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공간

<만공(滿空, 1871~1946) 선사>

수선님 2023. 12. 3. 13:27

<만공(滿空, 1871~1946) 선사>

만공 선사

한말~일제강점기에 활약한 승려, 경허(鏡虛) 선사의 제자로서 경허 선사의 법을 이어, 일제의 불교정책에 정면으로 반대하며, 우리나라 선불교를 중흥에 기여했다.

전북 태인 출신으로 1883년 13세 되던 해 김제 금산사에서 불상을 처음보고 크게 감동한 것이 계기가 돼 공주 동학사로 출가한 후 경허 선사의 제자가 됐다. 법명은 월면(月面)이다.

만공이 23세 되던 해(1893) 우연히 서산 천장사(天藏寺)에서 하룻밤을 동숙하게 된 어떤 소년이 질문을 했다.

“모든 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라는 말이 있는데, 사람들이 이것만 알면 생사에 해탈하고 만사에 막히는 것이 없다 하는데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런 질문을 받고, 만공은 아무런 대답을 못했다.

이것을 계기로 깊이 발심해 이 화두를 들고 열심히 참구했다.

가끔씩 의심이 절로 일어나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정진하다가 자리를 옮겨 온양 봉곡사(鳳谷寺)로 가서 더욱 수행에 진력했다.

1895년 어느 날, 벽에 기대어 서쪽 벽을 바라보던 중 홀연히 벽이 없어지고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나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새벽녘에,

「약인욕요지 삼세일체불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 만일 사람이 삼세의 일체 부처님을 요달해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법계의 본성을 관해야 한다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드는 것이라네.」

<화엄경> 게송을 읊는데, 어둠을 가르며 새벽 종소리가 들려오자, 그 순간 문득 깨달음이 와서 일체의 의심덩어리가 무너지며, 미망(迷妄)의 경계가 벗어져나갔다.

새벽 종소리에 어두웠던 눈앞이 환히 열렸으니, 종소리가 혜안을 밝혀준 것이다.

그 뒤 공주 마곡사(麻谷寺) 토굴에서 보경(普鏡) 스님과 함께 계속 수도하다가, 그렇게 토굴에서 3년이 되던 해, 스님 나이 26살 때인 1897년 어느 날 경허 선사가 찾아와서 지금까지 공부해 온 것을 낱낱이 고백하니,

“화중생련(火中生蓮), 불 속에 연꽃이 피었구나”라고 하며 기뻐했다.

그리고 다시 경허 선사가 스님에게 묻기를,

“등(藤) 토시와 미선(美扇) 하나가 있는데 토시를 부채라고 해야 옳으냐, 부채를 토시라고 하는 것이 옳으냐?”

※등(藤) 토시---등(藤)나무의 줄기를 가늘게 쪼개어 엮어 만들어 여름에 땀이 옷에 배지 않게 하기 위하여 꼈던 토시.

※미선(美扇)---아름다운 부채.

만공이 답했다. "토시를 부채라고 해도 옳고 부채를 토시라고 해도 옳습니다.“

경허 : “네가 일찍 다비문(茶毘文)을 봤느냐?”

※다비문(茶毘文)---다비를 행하는 절차와 의례에 대한 것을 밝힌 책.

만공 : “봤습니다.”

경허 : “다비문에 유안석인제하루(有眼石人齊下淚) - 돌사람이 눈물 흘린다”라 하니 이 참 뜻이 무엇인고?

만공 : “모르겠습니다.”

경허 선사가 이르되, “돌사람이 눈물 흘린다”를 모르고 어찌 토시를 부채라 하고 부채를 토시라 하는 도리를 알겠느냐?“라고 했다.

경허 선사가 다시 이르되, “만법귀일 일귀하처” 화두는 더 이상 진보가 없으니 조주(趙州) 스님의 무자(無字) 화두를 다시 드는 것이 옳다 하고, 또 이르기를, “원돈문(圓頓門)을 짓지 말고 경절문(徑截門)을 지으라.” 하고 떠났다.

그 후 무자화두를 열심히 의심 정진하던 중 날이 갈수록 경허 선사를 경모하는 마음이 간절해 1898년 경허 선사가 계신 서산 도비산(島飛山) 부석사(浮石寺)로 가서 다시 경허 선사를 뵙고 날마다 법을 물어 현현(玄玄:현묘하고 심오함)한 묘리를 탁마(琢磨)했다.

1901년 경허 선사와 헤어져 양산 통도사의 백운암(白雲庵)에 들러 며칠 머무르는 동안 어느 날 새벽 범종 치는 소리를 들으며,

“원컨대 이 종소리가 법계에 두루 퍼져 철벽의 어둠이 모두 밝게 하소서(願此鐘聲遍法界 鐵圓幽音悉皆明)"라는 게송을 읊으며 크게 깨달았다.

그리하여 곧 천장사로 돌아와 법열을 즐기던 중, 1904년 함경북도 갑산으로 가던 길에 천장사에 들른 경허 선사로부터 전법게(傳法偈)를 받았다.

이후 만공은 한 해 동안 전국의 선방을 돌며 선지식을 만나 법문을 나누다가, 1905년 4월에 예산 덕숭산 수덕사 뒤편에 작은 초암을 짓고 금선대(金仙臺)라 이름 붙이고, 이곳에서 보임(保任) 공부를 했다.

이때 사방에서 모여 든 수행승들이 그에게 설법하기를 간청하자 여러 번 사양하다가 마침내 법좌에 올라 법을 설하고 참선을 하려는 수도승들을 지도했다.

1905년부터 1908년까지 3년 동안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에서의 선(禪) 지도와 수행에 정진했다.

1913년 7월에는 사형인 혜월(慧月)과 함께 함경도 갑산에 가서 스승 경허의 시신을 다비하고 유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1936년 12월에는 설산(雪山) 최광익(崔光益)에 의뢰해 스승 경허 선사의 초상을 그리게 하고 직접 영찬(影贊)을 써서 금선대 진영각에 모셨다. 이후에도 만공은 스승의 유고를 모아 편찬하는 일을 주도해 마침내 1942년 <경허집>이 발간돼 한국불교 전통의 계승과 선의 대중화를 진작하는데 기폭제 역할을 했다.다음은 만공 선사가 스승 경허 선사를 회상하며 읊은 시이다.​

善惡過虎佛(선악과호불) ― 사나울 때는 범과 같고 착할 때는 부처와 같은 분이

是鏡虛禪師(시경허선사) ― 바로 경허스님이 참모습이다.

向什魔處去(향습마처거) ― 지금은 어디에 계시는가.

醉臥花中睡(취와화중수) ― 취하여 꽃 속에 누워 지금도 잠을 자고 계신가.​

한편 1937년을 전후해 잠시 마곡사 주지를 맡았을 때 일이다. 당시의 조선총독 미나미(南次郞)가 주재한 13도 도지사가 동석한 31본사 주지회의가 열렸다. 거기서 미나미 총독이 말했다.

“이전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寺內正毅)가 사찰령을 제정하는 등 조선불교 진흥에 공이 크다”고 했다.

이에 만공이 단상에 나아가 항의하며, 한국불교를 일본 불교화 하려는 총독부의 종교정책방침에 정면으로 반대했다.

“데라우치는 조선 승려로 하여금 일본 승려를 본받아 대처, 식육, 음주 등 파계하도록 했으니 큰 죄인이다. 마땅히 무간지옥에 떨어져 큰 고통을 받고 있을 것이다.”라고 질책한 뒤, 종교가 정치로부터 분리돼야 한다는 점과 한국불교가 일본불교로 변질돼 계율이 문란해지고 한국불교의 전통과 종교적 순수성이 흔들리고 있다는 점을 강력히 주장한 것이다. 이는 당시 불교계에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사건이다.

이때를 제외한 대부분의 생애를 덕숭산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선을 지도하면서 선불교를 크게 중흥시켜 현대 한국불교계에 하나의 큰 법맥을 형성했다.

그러다가 해방 이듬해 1946년 어느 날 저녁 공양을 들은 후 만공은 거울 앞에 서서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말했다.

“이 사람 만공! 자네와 나는 70여년을 동고동락(同苦同樂)했지만 오늘이 마지막일세. 그 동안 수고했네.” 이 말을 남기고 껄껄 웃고 문득 입적했다.

세수 76세였으며 법랍은 62년이었다. 덕숭산에서 다비해 유골을 모신 부도인 만공탑을 금선대 근처에 세웠다. 법맥은 경허(75대) - 만공(76대) - 전강(77대)으로 이어졌다.

수덕사에서 만공 선사의 자취가 어려 있는 정혜사(定慧寺)까지는 모두 1,200계단으로 된 오름길이 있는데, 이곳에 만공 스님이 세웠다는 미륵상과 만공의 사리탑을 볼 수 가 있다.

이론과 사변을 배제하고 무심의 태도로 화두를 구하는 간화선(看話禪)을 강조했으며, 제자들에게 ‘무자(無字) 화두’에 전념할 것을 가르쳤다.

문하에 고봉(古峰), 서경(西耕), 혜암(惠庵), 전강(田岡), 금오(金烏), 춘성(春城), 벽초(碧超), 비구니 법희(法喜), 일엽(一葉) 등 걸출한 제자들을 배출했다. 아래는 만공 선사의 오도송이다.

공산이기고금외(空山理氣古今外)요 - 공산의 이기(理氣)는 고금 밖이요,

백운청풍자거래(白雲淸風自去來)라 - 백운과 청풍은 스스로 가고 오는구나.

하사달마월서천(何事達摩越西天)고 - 달마는 무슨 일로 서천을 건넜던고,

계명축시인일출(鷄鳴丑時寅日出)이라 - 축시에 닭이 울고 인시에 해가 뜨느니라.

----세계일화(世界一花)와 만공 선사----

‘세계일화(世界一花)’란 세계는 한 송이 꽃이란 뜻이다. 세계일화는 2600여 년 전 부처님께서 인도 영축산에서 연꽃 한 송이를 들어 보임으로써 우주의 실상을 설파한데서 유래한다.

그리고 ‘세계일화(世界一花)’라는 말은 당(唐)나라시대 시인 왕유(王維)가 쓴 <육조혜능선사비명(六祖慧能禪師碑銘)> 속에 나오는 ‘세계일화 조종육엽(世界一花 祖宗六葉)’이라는 구절에서 나왔다.

세계는 하나의 꽃이며 조사의 종풍은 여섯 잎이라는 의미로 초조 달마에서 육조 혜능까지 내려온 중국 선종(禪宗)의 전등(傳燈)을 절묘하게 표현한 말이다.

“세계는 한 송이 꽃이요, 조사(祖師) 여섯 분은 꽃잎으로 피어있다”는 말이다.

선불교의 시조는 초조 달마(達磨) 대사이다. 인도 태생인 달마 대사는 9년간의 면벽수행을 통해 선(禪) 수행과 돈오(頓悟)의 전통을 세웠다.

달마 대사의 제자인 2조 혜가(慧可) → 3조 승찬(僧璨) → 4조 도신(道信) → 5조 홍인(弘忍) → 6조 혜능(慧能)에 이르러 ‘선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여기서 말하는 세계는 불법의 세계를 말함이고,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선지식(조사) 여섯 사람이 꽃잎의 역할을 했다는 말이다.

천지가 모두 한 뿌리(萬有同根)이고, 이러한 생각이 바로 부처님 자비사상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니 꽃으로 피어나되, 좀스럽게 내 꽃 네 꽃 가리지 말고, 모두 하나가 되는 그런 큰 꽃 한 송이를 피워내라는 말이다.

세계가 서로 다투고 짓밟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하나로 어우러져 꽃처럼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이 "세계일화(世界一花)"를 의미한다.

우리나라 근세에 이 ‘세계일화’라는 말을 세상에 널리 알린 장본인이 바로 만공(滿空) 선사이다. 선사는 일제 강점기에 무학(無學) 대사가 달을 보고 견성한 서산 안면면 간월도에 간월암(看月庵)을 중창해 조국독립을 발원하며 천일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만공 선사가 천일기도를 회향한 지 사흘 만에 조국은 해방을 맞이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항복하고 조국이 해방됐다는 소식을 만공 선사는 다음날인 16일에야 들었다. 신자로부터 그 소식을 듣고 길가에 핀 무궁화 꽃잎을 따다가 거기에 먹을 갈아 그 꽃잎에 ‘세계일화(世界一花)’라는 네 글자를 쓰고 낙관(落款) 대신 근화필(槿花筆)이라고 썼다.

그리고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멋진 법문을 남겼다.

“세계는 한 송이 꽃.

너와 내가 둘이 아니요, 산천초목이 둘이 아니요.

이 나라 저 나라가 둘이 아니요,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

어리석은 자들은 온 세상이 한 송이 꽃인 줄 모르고 있어.

그래서 너와 나를 구분하고, 내 것과 네 것을 분별하고, 적과 동지를 구별해 다투고 빼앗고 죽이고 있다.

허나 지혜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라.

풀이 있어야 짐승이 있고, 네가 있어야 내가 있고, 내가 있어야 네가 있는 법, 남편이 있어야 아내가 있고, 아내가 있어야 남편이 있고,

부모가 있어야 자식이 있고, 자식이 있어야 부모가 있는 법.

남편과 아내도 한 송이 꽃이요, 부모와 자식도 한 송이 꽃.

이 세상 모든 것은 한 송이 꽃이라는 이 생각 한 가지를 바로 지니게 되면 세상은 편할 것이요, 세상은 한 송이 꽃이 아니라고 그릇되게 생각하면 세상은 늘 시비하고 다투고 피 흘리고 빼앗아 죽이는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그래서 세계일화(世界一花)의 참 뜻을 펴려면,

지렁이 한 마리도 부처로 보고, 참새 한 마리도 부처로 보고, 심지어 저 미웠던 원수들마저도 부처로 봐야 할 것이요.

다른 교를 믿는 사람들도 부처로 봐야 할 것이니, 그리하면 세상 모두가 편안할 것이니라.”라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엔 의미심장하게 “한국이 이제 독립했으니 세계의 중심에 서게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세계일화(世界一花)’ 편액이 수덕사 금당에도 걸려 있다.

지구촌에 수많은 꽃이 있지만 인류가 만들어 내는 꽃에 양극화와 온난화와 세계일화가 있다. 양극화는 극단적으로 치우친 갈등의 꽃이고, 온난화는 욕망으로 점철된 재앙의 꽃이고, 세계일화는 불심으로 빚어진 화합의 꽃이다. 불법(佛法)이 퍼진 사바세계는 한 송이 꽃인 것이다.

이 세계일화의 가르침은 만공 선사 다음 고봉(高峰, l890~1961) 선사를 거쳐 숭산(崇山行願, 1927~2004) 선사를 통해 크게 빛을 발했다.

숭산 스님은 전 세계 200여 국가에 한국선원을 설립했으며, 스님으로부터 한국 간화선을 지도받은 제자가 무려 5만여 명이 됐다고 한다. 한국불교 세계화의 신기원을 이룩했던 숭산 선사의 해외포교 대장정에는 만공 선사의 ‘세계일화’의 가르침이 오롯하게 각인돼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87년 한국에서 숭산 스님의 60회 생신을 기념하는 제자들의 정성과 결합해 제1회 세계일화대회가 열렸다. 그 후 3년마다 한 번씩 세계를 돌며 세계일화대회가 치러지고 있다.

그리고 2014년엔 충남 공주시 사곡면 한국문화연수원에서 개최된 세계일화대회는 숭산 스님 열반에 든 지 10년째 되는 해와 맞물려 두 행사가 연계돼 진행됐다.

그리고 드디어 2015년 ‘세계일화’ 정신은 한국불교의 범종교적 행사로 세계대회가 개최됐다.

지난 2015년 5월16일에 한국의 중심 광화문광장에서 ‘한반도 통일과 세계평화를 위한 기원대회 및 세계 간화선 무차대회’가 봉행됐다.

역사상 가장 거대한 법회로 기록된 이 무차선대회(無遮禪大會)는 참가인원 20만 명 이상이 운집한 미증유의 법석이었다. 특히 이번 행사는 현 조계종 종정이신 진제 대선사의 적극적인 제안과 지원에 힘입어 성사됐다.

진제(眞際, 1934~ ) 큰스님의 해외전법여정이 시작된 것은 2010년 세계적인 신학자인 뉴욕 유니언 신학교 폴 니터(Paul F. Knitter) 교수의 방한에서부터 비롯됐다.

‘부처님 없이 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었다.’는 파격적인 제목의 책을 출간해 미국 종교계에 커다란 화제를 일으켰던 폴 니터 교수가 종교 간의 대화와 소통을 위해 큰스님을 방문해 화두를 받아 참선을 시작한 것이 그 발단이 됐다.

그리하여 광화문 법석에는 한국이 세계일화의 중심이 돼 세계 19개국의 불교고승과 이웃 종교를 비롯한 종교지도자 300여 명을 초빙했다.

이제 ‘세계일화’는 선가(禪家)에서만 쓰는 문구에 끝나지 않고, 우리네 일상생활에서도 얼마든지 체험하고 느낄 수 있는 명구가 됐다.

요즘처럼 부쩍 가까워진 지구촌의 이웃들, 그들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한가. 바로 세계일화의 가르침일 것이다. 그래야 모두가 복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구는 한 송이 꽃’이다. 그리하여 민공 스님의 예언대로 ‘세계일화’. 대한민국이 세계의 중심이 되는 그날을 기대하며 수행정진 해야 하겠다.

<만공 선사가 남긴 법어>

어느 날 어떤 학인이 만공(滿空) 선사에게 물었다.

“불법(佛法)은 어디에 있습니까?”

“네 눈앞에 있느니라.”

“눈앞에 있다면 왜 저는 보지 못합니까?”

“너에게는 ‘나’라는 상(相)이 있기 때문이다.”

“스님께서는 보셨습니까?”

“너만 있어도 안 보이는데 나까지 있다면 더욱 보지 못한다.”

“나도 없고 스님도 없으면 볼 수 있겠습니까?”

“나도 없고 너도 없는데 보려고 하는 자 누구냐?”

만공 선사의 유명한 일화이다. 학인이 스님께서는 보셨느냐고 따져 묻자 만공스님께서는 ‘너만 있어도 안 보이는데 나까지 있다면 더욱 보지 못한다,’고 하셨다.

아상(我相)만 있어도 못 보는데, 인상(人相)마저 있다면 더욱 볼 수 없다는 말이다. 나다 너다 하고 구분 짓는 마음이 바로 분별심이다. 나와 너를 나누고, 중생과 부처를 나누어 놓고, 어리석은 내가 열심히 수행해 깨달은 부처가 되겠다는 마음이 바로 어리석은 분별심이고, 바로 이 시비 분별하는 마음 때문에 목전에 펼쳐져 있는 도, 불법, 진리, 본성, 본래의 나, 근원의 나, 진짜 나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은 만공 선사가 남긴 법어 단편들이다.

*참선은 절대로 혼자는 하지 못하는 것이다. 반드시 선지식을 여의지 말아야 하나니, 선지식은 인생문제를 비롯해 일체의 문제에 걸림이 없이 바르게 가르쳐 주느니라.

*명안종사(明眼宗師)의 인가도 없이 자칭 선지식이라 하며 남을 가르치는 죄가 가장 크다.

*수도 중에는 사람 노릇할 것은 아주 단념해 버리고 귀먹고 눈먼 병신이 되어 일체 다른 일에 간섭이 없게 되면 대아는 저절로 이루어 지니라.

*공부가 완성되기 전에 미리 안다는 생각으로 정진을 게을리 하다가 불법인연까지 떨어지기 쉬우니라.

*아무리 문명이 발달한 나라라 하더라도 도인이 없으면 빈 나라요, 아무리 빈약한 나라라 하더라도 도인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그 나라는 비지 않은 나라이니라.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들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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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공(滿空, 1871~1946) 선사>

<만공(滿空, 1871~1946) 선사> 한말~일제강점기에 활약한 승려, 경허(鏡虛) 선사의 제자로서 경허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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