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나를 찾아라 – 법정
이 책은 법정 스님의 말씀을 모은 책이다. 그는 2010년 입적하셨지만, 저술과 말씀들이 아직도 우리에게 읽히고 회자 되고 있다는 것은 아마도 그럴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1994년 ‘마음을, 세상을, 자연을 맑고 향기롭게’라는 실천 덕목으로 만들었던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가 올해 30주년이 되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7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부산, 춘천, 대구, 창원, 광주 등에서 스님이 행한 강연 내용을 풀어 쓴 것이 이 책이다. 모든 강연 내용이 그동안 책으로 출간되지 않고 미공개된 것이어서 더욱 의미를 지닌다고 이 책을 출판한 「샘터사」는 말한다.
법정 스님의 ‘글맛’은 익히 잘 알려져 있지만, ‘말맛’은 제대로 평가되지 않은 측면이 있다고 하는데 스님의 강연을 녹음해서 풀어 놓으면 훌륭한 한 편의 글이 된다고 한다. 교훈과 유머, 위로와 격려까지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고 책을 읽다 보면 나지막이 때로는 격하게 말씀하시는 스님의 생생한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고 한다. 강연 내용이 20~30년 전의 말씀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크나큰 가르침과 위안을 준다. 어쩌면 점점 진짜 나의 모습을 잃어가고 획일화되어 가고 있는 요즘 세대에게, 우리에게 큰 울림이 아닐 수 없다.
중국 북송 때의 선승 원오극근은 “살 때는 삶에 철저하여 그 전부를 살아야 하고 죽을 때는 죽음에 철저하여 그 전부를 죽여야 한다.”라고 말했다(生也全機現 死也全機現). 살면서는 죽음 같은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고 또 죽음에 이르러서는 생에 대한 미련을 두어서도 안 된다는 뜻인데 이것이 불교의 생사관이다. ‘생에 처해 있으면서 살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러서도 죽지 못하는 것은 범부의 삶’이라는 것이다. 사는 것도 나 자신의 일이고, 죽는 것도 나 자신의 일이므로 살 때는 삶에 철저해야 하고 죽을 때는 철저하게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에 전력을 기울여 살고 죽을 때는 미련 없이 물러나야 한다는 말 같다.
사람의 얼굴은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즐겁고 기쁠 때는 표정이 밝고 환하지만 슬프고 괴로울 때는 어둡고, 자신도 모르게 찡그리기 마련이다. 웃음과 눈물의 차이만큼 극명하게 나타나는 것이 사람의 얼굴이다. 웃음만 나오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람 사는 일이 그렇지만은 않다. 눈물이 난다는 것은 구원이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웃음도 눈물도 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웃음으로 슬픔을 견디게 하고 눈물로써 괴로움을 이겨 내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환기가 필요하다. 환기(喚起)란 얼굴의 상相을 바꾸는 것이다. 늘 찌푸린 우거지상을 하고 있으면 마음이 더 무거워지고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온화하고 잔잔한 미소 띤 얼굴 모습은 신선하다. 선한 얼굴은 자신은 물론 이웃에게도 복된 기운을 준다.
“사람이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스님이 묻고 이렇게 답했다. “순간순간 새롭게 피어나는 것입니다. 꽃처럼 그렇게 할 수 있어야 사람입니다. 그래야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맨날 똑같은 거 되풀이하는 사람, 어떤 틀에 박혀서 벗어날 줄 모르는 사람, 그건 죽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낡은 것으로부터 묵은 것으로부터, 비본질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거듭거듭 털고 일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가 지니고 있는 가능성을 새롭게 개발할 수 있는 거예요.”
스스로 굴레를 벗어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늙음과 질병과 죽음이 찾아 온다고도 한다. 그리고 그런 사례로 아등바등 또순이처럼 살 때는 아픈 줄도 모르고 살다가 이제 살만해지면, 몸이 좀 편안해지면 그때부터 아프기 시작한다. 사람은 꽃처럼 날마다 새롭게 피어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은 절대 제자리 걸음만해서는 안 된다. 창조적인 삶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스님의 당부다. 그런 사례로 에이브라함 링컨 미국 대통령 일화를 소개했는데 그것은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친한 친구가 자신의 지인을 추천해 한 자리를 부탁했다고 한다. 링컨이 그 사람을 만나본 뒤, 한마디로 거절했다. 친구는 섭섭했지만 어쩔 수 없었고, 링컨이 거절한 말은 “그 사람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네.”였다고 한다. 사람의 얼굴에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내가 빛을 지니고 있어야 이웃에 비출 수 있고 세상을 밝힐 수 있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자신이 어두우면 아무리 밝은 세상도 암흑이나 다름 없다. 『화엄경』「입법계품」에서는 보현보살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살은 스스로 이와 같이 생각하고 다짐한다. 내가 지금까지 오랜 세월을 두고 살아오면서 탐내고 성내고 미워하고 어리석은 탓에 몸과 말과 뜻으로 지은 악업이 한량없을 것이다. 만약 그 악업에 어떤 형태가 있다면 끝없는 허공으로도 그것을 다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몸과 말과 뜻의 청정한 업으로 법계에 두루 계시는 부처님과 보살 앞에 지성으로 참회하고 다시는 악업을 짓지 않으며 항상 청정한 계율의 모든 공덕에 머물겠다.”이렇게 참회의 말을 했다.
참(懺)은 지나간 허물을 뉘우치는 것이고, 회(悔)는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거듭 태어나겠다는 몸부림이다. 진정한 참회는 변화하는 삶을 뜻한다. 참회를 거치지 않은 발원은 메아리 없는 헛된 소망에 불과하다. 참회로써 짐을 벗어 버릴 때 비로소 발원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내 상식대로 풀이해 보면 ‘잘 못한 것을 뉘우치지도 않고, 소원을 말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 말 같다.
1986년 어느 때 스님께서 동덕여대에서 연 3일간 화엄경을 논설한 적이 있는데, 그것이 앞에서 본 『화엄경』「입법계품」이다. ‘부처님과 같은 공덕을 이루려면’이라는 제목이었는데 여기 강의에서 보현보살이 말한 10가지 행원을 설명하였다. 앞서 본 참회는 네 번째 행원이고 나머지의 제목은 이렇다.
첫째, 모든 이웃에게 예배하고 또 그들을 공경하십시오.
둘째, 이웃의 덕행을 찬탄하십시오.
셋째, 여러 가지로 공양하십시오.
넷째, 지은 허물을 참회하십시오.√
다섯째, 남이 지은 공덕을 함께 기뻐하십시오.
여섯째, 설법을 청하여 들으십시오.
일곱째, 부모와 형제가 오래 살아 계시기를 바라십시오.
여덟째, 부처님을 본받아 배우십시오.
아홉째, 이웃의 뜻에 따르십시오.
열째, 내가 지은 공덕을 모두 이웃에게 돌려보내십시오.
불교를 승인하고 나름대로 불사도 많이 했던 양나라 무제의 이야기는 여러군데서 전한다. 그가 산에 웅거하고 있던 도홍경이란 학자를 불렀다. 허나 도홍경은 이를 거절했다. 이에 무제가 신하를 시켜 “산중에 무엇이 있기에 오지 않는가?”하고 질책했다. 이에 도홍경은 짧은 시 하나를 써 보냈다.
산중하소유(山中何所有)
영상다백운(嶺上多白雲)
지가자이열(只可自怡悅)
불감지증군(不堪持贈君)
산중에 무엇이 있는가?
산마루에 떠도는 구름 무더기
다만 홀로 즐거워할 뿐
그대(무제)에게 보내 줄 수가 없네
도홍경의 담담하고 소탈한 삶이 무심의 경지가 이런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이 선의 세계가 아닐까? 선은 좌선을 근본으로 삼지만 좌선뿐 아니라 일상의 동작마다 삼매의 정신으로 순화하고 통일해야 한다. 도홍경에게서 선禪의 경지를 보는 것 같다. 임제(林悌)선사도 말했다.
“그대들은 입버릇처럼 도를 닦아 진리를 깨닫는다고 말한다. 도대체 어떤 진리를 깨닫고 어떤 도를 닦는다고 하는가? 그대들의 지금 행동에 무엇이 모자라 또다시 깁고 보태겠다는 것인가?”
임제 선사는 인간은 본래청정(本來淸靜), 즉 사람은 지금 저마다 자기 특성을 지닌 온전한 존재라는 것이다. 임제 선사는 ‘걸림 없는 청정한 지혜를 얻고 싶거든 타인으로부터 미혹을 입지 말라. 안으로나 밖으로나 만나는 것은 바로 죽여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아라한을 만나면 아라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 권속을 만나면 친척 권속을 죽여라. 그래야만 그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자재하리라.’고 했다. 이런 말은 아직도 이해가 잘되지 않지만, 선의 세계에서는 평상심을 귀하게 여긴다. 평상심이 바로 도道라는 것이고 그만큼 한가한 사람이 귀하다는 것이다.
한 학승이 스승에게 물었다.
“무엇이 해탈, 곧 자유입니까?”
“누가 너를 묶어 놓았느냐?”
“어떤 곳이 정토, 곧 청정한 세계입니까?”
“누가 너를 더럽혔느냐?”
선은 설명하거나 해석하지 않는다. 논리 전개를 거부한다. 자기에게서 나온 의문은 자기 자신 안에서 찾으라고 한다. 답은 이미 질문 속에 있다는 것이다. 자기를 잃어버릴 때 모든 것은 비로소 진정한 자기가 된다. 모름지기 사람은 언제 어디서건 부분인 자기가 아니라 전체인 자기 안에 살 수 있어야 한다. 묵묵히 꽃을 피우고는 다시 꽃송이로 돌아가지 않는 꽃처럼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현재를 산다. 과거나 미래에 살지 못한다. 지금 이 시간, 이 자리에서 산다. 벤치에 앉아 과거를 반추할 필요도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탑을 쌓을 필요가 없다. 시간은 관념적 개념이다. 그 시간이란 것은 흐르고 변하는 것이 아니다. 흐르고 변하는 것은 사물이고 사람의 마음이다. 시간 자체는 늘 그대로 있다. 사람이 만든 시계는 시간 흐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은 단지 인간이 만든 약속일 뿐이다. 지나가 버린 과거도 오지 않은 미래도 우리 것이 아니다. 굳이 그것을 반추해볼 필요도 걱정할 필요도 없다. 추상적인 공간과 붙잡히지 않는 개념에 휘둘릴 이유도 없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 변하기 위해서는 바로 지금, 그리고 지금 이 자리다. - 149쪽
서산대사가 지은 「선가귀감(禪家龜鑑)」에 이런 구절이 있다고 한다.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인가. 편하고 한가함은 구해서가 아니며,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으려고 한 것도 아니며, 명예와 돈을 구하고자 함도 아니다. 오로지 생사의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해서이며, 번뇌의 속박을 끊기 위해서이고 부처님의 지혜를 이어받아 끝없는 중생을 건지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출가 수행자의 자세이고 각오여야 한다고 법정스님은 말한다. 그런데 오히려 편안함을 구하고자 하고 배불리 먹고자 하고 명예와 돈을 얻고자 하니 번뇌의 속박을 끊기는 커녕 그 자체가 하나의 번뇌 덩어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어찌 부처님의 지혜를 잇고자 하는 사람들이 할 형태란 말인가! “지혜는 누구한테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은 남에게 받을 수 있지만 지혜는 받을 수 없어요. 지식은 머리에서 자라나는 것이지만 지혜는 마음에서 움트는 겁니다. 지혜는 마음에서 꽃으로 피어나는 것입니다. 마음 밖에서 주워 모은 것으로는 지혜의 탑을 쌓을 수 없습니다. 출가라는 건 무엇입니까? 단지 살던 집에서 나온다고 해서 출가인 것은 아닙니다. 낡은 집으로부터 어떤 관념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입니다.”라고.
현대인의 불행은 옛날과 달라서 궁핍이 아니라 과잉에서 온다. 무엇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고 넘쳐서 그걸 감당하지 못해 생기는 것이다. 우리는 내면에서부터 맑은 가난을 실천해야 한다. 그래야 헛된 욕구도, 욕망도 일어나지 않는다. 내면에 있는 맑은 가난을 통해서만 삶의 진실을 볼 수 있다. 아무 갈등도 없고 어떠한 분란도 없는 그런 내면이 없으면 안으로 찬 것이 없기 때문에 흔들리고 만다. 마음의 중심이 잡혀 있지 않으면 과시하고 허세를 떨고 권력에 편승하여 소유에 빠져든다. 사람들은 마음이 공허할 때 물건을 사고 허세를 부린다. 그런다고 그 공허가 해소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집착만 생긴다. 집착은 쓰레기를 낳고 삶의 짐이 무거워진다. - 187쪽
호젓한 산길을 차 타고 쌩쌩 지나가면 흙먼지만 일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고무신 신고 나긋나긋 걸으며 하늘을 보아야 거기에 구름이 연꽃으로 피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음의 연꽃은 결코 속도에 따라 피지 않는다. 시도 그렇다. 느리게 읽어야 속도에 지친 몸에 생기가 돈다. 컴퓨터 상자 안에는 인간의 마음이 없다. 편리함은 있어도 인간의 향기가 없다. 산으로 들로 구체적인 접촉을 통해서만 그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인간이 성숙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씨앗이 움트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까지는 계절이 바뀌어야 한다. 오늘 씨뿌리고 내일 꽃 피기를 바라는 것은 꽃이 피었다고 바로 열매 맺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던 것’이 아니던가.
주옥같아 가슴에 담고 싶은 말씀들이 많지만 다 옮기지 못했다. 끝으로 고려시대 이규보(1169∼1241)의 시 하나를 옮기면서 줄인다.
산승탐월색(山僧貪月色) 산승이 달빛이 탐이 나서
병급일병중(竝汲一甁中) 물병 속에 함께 길어 담았네
도사방응각(到寺方應覺) 절에 이르면 깨닫게 되겠지
병경월역공(甁傾月亦空) 병을 기울이면 달도 사라진다는 것을
비록 달빛이 아무리 탐나더라도 끝내 그 달빛은 가질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래서 그저 눈으로 보기만 하라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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