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반야심경

금강경 오가해 야부송

수선님 2024. 7. 28. 11:44

金剛經 五家解 야부송

목차

 

冶父

第一 法會因由分(법회를 이룬 연유) 75

第二 善現起請分(선현이 법을 청하다) 102

第三 大乘正宗分(대승의 바른 종지) 117

第四 妙行無住分(묘행은 머묾이 없음) 125

第五 如理實見分(바른 도리를 실답게 봄) 135

第六 正信希有分(바른 믿음은 희유하다) 141

第七 無得無說分(얻을 것도 없고 설할 것도 없음) 154

第八 依法出生分(법에 의하여 출생함) 161

第九 一相無相分(하나의 상도 상이 아님) 169

第十 莊嚴淨土分(정토를 장엄함) 180

第十一 無爲福勝分(무위복이 수승함) 192

第十二 尊重正敎分(바른 가르침을 존중함) 197

第十三 如法受持分(법답게 받아지님) 202

第十四 離相寂滅分(상을 떠나서 적멸함) 213

第十五 持經功德分(경을 가지는 공덕) 241

第十六 能淨識心分(능히 업장을 깨끗이 함) 251

第十七 究竟無我分(끝까지 我가 없음) 259

第十八 一體同觀分(한몸으로 동일하게 봄) 277

第十九 法界通化分(법계를 다 교화하다) 286

第二十 離色離相分(색과 상을 떠나다) 289

第二十一 非說所說分(설함과 설하여 질 것이 아님) 292

第二十二 無法可得分(법은 가히 얻을 것이 없음) 298

第二十三 淨心行善分(깨끗한 마음으로 선을 행함) 301

第二十四 福智無比分(복과 지혜는 비교할 수 없음) 306

第二十五 化無所化分(교화하되 교화하는 바가 없음) 310

第二十六 法身非相分(법신은 상이 아님) 314

第二十七 無斷無滅分(단멸이 없음) 321

第二十八 不受不貪分(받지도 않고 탐하지도 않음) 324

第二十九 威儀寂靜分(위의가 적정함) 328

第三十 一合理相分(한 덩어리의 이치) 331

第三十一 知見不生分(지견을 내지 않음) 339

第三十二 應化非眞分(응화신은 진신이 아님) 345

 

일러두기

一. 이 책의 대본은 구마라즙본에 註解를 加한 雲興寺 版本을 사용했다.

一. 科 分段은 구마라집이 채택한 梁 昭明太子의 三十二分章에 따랐다. 本文과 註解가 혼성되어 있는 原典을 그대로 번역하였다. 금강경의 각 分마다 譯者가 해설을 덧붙여 금강경의 깊은 뜻을 이해하기 쉽게 배려했다.

一. 譯註는 되도록 고찰의 필요성이 있는 부분이나 전문술어등에만 한정하여 간결하게 풀이했다. 한편 譯文中 필요에 따라, 또 譯文만으로 文義가 미흡할 때는 괄호안에 내용을 보충 설명했다.

一. 번역대본에서 모음 아래의 주격조사는 ‘가’로 통일시켰다

一. 대본은 전통 강원에서 써오던 운흥사 판을 썼으나 함허스님이 決疑에서 지적한 衍文과 글자 선후가 바뀐 곳, 그리고 문장의 차례가 바뀐 곳 등은 함허 스님의 뜻을 따라 바로 잡았으므로 목판본과는 다른 곳이 많다.

一. 이 책은 明心會에서 개설한 금강경오가해 강의 내용을 이호묵 씨가 정리했으며 그것을 다시 교열, 윤문하고 수정 검토한 것이다. 번역은 되도록 直譯하였으며 문맥이 압축되어 의미전달이 부

 

冶父道川禪師 頌

冶父

야부 ○

○(金剛般若波羅蜜經에 대한 야부스님의 견해)

설의 圓相之作이 始於南陽忠國師하니 國師가 傳之耽源하시고 源이 傳之仰山하시다 源이 一日에 謂仰山曰國師가 傳六代祖師의 圓相九十七介하사 授與老僧하시고 臨示寂時에 謂予曰吾滅後三十年에 有一沙彌가 來自南方하야 大振玄風하리니 次第傳授하야 無令斷絶케하라하시니 吾詳此讖컨댄 事在汝躬일새 我今付汝하노니 汝當奉持하라 山이 旣得에 遂焚之하시다 源이 一日에 謂仰山曰向所傳圓相을 宜深秘之니라 山이 曰燒却了也니이다 源이 曰此乃諸祖의 相傳底어늘 何乃燒却고 山이 曰某가 一覽而已知其意호니 能用卽得이라 不可執本也니이다 源이 曰在子卽得이어니와 來者는 如何오 山이 於是에 重錄一本하야 呈似하시니 一無舛訛러라 源이 一日에 上堂이어시늘 山이 出衆하사 畫一圓相○하야 以手로 托起하사 作呈勢하시고 却叉手而立하신대 源이 以兩手로 交拳示之하시다 山이 進前三步하사 作女人拜하신대 源이 遂點頭어시늘 山이 卽禮拜하시니 此는 圓相所自作也니라 今師가 題下에 畫一圓相하신 意旨如何오 卽文字하야 拈出離文字底消息이니라 若是離文字底消息인댄 擬議得麽아 計較得麽아 不可以有心으로 求며 不可以無心으로 得이며 不可以語言으로 造며 不可以寂黙으로 通이니 直饒釘嘴鐵舌이라도 也卒話會不及이니라 然雖如是나 畢竟作麽生道오 生佛이 同源이요 妙體無物이라 三世諸佛이 出不得이며 歷代祖師가 出不得이며 天下老和尙이 出不得이며 六道輪廻도 亦出不得이며 三世間과 四法界의 一切染淨諸法이 無一法도 出此圓相之外니 禪은 謂之最初一句子요 敎는 謂之最淸淨法界요 儒는 謂之統體一太極이요 老는 謂之天下母라 其實은 皆指此也니 古人이 道하사대 古佛未生前에 凝然一相圓이라 釋迦도 猶不會어니 迦葉이 豈能傳者가 是也니라

圓相을 최초로 그린 이는 남양(南陽) 慧忠국사이다. 국사가 한 ○을 그려 탐원(耽源)에게 傳하고 탐원(耽源)이 앙산(仰山)에게 전했다. 耽源이 하루는 仰山에게 이르기를 “국사께서 六代祖師의 圓相 九十七개를 傳하사 老僧이 받으시고 돌아가실 때에 나에게 이르시길 ‘내가 滅後 三十年에 한 沙彌가 남쪽으로부터 와서 玄風(禪風)을 크게 떨치리니 차례로 전수해서 단절하지 않게 하라’하시니 내가 이 예언을 자세히 살펴보니 이 일이 너에게 있음이라. 내가 지금 너에게 주노니 너는 마땅히 받들어 가지라” 仰山이 이미 얻으매 그것을 태워버렸다. 耽源이 하루는 仰山에게 말하길 ‘지난번 전해준 圓相을 깊이 간수하라’하니 仰山이 ‘태워버렸습니다’하였다 耽源이 말하길 ‘이것은 여러 祖師스님이 서로 傳한 것인데 어찌 태워버렸는가’하니, 仰山이 말하길 ‘제가 한 번보고 이미 그 뜻을 다 알았으니 쓸 때가 되면 能히 쓸 수 있어서 가히 그 本(○)에 執着할 것은 아닙니다’하였다. 耽源이 이르기를 "그대에게 있어서는 그럴 수 있겠지만 앞으로 오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겠느냐" 仰山이 이에 거듭 한 本을 그려서 들어 바치니 하나도 잘못됨이 없었다. 하루는 耽源이 堂(법상)에 오르시매 仰山이 대중 가운데서 나와 한 개의 圓相을 그려서 손으로 받쳐드시는 자세를 지으시고 물러나 叉手하고 서 계시는데 耽源이 兩手로써 交拳(인사하는 자세)하여 보이셨다. 仰山이 앞으로 세 걸음 나아가 여자의 절을 하자 耽源이 드디어 고개를 끄덕이시자 仰山이 곧 예배하였다. 이것이 圓相을 지은 시초이다.

그러면 이제 야부 스님이 제목 아래에 圓相을 그리신 뜻은 무엇인가. 文字에서 文字를 벗어나는 소식을 끌어냈음이라. 만약 이 文字를 떠난 소식일진대 그것은 思量으로 이해되거나 計較할 수 있는 것인가. 가히 有心으로 구할 수 없고 無心으로 얻을 수도 없으며 언어로써 표현할 수도 없으며 寂黙(黙黙)함으로써 통할 수도 없음이니, 설사 쇠로 된 부리(입술)와 철로 된 혀로도 마침내 말이 미칠 수 없음이라. 비록 그러하나 畢竟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衆生과 부처가 같은 근원이요, 妙體엔 事物이 없음이라. 三世의 부처님도 그것을 벗어날 수 없으며 歷代祖師도 벗어날 수 없고 天下 老和尙도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六道에 輪廻하는 이들도 또한 벗어날 수 없음이로다. 三世間(器世間, 衆生世間, 智正覺世間)과 四法界의 一切 染淨諸法이 한 法도 이 圓相 밖을 벗어날 수 없음이니 禪은 그것을 일러 최초의 一句字라 하고, 敎에서는 가장 淸淨한 法界라 한다. 儒敎에서는 統體가 한 太極이라 하고 老子는 천하의 어머니라 하여 그 實은 다 이것을 가리켰다. 옛사람이 이르되 옛부처님이 나시기 이전에 분명하게 한 모양이 둥글었음이라. ‘釋迦도 오히려 알지 못했거니 迦葉이 어찌 能히 傳했겠는가.’한 것이 이것이다.

야부 法不孤起라 誰爲安名고

法은 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님이라.

누가 이름을 두었는가.

설의 法之一字는 直指圓相이요 安名二字는 直指經題니 法不自名이라 要因名現일새 所以安名이니라 所以로 道호대 總持無文字로대 文字現總持라하시니 應云法不孤起라 所以安名이어늘 而云誰爲安名은 語忌十成故며 恐成死語故니 圓話自在하야사 免夫招謗이니라 又法不自名일새 所以安名이니라 然雖如是나 安名者가 誰오 若道黃面老子安인댄 黃面老子가 未嘗安이시니 何則고 自從鹿野苑으로 終至拔提河히 於是二中間에 未曾說一字요 若道不是黃面老子安인댄 今此經題는 從甚處得來요 且道하라 是安名가 不是安名가

法이란 한 글자는 바로 圓相을 가리키고 安名 두 글자는 바로 經의 題目을 가리키니 法은 스스로 이름하지 않음이라. 필요에 인하여 이름을 나타내므로 이름을 두었도다. 그런 이유로 말씀하시되 總持(陀羅尼)는 文字가 아니되 文字로써 總持를 나타냄이니 마땅히 法은 홀로 일어남이 아니라. 그리하여 이름을 두었다 하거늘 ‘누가 이름을 두었는가’한 것은 十成(圓滿함, 완전함)을 꺼리는 연고로 말한 것이며 死語(죽은 말)를 이룰까 두려워한 까닭이니 완전한 말이 自在하여야 비방을 면하리라. 또한 法은 스스로 이름하지 않으므로 이름을 둔 것이로다. 비록 이와 같으나 이름을 둔 자는 누구인가. 만약 黃面老子(佛)가 했다고 하면 黃面老子는 일찍이 이름을 두지 않으셨으니 어인 일인가. 鹿野苑(初轉法輪地)으로부터 발제하(拔提河,跋提河)(拘尸那, 拘尸羅, 구시나가라 城밖에 있는 江)에서 마치실 때까지 이 두 중간에 일찍이 한 자도 說하지 않으셨으니 만약 黃面老子가 하지 않았다면 지금 이 經의 제목은 어느 곳에서부터 왔는가. 또 일러보아라. 이름을 둔 것인가, 이름을 두지 않은 것인가.

야부 摩訶大法王이여 無短亦無長이로다 本來非皀白이로대 隨處現靑黃이로다 花發看朝艶이요 林淍逐晩霜이로다 疾雷는 何太擊고 迅電도 亦非光이로다 凡聖도 元難測이어니 龍天이 豈度量이리오 古今에 人不識일새 權立號金剛이로다

크고 크신 法王이여,

짧지도 않고 또한 길지도 않음이로다.

本來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지만

곳에 따라 靑黃으로 나타나도다.

 

꽃이 피어 아침의 고운 모습 보이고

나무들 낙엽 지니 늦서리 내리 도다.

천둥은 어찌 그리 크게 치는가.(疾雷何太擊)

빠른 번개도 역시 빛이 아니로다.

 

凡夫 聖人 元來로 측량키 어렵거니(凡聖元難測)

天龍八部가 어찌 헤아리리요

예나 지금이나 아는 사람 없어서

方便으로 금강(金剛)이라 이름했도다.

설의 他本에 擊은 作急하고 元은 作猶하다

法王은 非指丈六金身이라 人人本有底一着子니 能爲萬像之主라 故로 號爲法王이니 古人이 道호대 法中王最高勝하니 恒沙如來同共證者가 是니라 法王之爲體也가 孤高更無上하고 廣博無邊表하야 乾坤이 在其內하고 日月이 處其中이라 恢恢焉蕩蕩焉하야 逈出思議之表일새 故로 號爲大法王이니라 無短云云은 實相無相이요 本來云云은 無相現相이요 花發云云은 當處出生하야 當處寂滅이요 疾雷云云은 妙旨迅速하야 難容擬議요 凡聖云云은 箇事極幽玄하야 智識俱不到니 非但古人罔措라 亦乃今人도 不識일새 爲止小兒啼하야 權且立虛名이날 只如依權現實底道理를 作麽生道오 月隱中峯에 擧扇喩之요 風息太虛에 動樹訓之니라

다른 책엔 擊은 急이고 元은 猶로 되어 있다. 法王은 丈六金身을 가리킴이 아니요, 사람사람이 本來 지니고 있는 一着子(한 物件)이니 能히 萬像의 주인이 되므로 法王이라 했도다. 옛사람이 이르되 法王이 가장 높고 殊勝하니 항하사와 같은 많은 如來가 다같이 證得했다함이 이것이라. 法王의 體의 됨됨이 높고 높아 다시 위가 없고, 넓고 넓어 한정할 수 없어서 하늘과 땅이 그 안에 있고 日月이 그 가운데 처했도다. 크고 커서 탕탕하여 멀리 생각 밖을 벗어났으므로 大法王이라 했다. ‘짧지도 않다’함은 實相은 相이 없음이요 ‘本來~’는 相이 없는 가운데 相을 나타냄이요. ‘꽃이 피어~’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고 그 자리에서 없어짐을 말함이요. ‘천둥~’이라 함은 妙한 뜻이 신속해서 思量分別을 용납하지 않음이요, ‘凡夫 聖人’이라 함은 그 일이 지극히 깊고 그윽해서 智慧와 識으로써 이르지 못하니 다만 옛사람들도 그것을 어찌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지금의 사람도 알지 못하여 어린아이의 울음을 그치기 위해서 방편으로 헛된 이름을 세웠도다. 그러면 저 방편을 의지하여 진실(實)을 나타내는 도리를 어떻게 말할 것인가.

달이 중봉에 숨으니

부채를 들어 그것에 비유하고

바람이 큰 하늘에서 쉬매

나무를 흔들어서 그것을 알리도다.

 

 

第一 法會因由分(법회를 이룬 연유)

如是我聞하사오니 一時에 佛께서 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하사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으로 俱러시니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한때에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시사 큰 비구들 일천이백오십인과 더불어 함께 하셨다.

야부 如是여

如是여

설의 如是之言을 古人이 說有多途호대 今川老는 蓋取有無不二爲如와 如非有無爲是니라

如是란 말은 古人들이 여러 갈래로 說하셨는데, 지금 川老(야부)는 대개 有와 無가 둘이 아님을 如라 했고 또 如는 有, 無가 아닌 것이 是가 됨을 취한 것이다.

야부 古人이 道하사대 喚作如如인댄 早是變了也라하시니 且道하라 變向甚麽處去오 咄 不得亂走어다 畢竟作麽生고 道火不曾燒却口니라

옛 사람이 이르기를 “如如“라 말한다면(喚作如如) 벌써 이것은 變해 버린 것이다 하였다. 또한 일러라. 變하여 어떤 곳을 向해 갔는가. 咄, 어지럽게 쫓아다니지 말라. 畢竟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불(火)을 아무리 말하여도 일찍이 입을 태운적이 없도다.

설의 南泉이 問請師하사대 講甚麽經고 云講涅槃經이니다 云經中에 以何爲極則고 云以如如로 爲極則이니다 云喚作如如인댄 早是變了也니 須向異類中行하야 道取異中事하야사 始得다하야시늘 法眞一이 頌云호대 涅槃寂滅이 本無名하니 喚作如如早變生이라 若問經中何極則하면 石人이 夜聽木鷄聲이라호리라하시니 謂涅槃寂滅이 本無名字하니 若立名字하면 未免變異去在라 須向異類中行하야 道取異中事히야 圓轉不觸하야사 始得이니라 且道하라 變向甚麽處去오 咄不得亂走어다 若以變不變으로 商量하면 又却不是也니라 畢竟作麽生고 涅槃寂滅이 雖本無名이나 亦不妨因名現體니 爲甚如此오 說名之時에 早己風吹不入이요 水洒不著이라 只有一段通身寒光이어니 喚作如如인들 有甚變去리오

남전(南泉)이 講師에게 물었다. "무슨 經을 講義하십니까?" "涅槃經을 강의합니다." 또 묻기를 "經 가운데서 무엇을 極則(第一 重要視함)으로 삼습니까." 答하길 "如如로서 극측을 삼습니다." 남전이 이르길 "如如라 말하면 벌써 變해버렸으니 모름지기 異類中(다른 입장, 또는 畜生類)을 향해 行해서 이중사(異中事)를 취했다 하여야 비로소 옳을 것입니다." 하니 법진일(法眞一)이 송(頌)하기를

“涅槃寂滅이 本來 이름이 없다.

如如라 하면 이미 변해버렸음이라.

만약 經中에서 무엇이 極則인가 물으면

石人이 밤에 木鷄(나무로 만든 닭)소리를 듣는다 하시니라.

涅槃寂滅이 本來 이름이 없으니 만약 이름을 세우면 변해버림을 면치 못하니 모름지기 異類中을 향해 行한 곳에 나아가 異類事를 取해 말해야 원만히 굴려 부딪히지 않으므로 비로소 옳다할 것이다.

또한 일러라. 변함은 어느 곳을 향해 갔는가. 咄. "어지럽게 쫓아다니지 말라" 하였는데 만일 變함과 不變함으로서 헤아리면 또한 도리어 옳지 못하다. 그렇다면 畢竟 어떻게 할 것인가. 涅槃寂滅이 비록 本來 이름은 없으나 또한 이름으로 因하야 涅槃寂滅의 體가 나툼을 妨害하지도 않으니 어찌하여 그런가. 이름을 말할 때에 이미 바람이 불어도 들어가지 못하고 물을 뿌려도 붙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一段의 몸에 사무친 찬 빛이 있으니(깨달은 자의 입장에서) 如如라 부른들 무엇이 變해갈 것 있겠는가.

야부 如如여 靜夜長天에 一月孤로다

如여, 如여, 고요한 밤 먼 하늘에 하나의 달이 외롭도다.

설의 水與波가 無二하고 波與水가 不別하니 淸寥寥時에 元的的이요 白的的處에 亦寥寥로다

물과 물결이 둘이 아니고 물결과 물이 다르지 않다. 맑고 고요한 때가 元來 的的(분명)하고 白的的(밝고 분명)한 곳이 또한 고요한 곳이다.

야부 是是여 水不離波波是水라 鏡水塵風不到時에 應現無瑕照天地니 看看하라

是여 是여,

물은 물결을 떠나지 않으니 물결이 바로 이 물이로다.

거울 같은 물에 티끌과 바람이 이르지 않아야

應해서 나타나매 티없이 天地를 비추니

자세히 보고 보아라.

설의 指水全是波요 指波全是水라 毘盧華藏이 物物頭頭요 萬像森羅가 全機無垢로다 機無垢여 本淸淨하니 鏡淨水澄하야 風塵이 不到라 湛湛地에 明歷歷하야 輝天鑑地하고 曜古騰今이로다 要會麽아 要會인댄 高着眼이어다

물전체가 이 물결임을 가리키고 물결 전체가 이 물임을 가리켰도다. 비로자나(毘盧遮那)와 화장세계(毘盧華藏)가 사물 하나하나에 다 갖추어져 있고(物物頭頭)이고 만상삼라(萬像森羅) 전부가 때가 없다(無垢). 森羅萬像에 떼가 없어 本來 淸淨하여 거울도 맑고 물도 맑아서 바람과 티끌(風塵)이 이르지 아니하면 맑고 맑은 곳에 밝은 것이 또렷또렷하여 하늘을 빛내고 땅을 비춰서 옛에도 빛났고 지금도 빛난다. 알고자 하는가. 알고자 하면 눈을 높이 뜰지어다(高着眼).

야부 我여

我여,

설의 指天指地獨立底人이로다

하늘을 가리키고 땅을 가리키며 홀로 서있는 사람이다.

야부 赤裸裸淨洒洒하야 沒可把로다

赤裸裸하고 淨洒洒하여 가히 잡을 수 없다.

설의 古人이 道하사대 阿呵呵是甚麽오 南北東西에 唯是我라하시니 雖云南北東西에 唯是我나 爭乃一切處에 摸扌索不着이리오 是可謂境上施爲渾大有나 內外中間覓摠無로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하하하 이것이 무엇인고 南北東西에 오직 이 ‘나’“라 하시니 비록 南北東西에 오직 나 하나인데 어찌하여 一切處에서 찾지 못하였는가. 이것은 가히 境界 위에서 渾然히 크게 있으나 안과 밖 중간을 찾아봐도 모두 없음이로다.

야부 我我여 認得分明成兩箇라 不動纖毫合本然하니 知音이 自有松風和로다

我여, 我여.

인식하면 分明 두 개(주관 · 객관)가 된다.

털끝만큼도 動하지 않고 本來 自然한 것에 合하였으니

소리를 아는 사람(知音者)이 있어서 저절로 솔바람에 和答할 것이다.

설의 若道我有인댄 眼中着屑이요 若道我無인댄 肉上剜瘡이니라 所以로 道호대 有我直應還未達이요 若言無我更愚癡라하니 一體上에 兩般見이여 析虛空作兩片이로다 兩頭俱不涉하야사 方得契如如니 踏得家田地하야 唱出無生曲이로다 無生曲子를 孰能和오 蕭蕭松籟送淸音이로다

만일 내가 있다고 말한다면 눈 속의 티이고 만일 내가 없다고 말한다면 살을 긁어서 부스럼을 만듦이라. 이러므로 이르되 “내가 있다고 하면 바로 마땅히 통달(通達)치 못하고 만일 내가 없다고 말하면 다시 어리석게 된다”하니 한 몸 위에 두 가지 所見이여, 虛空을 쪼개서 두 조각을 만듦이로다. 두 가지에 모두 들어가지 않아야 비로소 여여(如如)에 契合하여 제집 땅(家田地)을 밟고 無生曲을 부를 것이다.

無生曲에 누가 能히 화답하겠는가?

소슬한 솔바람소리가 맑은 소리를 보낸다.

야부 聞이여

聞이여,

설의 本是一精明이 分爲六和合이니 合處에 如瞥地하면 見處가 是眞聞이니라

本是 한 精明이 나누어져 六和合(六境+六根=六識)이 되었으니 合한 곳에서 깨달으면 보는 곳이 참으로 듣는 것이니라.

야부 切忌隨他去이다

간절히 남(境界)을 따라가는 것을 삼가하라.

설의 滿耳非音이어니 聞箇甚麽며 廓然無我어늘 聞底는 是甚麽오 了得如是하면 鶯歌與燕語를 從敎鬧浩浩어니와 若未如然인댄 宮商幷角徵가 化我常抽牽하리니 所以로 道호대 切忌隨他去라하시니라

귀에 가득한 것이 소리가 아니거니 듣는 것이 무엇이며, 廓然히 내가 없는데 듣는 자는 이 누구인가? 이렇게 깨달으면 꾀꼬리 노랫소리와 제비의 지저귀는 소리를 시끄러운 대로 맡겨두거니와 만약 그렇지 못하면 宮商角徵羽(궁상각치우)가 항상 나를 끌어당기리라. 그러므로 이르되 간절히 남(境界)을 따라 가는 것을 삼가라 한 것이다.

야부 聞聞이여 猿蹄嶺上이요 鶴唳林間이라 斷雲風捲하고 水激長湍이로다 最好晩秋霜午夜에 一聲新雁이 覺天寒이로다

聞이여, 聞이여,

원숭이는 고개위에서 울고

학은 숲속에서 우는데

조각 구름은 바람에 걷히고

물은 긴 여울져 흐르도다.

가장 좋은 늦가을의 서리내린 한 밤에

새끼 기러기 한 소리가 하늘이 차가움을 알리도다.

설의 (好는 一作愛라) 鶴唳猿啼聲入耳하니 誰信圓通門大啓오 反聞聞處에 心路斷하면 八音이 盈耳不爲塵하리라 不聞이 曾不礙於聞하니 頭頭爲我話無生이로다 夜靜秋空征鴈響이여 一聲聲送報天寒이로다 且道하라 是聞가 不是聞가 淡薄豈拘聲色外며 虛閑寧墮有無中이리오

(好는 한 곳에서는 愛로 됨) 학이 울고 원숭이 우는소리 귀에 들어오니 누가 圓通門이크게 열린 것을 믿을 것인가. 듣는 곳을 돌이켜 다시 듣는 곳에서 마음 길이 끊어지면 八音이 귀에 가득하여도 煩惱가 되지 않는다. 듣지 않는 것이 일찍이 듣는 것에 障礙되지 않으면 낱낱 事物이 나를 爲해서 無生을 말하도다.

고요한 밤 가을 하늘에 날아가는 기러기의 메아리여,

한 소리 울려 하늘이 차가움을 알려오도다.

또한 일러라. 이것이 듣는 것인가 듣지 않는 것인가.

담박(淡薄)한 것이 어찌 聲色밖에 걸리며

비어 고요함(虛閑)이 어찌 有無 가운데 떨어질 것인가.

야부 一이여

일(一)이여,

설의 天地之根이요 萬化之源이라 千途가 共向於彼하고 萬像이 皆宗於此로다

天地의 근본이며 온갖 변화(萬化)의 근원이다. 천가지 길이 모두 저것(一)를 향하고 森羅萬像이 이것을 근본한다.

야부 相隨來也로다

서로 따라 옴이로다.

설의 三界萬法에 皆從斯起하니 兵隨印轉이요 影逐形生이로다

三界의 萬法이 모두 이것으로부터 일어나니 병졸들은 印(깃발)을 따라 움직이고 그림자는 形象을 좇아 나타나도다.

야부 一一이여 破二成三이 從此出이라 乾坤混沌未分前에 以是一生參學畢이로다

一이여, 一이여. 이(二)를 부숴 삼(三)을 이루는 것이 이것으로부터 일어났도다. 天地가 나뉘기 이전에 이것으로 一生의 참학(參學)을 마쳤음이로다.

설의 破二도 以一也며 成三도 亦以一也니 成之破之가 皆從斯得이로다 興來先天地요 無形本寂寥하니 能爲萬像主요 亦爲諸佛母라 若人이 了得此하면 無事不圓通하리라

둘(二)을 부수는 것(破)도 일(一)로서 하고 셋(三)을 이루는 것도 또한 一로서 하니 이루고 부수는 것이 모두 이로부터 된다. 이루어지기는 天地보다 먼저 하였으나 形象 없이 本來 고요하므로 能히 萬像의 主가 되고 또한 모든 부처님들의 어머니가 된다. 만약 사람이 이것을 了達하면 일마다 圓滿하여 통하지(圓通) 아니한 것이 없을 것이다.

야부 時여

때(時)여,

설의 遠劫一念이 無碍하고 古今始終이 該通이라 爲甚如此오 動靜이 常在靑山中이니라

오랜 세월과 한 순간(一念)이 걸림이 없고, 옛과 지금과 처음과 끝이 모두 하나로 通하니 무엇이 이와 같은가. 동과 정(動靜)이 항상 靑山中(動하지 않는 마음의 心體)에 있다.

야부 如魚飮水에 冷暖自知로다

물고기가 물을 마시매 차고 더운 것을 스스로 아는 것 같다.

설의 怎生이 是冷暖底滋味오 明月堂前에 時時九夏요 太陽門下에 日日三秋로다 此味를 無人識하니 親嘗하야사 始自知니라

무엇이 차고 더운 맛을 내는가.

달 밝은 집 앞에는 항상 九夏이고

햇빛 비친 문 앞에는 나날이 三秋로다.

이런 맛을 아는 사람이 없으니

친히 맛보아야 비로소 스스로 알 것이다.

야부 時時여 淸風明月이 鎭相隨라 桃紅李白薔薇紫를 問着東君自不知로다

時여, 時여,

淸風明月이 항상 서로 따르고

도화는 붉고 오얏꽃은 희며 장미꽃이 붉은 것을

東君(봄바람)에게 물었더니

그도 또한 스스로 알지 못한다

설의 淸風明月을 不得別會니 淸風拂時에 明月照하고 明月照時에 淸風拂이로다 桃李薔薇는 東君造化底物事로대 東君이 不知하고 淸風明月은 人人受用底家事로대 人人이 不會하나니 不會不知여 人人이 盡有一雙眉요 箇箇面前에 更無人이로다 着語云自知라하고 頌云不知라하시니 不知與自知가 相去多少오 但知不知하면 是眞自知니라

淸風과 明月을 따로 알지 말 것이니, 淸風이 불 때에 明月이 비치고 明月이 비칠 때에 淸風이 분다. 복숭아꽃, 배꽃, 장미꽃은 봄바람의 調和속의 産物인데 봄바람이 알지 못하고 淸風明月은 사람들이 수용하는 집안 일이지만 사람들이 알지 못하니,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함이여, 사람들이 모두 한 雙의 눈썹을 가지고 있고 낱낱의 얼굴 앞에 다시 사람이 없다. 착어(着語)에 이르되 "스스로 안다"고 하고 송(頌)에는 "알지 못한다."하셨는데 알지 못함과 스스로 아는 것이 서로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

다만 알고 알지 못 함을 안다면 이것이 참으로 스스로 아는 것이다.

야부 佛이여

부처(佛)여,

설의 本源天眞이 是아 相好嚴身이 是아 一身이 分作兩鄕心이로다

本來 天眞한 根源(本源天眞)이 이것이냐. 훌륭한 상호(相好嚴身)가 이것이냐. 한 몸을 쪼개어 두 마음(兩鄕心)을 짓는다.

야부 無面目說是非漢이로다

면목(面目)도 없이 옳고 그름(是非)을 말하는 놈이로다.

설의 無形還有像하니 逢人說是非로다

형상이 없는데 도리어 모습이 있다하니 사람을 만나 是非를 했도다.

야부 小名은 悉達이요 長號는 釋迦라 度人無數하사 攝伏群邪로다 若言他是佛하면 自己는 却成魔니 只把一枝無孔笛하야 爲君吹起太平歌로다

어려서 이름은 싣달타(悉達多) 이고 커서 이름은 釋迦다.

數 없는 사람을 제도하고

삿된 무리를 거두어 항복받으셨다.

만약 저를 부처라 말한다면

自己가 도리어 魔軍이 될 것이니

다만 한 가닥 구멍 없는 피리(無孔笛)를 잡아서

그대를 위하여 太平歌를 부르리라.

설의 世與出世가 是俱化儀니라 雖然如是나 妙相은 無形이요 眞名은 非字니 形之與名을 甚處에 得來요 不因江招月이면 爭知應萬般이라오 應萬般이여 多少人天이 言下에 知歸하고 多少魔群이 廻邪返正고 此是拔亂返正하야 致得太平이어니와 須知有本太平하야사 始得이니 若將報化云是佛인댄 自己天眞은 竟何物고 君看四十九年迹하라 太虛空裏에 生閃電이로다 君看四十九年說하라 權將黃葉止兒啼로다 唯有一處가 也大難忘하니 黃葉葉底無孔笛으로 吹起吾家劫外歌로다 劫外歌여 歌何事오 歌詠人人本太平이로다 怎生是本太平고 人人脚下헤 淸風拂이요 箇箇面前에 明月白이로다

世間과 出世間이 모두 敎化하는 儀式(化儀)이다. 비록 그러하나 妙한 相은 形象이 없고 참된 이름은 글자가 아니다. 그러면 形象과 이름을 어느 곳에서 얻어올 것인가. 江을 因하여 달을 불러오지 아니하면 어찌 온갖 곳에 應함을 알 것인가. 온갖 곳에 應함이여, 많은 사람과 天人이 言下에 돌아갈 줄 알고 많은 魔群이 사(邪)를 돌이켜 정(正)에 돌아오니 이것은 어지러움을 뽑아버리고 바른 것에 돌아가 太平을 얻는데 이르겠지만, 모름지기 本來 太平한 것이 있음을 알아야 비로소 옳을 것이다.

만약 報身과 化身을 가리켜 부처라 한다면 自己의 天眞(佛性)은 다시 무슨 物件인가.

그대! 四十九年의 자취를 보라. 큰 虛空 속에서 번갯불이 번쩍이는 소식이로다.

그대! 四十九年 說法하신 것을 보라. 방편으로 黃葉(經)을 잡아 아이의 울음소리를 그치게 한 것이다. 오직 한 곳이 크게 잊기 어려우니 黃葉과, 구멍 없는 피리(法音)로써 우리 집의 겁외가(劫外歌)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겁 밖의 노래여!

무엇을 노래하는가. 사람사람이 本來 가지고 있는 太平歌를 부름이로다.

무엇이 本來의 太平한 것인가. 사람사람의 발아래(그 자리) 淸風이 불고 사람사람의 面前에 明月이 비친다.

야부 在여

있다(在)여,

설의 主中主여 長年을 不出戶로다 又寂然不動이로다 又獨坐庵中寂無事로다

주인 가운데 주인이여, 오랜 세월을 문밖을 벗어나지 안 했다. 또한 적연(寂然)하여 움직이지 않았고 또 홀로 암자에 앉아 고요히 일이 없음이로다.

야부 客來須看이니 也不得放過하고 隨後便打니라

客이 오면 자세히 살필지니 그냥 지나치지 말고 뒤를 따라가서 문득 쳐야하느니라.

설의 若一向坐在家舍則途中事가 闕이요 一向行在途中則家裏事疏니 要須在家舍而不虧途中事하고 在途中而不昧家裏事하야사 始得다 所以로 道호대 妙喜가 豈容無着問이리오마는 漚和론 爭負絶流機아하시니라 又客來云云은 感而遂通이요 不得云云은 隨緣無着이니라 又客來云云은 若遇客來어든 須善待요 不得云云은 是客이 稍有賊氣在니 知有賊氣어든 須打殺니라

만약 늘 집에만 앉아 있으면 途中의 일을 빠뜨리게 되고 늘 途中에만 있으면 집안의 일을 소홀히 할 것이니 모름지기 집안에 있으면서도 途中의 일을 빠뜨리지 않고 途中에 있으면서도 집안 일에 어둡지 아니하여야 비로소 옳다.

이런 까닭으로 이르기를 妙喜(文殊菩薩)가 어찌 無着禪師의 물음을 容納하리오마는 방편으로 絶類機(大根機)를 저버리겠는가 한 것이다. 또 ‘客이 오면(客來)’이라 한 것은 느껴서 마침내 통한 것이요, ‘그냥 지나치지 말라(不得)’고 한 것은 緣을 따라(隨緣) 執着하지 않음이다.

또한 ‘客이 오면-’이라 한 것은 만약 客이 오면 모름지기 잘 대접하고, ‘그냥 지나치지 말라’함은 손님이 약간 盜賊氣가 있으니 도적기가 있음을 알면 모름지기 쳐죽일 것이니라.

야부 獨坐一爐香하야 金文을 誦兩行이로다 可憐車馬客이여 門外에 任他忙이로다

홀로 한 향로 옆에 앉아서

經典(金文) 두어 줄을 외우노라

가련하다. 車馬의 客이여.

문밖에서 그의 분망함에 맡기도다.

설의 家裏事와 途中事를 一道俱行이니 常在途中하야 而昧於家裏事가 是可憐也로다 又獨坐云云은 寂照不二하야 體用如如요 可憐云云은 未了底人이 坐在聲色裏하야 三德彼岸에 相去大遠하니 是可憐也로다 又翛然獨坐眼惺惺하니 任他客賊門外忙이로다

집안 일과 途中 일을 한 길로 함께 行해야 하는데, 항상 途中에 있어서 집안 일에 어두운 것이 가련하다 한 것이다.

또 "홀로 한 향로(獨坐)"云云한 것은 寂과 照^가 둘이 아니어서 體와 用이 한결같은 것이고 "可憐하다"함은 깨닫지 못한 사람이 聲色(바깥 境界) 속에 앉아 있어서 三德의 저 언덕에서 서로의 거리가 떨어져 너무 먼 까닭에 "가련하다"한 것이다.

또한 소연히 홀로 앉아 눈(眼)이 성성(惺惺)하니 저 客賊이 문밖에서 분망함을 그대로 내버려둠이로다.

야부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으로 俱여

큰 比丘 千二百五十人과 더불어 함께 하심이여,

설의 主伴이 交參하고 說請이 同會로다

부처님(主)과 대중(伴)이 함께 참석하여 說하고 듣는 자가 함께 모였도다.

야부 獨掌이 不浪鳴이로다

한 손바닥만으로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설의 師資合會하야사 方成唱和로다

스승과 제자가 함께 모여서 바야흐로 先唱하고 和答함을 이루도다.

야부 巍巍堂堂이여 萬法中王이라 三十二相이요 百千種光이라 聖凡이 膽仰하고 外道歸降이로다 莫謂慈容을 難得見하라 不離祇園大道場이로다

높고 높아 堂堂함이여,

萬法 가운데 王이로다.

三十二相에 百千가지 빛이라

聖賢 凡夫가 우러르고

外道가 歸依하여 降伏하도다.

慈悲로운 모습을 뵙기 어렵다 이르지 말라.

祇園 大道場에 아직 그대로 계시도다.

설의 依眞起化에 化道方成이요 感畢遂隱에 而眞常住로다 世云호대 佛生迦毘羅하사 成道摩竭陀하야 說法波羅奈하시고 入滅拘尸羅라하나니 蓋釋迦老子가 於淨飯王宮에 示現出生하사 十九에 出家하고 三十에 成道하사 住世四十九年하시며 說法三百餘會하시고 壽登八十에 而示入滅하시니 其示滅以來가 于今二千餘載라 迹此觀之컨댄 世云佛有去來가 可矣어니와 據實而觀컨댄 來無所來라 月印千江이요 去無所去라 空分諸刹이로다 伊麽則雖云出世나 未曾出世요 雖云入滅이나 未曾入滅이니라 所以로 道호대 莫謂慈容을 難得見하라 不離祇園大道場이라하시니 要識慈容麽아 擬議思量千萬里니라 要識道場麽아 觸目無非古道場이로다

眞(身)에 의지해서 化(身)가 일어나매 가르침(化道)이 바야흐로 이루어지고, 感應하여 마치면 드디어 숨으니 마침내 眞이 항상 머무름이로다. 세상사람들이 말하기를 "부처님은 가비라(迦毘羅)에서 誕生하시고 마갈타(摩竭陀)에서 成道하시어 바라나(波羅奈)에서 法을 說하시고 구시라(拘尸羅)에서 入滅하셨다."하니 대개 석가모니께서는 정반왕궁에서 出生하시어 19세에 出家하시고 30세에 成道하시어 49년간 세상에 머무르시면서 3百餘會를 說法하고 壽가 八十에 이르러 入滅하셨으니 그가 돌아 가신지 이제 2천여년이 되었다. 그의 자취를 살펴보면 세상에서는 "부처님은 오고 가심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지만 실체를 들어 觀해 보면 와도 온 바가 없음이라. 달은 천강(千江)에 비침이요. 가도 가는 자취가 없음이라. 虛空을 모든 世界에 나눔과 같다.

이러한즉 비록 세상에 났으나 일찍이 세상에 나지 안 했고 비록 滅하였으나 일찍이 入滅하지 아니한 것이다. 이러므로 이르되 "慈悲로운 모습을 뵙기 어렵다 말하지 말라. 祈園의 大道場을 떠나지 않았다."한 것이다.

그러면 慈悲로운 모습을 알고자 하는가. 疑心하고 思量하면(擬議思量) 천만리나 멀어지도다.

祇園精舍의 大道場을 알고자 하는가. 눈 닿는 곳마다 옛 道場 아님이 없도다.(지금, 여기, 이 자리가 祇園道場 아님이 없다)

 

爾時에 世尊이 食時에 着衣持鉢하시고 入舍衛大城하사 乞食하실새 於其城中에 次第乞已하시고 還至本處하사

그때는 세존께서 공양하실 때라, 옷 입으시고 바리(鉢盂)를 가지시어 사위대성에 들어가시사 걸식하실 때, 그 성중에서 차례(7집 공양)로 걸식하여 본래의 처소로 돌아오사

 

飯食訖하시고 收衣鉢하시며 洗足已하시고 敷座而坐하시다

공양을 마치시고 옷과 발우를 거두시며 발을 씻으신 뒤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설의 入城乞食은 法身不癡니 以般若로 開示也요 收衣洗足은 般若無着이니 以解脫로 開示也요 敷座而坐는 解脫寂滅이니 以法身으로 開示也니라 方談般若에 以此開示者는 般若之所以爲般若也가 指其本體則名爲法身이요 指其大用則名爲解脫이요 指其當體則名爲般若니라 何則고 直般若는 非般若라 般若가 具法身解脫이요 直解脫은 非解脫이라 解脫이 具法身般若요 直法身은 非法身이라 法身이 具解脫般若니 擧一에 卽具三이요 言三에 體卽一이니라 方談般若에 以此開示者가 不其然乎아

城에 들어가 乞食하는 것은 法身이 어리석지 않은 것이니 般若로써 열어 보임이요, 옷을 거두고 발을 씻으심은 般若(智慧)가 執着함이 없음이니 解脫로써 열어 보임이로다. 자리를 펴고 앉으심은 解脫이 寂滅함이니 法身으로 열어 보이시니라. 바야흐로 般若를 말하매 이것으로써 열어보인 것은 般若가 般若된 까닭이 그 本體를 가리킨 즉 이름이 法身이고 그 作用은 解脫이요, 그 當體는 般若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般若만의 般若는 참다운 般若가 아니고 般若는 法身과 解脫을 갖춰야 함이요, 法身만의 法身은 참다운 法身이 아니라 解脫과 般若를 갖춰야 함이니, 하나를 들면 셋을 갖추고 셋을 말하면 體는 곧 하나이니라. 바야흐로 般若를 말하매 이것으로써 열어보인 것은 그것이 그러하지 않는가.

 

야부 惺惺著이삿다

惺惺著이셨다.

설의 惺之一字를 或以爲了慧라하며 或以爲寂靜이라하니 則惺惺者는 定慧圓明하야 寂照不二之謂也니라 只如定慧圓明하야 寂照不二를 作麽生道오 眼掛長空하고 手握靈鋒이로다

惺의 한 글자를 어떤 사람은 了慧라 하고 어떤 사람은 寂靜이라 하니 곧 惺惺은 定과 慧가 두렷이 밝아 寂과 照가 둘이 아님을 말한다.

그렇다면 定慧가 두렷이 밝아 寂과 照가 둘이 아님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눈을 장공(長空)에 걸어두고 손에는 신령스런 칼을 잡았음이로다.

야부 飯食訖兮洗足已하시고 敷座坐來誰共委오 向下文長을 知不知아 看看平地波濤起니라

供養하시고 발을 씻으신 다음에

자리펴고 앉으심은 누구와 함께 하심인가.

아래의 긴 글을 아는가 모르는가.

보고 보아라. 平地에 波濤가 일어나도다.

설의 入城乞食과 收衣洗足과 敷座宴坐가 一一皆是徹困爲人底時節이니라 入城乞食과 收衣洗足은 且置하고 只如敷座宴坐를 作麽生道오 高提祖令發光寒하니 直得毘耶에 口掛壁이로다 這裏에 除却上上根코는 未免一場扌麽扌羅니 根機莫等일새 要以多方으로 接得이니라 獲鳥者가 羅之一目이나 不可以一目으로 爲羅요 治國者가 功在一人이나 不可以一人으로 爲國이라 所以로 黃面老子가 曲爲中下하사 乃下一步하사 向言說海하야 橫身而入하사 東說西說하시며 橫說竪說하시니라 所以로 道호대 高提祖令當機用하니 利物에 應知語帶悲라하시니 向下文長이 正以此也니라 然이나 慈尊의 伊麽施設이 要之利害가 不細하니 還知得利害也未아 入城乞食收衣宴座로 以至東說西說橫說竪說히 善權方便은 卽不無어니와 據實而觀컨댄 人人分上에 如靑天白日相似하야 本來無爲無事하야 盡大地가 都盧是淸平世界어늘 黃面老子가 向淸平世界上하야 施設戈甲하시니 可謂無事中起事로다 所以로 道호대 看看平地波濤起니라 又古人이 道호대 澄澄性海와 湛湛智源이여 文字言詞가 從玆流出이라하시니 則黃面老子가 向大寂滅海하사 繁興言說波瀾하시니 要之言說波瀾이 初非外來라 終不離於大寂滅海니 敷座處에 如未薦得이면 向言說海하야 薦取하야사 始得다 所以로 道호대 看看平地波濤起니라

入城乞食과 收衣洗足과 敷座宴坐하심은 낱낱이 다 가슴깊이 사무치는 사람을 爲한 소식이로다. 入城乞食과 收衣洗足은 그만두고 저 부좌안좌를 어떻게 말할 것인가. 선사의 가르침을 높이 들어 찬 빛을 발하니 바로 비야리(毘耶) 성에서 입을 벽에 건 것과 같다.

여기에서 아주 영리한 사람(上上根機)을 빼고는 한바탕 부끄러움을 면치 못할 것이니, 근기가 같지 않으므로 여러 方便으로 대중들을 이끌어 들인 것이다. 새를 잡는 것은 그물의 한 눈금으로 족하나 그물의 한 눈금을 그물이라 하지 못함이요, 나라를 다스림에 그 功은 한 사람에게 있으나 한 사람만으로써 나라라함은 옳지 않도다. 그러므로 黃面老子(佛)가 곡진히 中下根機를 爲해서 한 걸음을 내려와서 言說의 바다에 몸을 비껴 들어가시어 동설서설하시고 횡설수설하시니라. 이러므로 祖師의 가르침을 높이 들어 근기에 따라 쓰니 衆生을 이롭게 하는 것은 그 말씀이 慈悲를 띠고 있음을 알라고 하시니 아래의 긴 글은 바로 그것 때문에 쓴 것이다. 그러나 慈悲로운 부처님께서 베푸신 이러한 말씀이 요컨대 利得과 害가 微細하지 못하니 도리어 利가 되고 害가 됨을 알겠는가.

성에 들어가 밥을 빌고 옷을 거두고 자리에 앉으심으로부터 동설서설과 횡성수설에 이르기까지 좋은 方便은 곧 없지 않으나 그 실제를 觀하건대 사람사람의 分上은 靑天白日과 같아서 本來 함도 없고 일도 없어서 온 天地가 모두 그대로 비로자나(毘盧遮那)의 淸平世界(佛國土)거늘 黃面老子(佛)가 이 청평세계를 向하여 괜히 창과 갑옷(戈甲)을 만들어 놨으니 가히 이것은 일없는 가운데서 일을 만들었도다. 이러므로 이르시되 "보고 보아라. 平地에서 波濤가 일어났도다(冶言)."하신 것이다. 또 옛 사람이 이르되 "맑고 맑은 性品의 바다(性海)와 맑고 맑은 智慧의 근원(智源)이여, 文字와 言辭가 여기로부터 흘러 나왔다."하니 곧 黃面老子가 大寂滅의 바다를 向하여 번거롭게 言說의 波濤을 일으켰으나 요컨대 그 言說의 波濤가 애초에 밖에서 온 것이 아니라 마침내 大寂滅의 바다를 떠나지 않았으니 자리를 펴고 앉은 그곳에서 알아듣지(篤得)치 못한다면 言說의 바다를 向하여 그 가운데서 取하여야(薦取) 비로소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잘 보아라. 平地에서 波濤가 일어나는 것을!

 

第二 善現起請分(선현이 법을 청하다)

時에 長老須菩提가 在大衆中이라가 卽從座起하사 偏袒右肩하시며 右膝着地하시고 合掌恭敬하사 而白佛言하사대 希有世尊하 如來가 善護念諸菩薩하시며 善護念諸菩薩하시나니

그 때에 장로 수보리가 대중 가운데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 어깨에 옷을 벗어메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으며 합장하고 공경히 부처님께 사뢰었다.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들을 잘(익숙하고 능란하게) 호념하시며 모든 보살들에게 잘 부촉하(당부하여 맡기)십니다.

설의 楊岐가 云黃面老子가 幸自可憐生이로다 被須菩提의 出來道介希有하야 當下에 氷消瓦解라하시니 此老此說은 只要敎人으로 向劫外承當이니라 所以로 大慧가 擧此話云黃面老子가 不下一言이어시늘 須菩提가 見介甚麽道理인대 便道希有오 但向楊岐의 氷消瓦解處看하야 自然看得破하면 一生參學事畢이라하시고 又古德이 頌云四溟에 風息月當天하니 不動波瀾駕鐵船이라 賴得空生이 重漏洩하야 免同良馬暗窺鞭이라하시니 則世尊이 端坐하사 不下一言處에 最初一句子를 覿面提持하사 向諸人面前하야 兩手로 分付了也어시늘 須菩提가 早知如是하사 出來道希有하시니 不有須菩提면 誰知暗中明이리오 因憶毘耶의 當日事하니 一聲雷震三千界로다

楊岐(方會禪師)스님이 이르되 黃面老子가 (須菩提 덕택에) 스스로 가련하게 되었도다. 須菩提가 나와서 “希有하십니다” 함을 듣고 그 자리에서 얼음을 녹이고 기와를 풀게하였다(氷消瓦解) 하시니 이 楊岐스님의 이러한 말씀은 사람들로 하여금 劫밖을 向해서 알아차리게 하는 소식이니 이런 까닭에 大慧(宗杲禪師)가 이 말씀을 듣고 "黃面老子가 한 말씀도 하지 아니했는데 須菩提가 무슨 道理를 보았길래 "希有하십니다."하였는가. 다만 楊岐스님이 말한 氷消瓦解處를 향하여 자연히 간파하면 一生의 參學을 마칠 것이다(一生參學事必:大慧).“하였다. 古德(정음)선사께서 頌하기를

四海에 바람이 쉬니 달이 하늘에 떠 있어서

파도를 움직이지 않고 鐵船을 몰고 가도다.

空生(須菩提)의 거듭 누설함을 힘입고서

良馬는 그윽이 채찍질을 면하도다 하시니,

즉 世尊이 단정히 앉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은 그곳에서 最初의 한마디(一句子)를 엿보아 이끌어서 여러 사람 앞에 두 손으로 분부하였거늘 須菩提가 벌써 이와같은 도리를 알고서 자리에서 나와 말하기를 “希有하십니다.“하시니 須菩提가 아니였으면 누가 어둠속에서 밝음을 알았을 것인가.

비야리성의 그때 일(유마거사의 黙言)을 기억하건대

한 우레 소리가 三千世界를 震動함이로다.

 

 

야부 如來가 不措一言이어시늘 須菩提가 便興讚歎하시니 具眠勝流는 試着眼看이어다

如來께서는 한 말씀도 하시지 안 했는데 須菩提가 곧 讚歎하였으니, 눈을 갖춘 뛰어난 무리들은 시험삼아 잘 着眼하여 보라.

설의 相逢不拈出하야도 擧意便知有하니 是何境界오 同道라야 方知니라

서로 만나서 꺼내지 않아도 뜻을 들면 문득 아는 자가 있으니 이것이 무슨 境界인가. 道가 같아야만 비로소 안다.

야부 隔檣見角에 便知是牛요 隔山見煙에 便知是火로다 獨坐巍巍여 天上天下어늘 南北東西에 鑽龜打瓦로다 咄

담 넘어 뿔을 보면 소인줄 알고,

산 넘어 연기를 보면 불인줄 아네.

홀로 앉아 높고높음이여, 천상천하거늘

南北東西에서 거북과 기와로 점(鑽龜打瓦)을 치도다. 咄!

설의 知火知牛事希奇하니 知音相見이 正如是로다 獨坐云云은 混虛空爲自身하고 盡大地爲坐具하야 坐斷千差하야 不通凡聖이니 是可謂天上天下渾漫漫이라 更無一物爲等倫이로다 若是過量漢인댄 一見에 便不疑어니와 若非過量漢인댄 未免暗思量하리라

불을 알고 소를 아는 일은 희귀한 일이다. 知音者가 서로 보는 것이 正히 이와 같도다. ‘獨坐’云云은 虛空으로 自身을 삼고 온 大地를 방석으로 삼아서 온갖 差別을 끊고 앉아서 凡聖에 通하지 아니하니 이것이 가히 天上天下에 혼연히 늠름한 모습이로다. 다시 어떤 物件이 있어서 그것과 짝하겠는가. 만약 이런 過量漢이라면 한번보고 당장 의심할 것이 없거니와 과량한이 아닐진대 저으기 사량(思量)함을 면치 못할 것이다.

 

世尊하 善男子善女人이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하니는 應-云何住며 云何降伏其心하리잇고

세존이시여 선남자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오니, 응당 (깨달은 마음을) 어떻게 머무르며, 어떻게 그 마음(번뇌망상)을 항복 받으오리까.”

설의 空生이 一見世尊端坐하시고 便不疑十方婆伽梵하사 仍發證同諸佛之心하야 直問云호대 塵不得出은 由未得住요 心不解脫은 由未降心이니 云何得住하야사 不住六塵이며 云何降心하야사 得心解脫이리잇고하시니 不言我已發心호니 云何住降이리잇고하고 而以善男善女로 言者는 諱却己悟也니라 人人分上에 不假修治하야도 本自圓成이어늘 空生이 以此로 問者는 雖復本來金이나 終以銷成就니 此는 正同善財가 於福城東畔에 初遇文殊하사 頓證法界하고 歷參五十三善知識하야 於一一善知識所에 白言호대 我已先發菩提心호니 云何學菩薩道며 修菩薩行이니라

空生이 世尊께서 단정히 앉아 계신 것을 한번보고 문득 十方의 바가범(婆伽梵:佛)을 의심치 않아서, 諸佛과 같이 證得한 마음을 發하여 바로 물었다. "六塵(티끌세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머물자리에 머물지 못하는 까닭이고, 마음이 解脫하지 못한 것은 煩惱를 降伏받지 못한 까닭입니다. 어떻게 제대로 머물러야 六塵에 물들지 않고 머물며 어떻게 降伏받아야 마음에 解脫을 얻겠습니까?"하시니 “내가 이미 發心했으니 어떻게 住하고 降伏받으리까” 하고 말하지 않고 아직 깨닫지 못한 善男子善女人으로써 말한 것은 自己의 깨달음을 숨긴 것이다.

사람사람의 그릇이 닦고 다스림을 빌리지 않아도 本來 스스로 圓滿히 이루어져 있는 것인데 空生이 이렇게 물은 것은 비록 本來 金이긴 하지만 마침내 녹여야 새롭게 成就되는 것이니 이것은 마치 善財童子가 福城 동쪽 언덕에서 처음 文殊菩薩을 만나서 한꺼번에 法界를 證得하고서도 차례로 五十三 善知識을 親見하여 낱낱 善知識의 處所에서 사뢰어 "내 이미 菩提心을 發했는데 어떻게 菩薩道를 배우고 菩薩行을 닦아야 합니까?"하고 물은 것과 같다."

 

야부 這一問은 從甚處出來오

이 한 물음은 어느 곳으로부터 왔는가.

설의 法法이 虛融하야 無法可住요 心心이 寂滅하야 無心可降이니 今此住降二問은 從甚處出來오 又須菩提는 佛稱解空第一하시니 豈不知妄心이 本空하고 塵境이 本寂이리오 若果知得인댄 如何輕發此問來오 又問法에 法無可問이요 修道에 道無可修라 但向未發問時하야 着眼이니 何須更問住與未住와 降與未降이리오 如是着語한 意旨如何오 若明今日事하면 昧却本來身이니라

法과 法이 모두 텅 비고 융통하여 法이 가히 머물 곳이 없고, 마음과 마음이 寂滅하여 마음을 가히 降伏받을 것 없다. 그런데 이제 머물고 降伏 받는다 하니 이 두개의 물음은 어느 곳으로부터 왔는가.

또 須菩提는 부처님께서 空의 道理를 이해하는데 第一人者라 하였는데 어찌하여 妄靈된 마음이 本來 空寂하고 바깥 境界(塵境)가 本來 고요한 道理를 몰랐겠는가. 만약 알아서 얻었다면 어떻게 가볍게 이런 질문을 던졌겠는가. 또 法을 물으매 法은 가히 물을 것이 없음이요, 道를 닦으매 道는 가히 닦을 것이 없음이라. 다만 그 묻기 이전의 소식을 向해서 着眼해야 함이니 어찌 모름지기 ‘머물고 머물지 못함’과 ‘降伏하고 降伏하지 못함’을 다시 물을 것이 있겠는가. 이와 같이 着語(이 한 물음은 어느 곳으로부터 나왔는가)하신 뜻이 무엇인가.

만약 오늘의 일을 밝힌다면

本來의 몸을 못보게 되리라.

야부 你喜我不喜요 君悲我不悲라 鴈思飛塞北하고 燕憶舊巢歸로다 秋月春花無限意를 箇中에 只許自家知니라

너는 기뻐도 나는 기쁘지 않고

그대는 슬퍼도 나는 슬프지 않네.

기러기는 북쪽으로 날아갈 것을 생각하고

제비는 옛집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네.

가을달과 봄꽃의 無限한 뜻은(本來의 참 모습)

그 속에서 다만 스스로 알뿐이로다.

설의 你與我와 君與我는 本分人이 向今時人하야 稱이니 你能住降하면 心生喜動하고 未能住降하면 心生悲憂어니와 我此世界는 本自淸平하야 理亂이 俱亡이니 何傷何喜리오 如雁之思塞北과 燕之憶舊巢어니 豈以悲喜로 爲心哉아 只有一段空이 來去自由耳라 以至春生夏長하며 秋收冬藏과 月圓月缺하며 花開花落히 凡有消長盈虛者가 莫不各有無窮無盡之意存焉하니 此는 父不得而傳이며 師不得而授라 各自當人이 自肯自悟하야사 始得다

너와 나, 그대와 나는 本分人(본성자리)이 今時人(新薰)을 向해서 일컬음이니 너는 能히 住하고 降伏하면 마음이 기뻐하고 能히 住하고 降伏하지 못하면 마음이 슬프고 근심하거니와 나의 世界(本分人)는 本來 스스로 맑고 고요해서 정리되고 정리되지 않음이 모두 없으니 무엇이 상하고 무엇이 기쁘리오. 마치 기러기가 저 북쪽을 생각하는 것과 제비가 옛집을 생각함과 같으니 어찌 기쁘고 슬퍼하는 것으로써 마음을 삼겠는가. 다만 일단의 空이 오고감에 自由로울 뿐이로다. 이로써 봄에는 만물이 소생하고 여름에는 자라며 가을에는 거두고 겨울엔 갈무리하는 것과 달이 차고 기울며 꽃이 피고 지는데 이르기까지 무릇 줄고 늘며 차고 비는 것이 각각 무궁무진한 뜻이 있으니, 이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할 수 없으며 스승이 제자에게 줄 수 없음이라. 各自 當人이 스스로 긍정하고 스스로 깨달아야 비로소 옳도다.

 

佛言하사대 善哉善哉라 須菩提야 如汝所說하야 如來가 善護念諸菩薩하며 善護念諸菩薩하노니 汝今諦聽하라 當爲汝說호리라 善男子善女人이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하니는 應如是住하며 如是降伏其心이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갸륵하고(좋은 말이로다) 갸륵하도다. 수보리야, 네 말과 같이 여래는 모든 보살들을 잘 호념하며 모든 보살들을 잘 부촉하느니라. 너희는 지금 자세히 들으라. 마땅히 너희를 위해 설하리라.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였으면 응당히 이와 같이 머물며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 받아야 하느니라”

 

唯然世尊하 願樂欲聞하노이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바라옵건대 듣고자 합니다.”

설의 當爲汝說이여 欲說這介事요 願樂欲聞이여 欲聞這介事로다

“마땅히 너를 爲하여 說한다.“한 것은 이 일을 말하고자 한 것이고 “원컨대 듣기 원합니다. “한 것은 이 일을 듣고자 한 것이다.

 

야부 往往事因叮囑生이로다

가끔가끔의 일이 자세히 付囑함을 因하여 생겼다.(叮囑은 이른바 “너는 이제 자세히 들으라.“한 것이다.)

설의 只這介事는 要因叮囑而現이로다

바로 이 일은 자세히 부촉하는 것으로 인하여 나타남이로다.

야부 七手八脚이요 神頭鬼面이라 棒打不開요 刀割不斷이라 閻浮踔躑幾千廻요 頭頭不離空王殿이로다

손이 일곱 다리가 여덟이요

신의 머리에 귀신의 얼굴이라.

몽둥이로 쳐도 열지 못하고

칼로 베어도 끊지 못하네.

閻浮提에 뛰는 것이 그 몇 천번이던가.

낱낱이 空王殿을 떠나지 않았네.

설의 神用自由하고 妙體難睹라 動彈不得이요 堅固難壞로다 生死路에 幾度往返고 脚跟이 元來淸淨如空이로다

신비한 쓰임은 自由스럽고 妙體는 보기 어려움이라. 흔들고 퉁겨봐야 얻지 못하고, 堅固하여 무너뜨리기 어렵다. 生死의 길에 몇 번이나 왔다 갔던고. 발자취(本心)는 元來 淸淨하여 虛空과 같도다.

 

第三 大乘正宗分(대승의 바른 종지)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諸菩薩摩訶薩이 應如是降伏其心이니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되 “모든 보살마하살은 응당 이와 같이 그 마음(번뇌망상)을 항복받을지니라.

 

 

所有一切衆生之類인 若卵生과 若胎生과 若濕生과 若化生과 若有色과 若無色과 若有想과 若無想과 若非有想非無想을

있는 바 일체중생의 종류인 난생 · 태생 · 습생 · 화생 · 유색 · 무색 · 유상 · 무상 · 비유상 · 비무상을

 

我皆令入無餘涅槃하야 而滅度之호리니

내가 다 무여열반에 들어가게 해서 그들을 다 멸도하리라.

 

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호데 實無衆生得滅度者니라

이와 같이 한량없고 셀 수 없고 가(邊)없는 중생을 멸도하되, 실로는 멸도를 얻은 중생이 없느니라.”

 

 

何以故오 須菩提야 若菩薩이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하면 卽非菩薩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니라.(보살이라고 함이 옳지 않다. 보살에서 어긋난다.)

설의 悲化含生入無餘하고 智冥眞際絶能所로다 見有可度면 卽乖眞이라 我人不生하야사 名菩薩이니라

慈悲로써 衆生을 敎化해서 無餘에 들게하고 智慧가 眞際에 冥合해서 能所를 끊었도다. 가히 제도할 것이 있다고 보면 眞과 어긋남이라. 我相, 人相이 나지 않아야 菩薩이라 하느니라.

야부 頂天立地요 鼻直眼橫이로다

이마는 하늘을 向하여 땅위에 서 있고, 코는 수직으로 있으며 눈은 가로 놓여 있도다.

설의 從一法界하야 形分九類하니 形形이 皆具一法界라 所以로 一一頭指天하고 脚踏地하며 一一鼻直向下垂하고 眼橫在上方이로다

한 法界로부터 형상이 아홉 가지로 나뉘니 모양과 모양이 모두 한 法界를 갖추고 있다. 그런 까닭에 낱낱의 머리는 하늘을 가리키고 다리는 땅을 밟으며 낱낱의 코는 아래를 向해 곧게 드리웠고 눈은 옆으로 비껴 위쪽에 있음이로다.

야부 堂堂大道여 赫赫分明이라 人人本具하고 箇箇圓成이라 秪因差一念하야 現出萬般形이로다

堂堂한 大道여,

밝고 밝아 分明하도다.

사람사람이 本來 具足하고

낱낱이 圓滿하게 이루워져 있도다.

다만 한 생각이 비끄러짐으로 인하여

萬 가지 形相이 나타난다네.

설의 堂堂大道여 廓周沙界요 赫赫分明이며 光呑萬象이로다 人人本具여 着衣喫飯과 彈指揚眉를 不要別人이요 介介圓成이여 折旋俯仰과 歆伸謦咳를 不借他力이로다 只因云云은 春色이 無高下로대 花枝自短長이니라 自短長이여 也不妨하니 九類同居一法界라 紫羅帳裏撒眞珠로다 雖然如是나 若但伊麽商量인댄 盡十方世界가 都盧是無孔鐵鎚라 畜生은 永作畜生하고 餓鬼는 永作餓鬼하야 無有一介도 發眞歸源이니라 旣然如是인댄 畢竟作麽生고 風和에 花織地요 雲淨에 月滿天이로다

堂堂한 大道여, 廓然하여 항하사 世界에 두루 펼쳐져 있고, 밝고 밝아 分明함이여, 그 빛이 萬象을 머금었도다. 사람사람이 本來 갖춰져 있음이여, 옷입고 밥먹는 것과 손가락을 퉁기고 눈썹을 움직임은 다른 사람에게 要하는 것이 아니다. 낱낱이 圓滿하게 이름이여, 折旋府仰과 歆伸警咳(몸의 온갖 動作)은 남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 “다만 한생각이 ~ 인하여“云云은 봄빛은 높고 낮음이 없으나 꽃가지가 스스로 길고 짧다. 스스로 짧고 길음이여, 이 또한 서로 방해하지 아니하니 九類가 함께 한 法界에 사는지라 붉은 비단 장막 위에 진주를 뿌림^과 같도다. 비록 그러나 이와 같으나 만약 다만 이렇게만 헤아린다면 온 十方世界가 모두 구멍 없는 망치^와 같아서 畜生은 영원히 畜生만 되고 餓鬼는 영원히 餓鬼만 되어서 한 개도 眞을 發하여 근원에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이와 같다면 畢竟 어떻게 할 것인가.

봄바람이 불면 꽃이 땅에 수놓고

구름이 걷히면 달빛이 하늘에 가득함이로다.

 

第四 妙行無住分(묘행은 머묾이 없음)

復次須菩提야 菩薩이 於法에 應無所住하야 行於布施니

또 수보리야, 보살은 법에 응당히 머문 바 없이 보시를 할지니

 

所謂不住色布施며 不住聲香味觸法布施니라

이른바 색에 머물지(집착하지, 얽매이지) 않고 보시하며 성향미촉법에도 머물지 않고 보시해야 하느니라.

 

須菩提야 菩薩이 應如是布施하야 不住於相이니

수보리야. 보살은 응당 이와 같이 보시하여 상에 머물지 않아야 되느니라.

 

 

何以故오 若菩薩이 不住相布施하면 其福德을 不可思量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만약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가히 헤아릴 수 없느니라.

설의 以智起行에 獲福無邊이로다

智慧로서 慈悲行을 일으키면 福얻음이 가이 없다.

 

야부 若要天下行인댄 無過一藝强이니라

만약 天下에서 行하고자 하면 한가지 재주를 뛰어나게 할지니라.

설의 無才者가 行天下則脚頭到處에 無與立談者하리니 其窮을 可知요 有才者가 行天下則無所往而不自得하리니 其樂을 不可言이니라 無慧眼者가 妄加功行則行行이 有着하야 去道轉遠이요 有慧眼者가 入於行海則心心이 淸淨하야 徑與本地로 相應하리니 旣與本地로 相應인댄 塵沙德用과 無量妙義가 元自具足하야 不從他得이니라

재주없는 者가 天下를 돌아다니면 발 가는 곳마다 더불어 말할 사람이 없으리니 그 궁함을 가히 알 만할 것이요, 재주가 있는 者가 天下에 돌아다니면 가는 곳마다 스스로 얻지 아니함이 없을 것이니 그 즐거움을 가히 말하지 못하리라. 慧眼이 없는 者가 망령되이 功德을 더하면 行마다 執着이 있어서 道에 이르기가 더욱 멀어지고 慧眼이 있는 사람이 行의 바다(行海)에 들어가면 마음마다 淸淨하여 바로 근본지(本地)와 더불어 相應할 것이다. 이미 本地와 相應하면 온갖 많은 德과 作用(塵沙德用)과 無量한 妙한 뜻이 元來 스스로 具足하여 다른 데서 얻지 않을 것이니라.

야부 西川十樣錦에 添花色轉鮮이라 欲知端的意인댄 北斗를 面南看이어다 虛空이 不閡絲毫念(毫는 一作頭라)이라 所以彰名大覺仙이니라

西川(中國) 열 무늬 비단(十樣錦)에

꽃을 수놓으니 색이 더욱 곱도다.

分明한 뜻을 알고저 하면

북두칠성을 남쪽을 向하여 볼지어다.

虛空은 털끝만한 생각도 거리끼지 않으니

이 까닭에 大覺仙이라 이름함이로다.

설의 般若智로 以爲質하고 萬行花로 以爲文하니 智行이 相資하야 文質이 彬彬이라 伊麽則以智起行智愈明하니 錦上添花色轉鮮이로다 又行施가 固已偉然이어늘 更能無住하니 其施益大라 所以로 道호대 西川十樣錦에 添花色轉鮮이라 欲知端的意인댄 北斗를 面南看이니 北斗南星이 位不別이어늘 言南言北이 也由情이로다 伊麽則行施가 卽無住라 一時無前後하야 逈出有無之境하고 不坐格外之機라 蕭然無寄하야 量同太虛하니 大覺之名이 於是乎彰이며 無量福聚가 於是乎成이로다

般若 智慧로 그 바탕을 삼고 萬行의 꽃으로 무늬를 놓으니 智慧와 萬行(智行)이 서로 어울려 무늬와 바탕이 빛나고 빛남이라. 이러한즉 智慧로서 行을 일으키니 智慧가 더욱 밝아져서 비단 위에 꽃을 더한 듯 색이 더욱 고움이로다. 또한 布施하는 것이 진실로 이미 거룩하거니와 그 위에 다시 能히 住함이 없으니(無住相布施) 그 베풂은 더욱 더 크도다. 이 까닭에 “서천의 좋은 비단에 꽃을 수놓으니 색이 더욱 곱도다. 그 分明한 뜻을 알고저 하면 북두칠성을 남쪽을 向해 볼지어다.“하였는데 北斗와 南星이 그 위치가 다르지 않거늘 南이라 말하고 北이라 말함은 또한 情(執着)에서 말미암은 까닭이다. 이러므로 布施는 無住相으로 行하면 一時에 전후가 없어서 멀리 有無의 境界를 벗어나고 格外의 근기에도 앉지 않으니 소연히 의지함이 없어 그 양이 虛空과 같아서, 大覺(佛)의 이름이 여기서 드러나며 無量의 복무더기가 여기에 이뤄지도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東方虛空을 可思量不아 不也니이다 世尊하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쪽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못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須菩提야 南西北方과 四維上下虛空을 可思量不아 不也니이다 世尊하 須菩提야 菩薩의 無住相布施하는 福德도 亦復如是하야 不可思量이니라

수보리야, 남서북방과 네 간방 상하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못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보살의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한 복덕도 또한 이와 같아서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느니라.”.

설의 菩薩萬行이 無念爲宗이니 一得其宗하면 無所施而不可라 其所獲福이 寬廣如空이로다

菩薩의 萬行이 無念으로 宗을 삼으니 한번 그 宗(근본)을 얻으면 베푸는 것마다 옳지 않음이 없어서 그 얻는 복이 너그럽고 넓기가 마치 虛空과 같음이로다.

 

須菩提야 菩薩이 但應如所敎住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다만 응당히 가르친 바와 같이 머물지니라

 

야부 可知藝也니라

가히 禮를 알도다.(예를 아는 사람이로다.)

설의 無住者는 萬行之大本也요 萬行者는 無住之大用也라 慈尊이 敎以無住로 爲住하시니 大本이 已明이나 而大用을 亦不可不知也니라 禮也者는 人間世之大用也라 存亡之所繫며 禍福之所由興也니 人이 知禮則進退를 可觀이며 擧措得宜하야 無施不可어니와 苟不知禮則雖曰無事於心이나 動輒違規하리니 豈有進退升降之可觀乎아 由是로 禮也者는 可知而不可不知也니라

‘無住’란 萬行의 큰 근본이요, 萬行이란 無住의 큰 作用이라, 慈尊(佛)이 無住로써 住하는 것을 가르쳤으니, 그 근본은 이미 밝혔으나 그 큰 作用은 不可不 알아야 하느니라. 禮란 人間世上에 큰 作用이라서 삶과 죽음에 얽매이고 禍와 福이 禮로 因하여 일어나는 것이니, 사람이 예를 알면 진퇴가 아름다우며 들고 놓음에 마땅함을 얻어서 그 베푸는 것마다 옳지 아니함이 없거니와, 진실로 禮를 모른다면 비록 마음에 일이 없다고 하나 그 움직임이 문득 禮(규칙)를 어김이니 어찌 진퇴와 오르고 내림(昇降)이 아름답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로 말미암아 禮란 가히 알아야 하며 不可不 알아야 하느니라.

야부 虛空境界를 豈思量가 大道淸幽理更長이로다 但得五湖風月在하면 春來依舊百花香하리라

虛空境界를 어찌 思量하겠는가,

大道는 맑고 깊어 그 이치 더욱 길도다.

단지 五湖^에 風月이 있음을 안다면

봄이 옴에 여전히 百花가 향기로우리라.

설의 無住로 爲住하니 廓然如空이라 雖然如是나 大道는 不屬有住無住하니 方之海印이요 越彼太虛로다 太虛中에 不妨有五湖風月이요 無住中에 亦不妨繁興大用이니 古人이 道호대 莫把無心云是道하라 無心도 猶隔一重關이라하시니 無心이 正是無住之義라 要向無住中하야 繁興大用하야 圓具萬德하야사 方與大道로 相應去在하리니 到這裏하야는 見聞覺知가 依前受用家風이요 色香味觸이 元是遊戱之場이니라

無住로 住를 삼으니 廓然히 虛空과 같도다. 비록 그러나 大道는 有住와 無住에 속하지 않으니 저 海印에 견줄 수 있고 저 太虛를 넘었도다. 큰 虛空 가운데는 五湖의 風月이 있음도 방해롭지 않음이요, 無住 가운데는 大用이 크게 일으킴도 방해롭지 않으니 古人이 말하길 “無心을 가지고 道라고 이르지 말라. 無心도 오히려 관문이 남아있다.“하니 無心이 바로 無住의 뜻이다. 無住中을 向하여 큰 作用을 많이 일으켜서 圓滿히 萬行萬德을 갖추어야 바야흐로 大道와 더불어 相應하여 가리니 여기에 이르러서는 보고, 듣고, 깨달아 아는 것(見聞覺知)이 예로부터 수용하는 家風이며 色香味觸(六塵境界)이 元來 유희하는 장소이니라(내가 修行하는 道場이다).

 

第五 如理實見分(바른 도리를 실답게 봄)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可以身相으로 見如來不야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몸의 모양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不也니이다 世尊하 不可以身相으로 得見如來니

“못보겠습니다. 세존이시여, 몸의 모양으로써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何以故오 如來所說身相은 卽非身相이니이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몸의 모양은 곧 몸의 모양이 아닙니다.”

설의 佛擧身相問空生하사 欲明妙圓無相身이어시늘 空生은 本是獅子兒라 不曾逐塊能咬人이로다 莫以無相云是斷하라 非形이 終不外於形이니라

부처님께서 身相을 들어 공생(空生)에게 물으시어 妙하고 圓滿한 無相身(모양없는 몸)을 밝히고자 하시거늘 空生은 本來 사자새끼라서 일찍이 흙덩이를 쫓지 아니하고 사람을 깨물었도다(本質을 追求함). 無相을 일러서 疑心을 끊었다고 이르지 말라. 形相이 아닌 것은 마침내 形相을 벗어난 것이 아니니라.

 

야부 且道하라 卽今行住坐臥는 是甚麽相고 休瞌睡어다

또 일러라 지금의 行住坐臥는 이 무슨 相인가. 졸지 말지어다.

설의 吾今色身이 卽是常身法身이니 不得離却色身코 別求常身法身이어다 若也離却色身코 別求常身法身인댄 慈氏宮中에 願生兜率이요 含元殿裏에 更覓長安이니라 所以로 道호대 卽今行住坐臥는 是甚麽相고하시니라 要見常身法身인댄 直須向行住坐臥處하야 覰破하야사 始得이니 離却日用코 別求常身法身인댄 便是鬼窟裏에 作活計니라 所以로 道호대 休瞌睡하라하시니라

나의 이 色身이 곧 常身인 法身이니 色身을 떠나서 따로 常身法身을 구하지 말라. 만약 色身을 떠나서 따로 常身法身을 구하면 자씨(慈氏:彌勒)궁중에서 兜率天에 나기를 원함과 같고 含元殿(장안에 있는 궁전)에 있으면서 다시 장안을 찾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말하길 “지금의 行住坐臥는 이 무슨 相인가?”하신 것이다. 常身法身을 보고자 하면 바로 行住坐臥處를 向해 간파하여야 비로소 얻을 수 있으니, 날마다 쓰는 것을 떠나서 따로 常身法身을 구하면, 문득 이 귀신굴 속에서 살 궁리를 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말하길 “졸지 말지어다”하시니라.

야부 身在海中休覓水하고 日行嶺上莫尋山이어다(嶺上은 一作山嶺이라) 鶯吟燕語가 皆相似하니 莫問前三與後三이어다

몸이 바다 가운데 있으면서 물을 찾지 말고

매일 산 위를 行하면서 산을 찾지 말라.

꾀꼬리 울음과 제비 지저귐이 서로 비슷하니

前三과 더불어 後三을 묻지 말지어다.

설의 淸淨水中에 遊魚自迷요 赫赫日中에 盲者不睹라 常在於其中하야 經行及坐臥호대 而人이 自迷하야 向外空尋하나니 身在海中이라 何勞覓水며 日行山嶺이라 豈用尋山이리오 鶯與鶯吟이 聲莫二요 燕與燕語가 語一般이라 但知物物이 非他物하면 莫問千差與萬別이니라

淸淨한 물 가운데 노는 고기는 스스로 迷하고, 밝고 밝은 대낮에도 눈먼 자는 볼 수 없음이라. 항상 그 가운데 있으면서 움직이고 앉고 눕지만 사람이 스스로 迷하여 밖을 向하여 부질없이 찾으니, 몸이 바다 가운데 있음이라. 어찌 수고로이 물을 찾을 것이며, 날마다 산 고개를 오름이라, 어찌 산을 찾을 것인가. 꾀꼬리와 꾀꼬리 소리가 둘이 아니고 제비와 제비 지저귐이 한가지로다. 다만 物物이 다른 物件이 아님을 알면 천 가지 만 가지 差別을 묻지 않으리라.

 

佛告須菩提하사대 凡所有相이 皆是虛妄이니 若見諸相非相하면 卽見如來니라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무릇 形相이 있는 것은 다 허망(거짓이 많고 망령된 것)하니 만약 모든 形相을 形相 아닌 것으로 보면 곧 如來를 보리라.”(般若第一偈)

설의 目前에 無法하니 觸目皆如라 但知如是하면 卽爲見佛이니라

눈앞에 法이 없으니 눈 닿는 곳마다 모두가 如如함이라. 다만 이같이 알면 곧 부처님을 보게 됨이니라.

 

야부 山是山水是水니 佛이 在甚麽處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부처님은 어느 곳에 계시는가.

설의 若一向佛身이 無相인댄 相外에 必有佛身이어늘 卽今見山에 卽是山이요 見水에 卽是水니 佛이 在甚麽處오

만약 한결같이 佛身은 모양이 없다 하면, 모양 밖에 반드시 佛身이 있어야 하거늘 지금 산을 보면 곧 이 산이요 물을 보면 곧 이 물이다. 부처님은 어느 곳에 계시는가.

야부 有相有求가 俱是妄이요 無形無見이 墮偏枯로다 堂堂密密何會間이리오 一道寒光이 爍太虛로다

相이 있고 구함이 있음은 이 모두 妄이요

無形 無見은 치우친 所見에 떨어짐이로다.

堂堂하고 密密하여 어느 곳에 틈이 있겠는가.

한 줄의 찬 빛(寒光)이 큰 허공을 빛내도다.

설의 執有執無는 俱成邪見이니 有無無二하야사 一味常現하리라

有에 執着하고 無에 執着하는 것은 함께 邪見을 이루는 것이니, 有無 둘 다 없어야 한맛(一味)으로 항상 나타나리라.

第六 正信希有分(바른 믿음은 희유하다)

須菩提가 白佛言하사대 世尊하 頗有衆生이 得聞如是言說章句하시옵고 生實信不잇가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자못 어떤 중생이 이와 같은 말씀을 듣고서 진실한 믿음을 내오리까.”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莫作是說하라 如來滅後後五百歲에 有持戒修福者가 於此章句에 能生信心하야 以此爲實하리니

부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그런 말 하지 말아라. 여래가 멸도한 뒤 후 오백세에도(정법이 문란한 때에 이르러서도) 계를 지니고 복을 닦는 자가 있어서 이 말씀에 能히 믿는 마음을 내고 이로써 실다움 삼으리라.”(열매를 얻다)

설의 上來問答은 只明得無住無相之義니라 若是無住無相之義인댄 甚深難解하야 不近人情하니 去聖愈遠에 容有不信일새 故로 問也니라 然이라 此固不外乎衆生日用이며 亦乃該通過現未來하니 由是로 雖是末世나 如有勝機면 必當生信하야 以此無住無相之義로 以爲實然也니라 無相은 是虛玄妙道요 無住는 是無着眞宗이니 若是眞宗妙道인댄 直是法身向上이라 非干向下니라 恁麽則以此爲實者는 法身向上으로 以爲實也라 法身向上으로 爲實則三身이 皆屬向下하야 是權非實이 明矣로다 爲甚如此오 三身이 皆是對機示現이라 畢竟非眞故也니라 趙州가 道하사대 金佛은 不度爐하고 木佛은 不度火하고 泥佛은 不度水어니와 眞佛은 內裏座라하시니 眞佛이 豈不是向上人也며 三佛이 豈不是三身也리오 臨濟가 道하사대 入淨妙國土中하야 着淨妙衣하고 說化身佛하며 入無差別國土中하야 着無差別衣하고 說報身佛하며 入解脫國土中하야 着解脫衣하고 說化身佛이라하야시늘 大慧가 拈云하사대 要識臨濟老漢麽아 法身報身化身이여 咄哉라 魍魎妖精이로다 三眼國中에 逢着하니 笑殺無位眞人이라하시니 則向上은 是實이요 三身은 是權이 灼然灼然이로다 又經顯法身이라 以此爲實者는 法身으로 以爲實也니 法身이 是實則報化요 是權非實이 明矣로다

위의 問答은 다만 無住 無相의 뜻을 밝힌 것이니라. 만약 無住 無相의 뜻이라면 심히 깊고 알기 어려워서 우리 상식에 가깝지 않으니, 聖人에 이르기가 더욱 멀어져서 或 믿지 못함이 있을까 하여 물은 것이니라. 그러나 이것은 진실로 衆生의 日用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이며, 또한 過去, 現在, 未來를 전부 갖추고 있는 것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비록 末世라 하나 만약 殊勝한 근기가 있으면 반드시 마땅히 신심을 내어서 이 無住, 無相의 뜻으로써 실다움을 삼으리라. 無相은 텅비고 현묘한 道이고 無住는 執着이 없는 참된 근본(眞宗)이니 만약 이 眞宗, 妙道라면 바로 이 法身向上(法身보다 높은 것) 이라. 向下에는 간섭되지 않으니, 이러한즉 이로써 실다움을 삼는다 하는 것은 法身向上으로써 실다움을 삼음이라. 法身向上으로 실다움을 삼은즉 三身이 모두 向下에 속하여서, 이는 方便이고 實이 아님이 分明하도다. 무엇 때문에 이같은가. 三身이 다 근기에 따라서 나타나므로 畢竟엔 眞이 아닌 까닭이니라. 趙州스님이 말씀하시되 “金佛은 화로를 건너가지 못하고 木佛은 불을 건너가지 못하고, 진흙佛(泥佛)은 물을 건너가지 못하지만 眞佛은 내 안에 앉아 있으시다”하시니 眞佛이 어찌 이 向上人이 아니며 三佛(金 · 木 · 泥)이 어찌 이 三身이 아니리오. 臨濟가 이르시되 淨妙國土中에 들어가서 정묘한 옷을 입고 法身佛을 說하며 無差別國土中에 들어가서 차별없는 옷을 입고 報身佛을 說하며, 解脫國土中에 들어가서 解脫의 옷을 입고 化身佛을 說한다 하시거늘 大慧(종고)스님이 이것을 들어 말하되 임제 스님의 취지를 알고자 하는가. 法身, 化身, 報身이여, 咄哉라. 도깨비 요정이로다. 三眼國土中에서 만나 無位眞人(差別心이 없는 참된 사람)을 비웃는다 하시니 곧 向上은 이 진실이요 三身은 方便인 것이 分明하도다. 또 經에서는 法身을 나타냄이라. 이것으로써 실다움을 삼는다는 것은 法身으로써 實을 삼음이니 法身이 實이라면 報身, 化身은 方便이요 實이 아님이 分明하도다.

 

當知是人은 不於一佛二佛三四五佛에 而種善根이라 已於無量千萬佛所에 種諸善根하야 聞是章句하고 乃至一念生淨信者니라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한 부처나 두 부처나 셋, 넷, 다섯 부처께 선근을 심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천만 부처님께 모든 선근을 심었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한 순간이라도(이 문장과 글귀를 듣고 이에 한 생각에 이르러) 깨끗한 믿음을 내는 사람이니라.

 

야부 金佛은 不度爐하고 木佛은 不度火하고 泥佛은 不度水로다

금 부처님은 화로를 지나가지 못하고

나무 부처님은 불을 건너지 못하며,

흙 부처님은 물을 건너지 못한다.

설의 三佛이 從來로 未免有壞니 三身도 亦然하야 畢竟非眞이니라 以三佛로 配於三身하신 意旨如何오 法身은 堅固不動하고 報身은 上冥下應하고 化身은 曲順機宜어든 金은 剛而不柔하고 木은 能柔能剛하고 泥는 柔而不剛하니 以三佛로 配於三身이 其意於此니라 又金之氣는 爲秋之涼이라 其質이 在地則確然其堅이니 是는 體句也요 木之氣는 爲春之煖이라 其質이 在地則蒼然其靑이니 是는 用句也요 土則旺於四季하야 爲金木等之所依니 是는 中間句也니라 又金佛은 一鑄便成이니 是는 中間句也요 木佛은 滅滅而成이니 是는 無句也요 泥佛은 加加而就니 是는 有句也니라 金佛은 不可以度爐니 度爐則鎔却去요 木佛은 不可以度火니 度火則燒却去요 泥佛은 不可以度水니 度水則爛却去라 此則三句가 一一非實이니 伊麽則以此爲實者는 三句外一句로 以爲實也니라 又金佛은 不須度爐요 木佛은 不須度火요 泥佛은 不須度水니 此則三句가 一一總不動着이니라 伊麽則有句也端端的的이요 無句也端端的的이요 中間句也端端的的이니 體用等도 亦然이니라 又法身은 以畢竟空寂으로 爲栖止니 何聲之可聞이며 何相之可睹리오 非金木等의 所能模邈也요 唯有報化는 妙相이 端嚴하야 令入樂見이며 音聲이 淸雅하야 令入樂聞이라가 及其示滅也에 人之像之호대 或鑄以金하며 或彫以木하며 或塑以泥하나니 伊麽則現前金佛木佛泥佛이 皆從報化中來也라 不度爐不度火不度水는 明報化非實也니라

三佛이 종래로 부서짐을 면치 못하고 三身도 또한 그러해서 결국 眞이 아닌 것이다. 三佛로써 三身을 배대하신 뜻은 무엇인가. 法身은 堅固하여 動치 아니하고 報身은 위로 명합하고 아래로 應하며 化身은 근기에 마땅함을 따라 구부려서 隨順하거늘, 金은 굳으나 부드럽지 않고 木은 能히 부드럽고 강하며 泥(진흙)는 부드럽지만 강하지 못하니 三佛로서 三身을 짝지운 뜻이 이런 것이로다. 또 金의 氣는 가을의 서늘함과 같고 그 바탕이 땅에 있은즉 확연하여 그 堅固한 것이 체의 구(體句)요, 木의 氣는 봄의 따뜻함과 같아서 그 바탕이 땅에 있으면 파랗게 푸르른 것이 용의 구(用句)요, 土는 사계절이 왕성해서 금, 목, 수, 화 等에 의지함이 되는 것이 中間의 句가 되느니라. 또 金佛은 한번 녹여 부우면 금방 이뤄지니 이것은 중간구(中間句)이고 木佛은 깎고 깎아서 이루워 지니 이것은 무구(無句)요, 泥佛은 더하고 더해서 이뤄지니 이것은 유구(有句)로다. 금불은 가히 용광로를 지나가지 못하니 지나가면 녹아버림이요, 목불은 불을 건너가지 못하니 불을 건너가면 타버리고, 진흙불은 물을 건너가지 못하니 물을 건너가면 풀어져 버리느니라. 이것은 삼구(三句)가 낱낱이 眞이 아니니, 이런즉 “이것으로써 실다움을 삼는다” 는 三句 밖의 일구(一句)로서 實을 삼는 것이니라. 또 금불은 모름지기 용광로를 지나가지 못하고, 목불은 불을 건너가지 못하고, 진흙불은 물을 건너가지 못하니, 이러한즉 三句가 낱낱이 모두 움직이지 못함이니라. 이러한즉 有句는 分明하고 뚜렷하고(端端的的) 無句도 분명하고 뚜렷하며 中間句도 분명하고 뚜렷해서 체와 용(體用)等도 또한 그러한 것이니라. 또 法身은 畢竟 공적(空寂)으로써 깃들어 의지하는 것이니, 무슨 소리를 가히 들을 것이며 무슨 상을 가히 볼 수 있으리오. 金이나 木 等으로 能히 모양을 본뜨지 못하며, 오직 報身 化身은 妙相이 端嚴하여 사람들이 즐겨 보게 하며, 音聲이 청아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즐겨 듣게 하다가 급기야 그 滅을 보이시매 사람들이 그것을 形相으로 만드는데, 或 금으로 주조하기도 하고 或은 나무로 조각하며 或은 진흙으로 빚으니, 이러한 앞에 드러난 金佛, 木佛, 泥佛은 모두 報身 化身 가운데서부터 나온 것이라. 용광로를 건너지 못하고 불을 건너지 못하고 물을 건너지 못함은 報身 化身이 實답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야부 三佛形儀總不眞하니 眼中瞳子面前人이라 若能信得家中寶하면 啼鳥山花一樣春이로다

三佛의 形相과 擧動은 다 眞實이 아니고

눈 가운데의 瞳子엔 그대 앞의 사람이라.

만약 能히 집에 있는 보배를 믿기만 하면

새 울고 꽃피는 것이 한결같은 봄이로다.

설의 三身이 只是那人影이라 悟來影影不是他로다 又三句但從一句來하니 一句悟來三則一이로다 又報化非眞全是影이라 眞若悟來影非他로다

三身은 다만 그 사람의 그림자이고, 깨닫고 보면 그림자 그림자가 다른 것이 아니로다. 또 三句가 다만 一句로부터 왔으니 一句를 깨달으면 三이 곧 一이다. 또 報身과 化身은 眞이 아니라 온전히 그림자이지만 만약 眞을 깨달으면 그림자가 다른 것이 아니로다.

 

須菩提야 如來가 悉知悉見하노니 是諸衆生이 得如是無量福德이니라

수보리야 여래는 다 알고 다 보나니 이 모든 중생들이 이렇게 한량없는 복덕을 얻느리라.

설의 諸佛所證이 只證此法이시며 是人所信도 亦信此法이니 信由宿熏이라 不是無因이요 信必有證이라 當成兩足이로다

모든 부처님들의 證得한 것이 다 이 法을 證得한 것이며 이 사람의 믿는 것도 또한 이 法을 믿는 것이다. 믿음은 전생부터 익혀온 것(宿熏)을 말미암은 것이라서 원인이 없는 것이 아니고 믿으면 반드시 證得함이 있어서 마땅히 兩足尊(福慧)을 이룬다.

 

야부 種瓜得瓜요 種果得果로다

오이를 심으면 오이를 얻고 과일을 심으면 과일을 얻는다.

설의 昔年所學이 卽今日所信이요 因地所習이 卽果上所證이로다

옛날에 배운 것이 곧 오늘에 믿는 것이요, 因地(처음 發心했을 때)에서 익힌 것이 果위에 證得한 것이로다.

야부 一佛二佛千萬佛이 各各眼橫兼鼻直이라 昔年에 親種善根來러니 今日에 依前得渠力이로다 須菩提須菩提여 着衣喫飯이 尋常事어늘 何須特地却生疑오

한 부처 두 부처 千萬부처가

각각 눈은 가로 있고 코는 세로 놓였도다.

옛날에 친히 善根을 심어 왔더니

오늘은 옛에 의지하여 큰 힘을 얻었도다.

須菩提 須菩提여, 옷 입고 밥 먹는 것이 日常의 일이거늘

어찌하여 모름지기 특별히 疑心을 내는가.

설의 諸佛이 同證眼橫鼻直이시니 承事諸佛은 只要學得眼橫鼻直이니라 眼橫鼻直身은 非但千萬佛이라 張三李四도 皆同有하니 昔已學得이라 今能生信이로다 須菩提須菩提여 卽日用이 便是니 有甚難會리오

모든 부처님들이 眼橫鼻直(다 똑같은 道理)을 함께 證得하셨으니 모든 諸佛들을 받들어 섬기는 것도 바로 眼橫鼻直을 배우고자 하는 것이로다. 눈이 옆으로 코가 바로 된 몸은 千萬 부처님들 뿐 아니라 張三李四도 다 똑같이 있으니 옛적에 배워 얻은 것이라서 지금에 能히 믿음을 낸 것뿐이다. 須菩提여, 곧 日用(着衣喫飯)이 문득 이것이니 무슨 알기 어려운 것이 있겠는가.

 

何以故오 是諸衆生이 無復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하며 無法相하며 亦無非法相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이 모든 중생은 다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으며 법이라는 상도 없으며 법 아니라는 상도 또한 없느니라

설의 麤細垢盡에 圓明體露로다

거칠고(麤) 微細한(細) 때(垢)가 다하면 圓明한 體가 드러나도다.

 

야부 圓同太虛하야 無欠無餘로다

두렷함이 큰 虛空과 같아서 남고 부족함이 없어라.

설의 人有身이여 圓滿空寂者가 是요 人有心이여 廣大靈通者가 是라 此身此心은 阿誰獨無리오마는 但以無明不了하야 妄認四大하야 爲自身相하고 六塵緣影으로 爲自心相일새 由是로 身以圓滿之體로 隱於形殼之中하고 心以靈通之用으로 匿於緣慮之內하며 脫或知非라도 亦成斷見이라 由滯二邊하야 圓滿之體와 靈通之用이 不能顯現이라가 如今에 我法雙忘하야 其忘亦忘하니 圓滿之體와 靈通之用이 豁爾現前하야 初無欠剩이로다

사람에게 몸이 있음이여, 圓滿空寂한 것이 이것이요. 사람에게 마음이 있음이여, 廣大하고 靈通한 것이 이것이로다. 이 몸 이 마음이 누군들 홀로 없으리오마는, 다만 無明을 요달하지 못하여 망령되이 四大를 오인하여 自身의 몸뚱이로 여기고 六塵의 그림자(六塵緣影)로 自己 마음을 삼아서 이로 말미암아 몸의 圓滿한 體가 형체의 틀(形殼) 속에 갇히고, 마음의 靈通한 쓰임(用)이 緣慮(생각하는 마음)의 속에 숨어 있으니, 설혹 잘못된 줄을 알더라도 또한 斷見을 이루는 것이라. 二邊에 막힘을 말미암아서 圓滿한 體와 靈通한 用이 能히 드러나지 못하다가 지금에 와서 我와 法을 雙으로 잊고, 그 잊은 것 또한 잊으니, 圓滿한 體와 靈通한 用이 활연히 앞에 나타나서, 아예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음이로다.

야부 法相非法相이여 開拳復成掌이로다 浮雲이 散碧空하니 萬里天一樣이로다

法相과 非法相이여,

주먹을 펴니 다시 손바닥이로다.

뜬구름이 푸른 하늘에서 흩어지니

만리의 하늘이 온통 푸른 하늘뿐이더라.

설의 是法非法이여 一常一斷이니 斷常은 雖異나 爲病은 是同이라 爲病是同이여 開拳成掌이로다 開拳成掌이여 何必不必이로다 斷常이 俱亡하야사 一味方現하리라

옳은 法과 그른 法이여, 하나는 常이고 하나는 斷이니, 단과 상(斷常)이 비록 다르나 病이 되는 것은 같다. 病이 되는 것이 이와 같음이여, 주먹을 펴니 손바닥이 되도다. 주먹을 펴니 손바닥이 됨이여, 何必이요 不必이로다. 斷常이 함께 없어야 한 맛이 바야흐로 나타나리라.

 

何以故오 是諸衆生이 若心取相하면 卽爲着我人衆生壽者니 何以故오 若取法相이라도 卽着我人衆生壽者며 若取非法相이라도 卽着我人衆生壽者니라

무슨 까닭인가. 이 모든 중생이 만약 마음에 상을 취하면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함이 되나니, 무슨 까닭인가. 만일 법상을 취하더라도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함이며 법 아닌(비법에, 그릇된 법에) 상을 취하더라도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함이 되느니라.

 

是故로 不應取法이며 不應取非法이니라

이러한 까닭으로 응당 법을 취하지 말아야 하며 응당 법 아님도 취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설의 取法은 只由不知法卽非法이요 取非法은 只由不知非法卽法이니 一眞法界는 無是無非며 此無도 亦無니라 所以로 道호대 何於一法中에 有法有不法이리오하시니 脫或分別是法非法이라도 拈一放一이라 有甚了期리오

法을 取함은 다만 法이 곧 非法임을 알지 못한 때문이고, 非法을 取함도 다만 非法이 곧 法임을 알지 못한 때문이니, 一眞法界는 옳음도 없고 그름도 없으며, 이 없다는 것도 또한 없는 것이니라. 이 까닭에 말하되 “어찌 一法中에 法이 있음과 法아님이 있으리오”하시니 설혹 이 法과 法아님을 分別할지라도 하나를 접고 하나를 놓음이라 언제 마칠 기약이 있으리오.

 

야부 金不忄尃金이요 水不洗水로다

금으로 금을 살 수 없으며 물로써 물을 씻지 못한다.

설의 只是一般金이어니 豈分能忄尃所忄尃이며 只是一般水이니 豈分能洗所洗리오 恁麽則法則一味어늘 見有二取니 二取相亡하야사 一味方現하리라

다만 이 똑같은 금이니 어찌 能히 바꿔줄 것과 바꿔가질 것으로 나누며 다만 똑같은 물인데 어찌 씻는 물과 씻어지는 물로 나누겠는가. 이러한즉 法은 한 맛이거늘 見에 두 가지 취함이 있으니, 二取의 相이 없어야 한 맛이 바야흐로 나타난다.

야부 得樹攀枝는 未足奇라(攀枝는 一本에 作攀高라) 懸崖撤手하야사 丈夫兒니라 水寒夜冷魚難覓하니 留得空船載月歸로다

(벼랑에서) 나뭇가지를 잡음은 족히 기이함이 아니라,

벼랑에서 손을 놓아야 비로소 장부로다.

물도 차고 밤도 싸늘하여 고기찾기 어려우니

빈배에 달빛만 가득 싣고 돌아오도다.

설의 得一心存이 未是奇라 一處亦亡하야사 是丈夫니라 到這裏하야는 凡情이 脫盡하고 聖解도 亦亡이니 但將無私照하야 却來是非場이로다

한 마음을 얻어 두는 것이 기이한 게 아니라 한 곳마저도 없어야 丈夫이니라. 이 경지에 이르러서는 凡夫의 뜻이 다 떨어지고 聖人의 앎도 또한 없어야 함이니, 다만 私心없이 비춤을 가져서 도리어 是非의 場에 왔도다.

以是義故로 如來가 常說호대 汝等比丘가 知我說法을 如筏喩者라하노니 法尙應捨어든 何況非法가

이런 뜻인 까닭으로 여래가 항상 말하길 “너희들 비구는 내 설법을 뗏목으로 비유함과 같이 알라”하노니 법도 오히려 응당 버려야 하거늘 어찌 하물며 법 아님이겠는가.

설의 佛所說法은 只是入道方便이니 依方便而入道則可어니와 守方便而不捨則不可하니라 方便도 尙應捨離어든 此離를 亦何所存이리오

부처님이 說하신 法은 다만 道에 들어가는 方便이니, 이 方便에 의해서 道에 들어가는 것은 옳거니와 方便을 지키고 버리지 않음은 옳지 않느니라. 方便도 오히려 응당히 버려야 하거늘 이 버려야 할 것을 어찌 보존하리오.

 

야부 水到渠成이로다

물이 이르면(고이면) 개울이 이루어지도다.

설의 一作成渠라 佛所說法은 卽眞卽俗이시니 卽俗故로 解脫이 卽文字라 四十九年을 東說西說하시고 卽眞故로 文字가 卽解脫이라 三百餘會에 未曾說一字시니라 若着文字하면 見派迷源이요 若捨文字하면 望源迷派니 源派를 俱不迷하야사 方入法性海니라 旣入法性海하야는 無念智가 現前이니 無念智現前이여 所向無碍하야 觸處皆通하리라

(다른 책엔 개울을 이뤘다 하다) 부처님께서 說하신 法은 眞에도 해당하고 俗에도 해당하니 俗에 해당한 까닭에 解脫이 곧 文字여서 四十九年을 東說西說하시고 眞에도 해당한 까닭에 文字가 곧 解脫이다. 三百餘會에 일찍이 한 글자도 說하지 아니했다 하시니 만일 文字에 執着하면 派(줄기)만 보고 源(근원)을 迷할 것이요, 만약 文字를 버리면 根源만 보게 되어 줄기를 迷하게 되니 源과 派을 함께 迷하지 않아야 바야흐로 法性의 바다에 들어가느리라. 이미 法性海에 들어가서는 無念智가 現前함이니 無念智가 現前함이여, 向하는 데마다 걸림이 없어서 부딪치는 곳마다 통하리라.

야부 終日忙忙에 那事無妨이라 不求解脫하고 不樂天堂이로다 但能一念歸無念하면 高步毘廬頂上行하리라

종일토록 바쁘고 바쁘나

그 어느 일도 방해되지 않도다.

解脫도 구하지 않고

天堂도 즐기지 않도다.

다만 能히 한 생각 無念으로 돌아가면

높이 毘盧의 頂上을 걸어가리라.

설의 無念智現이여 這邊那邊에 打成一片이라 縛脫이 無二요 升沈이 一際라 旣得正因하야 但不認着하면 高步毘盧頂하야 自成眞快活하리라

無念智가 나타남이여, 이쪽과 저쪽을 쳐서 한 덩어리를 이룸이라. 束縛과 解脫이 둘이 아니요, 떠오름과 잠김이 한때로다. 이미 正因을 얻고서 다만 誤認하지만 않는다면 毘盧頂上을 높이 걸어서 스스로 참다운 快活을 이루리라.

 

第七 無得無說分(얻을 것도 없고 설할 것도 없음)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가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야 如來가 有所說法耶아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하는가. 여래가 설한 바 법이 있다고 하는가.”

 

須菩提가 言하사대 如我解佛所說義컨댄 無有定法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며 亦無有定法如來可說이니이다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제가 부처님의 설하신 뜻을 알기에는 아뇩다라삼막삼보리라고 이름할 만한 결정적인 법이 없으며, 또한 여래가 설하셨다 할 고정된 법도 없습니다.

설의 眞如佛性菩提涅槃으로 以至六度諦緣等一切名言이 皆是對機不得已之施設이라 就實而觀하면 初無伊麽事로다 又乘時有說이나 無實法與人이로다

眞如 佛性 菩提 涅槃으로써 六度 四諦 十二因緣(十二緣起) 等 一切의 名言에 이르기까지 다 根機를 대하여 不得已 說함이로다. 사실에 나아가 觀하면 아예 이러한 일은 없음이로다. 또한 때에 따라서 說함은 있으나 실다운 法으로써 사람에게 준 것은 아님이로다.

 

야부 寒卽言寒이요 熱卽言熱이로다

추우면 춥다고 말하고 더우면 덥다고 말하도다.

설의 以有二乘說二乘하시고 以有大乘說大乘하시니 應物行權無定法이라 隨緣立理脫羅籠이로다

二乘이 있으므로 二乘을 說하고 大乘이 있으므로 大乘을 說하시니, 衆生에 應하여 方便을 行하시니 決定的인 法은 없음이로다. 因緣을 따라서 이치를 세우니 그물(羅籠 굴레)을 벗어나도다(完全解脫).

야부 雲起南山雨北山하니 驢名馬字幾多般고 請看浩渺無情水하라 幾處隨方幾處圓고

구름은 남산에서 일고 비는 북산에서 내린다.

나귀이름들에 馬자가 얼마나 많았는가.

청컨대 넓고 아득한 無情水를 보라.

몇 곳이 모났으며 몇 곳이나 둥글었는가.

설의 依俙說諦緣하시고 更爲談六度하시니 以機不同으로 法亦無定이라 從此分開萬種名이로다 以無念智應群機하시니 半滿偏圓多少說고 多少說이며 曾無一字落言詮이로다

그럴듯하게 四諦 十二因緣을 說하시고 다시 六波羅蜜을 말씀하셨으니 근기가 같지 않음으로 法 또한 일정함이 없도다. 이 때문에 만가지 이름으로 나누어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無念智로써 근기에 應하시니 半字敎 滿字敎 偏敎 圓敎가 얼마나 많은가. 그 많은 말씀이여, 일찍이 한 글자도 말에 떨어지지 않았도다.

 

何以故오 如來所說法은 皆不可取며 不可說이며 非法이며 非非法이니

무슨 까닭인가 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법은 다 취할 수 없으며 말할 수도 없으며 법도 아니고 법 아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설의 佛所說法은 若說有相과 若說無相에 圓話自在하야 終不滯於一邊이라 所以로 不可取說이니라 又佛所說法은 謂是法이라도 亦不是며 謂非法이라도 亦不是니 若定非法인댄 渡河에 須用筏이요 若定是法인댄 到岸에 不須船이니라 所以로 有時에 道호대 至理一言이 革凡成聖이라하고 有時에 道호대 三乘十二分敎는 是甚麽오 熱椀鳴聲이라하시니 金屎之論도 亦以此也니라

부처님께서 說하신 法은 有相이라 說했거나 無相이라 說했거나 간에 圓滿한 말(圓話)로 自在하여서 마침내 일변에 머물지 않음이라. 그러므로 가히 取할 것이 아니며 說할 것도 아니니라. 또한 부처님께서 說하신 法은 “이 法“이라 말해도 옳지 않고 “法이 아니다.“라고 말할지라도 또한 옳지 않다. 만약 결정코 “法이 아니라” 말하면 강을 건너는 데는 모름지기 뗏목을 쓰는 것이요 만일 결정코 “이 法”이라 한다면 언덕에 이른 후에는 배를 필요로 하지 않음이니라. 이 까닭에 어떤 때에 말하길 ”지극한 이치의 한 마디가 凡夫를 고쳐서 聖人을 만든다“하고 어떤 때엔 말하길 ”三乘 十二分敎가 이 무엇인가. 뜨거운 그릇에 물 붓는 소리”라 하시니 金과 屎의 말도 또한 이것 때문이니라.

야부 是甚麽오

是甚麽오(무엇이냐)

설의 佛所說法은 如水上에 按胡蘆相似하야 觸着便轉이라 無定法可取며 無定法可說이니 若定說有인댄 爭奈非有며 若定說無인댄 爭奈非無리오 旣非有無法인댄 畢竟是甚麽오 又謂法謂非法이 旣皆不是인댄 畢竟是甚麽오

부처님께서 說하신 法은 물위에 뜬 표주박(胡蘆)과 같아서 부딪치기만 해도 금방 움직이도다. 定한 法은 가히 취할 게 없으며 定한 法은 가히 說할 게 없으니, 만약 결정코 說할 것이 있다고 말하면 非有(있지 않음)는 어찌하며 만약 결정코 說할 것이 없다면 非無(없지 않음)는 어찌하리오. 이미 有無의 法이 아닐진대 畢竟 무엇인가. 또 法이라 말하고 非法이라 말하는 것은 이미 다 옳지 않으니, 畢竟에 무엇인가.

야부 恁麽也不得이며 不恁麽也不得이니 廓落太虛空에 鳥飛無影迹이로다 咄 撥轉機輪却倒廻하니 南北東西任往來로다

이렇다 해도 안되고 저렇다 해도 안된다.

텅빈 큰 虛空에 새가 나르나 자취가 없도다.

咄! 機輪(솜씨)을 움직여 도리어 거꾸로 돌아가니

南北東西에 뜻대로 왕래하도다.

설의 定有定無俱不是니 莫向四句覓黃老어다 黃老는 不坐四句中이니 不坐四句中이여 鳥飛空中無影迹이로다 咄更須向鳥道裏轉身하야사 始得이니 南北東西一天地에 莫分彊界任往來로다 又法與非法이 二俱不是니 二見이 皆非佛本心이라 誰向空中覓鳥迹이리오 咄縱然伊麽去라도 亦非佛本心이니 若也眞知佛本心인댄 謂是法이라도 亦不妨이며 謂非法이라도 亦不妨이니라

定한 것이 있고 定한 것이 없는 것이 모두 옳지 않으니 四句를 向해서 黃老(佛)를 찾지 말지어다. 黃老는 四句 가운데 앉아 있지 않음이여, 새가 空中으로 날아가도 그림자 자취가 없도다^. 咄, 다시 새가 날아간 그 길(鳥道)을 向해 몸을 굴려야 비로소 옳음이니 南北東西 한 天地에 境界를 나누지 않고 自由롭게 往來하도다. 또 法과 非法이 둘 다 옳지 않으니 두 가지 견해가 모두 부처님의 本心이 아님이라. 누가 空中에서 새의 자취를 찾겠는가. 咄! 비록 이렇게 되더라도 또한 부처님의 本心이 아니니 만약 부처님의 本心을 참으로 알고자 한다면, 法이라 하여도 방해되지 않고 非法이라 할지라도 방해되지 않도다.

 

所以者가 何오 一切賢聖이 皆以無爲法으로 而有差別이니이다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모든 현성이 다 무위법(생멸변화가 없는 참된 법)으로써 차별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설의 一切賢聖所證法이 皆以無爲로 有差別이니 而此差別이 卽無爲라 逈出中間與二邊이로다 伊麽則一味無爲法이 在聲聞則名四諦요 在緣覺則名因緣이요 在菩薩則名六度니 六度因緣與四諦가 一一無取不可說이로다

一切 賢聖이 證得한 法이 모두 無爲로서 差別을 두었으니 이 差別이 곧 無爲라. 中間과 二邊을 멀리 벗어났도다. 이러한즉 한 맛의 무위법(無爲法)이 聲聞에 있은즉 四諦라 하고 緣覺에 있은즉 十二因緣이라 하고 菩薩에 있은즉 六波羅蜜이라 하니, 六度와 十二因緣과 四諦가 낱낱이 取할 것도 없고 說할 것도 없음이로다.

 

야부 毫釐有差하면 天地懸隔이로다

털끝만한 차이라도 있으면 天地처럼 벌어진다.

설의 法雖一味나 見有千差하니 所以千差가 只在一念이라 一念之差에 隔同天地로다 雖然如是나 天地一統이니 伊麽則金爲千器에 器器皆金이요 栴檀萬片이 片片皆香이로다

法이 비록 한 맛이나 견해에 千差가 있으니 이 까닭에 千差가 단지 한 생각에 있음이라. 한 생각 차이에 나누어짐이 天地와 같으니 비록 이와 같으나 天地는 한 덩어리로다. 이러한즉 金으로 천가지 그릇을 만들면 그 그릇그릇이 모두 金이요 栴檀(전단) 만 조각이 조각마다 모두 香이로다.

야부 正人이 說邪法하면 邪法이 悉歸正이요 邪人이 說正法하면 正法이 悉歸邪라(歸邪는 一作皆邪라) 江北成枳江南橘이여 春來에都放一般花로다

바른 사람이 삿된 法을 말하면

邪法이 다 正에 돌아오고

삿된 사람이 正法을 說하면

바른 法이 다 邪에 돌아가도다.

江北에서는 탱자가 되고 江南에선 귤이 됨이여,^

봄이 오면 모두 똑같이 꽃이 피도다

설의 一味無爲法이 能正亦能邪라 一種이 分南北하니 南北이 一般花로다

한 맛 無爲法이 能히 바르기도 하고 能히 삿되기도 함이라. 한 종자가 南北으로 갈리지만 南北의 꽃은 한가지로다.

 

第八 依法出生分(법에 의하여 출생함)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若人이 滿三千大千世界七寶로 以用布施하면 是人의 所得福德이 寧爲多不아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칠보로써 보시한다면 이 사람이 얻을 복덕이 얼마나 많겠느냐(어찌 많지 않겠느냐)?

 

須菩提가 言하사대 甚多니이다 世尊하 何以故오 是福德이 卽非福德性일새 是故로 如來가 說福德多니이다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복덕은 곧 복덕성이 아니므로 이 까닭에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若復有人이 於此經中에 受持乃至四句偈等하야 爲他人說하면 其福이 勝彼하리니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서 사구게만이라도 받아지녀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설한다면 그 복이 저 앞의 복(저 칠보로써 보시한 복덕)보다 수승하리니

설의 福德性者는 離能所絶是非하며 泯存亡無得失하야 眞淨無漏者가 是라 如是福德은 等空難量하며 絶對無倫하야 不應以多少待對之言으로 稱之니 今則反是일새 只可說名爲多언정 不應以無量無邊으로 稱之어니와 若能持經悟理하야 行無住行하면 則所作이 出於無心하야 行行이 一一淸淨이라 所感福德이 宜其眞淨無漏하야 而終無有極也니라 故로 前에 讚云호대 若菩薩이 不住相布施하면 其福德을 不可思量이라하시니라

福德性이란 能所를 떠나 是非를 끊으며 存亡도 없애고 得失도 없애서 진정한 無漏가 이것이라.

이 같은 福德은 虛空과 같아서 헤아리기 어려우며 상대가 끊어지고 짝할 수 없어서 응당히 多少나 상대로써 일컫지 못하리니, 지금엔 이와 반대로 다만 가히 많다고 說할지언정 응당 無量無邊으로써 稱하지 못함이도다. 만약 能히 經을 가지고 이치를 깨달아서 無住行을 行하면 그 짓는 바가 無心에서 나와서 行마다 낱낱이 淸淨함이라. 感得한 福德이 마땅히 참답고 깨끗하고 새는 것이 없어서 마침내 다함이 없느리라. 그러므로 앞에서 讚歎하며 말하되 “만약 菩薩이 相에 住하지 않고 布施하면 그 福德이 가히 헤아릴 수가 없다” 하시니라.

 

야부 事向無心得이니라

일은 無心에서 이루어느리라.

설의 信此經則無我理顯이요 知無我則心無異緣이요 心無異緣則胸中이 洒落하야 淸淨如空이요 心旣淸淨則諸佛祖의 神通機用과 自餘無量妙義의 前所未獲을 皆從斯得하리라

이 經을 믿으면 無我의 이치가 드러나고 無我를 알면 마음에 다른 因緣이 없으며, 마음에 다른 因緣이 없으면, 胸中이 깨끗하여 淸淨함이 虛空과 같고, 마음이 이미 淸淨하면 모든 부처님과 祖師님들이 신통기용과 그 밖의 妙한 뜻의, 전에 얻지 못한 것을 다 이로부터 얻으리라.

야부 寶滿三千及大千이라도 福緣이 應不離人天이니 若知福德元無性하면 買得風光不用錢하리라

三千大千世界를 채울 만한 보배로 布施하더라도

福의 因緣은 人間과 天上을 떠나지 않으니

元來 福德의 性品이 없음을 알면

本地風光을 사는 데 돈을 쓰지 않으리라.

설의 七寶는 人世之所重也요 捨施는 人情之所難也어늘 今以七寶로 滿三千而施之하니 可謂能所難能也로다 然其行施也가 如未契於無念眞宗이면 則其感果也가 但是人天有漏之報而已어니와 若依此經하야 知福性空하면 則不因施功하야도 本地風光이 自然呈露하리라

七寶는 人間 세상에서 소중히 여기는 것이고, 布施를 베푸는 것은 사람의 마음으로 行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제 三千世界에 가득한 七寶로서 布施하니 가히 어려운 것을 能히 함이다. 그러나 布施를 行하는 것이 만약 無念의 眞宗에 계합하지 않으면 곧 그 感得한 果報가 다만 人間과 天上에 나는 有漏의 果報(人天有漏之報)에 지나지 않겠지만, 만약 이 經을 의지하여 福德性의 空함을 알면 곧 布施功德을 因하지 않더라도 本地風光(우리의 本來 모습)이 저절로 나타날 것이다.

 

何以故오 須菩提야 一切諸佛과 及諸佛阿耨多羅三藐三菩提法이 皆從此經出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야, 일체 모든 부처와 모든 부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모두 이 경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니라.

설의 秪這 一卷經은 量包太虛하고 體遍一切하니 佛之與法의 玄根이 在玆로다 又三身之佛은 人性中固有언마는 但以無明所覆로 不能顯現이라가 今以智慧觜로 ?破無明殼하니 三身之佛이 當處現前이로다

다만 이 한 권의 經은 그 모양이 太虛를 에워싸고 체(體)가 一切에 두루하였으니 부처님과 법의 현묘한 뿌리(玄根)가 바로 여기 있음이로다. 또 三身의 부처님은 사람의 性品가운데 다 있지만 다만 無明에 덮인바 되어 나타나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 智慧의 부리(觜)로써 無明의 껍질(殼)을 쪼아 깨뜨리면 三身의 부처님이 그 자리에서 나타난다.

 

야부 且道하라 此經은 從甚麽處出고 須彌頂上이요 大海波心이니라

또한 일러라. 이 經은 어느 곳으로부터 나왔는가.

須彌의 頂上이요 大海의 파도중심이로다.

설의 人이 但知有子하고 不知有父하며 雖知有父나 亦不知有祖在니 須彌頂上과 大海波心이 豈不是祖之面目이리오 須彌頂上이여 形名不到요 大海波心이여 嶷然千差로다 嶷然千差여 浩浩沒涯岸이요 形名不到여 巍巍杳難攀이로다 到這裏하는 佛佛祖祖가 計較不成이며 一切物類로 比況不及이로다

사람들이 단지 자식 있음만 알고 아비 있음은 알지 못한다. 비록 아비가 있음은 아나 또한 할아버지가 있음은 알지 못하니, 수미산의 정상과 大海의 波濤中心이 어찌 할아버지의 面目이 아니겠는가. 須彌의 정상이여, 形相이나 이름으로써 이르지 못하고 大海波心엔 嶷然히 千萬差別이로다. 억연한 千差여, 넓고 넓어 가이없고 形相과 이름이 이르지 못함이여, 높고 아득하여 더위 잡고 오르기 어렵도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부처와 부처, 祖師와 祖師가 헤아리지 못하며 一切의 어떤 사물로도 비교할 수 없음이로다.

야부 佛祖垂慈實有權하시니 言言이 不離此經宣이로다 此經出處를 還相委아 便向空中駕鐵船이니라(空中은 他本에 作雲中이라) 切忌錯會어다

佛祖께서 慈悲를 베푸시어 眞實에서 方便을 두시니

말씀말씀이 다 이 經을 떠나지 않고 베푸셨도다.

이 經의 出處를 자세히 아는가.

문득 하늘을 向해 鐵船을 몰고 갈지니라.

간절히 바라노니 잘못 알지 말지어다.

설의 頓獲大事了하야는 灰頭土面伊麽來하야 爲霑枯稿洒甘露하니 滴滴이 皆從此經出이라 知得此經出處已하야는 好向芳草岸頭行이로다 切忌錯會여 有甚錯會리오 無雲生嶺上이요 有月落波心이로다 有月落波心이여 上界에 光不歇이요 無雲生嶺上이여 舒卷이 也尋常이로다

큰 일(깨달음)을 몰록 얻어 마치고는, 재묻은 머리와 흙묻은 얼굴(灰頭土面)로 이렇게 와서, 마른 나무들을 적시기 爲하여 甘露의 비를 뿌리니 그 방울방울이 다 이 經으로부터 나온다. 이 經의 出處를 알고 나면 저 芳草언덕을 向해 거닐지니라.

간절히 잘못 안 것을 꺼려함이여,

무슨 잘못 알 것이 있겠는가.

구름이 없으면 산봉우리가 드러나고

달이 있으면 파도중심에 떨어진다.

달이 있으면 波心에 떨어짐이여,

하늘에는 그 빛이 쉬지 않음이요.

구름이 없으면 산봉우리가 들어남이여,

그 펴고 거둠은 늘 있는 일이로다.

 

須菩提야 所謂佛法者는 卽非佛法이니라

수보리야 이른바 불법(글자 · 음성으로 된 불법)이라 하는 것도 곧 불법이 아니니라(마음자리가 아니니라).

설의 眞性이 不碍緣起하니 經能出生佛法이요 緣起가 不碍眞性하니 佛法이 卽非佛法이로다

참된 性品은 緣起에 걸리지 않으니, 經이 能히 佛法을 出生함이요. 緣起가 참된 性品에 걸리지 않으니, 佛法이 곧 佛法 아니다.

 

야부 能將蜜果子하야 換汝苦胡蘆로다

能히 단 과자를 가지고 너의 쓴 호로와 바꾸도다.

설의 佛法也여 如彼蜜果子요 非佛法也여 如彼苦胡蘆로다 佛非佛法非法이여 如將蜜果하야 換苦胡蘆어니와 更知道甛果는 徹蒂甛하고 苦胡는 連根苦니라

佛法이여, 저 단 과자와 같고, 非佛法이여, 저 쓴 호로와 같도다. 佛이 佛이 아니고 法이 法이 아님이여, 단 과자를 가지고 쓴 호로와 바꿈과 같거니와 다시 단 과일은 꼭지까지 달고 쓴 호로는 뿌리까지 쓴 것을 알지니라.

야부 佛法非法이여 能縱能奪이라 有放有收하며 有生有殺이로다 眉間에 常放白毫光이어늘 癡人은 猶待問菩薩이로다

佛法이 法이 아님이여,

能히 놓아두기도 하고 能히 뺏기도 함이라.

놓아두기도 하고 거두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도다.

눈썹 사이에서 항상 白毫光을 놓거늘

어리석은 이들은 오히려 菩薩에게 묻도다.)

설의 左之右之에 能方能圓이라 鷺鷥立雪非同色이요 崑崙騎象稍依俙로다 人人이 盡有一雙眉하야 一雙眉際에 放毫光이로다 放毫光이여 本現成하니 何須向外空尋覓이리오

좌고 가고 우로 가고, 能히 모나기도 하고 둥글기도 하도다. 백로가 눈 속에 섰으나 같은 색이 아니요, 崑崙이 코끼리를 타니 조금 비슷하도다. 사람사람이 다 한 雙의 눈썹이 있어서 한 쌍의 미간에 백호광을 놓음이로다. 백호광을 놓음이여, 本來 다 이루었는데 어찌 모름지기 밖을 向해 부질없이 찾으리오.

 

第九 一相無相分(하나의 상도 상이 아님)

須菩提야 於意云何요 須陀洹이 能作是念호대 我得須陀洹果不아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다원이 능히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다(증득했다)’ 하는가.

 

須菩提가 言하사대 不也니이다 世尊하 何以故오 須陀洹은 名爲入流로대 而無所入이니 不入色聲香味觸法일새 是名須陀洹이니이다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인가 하면 수다원은 성류(성인의 흐름)에 든다고 하지만 들어간 바가 없으니 색성향미촉법에 들어가지 않으므로 이를 이름하여 수다원이라 합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斯陀含이 能作是念호대 我得斯陀含果不아 須菩提가 言하사대 不也니이다 世尊하 何以故오 斯陀含은 名一往來로대 而實無往來일새 是名斯陀含이니이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다함이 능히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사다함과를 얻었다’ 하는가.”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인가 하면 사다함은 이름이 일왕래로되 왕래함이 없으므로 이름을 사다함이라 합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阿那含이 能作是念호대 我得阿那含果不아 須菩提가 言하사대 不也니이다 世尊하 何以故오 阿那含은 名爲不來로대 而實無不來일새 是故로 名阿那含이니라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나함이 능히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아나함과를 얻었다’하는가”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인가 하면 아나함은 이름이 오지 않는다(不來) 하오나 실로는 오지 않음이 없으므로 이름을 아나함이라 합니다.”

설의 此本에 元無無不之不字어늘 今稽川頌本하야 加之라 一切佛法이 皆從此經出이요 一切賢聖이 皆以無爲法으로 而有差別이니 佛法이 旣非佛法인댄 差別聖果인들 亦何有實이리오 伊麽則若佛若法若僧寶가 畢竟冥然合一機로다

이 책에는 元來 無不의 不字는 없는데 지금 야부스님의 頌本을 상고하여 더함이라.

一切 佛法이 다 이 經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一切의 성현이 다 無爲法으로써 差別을 두었으니, 佛法이 이미 佛法이 아닐진대 差別의 聖果인들 또한 무슨 實이 있으리오. 이러한즉 佛寶, 法寶, 僧寶(三寶)가 畢竟엔 명현히 一機에 合함이로다.

 

야부 諸行이 無常하야 一切皆苦로다

모든 것이 無常하니 一切가 다 苦로다.

설의 皆苦는 他本에 作皆空하니 空字가 近是라 四果無果하야 歸一妙空이로다

皆苦는 다른 책에 皆空이라 하니 空자가 더 가깝도다. 四果는 果가 없어서 하나의 妙한 空에 돌아가도다.

야부 三位聲聞이 已出塵이나 往來求靜有疎親이로다 明明四果가 元無果하니 幻化空身이 卽法身이로다

三位의 聲聞이 이미 六塵을 벗어났으나

往來하며 靜을 구하니 親疎가 있음이로다.

분명하고 분명한 四果는, 元來 果라는 것이 없으니

幻化 空身(虛妄한 빈 몸뚱이)이 곧 法身이로다.

설의 六塵境內에 齊得出이나 涅槃城裏에 有疎親이라 有疎親分四果여 四果無果幻空身이로다 幻空身卽法身이여 混融平等勿疎親이로다

六塵 境界 안에서 벗어났으나 涅槃의 城 속에는 親과 疎가 있음이라. 疎親이 있어서 四果를 나눔이여. 四果는 果가 없어서 幻空身(虛妄한 몸뚱이)이로다.

幻空身이 곧 法身이라 함이여,

混融하고 平等하여 疎親이 없도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阿羅漢이 能作是念호대 我得阿羅漢道不아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라한이 능히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 하는가.”

 

須菩提가 言하사대 不也니이다 世尊하 何以故오 實無有法名阿羅漢이니 世尊하 若阿羅漢이 作是念호대 我得阿羅漢道라하면 卽爲着我人衆生壽者니다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인가 하면 실로 아라한이라 할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아라한이 이러한 생각을 하되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 하면 이는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함입니다.”

 

世尊하 佛說我得無諍三昧人中에 最爲第一이라 是第一離欲阿羅漢이라하시니라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저를 무쟁삼매를 얻은 사람가운데서 제일이라 하시니, 이는 욕심을 떠난 제일의 아라한이라고 하심이나

설의 內不被見聞의 使殺하고 外不被聲色의 染汚하야 內外淸淨하야 曠然虛閑을 是名無諍이며 亦名離欲이니라

안으로 見聞의 끄달림을 입지 않고 밖으로 聲色의 물듦을 입지 않아서 內外가 淸淨하여 확연히 虛閑(넓게 비어 고요함)함을 無諍이라 名하며 또는 離欲이라고도 하느니라.

 

야부 把定則雲橫谷口요 放下也에 月落寒潭이로다

把定하면 구름이 골짜기에 걸쳐 있고

放下하면 달이 찬 못에 떨어지도다.

설의 不爲有邊所動이여 根境法中에 無影迹이요 不爲無邊所寂이여 這邊那邊에 應無虧로다 應無虧여 月落寒潭이요 無影迹이여 雲橫谷口로다 把定이 是아 放行이 是아 把定放行이 俱不是하니 一掃掃向三千外로다

有에 動하는 바가 되지 않음이여, 六根과 六境의 法(根境法) 가운데 그림자나 자취(영적)가 없음이요, 無의 고요한 바가 되지 않음이여, 이쪽 저쪽의 應함에 이지러짐이 없도다. 응당히 이지러짐이 없음이여, 달이 찬 못에 떨어짐이요. 그림자나 자취가 없음이여, 구름이 골짜기에 걸쳤도다. 把定(잡아 정함)이 옳으냐 放行(놓음)이 옳으냐. 把定과 放行이 모두 다 옳지 않으니, 한번 쓸어 三千世界 밖으로 쓸어버리도다.

야부 喚馬何會馬리오 呼牛未必牛라 兩頭를 都放下하고 中道도 一時休라 六門에 迸出遼天鶻하니 獨步乾坤總不收로다

말이라고 부른들 어찌 말이 되며

소라고 부른들 반드시 소가 아니로다

두 가지를 함께 놓아 버리면

中道도 일시에 쉴지어다.

六門에서 먼 하늘의 매처럼 迸出하니

乾坤에 홀로 걸어서 모두 거두지 못하도다.

설의 喚馬呼牛總不然하니 放行把定이 俱不是라 旣不涉於明暗兩頭하고 亦不坐於毘盧頂寧頁이라 六根門頭에 沒蹤由하니 三千里外에 閑獨步로다 閑獨步여 快如遼天鶻이라 乾坤도 收不得이어니 宇宙가 豈能藏이리오

말이라 부르고 소라 부름이 모두 그렇지 않아서 放行과 把定이 모두 옳지 못함이라. 이미 明暗의 양쪽에 들어가지 않고 비로자나불의 이마에도 앉지 않음이라. 六根門頭에 자취가 없으니 三千里 밖에서 부질없이 홀로 걷도다.

부질없이 홀로 걸음이여. 그 快活하기가 저 멀리 하늘 끝까지 날아가는 매와 같도다. 乾坤도 거둬들여 얻지 못하거니, 宇宙가 어찌 能히 그것을 감추리오.

 

我不作是念호대 我是離欲阿羅漢이라하노이다

저는 제가 욕심을 떠난 아라한이라고 생각치 않습니다.

世尊하 我若作是念호대 我得阿羅漢道라하면 世尊이 則不說須菩提가 是樂阿蘭那行者어니와 以須菩提가 實無所行일새 而名須菩提가 是樂阿蘭那行이라하시나이다

세존이시여, 제가 만약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하면, 세존께서는 곧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즐기는 자”라고 말씀하시지 않으려니와 수보리가 실로 행하는 바가 없으므로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즐기는 자’라고 이름하셨습니다.

설의 離欲無諍에 已稱第一이요 又不作念하니 善不可加로다 反是則豈得名爲無諍이리오

욕심을 여의고 다툼이 없음을 이미 제일이라 稱함이요. 또한 그런 생각을 짓지 않으니 더 이상 좋을 수가 없도다. 이와 반대가 된다고 하면 어찌 無諍이라고 이름할 수 있으리오.

 

야부 認着하면 依前還不是니라

알았다고(認着) (말)하면 그전(공부하기 이전)처럼 도리어 옳지 못하도다.

설의 以有無諍之實일새 故有無諍之名이니 名實을 更須忘却하야사 始得다 若也未忘却이면 依前還不是니라

無諍의 實이 있는 까닭에 無諍의 이름이 있으니 名과 實을 모름지기 忘却해야 비로소 옳은 것이다. 만약 忘却하지 못하면 전처럼(수행 전) 도리어 옳지 못하리라.

야부 蚌腹에 隱明珠하고 石中에 藏碧玉이라 有麝自然香이니 何用當風立이리오(當은 一作臨이라) 活計看來恰似無나 應用頭頭皆具足이로다

조개(蚌蛤) 속엔 밝은 구슬 숨어 있고

돌 속엔 푸른 옥(碧玉) 감추었어라.

사향노루 있으매 저절로 향기 나는데

어찌하여 바람 앞에 섰으리오.

살림살이 보아오면 흡사 없는 듯하나

응용하면 낱낱이 다 具足함이로다.

설의 明珠碧玉이 隱不露하니 大智如愚看似癡라 道存乎己하면 自發外니 何用區區逆人知리오 莫謂渠無活計在하라 應用頭頭皆具足이로다

밝은 구슬과 푸른 옥(碧玉)은 숨어서 드러나지 않으니, 큰 智慧者는 어리석은 듯하여 愚癡한 것 같으나 道가 自己에게 있으면 自然히 밖으로 드러나게 되니 어찌 區區하게 사람에게 알리리오. 그가 살림살이가 없다고 말하지 말라. 응용하면 낱낱이 다 具足하다.

 

第十 莊嚴淨土分(정토를 장엄함)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於意云何오 如來가 昔在然燈佛所하야 於法에 有所得不아 不也니이다 世尊하 如來가 在然燈佛所하사 於法에 實無所得니이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옛적(전생)에 연등불 회상에서 법에 얻은 것이 있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연등불 회상에서 법에 (대하여) 실로 얻은 것이 없습니다.”

설의 已明聲聞無取了하시고 將現菩薩亦無取하사 先擧自己因地上에 師亦無言己無聞하시니 空生이 知佛明無得하사 果能答以無所得이로다 因甚道無所得고 以迹論之則釋迦가 彼時에 因聞然燈의 所說法要하사 熏成正覺하시니 豈是無得이리오 然이나 此는 但以借緣見道로 爲得耳니라 以實言之則釋迦는 本是天上天下에 獨尊獨貴底人이라 位過諸佛이시며 富有萬德이시니 何曾受他點眼이며 何容有法更得이리오 所以로 道호대 謂得然燈記인댄 寧知是舊身이리오하시니라

이미 聲聞들이 取할 것이 없음을 밝히시고 장차 菩薩도 또한 取할 것이 없음을 밝게 나타내고자 하시어, 먼저 自己의 因地上(처음 修行 당시)에 스승도 말이 없으시고 自己도 들음이 없음을 먼저 드시니, 空生이 부처님께서 얻은 바가 없음을 밝히기 爲함을 알아서, 과연 能히 無所得(얻은 바가 없음)으로써 答하였다. 왜 無所得(도를 얻은 것이 없다)이라고 말하였는가. 자취로써 그것을 論한다면 釋迦가 저 때에 然燈佛께서 說하신 法要를 들음으로 因하여 正覺을 이루시니 어찌 얻은 것이 없으리오. 그러나 이는 다만 因緣을 빌려 見道한 것으로써 얻음을 삼은 것일 뿐이니라. 사실로써 말하면 釋迦는 本來 天上天下에 홀로 높고 홀로 귀하신 분이라, 그 지위가 모든 부처님을 지나시며 그 富가 萬德을 소유하였으니, 어찌 일찍이 남이 點眼해 줌을 받을 것이며 또 어찌 다시 얻을만한 法이 있음을 용납하겠는가. 그러므로 이르되 然燈佛께 授記를 얻었다 말할진댄 어찌 옛 몸을 알았으리오 하시니라.

 

야부 古之今之로다

옛날이요, 지금이로다.(옛날은 옛날이고 지금은 지금이로다.)

설의 非但昔年에 無所得이라 至今出世라도 亦無得이니 伊麽則古亦只如是여 今亦只如是로다

非但 옛날에만 얻은 것이 없을(無所得) 뿐만 아니라 지금 出世하여도 또한 얻을 게 없으니, 그러한 즉 옛날에도 또한 이와 같았으며 지금에도 또한 다만 이와 같도다.

야부 一手指天하고 一手指地하시니 南北東西에 秋毫不視로다 生來心膽이 大如天하시니 無限群魔가 倒赤幡이로다

한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은 땅을 가리키시니

南北東西에 추호도 볼 수 없도다.

태어나면서부터 心膽이 하늘같이 크시니

無限한 마군들의 붉은 깃발을 넘어뜨리도다.

설의 指天指地를 會也未아 南北東西一釋迦로다 一釋迦여 誰籠罩오 心膽이 恢恢大如天하시니 一口呑盡諸佛祖로다 佛祖도 尙被渠呑却이어든 魔外가 如何得不降이리오

하늘을 가르키고 땅을 가르킴을 아는가. 南北東西에 오직 한 석가로다. 한 釋迦여, 누가 뒤덮고 있는가.

심장과 담이 크고 커서 큰 하늘과 같으시니, 한 입으로 佛祖들을 다 삼켰도다. 佛祖도 오히려 삼킴을 당했거늘 하물며 魔軍과 外道(魔外)가 어찌 降伏하지 않겠는가.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菩薩이 莊嚴佛土不아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하느냐.”

 

不也니이다 世尊하 何以故오 莊嚴佛土者는 卽非莊嚴일새 是名莊嚴이나이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고 그 이름이 장엄입니다.”

설의 內而根身과 外而器界가 皆是淸淨智境이며 一一無爲佛土니라 根身器界를 因甚喚作淸淨智境과 無爲佛土오 捏目에 空花亂墜요 不然이면 滿目蒼蒼이니라 作麽生莊嚴고 情忘勿疎親이요 見盡無內外로다 作麽生이 是非莊嚴고 情見忘處에 不留蹤하면 見佛見祖를 若寃讎니라

안으로 根身(六根의 몸)과 器界(밖으로의 世界)가 다 淸淨한 境界이며 낱낱이 함이 없는 佛土(無爲佛土)니라.

根身과 器界를 무엇 때문에 淸淨한 智慧의 境界와 無爲의 佛土라 부르는가. 눈을 누르면 헛 꽃(空花)이 어지럽게 떨어지고, 그렇지 아니하면 눈 가득히 푸르를 것(蒼蒼)이다. 어떻게 莊嚴하는가. 情을 잊으면 親疎가 없고 所見이 다하면 內外가 없음이로다. 무엇이 非莊嚴인가. 情과 見이 잊혀진 곳에서도 자취를 머물지 않으면 부처를 보고 祖師를 보는 것이 마치 원수와 같으리라.

 

야부 孃生袴子요 靑州布衫이로다

어머니의 속옷이요, 청주에서 만든 장삼(布衫)이로다.

설의 孃生袴子는 純而無雜이라 然이나 唯古非今이요 靑州布衫은 儉而無華라 然아나 但質無文이니 本始合體하야 文質이 彬彬하야사 始可名爲十成莊嚴이니라

어머니의 속옷은 순수하여 잡됨이 없음이라. 그러나 오직 옛이고 只今이 아님이요. 청주의 布衫은 검소해서 화려하지 않으나 다만 질박해서 무늬가 없음이니, 本과 始가 體에 合하여 무늬와 바탕(質)이 빛나고 빛나야만 비로소 滿足할 만한(十) 莊嚴이 된다고 하느리라.

야부 抖擻渾身白勝霜하니 蘆花雪月이 轉爭光이로다 幸有九皐翹足勢하니 更添朱頂又何妨가

온 몸을 털어 버리니 희기가 서리보다도 더 희고,

갈대꽃과 雪月은 더욱 빛을 다투도다.

다행히 깊은 못에 한 마리 학이 빼어났으니

다시 붉은 이마를 더한들 무엇이 방해로우랴.

설의 功中就位에 脫盡廉纖이요 位裏轉身에 更添光彩로다

功 가운데서 威儀에 나아감에 廉纖(자질구레한 것)을 다 벗어버리고, 위의 속에서 몸을 굴림에 다시 광채를 더함이로다.

 

是故로 須菩提야 諸菩薩摩訶薩이 應如是生淸淨心이니 不應住色生心하며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이요

이런 까닭으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응당 이와 같이 청정(맑고 깨끗한)한 마음을 낼지니 응당히 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 성 향 미 촉 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 것이요

설의 何謂淸淨心고 無取無着이 是니라 若欲無取着인댄 須開智慧眼이니 一切賢聖이 以開智慧眼故로 善能分別諸根境界호대 於中無着하야 而得自在니라 由是로 根塵識界가 廓達無碍하야 一一明妙하며 一一淸淨如虛空이니 是可謂天水相連爲一色이라 更無纖靄隔淸光이로다 般若利用이 如是甚深하며 如是自在하니 須開慧眼하야 普應根門하야 念念淸淨하며 塵塵解脫이요 不應無智하야 染着諸境이니라

무엇을 淸淨心이라 하는가. 取함도 없고 執着도 없는 것이 이것이다. 만약 取하고 執着함(取着)이 없고자 하면 모름지기 智慧의 눈을 열어야 하니, 一切賢聖이 智慧의 눈을 연 까닭으로 能히 모든 根의 境界(根境界)를 分別하되 그 가운데에 執着함이 없어서 自在함을 얻느니라. 이로 말미암아 六根, 六塵, 六識의 境界(根塵識界)가 확트여 걸림이 없어서, 낱낱이 밝고 妙하며 낱낱이 虛空같이 淸淨하여서 이것은 가위 하늘과 물이 서로 이어져 一色이 됨이라. 다시 纖靄(조각구름)도 淸光을 막지 않았도다.

般若의 날카로운 作用이 이와 같이 심히 깊으며 이와 같이 自在하니 모름지기 智慧의 눈을 열어 널리 根門에 應하여, 생각생각마다 淸淨하고 낱낱이 解脫할 것이요, 응당히 智慧가 없이 모든 境界에 染着하지 말 것이니라.

 

야부 雖然恁麽나 爭奈目前에 何오

비록 그러하나 눈앞에 있는 것을 어찌하리오.

설의 雖然不應住於色聲이나 色聲이 爭奈目前何오

비록 그렇게 色聲에 응당히 住하지 않으나, 色聲이 눈앞에 있는 것을 어찌할 것인가.

야부 見色非干色이요 聞聲不是聲이라 色聲不礙處에 親到法王城이로다

色을 보면 色에 간섭받지 않고

소리를 들어도 이 소리가 아니로다.

色과 소리가 걸리지 않는 곳에서

친히 法王城에 이르리라.

설의 目前諸法이 鏡裏看形이라 鏡裏看形不礙我하니 眉目分明非別人이라 非別人이여 此是相見法王處로다 所以로 道호대 鏡裏에 見誰形고 谷中에 聞自聲이라 見聞而不惑이어니 何處匪通程이리오하시니라

눈앞의 모든 法이 거울 속에서 形相을 보는 듯하여서, 거울속에서 形相을 보는 것은 나에게 걸리지 않으니, 눈썹과 눈이 分明하여 다른 사람이 아니로다. 다른 사람이 아님이여, 이것은 法王處를 相見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거울 속에서 누구의 形相을 보는가. 골짜기 속에서 自己 소리를 들음이로다. 보고 듣는 것에 현혹되지 않으니 어느 곳인들 길이 통치 않으리오 하시니라.

應無所住하야 而生其心이니라

응당 머문 바 없이 (하고서야 비로소) 그 마음을 낼지니라.

설의 不須空然逐風波하고 常在滅定應諸根이니 是可謂暗中有明로다 又無所住者는 了無內外하고 中虛無物이 如鑑空衡平하야 而不以善惡是非로 介於胸中也요 生其心者는 以無住之心으로 應之於事호대 而不爲物累也니라 孔夫子가 云君子之於天下也에 無適也하며 無莫也하야 義之與比라하시니 此는 言心無所倚하야 而當事以義也니 當事以義則必不爲物累矣며 不爲物累則必不失其宜矣니라 聖人이 時異而道同하고 語異而相須를 於斯에 可見也已로다 謝氏가 於無適莫註中에 引經此句하야 以爲猖狂自恣하야 而卒得罪於聖人이라하니 何其言之不審이 至於如是之甚耶아 昔者에 盧能이 於五祖忍大師處에 聞說此經하고 到此하야 心花頓發하사 得傳衣盂하야 爲第六祖하사 自爾로 五葉이 結果하야 芬芳天下하시니 故知只此一句가 出生無盡人天師也로다 嗚呼라 謝氏여 何將管見하야 擬謗蒼蒼乎아

모름지기 空然히 風波를 쫓지 말고 항상 滅盡定에 머물러 모든 根機에 應해야 함이니, 이것은 可謂 어두운 가운데서 밝음이 있는 道理이다. 또 無所住란 마침내 內外가 없고 中間도 비어서 事物이 없는 것이 마치 거울이 텅비고 평평한 저울대와 같아서 善惡是非를 가슴속에 두지 않는 것이요. 生其心이란 머무른 바 없는 마음으로 事에 應하되, 物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니라. 孔子가 이르되 “君子(賢人)가 天下에 머물면 옳은 것도 없고(無適) 옳지 않음도 없어서(無莫), 뜻과 더불어 和한다” 하시니 이는 마음에 의지하는 바가 없어서 일을 당함에 義로써 行함을 말함이니, 일을 當하여 義로써 行한즉 반드시 사물의 얽매임이 되지 않으며, 사물의 얽매임이 되지 않은즉 반드시 그 마땅함을 잃지 않는 것이니라. 聖人이 비록 태어난 시대는 다르나 道는 같고, 말은 비록 다르나 서로 필요로 함은 여기에 이르러서 가히 볼 만하도다. 謝氏^가 無適莫(可, 不可도 없음)의 註 가운데 經의 이 句를 인용하되, 창광히(미친 듯) 스스로 방자하게 함으로써 마침내 聖人에게 죄를 지었다 하니 어찌 말을 살피지 못함이 이같이 심한 데까지 이르렀는가. 옛날에 盧能(慧能)이 五祖 弘忍大師의 처소에서 이 經 說함을 듣고, 여기에 이르러 心花가 활짝 피어서 옷과 발우를 전해 받으사 第六祖가 되어 그로부터 오엽(五葉)이 열매를 맺어 天下를 향기롭게 하셨도다. 그러므로 알라. 단지 이 한 글귀(應無所住 而生其心)가 다함이 없는 人天의 스승을 出生하시도다. 오호라. 謝氏여, 어찌 좁은 所見으로 저 푸르고 넓은 하늘을 비방하려 하였던가.

야부 退後退後어다 看看하라 頑石이 動也로다

뒤로 물러서고 물러설지어다.

보고 보아라. 頑石(굳은 돌)이 움직이도다.

설의 明中에 莫留蹤하고 却向暗中歸어다 看看하라 可不動底가 如今動也니 動還無動하야사 始得다

밝은 가운데서 자취를 머물지 말고 도리어 어두운 곳을 向하여 돌아오도다. 잘 보아라. 動할 수 없는 것이 이제 動하니, 動하는 것이 도리어 動함이 없어야 비로소 옳을 것이다.

야부 山堂靜夜坐無言하니 寂寂廖廖本自然이라 何事西風이 動林野하야 一聲寒雁이 唳長天고

고요한 밤 산당에 말없이 앉아있으니

적적하고 寥寥함이 自然 그대로 더라.

무슨 일로 西風은 林野를 動케 하여

한 소리 찬 기러기가 長天을 울게 하는가.

설의 本自無動 何須動也 須信道 四海 浪靜龍穩睡 九天 雲淨鶴飛高

本來 스스로 動함이 없거늘 어찌 모름지기 動하리오.

모름지기 믿을지어다.

四海에 물결이 고요하면 용이 숨어서 자고

九天에 구름이 개이면 학이 높이 날도다.

 

須菩提야 譬如有人이 身如須彌山王하면 於意云何오 是身이 爲大不아 須菩提가 言하사대 甚大니이다 世尊하 何以故오 佛說非身이 是名大身이니이다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이 몸이 큰 수미산 같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몸이 크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몸 아닌 것을 이름하여 큰몸이라 하셨습니다.”

설의 放下根塵識하야 淸淨至無餘하니 圓滿空寂體가 豁爾於焉現이라 體同龜毛像巍巍하니 須彌橫海落群峰이로다 擧問空生深有以하시니 恐人於斯에 生認着이어시늘 空生이 果能知佛意하사 答以非身好知音이로다 只如非身底道理를 作麽生道오 未曾暫有像宛然하니 像雖宛然이나 同兎角이로다

六根과 六塵과 육식(根塵識)을 모두 놓아버려서 淸淨하여 남음이 없으니, 圓滿하고 空寂한 몸(體)이 활연히 나타나도다. 體는 거북이 털과 같으나 그 모습은 대단히 크니, 須彌山이 바다에 비껴 있으매 뭇 봉우리보다 우뚝 섰도다. 空生에게 물은 것은 깊은 까닭이 있으니 사람들이 여기에서 오인을 낼까 두려워하셨거늘, 空生이 과연 부처님의 뜻을 알아서 答하기를 「몸이 아니라」고 한 것은 좋은 知音者로다. 다만 저 몸 아님의 道理를 어떻게 말할 것인가.

일찍이 잠시도 있지 않으나 形相은 宛然하니

相이 비록 宛然하나 토끼풀과 같음이로다.

 

 

야부 設有인들 向甚麽處着고

설사 있다 한들 어느 곳을 向해서 着할 것인가.

설의 賴同兎角이어니 設有인들 向什麽處着고 大烘焰裏에 難停物이로다

토끼뿔과 같으니 설사 있다 한들 어느 곳을 向해서 着할 것인가. 큰 불꽃 속에서는 사물을 머물러 두기 어렵도다.

야부 擬把須彌作幻軀하니 饒君膽大更心麤라 目前에 指出千般有라도 我道其中一也無라하니라 便從這裏入이어다

須彌山을 가지고 幻化 같은 몸뚱이를 지으려 하니

설사 그대가 담이 크고 또 마음이 크다 하여

눈앞에서 千萬 가지 지적해 낼지라도

나는 그 中에서 한 개도 없다 말하리라.

곧 이곳으로부터 들어갈지어다.

설의 大身說非身이여 心膽이 大麤生이라 幸而喚作非身하니 設使喚作是身이라도 我道龜毛滿目前이라하시니라 伏請諸人은 須從這裏入이어다

큰 몸을 몸이 아니라 말함이여, 心膽이 크고 큼이라. 다행히 몸이 아니라 부르니 設使 이 몸이라 부를지라도 나는 거북이 털(헛것)이 눈앞에 가득하다고 말하리라. 엎드려 청하노니 모든 사람들은 모름지기 이 道理(本來 없는 道理)속으로 들어갈지어다.

 

 

 

第十一 無爲福勝分(무위복이 수승함)

須菩提야 如恒河中所有沙數하야 如是沙等恒河가 於意云何오 是諸恒河沙가 寧爲多不아 須菩提가 言하사대 甚多나이다 世尊하 但諸恒河도 尙多無數어든 何況其沙리잇가

“수보리야, 항하에 있는 모래처럼 많은 항하가 또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모든 항하에 있는 모래가 얼마나 많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다만 저 여러 항하만이라도 오히려 무수히 많거늘 하물며 그 모래수이겠습니까.”

설의 一恒河沙數無窮하니 沙等恒河亦無盡이로다 一性中有恒沙用하니 如恒沙用法無盡이로다 一一恒沙亦無盡하니 一一法有恒沙用이로다

한 恒河의 모래수도 無窮하지만,

모래수와 같이 많은 恒河도 또한 無盡하도다.

한 性品 가운데는 恒河의 모래수와 같은 妙用이 있으니,

恒河沙와 같은 妙用의 그 法도 다함이 없도다.

낱낱의 恒河沙 또한 無盡하니,

낱낱의 法 가운데도 恒河沙와 같은 作用이 있음이로다.

 

야부 前三三後三三이로다

前三三 後三三이로다.

설의 天地日月과 萬像森羅와 性相空有와 明暗殺活과 凡聖因果의 凡諸名數를 一句에 都說破로다

天地日月과 森羅萬像과

性, 相, 空, 有와 明暗과 殺活과,

凡聖과 因果의 무릇 모든 이름과 숫자(名數)를

이 한 구절에 모두 다 說破했도다.

야부 一二三四數河沙여 沙等恒河數更多로다 算盡目前無一法하야사 方能靜處薩婆訶하리라

一, 二, 三, 四의 수가 恒河沙와 같음이여,

모래 같은 恒河의 수가 다시 또한 많아라.

셈을 다하여 눈앞에 一法도 없어야

비로소 能히 寂靜處에서 薩婆訶하리라.

설의 一二三四等恒河여 一恒河沙로 以爲數하니 一恒河沙가 猶未足이라 沙等恒河數更多로다 諸法이 無邊數難窮하니 窮盡諸法無異法이로다 了得法法無異法하야사 方能靜處薩婆訶하리라

一, 二, 三, 四의 수가 恒河沙와 같음이여, 한 恒河의 모래를 算數하니 한 恒河의 모래로는 오히려 滿足하지 못함이라. 모래 같은 恒河의 數라야 많음이 되도다. 모든 法이 가없이 많아 헤아리기 어려우나 모든 法을 다 窮究하면 다른 法이 아니로다. 法과 法이 다른 法이 없음을 了達하여야 바야흐로 寂靜處에서 薩婆訶하니라.

규봉 二는 約多沙以彰福이라

㉸二. 많은 모래를 가지고서 복을 드러냄이다.

須菩提야 我今實言으로 告汝호리니 若有善男子善女人이 以七寶로 滿-爾所恒河沙數三千大千世界하야 以用布施하면 得福이 多不아 須菩提가 言하사대 甚多니이다 世尊하

“수보리야, 내가 이제 진실한 말로 너에게 이르노니,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칠보로써 저 항하의 모래수와 같은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채워서 보시한다면 얻을 복이 많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若善男子善女人이 於此經中에 乃至受持四句偈等하야 爲他人說하면 而此福德이 勝前福德하리라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 가운데서 사구게만이라도 받아 지지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설한다면 그 복덕은 앞에서 칠보로 보시한 복덕보다 수승하리라”.

설의 施寶는 終感生死일새 所以爲劣이요 持經은 當趣菩提일새 所以爲勝이니라

七寶를 布施하는 것은 마침내 生死를 感得하므로 下劣한 이유가 되고, 經을 受持하는 것은 마땅히 菩提에 나아감으로 殊勝함이 되느리라.

 

야부 眞鍮로 不換金이로다

진짜 놋쇠라도 금과는 바꾸지 않는다.

설의 眞鍮가 雖眞이나 比之精金하면 猶是僞寶요 施福이 雖勝이나 比之經福하면 猶是劣福이로다

진짜 놋쇠가 비록 진짜이기는 하나 純金에 비하면 오히려 가짜 보배(僞寶)가 되고, 布施하는 福이 비록 殊勝하긴 하나 經 가지는 福에 비유하면 오히려 下劣한 福이 되도다.

야부 入海算沙徒費力이라 區區未免走紅塵이니(紅은 一作埃라) 爭如運出家珍寶하야 枯木生花別是春가

바다에 들어가 모래를 헤아리는 것은 한갓 힘만 허비함이라.

구구히 紅塵에서 허덕임을 면치 못하니.

어찌 내집의 진귀한 보배를 꺼내어서

枯木에 꽃피우는 특별한 봄만 같겠는가.

설의 棄本逐風波하니 終成有漏因이라 有漏因이여 爭如直下明自己리오 因甚要須明自己오 人人脚跟下에 淸淨本解脫이라 更明今日事하면 別有一春光하리라

根本을 버리고 風波를 좇으니 마침내 有漏의 因을 이룸이라. 有漏의 因이여, 어찌 바로(直下에) 自己를 밝힘만 같으리오. 무엇 때문에 모름지기 自己를 밝혀야 하는가.

사람 사람의 선 자리가

淸淨하여 본래 解脫이라.

다시 오늘 일을 밝힌다면,

특별히 한 봄빛이 있으리라.

 

第十二 尊重正敎分(바른 가르침을 존중함)

復次須菩提야 隨說是經호대 乃至四句偈等하면 當知此處는 一切世間天人阿修羅가 皆應供養을 如佛塔廟어든

그리고 또 수보리야, 어디서나 이 경을 설하되 사구게만이라도 설한다면, 마땅히 알라. 이곳은 일체 세간의 천상, 인간, 아수라 등이 다 응당 공양하기를 부처님의 탑묘와 같이 할 것이거늘

 

何況有人이 盡能受持讀誦가 須菩提야 當知是人은 成就最上第一希有之法이니

어찌 하물며 어떤 사람이 능히 경을 수지하고 독송함이겠는가. 수보리야,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최상이며 제일인 희유한 법을 성취하리라.

설의 四句偈者는 對全經하야 而言其小分也라 雖是小分이나 隨所說處하야 皆應供養如塔이니 小分도 尙爾어든 況盡能持說全經者乎아 此則不啻如塔廟尊崇이니 當知是人은 決定成就最上無上第一無比한 希有難得之法也니라

四句偈란 경 전체에 대하여 작은 부분에 불과한 것이라. 비록 작은 分量이지만 說한 바의 곳을 따라 다 응당히 塔과 같이 供養함이니 작은 부분도 오히려 그렇거늘 하물며 능히 經 전체를 가지고 說하는 것이겠는가. 이는 곧 塔廟와 같이 尊崇할 뿐만 아니라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결정코 最上, 無上, 第一, 無比하고 希有하여 얻기 어려운 法을 成就함이니라.

 

若是經典所在之處는 卽爲有佛과 若尊重弟子니라

만약 이 경전이 있는 곳(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설하는 곳)에는, 곧 부처님과 존중할 제자가 계심이 되느니라.

설의 前明經勝하고 次敎尊重人法하시며 此顯經勝之所以하시니 人間世之所尊重者는 賢聖也요 賢聖之所宗者는 佛也요 佛之所宗者는 經也라 此經은 佛及賢聖도 尙以爲宗하시니 其勝을 可知로다 前明佛法僧三이 皆從一經流出하사 而言一切佛法이 皆從此經出이며 一切賢聖이 皆以無爲法으로 而有差別이라하시고 此明佛法僧三이 會歸一經하사 而言經典所在之處엔 卽爲有佛과 若尊重弟子라하시니 前則從體起用이요 此則攝用歸體也로다 又前明佛法僧三이 一一泯迹하사 而言佛法非法과 四果無果로 以至嚴非嚴身非身하시고 此明佛法僧三이 却向一處活하사 而言經典所在之處엔 則爲有佛과 若尊重弟子라하시니 前則把定乾坤黑이요 此則放開日月明이로다 伊麽則此一行文은 亦可謂之全體句也여 亦可謂之全用句也니 是可謂之雙明雙暗이며 是可謂之雙放雙收로다

앞에서는 經이 殊勝함을 밝혔고 다음엔 사람과 法을 尊重함을 가르치시며 여기에선 經이 殊勝한 까닭을 나타내시니 人間 세상에서 尊重해야 할 바는 聖賢이요, 賢聖이 근본삼는 것은 부처님이요, 부처님이 宗을 삼는 것은 經이라. 이 經은 부처와 賢聖들도 오히려 宗으로 여기시니 그 殊勝함을 가히 알 만하도다. 앞에서 밝힌 佛, 法, 僧 三이 다 이 一經으로부터 흘러나옴을 밝히시니 一切 불법이 다 이 經으로부터 나오며, 一切賢聖이 모두 無爲法으로써 差別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선 佛法僧 三이 한 經에 會歸함을 밝히시어 經典이 있는 곳엔 곧 부처님과 尊重하는 弟子가 있다하시니라. 앞에서는 體로부터 用을 일으키는 것이요, 여기에선 用을 攝하여 體로 돌아가는 것이로다. 또 앞의 佛法僧 三이 낱낱이 자취가 없음을 밝히사 佛法이 法 아님과, 四果가 果 아닌 것으로써, 莊嚴이 莊嚴이 아니며 몸이 몸 아님에 이르름을 말씀하시고, 여기에선 佛法僧 三이 도리어 한 곳을 向해 살아 있음을 밝히사 經典이 있는 곳엔 곧 부처님과 尊重하는 弟子가 있음을 말씀하시니라. 앞에서는 잡아 定하면 乾坤이 어둡고, 여기에선 놓아 버리니 日月이 밝도다. 이러한즉 한 줄의 글은 가히 온전한 體의 句라 하며 또한 온전한 用의 句라 하도다. 이것은 가히 雙明^, 雙暗^이라 말하며 雙放^, 雙收^라 이름하도다.

 

야부 合如是로다

합당히 이와 같도다.

설의 舒卷自由하고 隱現無碍하니 理合如是로다 又白雲은 只合在靑山이니 山含白雲이 也相宜로다

쥐고 펴는 것을 마음대로 하고 숨고 나타나는 것을 걸림 없이 하니 이치가 합당함이 이와 같도다. 또한 흰구름은 다만 靑山에 있으니 山이 흰 구름을 머금고 있는 것이 또한 서로 그럴 듯하도다.

야부 似海之深이요 如山之固로다 左旋右轉에 不去不住로다 出窟金毛獅子兒가 全威哮吼衆狐疑로다 深思不動干戈處에 直攝天魔外道歸로다

바다같이 깊고

산처럼 堅固하며

좌우로 돌고

가지도 머물지도 않도다

굴밖에 나온 금빛 사자새끼가

온전한 위세로 포효하니 여우들이 의심하도다.

깊이 생각하여 무기를 쓰지 않는 곳에

바로 天魔와 外道를 포섭하여 돌아가도다.

설의 日月이 雖明이나 明不到요 劫火壞時에 渠不壞로다 然亦賓主交參에 善能廻互하야 轉身無滯하며 大用이 全彰하야 群邪自伏이라 端拱九重에 四海朝宗이로다

日月이 비록 밝으나 그 밝음은 金剛經에 이르지 못하고 劫火로써 무너질 때도 이 金剛輕은 무너지지 않도다. 그러나 또한 主人과 客이 交參함에, 잘 어우려져 몸을 굴려 막힘이 없으면, 큰 作用이 온전히 드러나서, 뭇 사(邪)가 저절로 降伏됨이라. 다만 구중궁궐에 단정히 앉아 있어도 四海에서 우러러보도다(朝宗되도다).

 

第十三 如法受持分(법답게 받아지님)

爾時에 須菩提가 白佛言하사대 世尊하 當何名此經하며 我等이 云何奉持하리잇고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是經은 名爲金剛般若波羅密이니 以是名字로 汝當奉持하라

그때에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경을 무엇이라 이름하며 저희들이 어떻게 받들어 지니오리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이 경은 금강반야바라밀이니 이 이름으로써 너희들은 마땅히 받들어 지닐지니라.”

설의 從初敷座로 極至於此하야 一經體備하고 說義已周로다 由是로 空生이 請安經名하사 以求奉持어시늘 如來가 於是에 叩其兩端하사 兩手分付하다

‘처음 자리를 펴고 앉으심’으로부터 여기에까지 一經의 體가 갖추어있고 說하신 뜻은 이미 두루하였도다. 이로 말미암아 空生이 經의 이름을 두고자 청하시니, 이것으로 받들어 갖기를 구하시므로, 여기에 如來께서 그 양단(安名과 奉持)의 물음에 양손으로 分付하셨다.

야부 今日에 小出大遇로다

今日에 조금 내놓고 크게 얻었도다.

설의 一問經名求奉持어늘 和盤托出親分付하시니 可不謂之大遇乎아

經의 이름을 한번 물어서 받아 지님을 구한 것인데 小盤까지 내밀어 친히 分付하시니 가히 크게 얻었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야부 火不能燒요 水不能溺이며 風不能飄요 刀不能劈이라 軟似兜羅하고 硬如鐵壁하니 天上人間에 古今不識이로다 咦

불이 태우지 못하고 물도 빠뜨리지 못하며

바람도 날리지 못하고 칼도 자르지 못하도다.

부드럽기는 도라솜(兜羅綿) 같고 단단하기는 철벽과 같음이라.

天上과 人間이 古今에 알지 못하도다. 咦!

설의 般若波羅蜜이여 千變變不去로다 雖然變不去나 物來卽應이요 雖然應物이나 亦不變去로다 非情識到어니 那容思慮리오

般若波羅蜜이여, 천 번이나 변해도 변해가지 않도다. 비록 그렇게 변하지 않는다 하나, 衆生(物)이 오면 곧 衆生에 응하고, 비록 그렇게 衆生에 응하나 또한 변해가지 않음이라. 우리 생각(情識)으로는 이를 수 없으니 어찌 사려를 용납하겠는가.

所以者가 何오 須菩提야 佛說般若波羅密이 卽非般若波羅密일새 是名般若波羅密이니라

그 까닭이 무엇인가. 수보리야, 부처가 설한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고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니라.

설의 說經安名分付了하시고 且恐依語生知解라 故說般若非般若하사 令知文字性本空케하시니라

經을 설하시고 이름 안치함을 분부해 마치시고 또한 말에 의지하여 알음알이(知解)를 낼까 두려워 하였음이라. 般若波羅密이 般若波羅密이 아니라고 설하시어, 이로 하여금 文字의 性品이 本來 空한 것을 알게 하시니라.(言語 文字의 한계를 뛰어넘으라는 뜻)

 

야부 猶較些子로다

오히려 조금 비슷하도다.

설의 般若를 說非般若여 是則固是나 猶隔一線道로다

般若를 般若가 아니라고 말함이여, 그 말이 옳기는 眞實로 옳으나 오히려 한 선(線)의 길이 막혔도다.

야부 一手擡一手搦하고 左邊吹右邊拍이로다 無絃彈出無生樂하야사 不屬宮商律調新이니(律은 一作格이라) 知音知後에 徒名邈이로다

한손으로 들고 한손으로 잡으며

왼쪽으로 불고 오른쪽으로 치도다.

줄 없이도 無生의 가락을 퉁겨내어야

宮商에 속하지 않고도 律調가 새롭나니

知音者가 안 후에는 한갓 이름이 아득함이로다.

설의 般若가 卽非般若여 一擡一搦하고 左吹右拍이로다 擡搦吹拍이 善則善矣나 尙非好手니 無絃琴上에 彈出無生曲子하야사 始可名爲好手니라 若是無生曲子인댄 不屬擡搦與吹拍이니 雖然不屬彼宮商이나 格調淸新別宮商이라 此曲을 從來로 和者稀하니 子期之聽도 尙茫然이로다

般若가 곧 般若가 아님이여. 한 손으로 들고 한 손으로 잡으며 왼쪽으로 불고 오른쪽으로 치도다. 들고, 잡고, 불고, 치는 것이 좋기는 좋으나 오히려 좋은 솜씨는 못되니 줄 없는 거문고에서 無生曲을 퉁겨내어야 비로소 좋은 솜씨라 이름하느니라. 만약 이 無生曲이라면 들고, 잡고, 또한 불고 치는 것에 속하지 않으니 비록 그렇게 저 宮商角徵羽에 속하지는 않으나 격조가 청신하여 宮商과 다른 것이라. 이 곡은 예로부터 和答하는 이가 드무니 種子期의 들음도 오히려 茫然하도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가 有所說法不아 須菩提가 白佛言하사대 世尊하 如來가 無所說이니이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설한 바 법이 있느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드리되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법을)설하신 바가 없습니다.”

설의 佛稱空生善解空하시니 果能知佛本無言이로다 然雖如是나 自從阿難結集來로 名句文身의 差別言詞가 布在方策하야 溢于西乾하고 盈于東震하야 迄至于今하니 黃面老子가 若都無說인댄 如是法藏은 夫誰說來오 須信道어다 有言이라도 皆成謗이요 無言이라도 亦不容이니라

부처님께서는 空生이 空을 잘 이해한다 일컬으시니, 과연 空生은 부처님께서 本來 말이 없으심을 잘 알았도다. 비록 이와 같으나 阿難이 經을 結集함으로부터 名, 句, 文身(八萬大藏經)의 差別言詞가 方策(經典)에 펴 있어서 西乾(인도)에 넘치고 東震(중국)에 가득 차서 지금에 이르렀으니 黃面老子가 모두 說함이 없다고 하면 이 같은 法藏(八萬大藏經)은 대저 누가 說해왔는가. 모름지기 믿을지어다. 말이 있다 할지라도 비방함이 되고 말을 한 것이 없다 해도 또한 용납하지 못할지니라.

 

야부 低聲低聲하라

소리를 낮추고 소리를 낮추어라(조용 조용하라.)

설의 佛無所說이여 是則固是나 無言도 亦非佛本心이라 故로 云低聲低聲하라하시니 又莫謂一向無所說하라 人天耳裏에 鬧活活로다 鬧活活여 伏請하노니 低聲低聲하라

부처님께서 說한 바가 없음이여. 옳기는 眞實로 옳으나 無言도 부처님의 本心은 아님이라. 그러므로 소리를 낮추고 낮추라고 하시니 또한 한결같이 無所說(說한 바가 없다)이라고만 말하지 말라. 人天의 귓속에 시끄럽기가 浩浩하도다. 대단히 시끄러움이여. 엎드려 請하노니 소리를 낮추고 낮추어라.

야부 入草求人不奈何야 利刀斫了手摩挲로다 雖然出入無蹤迹이나 紋彩全彰을 見也麽아

풀숲에 들어가 사람을 구하려 해도 어쩌지 못하여

날카로운 칼로 베고 나서 손으로 어루만지도다.

비록 그러히 그 出入에 자취가 없으나

무늬가 온전히 드러남을 보았는가.

설의 要識黃面老麽아 此老는 本不愛草하시며 亦不厭草하시니 不愛草故로 入草하야 見此老不得이요 不厭草故로 出草하야 覓此老不得이니라 所以로 道호대 雖復不依言語道나 亦復不着無言說이라하시니 看看하라 黃面老子가 現也여 摩醯眼前에 藏身無地로다

黃面老(佛)를 알고자 하는가? 이 老人은 本來 풀(부처님 說法)도 사랑하지 않으시며 또한 풀을 싫어하지도 않으시니, 풀을 사랑하지 않는 故로 풀숲에 들어가서 이 老人을 볼래야 볼 수 없고 풀을 싫어하지 않는 까닭에 풀을 벗어나서 이 老人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음이라. 그러므로 말하되 비록 言語의 길을 의지하지도 않으나 또한 다시 無言說을 執着하지도 않는다 하시니라. 잘 보아라. 黃面老子가 나타남이여, 摩醯修羅(大自在天神)의 눈앞에서는 몸을 숨길래야 숨길 곳이 없도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三千大千世界所有微塵이 是爲多不아 須菩提가 言하사대 甚多니이다 世尊하 須菩提야 諸微塵을 如來가 說非微塵일새 是名微塵이며 如來가 說世界非世界일새 是名世界니라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미진이 많지 않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모든 미진을 여래가 설하되 미진이 아니라 그 이름이 미진이며, 여래가 설한 세계도 세계가 아니라 그 이름이 세계니라.”

설의 此는 擧塵界之喩하사 以明無所說也니라 於一大地에 有三千하니 三千界塵이 數難窮이라 離却本有一大地하면 世界微塵이 總皆空이로다 於一佛乘에 說三乘하시니 無盡法門이 從玆始라 離却本有一佛乘하면 法法이 皆空無所有로다 伊麽則從初轉四諦로 至今談般若히 可謂有法可示여 有言可宣이어니와 以實而觀컨댄 理本亡言이라 無法可示며 佛本無心이라 無言可宣이니 塵非塵則名數가 卽非名數요 界非界則三乘이 卽非三乘이니라 會三에 何待靈山會리오 祇園座上에 早歸一이로다

이것은 微塵世界(三千大千世界)의 비유를 들어서 說한 바 없는 道理를 밝히시니라. 一大地에 三千世界가 있으니 三千世界의 미진은 그 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도다. 本來 있는 一大地를 떠나면 世界의 微塵이 모두 다 空함이로다. 一佛乘(一乘)에서 三乘(聲聞 · 緣覺 · 菩薩)을 說하시니 無盡法門이 이로부터 시작되도다. 本來 있는 一佛乘을 떠나면 法法이 다 空해서 있지 않도다. 이러한즉 처음 四諦를 전함으로부터 이제 般若를 말하는데 이르기까지 法으로 가히 보일 수 있었으며 말로써 베풀 수 있다고 말하거니와, 실제로써 觀하건대 理致는 本來 말이 없어서 法은 가히 보일 수 없는 것이며, 부처는 本來 마음이 없는지라 말로써 가히 베풀 것이 없으니 塵이 塵이 아닌즉 名數(이름이나 숫자)가 곧 名數가 아니고, 界가 界가 아닌즉 三乘이 곧 三乘이 아닌 것이로다. 三乘을 아는데 어찌 靈山會上을 기다리리오. 기원정사의 좌상에서 일찍이 一佛乘에 돌아갔도다.

 

야부 南贍部洲요 北鬱單越이로다

남섬부주요 북울단월이로다.

설의 今師가 直取塵界하사 以明平常不動也시니 塵非塵則塵塵이 淨妙身이요 界非界則界界가 黃金國이라 界界가 旣知黃金國則更說什麽非世界며 塵塵이 旣知淨妙身則更說什麽非微塵이리요 只可喚作南贍部洲요 北鬱單越이로다

이제 야부 스님께서 바로 塵界를 取하여 이로써 平常不動을 밝히시니 塵이 塵이 아닌즉 塵塵이 淨妙身이 되고, 世界는 世界가 아닌즉 世界 世界가 그대로 黃金國이 된다. 世界 世界가 이미 黃金國인 줄을 알았으면 다시 무엇 때문에 非世界를 說하며 塵塵이 이미 정묘한 法身인 줄 알았다면 다시 非微塵이라 說함인가. 다만, 가히 남섬부주라 하고 북울단월이라 부를 뿐이다.

야부 頭指天脚踏地하고 饑則飡困則睡라 此土西天이요 西天此土로다 到處元正이 便是年이니 南北東西秪者是로다

머리는 하늘을 가리키고 다리는 땅을 밟으며

주리면 먹고 피곤하면 자도다.

이곳이 西天(極樂)이고 西天이 이곳이로다.

곳곳의 설날은 똑같은 새해이니

南北東西에 다만 이것일 뿐이로다.

설의 指天踏地人所同이라 飢飡困睡孰不能이리오 只這眞消息은 彼此無兩般이니 只如無兩般底道理를 作麽生道오 梅枝片白에 足知天下春이요 梧桐一葉에 可知天下秋라 從此不疑天下事하니 天下人皆應似我로다 應似我여 久旱에 逢甘雨하니 何人이 獨不喜리오 又頭指云云은 平常總不動이요 此土云云은 彼此無兩般이요 到處云云은 無私一着子가 全該一切處로다

하늘을 가리키고 땅을 밟는 것은 사람들이 똑 같다. 주리면 먹고 피곤하면 자는 것을 누가 能히 못하겠는가. 단지 이 참 소식은 彼此에 두 가지가 없으니 단지 두 가지가 없는 道理를 무엇이라 이를 것인가. 매화 가지의 한 송이 흰 꽃은 足히 天下의 봄임을 알리고 오동잎 하나 떨어지면 가히 天下의 가을임을 안다. 이것으로써 天下의 일을 의심하지 않으니 天下의 사람이 모두 다 응당히 나와 같도다. 응당히 나와 같음이여, 오랜 가뭄에 단비를 만났으니 어떤 사람인들 홀로 기쁘지 않겠는가. 또한 ‘머리는 하늘을···’ 云云한 것은 平常하여 모두 움직이지 않는 것이고, ‘이곳이··’ 云云은 彼此 두 가지가 없는 것이고 ‘곳곳의’ 云云은 사사로움이 없는 一着子가 온전히 一切處를 갖췄음이로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요 可以三十二相으로 見如來不아 不也니이다 世尊하 不可以三十二相으로 得見如來니 何以故오 如來가 說三十二相이 卽是非相일새 是名三十二相이니이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삼십이상은 곧 상이 아니고 그 이름이 삼십이상이기 때문입니다.”

설의 是相非相이 皆非佛이여 相卽非相이 乃爲眞이라 若能如是知端的하면 天眞面目을 更何疑아

이 相과 相아님이 모두 부처가 아니고 相은 곧 相아님이라야 참다운 것인 줄 알아야 한다. 만일 能히 이렇게 分明한 道理를 알면 天眞面目을 어찌 다 의심하겠는가.

야부 借婆衫子拜婆年^이로다

할머니 옷을 빌려 입고서 할머니에게 절한다.

설의 佛이 欲明無相이어시늘 果能答相非하시니 若使佛問相이면 亦能答以相이로다

부처님께서 無相을 밝히고자 하심에 과연 能히 相이 아닌 것으로써 答하시고 만약 부처님께서 相으로써 물으시면 또한 能히 相으로써 答함이로다.

야부 爾有我亦有요 君無我亦無라 有無俱不立하니 相對觜盧都로다

그대 있으니 나 또한 있고

그대 없으면 나도 또한 없음이라.

有와 無를 모두 세우지 아니하니

서로 대하여 입만 침묵하도다.

설의 承問有答不參差하니 爾有爾無我亦然이라 有無를 俱不立이여 相對黙無言이로다 有無不立하야 無言以對여 外道가 問佛에 世尊이 良久하시니 其勢然也라 彼可謂騎賊馬趕賊이요 此可謂借婆衫拜婆年이로다

물음을 따라 대답한 것이 조금도 어긋나지 않으니 그대가 있고 그대가 없음에 나 또한 그렇다. 有와 無를 다 세우지 않음이여, 相對하여 묵묵히 말이 없음이로다. 有와 無를 세우지 않고 無言으로써 대함이여, 外道가 부처님께 묻자 世尊께서 良久(침묵)하시니 그 勢가 당연히 그러하도다. 저것은 可謂 도적의 말을 타고 도적을 쫓는 격이요.^ 이것은 可謂 할머니 옷(婆衫)을 빌려 입고 할머니에게 절하는 것이다.

 

須菩提야 若有善男子善女人이 以恒河沙等身命으로 布施어든

수보리야,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항하의 모래수와 같은 목숨으로 보시했을지라도

 

若復有人이 於此經中에 乃至受持四句偈等하야 爲他人說하면 其福이 甚多니라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에서 사구게만이라도 받아지녀서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한다면 그 복이 저 복보다 매우 많으니라.”

설의 無智慧眼하야 空然捨施하면 此非菩提正路라 反招生死苦輪이요 受持四句하야 開得慧眼하면 此眞菩提正路라 當證涅槃眞常하리니 有爲無爲가 優劣이 晈然이로다

智慧의 眼目이 없이 空然히 베풀기만 하면 이것은 菩提의 바른길이 아니며 도리어 生死의 고통스런 輪廻를 초래한다. 四句를 受持하여 慧眼을 뜨면 이것은 참다운 菩提의 바른 길이어서 마땅히 涅槃의 眞常을 證得하리니 有爲와 無爲의 차별이 分明하도다.

 

야부 兩彩一賽로다

두 가지 色이 한 주사위로다.(두 가지 색을 가진 주사위로다)

설의 優劣晈然은 卽不無나 然이나 皆未免修斷功勳이어니와 若是本分衲僧인댄 動靜에 皆行施어니 何勞捨身命이며 語黙에 皆轉經이어니 何煩讀文字리오 伊麽則持經行施를 不故兼而自兼이로다

優劣이 分明한 것은 곧 없지 않으나, 그러나 다 닦고 끊는 功勳은 면치 못하거니와, 만약 本分衲僧이면 動하고 靜함이 다 布施를 行하거니와 어찌 수고로이 목숨을 버릴 것이며, 말과 침묵(語黙)이 다 經을 傳하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번거롭게 文字를 익히겠는가. 그렇다면 經을 가짐과 布施를 行함은 짐짓 兼하지 않아도 저절로 兼한 것이로다.

야부 伏手滑槌로 不換劍하니 善使之人은 皆總便이라(蓋總便은 他本에 作能穩便이라) 不用安排本現成하니 箇中에 須是英靈漢이라 囉囉哩哩囉囉여 山花笑野鳥歌로다 此時에 如得意하면 隨處薩婆訶하리라

손에 쥔 골추(滑槌)로 칼을 바꾸지 않으니

잘 쓰는 사람은 모두 편리하도다.

安排를 쓰지 않아도 本來 다 이루었으니

그 中에 모름지기 이 英靈한 사람이라.

라라리리라라여.

산에서는 꽃이 피고 들에서는 새가 지저귀도다.

이때에 만약 뜻을 얻으면

어느 곳에서든지 薩婆訶하리라.

설의 若是本分人인댄 卽日用이 便是妙用이어니 何須更借修斷方便이리요 不用今日安排하야도 妙用이 本自現成하니 此非劣機境界라 須是過量人이라야 始得다 只如過量人境界를 作麽生道오 海晏河淸風月好하니 人人이 齊唱太平歌로다 何獨人人이 如是리오 花笑山前洩天機하고 鳥歌林外話無生이라 頭頭自有無窮意하니 得來無處不逢原이로다

만약 이 本分人이라면 곧 날마다 쓰는 것이 다 妙用이니 어찌 모름지기 다시 닦고 끊는 方便을 빌리겠는가. 今日의 安排를 쓰지 아니하여도 妙用이 本來 스스로 이루어져 있으니 이는 下劣한 根機의 境界가 아님이로다. 모름지기 過量人(뛰어난 사람)이라야 비로소 될 수 있도다. 단지 저 過量人의 境界를 어떻게 말할까

바다는 잔잔하고 냇물은 맑아서 風月이 좋으니

사람 사람이 모두 太平歌를 부른다.

어찌 홀로 사람만이 홀로 그러리오.

꽃은 산 앞에서 웃으며 天機를 누설하고

새는 숲 밖에서 지저귀며 無生을 말하도다.

낱낱이 다 스스로 無窮한 뜻이 있으며,

얻고 나면 그 근원을 만나지 못할 곳이 없으리라.

 

第十四 離相寂滅分(상을 떠나서 적멸함)

爾時에 須菩提가 聞說是經하사옵고 深解義趣하사 涕淚悲泣하사 而白佛言하사대 希有世尊하 佛說如是甚深經典은 我從昔來所得慧眼으로 未曾得聞如是之經호이다

이때에 수보리가 이 경을 설하심을 듣고 깊이 그 뜻을 깨달아 눈물을 흘리고 슬피 울면서 부처님께 사뢰었다.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이렇게 (뜻이) 심히 깊은 경전을 설하심은 제가 예로부터 얻은 바 혜안으로도 일찍이 이와 같은 경은 얻어듣지 못하였습니다.”

설의 經初엔 以上根悟入일새 故로 不動悲欣하고 直讚希有어니와 此는 迹同中容하야 權示悟入일새 故로 非欣交集然後에 讚佛希有하시니라

經初에는 上根으로써 깨달아 들게 하시므로 슬픔이나 기쁨에 動하지 않고 바로 希有하다고 讚歎했거니와, 여기서는 자취를 中根機와 같이해서 方便으로 깨달아 들어감을 보이시므로 슬픔과 기쁨이 뒤섞인 然後에 부처님의 希有하심을 讚歎하시니라.

 

야부 好笑어늘 當面諱了로다

좋게 웃어야 하거늘 얼굴을 마주하여 숨겼도다.

설의 喜事現前에 也好吐笑어늘 涕淚悲泣은 只要諱却이로다 又深悟佛意에 忍不云喜하고 內悅外悲하시니 所以堪笑로다

기쁜 일이 現前함에 웃음을 토해야 좋거늘 눈물을 흘리고 슬피 우는 것은 다만 숨기기를 要함이로다. 또한 부처님의 뜻을 깊이 깨달으매 차마 기쁘다고 말하지 못하고 안으로는 기뻐하고 밖으로 슬퍼하니 그 까닭에 웃음을 견딤이로다.

야부 自少來來慣遠方하니 幾廻衡岳渡瀟湘하고 一朝에 踏着家鄕路하니 始覺途中日月長이로다

젊어서부터 돌아다녀 먼길에 익숙하니

몇 번이나 형악산을 돌고 소상강을 건넜던가.

하루아침에 고향 땅을 밟으니

비로소 途中에 歲月이 긴 것을 깨달았도다.

설의 因小利養하야 捨父逃逝하야 流落天涯하니 幾度往返我人山下며 幾度出沒恩愛河中고 忽逢良友의 指示하야 踏得常樂家鄕하니 始知昔年生死路에 虛送百千閑日月이로다

작은 利益으로 인하여 아버지를 버리고 벌리 도망가서 하늘가를 떠도니, 몇 번이나 我人의 山下를 가고 돌아왔으며 몇 번이나 恩愛의 물 속을 出沒했던가. 홀연히 좋은 친구의 가리킴(指示)을 만나서 항상 즐거운 고향을 밟으니, 비로소 옛날 生死의 길에서 부질없이 긴 歲月 보냄을 알겠음이로다.

규봉 二는 心淨契實具德勝이라 於中에 文二니 初는 正明이라

㉸二. 마음이 깨끗해지면 眞實에 계합하게 되어 德을 갖춤이 殊勝함이라. 그 중에 두 가지니 ㉹一은 정히 밝힘이라.

世尊하 若復有人이 得聞是經하고 信心淸淨하면 卽生實相하리니 當知是人은 成就第一希有功德이니이다

세존이시여,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을 얻어 듣고 신심이 청정하면 곧 실상을 내리니, 마땅히 이 사람은 제일 희유한 공덕을 성취한 사람임을 알겠습니다.

 

世尊하 是實相者는 則是非相일새 是故로 如來가 說名實相이니이다

세존이시여, 이 실상이란 곧 이 상이 아님이니 이 까닭에 여래께서 실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설의 經顯眞常妙體하시니 聞經生信하면 妙體實相이 當處現前일새 故로 云信心淸淨하면 卽生實相이라하시니라 此實相者는 不可以見聞覺智로 求며 不可以色香味觸으로 覓이라 故로 云是實相者는 卽是非相일새 是故로 如來가 說名實相이라하시니라 又是實相者는 非有相非無相하며 非非有相非非無相일새 是故로 如來가 說名實相이라하시니라

經에서는 참되고 항상한 妙體를 나타내시니 經을 듣고 信心을 내면 妙體 實相이 바로 그 자리에서 나타나므로 이르되, 信心이 淸淨하면 바로 이 자리에서 實相을 낸다고 하시니라. 이 實相이란 見聞覺智로써 구할 것이 아니며 색, 향, 미, 촉으로 찾을 것이 아님이라. 그러므로 이르되 이 實相이란 곧 相이 아니므로 如來께서 實相이라 이름하시니라. 또 이 實相이란 有相도 아니고 無相도 아니며 非有相도 아니고 非無相도 아닐새, 이 까닭에 如來께서 實相이라 이름한다 하시니라.

 

야부 山河大地를 甚處에 得來오

山河大地를 어느 곳에서 얻어오리오.

설의 若謂一向非相인댄 卽今山河大地가 顯然是相이니 甚處에 得來오

만약 한결같이 相이 아니라 하면 지금의 산하대지는 分明 이 相인데, 어느 곳에서 얻어왔는가.

야부 遠觀山有色이요 近聽水無聲이라 春去花猶在요 人來鳥不驚이로다 頭頭皆顯露하니 物物이 體元平이라 如何言不會오 秪爲太分明일새니라

멀리 바라보니 산은 色이 있고

가까이 들으니 물은 소리가 없음이로다.

봄은 갔건만 꽃은 아직 남아 있고

사람이 와도 새가 놀라지 않으나,

頭頭가 다 드러내니

物物의 體가 云來 平等하도다.

어떻게 모른다고 말하겠는가.

다만 너무나도 分明한 것을.

설의 迷之則目前有法이라 所以로 遠於道也요 悟之則耳畔無聲이라 所以로 近於道也니라 所以로 道호대 以衆生妄見則種種紛紜이어니와 以如來實見則一切眞寂이라하시니라 雖云無色聲이나 相相이 常宛然이요 雖云常宛然이나 相相을 不可得이라 所以로 道호대 無相無空無不空하니 卽是如來眞實相이라하시니라 此眞實相은 頭頭上顯하고 物物上明하야 無時無處而不明顯也니 旣頭頭上顯하고 物物上明인댄 老盧는 因甚하야 道不會佛法고 眉底兩眼이 極分明하니 反觀眸子作何樣고

迷한즉 눈앞에 法이 있음이라. 이 까닭에 道에서 멀고, 깨달은즉 귓가에 소리가 없을새 이런 까닭으로 道에 가깝게 된다.

그러므로 이르되 「衆生이 妄念으로 보면 여러가지가 분운(粉耘)하고 如來를 실제 보면 一切가 眞이고 寂靜이라」한 것이다. 비록 色聲이 없다 말하나 相과 相이 항상 宛然하고 비록 항상 宛然하다 이르나 相과 相을 가히 얻지 못한다. 이러므로 이르되 「相도 없고 空도 없고 不空도 없으니 곧 이것이 如來의 眞實한 모습이다.」하신 것이다. 이 眞實한 모습은 낱낱의 가운데 다 나타나 있고 사물과 사물 위에 分明해서 때마다 곳마다 밝게 나타나지 않음이 없으니 이미 頭頭에 다 나타나고 物物 위에 밝은데 老盧는 무엇 때문에 佛法을 알지 못한다 말하는가. 눈썹 밑에 두 눈이 極히 分明하니 도리어 눈동자를 보아라. 무슨 모양을 지었는가.

世尊하 我今得聞如是經典하고 信解受持는 不足爲難이어니라.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 이와 같은 경전을 얻어 듣고 믿어 알고 받아지니기는 족히 어렵지 않거니와

야부 若不得後語면 前話也難圓이로다

만약 뒷말을 얻지 못하면 앞의 말도 圓滿하기 어렵도다.

설의 若使空生으로 但說其易하고 不言其難이면 話不得圓이어니와 如今에 難易를 俱說하니 話得爲圓이로다

만약 空生으로 하여금 다만 그 쉬운 것만 말하고 어려움을 말하지 않으면 그 말이 圓滿함을 얻지 못하거니와, 지금의 어려운 것과 쉬운 것을 함께 說하니 말씀이 圓滿하게 되었도다.

야부 難難難이어 如平地上靑天이요 易易易여 似和衣一覺睡로다 行船이 盡在把梢人하니 誰道波濤從地起오

어렵고 어렵고 어려움이여,

마치 平地에서 靑天에 오름과 같고

쉽고 쉽고 쉬움이여,

옷 입은 채 한숨 자고 깸과 같도다.

배가 가는 것은 삿대잡은 이에 있으니

누가 波濤가 땅으로부터 일어난다 말하리오.

설의 言其難也인댄 五目으로 不能睹며 二耳로 不能聞이요 言其易也인댄 開眼便見하고 側耳便聞하며 開口則頭頭說破하고 擧足則步步踏着이니 平地上天이 誠不易나 和衣覺睡가 豈爲難이리오 看看하라 難易가 只是一人의 機變이로다

그 어려움을 말할진대 다섯 가지 눈으로써 能히 보지 못하고 두 귀로도 듣지 못함이요, 그 쉬움을 말할진대 눈만 뜨면 곧 보이고 귀를 기울이면 곧 들리며 입만 열면 낱낱이 가 說破하고, 발을 들면 걸음걸음이 다 그것을 밟으니 平地에서 하늘에 오름은 眞實로 쉽지 않으나, 옷입은 채 자다가 깨는 것이 어찌 어려우리오. 잘 보아라. 어렵고 쉬움이 다만 이 한사람의 機變이로다.

若當來世後五百歲에 其有衆生이 得聞是經하고 信解受持하면 是人은 則爲第一希有니이다

만약 오는 세상 후 오백세에 그 어떤 중생이 이 경을 얻어 듣고서 믿어 알고 받아 지닌다면, 이 사람은 제일 희유함이 되겠습니다.

설의 經顯人人本有하시니 此本有底一着子는 硬如鐵壁이요 軟似兜羅로다 軟似兜羅故로 受持卽易요 硬如鐵壁故로 受持卽難이니 空生이 左叩右擊하사 以現其中이로다

經에서는 사람 사람이 本來 지니고 있음을 나타내시니, 이 本來 지니고 있는 一着子는 굳기가 鐵壁과 같고 부드럽기는 도라솜과 같도다. 부드럽기가 솜과 같은 故로 받아 지니기는 쉽고 굳기가 鐵壁같은지라 받아 지니기는 어려우니, 空生이 左로 두드리고 右로 치시어 이로써 그 가운데를 나타내셨도다.

야부 行住坐臥와 着衣喫飯이 更有甚麽事리오

行住坐臥 着衣喫飯(가고 머물고 앉고 눕고, 옷입고 밥먹는 것)하니 다시 무슨 일이 있으리오.

설의 佛法이 只在日用의 行住坐臥處와 着衣喫飯時하야 一切時一切處에 一一呈路靡遺하니 旣然如是인댄 信解受持가 何難之有며 雖然信解나 亦何希有리오

佛法이 다만 날마다 쓰는 行住坐臥處와 옷입고 밥먹을 때에 있는 것이어서 어느때 어느곳에나 낱낱이 드러나고 빠뜨림이 없으니, 이미 이와 같음인데 信解하고 受持함에 무엇이 어려울것 있겠는가. 비록 信解受持할 지라도 또 무엇이 希有할 것 있겠는가.

야부 冰不熱火不寒이요 土不濕水不乾이라 金剛은 脚踏地하고 幡竿은 頭指天이라 若人이 信得及하면 北斗를 面南看하리라

얼음은 뜨겁지 않고 불은 차지 않으며

흙은 습하지 않고 물은 건조하지 않네.

金剛神은 다리로 땅을 밟고

깃대의 머리는 하늘로 向했도다.

만일 누구라도 이 道理를 믿으면

北斗를 남쪽으로 向하여 보리라.

설의 氷不熱로 至頭指天은 平常總不動着이니 只如平常底道理를 作麽生道오 行船에 宜擧棹요 走馬에 卽加鞭이며 若遇飢來飯하고 還因困卽眠이니라 君今欲識平常道인댄 北斗南星이 位不別이니 只如不別底道理를 且作麽生道오 雨中에 看好月이요 火裏에 汲淸泉이며 直立頭垂地요 橫眠脚指天이로다

‘얼음은 뜨겁지 않고’부터 ‘하늘로 向했도다’까지는 平常 道理라서 모두 움직이지 않는 것이니 다만 저 平常한 道理를 어떻게 말할까. 배를 탈 때는 마땅히 삿대를 들어야하며 말을 달릴 때는 곧 채찍을 가해야 하고 만약 주리면 밥을 먹고 곤하면 잠을 자라. 그대가 이제 平常한 道理를 알고자 하면 북두(北斗)와 남성(南星)이 위치가 다르지 않으니 단지 저 다르지 않는 道理를 또한 어떻게 말할 것인가.

비오는 가운데서 좋은 달을 봄이요

불 속에서 맑은 샘물을 길러 냄이며

바로 서서 머리를 땅에 드리움이요,

가로누워 자며 다리로 하늘을 가리킴이로다.

 

何以故오 此人은 無我相하며 無人相하며 無衆生相하며 無壽者相이니 所以者가 何오 我相이 卽是非相이며 人相衆生相壽者相이 卽是非相이라 何以故오 離一切諸相이 卽名諸佛이니이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아상이 없으며 인상이 없으며 중생상이 없으며 수자상도 없기 때문입니다.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아상은 곧 이 상이 아니며 인상, 중생상, 수자상도 곧 이 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일체 모든 상을 떠난 것을 이름하여 모든 부처님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설의 聞經信受를 何名第一希有오 以離四相하야 超然獨步故也니라 四相遠離가 爲難이어늘 因甚却能遠離오 以開智慧眼하야 了四相本空故也니라 了相本空하야 而能遠離를 何名第一希有오 離一切相을 卽名諸佛故也니라

經을 듣고서 信受하는 것을 어찌하여 第一 希有하다 하는가. 四相을 떠나서 超然히 홀로 걷기 때문이니라. 四相을 멀리 하는 것은 어려움이 되거늘 어떻게 能히 멀리 할 수 있는가. 智慧의 눈을 떠서 四相이 本來 空함을 了達하여야 하느니라. 相이 本來 空한 줄을 了達해서 能히 멀리 떠남을 어찌 第一 希有하다 하는가. 一切相을 떠난 것을 곧 諸佛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니라.

 

야부 心不負人이면 面無慙色이로다

마음에 사람을 저버리지 않으면 얼굴에 부끄러운 色이 없으리라.

설의 佛有三身하시니 是法身耶아 報身耶아 化身耶아 看彼毘盧老漢의 住處하라 非三非一이로대 而三而一이니 若使文殊로 不來途中하고 普賢으로 忘却靑山이면 早已辜負毘盧老漢이라 辜負毘盧則心有歉然하야 面有慙色이어니와 如今不然하야 寒山은 忘却來時路하고 拾得은 相將携手歸라 所以로 心無歉然하야 面無慙色이로다

부처님께는 三身(세 가지 몸)이 있으니 이것이 法身이냐 報身이냐 化身이냐. 저 毘盧遮那佛의 머무른 곳을 보라. 三도 아니고 一도 아니지만 能히 三도 되고 一도 되니 만약 文殊로 하여금 途中에서 오지 않고 普賢으로 하여금 靑山을 忘却케 한다면 벌써 毘盧遮那佛을 저버리는 것이다. 毘盧遮那佛을 저버린즉 마음에 겸연함이 있어서 얼굴에 부끄러운 빛이 있거니와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寒山은 올 때의 길을 잊어버리고 拾得은 서로 손을 잡고서 돌아오는지라 이런 까닭으로 마음에 꺼림칙한 것이 없어서 얼굴에 부끄러운 빛이 없도다.

야부 舊竹에 生新筍하고 新花가 長舊枝로다 雨催行客路요 風送片帆歸로다 竹密에 不妨流水過요 山高에 豈礙白雲飛리오

묵은 대에서 새 죽순 나고

새 꽃은 옛 가지에서 자라도다.

비는 나그네길을 재촉하고

바람은 조각배를 돌아가게 하도다.

대나무 빽빽해도 물 흘러감을 방해치 않고

산이 높다 한들 흰 구름 흘러감을 어찌 막으리오.

설의 本始雙成하야 父子가 同業이라 旣然同業인댄 莫戀家裏事하고 好作途中客하며 亦莫戀途中하고 却向家裏歸어다 雖然如是나 途中이 不碍家裏事요 家裏가 不碍途中事로다 看看하라 文殊普賢이 左旋右轉하니 毘盧滿面笑春風이로다

本覺과 始覺을 雙으로 이루어서 父子가 同業이라. 이미 業이 같다면 집안의 일을 생각하지 말고 좋게 途中에 客을 지을 것이며 또한 途中일은 생각지 말고 도리어 집을 向해 들어갈지어다. 비록 이와 같으나 途中일은 집안 일에 걸리지 않고 집안 일은 途中事에 걸리지 않음이로다. 잘 보아라. 文殊 普賢이 왼쪽으로 돌고 오른쪽으로 굴리니 毘盧遮那佛의 얼굴에 봄바람의 미소가 가득하도다.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如是如是하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그렇다 그렇다.”

 

 

若復有人이 得聞是經하고 不驚不怖不畏하면 當知是人은 甚爲希有니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놀래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도 않으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심히 희유함이되느니라.

설의 空生의 希有之說이 妙契於理일새 故로 讚言如是如是라하시니라 衆生이 違背覺王이 其來久矣라 聞佛開示하고 多生驚怖하나니 苟不驚怖면 甚爲希有로다 比之窮子가 立令立屛孤露하야 爲日已久라 得見父王이 實爲天幸이로다 然이나 其父는 門庭이 高峻하고 窮子는 志意가 下劣일새 見已에 未免驚怖去在니 見已에 不驚怖者는 甚爲希有로다

空生의 希有한 말씀이 妙하게 이치에 계합하므로 讚歎해 말하되 ‘그렇고 그렇다’ 하시니라. 衆生이 覺王(佛)을 違背하여 온 것이 오래로다. 이제 부처님의 開示함을 듣고 여러 번 놀래고 두려움을 내나니, 眞實로 놀래고 두렵지 않으면 심히 希有함이로다. 비유컨대 집나간 窮子가 가난하고 헐벗은지 오래됐음이라. 父王을 뵌 것이 실로 天幸이 되도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門庭이 高峻하고 그 窮子는 뜻이 下劣하여 보고나니 놀랍고 두려워함을 면치 못하나니, 보고남에 놀래고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심히 希有함이되도다.

 

야부 秪是自家底니라

다만 自己 것이기 때문이다.

설의 不生驚怖를 說爲希有하니 是則是矣나 而父子가 本自同氣며 亦自同家니 何曾驚怖며 雖不驚怖라 亦何希有리오

놀래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希有라 하니 이는 옳기는 옳으나 아버지와 자식이 本來 같은 氣이며, 또한 스스로 같은 집이니, 왜 놀래고 두려워하겠는가. 비록 놀래고 두려워하지 않음이 또한 어찌 希有하리오.

야부 毛呑巨海水요 芥子에 納須彌로다 碧漢에 一輪滿하니 淸光이 六合輝로다 踏得故鄕田地穩하니(鄕은 一作關이라) 更無南北與東西로다

한 터럭이 큰 바다를 다 삼키고

겨자 속에 須彌山을 드리우도다.

푸른 하늘에 한 달이 둥글으니

밝은 빛이 六合(온 누리)에 빛나도다.

고향땅을 밟아서 안온하니

다시 南北東西가 없도다.

설의 塵毛芥子는 物之最微者也요 巨海須彌는 物之最大者也라 以最微로 攝最大하니 非情識之所到로다 然이나 智以照之則塵毛芥子가 不曾小며 巨海須彌가 不曾大니 容巨海於毛端하고 納須彌於芥子가 是吾輩之常分이라 非假於他術이니라 因甚如此오 性天覺月이 虛徹靈明하야 輝騰六合하고 光被萬像하야 洪纖巨細가 無一不容其光焉이니 踏得這般境界하며 見得這般消息하야는 更說甚麽是東是西와 是南是北이리오 南北東西가 皆吾化라 一切由我總無妨이니 恁麽則建立도 亦在我며 掃蕩도 亦在我로다

먼지와 털과 겨자는 事物 가운데서 가장 작은 것이고 큰 바다와 須彌는 事物 가운데서 가장 큰 것이다. 가장 작은 것으로서 가장 큰 것을 거두는 것은 우리의 상식(情識)으로서는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智慧로 그 것을 비추어 보면 먼지, 털, 겨자가 일찍이 작지 않고 큰 바다와 須彌山이 일찍이 큰 것도 아니니 큰 바다를 터럭 끝에 용납하고 須彌山을 겨자에 받아들이니 이것은 우리들의 상식이어서 다른 기술을 빌린 것이 아니다. 무엇을 인하여 이러한가. 性品의 하늘에 覺의 달이 虛徹靈明(사무치게 밝아서)하여 六合에 밝게 빛나고 빛이 森羅萬像에 입혀져서 넓고 좁고 크고 가는 것(洪纖巨細)이 하나도 그 빛을 용납하지 아니함이 없다. 이 境界에 오르며 이러한 소식을 얻어보면 다시 무슨 東이 옳고 西가 옳고 南이 옳고 北이 옳다 말하겠는가. 南北東西가 다 내가 만든 것이라. 一切가 다 나로 말미암아서 방해로움이 없으니 이런즉 建立도 또한 나에게 있고 그것을 없애는 것도 또한 나에게 있음이로다.

 

何以故오須菩提야如來가說第一波羅密이卽非第一波羅密일새 是名第一波羅密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야, 여래가 설한 제일바라밀이 제일바라밀이 아님일새 그 이름이 제일바라밀이니라.

설의 聞經不怖를 因甚道甚爲希有오 此法이 物無與等이로대 而能與物爲等이라 深玄幽奧하야 不近人情하니 聞者가 多生驚怖하야 信解者가 誠難이어늘 如今에 能生淨信하야 不生驚怖일새 所以希有로다

經을 듣고서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왜 심히 希有하다 하는가. 이 法은 어떤 事物과 더불어 같지 않으며 또한 能히 사물과 더불어 平等함이라. 深玄하고 幽奧하여 人情에 이르지 못하니 듣는 사람이 많은 놀라움과 두려움을 내어서 믿고 이해한다는 것이 실로 어렵다. 지금에 能히 깨끗한 믿음을 내어서 겁내고 두려워하지 않으므로 이런 까닭으로 希有하다 한 것이다.(희유에 대한 내용)

 

야부 八字打開하야 兩手分付하다

八字로 打開하여 兩手로 分付하셨다(양팔로 열어보여 두 손으로 드러내었다)

설의 第一波羅蜜이여 更無向上이요 非第一波羅蜜이여 不異向下로다 是名第一波羅蜜이여 是向上耶아 向下耶아 向上向下를 都說示하사 兩手로 分付了也로다

第一波羅蜜이여, 다시는 向上이 없도다. 第一波羅蜜이 아님이여. 向下와 다르지 않다. 第一波羅蜜이라 이름함이여, 이는 向上인가 向下인가. 向上 向下를 모두 說해 보여서(說示) 양 손으로 다 들어 바쳤도다.

야부 是名第一波羅蜜이여 萬別千差가 從此出이라 鬼面神頭가 對面來하니 此時에 莫道不相識하라

第一波羅蜜이라 이름함이여,

千差萬別이 이로부터 나왔도다.

鬼面과 神頭로써 대면하여 오니

이때에 서로 모른다고 말하지 말라

설의 第一波羅蜜이여 差別이 所從出이라 窅然幽奧深難測이나 爭奈頭頭常現露리오 常現露여 別無眞하니 此時에 莫道不相識하라

第一波羅蜜이여, 온갖 差別이 이로부터 나왔도다. 了然히 아득히 깊어 측량키 어려우나, 낱낱이 항상 드러나 있음을 어찌하리오. 항상 드러나 있음이여. 따로 참다운 것이 없으니 이때에 서로 모른다고 말하지 말라.

 

須菩提야 忍辱波羅密을 如來說가 非忍辱波羅密일새 是名忍辱波羅密이니라

수보리야, 인욕바라밀도 여래가 설하되 인욕바라밀이 아니고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이니라.

 

何以故오 須菩提야 如我昔爲歌利王에 割截身體하야 我於爾時에 無我相하며 無人相하며 無衆生相하며 無壽者相호라

어찌한 까닭인가. 수보리야, 내가 옛적 가리왕에게 신체를 낱낱이 베일 때에 나는 그때에 아상이 없었고 인상이 없었으며 중생상도 없었고 수자상도 없었느니라.

 

何以故오 我於往昔節節支解時에 若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이면 應生嗔恨일러니라

왜냐하면 내가 옛적에 마디마디 사지를 베일 때에 만약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었으면 응당 성내고 원망함을 내었으리라.

설의 上讚信解하사 令發心竟하시고 將勸菩薩의 離相發心하려하사 先擧自己의 行菩薩道時에 逢難安忍하던 離相之迹하시니 忍辱波羅蜜者는 逢難安忍하야 求到彼岸也요 非忍辱波羅蜜者는 辱境이 本空하고 忍心이 本寂하야 無彼岸可到也니라 爲甚如此오 如我昔爲歌利의 割載하야 不見有辱境當情하며 亦不見有身心이 當彼所害하야 初無我人之相이라 尙不見有辱境身心이어니 何更見有彼岸可到也리오 因甚知無我相고 我於彼時에 若有我相이면 應生瞋恨이니 旣不生瞋일새 故知無相也니라

위에서는 信解를 稱讚하여 이로 하여금 發心해 마치시고, 將次 菩薩의 相을 떠난 發心을 권하기 爲하여 먼저 自己가 菩薩道를 行할 때, 어려움을 만나서 忍에 安住하던, 相을 떠난 자취를 드신 것이다. 忍辱波羅蜜이란 어려움을 만나서 忍에 安住하여 彼岸에 이르름을 구해 가는 것이요. 忍辱波羅蜜이 아니라 한 것은 辱境에 本來 空하고, 참는 마음이 本來 空寂해서 彼岸에 가히 이를 것이 없느니라. 어째서 이 같은가. 내가 옛적에 歌利王에게 몸을 베이고 끊음에 당해서도 욕된 境界가 마음에 있음도 보지 못하며, 또한 몸과 마음이 해치는 것을 당함도 보지 못하여서 애초에 我相 人相이 없는 것이라. 오히려 辱境과 身心이 있음을 보지 못하거늘 어찌 다시 彼岸에 이르러 가는 것을 볼 것인가. 그러면 무엇을 인하여 我相이 없음을 아는가. 내가 저 때에 만약 我相이 있었으면 마땅히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을 내었을 것이나 이미 성내고 원망을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相이 없음을 알겠느니라.

 

야부 如刀斷水요 似火吹光이라 明來暗去에 那事無妨이로다 歌利王歌利王이여 誰知遠煙浪에 別有好商量이리오

칼로써 물을 베는 것과 같고

불로써 빛을 부는 것과 같도다.

밝음이 오면 어둠이 가시니

무슨 일이라도 방해롭지 않도다.

歌利王 歌利王이여

누가 遠煙浪에 달리 좋은 思量이 있음을 알리오.

안개와 물결이 자욱한 곳에

따로 좋은 경치가 있음을 누가 알리오.

설의 商은 一作思라 靈源이 湛寂하야 攪之不可動이며 靈焰이 烜赫하야 吹之不可滅이라 任他八風交馳하야 內智가 湛爾常凝하니 歌利之愚가 焉知逢難之中에 具無限好消息也리오

(商은 思라고도 함) 신령스런 근원이 밝고 고요해서 흔들어도 가히 동하지 않으며 신령스런 불꽃이 밝게 빛나서 불어도 가히 꺼지지 않음이라. 저 八風이 交馳함에 맡겨서 안으로의 智慧가 맑아 항상 엉겨 있으니 歌利王의 어리석음이 어려움을 만난 가운데서 無限한 좋은 소식이 갖추어 있음을 어찌 알리오.

 

須菩提야 又念過去於-五百世에 作忍辱仙人하야 於爾所世에 無我相하며 無人相하며 無衆生相하며 無壽者相호라

수보리야, 또 과거 오백세 동안에 인욕선인이었던 일을 생각하니 그때의 세상에서도 아상이 없었으며 인상도 없었고 중생상도 없었으며 수자상도 없었느니라.

설의 非但一生에 安忍無相이라 五百生中에 頻遭此苦하야도 悉皆無相이니라

非但 一生을 잘 참아서 相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五百生 중에서 자주 이런 고통을 만났어도 모두 다 相이 없었도다.

 

야부 目前에 無法하니 從敎柳緣花紅이요 耳畔에 無聞하니 一任鶯吟燕語로다

눈앞에 法이 없으니

버들이 푸르고 꽃이 붉은 데에(本然의 모습, 諸法의 實相) 맡겨둠이요,

귓가에 들림이 없으니

꾀꼬리가 읊조리고 제비가 지저귐에 일임하도다.

설의 深達法性空하야 塗割에 兩無心하니 達性空則根塵이 無礙요 得無心則事事無妨이로다 所以로 道호대 智明頭頭明이요 心閑事事閑이라하시니라

法性이 空함을 깊이 通達해서 塗(약을 발라줌)와 割(해침)에 둘 다 무심하니, 性品이 空함을 通達한즉 六根과 六塵이 걸림이 없음이요. 無心을 얻은즉 일마다 방해롭지 않도다. 그러므로 말하되 智慧가 밝으면 낱낱이 다 밝음이요, 마음이 한가하면 일마다 다 한가하다고 하시니라.

야부 四大가 元無我요 五蘊이 悉皆空이라 廓落虛無理여 乾坤이 萬古同이라 妙峯이 嶷嶷常如故하니 誰管顚號括地風이리오

四大가 元來 我가 없음이요.

五蘊은 다 空하도다.

텅 비어 허무한 이치여.

하늘과 땅은 萬古에 같도다.

妙峯은 높고높아 항상 옛과 같으니

땅을 휩쓸고 가는 회오리바람을 누가 관계하리오.

설의 四大五蘊이 同鏡像하니 空空無我亦無人이라 無我無人性常住하니 同地同天古到今이로다 古到今이여 無變異하니 從敎八風來彭彭이로다

四大五蘊이 거울 속의 모습과 같으니 空하고 空해서 我도 없고 또한 人도 없도다. 我도 없고 人도 없어서 性이 항상 住하니 땅도 같고 하늘도 같아서 예나 지금이 같음이로다. 예나 지금이 같음이여(시간을 초월함). 變하거나 달라진 것이 없으니 八風이 彭彭함에 맡기도다.

 

是故로 須菩提야 菩薩이 應離一切相하고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이니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은 응당 일체상을 떠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낼지니

설의 旣悟自心이 與佛無殊인댄 更能塵塵無着하고 念念無生하야사 是眞發心이며 名眞菩薩이니라 由是로 凡有發心者는 要應離相也니 此는 正勸離相發心也니라 又離相發心者는 是非人我가 俱是虛妄이니 悉應遠離하고 但發無上菩提之心也니라 然이나 所謂離相은 但了相虛妄하야 能所不生을 卽名爲離요 非別有相爲可離也니라

이미 제 마음을 깨달은 것이 부처님과 다름이 없으면, 다시 능히 사물사물에 執着하지 않고 생각생각이 일어나지 않아야 이것이 참으로 發心한 것이며 참다운 菩薩이라고 하느니라. 이로 말미암아 무릇 발심한 사람은 종요로히 마땅히 相을 여의라. 이는 바로 相을 여의고 發心할 것을 권한 것이다. 또 相을 떠나서 발심한다는 것은 是, 非, 人, 我가 다 虛妄한 것이어서 다 멀리 떠나고 다만 無上菩提心만 말할 뿐이니라. 그러나 다만 相 떠난다는 것은, 다만 相이 虛妄한 줄을 了達하여서 能과 所라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바로 相을 떠난 것이지, 따로 相이 있어서 가히 떠나야 될 相이 있는 것은 아니로다. (근본적으로 相의 空한 이치를 깨달으면 떠나야 할 相은 없는 것이다.)

 

야부 是가 卽此用가 離此用가

이것은 이 用에 卽한 것인가. 이 用을 떠난 것인가.

설의 旣云離相發心인댄 心與相이 相去多少오 冲虛妙粹하고 廣大靈明하야 離諸幻妄을 名之爲心이요 日用是非人我와 現前色香味觸이 俱是虛妄을 皆名爲相이니라 然이나 相非外來라 全是自心起用이니 伊麽則此心이 卽此用가 離此用가 若道卽此用인댄 爭奈絶相離名이며 若道離此用인댄 爭奈不礙諸相이리오 畢竟作麽生道오 若人이 識得心하면 大地無寸土니라 所以로 道호대 於一毛端에 現寶王刹하고 坐微塵裏하야 轉大法輪이라하시니라

이미 相을 떠난 發心이라 말하면 마음과 相의 서로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 텅비어 妙하게 순수(沖虛妙粹)하고 넓고 커 신령스럽게 밝아서 모든 幻과 妄을 여의는 것을 이름하여 마음이라 하고 日用의 是 非 人 我와 現前의 色香味觸이 다 虛妄한 것을 모두 이름하여 相이라 한다. 그러나 이 相이란 밖에서 온 것이 아니고 모두 제 마음에서 일어난 作用이니 이러한즉 이 마음이 이 用에 卽한 것인가,(곧 이 用인가) 이 用을 여읜 것인가. 만약 이 用에 卽했다면 어찌 相을 끊고 이름을 여읜 것이겠으며, 만약 用을 여읜 것이라면 어찌 모든 相에 걸리지 않을 것인가.

결국 어떻게 말할 것인가.

만약 사람이 마음을 알아 얻으면

大地에 寸土도 없을 것이다.(모두 마음으로만 보인다)

그러므로 이르되

한 터럭 끝에 寶王刹(큰世界, 佛刹)이 나타나고

微塵속에 앉아서 大法輪을 굴린다 하시니라.

야부 得之在心이요 應之在手라(在는 一作於라) 雪月風花요 天長地久라 朝朝鷄向五更啼하고 春來處處出花秀로다

얻는 것은 마음에 있고

쓰는 것은 손에 있다.

눈(雪) 위를 비치는 달빛과 바람에 나부끼는 꽃이요,

하늘은 높고 땅은 넓네.

아침마다 닭은 五更에 울고

봄이 오면 산마다 꽃이 아름답도다.

설의 失其旨也인댄 離却日用코 別求生涯어니와 得其源也인댄 機境上에 把得便用이니라 伊麽則頭頭가 淨妙國土요 物物이 常住眞身이라 一切聲이 是佛聲이요 一切色이 是佛色이니 觸處天眞하야 雌黃無分니라 鷄向五更啼하고 處處山花秀하니 可得雌黃麽아

그 뜻을 잃어버리면 일상생활을 떠나서 따로 생애를 구하거니와 그 근원을 얻으면 一切 境界(機境)위에서도 그것을 잡아 곧 씀이니라. 이러한즉 낱낱이 淨妙한 國土(우리의 마음자리)가 되고 事物事物이 항상 머물러 있는 眞身이다.(淸淨法身) 一切의 모든 소리는 부처님 音聲이고 一切의 모든 물질이 다 佛色이니 부딪치는 곳마다 천진(天眞)하여 雌黃을 가릴 수 없도다. 닭은 五更에 울고 산마다 꽃들이 수려하나 가히 자황을 얻겠는가.

 

不應住色生心하며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이요 應生無所住心이니라

응당 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 성 · 향 · 미 · 촉 · 법에 머물러서도 마음을 내지 말고 응당 머문 바 없는 그 마음을 낼(生)지니라.

 

若心有住면 卽爲非住니

만약 마음이 머묾이 있으면 곧 머묾 아님이 되느니라.

 

是故로 佛說菩薩心이 不應住色布施라하노라

그러므로 부처님이 말하길 “보살은 마땅히 마음을 색에 머물지 말고 보시하라” 하느니라.

 

須菩提야 菩薩이 爲利益一切衆生하야 應如是布施니

수보리야, 보살은 일체중생을 이익하기 위하여 응당 이와 같이 보시하느니

설의 識浪이 內湧則境風이 作而常動하고 智水가 內凝則風塵이 息而常靜이니 靜無靜相이라 眞明自照니 是謂無住生心이라 是眞菩薩住處니라 由是로 發心之者는 凡於應用之際에 但當無念而應하고 不應着意攀緣이니 着意墮魔坑이라 非眞菩薩住處也니라 所以然者는 菩薩發心은 只爲益生이니 自若有住면 豈能令他無住리오 所謂有諸己然後에 求諸人하며 無諸己然後에 非諸人이 是也니라 所謂無念無住는 正似秋天野水에 森羅自顯이니 豈同寒灰枯木하야 一於忘懷者哉하 忘懷는 沈鬼窟이라 亦非菩薩住處也니 若眞住處인댄 不依有住而住하고 不依無住而住하며 亦不依中道而住하야 如是而住也니라

識의 물결이 안으로 용솟음치면 境界의 바람이 일어나서 항상 動하게 된다.(마음속에서 妄想과 煩惱가 일면 모든 境界도 바로 시끄러워지는 것이다) 智慧의 물이 안으로 엉기면 風塵(六塵境界)이 쉬게되어 항상 고요할 것이요, 고요하되 고요하다는 相이 없어야 참되고 밝은 것이 스스로 비추는 것이 이것을 머무른 바 없이 마음을 낸다고 이르는 것이라. 이것이 참된 菩薩이 머물 곳이다. 이로 말미암아 發心한 사람은 무릇 應用할 때에 다만 마땅히 無念(執着없이)으로써 應하고, 應當 뜻에 執着하여 攀緣하지 말 것이니, 뜻에 執着하면 마군이의 구덩이에 떨어지게 되어 참다운 菩薩의 머무를 곳이 못되느니라. 그러한 이유는 菩薩의 發心은 단지 衆生을 利益되게 하기 위한 것이니 만약 스스로 머무름이 있으면 어찌 能히 다른 이로 하여금 無住케 할 것인가. 이른바 몸소 그렇게 한 然後에 남에게도 있기를 구할 것이며 自己에게 (허물이) 없은 然後에 남을 그르다 하는 것이 이것이다.

이른바 無念, 無住라는 것은 가을하늘과 맑은 물위에 森羅萬像이 저절로 드러남과 같으니, 어찌 싸늘한 재와 고목처럼 한결같이 생각만 잊는 것과 어찌 같겠는가. 생각을 잊는 것은 귀신의 굴에 잠기는 것이어서 또한 菩薩의 머무를 곳이 아니니 만약 참다운 머무를 곳이라면 有住를 의지하여 住하지도 말고 無住를 의지하여 住하지도 말며 또한 中道를 의지하여 住하지도 않아야 이와 같이 住하는 것이다.

 

야부 有佛處에 不得住하고 無佛處에 急走過하야 三十年後에 莫言不道어다

부처님 계신데도 머물지 말고, 부처님 없는데서는 급히 지나갈지니 삼십年 후에 (너에게) 이르지 못하였다고 말하지 말지어다.

설의 有佛處에 有敎可遵이요 無佛處에 無敎可効라 然이나 有敎無敎가 盡令人으로 不得洒洒落落이니 旣不坐於兩邊인댄 亦不滯於中道하야 透過三關已하야는 亦復不留蹤이니라

부처님 계신 곳에서는 가르침에 있어서 가히 좇을 만 하고 부처님 없는 곳에서는 가히 본받을 만한 가르침이 없도다. 그러나 가르침이 있고 없는 것은 다 사람으로 하여금 洒洒落落(깨끗한 상태)하게 하지 못함이니 이미 兩邊에 앉지 아니하였으면 또한 中道에도 머물지 말고 三 가지 關門(有敎, 無敎, 中道)을 뚫고 지나서는 또한 다시 자취에도 머물지 말지니라.

야부 朝遊南嶽하고 暮往天台로다 追而不及이요 忽然自來로다 獨行獨坐無拘繫하니 得寬懷處에 且寬懷로다

아침엔 南嶽山에서 놀고

저물면 天台山에 간다.  

쫓으려 해도 미치지 못하더니

홀연히 저절로 오네

홀로 行하고 홀로 앉아 매인 것 없으니

너그러운 생각이 있음에 또한 너그러워짐이로다.

설의 彼此無所止하고 中間도 亦無蹤이라 蕭然獨脫無拘繁하니 雲蹤鶴態로 喩難齊로다 旣不坐於三千里內하고 亦不立於三千里外하니 是可謂逸驥之於春風廣野요 神龍之於月明滄海로다

彼此에 머물 것이 없고 中間도 또한 자취가 없음이라. 소연히 홀로 벗어나서 구속과 얽매임이 없으니, 구름의 자취와 학의 자태로 비유하여도 똑같이 표현하기 어렵도다. 이미 三千里(有敎, 無敎, 中道)안에 앉아 있지 않고 또한 三千里 밖에서도 서있지 않으니 이것은 가히 春風廣野에서 駿馬가 달림과 같고 달 밝은 푸른 바다에 神龍이 오름과 같도다.

如來가 說一切諸相이 卽是非相이며 又說一切衆生이 卽非衆生이니라

여래가 설한 일체의 모든 상은 곧 이 상이 아니며 또한 일체의 중생이라고 설함도 곧 중생이 아니니라

설의 諸相이 本空하야 無相可住요 衆生이 本寂하야 無生可度也니 此所以勸離相發心也니라

모든 相이 本來 空하여 相에 가히 머물 것이 없음이요, 衆生이 本來 고요하여 衆生을 가히 제도할 것이 없음이니 이 까닭에 相을 떠난 發心을 권함이라.

야부 別有長處하니 不妨拈出이로다

따로 長處(좋은 곳)가 있으니

잡아내는데 방해롭지 않도다.

설의 相卽非相이며 生卽非生이여 只說得一半이요 說不及一半이니 一半을 更須拈出하야사 始得다

相은 곧 相이 아니고, 衆生이 곧 衆生이 아님이여, 단지 半만 말했고 半은 아직 말로써 미치지 못했으니, 半을 다시 잡아내어야 비로소 옳을 것이다.

야부 不是衆生不是相이여 春暖黃鶯이 啼柳上이로다 說盡山雲海月情이여늘 依前不會空惆悵이로다 休惆悵하라 萬里無雲天一樣이로다

衆生도 아니고 相도 아님이여,

따뜻한 봄날 노란 꾀꼬리 버들 위에서 우누나.

山雲과 海月의 情을 다 說했거늘

예전처럼 알지 못하고 空然히 쓸쓸해 하도다.

서글퍼하지 말라.

만리에 구름 한 점 없으니 하늘이 한 모양뿐이더라.

설의 纖毫不掛處에 萬像頓彰時라 山頂白雲은 封不開요 海天明月은 正簫然이로다 見已에 情自悅하니 此情을 說向誰오 傍有遠鄕客作夢이어늘 扶起分明說此情하니 睡初起라 眼昏昏하야 依前不會空惆悵이로다 休惆悵하라 一道寒光이 滿目前이로다

가는 털도 걸지 못하는 곳에 萬像이 담박 나타난 때로다.

산봉우리의 흰 구름은 봉(封)하여 열지 않았고 海天의 明月은 正히 分明하도다. 보고나매 情이 절로 즐거우니 이 情을 누구를 向해 말할까. 곁에 먼 고향의 나그네가 꿈을 꾸고 있어서 붙잡아 일으켜 分明한 이 情景을 말하니, 잠이 막 깬지라 눈이 昏昏하여 예전처럼 알지 못하고 空然히 서글퍼하노라.

서글퍼하지 마라.

한 줄기 차가운 光明이 눈앞에 가득한 것을!

 

須菩提야 如來는 是眞語者며 實語者며 如語者며 不誑語者며 不異語者니라

수보리야, 여래는 참다운 말을 하는 자며 실다운 말을 하는 자며 사실과 같이 말하는 자며 거짓이 아닌 말을 하는 자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자니라.

설의 諸法實相을 說也說盡하시고 乃云我所說法은 眞不僞며 實不虛며 上不違如理하고 下不誑衆生이라 佛佛이 皆然하야 初無異說이라하시니라

모든 법의 實相을 說하고 說하여 다하시고, 이에 이르러 내가 說한 바 法은 참다워서 거짓이 아니며 실다워서 헛되지 않으며 위로는 如如한 이치에 어기지 않고 아래로는 衆生을 속이지 않음이라. 모든 부처님이 다 그러해서 애초에 다른 말씀이 없다 하시니라.

야부 知恩者가 少하고 負恩者가 多로다

은혜를 아는 者는 적고 은혜를 저버리는 者는 많도다.

설의 諄諄之慈가 靡所不至언마는 隨語生解者가 衆하고 承言會旨者鮮하니 承言會旨는 所以知恩이요 隨語生解는 所以負恩이니라

지극하고 지극한 慈悲가 이르지 아니한 곳 없건만 말을 따라 알음알이를 내는 자는 많고, 말을 받아듣고 뜻을 아는 자는 드무니 말을 받아 뜻을 아는 것은 은혜를 아는 것이고, 말을 따라서 알음알이를 내는 것은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니라.

야부 兩箇五百이 是一貫이요 阿爺元是丈夫漢이라 分明對面向渠言이나(向은 一作報라) 爭奈好心이 無好報리오 眞語者 實語者여 呵呵呵喏喏喏이로다

두 개의 五百斤이 一貫이요

아버지는 元來 장부로다.

分明히 對面하여 그를 向해 말하나

좋은 마음에 좋은 報가 없음을 어찌하리오.

眞語者, 實語者여. 呵呵呵, 喏喏喏로다(하하하, 그렇고 그렇도다).

설의 天下에 無二道요 聖人은 無兩心이니 如來眞實說이여 只說這介法이라 琴上에 分明彈報知나 一曲無生을 和者稀로다 邈然天地間에 唯師獨知恩이라 忍俊不禁笑呵呵하고 肯心自許云喏喏이로다 且喜瞿曇이 逢此老하노니 白雲千載에 一知音이라 連下三聲을 字細看하라 亦與忠老로 作知音이로다

天下에는 두 道가 없고 聖人은 두 마음이 없으니, 如來의 眞實한 말이여, 다만 이 法을 說할 뿐이로다. 거문고를 퉁기어 分明히 알리나 한 곡조 無生曲에 화답하는 자가 희귀하도다. 아득한 天地 사이에서 오직 스님(야부)만이 홀로 은혜를 알도다. 그 준걸함을 참을래야 참지 못하여 ‘하하하’웃고, 기꺼이 스스로 허락하여 이르되 ‘야야야’(그렇고 그렇도다)라 하도다. 또한 瞿曇(佛)이 이 老人(冶父) 만남을 기뻐하노니 흰구름만 뒤덮인 천년 사이에 한 知音者를 만났음이라. 아래로 이은 세 소리(가가가,야야야)를 자세히 보아라. 또한 忠老와 더불어 知音者를 지었도다.

 

須菩提야 如來所得法은 此法이 無實無虛하니라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바 법인 이 법은 실다움(참)도 없고 헛됨(거짓)도 없느니라.

설의 前明所說하시고 此明所得하시니 所說도 亦只是不二法이며 所得도 亦只是不二法이라 無實無虛는 是言不二니라

앞에서는 說한 바를 밝히시고, 여기서는 얻은 바를 밝히시니 說한 바도 또한 두 法이 아니며, 얻은 것도 亦是 두 法이 아님이라. 無實無虛는 둘이 아닌 道理를 말함이니라.

야부 水中醎味요 色裏膠淸이로다

물속의 짠맛이요, 색깔속에 있는 아교의 깨끗함(투명함)이로다.

설의 是有아 是無아 是實가 是虛아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실다운 것인가 헛된 것인가.

야부 硬似鐵軟如酥하고 看時有覓還無라 雖然步步常相守나 要且無人識得渠로다 咦

굳기는 철과 같고 부드럽기는 연유와 같으며

보면 있는 듯하나 찾으면 도리어 없도다.

비록 그렇게 걸음걸음에 항상 서로 따르나

또한 그를 아는 이 아무도 없도다. 咦!

설의 且强且柔하니 易見難曉로다 雖一切處에 披露分明이나 乃一切處에 摸扌索不着이로다 更知道어다 十聖三賢도 不知處하니 有時에 閑掛寺門前이로다

또한 강하기도 하고 부드럽기도 하니 쉽게 보되 밝히기는 어렵도다. 비록 一切處에서 헤쳐 드러내면 分明하나, 그러나 一切處에서 찾으려면 찾을 수 없도다. 다시 알지어다. 十聖三賢도 그 있는 곳을 알지 못하나 어느 땐 한가롭게 절문 앞에 걸려 있도다.

 

㉴十은 如(眞如)가 有得과 無得에 두루하다는 疑心을 끊음이라. 論에 이르되 만약 聖人이 無爲의 眞如法으로써 이름을 얻었다면 저 眞如가 一切의 時와 處에 항상 있거늘 어찌하여 얻는 자도 있고 얻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하므로 그것을 끊음이라. 두 가지가 있으니 ㉵一. 비유를 들어서 疑心을 끊음이라.

須菩提야 若菩薩이 心住於法하야 而行布施하면 如人이 入暗에 卽無所見이요 若菩薩이 心不住法하야 而行布施하면 如人이 有目하야 日光明照에 見種種色이니라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마음을 법에 머물러서(얽매이면서)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어두운 곳에 들어가매 아무것도 보이는 바가 없는 것과 같고, 만약 보살이 마음을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눈도 있고 햇빛도 밝게 비쳐서 여러 가지의 사물을 보는 것과 같느니라.

 

須菩提야 當來之世에 若有善男子善女人이 能於此經에 受持讀誦하면 卽爲如來가 以佛智慧로 悉知是人하며 悉見是人하야 皆得成就無量無邊功德하리라

수보리야, 오는 세상에서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능히 이 경을 수지독송(받아 지니어 읽고 외우고)하면, 여래가 부처의 지혜로써 이 사람을 다 알며 이 사람을 다 보아서 모두가 한량없고 끝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되리라.

설의 前明無住所以하시고 此喩明無住하시니 法本無實이라 不應住於有며 法本無處라 不應住於無니라 住於有則違於空寂本體요 住於無則違彼靈明之本用이니 旣與本體本用으로 相違則性上萬德이 無由顯發하리니 如人이 入暗에 卽無所見이라 是可謂盲者가 不知光所在하야 低頭冷坐暗思量이니라 不住有則契乎本體하고 不住無則契乎本用이니 旣與本體本用으로 相契則性上萬德이 當處現前하리니 如人이 有目하야 當陽見色이라 是可謂決散浮雲孤月上하니 大千沙界一時明이로다

앞에서는 無住한 까닭을 밝히고 여기서는 비유로서 無住를 밝히셨다. 法은 本來 실다움이 없으니, 마땅히 有에도 住하지도 말 것이며, 法은 本來 헛되지 않아서 마땅히 無에도 住하지 말 것이다. 有에 住하면 저 空寂한 本體를 어기게 되고, 無에 住하면 저 신령스럽게 밝은 本來의 作用에 어긋나니, 이미 本體本用과 더불어 서로 어긋난즉 性品 위에 萬德이 나타날 수 없으리니, 사람이 어두운 곳에 들어가면 곧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는 가히 눈먼 자가 빛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하여 머리를 떨구고 냉랭히 앉아서 그윽히 思量함을 말하는 것이니라. 有에 住하지 아니한즉 本體에 계합하고 無에 住하지 아니한즉 本用에 계합하니, 이미 本體, 本用과 더불어 서로 계합한즉 性品위에 萬德이 그 자리에서 드러날 것이니라. 이는 마치 사람이 눈이 있어서 햇빛에서 사물을 보는 것과 같음이라. 이것은 가히 뜬구름을 다 흩날리고 둥근 달만이 떠오르니, 大千沙界가 一時에 밝아짐을 말하느니라.

 

야부 因地而倒에 因地而起니 地向爾道什麽오

땅으로 인해 넘어진 사람은 땅을 인해서 일어나니, 땅이 그대에게 뭐라 말하던가.

설의 地不令人倒며 亦不令人起니 起倒由人이라 不關於地니라 法不令人悟며 亦不令人迷니 迷悟在人이라 不關於法이니라 法不令人取며 亦不令人舍니 取舍由人이라 不在於法이니라

땅은 사람으로 하여금 넘어지게도 하지 않으며 또한 사람을 일어나게도 하지 않으니 일어나고 넘어지는 것은 사람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땅은 관계하지 않는다. 法은 사람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지 않으며 또한 사람을 迷하게도 하지 않으니 迷와 悟는 사람에게 있고 法은 관계하지 않도다. 法은 사람을 取하게 하지 않으며 또한 사람을 버리게도 하지 않으니 取하고 버리는 것은 사람으로 말미암음이어서 법에 있는 것이 아니다.

야부 世間萬事가 不如常하니(不如常은 他本에 作總如常이라) 又不驚人又久長이라 如常이여 恰似秋風至하야 無意涼人人自涼이로다

世間萬事가 한결같지 않으니(不如常이 다른 책엔 모두 한결같으니)

또한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으며 또한 오래가도다.

如常함이여! 한결같음이여!

恰似 가을바람과 같아서

사람을 서늘케 할 뜻이 없으나

사람들이 저절로 서늘해 하도다.

설의 世間萬事가 不過常與不常이니 言其常也인댄 頂天立地하고 飢飡渴飮이라 又不驚人이며 亦乃久長이요 言其不常也인댄 身上出水하고 身下出火라 此則驚動人心이며 又不久長이로다 雖云奇特이나 就實而觀컨대 不如常也니라 伊麽則觸目皆道라 是平常이니 平常이 何以使人驚이리오 不以有相으로 驚於人하며 不以無相으로 驚於人이어늘 人於其間에 自生障碍하야 或以爲有相이라하야 着於有而落於常見之坑하며 或以爲無相이라하야 着於無而落於斷見之坑하나니 正似秋風은 無心이어늘 而人이 自涼이로다 迷悟도 亦然하니라

世間萬事가 常과 不常에 지나지 않으니, 그 常을 말할진대 이마는 하늘에 두고 땅에 서 있으며, 주리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도다. 또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으며 또한 오래감이로다. 그 不常을 말할진대 몸 위에서 물이 나고 몸 밑으로 불이 나옴이라. 이것은 사람의 마음을 놀라 동하게 하며 또한 오래가지 않음이로다. 비록 奇特하다 하나 사실에 나아가 觀하건대 如常하지 못하도다. 이러한즉 눈에 닿는 것마다 모두 道로다. 이것이 平常의 道理이니 平常이 어찌 사람을 놀라게 하리오. 相이 있음으로써 사람을 놀라게도 하지 않으며 無相으로써 사람을 놀라게도 하지 않거늘, 사람이 그 사이에 스스로 障碍를 내어서 或 相이 있다고 여겨 有에 執着해서 常見의 구덩이에 떨어지며 或은 無常이라고 여겨 無에 執着해서 斷見의 구덩이에 떨어지나니, 바로 가을바람은 無心하거늘 사람들이 스스로 서늘해함과 같도다. 어리석고 깨닫는 것도 또한 그러하도다.

 

金剛般若婆羅蜜經 下

第十五 持經功德分(경을 가지는 공덕)

須菩提야 若有善男子善女人이 初日分에 以恒河沙等身으로 布施하며 中日分에 復以恒河沙等身으로 布施하며 後日分에 亦以恒河沙等身으로 布施如是無量百千萬億劫을 以身布施어든

수보리야,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아침에 항하의 모래수와 같은 몸으로 보시하고, 낮에 다시 항하의 모래수와 같은 몸으로 보시하며, 다시 저녁에도 또한 항하의 모래수와 같은 몸으로써 보시하여 이와 같이 무량한 백천만억 겁동안을 몸으로써 보시하더라도

 

若復有人이 聞此經典하고 信心不逆하면 其福이 勝彼하리니 何況書寫受持讀誦하야 爲人解說가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믿는 마음이 거슬리지 않으면 그 복이 저 몸을 보시한 복보다 수승하리니 어찌 하물며 이 경을 받아지니어 읽고 외워서 남을 위해 해설해줌이겠는가.

설의 世人慳貪이 厚於地하야 寸絲施人도 尙爲難이어든 況捨身命而行施를 誰肯一念生其心이리오 今捨身命日三時하야 施經多劫尙無厭하니 此事希奇絶無倫이라 聞之使人竪寒毛어늘 今讚持經福勝彼하시니 信知此經이 爲無上이로다 佛訶布施言爲劣은 以其不能無所着이니 但能布施心無住하면 只此便是菩薩行이니라

世人의 慳貪心이 땅 보다도 두꺼워서 한 토막의 실을 남에게 베풂도 오히려 어려움이 되거늘 하물며 이 목숨을 버려서 布施하는 것을 누가 한 생각이라도 그런 마음내기를 즐겨하랴. 지금 목숨 버리기를 하루에 세번씩 해서 多劫이 지나도록 布施를 해도 오히려 싫어함이 없으니 이 일은 참으로 希奇해서 짝할 것이 없도다. 그것을 들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머리끝이 서게 하거늘 지금 經을 가지는 복이 저 보다 殊勝하다고 讚歎하시니 眞實로 이 經典이 위없음을 알겠도다. 부처님이 布施하는 것을 下劣하다 꾸짖은 것은, 能히 그것에 執着하는 바가 없지 않기 때문이니, 다만 布施를 하되 마음에 머문 바가 없다면 이것이 곧 菩薩의 行이니라.

 

야부 人天福報는 卽不無어니와 佛法은 未夢見在로다

人天에 태어나는 福의 果報가 없지는 않으나 佛法은 꿈에도 보지 못함이로다.

설의 捨身時事兩不輕하니 人天福報를 孰敢先이리오 然이나 所作이 出於迷情하야 終感不如意事니 若將經福論相去인댄 十萬八千이 未是遠이로다

몸을 布施하는 시간과 일이 둘 다 가볍지 않으니 人天에 태어나는 福의 果報를 누가 이보다 먼저 하리오. 그러나 그 지은 바가 迷한 情에서 나와 마침내는 뜻과 같지 않은 일을 感得하니, 만약 經을 가지는 복과 몸을 布施하는 복과의 거리를 논한다면 十萬八千里라 해도 먼 것이 아니로다.(有漏(有爲)의 복은 아무리 쌓아도 無漏(無爲)의 복이 되지 못함)

야부 初中後發施心同하니 功德이 無邊算莫窮이로다 爭似信心心不立하야 一拳打透太虛空가

初, 中, 後의 베푸는 마음을 냄은 같으니

功德은 그지없어 다 헤아릴 수 없도다.

어찌 信心의 마음을 세우지 않고서

한 주먹으로 저 虛空을 쳐서 꿰뚫는 것만 같으랴.

설의 三時捨身福無邊이나 爭似聞經一念信가 一念了達無生佛하면 其量이 恢恢大如空이어니와 更把虛空令粉碎하면 人天福報을 不堪論이로다

三時로 몸을 버리는 복이 그지없으나 어찌 잠간 동안이라도 經을 듣고 믿는 것만 같겠는가. 한 순간에 衆生과 부처가 없음을 了達하면 그 量이 크고 커서 큰 虛空과 같거니와 다시 虛空을 잡아서 粉碎한다면 人天에 나는 福의 果報와는 감히 論할 수 없음이로다.

 

須菩提야 以要言之컨댄 是經이 有不可思議不可稱量無邊功德하니

수보리야, 요약해서 말할진대 이 경은 생각할 수 없고 말할 수도 없는 끝없는(무변한) 공덕이 있느니라.

 

如來가 爲發大勝者說이며 爲發最上勝者說이니라

여래는 대승을 발심한 자를 위하여 이 경을 설하며 최상승에 발심한 자를 위하여 이 경을 설하느니라.

설의 是經이 德難量이라 獨爲上智說이니라

이 經은 그 德이 限量없음이라. 홀로 最上의 智慧者를 爲하여 說하셨느니라.

규봉 最上者는 一佛乘也니라

最上이란 一佛乘이다.

六祖 大乘者는 智慧廣大하야 善能建立一切法이요 最上乘者는 不見垢法可厭하고 不見淨法可求하며 不見衆生可度하고 不見涅槃可證하며 不作度衆生之心하고 亦不作不度衆生之心이니 是名最上乘이며 亦名一切智며 亦名無生忍이며 亦名大般若니라 有人이 發心하야 求無上道인댄 聞此無相無爲甚深之法하고 聞已에 卽便信解受持하야 爲人解說하야 令其深悟하고 不生毁謗하야 得大忍力과 大智慧力과 大方便力하면 卽能流通此經하리라

大乘이란 智慧가 廣大해서 能히 一切法을 잘 建立하는 것이요, 最上乘이란 더러운 法은 가히 싫어함을 보지 않으며 깨끗한 法을 구함도 보지 않고 제도할 衆生도 보지 않으며 證得할 만한 涅槃도 보지 않고 衆生을 제도한다는 마음도 짓지 않으며 또한 衆生을 제도하지 않는다는 마음도 짓지 않으니, 이것을 最上乘이라 名하며 또한 一切智라 名하고 無生忍이며 大般若라 이름하느니라. 어떤 사람이 發心하여 無上道를 구하려면 이 無上, 無爲의 심히 깊은 法을 듣고서 들은 후엔 곧바로 信解受持하여 사람을 爲해 解說하고 그로 하여금 깊이 깨닫게 하여 毁謗을 내지 않게 해서 大忍力과 大智慧力과 大方便力을 얻게 하면 바로 能히 이 經을 流通함이 되리라.

야부 如斬一握絲하야 一斬에 一切斷이로다

마치 한줌의 실을 끊음과 같아서 한번 끊으면 一切가 끊어짐이로다.

설의 此經이 令人斷障則如斬一握絲하야 一斬에 一切斷이요 令人成德則如染一縷絲하야 一染에 一切染이로다

이 經이 사람으로 하여금 障礙를 끊게 하는 것은 곧 한줌의 실을 끊는 것과 같아서 한번 끊으면 一切가 끊어지고, 사람으로 하여금 德을 이루게 하는 데는 곧 한 타래의 실을 물들임과 같아서 한번 물들이면 모두가 물듦이로다.

야부 一拳打倒化城關하고 一脚趯翻玄妙寨로다 南北東西에 信步行하니 休覓大悲觀自在어다 大乘說最上說이여 一棒에 一條痕이요 一掌에 一握血이로다

한 주먹으로 化城의 關門을 打倒하고

한 발로 玄妙의 울타리를 차서 뒤엎도다.

南北東西에 마음대로 行하니

大悲의 觀自在를 찾지 말지어다.

大乘說 最上說이여,

一棒에 한가닥의 흔적이요

一掌에 한줌의 피로다.

설의 摑倒化城踏玄關하니 濶步如來廣大刹이로다 旣能與佛同活計인댄 大悲提接을 更何求아 大乘說最上說이여 一棒이 可當五千部요 一掌擊盡八萬門이로다 只此已成多事在니 何便喃喃話葛藤이리오 一條痕一握血이여 乾坤이 失色이요 日月이 無光이로다

化城을 쳐버리고 玄關을 밟아버리니 如來의 廣大한 世界를 闊步하도다. 이미 능히 부처님과 더불어 살림살이를 같이할진대 大悲觀自在菩薩의 지도(提接)함을 어찌 구할 것인가. 大乘說 最上乘을 說함이여, 한 방망이에 가히 五千部를 당하고 한 손바닥으로 八萬門을 다 치도다. 다만 이것도 많은 일을 이룬 것이니 어찌 다시 지껄이며 言語 文字(喃喃)를 말하리오. 한가닥의 흔적과 한줌의 피여, 乾坤이 빛을 잃고 日月이 빛이 없도다.

 

若有人이 能受持讀誦하야 廣爲人說하면 如來가 悉知是人하며 悉見是人하야 皆得成就不可量不可稱無有邊不可思議功德하리니 如是人等은 則爲荷擔如來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

만약 어떤 사람이 능히 이 경을 받아지니고 읽고 외우며 널리 사람들을 위하여 설한다면 여래는 이 사람을 모두 알며 이 사람을 모두 보나니, 이 사람은 헤아릴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며 끝이 없고 생각할 수 없는 공덕을 모두 성취하게 되리라. 이런 사람은 곧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짊어짐이 되느리라.

설의 此經이 旣爲上智說來시니 若人이 持說하면 此必上智라 得佛知見하야 荷擔菩提가 必無疑矣로다

이 經은 이미 最上의 智慧를 爲해 說하였으니 만약 사람이 이 經을 가지고 說하면 이는 반드시 最上의 智慧人이라서 佛智見을 얻어 菩提를 짊어짐에 반드시 疑心이 없으리라.

야부 擘開泰華手는 須是巨靈神이니라

泰山과 華山을 쪼갤 수 있는 솜씨는 모름지기 이 巨靈神(火身)이로다.

설의 荷擔佛菩提는 須是介中人이니라

부처님의 菩提를 짊어진 이는 모름지기 이 가운데 사람이로다.

야부 堆山積岳來에 一一盡塵埃로다 眼裏에 瞳人碧하고 胸中에 氣若雷로다 出邊에 沙塞靜이요 入國에 貫英才로다 一片寸心의 如海大하니 波濤에 幾見去還來오

山과 岳을 쌓고 쌓아옴이여.

낱낱이 다 티끌이로다.

눈속의 그 눈동자 푸르르고

胸中의 그 기세는 우레 같도다.

변방에 나아가면 변방이 고요하고

나라안에 들어오면 英才를 꿰도다.

한 조각 작은마음이 바다처럼 크니

波濤가 출렁임을 몇 번이나 보았던가.

설의 若是介中人인댄 無理不窮하고 無事不通이라 直令虛空으로 粉碎하고 大地로 平沈이니 假使十方諸佛이 同時興現種種神變이라도 此人面前엔 盡成盡埃니라 爲甚如此오 拈槌竪拂도 他亦不顧하며 語言三昧도 他亦不聞하야 眼光이 爍破三千界하니 裏有瞳睛碧眸寒이로다 胸次洒落渾忘世하니 中有雷霆氣宇新이로다 外應衆緣隨處寂하고 內冥一寂應無虧로다 肚裏恢恢如海大하니 一任千差有與無로다

만약 그 가운데 사람일진대 그 이치가 다하지 않음이 없고, 일마다 通하지 않음이 없도다. 바로 虛空으로 하여금 粉碎하고 大地로 하여금 平沈케 하니, 가령 十方의 諸佛이 동시에 갖가지 신통변화를 일으켜 나타낼지라도 이 사람의 面前에선 다 먼지와 같이 되도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방망이를 잡고 拂子를 세움도(祖師들이 法을 드날리는 표현) 저들은 또한 돌아보지 않으며 語言三昧(훌륭한 說法)도 저들은 듣지 않아서, 眼光이 三千界를 불살라서 깨뜨리니 그 눈 속에 눈동자가 푸르르고 차갑도다. 胸中이 洒落(물 뿌린 듯)하여 혼연히 세상을 잊었으나 그 안에 우레가 있어서 기개와 道場이 신선하도다. 밖으로 온갖 因緣에 應하나 곳을 따라 고요하고 안으로는 한결같이 고요한 데 명합하나 그 應함에는 이지러짐이 없도다. 뱃속이 넓고 넓어 바다같이 크니 천가지 差別인 有와 無에 일임하도다.

 

何以故오 須菩提야 若樂小法者는 着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일새 卽於此經에 不能聽受讀誦하야 爲人解說하리라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야, 만약 작은 법을 좋아하는 자는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에 집착하게 되므로 곧 이 경을 능히 받아듣고 읽고 외우며 남을 위하여 해설하지 못하느니라.(법신에는 四相이 용납될 수 없음을 보여주심)

설의 因甚道此經이 爲發大乘者說이며 爲發最上乘者說이며 乃至云如是人等은 卽爲荷擔阿耨菩提오 此經은 直示大人境界라 非是小根小智의 所能堪任故也니라

무슨 까닭으로 이 經이 大乘을 發한 者를 爲하여 說하며 最上乘을 發한 者를 爲하여 說하며, 내지 이러한 사람들은 곧 阿耨菩提를 짊어졌다고 말하는가. 이 經은 大人의 境界를 바로 보인 까닭에 작은 根機와 작은 智慧者는 能히 감당할 수 없는 연고이니라.

 

야부 仁者見之에 爲之仁이요 智者見之에 謂之智로다

어진 이가 보면 ‘어질다(仁)’ 말하고 智慧로운 이가 보면 ‘智慧롭다’ 말하도다.

설의 此經이 以智立體하야 念念無生하고 以行起用하야 繁興無際하니 此乃文殊普賢의 大人境界라 非小根小智의 所能掛懷니라 伊麽則非智면 無以窮其體요 非仁이면 無以盡其用이니 依此而修者는 可謂行悲에 悲廣大요 用智에 智能深이로다

이 經은 智慧로써 體를 세워서 생각생각에 生함이 없고 行으로써 用을 일으켜서 계속 일어나 끝이 없으니, 이것은 文殊와 普賢같은 大人의 境界로다. 작은 근기와 작은 智慧者의 생각엔 能히 걸릴 만한 것이 못되도다. 이러한즉 智慧가 없으면 이로써 體를 窮究할 수 없고 仁이 아니면 그 作用을 다할 수 없으니, 이것을 의지해서 닦는 자는 가히 慈悲를 行함에 慈悲가 廣大하고 智慧를 쓰면 智慧가 能히 깊어지도다.

야부 不學英雄不讀書하고 波波役役走長途로다 娘生寶藏을 無心用하야 甘作無知餓死夫로다 爭怪得別人이리오

영웅도 배우지 않고 독서도 하지 않으며

부지런 부지런히 먼길만 가도다.

어머니가 낳아준 보배를 마음대로 쓸 줄 몰라서

無知하게 굶어 죽는 것을 당연히 여기도다.

어찌 다른 사람을 怪異하게만 여기리오

설의 能文能武世第一이면 免見人間貧賤苦니 仁智於人에 亦如然하야 習來能得免沈淪이어니와 如今仁智兩不習일새 故於迷途에 長匍匐이라 德性寶藏이 雖然在나 不解用하야 自取立令立屛苦로다 旣然自取어니 歸咎何人이리오

글에도 能하고 무술에도 能한 것이 세상 제일이면 人間의 빈천한 고통을 면할 수 있으리니, 어질고 智慧로운 것도 사람에게 또한 그러하여 익혀오면 能히 輪廻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지금은 仁과 智慧를 둘 다 익히지 못하여 迷한 길에서 오래도록 기어다님이라. 德性의 보배가 비록 우리에게 있으나 사용할 줄 몰라서 스스로 비척거리는 고통을 取하도다. 이미 그렇게 스스로 取하였으니 그 허물을 누구에게 돌리리오.

 

須菩提야 在在處處에 若有此經하면 一切世間天人阿修羅의 所應供養이니 當知此處는 則爲是塔이라 皆應恭敬作禮圍遶하야 以諸華香으로 而散其處하리라

수보리야, 어느 곳이든지 만약 이 경이 있는 곳이면 일체 세간의 천상과 인간과 아수라 등이 응당 공양하게 되리니 마땅히 알라. 이곳은 곧 탑이 됨이라. 모두가 공경히 예배하고 돌면서 여러 가지 꽃과 향으로써 그곳에 흩으리라.(법신에는 처소가 공함을 보이심)

설의 此經이 從來로 無處不在로대 只困埋塵不顯하야 人不得知라 唯有大智人은 破塵擎來하야 廣爲人說하나니 此有此經之處也니라 此是人天眼이니 人天의 所應供이로다

이 經은 예로부터 있지 않은 곳이 없으나 단지 먼지(六塵)에 묻혀서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것을 알지 못함이라. 그러나 오직 큰 智慧者는 먼지를 깨뜨리고 드러내어서 사람들을 爲해 널리 說하나니 이 곳이 곧 經이 있는 곳이니라.

이것은 人天의 眼目이어서 人天이 응당 供養해야 함이로다.

 

야부 鎭州蘿蔔이요 雲門胡餠이로다

진주의 무우요 운문의 호떡이로다.

설의 供養此經에 以何로 爲供養具요 鎭州蘿蔔이요 雲門胡餠이로다 僧이 問雲門호대 如何是超佛越祖之談이니잇고 門이 云胡餠이니라 開先暹和尙이 擧此話云하사대 如今二百員衲子가 東京西洛에 出一叢林하야 入一道場호대 到處에 嫌冷愛熱하야 喫却多少了也어니와 還有一人이 識得雲門胡餠也未아 山僧이 不是壓良爲賤이라 敢道未識得在라하노니 何故오 山僧이 二十年前에 藏在衣鉢下하야 鬼神도 亦不能知니 爾這一隊漢이 向甚麽處하야 摸扌索이리요 若也不信인댄 今日에 普將供養大衆호리라 遂拈起柱杖하야 畫一圓相云하사대 好手底는 拈取하라 復云하사대 收라하시니 須知所以爲供養具하야사 始得다 此一枚胡餠이 非但可以供養一衆이라 亦可以供養十方諸佛이며 亦可以供養六途含靈이니라 作麽生供養고 鎭州의 一頭蘿蔔을 天下老和尙이 呑吐來呑吐去하며 雲門의 一枚胡餠을 天下衲僧이 咬嚼來咬嚼去하나니 苟知呑吐咬嚼인댄 早已供養了也니라

이 經을 供養하되 무엇으로 供養具로 삼겠는가. 鎭州의 무우요 雲門의 호떡이로다. 어떤 스님이 운문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부처를 뛰어넘고 祖師를 초월할 수 있는 말입니까.” 운문 스님이 이르시되 “호떡이니라” 開先, 暹(宋初) 和尙이 이 말을 들추어 말하길 지금 이 백명의 衲子가 東京西洛의 한 총림에서 나와서 한 道場에 들어가되, 이르는 곳마다 찬 것을 싫어하고 따뜻한 것을 좋아해서 먹고 간 것이 그 얼마이며 또 한 사람이라도 운문의 호떡을 참으로 아는 사람이 있는가(운문 호떡의 道理를 아는 이가 있는가.)

山僧(暹和尙)이 양반을 강제로 賤하게(종으로) 하려는 것이 아니라 감히 말하건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하니 무슨 까닭인가. 暹스님이 二十年前에 옷과 발우 밑에다 감추어 두어서 귀신도 能히 알지 못하거늘 지금 너희들은 어느 곳을 向해 호떡을 찾으리오.

만약 이런 이치를 믿지 않는다면 오늘 大衆에게 널리 供養하리라. 드디어 주장자를 잡아세워 한 圓相을 그리며 이르시되 “수단이 좋은 이는 잡아 取하라.” 또 이르시되 “거둬들였다”하시니 모름지기 그것이 供養具가 되는 所以를 비로소 알았도다.

이 한 개의 호떡은 非但 한 大衆에게 供養할 뿐 아니라, 또한 十方諸佛께 供養한 것이며 또한 六途衆生에게 다 供養한 것이니라. 어떻게 供養하는가. 진주의 한 개 무우를 天下 老和尙이 삼켰다 토하고 삼켰다 토하며 운문의 한 개 호떡을 天下 衲僧이 씹어오고 씹어가니, 眞實로 삼키고 토하고 또 씹을 줄 알면 벌써 이미 供養하여 마친 것이로다.

야부 與君同步又同行하니 起坐相將歲月長이로다 渴飮飢飡常對面하니 不修回首更思量이니라

그대와 함께 걷고 함께 行하며

서고 앉음에 항상 서로 거느리며

오랜 歲月 함께 했음이로다.

목마르면 마시고 주리면 먹으며 항상 서로 대하니

머리를 돌이켜 다시 생각 말지어다.

설의 只如供養底一卷經을 向什麽處하야 看고 一切時處에 覿面相呈하니 擬議思量하면 對面千里니라

但只 저 供養하는 한 권의 經典을 어느 곳을 向해서 볼 것인가. 一切의 때와 곳에서 얼굴을 보고 서로 받드니 헤아려서 思量하면 얼굴을 마주하여도 천리나 어긋나도다.

第十六 能淨識心分(능히 업장을 깨끗이 함)

復次須菩提야 善男子善女人이 受持讀誦此經호대 若爲人輕賤하면 是人이 先世罪業으로 應墮惡道언마는 以今世人이 輕賤故로 先世罪業이 卽爲消滅하고 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하리라

다시 수보리야,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을 받아지니며 읽고 외우더라도 만약 남에게 업신여김을(경멸과 천대를) 당하면 이 사람은 전생에 지은 죄업으로 응당 악도(지옥, 아귀, 축생)에 떨어질 것이로되 금생의 사람들이 업신여김으로써 전생의 죄업이 모두 소멸되고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라.

설의 爲人輕賤은 明無我人이니 大率有我人者는 只欲爲人之上하고 不欲爲人之下어니와 達無我人者는 貴之不喜하며 賤之不怒하야 能下心於一切衆生하야 甘爲人之下也니라 由是로 昔年에 忍辱仙人은 爲歌利의 割載하시고 不輕菩薩은 爲四衆의 打罵하시니 此皆經賤之事로대 初無瞋恨之心이라 故知爲人輕賤之事는 乃達無我人者之所爲也니 苟達無我則爲人輕賤도 猶爲法樂이니라 法無彼此어늘 見起我人하나니 因有我人하야 起業造罪라 罪業이 相形하야 障菩提路니 欲成菩提인댄 先除罪業이요 欲除罪業인댄 先斷我人이니라 若聞經解義하야 達無我理하고 又能修行無我之行하야 更不造生死之業하면 則罪根이 永除故로 縱有先世無量罪業이라도 卽同氷消瓦解하야 當成無上佛果菩提니라 故로 云若善男子善女人이 受持讀誦此經호대 若爲人輕賤하면 是人의 先世罪業이 卽爲消滅하고 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하시니라 雖然受持讀誦此經이나 若貪名聞利養하야 不能生淨信心하며 亦不能知無我理하야 行無我行이면 則塵勞業用이 依舊熾然하리니 非唯不能轉罪成佛이라 亦乃未免當墮惡途니라

남으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은 我相 人相이 없음을 밝힌 것이니, 대개 我人(너다 나다하는 생각)이 있는 사람은 단지 남의 위가 되고자 하고 사람 아래 되고자 하지 않거니와, 我와 人이 없는 道理를 통달한 사람은 귀히 여겨도 기뻐하지 않고 천하게 여겨도 성내지 않으며 能히 一切衆生에게 下心하여 남의 아래됨을 달게 여기느니라. 이로 말미암아 옛날의 忍辱仙人은 歌利王에게 割截하게 되고 常不輕菩薩은 四部大衆(四衆)의 때리고 꾸짖음을 당했어도 이것은 다 輕賤하는 일이지만 아예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도다. 그러므로 알라. 남으로부터 輕賤당하는 일은 我相 人相이 없음을 通達한 자의 하는 일이니 眞實로 無我의 道理에 도달한즉 남의 輕賤함이 되어도 오히려 법의 즐거움으로 삼는 것이니라. 法에는 彼此가 없거늘 見에 我와 人을 일으키니 我와 人이 있음으로 인하여 業을 일으키고 罪를 짓는 것이로다. 罪業이 形相을 이루어서 菩提의 길을 障礙하니 菩提를 이루고자 하면 먼저 罪業을 없애야 하고 罪業을 없애고자 하면 먼저 我와 人을 끊어야 함이니, 만약 經을 듣고서 뜻을 알아 無我의 이치를 통달하고 또한 無我의 行을 修行해서 다시는 生死의 業을 짓지 않으면 곧 罪의 뿌리가 영원히 없어진 까닭으로 비록 先世의 無量한 罪業이 있다 할지라도 곧 봄날에 얼음이 녹고 기와가 풀어지는 것같이 마땅히 위없는 부처님의 果報인 菩提(깨달음)를 이루리라. 그러므로 이르되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이 經을 受持讀誦하되 남에게 輕賤을 당하면 이 사람의 先世罪業은 곧 消滅되고 마땅히 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얻는다고 하느니라. 비록 그렇게 이 經을 受持讀誦하나 만약 稱讚이나 利益을 탐하여 能히 깨끗한 信心을 내지 않거나 또한 能히 無我의 이치를 알지 못하여 無我의 行을 行하지도 않으면 煩惱와 業의 作用이 예전처럼 熾盛하리니, 오직 이는 罪를 굴려서 成佛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惡途에 떨어짐을 면치 못할 것이다.

 

輕賤이란 모두를 포함한 것이니 그것은 或 때리기도 하고 꾸짖음도 있는 까닭이다. 隋나라 번역에는 경천하고 또 심히 경천하게 여긴다 했으며 無着이 이르되 이것은 헐뜯고 욕하는 것이 限量없는 故로 다시 말하길 매우 경천하게 여김인 것이라 하다. 마땅히 菩提를 얻는다는 것은 罪가 滅한 까닭이라 하다.

 

야부 不因一事면 不長一智니라

한가지 일을 因하지 아니하면 한가지 智慧가 자라지 않느니라.

설의 無我不造業하고 斷障成菩提가 全承受持經力이니 伊麽則不因了得一大事면 不能證之一切智로다

我가 없으면 業을 짓지 않고 장애를 끊으면 菩提를 이루는 것은 온전히 經을 受持한 힘을 받은 것이니, 이런즉 一大事를 了達하지 않으면 能히 一切智를 證得하지 못하리라.

야부 讚不及毁不及이라 若了一萬事畢이로다 無欠無餘若太虛어늘 爲君題作波羅蜜이로다

讚歎도 미치지 못하고 훼방도 미치지 못함이라.

만약 하나를 了達하면 萬事를 마침이로다.

모자람도 남음도 없는 것이 큰 虛空과 같거늘

그대를 爲해서 ‘波羅蜜’이라 제목하도다.

설의 此一大事는 釋梵諸天이 稱讚不及이요 天魔外道가 毁謗無門이로다 若能了得一大事하면 諸佛祖의 神通機用과 百千三昧와 無量妙義를 只向一念間하야 了畢無餘하리니 此一大事는 無名字相하며 無迷悟相하야 圓同太虛하야 無欠無餘어늘 只爲未了底人하야 施設文字言詞로다

이 一大事는 釋 梵 諸天(帝釋 法王 모든 하늘들)의 稱讚이 미치지 못하고 天魔外道가 毁謗할 門이 없음이로다. 만약 能히 一大事를 了達하면 모든 佛祖의 神通機用과 百千三昧와 限量없는 妙한 뜻을 다만 한 순간에 다 알아서 남음이 없으리니, 이 一大事는 名字의 相도 없고 迷悟의 相도 없어서 圓滿함이 큰 虛空과 같아서 부족함도 남음도 없으나 다만 요달치 못한 이를 爲하여 文字와 言詞를 베푼 것이로다.

 

須菩提야 我念過去無量阿僧祗劫에 於然燈佛前에 得値八百四千萬億那由他諸佛하야 悉皆供養承事하야 無空過者호라

수보리야, 내가 과거 무량 아승지 겁을 생각하니, 연등불을 뵙기 전에도 팔백사천만억 나유타의 여러 부처님을 만나서 모두 다 공양하고 받들어 섬겼으며 헛되이 지냄이 없었노라.

 

若復有人이 於後末世에 能受持讀誦此經하면 所得功德이 於我所供養諸佛功德으로 百分에 不及一이며 千萬億分과 乃至算數譬喩로 所不能及이니라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앞으로 오는 말세에 능히 이 경을 받아지니고 읽고 외우면 그 얻는 공덕은 내가 여러 부처님께 공양한 공덕으로는 백분의 일도 미치며 못하며 천만억분과 내지 산수와 비유로도 미칠 수 없느니라.

설의 佛不外求라 只向心覓이니 若欲見佛인댄 唯須內照니라 承事諸佛이 福則不無나 然亦未免向外馳求어니와 一念聞經하면 能生淨信하야 卽自見性하야 直了成佛일새 所以로 供佛의 不及持經이니라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님이라. 다만 마음을 向해서 찾는 것이니, 만약 부처를 보고자 하면 오직 모름지기 안으로 비출지니라(自身을 살펴라). 여러 부처님을 받들어 섬김이 복은 없지 않으나 또한 밖을 向해서 어지럽게 구함을 면치 못하는 것이니 한 순간이라도 經을 들으면 能히 깨끗한 믿음을 내게 되고 곧 스스로 見性하여 바로 成佛해 마치리니 이 까닭에 부처님께 供養하는 것이 이 經을 가지는 것에 미치지 못하느니라.

 

야부 功不浪施니라

功은 헛된 베품이 아니니라.

설의 持經一念圓證하면 直了成佛일새 所以로 功不浪施니라

경을 수지하여 한 순간에 원만히 증득하면 바로 성불하는 것이므로 이 까닭에 功은 헛되지 않음이니라.

야부 億千供佛이 福無邊이나 爭似常將古敎看가 白紙上邊에 書黑字하니 請君開眼目前觀이어다 風寂寂水漣漣하니 謝家人이 秪在魚船이로다

억천 부처님을 供養하는 복이 끝이 없으나

어찌 옛 가르침을 항상 가져보는 것과 같으리요.

백지 위에 검은 글자를 써서 그대에게 청하노니

눈을 뜨고 눈앞을 볼지어다.

바람은 고요하고 물결은 잔잔하니

집 떠난 사람은 다만 어선 위에 있도다.

설의 他本에 謝家人이 在釣魚船이라 要識古敎在處麽아 似海之深이요 如山之高로다 要識古敎文彩麽아 煦日이 發生舖地錦하니 無紋印字錦上舒로다 請君大開娘生眼하야 十二時中에 常照了어다 常照了여 內外無侵眞境現하니 一人이 獨擅其中事로다 又古敎者는 以迹言之則古佛의 能詮之敎也요 以理言之則學人의 一卷經也라 此一卷經은 佛祖相傳底法印이며 衆生本有底一着子니 其來無始일새 故云古敎니라 白紙上邊書黑字者는 經卷에 本具文彩也라 白屬偏하니 自性隨緣二用也요 黑屬正하니 寂滅一體也니라 請君開眼目前觀者는 勸令諸人으로 不離日用하고 轉一大經卷也니라 風寂寂云云은 若轉得一大經卷하면 卽外而境風이 自寂하고 內而智水가 澄淸하야 隨緣任眞하며 逐處消遙가 一似虛舟駕浪에 自東自西하며 隨高隨下也니라 又風寂寂云云은 謂釣得錦鱗時에 也合風停而水面漣漣이요 觀照實相時에 也宜情忘而智水澄澄이니라 船爲釣魚之具요 敎爲悟眞之法이니 悟眞者가 專心悟眞之法하면 則必有悟眞之期요 釣魚者가 只在釣魚之船하면 則必有釣魚之時也니라

(다른 책엔 “집 떠난 사람이 낚시배 위에 있도다”로 되어있음.) 옛 가르침이 있는 곳을 알고자 하는가. 마치 바다의 깊음과 같고 산이 높음과 같도다. 옛 가르침의 무늬(文彩)를 알고자 하는가. 아침 햇빛이 땅 위에 비단을 깐 듯이 무늬없는 도장을 비단위에 찍음이로다. 그대에게 청하노니, 어머니가 낳아준 눈을 뜨고서 十二時中(하루종일) 늘 비출지어다. 항상 비춤이여! 안밖으로 침범함이 없어서 참된 境界가 나타나니, 한 사람이 홀로 그 가운데 일을 오로지 함이로다. 또한 옛 가르침이란 그 자취로써 말한즉 옛부처님이 能히 가르치신 말씀이요, 이치로서 말하자면 學人의 한 권 經이로다. 이 한 권의 經은 부처와 祖師가 서로 傳한 法印이며 衆生들이 本來 갖추고 있는 一着子(한物件)이니 그것이 오매 시작이 없으므로 옛 가르침이라 이르도다. 백지 위에 검은 글자를 쓴 것은 經典에 本來 갖춘 무늬로다. (우리 마음 經典에도 온갖 萬行萬德과 온갖 見聞覺智의 作用이 있다)

흰 것은 치우친 데(偏)에 속하니 自性과 隨緣 두 가지 쓰임(用)이요 검은 것은 正에 속하여 寂滅이 하나의 體이니라. “그대에게 請하노니 눈을 뜨고 앞을 보라”는 것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日用을 떠나지 않고 一大經卷 굴리기를 권함이니라. ‘바람이 고요하고 고요하다’云云한 것은 만약 一大經卷을 굴린다면 곧 밖으로의 境界 바람이 스스로 고요하고 안으로 智慧의 물이 말쑥하여 因緣을 따라 眞에 맡기며 좇는 곳마다 逍遙하는 것이 한 빈배가 물결따라 저절로 東西로 가는 것 같으며 높고 낮은 데를 따름과 같도다. 또한 ‘바람은 고요하다’云云한 것은 아름다운 물고기를 낚을 때엔 바람이 그쳐 수면이 잔잔(漣漣)함이요, 實相을 觀照할 때엔 마땅히 情을 잊으니 智慧의 물이 맑고 맑음이니라. 배는 고기를 낚는 도구요 가르침은 眞理를 깨닫는 法이니, 眞理를 깨닫는 자가 마음을 眞理 깨닫는 법에 오로지 할 것 같으면 반드시 眞理를 깨달을 기약이 있을 것이요, 고기를 낚는 자가 다만 낚시배 위에 있으면 반드시 고기를 낚을 때가 있으리라.

 

須菩提야 若善男子善女人이 於後末世에 有受持讀誦此經하는 所得功德를 我若具說者면 或有人이 聞하고 心則狂亂하야 狐疑不信하리라

수보리야,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앞으로 오는 말세에 이 경을 받아지니며 읽고 외워서 얻는 공덕을 내가 다 갖추어 말한다면, 혹 어떤 사람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몹시 산란하여 의심하고 믿지 않으리라.

 

 

須菩提야 當知是經은 義도 不可思議며 果報도 亦不可思議니라

수보리야, 마땅히 알아라. 이 경은 뜻도 가히 생각할 수 없으며 과보도 또한 생각할 수 없느니라.”

설의 廣讚持經說經之功德을 不可得而思議라하시고 乃云所得功德을 我若具說者면 或有人이 聞하고 心卽狂亂하야 狐疑不信이라하시며 乃至云果報도 亦不可思議라하시니 聞經不信受하면 良藥이 現前不知服이요 果報不思議여 服來平地에 便升仙이로다

“經을 가지고 經을 說하는 功德은 가히 생각할 수 없다.”고 널리 찬탄하시고, 이에 이르러 “얻을 바 功德을 내가 다 갖추어 말한다면 或 어떤 사람은 듣고 마음이 散亂하여 의심하고 믿지 않으리라”하시며 “乃至 그 果報도 또한 생각할 수 없느니라”하시니 經을 듣고도 믿어 지니지 않으면 좋은 약이 앞에 있어도 먹을 줄 모름이요. 果報도 생각할 수 없다 함이여! (좋은 약을) 먹으면 平地에서 당장 神仙이 되어 오름이로다.

야부 各各眉毛眼上橫이로다

各各의 눈썹은 눈 위에 가로놓여 있도다.

설의 佛所說法은 只說得眼上眉毛시니 若是眼上眉毛인댄 生而固有라 誰獨且無리오

부처님이 설하신 法은 다만 눈 위의 눈썹을 말한 것이니, 만약 눈 위의 눈썹이라면 나면서부터 본래로 있음이라.

누군들 홀로 없으리오.

야부 良藥은 苦口요 忠言은 逆耳라 冷暖自知가 如魚飮水로다 何須他日에 待龍華리오 今朝에 先授菩提記로다

좋은 약은 입에는 쓰고

충성스런 말은 귀에 거슬림이라.

차고 더움을 스스로 아는 것은

고기가 물 마심과 같으니

어찌 모름지기 다른 날에

龍華世界를 기다리리오.

오늘 아침에 벌써 菩提의 授記를 받음이로다.

설의 旣皆同有인댄 聞不信受는 怎麽요 只爲太近難曉니라 雖然如是나 飮?隨時에 飢飽自知라 伊麽則人人이 位同毘盧요 一一同居寂光이니 何待龍華記莂이리오 擧足卽是寂場이로다 以本分으로 論之則理合如斯어니와 若據今時하야 論之則此經이 如良藥하야 服來에 萬病消라 超然作金仙이언마는 只是不肯下口요 亦如忠言하야 信受에 自知非라 能爲衆中尊이언마는 只是不肯信受니라 唯有利根人은 言下에 自知非하야 一聞에 能總持하리니 鯤鯨이 飮海水라 位同大覺已이니 極果를 更何疑리오 果報不思議라하시니 誠哉라 佛所說이여

이미 다같이 갖고 있지만 듣고도 信受하지 아니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단지 너무 가까이 있어서 알기 어려움이니라.

비록 이와 같으나 마시고 먹는 것은 때를 따르는 것이며 주리고 배부름은 스스로 아는 것이로다. 이러한즉 사람사람의 지위는 비로자나불과 같고 낱낱이 寂光土(佛國土)에 함께 있으니 어찌 龍華의 기별(授記)을 기다리리오. 발을 들면 곧 이곳이 寂光의 道場이로다. 本分으로써 논한다면 이치가 합당히 이와 같거니와 만약 今時(新熏:현재의 입장)를 들어 논한다면 이 經은 마치 좋은 약과 같아서 먹으면 만병이 없어짐이라. 超然히 金仙(佛)을 짓건만 다만 기꺼이 입에 넣지 않음이요. 또한 충언과 같아서 信受하면 스스로 그릇됨을 알도다. 能히 大衆의 尊重함이 되건만 다만 기꺼이 信受하지 않느니라.

오직 영리한 사람은 言下에 스스로 그른 줄을 알아서 한번 둘으면 能히 다 가지리니 고래(鯤鯨)가 바닷물을 마심과 같도다. 그 지위가 大覺과 같거니와 지극한 果報를 다시 어찌 의심하리오. “果報가 不可思議하다”하시니 眞實하도다! 부처님의 說하심이여!

 

第十七 究竟無我分(끝까지 我가 없음)

爾時에 須菩提가 白佛言하사대 世尊하 善男子善女人이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하니는 云何應住며 云何降伏其心하리잇고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였으니, (깨달은 마음을) 어떻게 마땅히 머물며 어떻게 그(번뇌의) 마음을 항복받으리까.”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若善男子善女人이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는 當生如是心이니 我應滅度一切衆生호리라 滅度一切衆生已하야는 而無有一衆生도 實滅度者니라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였으면 마땅히 이와 같은 마음을 낼지니, 내가 응당 일체 중생을 멸도하리라. 일체 중생을 멸도하고 나서는 한 중생도 멸도함이 없느니라.

설의 滅度一切衆生은 不同二乘하야 悲化含生이요 無一衆生滅度는 智冥眞際하야 不生於化니 此當安住降心也니라

一切衆生을 滅度한다는 것은 二乘과 같지 않아서 慈悲로써 모든 衆生(含生)을 敎化함이요. 한 중생도 滅度함이 없다는 것은 智慧가 眞際에 명합해서 敎化했다는 생각을 내지 않음이니 이것이 마땅히 降伏한 마음에 安住하는 것이니라.

 

야부 有時에 因好月하야 不覺過滄洲로다

어떤 땐 달이 하도 좋아서 滄洲 지나가는 줄도 몰랐도다.

설의 駕起鐵船入海來하니 釣竿揮處에 月正明이로다 性愛蟾光寒照影하야 滄溟過來渾不覺이로다 更知道어다 途中에 却憶靑山事하니 終日行行不知行이로다

鐵船을 끌고 바다에 들어가니 낚싯대 드리운 곳에 달이 환히 밝도다. 性品이 달빛에 차갑게 비치는 그림자를 사랑하여 滄溟을 지나도록 혼연히 깨닫지 못했도다.

다시 알지어다. 途中에 도리어 靑山의 일을 기억하니 종일토록 行하고 行하여도 그 行함을 알지 못하도다.

야부 若問云何住인댄 非中及有無라 頭無纖草蓋하고 足不履閻浮로다 細似隣虛析이요 輕如蝶舞初로다 衆生滅盡知無滅하니 此是隨流大丈夫로다

만일 어떻게 住하는가 묻는다면,

中도 아니고 有, 無도 아님이라.

머리엔 작은 풀도 덮지 않고

발은 閻浮提(南贍部洲)도 밟지 않았도다.

가늘기는 작은 먼지를 쪼갠 듯하고

가볍기는 나비춤의 날개짓과 같도다.

衆生을 滅盡하되 滅함이 없음을 알면

이는 流를 따르는 大丈夫로다.

설의 要識眞住處인댄 非中及有無라 脫然無所托하니 鹿重淨無痕이로다 靑山에 留不得이어니 紫陌에 豈能容이리오 化生而無化하니 隨流大丈夫로다

참된 住處를 알고자하면 中 및 有無가 아니로다. 탈연하여 의탁할 것이 없으니, 거칠고 무거운 것(煩惱)이 다 淸淨해져서 흔적이 없음이로다.

靑山에도 머물지 않거니와 어찌 도시(紫陌)를 용납하겠는가. 衆生을 敎化하되 敎化함이 없으니 이는 流를 따르는 大丈夫로다.

 

何以故오 須菩提야 若菩薩이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이면 卽非菩薩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니라.

 

所以者가 何오 須菩提야 實無有法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니라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수보리야, 실로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것이 아니니라.

설의 因甚道要須不生於化오 若謂我能度生하며 我是發心者라하면 我人이 競作하야 能所紛然이라 卽非菩薩이니라 我能我是를 因甚道非菩薩고 實際理地엔 曾無伊麽事니 我人이 頓盡하고 能所俱寂하야사 方與實際로 相應去在니라

무엇 때문에 모름지기 敎化하는 생각을 내지 않아야 하는가.

만약 내가 能히 衆生을 제도하며 내가 발심한 사람이라 말하면 我와 人이 다투어 지어져서 能所가 어지러워지게 되어 곧 菩薩이 아님이니라. 나는 能하고 나는 옳다고 함을 왜 菩薩이 아니라고 하는가. 實際의 眞理 그 자리에는 일찍 이러한 일이 없으니 我와 人이 단번에 다하고 能所가 함께 고요해져야 바야흐로 實際와 더불어 서로 맞기 때문이니라.

 

야부 少他一分인들 又爭得이리오

저 하나마저 없는데 또 어찌 얻으리오.

설의 我人頓盡하고 能所俱寂이 功極則不無나 以實而觀컨댄 又爭得也리오

我, 人이 단번에 다하고 能所가 함께 고요해짐은 功이 지극하여 곧 없지 않으나 實際로써 관하건대 또한 어찌 얻으리오.

야부 獨坐翛然一室空하니 更無南北與西東이라 雖然不借陽和力이나 爭奈桃花一樣紅이리오

홀로 소연히 一室이 空한 데 앉았으니

다시 南北과 東西도 없음이라.

비록 그렇게 화창한 봄날의 힘을 빌리지 않았으나

복숭아꽃이 온통 붉음은 어이하리오.

설의 脫然物外에 更無栖泊處하니 莫把此境云究竟하라 敢道此亦猶未在니 雖然不用苦鍛鍊이나 自有本地風光爛이로다

탈연(脫然)히 物 밖에 다시 깃들어 머물 곳이 없으니, 이 境界를 잡아서 최고(究竟)라고 이르지 말라. 감히 말하건대 이것도 또한 오히려 부족하니 비록 그렇게 괴롭게 鍛鍊하지 아니하여도 저절로 本地風光의 찬란함이 있음이로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요 如來가 於然燈佛所에 有法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不아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연등불 처소에서 法이 있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냐.”

규봉 降怨王이 請然燈佛하야 入城에 城中長幼가 盡迎할새 路泥어늘 善慧가 布髮한대 佛與授記하시다 故擧此問이니라 二는 斷疑念이라

降怨王(원수를 降伏받는 왕)이 然燈佛을 청하여 성에 들어오심에 성중의 모든 사람이 다 영접할 때 길이 질퍽거리므로 善慧童子가 머리를 풀어서 펴시니 부처님이 授記를 주셨도다. 그러므로 이 물음을 든 것이니라.

㉵二. 의심하는 생각을 끊음이라.

不也니이다 世尊하 如我解佛所說義컨댄 佛이 於然燈佛所에 無有法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이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이 설하신 뜻을 이해하기에는 부처님이 연등불 처소에서 법이 있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佛言하사대 如是如是하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그렇다. 그렇다.”

설의 上明菩薩의 無我之意하시고 今擧自己의 無所得하사 重明無我之意하시니 佛이 欲明無得하사 假以有得問也어시늘 空生이 善契佛意하야 答以無得하니 可謂好知音也로다 再歎如是를 須着眼하라 滿口許他見家風이로다

위에서는 菩薩의 無我의 뜻을 밝히시고, 지금은 自身의 얻음 없음(無所得)을 들어서 거듭 無我의 뜻들 밝히시니라. 부처님께서 얻음 없음을 밝히고자 하여 거짓으로 얻음이 있는 것으로 물으셨는데 空生이 잘 부처님 뜻에 잘 계합하여 無得(얻음 없음)으로써 答하시니 可謂 좋은 知音者로다. 재차 ‘如是’라고 讚歎한 것을 着眼하라. 입에 가득히 저 家風 본 것(참다운 眞理를 깨달은 것)을 허락하도다.

 

야부 若不同床睡면 爭知紙被穿이리오

만약 같은 침상에서 잠자지 않았으면 어찌 紙被(종이 속옷)가 뚫어진 줄을 알았으리오.

설의 同聲相應이요 同氣相求로다

같은 소리는 서로 應함이요, 같은 氣運은 서로 구함이로다.

야부 打鼓弄琵琶가 相逢兩會家로다 君行楊柳岸하고 我宿渡頭沙로다 江上에 晩來疎雨過하니 (疎는 一作初라) 數峯이 蒼翠接天霞로다

북치는 이와 琵琶 타는 이가

둘이 한집에 모였도다.

그대는 버들 언덕을 거닐고

나는 나루터에서 잠자도다.

강 위엔 늦은 성긴 비가 지나가고

두어 봉우리의 푸른빛은 하늘가 노을에 닿았도다.

설의 空生이 見世尊이여 打鼓人이 逢弄琴者로다 見來에 歌何事오 君行楊柳我渡頭로다 要識渡頭光景麽아 雨過雲收江上晩하니 數峯蒼翠接天霞로다 箇中無限淸意味를 江上一句로 都說破로다

空生이 世尊을 봄이여, 북을 치는 이가 琵琶 타는 이을 만났도다. 마주 보며 무슨 일을 노래할까. 그대는 버들 언덕을 거닐고 나는 나루터에 있도다. 나루터의 광경을 알고저 하는가? 비가 지나가고 구름이 걷히며 강 위가 저무르니 두어 봉우리의 푸른빛이 하늘이 노을에 닿았도다. 그 속의 無限하고 맑은 의미를 강 위의 한 구절로 모두 說破했음이로다.

須菩提야 實無有法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

수보리야, 실로 법이 있어서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음이 아니니라.

 

須菩提야 若有法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인댄 然燈佛이 則不與我授記하사대 汝於來世에 當得作佛호대 號釋迦牟尼어니와 以實無有法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일새 是故로 然燈佛이 與我授記하사 作是言하사대 汝於來世에 當得作佛하야 號를 釋迦牟尼라하시니

수보리야, 만약 法이 있어서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을진댄 연등불이 곧 나에게 수기를 주면서 “너는 내세에 마땅히 부처를 이루리니 호를 석가모니라 하라”고 하시지 않았으려니와 실로 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아니므로 이 까닭에 연등불이 나에게 수기를 주시면서 말씀하시되 “너는 내세에 마땅히 부처를 이루리니 호를 석가모니라 하리라”고 하시니라.

설의 得失之言이 只緣迷悟나 而其實則迷介什麽며 悟介什麽오 迷悟旣無인댄 得何曾得이며 失何曾失이리오 旣然不可言有得이라 亦復不應言無得하니 我佛見然燈도 了應如是知니라

得과 失의 말은 다만 迷와 悟를 인연했으나 그 실인즉 迷한 것은 무엇이며 悟한 것은 또 무엇인가. 迷와 悟가 이미 없을진대 얻는다 한들 어찌 일찍이 얻는 것이며, 잃었다 한들 어찌 일찍이 잃은 것이리오. 이미 그렇다면 가히 얻음이 있다고 말할 수 없음이라. 또한 다시 얻음이 없다고도 말할 수 없음이니 우리 부처님이 然燈佛을 본 것도 마침내 응당히 이와 같이 알지니라.

야부 貧似笵丹이나 氣如項羽로다

가난하기는 范丹(후한의 청빈한 선비)같으나 그 기개는 항우와 같도다.

설의 貧則貧矣나 自有衝天意氣로다

가난하기는 몹시 가난하여도 스스로 충천하는 意氣가 있도다.

야부 上無片瓦하고 下無卓錐로다 日往月來에 不知是誰오 噫라

위로는 한 조각 기와도 없고

아래로는 송곳 꽂을 데도 없도다.

해가 지고 달이 떠도

알 수 없어라. 이 누구인가.

아! 슬프다

설의 淸貧無所有나 意氣는 不敢籠이로다

淸貧하여 가진 것이 없으나 그 意氣는 감히 숨길 수가 없도다.

 

何以故오 如來者는 卽諸法如義니라

무슨 까닭인가 하면 여래라 함은 곧 모든 법이 여여하다는 뜻이니라.

설의 旣得如來號인댄 必得菩提道어늘 因甚道無所得고 得名如來無別意라 以了諸法是眞如니라 眞如平等性淸淨하니 所得을 何以論其中이리오

이미 如來의 호를 얻었으면 반드시 菩提道를 얻었을 것이거늘 어찌하여 無所得을 말하는가. 如來란 이름을 얻음은 별뜻이 없음이라. 모든 法이 眞如임을 了達할 뿐이니라. 眞如는 平等하여 그 性德이 淸淨하니 그 얻은 바를 어찌 그 가운데서 논하리오.

 

야부 ○住住하라 動著則三十棒호리라

○ 住하고 住하라(가만히 있으라). 움직이면 三十방을 치리라.

설의 只如眞如平等底道理를 作麽生道오 ○生佛이 幷沈하고 自他俱泯하니 天地地天天地轉이요 水山山水水山空이로다 雖然如是나 法法이 本來安本位하니 誰喚燈籠作露柱리오 伊麽則不應動着이니 動着則三十棒호리라

다만 저 眞如平等의 道理를 어떻게 말할 것인가. ○衆生과 부처가 다 함께 없어지고 自他가 다 함께 없어지니 하늘이 땅이요 땅이 하늘이라 하늘과 땅이 뒤바뀌고, 물이 산이고 산이 물이라 물과 산이 다 空함이로다. 비록 이와 같으나 法과 法이 本來의 위치에 안치해 있으니 누가 燈籠(內 또는 體)을 불러 露柱(外 또는 用)라고 하리오. 그러한즉 마땅히 움직이지 말지니 움직인즉 三十방을 치리라.

야부 上是天兮下是地요 男是男兮女是女로다 牧童이 撞着牧牛兒하니 大家齊唱囉囉哩로다 是何曲調오 萬年歎이로다

위는 하늘이고 밑은 땅이라,

남자는 남자이고 여자는 여자로다.

목동이 목동을 만나니

大衆이 다 함께 라라리~ 부르도다.

이 무슨 곡조인가. 만년의 즐거움이로다.

설의 天天地地何曾轉이리오 水水山山各宛然이로다 百億活釋迦가 醉舞春風端하니 韻曲이 自然이라 誰不解和리오 萬年歎曲이 緣何有오 人人이 自有無生樂이로다

하늘은 하늘이고, 땅은 땅이라, 어찌 일찍이 뒤바뀌리오. 물과 물, 산과 산이 각각 宛然함이로다. 百億의 살아있는 석가(釋迦)가 春風끝에 취하여 춤을 추니 韻曲이 저절로 그러함이라. 누가 화답할 줄 모르리오. 萬年의 즐거운 곡이 무엇으로 인하여 있는가. 사람사람이 저절로 無生樂이 있음이로다.

 

若有人이 言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하면 須菩提야 實無有法佛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하니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길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하면 수보리야, 실로 법이 있어서 부처님이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음이 아니니라.

 

須菩提야 如來所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는 於是中에 無實無虛하니라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이 가운데는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느니라.(제 14 分의 무실무허와 비교할 것)

설의 前言佛하사 以明無得無實하시고 此言法하사 以明所得無虛하시니 若論佛義인댄 猶如太虛하야 廓然無諸相하며 寂然無去住하야 盡十方世界가 都盧是一身이라 更無二相하니 傳介什麽며 得介什麽리오 所以로 道호대 實無有法如來得阿耨菩提等이라하시니라 若論法義인댄 如彼太虛에 白日相似하야 萬像森羅가 差別全身이요 見聞覺知가 應用無妨이라 這裏엔 說聽도 亦不無며 傳得도 亦不無니라 所以로 道호대 無實無虛라하시니 雖然無實이나 亦非無實也니라

앞에서는 부처님을 말씀하시어 無得과 無實을 밝히시고 여기서는 法을 말하사 얻은 바가 헛됨이 없음을 밝히시니, 만약 부처님의 뜻을 논할진댄 마치 큰 虛空과 같아서 廓然히 모든 相이 없으며 寂然하여 가고(去) 住함이 없어서 온 十方世界가 모두 한 몸인 것이라, 다시 두 相이 없으니 傳한다는 것은 무엇이며 얻는다는 것은 무엇이리오. 그러므로 말하되 실로 法이 있어서 如來가 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얻음이 아니라고 하시니라. 만약 법의 뜻을 논함인댄 저 큰 虛空의 밝은 해와 같아서 森羅萬像이 그대로 差別된 온전한 몸이요, 見聞覺知가 應用함에 방해가 없음이라. 이 속에는 說하고 들음도 역시 없지 않으며 傳하고 얻음도 또한 없지 않음이로다. 그러므로 말하되 無實無虛라 하시니 비록 그러히 實답지 못함이나 또한 實답지 못하지도 않느니라.

 

야부 富嫌千口少요 貧恨一身多로다

부유하면 千 입도 적다고 싫어하고, 가난하면 한 몸도 많다고 한탄하도다.

설의 實而無實이요 虛而無虛로다

實답되 實다움이 없음이요, 헛되되 헛되지 않음이로다.

야부 生涯如夢若浮雲하니 活計都無絶六親이로다 留得一雙靑白眼하야 笑看無限往來人이로다

生涯가 꿈과 같고 뜬구름과 같으니

살 길을 모두 잃어 六親이 끊어졌도다.

오직 한 雙의 靑白眼을 얻어서

무한한 往來人을 웃으며 보도다.

설의 莫怪寥寥無一物하라 伊家活計自如然이로다 莫謂一向空無物하라 左之右之應無虧로다

寥寥하여 한 物件도 없음을 괴이하게 여기지 말라. 너의 집 살림살이가 本來로 그러하도다. 한결같이 空하여 物이 없다고 말하지 말라. 좌로 가나 우로 가나 應함에 모자람이 없도다.

 

是故로 如來가 說一切法이 皆是佛法이라하노니

그러므로 여래가 설하되 ‘일체법이 다 불법이라’ 하시니

설의 前言無實則法法이 無自性이라 內而根身과 外而器界가 相相이 皆爲虛妄하야 無可指陳이요 此言無虛則法法이 依位住하야 鶴長鳧短하고 松直棘曲하야 相相이 元眞이라 無非實相이니 牛佛馬佛과 男佛女佛이 不相借借하야 各受法樂이로다

앞에서는 無實을 말한 즉 法과 法이 自性이 없어서 안으로 六根의 몸(根身)과 밖으로의 世界(器界)가 相과 相이 모두 虛妄해서 가히 (이것이라고) 가르칠 것이 없음이고 여기서는 無虛를 말한즉 法과 法이 다 法位에 住하여 학다리는 길고 오리다리는 짧으며 소나무는 곧고 가시덩굴은 굽어서 모양과 모양이 元來로 진실함이라, 實相 아님이 없으니, 소부처, 말부처, 남부처, 여부처가 서로 빌리지 않고 각기 法樂을 수용함이로다.

야부 明明百草頭에 明明祖師意로다

분명분명한 百草頭에 분명분명한 祖師의 뜻이로다.

설의 祖意明明百草頭니 百草頭上에 好開眸어다

祖師의 뜻이 百草頭에 분명분명하니 사물 하나하나 위에서 좋게 눈을 뜰지어다.(一切法이 皆是佛法)

야부 會造逡巡酒하고 能開頃刻花로다 琴彈碧玉調요 爐煉白硃砂로다 幾般伎倆을 從何得고 須信風流出當家니라

逡巡酒를 만들 줄 알고

頃刻花를 能히 피우도다

거문고로 碧玉의 곡조를 타고

화로에 白硃砂를 精鍊하도다.

몇 가지의 기량을 어디서 배웠는가.

모름지기 風流가 自己 집에서 흘러남을 믿을지니라.

설의 造酒開花여 伎倆이 多端하니 如是伎倆이 非從他得이로다

술을 빚고 꽃을 피움이여. 기량이 여러 가지이니 이와 같은 재주는 다른 이에게서 얻음이 아니로다.

須菩提야 所言一切法者는 卽非一切法일새 是故로 名一切法이니라

수보리야, 말한 바 일체법이란 곧 일체법이 아님일새 그러므로 일체법이라 이름하느니라.

설의 前言無實無虛則捏取放開요 此言法卽非法則放開捏取로다 伊麽則佛則是法이요 法則是佛이니 佛法이 無二라 道方現前이로다

앞에서는 無實無虛를 말한즉 잡았다가 놓음이요, 여기서 法이 곧 法 아님이라고 말한 것은 놓았다가 다시 잡음이로다. 이러한즉 佛이 곧 法이요 法이 곧 佛이니 佛과 法이 둘이 아님이라. 道가 바야흐로 現前함이로다.

 

야부 上大人丘乙己로다

上大人 丘乙己로다.(孔子님이로다. 聖人이로다.)

설의 斯道之體가 最尊極無上하고 廣博無邊表하며 混空爲體性하야 無物爲等論이니 所以로 道上大人丘乙己니라 上大人之言은 世稱孔聖之談이나 然이나 此乃天下之公名이니 豈一人之獨稱哉아 但孔聖이 深體乎此하야 而其德之大成이 未嘗有間然故로 稱之云然이니 如所謂佛者는 妙契天眞佛體故로 稱之爲佛也니라

이 道의 體는 가장 높고 지극하여 위가 없고 지극히 넓어서 끝이 없으며 온 虛空으로 體性을 삼아서 어떤 物件과도 짝할 수 없으니, 그러므로 말하되 ‘上大人 丘乙己’로다. 上大人이란 세상에서 孔子 聖人을 말하나 이것은 天下의 公名이니, 어찌 한사람만을 홀로 일컫는 것이겠는가. 다만 공자 聖人이 깊이 이것을 體得하여 그 德을 크게 이룬 것이 일찍이 끊임이 없는 故로 그렇게 稱함이니, 저 이른바 佛이란 것도 天眞佛體에 妙하게 계합한 까닭에 佛이라 함이니라.

야부 是法非法不是法이여 死水藏龍活鱍鱍이요 是心非心不是心이여 逼塞虛空古到今이로다 秪者是라 絶追尋이롸다 無限野雲을 風捲盡하니 一輪孤月이 照天心이로다

是法과 非法은 이 法이 아님이여,

죽은 물에 잠긴 용이 活鱍鱍하도다.

是心과 非心은 모두 是心이 아님이여,

虛空을 가득 채우고 옛부터 오늘에 이르렀도다.

다만 이것일 뿐이라, 달리 찾을 게 없도다.

한없는 들구름을 바람이 다 거두니,

둥근달만이 하늘 한가운데서 비춤이로다.

설의 法則是心不是法이여 死水藏龍活鱍鱍이요 法旣非法心亦非여 非心心體塞天地로다 塞天地여 今古應無墜하야 分明在目前이로다 在目前이며 何用區區謾追尋이리오 是非雲盡하야 心法雙忘하니 大人面目이 當陽顯赫이로다

法은 곧 마음이고 法이 아님이여, 죽은 물에 잠긴 용이 活鱍鱍하게 움직임이요. 法은 이미 法이 아니고 마음 또한 아니니, 非心인 心體가 天地에 가득찼도다. 天地를 메움이여, 지금과 옛날에 응당 떨어짐이 없이 分明히 눈앞에 있음이로다. 눈앞에 있음이여, 어찌 구구하게 부질없이 따로 찾을 것인가. 是非의 구름이 다하여 마음과 法을 쌍으로 잊으니 大人의 面目이 햇빛에 나와 밝게 빛남이로다.

 

須菩提야 譬如人身長大하니라 須菩提가 言하사대 世尊하 如來가 說人身長大가 卽爲非大身일새 是名大身이니이다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사람의 몸이 장대함 같느니라.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설한 사람몸의 장대함도 곧 큰몸이 아니고 그 이름이 큰몸입니다.”

설의 此身이 無限量하고 無邊表하야 無一物可等伊며 無一物能蓋伊니 設道大同須彌라도 早已局限他了也며 量同太虛라도 亦局限他了也니라 因甚道非身고 本是尊貴人이 不居尊貴位니 須彌頂上에 尋不遇라 芳草岸頭에 或相逢이로다 是名爲大身이여 令人特地愁라 摩竭에 爲之曾掩關하고 毘耶에 爲之口掛壁이로다

이 몸은 限量이 없고 끝이 없어 한 物件도 그것과 같은 것이 없으며 一物도 能히 그것을 덮을 수 없음이니, 設使 크기가 須彌山과 같다고 말하더라도 벌써 그것에 국한한 것이며 그 양이 큰 虛空과 같더라도 그것에 국한된 것이니라. 무엇을 인하여 몸이 아니라고 말하는가. 本來 존귀한 사람은 존귀한 위치에 머물지 않았으니 須彌頂上에서 찾아봐도 만나지 못함이라. 芳草 우거진 언덕에서 或 서로 만남이로다. 이름이 큰 몸이라 함이여. 사람으로 하여금 특별히 서글프게 하도다. 마갈타(摩竭陀)에서 그를 爲해 일찍이 문을 닫았고^ 비야리(비야리) 성에서는(유마거사 있던 곳) 그를 爲해 입을 벽에 걸었음이로다

야부 喚作一物이라도 卽不中이니라

一物이라 해도 맞지 않도다.

설의 設道卽心卽佛이라도 爭奈非心非佛이며 設道一物이라도 亦非一物이로다

設使 卽心이 卽佛이라 말하더라도 非心非佛임을 어찌 할 것이며 設使 一物이라 말하더라도 또한 一物이 아님이로다.

야부 天産英靈六尺軀하니 能文能武善經書로다 一朝에 識破孃生面하니 方信閑名이 滿五湖로다

하늘이 뛰어난 六尺의 몸을 낳으시니

文에도 能하고 武에도 能하며 經書도 잘 하도다.

하루아침에 本來面目을 깨뜨리니

바야흐로 부질없는 이름들이

天下에 가득함을 믿겠도다.

설의 能文能武善經書하니 可謂天産之英靈이며 人間之俊傑이로다 然이나 只得雙眼圓明이요 未開得頂門正眼이니 識得大人面目然後에 許伊開得頂門正眼이니라 伊麽則目前所作이 只是閑事며 所聞도 亦只是閑名이로다

文武에도 能하고 經書에도 밝으니 가히 이르되 하늘이 낳은 뛰어난 사람이며 人間中의 준걸이로다. 그러나 다만 두 눈이 두렷이 밝음을 얻은 것이요, 頂門(智慧眼)의 바른 눈은 얻어 열지 못했으니 大人의 眼目을 안 然後에야 저 頂門의 正眼을 열었음을 허락함이니라. 이러한즉 눈앞에서 짓는 것이 단지 부질없는 일이며 듣는 바도 또한 부질없는 이름들이로다.

 

須菩提야 菩薩도 亦如是하야 若作是言호대 我當滅度無量衆生이라하면 卽不名菩薩이니

수보리야 보살도 또한 이와 같아서 만약 이러한 말을 하되 ‘내가 마땅히 한량없는 중생을 멸도하리라’한다면 곧 보살이라 이름할 수 없음이니,

 

何以故오 須菩提야 實無有法名爲菩薩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야, 실로 법이 있어서 보살이라 이름하지 않느니라.

 

是故로 佛說一切法이 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라하노라

그러므로 부처님이 설하되 “일체법은 아도 없고 인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수자도 없다” 하느니라.

설의 始因空生問住降하사 敎以滅度而無滅하야 以明無住無我之意하사 令如是降心하며 如是安住也케하시고 次言實無有法如來得阿耨等이라하시고 又言一切法으로 以至云大身이 卽非大身하사 以明佛法道三이 皆空而無住하시고 此言菩薩도 亦如是로 至實無有法名爲菩薩하사 重明無住無我之意하사 乃云是故로 佛說一切法이 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라하시니 伊麽則現前天地日月과 萬像森羅로 以至二乘諦緣과 菩薩六度와 諸佛無上正等菩提히 一一無住하며 一一無相하며 一一淸淨하며 一一寂滅하며 一一如銀山鐵壁相似하야 無有一法도 容思議於其間矣니라

처음 空生의 住하고 降伏함에 대한 물음으로 인하여 衆生을 滅度하되 滅度함이 없어야됨을 가르쳐서 無住, 無我의 뜻을 밝히시어 이로 하여금 이와 같이 降伏하며 이와 같이 安住케 하시니라. 다음에는 實로 法이 있어서 如來가 阿耨菩提 等을 얻지 않았다 하시고 또한 一切法으로부터 큰 몸이 곧 큰 몸이 아니라고 한 데까지 이르러서 말씀하사 佛, 法, 僧 세 가지가 다 空하여 住함이 없음을 밝히셨다. 이어서 말씀하시되 菩薩도 또한 이와 같아서 실로 法이 있어 이름을 菩薩이라 이름하지 않는 데까지 말씀하사 거듭 無住, 無我의 뜻을 밝히셨다. 이에 이르되, 부처님께서 說하신 一切法은 我도 없고 人도 없으며 衆生도 없고 壽者도 없다 하시니라. 이러한즉 눈앞에 나타난 天地日月과 森羅萬像으로 二乘과 四諦와 十二因緣과 菩薩의 六度萬行과 諸佛의 無上正等 菩提에 이르기까지 낱낱이 無住며 낱낱이 無相하며 낱낱이 淸淨하며 낱낱이 寂滅하며 낱낱이 銀山鐵壁과 서로 같아서 한 法도 그 사이에 생각함을 용납할 수 없느니라.

 

야부 喚牛卽牛요 呼馬卽馬니라

소라고 부르면 곧 소이고, 말이라 부르면 곧 말이다.

설의 旣一一如銀山鐵壁相似인댄 作麽生出氣去오 喚牛卽牛요 呼馬卽馬니 法本是無라 道無라도 亦不乖法體며 法本是有라 道有라도 亦不乖法體니라

이미 낱낱이 銀山鐵壁과 같음인댄 무엇으로 기운을 내어 가겠는가. 소라고 부르면 곧 소이고 말이라 부르면 곧 말이니 法은 本來 없음이라. 없다고 말하여도 또한 法體를 어기지 않으며, 法은 本來 있음이라. 있다고 하여도 또한 法體를 어기지 않느니라.

야부 借婆衫子拜婆門하니 禮數周旋已十分이라 竹影이 掃階塵不動이요 月穿潭底水無痕이로다

노파의 적삼(婆衫子^)을 빌려 입고

노파의 문 앞에서 절을 하니

예의가 법도에 맞음이 이미 充分하도다.

대 그림자 뜰을 쓸어도 티끌은 움직이지 않고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물은 흔적이 없네.

설의 看取門前禮數儀하라 借來堂上婆子衫이라 有影掃階塵不動하니 當軒翠竹이 舞婆娑로다 有華透水水無痕하니 在天明月이 光炯曜로다 空耶아 有耶아 吾不稱斷이로다

문전에서 예의를 갖추는 거동을 보아라. 堂上의 노파옷을 빌려 입었도다. 그림자로 뜰을 쓸어도 티끌은 움직이지 않고, 툇마루의 푸른 대나무만 너울너울 춤을 추도다. 달빛이 물을 뚫으나 물에 흔적이 없고 하늘의 밝은 달은 그 빛이 밝도다. 없느냐 있느냐 나는 단적으로 말할 수 없음이로다.

규봉 二는 遮嚴土念이라 於中에 文二니 一이 明失念이라

國土를 莊嚴한다는 생각을 막음이라. 이 중에 두 가지니 ㉶一. 失念을 밝힘이라.(생각을 잃는 것)

須菩提야 若菩薩이 作是言호대 我當莊嚴佛土라하면 是不名菩薩이니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이런 말을 하되 ‘내가 마땅히 불국토를 장엄하리라’한다면 이는 보살이라 이름할 수 없음이니

 

何以故오 如來가 說莊嚴佛土者는 卽非莊嚴일새 是名莊嚴이니이다

무슨 까닭인가. 여래가 설한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고 그 이름이 장엄이니라.

 

須菩提야 若菩薩이 通達無我法者는 如來가 說名眞是菩薩이니라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무아의 法을 통달한 자이면 여래는 이를 참다운 보살이라 이름하느니라.

설의 前依度生하사 以明無我하시며 此依嚴土하사 復明無我하시고 乃云若菩薩이 通達無我法者는 如來가 說名眞是菩薩이라하시니 只如無我底道理를 作麽生道오 內不見有五蘊身하니 天地萬物이 爲一己로다 更有一道理하니 亦名無我法이라 寒山拾得이 兩相隨하니 在山在途影從形이로다 若使二人으로 如有我면 一在靑山一在途리라 作麽生通達고 智窮文殊之智源하야 權掛垢衣伊麽來하고 行窮普賢之行海하야 却粧珍御伊麽去니라

앞에서는 衆生濟度함을 의지하여 無我를 밝히시고 여기서는 佛土 莊嚴을 의지하여 다시 無我를 밝히시니, 이에 이르되 만약 菩薩이 無我의 法에 通達한 者면 如來는 참다운 菩薩이라 하느니라 하시니, 다만 저 無我의 道理를 어떻게 말할 것인가. 안으로 五蘊의 몸이 있음을 보지 않으니 天地萬物이 한 몸이 된다. 다시 한 道理가 있으니 또한 이름이 無我의 法이라. 寒山과 拾得이 두 사람이 서로 따르니 산에 있으나 집에 있으나 그림자가 形相을 좇음과 같도다. 만약 두 사람으로 하여금 我가 있었으면 한 사람은 靑山에 있고 한 사람은 길에 있으리라. 어떻게 通達했다 하는가. 智慧는 문수의 智慧 근원(智源)을 궁구하여 方便으로 때묻은 옷을 걸치고 이렇게 오며, 行은 普賢의 行海를 궁구하여 도리어 진귀한 것으로 꾸며 이렇게 가느니라.

야부 寒卽普天寒이요 熱卽普天熱이로다

추우면 온 하늘이 다 춥고 더우면 온 하늘이 다 덥도다.

설의 妙造文殊之智境하니 朔風이 冽冽에 霜雪이 漫天이요 高踏普賢之行門하니 熏風이 習習에 靑黃이 滿地로다

妙하게 文殊의 智慧 境界에 나아가니 삭풍이 매우 차서 서리와 눈이 하늘에 가득함이요, 높은 普賢의 行門을 밟으니 훈풍이 은은히 불어와 푸르고 노란 빛이 땅에 가득하도다.

야부 有我元無我하니 寒時에 燒軟火요 無心似有心하니 半夜에 拾金針이로다 無心無我를 分明道하니 不知道者가 是何人고 呵呵

我가 있음은 元來 我가 없음이니

추울 때는 軟火^를 태우고

無心은 有心과 같아서

한밤중에 金針을 줍도다.

無心과 無我를 分明히 일렀으니

이를 줄 모르는 자가 누구인가? 하하-.

설의 本是無我人이로대 度生權立我하니 寒時軟火가 不是可厭이요 內同枯木호대 假現威儀하니 夜半拾針이 不是無知로다 分明道出無我理하니 不知道者是何人고 呵呵是有我아 無我아 有心가 無心가

本來 我人이 없으되 衆生을 제도하기 爲하여 方便으로 我를 세웠으니 추울 땐 불 때는 것이 싫지 않고, 안으로는 枯木과 같으나 거짓으로 威儀를 나타내니 한밤중에 바늘을 줍는 것은 無知함이 아니로다. 分明히 無我의 이치를 말하니 이르지 못하는 者가 누구인가. 하하, 이것이 有我인가 無我인가. 有心인가 無心인가.

 

第十八 一體同觀分(한몸으로 동일하게 봄)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가 有肉眼不아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가 有肉眼이니이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육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육안이 있습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가 有天眼不아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가 有天眼이니이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천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천안이 있습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가 有慧眼不아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가 有慧眼이니이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혜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혜안이 있습니다.”

 

根本의 智慧로써 眞理를 비춤이라. ㉷四. 法眼이라.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가 有法眼不아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가 有法眼이니이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법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법안이 있습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가 有佛眼不아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가 有佛眼이니이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불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불안이 있습니다.”

설의 上明無住無我之意하시고 此엔 歷擧五眼하사 以明如來知見이 廣大纖悉하야 沙界衆生의 染淨善惡差別心行을 不可得而掩也니라 意在令捨顚倒知見하야 契乎無住大道也니 若使衆生으로 住無住하면 佛眼이 雖明이나 覰不見이니라

위에서는 無我, 無住의 뜻을 밝히시고 지금엔 五眼을 낱낱이 들으시며 如來의 知見이 광대하고 섬세하게 갖추어져서 恒河沙 같은 世界의 衆生의 染淨, 善惡인 差別의 心行을 가히 막을 수 없음을 밝히시니라. 이로 하여금 顚倒된 知見을 버리고 無住의 大道에 계합하게 하는 데 뜻이 있는 것이다. 만약 衆生으로 하여금 無住에 住하게 하면 佛眼이 비록 밝으나 엿보지는 못하느니라.

 

야부 盡在眉毛下로다

(그 五眼이) 모두 눈썹 밑에 있다.

설의 如來五種眼이 盡在眉毛下하니 張三一雙眼도 亦在眉毛下로다 旣然同在眉毛下인댄 應用亦應無兩般이로다

如來의 다섯 가지 눈은 모두 눈썹 밑에 있으며 장씨의 셋째 아들(그 누구나)도 한雙의 눈은 역시 눈썹 밑에 있도다. 이미 그렇게 모두 눈썹 밑에 있음인댄 應用하는 데 應當 두 가지가 있을 수 없음이로다.

야부 如來는 有五眼이요 張三은 只一雙이라 一般分皀白하야 的的別靑黃이로다 其間些子爻訛處는 六月炎天에 下雪霜이로다

如來는 五眼이 있음이요

張三(우리들)은 다만 한雙뿐이라

똑같이 흑(皀)과 白을 나누고

分明히 靑과 黃을 分別하도다.

그 사이에 조금 다른 것은

六月 염천에 눈서리가 내림이로다.

설의 五眼一雙이 名雖異나 誰將皀白謂靑黃가 春來에 同見芳草緣이요 秋來에 同見黃葉彫로다 佛之所以異於人은 熾然作用無其蹤이시니 無其蹤이여 六月炎天에 下雪霜이로다

五眼과 한雙이 비록 이름은 다르나 누가 장차 黑白을 가지고 靑黃이라 하겠는가. 봄이 오면 다같이 芳草가 푸르름을 보고 가을이 오면 다같이 黃葉이 시드는 것을 보도다. 부처님이 다른 사람과 다른 까닭은 熾然히 작용하되 그 蹤迹(자취)이 없으시니, 그 蹤迹이 없음이여, 六月 炎天에 눈서리가 내림이로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恒河中所有沙를 佛說是沙不아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가 說是沙니이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저 항하 가운데 있는 모래를 부처님이 설하신 적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그(항하의) 모래를 말씀하셨습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一恒河中所有沙하야 有如是沙等恒河어든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 한 항하에 있는 바 모래수와 같이 이렇게 많은 항하가 있고

 

是諸恒河所有沙數佛-世界가 如是寧爲多不아 甚多니이다 世尊하

이 모든 항하에 있는 바 모래수만큼의 불세계가 있다면 이는 얼마나 많음이 되겠느냐. 심히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爾所國土中所有衆生이라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저 국토 가운데 있는 바 중생의

 

若干種心을 如來悉知하노니

가지가지 종류의 마음을 여래가 다 아느니라.

설의 如來心地月이 照臨諸刹海하시니 刹海가 都一撮이요 諸心이 一點雲이로다

如來 心地의 달이 모든 刹海를 비추시니 찰해가 모두 하나로 묶음이요 모든 마음이 한 점의 구름이로다.

 

야부 曾爲蕩子라 偏憐客이요 慣愛貪盃라 惜醉人이로다

일찍이 蕩子(나그네)가 됐음이라. 나그네를 특별히 생각함이요. 술을 늘 좋아했음이라. 취한 사람을 애석하게 여기도다.

설의 客作他鄕이여 立令立屛事可哀요 醉迷衣寶여 痴迷情可愍이로다 循塵背眞覺하야 枉趣輪轉事如然이라 我佛이 曾經今故愍하사 慈眼普照輪中人이로다

타향에서 나그네 됨이여, 비틀거리는 일이 가히 애석하고, 醉하여 옷속의 보배를 잊어버림이여, 어리석고 迷한 情이 가히 불쌍하도다. 塵(妄想)을 쫒으며 眞覺(참된 깨달음)을 등지니 輪廻에 잘못 나아감이 이와 같도다. 우리 부처님이 일찍이 경험하여 짐짓 지금에 불쌍히 여기사 慈悲의 눈으로 輪廻中에 있는 사람들을 널리 비추심이로다.

야부 眼觀東南이요 意在西北이로다 將謂猴白이리니 更有猴黑이로다 一切衆生一切心이여 盡逐無窮聲與色이로다 喝

눈은 東南으로 보고 뜻은 西北에 있도다.

猴白이라 말하려 했는데 다시 猴黑이 있음이로다.

一切衆生의 一切心이여,

모두가 다 한없는 聲과 色을 쫓아다니도다, 喝!

설의 白雲兒向萬里飄나 從來로 不忘靑山父로다 將謂牟尼是大悲러니 更有毘盧最是慈라 乃何遊子가 不知返하야 累他慈父送人尋고 不知還이여 長在迷途逐風波로다 喝金剛寶劍이 倚天寒하니 一揮能摧萬仞峯이라 徧界魔軍이 從此落하니 有何精魅하여 闖其中이리오

흰구름이 만리를 向해서 흘러가나 從來로 靑山의 아비를 잊지 않았도다. 釋迦牟尼를 大悲라고 이르더니 다시 비로자나를 가장 慈悲롭다 하도다. 이에 떠돌던 아이가 돌아올 줄 몰라서 여러 번 慈父가 사람을 보내어 찾게 하는가. 돌아올 줄 모름이여. 오랫동안 길을 잃고 風波를 쫓았음이로다. 喝! 金剛寶劍이 하늘을 의지해서 차가우니 한번 휘두르면 能히 만길의 봉우리를 자르도다. 온 世界의 魔軍들이 이로부터 다 떨어져 버리니 무슨 귀신이 있어서 그 가운데를 엿보리오.

규봉 二는 會妄歸眞하야 以釋悉知라

㉷二. 妄을 알아 眞에 돌아가서 모두 아는 것을 해석함이라.

何以故오 如來가 說諸心이 皆爲非心일새 是名爲心이니

무슨 까닭인가. 여래가 설한 모든 마음은 다 마음이 아니요 그 이름이 마음이기 때문이니라.

설의 靈源이 湛寂하야 本自無生이어늘 一念波興에 諸妄이 競作하니 波非水性이요 妄非眞源이라 是可名爲虛妄浮心이로다 又前念今念後念이 念念에 思無量善事하며 思無量惡事하야 念念遷流하야 起滅不停하나니 如是等心을 是名諸心이요 而此諸心이 刹那에도 無有生相이며 刹那에도 無有滅相이라 更無生滅可滅일새 是名非心이요 旣無生滅可滅인댄 唯一妙圓眞心이 常住不滅일새 是名爲心이니라 所以로 佛頂經에 云見與見緣과 幷所想相이 如空中花하야 本無所有하나 此見及緣이 元是菩提의 妙精明體라하시니라

신령스런 근원이 맑고 고요해서 本來 스스로 生함이 없거늘, 한 생각의 물결이 일어나매 모든 망념이 다투어 지어지느니라. 물결은 물의 性品이 아니고 妄念은 眞理의 근원이 아님이라, 이것을 가히 이름하여 虛妄한 뜬 마음이라 하도다.

또한 前念, 今念, 後念이 순간순간 限量없는 좋은 일을 생각하며, 온갖 악한 일을 생각하니 순간순간 계속 흘러가고, 일어나고, 滅함이 멈추지 아니하니, 이와 같은 等等의 마음을 모든 마음(諸心)이라 함이요, 이 모든 마음은 刹那에도 生한 모양이 없으며 刹那에도 滅한 모양이 없음이라. 다시 生滅이 가히 滅함이 없음일새, 이것을 非心이라 함이요 이미 生滅이 가히 滅함이 없을진댄 오직 하나 微妙하고 圓滿한 참된 마음이 常住하여 滅하지 않음일새, 이를 마음이라 하도다. 이 까닭에 佛頂經에 이르되 見(보는 나)과 見緣(볼 것)과 아울러 생각할 바의 모습들이 空中의 꽃과 같이 本來 있는 것이 아니니, 이 見(봄)과 緣(볼 것)이 元來 菩提의 妙하고 정미로운 밝은 체라 하시니라.

 

야부 病多에 諳藥性이로다

病 많은 사람이 藥의 性品을 알도다.

설의 世人이 無病에 醫王이 拱手하고 衆生이 無垢에 佛自無爲로다

세상 사람의 병이 없으면 의사는 팔짱을 끼고 있을 것이며 衆生의 허물이 없으면 부처님이 할 일이 없을 것이로다.

야부 一波纔動萬波隨하니 似蟻循環豈了期리오 咄 今日에 與君都割斷하니 出身方號丈夫兒니라

한 물결이 일렁이면 만 물결이 따르는 것이

마치 개미의 순환함과 같아서

어찌 마칠 기약이 있으리오.

咄! 오늘 그대와 더불어 모두 다 잘라 버리니

몸을 나타내면 바야흐로 丈夫라 부르도다.

설의 虛妄浮心이 其勢然也로다 咄 妄想林向靈鋒斷하니 於焉方現本來身이로다

虛妄한 뜬마음의 기세가 그러하도다. 咄!

妄想의 숲을 向하여 영봉(靈鋒)으로 자르니 어언간 바야흐로 本來의 몸이 나타나도다.

 

所以者가 何오 須菩提야 過去心不可得이며 現在心不可得이며 未來心不可得이니라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수보리야, 지나간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음이니라.

설의 因甚道諸心이 非諸心일새 是名常住妙圓眞心과 若定諸心이 是妄非眞인댄 何者가 是過去心이며 何者가 是現在心이며 何者가 是未來心고 過去心不可得이며 現在心不可得이며 未來心不可得이니라 旣總不可得인댄 唯一妙圓眞心이 無去來相하며 無現在相하야 光通三際하고 體徧十方이니 佛之所以言此者는 示現沙界衆生의 差別心行이 卽是如來妙圓眞心이라 與佛無殊也니라 所以로 永嘉가 云諸行無常一切空이라 卽是如來大圓覺이라하시니라 然이나 此는 但依會妄歸眞之義하야 論之而已니 若但伊麽商量인댄 恐妨捨妄歸眞之路일가하노라 若以捨妄歸眞之義로 論之則沙界衆生의 若干種心을 如來悉知하시나니 因甚得知之也오 沙界衆生의 若干種心이 卽非常住眞心이라 皆爲虛妄浮心일새 故得知之也니라 因甚如此오 若是常住眞心인댄 是過去耶아 現在耶아 未來耶아 若道過去心인댄 過去已滅이라 心不可得이요 若道現在心인댄 現在空寂이라 心不可得이요 若道未來心인댄 未來未至라 心不可得이니 寂然無有去住하며 廓然無有諸相하야 一切時中에 不可得而見也며 一切法中에 亦不可得而知也니라 佛之所以言此者는 令捨虛妄浮心하고 契乎常住眞心也니라 所以로 道로대 妄心滅盡業還空하니 直證菩提超等級이라하시니라

무엇을 인하여 모든 마음이 마음이 아니고 이름하여 常住, 妙圓, 眞心이라 하는가. 만약 결정코 모든 마음이 妄이고 眞이 아니라면 무엇이 過去心이고 무엇이 現在心이며 무엇이 未來心인가. 過去心도 가히 얻을 수 없으며 現在心도 얻을 수 없으며 未來心도 얻을 수 없음이니라. 이미 모두 얻을 수 없으면 유일한 妙圓眞心이 過去나 未來의 相도 없으며 現在의 相도 없어서 그 光明이 三際(過去, 現在, 未來)에 通하고 體가 十方에 두루함이니 부처님이 이것을 말한 까닭은 恒沙世界의 衆生의 差別 心行이 곧 如來의 妙圓眞心이어서 부처와 더불어 조금도 다름이 없음을 나타냄이니라. 그러므로 영가 스님(永嘉)이 이르기되 諸行이 無常하여 一切가 空함이라. 이는 곧 如來의 大圓覺이라 하시니라. 그러나 이것은 다만 妄을 알고 眞에 돌아가는 뜻을 의지하여 논했을 따름이니 만약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妄을 버리고 眞에 돌아가는 길을 방해할까 염려하노라. 만약 妄을 버리고 眞에 돌아가는 뜻으로 논한다면 娑婆世界 衆生들의 가지가지 마음을 如來가 다 아노니 무엇 때문에 그것을 알 수 있는가. 娑婆世界 衆生의 가지가지 마음이 곧 常住眞心(변함없는 마음)이 아님이라.

다 虛妄한 뜬 마음이 되므로 그것을 알 수 있느니라. 어찌하여 그런가. 만약 이 常住眞心이라면 이것이 過去인가 現在인가 未來인가. 만약 過去心이라 말하면 過去는 이미 滅하여 그 마음을 가히 얻을 수 없으며 만약 現在心이라면 현재는 텅비어 그 마음 또한 얻을 수 없으며 만약 未來心이라 하면 未來는 이르지 않았으므로 그 마음을 가히 얻을 수 없으니, 寂然하여 가고머무름(居住)이 없으며 廓然하게 모든 相이 없어서 一切의 時間中에 가히 얻어 볼 수 없으며 一切의 法中에 또한 알 수 없느니라. 부처님이 이것을 말씀하신 까닭은 虛妄浮心을 버리고 常住眞心에 계합하기 위함이니라. 그러므로 말하되 妄心이 滅盡하고 業 또한 空하여서 바로 菩提를 證得하여 等及을 초월한다 하시니라.

 

야부 低聲低聲하라 直得鼻孔裏出氣하야사하리라

소리를 낮추고 낮추어라. 바로 콧구멍 속에서 氣가 빠져나가게 되리라.

설의 此心을 向三際求하야도 求之不得이요 向十方覓하야도 覓之無蹤이니 進之에 如銀山鐵壁이요 退之에 若萬丈深坑이라 無有掛目處며 無有下脚處로다 雖然如是나 若但伊麽提持하면 後學이 無有進身之路하야 便見陸地平沈하리라 所以로 道호대 低聲低聲하라 直得鼻孔裏出氣하야사하리라하시니라

이 마음은 三際를 向해 구하여도 구할 수 없으며 十方을 向해 찾아도 그 찾음에 자취가 없으니 나아가면 銀山鐵壁과 같고 물러서면 만길의 깊은 굴과 같도다. 눈을 걸 곳이 없으며 발붙일 곳이 없다. 비록 이와 같으나 만약 다만 이렇게 이끌어 가면 後學들이 나아갈 길이 없어서 문득 땅이 꺼짐을 보리라. 그러므로 말하되 소리를 낮추고 낮추어라. 바로 콧구멍 속에서 氣가 빠져나가게 되리라 하시니라.

야부 三際求心心不見하니 兩眼이 依前對兩眼이라 不須遺劍刻舟尋이니 雪月風花에 常見面이로다

三際에 마음을 구하여도 마음은 볼 수 없으나

두 눈은 예전처럼 두 눈을 대하도다.

모름지기 칼을 빠뜨리고 배에다(빠뜨린 곳을)

표해서 찾지 말지니

눈과 달과 바람과 꽃에서 항상 그대 얼굴을 보리라.

설의 作麽生出氣去오 三際求心心不見하니 兩眼이 依前對兩眼이로다 要識兩眼對兩眼麽아 看取古境裏影子어다 不須求劍이니 劍不曾失이요 不須刻舟니 刻舟奚爲리오 只如古境裏影子를 作麽生看取오 雪月風花無限事여 頭頭常現劍全身이로다

어떻게 氣가 빠져나가는가. 三際에 마음을 구하여도 마음은 볼 수 없으니 두 눈은 그대로 두 눈을 대함이로다. 두 눈이 두 눈을 대하고 있음을 알고자 하는가. 옛 거울 속의 그림자를 볼지어다. 모름지기 칼을 구하지 말지니 칼은 일찍이 잃은 적이 없음이라. 모름지기 배에다 (빠진 곳을) 표하지 말지니 배에 표한즉 무엇하리오. 다만 저 옛거울 속의 그림자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눈, 달, 바람, 꽃의 無限한 경관이여. 頭頭에서 항상 칼의 全身(佛性)이 나타남이로다.

 

第十九 法界通化分(법계를 다 교화하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若有人이 滿三千大千世界七寶로 以用布施하면 是人이 以是因緣으로 得福多不아 如是니이다 世尊하 此人이 以是因緣으로 得福이 甚多니이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찬 칠보로써 보시에 쓴다면 이 사람은 이 인연으로 복을 얻음이 많겠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사람은 이 인연으로 복을 얻음이 매우 많겠습니다.”

 

須菩提야 若福德이 有實인댄 如來不說得福德多어니와 以福德이 無故로 如來가 說得福德多니라

“수보리야, 만약 복덕이 실다움이 있을진대 여래가 복덕을 얻음이 많다고 말하지 않으련만 복덕이 없으므로 여래가 복덕을 얻음이 많다고 말하느니라.”

설의 福有者는 取相也요 福無者는 離相也라 經中에 凡所以訶之者는 警其住相也요 贊之者는 進其離相也니 離相行施가 是眞修行이니라 故知하라 凡言施者는 非但爲較量經勝이라 蓋責其住相也니 前則責其住相故로 寶施福德이 皆歸世諦有漏어니와 此則直示無相無住故로 寶施福德이 得歸眞淨無漏니라

福이 있다는 것은 相을 取한 것이요, 福이 없다는 것은 相을 떠남이라. 經 가운데서 무릇 꾸짖은 까닭은 相에 住하는 것을 경책한 것이요, 讚歎한 것은 그 相을 떠난 것에 나아가게 하기 爲한 것이니 相을 떠나서 布施를 行하면 이는 참다운 修行이니라. 그러므로 알라. 무릇 布施를 말하는 것은 非但 經이 殊勝함을 비교하여 헤아릴 뿐만 아니라 대개 相에 住함을 책망한 것이니, 앞에서 相에 住한 것을 책망한 故로 보배를 베푼 福德이 世諦의 有漏에 다 돌아가거니와 여기서는 바로 無相無住를 가리킨 故로 보배를 베푼 福德이 眞淨 無漏에 돌아가게 되느니라.

 

야부 由勝別勞心이니라

오히려 달리 마음을 쓰는 것보다 殊勝하도다.

설의 但知作福하고 不解性空하면 果招象身七寶珍이요 但觀性空하고 不解作福하면 果招羅漢應供薄이니 此與大道로 皆不相契니라 然이나 此二를 較量하면 觀空者가 差勝이라 所以로 道호대 莫言空打坐하라 猶勝別勞心이라하시니라

다만 복지을 줄만 알고 복의 性品이 空함을 알지 못하면 그 果報는 코끼리 몸에 진귀한 七寶를 두른 것과 같고, 다만 性品의 空함만을 관하고 복지을 줄 모르면 그 果報가 羅漢의 應供함이 박복함을 초래하니, 이것은 大道와 더불어 서로 계합하지 못함이니라. 그러나 이 두 가지를 비교하면 空을 관한 자가 조금 殊勝함이라. 그러므로 말하되 부질없이 앉아 있기만 한다고 말하지 말라. 오히려 달리 마음을 쓰는 것보다 殊勝하다고 하시니라.

야부 羅漢은 應供薄이요 象身은 七寶珍이라 雖然多濁富나 爭似少淸貧이리오 罔象은 只因無意得이요 离婁는 失在有心親이니라

羅漢은 應供이 薄하고

코끼리 몸은 七寶가 진귀함이라.

비록 그렇게 많은 濁富이긴 하나

어찌 적은 淸貧과 같으리오.

罔象은 다만 無意를 인하여 얻었음이요,

离婁^는 有心에 親하여 잃었느니라.

설의 因若偏修면 果闕圓常이니 觀空作福이 二俱差過니라 然이나 於中에 觀空이 猶勝이니 觀空이 因甚有勝處오 罔象은 只因無意得이니라 作福이 因甚有劣處오 离婁는 失在有心親이니라

만약 因에 치우쳐서 닦으면 結果가 圓滿하고 恒常함을 빠뜨리게 되니, 空을 觀함과 복지음 둘 다 차이가 있느니라. 그러나 그 가운데 空을 觀함이 오히려 殊勝함이니, 空을 觀함이 무엇 때문에 殊勝한 것인가 罔象은 단지 뜻없음으로 인하여 얻음이니라. 복을 지음은 무엇 때문에 下劣한가. 이루(离婁)의 잃은 것은 有心에 親하였기 때문이다.

 

第二十 離色離相分(색과 상을 떠나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佛을 可以具足色身으로 見不아 不也니이다 世尊하 如來를 不應以具足色身으로 見이니 何以故오 如來가 說具足色身이 卽非具足色身일새 是名具足色身이니이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부처를 가히 구족한 색신으로써 볼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마땅히 구족한 색신으로써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구족한 색신은 곧 구족한 색신이 아니고 그 이름이 구족한 색신입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를 可以具足諸相으로 見不아 不也니이다 世尊하 如來를 不應以具足諸相으로 見이니 何以故오 如來說諸相具足이 卽非具足일새 是名諸相具足이니이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를 모든 상이 구족한 것으로 보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모든 상이 구족한 것으로써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모든 상의 구족함이 곧 구족이 아니고 그 이름이 모든 상의 구족함입니다.”

설의 體虛不見一絲毫어늘 對緣垂示萬般形이니라

體가 텅 비어서 실 한터럭도 볼 수 없지만 緣을 대하면 만 가지 形相을 드리워 보이도다.

 

야부 官不容針이나 私通車馬로다

官(公的인 입장)에서는 바늘만큼도 용납하지 못하나 私私로는 수레도 통함이로다.

설의 公門에 不容私나 鄕黨에 豈無情이리오

公的인 門中에선 私私로움을 용납하지 못하나 마을에선 어찌 情이 없겠는가.

야부 請君仰面看虛空하라 廓落無邊不見蹤이로다 若解轉身些子力하면 頭頭物物總相逢하리라

그대에게 청하노니 얼굴을 우러러 虛空을 보라.

확 트이고 가없어 그 자취를 볼 수가 없도다.

그러나 만약 몸을 굴려 작은 힘을 알게 되면

頭頭物物에서 모두 만나보게 되리라.

설의 正體從來로 絶聲色하니 覓則知君不見蹤이로다 妙峯頂上에 一轉身하면 十方無處不逢渠하리라

바른 體는 本來로 소리와 색을 끊었으니 찾은즉 그대는 알리라, 그 자취를 볼 수 없음을. 妙峯頂上에서 한번 몸을 뒤척이면 十方 그 어디에서든지 그를 다 만나보리라. (頭頭物物에서 如來의 眞身을 보리라.)

 

第二十一 非說所說分(설함과 설하여 질 것이 아님)

須菩提야 汝勿謂如來가 作是念호대 我當有所說法이라하라 莫作是念이니

“수보리야, 너는 여래가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마땅히 설한 법이 있다’고 이르지 마라. 이런 생각을 하지 말지니(自他가 없어야 한다는 말)

 

何以故요 若人이 言如來가 有所說法이라하면 卽爲謗佛이라 不能解我所說故니라

무슨 까닭인가 하면 만약 사람이 말하길 如來가 說한 法이 있다고 하면 이는 곧 부처님을 비방함이니라. 능히 내가 說한 바를 알지 못한 연고니라.

설의 佛說一切法이 湛然常寂滅하시니 但信佛無言이면 可稱爲子期니라

부처님이 說하신 一切法은 湛然하여 항상 寂滅하시니 다만 부처님가 말이 없음을 믿으면 가히 種子期(知音者)라고 이를 만하도다.

 

야부 是則是나 大藏小藏은 從甚處得來오

옳기는 옳으나 大藏經 小藏經들은 어느 곳으로부터 왔는가.

설의 佛無所說이 是則固是나 頓漸偏圓의 大小乘藏이 充樑溢宇하야 如今天下에 無在不在하니 若都無說인댄 如是法門은 其誰說來오

부처님이 說한 바 없음은 眞實로 옳으나 頓敎, 漸敎, 偏敎, 圓敎의 大乘 小乘 藏經(頓漸偏圓 大小乘藏)들이 들보에 가득차고 집에 넘쳐서 지금 天下에는 없는 곳이 없도다. 만약 그 모두가 說함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와 같은 法門은 그 누가 說한 것인가.

야부 有說이라도 皆成謗이요 無言이라도 亦不容이라 爲君通一線하노니 日向嶺東紅이니라

說함이 있다 해도 다 비방을 이루고,

말이 없다 해도 또한 용납하지 못하도다.

그대를 爲하여 한가닥 線을 通하노니

해가 嶺東에서 붉게 떠오르리라.

설의 有說無說이 二俱擔板漢이라 無念說示가 同谷響이요 亦如日輪이 照無心이로다

설이 있음과 설이 없음이 둘 다 모두 擔板漢이로다. 無念으로 說하여 보이신 것이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고 또한 해가 비추되 無心히 비추는 것과 같도다.

 

須菩提야 說法者는 無法可說을 是名說法이니라

수보리야, 설법이란 것은 법을 가히 설할 것이 없음을 이름하여 설법이라 하느니라.”

설의 法身은 本無說이라 報化方有說이니 有說은 非眞說이요 無說이 是眞說이니라 十方佛土中에 唯有一乘法하니 離此一乘法하고 更無可說底라 故로 云無法可說이요 只以一乘法으로 開示諸衆生일새 故로 云是名說法이니 若是一乘法인댄 直是無開口處로다 然이나 亦不離衆生日用이니라

法身은 本來 說함이 없는지라 報身 化身이라야 바야흐로 說함이 있으니 說함이 있음은 참다운 說이 아니고 說함 없음이 참다운 說이니라. 十方의 佛土 가운데는 오직 一乘法이 있으니 이 一乘法을 떠나서는 다시 가히 ‘說할 것’이 없도다. 그러므로 이르되 法 가히 說할 게 없다 한 것이요, 다만 一乘法으로써 모든 衆生에게 열어 보이셨으므로 이름을 說法이라 한 것이니 만약 一乘法이라면 바로 입을 열 곳이 없음이로다. 그러나 또한 衆生의 日用을 떠난 것도 아니니라.

 

야부 兎角杖龜毛拂이로다

토끼뿔로 만든 지팡이요 거북이 털로 만든 拂子(털이개)이다.

설의 古人이 道호대 四十九年積累功이여 龜毛兎角이 滿虛空이라 一冬臘雪이 垂垂下하야 落在烘爐烈焰中이라하시니 則許多年을 露胸跣足하고 拖泥帶水하사 拔濟沈淪하신 如是功能이 如夢相似하야 無一毫許可與相許로다 雖然如是나 畢竟作麽生道오 拈起兎角杖하야 拈開一路涅槃門이요 竪起龜毛拂하야 拂盡三千空假中이로다

옛사람이 이르되 49年간 많은 功을 쌓음이여, 거북이 털과 토끼 뿔이 虛空에 가득함이라. 한 겨울 섣달 눈이 계속 내려서 붉은 화로의 불꽃 속으로 떨어진다 하시니라. 곧 허다한 歲月을 가슴 드러내고 맨발로 진흙을 묻히고 물에 젖으며 苦海에 빠져있는 衆生을 건져 제도하신 이와 같은 功能이 꿈과 같이 相似하여 한 터럭만큼도 가히 더불어 허락할 게 없도다. 비록 이와 같으나 畢竟 어떻게 말할 것인가. 토끼뿔 지팡이를 잡아 일으켜서 한 길의 涅槃門을 열어주고 거북털의 拂子를 일으켜 세워서 三千大千世界의 空, 假, 中을 다 털어 없애버렸다.

야부 多年石馬가 放毫光하니 鐵牛哮吼入長江이로다 虛空一喝이 無蹤迹하야 不覺潛身北斗藏이로다 且道하라 是說法가 不是說法가

나이 많은 石馬^가 白毫光明을 놓으니

鐵牛가 포효하며 長江으로 들어간다.

虛空의 一喝 蹤迹이 없이

몰란결에 몸을 숨겨 北斗에 감추도다.

또 일러라. 이것이 說法인가 說法이 아닌가.

설의 寂滅場中에 不曾擡步하고 生死海裏에 橫身而入하사 許多年을 以石馬而放毫光하사 致令盲者로 得見하며 以鐵牛而作哮吼하사 致令聾者로 得聞케하시고 且喝得虛空하사 令北斗裏藏身케하시니 且道하라 是說法가 不是說法가 若道是說인댄 爭奈石馬鐵牛어니 有甚閑情이며 有甚閑氣리오 若道不說인댄 爭奈放光哮吼하야 解喝虛空가 又須信四十九年說이 石馬放光鐵牛吼니 石馬鐵牛가 竟無力이요 虛空一喝이 便無蹤이라 伊麽則虛空一喝이 大烘焰裏요 放光哮吼가 一冬片雪이로다

寂滅의 道場 가운데 일찍이 걸음을 옮기지 않고, 生死의 바다 속에 몸을 비껴 들어가서 허다한 歲月 동안 石馬로써 白毫光明을 놓아서 눈 어두운 자로 하여금 보게 하고 鐵牛로써 사자후(哮吼)를 하여서 귀먹은 자로 하여금 다 듣게 하시며, 또한 虛空에 대고 할(喝)을 하시어 北斗로 하여금 몸을 감추게 하시니 또 일러라. 이는 說法인가 說法이 아닌가. 만약 說法이라 하면 이는 石馬와 鐵牛와 같거니 무슨 부질없는 생각이 있을 것이며 무슨 부질없는 氣가 있으리오. 만약 說法이 아니라고 한다면 放光하고 포효하여 虛空에 대고 喝할 줄 어찌 알 겠는가. 또한 모름지기 49年 說함은 석마가 방광하고 철우가 부르짖음인 줄 믿을지니 석마와 철우가 마침내 힘이 없음이요, 虛空의 一喝이 문득 자취가 없음이로다. 이런즉 虛空의 一喝이 큰 불구덩이 속이요, 방광과 포효가 한 겨울의 조각눈이로다.

爾時에 慧命須菩提가 白佛言하사대 世尊하 頗有衆生이 於未來世에 聞說是法하고 生信心不잇가 佛言하사대 須菩提야 彼非衆生이며 非不衆生이니 何以故요 須菩提야 衆生衆生者는 如來가 說非衆生일새 是名衆生이니라

그때에 해명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자못 어떤 중생이 미래세에 법 설하심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수보리야, 저들은 중생이 아니며 중생 아님도 아니니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야, 중생 중생이라 함은 여래가 설하되 중생이 아니고 그 이름이 중생이니라.”

설의 空生이 以後世信與不信으로 發問이어시늘 佛이 以是生非生으로 答者는 以是生故로 困於生死하야 以求出要니 應有信之之理요 以非生故로 本來是佛이라 不應以佛求佛이니 應有不信之理로다 不信佛法이 是眞生信이니 以無法相故也니라

空生이 ‘후세에 믿음과 믿지 않음’으로 물음을 發하심에 부처님이 ‘이 衆生은 衆生이 아님’으로 答한 것은 衆生인 연고로 生死에 빠져서 벗어날 것을 구하니 응당 믿을만한 이치가 있음이요, 衆生이 아닌 故로 本來 이 부처인 것이라. 응당 부처로써 부처를 구하지 못하리니, 응당 믿지 못할 만한 이치가 있음이로다. 佛法을 믿지 않는 이것이 참으로 믿음을 내는 것이니 法의 相이 없는 까닭이니라.

幽冥禪師續加

 

야부 火熱風動이요 水濕地堅이로다

불은 뜨겁고 바람은 움직이며 물은 습하고 땅은 堅固하도다.

설의 孺子入井見皆憐하니 可稱人天調御師요 毁聲이 入耳聞皆怒하니 是則難當聖人名이로다 伊麽則面前驢脚이요 背後龍鱗이니 是凡가 是聖가 定當不得이로다 然雖如是나 凡住凡位하고 聖住聖位하니 凡聖路別이라 不可得而混也니라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진 것을 보면 모두 불쌍히 여기니 가히 人天의 調御師라고 일컬음이요, 헐뜯는 소리를 귀로 들으면 다 화를 내니 이는 곧 聖人이라 이름하기 어렵다. 그러한즉 앞에는 당나귀요 뒤는 용의 비늘이로다. 이는 凡夫인가, 聖賢인가. 결정코 알 수 없도다. 비록 그러하나 凡夫는 凡夫의 위치에 머물고 聖人은 聖賢의 위치에 머무르니 凡夫와 성현의 길이 다름이다. 가히 혼동하지 말지니라.

야부 指鹿에 豈能成駿馬며 言烏에 誰謂是翔鸞이리오 雖然不許纖毫異나 馬字驢名이 幾百般고

사슴을 가리켜 어찌 준마라 할 수 있으며

까마귀를 일러 누가 난새(희귀한 새)라 이르리오.

비록 그렇게 털끌만큼의 다름도 허락치 않건만

馬字가 든 나귀이름들이 얼마나 많던가.

설의 盜跖을 不應號文湯이니 誰喚波旬作牟尼리오 雖然理上에 融無二나 爭奈難齊聖凡名가

盜跖을 文王, 湯王(위대한 성군)이라 부르지 못함이니 누가 魔王 파순(波旬)을 釋迦牟尼라 부르리오.

비록 그렇게 이치상으론 융통하여 둘이 없으나 聖人과 凡夫 이름이 같지 않음은 어찌하리오.

종경 如來가 無所說이여 慈雲甘露가 洒濛濛이요 慧命이 未嘗聞이여 明月淸風이 空寂寂이로다 正恁麽時에 且道하라 是何境界오 欲得不招無間業인댄 莫謗如來正法輪이어다

如來가 說함이 없음이여, 慈悲스런 구름과 甘露가 자욱히 젖음이요(무비스님 책엔 酒濛濛인데 洒濛濛인 것 같음). 慧命須菩提가 일찍이 듣지 못함이여, 明月과 淸風이 空하여 고요하도다. 정히 이러한 때에 일러보아라. 이 무슨 境界인가. 無間地獄의 業을 초래하지 않고자 하면 如來의 바른 法輪을 비방하지 말지어다.

설의 如來無說說이여 出岫雲無心이요 慧命이 不聞聞이여 風月이 兩蕭然이로다

如來가 說함없이 說함이여, 산마루에 이는 구름같이 무심하고 慧命이 들음없이 들음이여, 바람과 달이 둘 다 스산하도다.

 

第二十二 無法可得分(법은 가히 얻을 것이 없음)

須菩提가 白佛言하사대 世尊하 佛이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는 爲無所得耶니이다 佛言하사대 如是如是하다 須菩提야 我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에 乃至無有少法可得일새 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심은 얻은 바 없음이 되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그렇다. 그렇다. 수보리야,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내지 작은 법이라도 가히 얻음이 없으므로(내가 阿耨多羅三藐三菩提에서 곧 얻을 수 있는 法이 조금도 있지 아니하게 힘써 成就하면) 이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하느니라.”

설의 上言生不生하시고 此言佛無得하시니 蓋菩提는 生佛平等之本有라 於中에 不應分別是凡是聖과 有得無得이니라

위에서는 衆生과 衆生 아님을 말씀하시고 여기서는 부처님께서 얻은 것이 없음을 말씀하시니 대개 菩提란 衆生과 부처가 平等하게 本來 가지고 있는 것이라서 그 가운데서는 마땅히 凡夫와 聖人, 有得과 無得을 分別하지 않음이니라.

 

야부 求人이 不如求自己니라

남에게 구하는 것은 自己에게 구하는 것만 같지 못하느니라.

설의 求自는 一作自求라 旣是平等인댄 何以遠推諸聖이며 旣是本有인댄 何須向外馳求리오 若能反求諸已하야 驀然觸着鼻孔하면 坐斷報化의 佛頭去在리니 所以로 求人이 不如求自己니라

이미 平等하다고 한다면 어찌 멀리 聖人들에게 미루어 구할 것이며, 이미 本來 지니고 있음인댄 어찌 모름지기 밖을 向해서 급하게 구할 것인가.

만약 自己에게 돌이켜 구하여서 문득 콧구멍(根本)을 만지면 報身 化身의 부처머리를 앉아서 끊어가리니, 그러므로 남에게 구하는 것이 自己에게 구하는 것만 같지 못하느니라.

야부 滴水成氷이 信有之나 緣楊芳草色依依라 秋月春花無限意여 不妨閑聽鷓鴣啼로다

방울 물이 얼음이 됨은 진실로 있으나

緣楊과 芳草의 色은 무성하도다.

秋月과 春花의 無限한 뜻이여,

자고새의 울음을 한가히 듣는데 방해롭지 않도다.

설의 此事는 寒威威冷湫湫라 滴水滴凍에 江河絶流하야 纖塵不立하고 寸草不生이로다 雖然如是나 寒暄이 不常이라 日煖風和에 山川이 競秀하야 玄黃을 可判이며 黑白이 分明이로다 伊麽則秋月春花無限事가 各各自有無限意하야 事事가 一一天眞이며 着着에 可以明宗이니 可以向翠竹黃花邊하야 明得此事며 可以向鶯吟燕語邊하야 明得此事라 以至一見一聞이 一一皆是發機的時節이요 一色一香이 一一開我活眼的物事니 須信道어다 山僧이 未陞座에 風鐸이 已搖舌이니라

이 일은 차갑기가 威威하고 冷하기는 湫湫한지라.(지극함을 표현) 방울물이 얼어서 강물이 흐르지 못하고 가는 티끌도 서지 못하며 작은 풀도 나지 않음이로다. 비록 이와 같으나 차고 더움은 항상하지 않음이라. 날이 따뜻하고 바람이 온화하매 산천이 빼어남을 다투니 검고 누런 것을 판단할 수 있으며 흑백이 分明하도다. 이러한즉 가을달과 봄꽃의 無限한 일들은 各各 自己 스스로 無限한 뜻을 갖고 있어서 일과 일이 낱낱이 天眞하며 만나는 것마다 가히 宗旨를 밝히도다. 푸른 대나무와 노란 꽃잎 끝을 向해서 이 일을 밝힐 것이며 꾀꼬리 울음과 제비의 지저귐을 向하여 이 일을 밝힐지니라. 하나를 보고 하나를 듣는 것들이 낱낱이 다 機를 일으켜 세우는 時節이요, 하나의 사물 하나의 향기가 낱낱이 다 나의 살아 있는 눈을 뜨게 하는 것이니 부디 믿을지어다. 山僧이 아직 법상에 오르기도 전에 풍경소리가 法을 이미 다 說하였느니라.

 

第二十三 淨心行善分(깨끗한 마음으로 선을 행함)

復次須菩提야 是法이 平等하야 無有高下일새 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

다시 또 수보리야,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므로 이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하느니라.

 

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로 修一切善法하면 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하리라

아도 없고 인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자도 없이 일체 선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설의 佛이 因空生之問하사 答以生亦非生이며 佛亦無得하시고 乃云是法이 平等하야 無有高下일새 是名阿耨菩提라하시니 生非生則不異於佛이요 佛無得則不異於生이라 是名平等하야 無有高下니라 前言無得하시고 此言卽得은 何也오 前明本有하사 令不屈於凡下요 此明新熏하사 使功齊於諸聖이니 若恃其本有하야 不以新熏으로 熏之면 則持珠行丐라 永處輪廻하리라

부처님이 空生의 물음으로 인하여 衆生 또한 衆生이 아니며 부처님도 또한 얻음이 없음으로써 答하시기를 하시니 이에 이르기되 이 法은 平等하여 高下가 없으므로 그 이름이 阿耨菩提라 하시니라. 衆生은 衆生이 아닌즉 부처와 다르지 않고 부처가 얻음이 없은즉 衆生과 다르지 않음이라. 이것을 平等하여 高下가 없다고 하느니라. 앞에선 얻음이 없다고 하시고 여기에선 곧 얻는다고 한 것은 무엇인가? 앞에서는 本來 있음를 밝히사 凡下(下劣한 凡夫)에 굴하지 않게 함이요, 여기에선 新熏(새로운 훈습)을 밝히사 이로 하여금 功이 모든 聖人과 같게 함이니 만약 그 본래 있는 것만 믿고 新熏으로써 훈습하지 않으면 곧 寶珠를 가지고 거지 노릇을 하는 것이라서 영원히 輪廻에 處하리라.

 

야부 山高海深이요 日生月落이로다

산은 높고 바다는 깊으며 해가 뜨면 달이 지도다.

설의 所謂平等은 豈是夷岳實淵하며 截鶴續鳧然後에 然哉아 長者는 任其長하고 短者는 任其短이며 高處는 任其高하고 低處는 任其低니라

이른바 平等이라 함을 어찌 산을 깎아서 연못을 채우는 것이며 학의 다리를 잘라 오리다리에 이은 然後에라야 그렇게 되는 것인가. 긴 것은 긴 것에 맡기고 짧은 것은 짧은 데 맡기며 높은 곳은 높은 데 맡기고 낮은 곳은 낮은 데 맡기도다.

야부 僧是僧兮俗是俗이요 喜則笑兮悲則哭이라 若能於此에 善參詳하면 六六이 從來三十六이니라

스님은 스님이고 俗人은 俗人이며,

기쁘면 웃고 슬프면 울도다.

만약 여기에서 잘 참구하여 살피면

六六은 本來 三十六^이니라.

설의 何須喚僧作俗이리오 不必忍喜云哭이니 但能隨流認性하면 彼彼元來平等이니라

어찌 모름지기 스님을 불러 속인이라 하리오. 구태여 기쁨을 참고 울 필요는 없음이니, 다만 流를 따르되 性品을 알 수 있으면 저마다 元來 平等함이니라.

須菩提야 所言善法者는 如來가 說卽非善法일새 是名善法이니라

수보리야, 말한 바 선법이란 것은 여래가 설하되 곧 선법이 아니고 그 이름이 선법이니라.

설의 了得平等理하야 無我로 修善法이니 善法非善法이여 與惡性無殊라 是名眞善法이니 不同於有漏로다

平等한 이치를 了達하여 無我로써 善法을 닦으니 善法과 善法아님이여. 惡性과 다르지 않음이라. 이것이 참다운 善法이니 有漏와 같지 않도다.(善惡을 초월한 것이 참 善法이다.)

 

야부 面上엔 夾竹桃花요 肚裏엔 侵天荊棘이로다

얼굴엔 夾竹桃(복숭아 꽃 종류)의 꽃이요 뱃속엔 侵天^(가시나무 종류)의 가시로다(얼굴엔 慈悲스런 菩薩의 모습이고 속에는 羅刹의 마음이로다).

설의 善耶야 惡耶아

善인가 惡인가

야부 是惡非惡이요 從善非善이라 將逐符行하고 兵隨印轉이로다 有時에 獨立妙高峯이라가 却來端坐閻羅殿이라 見盡人間抵點頭하니 大悲手眼이 多方便이로다

이 惡은 악이 아니고 善을 쫓아도 선이 아니로다.

장수는 符^(부: 명령표시)를 따라 行하고

병사는 印^(지휘봉)을 따라 움직이도다.

어떤 때는 홀로 妙高峰(須彌山 꼭대기 忉利天)에 섰다가

도리어 閻羅殿에 단정히 앉아 있도다.

人間을 다 보고 다만 머리를 끄덕거리니

大慈悲의 觀音菩薩은 方便이 많으시다.

설의 惡非惡善非善이여 善惡이 性無殊하니 擧一相隨來로다 涅槃生死에 兩逍遙하니 雖知無化나 常演化로다

惡은 악이 아니고 善은 선이 아님이여. 선과 악의 本性은 다르지 않으니 하나를 들면 서로 따라 오도다. 涅槃과 生死에 둘 다 逍遙하니 비록 敎化가 없음을 아나 항상 敎化를 펴시도다.

 

第二十四 福智無比分(복과 지혜는 비교할 수 없음)

須菩提야 若三千大千世界中所有諸須彌山王如是等七寶聚를 有人이 持用布施어든 若人이 以此般若波羅密經으로 乃至四句偈等을 受持讀誦하야 爲他人說하면 於前福德으로 百分에 不及一이며 百千萬億分과 乃至算數譬喩로 所不能及이니라

수보리야, 만약 삼천대천세계 가운데 있는 모든 수미산왕과 같은 칠보무더기들을 어떤 사람이 가져다 보시하더라도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이 반야바라밀경이나 내지 사구게 등을 수지독송하여 남을 위해 말해주면 앞의 복덕으로는 백분의 일도 미치지 못하며 백천만억분과 내지 산수나 비유로도 능히 미치지 못하느니라.

설의 持經行施가 功行이 不等하니 所以不等은 只在頓漸이니라

經을 가지는 것과 布施를 行하는 功行은 같지 않으니, 같지 않는 까닭은 다만 頓과 漸에 있느니라.

 

야부 千錐剳地가 不如鈍鍬一捺이로다

천 개의 송곳으로 땅을 파는 것이 무딘 괭이로 한 번 파는 것만 같지 않도다.

설의 無明堅厚가 猶如地碍하니 漸斷頓除가 千錐一捺이로다 寶施는 只度慳貪이요 般若는 直度無明이니 頓漸이 懸殊하고 優劣이 晈然이로다

無明의 굳고 두꺼운 것이 마치 땅의 堅固함과 같으니 점점 끊고 단번에 없애는 것이 천개의 송곳과 한 개의 괭이와 같도다. 보배를 베푸는 것은 단지 간탐만 없애기 爲함이고 般若는 바로 無明을 건지는 것이니 頓과 漸이 현격히 다르고 優劣이 分明함이로다.

야부 麒麟鸞鳳이 不成群이니 尺璧寸珠가 那入市리오 逐日之馬는 不並駝요 倚天長劍은 人難比로다 乾坤이 不覆載요 劫火가 不能壞라 澟澟威光이 混太虛하니 天上人間이 總不如로다 噫라

기린과 난새, 봉황이 무리를 이루지 못하고

크고 훌륭한 보배가 어찌 시장에 들어오리오.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말은 낙타와 함께 하지 못하고

하늘을 의지한 장검은 사람이 비교하지 못하도다.

乾坤이 그것을 싣지 못하고

劫火가 能히 그것을 무너뜨리지 못하도다.

늠름한 威光이 太虛에 빛나니

天上과 人間이 모두 같지 않도다. 噫라.

설의 麒麟之爲物은 頭載一角하고 性含仁心하며 鸞鳳之爲物은 身備五彩하고 聲含五音하야 天下有道則至하고 無道則隱하나니 此事도 亦然하야 本是一道로대 開有四心五位하야 諸佛이 時乃說之하시며 衆生이 時乃得聞이니 不成群則彼物이 無伴侶라 此事도 無多字니라 尺璧寸珠는 體具溫潤明瑩之德하고 亦有剛强淸淨之相하니 此事도 亦然하야 擧體隨緣而照無遺餘하고 隨緣不變而物不能汚니 那入市則此寶를 人人이 珍之하야 不用賤賣라 此事도 佛佛이 密護하야 罕爲人說이니라 亦迅速이 如良馬하야 不爲鈍根之所追며 快然이 如利劍하야 魔外가 於是乎心寒이로다 恢恢乎乾坤이 覆載不着이요 確確乎劫火가 燒壞不得이라 澟澟乎光爍億萬乾坤이요 巍巍乎絶對天上人間이니 得之者가 所以殊勝無譬니라

麒麟의 物件됨은 머리에 한 뿔을 이고 性品은 어진 마음을 함유하고 있으며 난새와 봉황의 物件됨은 몸에 五色을 갖추고 소리는 五音을 가지고 있어서 天下에 道가 있으면 이르고(至) 天下에 道가 없으면 숨나니, 이 일도 또한 그러해서 본시 하나의 道로되 열면 四心과 五位가 있느니라. 諸佛이 때때로 이를 說하시며 衆生이 때때로 이를 얻어들으니 무리를 이루지 않은즉 저 사물은 벗이 없음이라.

이 일도 설명이 많지 않으리라. 한 척이나 되는 옥과 한 치나 되는 구슬은 體가 따뜻하고 윤기 있으며 밝은 德을 갖추었고 또한 아주 강하고 淸淨한 相을 갖추었으니 이 일도 또한 그러해서 전체가 因緣을 따르되 비추임에 남김이 없고 연을 따라 不變하나 사물에 能히 물들지 않으니 그것이 시장(市)에 들어가면 이 보배를 사람들이 진귀하게 여겨서 천하게 팔지 않도다. 이 일도 그러하여 부처와 부처가 비밀히 보호해서 사람을 爲하여 說함이 드물도다. 또한 신속하기가 좋은 말과 같아서 둔한 근기는 따라갈 수 없으며 明快하기가 날카로운 칼과 같아서 魔軍이와 外道가 이에 마음이 써늘해짐이로다.

크고 커서 乾坤이 덮고 실을 수가 없음이요 확실하고 확실해서 劫火가 그것을 태워서 무너뜨릴 수 없도다. 늠름한 빛이 億萬 乾坤에 빛나고, 높고 높아서 天上과 人間에 相對가 없으니 그것을 얻는 자는 殊勝하여 비유할 데가 없느니라.

 

第二十五 化無所化分(교화하되 교화하는 바가 없음)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汝等은 勿謂가 如來作是念호대 我當度衆生이라하야 須菩提야 莫作是念이니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희들은 여래가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마땅히 중생을 제도한다’고 말하지 말라. 수보리야, 이런 생각을 하지 말지니

 

何以故오 實無有衆生如來度者니

왜냐하면 실로는 여래가 제도할 중생이 없음이니,

 

若有衆生如來度者면 如來가 則有我人衆生壽者니라

만약 여래가 제도할 중생이 있다하면 여래는 곧 아와 인과 중생과 수자가 있음이니라.

설의 衆生이 本成佛이라 佛不度衆生이니라 爲甚如此오 眞如界內에 無生佛이요 平等性中에 無自他니라 見有可度면 成自他니 豈謂如來無我人이리오

衆生은 本來 부처를 이루었음이라. 부처가 衆生을 제도할 수 없느니라. 어찌하여 이 같은가. 眞如法界 안에서는 衆生과 부처가 없음이요, 平等한 性品 가운데는 自他가 없음이로다. 衆生을 가히 제도할 것이 있다고 보면 自他를 이루는 것이니 어찌 如來가 我와 人이 없다고 말하리오.

 

 

야부 春蘭秋菊이 各自馨香이로다

봄의 난초와 가을 국화가 각기 스스로 향기를 뿜도다.

설의 十類生이 與十方佛로 一時成道요 十方佛이 與十類生으로 同日涅槃이니 生佛相이 本寂이요 能所度도 亦寂이로다 能所度가 旣寂인댄 我人相이 何有리오 伊麽則釋迦도 眼橫鼻直이요 人人도 亦眼橫鼻直이니 同居常寂光土하야 共受無生法樂이로다

十類의 衆生이 十方의 부처님들과 더불어 일시에 성도함이요 十方 부처님이 십류중생과 더불어 같은 날 涅槃하니 衆生과 부처의 相이 本來 空寂하고 能度(제도할 자)와 所度(제도받을 자)도 또한 없으며 能所度가 이미 없음인댄 我와 人의 相이 어찌 있으리오. 이러한즉 釋迦도 눈은 가로로 있고 코는 곧게 있으며 사람사람도 또한 눈은 가로로 있고 코는 곧게 있으니 常寂光土에 함께 있어서 法樂을 함께 받도다.

야부 生下에 東西七步行이여 人人이 鼻直兩眉橫이로다 哆口和悲喜가 皆相似하니 那時에 誰更問尊堂이리오 還記得在麽아

탄생하여 東西로 七步를 걸음이여

사람마다 코는 곧게 있고 두 눈썹은 옆으로 있도다.

哆口和와 슬픔과 기쁨은 다 서로 같으니

어느 때에 누가 다시 尊堂에 물으리오.

또한 기억하는가.

설의 釋迦가 纔生母胎에 周行七步하시고 人人이 纔生母胎에 眼橫鼻直이로다 哆哆口和口和兼悲喜여 人家孺子가 皆相似라 性本神解自如然하니 誰向尊堂問何爲리오 傾心吐露報君知하노니 問君於斯에 記取否아

釋迦가 모태에서 태어나자 七步를 걸으시고 사람들도 모태에서 태어나자 눈은 옆으로 있고 코는 곧게 있도다. 哆哆(애들이 기뻐하는 소리)口和口和(애들이 슬퍼하는 소리)하고 兼하여 슬퍼하고 기뻐함이여! 人家의 아이들은 모두 서로 비슷하도다.

性品은 本來 神解(신비롭게 아는것)하여서 저절로 그러하니 누가 존당(佛)을 向해 어찌할까 물으리오.

마음 기울여 그대에게 토로하여 알리노니, 묻겠노라. 그대는 여기에서 기억하는가. 마는가.

 

須菩提야 如來가 說有我者는 卽非有我어늘 而凡夫之人이 以爲有我일새니 須菩提야 凡夫者는 如來가 說卽非凡夫일새 是名凡夫니라

수보리야 여래가 설하되 아가 있다는 것은 곧 아가 있음이 아니거늘 凡夫들이 이를 아가 있다고 여기느니라. 수보리야, 凡夫라는 것도 여래가 설하되 곧 凡夫가 아니고 그 이름이 凡夫니라.

설의 雖云有我나 我性이 本空이어늘 凡夫가 不知하야 以爲有我니라 雖曰凡夫나 凡夫相이 寂滅이니 凡夫相이 寂滅일새 故說非凡夫니라 又前念不覺을 名凡夫요 後念卽覺을 說非凡夫니라

비록 我가 있다고 말하나 我의 性品은 本來 空하거늘 凡夫들이 이를 알지 못하고 我가 있음을 삼느니라. 비록 凡夫라고 말하나 凡夫의 相도 寂滅한 것이니 凡夫의 相이 적멸한 故로 凡夫가 아니라고 說하시니라. 또 앞생각이 깨닫지 못함을 凡夫라 하고 뒷생각이 곧 깨달음을 凡夫가 아니라고 說하시느니라.

 

야부 前念衆生後念佛이라 佛與衆生이 是何物고

앞생각은 衆生이고 뒷생각은 부처로다.

부처와 더불어 衆生은 무슨 物件인가.

설의 前念起妄에 後念卽覺하고 前念有着에 後念卽離니 妄還覺着却離여 爲聖가 爲凡가 是善가 是惡가 定當不得이로다

앞생각이 妄念을 일으키면 뒷생각이 곧 깨닫고 前念이 執着하면 곧 (執着을) 떠남이니 妄을 돌이켜 깨닫고 執着을 문득 떠남이니 聖人이 되는가 凡人이 되는가, 선인가 악인가. 결정코 알지 못하도다.

야부 不現三頭六臂하야도 却能拈匙放筯로다 有時에 醉酒罵人이라가 忽爾燒香作禮로다 手把破砂盆하고 身披羅錦綺로다 做模打樣이 百千般이나 驀鼻牽來秪是你로다 咦

三頭와 六臂(머리 셋과 팔 여섯)^를 나투지 않아도

能히 수저를 잡고 놓을 줄 알도다.

어느땐 술에 취하여 사람을 꾸짖다가

홀연히 향을 사르고 예를 올리도다.

손에는 깨진 사기그릇을 잡고

몸에는 비단 옷을 걸쳤도다.

모양을 만들고 지음이 百千 가지이나

문득 코를 이끌어오니, 다만 이는 너로다.

咦!

설의 咦는 一作嗄라 非能非不能이며 非善非不善이며 非貴非不貴니 貴賤善惡能否異여 正眼看來唯一人이로다

咦는 嗄라고도 함. 能도 아니고 不能도 아니며 善도 아니고 不善도 아니로다. 貴함도 아니고 不貴함도 아니니 貴賤과 善惡과 能否가 다름이여. 바른 눈으로 보면 오직 한 사람이로다.

 

第二十六 法身非相分(법신은 상이 아님)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可以三十二相으로 觀-如來不아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가히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須菩提가 言하사대 如是如是하니이다 以三十二相으로 觀如來니이다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습니다.”

설의 空生이 彼中엔 迹同中容하야 權示悟入일새 故로 言不可以三十二相으로 得見如來라하시고 此中엔 迹同下根하야 權示未悟일새 故로 言可以三十二相으로 觀如來라하시니 彼中言見하고 此中言觀이 亦有以也로다

空生이 저 앞에선 자취(대답)를 中根機와 같게 하여 方便으로 깨달아 들게 하시므로 “三十二相으로 如來를 볼 수 없다”하시고 여기에선 자취를 下根機와 같게 하여 方便으로 깨닫지 못함을 보였으므로 이르되 “三十二相으로 如來를 觀할 수 있다”고 하시니 저곳에선 見이라 하고 여기에선 觀이라 함은 또한 까닭이 있음이로다.

 

야부 錯이라

틀렸음이라.

설의 色身이 非是佛이요 音聲도 亦復然이어늘 而云以相觀如來라하시니 所以로 云錯이니라

色身은 부처가 아니고 音聲도 또한 그렇다. 그렇거늘 相으로써 如來를 관한다고 하시니 그러므로 틀렸다고 하시니라.

야부 泥塑木雕縑綵畫여 堆靑抹綠更粧金이로다 若將此是如來相인댄 笑殺南無觀世音하리라

진흙으로 빚고 나무로 조각하며 비단에 그림이여.

靑을 칠하고 綠을 바르고 다시 金으로 장식하도다.

만약 이것을 如來의 모습이라 하면

우습도다. 나무 관세음보살!

설의 執相執情之見이 違於離塵復性之觀이니 取笑菩薩이 其在玆焉이로다

相에 執着하고 情에 執着한 견해가 塵을 떠나서 本性을 회복하는 觀을 어긴 것이니 “우습도다. 나무 관세음!”이라 한 그 뜻이 여기에 있음이로다.

 

佛言하사대 須菩提야 若以三十二相으로 觀-如來者인댄 轉輪聖王이 則是如來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수보리야, 만약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관한다 하면 전륜성왕도 곧 여래이리라.”

 

須菩提가 白佛言하사대 世尊하 如我解佛所說義컨댄 不應以三十二相으로 觀如來니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의 설하신 뜻을 이해하기에는 응당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관할 수 없습니다.”

설의 蒙佛痛與針剳코사 方得醒悟일새 乃云不以相觀이라하시니 是則是矣나 猶未澈見이로다

부처님께서 침으로 아프게 찔러줌을 당하고서야 바야흐로 깨달음을 얻었으므로 이에 相으로 관하지 못한다 이르시니, 이는 옳기는 옳으나 사무쳐 보지는 못했음이로다.

 

야부 錯이라

틀렸음이라.

설의 亦不離色聲코 見佛神通力이어늘 而云不以相觀이라하시니 所以로 亦錯이니라

또한 色聲을 떠나지 않고 부처의 신통력을 보거늘 相으로써 觀하지 못한다 이르시니 그 까닭에 또한 틀렸음이라.

야부 有相身中無相身이여 金香爐下에 鐵崑崙이로다 頭頭盡是吾家物이니 何必靈山에 問世尊이리오 如王秉劍이로다

有相身 가운데 無相身이여!

금향로^ 밑에 철곤륜^이로다.

頭頭가 모두 내집 物件이니

何必 영산의 세존께 물으리오.

王이 칼을 잡음과 같도다.

설의 卽相卽眞이라 相外無眞이니 頭頭物外家風이요 事事目前三昧로다 處處에 得逢渠니 何必向外求리오 如王秉劍者는 以有相求라도 亦錯이며 以無相求라도 亦錯이니 有相無相이 都盧是着이니라 如王秉劍하야 罪來卽斬하고 一得知非하면 便令却活이니 操縱이 在握이요 殺活이 臨時로다

相이 곧 眞이라. 相 밖에는 眞이 없음이니 頭頭가 物件 밖의 家風이요, 事事가 눈앞의 三昧로다. 處處에서 저를 만나니 何必이면 밖을 向해서 구하리오. 왕이 칼을 잡는 것과 같다는 것은 有相으로써 구하더라도 또한 틀렸음이며 無相으로써 구하더라도 또한 틀렸음이니 有相과 無相이 모두 다 틀렸음이라. 왕이 칼을 잡아서 罪가 있으면 斬하고 한번 그른 줄 알면 도리어 살게 함이니 조종하는 것이 손에 있고 죽고 사는 것이 그때에 임하도다(때를 따르도다).

 

爾時에 世尊이 而說偈言하사대 若以色見我어나 以音聲求我하면 是人은 行邪道라 不能見如來니라

그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만약 “색신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함이라,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설의 色見聲求가 是行邪道인댄 作麽生이 不幸邪道去오 但知聲色이 本非眞이면 自然不被聲色惑이니 見盡에 自於玄旨會요 情忘에 能與道相親이니라

色으로 보고 音聲으로 구하는 것은 邪道를 行하는 것일진대 어떻게 하면 邪道를 行하지 않으리오. 다만 聲色이 本來 眞이 아님을 알면 自然히 聲과 色의 迷惑됨을 입지 않으리라. 見이 다하면 스스로 깊은(오묘한) 뜻을 알 것이요, 情을 잊으면 能히 道와 더불어 서로 親하리라.

야부 直饒不作聲色求라도 是亦未見如來在나 且道하라 如何得見고

設使 聲色으로 구하지 않더라도 이는 또한 如來를 보지 못함이니, 또 말하라. 어찌해야 볼 수 있겠는가.

설의 聲至是는 一作聲求色見이라

聲至是(소리로 여기에 이르름)는 소리로 구하고 色으로 본다고도 함이라.

야부 不審不審이로다

모르겠다. 모르겠다.

설의 佛不在色聲이요 亦不離色聲이니 卽色聲求佛도 亦不得見이며 離色聲求佛도 亦不得見이니라 卽色離色에 兩不得見이니 且道하라 如何得見고 不審不審이여 看看하라 黃頭老가 現也로다

부처는 色과 聲에 있지 않고 또한 色과 聲을 떠난 것도 아님이니 色聲으로써 부처를 구하여도 또한 볼 수 없으며 色聲을 떠나서 부처를 구해도 볼 수 없느니라. 色에 卽하거나 色을 떠나서도 둘 다 볼 수 없음이니 또 말하라. 어떻게 해야 볼 수 있겠는가. 모르겠다. 모르겠다 함이여! 잘 보아라. 黃頭老(佛)가 나타났음이로다.

야부 見色聞聲이 世本常이어늘 一重雪上에 一重霜이로다 君今要見黃頭老인댄 走入摩耶腹內藏이어다 咦 此語가 三十年後에 擲地金聲在하리라

色을 보고 소리 듣는 것은 세상에 本來 항상하거늘

한 겹의 눈 위에 한 겹의 서리로다.

그대가 지금 黃頭老를 보고자 하면

摩耶의 뱃속에 뛰어 들어갈지어다.

咦, 이 말은 三十年 後 땅에 던지면 쇳소리가 나리라.

설의 妙圓眞淨劫前身이여 莫將知見妄疎親이어다 見色聞聲이 世本常이니 莫離色聲別求眞이어다 古人이 道호대 道不屬見聞覺知며 亦不離見聞覺知라하시니 則卽見聞覺知求道라도 亦錯이요 離見聞覺知求道라도 亦錯이며 卽色聲求佛도 亦錯이요 離色聲求佛도 亦錯이니 將錯就錯이여 雪上加霜이로다 如斯見佛하면 終不得見이니 君今要見黃頭老인댄 走入摩耶腹內藏이어다 古人이 道호대 摩耶肚裏堂이여 法界體一如라하시니 若是法界體인댄 爲相가 爲非相가 非相非非相이여 諸佛所同歸니 要見黃頭老인댄 便向此中尋이어다 此語가 三十年前엔 未得分曉어니와 三十年後엔 一似擲地金聲在리라

妙圓하고 眞淨한 劫前(時空의 전)의 몸이여. 知見을 가지고 망녕되이 親疎하지 말지어다. 色을 보고 소리를 들음은 세상에 本來 항상한 일이니 色과 聲을 떠나서 따로 眞을 구하지 말지어다. 옛사람이 이르되 道는 見聞覺知에 속하지도 않고 또한 견문각지를 떠나지도 않는다 하시니라. 견문각지에 즉하여 도를 구하여도 또한 틀렸음이요, 견문각지를 떠나서 도를 구하여도 또한 틀렸음이라. 色聲에 즉하여 부처를 구하여도 또한 틀렸고, 色聲을 떠나서 부처를 구하여도 또한 틀렸음이니 틀린 것을 가지고 틀린 데에 나아감이여, 雪上加霜이로다. 이와 같이 부처를 볼 것 같으면 마침내 부처를 볼 수 없으니 그대가 지금 黃頭老를 보고자 하면 摩耶의 뱃속으로 뛰어 들어갈지어다. 옛사람이 이르되 마야 뱃속의 집(法堂)이여. 法界의 體는 하나라고 하시니, 만약 法界의 體인댄 相이 되는가. 非相이 되는가. 相도 아니고 非相도 아님이니 모든 부처가 같이 돌아가는 바이므로 黃頭老를 보고자 하면 곧 이 속을 向해서 찾을지어다. 이 말이 삼십年 전에는 分明하지 못했으나 삼십年 후에는 마치 쇠를 땅에 던지는 듯한 (分明한) 소리를 내리라.

 

第二十七 無斷無滅分(단멸이 없음)

須菩提야 汝若作是念호대 如來가 不以具足相故로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야 須菩提야 莫作是念호대 如來가 不以具足相故로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하라

“수보리야, 네가 만약 이런 생각을 하되 ‘여래는 구족한 상을 쓰지 않는 연고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하느냐. 수보리야, ‘여래는 구족한 상을 쓰지 않는 연고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이런 생각을 하지 말라.

 

須菩提야 汝若作是念호대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는 說諸法斷滅가 莫作是念이니

수보리야, 네가 만약 이런 생각을 하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사람은 모든 법이 단멸했다고 말하는가’한다면 이런 생각도 하지 말지니,

 

何以故요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는 於法에 不說斷滅相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發한 사람은 법에 있어서 단멸상을 말하지 않느니라.

설의 訶相與非相은 恐伊落斷常이니 若謂佛無相인댄 早已成斷滅이니라

相과 非相을 꾸짖은 것은 斷(不定)과 常(肯定)에 떨어질까 염려함이니 만약 부처는 相이 없다고 말하면 벌써 이미 斷滅은 이루었음이다.

 

야부 剪不齊兮여 理還亂이요 拽起頭來割不斷이로다

잘라서 가지런하지 않음이여. 다스려도 도리어 어지러워짐이요. 머리를 끌어 일으켜 잘라도 끊어지지 않도다.

설의 剪欲其齊나 不能使之齊며 理欲無亂이나 不能使之無亂이며 拽來割欲斷이나 不能使之斷이니 伊麽則雖云無色聲이나 亦不碍色聲이로다

잘라서 가지런히 하고자 하나 能히 그로써 가지런하지 못하며 다스려서 어지럽지 않게 하고자 하나 能히 어지럽지 못하게 하며 이끌어와서 잘라 끊고자 하나 能히 그것으로써 끊어지지 않으니 이러한즉 비록 色聲이 없다고 하나 또한 色聲에 걸리지도 않도다.

야부 不知誰解巧安排오 捏聚依前又放開로다 莫謂如來成斷滅하라 一聲이 還續一聲來로다

알 수 없어라. 누가 교묘히 安排함을 아는가.

잡았다가 예전처럼 또 놓아주도다.

如來가 斷滅을 이뤘다고 말하지 말라.

한소리가 또 한소리를 이어오도다.

설의 旣言非諸相하고 又道是具足이여 恐人生斷見하야 再言莫作念이니라

이미 모든 相이 아니라 말하고 또 具足이라 말함이여, 사람들이 斷見을 낼까 염려하여 거듭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말하느니라.

 

第二十八 不受不貪分(받지도 않고 탐하지도 않음)

須菩提야 若菩薩이 以滿恒河沙等世界七寶로 持用布施어든 若復有人이 知一切法無我하야 得成於忍하면 此菩薩이 勝前菩薩의 所得功德이니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항하의 모래수와 같은 세계에 가득찬 칠보를 가지고 보시하더라도 만약 또 어떤 사람은 일체법이 아가 없음을 알아서 인(忍)을 얻어 이루면 이 보살은 앞의 보살이 얻은 공덕보다 수승하리라.

설의 布施不住於相을 前贊福等十方虛空하시고 知法無我하야 得成於忍을 今贊福勝河沙布施하시니 今此一言이 可以攝前住降等意니 所謂不貪不受가 蓋是住修降心之意也니라

布施하되 相에 住하지 않는 것을 앞에서는 그 복이 十方虛空과 같다고 稱讚하시고 法이 我가 없음을 알아서 忍을 成就한 것을 지금엔 福이 恒河沙 布施보다 수승하다고 찬탄하시니 지금의 一言이 앞의 ‘머물고 降伏받는’等의 뜻을 포함한 것이니라. 이른바 탐하지도 않고 받지도 않는다는 것은 대개 住하고 닦고, 마음을 降伏받는 뜻이니라.

야부 耳聽如聾이요 口說如啞로다

귀로 들어도 귀머거리 같고

입으로 말하여도 벙어리와 같도다.

설의 知法無我하면 則彼我相이 泯이요 得成於忍하면 則能所情이 忘이니 能所情이 忘則無念智가 現하고 彼我相이 泯則平等理가 現이니라 到伊麽時하야는 眼見耳聞에 分別不生이요 開口動舌에 分別不生이니 不生不生하면 何啻如聾若啞리오 直如明鏡照物과 空谷應聲하야 熾然照應호대 而無照應하리니 所以로 道호대 常應諸根用호대 而不起用想이라 劫火가 燒海底하고 風鼓山相擊하야도 眞常寂滅樂은 涅槃相이 如是라하시니라

法이 我가 없음을 알면 곧 彼我相(너다 나다 하는 생각)이 없어짐이요, 忍을 얻어 成就하면 곧 能所의 情(주관과 객관의 생각)을 잊을지니 能所의 情이 없어지면 無念智^가 나타나고 彼我相이 없어지면 平等의 이치가 나타남이니라. 이런 경지에 이르러서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에 分別이 나지 않음이요, 입을 열고 혀를 움직여도 分別이 나지 않음이니, 나지 않는 것까지도 나지 않으면 어찌 귀머거리 같고 벙어리와 같을 뿐이리오. 이는 곧 밝은 거울이 사물을 비춤과 같고 빈 골짜기가 소리에 應함과 같아서 熾然히 비추고 應하되 비추고 應한다함이 없으리니, 그러므로 말하되 항상 모든 根(六根)에 應하여 쓰되 그 쓴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음이라. 劫의 불이 바다밑까지 태우고 바람이 몰아쳐 산이 무너져 내리더라도 참답고 항상한 寂滅의 즐거움인 涅槃의 모습은 이와 같다 하시니라.

야부 馬下人因馬上君하야 有高有下有疎親이러니 一朝에 馬死人歸去하니 親者가 如同陌路人이라 秪是舊時人이 改却舊時行履處로다

말(馬)을 모는 사람이 말 위의 임금으로 인하여

높음도 있고 낮음도 있어서 疎親이 있더니,

하루아침에 말이 죽고 임금도 돌아가시니

그 친하던 사람들은 길가는 사람(무관한 사람)과 같음이라.

다만 이 옛時節의 사람도

옛時節에 놀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음이로다.

설의 窮寒淸苦拙郞君이 本來無馬亦無人이러니 自有馬人分高下하야 親反成疎疎反親이라 一朝에 馬死人歸去하니 親者如同陌路人이라 馬死人歸親亦疎하니 依舊窮寒拙郞君이로다 又淸淨本解脫이여 我人相이 元無러니 自有我人相으로 高下執情生이라 高下情生與道疎하고 無明三毒以爲親이로다 我人山向一念摧하니 所親三毒이 反成疎라 反成疎여 依舊淸淨本解脫이로다

궁핍하고 옹졸한 사람이 本來는 말(馬)도 없고 사람(임금)도 없더니 말과 사람이 있음으로부터 高下가 나뉘어져 親한 이는 도리어 멀어지고 먼 사람은 도리어 親해지도다. 하루아침에 말이 죽고 임금도 돌아가니 그 친하던 사람들은 마치 길가는 사람과 같아지도다. 말이 죽고 임금도 돌아가 버리니 親한 이들이 또한 멀어져서 예전처럼 궁핍하고 옹졸한 사람이 됨이로다.

또한 淸淨한 本來의 解脫이여, 我 人의 相이 元來 없더니 我 人의 相이 있음으로부터 높고 낮은 執着의 情이 생김이라. 高下의 情이 생기니 道와는 멀어지고 無明과 三毒이 도리어 親해지도다. 我 人의 山이 한 순간에 무너지니 친하던 三毒이 도리어 멀어지도다. 도리어 멀어짐이여. 예전처럼 淸淨한 本來의 解脫이로다.

 

何以故오 須菩提야 以諸菩薩이 不受福德故니라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야, 모든 보살은 복덕을 받지 않는 까닭이니라.”

설의 知法無我하야 得成於忍이 何勝布施之福耶아 布施는 但住相이라 福德이 爲究竟이어니와 菩薩은 則不然하야 通達法性空이라 福德도 尙不受일새 所以爲勝也니라

法이 無我임을 알아서 忍을 成就한 것이 어찌 布施한 福德보다 殊勝한 것인가. 布施는 다만 相에 住한 것이어서 福德을 究竟으로 삼거니와 菩薩은 그렇지 않아서 법의 性品이 空함을 通達하여 福德도 오히려 받지 않는 까닭에 殊勝함이 되느니라.

 

須菩提가 白佛言하사대 世尊하 云何菩薩이 不受福德이나잇고 須菩提야 菩薩의 所作福德은 不應貪着일새 是故로 說不受福德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보살이 복덕을 받지 않습니까.” “수보리야, 보살의 지은 바 복덕은 응당 탐착하지 않음이니 이 까닭에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말하느니라.

설의 了知福德이 元無性하면 不應於中에 生染着이니 貪求已泯徹底空이라 日入萬金渾不知니라

福德이 元來 性品이 없음을 알면

應當 그 가운데 물들고 執着함을 내지 않으리니

탐하고 구함이 이미 없어져 徹底하게 空하도다.

하루에 만금이 들어와도 혼연히 알지 못함이니라.

 

야부 裙無腰袴無口로다

치마엔 허리가 없고 바지는 입구가 없도다.

설의 裙袴가 雖然在나 與無却一般이니 經云不受福이 其旨正如斯니라

치마와 바지가 비록 있으나 없는 것과 같으니 經에 이르되 복을 받지 않음은 그 뜻이 바로 이러하도다.

야부 似水如雲一夢身이여 不知此外에 更何親고 箇中에 不許容他物하니 分付黃梅路上人이로다

물과 같고 구름 같은 한 꿈의 몸이여,

알 수 없어라. 이것 外에 다시 무엇과 親하리오.

이 가운데는 어떤 것도 용납을 불허하노니

黃梅의 路上人에게 分付함이로다.

설의 只此一夢身이 似水無情하야 逐處方圓하며 如雲無心하야 捲舒自由하니 此外에 別無親이라 何物이 此中歸리오 曠然無人縛하니 解脫을 更何求아 信老가 曾將此消息하야 分付黃梅路上人이로다

다만 이 꿈 같은 몸은 물과 같이 생각이 없어서 곳에 따라 모나기도 하고 둥글기도 하며, 구름같이 무심하여 거두고 펴는 것이 자유로우니 이외에 달리 親할 것이 없음이라. 무슨 物件이 이 가운데 돌아오리오. 넓고 넓어 남의 속박이 없으니 解脫을 어찌 다시 구할 것인가. 信老(四祖 道信스님)가 일찍이 이 消息을 가져서 黃梅의 路上人(五祖 弘忍스님)에게 分付함이로다.

 

第二十九 威儀寂靜分(위의가 적정함)

須菩提야 若有人이 言如來가 若來若去若坐若臥라하면 是人은 不解我所說義니

수보리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는 오기도 하고 가기도 하며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한다’하면 이 사람은 나의 설한 바 뜻을 알지 못함이니라.

 

何以故오 如來者는 無所從來며 亦無所去일새 故名如來니라

무슨 까닭인가. 여래란 어디로부터 온 바도 없으며 또한 가는 바도 없으므로 여래라 이름하느니라.

설의 前言不可以身相으로 得見如來며 不可以三十二相으로 得見如來며 佛을 不應以具足色身으로 見이며 不應以三十二相으로 觀如來라하시니 此는 皆明佛非有相이요 次言莫作是念호대 如來가 不以具足相故로 得阿耨菩提라하시니 此는 明佛非無相이요 此言無所從來며 亦無所去라하시니 此는 明佛無去來니라 伊麽則眞法性身은 非相非非相이라 性相이 相融이요 無去亦無來라 動靜이 一如로다

앞에서는 가히 身相으로써 如來를 볼 수 없다고 하며 가히 三十二相으로써도 如來를 볼 수 없다 하니, 부처님은 응당 具足한 色身으로도 볼 수 없으며 또한 응당 三十二相으로도 如來를 관하지 못한다 하시니라. 이것은 다 부처가 相이 있지 않음을 밝힌 것이로다. 다음에 말하길 “이런 생각을 하지 말되 如來가 具足한 相으로써 阿耨菩提를 얻은 것이 아니다”라고 하시니 이것은 부처가 無相이 아님을 밝힌 것이요. 여기에선 말하길 “어디로부터 온 바도 없으며 또한 가는 바도 없다” 하시니 이것은 부처란 去來가 없음을 밝힌 것이니라. 이러한즉 참다운 法性身은 相도 아니며 相아님도 아닌 것이라. 性과 相이 서로 융통함이요,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음이라. 動과 靜이 一如함이로다.

 

야부 山門頭에 合掌하고 佛殿裏에 燒香이로다

山門 앞에서 合掌하고 佛殿에 들어가 香을 사룬다.

설의 雖云無去來나 山門殿裏에 進止從容하며 合掌燒香에 威儀炳著로다

비록 그렇게 去來가 없다 하나 山門과 佛殿에서 나아가고 머물음이 법다우며 合掌하고 향사루는 威儀가 환히 나타남이로다.

야부 衲捲秋雲去復來하니 幾廻南岳與天台오 寒山拾得을 相逢笑하니 且道하라 笑箇甚麽오 笑道同行步不擡니라

衲僧이 가을 구름을 거두어 가고 또 오니,

몇 번이나 南岳山과 天台山을 돌았던가.

寒山과 拾得이 서로 만나 웃으니,

또 말하라. 그 웃음은 무엇인가.

동행하되 한 걸음도 옮기지 않음을 웃어 보이도다.

설의 飄然一條衲이 來去雲無心이라 大千을 寄脚底하니 台岳을 經幾廻오 撞着寒山拾得하야 笑道同行步不擡로다 怎生이 是同行步不擡오 寒山은 也宜去요 拾得은 也宜來어늘 寒山之與拾得으로 來而不知去하며 拾得之與寒山으로 去而不知來하야 相緣不自由일새 取笑가 於焉在라 此衲은 不如彼하야 來去自從容이로다

표연한 一條의 衲僧이 오고가매 구름처럼 無心하도다. 大千世界를 발밑에 두니 天台山과 南岳山을 몇 번이나 돌았던가. 寒山과 拾得이 만나서 동행하되 걸음을 옮기지 않음을 웃어주도다. 누가 동행하되 걸음을 옮기지 않는 것인가. 寒山은 마땅히 가야하고 拾得은 마땅히 와야 하는데 寒山과 더불어 拾得은 오기만 하고 拾得은 寒山과 더불어 가기만 하고 올 줄을 몰라서 서로 因緣함이 자유롭지 못하여 웃음을 취한 것이 여기에 있도다. 이 衲僧은 저들과 같지 않아서 오고감이 스스로 조용하도다.

第三十 一合理相分(한 덩어리의 이치)

須菩提야 若善男子善女人이 以三千大千世界로 碎爲微塵하면 於意云何오 是微塵衆이 寧爲多不아 [須菩提가 言하사대] 甚多니다 世尊하

수보리야,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삼천대천세계를 부수어 작은 먼지로 만든다면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작은 먼지들이 얼마니 많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야부 若不入水면 爭見長人이리오

만일 물에 들어가지 아니하면 어찌 큰 사람인 줄 알리오.

설의 黃葉非錢이 是則固是나 理非言外라 卽言卽理니 何須拂去文字코 別求忘言之旨乎아 敎海裏에 得大解脫하고 知解上에 建大法幢하야사 乃可謂寬腸沒量大人也니라 又今師가 直取塵界하야 以明衲僧의 不斷煩惱코 而入涅槃之義也니 伊麽則所謂微塵은 塵勞業用이 熾然競作之謂也니라 若向塵勞中하야 任性浮沈하야 而得自在하면 則可謂寬腸沒量大人也니 須信道어다 霜天에 知勁草요 火裏에 見精金이니라

黃葉이 돈이 아님은 옳기는 옳으나 이치는 말 밖의 것이 아니니라. 말에 卽하고 이치에 卽하니 어찌 모름지기 文字를 털어버리고 따로 말을 잊은 뜻을 구하겠는가. 가르침의 바다 속에서 大解脫을 얻고 알음알이(知解) 위에서 큰 法의 깃대를 세워야 이는 가히 속(腸)이 限量없이 넓은 大人이라 이를지니라. 또한 이제 야부 스님께서 바로 微塵世界를 取하여 이로써 衲僧의 煩惱를 끊지 않고 涅槃에 들어가는 뜻을 밝힘이니, 이러한즉 이른바 微塵은 塵勞業用이 熾然히 다투어 지음을 말함이니라. 만약 塵勞中을 向하여 性品에 맡겨 부침해서 自在를 얻으면 곧 가히 속(腸)이 限量없이 넓은 大人이라 이를지니 모름지기 믿을 지어다. 서리 내린 날에야 굳센 풀을 알게되고 불 속에서야 精金을 볼 수 있느니라.

야부 一塵纔起翳磨空하니 碎抹三千數莫窮이로다 野老는 不能收拾得하야 任敎隨雨又隨風이로다

한 먼지가 막 일어나니 그 먼지들은 虛空을 간 듯하고

三千世界를 가루로 부수니 그 수를 다 셀 수 없도다.

野老는 能히 거두고 收拾하지 못하여

가르침에 맡겨 비를 따르고 또한 바람을 따르도다.

설의 名數之於靈覺에 猶微塵之於太淸이니 微塵을 不勝數라 名數도 亦如然이로다 衲僧은 自知無一字하야 從敎名數亂縱橫이로다 又箇裏에 從來無一物하니 瑩若淸空絶點霞라 一念纔起性空暗하니 諸妄이 競作浩無邊이로다 衲僧은 自知妄元無하야 無心除斷任浮沈이라 休笑此衲不斷妄하라 火裏生蓮終不壞로다

名數(이론 · 교리)는 靈覺(心性)에 있어서 마치 작은 먼지가 맑은 虛空에 있음과 같아서 먼지를 다 셀 수 없음이라. 名數도 또한 그러함이로다. 衲僧은 스스로 한 글자도 없음을 알아서 저 名數가 어지럽게 縱橫함에 맡기도다. 또 그 속엔 從來로 一物도 없어서 밝기가 맑은 하늘과 같이 한 점의 노을도 끊어짐이라. 한 생각이 막 일어나면 性品의 하늘을 어둡게하는 것이니, 온갖 妄念이 다투어 일어나서 넓기가 가이없도다. 衲僧은 스스로 妄念이 元來 없는 줄 알아서 없애고 끊음에 무심하여 일어나고 스러짐에 맡기도다. 이 衲僧이 妄을 끊지 않는다고 웃지 말라. 불 속에서 연꽃이 나와야 마침내 무너지지 않느니라.

 

世尊하 如來所說三千大千世界가 卽非世界일새 是名世界니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설하신 삼천대천세계는 곧 세계가 아니고 그 이름이 세계입니다.

 

何以故오 若世界가 實有者인댄 卽是一合相이니 如來가 說一合相은 卽非一合相일새 是名一合相이니이다

왜냐하면 만약 세계가 실로 있는 것이라면 곧 한 덩어리의 모양이니, 여래께서 설하신 한 덩어리의 모양도 한 덩어리의 모양이 아니고 그 이름이 한 덩어리의 모양입니다.”

 

須菩提야 一合相者는 卽是不可說이어늘 但凡夫之人이 貪着其事니라

수보리야, 한 덩어리의 모양이란 곧 이를 말할 수 없거늘 다만 凡夫들이 그 일에 탐착할 뿐이니라.

설의 微塵이 旣非實有인댄 三千도 亦非實有니 三千이 非實이로대 而有三千之名者는 但假其名하야 以分其界而已라 而其實則豈有三千之異乎아 何以故然고 一地는 是實이요 三千은 是假니 一地가 是實故로 爲一合相也요 三千이 是假故로 非一合相也니라 三千이 若實인댄 卽是一合相이요 而非異相이로대 但是異相이요 而非一合相일새 所以로 三千이 卽非實有니 三千이 旣非實有인댄 一地도 亦非實有니라 何則고 三千이 不外乎一地하고 一地도 亦不外乎三千이니 是眞一合相이라 言詞相이 寂滅이어늘 但諸凡夫人이 不解其所以하야 語三千而取三千之名하고 語一地而生一地之解하나니 以明名數가 旣非實有인댄 三乘도 亦非實有니라 三乘이 非實이로대 而有三乘之名者는 但假其名하야 以接其根而已라 而其實則豈有三乘之異乎아 何以故然고 一乘은 是實이요 三乘은 是權이라 一乘이 是實故로 爲一合相也요 三乘이 是權故로 非一合相也니라 三乘이 若實인댄 卽是一合相이요 而非異相이로대 但是異相이요 而非一合相일새 所以로 三乘이 卽非實有니 三乘이 旣非實有인댄 一乘도 亦非實有니라 何則고 三乘이 不外乎一乘하고 一乘도 亦不外乎三乘이니 是眞一合相이라 言詞相이 寂滅이어늘 但諸凡夫人이 不解其所以이하야 語三乘而取三乘之名하고 語一乘而生一乘之解하나니 所謂錯認何曾解方便者가 是已니라 只如一合相은 且作麽生道오 諦緣六度幷一乘이 混然一味難分析이로다 非一合相은 又作麽生道오 一河雖然不可分이나 象馬兎三이 爭奈異아 伊麽則非但異相不應執이라 一合相亦不可守니라

微塵이 이미 實로 있지 않다면 三千世界도 또한 實로 있지 않으니 三千이 實이 아니로되 三千이라는 이름이 있는 것은 다만, 그 이름을 빌려서 그 世界를 나눴을 뿐이니라. 그것이 實인즉 어찌 三千의 다름이 있겠는가. 무슨 까닭에 그러한가. 하나의 땅은 實이요 三千은 거짓된 것이니 하나의 땅은 實인 故로 一合相이 되고 三千이 거짓인 故로 一合相이 아니다. 三千이 만약 實이라면 곧 一合相이요 다른 相이 아니로되 다만 이 다른 相이요, 一合相이 아닌 까닭에 三千이 곧 실로 있지 않으니 三千이 실로 있지 않을진대 一地도 또한 실로 있는 것이 아니니라. 어찌하여 그런가. 三千이 一地 밖의 것이 아니고 一地도 또한 三千 밖의 것이 아님이니 이는 참된 一合相이로다. 말(言詞相)이 寂滅하거늘 다만 모든 凡夫들이 그 까닭을 알지 못하여 三千을 말하면 三千의 이름을 取하고 一地를 말하면 一地의 알음알이를 내나니 이로써 이미 名數가 실로 있지 않음인댄 三乘도 또한 실로 있지 않음을 밝힘이니라. 三乘이 실이 아니로되 三乘의 이름이 있는 것은 다만 그 이름을 빌려서 그 근기들을 提接할 따름이니라. 그 사실인즉은 어찌 三乘의 다름이 있겠는가. 무슨 까닭에 그러한가. 一乘은 實이요 三乘은 權이라 一乘이 實인 故로 一合相이되고 三乘이 權인 故로 一合相이 아니다. 三乘이 만약 실이라면 곧 一合相이고 異相이 아니로되 다만 異相이고 一合相이 아닌 까닭에 三乘이 곧 實有가 아니니 三乘이 이미 實有가 아님인댄 一乘도 또한 實有가 아니니라. 왜 그런가. 三乘이 一乘 밖의 것이 아니고 一乘도 또한 三乘 밖의 것이 아니니 이는 참된 一合相이라. 말이 寂滅하거늘 단지 모든 凡夫들이 그 까닭을 알지 못하여 三乘을 말하면 三乘의 이름을 取하고 一乘을 말하면 一乘의 알음알이를 내나니 이른바 잘못 안 것이로다. “어찌 일찍이 方便인 줄 알리오”한 것이 이것이니라. 다만 저 一合相은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四諦, 十二因緣, 六度와 아울러 一乘이 혼연히 한 맛이라서 分析하지 못하겠도다. 一合相이 아님은 또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하나의 강물은 비록 나누지 못하나 코끼리, 말, 토끼 셋이 다름은 어찌 하겠는가. 이러한즉 非但 異相이라 해서 마땅히 執着하지 않을 뿐 아니라 一合相도 또한 가히 지킬 것이 아니니라.

 

야부 捏聚放開여 兵隨印轉이로다

집합시키고 해산시킴이여. 병사들은 印(지휘)을 따라 움직이도다.

설의 有時엔 開三하고 有時엔 合一하니 合一卽三이며 開三卽一이라 三一이 相離하고 三一이 相卽하니 非三而三이요 非一而一이라 三一이 俱非하고 三一이 俱是하니 伊麽則殺活이 臨時요 收放이 自由로다

어떤 때는 셋으로 열고 어떤 때는 하나로 合하니 하나로 合한 것이 곧 셋이고 셋으로 연 것이 곧 하나로다. 三과 一이 서로 떠나고 三과 一이 서로 卽하니 三이 아니로되 三이요 一이 아니로되 一이라. 三과 一이 모두 틀리고 三과 一이 모두 옳으니 이러한즉 죽이고 살리는 것이 때에 따름이요 거두고 놓음이 자유롭도다.

야부 渾成兩片이요 擘破劫團圓이라 細嚼莫咬破하야사 方知滋味全하리라

한 덩어리(渾)가 두 조각을 이룸이요

쪼갠 것이 도리어 한 덩어리로다.

잘게 씹되 쪼개지는 말아야

바야흐로 그 맛이 온전함을 알리라.

설의 咬破는 他本에 作空碎라

欲言非異나 爭奈異며 欲言非一이나 爭奈一이리오 欲空三一還三一이라 三一이 方知本圓成이로다 又一本에 云細嚼莫空碎라하니 理之極致는 要須着意精詳이요 不應偶爾念過니라 古人이 道호대 知有底人은 細嚼來嚥하고 不知有底人은 一似渾呑可棗라하시니 末後圓成處는 精詳하야사 始應知니라

(쪼개다(咬破)는 다른 책에 완전히 부수다(作空碎)로 되어있음) 다르지 않다고 말하고자 하나 다른 것을 어찌할 것이며 하나가 아니라고 말하고자 하나 하나임을 어찌하리오. 三과 一을 비우고자 하나 도리어 三과 一이라. 三과 一이 바야흐로 本來 圓滿히 이룬 것임을 알겠도다. 또 다른 책에 이르되 잘게 씹되 부수지는 말라고 하니 이치의 극치는 마음을 써서 자세하게 할 필요가 있음이요. 應當히 아무렇게나 생각으로 지나치지 말지니라. 옛사람이 이르되 有를 아는 사람은 가늘게 씹어 삼키고 有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대추를 통째 삼키는 것과 같다고 하시니 마지막에 圓滿히 이루는 곳은 자세히 살펴야 비로소 應當히 알지니라.

 

第三十一 知見不生分(지견을 내지 않음)

須菩提야 若人이 言佛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이라하면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是人이 解我所說義不아 不也니이다 世尊하 是人이 不解如來所說義니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부처님이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을 말하였다’한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사람은 나의 말한 바 뜻을 이해하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 사람은 여래께서 말씀하신 뜻을 알지 못합니다.

 

何以故오 世尊이 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은 卽非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일새 是名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이니이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세존께서 말씀하신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은 곧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이 아니고 그 이름이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입니다.”

 

須菩提야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는 於一切法에 應如是知하며 如是見하며 如是信解하야 不生法相이니

“수보리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사람은 모든 법에 응당 이와 같이 알며 이와 같이 보며 이와 같이 믿어서 법이란 상을 내지 않아야 하느니라.

 

須菩提야 所言法相者는 如來說卽非法相일새 是名法相이니라

수보리야, 말한 바 법상이란 여래가 설하되 곧 법상이 아니고 그 이름이 법상이니라.

설의 正顯法相이 卽非法相하사 合上塵界非塵界之喩也니 所說이 無量이어늘 特擧四見者는 此是三乘의 所斷麤細惑之總名이며 八萬四千諸妄染之頭數라 故로 上來에 頻說之하시고 於此에 特擧問耳니 意通明能治所治一切諸法이 皆非實有也니라 佛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이 卽非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이라하시니 以此例之컨댄 則佛說四聖諦가 卽非四聖諦요 佛說十八不共法이 卽非十八不共法이며 乃至八萬四千多羅尼門이 卽非八萬四千多羅尼門이로다 伊麽則從初轉四諦로 至今談般若히 所說諸法이 無一字도 可以掛在目前이며 無一言도 可以記在胸中이니 所謂一相一味가 究竟涅槃이라 常寂滅相이 於是乎現이로다 於此에 可以悟佛知見이며 入佛知見이요 於此에 可以發眞正信心이며 得眞正妙解也니 豈可泥言敎而爲究竟하야 墮在名數之中也리오 所以로 云호대 發菩提心者는 於一切法에 應如是知見하며 如是信解하야 不生法相이라하시고 以至云所言法相者는 卽非法相일새 是名法相이라하시니 一切法三字가 總該大小乘法이요 非法相三字가 通明所說諸法이 皆歸實相妙空이로다 怎生이 是皆歸實相妙空하고 千重百匝無廻互하니 大家靜處薩婆訶로다

正히 法相은 곧 法相이 아님을 나타내사 위에서 塵界는 塵界가 아닌 비유에 합함이니, 說한 바가 限量없거늘 특별히 四見을 든 것은 이것이 三乘들의 끊은 바 거칠고 微細한 迷惑의 총이름이며 八萬四千 모든 妄染의 첫머리(頭數)인 것이라. 그러므로 위에서 자주 그것을 說하시고 여기에서도 특별히 물음을 들었을 따름이니 뜻은 能治, 所治(다스림과 다스려질 것)의 一切 모든 法이 다 실로 있지 않음을 통틀어 밝힘이니라.

부처님께서 說하신 我見, 人見, 衆生見, 壽者見은 곧 我見, 人見, 衆生見, 壽者見이 아니라 하시니 이것으로써 예를 들면 즉 부처님이 說하신 四聖諦가 곧 四聖諦가 아님이요 부처님이 說하신 十八不共法이 곧 十八不共法이 아니며 내지 八萬四千多羅尼門이 곧 八萬四千多羅尼門이 아님이로다. 이러한즉 처음 四諦를 전함으로부터 지금의 般若를 말씀하신 데까지 說하신 모든 法이 한 글자도 가히 눈앞에 걸려 있지 않으며 한 말씀도 가히 가슴 가운데 기억해 두지 않음이니, 소위 一相一味가 究竟涅槃인 것이니라. 항상 寂滅한 모습은 여기에 나타남이로다. 여기에서 부처님의 知見을 깨달아야 할 것이며, 부처님의 知見에 들어가야 하고, 여기에서 眞正한 信心을 發해야 하며, 眞正한 妙解를 얻어야 함이니, 어찌 가히 言敎에 빠져서 究竟을 삼아 名數 가운데 떨어져 있으리오. 그러므로 이르되 菩提心을 發한 자는 一切法에 응당 이와 같이 알고 보며 이와 같이 믿고 이해하여 法相을 내지 말라 하시니라. 이로써 이르되 말한 바 法相이란 곧 法相이 아니고 그 이름이 法相이라 하시니 ‘一切法’ 세글자는 총히 大小乘을 포함하고 있음이요, ‘非法相’ 세글자는 통틀어 말한 바 모든 法이 다 實相妙空에 돌아감을 밝힘이로다. 무엇이 다 實相妙空에 돌아가는가. 천 번 거듭하고 백 번 돌아도 돌아오지 않으니 大家(大衆)가 靜處에서 薩婆訶(成就)함이로다.

야부 飯來開口하고 睡來合眼이로다

밥이 오면 입을 벌리고 잠이 오면 눈을 감도다.

설의 黃面老子가 從寂滅場하사 入生死海하시어 張大敎網하사 漉人天魚하시니 無一衆生도 入彼網中이로다 何以故然고 人人이 有脚하야 要行卽行하고 要住卽住라 不要別人이요 介介가 有手하야 要捉卽捉하고 要放卽放이라 不借他力이며 以至飯來開口하고 睡來合眼히 一切自由하야 不借他能이니 旣然如是인댄 何有衆生이 爲佛所度리오 伊麽則四十九年을 伊麽來하사 終無得物空手廻로다

黃面老子가 寂滅道場으로부터 生死의 바다에 들어가시며 큰 가르침의 그물을 펼쳐서 人天의 고기를 건지시니, 한 衆生도 저 그물 속에 들어가지 않았도다. 어찌하여 그런가. 사람사람이 다리가 있어서 行하고자 하면 곧 行하고 住하고자 하면 곧 住함이라.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음이요, 개개인이 손이 있어서 잡고자 하면 곧 잡고 놓고자 하면 곧 놓음이라. 남의 힘을 빌리지 않으며, 이로써 밥이 오면 입을 벌리고 잠이 오면 눈을 감는데 이르기까지 一切가 자유로워서 남의 能力을 빌리지 않으리니 이미 이와 같을진대 어떤 衆生이 부처님의 제도할 바가 되리오. 이러한즉 四十九年을 이렇게 와서 마침내 얻은 것 없이 빈손으로 돌아갔음이로다.

야부 千尺絲綸直下垂하니 一波纔動萬波隨라 夜靜水寒魚不食하니 滿船空載月明歸로다

천 자나 되는 긴 실을 곧게 드리우니

한 물결이 막 일어나매 만 물결이 따르도다.

밤은 고요하고 물은 차가워 고기가 물지 않으니

배에 가득히 虛空만 싣고 달 밝은 곳으로 돌아오도다.

설의 錦鱗이 正在深深處하니 千尺絲綸을 也須垂로다 佛性이 深在五蘊海하니 要以大悲로 能引出이로다 一開大悲門이여 無盡法門이 從玆始로다 無明長夜靜하고 心水本淸凉하니 淸淨妙覺性은 不受大悲化로다 生旣不受化인댄 佛亦不住世니 無底船留大智月하고 却向靑山更那邊이로다 雖然伊麽나 恐人錯會하노니 莫謂多時空下釣하라 如今에 釣得滿船歸로다

錦鱗^은 正히 깊고 깊은 데 있어서 천자의 실을 모름지기 드리웠도다. 佛性이 깊은 五蘊의 바다에 있으니 요컨대 大慈悲로써 能히 끌어내도다. 大悲의 門을 한 번 열음이여, 무진법문이 이로부터 시작됐도다. 無明의 긴 밤은 고요하고 마음의 물은 本來 淸凉하여 淸淨한 妙覺의 性品은 大悲의 敎化를 받지 않도다. 衆生이 이미 敎化를 받지 않는다면 부처도 또한 세상에 住할 것이 아니니, 밑없는 배에 大智月을 머물게 하고, 도리어 靑山에서 다시 저쪽을 向하도다. 비록 그러하나 사람들이 잘못알까 염려하노니, 오랜 歲月동안 空然히 낚시만 드리웠다고 말하지 말라. 지금 배에 가득하도록 낚아서 돌아가리라.

 

第三十二 應化非眞分(응화신은 진신이 아님)

須菩提야 若有人이 以滿無量阿僧祗世界七寶로 持用布施어든 若有善男子善女人이 發菩薩心者가 持於此經하야 乃至四句偈等을 受持讀誦하야 爲人演說하면 其福이 勝彼하리니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한량없는 아승지 세계에 가득찬 칠보를 가지고 보시할지라도 만약 또 어떤 선남자 선여인으로서 보살심을 발한 자가 이 경전을 가지되 내지 사구게 등이라도 수지하고 독송하여 남을 위해 연설하면 그 복덕이 저보다 수승하리라.

 

云何爲人演說고

어떻게 남을 위해 연설하는가.

야부 要說인댄 有甚難이리오 卽今便請하노니 諦聽諦聽하라

說하고자 하면 무슨 어려움이 있으리오.

지금 다시 청하노니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으라.

설의 只如四句를 要說인댄 有甚難이리오 卽今便請하노니 諦聽諦聽하라

다만 四句를 說하고자 하면 무슨 어려움이 있으리오.

지금 다시 청하노니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으라.

야부 行住坐臥와 是非人我와 忽喜忽瞋이 不離這箇어니와 祗這箇라하면 驀面唾하리라. 平生肝膽을 一時傾하니 四句妙門을 都說破로다

行住坐臥와 是非人我와

문득 기뻐하고 문득 성냄이, 이것을 떠나 있지 않거니와

또한 이것이라 하면 당장 얼굴에 침을 뱉으리라.

평생의 肝膽(가슴에 품고 있는 것)을 일시에 쏟아 놓으니

四句의 妙門을 모두 說破했도다.

설의 日用行住坐臥와 瞋喜是非가 畢竟承誰恩力고 要之컨댄 總不離這介니 只這介여 堂堂覿面露規模하고 了了圓成無比格이로다 然雖如是나 莫作這介會니 若作這介會하면 便是眼中屑이라 不作這介會하야사 方得契如如니 比如淸凉池가 四面皆可入이며 亦如猛火聚가 四面不可入이니라 妙門이 諒斯在하니 如今에 都說破로다

날마다 쓰는 行住坐臥와 성내고 기뻐하고 옳고 그름은 畢竟 누구의 은혜를 받은 것인가. 요컨데 모두 이것을 떠나 있지 않으니 다만 이것이여. 堂堂히 얼굴을 보아 규모를 드러내고 了了히 圓成하여 비교할 데가 없도다. 비록 그렇긴 하나 이것이라는 알음알이를 짓지 말지니, 만약 이것이라는 알음알이를 지으면 곧 이것은 눈 속의 티로다. 이것이라는 알음알이를 짓지 않아야 바야흐로 如如함에 계합할 수 있으니 비유컨대 시원한 못에는 사면으로 다 들어갈 수 있음과 같으며 또한 맹렬한 불구덩이엔 사면으로 들어갈 수 없음과 같도다. 妙門은 실로 여기에 있으니 지금에 모두 다 說破했음이로다.

不取於相하야 如如不動이니라

상을 취하지 않고 여여히 동하지 않느니라.(한결같아서 움직이지 않느니라).

설의 法界는 本無說이로대 對緣而有說이라 說法이 無自性하야 終不離法界니 若是法界體인댄 爲有아 爲空가 爲非空有아 有空은 不空이요 空有는 不有니 旣非空有인댄 中亦非中이니라 是知法界體上에 三相이 元來空寂이니 云何演說하야사 得與法界로 相應去在오 說理而卽事라 不取於空이며 說事而卽理라 不取於有며 說中而卽邊이라 不取於中이니라 故로 云不應取法이며 不應取非法이라하시니 合卽法非法之二相이요 開卽有無中之三相이라 離三相而安住實際하고 坐一如而曾不動搖니 說是經者가 妙造乎此則不見有我爲能度며 有生爲所度요 不見有法爲可說이며 有人爲能說이니라 所以로 道호대 始從鹿野苑으로 終至拔提河히 於是二中間에 未曾說一字라하시니 伊麽則內絶己躬하고 外無可化라 終日度生호대 未曾度生이요 舌頭無骨하고 語下無迹이라 終日說示호대 未曾說示니라 雖彌天敎海와 滿地葛藤이라도 如紅爐上一點殘雪이니 如是解者가 是眞正解며 如是說者가 是眞實說이니라

法界는 本來 說함이 없음이로되 因緣에 닿으면 說함이 있도다. 說法은 自性이 없어서 마침내 法界를 떠나지 않았으니 만약 이 法界의 體라면 있음이 되는가 空함이 되는가. 空도 有도 아님이 되는가. 有空은 空이 아님이고 空有는 有가 아님이니 이미 空도 有도 아니라면 그 中間도 또한 中이 아님이다. 알지어다. 法界의 體위에는 三相이 元來 空寂하니 어떻게 演說해야 法界와 더불어 서로 相應할 수 있으리오. 이치를 說하면 事에 卽함이라. 空을 取하지 말 것이며 事를 說하면 理에 卽함이라. 有를 取하지 말 것이며 中을 說하면 道에 卽함이라. 中을 取하지 말 것이니라.

그러므로 말하되 응당 法을 取하지 말 것이며 法아님도 取하지 말라 하시니, 合한즉 法과 非法의 二相이요, 연즉은 有, 無, 中, 三相이로다. 三相을 떠나서 實際에 안주하고 一如(如如不動處)에 앉아서 일찍이 동요치 말지니 이 經을 說하는 자가 妙하게 여기에 나아간즉 我가 있어서 能히 제도함을 보지 않으며 衆生이 있어서 제도할 바가 됨을 보지 않으며, 法 가히 說할 것이 있음을 보지 않으며 사람이 있어 能히 說해야 됨을 보지 않으니라. 그러므로 이르되 처음 鹿野苑으로부터 마침내 跋提河(拘尸羅)에 이르기까지 두 中間에 일찍 한 글자도 說하지 않았다 하시니, 이러한즉 안으로는 自己를 끊고 밖으로는 가히 敎化할 것도 없음이라. 종일토록 衆生을 제도하되 일찍이 衆生을 제도하지 않음이요, 혀에는 뼈가 없고 말에는 자취가 없음이라. 종일토록 설하여 보이되 일찍이 설하여 보이지 않음이니라. 비록 하늘에 가득한 가르침과 땅에 가득한 쓸 데 없는 말들(葛藤)이라도 붉게 타는 화로 위에 한 점 잔설과 같음이니, 이와 같이 아는 자는 진정으로 아는 자이며 이와 같이 說하는 자는 참으로 眞實하게 說하는 자이니라.

야부

(圓伊三點)

설의 拂盡今時하야사 始得就體니 須知三點水가 却向裏頭圓이니라

今時(煩惱)를 떨어버려야 비로소 本體에 나아감이니 모름지기 三點의 水(∴)가 도리어 속의 원을 向하여 있음을 알지니라. (∴는 梵語의 伊자를 두고 法을 表現했음)

야부 末後一句가 始到牢關하니 直得三世諸佛이 四目相關이며 六代祖師가 退身有分이라 可謂是江河徹凍에 水泄不通이요 極目荊榛에 難爲措足이로다 到這裏하야는 添一絲毫라도 如眼中着刺요 減一絲毫라도 似肉上剜瘡이니 非爲坐斷要津이라 蓋爲識法者恐이니라 雖然恁麽나 佛法이 只如此인댄 便見陸地平沈이니 豈有燈燈續焰이리오 川上座는 今日에 不免向猛虎口中奪食하며 獰龍頷下穿珠하야 豁開先聖妙門하야 後學이 進身有路케하리니 放開一線이 又且何妨이리오 語則全彰法體요 黙則獨露眞常이며 動則隻鶴片雲이요 靜則安山列嶽이라 擧一步에 如象王回顧요 退一步에 若獅子嚬呻이니 法王法令을 當行이라 便能於法에 自在로다 秪如末後一句를 又作麽生道오 還委悉麽아 雲在嶺頭閑不徹하고 水流澗下太忙生이로다

마지막 한 구절(不取於相 如如不動)이 비로소 뇌관(牢關, 堅固한 관문)에 이르렀으니 바로 三世의 모든 부처님이 네 개의 눈으로 서로 보는 것이며 六代祖師가 물러설 分이 있음이로다. 가히 이르되 강물이 徹底히 얼었으니 물이 흐를래야 通하지 못함이요, 눈에 가시가 가득하매 발들여 놓기가 어렵도다. 이 속에 이르러서는 한 터럭을 더하더라도 마치 눈 속에 가시를 둔 것 같고 한 터럭을 빼더라도 살 위의 부스럼과 같으니, 앉아서 요긴한 길을 끊으려는 것이 아니라 대저 法을 아는 자에게 두려움이 되기 때문이니라. 비록 이러하나 佛法이 다만 이와 같을진대 문득 陸地가 平沈함을 볼 것이니 어찌 (祖師의) 燈과 燈이 불꽃(慧明)을 이음이 있으리오. 川上座(冶父)는 오늘 사나운 호랑이 입속에서 음식을 빼앗으며, 사나운 용의 턱 속에 있는 구슬 꿰는 것을 면치 못함이니, 先聖의 妙門을 활짝 열어서 後學들이 몸이 나아가는데 길이 있게 하리니 한 길을 터놓는 것이 또 어찌 방해되리오. 말한즉 온전히 法體를 나타냄이요, 묵묵한즉 홀로 眞常을 드러냄이며 움직인즉 한 마리 학이 조각구름으로 날아감이요, 고요한즉 앞산이 펼쳐짐이로다. 한 걸음을 들면 마치 코끼리가 돌아보는 듯하고 한 걸음을 물러서면 사자가 기지개를 켜며 포효하는 것 같으니 法王의 法令을 마땅히 行함이라. 곧 能히 法이 있어서 自在함이로다. 다만 저 마지막 한 구절을 또 어떻게 말할 것인가. 또한 자세히 알겠는가.

구름은 고갯마루에 걸려 한가히 걷히지 않고

물은 시내로 흐름이 너무 바쁘도다.

설의 最初敷座는 仗劍當路하야 號令天下요 末后不動은 斬盡精靈하야 秉劍歸位니 這一柄吹毛는 體絶纖塵하고 光爍太虛라 寓目者가 喪膽亡魂이요 近傍者가 身分兩段이니 直得三世諸佛이 覰不及이며 歷代祖師가 親不得이로다 伊麽則深深乎不通風이요 凜凜乎難掛目이라 終年竟歲威且險하니 不通凡聖絶去來로다 到這裏하야는 開口也錯이며 閉口也錯이라 動靜이 俱非요 進退俱失이니 此非强爲라 法爾如然이로다 雖然伊麽나 若一向收而不放하고 合而不開면 則致令後代兒孫으로 擡脚不起하야 便見陸地平沈하리니 豈有子子相傳하며 孫孫相繼리오 所以로 今日에 向荊棘林中하야 啓一線道하야 不通風處에 別通消息이니 所以然者는 無施設中에 不妨有施設이며 不風流處에 不妨有風流라 語黙動靜이 本現成이요 擧步退步가 俱自若이로다 到這裏하야는 妙用이 縱橫하야 不存軌則이라 蕩一切法도 亦在我며 建一切法도 亦在我니 如王秉劍하고 似虎戴角이라 有意氣時에 添意氣요 得寬懷處에 且寬懷로다 只如末后一句를 又作麽生道오 還委悉麽아 山不露頂雲不徹이여 望之令人總愁殺로다 澗水冷冷流太忙이여 行人이 到此快精神이로 要會箇中意하면 雙暗亦雙明하리라

最初의 敷座는 칼을 잡고 길에 나가 天下를 호령함이요, 마지막의 不動은 精靈(숱한 법답지 못한 것)들을 다 베어버리고 칼을 잡고 제 위치에 돌아옴이니 한 자루 吹毛劍의 體는 먼지 하나 붙지 않고 그 빛은 온 虛空에 빛남이라. 쳐다보는 자는 담이 녹고 혼을 잃음이요, 가까이 하는 자는 몸이 두 조각으로 나뉘게 되니, 바로 三世諸佛이 엿볼래야 미치지 못하며 歷代祖師가 親하려 해도 親할 수 없도다. 이러한 즉 깊고 깊어서 바람이 通하지 못하고 늠름하여 쳐다보기 어렵도다. 해가 가고 歲月이 다하도록 威儀가 험준하니 凡聖도 通하지 못하고 去來도 끊었도다. 이 속에 이르러서는 입을 열어도 그르치고 입을 다물어도 그르침이라. 動과 靜이 함께 틀림이요 進退가 모두 잃어버림이니, 이것은 강제로 되는 것이 아님이라 法이 依例히 그러함이다. 비록 그러하나 만약 한결같이 거두기만 하고 놓지 않으며 合하기만 하고 열지 않으면 곧 後代兒孫들로 하여금 다리를 들고 일어나지 못하게하여 문득 陸地가 平沈함을 보리니 어찌 아들과 아들이 서로 전함이 있으며 손자와 손자가 서로 계속함이 있으리오. 그러므로 오늘에 가시덤불 속을 向하여 한 길을 터 놓아서 바람이 通하지 않는 곳은 달리 消息을 通하게 하리니 이유인즉 施設이 없는 가운데 施設 있음이 방해롭지 않으며 風流아닌 곳에 風流 있음이 방해롭지 않음이라. 語黙動靜이 本來 이루어진 것이고 걸음을 들고 걸음을 물러서는 것이 모두 法道를 두지 않음이라.(저절로 그러함이라) 一切法을 없애는 것도 또한 나에게 있으며 一切法을 세움도 또한 나에게 있으니 마치 왕이 칼을 잡은 것과 같고 호랑이가 뿔이 달려있는 것과 같음이라. 意氣가 있을 때 의기를 더함이요 寬懷^를 얻은 곳에 또한 관회함이로다. 다만 저 마지막 한 구절을 또 어떻게 말할 것인가 또한 자세히 아느냐. 山은 정상을 드러내지 않고 구름도 걷히지 않음이여! 바라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두 근심스럽게 하도다. 시냇물이 冷冷히 급하게 흘러감이여. 行人이 여기에 이르르면 정신이 상쾌해지도다. 그 가운데 뜻을 알고자 하는가. 雙으로 어둡고 또한 雙으로 밝으리라.

야부 得優遊處에 且優遊하니 雲自高飛水自流로다 秪見黑風이 翻大浪하고 未聞沈却釣魚舟로다

優遊함을 얻은 곳에 또한 우유하니

구름은 저절로 높이 날고 물은 저절로 흐르도다.

다만 黑風이 큰 물결 뒤치는 것만 보고

낚싯배가 침몰함은 듣지 못했도다.

설의 自由更自由하니 閑忙이 共一時로다 風翻白浪이 尋常事라 漁艇이 從來로 不見沈이로다

자유롭고 또 자유로우니 한가하고 바쁜 것이 모두 한때로다.

바람이 흰 물결 출렁이는 것은 늘 있는 일이라. 고깃배가 從來로 침몰함은 보지 못함이로다.

 

何以故오 一切有爲法이 如夢幻泡影하여 如露亦如電하니 應作如是觀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일체의 함이 있는 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도 같으니 응당 이같이 관할지니라.

설의 演說是經에 何須不取於相하야 如如不動고 一切有爲化演之法이 若離法界하면 無自體相이 如彼六喩하야 皆非究竟이니 所以로 應如是觀하야 不取於相이니라 不取於相을 以不取三相으로 言者는 眞如自性은 非有相이며 非無相이며 非非有相이며 非非無相이라 爲破常見하사 說一切空하시고 爲破斷見하사 說一切有하시며 恐落二邊하사 說不空不有하시니 此皆對緣施設이라 非爲究竟이니라 由是로 不應取於三相하야 違彼如如妙境이니 此則單約化演說耳어니와 且通約世出世法하야 以明三觀一心一心三觀之意인댄 內而根身과 外而器界의 依正淨穢와 上至諸佛하며 下至螻蟻히 凡聖因果等法이 皆從緣有라 盡屬有爲요 因心所現이라 皆無自體가 如夢因想有하야 無自體하며 幻因物有하야 無自體하며 泡因水有하야 無自體하며 影因形有하야 無自體라 所以로 諸法이 無不是空이니라 雖無自體나 依正淨穢가 相相이 宛然하고 凡聖因果를 不可云無호미 如彼草露가 雖非常住나 暫焉得住라 所以로 諸法이 無不是假니라 旣如夢卽空이며 如露卽假요 亦如電光이 無中忽有하며 有中忽無하야 刹那卽生이며 刹那卽滅이라 有卽非有요 無卽非無니 旣非有無일새 所以로 諸法이 無非中道니라 生卽無生이며 滅卽無滅이니 生滅이 旣虛일새 所以로 諸法이 無非實相이니라 所以로 道호대 因緣所生法을 我說卽是空이라 是名爲假名이며 亦名中道義라하시니 伊麽則三相이 不離一境이며 一境이 圓含三相이라 欲言三相인댄 宛是一境이요 欲言一境인댄 宛是三相이라 三一一三이 圓融互照하니 此是如如大總相法門也니라 取於有得麽아 取於空得麽아 取於中得麽아 取三相得麽아 取一相得麽아 應觀卽三之一하야 契乎三觀一心之門하고 觀卽一之三하야 契乎一心三觀之門하며 頓超三一之外하야 安住如如妙境이니 持是經者가 入此觀門하면 不用解一理라도 會盡無量義요 說是經者가 入此觀門하면 不用說一字라도 常轉正法輪이니라 末后一偈가 妙超情謂하야 千古令人으로 洒洒落落하니 凡着讀者는 尤須着眼이어다

이 經을 演說하매 어찌 모름지기 相을 取하지 않고서 如如히 不動하는가. 모든 有爲로써 敎化하고 演說하는 法이 만약 法界를 떠나면 自體의 相이 없는 것이 저 여섯가지 비유(六喩)와 같아서 다 究竟이 못됨이니, 그러므로 應當 이와 같이 觀하여 相에 取하지 말지니라. 相을 取하지 않는 것을 三相(有, 假, 中)을 取하지 않는 것으로 말한 것은 眞如自性은 有相이 아니며 無相도 아니고 非有相도 아니며 非無相도 아니니라. 常見을 破하기 爲하여 一切가 空함을 說하시고 斷見을 파하기 爲하여 一切가 有임을 說하시며 二邊에 떨어질까 염려하여 空도 아니고 有도 아님을 說하시니, 이는 모두 因緣에 닿아서 施設하심이라. 究竟이 되지 않는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應當 三相을 取하여서 저 如如한 妙境에 위배되지 말지니라. 이것은 곧 單的으로 敎化하고 演說함을 잡아 說하였을 따름이거니와, 또한 通히 世와 出世法을 잡아서 三觀이 一心이며 一心이 三觀인 뜻을 밝힘인댄 안으로의 根身과 밖으로 器界의 依報, 正報와 淨土, 穢土와 위로는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아래로는 개미류에 이르기까지 凡聖과 因果等의 法이 다 因緣을 좇아서 있음이라. 모두 有爲에 속함이요, 마음으로 인하여 나타난 바로다. 모두 自體가 없는 것이 마치 꿈은 생각으로 인하여 있어서 自體가 없으며 幻은 사물로 인하여 있어서 自體가 없으며 물거품은 물로 인해 있어서 自體가 없고 그림자는 形相으로 인해 있어서 自體가 없음과 같도다. 그러므로 모든 법이 이 空아님이 없느니라. 비록 自體가 없으나 依 正 淨 穢의 모양모양이 分明하고 凡聖, 因果가 가히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저 풀잎의 이슬이 비록 항상 있지는 않으나 잠시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모든 法이 거짓(假)아님이 없느니라. 이미 꿈은 곧 空함과 같으며 이슬은 곧 거짓과 같으며 또한 번갯불은 없는 가운데 홀연히 있는 것과 같으며 있는 가운데 홀연히 없는 것과 같아서 刹那에 곧 生하고 刹那에 곧 滅함이라. 有가 곧 有가 아니요, 無가 곧 無가 아님이 되니 그러므로 모든 法이 中道 아님이 없느니라. 生이 곧 生이 아님이요 滅한 즉 滅함이 아니니, 生滅이 이미 텅비었으므로 諸法이 實相 아님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말하되 因緣으로 생긴 바의 法을 내가 말하되 곧 空이라. 이 이름은 假名이 되며 또한 이름이 中道의 뜻이라 하시니, 이러한즉 三相이 한 境界(一境)를 떠나지 않았으며 一境이 圓滿히 三相을 다 포함하고 있음이라. 三相을 말하고자 하면 宛然히 이 一境이요, 一境이라 말하고자 하면 宛然히 이 三相이라, 三, 一과 一, 三이 圓融하게 서로 비추니 이것이 如如한 大總相法門이니라.

有를 取할 수 있겠는가. 空을 取할 수 있겠는가. 中을 取할 수 있겠는가. 三相을 取할 수 있겠는가. 一相을 取할 수 있겠는가. 應當히 三에 卽한 一을 觀해서 三觀一心의 門에 계합하고 一에 卽한 三을 觀해서 一心三觀의 門에 계합하며, 三과 一의 밖을 단번에 초월하여 如如한 妙境에 安住함이니 이 經을 가진 사람이 이 觀門에 들어오면 한 이치의 앎을 쓰지 않았더라도 無量한 뜻을 다 알게 되고 이 經을 說하는 자가 이 觀門에 들어오면 한 글자의 說함을 쓰지 않더라도 항상 正法輪을 굴릴지니라. 마지막 한 偈頌이 妙하게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어서 千古의 사람으로 하여금 洒洒落落하게 함이니 무릇 經을 읽는 사람은 더욱더 여기에(마지막 한 偈頌) 着眼할지어다.

 

야부 行船이 盡在把梢人이로다

배를 움직임은 다 키(梢)잡은 사람에게 달려있느니라.

설의 蒿師가 行船에 要東卽東하며 要西卽西라 或東或西에 去住自由하며 洪波涌浪에 隨高隨下하나니 以觀智로 入法性波瀾하면 是則俱是요 非則俱非라 掃蕩도 亦在我며 建立도 亦在我니 我爲法王이라 於法에 自在로다

蒿師(키잡은 사람)가 배를 끌고 동으로 가고자 하면 동으로 가고 서로 가고자 하면 서쪽으로 감이라. 或 동이나 或은 서로 가려함에 가고 머무름이 자유로우며 큰 波濤가 물결치면 높고 낮음을 따르니, 觀智로 法性의 波濤에 들어가면 옳은즉 모두 옳고 그른즉 모두 그름이라. 없애는 것도 또한 나에게 있으며 建立도 또한 나에게 있음이니 내가 法王이 됨이라. 법에 있어 自在하도다.

야부 水中捉月이요 鏡裏尋頭로다 刻舟求劍이요 騎牛覓牛로다 空華陽燄이요 夢幻浮漚로다 一筆句下요 要休便休니 巴歌社酒村田樂이 不風流處自風流로다

물 속에서 달을 건지고

거울 속에서 얼굴을 찾음이로다.

배에 새겨놓아(표시) 칼을 찾으며

소를 타고 소를 찾음이로다.

虛空꽃과 아지랑이이고

꿈과 幻과 뜬 물거품이로다.

모두가 붓끝에 있음이요

쉬고 싶으면 곧 쉬나니

천한 노래와 막걸리와 시골의 즐거움들이

風流가 없는 곳에서 저절로 風流롭도다.

설의 我不是渠어늘 認影爲眞하며 日用便是어늘 向外尋眞이로다 一切皆非라 可以句下요 一切皆是라 要休便休니 村田이 何荒凉하야 固非風流處로대 歌酒樂自娛하니 是則也風流로다 六喩에 取一幻하야 以明箇中意하니 一切皆如幻이라 幻外에 無非幻이니 幻與非幻이 成一家라 頭頭自有無生樂이로다 此名大幻法門이며 亦名大幻三昧니 古今證者가 同證此大幻三昧며 古今說者가 同說此大幻法門이라 以此大幻法門으로 能作種種佛事하며 以此大幻三昧로 能現種種神變하나니 大幻之義가 何止從古于今이리오 亦乃天上天下로다 一喩가 已如是하니 餘喩도 亦如然이로다

나는 저가 아니거늘 그림자를 오인하여 眞을 삼으며 날마다 쓰는 것이 곧 이것이거늘 밖을 向해 眞을 찾음이로다. 一切가 다 아님(非)이라 가히 글귀일 뿐이요, 一切가 다 옳음(是)이라 쉬려 하면 곧 쉬나니, 시골밭이 자못 황량하여 眞實로 風流處가 아니지만 노래와 술의 낙으로 저절로 즐거우니 이것이야말로 風流로다.

여섯가지 비유에 한 가지 幻을 取하여 그 중의 뜻을 밝히노니 一切가 다 幻과 같음이라. 幻외에 幻아님이 없으니 幻과 더불어 幻아님이 一家를 이루도다. 頭頭가 스스로 無生樂이 있도다. 이 이름이 大幻法門이며 또한 이름하여 大幻三昧이니 古今에 證得한 자가 다같이 이 大幻三昧를 證得한 것이며 古今에 說한 자가 다같이 이 大幻法門을 說함이라. 이 大幻法門으로써 能히 갖가지 佛事를 지으며 이 大幻三昧로써 能히 갖가지 신통변화를 나타냄이니 大幻의 뜻이 어찌 옛부터 지금에 이르는데 그치리오(시간적). 또한 天上과 天下로다(공간적). 하나의 비유가 이미 이와 같으니 나머지 비유도 또한 그러함이로다.

 

佛이 說是經已하시니 長老須菩提와 及諸比丘比丘尼와 優婆塞優婆夷와 一切世間天人阿修羅가 聞佛所說하고 皆大歡喜하야 信受奉行하시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설하여 마치시니, 장로수보리와 모든 비구 비구니와 우바새와 우바니와 일체 세간의 천상과 인간과 아수라 등이 부처님의 설하심을 듣고 모두 다 크게 환희(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믿고 받아지니며 받들어 행하니라.

설의 靈鋒이 獨露에 四相이 俱破하고 慈雨가 普潤에 九類同沾이로다 三觀智滿하고 一乘理圓하니 四衆이 齊悟하고 群疑가 頓釋이로다 正眼이 圓明하야 心鏡이 豁爾하니 妙體實相이 瞭然目前이라 信受奉行이여 妙益이 斯在로다

신령스런 칼날이 홀로 드러나매 四相이 함께 깨뜨려지고 慈悲스런 비가 널리 적시니 九類가 다 같이 젖음이로다. 三觀의 智慧가 가득차고 一乘의 이치가 圓滿하니 四部大衆이 고르게 깨닫고 온갖 疑心들이 단번에 풀어짐이로다. 正眼이 두렷이 밝아서 마음거울이 훤하니 妙體實相이 눈앞에 分明하도다. 信受奉行이여, 妙한 利益이 여기에 있도다.

 

야부 三十年後에 莫敎忘却老僧이니 不知케라 誰是知恩者오 呵呵 將謂無人이로다

30年 후에 老僧을 忘却하지 말지니, 알 수 없어라. 누가 은혜를 아는 者인가. 하하, 장차 사람이 없다 하리라.

설의 三關을 已透에 一鏃이 遼空하니 更須奮丈夫志하야 拗折一鏃하고 向碧空外하야 相見老僧이니라 若與老僧相見하면 可謂知恩報恩이니 不知케라 誰是知恩者오 呵呵將謂無人이로다

三觀을 이미 뚫어버리고 한 화살이 멀리 虛空을 날으니 다시 모름지기 장부의 뜻을 분발하여 한 화살을 꺾어버리고 푸른하늘 밖을 向하여 老僧을 相見할지어다. 만약 老僧과 相見하면 가히 은혜를 알고 은혜를 갚는다고 할지니 알 수 없어라. 누가 은혜를 아는 사람인가. 하하, 은혜를 아는 者 끝내 없도다.

야부 饑得食渴得漿하고 病得瘥熱得涼이라 貧人이 遇寶하고 孾兒가 見孃이로다 飄舟가 到岸이요 孤客이 歸鄕이라 旱逢甘澤이요 國有忠良이로다 四夷拱手하고 八表來降이라 頭頭總是요 物物全彰이로다 古今凡聖과 地獄天堂과 東西南北을 不用思量이니 刹塵沙界諸群品이 盡入金剛大道場이로다

주림에 밥을 먹고 목마름엔 漿(간장물)을 얻으며

병든 이는 쾌차하고 더우면 시원함을 얻음이라.

가난한 이 보물을 만나고 어린이는 어머니를 만나도다.

표류하던 배가 언덕에 이르고

외로운 길손이 고향에 돌아오니

가뭄에 단비 만남이요, 나라엔 충신과 선량이 있도다.

사방의 오랑캐 예배하고 八方에서 降伏하여 오도다.

頭頭가 다 옳음이요, 物物이 온전히 드러내도다.

古 今, 凡 聖과 地獄 天堂과, 東西南北을 따로 思量하지 말지니

刹塵世界의 모든 衆生들이 모두 함께

金剛大道場에 들어가도다.

설의 佛坐道場이여 北辰이 居其所요 十方同聚여 衆星이 皆拱北이로다 諸子가 痴迷에 捨父逃逝하야 流落天涯가 爲日已曠이러니 父王이 設權하야 號令天下하니 諸子가 知非하야 今盡來歸라 各慙無知하야 願聞慈誨호대 如飢思食하며 如渴思漿하니 水澄月現이라 感應交生하야 甘露門開에 皆得法喜하며 斷常爲病하야 惱亂法身이러니 法爲良藥이라 一聞便除하며 貪愛爲熱하야 煩煎心海러니 法爲淸涼이라 一聞頓歇하며 乏功德財하야 日受貧苦러니 一聞法要에 寶藏이 現前하며 爲迷所覆하야 覺性이 不現이러니 一得開悟에 妙體昭彰하며 失正知見하야 飄沈苦海러니 方便風生에 得到彼岸하며 立令立屛五道하야 客作多年이러니 今始得歸常樂家鄕하며 惑日이 煩蒸하야 道芽燋枯러니 法雨遐霑하야 心花發明하며 心王이 作夢에 識臣이 擅權하야 淸平世界에 風塵이 競作이러니 天君이 一覺에 識變成智하니 風塵이 頓息에 六國이 晏然하며 萬法이 歸已하야 天下太平하니 千途異轍이 共向帝都라 長安路通에 萬戶千門이로다 古今也無疑碍하고 凡聖也無疑碍하며 以至地獄天堂과 東西南北이 悉無疑碍하야 不用思量이라 祇園一會가 利如斯하니 從此含靈이 盡歸源이로다

부처님이 道場에 앉음이여. 북쪽별이 그 處所에 있음이요 十方에서 함께 모임이여. 별의 무리가 모두 북쪽에 절하도다. 모든 아들이 어리석고 미하여 아버지를 버리고 도망가서 천애에 떠돌은 지라. 날이 이미 오래 됐더니 父王이 方便을 베풀어 天下를 호령하니 모든 아들들이 그릇됨을 알고 모두 와서 귀의함이라. 各各 무지함을 부끄러워하고 慈悲로운 가르침을 듣기 원하는데 주린 이가 밥을 생각하듯 하며 목마른 자가 장물을 생각하듯 하니 물이 맑으면 달이 나타남이라. 느끼고 應함에 서로서로 甘露의 문이 열리니 모두 다 法喜를 얻으며, 斷과 常이 병이 되어서 法身을 惱亂시키더니 法이 좋은 약이 됨이라. 한번 들으매 곧 없어지며 탐애가 열기가 되어서 마음바다를 번거롭게 들끓더니, 法이 청량하게 하여 한번 들으면 단번에 쉬게 되도다.

공덕의 재물이 없어서 날로 가난한 고통을 받더니 한번 法要를 들으매 보배창고가 눈앞에 나타나며 迷의 덮인 바가 되어서 覺의 性品이 나타나지 않더니 한번 깨달음을 얻으매 妙體가 밝게 나타나도다. 正知見을 잃어서 苦海에 나부끼고 침몰하더니 方便의 바람이 생겨서 彼岸에 이르르게하며 五道(六道輪廻中)에 비틀거리며 나그네된 지가 여러 해에 이르더니, 지금 비로소 항상 즐거운 고향에 돌아오도다. 迷惑의 해가 번거롭게 내리쪼여 道의 싹이 다 마르더니 법의 비(法雨)가 멀리까지 적시어서 心花가 밝게 핌이로다.

心王이 꿈을 꾸매 識의 신하가 권력을 마음대로 굴려서 淸平世界에 風塵이 다투어 지어지더니 天君이 한번 깨달으매 識이 변하여 智慧를 이루어서 風塵이 단번에 쉬고 六國(根)이 편안하여 萬法이 自己에게 돌아와서 天下가 太平하니 千의 길과 다른 자취들이 모두 서울을 向함이라. 長安으로 길이 通하매 萬戶와 天門이로다. 古今에 의심과 걸림이 없고 凡聖 또한 의심과 걸림이 없으며 지옥 천당과 동서남북에 이르기까지 아무 의심과 걸림이 없어서 思量을 쓰지 않음이로다.

祇園精舍에 한번 모인 利益이 이와 같으니 이로부터 모든 衆生이 다 근원으로 돌아감이로다.

 

 

金剛經五家解 終

참고문헌

1. 불교개론 : 저자 마쓰야 후미오. 현암사 刊

2. 불교로 가는 길 : 金月雲 편저. 經書院. 1990년

3. 禪門撮要 : 西山大師 著. 白龍城 譯. 佛書普及社.1990년

4. 동아대백과 사전

5. 한매대백과 사전

6. 불교학대사전 : 弘法院

 

 

 

 

 

 

 

금강경 오가해 야부송

金剛經 五家解 야부송 목차 冶父 第一 法會因由分(법회를 이룬 연유) 75 第二 善現起請分(선현이 법을 청하다) 102 第三 大乘正宗分(대승의 바른 종지) 117 第四 妙行無住分(묘행은 머묾이 없음)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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