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없는 가르침

<[불교에서] 가명(假名)의 역할>

수선님 2023. 12. 17. 13:05

<[불교에서] 가명(假名)의 역할>

 

모든 현상은 여러 인연의 일시적인 화합에 지나지 않으므로 거기에 불변하는 실체가 있을 리 없고 다만 이름만 있을 뿐이다. 그 이름조차 본디 이름이 없는 현상에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이름을 갖다 붙인 것이므로 가명(假名)이라 한다. 모든 법은 인연이 화합해 되는 것이고, 진실한 실체가 없으므로 거짓 이름을 빌려서 구별하는 것이다.

모든 법은 본래 이름이 없는데, 사람들이 이름을 지어 붙여서 구별(區別-差別)을 하는 것이므로 온갖 이름이 모두 거짓 이름이다. , 모든 현상에는 본디 차별이 없지만 경계를 지어 임시로 각각 이름을 붙여 차별하는 모든 차별 현상을 일으키니, 그 임시 이름이야말로 가명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모든 법을 거짓 이름[가명]’이라 한다. 불교 교의에서는 이 가명(假名)’이라는 말이 많은 작용을 하므로 자주 등장하는지라, 이에 대한 규명이 확실해야 한다.

이름뿐인 것, 실체가 아닌,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같은 것,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에 매달린다. 이름뿐만이 아니라 문자나 언설도 마찬가지 가()이다. 아니 사실은 온 우주가 다 가명(假名)과 가상(假相)으로 이루어져 있다. ? 모든 사물(事物)과 사상(事象)이 일시적 화합에 의해 연기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그렇다.

따라서 모든 사물(事物)은 실체(實體)는 없고 다만 인연에 따라 성립되고 있을 뿐이므로,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는 것임을 가리키는 용어가 ()’이다. 따라서 '()'란 잠정적이고 가변적이라는 뜻이며, 아무것도 없다는 뜻은 아니다.

나가르주나(Nāgārjuna, 龍樹, 150?-250?)는 그의 저서 <중론(中論)>에서 「막 생긴 것, 즉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들을 공()이라 한다. 또 그것을 가명(假名)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또 중도(中道)라는 뜻이다.」라고 했다.

그리하여 나가르주나는 이 구절을 바탕으로 그의 삼제게(三諦偈)를 설했고, 중국의 천태(天台) 지의(智顗, 538~597) 대사는 나가르주나의 삼제게(三諦偈)를 바탕으로 해서 공()⋅가()⋅중() 삼제론(三諦論)을 내세웠다.

나가르주나의 <중론>에서 삼제게(三諦偈)를 보자.

「인연으로 생겨난[衆因緣生] 모든 것을 공[, sunyata]이라 말한다. 그것은 임시로 시설된 가명[假名, prajnapti]으로 이것은 또한 중도[中道, madhyama pratipat]이다.

어떤 존재도 인연으로 생겨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어떠한 존재도 공하지 않은 것이 없다. 공한 것이니 이름뿐이다. 그러니 그 이름이 가명일 수밖에 없다.

연기(緣起)이므로 [자성이] 공한 것이고, 자성이 공하므로 사물은 연기적으로 성립한다. 따라서 공과 연기는 동일한 사태를 달리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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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염불론>으로 유명한 청나라 말기 담허(倓虛, 1875~1963) 대사의 법문이다.

『어디에 또 가 있겠는가? 일곱 가지 인연이 모여서 를 형성했지만 사실상 더러운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 속에는 비린내 나는 더러운 물건들이 담겨져 있다. 지금 이 법문을 하는 이때, 어떤 사람이 가죽으로 된 자루에 똥을 가득 담고 꽁꽁 묶어서 이 법당에 들여 놓는다면, 우리는 더럽다고 코를 잡고 멀리 피할 것이다. 혹은 재빨리 이 자루를 법당 밖으로 멀리 버릴 것이다.

하지만 사실 우리들은 누구나 다 이 똥자루와 같다. 우리의 이 자루는 진짜 가죽자루에 똥을 담은 것보다 결코 깨끗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 자루는 아가리를 묶어 놓았지만 사람들의 이 자루는 아래위로 입을 벌리고 있으며, 더러운 냄새를 풍기고 아홉 구멍으로는 항상 부정한 것들이 흐르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더러운 가죽자루를 라고 집착하고 아끼고 또 아낀다. 이렇게 화장도 하고, 저렇게 보양(保養)도 한다. 부처님의 눈으로 봤을 땐 어리석기 짝이 없다. 우리가 ''라고 생각하는 이 몸은 가 아니라 내가 사용하고 있는 하나의 물건이며, () 밑에 적()이란 글을 붙여 나의 것이라 불러야 한다.

왜냐하면 이 몸은 나의 일부분이며, 마치 나의 물건과 같아 내가 사용하고자 할 때 사용하고, 사용하지 않을 땐 놓아버리고, 폐가 되지 않아야 한다. 만약 내려놓지 못한다면 육신의 폐를 입게 될 것이다. 보통 사람들의 습관은 이 몸을 라고 여기고, 나 밖은 사람(-)이며, 많은 사람이 모여서 중생이 된다. 모든 중생들이 오래 살고자하는 생각은 이어져 끊이지 않는데, 이것이 수자(壽者-생멸체, 목숨)이다. 사실 이런 것들은 모두 가명(假名)과 가상(假相)이다.

예컨대 사람(-)과 나는() 상대가(相對假)이다(대립법-남이 있으므로 내가 있고, 내가 있으므로 남이 있다). 중생은 인성가(因成假-잠시 여러 인연을 빌어 이루어졌기 때문)이고, 수자(壽者)는 상속가(相續假-아ㆍ인()ㆍ중생이 이어져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떠나면 어디에 또 가 있겠는가.

하물며 나()란 주재(主宰)라는 뜻인데, 사람들의 이 색신(色身)는 자신의 뜻대로 할 수가 없다. 예를 들면, 사람이 배가 고플 땐 음식을 먹지 않으면 안 되고, 갈증이 날 땐 물을 마시지 않으면 안 된다. 목숨이 다하면 죽지 않으려야 안 죽을 수 없고, 예쁜걸 보면 보지 않으면 안 되고, 오욕(五慾)의 경계를 만나면 향수(享受) 않으면 안 된다. 이는 벌써 주재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다.

특히 이런 먹고 마시고 향수(享受)는 생명에 속하는 일인데, 생명은 생멸이 있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이 생명 밖에 또 하나의 혜명(慧命)이 있는데, 그것은 영원히 생멸이 없는 것이다. 무엇이 생멸이 없는 혜명인가? 바로 사람마다 본래 갖고 있는 지각성(知覺性)을 말한다. 이 지각성은 비록 형상이 없지만, 진허공 편법계(盡虛空 遍法界)에 없는 곳이 없고, 아닌 곳이 없다. 이른바 허공은 큰 깨달음 가운데 생겨 바다의 한 방울과 같다.”

염불은 곧 자신의 법신 혜명을 키우는 것이며, 부처님의 힘과 자력의 힘에 의지해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을 구하는 것이며,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열고 자신의 본각(本覺)을 회복하는 것이다.

연기법(緣起法)은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

고⋅집⋅멸⋅도 사성제(四聖諦)도 역시 이 연기법에 속한다.

고성제는 결과이며, 집성제는 원인이다. 멸성제는 결과이며, 도성제는 원인이다. 집성제로 인해 고성제가 있으며, 도성제로 인해 멸성제가 있다. 이렇듯 인과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연기법(緣起法)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른 조건()으로 인해 생겨난다()는 말이다.

이것이 있음으로 인해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음으로 인해 저것이 사라진다.

이것은 원인이며, 저것은 결과다.

그래서 이 원인과 결과가 바로 인과[因果]이며, 연기법의 첫 번 째 측면이다.

현명한 사람들은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 원인을 찾아내려고 애쓴다. 원인을 알면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의 실험 역시 이 인과이다.

그러므로 악행을 하면 괴로움이라는 과보를 받고, 선행을 하면 즐거움이라는 과보를 받게 된다. 이렇듯 인과법은 연기법에서 생겨난 것이다.

중생들이 이 인과(因果)의 법칙을 믿지 않고 악하게 사는 이유는 어떤 행위를 했을 때 그 과보[]가 즉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과보[]는 어떤 행위를 하자마자 그 즉시 나타날 수가 없다. 마치 어린 사과나무 묘목을 심자마자 사과 열매가 맺히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건만, 중생들이 이 사실을 어찌 알겠는가.

그래서 중생들은 인과법을 몰라 이런 바보 같은 말을 많이 한다.

영악해야 잘 산다.” “너무 착하기만 하면 천덕꾸러기가 된다.”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있음으로 인해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음으로 인해 저것이 사라진다.

연기법(緣起法)의 두 번 째 측면은 공()이다.

저것이 생겨나는 이유는 이것이 있음이 원인이다. 제 스스로 생겨난 게 아니다. 다른 것에 의존해서 생겨났기에 그 자체엔 내재된 자성[실체]이 없다. 그래서 가(), 그래서 공()한 것이다. 다른 것에 의존해서 생겨난 것이기에 실체가 없다.

그런데 모든 것은 다른 것에 의해 생겨났기에 그 자체엔 내재된 실체가 없어서 모든 게 다 공()하다.

​내 몸을 살펴보자.

내 몸은 몸 스스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부모의 정자와 난자의 결합, 그리고 오랜 이전부터 면면히 흘러오던 의식의 결합으로 생겨난 것이다. 이렇듯 다른 것에 의존해서 생겨난 몸이기에 실체가 있을 수 없다. ()란 것이다.

몸에 실체가 없으니 변화한다. 계속 변화돼간다. 그래서 늙고 싶지 않아도 늙고, 병들고 싶지 않아도 병들고, 코로나에 걸리고 싶지 않아도 코로나에 걸린다.

왜 이렇게 다른 것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을까? 실체가 없어서 그렇다.

지금 이런 저런 생각하고 있는 내 마음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인과(因果)에 의해 작동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 역시 실체가 없어 텅 비어있다.

이렇듯, 연기법(緣起法)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는 인과(因果)이며, 둘째는 공()이다.

인과(因果)는 드러난 현실적인 측면이며, ()은 숨겨진 본질적인 측면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설법 역시 본질적인 측면과 현실적인 측면의 두 가지 측면이 있다. 그게 바로 세간법과 출세간법이다. 세간법(世間法)은 현실적인 측면이며, 출세간법(出世間法)은 본질적인 측면이다.

세간법은 속제요, 출세간법은 진제이다. 진제(眞諦)⋅승의제(勝義諦)⋅제일의제(第一義諦). 다 같은 말이며, 이것이 바로 출세간법, 즉 도()이다.

불경을 볼 때는, 반드시 이 두 부분이 있음을 알고 그걸 구분해낼 줄 알아야 한다. 이걸 구분해내지 못하고 불경을 보면, 특히 진제 부분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본질적인 측면과 현실적인 측면이 있기에, 번뇌의 발생 원인도 역시 부처님께서는 두 가지를 말씀하셨다. , 무명과 갈애이다.

무명(無明)은 본질적인 원인이요, 갈애(渴愛)는 현실적인 원인이다. 그래서 번뇌를 완전히 소멸시키려면 무명을 없애야 한다.

또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에도 진제와 속제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진제(眞諦)는 절대적이고 본질적인 진리요, 속제(俗諦)는 상대적인 진리이다.

무상⋅고⋅무아는 속제요, ()⋅무상(無相)⋅무원[無願, 무작(無作)]은 진제이다. 그러므로 속제를 깨달아서 해탈하는 게 아니고, 진제를 깨달아야 해탈한다. 진제가 곧 도()라서 그렇다.

연기법(緣起法)의 세번째 측면은 가명(假名)이다.​​

생겨난 모든 것들은 인연화합, 즉 연기적으로 발생된 것이라, 그 자체엔 실체[자성]이 없어서 공한 것이다. 중생들은 그 실체 없어 공한 것들에 이름을 붙여놓고 서로 호칭하며 부른다. 그러니 그 이름에 무슨 진실이 있겠나, 실체 없는 공한 대상에 이름을 붙여놨기에 거짓 명칭, 즉 가명(假名)이다. 모든 이름들은 다 거짓이다. 가짜다.

, 자아, 영혼, , 우리, 우주, 생명, , 귀신, 악마, 악귀, 천사, 창조주, 하느님, 옥황상제, 짐승, 자동차, 우주선, 외계인, 아수라, 짝사랑, 연애, 영원한 사랑, 천국,

이런 것들도 다 가짜 이름[假名]일 뿐이다.

사성제, 팔정도, 연기법, 무아, , 사랑, 진실, 지혜, 반야바라밀, 자비, 등… 이런 것들도 다 그저 말이요, 이름일 뿐이다. 사람들이 그렇게 이름 붙여놓은 것이다. 말과 언어, 이름에 뭔 실체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가명(假名)이다. 중생들은 이 말과 언어, 이름에 속고 있다.

이름이 진짜인줄 알고 있다. 그래서 어른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고, 거기에 또 가짜 이름, ()나 호()를 만들어 부르고 있다.

모든 말과 언어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물론 달도 실체가 없어 공한 것이다. 그러니 그 손가락도 당연히 거짓이요, 가짜이다. 그러나 가짜임을 알게 하기 위해 손가락을 들어 달을 가리켜 줘야 한다. 이런 게 허무한 우리들의 언어의 쓰임새이다.

 

중국 수나라시대 천태대사(天台大師) 지의(智顗, 538~597)는 이를 어렵게 공⋅가⋅중(空假中)의 원리, 삼관법(三觀法)이라 말했다.

모든 현상에는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공(), 모든 현상은 여러 인연의 일시적인 화합으로 존재한다는 가(), ― 여기서 가는 차별상을 말한다. 그리고 공()이나 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것을 중()이라 하고, 이 셋을 공ㆍ가ㆍ중 3(三諦)라 하며, 이 진리를 관찰함을 공가중 3(三觀)이라고 했다.

파도가 바다를 떠나서 존재하지 못하듯 공()ㆍ가()ㆍ중()은 하나이면서 동시에 셋이다. 이것이 공ㆍ가ㆍ중의 원리이다. ()는 차별관, ()은 평등관, ()은 통일관을 말한다.

<반야경>에 공 또한 공한 것이라 가르치니, 그 공이란 무엇인가. 그 때의 공은 가 시설(假施設)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실상은 공이다. 실상은 연기하므로 고정된 실체성이 비어 있는 공이 맞지만 그 실상에 대해 잠정적으로 일시적으로 이름을 붙여놓았다. 이때의 실상은 가 시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실상이 공이라고 했듯이 모든 것이 공한 것인데, 그 공을 붙잡고있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위이다. 그런 것을 공병(空病)이라 한다.

※가 시설(假施設, prajnapti)---방편시설(方便施設, 임시로 세운 이론)을 말한다.

공이라고 하는 것은 철저하게 부정의 방식이지만 가 시설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있긴 있다는 긍정이다. 그렇다면 진짜 실상은 무엇일까. 중관학파에서는 진짜 실상은 중도밖에 없다고 말한다. 중도란 부정도 아니고 긍정도 아니다. 이렇게 언어의 표현을 넘어선 궁극적 입장을 공(진제)이라 하고, ‘가 시설된 방편의 입장을 가(속제)라 하며, 이 두 가지 진리를 포괄해 유무 양변을 떠난 것을 중(중도)이라 한다. 이것이 중론(中論)이라고 명명한 요인이다.

이 공ㆍ가ㆍ중(空假中)을 중관학파에서는 세 가지 진리라 해 3제라 하는데, 대등한입장으로 본다.

• 공제(空諦) - 삼라만상은 공무(空無)해서 한 물건도 실재하는 것이 없다.

• 가제(假諦) - 한 물건도 실재한 것이 아니지만, 모든 현상은 뚜렷하게 있다.

• 중제(中諦) - 모든 법은 공도 아니고, ()도 아니며 또 공이면서 유, 유이면서 공이다.

 

그리고 3(),

• 공제(空諦)를 관하는 것을 공관(空觀),

• 가제(假諦)를 관하는 것을 가관(假觀),

• 중제(中諦)를 관하는 것을 중관(中觀)이라 한다.

대개 3제는 관()할 바 이치에 대해 말하고, 3관은 관하는 지혜에 대해 말한다.

인간은 유일하게 반성적 사유가 가능한 생물의 종이다. 따라서 인간은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을 수 있는 존재이다. 또한 이는 불성(佛性)의 자각 곧 해탈에 이르는 출발점이기도 한다. 이러한 반성적 사유에 의해 우주의 모든 사물을 면밀히 고찰해 보면, 그 크기가 아주 작은 양성자나 중성자에서부터 대단히 큰 천체에 이르기까지 거기엔 불변하는 고정된 실체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자성(自性)을 가지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오직 연기(緣起)에 의해 서로 상의상관(相依相關) 관계로 존재할 뿐이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으므로 제법무아(諸法無我)이고,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한다.

그렇다고 색이 변화해 공이 되고, 공이 변화해 색이 되는 관계는 아니다. ,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이란 시간이 경과하면 색이 변해 공이 되고 공이 변해 색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색과 공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색이 바로 공이고 공이 바로 색이라는 것이다. 공이란 색이 있는 바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이지 색이 있는 자리를 떠나서 따로 공이 존재하지 않고, 색 역시 공을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니다.

현대물리학의 상대론적 양자역학이 이해하는 진공(眞空)의 개념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완벽하게 차 있는 상태를 이르는 것이다. 20세기 초 영국의 물리학자 폴 디락(Paul A M Dirac)은 진공이 실제로 텅 빈 것이 아니라 아주 약한 에너지(Zero-point energy)로 채워져 있고, 이 에너지에 의해 입자와 반입자가 끊임없이 만들어졌다 사라졌다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최근 한국의 연구진이 이 사실을 영상으로 형상화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므로 공의 자리가 바로 색의 세계이며, 색의 그 자리가 바로 공의 세계이다. 따라서 색과 공은 분리해 낼 수 있는 두 세계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일 수밖에 없는 세계이다.

이와 같이 색은 곧 가()라 하고, 일체 모든 사물은 오직 무아(無我)여서 자성(自性)이 없으므로 공()이라고 하며, 또한 그 둘의 양변을 떠나면서 그 양변을 포용해 중()이라고 한다. 공ㆍ가ㆍ중 그것은 하나이면서 동시에 셋이다. 그러므로 가라 하면 공과 중이 따라 오고, 공이라 하면 가와 중이 따라 오며, 중이라 하면 가와 공이 따라 온다. 이렇듯 공과 가와 중이 거칠 것이 없이 원융무애 하니 이를 일러 공ㆍ가ㆍ중 삼제원융(空假中三諦圓融)이라 한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들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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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불교에서] 가명(假名)의 역할>|작성자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