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없는 가르침

십이연기법(十二緣起法) 해석

수선님 2023. 5. 28. 13:36

십이연기법(十二緣起法)

 

 

불교는 자각의 종교·실천의 종교·인격완성의 종교 등 여러가지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답니다.

이처럼 다양하게 설명할 수 있도록 할수 있는 것은 바로 각(覺), 즉 깨달음이라는 것이 신행의 출발이자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인생관, 세계관, 우주관 등에 대한 물음의 의혹으로 부터 온전한 이해와 체현에 의해 일체 번뇌와 고통으로부터 대자유스러움의 해탈 열반을 성취할 수 있기에 그러합니다.

그러기에 모든 일체 삼라만상에 대한 문제에 대해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인 실상(實相)을 반듯하게 보고 그것과 자신과 동일화를 이루어 여여부동한 삶을 성취하신 분을 대각자라고 하시며 붇다(Buddha)라고 하는 이유도 깨달음을 성취하시었기에 존칭으로서 성호(聖號)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깨달음의 본질과 내용은 과연 어떠한 것인가가 무척 궁금합니다.

이것을 설명하기란 직접 깨달음을 이루지 않고서는 불가능 합니다. 하지만 진리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에 의해 진리의 성격과 내용 등을 표현해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대각을 성취하신 깨달음의 내용을 설명하여 주신 것이 곧 십이 인연법(十二 因緣法)인 것입니다.

십이 인연법은 12가지의 흐름을 인연의 관계성으로 나열하고 인간의 생사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과 생사가 있게 된 원인을 12가지 인연의 연기법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즉 ①무명 ②행 ③식 ④명색 ⑤육입 ⑥촉 ⑦수 ⑧애 ⑨취 ⑩유 ⑪생 ⑫노사 입니다.

이와 같이 십이 인연법은 12가지로 나열되어 있으면서 상호 의존관계성을 띄고 있는 만큼 쉽게 이해와 깨침을 얻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갖고 십이 연기법을 바르게 이해하고 생활에 응용시켜 나간다면 분명히 지혜로운 삶이 이루어져 무한한 복덕과 지혜로서의 최상의 즐거움 삶을 영위할 것입니다. 이에 따라 십이 연기법의 순관 순서에 의해 무명(無明)부터 살펴보고자 합니다.

 

①무명

 

 

무명(無明)은 십이 연기법 가운데에서 처음 시작되는 곳입니다.

그렇다고 무명이 어떤 실체가 있어서 출발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음 단계가 있게 되는 근본원인으로서의 출발이라는 점 입니다.

이점을 오인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무명은 밝음이 없다는 뜻을 담고 있는데 뜻의 내용으로는 삼세를 알지 못하고, 현상과 본체 인과도리(因果道理), 응보, 3보, 괴로움의 원인 등 일체 존재하는 사물·사건 등의 원인과 결과 내용·본질에 있어 그 진실을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우주가 어떻게 생겼는가 자신은 어떻게 태어나고 또 태어나기 이전에는 어디에 있었는가. 또 죽음 이후에는 어디로 가는가 눈앞에 펼쳐진 현상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자연과 인생에 대한 의혹의 문제에 대해 명확히 그 원인을 알지 못하고 또한 불·법·승 3보의 진리성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해 무명은 일체법에 대한 앎의 없음을 기인하여 발생하는 번뇌의 근원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무명은 인간 삶에 또다른 원인을  낳아 알지 못하는 것으로부터 행동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명을 망집무명 미진무명으로 설명하여 애당초 진리에 미혹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소유와 탐착에 의해 집착되어 미혹심을 일으키는 근원이 되는 출발점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② 행(行;Samskara

 


행(行)은 십이연기법 가운데에서 두 번 째 해당하는 위치로 무명(無明)에 연(緣)하여 발생되어지는 단계를 뜻합니다.

이러한 행(行)에는 여러 가지 뜻을 담고 있는데, 우선 전문용어부터 살펴보면, 삼스카라(samskara)라고 하여 결합과 작용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즉, 무명에 의해 중생이 어떤 대상에 대해 집착된 상태로 결합하려는 행위·작용 등을 하게 됨을 나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앎이 없는 상태에서 대상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과 결합 즉 집착되어가는 행위·행동 등을 하게 되는 경우를 말합니다. 이러한 행위·행동 등을 일러 불교용어로는 카르마(karma)라고 하고, 업(業)이라 번역하고 있습니다.

업(業)은 행위·조작·작용·행동 등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넓게 해석하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업(業)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보는 견해가 불교에서 창조와 변화의 상태를 설명하는 이론입니다.

이 점이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진리관임과 동시에 불교만이 내세우는 깨달음의 추구정신이며 성취 도달목표입니다.

그래서 인간 삶의 모습을 설명하게 되면 가장 기본적 입장이 업설로써 설명하고 무지의 행위를 인과설로 보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삶의 흐름과 생사의 원인과 해결, 나아가  행·불행의 과보 등 인생문제로 설명할 때는 3업에 의해 해설합니다. 즉, 3업은 몸으로 하는 행위, 언어로 하는 행위, 마음으로 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행위질서의 올바름과 그릇됨이 어떤 성향을 띠고 작용해 가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변해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3업 그 자체가 삶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한 시라도 3업이 일어나지 않으면 곧 생명활동은 정지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업(業)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행위작용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전부가 아니라 업이 발생된 그곳에는 하나의 세력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된 상태를 현재적 상태와 잠재적 상태로 구분합니다. 현재적 상태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신업·구업·의업이라고 하여 현재 일어나고 있는 행위작용을 말합니다. 이것을 3업이라고 합니다. 이때 선·불선의 행이 구분지어지게 됩니다.

또 다른 측면은 잠재적 상태로서 업이 발생되면 과보를 초래할 세력을 띠고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업력이라고 하며 잠재력이라고도 합니다. 이 세력은 필연적 과보를 발생시키기 때문에 인과응보의 필연성을 띠고 자업자득이라는 인과성을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업은 두 가지 상태를 띠고 있으며, 그 중 잠재력 상태는 필연적 과보를 나타내는 세력을 형성하고 있기에 인과이법에 대한 진리성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십이연기법 가운데 두 번 째 등장하는 행(行)은 홀로 행업이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무명에 기인하여 행업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나타내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은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해 보아도 충분히 납득이 가는 사실입니다. 알고 하는 행위와 모르고 하는 행위의 결과는 엄청난 차이를 발생시키듯이, 행위 그 자체가 발생될 수 있게 되는 근원적 원인은 곧 무명이라는 조건에 있기에 이에 상응하는 행위가 발생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행(行)은 십이연기법 가운데 업(業)을 뜻하며 이것은 생사윤회에 있어서 동력인(動力因)이 된다 하겠습니다.

이렇게 볼 때 중생의 괴로움이 있게 되는 것은 혹(惑)→업(業)→고(苦)라는 것입니다. 혹은 곧 무명을 뜻하며, 미혹된 상태에 의해 발생된 업(karma)은 세력을 띠고 있어 결과를 초래하는 힘에 의해 고(苦)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③식(識)

 

식(識)은 12연기법 가운데 세 번 째에 해당되는 지법(支法)입니다.

식을 설명할 때는 찰나적 연기와 태생학적 연기로 설명하는 방법이 있는데, 태생학적 연기로 설명하는 방법이 이해하기 쉬운 방법입니다. 이 방법은 불교내에서도 삼세양중인과로 학술적 방법에 의해 설명되어 내려오고 있으며, 특히 12연기법이 인생의 흐름을 나타내고 있고, 또 생사의 근원적 원리가 어떠한 것인가 잘 설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식(識)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면, 식은 인식하는 활동체로서 정신적 활동이라고 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어떤 마음이 별도로 존재하고 있어서 마음작용이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12연기 가운데 행(行)에 인연하여 발생된다는 것입니다. 행은 곧 3업이고, 3업은 행위라고 볼 때, 어떠한 행위를 일으키면 그 행위에 따라 마음이 함께 작용되어 인식되고 차별·분별 등 다양한 정신작용이 발생됩니다. 그래서 식이 발생되는 근원을 행(行)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태생학적으로 설명하면 약간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답니다.

태생학적 내용은 윤회와 결부되고 있고 나아가 생사의 근원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식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먼저 식이 있게 되는 것은 행(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뜻은 식은 곧 마음인데 마음이 윤회가 되어 수태되어가는 생명체의 태생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중생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가리켜 원인이라고 한다면 원인은 곧 마음(식)이라는 것입니다.

중생이 한평생 살다가 죽음을 맞이할 때 육신은 모두 무상하여 소멸되어지지만 육신 외에 느끼고 생각하고 인식하고 기억했던 활동체로서의 정신(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마음은 형색이 없고 맛도 없으며, 무시무종(無始無終)으로서 근본의 성품을 스스로 갖추고 있는데 스스로의 자성이 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조건이 형성될 때 일어나 인식작용하는 것이 곧 마음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마음작용이 업이라는 세력에 의해 발생되어 한 세상을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게되면 오직 마음만 윤회를 하게 되는데, 이 때 그 마음 가운데 어떠한 업(業)을 많이 담았는가에 따라 마음은 그러한 성질로 변해지기에 그에 따른 과보로 태어나게 됩니다.

그러기에 식은 12연기 가운데 윤회의 본질로 보는 것이고, 하나의 생명체로 태어나기 위한 질료인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을 경전 『중아함경』에서는 「이 몸을 가지고 다른 세상에 가는 것이 아니고 다만 마음을 따라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마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하느냐에 따라 그 과보를 받는다고 하여 업보설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불교 후대의 교리 발전에서는 아뢰야식과 결부되어 아뢰야식이 곧 윤회 주체가 되어 식과 동일한 것임을 설명하고, 아뢰야식이라는 정신적 기체에 선(善)·불선(不善)의 업에 따라 태어남의 과보를 받는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마음이라는 것이 자기 자신이라고 해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아에 빠지게 되므로 자칫 아트만 사상처럼 자기 영혼의 불멸이라는 사견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디까지나 식의 존재는 조건에 의해 일어난 임시 명칭된 가명(假名)임을 알아야 하며 식이 발생되는 연유를 깊게 사려해 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④명색

 

12연기법 가운데 네 번 째 순서가 명색(名色)입니다. 명색을 풀이하는 방법은 세 번 째 식(識)과 마찬가지로 태생학적 방법으로 설명할 수도 있고, 또 찰나적 연기로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선 태생학적 설명으로 정리해보면, 명색은 명과 색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생명체라고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식에 의해서 태내에 생명체로 수태되어 성장되는 단계에 있는 하나의 개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명이라고 하여 정신적 활동을 이름하고, 색은 육체를 구성하는 4대요소로 설명합니다. 즉, 명(名)은 수(受)·상(想)·행(行)·식(識)을 나타내는데, 수는 감수하는 것으로서 감각을 받아들이는 정신작용이고, 상은 대상에 대해 개념 또는 표상(表象)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행은 형성하는 힘을 가지면서 의지작용을 말하며, 식은 분별·인식작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색(色)은 물질적인 것을 말하는데, 4대요소를 지(地)·수(水)·화(火)·풍(風)으로 설명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의 생명개체로 구성되기 위해서는 명색이 합해짐으로써 물질과 정신이 하나가 되어 하나의 생명체로 활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물질의 구성요소를 4대(四大)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사대를 땅·물·불·바람 등의 물질적 원소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어디까지나 4대요소와 같은 물리적 성질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간혹 이 점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이 4대요소로 구성되었다고 하니까 마치 진짜 4대요소인 물질의 원소로 되어 있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이해 방법입니다.

일찍이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자인 엠페도클레스는 만물을 구성하는 근원 요소를 흙·물·불·공기 등으로 실재한다고 주장하여 이 요소는 없어지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바라보는 4대요소는 이것이 아니라, 4대요소의 물리적 성질인 견고함, 습윤성, 열성, 유동성 등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점을 중아함경 제7권에서는 4대요소의 근원적 성질로 설명하고 있답니다.

그리고 찰나적 연기 입장에서 보면, 식(識)에 의해 객관의 대상을 구분하게 됩니다. 다시 설명하면 식(識)은 인식작용입니다. 인식작용에 의해 객관의 대상에 대해 이름과 형상 등을 구분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형상을 마주할 때 그 형상에 대해 무엇이라고 이름 짓고 구분하는 분별력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을 명과 색이라고 합니다.

이 점과 관련해서 예를 들어 설명해보면, 노란 꽃을 보았다고 할 때, 노란 꽃으로 구별하게 되는 것은 식에 의해서 노란색과 꽃이라는 대상을 만들어버리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매일 매일 마주하고 부딪치는 대상의 객관은 그때 그때마다 이름과 형상이 우리들의 인식 속에 함께 자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이름과 형상 즉, 명색은 임시 인연소생법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진짜인 양 그대로 의식 속에 각인시켜 버립니다.

이렇듯 무명의 습기에 젖어 있으므로 중생은 끊임없는 무명에 의해 행위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일상생활하는 그 자체는 모두가 연기의 이법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이치를 깨달으면 곧 그 자리가 법계의 자리에 있음을 알고, 무명에 가리어 모름으로 인해 중생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명색을 설명할 때에는 식(識)의 조건연에 의해 일어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⑤육입(六入) 또는 6처(六處)  

 

육입(六入)은 12지 연기 중 다섯 번째 항목으로서 명색에 연(緣)하여 발생되는 순차입니다.

육입(六入)이라는 것은 6근(六根)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우리들이 갖추고 있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입니다. 다시 말하면 눈·귀·코·혀·몸·생각(마음)을 뜻합니다.

이와 같이 6입이 발생된다고 하는 것은 앞서 명색(名色)에 의한 것이 되는데, 명색을 설명할 때 보통 정신과 물질로 설명할 수 있고, 또 명칭과 형상으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6입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명색을 명칭과 형상으로 설명해 보면, 어떤 경계를 마주할 때 그 대상에 대해 일단은 명칭과 형상을 6근을 통해 그 대상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때 수용하는 감각적 기관은 우리가 갖추고 있는 6근(六根)에 의해서 작용됩니다.

다시 말해 명색을 받아들일 때 눈으로 보고 귀로 듣기도 하고 코로 냄새를 맡아보기도 하고 혀로도 느끼며 등등 명색을 6근에 의해 자신 쪽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의 주변 생활에서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모두가 6근에 의해 받아들여서 자신에게 담아 놓게 됩니다. 보면 보는 대로 갖고 싶어하고, 들으면 듣는 대로 가지려고 하다보니 여러 가지 일들이 이로 인해 발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6입(六入)이라고 하는 의미도 여섯 가지 6근에 의해 받아들인다 라는 의미에 따라 ‘육입(六入)’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육입은 바깥 정보를 받아들이는 문(門)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매일 매일 쏟아져나오는 정보소식을 하루라도 6근에 의해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삶에 발전도 없을 것이고 생활 그 자체도 무의미할 것입니다.

하지만 중생은 6근에 의해 만법에 대한 새로운 소식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과 작용을 발휘할 수 있기에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현재 살아있다는 그 자체 만으로도 얼마나 큰 행복인가를 절대자각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삶이 중지되어 있다고 하면 6근의 작용이 발휘될 수 없어 자신의 행복을 빛낼 수 없을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존재의 가치와 역할이 무의미하게 됩니다. 그래서 6근을 갖추고 있는 자신은 우주의 주인이 될 수 있고 우주만법과 하나임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6근이 비록 자신의 전부이고 전체라고 하지만 이것을 잘못 다스리고 관리가 허술하게 되면 이로 인해 죄보의 인연을 발생시켜 큰 괴로움을 당하기도 한답니다. 왜냐하면 6근을 통해 탐착하는 것 때문에 자신의 소중한 주인의 권리를 우주 자연으로부터 박탈당해 삶이 괴로움에 젖어 고난으로 이어져가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가르침을 『아함경』 제8권에서 「일체는 불타고 있다.」 라고 하시며, 불타고 있는 것은 안이비설신의에 의해서 불타고 있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6근에 의한 탐착과 3독심이 일어나 순진무구한 중생본성의 청정심이 모두 죄업의 괴로움으로 덮혀 번뇌의 불길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6근을 잘 다스려 선근증장을 쌓는다면 곧 현실 속에서도 진정한 행복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6근 즉, 6입은 중생의 삶을 나타내기도 하고, 인간 존재를 지칭하는 것이 되므로 6근을 어떻게 작용하느냐에 따라 삶을 행·불행으로 만들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6근청정(六根淸淨)의 행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6근이 청정한 그곳이야 말로 아미타불께서 계시는 곳임을 알 수 있고 무량공덕을 갖춘 법신을 이룰 수 있답니다.

이와 같이 6입(六入) 즉, 6근(六根)은 12지 중에서 삶의 주관을 일구어 나가는 곳이 되며, 명색에 의해 생기하는 것입니다.

 

⑥ 촉(觸)

 

6근(六根)에 의해 발현되는 다음 단계가 촉(觸)입니다. 6근(六根)은 육입(六入)이라고도 하는데 우리들이 갖추고 있는 감각기관, 즉, 안·이·비·설·신·의를 지칭하는 것으로서 여섯 감각기관에 의해 외부의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여섯 기관이라고 하며, 또 들어오는 곳이라고 해서 입(入)이라고도 합니다.

또한 육근이 있음으로 해서 촉(觸)이 있게 되는데, 촉(觸)은 심소(心所)라고 하여 심적 작용에 해당하는 하나의 정신작용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촉의 기능은 어떤 대상을 보고 인식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꽃을 보고 인식하여 꽃이라고 할 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정신활동이 발생되게 됩니다. 우선 꽃을 볼 수 있는 감각기관이 있어야 합니다. 이는 6근 중 안근(眼根)인 눈을 말합니다. 눈[眼]이 있음으로써 꽃을 보고 인식하는데, 이때 그냥 안근인 눈만 있으면 안되며, 꽃이라는 대상에 안근이 접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대상인 꽃과 6근에 의한 접촉이 이루어짐으로써 비로소 꽃을 보고 인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6근의 조건이 있음으로써 촉의 작용을 낼 수 있는 것이기에 촉이 6근 다음 단계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사물을 인식하더라도 촉이 없고서는 인식작용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필히 대상과 접촉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촉은 곧 6근에 의해 대상을 인지하는 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에 촉을 촉지(觸知)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촉은 안근에만 있어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6근인 안·이·비·설·신·의에 두루 작용되어 6촉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보다 촉의 작용을 깊게 살펴보면 단순히 6근에 의해 발해지는 심작용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보다더 폭넓게 관련을 맺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꽃을 본다고 할 때 꽃을 보는 것은 6근이지만 꽃이라고 인식하는 주관작용도 함께 있어야 꽃이라고 인식합니다. 이러한 정신작용으로 볼 때, 촉이 하는 역할은 6근·6경·6식 즉, 눈과 꽃과 인식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역할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꽃을 보면서 꽃이라고 인식하는 정신작용이 있게 되는데 이러한 작용을 결합시키는 것도 촉이면서, 또다른 한편으로는 6근·6경·6식이 함께 하므로써 촉(觸)이 발생됩니다. 이때 촉이 발현되는 정신작용은 최초로 생(生)하는 미세한 심리작용입니다. 이로 인해 모든 정신작용이 발생되므로 촉을 정신작용의 의지처가 된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을 덧붙이자면, 촉각 또는 촉감이라는 용어를 생각해 보면 촉에 대해 더 쉽게 이해되리라 생각됩니다. 촉각은 어떤 대상에 대해 접촉이 이루어지고 그 자극에 따라 감수작용이 일어나게 되는데, 구체적으로 고·락의 감수작용이 주관적으로 드러나기 이전에 감촉되어지는 미세한 정신작용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이런 상태가 발생된 이후에는 고·락의 감정에 따라 마음작용이 일어나겠지만 그 이전의 마음작용을 곧 촉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때 이처럼 미세한 감수작용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6근·6경·6식이 결합되어야 하므로 전문용어로는 3사화합(三事和合)이라고 설명합니다. 6근과 6경을 관계지어야 하고 ,달리 말하면 6근이 6경에 접촉하여야 하고, 경은 다시 식(識)과 접촉되어야 하는데 이때는 상호 동시적 관계입니다. 그래서 3사화합을 이루어주는 것을 촉이라고 하며 촉은 곧 6근에 의해 발생되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편 태생학적으로 살펴보면 생명체가 태어나 최초로 외부와 접촉하는 상태가 발생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6근이 모두 갖추어진 상태이기에 태어남으로써 환경과 접촉이 이루어진다는 것으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⑦ 수(受)

 

수(受)는 12연기 중에서 일곱 번째에 해당하는 항목입니다. 수(受)의 뜻은 감수(感受)라고 하여 어떤 대상에 대해 촉(觸)이라는 마음작용이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마음의 감수작용이 발생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대상을 마주하게 됨으로 인해 발생되는 감각·지각·인상 등을 받아들이는 상태 또는 그 느낌의 감각을 느끼는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하겠습니다.

이때 수의 작용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낙수(樂受)·고수(苦受)·불낙불고수(不樂不苦受)입니다. 즉 즐거움의 느낌을 받아들이는 것, 괴로움의 느낌을 받아들이는 것,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서 세 가지 마음작용이 있습니다.

여기서 수(受)를 달리 설명해 보면, 일단은 마음작용에 의해 감각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각(覺)이라고도 표현합니다. 각(覺)은 ‘알다’, ‘깨닫다’라는 의미인데, 대상에 대한 그 느낌 등을 감수, 즉, ‘느끼어 알아 받아들인다’ 라는 것으로 해설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수(受)의 범위는 매우 넓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눈으로 보아도 느끼고, 귀로 들어도 느끼고, 코로 냄새를 맡아도 느끼고, 혀로 맛을 보면 느끼고, 몸을 접촉해도 느끼고, 마음으로도 느끼기 때문에 이러한 느낌의 감각을 모두 받아들이는 마음작용이 발생됩니다. 이뿐만 아니라 수(受)는 우리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도 작용하고 있다고 해서 전문적으로 마음의 실상을 해석하는 용어로는 변행심소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촉(觸)과 같이 수(受)도 두루두루 일어나는 정신작용인데 마음이 일어날 때마다 널리 일어나므로 이를 변행(遍行)이라고 한답니다.

그래서 정신작용인 수(受)를 설명할 때는 정적(情的)인 측면으로 보고 수(受)에 의해 속박 당하고 있는 까닭에 번뇌장인 정적으로 봅니다.

사실 중생은 수(受)라는 감수작용에 따라 3독심도 일어나고 더불어 악업·죄업을 발생시키게 됩니다.

감수에 따라 취사선택이 일어나고 또한 집착이 강해져서 이로 인해 3독심이 따르기 때문에 무명업보에 의해 3계윤회를 끊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의 형태를 보면 정적인 측면이 지적인 측면보다 더 끊기가 어렵기 때문에 수도(修道)라고 하는 이유도 곧 정을 닦아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것이랍니다.

그만큼 수의 작용은 삶에 큰 영향을 가져오는 단계적 발생현상입니다. 어떻게 수를 활용하느냐에 따라 업보를 소멸할 수도 있고 더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평소 기도와 수행을 통해 선정력과 지견력이 갖추어져 있다면 어떤 상태에서도 충분히 자신의 허물을 일으킬 감정과 행동을 조절할 수 있고 조화를 이루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이와 같은 수(受)와 관련해서 살펴보면, 불교는 자기마음을 다스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 궁극에는 해탈열반인 무상보리를 성취하는 데 있습니다. 본래 마음은 모두가 청정심인 보리지혜로 빛나고 있지만 수(受)라는 마음의 작용에 따라 선택취사 분별 구별 등 여러 가지 집착번뇌를 일으켜 청정심을 가려 놓았기 때문에 마음의 밝은 보리지혜가 발현되지 못하므로 미혹한 마음과 행위에 의해 괴로움의 과보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음 다스리는 것은 곧 수의 작용을 밝고 아름답게 하여 선한 작용이 일어나게 함으로써 본래의 청정심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受)는 촉(觸)에 의하여 발휘되는 감수작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반면에 수(受)는 애욕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번뇌장과 소지장인 두 가지 번뇌에 의해 수(受)의 감수작용에 의한 업력이 발휘되어 중생의 업보윤회는 삼계를 표류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⑧애(愛)

 

애(愛)는 수(受)에 인연해서 발생되는 결과이면서 다음 단계의 원인이 되는 존재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 또한 십이연기법을 설명하는 과정이라고 하겠지만, 십이연기법이란 이렇듯 단순히 열두 가지 변화과정을 도식화 상태에 따라 차례로 나열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십이연기법을 통해 세상만물의 모든 존재는 상호 의존관계로 존립하고 있으며, 또 끊임없이 상호 연기되어지는 진리로움에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며, 뿐만 아니라 이러한 연기 도리를 통해 각각의 존엄한 가치성과, 또 어떠한 것도 홀로 탄생되어질 수 없다는 존재의 근원을 설명하는 것이며, 인생과 삶의 행·불행도 인과응보라는 연기법을 떠나지 않고 윤회(輪廻)라는 변화의 연속적 삶의 형태도 모두가 인(因)과 연(緣)의 이치를 벗어날 수 없다는 우주의 법칙성인 법성(法性)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애(愛)가 발생되는 근원도 곧 수(受)라는 감수작용, 즉 감각적 느낌에 의해 발생되는 또다른 법상(法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애(愛)란 단순하게는 사랑·욕망 등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더 깊게 표현한다면 갈애(渴愛)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갈애의 심정은 마치 목마른 자가 심한 갈증을 일으켜 애타게 물을 찾는 모습과 같은 상태를 말합니다.

그만큼 ‘애(愛)’가 갖고 있는 성향은 대단히 폭발적이고 광폭적이어서 스스로 자기 자신을 통제하기 어려운 소유의 욕망, 집착하는 욕망, 떨쳐버릴래야 떨쳐버릴 수 없는 즐기고자 하는 욕망·욕구 등의 심리적 작용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흡연을 한두 번 하다보니 그 호기심과 쾌감이 가져다주는 지각·감각의 느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을 수(受)의 단계라고 한다면, 이것에 머물지 않고 한 단계 더 확대되어 이제는 호기심이 아니라 흡연이 중심이 되어 흡연을 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깊이 빠져버리는 애착심, 욕구, 욕망 등이 일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고 하는 습관과 버릇의 고질성을 일깨워주는 속담처럼, 수(受)에 의한 욕망의 애(愛)가 갈애(渴愛)와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생의 행·불행도 ‘애(愛)’를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드러나며, 인간이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원인도 애욕이 근본이 되기 때문에 애욕을 떨쳐버리는 것만이 해탈 성불로 가는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잡아함경』에서는 애(愛)로 인해 발생되는 번뇌를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데, 첫째는 욕애(欲愛)이고, 둘째는 색애(色愛)이며, 셋째는 무색애(無色愛)입니다. 먼저 욕애는 욕망의 세계를 뜻하는 것으로 욕망의 애착이 가득찬 중생세계를 말합니다. 끝없는 욕망으로 인해 온갖 죄업을 짓게되므로 인과에 의해 윤회전생의 업도(業道)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 ‘색애’는 욕애의 번뇌·욕망은 일어나지 않고 청정한 물질의 세계로 가득한 세계에서 일으키는 집착심을 말하는데, 비록 번뇌망상의 더러움은 벗어났지만 그래도 자아 집착, 물질 집착에 대한 욕망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무색애’는 물질을 초월하여 정신적 세계로만 되어 있는 곳에서도 아직도 정신의 해체인 열반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 머무르고 있는 욕망, 욕구의 작용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3애를 윤회의 근본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애(愛)는 현재의 인(因)이 되어서 미래의 결과를 초래하는 원인으로 요건을 갖추고 있는 만큼 애증·애욕의 번뇌와 집착심을 떨쳐버리지 않는 이상에는 중생의 상태를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愛)를 떠난 상태로 가는 것이 수행이고, 미혹함에 빠지는 것이 애욕·애착이므로 이러한 허망분별을 벗기 위함이 3학(三學) 수행인 것입니다.

 

 ⑨취(取)

 

십이지연기(12支緣起)에 있어 여덟 번째 항목이 취(取)에 해당됩니다.

취(取)는 ‘집착한다’는 뜻으로서 ‘집취(執取)’의 의미를 담고 있는데, 3계와 만법에 대한 허망함을 모르고 진실인 양 그것에 집착하여 취(取)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달리 설명하면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번뇌를 구별하여 보면, 하나는 번뇌장이고 다른 하나는 소지장이라고 하는데, 번뇌장은 정적인 측면으로부터 발생되는 번뇌심을 말하고, 소지장은 존재에 대한 진리를 모르는 것으로부터 발생되는 번뇌심을 말합니다. 이러한 두 번뇌를 취의 항목에서는 앞전의 욕망에 인연하여 집취라는 번뇌심이 작용되어 소유와 탐착의 번뇌를 낳게 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의 삶 전반에서 실지로 느끼고 있고 또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물들어버려 생활해 가고 있는데, 어떤 대상을 마주함에 있어 그것에 대해 탐애가 있게 되면 그 다음에 발생되는 욕망 욕구는 자기 것으로 소유하고 싶은 취(取)가 있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취의 번뇌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등산을 하다가 예쁜 꽃을 보게 되면 사랑스러워하다가 마침내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충동이 일어나게 되고 마침내 꽃을 꺾어 집으로 가져가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에서 취(取)가 일어나는 과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취를 번뇌라고도 합니다. 왜냐하면 소유하고자 하는 탐착심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취(取)를 설명할 때에는 번뇌라고 하고 이를 4취(四取)라는 내용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첫째는 욕취(欲取)입니다. 욕취는 탐욕심이 일어나 소유하려는 것이고, 둘째는 견취(見取)인데 그릇된 견해로부터 발생되는 번뇌의 욕심을 말합니다. 셋째는 계금취(戒禁取)로서 외도의 계율이 진실이라고 따르고 취하는 것이며, 넷째는 아어취(我語取)로서 자아(自我)에 대한 집착으로서 자신의 실체를 인정하는 행위 등을 말합니다.

이상의 4취를 살펴보면 모두 번뇌가 작용되는 것이고, 이 번뇌는 애(愛)가 있으므로 해서 취(取)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취(取)와 관련하여 좀더 살펴보면, 중생이 육도윤회 전생을 하게 되는 것은 모두 업(業)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는데, 이때의 업력은 번뇌가 있는 업이 쌓임으로써 윤회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윤회의 근원을 업력(業力)이라고 보는데, 이 업력이 있게 되는 근본은 미혹된 번뇌심에 의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괴로움을 낳게 하는 근원도 미혹에 의해 악업, 즉, 번뇌심이 가득한 업이 작용하므로써 그에 상응하는 결과인 괴로움, 재앙 등을 낳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도식으로 정리하면, 혹(惑)→업(業)→고(苦)로 진행되어지는데, 이때 취에 해당되는 경우가 미혹(迷惑)이며 미혹의 집착에 의해 결국은 업(業)을 발생시키게 됩니다.

결국 중생의 업보는 애(愛)와 취(取)에 강한 중심을 이루고 있고 취(取)가 고통의 원인임도 나타내고 있답니다. 그래서 베푸는 보시(布施)는 결박을 푸는 선업(善業)이 되고, 탐착하는 취(取)는 결박하는 죄업으로 진행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베푸는 보시 선업을 강조하는 것도 자성청정심을 회복시키려는 데 있으며, 본성청정이 그대로 법신광명이므로 이 광명을 발휘하기 위해서 보시 선업을 통해 결박되어져 있는 인색함, 탐착, 집착, 집취 등의 그릇된 망상을 해체 원리하는 습관적 습기, 훈습이 됨으로써 공덕을 성취하는 길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취하는 욕심은 자신의 삶을 무겁게 하는 것이며, 비우고 베풀고 해체시키는 보시는 삶을 가볍게 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⑩유(有)

 

유(有)는 십이연기법(12緣起法) 항목 가운데 열 번째에 해당하는 지(支)입니다.

우선 유(有)의 뜻을 풀이하면 ‘존재’라고 합니다. 존재는 형상을 가진 것도 있는 반면에 형상이 없는 무형상의 존재도 있습니다.

그래서 유(有)라고 하는 십이연기법 유지(有支)에서는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답니다.

첫째는 형상을 가진 것으로서 중생이 취(取)하는 분별심으로 욕망의 집착에 의거하여 유형의 세계를 발생시키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설명해보면, 욕망의 집착에 따라 생존 영역의 세계를 만들어내게 되는데 이를 인과응보로 설명하여 다음 생에 태어나는 세계를 천상· 지옥 등의 세계로 표현합니다.

이를 좀더 세세하게 설명하면 3유(三有)로 설명하는데, 욕유(欲有)·색유(色有)·무색유(無色有)라고 합니다. 욕유(欲有)는 욕계(欲界)의 생존으로서 욕심이 번성한 세계를 말하며, 색유(色有)는 색계(色界)로서 욕심은 없지만 아직도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에 머무르고 있는 생존형태를 말하고, 무색계(無色界)는 욕심과 물질의 세계가 끊어지고 순수 고도의 정신세계만이 있는 세계를 지칭합니다. 그러나 이 세계들도 모두 윤회를 하는 곳이기에 이를 삼계윤회 전생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삼계(三界)는 우주의 총칭으로 보고 이곳도 역시 윤회 전생하는 곳이기에 중생의 삶은 끊임없이 업보 윤회됨을 보여주고 있답니다.

따라서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유(有)는 영역·세계 등의 의미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 반면에 무형의 존재에서는 이를 달리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유(有)의 본질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유(有)는 앞 단계의 지(支)인 취(取)에 의해 연기되어진 항목인데 이때 취(取)에 의해 일어난 업(業), 또는 여력, 습관력 등이 축적되어 있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유(有)를 업유(業有)와 보유(報有)로 설명하여 업유는 3업의 여력인 업력(業力)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업력은 현재 또는 내생에 필연적 과보(果報)를 규정하는 힘 또는 영향력을 말하며, 이 업력에 의해 중생의 생사고락인 삶이 끊임없이 펼쳐지게 됩니다.

그래서 아비달마 교학에서는 중생의 생애를 설명할 때 사유(四有)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생유·본유·사유·중유가 그것입니다.

역시 여기에서도 유(有)가 갖는 의미는 ‘존재’이면서 업력을 포함하고 있게 됩니다.

따라서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업유(業有)는 곧 선·악업의 존재를 말함과 동시에 3업의 여력·업력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유(有)는 12연기법 가운데 3업으로 이루어진 업력을 모두 형성하고 축적하고 있는 상태로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인연에 따라 금생에 받는 업보가 있게 되고 또는 내생에 받게 되는 업보가 있으며, 또 내후생에 받는 업보로 설명하여지고 있으므로 이것을 3시업(三時業)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유(有)의 항목은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원인이 되는 선·악의 업력 성향 여부를 축적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보유(報有)로 설명하는 입장에서는 업유(業有)에 포함된 업력에 의해 그 결과가 규정된 존재의 모습이 잠재적으로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인과관계로 설명하면 선인락과(善因樂果) 악인고과(惡因苦果)와 같이 선한 원인에는 응당 즐거운 결과를 낳는 것이고, 착하지 않는 원인에는 괴로운 결과를 낳는 응보(應報)의 모습과 같이 미래의 존재를 낳게하는 과보를 보유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업유를 선·악의 여력, 세력, 업력이라 하면 보유(報有)는 이에 상응하는 과보의 존재 모습으로서의 잠재된 형상이라 하겠습니다.

 

 ⑪생(生)

 

유(有)의 원인으로 다음 항목이 설정되는 것은 생(生)이라고 합니다.

생(生)은 태어나는 뜻도 있고, 발생된다는 뜻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는 태생학적 입장으로 설명되는 것인데 유정중생(有情衆生)이 다른 유정의 부류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앞 단계의 원인 조건에 의한 유(有)에 의해서인데, 유(有)에는 3업(三業)으로 이루어진 업력을 모두 형성하고 축적되어 있는 관계로 이러한 업력(業力)에 따라 과보(果報)를 낳게 하는 인과(因果) 질서에 의한 것입니다.

따라서 유(有)에 축적된 업력이 선업(善業)·악업(惡業)의 강한 성향에 따라서 업(業)의 작용에 의해 생(生)이 있게 되는 것으로서 선업(善業)이 강하면 선과(善果)의 업보로 나타나고, 악업(惡業)이 강하면 악과(惡果)의 업보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생(生)의 의미를 설명할 때는 중생이 태어나는 부류의 태생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때 태어나는 부류는 9류중생(九類衆生)으로 설명합니다. 아홉 종류의 중생이란 내용은 『금강반야바라밀경』에서도 설명되고 있는 바 중생이 태어나는 부류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유정중생이 생명체로서 태어나는 부류인 것이지만 여기에 수반되는 업보 중에는 생명체로서 살아가는 환경, 신체, 건강, 모습 등도 함께 포함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인간은 9류중생(九類衆生) 중 태(胎)로 태어나는 생명체입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구비되어야 할 요건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반면에 신체, 건강, 환경 등도 함께 과보를 받는데 이때 유(有)의 업력에 의해 다음 생(生)의 행(幸)·불행(不幸)·고(苦)·락(樂) 등의 과보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생(生)의 항목에서 보여주는 의미는 과보에 대한 결과로 설명되어짐을 알 수 있답니다.

그런 반면에 후자의 경우로는 일상 생활에서 경험되어질 수 있는 인과율(因果律)의 연기관계(緣起關係) 또는 상의상관관계(相依相關關係) 등으로도 설명되어지고 있습니다. 이 중 인과율(因果律)의 연기관계를 보면 쉽게 이해되리라 봅니다.

인과율(因果律)의 의미는 원인에 의한 결과의 나타남을 설명하는 연기관계인데 어떤 개체가 존재하게 되는 것은 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원인인 인(因) 또는 조건이 있기 때문에 개체는 존재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령 사과나무에 사과가 탐스럽게 열매 맺고 있는 것은 사과나무 자체로서 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여러 조건들이 모여서 탐스러운 사과 열매를 맺게 되는 것으로서 태양, 바람, 물, 거름, 토양, 관리 등등 여러 인연이 모여서 일구어 낸 결과입니다. 그러기에 유(有)는 여러 조건의 인(因)과 업유(業有)에 의해 생(生)은 사과 열매로 발생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 세상 만물은 그 어느 하나라도 제 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인과율(因果律)에 의한 연생(緣生)입니다. 연생(緣生)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또 생(生)하여 존재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소멸되는 이치도 인연으로 멸(滅)해지기에 이를 연멸(緣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존재하는 사물현상은 모두가 연생연멸(緣生緣滅)하는 법칙에 의하므로 이를 법주법계(法住法界)라고 하고, 법(法) 즉 진리의 세계라고 설명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생(生)은 연생(緣生)의 시작이면서 결과임을 알 수 있답니다

 

 ⑫노·사(老死)

 

12연기법에 있어 마지막 항목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열두 번째 노·사(老死)입니다.

노·사(老死)는 늙음과 죽음을 뜻하는 내용으로서 인생에 대한 괴로움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인생을 보는 차이, 느끼는 입장에서 달리 설명하기도 합니다만 그 본질은 뭐니뭐니해도 괴로움이 떠나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괴로움 즉, 고(苦)는 인생 전반에 중심을 하고 있기에 비록 행복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괴로움이라는 것이 있기에 행복도 깊이 자각하기 어려울지 모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인간 생활, 중생은 괴로움의 세계에 있어 헤어나려고 하질 않는 어리석음이 있기에 중생 세간을 삼계화택(三界火宅)에 비유하여 인생의 괴로움을 설명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중생의 현실에서는 물질풍족, 정신쾌락 등을 가지고 행복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고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또다시 윤회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괴로움이 있으므로 중생의 삶은 괴로움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 삶의 괴로움을 설명할 때에는 4고8고(四苦八苦)로 나타냅니다. 우선 4고(四苦)는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말합니다. 태어남을 말하고, 태어나면 늙음이 오고, 늙음이 오면 병이 찾아오고, 병이 찾아오면 마침내 죽음을 맞이하는 현실이 모두 괴로움이라는 것입니다. 생로병사는 어떠한 중생도 이를 거역할 수 없고 또 피할 수 없는 것이기에 인생의 진리로서 간략히 삶의 질서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8고(八苦)는 4고에다 네 가지 괴로움을 더한 것인데 첫째는 원증회고(怨憎會苦)입니다. 이는 원망·증오 등으로 관계지어진 사람과 만나야 하는 괴로움을 뜻하고, 둘째는 애별리고(愛別離苦)로서 사랑하는 것과 떠나거나 헤어져야 하는 괴로움이며, 셋째는 구부득고(求不得苦)로서 구하여 얻지 못하는 괴로움이고, 넷째는 오음성고(五陰盛苦)로서 오온으로 구성된 것으로부터 발생되는 몸과 마음의 괴로움을 뜻하는 것으로 이 네 가지를 더해 8고(八苦)라고 합니다.

이렇듯 우리의 인생을 들여다보면 모두 괴로움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모두 괴로움이라고 하여 이를 일체개고(一切皆苦)라고도 합니다.

이러한 괴로움인 고(苦) 즉, 두카(Duhkha)가 어떻게 해서 중생에게 있는 것인가를 12연기법에서는 사실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태어남 그 자체와 더불어 노사(老死)가 있게 되며, 원인은 12연기 가운데 행·취·유 등의 업인에 의한 것이라고 봅니다. 이러한 고(苦)의 발생 원인은 모두 무명(無明)이라는 무지(無知)에 의한 것인데 이것으로부터 괴로움의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생에 있어 제아무리 행복한 생활을 한다하여도 결국은 생로병사의 괴로움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므로 현실세계를 불교에서는 고(苦)라고 단안을 내림으로써 무상(無常)의 진리를 일깨우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종교의 역할과 출발 그리고 종착점은 결국 고(苦)에 대한 해결 방안·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 불교는 분명하게 해결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고(苦)에 대한 진실과 내용·본질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또 해결방법을 사성제(四聖諦)로써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12연기 가운데 노사(老死)가 있게되는 원인은 태어남이라는 생(生)이 있음으로 하여 노사(老死)가 있으며, 노사(老死)는 괴로움을 뜻한다 하겠습니다.

이러한 노사(老死)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거꾸로 행(行)을 소멸하므로써 가능하다는 인연관계를 알게되는데 이렇게 깨달아 가는 것을 역관(逆觀)이라고 하고, 순차적으로 무명(無明)에서 노사(老死)로 지견하는 것을 순관(順觀)이라고 한답니다.

 

 

 

 

 

 

 

 

 

 

십이연기법(十二緣起法) 해석

십이연기법(十二緣起法) 불교는 자각의 종교·실천의 종교·인격완성의 종교 등 여러가지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답니다. 이처럼 다양하게 설명할 수 있도록 할수 있는 것은 바로 각(覺), 즉 깨달

cafe.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