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동파의 선시(禪詩)
지 안
동파(東坡 : 본명 蘇軾소식 1036~1101) 거사가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형남(荊南)에 있을 때 옥천사(玉泉寺)의 승호(承皓: 1011~1091) 선사를 만나면서부터다. 천하에 문장가요 시인이자 서예가, 화가였던 그는 학식과 재주로써는 남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 송대(宋代)의 인물 가운데 소동파를 최고 천재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마치 우리나라 조선조의 최고 천재를 김시습으로 치듯이 동파는 중국 역사에서 천재로 평가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 그가 도인이라 칭송받으며 세속의 학문을 내려보는 불교의 선사(禪師)들에 대하여 못마땅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선사들을 만나 한 번 떠볼 양으로 소문 듣고 형남에 있던 옥천사 승호 선사를 방문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일부러 객기를 부리며 승호 선사의 방앞에 다다라 큰 소리로 “계시오.”하고 외쳤다. 뜻밖의 방문객을 맞은 선사가 문을 열고 “누구요.” 하고 물었다. 이때 동파가 오만방자하게 말했다.
“나 칭가(秤哥) 라는 사람이오.”
“아니, 칭가라니요?”
칭가라는 성(姓)은 없는 성이었다.
“천하에 내노라 뽐내는 선사들을 달아보는 저울이란 말이요.”
이때 선사는 벼락같은 소리로 고함을 꽥 질러 할(喝)을 했다. 천둥이 쳐 산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 이게 몇 근이나 되는가?”
동파는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서서 대답을 못했다. 할에 눌린 동파는 자신의 경솔함을 뉘우쳤다. 이로부터 선(禪)에 매료되어 정중하고 겸손한 자세로 제방의 스님들을 찾아다니며 선을 배우고 도(道)를 물었다. 그는 일생 동안 100여 명의 고승들을 만나 뵈었다 한다. 『오등회원(五燈會元)』에는 소동파가 동림상총(東林常總) 선사의 법을 이은 재가 제자로 기록하고 있다.
그는 정치적 불운을 겪으면서 여러 고을로 좌천을 당해 옮겨 다녔다. 그러다 한 번은 여산(廬山)의 귀종사(歸宗寺)에 계시던 불인요원(佛印了元: 1032~1098) 선사를 찾아갔다. 요원 선사와는 이미 친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어서 오시오. 태수, 오늘은 의자를 치워버려 방바닥에 그냥 앉아야 되겠소.”
“의자가 없으시면 스님의 사대(四大; 몸)를 빌려주시면 거기에 앉지요.”
따는 법거량을 하는 셈이었다. 선사가 이어 말했다.
“그래요? 그럼 내 묻는 말에 답을 바로 하면 빌려 주겠소. 만약 틀린 말을 하면 태수의 옥대(玉帶)를 풀어 내게 주시오. 사대는 본래 공한 것인데 어디다 몸을 앉히겠소?”
말이 막힌 동파는 옥대를 풀었다.
동파의 구도행각은 계속되었다.
동림(東林) 흥용사(興龍寺)에 계시던 상총(常聰) 선사를 찾아갔다.
“가르침을 받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자비를 베푸시어 미혹한 마음을 열어 주십시오.”
“귀관은 여러 스님을 만나 뵈었지요?”
“예, 여러 고을을 옮겨 다니면서 대덕 스님들을 여러 분 뵈었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러면 이제부터 사람의 말 유정설법(有情說法)은 듣지 말고 무정설법(無情說法)을 듣는 것이 좋겠습니다.”
“...? 무정설법?...”
무정설법은 산하대지, 일월성신 두두물물이 법을 설한다는 말이다. 『화엄경』 경문에도 “국토가 설법하고 중생이 설법하고 삼세 모든 것이 법을 설한다(刹說 衆生說 三世一切說)”는 말이 있다.
어느 스님이 법문을 하려 법상에 올라갔다. 마침 법당 밖 인근 숲속에서 매미가 울어댔다. 스님이 말하기를 “내가 법문하러 법상에 올라왔더니 매미가 먼저 해버렸으니 그냥 내려가겠소.” 하고 법상에서 내려 와버렸다는 설화도 있다.
동파는 먼 길을 갈 때 말을 타고 다녔다. 이날도 말을 타고 갔었다. 큰 절 입구에 하마비(下馬碑)란 표지석이 많이 있다. 절 마당 안에까지 타고 갈 수가 없어 절 밖에 말에서 내리고 말은 매어 두고 사람만 들어간다.
동파는 절을 나와 매어 둔 말고삐를 풀고 말 위에 올라탔다. 말 등에 앉아 ‘무정설법’이란 말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말(馬)이 제 알아 길을 따라 산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흥룡사 내려오는 골짜기 아래 폭포가 하나 있었다. 전날 밤비가 와서 골짜기 물이 불어나 폭포수가 굉음을 내며 아래로 쏟아지고 있었다. 이백의 시구 “날아 흘러 떨어지는 것이 삼천 자(尺)구나. 은하가 구천으로 떨어지나 보다.(飛流直下三千尺 疑是銀河落九天)”를 연상케 하는 장관이었다. 말이 폭포수 아래로 지나갈 때 별안간 폭포수 소리가 동파의 머릿속을 때렸다. 아! 하는 탄성과 함께 동파는 중얼거리며 시구를 읊었다.
溪聲便是廣長舌 시냇물 소리가 바로 부처님의 설법이니
계성변시광장설
山色豈非淸淨身 산색이 어찌 청정한 부처님 법신이 아니겠는가?
산색기비청정신
夜來八萬四千偈 밤새 설해진 팔만사천 게송(법문)을
야래팔만사천게
他日如何擧似人 다른 날 남에게 어떻게 보여주리
타일여하거사인
드디어 소동파의 오도송(悟道頌)이 탄생한 것이다. 이 사구송(四句頌)이 중국 각 지방의 사찰 법당에 주련으로 붙어 있는 것을 여러 곳에서 보았다. 다만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과 글자 한자가 달랐다. 2구의 어찌기(豈)가 없을무(無)로 되어 있었다. 내가 중국 사찰 순례 중에 유심히 살펴본 적이 있다. 기(豈)나 무(無)나 뜻이 달라지는 건 없다.
동파의 오도송은 여산에서도 나왔다. 말하자면 제 2 오도송이라 할 수 있는 시다.
廬山煙雨浙江潮 여산의 실안개비, 절강의 물결이여
여산연우절강조
未到千般恨不消 와보지 않았을 땐 온갖 한이 남더니만
미도천반한불소
到得還來別無事 와서 보고 나니 아무 별것 없고서
도득환래별무사
廬山煙雨浙江潮 여산의 실안개비 절강의 물결이네
여산연우절강조
여산(廬山)은 중국 강서성 남강부에 있는 유명한 산이다. 동진(東晉)시대로부터 불교와 깊은 인연이 있는 지역으로 동림사를 위시해서 서림사, 천불사, 개선사, 만장사를 비롯한 70여 개의 사찰이 있어 강남불교의 한 중심지가 되었던 곳이다. 또한 향로봉, 오로봉, 자소봉, 칠선봉 등 40여 개의 산봉우리가 솟아 산세의 경치가 아름답기로 이름난 곳이다. 이렇기 때문에 중국의 역대 문인 명사들이 여기를 찾지 않은 이가 없었고, 이곳을 소재로 글을 짓거나 그림을 그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한다.
불교사에서 보면 일찍이 안세고(安世高)가 이곳에 머문 적이 있으며, 그 후 도안 법사가 머물렀고 그의 문인 혜영(慧永)이 서림사를 짓고는 혜원(慧遠)을 청해 오게 하였고, 혜원이 다시 동림사를 지었다. 이리하여 여산 이림(二林)이란 말이 생기고 불교사에 숱한 일화가 만들어졌다. 특히, 혜원이 이곳에 백련사(白蓮社)를 결사(結社)하여 아미타불 염불 수행을 한 이래로 이곳이 중국 정토종의 발상지로 여겨져 왔다. 당나라 때에 와서는 선도(善導) 대사가 이곳에 와 혜원의 유적을 찾았으며, 지순(智舜)은 이곳에서 정토삼부경의 하나인 <관무량수경>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시인 이백도 이곳을 드나들며 시를 지었으며, 백낙천 역시 유애사(遺愛寺) 부근에 초당(草堂)을 짓고 머무르기도 하였다.
송대에 이르러서는 거눌(居訥)이 원통사에 머무르면서 구양수 등과 청송사(靑松社)를 결사하였다. 그 후 선종의 황용혜남(黃龍慧南)의 제자 상총(常聰)이 왕명을 받고 동림사에 와 선풍을 드날렸다. 바로 이 무렵 당대의 시인이요, 명사였던 소동파가 이곳을 드나들면서 많은 고승들과 교류하며 선에 탐닉하여 마침내 한 소식을 얻는다. 이 시 역시 오도송이라 할 만큼 품격 높은 선시로 평가 받고 있는 시이다. 그가 처음 옥천사 승호承晧 선사를 참방한 이래 상총 선사나 불인요원(佛印了元) 선사 등과의 교류에서 선지를 터득하여 이와 같은 격조 높은 선시를 남긴 것이다.
여산에 안개비 내리는 풍경과 절강의 강물을 읊은 이 시는 선을 참구하여 체험한 도의 경지를 비유적으로 매우 미묘하게 표현한 것이다. 여산의 경치를 소문만 들었을 적에는 가서 보고 싶어도 아직 가보지 못한 것을 탄식하였는데, 막상 보고 나니 별 게 아니더라는 말은 굳이 덧붙이자면 깨닫고 나면 깨달은 것이 시시하다는 말이다. 보기 전이나 보고 난 후의 여산의 경치가 그대로이듯이, 깨닫기 전이나 깨달은 후의 나의 정체도 아무 변함없이 그대로라는 것이다. 처음의 제1구와 마지막 제4구는 똑같은 말이다. 별것 아닌 것이 그토록 와서 보고 싶게 했으나 산과 물은 오기 전이나 와 본 후나 본래 그대로라는 말이다. 이 시는 선가(禪家)에서도 많이 인용해 왔다.
동파는 여산을 여러 번 유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또 다른 시 “제서림벽 (題西林壁) ”이라는 시가 있다.
橫着成嶺側成峰 가로 보면 뻗어 간 고개요 옆으로 보면 솟은 봉우리
횡간성령측성봉
遠近高低各不同 멀리서 가까이서, 높고 낮은 곳에서 각각 다르구나
원근고저각부동
不識廬山眞面目 여산의 참모습 알 수 없는 것은
불식여산진면목
只緣身在此山中 이 몸이 산속에 있었기 때문이겠지
지연신재차신중
동파는 선사들의 어록(語錄)을 많이 보았고 경전도 많이 보아 그의 시에는 『반야경』, 『유마경』, 『원각경』, 『능가경』, 『능엄경』, 『법화경』에 있는 말들의 뜻이 인용되고 있는 곳이 많다.
수륙사(水陸寺)라는 절에 자면서 거문고 소리를 듣고 청순(淸順) 스님에게 지어 보낸 시가 있다.
若言琴上有琴聲 만약 거문고 소리가 거문고에서 난다면
약언금상유금성
放在匣中何不鳴 어찌 그대로 두면 속에서 소리가 나지 않는가
방재갑중하불명
若言聲在指頭上 만약 거문고 소리가 손가락에서 난다면
약언성재지두상
何不于君指上聽 어찌하여 그대는 손가락에서는 듣지 못하는가
하불우군지상청
『능엄경』에 나오는 “비유하건대 거문고와 비파가 비록 아름다운 소리가 있지만, 만약 손가락이 없다면 마침내 소리를 내지 못할 것이다,(譬如琴瑟琵琶, 雖有妙音, 若無妙指, 終不能發)”라고 한 경문의 뜻을 생각나게 한다.
청대(淸代)의 유희재(劉熙載)는 동파의 시를 이렇게 평했다.
“동파의 시는 공(空)에서 유(有)를 만들고, 또한 유(有)에서 무(無)를 만든다. 그의 시는 대부분 선(禪)의 깨달음에서 나온 것이다.”
만년에 동파는 인생무상을 처절히 느끼며 시로써 자신을 달래기도 했다.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으니, 백 년의 과객이 되려 한다네(人生如朝露, 要作百年客).
또 똑같은 말을 백발을 들어 읊었다.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고, 백발은 나날이 늘어 간다네(人生如朝露, 白髮日夜催).”
방온(龐蘊) 거사와 더불어 중국의 2대 거사라 할 수 있는 동파거사는 천재 시인이요, 화가, 서예가에, 정치적 불운을 겪으며 좌천을 여러 번 당하고 유배를 당하면서도 불후의 선시를 남긴 거봉이었다.
'지혜의 공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함월해원(涵月海源) 대사 (1) | 2024.04.07 |
---|---|
방거사(龐居士)의 선시(禪詩) (0) | 2024.04.07 |
冶父道川 禪師 ㅡ宋代 禪詩 특징 (2) | 2024.02.25 |
승조대사의 조론(肇論) -감산덕청 주해 略 (1) | 2023.12.17 |
<만공(滿空, 1871~1946) 선사> (1) | 2023.1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