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조대사의 조론(肇論) -감산덕청 주해 略-
1. 宗本義
本無, 實相, 法性, 性空, 緣會. 一義耳.
본무와 실상과 법성, 성공과 연회는 하나의 뜻이다.
何則. 一切諸法. 緣會而生.
무엇 때문인가. 일체제법이 인연으로 회합한 연회로써 발생하기 때문이다.
緣會而生. 則未生無有. 緣離則滅.
인연으로 회합하여 발생하였다면 모든 법이 인연으로 회합해서 발생하기 이전에는 없었으리니, 인연으로 회합한 것은 인연을 여읜 즉 멸한다.
如其眞有. 有則無滅.
만약 만법이 진실로 실제해 있다면, 있은 즉 인연의 분리를 따라서 멸할 수 없다.
以此而推. 故知雖今現有. 有而性常自空. 性常自空. 故謂之性空.
이로써 유추하건대, 연생의 모든 법은 지금 현재 존재해 있기는 하나, 존재해 있어도 성품은 항상 스스로 공하고, 성품이 항상 스스로 공하기 때문에 이를 性空이라 이름이라.
性空故. 故曰法性. 法性如是. 故曰實相.
性空인 고로 眞如性空이 법성이라고 말한다. 법성이 이와 같다. 고로 실상이라고 말한다.
實相自無. 非推之使無. 故名本無.
제법자성인 진여성공의 실상은 원래 없는 본무이지, 인식으로 추리를 하여 없게 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를 본무라고 부른다.
言不有不無者. 不如有見常見之有. 邪見斷見之無耳.
모든 법이 존재해 있지도 않고, 단멸로서 없지도 않다라고 말하는 것은 범부와 외도들이 제법은 진실하게 존재해 있다고 집착하는 견해(有見)인 常見의 有와, 邪見인 제법은 단멸하여 없다는 斷見의 無와는 같지 않다.
若以有爲有. 則以無爲無.
모든 법이 존재해 있다하여 이를 진실하게 존재해 있다라고 한다면, 상대적으로 모든 법의 인연이 분리하여 없는 것은 확실히 없다 하리라.
夫不存無以觀法者. 可謂識法實相矣.
대저 마음에 有無를 두지 않고 제법을 관하는 자라면 제법의 실제 모습인 실상을 안다고 말할 만하리라.
雖觀有而無所取相. 然則法相爲無相之相. 聖人之心. 爲住無所住矣.
(실무, 실유의 전도된 견해를 간직하지 않고 제법을 관찰한다면) 제법의 有를 관한다 해도 취할 바의 상은 없다. 그러한즉 제법의 차별적인 모습은 無相의 性空에서 나타난 모습이며, 성인의 마음은 주할 바 없음에 주하게 되는 것이다.
三乘等觀性空而得道也. 性空者. 謂諸法實相也. 見法實相. 故云正觀. 若其異者. 便爲邪觀. 設二乘不見此理. 則顚倒也.
삼승을 제법이 性空임을 평등하게 관하여 도를 체득한다. 성공은 제법의 실상을 말한다. 제법의 실상을 보기 때문에 정관이라 하고, 이와 다르게 수행한다면 邪觀이 될 것이다. 설사 이승이라도 이 이치를 보지 못한다면 즉 전도되어 잘못된 견해인 것이다.
是以三乘觀法無異. 但心有大小爲差耳.
그러므로 삼승의 법을 관함은 다름이 없다. 다만 마음의 대소가 있어 차이가 날 뿐이다.
漚和般若者. 大慧之稱也.
구화반야를 대혜라고 지칭한다.
(구화는 범어음역으로 방편으로, 반야는 지혜로 번역한다. 지금의 구화반야는 관찰하는 주관적인 마음을 삼고 진속이제를 쌍으로 동시에 觀照한다. 그리하여 유와 무를 취하지 않고 유무의 이변(二邊)에 떨어지지 않았다. 그 때문에 대혜라고 말했다.)
諸法實相. 謂之般若. 能不形證. 漚和功也. 適化衆生. 謂之漚和. 不染塵累. 般若力也.
제법실상을 볼 수 있는 것을 반야라고 하며, 제법실상을 보고도 증오(證悟)했다고 집착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방편반야(漚和)의 공로이다. 중생의 세계로 가서 六塵의 번거로움에 오염되지 않음은 실상반야의 힘이다.
然則般若之門觀空. 漚和之門涉有. 涉有未始迷虛. 故常處有而不染. 不厭有而觀空. 故觀空而不證. 是謂一念之力. 權慧具矣. 一念之力. 權慧具矣. 好思. 歷然可解.
그렇다면 반야의 문에선 제법성공을 관하고, 구화의 문에선 유에 거닌다. 유에 거닌다 할지라도 애초에 제법성공의 이치에 어둡지 않기 때문에 항상 유에 처한다 할지라도 육진에 물들지 않고, 유를 싫어하지 않고 공의 이치를 관하기 때문에 제법성공을 관하면서도 편공(偏空)을 증오(證悟)하여 집착하지 않는다. 이를 일념 실지반야의 힘에 그 공능인 방편반야의 능력을 갖추었다고 말한다. 일념 실지반야의 힘에 방편반야를 갖추었음을 잘 생각해보면 분명히 알리라.
泥洹盡諦者. 直結盡而已. 則生死永滅. 故謂盡耳. 無復別有一盡處耳.
니원을 진제(盡諦)라고 하는 것은 번뇌의 결사(結使)가 곧장 다했음을 말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생사가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번뇌가 다한다 해서 盡이라 말했을 뿐, 다시 하나의 다한 처소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니원을 열반이라 하기도 한다. 이를 盡諦라 하는 것은 열반의 경지는 번뇌의 결사가 다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다시 하나가 다한 곳에 귀의할 만한 하나의 공간이 있는 것은 아니며 열반이라고 호칭할 만한 하나의 명사가 실제로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열반은 無名이라고 말했다.)
2. 物不遷論
夫生死交謝. 寒暑迭遷. 有物流動. 人之常情. 余則謂之不然.
대저 생사가 교대로 뒤바뀌고 한서가 번갈아 천류하면서 사물은 움직이면서 유전함이 있다 함은 사람의 일상적인 감정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何者. 放光云. 法無去來. 無動轉者.
왜냐하면 『방광반야경』에서 말하기를, “제법은 현재가 과거로 흘러가지도, 과거가 현재로 흘러오지도 않는다. (제법은 無動하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을 따라 움직이면서 전변함도 없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법화경』에 “제법은 제 위치에 안주하여 세간의 모습이 변치 않고 영원히 안주한다.”)
尋夫不動之作. 豈釋動以求靜. 必求靜於諸動.
방광반야경에서 말한 “움직이지 않는다” 했던 것을 연구해 보자. 어찌 움직이는 것을 버리고 고요함을 찾았겠는가. 반드시 움직이는 모든 현상의 모습에서 고요한 眞空을 구해야만 한다.
必求靜於諸動. 故雖動而常靜. 不釋動以求靜. 故雖靜而不離動.
반드시 제법이 움직이는데서 고요함을 구해야만 한다. 고로 비록 움직이지만 항상 고요하고, 움직임을 버리지 않고 고요함을 구하기 때문에, 비록 고요하나 움직임을 떠나지 않는다.
(『화엄경』에서 “보리의 도량을 떠나지 않고, 일체의 세계에 보편한다.” 말한 것과 같다.)
然則動靜微時異. 而惑者不同. 緣使眞言滯於競辯. 宗途屈於好異. 所以靜躁之極. 未易言也.
그러한즉 動靜이 처음부터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미혹한 범부는 動靜이 동일하지 않다고 한다. 이 때문에 진리의 말씀은 시비를 다투어 변론하는 데서 막히고, 종지로 통하는 길이 부질없이 動靜이 다름을 좋아하는 데서 굴복을 당하게 하였다. 그런 까닭에 動靜이 둘이 아닌 극치의 경지는 말을 하기가 쉽지 않다.
何者. 夫談眞則逆俗. 順俗則違眞. 違眞故迷性而莫返. 逆俗故言淡而無味.
왜냐하면 진리를 담론하면 세속의 속된 견해를 거슬리고, 세속적 견해를 따르자니 진리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진리에 위배되기 때문에 본성에 미혹하였는데도 근원으로 돌아올 수 없고. 세속적인 견해를 거슬리기 때문에 말이 담담하여 맛이 없다.
緣使中人未分於存亡. 下士撫掌而弗顧.
이 때문에 보통 근기의 사람은 도가 있는지 없는지를 분간하지 못하고 반신반의하고, 최하근기의 사람은 손뼉을 치면서 비웃으면서 되돌아보지도 않게 되었다.
近而不可知者. 其唯物性乎.
가까우면서도 알지 못할 것은 사물의 본성이리라.
然不能自已. 聊復寄心於動靜之際. 豈曰必然. 試論之曰.
그러나 이 문제를 그만두지 못하고 부족한 대로나마 마음을 動靜의 즈음에 의탁해 보긴 하겠지만, 어찌 나의 말이 꼭 그렇다고 긍정하겠는가. 시험 삼아 이를 의론해 보겠다.
道行云. 諸法本無所從來. 去亦無所至. 中觀云. 觀方知彼去. 去者不至方.
『도행반야경』에서 말하기를, “제법은 본래 과거에서 현재로 흘러 온 유래가 없으며, (인연이 흩어지면 사라지기 때문에) 과거로 흘러간다 해도 이를 곳이 없다.” 『중관론』에서 말하기를 “갈 방향을 관찰하고 그가 간다는 것을 아나 가는 자는 끝내 그 방향에 이르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방향을 초월한 절대의 방향은 방향이 없으므로 본래 단정적인 방향이란 없다. 그런데 방향을 향해 가는 사람은 어느 방향이라고 허망하게 지적하나 실제론 이르러 갈 만한 단정적인 방향이란 없다.)
斯皆卽動而求靜. 以知物不遷. 明矣.
이는 모두가 제법의 움직임에 나아가서 고요함을 찾은 것이다. 이로써 사물은 천류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夫人之所謂動者. 以昔物不至今. 故曰動而非靜. 我之所謂靜者. 亦以昔物不至今. 故曰靜而非動. 動而非靜. 以其不來. 靜而非動. 以其不去. 然則所造未嘗同. 逆之所謂塞. 順之所謂通. 苟得其道. 復何滯哉.
대저 사람들은 소위 움직이며 변화한다라고 말들 하는데, 이는 과거의 사물이 현재에 이르러 오지 않기 때문이다. 고로 “움직이면서 고요하지 않다.”라고 한다. 내가 말하는 사물은 움직이지 않고 고요하다 함은 과거의 사물이 현재에 이르러 오질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물은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는다.” 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움직이며 고요하지 않다라고 한 것은 과거의 사물이 현재로 흘러오지 않았기 때문이며, 내가 사물이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는다 한 것은 현재의 사물이 과거에로 흘러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다면 일반 사람과 내가 나아간 대상은 아직 차이가 나지 않았는데도 이를 보는 견해는 일찍이 동일하지 않았다. 진리를 거역함을 막힘이라 말하고 진리를 수순함을 통함이라 말한다. 굳이 그 도를 체득하기만 한다면 다시 무엇에 막히랴.
傷夫. 仁情之惑也久矣. 目對眞而莫覺.
한심스럽구나. 사람들의 허망한 마음의 미혹함이 오래 되었음이여. 눈으로 진상의 도를 마주하면서도 깨달을 수 없다니.
旣知往物而不來. 而謂今物而可往. 往物旣不來. 今物何所往.
과거의 사물이 현재로 흘러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현재의 사물이 과거로 흘러간다고들 말한다. 과거의 사물이 현재로 오지 않았다면 지금의 사물인들 어디로 흘러가겠는가.
何則. 求向物於向. 於向未嘗無. 責向物於今. 於今未嘗有. 於今未嘗有. 以明物不來. 於向未嘗無. 故知物不去. 覆而求今. 今亦不往. 是謂昔物自在昔. 不從今以至昔. 今物自在今. 不從昔以至今.
왜냐하면 과거의 사물을 과거에서 구해 보았으나 과거에 일찍이 없지는 않았었고, 과거의 사물을 현재에서 따져 보았더니 현재에선 아직까지 있지 않았다. (현재와 과거가 서로 왕래하지 않는 측면에서) 과거의 사물이 현재에서 있지 않기 때문에 이로써 과거의 사물이 현재로 오지 않았음이 분명하고, 현재의 사물이 일찍이 과거엔 없었기 때문에 현재의 사물이 과거로 흘러가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이를 뒤집어서 현재에서 찾아보았더니 현재도 과거로 가지 않았다. 이는 과거의 사물은 스스로 과거에 있었고, 현재로부터 과거에로 이르러 간 것은 아니며, 현재의 사물은 절로 현재에 있고,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르러 오지 않았음을 말한다.
故仲尼曰. 回也見新交臂非故. 如此. 則物不相往來. 明矣.
고로 중니(공자)가 제자 안회에게 말하기를 “회야, 너와 내가 새롭게 스치는 팔은 옛날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보았느냐”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다면 사물이 서로 왕래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일체법은 찰나찰나에 유전하기 때문에 반드시 자성이란 없다. 자성이 없기 때문에 찰나찰나에 유전천류하는 일체법이 생겨남이 없는 不生不滅의 眞如性空이다. 유마경에 “제법의 불생불멸이 진여성공인 무상의 의미이다.”)
旣無往返之微朕. 有何物而可動乎.
이미 흘러갔거나 되돌아오는 희미한 조짐도 없는데 무슨 사물이 있어서 움직이겠는가.
(제법은 고요하게 담연하여 흘러오고, 흘러가는 모습이 가느다란 털끝만큼의 희미한 조짐도 없는데, 무슨 사물이 있어 움직이며 구르겠는가 함을 말한 것이다. 시간의 흐름은 한량이 없지만 한 찰나 사이에 포섭된다. 시간에는 고금이 없으며 제법은 시간을 따라가고 옴이 없다.)
然則旋嵐偃嶽而常靜. 江河兢注而不流. 野馬飄鼓而不動. 日月歷天而不周. 復何怪哉.
이와 같다면 선람(우주가 무너지는 괴겁에 부는 바람)의 바람이 수미산을 무너뜨린다 할지라도 항상 고요하며, 강하가 다투기나 하듯이 바다로 흘러들어간다 해도 흐르는 것이 아니며, 봄날의 아지랑이가 나부끼며 올라간다 해도 움직이는 것이 아니며, 해와 달이 하늘을 지나간다 해도 우주를 한 바퀴를 돈 것은 아니다. 다시 무엇을 괴이하게 여기겠는가.
(사물마다의 당체가 천류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사물의 모습은 천류하는데 본성은 천류하지 않는다 한 것은 아니다.)
噫. 聖人有言曰. 人命逝速. 速於川流. 是以聲聞悟非常以成道. 緣覺覺緣離以卽眞. 苟萬動而非化. 豈尋化以階道. 覆尋聖言. 微隱難測. 若動而靜. 似去而留. 可以神會. 難以事求.
아, 성인이 말씀하시기를, “인명이 흐르는 시냇물보다 빠르다” 하셨다. 그러므로 성문은 非常(無常)의 性空을 깨달아 도를 이루고, 연각은 緣會가 분리하여 사라지는 性空을 깨닫고 진상의 도에 나아간다. 움직이는 모든 법이 무상하게 변화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무상하게 변화하는 것을 연구하여 도과에 오르겠는가. 성인의 말씀을 반복해서 연구해 보았더니 은미하여 헤아리기 어렵다. 성인은 움직임을 말씀한 듯하나 고요하고, 흘러감을 말씀한 듯하나 상주하여 머문다. 이는 신령한 정신으로 회합해야지 事相에서 찾기란 어렵다.
是以言去不必去. 閑人之常想. 稱住不必住. 釋人之所謂往耳. 豈曰去而可遣. 住而可留也.
그 때문에 생사가 무상하게 흘러간다고 했으나 반드시 흘러가는 것은 아닌데, 이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망상을 막아주려 하기 때문이다. 열반은 상주한다고 말씀해도 꼭 열반에 안주하지 않는데, 이는 사람들이 말하는 생사로 흘러간다 한 것을 버리게 한 것이다. 어찌 생사가 흘러간다고 해서 생사를 버렸겠으며, 열반에 안주한다 해서 상주함을 말했으랴.
(열반은 상주한다 말씀하셨으나 열반에 상주할 만한 하나의 모습이 정말로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생사와 열반은 둘 다 실체의 모습을 얻지 못하는데 어찌 버려야 할 생사가 단정적으로 있고, 상주해야 할 열반이 정말로 있다고 하셨으랴.)
故成具云. 菩薩處計常之中. 而演非常之敎. 摩訶衍論云. 諸法不動. 無去來處. 斯皆導達群方. 兩言一會. 豈曰交殊. 而乖其致哉.
고로 『성구경』에서 말하기를 “보살은 상주불변한다고 헤아리며 집착하는 가운데 처하여 생사의 무상한 가르침을 연설한다.” 라고 하였고, 『마하연론』에서는 “제법은 부동하여 흘러가거나 흘러 온 곳이 없다.”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는 모두가 여러 상대적인 방향을 인도하여 중도로 도달시킨 것으로서 이 두 말의 귀결점은 하나로 회합한다. 어찌 표현한 문장이 다르다 해서 그 이치마저 다르겠는가.
(『성구경』에서 “보살이 범부가 영원하다고 망상으로 헤아리는 가운데 처하여, 그 때문에 덧없는 생사의 무상함을 설명하여 그들의 집착을 타파한 것이지, 타파해야 할 생사의 모습이 정말로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是以言常而不住. 稱去而不遷. 不遷. 故雖往而常靜. 不住. 故雖靜而常往. 雖靜而常往. 故往而弗遷. 雖往而常靜. 故靜而弗留矣. 然則莊生之所以藏山. 仲尼之所以臨川. 斯皆感往者之難留. 豈曰排今而可往. 是以觀聖人心者. 不同人之所見得也.
그러므로 열반의 상주불변을 말한다 해도 열반에 안주하지 않고 생사는 무상하게 흘러간다 해도 실제로 천류하는 것은 아니다. 천류하지 않기 때문에 생사의 세계로 간다 해도 항상 고요하며(만법의 변화를 따른다 해도 하나인 중도는 고요 담연한 것이다), 열반에 상주하지 않기 때문에 고요하면서도 항상 생사의 세계로 가는 것이다.(번뇌가 사라진 멸진정의 열반에서 일어나지 않고 모든 威儀를 나타낸다) 열반에서 고요해도 항상 생사의 세계로 가기 때문에 간다 해도 생사에 천류하지 않으며(심의식의 망상이 없이 만행을 나타내기 때문에 항상 생사의 세계로 간다 해도 천류하지 않는다), 생사의 세계로 간다해도 항상 열반에서 고요하기 때문에 고요해도 열반에 머물며 집착하지 않는다.(무위의 열반에 안주하지도 않고, 현상의 유위법도 버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장자가 산을 늪지대에 숨겼던 까닭과 공자가 흐르는 시냇물에 임했던 까닭은 모두가 흘러가는 것을 붙잡아 두기 어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어찌 현재의 사물을 밀어젖히고 과거로 흘러감을 말했으랴. 그러므로 성인의 마음을 관찰한 자는 일반 사람들이 보고 체득하는 것과는 동일하지 않다.
(장자가 말하기를 “배는 산골짜기에 숨기고 그 산을 늪지대에 숨겨놓고 이를 견고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힘센 사람이 이를 걸머지고 도망을 했는데도 어리석은 사람은 이를 깨닫지 못한다. 천하를 천하에 숨겨둔다면, 즉 천하가 있는 그대로 둔다면 도망할 곳이 없으리라.”하였다. 사람들이 외형의 껍데기를 잊고 본질의 도에 계합하지 않으면 산림 속에 은둔하고 천지에 나의 형체를 의탁한다 해도 나의 몸은 造化가 은밀하게 옮겨간다. 어리석은 사람은 숨긴 곳이 있으면 상대적으로 도망할 곳도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만일 형체와 도가 하나로 합일한다면 숨길 곳이 없고, 숨김이 없으면 도망함도 없다. 이는 장자가 의도하고 한 말이다.)
何者. 人則謂少壯同體. 百齢一質. 徒知年往. 不覺形隨. 是以梵志出家. 白首而歸. 隣人見之曰. 昔人尙存乎. 梵志曰. 吾猶昔人. 非昔人也. 隣人皆愕然. 非其言也. 所謂有方者負之而趨.昧者不覺. 其斯之謂歟.
왜냐하면 사람들은 어린 시절이나 장성한 때의 몸이 동일하므로 백세가 된다 해도 형질은 하나이다 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이가 젊은 시절의 과거로 흘러간 것만 알았을 뿐, 형체도 나이를 따라 함께 흘러갔다는 점은 몰랐었다. (사람이란 동일한 몸의 하나의 형질이긴 하나 늙음과 젊음이 같지 않다. 실제로 젊은 시절의 얼굴은 스스로 과거 젊은 시절을 따라가 있지 현재의 늙음으로 오지 않았으며, 늙음은 스스로 현재에 머물러 있지 젊음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러므로 범지가 젊은 시절에 출가하여 머리가 하얀 늙은이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이웃집 사람이 그를 보더니 말하였다. ‘지난 젊은 시절의 모습 그대로 있군.’ 범지가 말하였다. ‘나는 지난날 젊은 시절의 사람인 듯하지만 이미 지난날의 사람은 아니다.’ 이웃집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면서 그의 말이 틀렸다고 비난하였다. 위에서 말했던 ‘힘센 사람이 걸머지고 도망을 갔는데도 어리석은 사람은 깨닫지 못했다’고 한 것이 이런 경우를 두고 말했으리라.
是以如來. 因群情之所滯. 則方言以辯惑. 乘莫二之眞心. 吐不一之殊敎. 乖而不可異者. 其唯聖言乎.
그 때문에 여래께서는 여러 중생들이 허망한 마음으로 막힌 것 때문에 방편의 말씀을 하여 미혹을 분별하셨다. 둘이 없는 진실한 마음을 타고 하나가 아닌 다른 가르침을 토해 내셨으니 말씀은 달라도 마음마저 다르다 하지 못할 것은 성인의 말씀뿐이리라.
故談眞有不遷之稱. 導俗有流動之設. 雖復千途異唱. 會歸同致矣.
그러므로 진리를 담론하시면 사물은 천류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었고, 세속을 인도하는데는 사물은 흐르며 움직인다는 말씀이 있었다. 이처럼 천 갈래 길로 다르게 말씀하셨으나 회합하여 귀결하는 점은 동일하게 이르러 간다.
而徵交者. 聞不遷. 則謂昔物不至今. 聆流動者. 而謂今物可至昔. 旣曰古今. 而欲遷之者. 何也.
그런데도 언어문자에서 따지는 자들은 사물은 천류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들으면 과거의 사물은 현재로 이르러 오지 않는다 말하고, 사물은 움직이며 유전한다는 말씀을 들으면 현재의 사물이 과거에로 이르러 간다고들 말한다. 이미 상대적인 과거와 현재라면 이를 옮기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과거가 현재로 흘러오지 않는다는 이치는 보기가 쉽지만 현재가 과거로 이르러 가지 않는다는 말은 가장 밝히기 어렵다.)
是以言往不必往. 古今常存. 以其不動. 稱法不必去. 謂不從今至古. 以其不來.
고로 시간이 흘러간다고 말해도 간다고 이해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과거와 현재가 움직이지 않고 변함없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시간이 과거로 흘러간다 해서 간다고 이해할 필요가 없는데, 현재로부터 과거로 이르러 가지 않는 것은 과거의 시간이 현재로 흘러 오지 않기 때문임을 말한다.
不來. 故不馳騁於古今. 不動. 故各性住於一世.
과거의 시간이 현재로 흘러오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의 시간으로 서로가 갈리지 않고, 항상 존재하며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각자의 성품이 한 세대에 안주한다.
然則群籍殊文. 百家異設. 苟得其會. 豈殊文之能惑哉.
그렇다면 여러 서적에서 표현한 문자가 다르고 모든 사상가들이 다르게 말한다 해도 귀납하여 회합하는 점만 체득한다면 어찌 표현한 문자가 다르다해서 거기에 현혹을 당하겠는가.
是以人之所謂住. 我則言其去. 人之所謂去. 我則言其住. 然則去住雖殊. 其致一也. 故經云. 正言似反. 誰當信者. 斯言有由矣.
그러므로 소위 상주불변하다고 말하는 것을 나는 그것은 무상하게 흘러간다 말하고, 사람들이 무상하게 흘러간다고 말하는 것을 나는 그것은 상주불변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무상하게 흘러간다, 상주불변한다 한 말이 다르지만 그것이 이르러 가는 곳은 하나이다. 그러므로 『도덕경』에서 말하기를 “올바른 말은 반대되는 듯도 하다. 이를 뉘라서 믿으려 할까” 하였는데, 이 말을 하게 된 까닭이 있었다 하리라.
何者. 人則求古於今. 謂其不住. 吾則求今於古. 知其不去. 今若至古. 古應有今. 古若至今. 今應有古. 今而無古. 以知不來. 古而無今. 以知不去. 若古不至今. 今亦不至古. 事名性住於一世. 有何物而可去來. 然則四象風馳. 㻢璣電捲. 得意毫微. 雖速而不轉.
왜냐하면 사람들은 옛날을 현재에서 구해보고 옛날에는 안주하지 않는다 말들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현재 가운데서 옛날을 찾아보다가 찾지 못하면 옛날은 천류했다라고 헤아린다. 이는 범부의 미혹이다.) 나는 현재를 옛날에서 찾아보고 현재는 옛날로 흘러가지 않았음을 안다. (나는 옛날속에서 현재를 찾아보니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현재가 옛날로 흘러가지 않았음을 안다. 이는 성인의 깨달음이다.) 일반인의 견해대로 현재가 옛날로 이르러 갔다면 옛날도 현재로 흘러 와 있어야만 하며, 옛날이 현재로 이르러 왔다면 현재도 응당 옛날로 흘러가 있어야만 하리라. (현재와 옛날이 서로 왕래함이 있다면 서로에게 그 자취가 있어야만 된다.) 현재에는 옛날이 없기 때문에 이로써 옛날은 현재로 흘러오지 않았음을 알 수 있고, 옛날에는 현재가 없기 때문에 이로써 현재는 옛날로 흘러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옛날이 현재로 이르러 오지 않았다면 현재도 옛날로 흘러간 것은 아니다.(옛날과 현재가 서로 도달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사물마다 각자의 성품이 한 세대에 안주한다. 무슨 사물이 있어서 흘러가고 흘러오겠는가. 이와 같다면 사상(일월성신)이 바람처럼 달리고, 선기(북두칠성 가운데 별자리이름)가 번개처럼 걷힌다해도 은미한 데서 털끝만큼의 그 의도를 체득하면 신속하다해도 실제론 구르는 것이 아니다.
是以如來. 功流萬世而常存. 道通百劫而彌固.
그러므로 여래의 공덕은 만세에 유전하면서도 항상 존재하며, 도는 영겁에 통하면서 더욱 견고하기만 하다.
(여래의 공덕이 만세에 유전한다 한 것은 利他의 실천이 항상 존재해 있는 것이며, 도가 영겁에 통한다 한 것은 自利의 행이 더욱 견고하여, 만세백겁이 지나면서 시간이 천류하는 듯하면서도 자리와 이타의 두가지 형이 썩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사물이 천류하지 않는 실제이다.)
成山假就於始簣. 修途託至於初步. 果以功業不可朽故也.
비유하자면, 산을 이루는 데는 처음 한 삼태기의 흙을 빌려 완성하고, 먼 길을 떠나는 데는 첫걸음부터 시작하여 목적지에 이르러 가는 것과도 같다. 이는 인에서 과에 이르기까지, 결과를 이루었다 하여 인의 공업이 썩어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천리의 길을 가려면 첫걸음부터 시작하나 천리 길에 이르고 나서도 첫걸음은 천리의 끝으로 옮겨가지 않는 것과도 같다. 그 때문에 수행의 공부가 성취되어 성인의 경지에 이르러, 자리이타의 수행이 가득찼다 해도 처음 보리의 마음을 냈던 것과 다르지 않다. 수행의 因地로부터 성불의 결과에 이르기까지 수행마다 인과가 천류하지 않는다. 선악의 인과도 이와 같다.)
功業不可朽. 故雖在昔而不化. 不化故不遷. 不遷故則湛然明矣. 故經云. 三災彌綸. 而行業湛然. 信其言也.
성인의 공업은 썩어 없어지지 않는다. 고로 수행의 因地는 수행할 때의 과거에 있으면서 변화하지 않고,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果地로 천류하지 않는다. 천류하지 않기 때문에 담연하여 인과가 분명한 것이다. 고로 경전에서 말하기를, “삼재가 미륜(충만)하다 해도 수행의 공업은 담연하다”라고 하였는데, 그 말씀은 믿을 만하구나.
何者. 果不俱因. 因因而果. 因因而果. 因不昔滅. 果不俱因. 因不來今. 不滅不來. 則不遷之致明矣. 復何惑於去留. 踟蹰於動靜之間哉.
왜냐하면 과는 인과 함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은 인 그대로 있는 상태에서 과이며, 인은 인 그대로인 채 과이므로 인은 과거에 사라지지도 않았고, 현재의 과는 과거의 인과 함께 하지 않았으므로 과거의 인이 현재의 과로 오지도 않았다. 과거의 인이 사라지지도 않았고, 현재의 과로 흘러오지도 않았다면 인과가 천류하지 않는다 한 이치가 분명하다. 다시 무엇 때문에 흘러가고 머무는 데에서 현혹을 당하고, 동과 정의 사이에서 주저하겠는가.
然則乾坤倒覆. 無謂不靜. 洪流滔天. 無謂其動. 苟能契神於卽物. 斯不遠而可知矣.
이와 같다면 천지가 뒤집힌다 해도 고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며, 홍수가 하늘까지 넘실댄다 해도 움직인다고 말할 수는 없으리라. 움직이는 사물에 나아가 천류하지 않는 이치에 나의 정신이 하나로 일치할 수만 있다면 이를 머지않는 데에서 알게 되리라.
(천류하는 사물에 나아가서 천류하지 않는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 진여의 세계를 볼 수 있다면 눈에 부딪치는 대로가 제법실상의 상주 아님이 없다.)
3. 不眞空論
夫至虛無生者. 蓋是般若玄鑑之妙趣. 有物之宗極者也. 自非聖明特達. 何能契神於有無之間哉. 是以至人通神心於無窮. 窮所不能滯. 極耳目於視聽. 聲色所不能制者. 豈不以其卽萬物之自虛. 故物不能累其神明者也.
지극히 텅 비어 생멸이 없는 중도는 (중도제일의제는 인식의 사량으로 분별할 세계가 아님을 지적하였다) 實相반야의 자체에서 일으킨 觀照반야의 작용으로 현묘하게 조감하여 오묘하게 취향한 곳이며, 유위법인 사물이 종극으로 여기는 것이다. 스스로 성스러운 총명으로 특수하게 통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계합할 수 있었으랴. 그러므로 至人은 중도의 무궁한 묘취에 현묘하게 조감하는 관조반야의 신령한 마음을 통하여 斷空(단멸의 공)이 다한 데에 막히지 않고, 방편반야로서 보고 듣는 데에 이목의 종극을 삼아 들리는 소리나 보이는 색깔이 제압하지 못한다. 어찌 성인은 만물이 스스로 텅 빈 성공의 실상에 나아감이 아니였겠는가. 그 때문에 지인은 사물이 그의 신명에 누를 끼치지 못하는 자인 것이다.
(神心은 實智반야(실상반야)에서 일으킨 관조반야로 內照함을 말하고. 玄鑑이나 無窮은 중도를 말한다.)
是以聖人. 乘眞心而理順. 則無滯而不通. 審一氣以觀化. 故所遇而順適. 無滯而不通. 故能混雜致湻. 所遇而順適. 故則觸物而一. 如此則萬象雖殊. 而不能自異. 不能自異. 故知象非眞象. 象非眞象故. 則雖象而非象. 然則物我同根. 是非一氣. 潛微幽隱. 殆非群情之所盡. 故頃爾談論. 至於虛宗. 每有不同. 夫以不同而適同. 有何物而可同哉. 故衆論競作. 而性莫同焉.
그러므로 성인은 진실한 마음을 타고 만물의 이치를 고르게 순종하면 막히는 곳마다 통하지 않음이 없다. 一眞의 一氣인 진실한 마음에 처하여 현실 만법의 변화를 관찰한다. 그 때문에 만나는 사물마다의 이치를 따르며 자적한다. 막히는 사물마다 통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異流중생과 혼융하여 一眞의 순일함을 이룰 수 있고, 만나는 사물마다의 이치를 순종하며 자적하기 때문에 부딪치는 사물마다 진실이다. 이와 같다면 삼라만상이 다르다 해도 스스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 삼라만상이 스스로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에 만상의 형상은 진실로 존재해 있는 형상이 아님을 알 수 있으며, 만상이 진실한 존재로서의 형상이 아니기 때문에 만상이라 해도 만상이 아니다. 이와 같다면 만물과 내가 동일한 근원이며, 긍정과 부정이 一氣의 중도이다. 이러한 중도의 경지는 그윽하고 은미하여 일반 뭇 중생들이 허망하게 헤아리는 망정으로는 극진히 할 바가 사뭇 아니다. 그 때문에 요즈음 천박한 지혜로 하열하게 이해를 한 사람들의 담론이 虛宗에 이르러선 중도의 심오한 이치와는 매양 동일하지 않음이 있는 것이다. 그들이 동일하지 않는 담론으로써 大同의 중도로 가려 하나 어떤 사물이 있어 그들과 동일해지겠는가. 그러므로 여러 사람들의 의론이 다투듯이 일어났으나 실제의 성품과는 동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何則. 心無者. 無心於萬物. 萬物未嘗無. 此得在於神靜. 失在於物虛.
왜냐하면 心無宗을 의론한 자는(진나라의 도항이 지은 「심무론」을 타파) 인식의 대상인 만물에 있어서 주관적인 인식의 마음이 없을지언정, 만물은 일찍이 없는 것은 아니다 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는 주관적인 정신이 고요하여 번뇌가 없는 데서는 옳았으나 사물의 자체가 性空인 데에 있어선 잘못하였다.
(그의 논지는 주관적인 마음은 공하였으나, 六境의 세계는 그대로 實有로서 존재한다고 하여 만물은 緣生으로서의 성공임을 알지 못하였다. 이는 중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卽色者. 明色不自色. 故雖色而非色也. 夫言色者. 但當色卽色. 豈待色色而後爲色哉. 此直語色不自色. 未領色之非色也.
卽色宗을 의론한 자는(진나라의 도림이 지은 「즉색유현론」을 타파) 색은 스스로 색이라 여기지 않는다. 그 때문에 색이라 헤아린다 해도 색은 색이 아니다 라고 밝혔다. (단지 사람들이 적,황,백 등의 색이라고 이름 붙였기 때문에 각자 차별적인 색이 되었음을 말한다. 그 자체는 색이라는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색이 스스로 색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만 직선적으로 말했을 뿐, 색의 자체가 색이 아님을 아직 알지 못하였다.
(그는 緣生의 依他起性에 붙여진 名假만 일렀을 뿐, 의타기성의 자체인 圓成實性을 몰랐기 때문에 올바른 논리가 아닌 것이다.)
本無者. 情尙於無. 多觸言以賓無. 故非有. 有卽無. 非無. 無亦無. 尋夫立文之本旨者. 直以非有. 非眞有. 非無. 非眞無耳. 何必非有無此有. 非無無彼無. 此直好無之談. 豈謂順通事實. 卽物之情哉.
本無宗은 (진나라 축법태의 본무종을 타파) 情的으로 無의경지를 숭상하여 부딪치는 말마다 無에는 공순하게 복종하는 경우가 많다. 그 때문에 속제는 연생이기 때문에 실유가 아니다(非有)라고 말하면 속제의 유가 바로 없는 것이다 라고 하며, 진제의 공은 정말로 없는 것은 아니다(非無)라고 하면 없다 한 개념마저 없다라고 한다. (그는 속제는 연생이기 때문에, 非有라고 말하는 것은 그 자체가 성공이기 때문에 실유가 아니라는 뜻을 모르고, 있어도 실은 없는 것이다라고 헤아린다. 斷見의 공에 떨어진 것이다.) 非有非無의 논리를 수립한 문장의 근본 종지를 연구해 보자. 이는 곧장 非有이고 속제의 사물은 연생이기 때문에 진실하게 존재해 있지 않다 한 것이며, 非無는 眞空이면서 妙有이기 때문에 진실공으로서 없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였을 뿐이었다. 하필이면 非有라고 했다해서 속제의 유가 없다고 하였겠으며, 非無라고 해서 진제의 무마저 없다 하였겠는가. 이는 무를 정적으로 좋아하는 담론일 뿐이다. 어찌 사물 실제의 이치에 순종하고 통하여, 사물의 실정에 나아갔다 말할 수 있으랴.
夫以物物於物. 則所物而可物. 以物物非物. 故雖物而非物. 是以物不卽名而就實. 名不卽物而履眞.
사물을 사물이라는 명사로 이름을 붙인다면 이름을 붙인 사물의 자체는 사물이라 하겠지만 사물을 사물이라 한 명칭은 사물의 자체는 아니다. 그러므로 사물에 붙인 명칭은 있다해도 그 명칭에서 사물의 실제 모습을 얻지 못한다. 그 때문에 사물의 실제는 사물의 명칭에 나아가서 사물의 실제를 이루지 못하며, 사물의 명칭도 사물의 자체에 나아가 사물 자체의 진실을 증험하지 못한다.
然則眞諦獨靜於名敎之外. 豈曰文言之能辨哉. 然不能杜默. 聊復厝言以擬之. 試論之曰.
이와 같다면 진제는 홀로 세간의 명칭이 있는 言敎밖에서 고요하다. 이를 어떻게 문장과 언교로써 분별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기는 하지만 나는 말을 아니하지는 못하고 부족하나마 다시 논리를 펴서 진제의 경지를 헤아려 보리라. 시험 삼아 이를 의론해 보리라.
摩訶衍論云. 諸法亦非有相. 亦非無相. 中論云. 諸法不有不無者. 第一眞諦也.
『마하연론』에서는 말하기를 “모든 만법은 연생의 성공이기 때문에 차별적인 모습이 있지 않으며, 성공이지만 연생이기 때문에 모습이 없지도 않다.” 하였고, 『중론』에서 말하기를, “모든 법은 연기이기 때문에 實有가 아니고(不有), 연생이기 때문에 實無도 아니다(不無)”라고 하였다.
(속제는 假有로서 진실이 아니기 때문에 性空이며, 진제는 속제로 緣生을 하기 때문에 정말로 확실하게 단멸한 공이 아니다. 그 때문에 제목을 不眞空이라 한 데는 두가지 의미를 포함한 것이다. 이는 유무의 상대적인 양쪽을 부정하고 이를 통해 중도를 나타낸 것이다.)
尋夫不有不無者. 豈謂滌除萬物. 杜塞視聽. 寂寥虛豁. 然後爲眞諦者乎.
『중론』에서 “실유도 아니고(不有), 실무도 아니다(不無)”라고 한 말을 연구해 보았더니, 어찌 만물을 씻은 듯이 제거해 버리고 주관적으로는 보고 듣는 것을 막아 버려, 객관과 주관을 텅 비고 고요하게 한 뒤에야 이를 진제라고 말하였으랴.
誠以卽物順通. 故物莫之逆. 卽僞卽眞. 故性莫之易. 性莫之逆. 故雖無而有. 物莫之逆. 故雖有而無. 雖有而無. 所謂非有. 雖無而有. 所謂非無. 如此. 則非無物也. 物非眞物. 物非眞物. 故於何而可物.
진실로 사물에 나아가 순통하기 때문에 사물이 그를 거역할 수가 없고, 거짓에 나아가서 바로 진실이기 때문에 본성이 변역될 수가 없다. 본성을 변역시킬 수 없기 때문에 없다 해도 있으며(정말로 없는 것은 아니다), 사물이 거역할 수 없기 때문에 있다 해도 없다.(정말로 있지 않다) 있다해도 없는 것이 이른바 非有이며, 없다 해도 있는 것이 이른바 非無이다. 이와 같다면 사물은 정말로 없는 것이 아니다(단절된 無가 아님). 사물은 진실한 사물이 아니며, 사물은 진실한 사물이 아니기 때문에(不眞) 어디에선들 사물이라고 하겠는가.
(有에 나아가서 空을 밝히는 것을 妙空이라 말하고, 空에 나아가서 有를 밝히는 것을 妙有라고 말한다)
故經云. 色之性空. 非色敗空. 以明夫聖人之於物也. 卽萬物之自虛. 豈待宰割以求通哉.
고로 경에서는 “색법이 성공이며, 색을 부수어서 공한 것은 아니다.” 라고 말하였다. 이로써 성인이 사물에 있어서 만물 스스로의 성공에 나아갔음을 밝혔다. 어찌 만물을 요리하듯 분석하기를 기다려 통하기를 구했으랴.
是以寢疾有不眞之談. 超日有卽虛之稱. 然則三藏殊文. 統之者一也.
그러므로 『유마경』에서는 “진실도 아니고, 실제 있는 것도 아니다.”한 담론이 있고, 『초일명삼매경』에서는 “사물 자체가 바로 성공이다.” 한 말이 있다. 그렇다면 삼장에서 표현한 문장은 다르다해도 이를 통괄하는 것은 하나의 이치인 것이다.
故放光云. 第一眞諦. 無成無得. 世俗諦故. 便有成有得.
그러므로 『방광반야경』에서 말하기를 “제일진제는 인연을 떠났기 夫때유문에 성취함도 얻음도 없지만, 연생의 세속제는 연생이기 때문에 문득 성취함도 얻음도 있다.” 하였다.
夫有得卽是無得之僞號. 無得卽是有得之眞名.
얻음이 있는 것이 즉시 얻음이 없는데서 얻음이 있다고 거짓 호칭했으며, 얻음이 없는 것이 바로 얻음이 있는 것의 진실한 이름인 것이다.
眞名故. 雖眞而非有. 僞號故. 雖僞而非無.
진실한 이름이기 때문에 진제가 진실이긴 하나 실제로 존재해 있지 않으며, 거짓 호칭은(얻음이 있는 俗諦) 거짓이긴 하나 실제로 없지는 않다.
是以言眞未嘗有. 言僞未嘗無. 二言未始一. 二理未始殊. 故經云. 眞諦俗諦. 謂有異耶. 答曰無異也. 此經直辯. 眞諦以明非有. 俗諦以明非無. 豈以諦二而二於物哉.
그러므로 진제를 말하면 일찍이 실제로 있는 것도 아니며, 속제의 거짓 호칭을 말하면 일찍이 없지도 않다. 有無의 두가지 말이 애초에 하나는 아니지만 둘이 아닌 이치는 처음부터 다르지 않다. 고로 경전에 이르기를 “진제와 속제가 다름이 있다고 말하겠느냐, 답하여 이르되 차이가 없다.” 라고 하였다. 이 경전에서 곧장 진제를 분별하여 (속제는 있다해도) 실제로 있지 않음을 밝혔고, 속제는 (진제가 연생한 것이기 때문에) 없지도 않다는 것을 밝혔다. 어찌 眞俗 二諦의 말이 둘이라 해서, 진속이 둘이 아닌 중도마저 둘로 나누겠는가.
然則萬物果有其所以不有. 有其所以不無.
이처럼 진속이제가 둘이 아니라면 만물은 정말로 있다 해도 실제로 있지 않은 까닭이 있으며, 없지도 않은 이유가 있다 하겠다.
有其所以不有. 故雖有而非有. 有其所以不無. 故雖無而非無.
속제는 있어도 실제로 있지 않은 까닭이 있기에, 비록 있다 해도 實有가 아니며, (속제의 假有는) 없지도 않은 까닭이 있기에 진제는 비록 없다 해도 정말로 없는 것은 아니다.
雖無而非無. 無者不絶虛. 雖有而非有. 有者非眞有. 若有不卽眞. 無不夷跡. 然則有無稱異. 其致一也.
진제는 없다 해도 정말로 없지 않으므로 없다해도 단절되어 텅 빈 공은 아니며, 속제는 있다해도 정말로 있지 않으므로 있다 해도 진실하게 있다 한 것은 아니다. 만일 유의 속제가 진실에 상즉한 실유가 아니라면 진제의 무도 유의 자취를 평평하게 쓸어버리고 나서의 무는 아니다. 그렇다면 유무의 칭호가 다르긴 하나 중도제로 이르러 간다는 점에서는 하나의 이치인 것이다.
故童子歎曰. 說法不有亦不無. 以因緣故說法生.
그러므로 동자가 찬탄하여 말하기를, “ 설법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으나 인연 때문에 모든 법이 발생한다.” 하였다.
瓔珞經云. 轉法輪者. 亦非有轉. 亦非無轉. 是謂轉無所轉. 此乃衆經之微言也.
『영락경』에서 이르기를 “법륜을 굴리는 것은 법륜을 굴림이 있는 것도 아니며, 법륜을 굴림이 없는 것도 아니다.” 라고 하였는데, 이는 굴려도 굴림이 없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모든 경전의 은미한 말이다.
何者. 謂物無耶. 則邪見非惑. 謂物有耶. 則常見爲得.
왜냐하면 사물은 실제로 없다라고 말하면 단견의 빗나간 견해가 미혹이 아니며, 사물은 실제로 존재해 있다라고 말하면 상견의 잘못된 견해가 옳기 때문이다.
以物非無. 故邪見爲惑. 以物非有. 故常見不得. 然則非有非無者. 信眞諦之談也.
현상의 만물은 정말로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단견의 빗나간 견해가 미혹이며(여기서는 본무종과 심무종을 정면으로 부정), 사물은 실제로 있지도 않기 때문에 상견도 옳지 않다.(여기서는 즉색유현론을 부정) 그렇다면 비유비무는 진실한 진제의 담론이다.
故道行云. 心亦不有. 亦不無. 中觀云. 物從因緣故不有. 緣起故不無. 尋理卽其然矣.
고로 『도행반야경』에서 이르기를 “ 心意識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 하였으며, 『중론』에서는 “사물은 인연을 따르기 때문에 정말로 있는 것이 아니며, 실상의 성공이 인연을 따라 일어나기 때문에 진제는 없지도 않다.” 하였다. 이치를 깊이 연구해 본다면 그러하리라.
(제법은 假有의 인연을 따르기 때문에 진실이 아닌 性空의 有이며, 진여성공이 현상의 인연을 따라 일어나기 때문에 정말로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진제는 진실한 공(眞空)이 아니다.)
所以然者. 夫有若眞有. 有自常有. 豈待緣而後有哉. 譬彼眞無. 無自常無. 豈待緣而後無也. 若有不自有. 待緣而後有者. 故知有非眞有. 有非眞有. 雖有不可謂之有矣. 不無者. 夫無則湛然不動. 可謂之無. 萬物者無. 則不應起. 起則非無. 以明緣起故不無也.
이러한 까닭은 (여기부터는 유무가 아님을 논변) 유가 진실한 유라면 유는 스스로 한결같은 常有인데 어찌하여 緣會를 의지한 뒤에 있겠는가. 비유하면 단견의 진실한 무인 그 무는 스스로 常無인데 緣離를 기다린 뒤에 무이겠는가. 유는 그와 같은 것이다. 유가 스스로의 유가 아니고 연회를 의지한 뒤에 있다면, 고로 알 수 있는 것은 유가 진실한 유가 아니며, 유가 진실한 유가 아니라면 비록 유라 해도 유라 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없지 않다’ 한 것은 정말로 없다면 변화없이 담연하여 움직이지 않아야만 없다 말할 수 있으며, 이처럼 만물이 아예 없다면 만물은 일어나지 않아야만 하며, 만물이 일어났다면 정말로 없는 무는 아닌 것이다. 이로써 연기를 밝히기 때문에 정말로 없는 실무는 아니다.
故摩訶衍論云. 一切諸法. 一切因緣故應有. 一切諸法. 一切因緣故不應有. 一切無法. 一切因緣故應有. 一切有法. 一切因緣故不應有. 尋此有無之言. 豈直反論而已哉.
그러므로 『마하연론』에서 이르기를 “일체의 제법은 일체의 인연 때문에 응당 있어야만 하며, 일체의 제법은 일체의 인연 때문에 진실하게 있지도 않아야만 한다. 일체의 無法은 일체의 인연 때문에 응당 있어야만 하며, 일체의 有法은 일체의 인연 때문에 진실하게 있지 않아야 한다.” 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말한 유무의 말을 연구해 보았더니, 어찌 유무가 상반되는 논리를 서술했을 뿐이겠는가.
若應有. 卽是有. 不應言無. 若應無. 卽是無. 不應言有.
일체의 인연 때문에 속제는 있어야 한다면 이는 바로 있는 것이므로 응당 없다 말하진 못하며, 일체의 인연 때문에 제법은 없어야 한다면 이는 즉시 없는 것이므로 응당 있다고 말하진 못하리라.
言有. 是爲假有以明非無. 借無以辨非有. 此事一稱二. 其文有似不同. 苟領其所同. 則無異而不同.
유라 말해도 이는 가유이므로 이로써 실무가 아님을 밝히고, 무를 빌려 실유가 아님을 분별하였다. 이 유무의 실제 일은, 중도인 하나이나 칭호가 둘이다. 유무를 표현한 문자가 흡사 동일하지 않은 듯하나 유무의 동일점만 안다면 차이나는 것마다 동일하지 않음이 없다.
然則萬法. 果有其所以不有. 不可得而有. 有其所以不無. 不可得而無.
이와 같다면 만법은 있어도 실유가 아닌 까닭이 정말로 있으므로 실유라 하지 못하면, 가유로서 실무가 아닌 원인이 있으므로 실무라 하지 못한다.
(현상의 만법은 실제로 존재해 있지 않는데 어떻게 실제 있다고 억지로 집착하겠으며, 모든 법은 없지도 않은데 어떻게 정말로 없다고 억지로 집착하겠는가 함을 말하였다. 그러므로 단정적으로 집착하면서 유라 무라 하지 못한다 하였다.)
何則. 欲言其有. 有非眞生. 欲言其無. 事象旣形. 象形不卽無. 非眞非實有. 然則不眞空義. 顯於玆矣.
왜냐하면 (유무를 쌍으로 부정한 것) 있다 말하고 싶으나 있어도 진실한 연생은 아니며, 없다 말하고 싶으나 현상의 事象이 이미 나타났다. 현상의 사상이 이미 나타났다면 사상은 없지 않으나 이는 진실이 아니므로 정말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부진공의 의미가 여기에서 환하게 나타났다 하리라.
故放光云. 諸法假號不眞. 譬如幻化人. 非無幻化人. 幻化人. 非眞人也.
그러므로 『방광반야경』에 이르기를 “모든 법은 진실이 아닌 거짓 호칭이다. 이를 비유하면 꼭두각시와 같아 꼭두각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꼭두각시는 진실한 사람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
夫以名求物. 物無當名之實. 以物求名. 名無得物之功.
거짓의 명칭으로써 명칭이 붙은 실제의 사물을 찾아보아도 명칭에 일치하는 사물의 실제는 없으며, 반대로 실제의 사물로써 명칭을 찾아보아도 명칭에서는 실제의 사물을 얻을 수 있는 功能의 작용이란 없다.
物無當名之實. 非物也. 名無得物之功. 非名也. 是以名不當實. 實不當名. 名實無當. 萬物安在.
사물은 명칭에 일치하는 진실한 실제가 없으므로 진실한 사물은 아니며, 명칭은 사물을 얻는 공능이 없으므로 진실한 명칭은 아니다. 그러므로 명칭은 실제의 사물엔 해당이 없고, 실제의 사물은 명칭에 해당하지 않는다. 이름과 실제가 일치함이 없다면 모든 이름이 있는 만물의 실제는 어디에 존재하겠는가.
故中觀云. 物無彼此. 而人以此爲此. 以彼爲彼. 彼亦以此爲彼. 以彼爲此.
그러므로 『중론』에서 이르기를 “사물의 자체에는 상대적인 피차가 없는데 사람들이 자기의 주관에 의해서 이쪽을 이쪽이라 하고 저쪽을 저쪽이라고 하나, 상대방에서도 내가 이쪽이라 했던 것을 저쪽이라 하고 내가 저쪽이라 했던 것을 이쪽이라 한다.” 라고 하였다.
此彼莫定乎一名. 而惑者懷必然之志. 然則彼此初非有. 惑者初非無.
피차는 하나의 이름으로 단정할 수 없는데도 미혹한 사람은 자기의 주관에 의해 단정한 피차가 필연적이라는 뜻을 품게 된다. 그렇다면 피차는 처음에는 실제로 있지 않았는데 미혹한 사람은 애초에 없지 않았다 하리라.
旣悟彼此之非有. 有何物而可有哉. 故知萬物非眞. 假號久矣.
이미 피차가 원래 있지 않았음을 깨달았다면 무슨 피차의 실제하는 사물이 있어서 그를 집착할 만한 것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제법의 만물은 진실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거짓으로 만물이라고 호칭하여 부른지가 오래였음을 알아야 한다.
是以成具立强名之文. 園林託指馬之況. 如此. 則深遠之言. 於何而不在.
그러므로 『성구경』에는 “억지로 명칭을 붙였다.”한 표현이 있고, 원림(장자)에서는 지마의 비유에 의탁함이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다면 심오원대한 말이 불전 이외에도 어디엔들 있지 않으랴.
是以聖人. 乘千化而不變. 履萬惑而常通者. 以其卽萬物之自虛. 不假虛而虛物也. 故經云. 甚奇世尊. 不動眞際. 爲諸法立處. 非離眞而立處. 立處卽眞也.
그러므로 성인은 현상의 모든 변화를 타면서도 자체는 변하지 않고, 중생의 모든 미혹의 세계에 거닐면서도 항상 통하는 자이시다. 왜냐하면 만물 자체의 성공에 나아간 것이지, 공을 빌려 만물을 비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기를 “매우 기이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진제에서 움직이지 않으시고 그 자리에서 (속제의) 모든 법 세울 처소를 삼는군요.” 라고 하였다. 진제를 떠나지 않고 모든 법 건립할 처소를 삼았기 때문에 제법을 건립한 곳이 바로 진제인 것이다.
然則道遠乎哉. 觸事而眞. 聖遠乎哉. 體之卽神.
이와 같다면 성인의 도가 멀다고 하겠는가. 부딪치는 일마다 진제이며, 중도를 체득한 성인이 멀다고 하겠는가. 체득하면 바로 신령해지는 것이다. (이는 외부에서 빌린 성질은 아니다)
4. 般若無知論
夫般若虛玄者. 蓋是三乘之宗極也. 誠眞一之無差.
無知의 허현한 반야는 삼승 모두가 종극으로 여기는 것으로서 차이 없는 진실한 眞一의 마음이다.
(그윽하고 신령한 반야는 상대적인 의존관계의 인식이 끊겼기 때문에 虛라고 말하고, 앎이 없고 관조의 작용마저 끊겼기 때문에 玄이라고 말한다.)
然異端之論. 紛然久矣.
그러나 이단의 의론이 분분하게 어지러운지가 오래 되었다.
有天竺沙門鳩摩羅什者. 少踐大方. 硏機斯趣. 獨拔於言象之表. 妙契於希夷之境.
천축의 사문인 구마라집은 어려서부터 방향을 초월한 대방의 반야도를 실천하여 그 기미를 연구하여 여기에로 취향하였다. 그리하여 홀로 言象의 밖으로 빼어나 중도의 희이(希夷)한 경지에 오묘하게 계합하였다.
(희이는 노자에서 왔는데, 오묘하게 깨닫고 생사를 초월하여 홀로 우뚝섰다는 말이다.)
齊異學於迦夷.
이단의 학문을 가비라국(부처님 탄생하신 곳)에서 하나로 집합하고
揚湻風於東扇. 將爰燭殊方. 而匿耀耀凉土者. 所以道不虛應. 應必有由矣.
순수한 가풍을 동쪽에서 드날여 다른 지방을 환하게 밝히려 하면서 양토에서 광채를 숨기고 있었던 것은, 도는 헛되게 감응하지 않고 감응하는 데는 반드시 그 이유가 있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나집대사가 중국에 들어오게 된 유래를 서술. 양토는 여광이 점령하여 국호를 서량이라 한 곳. 나집대사가 진나라로 가지 못하고 여광에게 11년을 붙들여 있었다.)
弘始三年. 歲次星紀. 秦乘入國之謀. 擧師以來之意也. 北天之運數其然也.
홍시3년 세차성기에 진나라에선 대사를 입국시킬 것을 도모하고, 군사를 거행함으로써 그를 오게 할 의도를 가졌으니, 북천의 운수가 그러하였으리라.
(나집대사가 시기를 얻어 도를 시행한 유래를 서술.)
大秦天王者. 道契百王之端. 德洽千載之下. 游刃萬機. 弘道終日. 信季俗蒼生之所天. 釋迦遺法之所仗也.
대진 천왕의 도는 모든 왕들의 으뜸에 계합하였고, 그가 지닌 덕은 천년 뒤까지 흡족히 적실만 하였다. 바쁜 정사에서도 여유롭게 유인하며 종일토록 불도를 흥통하였다. 그는 실로 말세의 창생들이 어버이로 여기고 석가여래께서 남기신 법이 의지하는 바였다.
(유인游刃은 장자에서 나왔다.)
時乃集義學沙門五百餘人於逍遙觀. 躬執秦文. 與什公參定方等. 其所開拓者. 豈謂當時之益. 乃累劫之津梁矣.
때로 불법의 의미를 배우는 사문 오백여 사람을 소요관에 모아놓고 몸소 한문으로 번역하면서 나집공과 함께 『방등경』을 참정하였다. 그가 개척한 것을 어찌 당시에만 이익되게 하였다고 말하겠는가. 영원토록 나루터가 되리라.
余以短乏. 曾廁嘉會. 以爲. 上聞異要. 始於時也.
나는 재주와 덕이 부족한데도 일찍부터 아름다운 모임에 참여하여 일상에 듣던 것과는 다른 심요를 위로부터 듣게 됨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이상은 반야무지론을 짓게 된 유래를 서술하였고, 이후로 본론의 종지를 드러냈다.)
然則聖智幽微. 深隱難測. 無相無名. 乃非言象之所得. 爲試罔象其懷. 寄之狂言耳. 豈曰聖心而可辨哉. 試論之曰.
그렇다면 성인의 지혜는 그윽하고 은미하여 매우 헤아리기 어렵다. 이는 차별적인 모습도 없고 모습에 대한 명칭도 없어, 명칭인 언어나 모습인 형상으로 얻는 바는 아니다. 나의 마음을 형상이 없이 비우고 광언에 의탁해 보리니, 어찌 성인의 마음을 논변한다 말하겠는가. 시험삼아 이 문제를 의론해 보겠다.
(罔象은 장자에서 나왔다. 이는 자기의 마음을 텅 비워야만 근본의 지혜, 즉 반야의 실지와 서로 호응함을 말한다. 狂言도 장자에서 나왔다. 논변이 광대하기만 해서 일상적인 범부들의 마음에 일치함이 없는 말을 말한다. 이는 겸손해서 하는 말이다.)
放光云. 般若無所有相. 無生滅相. 道行云. 般若無所知. 無所見.
『방광반야경』에서 말하기를, “실제로 존재하는 모습도 없으며, 따라서 생멸하는 모습도 없다.”라고 하였고, 『도행반야경』에서 말하기를 “반야는 인식의 사량분별로 알 대상이 아니며, 상대적으로 볼 수도 없다”라고 하였다.
此辨智照之用. 而曰無相無知者何耶. 果有無相之知. 不知之照明矣.
이 두 경전에서는 실지 반야가 관조반야의 작용을 일으키는 것을 말하였는데도 “모습도 없고 앎도 없다”라고 말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겠는가. 차별적인 모습이 없이 앎과, 인식의 사량분별로 알지 않고 관조하는 작용이 정말로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하겠다.
何者. 夫有所知. 則有所不知. 以聖心無知. 故無所不知. 不知之知. 乃曰一切知. 故經云. 聖心無所知. 無所不知. 信矣.
반야는 무엇 때문에 사량분별로서 아는 세계가 없을까. 일반적으로 인식으로 사량하여 알 대상이 있다면 인식이 미치지 못하는 대상은 알지 못함이 있겠지만(이는 범부의 망정이다), 성인의 마음인 반야는 인식으로써 앎이 없기 때문에 모를 것도 없다. 심의식으로 사량하여 알지 않고 앎을 일체지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말하였는데, 이는 확신할 만한 말이다.
是以聖人. 虛其心而實其照. 終日知而未嘗知也. 故能黙耀韜光. 虛心玄鑒. 閉智塞聰. 而獨覺冥冥者矣.
그러므로 성인은 그 마음에 번뇌의 미혹을 비우고 진실을 관조하여 종일토록 알아도 일찍이 아는 것이 아니다. 그 때문에 말없이 마음의 광채를 숨기고 번뇌가 텅 빈 마음에서 현묘한 관조반야의 조감을 일으켜, 인식의 지혜와 총명을 사용하지 않고 그윽하게 홀로 깨달은 분이다.
然則智有窮幽之鑑. 而無知焉. 神有應會之用. 而無慮焉. 神無慮. 故能獨往於世表. 智無知. 故能玄照於事外.
이와 같다면 실지반야에는 그윽함을 끝까지 조감하는 관조반야의 작용이 있으나 인식의 사량으로 앎은 없으며, 신령한 관조반야는 외연에 감응하여 회합하는 작용이 있으나 사려는 없다. 신령한 관조반야는 인식의 사려가 없기 때문에 세간 밖에서 홀로 가장 존귀할 수 있고, 실지반야는 앎이 없기 때문에 사물 밖에서 현묘하게 관조할 수 있다.
(神은 방편의 작용인 관조반야이다. 방편반야로 정도를 낮추어 모든 중생의 개별적인 상황에 순종하기 때문에 감응하여 회합하는 작용이 있으며, 그 상황을 따라가면서도 생각이 없이 감응하기 때문에 사려가 없다.)
智雖事外. 未始無事. 神雖世表. 終日域中. 所以俯仰順化. 應接無窮. 無幽不察. 而無照功. 斯則無知之所知. 聖神之所會也.
실지반야가 사물 밖이긴 하나 현묘한 관조의 작용을 일으키므로 애초에 사물이 없는 것은 아니며, 신령한 관조반야가 세간 밖에서 홀로 존귀하나 종일토록 세계 속을 떠나지 않고 있다. 그 때문에 정도에 따라 현실의 변화에 순종하면서 무궁하게 모든 중생들을 응접하며, 그윽한 중도의 이치를 끝까지 살피지 않음이 없으나 관조하는 공능의 작용은 없다. 이는 성인의 실지가 앎이 없이 아는 것이며, 성인의 신령한 관조반야로써 실지에 회합하는 까닭이다.
然其爲物也. 實而不有. 虛而不無. 存而不可論者. 其唯聖智乎.
그러나 반야의 자체는 진실이긴 하나 정말로 모습이 있지는 않으며, 번뇌가 텅 비긴 하였으나 실지로 없지는 않다. 있는 그대로 간직해둘 뿐 시비의 의론을 하지 못할 것은 성인의 지혜 일뿐이리라.
何者. 欲言其有. 無狀無名. 欲言其無. 聖以之靈.
무엇 때문에 반야는 유·무에 소속하지 않을까. 반야가 있다 말하려 하나 꼴도 명칭도 없으며, 없다고 말하려 하나 성인은 이로써 신령하기 때문이다.
聖以之靈. 故虛不失照. 無狀無名. 故照不失虛.
성인은 반야로써 신령하기 때문에 마음에 번뇌가 텅 비었으나 관조의 작용을 잃지 않고, 관조의 작용은 있으나 형상도 명칭도 없기 때문에 관조의 작용을 한다 해도 실지 자체의 텅 빈 마음을 잃지는 않는다.
照不失虛. 故混而不渝. 虛不失照. 故動以接麤.
관조하면서도 텅 빈 자체를 잃지 않기 때문에 만물과 혼융하면서도 담연한 자체의 실지는 변하지 않는다. 자체가 텅 비었어도 관조의 작용을 잃지 않기 때문에 걸핏하면 세간에 나타나 중생을 제접한다.
(투渝는 변화한다는 의미이며, 추麤는 삼계에 몸을 나타내어 중생의 종류를 따라서 감응해 주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관조의 작용이 더욱 깊어질수록 반야의 작용은 더욱 광대해 지는 것이다.)
是以聖智之用. 未始暫廢. 求之形相. 未暫可得.
그러므로 성인의 실지가 일으키는 관조의 작용은 처음부터 잠시도 폐지하지 않았지만 이를 구체적인 형상에서 찾아본다면 잠시나마도 얻지 못한다.
故寶積曰. 以無心意而現行. 放光云. 不動等覺而建立諸法. 所以聖迹萬端. 其致一而已矣.
그러므로 『보적경』에서 말하기를 “심의식의 사량분별 없이 전5식으로 현행한다”하였고, 『방광반야경』에서는 “등각에서 움직이지 않고 모든 만법을 건립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인이 감응한 자취는 만가지의 단서나 되지만 이르러 간 이치는 하나의 중도일 뿐이다.
是以般若可虛而照. 眞諦可亡而知. 萬動可卽而靜. 聖應可無而爲. 斯則不知而自知. 不爲而自爲矣. 復何知哉. 復何爲哉.
그러므로 반야는 텅 비었으나 관조의 작용이 가능하며, 중도의 진제는 모습이 없어도 알 수가 있으며, 움직이면서 변화하는 현상의 모든 사물은 그 속에 나아가 고요할 수 있으며, 성인의 감응은 심의식의 작위가 없이 작위가 가능하다. 이는 알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알며, 작위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작위하는 것이다. 다시 무슨 사량분별의 앎이 있겠으며, 무슨 인위적인 작위가 있겠는가.
難曰. 夫聖人眞心獨朗. 物物斯照. 應接無方. 動與事會. 物物斯照. 故知無所遺. 動與事會. 故會不失機. 會不失機故. 必有會於可會. 知無所遺故. 必有知於可知. 必有知於可知. 故聖不虛知. 必有會於可會. 故聖不虛會. 旣知旣會. 而曰無知無會者. 何耶. 若夫忘知遺會者. 則時聖人無私於知會. 以成其私耳. 斯可謂不自有其知. 安得無知哉.
따져 물어 보겠다. 성인의 진실한 마음은 홀로 명랑하여 사물마다를 관조하면서 일정한 방향이 없이 응접한다. 움직였다하면 현상의 사물과 회합하여 모든 사물을 관조한다. 그러므로 모든 대상의 세계를 일제히 관찰하여 빠짐없이 안다. 움직였다하면 사물과 회합하여, 그 때문에 감응하여 회합했다하면 외연의 상황을 잃지 않는다. 외연에 회합하여 그때그때의 상황을 잃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회합할 만한 상황을 가려서 회합하며, 빠짐없이 알기 때문에 반드시 알 수 있는 마음으로 알만한 세계를 안다. 반드시 알만한 세계를 알기 때문에 성인은 부질없이 아는 것은 아니며, 회합할 만한 상황을 가려서 회합하기 때문에 성인은 헛되게 회합하지 않는다. 이처럼 이미 알고 이미 회합하였는데도 성인의 마음은 앎도 없고 회합함도 없다 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만일 성인이 앎을 잊고 회합함을 빠뜨렸다면 이는 성인이 앎과 회합에 사사로움이 없음으로써 자기의 사사로움을 이루었을 뿐이다. 이럴 경우 스스로 자기의 앎을 소유하지 않는다 말할지언정 어떻게 앎이 없을 수 있겠는가.
答曰. 夫聖人功高二儀而不仁. 明逾日月而彌昬. 豈曰木石瞽其懷. 其於無知而已哉. 誠以異於人者神明. 故不可以事相求之耳. 子意欲令聖人不自有其知. 而聖人未嘗不有知. 無乃乖於聖心. 失於文旨者乎. 何者. 經云. 眞般若者. 淸淨如虛空. 無知無見. 無作無緣. 斯則知自無知矣. 豈待返照. 然後無知哉. 若有知性空而稱淨者. 則不辨於惑智. 三毒四倒亦皆淸淨. 有何獨尊於般若. 若以所知美般若. 所知非般若. 所知自常淨. 故般若未嘗淨. 亦無緣致淨歎於般若. 然經云般若淸淨者. 將無以般若體性眞淨. 本無惑取之知. 本無惑取之知. 不可以知名哉. 豈唯無知名無知. 知自無知矣. 是以聖人. 以無知之般若. 照彼無相之眞諦. 眞諦無兎馬之遺. 般若無不窮之鑒. 所以會而不差. 當而無是. 寂怕無知. 而無不知者矣.
답하여 이르되, 성인의 자비하신 공로는 천지보다도 높지만 사랑한다고 여기지 않고, 밝음은 일월을 능가하지만 더욱 어둡다. 어찌 목석처럼 그 마음을 눈멀게 하여 앎이 없는 것으로써 끝날 뿐이겠는가. 실로 성인이 일반 사람들과 다른 점은 신명 때문이다. 그러므로 事相으로써는 찾지 못할 뿐이다. 그대의 의도로는 성인이 스스로 자기의 앎을 뽐내며 소유하지 않을지언정 성인은 미상불 앎이 있다라고 하고 싶어한다. 그대가 이것으로써 옳다고 여긴다면 성인의 마음에 어긋나서 논문의 깊은 뜻을 잃음이 없겠는가. 무엇 때문에 그대가 잘못되었는가하면 경전에서 말하기를 “진실한 반야는 허공처럼 청정하여 앎도 볼 수도 없으며 조작도 반연함도 없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안다해도 자체엔 앎이 없음을 말한다. 어찌 돌이켜 관조하여 단절되어 없기를 기다린 뒤에야 앎이 없겠는가. 만일 반야는 앎이 있다해도 그 자체는 성공이라해서 청정하다라고 말했다 한다면, 이는 二惑과 반야의 智를 분간하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미혹의 번뇌도 성공이기 때문인데, 무엇 때문에 유독 반야만 청정하다 하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삼독과 사전도까지도 모두가 청정하리라. 무엇 때문에 유독 반야에만 홀로 존귀함이 있겠는가. 가령 반야가 알 대상인 진제가 청정하다하여 이로써 반야를 청정하다고 찬미했다고 말한다면, 반야가 알 대상인 진제는 바야의 자체가 아니다. (진제는 관찰할 대상의 세계이며, 반야는 주관적으로 관찰하는 마음이다.) 알 대상인 진제는 자체가 항상 청정하다. 그러므로 반야가 일찍이 청정한 것은 아니다. 만일 진제가 청정했던 반야에 누를 끼쳤다면 진제의 청정 때문에 반야가 청정하다는 찬탄을 이르러 오게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경전에서 말한 “반야가 청정하다”했던 것은 어찌 반야의 자체 성품은 진실청정하여 본래 二惑으로 취하는 앎은 없으며, 이혹으로 취하는 앎이 본래 없다해서 진실한 앎으로서마저 명칭하지 못한다함은 아니였으리라. 어찌 아무것도 모르는 無知로써 반야는 무지라고 말하였겠는가. 알아도 스스로 앎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앎이 없는 반야로써 모습 없는 중도의 진제를 관조하여, 진제는 삼승을 빠뜨림이 없고, 반야는 진제를 끝까지 조감하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관조반야는 회합하여 어긋남이 없고, 일치하여도 이를 옳다고 의식함이 없으며, 실지반야는 고요하게 앎이 없으면서도 모르는 것은 없다.
難曰. 夫物無以自通. 故立名以通物. 物雖非名. 果有可名之物. 當於此名矣. 是以卽名求物. 物不能隱. 而論云. 聖心無知. 又云. 無所不知. 意謂. 無知未嘗知. 知未嘗無知. 斯則名敎之所通. 立言之本意也. 然論者欲一於聖心. 異於文旨. 尋文求實. 未見其當. 何者. 若知得於聖心. 無知無所辨. 若無知得於聖心. 知亦無所辨. 若二都無得. 無所復論哉.
따져보자. 사물은 자체로써 소통하지 못한다. 그 때문에 명칭을 수립하여 사물을 소통한다. 사물은 명칭이 아니긴하나 명칭을 붙일만한 사물이 정말로 있어야만 그러한 명칭에 일치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명칭에 나아가 실체의 사물을 찾아보면 사물이 숨지를 못한다. 그런데도 논문에서 말하기를 “성인의 마음은 앎이 없다”하였고, 다시 “모르는 것이 없다”라고 말하였다. 나의 의도를 말해 보겠다. 반야는 앎이 없다고 말했다면 앎은 아니며, 앎은 무지가 아니다. 이러한 논리는 명분 있는 가르침에서 통용되는 것이며, 논리를 수립하는 근본 의도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논문을 지은 사람은 성인의 마음을 하나의 중도로 만들고 싶어하여 논문을 수립하는 깊은 뜻과는 차이가 났다. 논문을 연구해보고 그 실제 알맹이를 찾아보았더니 그러한 논리의 온당성은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앎이 성인의 마음에 계합했다면 무지는 변론할 필요가 없으며, 무지가 성인의 마음에 일치하였다면 앎 역시 변론할 필요가 없으며, 앎과 무지 이 둘 모두가 성인의 마음에 계합하지 못하였다면 다시 논변할 필요는 없으리라.
答曰. 經云. 般若義者. 無名無說. 非有非無. 非實非虛. 虛不失照. 照不失虛. 斯則無名之法. 故非言所能言也. 言雖不能言. 然非言無以傳. 是以聖人. 終日言而未嘗言也. 今試爲子狂言辨之. 未聖心者. 微妙無相. 不可爲有. 用之彌勤. 不可爲無. 不可爲無. 故聖智存焉. 不可爲有. 故名敎絶焉. 是以言知不爲知. 欲以通其鑑. 不知非不知. 欲以辨其相. 辨相不爲無. 通鑑不爲有. 非有. 故知而無知. 非無. 故無知而知. 是以知卽無知. 無知卽知. 無以言異. 而異於聖心也.
답하여 이르되, 경전에 말하기를 “반야의 의미는 명칭이 없고 설명할 수도 없으며, 실유도 아니고 실무도 아니며, 진실한 알맹이도 아니고 헛되게 부질없는 것도 아니다. 텅 비었지만 관조의 작용을 잃지 않고, 관조의 작용을 하면서도 텅 빈 실지를 잃지 않는다” 라고 하였다. 이러한 반야는 명칭이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언어로써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언어로는 말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언어를 빌리지 않으면 전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성인은 종일 말을 해도 일찍이 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 시험삼아 그대를 위하여 광언으로 이 문제를 논변해 보겠다. 有無의 명칭이 쌍으로 끊긴 성인의 마음은 미묘하여 차별적인 모습이 없으므로 있다하지 못하며, 작용할수록 더욱 부지런히 움직이므로 없다하지도 못한다. 없다 하질 못하기 때문에 성인의 실지는 존재하며, 있다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名敎가 단절되었다. 그러므로 안다 말해도 앎이라 하지 못함은 그 조감하는 작용을 소통시키려함 때문이며, 몰라도 모르는 것이 아니라 한 것은 그 모습을 논변하고 싶어서일 뿐이다. 미혹으로 취하여 앎이 없는 모습을 분별해 보면 아예 없지를 않으며, 조감하는 작용을 소통시켜 보면 있는 것도 아니다. 취할 만한 앎이 있지 않기 때문에 알아도 앎이 없으며, 진실한 앎이 없지 않기 때문에 미혹의 앎이 없이 진실하게 안다. 그러므로 앎이 바로 무지이며, 무지가 즉시 앎이므로 有知·無知의 말이 다르다해서 성인의 마음에 차이는 없는 것이다.
難曰. 夫眞諦深玄. 非智不測. 聖智之能. 在玆而顯. 故經云. 不得般若. 不見眞諦. 諦眞則般若之緣也. 以緣求智. 智則知矣.
물어보자. 진제는 심오하고 현묘하여 반야의 지혜가 아니면 헤아리지 못한다. 성인의 지혜로 관조할 수 있는 작용으로서의 능력이 여기에서 환하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는 말하기를 “반야를 얻지 못하면 진제를 보지 못한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진제는 能緣인 반야로 반연할 所緣이다. 소연의 진제로써 능연인 반야의 지혜를 찾아본다면 반야는 진제를 앎이 있다.
答曰. 以緣求智. 智非知也. 何者. 放光云. 不緣色生識. 是名不見色.又云. 五陰淸淨故. 般若淸淨. 般若卽能知也. 五陰卽所知也. 所知卽緣也. 夫知與所知. 相與而無. 相與而無. 故物莫之有. 相與而有. 故物莫之無. 物莫之無故. 爲緣之所起. 物莫之有故. 則緣所不能生. 緣所不能生. 故照緣而非知. 爲緣之所起. 故知緣相因而生. 是以知與無知. 生於所知矣. 何者. 夫智以知所知. 取相故名知. 眞諦自無相. 眞智何由知. 所以然者. 夫所知非所知. 所知生於知. 所知旣生知. 知亦生所知. 所知旣相生. 相生卽緣法. 緣法故非眞. 非眞. 故非眞諦也. 故中觀云. 物從因緣有. 故不眞. 不從因緣有. 故卽眞. 今眞諦曰眞. 眞則非緣. 眞非緣. 故無物從緣而生也. 故經云. 不見有法無緣而生. 是以眞智觀眞諦. 未嘗取所知. 智不取所知. 此智何由知. 緣智非無知. 但眞諦非所知. 故眞智亦非知. 而子欲以緣求智. 故以智爲知. 緣自非緣. 於何而求知.
답하여 이르되, 그대는 연회로써 반야를 구했으나 반야는 앎이 아니다. 왜냐하면 『방광반야경』에서 말하기를 “색온을 반연하지 않고 나오는 식을 색온을 보지 않음이라 말한다”고 하였고, (연회를 떠나서 아는 것은 연회로써 구하지 못한다 한것이다.) 또 “오음이 청정하기 때문에 반야가 청정하다”라고 하였다. (청정은 空의 다른 이름이다. 오음이 본래 공하였기 때문에 반야도 공하며, 반야가 공하였다면 연회를 떠났으므로 앎이 있지 않다.) 반야는 주관적인 앎이고 오음은 알 객관인데, 알 객관은 바로 연회이다. 주관적으로 아는 마음은 알아야 할 객관의 경계와 서로 함께 동시적으로 의지하여 존재하고, 서로 함께 일시에 없다. 서로 함께 없기 때문에 주관인 마음과 객관의 진실한 경계는 실제의 모습이 있을 수가 없으며, 서로 함께 있기 때문에 마음과 경계는 정말로 없을 수가 없다. 마음과 경계가 없을 수 없기 때문에 허망한 외연을 따라서 주관·객관이 일어나며, 마음과 경계는 정말로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외연의 경계가 주관인 마음을 내게하지 못한다. 외연을 의지하여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에 주관적인 앎과 객관의 외연이 서로 의지해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허망한 앎과 眞知인 無知는 진실과 허망에 동시에 통하는 알 경계(所知境)에서 나온다. 무엇 때문에 망지와 진지는 동시에 진·망에 통하는 소지경에서 나올까. 진실한 지혜가 주관적인 앎과 알 객관의 경계 때문에 대상의 모습을 취하였다. 그러므로 망지라고 말한다. 진제는 본래 취할 만한 모습이 없다. 진실한 지혜가 무엇을 따라서 진제의 모습을 알겠는가. 진지와 망지가 각각 있게 된 까닭은 알아야 할 허망한 소지경의 경계는 본래 공하기 때문에 본래 알 대상이 아니다. 허망한 소지경은 허망한 앎에서 나오며, 허망한 소지경이 허망한 앎을 내면 허망한 앎이 상대적으로 허망한 소지경을 낸다. 허망한 소지경과 허망으로 아는 마음이 상대적으로 발생했다면 상대적으로 발생한 것은 인연법이다. 인연으로 발생한 법이기 때문에 진실이 아닌 假有이며, 진실이 아닌 가유이기 때문에 진제는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중관론』에서 말하기를, “사물은 인연을 따라 있기 때문에 진실하게 있지 않으며, 인연을 따라 있지 않기 때문에 바로 진실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진제를 진실이라고 말했다면 진실은 허망한 인연을 빌려서 나오지 않는다. 진제는 허망한 인연을 빌려서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인연이 아닌 진제로부터 반야의 앎이 나올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기를, “인연이 아닌데서 발생하여 있는 법은 보지 못한다” 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한 반야로 중도의 진제를 관조하며 소지경인 진제를 취하진 않는다. 진실한 반야가 소지경인 진제의 모습을 취하지 않는데 이 반야가 무엇을 따라서 알겠는가. 그러나 반야가 소지경을 앎은 없으나, 단지 진제는 소지경이 아닐 뿐이며, 그러므로 진실한 반야도 앎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대는 허망한 인연법으로써 반야를 찾으려 하였다. 그 때문에 실지반야로써 안다 하였으나, 인연은 본래 인연이 아닌 진제가 아닌데 어디에서 앎을 구하겠는가.
難曰. 論云不取者. 爲無知故不取. 爲知然後不取耶. 若無知故不取. 聖人則冥若夜游. 不辨緇素之異耶. 若知然後不取. 知則異於不取矣.
따져보자. 논문에서 말하기를 “소지경을 취하지 않는 것은 소지경을 취하는 허망한 앎이 없는 무지이기 때문에 소지경을 취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소지경이 인연법의 허망임을 안 뒤에 취하지 않는 것인가. 만일 소지경을 앎이 없기 때문에 취하지 않았다면 성인은 어둡기가 깜깜한 밤에 거니는 것처럼 흑백의 다름을 분별하지 못하리라. 만일 소경이 인연법의 허망임을 안 뒤에 취하지 않는다면 허망임을 아는 것은 취하지 않는 것과는 다르리라.
答曰. 非無知故不取. 又非知然後不取. 知卽不取. 故能不取而知.
답하여 이르되, 백지처럼 어리석게 앎이 없는 무지이기 때문에 소지경을 취하지 않는 것은 아니며, 소지경이 허망임을 안 뒤에 취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관조의 앎이 바로 취하지 않음이다. 그러므로 소지경의 상대적인 모습을 취하지 않고도 홀로 진실하게 아는 것이다.
難曰. 論云不取者. 誠以聖心不物於物. 故無惑取也. 無取則無是. 無是則無當. 誰當聖心. 而云聖心無所不知耶.
따져보자. 논문에서 말하기를 “소지경의 모습을 취하지 않는 것은 진실로 성인의 마음은 소지경의 진제를 사물의 모습으로 집착하여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혹으로 소지경을 취함은 없다”라고 말하였다. 미혹의 마음으로 소지경을 취함이 없다면 취하지 않음을 옳다고 긍정하는 의식도 없을 것이며, 옳다고 긍정하는 의식이 없다면 마음이 소지경의 진제에 일치함도 없으리라. 그렇다면 뉘라서 성인의 마음에 해당하겠는가. 그런데도 “성인의 마음은 모르는 것이 없다”라고 말하겠는가.
答曰. 然. 無是無當者. 夫無當則物無不當. 無是則物無不是. 物無不是. 故是而無是. 物無不當. 故當而無當. 故經云. 盡見諸法. 而無所見.
답하여 이르되, 그대가 따진 주관적이 긍정도 없고, 일치한 객관도 없다 한 말이 옳긴 하나, 성인의 마음이 일정한 소지경의 모습에 일치함이 없다면 일치하지 않음이 없으며, 대상을 옳다고 인가하면서 주관적으로 취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물마다 옳지 않음이 없다. 사물마다 옳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옳다해도 따로 옳음이 없으며, 객관의 사물마다 주관에 일치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주관인 마음에 소지경이 일치한다해도 따로 일치함은 없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말하기를, “모든 법을 끝까지 다 본다해도 볼 대상이 없다”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難曰. 聖心非不能是. 誠以無是可是. 雖無是可是. 故當是於無是矣. 是以經云. 眞諦無相. 故般若無知者. 誠以般若無有有相之知. 若以無相爲無相. 有何累於眞諦耶.
따져보자. 성인의 마음은 주관적으로 옳다고 긍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옳게 여김이 없는 것으로써 옳게 여긴다. 옳게 여김이 없는 것이 옳게 긍정함이기는 하다고 인정해 주자. 그러므로 옳게 여김이 없는 것을 옳게 여기고 거기에 일치하게 된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기를, “진제는 모습이 없기 때문에 반야는 앎이 없다”라고 하였다. 이는 실로 반야는 허망한 有相을 앎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無相으로써 반야의 무상을 삼는다면 무상인 반야에 무슨 누를 끼침이 있겠는가.
答曰. 聖人無無相也. 何者. 若以無相爲無相. 無相卽爲相. 捨有而之無. 譬喩逃峰而赴壑. 俱不免於患矣. 是以至人. 處有而不有. 居無而不無. 雖不取於有無. 然亦不捨於有無. 所以和光塵勞. 周旋五趣. 寂然而往. 怕爾而來. 恬淡無爲. 而無不爲.
답하여 이르되, 성인은 무상까지도 없다. 무의 모습까지도 무엇 때문에 부정되는가. 무상이라고 알고 집착하는 모습이 바로 유상이 된다. 유상을 버리고 무상으로 가는 것을 비유해 보면 높은 산봉우리를 피하여 바다로 들어가는 것과 같아 양쪽 모두가 환란을 면치 못한다. 그러므로 至人(성인)은 유에 처하여도 유에 집착하지 않고, 무에 거처해도 무에 집착하여 안주하지 않는다. 有無를 취하여 집착하지 않지만 그러나 有無를 버리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塵勞의 세계에서 마음의 광채를 조화시키고, 오취의 세계를 두루 돈다. 그리하여 고요하게 가고, 담박하게 와, 편안하고 담담하여 작위가 없으면서도 작위하지 않음이 없다.
難曰. 聖心雖無知. 然其應會之道不差. 是以可應者應之. 不可應者存之. 然則聖心. 有時而生. 有時而滅. 可得然乎.
따져 보겠다. 성인의 마음은 허망을 취하는 앎이 없긴 하나 그러나 외연에 감응하여 상황에 회합하는 방편의 도는 어긋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감응해 줄 만한 상황에 감응을 해주고, 감응해서 안 될 것은 있는 그대로 둔다. 이와 같다면 성인의 마음은 때로는 발생해 나오고 때로는 사라짐도 있다. 이와 같다 할 수 있겠는가.
答曰. 生滅者. 生滅心也. 聖人無心. 生滅焉起. 然非無心. 但是無心心耳. 又非不應. 但是不應應耳. 是以聖人應會之道. 則信若四時之質. 直以虛無爲體. 斯不可得而生. 不可得而滅也.
답하여 이르되, 생멸하는 것은 생멸하는 마음이다. 성인은 심의식이 없는데 생멸이 어디에서 일어나겠는가. 그러나 무정물인 목석처럼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생멸하는 심의식으로써 마음을 삼음이 없을 뿐이며, 또 대상에 감응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감응하지 않음으로써 감응할 뿐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방편인 관조반야로 외연에 감응하여 회합하는 도는 춘하추동 사시절이 무심하게 어김없이 운행하는 실제처럼 확실하다. (質은 실제의 의미이다.) 곧장 경지가 고요하고 번뇌가 사라진 허무로써 자체를 삼을 뿐이다. 이는 발생한다 하지 못하고 사라진다 하지도 못한다.
難曰. 聖智之無. 惑智之無. 俱無生滅. 何以異之.
따져 보자. 성지가 없고 혹지도 없어 근본실지인 성지와 後得權智(관조반야)인 혹지가 모두 생멸이 없다면 무엇으로써 이를 다르다고 하겠는가.
答曰. 聖智之無者無知. 惑智之無者知無. 其無雖同. 所以無者異也. 何者. 夫聖心虛靜. 無知可無. 可曰無知. 非謂知無. 惑智有知. 故有知可無. 可謂知無. 非曰無知也. 無知. 卽般若之無也. 知無. 卽眞諦之無也. 是以般若之與眞諦. 言用卽同而異. 言寂卽異而同. 同故無心於彼此. 異故不失於照功. 是以辨同者同於異. 辨異者異於同. 斯則不可得而異. 不可得而同也. 何者. 內有獨鑒之用. 外有萬法之實. 萬法雖實. 然非照不得. 內外相與. 以成其照功. 此則聖所不能同. 用也. 內雖照而無知. 外雖實而無相. 內外寂然. 相與俱無. 此則聖所不能異. 寂也. 是以經云. 諸法不異者. 豈曰續凫截鶴. 夷嶽盈壑. 然後無異哉. 誠以不異於異. 故雖異而不異也. 故經云. 甚奇世尊. 於無異法中. 而說諸法異. 又云. 般若與說法. 亦不一相. 亦不異相. 信矣.
답하여 이르되, 성지가 없다 함은 앎이 없다 함이고, 혹지가 없다는 것은 허망한 앎이 본래 없다 함이다. 이 둘이 없음은 동일하나 없는 원인은 다르다. 무엇 때문에 이 둘이 동일하지 않겠는가. 성인의 마음은 번뇌가 텅 비고 고요하여 무지를 알 만한 것도 없으므로 無知라는 말은 가능하나 미혹이 없음을 관조하여 안다함을 말한 것은 아니다. 혹지는 관조의 작용으로 앎이 있다. 그 때문에 허망의 미혹이 본래 없음을 앎이 있다. 이는 허망한 미혹이 본래 없음을 照破하여 안다는 말은 가능해도 성지의 무지를 말함은 아니다. 성지의 무지는 반야의 무지이며, 혹지의 知無는 진제의 무지이다. 그러므로 반야와 진제는 혹지의 작용을 말한다면, 성지의 고요함과 동일하면서 다르고, 성지의 고요함을 말한다면 혹지의 다름에 나아가 동일하다. 고요함은 혹지의 다름에 나아가 동일하기 때문에 피차에 무심하며, 작용은 성지의 고요함에 나아가 다르기 때문에 관조하는 공능을 잃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지의 고요한 측면에서 분별하면 작용의 다름에 나아가서 동일하며, 혹지의 작용이 다른 측면에서 분별하면 동일한 성지의 고요함에서 관조의 작용이 다르다. 이는 성지의 고요함과 혹지의 작용을 다르다 하지 못하고 동일하다하지도 못한다. 무엇 때문에 고요함과 작용을 동이로써 명칭하지 못하는가. 성지의 고요함 안엔 절대 홀로 작용하며 조감하는 밝음이 있고, 밖으로는 만법의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밖으로 있는 만법이 진실이긴 하나 관조의 작용이 아니면 그 실제를 얻지 못한다. 안으로는 성지의 마음과 밖으로는 진실인 만법의 경계가 서로 함께하면서 관조의 공능을 성취한다. 이는 성지의 고요함이 관조의 작용과 동일하지 못함이니 작용이며, 안으로는 만법의 진실을 관조하는 작용으로서의 공능이 있긴 하나 앎이 없다. 밖으로의 만법이 진실이긴 하나 진실은 모습이 없다. 내적으로 성지와 외적으로 만법의 진실이 고요하여 이 둘이 서로 함께 없다. 이는 성지의 고요함이 관조의 작용과 다르지 못한 것이니, 고요함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기를 “모든 작용하는 차별적인 법이 실상반야의 고요함과 다르지 않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는 어찌 학의 긴 다리를 절단하여 짧은 오리 다리에 잇고, 산악을 깎아서 골짜기를 메운 뒤에야 다름이 없음을 말하였겠는가. (인위적인 조작을 의지한 뒤에 일제히 공평함은 아니다) 고요의 동일함이 작용의 다름에서도 다르지 않기 때문에 작용이 다르다해서 고요의 동일함마저 다르진 않다. (경계가 다르다해서 그 마음마저 다르지 않다) 그 때문에 경에서 말하기를, “매우 기이하십니다. 세존이시여. 다름이 없는 실제법 가운데서 모든 법의 다름을 설명하시는군요”라고 하였던 것이다. 또 말하기를, “반야와 모든 법은 하나의 모습도 아니고, 다른 모습도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확신할 만하다 하겠다.
難曰. 論云. 言用則異. 言寂則同. 未詳. 般若之內. 則有用寂之異乎.
따져보자. 논문에서는 말하기를, “작용을 말하면 고요와 다르고, 고요를 말하면 작용과 동일하다”라고 하였는데, 자세히 모르겠다. 반야의 안에 고요와 작용의 다름이 있는지를.
答曰. 寂卽用. 用卽寂. 用寂體一. 同出而異名. 更無無用之寂. 而主於用也. 是以智彌昧. 照逾明. 神彌靜. 應逾動. 豈曰明昧動靜之異哉. 故成具云. 不爲而過爲. 寶積曰. 無心無識. 無不覺知. 斯則窮神盡智. 極象外之談也. 卽之明文. 聖心可知矣.
그에 대해 답변하겠다. 작용의 다름이 바로 고요의 동일함이며, 고요가 바로 작용과 상즉관계이다. 작용과 고요는 동일한 근원에서 나왔으나 명칭이 다르다. 작용 없는 고요함이 따로 작용의 주체가 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성지가 고요히 어두울수록 관조의 작용은 더욱 밝아지고, 신령한 관조반야가 실지에서 고요할수록 감응의 작용은 더욱 움직인다. 어찌 작용하면 밝고 고요하면 어두움이 다르다고 말하겠는가. 그러므로 『성구경』에서 말하기를, “작위하지 않으면서 지나치게 작위한다”하였고, 『보적경』에서 말하기를 “사량분별하는 심의식이 없지만 깨달아 알지 않음이 없다. ”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는 신령한 관조반야의 작용으로써 사물의 진실을 끝까지 조감하여 실지반야로써 진여의 이치를 극진히 관조한 事象밖으로 극치에 이른 담론인 것이다. 이러한 이치로써 나아가 논문의 종지를 밝힌다면 성인의 마음을 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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