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구경 : 진리의 말씀
종교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할 때가 있었다. 위정자들이 종교를 정치의 방편으로 선택했던 역사가 많았기에 종교의 효용성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도 했다. 물론 지금도 종교에 대해 완전히 그 사상을 수용하거나 사후세계를 인정하지는 않는다. 편안하고 안락한 삶이 사후에 있다면 그것은 지루함과 고통이 가득한 삶과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힘듦과 괴로움이 있지만 순간순간 느끼는 기쁨과 행복감에 이곳이 천국이나 극락과 같다고 생각하며 산다. 忙中閑(망중한)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다.
법구경은 ‘진리의 말씀’이라는 ‘담마파다’를 한자로 번역해 놓은 것을 말하며, 많은 나라에서 반드시 읽어야할 교양서적으로 꼽힌다. 나 또한 대학 때부터 읽기 시작하여 몇 번을 상황 변화에 따라 달리 읽어 왔는지 모른다. 이제 또 다른 생각을 하면서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중에 이 책을 들었다. 한때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고, 남으로부터 피해를 입지도 말 것이며, 항상 진실한 생각으로 행하겠다.’라는 생각에 꽂혀 한참을 스스로 힘들게 했었다. 그리고 우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된 ‘가는 사람 잡지 말고, 오는 사람 막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도 만들지 말고 미워하는 사람도 만들지 말라’는 말을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 내용의 글들이 이 책에 포함되어 있어 읽어보기를 권한다.
우리는 사랑하기를 원하며 더 사랑받고자 몸부림치기도 한다. 중심은 아닐지라도 아웃사이더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사람은 바람이 많아지면서 다툼이 생기며,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게 된다. ‘이 세상에 원한은 원한에 의해서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원한을 버릴 때에만 사라지나니 이것은 변치 않을 영원한 진리다.’ 미움은 미움으로 해결할 수 없다. 예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생각과 일맥상통한다. 사사건건 미움의 대상이나 미움의 일을 맞닥뜨리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이것은 우리가 영원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고, 밤하늘의 별을 바라볼 때는 무한함에 경외하고, 유한한 스스로를 반성하게 된다. 그런데 시선을 아래로 내릴 때면 변함없이 시시비비를 가리고, 分別智(분별지)를 키운다.
「명심보감」에 ‘一日不念善이면 諸惡이 皆自起니라’고 했다. 우리의 마음은 그렇게 허술하여 빈틈이 많은 것이다. 법구경에 ‘허술하게 덮은 지붕에 비가 새듯이 수행이 덜된 마음에는 욕망의 손길이 뻗치기 쉽다.’고 노래하고 있다. 「대학」에 나온 愼獨(신독_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긋난 생각이나 일을 하지 않음)을 실천하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이런 수행은 정말 어렵다. 불가에서 하루 한 번만 나무관세음을 외쳐도 극락에 갈 수 있다고 했지만 그것이 어렵다. 하루 한 번 하늘 바라보기도 어렵지 않는가? 고개 숙여 일하다가 퇴근길에 밤하늘조차 보지 못하고 걸음을 재촉하는 것이 현대인의 삶이기에 쉽지 않다.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중심을 잡고 스스로를 올곧게 만드는 일이다. 그렇지만 대부분 우리는 매사에 흔들린다. 젊어서는 삶의 틀을 만들기 위해 흔들리며 아파했지만 나이 들어 흔들리는 것은 왜일까? 삶의 흔적과는 상관없이 돌만 던지면 물이 이는 수면처럼 흔들리는 의식을 바로하지 못하면 번뇌의 숲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물에서 잡혀 나와 땅바닥에 던져진 물고기처럼 이 마음은 파닥거린다.’ 파닥거리는 마음을 동아줄로 단단히 묶지는 못할지라도 달래어 가만히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삶의 지혜를 얻으며, 두려움의 번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꽃을 꺾는 일에만 팔려 마음에 끈질긴 집착을 가지고 욕망에 빠져 허덕이는 사람’은 우리네의 보편적인 모습이다. 꽃을 꺾지 않고 꽃에서 꿀만을 채취한다면 우리의 삶은 달라질지도 모른다. ‘남의 허물을 보지 말라. 남이 했건 말았건 상관하지 말라. 다만 내 자신이 저지른 허물과 게으름만을 보라’고 했다. 남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만남이 길어질수록 피곤하게 여겨진다. 스스로를 돌아보며 반성하고, 내일의 성숙해질 자신을 가꾸어나가야 한다. ‘꽃향기는 바람을 거스르지 못한다. 그러나 덕이 있는 사람의 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사방에 풍긴다.’ 이런 경지까지는 너무 멀지만 그래도 그 끄트머리라도 잡고 부족한 스스로를 안쓰러워하면 좋겠다.
‘잠 못 이루는 사람에게 밤은 길고, 지쳐있는 나그네에게 지척도 천리’일 것이다. 제 몸도 온전히 제 것이 아닐진대 스스로 어리석은 굴레를 씌운다면 언제 홀로 설 수 있을까? 스스로 부족함을 알면 그것보다 더 현명한 것이 없다. 그럼에도 혼자 잘나서 스스로를 위태롭게 하는 내 자신을 보면서 부족함을 탓할 때가 많다. 좋은 글을 읽는 것은 부족한 스스로를 더 경계하고, 전전반측하는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함일 것이다.
모든 부모가 좋은 사람과 사귀라고 한다. ‘나쁜 벗과 사귀지 말라. 저속한 무리들과도 어울리지 말라. 착한 벗과 기꺼이 사귀고, 지혜로운 이를 가까이 섬기라’고 한다. 좋은 사람에 대한 정의는 비슷하게 내릴 수 있겠다. 그렇지만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닐 때 내 주변에 어찌 좋은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이 말은 다음과 같이 바꾸어야 할 것이다.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라. 주변에 더 좋은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찾아 사귀고, 좋은 것을 서로 권하는 사이가 되어라’고 바꾸면 더 좋겠다. 말은 쉽다. 이렇게 말하는 내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즐거움을 만나거나 괴로움을 만나거나 지혜로운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다.’ 이 때 지혜로운 사람은 ‘어둠을 등지고 밝음을 찾아 나선다. 욕망을 버리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마음의 때를 씻어 자신을 맑힌다.’ 집착을 끊고 소유욕을 버리면 깨달음을 향한 첫걸음을 뗐다고 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지혜가 늘어가는 것이 아니라 나이 들수록 아집과 집착, 소유욕, 강한 지배욕 등에 시달린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더 지혜로워진 척, 더 너그러워진 척 애쓰게 된다.
친구 중에 목사님이 한 분 계신다. 그 분은 항상 세속의 집착에서 벗어나 다른 곳의 삶을 생각하고 산다. 부귀와 명예에 집착하는 나로서는 그런 목사님의 모습에 공감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먹고 입음에 구애받지 않는 그런 사람의 깨달음의 경지는 텅 비어 아무 흔적도 없기 때문에 허공을 나는 새의 자취처럼 알아보기 어렵다.’ 그런 경지에 이르렀기에 속인이 바라보는 친구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리라. 내 친구 목사님의 ‘바른 지혜로 깨달음을 얻어 절대 평화에 이른 사람은 마음이 잔잔하게 가라앉고 말과 행동도 고요한’ 모습에 항상 배움을 얻는다.
조선 후기 문신 윤기는 ‘三緘銘(삼함명)’을 지었다. 평생 동안 말을 하고 싶을 때 입을 봉하고, 또 봉하고, 또 봉해야 한다는 것으로 말함을 경계했다. 김천택의 「청구영언」에 실린 작자미상의 시조 ‘말하기 좋다하고 남의 말을 말을 것이 / 남의 말 내 하면 남도 내말 하는 것이 / 말로써 말 많으니 말말까 하노라’고 했다. 시대가 거칠어져서 인지 남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휘젓는 모습들을 많이 본다. ‘거친 말을 하지 말라.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분노의 말은 고통이 된다. 그 보복이 네 몸에 돌아온다. 그대가 파손된 종처럼 묵묵해서 말이 없다면 그대는 이미 절대 평화에 도달한 것 성내거나 꾸짖을 일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런 경지는 말을 하지 않음이 아닌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지 않았기에 얻을 수 있는 경지이다.
살면서 내 것이 아닌 것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다.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에 배 아파하고,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을 탐하다 패가망신한다. 權不十年 花無十日紅이라고 했다. ‘헛된 집착에서 근심이 생기고, 헛된 집착에서 두려움이 생긴다.’고 노래한다. 집착과 삶에 대한 적극적 욕망을 동일시하지 않는다. 자신의 역량을 몰라 과욕을 부리거나 자신의 꿈을 몰라 헛손질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른 사람에게 좋은 소리 듣기 힘들다. ‘기생도 모두에게 좋은 소리 못 듣는다.’는 말이 있다. 시대가 달라져도 인심은 크게 변하지 않는 것 같다. ‘예전부터 말해온 것이고, 지금 새삼스럽게 시작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침묵을 지켜도 비난을 하고, 말을 많이 해도 비난을 하며, 조금만 말해도 비난을 한다. 이 세상에서 비난받지 않을 사람은 없다.’ 이 글에서 예전은 언제이고, 지금은 또 언제인가? 시간은 흘러 많은 경험들이 쌓였지만 의식의 변화는 크지 않은 것 같다. 비난을 무서워서 자신의 해야 할 일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닌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흔히 철없어 보이는 행동을 하면 “나잇값을 해라”로 말한다. 그 나잇값이 무엇일까? 진시황이 전국을 통일하고 각 지방의 작은 마을까지 통치하기 위해 헛작위인 ‘齒爵(치작)’을 주었다. 나이가 많으면 관원이 없는 곳에서 관원 대신에 다스릴 수 있는 명분을 준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나이’가 우선이다. 그 사람의 인품이나 능력, 직위보다도 나이를 먼저 생각한다. 그러나 ‘머리카락이 희다고 해서 큰 스승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나이만을 먹었다면 그는 부질없이 늙어버린 속 빈 늙은이’일 뿐이다. 정말 나잇값을 하면서 살고 싶다. 작은 손익에 一喜一悲하지 않는 해야 할 일을 하고, 해서는 안될 일을 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중용의 愼獨(신독)을 다시 연상케 하는 구절이 있다. ‘홀로 앉고 홀로 눕고 홀로 다녀도 지치지 않고, 자신을 억제하며 숲 속에서 홀로 즐기라’고 한다. 명심보감의 ‘口舌者 禍患之門 滅身之斧也(구설자 화환지문 멸신지부야)’라는 말을 연상하는 구절도 있다. ‘혀를 조심하고 생각을 깊이 해 말하고, 잘난 체 하지 않고 인생의 목적과 진리를 밝히는’ 그런 말만 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앞에서도 나잇값을 얘기했지만 나잇값을 못하고 더 작은 일에 감정을 토로한다. 남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만을 고집하는 완고한 늙은이가 되어가고 있다. 마치 내 삶의 경험이 최고인 것처럼 우매한 늙은이가 되어간다. 지금도 작은 소망은 ‘행동이 진지하고 말씨가 조용하며 마음이 안정된’ 그래서 갈등 없이 편히 살기를 바란다. ‘거칠거나 속되지 않고, 분명하게 진실을 말하고, 말로써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는 사람’이 되면 싶다. 욕심, 성냄, 어리석음, 교만, 고정관념의 다섯 가지 집착에서 조금이라고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 법정스님 옮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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