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반야심경

불취어상 여여부동(不取於相 如如不動)

수선님 2024. 11. 17. 13:02

<불취어상 여여부동(不取於相 如如不動)>

<금강경> 제32분에 나오는 말이다.

『수보리여! 만약 어떤 사람이 헤아릴 수 없는 아승지(阿僧祗) 세계에 가득 찬 칠보를 가지고 보시를 한다 하더라도, 어떤 선남자 선여인으로서 보살심을 발하고 이 (금강)경이나 혹은 사구게(四句偈)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서 남을 위해 널리 일러준다면, 그 복은 저 보시한 복보다 더 나을 것이니라.

어떻게 남을 위해 일러 줄 것인가? 가르침을 전하되 전한다는 생각과 상(相)에 집착하지 말고, 항상 여여(如如)해 동요가 없어야 하느니라(云何爲人演說고 不取於相하야 如如不動).』

여기서 ‘연설(演說)'이란 말은 불타의 가르침을 남에게 설한다는 의미로 쓰고 있으며, 연(演)하여 설한다는 뜻이다. 연(演)이란, “물 흐르는 대로 그 물가를 따라서~”의 뜻이 있다.

산스크리트 원문에는 “그렇다면 어떻게 남을 위해 이 가르침을 말해 들려줄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말해 들려주려고 하지 말라! 그래야 비로소 말해 들려준다고 말할 수 있다”로 돼 있다.

이에 대해 구마라습은 「불취어상(不取於相), 여여부동(如如不動)」이라 번역했다. <금강경>의 처음과 끝이 상(相)이 핵심 사상이므로 “상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모든 유위(有爲)의 법은 꿈이나 환상 같고 물거품이나 그림자와 같으며, 마치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관(觀)해야 하기 때문이다[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그래서 무상(無相)과 여여부동(如如不動)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하여 “상을 취함이 없이, ― (만법은 무상하므로 관념, 사견 등에) 물들지 말고 여법(如法)하게 설해야 한다.”라고 했다. 살아오면서 과거 학습된(의식화된) 온갖 관념, 상념, 견해, 가치 등을 통해 세상을 보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바로 보지 못한다. 때문에 그런 것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듣는 상대가 귀하거나 천하거나, 남자든 여자든, 그런 겉모습에 마음을 두지 말고, 진리의 모습을 드러냄에 있어서 그런 것에 머무름이 없이(얽매이지 말고) ― 동요됨이 없이, 흔들리지 않음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중국 당나라 말기 임제 의현(臨濟義玄, ?~867) 선사는 수행을 함에 ‘살불살조(殺佛殺祖)’하라고 했다.

결가부좌(結跏趺坐) 한 참선(參禪)이니 안거(安居)니 하며 선(禪)의 전통을 형식적으로만 붙들고 앉아있으려는 자세를 떨어내야한다.

이것이 바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선사들의 간곡한 가르침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욕설이나 살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보다 앞선 사람들을 모델(우상)로 삼아 그에 얽매임이 있어서는 결코 그 사람을 뛰어넘을 수 없다.

어떤 전통이나 권위에도 얽매이지 말고, 여여부동 해야 읽은 경문이나 들은 법문을 뛰어넘을 수 있다. 그래야만 지금껏 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즉, 마음의 상[우상]을 멸함으로써 본래청정심을 회복해 불취어상 여여부동(不取於相 如如不動)한 제 본분을 다하라는 말이다. ‘불취어상 여여부동’, 즉 모양에 집착하지 말고, 항상 여여해서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부처나 조사에 대한 고정된 상상의 이미지는 물론, 부처나 조사들이 체득한 깨달음의 경지까지 초월해 머무름이 없는 ― 무주(無住)의 실천으로 무한한 자기향상을 이루는 깨달음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부처나 조사라는 이름과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형상(모습), 이미지나 고정관념인 형상(우상)에 얽매이지 말고, 부처나 조사의 명성이나 그에 대한 고정관념의 분별심도 떨쳐버리고 본래심의 지혜로운 선(禪) 생활이 되도록 해야 함을 의미한다.

상을 취하지 말고, 부처나 조사에 얽매이지 말고, 여여부동하게 수행하라는 말이다.

다시 한 번 되돌아보자.

어떻게 남을 위해 일러 줄 것인가?

모양(相)에 집착하지 않고, 항상 여여(如如) 해서 동요가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모든 유위(有爲)의 법은 꿈이나 환상 같고 물거품이나 그림자와 같으며, 마치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기 때문에 마땅히 이와 같이 관(觀)해야 한다.

그리고 <금강경>의 한 구절 또는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말해 준다면, 그 복은 참으로 수승하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응당 형상을 취하지 말고 일러 주어야 한다. 그것도 상대에 따라 차별을 두지 않고 항상 한결같은 마음으로 여여한 이치를 통해 동요함이 없이 일러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많은 선사들이 광대한 팔만대장경 가운데 단 한 권의 경전만을 고르라고 한다면 단연코 <금강경>을 고를 것이라 했다. 그러함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선종의 소의경전이자 동북아시아 불교권에서 가장 큰 사랑을 받은 경전으로 <반야심경>보다는 길면서 <법화경>이나 <화엄경>보다는 짧고, <능엄경>보다는 단순명쾌한 것이 특징이다.

이 <금강경>의 요지를 한 마디로 말하자면, ‘불취어상 여여부동(不取於相 如如不動)’이라 할 수 있다. 상(相)을 취하지 말고, 진여(眞如)와 같이 여여해서 마음을 동(動)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반대로 해석하면, 상을 취하기 때문에 마음이 움직인다는 뜻이다. 마음이 동한다는 말은 집착한다는 뜻한다.

그러면 상(相)이란 뭔가?

상(相)이란 단순하게 눈에 보이는 모양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광범위한 뜻으로 온갖 사물의 특징ㆍ특성을 뜻한다. 오온의 상(특성)은 색ㆍ수ㆍ상ㆍ행ㆍ식이다.

• 색(色)은 물질을 뜻하므로 허공처럼 걸리지 않는 게 아니고 걸리적거리는 게 특성이다.

• 수(受)는 느끼는 것, 느껴지는 것이 특성이다.

• 상(相)은 자기 생각, 주장, 고집, 분별을 취하는 것이 특성이다.

• 행(行)은 뭐든지 지어가는 것, 만들어가는 것이 특징이다.

• 식(識)은 이것저것에 대해 아는 것, 알음알이가 특성이다.

이와 같아서 모든 것에는 각각의 제 나름대로의 특성ㆍ특징이 있다. 왜냐면 각각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구각색(區區各色)이다.

그러면 왜 상(相)을 취하는가?

보이고 들리는 것들이 구구각색이고, 거기에 독립적인 영원한 실체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보이고 들리고 인식되어지는 그 모든 것들이 영원하다고 믿기 때문에 상을 취하게 된다.

모든 사물에 자성이 있다고 여기므로 그것에 집착하게 된다.

모든 것이 항상하고 영원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상을 취한다.

만약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땐 상을 취하지 않게 될 것이다.

실체가 없다고 안다면 거기엔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허깨비임을 안다면 마음이 동하지 않게 될 것이다.

사막의 아지랑이가 물이 아님을 안다면 더 이상 거기에 집착하지 않게 됨과 같다.

그런데 연기법, 즉 공을 깨닫지 못하면 상을 취할 수밖에 없다.

상(相)을 취한다는 것은, 내 마음에 상(相)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중생은 항상 마음으로써 상(相)을 취하고, 성인들은 상(相)을 가지지 않는다.

그리고 상(相)을 취한다는 말은, 내 마음에 드는 것이 정해져 있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내 마음에 드는 것만 고르고, 내 마음에 드는 것에 집착한다는 말이다.

그것도 대상의 본질을 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겉모습을 붙잡는다는 말이다.

취한다는 말은 마음이 거기에 달라붙어 있다는 뜻이다. 이게 집착이다.

그런가 하면, 내가 싫어하는 것은 배척한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보면 화부터 치밀어 오른다. 향미촉법 역부여시(香味觸法亦復如是)라, 향기와 맛과 감촉과 법진(法塵)에 대한 생각도 또한 이와 같게 된다. 매사에 분별심을 일으켜 좋은 것만 고르고, 싫은 것은 배척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상(相)을 취하지 않고, 자유로이 살려면 모든 사물들을 관찰하되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결국 연기법과 공성(空性)을 깨달아야 한다.

무상함을 관찰하는 것과 공을 직접 깨달음으로써 그 모든 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보이는 것이 있든 없든 들리는 것이 있든 없든 그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상을 취하는 이유는 보이고 들리는 것이 진짜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다.

진짜라고 여기니까 상을 취하게 된다. 만약 보이고 들리는 것들이 진짜가 아닌 가짜임을 안다면 더 이상 그것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즉, 마음이 움직이지 않게 된다. 마음이 거기에 달라붙지 않게 된다.

헌데 이 세상에 진짜는 단 하나도 없다. 일체제법에 실체가 없다. 모든 것이 다 거짓이고, 허깨비이다. 모든 것이 공이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말했다.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 만약 색(형상)으로 나(부처님)를 보려고 하거나 소리나 음성으로 나(부처님)를 구하는(알아보려는)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라 여래를 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건 존재건 모든 것엔 실체가 없고 거짓이다. 진짜가 아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깨달으면 그 무엇도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집착하지 않게 된다.

일체의 모든 것들, 즉 모든 상(相)을 진짜라고 여기지 않고 그 모든 것들이 모두 가짜임을 알면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는 뜻이다.

모든 것은 실체가 없이 공하며, 실체가 없으므로 그 모든 것은 거짓이다.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그 모든 것들은 진실이 아닌 거짓이다. 이걸 안다면, 불취어상 여여부동(不取於相 如如不動)할 것이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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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취어상 여여부동(不取於相 如如不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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