(南阮道顒) / 41대(선불교 14조)풍혈연소(風穴延沼) / 42대(선불교 15조)수산성념(首山省念) / 43대(선불교 16조) 남양선소(南陽善昭) / 44대(선불교 17조)자명초원(慈明楚圓)

 

45대(선불교 18조) 양기방회(揚岐方會, 992∼1049)

속성은 냉(冷)씨로 강서성(江西省) 선춘현(宣春縣) 출신이며, 20세에 균주(筠州, 강서성 고안현)의 구봉산으로 출가하여 도오산(道悟山)에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출가 초기 스님은 후일 그가 주석한 강서성 양기산 보통선사에서 10여리 쯤 떨어져 있는 남원사(南源寺)에서 감사(監寺: 선원에서 주지를 보조하여 절의 일체 서무(庶務)를 총괄하는 소임)를 맡고 있었다. 그러나 완전한 지혜에 대한 의문을 지울 길이 없었다. 그래서 하루는 스승인 석상초원(石霜楚圓, 986∼1039) 선사에게 물었다. “불법(佛法)이란 어떤 것입니까.” 그러나 스승의 대답은 엉뚱했다. “선원의 일이 이처럼 많은데 쓸데없는 소리 말고 네가 맡은 창고 일이나 부지런히 하거라.” 스님은 그 후에도 여러 번 반복하여 불법에 대하여 선사에게 물었지만 그때마다 스승은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기회를 엿보다가 어느 날 스승이 출타를 했다가 비에 흠뻑 젖어서 돌아오는 것을 보고는 스승의 멱살을 움켜쥐며 말했다. “이 늙은이야, 오늘 나에게 불법에 대해서 일러주지 않으면 방망이로 요절을 낼 테다.” 이에 스승이 말했다. “자네도 원래 이 일을 알고 있지 않나.” 스님은 스승의 이 말을 듣자말자 그 자리에서 확연히 깨닫게 된다. 그래서 고마움을 이기지 못하여 진탕도 개의치 않고 엎드려 스승께 절을 올렸다.

양기방회 스님과 황룡혜남 스님이 임제종 양기파, 황룡파를 개창. 양기파는 인재 많이 배출해 임제종의 선(禪) 전통을 계속 이어갔다. 임제종의 개조는 임제의현 선사이다. 그러나 법제자 흥화존장(興化存奬, ?∼924) 선사로부터 수산성념(首山省念, 926∼993) 선사에 이르기까지 초기 임제종은 임제의현 스님이 일으켰던 선풍(禪風)을 답습하는데 급급할 뿐 새로운 선풍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임제종 분양선소(汾陽善昭, 947∼1024)의 제자 석상초원의 문하에서 배출된 양기방회 스님과 황룡혜남(黃龍慧南, 1002∼1069) 스님이 개창한 임제종 양기파와 황룡파가 공안선(公案禪)의 시대에 접어든 새로운 선풍을 대표하게 된다.

송대(宋代) 이후 동아시아 선종을 석권한 임제종 양기파는 비교적 법맥이 일찍 끊어진 임제종 황룡파와는 달리 중국 선종사에서 그 의미가 깊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우수한 인재들을 계속 배출하면서 온건고담(穩建古淡)한 임제종의 선 전통을 계속 이어갔을 뿐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 송대 이후의 도가(道家)와 성리학(性理學) 등이 선종(禪宗)의 종지로부터 큰 영향을 받을 때 그 근원지의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임제종 양기파는 고려(高麗) 말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3) 국사가 스님의 12세손 석옥청공(石屋淸珙, 1272∼1352) 선사로부터 이어온 법맥을 받아왔다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한국 선종사에도 매우 의미가 깊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우리나라의 조계종은 넓은 의미로는 임제종 법맥 아래에 있지만 좀더 세밀하게는 임제종 양기파의 선풍을 그 가풍으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46대(선불교 19조)자운수단(自雲守端)

** 백운수단(白雲守端, 1025~1072)

속성은 주씨였고, 후난성 형양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책을 읽어 문장을 지을 수 있었으나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었다. 24세 때 다릉욱 선사에게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은 후에 양기방회 성사를 참방했다. 백운수단은 양기방회의 시자(侍子)를 지낸 뒤 28세 되던 해에 강주에 있는 승천사 주지가 되었고, 나중에는 서주에 있는 백운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백운수단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백운수단은 스승에게서 배운 대로 옛사람들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것을 철저히 반대하였다.

 

47대(선불교 20조) 오조법연(五祖法演)

공안 참구의 체계화는 오조법연에서 본격화되었다고 보겠는데 그는 무자 공안을 참구토록 강조하였다.

 

48대(선불교 21조) 원오극근(園悟克勤, 1063-1135)

<원오선사심요>는 벽암록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원오극근 스님에게 당시 법을 묻는 선승과 사대부들, 그리고 제자들에게 답서로써 보낸 편지글을 모아 펴낸 서간집이다. 원오극근 선사의 특징은 여러 조사들의 공안과 기연연구들을 매 편마다 제시하긴 하나 그것을 일관토록 하지 않고 여러 개의 공안들을 동시에 제시해 줌으로써 그것을 지표삼아 구경을 직하에 요달하도록 강조한 것이다. 반면 대혜 종고에 와서는 오직 무자 공안 하나만을 끝까지 참구하여 안신입명처를 찾도록 강조하였다. 더러는 간시궐 등 다른 몇 개의 공안들을 동시에 제시하긴 하나 주로 한개의 공안으로 결판내도록 하는 간화선이 확립된 것은 대혜에 와서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간화선 확립시기인 법연- 원오- 대혜의 3대 가운데서 원오의 심요는 그 교량역할을 한 법어들이다.

원오선사의 저술 중에 이 심요는 평생 썼던 그의 편지글을 제자들이 모아서 펴낸 책이다. 이하에 실린 글들은 심요라는 제목이 시사하듯이 하나같이 직지단전의 종지를 드러내는 데 역점을 두고있다. 그리고 선문에서 가장 금기시하는 교리적인 설명이나 고정된 형식에 얽매이지 말 것을 매 편에서 강조하였다. 옛 선지식들의 기연이나 말씀들을 종지를 이해하는 착안점으로 제시하면서, 참선하는 납자들의 본분자세나 선지식으로서 가져야 할 안목과 삶의 태도등을 편지 받을 사람의 공부정도와 그들이 처한 상황을 고려하면서 자세하게 지시해 주고 있다.

특히 송대에는 사대부들 사이에 참선이 유행한 관계로 이하 글 속에서도 사대부들에게 주는 편지가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송대에 만들어진 다른 저술과는 달리 여기서는 재가, 출가를 막론하고 염불이나 기도, 혹은 당시 사회문제나 불교계에 있었던 사건들에 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고, 오로지 화두참선으로 일관된 이야기뿐이다. 그런 만큼 이 심요는 임제종 선승들 사이에 종안을 판가름하는 지침서로 읽혀 왔으며, 대혜스님의 편지글 모음집인 서장(書狀)도 형식상 닮은 점으로 보아 이 책을 답습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책에는 상권 70편 하권 73편 모두 143현의 글이 실려 있으며, 이중 사대부들과 나눈 편지는 32편이다.

 

원오극근선사의 묵적 다선일미를 호구소룡에게 써서 줌.

다선일미 화경청적(和敬淸寂)의 계승 : 임제-황룡-양기방회-백운수단-원오극근-호구소륭-석옹청공-태고보우(차와 선은 한 길 설파, 고려 공민왕 때 선이 자리 잡음) 양기방회와 원오극근은 한국 선종의 뿌리라고 알고 있으나 무상선사가 있었다는 것이 알려지므로 인해서 한국선종이 시작된 계기된 태고보우가 인가를 받고 돌아와서 시작된 것이나 무상선사가 달마선종의 맥을 이미 잇고 있었으므로 그 연원은 신라 구산선문까지 더 오래 거슬러 올라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선일미(茶禪一味)

일반적으로 ‘다선일미’의 정신은 그 기원을 중국 송(宋)나라 때로 보지만 사실 그 기원은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 당(唐)나라 때로 볼 수 있다. ‘다선일미’ 정신을 일본에 직접적 영향을 준 근원지는 중국 절강성 항주시 여항(余杭)의 경산사(徑山寺)이다. 경산사의 ‘다선일미’ 정신은 다시 당나라 때의 고승이자 협산(夾山 : 지금의 호남성(湖南省) 상덕시(常德市) 석문현(石文縣)에 위치)의 개산종조(開山宗祖)로 협산사(夾山寺)의 주지로 있던 선회선사(善會禪師)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선회로부터 계속 이어져 내려온 ‘다선일미’의 정신은 송나라 때에 이르자 협산사에서 선회선사의 ‘다선일미’의 법통을 이어 받은 원오극근(圓悟克勤)스님에 의해 더욱 일어나게 된다.

원오극근선사는 20여 년간 협산사 주지로 있으면서 ‘차(茶)와 선(禪)의 관계’에만 몰두하여 마침내 ‘다선일미’의 참뜻을 깨닫고는 그 자리에서 일필휘지(一筆揮之)하여 ‘다선일미(茶禪一味)’라는 네 글자를 썼으며, 이로 인해 중국의 선풍은 크게 일어나게 되었다. 원오 선사의 문하에 크게 촉망받는 제자가 두 명 있었는데 바로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선사와 호구소륭(虎丘紹隆, 1077~1136)선사였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어려서 출가하여 협산사에서 원오 선사를 20여년이나 스승으로 모시며 정진하였다.

그 뒤 남송(南宋) 소흥(紹興) 7년(1137년) 종고(宗杲)선사는 승상 장준(張浚)의 추천으로 황명(皇命)을 받들어 항주 여항의 경산사(徑山寺)의 주지가 되었으며 아울러 ‘다선일미’의 선풍을 크게 일으키게 된다. 종고선사가 경산사의 주지로 온 이듬해 여름에는 설법을 듣고자 참가하는 승속(僧俗)이 무려 1,700여명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수많은 승려와 신도들을 위한 각종의 다연(茶宴)이 베풀어지고, 이에 따라 《선원청규(禪院淸規)》를 바탕으로 한 각종의 사찰다례의 의식 등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이로써 바로 그 유명한 ‘경산다연(徑山茶宴)’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는 또 일본에도 아주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남송 말년에 일본 다도의 비조(鼻祖)격인 에이사이(榮西禪師, 1141~1215)는 두 차례나 중국을 다녀가게 되고, 에이사이선사는 이때 원오선사가 지은 《벽암록》과 함께 원오선사가 친필로 쓴 ‘다선일미’의 묵적까지 함께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갔으며 뿐만 아니라 1191년에는 일본의 다경(茶經)이라고 할 수 있는 《끽다양생기(喫茶養生記)》를 저술하여 광범위하게 선도와 다도를 전파하였다.

 

화경청적(和敬淸寂)

화경청적은 백운선사가 제자들에게 내린 화두인데 송나라로 유학 온 일본선승들이 돌아가서 다도 체문으로 사용하여 일본다도의 핵심이 되었다. 백운선사는 양기 방회(楊岐方會)에게 수참(修參)하여 양기방회의 법사자(法嗣子)가 되었으며, 또한 남악(南嶽)의 12세손이다. 선사는 차를 마시면서 화경청적(和敬淸寂)이란 화두공안과 명선(茗禪)이란 화두공안으로 참구(參究)하는 다담선을 개창하였다. 선사(禪師)의 뒤를 이어 다담선(茶湛禪)을 계승한 사람은 중국에서는 화경청적(和敬淸寂)이란 화두를 가지고 다도회(茶道會)를 조직하여 세상에 널리 알렸던 유원보(劉元甫)이다.

 

**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 1055~1101)

우리나라의 다담선(茶湛禪)은 고려대각국사 의천(義天)을 개창조로 하고 있다. 국사는 영지대지(靈芝大智)율사(律師)에게 율장(律藏)을 배웠으며, 백운수단선사의 법제자(法弟子)인 원조, 송나라로 1085년에 들어가 종본선사(圓照, 宗本禪師)로부터 다담선(茶湛禪)을 배운 뒤 1086년에 귀국하였다. 국사께서 전수한 다담선은 조선 말기 범해선사(梵海禪師)까지 26분께서 맥을 이어 사자상승하여 계승 발전시켰다. 우리나라 다담선 수행의 화두는 명선(茗禪)이다. 이는 차를 마시고 선을 수행함에 있어 차나무에서 새순이 나오는 것처럼 선의 싹이 나온다는 뜻이다. 이 명선이란 화두로 다담선이 스님들 간에 수행되어 오다가 범해선사 이후에 계승되지 못하고 사라졌음은 너무나 아쉬운 일이다. 추사 김정희가 ‘명선(茗禪)’을 괜히 쓴 것은 아닌 것 같다.

 

** 의천국사와 선암사

고려 선종 9년에 의천 대각국사가 선암사를 중창하여 남방 중심의 천태종 사찰로 부흥시키고, 뇌원차로 고려의 차문화를 부흥시켰다. 조선 광해군 때에는 침굉현변이 나와 차와 선을 일으켰다. 침굉의 차의 정신은 고산 윤선도에게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조선후기 해붕전령은 초의의순과 도반처럼 지냈다고 한다. 해붕으로 인하여 조선 순조 때 선암사는 다시 중창되었다고 한다. 당시 호남의 7고붕은 함양의 여질, 둘째는 남원의 이학전, 셋째는 함양의 김각, 넷째는 곡성의 심두영, 다섯째는 창암의 이삼만, 여섯째는 선암사의 석전령, 일곱째는 대둔사의 석의순이다.

최근에는 선암사의 차와 푸첸성[복건성(福建省)] 무이산차의 차맛과 찻잎의 형태가 일치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의천이 그당시 가지고 들어 왔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 시기 의천은 용봉단차를 함께 가지고 들어왔을 가능성이 추측된다. 뇌원차는 송으로 가지고 들어가고, 송의 용봉단차를 가지고 들어옴으로서 용단 승설차 등이 고려로 퍼져나가는 계기를 만들었다. 또 하나는 선암사의 건물들이 입 구(口)자 형태인 것은 다관 형태의 가람 형태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선암사는 육방살림을 하면서 각 방마다 차를 음용했다. 공양시간마다 차를 우려 마시는 있었는데 전각 주변의 천연 차밭도 이런 형태와 상관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차밭 옆에 물을 끓일 수 있는 삼탕수가 이를 잘 말해준다.<세종실록지리지>에 조계산 차가 으뜸이라는 기록이 있다.

 

**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1158-1210)

원효(元曉)와 함께 한국불교의 가장 우뚝한 봉우리 일 뿐만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사상가이다. 신라의 원효가 불교내의 여러 갈래의 흐름과 쟁론을 화합시키어 회통불교의 초석을 놓았다면 지눌은 선과 교[禪敎]가 대립 갈등하는 타락한 교려불교를 바로잡아 선․교가 둘이 아닌 회통불교의 전통을 확립하였다.

화두참구의 간화선이 바로 지눌이 최초로 소개한 수행법이다. 근세 한국불교의 중흥조로 사라져가는 선풍을 다시 진작시킨 경허(鏡虛) 스님이 지눌의 결사정신을 이었으며, 만공(滿空) 스님께서도 보조선을 크게 선양하였다. 역시 경허의 법을 이은 혜월(慧月)과 한암(漢岩) 스님께서는 지눌의『수심결』을 읽다가 견성했다고 한다. 또 효봉 스님께서도 꿈에 송광사 제 16국사 고봉화상으로부터『수심결』법문을 듣고 ‘효봉’이란 법호를 받았으며, 경봉(鏡峰) 스님 역시『보조어록』을 읽다가 견처(見處)를 얻고 지눌을 스승으로 삼았다 한다. 조계총림을 개설하고 보조선을 세계 속에 선양한 구산(九山) 스님도 광양 백운산 상백운암에서『보조어록』을 읽고 용맹정진을 하다가 오도송을 읊었다고 한다.

12~3세기 고려 불교는 정법과 멀어진 타락한 불교였다. 밖으로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 휩쓸려 승려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안으로는 선과 교가 대립 갈등하여 서로를 원수처럼 여겼다고 한다. 지눌은 고려불교의 타락상을 “부처님 법을 빙자하여 나와 남을 꾸미고 이양(利養)의 길에서 허덕이며 옷과 밥만 허비하고 있다.”고 통탄했다. 고려불교가 정법과 멀어진 이유를 불자들이 가장 기본적인 마음 닦는 수심(修心)을 게을리 하기 때문이라 보았다. 그래서 그를 바로잡기 위해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닦는 수심불교를 해야 된다고 했다. 정혜결사는 실로 마음 닦는 수심결사(修心結社)라 할 수 있다. 정혜결사를 통해 그는 왕실불교와 국가불교를 대중의 불교, 기복․의례 불교를 수행불교, 명예나 이익을 탐하는 불교를 수심불교로 일대전환시켜 정법을 바로 세웠다.

지눌의 사상은 12-3세기 고려불교를 바로잡으려는 고뇌의 산물이다. 모든 사람들이 마음 닦는 바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제시하기 위해 많은 저술도 했다. 따라서 그의 사상은 마음, 깨침, 닦음을 중심주제로 하고 있다. 지눌에 의하면 우리들 본래 마음은 육신 속에 있는 비좁은 바탕이 아니라 우주와 둘이 아니며, 나와 남이 둘이 아닌 하나인 바탕이라고 한다. 그 바탕을 텅 비었으면서 환히 밝은 바탕[空寂靈知心]이라 했고, 하늘과 땅을 덮는 바탕이라고 했다. 그 본래 마음이 다름 아닌 부처이다. 그런데 문제는 마음이 부처라는 사실을 모른 채 바깥 대상에만 팔려 살기 때문에 중생살이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밖으로만 치닫던 의식의 빛이 일대 방향전환을 일으켜 본바탕 마음을 보아야 한다.[일념회광견자본성(一念回光見自本性)] 그것이 돈오(頓悟)이며, 그 때 터지는 탄성이 마음이 부처이다. 돈오점수를 보편적인 길로 강조하고 있으나 결코 돈오돈수를 무시하지 않았다.

점수의 내용이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이며, 그와 함께 이타의 보살행을 강조하는 점도 보조선의 한 특성이라 하겠다. 그는 “만약 남을 이롭게 하는 행이 없다면 곧 고요함만 취하는 무리들[취적지도(趣寂之徒)]과 무엇이 다른가?”라 하고 있으며 “남을 제도하려 하기 때문에 먼저 선정과 지혜를 닦아야 한다.”고 했다. 혜능의 돈문(頓門)에 서면서도 점문(漸門)을 수용하고 있으며, 돈오점수를 강조하면서도 돈오돈수, 화두로 바로 깨치는 경절문(徑截門)을 함께 수용하고 있다. 또 하근기의 경우 염불수행도 권하고 있다. 이처럼 그의 선은 근기에 따라 다양한 길을 제시하는 회통적 수심 불교다. 이런 보조선의 확립으로 한국의 선은 비로소 중국선(中國禪)으로부터 벗어나 독자적 전통을 이루게 되었다. 이런 보조선의 전통을 목우가풍(牧牛家風)이라 부르며 이 목우가풍은 조선조까지 16국사를 배출한 송광사를 중심으로 오늘날까지 한국불교에 면면히 전승되고 있다.

보문사에서 3년 동안 대장경을 열람한 끝에 마침내『화엄경』을 통해 선교가 둘이 아님을 발견,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부처가 입으로 말한 것은 교요, 조사가 마음에 전한 것은 선이다.”라고 설파했다. 이는 후에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란 말로 정형화 되었고 선교회통의 원리가 되었다. 그는 손가락을 통해 달을 직접 보듯이 말씀을 통해 마음을 직접 깨치는 것을 수행의 바른 길이라고 했다. 송광사의 다풍(茶風)은 보조, 지눌, 원감 등 16국사 이래 조선시대 다송자로 알려진 보정선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다승이 배출되어 다선도량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49대(선불교 22조) 호구소륭(虎丘紹隆, 1077~1136)

원오극근선사가 묵적 다선일미(茶禪一味)를 호구소룡에게 써서 줌.

원오선사의 문하에 크게 촉망받는 두 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바로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선사와 호구소륭(虎丘紹隆, 1077~1136)선사였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어려서 출가하여 협산사에서 원오 선사를 20여년이나 스승으로 모시며 정진하였다.

 

원오극근선사의 묵적과 일본다도의 다선일미의 비밀

일본 다도의 본격적인 시작은 난포조묘(南浦紹明, 1235∼1308)로부터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은 800년 전 난포조묘 선사가 남송시대의 고승 허당선사(虛堂智偶, 1185∼1269)로부터 ‘경산다연(茶卓, 茶典)’을 가져간 것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난포조묘는 숭복사(崇福寺)의 개산조였다. 일본의 고불서(古佛書)인 「속시청초(續視聽草)」와 「본조고승전(本朝高僧傳)」에는 “난포조묘가 송나라에서 귀국하면서 차 탁자와 차 도구를 숭복사에 가져왔다”고 했다. 이때 경산에서 중국의 <차전(茶典)> 7부도 일본에 전했는데 이 <차전> 중에 <다도청규> 3권도 들어 있었다.

중국 차학의 대부격인 좡완팡(莊晩芳) 선생은 “경산다연은 일본으로 건너가 화(和)·경(敬)·정(精)·청(淸)·도(道)·덕(德)을 널리 알렸다”고 말했다. 허당의 다풍은 난포조묘를 거쳐 잇큐소준(一休宗純, 1394∼1481)으로 이어졌다. 허당이 난포조묘에게 글씨를 한 폭 준 것은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 뒤로 차어(茶語)가 있는 족자를 걸고 차회를 하는 풍경이 일본에서 자리를 잡았다.

난포조묘는 25세에 중국 송나라에 가서 양기파인 허당선사의 시자로 있다가 법을 받고 33세에 귀국하였다. 난포조묘의 제자 다이토국사(大燈國師) 슈호묘초(宗峰妙超, 1282∼1337)는 대덕사(大德寺)를 개창하고, 묘초의 제자 간잔에겐(關山慧玄, 1277∼1360)은 묘심사(妙心寺)를 개창했다. 이들 3대를 오도칸(應燈關)이라고 하며 임제종(臨濟宗) 대응파(大應派)라고 불린다. 이 법맥은 일본 임제종의 중흥조인 하쿠인에카쿠(白隱慧鶴, 1685∼1768)를 거쳐 오늘날까지 임제종의 정통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최근 원오극근(圓悟克勤, 1063∼1135) 친필인 ‘류(流)의 묵적(墨蹟)’에 대한 다른 견해가 제기됐다. 지금까지 원오극근의 묵적은 한중일(韓中日)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다. 중국 닝보(寧波)시 인민정부(닝보 칠탑사)가 대회를 유치하면서 한국의 <차의 세계(한국국제선차문화연구회)>가 공동주최한 ‘선차문화의 동전(東傳)’을 주제로 한 ‘제5차 세계선차문화교류대회’(2010년 4월 23∼26일) 학술연토회에서 베이징대 쉬안팡(宣方) 교수는 ‘송원 불차의 다연’이라는 논문을 들고 나와 “원오극근 선사가 구큐조류(虎丘紹隆, 1077∼1136)에게 써 준 인가장(도쿄박물관 소장), 즉 ‘류(流)의 법어’는 다선일미의 정맥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법어(法語)에 불과하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일본 무라다 슈코(村田珠光, 1442∼1502) 연구의 권위자인 구라사와 유키히로(倉澤洋行) 교수는 경악했고,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한·중·일 차학계는 긴장했다. 구라사와 교수는 대회가 끝난 뒤 ‘류의 묵적’은 종래 일본의 주장이 맞지만 또 다른 ‘원오 묵적’(圓悟墨蹟, 슈코(·珠光) 소지)은 원오가 쓴 것이 아니라 남송시대의 선승 대혜종고가 대신 써준 것이라는 내용의 글 ‘슈코의 원오묵적’을 <차의 세계(2010년 10월호)>에 기고함으로써 원오묵적을 둘러싼 논쟁은 가열되고 있다. 더구나 ‘화경청적’도 백운수단(白雲守端·1025∼1072)의 어록을 일본이 즐겨 쓰면서 일본 다도의 진결(眞訣)이 되었다는 중국 측의 주장이 나왔다. 백운수단은 임제의현(臨濟義玄), 황룡혜남(黃龍慧南)에 이은 양기방회(楊岐方會)의 제자이다. 백운수단의 제자가 원오극근이고, 원오극근의 제자가 구큐조류이다.

일본 다도가 신주(神主)처럼 모시고 있는 ‘화경청적’과 ‘다선일미’의 신화가 뿌리째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이 같은 발언은 일파만파(一波萬波)가 되어 동아시아 차계에 풍랑을 일으켰다. 지금까지 일본인들은 선차의 맥이 원오극근을 통해 일본에 전해졌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차계의 원로인 다다 유지(多田侑史) 선생은 1992년 3월 원오극근 선사가 다선일미를 제창한 협산 영천사를 찾아 감격한 나머지 “일본 다도의 조정은 석문 협산에서 나왔다”고 말했을 정도이다. <신선소각사지(新選昭覺寺志)>에 따르면 무라다 슈코가 중국에서 원오극근 선사를 참배하니 선사는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전하고 ‘다선일미’라는 묵보를 증송하였다고 한다. 무라다 슈코는 귀국하면서 태풍을 만나 대나무 통에 넣어둔 ‘다선일미’를 잠시 잃어버렸으나 나중에 일본 혼슈(本州) 강변에서 잇큐소준이 발견해 대덕사에 보관되어 있다가 무라다 슈코에게 다시 전해졌다.

일본 승려들은 이 묵보를 통해 깨우쳐 후에 저술하니 그것이 ‘선다지도(禪茶之道)’이다. 묵보는 그 후 다케노 조오(武野紹鷗, 1502∼1555), 센리큐(千利休)에게 전해진다. 이 묵보는 센리큐 사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수중에 들어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로 넘어가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2001년 5월 중국 경공업출판사에서 나온 ‘중국차엽대사전’에는 다선일미라는 말이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 있다. “다선일미(茶禪一味, Same sense in tea & buddhism): 불교용어. 선미(禪味)와 차미(茶味)는 동일한 종류의 흥취임을 가리킨다. 본래 송대 원오극근(1063∼1135)이 선수행을 하던 일본인 제자에게 써준 네 글자로 이루어진 진결로 일본 나라(奈良)현의 다이도쿠지에 보관되었으며, 나중에 불교계와 민간에 널리 유행하는 말이 되었다.”

현재 도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다선일미 묵적의 설명에 따르면 “원오극근은 66세 되던 때인 1128년 2월 12일 남송 고종의 명을 받아 운거산으로 가고 있었다. 금릉(金陵)을 지나다가 잠시 쉴 때에 특별히 배웅을 나온 법제자 구큐조류에게 준 법어이다.” 이를 일본에서는 ‘조류에게 준 인가장’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인가장이 아니라 단순한 법어라는 것이다.

일본의 어떤 선종(禪宗)과 차(茶) 관련 저술에도 ‘다선일미’라는 글은 나오지 않았고, 단지 묵보(墨寶)로서만 대덕사에 보관되어 있다고 할 뿐 이 사실조차도 세상에 알려진 것도 최근의 일이다. 그래서 일본의 차 정신을 다선일미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중국 측 주장이다. 그만큼 다선일미는 오늘날 동아시아 차 정신으로, 차 브랜드로, 어떤 글귀보다도 요약과 힘이 강하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센리큐에 의해 소장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일본 차 정신의 요체가 바로 ‘다선일미’라고 하는 데에 손색이 없다는 것이다.

‘다선일미’와 ‘화경청적’이라는 묵적의 출처와 진위가 어떻든 간에 일본은 이것을 가지고 근대 다도의 신화를 완성하는데 이것이 근본에서 흔들리고 있는 셈이다. 현재 동아시아 삼국 간에는 선차문화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보이지 않는 암투(暗鬪)가 벌어지고 있는 형편이다. 제5차 세계선차문화교류대회에서는 또 중국 측의 여러 발표자가 대회 명칭인 ‘선차(禪茶)’를 ‘다선(茶禪)’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해프닝 성격의 주장도 나왔다. 그러나 그 뒤 중국과 일본, 한국의 논문들이 ‘선차’로 가야 한다는 주장을 일제히 쏟아내고, 중국 닝보 당국의 사과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중국 다예연구의 권위자인 위웨(余悅) 장시성 난창(南昌)대 교수는 ‘선차대회’가 동아시아 차학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는 장문의 기고를 통해 한국의 입장을 앞장서 지지해주었다. 일본의 다도신화는 앞으로 한국과 중국의 차 문화 부흥에 따라 종래의 위상이 달라지는 것은 물론이고, 입장의 재조정이 요구될 전망이다.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선사

대혜선사는 특히 간화선(看話禪)을 주창하였으며, 당시에 유행하던 묵조선(默照禪)의 병폐를 통렬히 비판하였는데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 미치고 있다고 하겠다. 묵조선(默照禪)을 비판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흔히 말하는 지관(止觀)과 묵조(默照)의 방편으로 선의 안목을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 선의 도리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가운데에서 선의 도리를 알았다고 하면 그저 탁론을 이룰 뿐이라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 관과 허공의 도리를 어떻게 하면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이 도리조차도 분명하게 드러내지 못했다면 간화선이란 분수 밖의 일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무수한 수행자들이 간화선에서 고개를 돌려 위빠사나 관법이나 다른 방편을 뒤적거리면서 길을 찾는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 어떤 이가 묵조와 지관의 방편에 머문다면 신위(信位)는 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위(人位)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못할 것이다. 조(照)라는 글자를 관법의 관으로 아는 것은 병폐이다.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기에 눌러앉는 것을 결국 대혜선사께서도 우려한 바가 아니었겠는가? 엄밀한 의미에서 대혜선사의 묵조사선이라는 비판은 묵조선, 간화선의 문제가 아니라 수행자의 문제라고 하겠다.

 

50대(선불교 23조)응암담화(應庵曇華)/ 51대(선불교 24조)밀암감찬(蜜庵減儏)/ 52대(선불교 25조)파암조선(破庵祖先)/ 53대(선불교 26조)무준원조(無準圓照)/ 54대(선불교 27조)설암혜랑(雪岩慧郞)/ 55대(선불교 28)급암종신(及庵宗信)/56대(선불교 29조)석옥청기(石屋淸琪)

 

** 허당지우선사(虛堂智禺禪師, 경산차=경산다연)

백운수단선사의 화경청적(和敬淸寂)을 허당지우선사가 이어감 - 이는 다시 일본 원통국사에게 이어짐. 일본에서는 원통대응국사(圓通大應國師)가 다담선의 개창조이다.

허당지우선사(虛堂智禺禪師, 백운수단선사의 법손자)에게 수참(修參), 허당선사로부터 선장(禪杖)으로 인가를 받았다. 화경청적은 일본 다도(茶道)의 근본정신을 나타내는 숙어로 통용되게 되었다. 경산차가 일본다도의 원류는 경산차=경산다연.

 

** 석옥청공선사(1257~1352)

원나라 때 스님. 태고보우선사는 석옥청공에게 임제종 인가를 받음. 구산선문 통합, 간화선 중심으로 선문을 확립함.

절강성(浙江省) 호주(湖州)는 700년 전 석옥청공(石屋淸珙)을 인연으로 고려 말의 고승 태고보우(太古普愚)와 백운경한(白雲景閑) 선사가 구법한 땅으로 하무산(霞霧山)은 호주시 서남쪽 25km에 위치하고 있다. 해발 1,200m 정도의 고봉이다. 산봉우리에 호수가 있고 거기서 내려다보면 산이 물결처럼 흘러내리고 있다. 안개가 많고 비가 자주 오므로 하우산(霞雨山) 또는 하무산이라고도 한다. 마치 안개가 병풍처럼 흘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경치가 아름답고 산봉우리에는 천호암(天湖庵)이 있는데 거기서 석옥청공 큰스님이 나서 유명하게 되었다.

호주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절강성 북부 태호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중요한 성시(城市)이다. 이곳이 유명케 된 데는 당대의 다성(茶聖) 육우(陸羽)가 30년 동안 거주하면서 『다경(茶經)』을 저술했던 차문화의 보고일 뿐 아니라 원대 불교를 주도한 임제종(臨濟宗)의 고승 석옥청공이 불법을 휘날렸던 곳이다. 또한 고려의 태고보우 국사가 찾아가 불법을 토로했던 곳이기도 하다.

[석옥청공선사어록]의 내용인즉 급암(及菴) 선사가 석옥에게 부촉하길 “그대는 법해(法海) 가운데 그물을 뚫고 나오는 금린(錦鱗)을 투과하라”고 말씀했다. 그 뒤 고려의 한 스님(태고보우)이 원나라의 고승 석옥청공을 찾아온다. 이 스님은 석옥청공 선사의 탑비에 등장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석옥은 그를 인가(印可)하면서 “금린이 곧은 낚시에 올라온다”라는 시구를 주면서 “나의 법이 온통 해동으로 가는구나”라고 일렀다. 그처럼 석옥은 태고보우가 일찍이 법기임을 간파하고 그에게 그물에 걸린 보물창고를 건져 올리라는 시구를 주었다. 그 보물은 다름 아닌 깨달음의 말씀을 가리킨다.

“석옥청공은 마조도일의 ‘마음이 아니고 사물이 아니다’라는 심법륜(心法論)과 관계된 사상을 직접 계승한 기초 위에 ‘무심처용심(無心處用心)’이란 중요한 선학 명제를 제기한 사람이다. 이는 혜능(慧能)의 ‘무심(無心), 무상(無相), 무주(無住)’의 삼무(三無)사상에서 발전했다” 호주에서 활약한 교연(皎然)과 청공(淸珙)의 선다 심인사상을 발표한 소옥(邵鈺)은 다성 육우에게 제일 깊은 영향을 미친 시승 교연, 그로부터 500년 후 석옥청공 선사가 나와 그 밑에 태고와 백운경한이 마음과 마음을 이으면서 한·중의 우의는 마치 물결처럼 이어져왔다고 피력했다. 당대 한국불교의 중심메카가 강서였다면 다시 그 등불은 절강성 호주에서 원나라 시대의 고승 석옥이 나와 그 맥을 태고, 백운이 이어가면서 찬란한 법등을 밝혀왔다.

 

56대까지는 중국 스님, 57대부터는 한국스님들이 법맥을 잇게 되었다.

 

57대(선불교 30조, 한국 선불교 1조)태고보우(太古普愚, 1302~1382)

태고 보우 국사는 고려 충렬왕 27년(1301)에 양근에서 태어나 우왕 8년(1382) 용문산 소설암에서 입적하기까지 살다간 81년의 생애는 장엄하였다. 북한산 태고사는 태고보우국사가 계셨던 곳이다. 태고스님은 고려 말 최초로 중국 임제스님 법통을 이어 받으신 분이다. 19세부터 '만법귀일(萬法歸一)'의 화두(話頭)를 혼자서 참구하였고, 26세에 화엄선(華嚴選)에 합격하였다. 그뒤 불경을 열람하면서 깊이 연구하였으나, 불경의 연구가 수단일 뿐, 진정한 수행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선수행(禪修行)에 몰두하였다. 1333년(충숙왕 복위 2) 가을에는 성서 감로암(甘露庵)에서 죽기를 결심하고 7일 동안 정진하였다. 그때 푸른 옷을 입은 두 아이가 나타나서 더운 물을 권하였는데 받아서 마셨더니 감로수였으며, 그때 홀연히 깨친 바가 있었다.

1337년 가을에는 불각사(佛脚寺)에서 <원각경(圓覺經)>을 읽다가 “모두가 다 사라져 버리면 그것을 부동(不動)이라고 한다.”는 구절에 이르러 모든 지해(知解)를 타파하였다. 그뒤 송도의 전단원(栴檀園)에서 조주(趙州)의 무자화두(無字話頭)를 참구하였으며, 1338년 1월 7일에 대오(大悟)하였다. 1341년(충혜왕 복위 2)에는 중흥사(重興寺)에서 후학들을 지도하였고, 중흥사 동쪽에 태고암(太古庵)을 창건하여 5년 동안 머물렀다.

1347년 7월에 호주 천호암(天湖庵)으로 가서 석옥(石屋)을 만나 도를 인정받았고, 40여일 동안 석옥의 곁에서 임제선(臨濟禪)을 탐구하였다. 그가 떠나려 하자 석옥은 <태고암가>의 발문을 써주는 한편 깨달음의 신표로 가사(袈裟)를 주면서 “이 가사는 오늘의 것이지만 법은 영축산에서 흘러나와 지금에 이른 것이다. 지금 그것을 그대에게 전하노니 잘 보호하여 끊어지지 않게 하라.”고 하였다. 1348년에 귀국하여 중흥사에 머물렀으며, 도를 더욱 깊이 하고자 미원의 소설산(小雪山)으로 들어가 4년 동안 농사를 지으면서 보임(保任)하였다.

이때 <산중자락가(山中自樂歌)>를 짓기도 하였다. 1363년에 신돈(辛旽)이 공민왕의 총애를 받아 불법을 해치고 나라를 위태롭게 하므로 보우는 “나라가 다스려지려면 진승(眞僧)이 그 뜻을 얻고, 나라가 위태로워지면 사승(邪僧)이 때를 만납니다. 왕께서 살피시고 그를 멀리하시면 국가의 큰 다행이겠습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그러나 신돈의 횡포가 더욱 심하여졌으므로 왕사의 인장을 반납하고 전주 보광사(普光寺)에 가서 머물렀다.

태고 보우는 회암사에서 얼마 안 되어 은사 광지 선사에게 작별을 고하고, 가지산 총림으로 가게 된다. 광지는 가지산파의 숨어있는 인물로 당시 회암사의 원로급 인물이었던 것 같다. 스승의 뜻을 따라 태고 보우는 가지산파의 총본사격인 회암사에서 먼거리에 있는 가지산 총림에 자리잡은 남도지방의 보림사를 찾게 된다. 태고 보우는 비로소 보림사에서 선의 길에 들게 된다. 그가 참구한 화두는 ‘만법귀일, 일귀하처’ 라는 화두이다. 암도 스님은 회암사와 태고와의 관계에 대해 “회암사는 태고보우가 광지 선사와의 인연으로 불문에 들게 한 인연터로 만족했을 것으로 본다”며 “더욱 큰 발심을 위해 가지산 보림사로 찾아간 것”이라고 말했다.

불문에서의 스승과 제자 관계는 법사의 개념보다도 깨달음이 우선한다. 환암 혼수의 경우 나옹의 제자였으나 태고 보우의 제1의 문도가 됨으로써 태고 보우 선풍을 계승한다. 그러므로 환암 혼수는 태고 보우의 임제선을 이은 인물이라 볼 수 있다. 회암사는 지공․나옹․무학의 3대 화상으로 이어지는 나옹의 세력에 의해 전성기를 누렸던 선종사찰이었으나 나옹의 제자인 환암 혼수가 태고의 전법제자가 됨으로써 태고의 법향이 가득한 임제선의 고향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회암사는 태고의 출가 본사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당시 고려 불교계의 큰 스승 나옹과 태고의 세력 싸움은 치열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승자는 역시 태고 보우다. 그는 단절된 법맥을 복원하여 당시 고려불교계를 주도함으로써 나옹의 시대에서 태고의 시대로 탈바꿈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권근이라는 인물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권근은 태고 보우의「소설암 원증국사비」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태고 제자 환암 혼수의 비인「보각국사탑명(普覺國師塔銘)」까지 지은 인물이다.

공민왕 19년(1370) 7월 공민왕이 공부선장(工夫選場)을 설치하여 선교의 선문납자에게 응시케 했다. 그때 나옹 화상이 주시(主試)케 했는데 환암 혼수가 응시하였다. 그때 나옹은 혼수의 그릇됨을 크게 인정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환암 혼수와 나옹과의 관계이다. 분명 선사는 태고 보우의 법맥을 잇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공, 나옹, 무학이 거쳐간 회암사는 태고 보우 스님의 자취는 없으나 스님의 득도처라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뿐만 아니라 보우의 법손인 환암 혼수의 법향이 가득한 곳이기도 하다.

태고 보우 선사의 오도의 과정을 살펴보면 보림사에서 6년, 이후 용문산 상원사와 상서의 감로사, 불각사 등에서 피나는 정진을 통한 깨달음과 개성 전단원에서의 돈오의 과정을 거치면서 태고 보우의 뚜렷한 선(禪)철학이 성립된 것 같다. 가지산 보림사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가지산문을 크게 일으킨 도의 법사의 법손 보조 체징 선사에 의해 선풍을 일으킨 선종사찰로 최형미(崔逈微) 스님을 거쳐 고려 말의 고승 태고보우가 수선(修禪)했던 곳이다.

보림사를 주목하는 것은 보우 선사가 보림사에서 6년간 수선안거 뒤 중국에서 임제의 법맥을 받아와, 희양산 봉암사를 거쳐 보림사 주지로 추대되어 개당법문을 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보림사는 신라 구산선문 중 가지산문의 중흥지이며 고려 말 불교계의 리더 태고 보우에 의해 임제선으로 복구, 한국선불교 부흥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곳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조계종의「종헌과 종지」편에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은 신라의 도의 국사가 창수한 가지산문에서 기원하여 고려 보조 국사의 중창을 거쳐 태고 보우의 제종 포섭으로 조계종이라 공칭하여 이후 그 종맥이 면면부절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곡성 태안사의 동리산문, 남원 실상사의 실상산문, 화순 쌍봉사의 사자산문 등이 개산조 혜철, 홍척, 철감에 의해 탄생된 것에 비해 가지산 보림사는 가지산파의 3대 법손인 보조 체징에 의해 탄생된 남종선으로 신라말 원표․체징․최형미․고려 말 보우 선사까지 2대 왕조에 이르기까지 남종선의 뿌리를 이어오고 있다.

 

58대(선불교 31조, 한국 선불교 2조)(1320∼1392)환암혼수(幻庵混修)/

59대(선불교 32조, 한국 선불교 3조)귀곡각운(龜谷覺雲)고려말 스님

 

60대(선불교 33조, 한국 선불교 4조)벽계정심(碧溪正心)

조선조 태종(太宗) 때 불교 탄압이 극심해지자 머리를 기르고 환속하여 금릉군 황학산(黃鶴山)으로 처자식과 함께 들어가 물한리에 숨어 지냈다. 뒷날 벽송 지엄(碧松智嚴)에게는 선(禪), 정련 법준(淨蓮法俊)에게는 교학을 전하여 선교의 두 법맥이 조선시대에도 이어질 수 있도록 했다.

 

***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1435년~1493년, 향년 58세)

세종 문종 단종 세조(생육신의 한 사람). 초암차를 행함.

조선 초기의 문인으로 그의 이름인 시습(時習)도 [논어(論語)] 학이편(學而篇) 중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과거준비로 삼각산 중흥사(三角山 中興士)에서 수학하던 21세 때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대권을 잡은 소식을 듣자 그 길로 삭발하고 중이 되어 방랑의 길을 떠났다. 그는 관서, 관동, 삼남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체험했는데 〈매월당시사유록( 每月堂詩四遊錄)〉에 그때의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31세 되던 세조 11년 봄에 경주 남산(南山) 금오산(金鰲山)에서 성리학(性理學)과 불교에 대해서 연구하는 한편,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37세에 서울 성동(城東)에서 농사를 직접 짓고 환속하는 한편 결혼도 했다. 벼슬길로 나아갈 의도를 갖기도 했으나 현실의 모순에 불만을 품고 다시 관동지방으로 은둔, 방랑을 하다가 충청도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59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그는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갈등 속에서 어느 곳에도 안주하지 못한 채 기구한 일생을 보냈는데, 그의 사상과 문학은 이러한 고민에서 비롯한 것이다.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얻은 생활체험은 현실을 직시하는 비판력을 갖출 수 있도록 시야를 넓게 했다. 그의 현실의 모순에 대한 비판은 불의한 위정자들에 대한 비판과 맞닿으면서 중민(重民)에 기초한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상을 구가하는 사상으로 확립된다.

한편 당시의 사상적 혼란을 올곧게 하기 위한 노력은 유·불·도 삼교(三敎)를 원융적(圓融的) 입장에서 일치시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불교적 미신은 배척하면서도 조동종(漕洞宗)의 인식론에 입각하여 불교의 종지(宗旨)는 사랑(자비)으로 만물을 이롭게 하고 마음을 밝혀 탐욕을 없애는 것이라고 파악한다. 또 비합리적인 도교의 신선술(神仙術)을 부정하면서도 기(氣)를 다스림으로써 천명(天命)을 따르게 하는 데 가치가 있다고 한다. 즉 음양(陰陽)의 운동성을 중시하는 주기론적(主氣論的) 성리학의 입장에서 불교와 도교를 비판, 흡수하여 그의 철학을 완성시키고 있는데 이런 철학적 깨달음은 궁극적으로는 현실생활로 나타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저(遺著)로는 〈금오신화〉, 〈매월당집(梅月堂集)〉, 〈매월당시사유록〉 등이 있다.

 

매월당 김시습의 초암차(草庵茶)

한일(韓日) 양국의 다도계가 숙명처럼 여기고 있는 말 가운데 하나가 초암차로 이 말이 한국 차문화나 일본 다도를 말할 때 맨 처음에 등장하는데 초암차가 한일 두 나라의 다도의 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다도를 정착시킨 무라다슈코(1422~1502)가 초암다법을 창안하면서 그 정신을 다케노죠오(1502~1555)와 센리큐(1522~1591)가 이어 와비차로 대성하면서 오늘날까지 그 정신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초암차라는 말을 처음 창안한 사람이 김시습이라는 사실은 국내에 널리 알려져 있으나 일본 다도계에서는 그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초암다법은 베일에 싸이 블랙박스가 되어 갔으나 점차로 베일이 벗겨지고 있다. 지금까지는 막연히 <매월당집>의 <유금오록>에 수록된 (일동순장로와 이야기하며)라는 시를 근거로 준장로가 매월당을 울산 염포 영성의 불일암에서 만난 사실을 내세워 그 영향이 일본에 전해졌고, 무라다슈코가 영향을 받아 초암차를 이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차의 세계> 발행인인 최석환님이 센리큐의 유파인 우라센케와 모모테센케 종장을 만났을 때 그들은 초암차는 매월당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최석환님은 10년전부터 일본 오산(남선사, 청룡사, 상국사, 건인사, 동복사)을 답사하기 시작하여 매월당의 초암차가 일본차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추적하기 시작했다.

발단은 재야 차연구가로부터 두루마리로 된 일본 극비 문서 속에 매월당과 준장로가 만난 사실이 있다는 말을 듣고부터이다. 그러나 문서는 아직 공개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10여 년 전 최석환님은 알본 도쿄대 도서관에 비장되어 오던 사전 속에서 무라다슈코가 매월당의 영향을 받았다는 구절을 우연히 발견했다. 그 자료의 근거를 화엄학의 대가인 김지견박사에게 보여주었다. 그 자료를 근거로 ‘매월당의 초암차가 일본 차계에 미친 영향’이란 주제로 강연을 하여 다시 한번 매월당의 초암차가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김지견 박사는 매월당의 초암차에 대한 연구를 완성하지 못하고 고인(故人)이 되셨고, 그 후 이렇다 할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최석환님은 매월당의 초암차 산실인 울산 옛 염포 영성을 찾았는데 현대자동차 경내에서 자동차 하차장으로 쓰이고 있었다. 불일암터는 작은 공원으로 유지로 남겨놓았다.

우라센케와 모모테센케 종장은 조선반도를 거쳐 일본에 차가 들어왔다고는 말하지만 초암차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거부했지만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초암차가 일본에 전해졌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신기수가 쓴<조선통신사왕래>에는 고려왕조에서 조선왕조로 바뀌면서 불교에서 유교로 음다풍도 바뀌었다고 말하였다. 그 시기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은 세조의 왕위찬탈에 분개하여 책을 불살라 버리고 한평생을 방랑으로 지냈다. 매월당이 1460~1470년경 금오산 용정사에 은거하면서 <금오신화>를 쓰고 있을 무렵 일본의 준장로가 찾아와서 둘은 다담을 나눈다. <매월당집> 의 12권 <유금오록>에 '일동순 장로와 이야기하며' 라는 시가 전해온다.

「고향을 멀리 떠나니 뜻이 쓸쓸도 하여

옛 부처 산꽃 속에서 고적함을 보내누나

쇠 다관에 차를 달여 손님이 마시도록 제공하고

질화로에 불을 더해 향을 태우네

봄 깊으니 해월이 쑥대 문에 비치고

비 멎으니 산 사슴이 약초 싹을 밟아 대네

선의 지경 나그네 정이 모두 아담하니

오순도순 밤새도록 말하여도 무방하리라」

시를 살펴보면 쇠 다관에 차를 달였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차를 우려 마신 것이 아니라 팔팔 끓는 물을 부어 차를 마셨던 것 같다. 여기서 초암차가 시작되었음이 짐작된다. 조선왕조의 음다풍이 바뀌게 된 것은 470여 년간 이어져 온 고려왕조가 무너지고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개국하면서 말차 중심에서 잎차중심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매월당의 시에서도 펄펄 끓는 물을 부어 차를 우려 마시는 풍습이 나오는 것만 보아도 1460년경 완전히 차가 잎차 중심으로 바뀐 것이 분명하다. 준장로와 매월당은 경주 금오산의 용장사와 염포 불일암을 오가며 깊은 다담을 나웠던 것 같다. 차 연구가인 자영동 씨 역시 울산과 경주가 그리 멀지 않은 점을 미루어 준장로와 매월당이 자주 만나서 다담을 나누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당시 준장로가 조선통신사 일행으로 방문한 것은 분명하다. <세종실록(世宗實錄)>에 보면 세조 10년 2월 17일경 자조에 왜국사자 가운데 '준초'라는 승려가 나온다. 이 준초라는 일본 승려가 일동승 준장로가 아닐는지. 두 승려가 조선에서 활동한 시기와 매월당과 준장로가 만난 시기가 일치한다. 준초는 1463년 조선에 왔다가 태풍을 만나 이륙해 조선에 머무는데 준장로가 조선에 머물렀던 1460~1470년과 거의 일치한다.

초암이란 작고 소박은 공간을 말한다. 이른바 선방의 텅빈 공간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으며 유마 거사가 살던 사방 한 장 짜리의 방장을 말한데서 연원한다. 매월당은 그 방장을 차실 공간으로 이끌어 냈고 그 공간을 초암이라고 했다. 더 나아가 무라다슈코는 다다미 4조 반의 공간으로 구체화시켰고 센리큐는 3조, 2조 반으로까지 축소시켰다. 매월당의 초암차 다법은 서원식 다도로 발전했고 일본으로 건너가 와비차를 이끌어 냈다.

 

61대(선불교 34조, 한국 선불교 5조) 벽송지암(碧送智岩, 1464∼1534)

성종 때 불교탄압이 심할 때 출가함. 벽계 정심스님 등에게 수학함.

62대(선불교 35조, 한국 선불교 6조) 부용영관(芙蓉靈觀, 1485(성종 16)~1571(선조 4)

 

63대(선불교 36조, 한국 선불교 7조) 청허휴정(淸虛休靜)

부용영관선사의 제자[(1520(중종 15)~1604(선조 37)]

당시 불교는 조선왕조의 계속된 억불정책으로 사회경제적인 토대를 박탈당했으며, 사림의 등장으로 성리학적 질서에 의해 사회체제가 재편되고 불교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면서 국가제도권에서 탈락하여 산간총림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휴정은 이러한 때에 불교교단의 존립과 국가 전체의 안위를 의식하고 이에 대처했다. 그는 선종 가운데서도 임제종의 간화선(看話禪)을 가장 중시했으며, 화두로는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을 강조했다. 교학에 대해서는 선 수행에 들어가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만 그 필요성을 인정했다. 이러한 사교입선(捨敎入禪)적 입장에서 그는 종래 선종에서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중시해온 〈능엄경〉과 〈반야경〉을 비판했다.

또 휴정은 염불을 인정했는데 이때의 염불은 사후에 서방극락으로 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찾는 자성미타(自性彌陀)의 차원이었다. 즉 염불도 선 수행의 일종이었다. 실천으로서 그가 인정한 경전공부와 선 수행 및 염불은 조선 후기에 불교교단의 공통된 수행방법으로 체계화되었다. 유(儒)·불(佛)·도(道)의 3교는 명칭만 다를 뿐 그 가르침의 근본은 같다는 3교일치를 주장하기도 했으며, 성리학의 도통관(道統觀)에 대비되는 불교의 법통관을 새로 제시하여 임제종의 전통을 강조했다. 그의 제자는 1,000여 명이나 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사명유정(四溟惟政), 편양언기(鞭羊彦機), 소요태능(逍遙太能), 정관일선(靜觀一禪)의 4대 제자가 조선 후기의 불교계를 주도하게 되었다. 서산대사의 제자로는 사명유정(四溟惟政), 편양언기(鞭羊彦機), 소요태능(逍遙太能), 정관일선(靜觀一禪)의 4대 제자가 조선 후기의 불교계를 주도

해남 대둔사는 서산대사가 임진왜란 이후 의발을 이곳에 전하고 나서 사세가 크게 일어난 곳이다. 그 후로 대둔사는 원교 이광사(1705~1777),정조 이산(1752~1800),창암 이삼만(1770~1845), 추사 김정희(1786~1856)의 글씨가 남아 있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의 차연이 서린 일지암이 있다. 초의선사에게 화법, 시학, 불경과 차를 익힌 소치 허련(1809~1893)은 후에 추사 김저희의 제자가 되어 한국 남종화의 선구자가 되었고 미산, 남농, 임전 등으로 이어가게 된다. 초의선사와 대둔사, 초의선사와 일지암은 훗날 한국차문화의 전성기의 요람으로 기록되었다.

 

64대(선불교 37조, 한국 선불교 8조)편양언기(鞭羊彦機, 1581~1644)

 

** 유정(사명대사, 1544(중종 39) 경남 밀양~ 1610(광해군 2).

그는 휴정의 4대 제자의 하나였지만 불교승려로서의 독창적이고 체계화된 사상은 남기지 않았으며, 오히려 승병장(僧兵將)이나 외교가로서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65대(선불교 38조, 한국 선불교 9조)풍담의심(楓潭義諶, 1592~1665)/ 66대(선불교 39조, 한국 선불교 10조)월담설제(月潭雪霽, 1632~1704) / 67대(선불교 38조, 한국 선불교 11조)환성지안(喚惺志安, 1664~1729)/ 68대(선불교 39조, 한국 선불교 12조)호암체정(虎巖體淨, 1687~1748)/ 69대(선불교 40조, 한국 선불교 13조)청봉거안(靑峰巨岸, 1738~1823)/ 70대(선불교 41조, 한국 선불교 14조)율봉청고(栗峰靑古, 1855~1894)/ 71대(선불교 42조, 한국 선불교 15조)금허법첨(錦虛法沾, 1824~1894)/ 72대(선불교 43조, 한국 선불교 16조)용암혜언(龍岩慧彦)/ 73대(선불교 44조, 한국 선불교 17조)영월봉율(永月奉律, 1738~1823)

74대(선불교 45조, 한국 선불교 18조)만화보선(萬化普善)

고종 원년인 1864년에 동학사를 크게 중창.

 

** 정약용(丁若鏞, 1762(영조 38)~1836(헌종 2), 경기 광주)

정약용(丁若鏞)은 조선 정조 때의 문신이며, 실학자·저술가·시인·철학자·과학자·공학자이다. 본관은 나주, 자는 미용(美庸), 호는 사암(俟菴)·탁옹(籜翁)·태수(苔叟)·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다산(茶山), 당호는 여유(與猶)[2]이며, 천주교 세례명은 요한,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중농주의 실학자로 전제 개혁을 주장하며 조선 실학을 집대성하였고, 수원 화성 건축 당시 기중가설(起重架說)에 따른 활차녹로(滑車轆轤 : 도르래)를 만들고 그를 이용하여 거중기를 고안하여 건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유교 경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당대 조선을 지배한 주자학적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시도하였다. 문집으로 유배 생활 중 대부분이 저술된 《여유당전서》가 있다.

다산의 고향 마현마을, 다산이 열수(洌水)라고 부르던 한강물이 넘실대고, 멀리 운길산의 수종사가 종소리를 울려 퍼지게 하여 나라의 개혁과 인민의 해방이 완성되는 희망도 있었지만, 이제는 다산은 눈을 감고 지하에 영면하고 있다. 그러나 그곳은 역사의 땅이다. 정약현·약전·약종·약용 등 4형제의 뛰어난 학문과 사상이 피어나 형성된 곳이다. 천주교의 초기 신앙인들인 이벽·이승훈·황사영 등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던 곳이다. 정약종과 그의 두 아들 정철상·정하상, 그의 조카사위이던 황사영이 죽음을 무릅쓰고 천주교의 수호를 위해 장렬하게 순교한 피가 연결되어 있는 곳이다. 정약용과 그의 중형 정약전의 실학사상이 자라났고, 다산의 두 아들인 정학연·정학유 등의 계승, 다산의 외손자 윤정기가 외가를 드나들면서 실학사상을 꽃피게 했던 곳도 그곳이다.

임금 정조가 승하하자 이듬해 정월 조선 천주교회는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천주교 탄압령을 시작으로 탄압을 받았는데 이를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신유박해(辛酉迫害)라고 부른다. 신유박해는 천주교 탄압을 빌미로 남인을 제거하기 위한 노론의 정치적 공격으로, 이가환(李家煥)·권철신(權鐵身)·이승훈(李承薰)·최필공(崔必恭)·홍교만(洪敎萬)·홍낙민(洪樂敏)·최창현(崔昌顯) 등이 연루되었으며, 이 박해에 정약용과 그의 두 형인 정약전(둘째 형), 정약종(셋째 형)도 연루되었다.

정약용과 그의 둘째 형 정약전은 정약종과는 달리 이미 천주교를 버린 뒤였으나 노론에서는 이미 이들을 제거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약종만 천주교 신자일 뿐, 정약전과 정약용은 천주교에 무관심한 비신자라는 점이 확인되면서 사형에서 유배로 감형되었다. 그리하여 정약용과 정약전은 유배되었으며, 정약종은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아 장형을 받던 중 죽었다.

정약용은 18년간 경상도 장기, 전라도 강진 등지에서의 이 유배 기간에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의 저술 대부분이 이루어졌으며, 둘째 형 정약전도 물고기의 생태를 기록한 자산어보라는 명저를 남겼다. 고난을 겪음으로써 학자로서의 지성이 자라는 새로운 경험을 한 것이다.

1818년(순조 18) 음력 5월에 귀양이 풀려 승지(承旨)에 올랐으나 음력 8월 고향으로 돌아왔다. 혼인 60주년 회혼일 아침인 1836년 음력 2월 22일에 마현리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다산이 남긴 마지막 시는<회혼시>였다. 정약용이 죽기 전 자녀들에게 신신당부로 이른 말은 "서울을 벗어나는 순간 기회는 사라지니 무슨 일이 있어도 서울에서 버티라"는 것이었다.

더구나 다산이 해배한 뒤, 1818년에서 세상을 떠나던 1836년까지의 18년 동안에는 얼마나 많은 당대의 석학들이 그곳을 출입하면서 다산과의 교유를 통해 학문의 범위를 넓혀갔다. 석천 신작과 대산 김매순의 학문논평의 서찰이 수없이 오고갔고, 홍석주·길주·현주 3형제와 다산과의 교유가 이어졌다.. 그 모든 사람 중에서 또 정조대왕의 외동사위인 해거도인 홍현주의 마현출입은 외로운 다산의 노년에 위로가 되었다.

18년의 귀양살이에서 유배 초기 강지읍내의 사의재(四宜齋)라는 주막집 방에서 연구하고 강진읍내의 뒷산에 있던 고성사에서도 연구는 계속했지만,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귤동마을의 뒷산인 다산에 있던 윤씨들의 서재인 ‘다산초당’에서 다산학이 완성되었음도 부인할 수 없다. 관념적이고 사변적이며, 행위와 실천보다는 이론 위주의 학문인 성리학에서 관념과 사변적인 것보다는 실용적이며 실천적인 다산학을 연구했음은 조선 500년 온갖 학문 중의 금자탑이었다. 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 등 경세학이 이룩되고 경학인 다산학이 수립된 다산초당이야말로 다산학의 산실임에 분명하다. ‘다산초당’은 생가인 ‘여유당’과 함께 조선 학문의 금자탑인 다산학의 양대 보금자리였다.

다산초당은 소유권도 연고권도 전혀 없는 남의 산정(山亭)이지만 다산은 그 산정을 자신이 소유주인 양 경관을 참으로 아름답게 꾸몄다. 물을 끌어다가 비류폭포인 인공폭포도 만들고, 그 물이 고이는 곳에 연못을 파서 경치를 아름답게 단장했다. 흐르는 물을 받아 산자락에 계단밭을 일구어 미나리를 가꾸며 용돈도 벌고 반찬감도 장만했다. 바위 절벽에 ‘정석(丁石)’ 두 글자를 새겨 징표로 삼았고, 약천·다조 등 아름다움의 최상을 만들어 선비의 연구처로 삼았다. 귤동마을에는 가을이면 노랗게 유자가 익어가고, 마을 앞까지 밀려오던 구강포의 바닷물은 빠져나가면서 다산의 시름을 덜어주기도 하였다. 초당의 뒤 오솔길을 따라 걸으면 학승 혜장선사가 거처하던 백련사 절이 있어 답답한 가슴을 식히기에 넉넉하였다. 초의선사와는 이때 차인연을 맺게되어 사제지간이 되었고, 그 인연은 다산의 아들인 정학연, 정학유, 추사 김정희, 해거도인 홍현주까지 이어졌다.

다산은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강진읍내의 사의재에서 낮은 신분의 제자를 가르쳤다면 다산초당에서는 양반신분의 자제 18명을 가르쳐내, 이른바 ‘다산학단’이라는 학파를 형성해냈다. 쟁쟁한 제자들이 다산의 학문을 계승하여 망해가던 나라에 온갖 방법으로 복무(服務)했던 점은 또 다른 다산의 공로였다.

 

**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정조 10) 충남 예산~ 1856(철종 7)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 금석학자이자 고증학자이다. 본관은 경주, 호는 완당(阮堂), 추사(秋史), 예당(禮堂), 시암(詩庵), 과파(果坡), 노과(老果) 등이다. 한국 금석학(金石學)의 개조(開祖)로 여겨지며, 한국과 중국의 옛 비문(碑文)을 보고 만든 추사체가 있다. 그는 또한 난초를 잘 그렸는데 실학자이면서 화가, 서예가였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친족이었고, 양어머니 남양 홍씨를 통해 남연군과 이종사촌간이 된다. 흥선대원군 역시 한때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김정희는 한국 금석학의 개조로 여겨지며, 청나라에서 고증학을 배울 때 금석학도 함께 배웠다. 청나라에서 귀국한 뒤 친구인 김경연, 조인영 등과 함께 비문을 보러 팔도를 답사하기도 했다. 김정희가 남긴 금석학의 가장 큰 업적은 1816년 당시까지 ‘무학대사의 비’ 또는 ‘고려 태조의 비’라고 알려져 있던 북한산비를 비문에 적힌 「…眞興太王及衆臣巡狩…」라는 구절을 통해 진흥왕(眞興王) 순수비(巡狩碑)라고 밝혀냈다. 순수비를 밝혀낸 과정과 그 사실적인 증명은 그가 저술한 《금석과안록》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의 학문 태도를 밝힌 글로서 유명한 <실사구시설>은 과학적이며 객관적인 방법으로 진리를 탐구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김정희는 그밖에도 《주역》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전각(篆刻)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차(茶)를 좋아하여 한국의 다성(茶聖)이라 불리는 초의 스님, 백파 스님과 친분을 맺었다. 제주도에서 유배하던 때에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에까지 내려오는 한국의 서법(書法)을 연구하여 만든 서체(書體)가 추사체(秋史體)이다. 이 추사체는 한국의 필법(筆法)뿐만 아니라 한국의 비문과 중국의 비문의 필체(筆體)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유배지에서의 곤궁한 생활 가운데 계속 글과 작품을 썼는데 1850년(철종 1년) 또는 1851년에 실수한 권돈인은 물론이고 친구였던 김정희까지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북청 유배는 1852년 예순여덟 살 겨울에야 풀려나게 되며, 그동안 지인과 제자로부터 고대의 석기를 모아오게 하여 한국의 고대 문화를 연구하였다고 한다. 북청에서 돌아온 김정희는 과천에 과지초당(瓜地草堂)이라는 거처를 마련하고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으며, 일흔한 살 되던 해에 승복을 입고 봉은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해 10월 과천으로 돌아와 생을 마쳤으며, 죽기 전날까지 집필을 하였다고 한다.

글씨로는 해남 대둔사의 대웅보전(大雄寶殿), 무량수각 현판(懸板), 단연죽로시옥(端硏竹爐詩屋), 소창다명 사아구좌(小窓多明 使我久坐), 대팽두부(大烹豆腐), 봉은사의 판전, 초의선사에게 보낸 명선(茗禪), 선탑록명(禪榻綠茗) 등과 그림으로는 세한도, 불이선란도, 영영백운도(英英白雲圖), 고사소요(高士逍遙), 소림모정(疏林茅亭), 세한도(歲寒圖) 등이 있다.

추사의 일생은 보통 연경(燕京, 지금의 북경(北京)을 말함)을 다녀온 25세부터 과거(科擧)에 합격하는 35세까지, 10년간의 학예 연찬기, 20년간 중년의 활동기, 55세부터 63세까지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는 9년간의 유배기, 제주도 귀양에서 풀려나서부터 세상을 떠나는 71세까지 다섯 단계로 나뉘어진다.

 

백석신군비와 명선

추사 김정희가 필의(筆意)했다는 백석신군비는 2007년 9월 4일 신문지상을 통해 보도되었다. 추사에게 백석신군비의 탁본(拓本)을 전한 이는 청의 학자 유희해이다. 유희해는 운석 조인영을 통하여 추사의 아우 김명희와 조선의 금석문을 <해동금석원>으로 엮은 저자이다. 유희해는 조선과 청의 금석문화 교류사에 중요한 역학을 했던 금석학자이다. 추사는 제주도 유배당시 <백석신군비(白石神君碑)>탁본을 정성껏 살피다가 초의가 차를 보내준 것에 고마움의 표시로 ‘명선(茗禪)’이란 두 글자를 써서 보냈다. 그 글을 쓸 때 추사는 <백석신군비>의 필의로 썼다고 했다. 이는 스승 옹방강을 존경한 나머지 <백석신군비>를 한나라체로 비정(批正)한 뒤 <명선>을 필의한 것 같다.

<백석신군비>의 원석 발견은 추사 사후 150년만에 처음으로 뉴스의 초점이 되었다. 청조의 고증학을 받아들이고 옹방강을 스승으로 모셨다는 추사는 <백석신군비>에서 ‘명선’만을 필의한 것이 아니라 추사의 시 중에서 ‘정좌처다반향초(靜坐處茶半香初) 묘용시수류화개(妙用時水流花開)’라는 시 또한 황산곡의 시를 인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유홍준 전문화재청장은 “해동의 유마거사라는 평을 받았던 추사가 만년에 남긴 ‘판전(版殿)’이란 글씨를 보면 마치 어린애 글씨 같은 분위기가 있습니다. 본래 어린애 글씨는 아무 꾸밈없이 천진한 것인데 추사가 추구한 천진무구(天眞無垢)함이란 단련된 천진성이라는 데 중요한 미덕이 있습니다. 추사는 70평생 벼루 10개와 일천 자루의 몽땅붓으로 추사체를 형성했고, 이는 판전이라는 글씨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그 판전 글씨는 추사체의 미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 초의(艸衣, 1786~1866(고종 3년))

대흥사의 13대 종사의 한 사람인 대선사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던 우리나라 다도를 중흥시켜 다성(茶聖)으로 불린다. 초의선사는 불문에 몸담고 있었으나 그 테두리에 그치지 않고 유학, 도교 등 당대의 여러 지식을 섭렵하며 다산 정약용이나 추사 김정희, 자하 신위 같은 학자나 사대부들과 폭넓게 사귀었고 범패와 서예, 시, 문장에도 능했다.

그는 조용한 곳을 찾아 가부좌를 틀고 앉는 것만이 선이 아니었으며, 현실의 일상생활과 선이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차(茶)와 선(禪)을 하나로 보아 ‘동다송’에서 ‘다선일미(茶禪一味)’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초의선사는 차 한잔을 마시는 데서도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맛본다고 하였으며 차는 그 성품에 삿됨이 없어서 어떠한 욕심에도 사로잡히지 않은 것이며, 때 묻지 않은 본래의 원천과 같은 것이라 하여 ‘무착바라밀(無着波羅蜜)’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가 지은 󰡔동다송(東茶頌)󰡕은 동다(東茶) 즉 우리나라 차에 대한 예찬을 담고 있는 것으로 차의 효능과 산지에 따른 품질, 만들고 마시는 법 등을 적은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차에 관한 책이다. 우리나라의 중요한 차(茶)의 고전(古典)이라고 할 수 있는 󰡔동다송(東茶頌)󰡕은 다승(茶僧) 초의선사(艸衣禪師)가 해거도인 홍현주의 요청을 받아 1837년에 완성한 글이다.

동다송은 1책. 필사본. 7언시로 총 31송이며 송마다 주를 붙여 본문을 보충했다. 내용은 차의 역사, 차나무의 품종, 차 만드는 법, 차를 끓이고 마시는 법, 차의 생산지와 품질 등을 노래한 것이다. 우리나라 토산차에 관한 것은 6송이 있다. 토산차가 중국 것에 못지 않음을 찬양하고, 토산차를 따는 시기도 중국과 달라 중국 책인 󰡔다경(茶經)󰡕에서 말한 곡우(穀雨) 뒤가 아닌 입하(立夏) 다음이 적당하다고 했다.

그리고 차의 수확과 다도에 관한 저술인 [다신전(茶神傳, 8장, 필사본)]이 있는데 내용은 중국의 <만보전서(萬寶全書>에서 뽑아 엮은 것이다. 우리나라 차의 역사와 전통다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1975년 최범술(崔凡述)이 보련각(寶蓮閣)에서 간행한 〈한국의 다도〉에 두 책의 원문과 번역문이 수록되어 있다.

 

다선을 지켜온 조정, 대흥사 선다일미 원류

조선의 차문화를 말할 때 초의 선사(艸衣禪師, 1786~1866)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초의 선사는『동다송(東茶頌)』이란 책을 지어 고래(古來)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차문화(茶文化)를 살리면서 그 정신을 중정청경(中正淸境)으로 정립, 중국이나 일본다도와 확연히 다른 새로운 세계를 개척했다. 한국 차문화를 중흥시킨 초의 선사가 오랫동안 주석하면서 다선불이(茶禪不二) 정신을 이끌어 냈던 한국다선의 조정(祖庭)인 해남 대흥사의 다풍(茶風)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13대 종사(宗師)와 13대 강사(講師)를 배출해 낸 대흥사는 서산문도(西山門徒) 중 가장 번창한 소요태능계(逍遙太能系)와 편양언기계(鞭羊彦機系)가 함께 살면서 서산문풍을 드높였던 곳이다. 청허휴정(淸虛休靜, 1520~1604)의 법맥을 잇는 제자만도 천여 명에 이르고 있으니 한국불교계 모든 승도(僧徒)가 청허법손이라고 말하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청허의 적손은 사명유정(四冥惟政) - 편양언기(鞭羊彦機) - 소요태능(逍遙太能) - 정관일선(靜觀一禪)으로 이어졌다. 대흥사는 편양언기(鞭羊彦機ㆍ1581~1644)에서 연담유일(連潭有一)을 거쳐 한국 차문화의 중흥조인 초의의순(草衣意恂)과 아암혜장(兒菴惠藏), 범해각안(梵海覺岸) 등 유난히도 많은 다승을 배출했다.

한국다선의 원류는 임제의현(臨濟義玄) 문하에서 양기방회(楊岐方會)가 나와 임제의현(臨濟義玄) - 황룡혜남(黃龍慧南) - 양기(楊岐) - 백운수단(百雲守端) - 원오극근(圓悟克勤) - 호구소륭(虎丘紹隆)을 거쳐 석옥청공(石屋淸珙) - 태고보우(太古普愚)로 이어져 왔고, 그 뒤 서산문도로 이어져 편양언기(鞭羊彦機) - 풍담의심(楓潭義諶) - 월담설재(月潭雪齋) - 환성지안(喚醒志安) - 호암체정(虎巖體淨) - 연담유일(蓮潭有一)을 거쳐 완호윤우(玩虎尹佑) - 초의의순(草衣意恂)으로 대흥사의 다풍이 면면히 이어져 왔다.

원오극근 선사가 일본인 제자에게 네 글자로 써 준 다선일미(茶禪一味)라는 진결(眞訣)이 일본 나라의 대덕사에 보존되면서 일본 다도의 전유물처럼 되어왔다. 그러나 양기방회(992~1049), 원오극근으로 이어지는 다선의 정통맥은 한국으로 이어졌다. 원오극근에서 호구소륭(1077~1136)으로 이어지는 다선의 정통맥을 청허 선사가 이어와 초의의순에 의해 활짝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한국다선의 조정 대흥사가 차지하는 위상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기 때문이었다.

 

전다박사로 불린 초의선사

18세기 후반 차문화가 전성기를 맞이했을 때 자하신위(1769~1845)와 금령 박영보(1808~1872) 같은 어른이 초의선사에게 ‘전다박사’의 칭호를 붙여주었다. 전다박사란 요즘처럼 박사학위를 받은 이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차품(茶品)을 겨루는 박사'를 말한다. 서한 말년 왕포의 <동약>(부)에 나오는 편료가 첫 번째 차박사라면 초의선사는 전다박사라는 호칭을 얻은 첫 번째 사례라고 말할 수 있겠다. 초의차에 대한 입소문이 퍼지자 사대부들은 초의에게 차를 선물받는 일을 기쁘게 생각하였다.

18세기 후반 초의를 중심으로 자하 신위, 해거도인 홍현주, 추사 김정희, 그의 아무 김명희, 다산 정약용, 그의 제자 황상을 통해 초의 차의 진가가 밝혀지면서 초의는 중정(中正)의 도(道)로써 대중들의 마음을 하나로 결집하게 되었다. 차가 중국을 통해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전파된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부분이다. 초의는 일본 다도정신을 이룬 화경청적을 뛰어넘어 일본다도와는 다른 '중정의 도'를 들고 나왔다. 예부터 차는 군자와 같아서 성품에 삿됨이 없다고 말해왔다. 조선 후기로 접어들어 차품을 겨루는 품다가 이루어지면서 차문화가 활짝 꽃을 피웠던 것에는 전다박사 초의의 공로가 크다 할 것이다.

* 대둔사의 다승들 : 청허휴정, 월저도안, 설암추봉, 환성지안, 상월새봉, 함월해원, 연담유일, 아암혜장, 범해각안, 보제심여, 금명보정 등은 다시를 통해 다맥을 잇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 해거도인(海居道人)홍현주(洪顯周, 1793∼1865)

정조(正祖)의 따님인 숙선옹주(淑善翁主)의 부마(駙馬 : 임금의 사위)로 영명위(永明尉) 영의정 낙성(樂性)의 손자이자 우부승지(右副承旨) 인모(仁模)의 아들이다. 그의 어머니는 영수합(令壽閤) 서(徐)씨이고, 좌의정(左議政) 홍숙주(洪奭周)는 그의 형이며, 홍현주의 집안은 홍석주를 포함한 그의 형들과 어머니, 그의 아내인 숙선옹주도 다시(茶詩)를 여러 수(首) 남긴 다인(茶人) 집안으로 저서(著書)로는 [해거재시초(海居齋詩抄)]가 있다.

<납설수팽다臘雪水烹茶 : 섣달 눈 녹인 물로 차를 끓이다>

동십이월계미납(冬十二月癸未臘) 계미년 겨울이라 섣달 12월에

일고수족남창탑(日高睡足南窓榻) 중천에 해 뜨도록 남창 침상에서 실컷 잤네

운소죽관무박탁(雲銷竹關無剝啄) 대나무 사립은 구름에 잠겨 문 두드리는 사람 없고

설옹매려절진잡(雪擁梅廬絶塵雜) 눈 덮인 매려에는 세상 잡사 아예 없다.

염취구협백견봉(拈取舊篋白絹封) 북은 상자 뒤져서 흰 깁 봉함 접어드니

보이차고월단탑(普洱茶膏月團榻) 보이차 덩어리에 둥근 달이 박혔구나

개함완견천리면(開緘宛見千里面) 봉함 열자 완연히 천리 면목 본 듯 하니

연남고인정주잡(燕南故人情周匝) 연남 사는 옛벗은 그 정이 깊고 말고

방규원벽수처옥(方珪援璧隨處沃) 방규와 원벽이 곳곳에 넉넉하여

고송노괴신수랍(枯松老槐信手拉) 마른 솔과 홰나무를 손길따라 꺾는다네

전로수탄화후활(甎爐獸炭火候活) 벽돌화로 수탄 피워 불기운이 살아나니

석조어안송풍삽(石銚漁眼松風颯) 돌 냄비에 어안 일고 솔바람 불어온다

자전불감부동복(自煎不敢付童僕) 하인 아이 못 맡기고 내가 직접 차 달이니

두상반의오사암(頭上半欹烏紗匼) 머리 위에는 오사모(烏紗帽)가 반쯤은 기울었네

화자성래유가색(花瓷盛來有佳色) 화자잔(花瓷盞)에 담아내자 고운 빛 어리더니

일완돈개금격탑(一椀頓開襟鬲闒) 차 한 잔에 갑자기 막힌 가슴이 뻥 뚫린다

통정미천유제이(桶井尾泉猶第二) 통우물과 미천 물은 오히려 두 번째라

한영정여갈후합(寒英正與渴喉合) 한영이 참으로 마른 목에 합당하다

다병소수유명음(多病所須惟茗飮) 병이 많아 필요한 것은 다만 차를 마시는 일

유대명년잉저납(留待明年剩貯納) 내년을 기다려 남은 것을 간직하네

 

위의 싯귀를 보면 이미 조선시대에도 보이차(普洱茶)가 차를 즐기는 사대부나 차인들 사이에 음용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고려의 차인들 시에도 보이차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다른 차인의 시나 글에 보이차가 등장하는 것을 찾아서 다음 번에 올리도록 하겠다.

9句의 방규원벽(方珪援璧)은 송나라 때의 시인 진관(秦觀)이 “북원의 원차는 방규원벽이라 만리의 이름이 서울에 울렸다(원문 생략)”라고 한데서 유래한 것으로 북원차(北苑茶)를 지칭하는 말이며 18구(句)의 한영(寒英)은 설화(雪花)를 말하는 것으로 시제(詩題)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설수(雪水 : 눈 녹인 물)를 가르키는 말이다. 그리고 남은 차를 비단에 꼭꼭 싸서 보관한다거나 화후(火候)를 직접 살핀다는 것을 볼 때 홍현주의 차에 대한 식견은 초의선사에게 차에 대해 묻기를 청하기 전에 이미 상당한 수준에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초의스님은 1831년(순조 31), 스승 완호(玩虎)스님의 삼여탑(三如塔)을 건립하며 명시(銘詩)를 홍현주에게 부탁한 일이 있다. 홍현주는 이 일을 계기로 초의스님의 차를 맛본 후 부쩍 우리 차에 관심을 가졌다. 홍현주는 1817년(순조 17) 변지화(卞持和)를 통해 초의스님에게 다도를 물었고, 초의스님은 그 대답으로 󰡔동다송󰡕을 지었다. [동다송(東茶頌)]은 다도(茶道)를 시로 설명한 글이다. [동다송]의 첫 구절을 보면 ‘一傾玉花風生腋 身輕已涉上淸境 : 옥화같은 차를 한잔마시니 겨드랑이에 바람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75대(선불교 46조, 한국 선불교 19조)경허성우(1849~1912)

철종(哲宗) 1년에 출생했고, 순종(純宗) 사후 2년에 열반(涅槃)하였으며, 제자들은 만공월면, 한암중원, 제산정원, 수월음관, 침운현주 등이다.

경허(鏡虛, 1849년~1912년)는 한국 근현대 불교를 개창했다는 대선사로 1849년 전주에서 태어났고, 9세 때, 경기도 과천 청계산에 있는 청계사로 출가하였다. 속가의 이름은 송동욱(宋東旭)이고, 아버지는 송두옥(宋斗玉)이다. 법호는 경허(鏡虛), 법명은 성우(惺牛)이다.

1879년 11월 15일 [모호한 표현], 동학사 밑에 살고 있던 진사인 이처사(李處士)의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어야지.’ 이 한마디를 전해 듣고는 바로 깨달아 부처가 되었다. 1대 조사인 인도의 마하가섭존자 이래 75대 조사이다. 우무비공처(牛無鼻孔處 : 콧구멍 없는 소)는 중국 법안종의 종주 법안(法眼) 선사의 어록에 실려 있는 선어다. 당시 경허의 시봉을 받들던 사미승 원규는 경허의 사제인 학명의 제자였고, 이처사는 사미승 원규의 속가 아버지였다.

1886년 6년 동안의 보임(保任)을 마치고 옷과 탈바가지, 주장자 등을 모두 불태운 뒤 무애행(無碍行)에 나섰다. 한동안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돌연 환속(還俗)하여 박난주(朴蘭州)라고 개명하였고, 서당의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함경도 갑산(甲山) 웅이방(熊耳坊) 도하동(道下洞)에서 1912년 4월 25일 새벽에 임종게를 남긴 뒤 입적하였다. 나이 64세, 법랍 56세이다. 저서에는 《경허집》이 있다.

경허의 수제자로 흔히 ‘삼월(三月)’로 불리는 혜월(慧月, 1861~1937), 수월(水月, 1855~1928), 만공(滿空, 1871~1946)선사가 있다. 경허는 “만공은 복이 많아 대중을 많이 거느릴 테고, 정진력은 수월을 능가할 자가 없고, 지혜는 혜월을 당할 자가 없다.”고 했다. 삼월인 제자들도 모두 깨달아 부처가 되었으며, 이들 역시 근현대 한국 불교계를 대표하는 선승들이다. 현재 ‘북송담 남진제’의 두 큰스님의 경우에 송담스님은 경허(75대)-만공(76대)-전강(77대)-송담(78대)의 계보이고, 진제스님은 경허(75대) - 혜월(76대) - 운봉(77대) - 향곡(78대) - 진제(79대)의 계보이다.

 

76대(선불교 47조, 한국 선불교 20조)만공월면/혜월혜명(1862~1937)

 

만공(1871~1946)

조선과 일제 강점기의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이다. 한국 현대 불교의 대선사이며, 석가모니 이래 제76대 조사이다. 속세의 성은 송씨로 송만공으로도 부른다. 경허(75대) - 만공(76대) - 전강(77대)으로 법맥이 이어졌다. 춘성은 한때 그의 문하에서 수행하기도 했다. 13세에 어머니와 금산사에 다녀온 바우(만공스님의 속명)소년은 미륵부처가 업어주는 꿈을 꾸고 나서 식구들 몰래 출가의 꿈을 키운다. 14세에 공주 계룡산 동학사로 출가해 진암(眞巖)스님 밑에서 행자생활을 하다가 그곳에 다니러 온 경허스님을 운명적으로 만난다. 경허를 따라가라는 진암스님의 말에 처음엔 싫다고 거부하지만 경허의 법문을 듣고난 후 그 자리에서 마음을 바꿔 제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경허스님은 그의 형 태허스님과 어머니가 머물던 천장암에 바우소년을 데리고 가 월면(月面)이라는 법명을 준다.

바로 이때가 경허의 세 달(月)이 모두 함께 천장암에 거하던 기념비적인 순간이었다. 훗날 백두산에서 나그네들에게 짚신을 삼아주던 무주상보시로 유명했던 ‘북녘의 상현달’ 수월(水月)스님은 땔나무를 해오는 소임인 부목을 맡고 있었고, 아이와 같은 천진불로 유명했던 남녘의 하현달 혜월(慧月)스님은 이곳에서 경허스님에게 보조국사의 수심결을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수월은 30세, 혜월은 23세, 만공월면은 14세였다.

1905년 이후 주로 덕숭산 수덕사에서 주석한 만공스님은 1931년 금강산 유점산 금강선원 조실, 1933~35년 마하연 조실, 1936년 마곡사 주지를 잠깐 맡았을 뿐이다. 만공스님이 마곡사 주지로 있었던 1937년 3월, 총독부는 전국 31본산 주지와 도지사를 모아 미나미 총독의 주재로 ‘불교진흥책 마련’이란 미명하에 한·일 불교 합병을 획책하는 회의를 주최했다. 이 자리에서 미나미가 “전 총독 데라우치는 조선불교에 끼친 공이 크다”고 하자 만공스님은 벌떡 일어나 “데라우치는 조선승려로 하여금 일본 승려처럼 파계하도록 했으니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져 큰 고통을 받을 것”이라고 분연히 소리 치며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미나미는 아무 말도 못하고 말았다. 이날 밤 만공스님의 둘도 없던 친구 만해 한용운 스님이 찾아와 잘했다면서 “이왕이면 주장자로 저 쥐새끼 같은 놈들을 한방씩 갈겨 주지그랬나”라고 하자 만공스님은 “미련한 곰은 방망이를 쓰지만 큰 사자는 원래 할(喝, 깨달음을 주기 위해 크게 소리침)을 하는 법”이라고 응수하자 이 때 만큼은 한용운도 잠시 말을 잊었다.

만공스님의 시봉이었던 원담스님(덕숭총림 방장)은 “만해 한용운 스님과 김좌진 장군은 자주 수덕사로 놀러 오시곤 했다”면서 “만공스님은 한용운을 가리켜 ‘내 애인’이라고 종종 말씀하셨다”고 회상했다. 만공스님은 거구에 육척장신으로 힘이 장사여서 김좌진 장군과 팔씨름을 하면 이길 때가 많았다고 한다. 또한 풍류를 즐길 줄 알았던 만공스님 주위에는 항상 글쓰고 그림 그리고 소리하는 예인들이 많았다. 남농 허건, 허백련 등 화가들을 비롯해 소리 잘하는 풍류객들도 종종 만공을 찾았다. 만공스님은 그럴 때면 늘 옆에 끼고 있던 ‘공민왕 거문고’를 타며 함께 풍류를 즐겼다.

만공스님은 말년에 덕숭산에 전월사를 짓고 지내다가 1946년 10월20일 나이 75세, 법랍 62세로 입적했다. 입적하던 봄 스님은 시봉하던 원담스님을 불러 “더 살면 험악한 꼴을 볼 것이니 올해 시월 스무날쯤 가는 게 좋겠다”라고 했다. 그리고 바로 그날 아침 목욕 후 거울을 들여다보며 “자네 나와 이별할 때가 되었네 그려” 하더니 춘성스님에게 법상을 맡긴 후 열반에 들었다. 만공스님의 제자로는 보월(寶月), 용음(龍吟), 고봉(古峰), 서경(西耕), 혜암(惠庵), 전강(田岡), 금오(金烏), 춘성(春城)스님, 비구니로는 법희(法喜), 만성(萬性), 일엽(一葉)스님을 들 수 있다.

 

혜월혜명(1862~1937)

속성(俗姓)은 신씨(申氏)로 호는 혜월(慧月)이며, 11세에 예산 정혜사(定慧寺)의 안수좌(安首座)에게 출가했다. 1884년(고종 21) 경허성우(鏡虛惺牛)로부터 보조국사(普照國師)의〈수심결(修心訣)〉을 들어 깊은 뜻을 깨닫고, 1901년 그의 법을 이어받았다. 1908년부터 도리사(桃李寺), 파계사(把溪寺), 성전(聖殿), 울산 미타암(彌陀庵), 통도사, 천성산 내원사(內院寺) 등으로 다니면서 종풍을 크게 선양했다. 1921년 부산 선암사(仙巖寺)에서 주지하면서 산지를 개간하여 논을 만들었다. 부산 양안암(養安庵)에서 입적했다. 언제나 보시를 행했으며 꾸밈이 없었고 탐욕을 부리지 않았다. 혜월 혜명(1862~1937) 스님은 12세에 출가하여 글 한 줄 제대로 배워 본 적이 없다가, 은사(恩師) 스님의 퇴속(退俗)으로 경허 선사와 인연이 되어서 참선의 관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근세 한국불교 중흥(中興)의 씨앗을 뿌린 경허스님의 법제자인 혜월혜명(慧月慧明, 1862~1937)스님은 무심도인(無心道人)이다. 일제 강점기 부산 선암사에는 많은 대중이 모여 들었다. 남방의 도인인 혜월스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였다. 혜월스님의 열반 상황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백양산에서 솔방울을 주워 자루에 담고 내려오는 길에 산기슭에서 입적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솔방울을 주워 올 때면 백양산 중턱 길에서 한 번씩 쉬었는데 그곳서 입적했다는 것이다. 1937년 2월 어느 날. 그날도 스님은 평소처럼 절로 돌아오고 있었다. 늘 쉬어가던 곳에서 한숨 돌린 스님은 백양산과 마을을 한번 바라본 후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는 자세를 취하다 원적에 들었다. 가고 옴이 따로 없는 선지식의 열반을 혜월스님이 보여준 것만은 사실이다. 길에서 열반에 든 부처님처럼 혜월스님은 집착하지 않는 삶의 가르침을 마지막 순간까지 보여주었다. 혜월스님의 법맥은 운봉스님을 통해 향곡. 진제스님에게 계승됐다.

 

77대(선불교 48조, 한국 선불교 21조)혜암현문(慧庵玄門) 만공선사의 제자/ 운봉성수(1889~1944) 혜월선사가 인가, 혜월선사의 제자

(한편 제77대는 고봉경욱(1890~1962), 제78대는 숭산행원(1927~2004)이라고 하는 이도 있다.<다음카페 「하늘스님의 시사랑」>참조)

 

혜암 현문(1886∼1985)

근현대 한국불교의 선지식이며 중흥조인 경허, 만공스님의 선풍(禪風)을 계승하고 덕숭총림 수덕사 초대 방장을 역임한 혜암현문(惠菴玄門)스님은 1886년 1월5일(음력은 1885년 12월 21일) 황해도 배천군 해월면 해암리에서 태어났다. 부친 최사홍(崔四弘) 선생과 모친 전주 이씨 사이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세속의 이름은 최순천(崔順天), 본관은 강릉으로 11세에 부친상을 당한 후 이듬해 수락산 흥국사에서 삭발했다. 은사는 보암(保菴)스님, 계사는 금운(錦雲)스님으로 이때 받은 법명이 현문(玄門)이다. 17세에 모친마저 별세한 후 스님은 운수행각에 나섰다.

1911년 해담(海曇)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은 후 만공(滿空), 혜월(慧月), 용성(龍城)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공부에 몰두했다. 이무렵 오대산 상원사 주지와 태백 정암사 주지 소임을 잠깐 보았다. 혜암스님은 1929년 수덕사 조실 만공스님에게 전법게를 받았다. 이때 만공스님이 혜암이란 법호를 내렸다. 이로써 스님은 만공스님의 법맥을 이은 법제자가 되어 ‘경허, 만공의 선풍’을 세상에 보였다.

1956년 수덕사 조실로 추대된 혜암스님은 20여 년간 후학을 지도했다. 1984년 덕숭총림 개설시 초대 방장으로 추대되어 사부대중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한 혜암스님은 1985년 5월 19일(음력은 3월30일) 수덕사 염화실에서 열반에 들었다. 원적에 들기 전에 “모든 존재는 변화하여 고정된 실체가 없으니 허망한 것도 아니고, 허망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는 내용의 마지막 가르침을 남겼다. 세수 101세, 법납 89세였으며, 마지막까지 건강하게 천명을 다한 스님의 별칭은 ‘장수도인(長壽道人)’이었다. 혜암스님은 1976년 그동안의 법어를 모은 <선관법요(禪關法要)>를 발간했으며, 1980년에는 <선문촬요(禪門撮要)>를 직접 편역(編譯)해 후학들에게 지남(指南)을 보여주었다.

 

운봉성수(1889~1944)

13세에 출가하여 경율론 삼장(經律論三藏)을 두루 섭렵하였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진리의 본체(本體)에 한 걸음도 다가서지 못하는 것임을 통감하여 참선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 그리하여 전국의 명산제찰(名山諸刹)을 두루 행각(行脚)하며 선지식을 참예(參詣)하고 공부에 혼신을 기울였다.

그렇게 참선정진에 전력(全力)하기를 10여 년,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두일념(話頭一念)이 현전(現前)되는 경계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스님의 세수 35세 되던 1923년 심기일전(心機一轉)하기 위해 부처님전에 대발원을 세워 백일기도를 한 후 사생결단의 각오로 백양사 운문암에서 동안거 정진에 들어갔다. 밤낮의 구별이 있을 수 없는 대분심(大憤心)이었던 터라 자연히 화두 한 생각이 뚜렷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섣달 보름이 되어 우연히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녘에 문 밖에 나서는데 그 순간 홀연히 마음 광명이 열려 가슴에 막혀 있던 의심이 완전히 해소되었다. 그리하여 깨친 바를 점검받고자 당시 남방 제일의 선지식으로 알려져 있던 혜월선사를 참예하여 여쭈었다.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 조사 스님들은 어는 곳에서 안신입명(安身立命)하고 계십니까?” 이에 혜월 선사께서 양구(良久)하므로 스님이 냅다 한 대 치면서 다시 여쭈었다. “산 용(龍)이 어찌하여 죽은 물에 잠겨 있습니까?” “그럼 너는 어찌하겠느냐?” 스님이 문득 불자(拂子)를 들어 보이니 혜월 선사께서는 짐짓 “아니다.”라며 부정하셨다. 이에 다시 응수(應手)하기를 “스님 기러기가 창문 앞을 날아간지 이미 오래입니다.” 하자 혜월 선사께서는 크게 한바탕 웃으시며 “내 너를 속일 수가 없구나.”하고 매우 흡족해 하셨다. "운봉 성수에게 부치노라. 일체의 유의법은 본래 진실상이 없음이니 저 산 가운데 상이 없으면 곧 견성이라 이름하나니..." 이렇게 혜월선사에게서 전법게를 받으셨다.

이후 제방(諸方)에서 납자를 제접하시며 선(禪)의 종지(宗旨)를 크게 떨치시니 도법(道法)의 성황함이 당대의 으뜸이 되었다. 선사께서 내원사(內院寺) 조실로 계시던 중 1929년에 훗날의 법제자인 향곡 혜림 스님을 만나셨다.

 

*** 경봉선사(1892~1982)

염다래, 고종때 태어나서 일제시대를 거쳐 1980년대까지. 만해, 용성, 한암선사 등과 같은 시대를 살았음. 혜월스님 제자.

경봉선사는 통도사 극락암에 머물면서 승속을 가릴 것 없이 찾아오는 사람에게 선다일미를 실천해 온 선승이었다. 조주의 다풍을 선가의 가풍으로 진착시킨 스님은 츠차취(喫茶去)를 염다래(拈茶來)로 이끌어 냈다. 이는 더 나아가 경봉의 다선에서 영향을 받은 금당 최규옹 옹의 끽다래(喫茶來)로 이어져 오면서 근세 선차문화를 이끌어 냈다.

스님의 차의 인연은 깨달음을 이룬 과정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36세 되던 해인 1927년 11월 15일 스님이 법주(法主) 겸 설주(說主)가 되어 화엄산림법회를 시작했을 때였다. 나흘째 되던 날 갑자기 별이 무너지듯 시야가 넓게 트이면서 천지간에 오롯한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났다. 그렇게 깨닫던 순간을 선필에 담아 일원상을 담아냈다. 그것을 간직한 다우들이 족자(簇子)로 차실에 다괘(茶掛)로 걸게 되면서 경봉선사는 다선일미를 올곧게 지켜 온 참 스승으로 자리 잡았다. 경봉선사는 늘 “시자(侍子)야, 염다래(拈茶來 : 차 달여 오너라)”라고 말씀 하셨다. 그리고 그를 찾아오는 이에게 “자네 차 몇 잔 마셨나”로 경책(警策)을 늦추지 않았다.

근래 편찬한 <선원청규>에서도 예로부터 선가에서는 선수행과 다도를 일치시켜 선다일미의 선풍을 진작시켰으며,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사찰에서 선차가 사라져 가고 있을 때 경봉선사와 효당스님이 나와 꺼져가는 선차의 맥을 이어갔다고 말하고 있다. 그만큼 경봉선사는 근세 선차를 논할 때 맨 먼저 거론된다. 선사는 일원상을 시작으로 츠차취, 선차, 조주차, 운병법, 다선일미, 염다래 등 수 많은 선어를 남겨 지금은 다괘로 명성이 후세까지 전해지고 있다.(한편으로 드는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러한 모든 선어(禪語)는 선차(禪茶)로 정리될 수 있을 듯하다. 선차에서 다양한 자기만의 스타일을 만들어 낸 것이므로 모두 선차로 환원될 수 있을 것 같다. 더구나 다양한 다도는 선차지법(禪茶之法)으로 환원될 수 있을 듯하다. 하나에서 모든 것이 나온 것이므로... 그러나 각자 운용하는 묘미가 있으므로 다양함을 유지해가며 자기언어로서 그 운용의 묘미를 살리며 자기스타일화 시키는 것도 중요한 듯 하다. 하나에서 다양함으로, 다양함은 하나로 환원될 수 있는 것. 즉 소통의 통용이자 상호작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차와 선에 대해 경봉선사가 말씀하시길 “무릇 선(禪)이란 마음 가운데 망상(妄想)을 쉬고 진성(眞性)을 나타내는 공부이며, 물 가운데 화기(火氣)를 내려가게 하고, 수기(水氣)를 오르게 하는 방법이니 망상을 쉬면 물 기운이 오르고 망상이 가라앉아 물과 마음이 한 겹 같으며 정신과 기운이 상쾌(爽快)해진다.”고 하셨다.

 

** 응송 박영희 스님(1893년 ~ 1990)

고종때 태어나서 일제를 거치고 .6.25동란을 거치고 1990대까지.

 

차를 뜨겁게 우려 마심.(열탕차)

열일곱살에 일본헌병의 눈을 피해 대흥사에 들어가 서호스님으로부터 수계를 받았다. 그 후 현대 다성으로 추앙받고 있는 초의스님의 법제자인 서암스님의 문중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서암스님으로부터 사후법계를 받아 초의스님 문중에 들게 되어 자연히 초의스님의 종법손이 됐다. 종법손이란 직계가 아닌 방계의 손이다. 초의스님이 입적한 지 17년 후에 응송스님이 태어났고, 또 그 17년 후에 머리를 깎았지만 초의스님의 문중에 들 수 있는 것이 불법의 법이기도하다. 아무튼 응송스님은 수계를 받고부터 절에서 차만을 맡아 심부름하는 다각생활을 20년간 했다. 또 20년간 대흥사주지도 했다. 소위 대흥사 다법이나 초의다법을 그대로 계승한 살아있는 증인이다.

뜨거운 차(茶)는 선종 본래의 다법(茶法)이다. 초의, 응송의 음다법은 중국 선종의 영향을 받았다. 응송스님의 제다법도 솥에 덖은 방법이니 초의스님의 제다법이 응송스님과 같음을 알 수 있다. 응송스님의 제다법은 뜨거운 화후에서 생잎을 살청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차가 가지고 있는 영양, 식물적인 요소, 일시에 갈무리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그리고 뜨거운 탕수에 견딜 수 있는 비법이 여기에 있다. 이 유형의 제다법은 선종이 들어오면서 함께 유입되어 우리나라에 면면히 이어오던 고유의 제다법이 가미된 형태는 아닐지….

중국 선종의 제다법이 우리나라에 유입된 것이 확실하다는 증거는 중국 강서성 영수현에 소재한 선종사찰 운거사의 제조법이 응송스님의 제다법과 가장 유사하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강서성 운거사의 제다과정을 조사한 결과 뜨거운 불에 달구어진 무쇠솥에서 생잎을 덖을 때 쓰는 대나무로 만든 차손, 차를 유념하는 방법, 유념한 후 약하게 발효를 거치는 방법이 대흥사의 응송스님의 제다법과 같다.

남종선과 함께 유입된 제다법이라면 1천 년의 역사 흐름 속에서 우리의 심성과 환경에 맞추어 얼마만큼 변화되고 발전되었는지 면밀히 연구하면 그 실체가 자명(自明)하게 드러날 수 있다. 운거사는 구법승의 접근이 용이하다는 지리적 특성을 갖고 있고 또 우리나라와 같이 쌀을 주식으로 하며, 차나무의 종류도 소엽종으로 우리의 차종과 같다. 실제 강서를 답사했을 때 운거사를 찾아가는 산하는 마치 우리나라의 어느 곳에 온 착각이 들 정도로 비슷했다. 나지막한 산들과 논, 그리고 소나무들, 우리의 선조들이 강서의 문화적 특성을 선호함은 이런 조건들이 작용했을 것이다. 특히 차제조법은 수종이 중요한데 운거사의 수종은 소엽종으로 우리나라 옛 절터에 자생하는 수종과 같았다. 운거사에서 제조되고 있는 차품은 그 형태도 우리와 같다. 실제 처음 입산하여 삼여 년 동안 제다과정을 거쳐야 정식 승려로 인정된다 하니 선종에서 제다는 한 수행의 과정이다.

허운대사가 득도하는 과정은 선종에서 뜨거운 차를 마셨다는 방증자료가 되기에 충분한 것인데 허운대사가 방선중 다관에 따라 주는 뜨거운 찻물이 손에 튀는 바람에 잔을 떨어트렸고, 잔이 떨어지면서 내는 소리에 득도하여 오도송(悟道頌)을 읊었다는 사실이 있다. 또 회화 속에 나타난 팽다(烹茶)는 동자가 소나무 아래에서 풍로 위에 다관을 얹어 부채를 부치면서 차를 달이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이것은 차가 뜨거웠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이며 적어도 20세기 초까지 유행했던 차는 뜨거운 차이며 특히 선종에서 차는 뜨거워야 하는 당위성을 운거사의 유품에서 증명한 셈이다. 차는 찬 것인데 뜨거운 것은 차(茶)뿐이라는 응송스님의 지론은 곧 초의스님의 차품에서 나온 것이며, 전통적인 차품은 뜨거운 차가 원형이라는 사실은 충분한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

응송은 아침 공양 뒤, 점심 공양 전, 점심 뒤 오후, 식 간, 저녁 뒤, 잠자리 전, 낮에 주변서 권하면, 손님이 오면 그때 그때, 그렇게 마치 호흡하는 공기처럼 차를 마셨다. 응송은 차문화운동에 크게 뜻을 두지 않았다. 대신 선종(禪宗)에서 차를 어떻게 다뤘는지에 대한 원형질을 간직하고 싶어 했다. 그는 차를 짜게(진하게) 마셨고, 찻물을 일정온도(우전차의 경우 60~70℃)로 식혀서 마시는 일반의 다법과 달리 초의선사 다법 그대로 펄펄 끓는 물(95℃ 가량)에 순간적(3인 기준 40초 가량)으로 우려마시는 열탕을 고수했다. 고온의 물에 견디면서 차의 본래 색과 향, 기운, 맛의 조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제다법이 달라야 한다. 일본차는 고온에서 문드러진다.

응송 스님의 제다법은 초의(艸衣) 스님 그대로 솥에 덖는 방법이다. 뜨거운 화후(火候)에서 생잎을 살청(殺靑)하면 차가 가지고 있는 영양, 식물적인 요소를 일시에 갈무리할 수 있다. 뜨거운 탕수에 견딜 수 있는 비법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초의 스님 다풍은 현장성이 중요하다. 초의 스님이 문자로 기록한 󰡔동다송(東茶頌)󰡕이 문헌 자료로 남아 있고, 실증적 형태의 제다법이 남아 있다. 응송다맥의 미묘한 맛은 ‘고회감(先苦回甘)’으로 처음엔 씁쓸한 듯하다 서서히 맑은 느낌을 주며, 두세 잔째에 우러난 제맛은 몇 잔이 돌아도 끊어지지 않고 유지된다.

 

** 효당 최범술 스님(1904~1979)

고종 때 태어나서 일제를 거치고, 6.25동란을 거치고 1970년대 후반까지.

스님은 사천 지역에서 자생하고 야생차 씨앗으로 다솔사 후원에 다원을 조성해 손수 ‘반야로(般若露)’라는 정제증차(精製蒸茶)를 만들었다. 73년 한국 차도의 입문서로 평가받고 있는 <한국의 차도>를 집필했고 77년 1월 15일 국내 최초로 차인들의 모임인 ‘한국차도회’를 발족시켜 우리 차문화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어떤 규범이나 격식, 계층에 얽매임 없이 누구나 차를 즐길 수 있다는 ‘차도무문(茶道無門)’과 다기를 다루는 행위와 그 마음자세를 일컫는 ‘차도용심(茶道用心)’을 바탕으로 한 선차(禪茶)수행을 확립한 효당 스님은 79년 7월 10일 76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차도무문을 찻자리로 이끌어낸 효당 최범술 스님은 근세 우리차의 중흥조로 진주의 다솔사에서 원효학에 몰두하던 중 80년대 초 우리 차문화 운동이 싹틀 무렵 서울에 올라왔다. 그에게 차도의 진리를 묻자 “차는 자연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그 진리를 음미하면서 생활화하는 데 그 원리가 있다”고 피력(披瀝)한 바 있다. 스님은 차 생활화의 하나로 차도무문을 주장했다. 차도무문이란 말은 <무문관>의 첫머리의 ‘대도(大道)는 문(門)이 없다.’라는 말에서 연원(淵源)하여 그 말을 근거로 다도의 원리를 이끌어 낸 것 같다. 그 밖에도 ‘차도용심(茶道用心)’란 말도 즐겨 쓰셨다. 그 말은 차생활을 할 때, 실제로 다기를 다룰 때 도(道)와 그에 운용하는 마음자리까지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효당 스님은 차맛을 감윤(甘潤)하는 것을 최상으로 하고, 가볍게 쓰면서 달고 떫은 것을 그 다음으로 여기고, 쓰거나 떫은 것은 좋은 품미가 못된다고 하였다. 또한 차를 이야기할 때 참 나에 바탕을 두어야 차선에 이른다고 말했다.

선가(禪家)에는 선필(禪筆)에 선기(禪氣)가 흐른다는 말이 있다. 효당스님은 차도무문, 차도용심, 대도무문이란 차어(茶語)로 이끌어 냈다. 조주의 끽다거와 견줄 정도로 차도무문에는 모든 것을 초월한 청정무구한 차의 세계가 담겨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 금당 최규용(1903~2002년 4월 5일)

순종 때 태어나서 일제를 거치고 ,6.5동란을 거치고 2002년까지.

최규용 선생은 대한민국 근현대 부산에서 활동한 통영 출신의 차문화연구가였다. 일본 유학 시절 차를 접한 이후 차 문화에 대해 많은 흥미를 가졌고 평생 동안 반려(伴侶)로 삼았다. 1938년 중국 상해서 사업을 하던 중 명차(名茶) 산지를 여행하며 한·중·일 차 문화를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대륙에 머물며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 부춘(富春), 난계(蘭溪), 강소성(江蘇省), 천진(天津), 북경(北京), 천목산(天目山) 등지를 여행하며 견문을 쌓았다.

1946년 귀국하여 한국의 차 역사를 공부하며 우리 차산지를 돌아다니면서 차와 관련 문헌 등을 찾아 본격적인 차 문화 연구에 몰두했다.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 선방(禪房)에서 2년 동안 참선수도하며 차 문화가 불가(佛家)를 통해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는 사실을 알고 사원차(寺院茶) 연구에 심취하여 불교와 깊은 인연을 맺기도 했다. 1952년에 해인사 경판고, 장경각, 퇴설당 보수공사에 참여했다. 고건축, 고미술, 민예품 등에 대한 조예가 깊었고, 1965년 부산에 고려민속공예학원을 설립하여 회장을 역임했다.

1978년에 금당차회(錦堂茶會)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차 문화 교육을 시작으로 1983년 한국차인연합회(韓國茶人聯合會) 고문을 맡으면서 전국적인 전통문화운동에 깊이 관여했다. 1987년 중국 항주 절강대학과 한중 문화교류에 앞장섰으며 1987년에 창립된 한국차문화회(韓國茶文化會) 상임고문을 비롯한 여러 차 문화 단체에 관여하여 한국 차문화계의 정신적 지주로 숭앙받았다.

1988년에 한국육우다경연구회를 창립하여 중국의 다성(茶聖) 육우(陸羽)가 지은 󰡔다경(茶經)󰡕을 연구하며 동양 차문화의 근본을 정리하기도 했다. 1989년에 중국차문화연구회로부터 다성(茶星) 칭호를 받았다. 금당은 한국 뿐 아니라 중국 국제차문화교류회 등의 중국 차 문화 단체에도 고문을 맡아 국제적인 차인(茶人)으로 인정받았다. 현대 차 문화의 산실이자 중흥지인 부산 지역은 여러 모로 오늘날 한국의 차문화사(茶文化史)에 큰 자리를 차지함은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유구한 역사와 그 정신을 이어오던 한국의 차 문화가 조선을 거치면서 임진왜란 등 우리 민족의 아픔과 함께 쇠퇴의 길을 걸었지만 다산(茶山), 초의(艸衣), 추사(秋史)등 옛 차인(茶人)들에 의해 그 정신과 다법(茶法)이 이어졌던 일은 우리의 은근하면서도 끈질긴 민족성과 함께한다. 그러다가 현대에 접어들면서 다시 한 번 차 문화의 불꽃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그 무렵 영호남을 중심으로 전통문화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근현대 차인들이 부산에 거주하며 차 생활 운동을 펼쳐나갔던 것이며, 그 운동에 앞장선 이가 금당이었다.

금당(錦堂)은 1978년에 󰡔금당다화(錦堂茶話)󰡕라는 책을 시작으로 송도의 ‘금당다우(錦堂茶禹)’에서 많은 제자를 기르고 오늘날 한중일 국제 차문화의 기틀을 세웠던 어른이다. 금당 최규용은 한평생 차를 즐기며 정행검덕(精行儉德)의 차정신(茶精神)으로 살다가 2002년 4월 5일 청명(淸明)날 부산 송도 바다가 보이는 금당다우에서 백세로 생을 마감했다. 장례는 부산차인연합회장(釜山茶人聯合會葬)으로 치러졌고 사리 36과를 수습했다. 유골은 유언대로 통영의 선산에 뿌려졌다.

 

금당의 ‘끽다래(喫茶來)’ 화두(話頭)

1988년 해인사에서 일타(日陀)스님, 석정(石鼎)스님과 함께 중국 당나라 조주선사(趙州禪師)의 화두(話頭) ‘끽다거(喫茶去)’와 대거되는 ‘끽다래(喫茶來)’란 신조어를 만들어 평생을 차(茶)마시기 운동의 지침으로 삼았다. 일타스님은 그가 팔만대장경 경판고 보수공사 때 퇴설당에서 참선하던 스님을 처음 만나 평생의 지기로 삼았다. 그리고 석정스님은 그가 해인사에서 참선 수도할 때 진주 의곡사(義谷寺)에서 해인사로 가끔 와서 달마도를 그리던 스님의 화필에 감탄하며 가깝게 지냈던 인연이었다.

2005년 가을에 중국 하북성(河北省) 백림선사(栢林禪寺)에서 열린 ‘세계선차문화교류대회(世界禪茶文化交流大會)’에서 <조주의 끽다거(喫茶去)와 금당의 낃다래)>라는 주제의 짧은 논문을 발표하여 여러 나라 차문화인들에게도 ‘끽다래’의 정신이 알려졌다. 오늘날 백림선사는 조주가 ‘끽다거’의 화두를 남겼던 그 유명한 관음원이다.

이 ‘끽다래’란 금당(錦堂) 최규용의 인사는 유명한 차 이야기가 되어 그 글귀가 새겨진 기념비가 1997년 부산 초읍의 삼광사(三光寺) 뜰에 세워졌고 1999년 합천 해인사 지족암에도 건립되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을 비롯한 국제 차 문화 교류의 다리를 놓은 업적으로 중국인들에 의해 차문화 교류 공덕비가 세워졌는데 1998년 10월 8일 중국 항주시 서호(西湖) 부근의 차인지가(茶人之家)에 건립되었고 또한 2000년에 호북성 호주시에도 ‘끽다래’비가 세워졌다. 그리고 한국의 제자들에 의해 2008년 부산시 구덕문화공원에 끽다래 기념비가 세워져 매년 추모 헌다례가 진행되고 있다.

현대 차문화의 꽃이 피기 시작한 80년대엔 전국의 차문화를 주도하는 곳이 영남과 호남이었다. 1988년에 ‘영호남차인들의 만남을 위한 모임 추진위원회’가 부산의 몇몇 뜻있는 차인들에 의해 기획되어 광주 ‘작설헌(雀舌軒)’에서 호남 지역의 대표 차인들을 만나 한국의 茶문화 진흥에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지금은 추억이 되었지만 행사장에 가기 전에 우리들이 기획한 중요한 일이 있었다. 그 당시 군사독재시절에 입에다 담는 것조차 꺼리던 광주 망월동 묘역에 누워있는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목숨 바친 넋들을 기리기 위해 먼저 차 한 잔 올리는 헌다식(獻茶式)을 하기로 했던 것이다. 부산을 비롯한 영남지역 차문화인들의 대표들과 대학차회 동아리 회장단과 그리고 한국차문화회와 여천차문화회회원들과 함께 부산역을 새벽에 출발했지만 망월동 참배에 대한 인식 부족과 비바람 치는 궂은 날씨에 행사 책임을 맡은 필자의 마음을 착잡하게 했을 때, 행사 고문을 맡아 기꺼이 참여하여 그곳 망원동에서 즉석 추모사를 통해 보여준 그 의연함에 참석한 모두들에게 큰 힘이 되어준 그 시절이 떠오른다. 그곳에 참여한 영남지역 차문화인들과 광주의 민주인사들과 차 문화를 사랑하는 호남지역 대학생들 모두 감동의 눈물을 흘렸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범국민적인 ‘정신대해원상생굿’ 행사를 부산 해운대 바닷가서 펼치려고 할 때 부산 문화계의 최고 어른인 요산(藥山) 선생과 함께 첫 번째 행사 공동 대회장으로 추대하기 위해 행사 관계자들과 함께 찾아갔을 때 행사 취지를 들은 그가 정중히 “나는 일제(日帝) 때 그들을 위해 일을 했던 사람이오. 그런 자리는 맡을 자격이 없소”라고 사양을 하며 차인의 양심(良心)을 보여주었던 어른이었다. 필자기 부탁한 일 중에 사양한 것은 그 일이 처음이었다.

최규용은 생전에 육우 [다경(茶經)]의 근본정신인 ‘정행검덕’의 사상을 바탕으로 차생활을 하였으며, 평소 차 마시는 이들에게 “천천히, 살그머니, 조용히, 환담하면서, 그 향기를 맡으며 한가한 경지에 자연히 이르게 된다.(󰡔금당다화󰡕)”고 말했었다.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으로 생활차 운동을 이끌며 또한 매화가 필 무렵이면 반드시 다우(茶友)들을 초청하여 풍류차(風流茶)를 즐겼던 차인으로 근현대 동양차문화의 기틀을 만들었다.

초의선사의 [동다송(東茶頌)], [다신전(茶神傳)] 등을 연구하면서도 차문화 시원 탐구는 마땅히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으로부터 비롯되어야하며, 이는 어느 학문이든 그 원류(源流)를 밝히지 않고서는 대중화가 불가능하듯이 차문화 연구 역시 [다경] 연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신념으로 다도문화를 주도했던 한국 근현대 시기의 저명한 차문화운동가였다. 금당다우(錦堂茶寓)를 찾아 공부하러 오는 이들에게 손수 찻물을 끓이며 차를 우려내면서 다례(茶禮)의 모습을 보여주며 평등과 검소함의 다도철학을 가르쳤다. 그리고 포은(圃隱) 정몽주의 다시(茶詩) “돌솥에 물이 끓고/ 풍로(風爐)에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구나./ 물과 불은 천지의 조화를 이루니/ 이 뜻이야말로 무궁하구나.(石鼎湯初沸 風爐火發紅 水火用天地 卽此意無窮)”를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78대(선불교 49조, 한국 선불교 22조)청봉 청운(淸峯淸韻) /

혜암현문의 제자, 향곡혜림(1912~1978) 운봉성수의 제자

 

청봉 청운(淸峯淸韻)

1937년 중국만주에서 출생, 해방 후 경북 안동에서 성장(청소년기), 동아병원 원장 및 동아의료재단 이사장 역임(서울 광진구 소재), 수덕사 초대방장 혜암 대선사로부터 전법인가(법호: 청봉), 1985년 출가해 무구스님을 계사로 석천스님으로부터 구족계 받음.

청봉 선사는 1980년 수덕사의 큰 스님이신 혜암 스님과 인연이 되어 그 문하로 들어가 참선정진을 하면서 공부에 큰 진전을 이루어 혜암 스님으로부터 전법 인가를 받았고, 홍법(弘法)하라는 부촉(咐囑)을 받아 1985년 출가했다. 출가 이후 전국을 떠돌며 수행정진을 했고, 어느 날 새벽 천하와 내가 둘이 아닌 경계를 홀연히 얻어 안심입명처를 득했다. 이후 보임과 전법으로 나머지 삶을 살았다.

청봉 선사는 특히 경기도 광주 불심정사에 주석하면서 정릉 삼보정사, 인천 원명정사, 마산 정법사 정기법회를 챙겼고, 4천 명의 회원을 둔 ‘다음카페 장군죽비’를 개설하여 인터넷을 통한 포교에 앞장섰다. 손수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면서 문답하시고, <금강경오가해>, <육조단경>, <반야심경> 해설서와 <짚신은 있는데 사람은 어디 갔나>, <문을 나서지 않아도 풀밭이니라> 등의 법어집을 저술했다.

78대 조사인 청봉스님은 출가하기 직전 서울 성동구 성수동 종합병원인 동아병원을 운영하며 부와 명예를 쌓았던 의사였다. 병원을 운영하면서도 평소 어려운 이웃을 그대로 지나치지 못했던 청봉스님은 재소자를 위한 강연회와 무의촌 진료 등 사회 봉사활동에 적극적으로 앞장서는가 하면 모 TV의 프로그램을 통해 생계가 어려운 환자의 병원비 수백만 원을 받지 않았던 일화가 알려져 화제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그의 인생은 국회의원에 출마했다 낙마한 뒤 새롭게 전환되었다.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며 인생의 덧없음을 느낀 그는 미련 없이 속세를 떠나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

 

향곡혜림(1912~1978)

법호는 향곡(香谷)이며, 법명은 혜림(蕙林)이다. 16세 때 둘째 형을 따라 양산 내원사에 입산해 18세 때 성월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후 1930년 부산 범어사에서 운봉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향곡스님은 조선시대 500년간 숭유억불정책(崇儒抑佛政策)으로 위축된 선(禪)불교 중흥의 기틀을 다진 경허스님의 법맥을 잇게 된다. 즉 경허 - 혜월 - 운봉으로 이어지는 법맥(法脈)을 이어 선풍(禪風)을 크게 진작시킨 선지식이다. 향곡스님의 법맥은 이후 법제자인 진제스님(현재 대구 동화사 조실)을 통해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향곡스님은 선암사, 불국사, 동화사, 선학원 등 여러 선방의 조실로서 20여년간 계시며 법의 깃을 높이 세우고 종풍을 드날렸다. 특히 스님은 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성철, 청담, 자운, 월산, 혜암, 법전스님 등과 함께 ‘봉암사 결사’를 하며 수행정진했다. 향곡스님은 봉암사 결사를 함께 한 성철스님과 세납이 같을 뿐만 아니라 평생을 함께 한 도반이었다. 성철스님은 1978년 향곡스님이 세수 67세, 법납 50세로 열반에 들자 ‘곡향곡형(哭香谷兄)’이란 글을 지을 만큼 막역한 사이였다

 

79대(선불교 50조, 한국 선불교 23조) 성철(1912~1993) / 진제법원(1934~ )

 

성철(1912~1993)

운봉화상을 계사(戒師)로 보살계·비구계를 받았다. 향곡스님과 도반이자 운봉의 같은 제자로 속명은 이영주이다. 현대 대한민국의 선불교 전통을 대표하는 수행승으로 경상남도 산청에서 출생했으며, 1993년 해인사(海印寺)에서 입적하였다.

1936년 해인사에서 동산(東山) 대종사에게 사미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 1938년 운봉화상을 계사(戒師)로 보살계·비구계를 받았고, 그 뒤 봉암사(鳳巖寺)에서 청담(靑潭) 등과 함께 수행하며 부처답게 살 것을 결사(結社)하는 등 새로운 선풍(禪風)을 고양시켰다. 1967년 해인총림(海印叢林) 초대 방장(方丈)이 되었고, 1981년 대한불교 조계종 제7대 종정(宗正)에 취임하였으나. 세속(世俗)에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교리에 대한 그의 입장은 저서인 <선문정로(1981)>에 잘 나타나 있다. 대한민국 선불교의 수행 전통으로 여겨온 지눌의 돈오점수(頓悟漸修)에 반대하여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창했다. 그 후 현재까지 대한민국 불교 철학계의 돈·점 논쟁은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다. 성철에 따르면 앎과 행동이 일치된 단계의 앎만이 진정한 앎이며, 지눌의 돈오점수는 이론적 앎일 뿐 참 앎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눌과 성철은 가르침의 대상이 달랐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따지기가 어렵다. 지눌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여 인생의 가르침을 폈으며, 성철은 수행승을 대상으로 했다.

[육조단경(六組檀經)], [전등록(傳燈錄)] 등 선문의 조사 어록을 중심으로 많은 법어를 이루었는데 관념의 도그마에 빠지지 말 것과 견성의 체험을 강조하였다. 저서로 <돈오입도요문강설(1986)> 등이 있다. 성철의 유명한 법어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수행하는 사람이 자그마한 깨달음을 얻었을 때에는 물이 산으로, 산은 물로 보이는 혼돈을 겪게 되지만 깨달음의 수준이 자라면서 물은 물, 산은 산으로 보게 된다는 즉, 만물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는 지혜(반야 · 보리)를 갖게 된다는 법어이다.

 

진제법원(1934~ )

현재 제 13대 조계종 대종사이다.

1934년 경남 남해 산동면에서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나 20세 되던 1954년 정월 해인사로 출가하여 석우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1957년 통도사에서 구족계를 수지한 뒤 본격적인 참선 수행길에 올랐다. 석우 선사로부터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 本來面目)’ 화두를 받고 감자로 끼니를 때우며 태백 각화사 동암, 선산 도리사 등의 선원에서 용맹정진(勇猛精進)하던 중 지견을 얻었다. 오대산 상원사에서 정진하던 중 참공부의 의미를 깨닫고 1959년 전법스승인 향곡(香谷) 선사 문하에 입실했다. 향곡 선사는 ‘향엄상수화(香嚴上樹話)’ 화두를 내렸다.

1967년 향곡 선사로부터 깨달음에 대한 인가(認可)를 받고, 태고 보우 선사로부터 경허 - 혜월 - 운봉 - 향곡 선사로 이어져온 임제정맥(臨濟正脈)의 법등(法燈)을 부촉(咐囑)했다. 향곡 선사는 스님에게 ‘진제(眞際)’라는 법호(法號)와 함께 ‘부진제법원장실(付眞際法遠丈室 : 진제 법원 장실에 부치노라)’라는 전법게(傳法偈)를 내렸다. 1998년과 2000년 백양사에서 열린 무차선대법회의 초청법주로 회상을 열어 보였고, 2002년에는 해운정사에서 국제무차선대법회를 열어 최상승 간화선의 선풍을 열어보였다. 2003년 간화선을 종지종풍으로 삼는 조계종의 원로의원에 올랐으며, 이듬해 종단의 최고법계인 대종사 법계를 품수했다.

 

조계종(曹溪宗)의 종정(宗正)

종정은 대한불교조계종의 종통(宗統)을 승계하는 최고의 권위와 지위를 가진 종단의 정신적 지도자이다. 이에 대한불교조계종의 모든 종도들은 종정께는 ‘스님’이라는 호칭 대신에 그 가르침에 따른다는 의미로 ‘예하(猊下)’라 칭하고 있다.

종정 예하의 자격은 승납 45년 이상, 세납 65세 이상의 대종사 법계를 받은 수행과 법력이 높은 비구스님으로 하고 있다. 종정 예하는 종단의 법을 상징하기 때문에 종단 행정에는 관여하지 않으나 종단의 주요 행사와 안거 등을 맞아 종도들에게 법어를 내리며, 종단의 모든 스님들에게 계를 전하는 전계대화상의 위촉권을 가진다. 또한 종헌 종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포상과 징계의 사면, 경감, 복권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

1,700여년 한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조계종은 현대에 들어 비로소 종단의 모습을 갖추게 되면서 종정을 모셔왔다. 대한불교조계종은 통합종단이 출범한 1962년 제1대 종정으로 효봉 대종사를 모셨다. 그후 청담 대종사(2대), 고암 대종사(3~4대), 서옹 대종사(5대), 성철 대종사(6~7대), 서암 대종사(8~9대), 월하 대종사(9대), 혜암 대종사(10대), 법전 대종사(11~12대)가 뒤를 이어 종단의 법을 상징하는 최고 어른으로 역할을 해 왔다.

현 종정(宗正)이신 도림 법전 대종사는 2002년 당시 종정이셨던 혜암 대종사의 입적으로 인한 유고(有故)에 따라 그해 3월 26일 추대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추대되었고, 2007년 재추대되어 연임하신 후 오는 2012년 3월 25일까지 그 본분을 다해 오고 계신다. 아울러 새롭게 추대되는 종정예하는 3월 26일 임기시작일 이후 종단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 후학들을 지도하게 된다.

 

<출처 : 다음카페 [차맛 어때]/아란도(옮긴이가 몇 자를 보충, 일부를 윤색함)>

 

 

 

 

 

 

 

 

선불교(禪佛敎) 법맥(法脈)으로 살펴보는 선차(禪茶) 계보(系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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