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에 읽는 『금강경』
불교에 대해 조금씩 관심을 가지면서 가장 좋아한 불어가 금강(金剛)과 장엄(莊嚴), 화엄(華嚴)과 연화(蓮花)였던 것 같다. 금강은 ‘모든 금속 중에서 가장 강한 금속’을 말하지만, 불교에서는 ‘일체의 번뇌를 깨뜨릴 수 있음’을 상징하고, 장엄은 ‘위엄 있고 엄숙하다’는 뜻이지만, 불교에서는 ‘공덕을 쌓아 몸을 장식하고 향이나 꽃을 부처에게 올리는 일’을 말한다. 또 화엄은 ‘만덕(萬德)을 쌓아서 덕과(德果)를 장엄하게 하는 일’연화는 진흙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깨끗하고 밝은 꽃을 피운다 하여 불자들이 선호하는 꽃으로 불당이나 탑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이다.
불교도에게 『성경』만큼이나 잘 알려진 경전이 『금강경』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실제로 읽기(讀誦)는 뭐니 뭐니해도 『반야심경』일 것이다. 그러나 『반야심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금강경』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고 『금강경』을 번역하고 해석한 이 책의 저자 유중 선생은 말한다. 260자로 이뤄진 『반야심경』에는 깨달음의 지혜, 즉 반야지혜를 압축해 담고 있는데, 그 『반야심경』이 『금강경』의 길지도, 너무 짧지도 않은 내용에 모두 녹아 있다고 한다.
『금강경』의 글자 수는 5,127자로 이를 한 글자로 줄이면 공(空)이라고 한다. 실제 『금강경』에는 한 번도 공을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공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전반부에는 공에 대한 가르침, 후반부에는 ‘공도 공하다’는 가르침을 준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금강경』은 한결같이 무아(無我)를 말하고, 이것은 ‘일체 법에는 자아도 없고, 인간도 없고, 중생도 없고, 목숨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무아법을 통달하면 참된 보살이 된다고 한다.
『금강경』에는 다섯 개의 눈을 갖도록 가르치고 있는데 다섯 개 눈이란 육안(肉眼), 천안(天眼, 혜안(慧眼), 법안(法眼), 불안(佛眼)*을 말한다. 그러면서 자아는 공하기 때문에 자아에 집착하지 말며, 법도 공하기 때문에 법에도 집착하지 말며, 공한 것도 공하기 때문에 공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한다. 자아에 대한 법과 공에 대한 법까지도 점차 버리라고 하는 것인데 그래야 참된 무아가 된다는 것이다.
*육신의 눈, 미세한 사물까지도 멀리 또는 널리 보는 눈(천안), 현상계를 차별적으로 보지 않는 지혜의 눈 성문/연각이 얻은 눈(혜안), 법안은 모든 법의 진리를 분명히 알고 보는 중생을 건지는 보살의 눈, 불안은 오직 깨달은 부처님의 눈으로 시방세계를 두루 보지만 보는 사람도, 보이는 대상도 없이 보는 눈을 말하고, 중생은 이 육안을 가졌음에도 미혹에 덮여 바로 보지 못한다.
전체적으로 『금강경』의 가르침은 이렇듯 단순하고 간결하다. 하지만 그 뜻은 깊고 심오하다. 『금강경』은 구마라집*이라는 승려가 아주 쉽게 옮겨놓은 경전으로 구마라집이 『금강경』을 번역할 때, 호칭과 반복되는 어구들을 과감히 생략하여 간결하게 하거나 어려운 구절은 쉽게 와 닿는 어휘를 선택해서 의역함으로 핵심을 명확히 전달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금강경』은 소략하고 담백한 어투를 유지하면서 운율에 맞추어 읽을 수 있도록 하는 문학성까지 보여 준다.
*구마라집(344∼413)중국 구자국에서 태어났다.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교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한 4대 역경가(譯經家)중 가장 정평이 높다. 불교사상과 철학사상이 중국에 전파된 것은 대부분 그의 노력과 영향력이었다. 인도에 유학했고 401년(동진隆安5) 장안(長安)에 와서 국사로 봉해져 소요원(逍遙園)에 머물렀으며, 403년(후진弘始5)〈중론中論〉·〈백론百論〉·〈십이문론十二門論〉·〈반야경般若經〉·〈법화경法華經〉·〈대지도론大智度論〉·〈아미타경阿彌陀經〉·〈유마경維摩經〉·〈십송률十誦律〉등 35부 348권에 달하는 방대한 경전을 번역했다.
『금강경』이 어떤 경전인지 아는데도 많은 소개가 필요하지만 다할 수 없겠다. 유중 선생이 해설한 이 책은 해인사 《고려대장경》권5에 있는 구마라집 번역의 『금강반야바라밀경』을 한글로 해설한 것으로, 번역은 아주 쉽고 또 현대적인 감각과 운율에 맞춘 곽철환 선생의 『금강경』을 바탕으로 했다고 한다. 유중 선생은 경희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정치학 석사가 되어 〈정치란 무엇인가〉, 〈각인각색 심리이야기〉등을 저술하고 〈하룻밤에 읽는 법구경〉등 여러 번역서를 내었다.
한자로 읽으면 짧을지 모르지만 이것을 한글로 번역하면 방대해지는 『금강경』은 보통 ‘32회분’으로 나누고, 각각 네 자로 된 제목이 붙어 있는데 이것은 양무제(梁武帝, 재위 502∼549)의 아들 소명태자(昭明太子, 501∼531)가 분류한 것으로 이 책은 32회분 형식을 따르되 제목은 풀어서 새로 붙였다고 했다. 제1회분부터 차례로 보겠지만 그 내용이 좀 길므로 여기에 다 옮길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미리 해 본다.
1. 가르치지 않고 가르치다 (法會因由分-법회인유분)
如是我聞 一時 佛在 舍衛國祇樹給孤獨園 與大比丘衆 千二百五十人俱 爾時
여시아문 일시 불재 사위국기수급고독원 여대비구중 천이백오십인구 이시
世尊食時 着衣持鉢 入舍衛大城乞食 於其城中 次第乞已 還至本處 飯食訖
세존식시 착의지발 입사위대성걸식 어기성중 차제걸이 환지본처 반사흘
收衣鉢 洗足已 敷座而坐
수의발 세족이 부좌이좌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세존께서는 1,250명 큰 무리의 비구들과 함께 사위국기수급고독원에 머무셨다. 그때 세존께서 식사 때가 되자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고서 걸식하러 사위대성에 들어가셨다. 그 성에서 차례로 걸식을 하시고는 본래 머물었던 곳으로 돌아와서 식사를 마치고 가사와 발우를 제자리에 놓고 발을 씻은 다음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이는 세존께서 1,250명 비구들과 무언가를 하기 위해 한 곳에 모였다는 것이다. 처음에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는 산스크리트어 ‘evam maya snutam’의 한역으로 ‘여시아문’으로 번역되었다. 여기 나는 아난다를 가르키는 것으로 아난다는 석가모니의 사촌동생으로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던 날에 태어났다. 아난다의 음역은 아난타(阿難陀)고, 줄여서 ‘아난’이라고도 한다. 또 세존은 산스크리트어 ‘Bhagavan’의 역어로서 ‘부·복·행운을 가진 분’이라는 뜻이다. ‘Bhagavan’을 구마라집은 불(佛)로, 보리류지는 바가바(婆伽婆)로, 진제는 불바가바로 현장과 의정은 박가범(縛迦梵)으로 음역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세존(世尊-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분)으로 통일되었다. 또 구마라집이 불이라고 한 것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석가모니 부처’즉‘붓다’라고 한 것이다.
세존께서는 걸식을 했다고 했는데 ‘얻어 먹는다’는 뜻인 걸식을 한 이유가 무엇일까? ‘차제걸이(次第乞已)’에서 알 수 있듯 ‘당시 사회 규칙은 차례차례 탁발을 하되 일곱 집을 넘지 않는다. 부자나 귀한 집의 음식을 받기 위해서 가난한 집을 건너뛰어서도 안 된다’고 했던 것으로 이것은 공평하고 편견 없는 부처의 자비를 상징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 걸식의 목적은 아집과 오만을 다스리기 위함이고 음식의 맛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고 했다. 이것은 세속에 대한 생각보다 수행에 마음을 집중하기 위한 것으로, 걸식은 수행자의 고행을 상징할 뿐 아니라 중생에게도 이익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굳이 탁발, 즉 걸식을 했던 것이다.
정리해 보면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에 붓다께서는 1,250명 무리의 비구들과 함께 슈라와스띠 제따 숲 급고독원에 머무셨는데 그때 세존께서 식사 때가 되자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고 탁발하러 슈리와스띠 라는 큰 도시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에서 차례로 탁발을 하시고 나서 본래 머물던 곳으로 돌아와서는 공양을 마치고, 가사와 발우를 제자리에 놓고는 발을 씻은 다음에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즉 법회 시작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2. 수보리가 무상정등각의 법을 청하다 (善現起請分-선현기청분)
그때 대중 가운데 있던 수보리 존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합장하여 공경하며 붓다에게 여쭈었다. “희유하신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을 잘 보호하고 염려해 주시며, 모든 보살을 잘 가르쳐주십니다. 세존이시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려는 마음을 낸 선남자 선여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고, 또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선재 선재라! 수보리야! 네가 말한 대로 여래는 모든 보살을 잘 보호하고 염려하며, 모든 보살을 잘 가르쳐준다. 너는 이제 잘 들어라. 너를 위해 설하겠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려는 마음을 낸 선남자 선여인은 이렇게 살아야 하고 또 이렇게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그러겠습니다. 세존이시여!”하며 기쁘게 듣고자 했다.
(길기도 어렵기도) 한 것 같아서, 2회분부터는 한자 원문은 생략하기로 한다. 2장에서 살펴야 할 것은 선현 존자, 수보리,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선남자 선여인, 무상정등각 등인 것 같다. 앞에서 본대로 소명태자가 제목에 붙힌 선현은 수보리를 말하는데, 산스크리트어 Subhuti의 음역으로 ‘착한 존재’라는 뜻이다. 『금강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수보리를 구마라집, 보리류지, 진제는 수보리(須菩提)로, 현장은 선현으로, 급다는 선실(善實)로, 의정은 묘생(妙生)으로 각각 번역했다.
수보리는 붓다의 10대 제자 중 한 명으로 그는 무쟁삼매(無諍三昧)의 법을 깨쳐 제자들 가운데 제일이라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또한 공에 대한 이해가 깊어 해공제일(解空第一)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하는데, 그를 존자라고 한 것은, ‘생명·수명·긴수명을 가진자’를 뜻하고, 역자에 따라서 장로(長老), 명자(命者), 구수(具壽), 혜명(慧命), 정명(淨命) 등으로 번역되었다.
여기서 어쩌면 처음 듣거나, 어렵게 들리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접하게 되는데, 의역하면 ‘여래, 아라한, 정등각’으로 여래와 정등각은 부처를 칭하는 여래십호의 호칭들이다. 여래십호(如來十號)는 여래, 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세존 등 부처를 칭하는 10가지 호칭들로 이것은 역자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의역되었으나 구마라집은 전체를 통털어 ‘여래’라고 했다.
이때 수보리는 ‘세존이시여, 보살승에 굳게 나아가는 선남자 선여인은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야 하며, 어떻게 마음을 항복받아야 합니까?’하고 묻는데, 여기에서 ‘보살승에 굳게 나아가는’것이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나아가는 길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산스크리트어를 그대로 쓴 것으로 아뇩다라는 ‘가장 뛰어나다’, 삼먁은 ‘바르다’, 삼보리는 ‘원만한 깨달음’을 뜻한다. 이를 의역하면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 되는 것이다.
한편, 선남자는 가족·가문으로 ‘아들’을 의미하기도 하고, 선여인은 ‘좋은 가문의 딸’이라는 뜻이다. ‘선남자 선여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하는 물음을 구마라집은 일관되게 ‘응운하주 운하항복기심(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으로 의역했는데 이것은 ‘어떻게 수행해야 하며...’를 생략한 것으로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는 ‘세상에 머무는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하고’라는 뜻이며, ‘어떻게 마음을 항복받아야 합니까?’는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라는 의미다.
이에 대한 세존의 대답은 ‘선재 선재라, 수보리야 참으로 네가 말한 바와 같다’고 칭찬하고 나서, ‘여래 아라한 정등각에 의해서 보살들은 최상의 부촉으로 부촉되어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선재는 ‘선한, 좋은,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이라는 뜻이고, 부촉(附屬)은 ‘격려·전수, 맡기다, 가르치다, 호의를 보이다’는 의미와 ‘신뢰감을 갖고 격려하다, 부탁하거나 당부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정리해 보면, 그때 대중 가운데 있던 수보리 존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서 합장하고 공경하며 붓다에게 여쭈었다.
“기쁨을 주시는(希有)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을 잘 보호하고 염려해 주시며, 모든 보살을 잘 가르쳐 주십니다. 세존이시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려는 마음을 낸 선남자 선여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고, 또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이에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좋다, 좋다! 수보리야, 네가 말한 대로 여래는 모든 보살을 잘 보호하고 염려하며 보살들을 잘 가르쳐준다. 너는 이제 잘 들어라. 너를 위해 설하겠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려는 마음을 낸 선남자 선여인은 이렇게 살아야 하고, 이렇게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이에 수보리는 “그러겠습니다. 세존이시여”하며 기쁘게 듣고자 했다.
3.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할까? (大乘正宗分-대승정종분)
붓다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마하살은 이렇게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알에서 깨어난 것이나, 어미 뱃속에서 태어난 것이나, 습한 데서 생긴 것이나, 변화로 생긴 것이나, 형상이 있는 것이나 형상이 없는 것이나, 생각이 있는 것이나 생각이 없는 것이나, 생각이 있는 것도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이나, 그리고 그 어떤 중생의 세계가 더 있다고 하더라도 온갖 부류의 일체 중생을 내가 다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게 해서 멸도(滅度)에 이르게 하겠다. 그러나 이렇게 한량없고, 셀 수 없고 끝없는 중생을 멸도에 이르게 했다 하더라도 실은 멸도에 이른 중생은 없다. 왜 그런가? 수보리야! 보살에게는 자아라는 생각, 인간이라는 생각, 중생이라는 생각, 목숨이라는 생각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여열반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는’것으로 탐진치 등 욕망과 집착의 모든 번뇌가 완전히 소멸된 상태로 열반을 강조한 말이다. 그럼 열반은?흔히 죽어서 가는 곳으로 생각하지만, 열반은 ‘바로 지금 여기’우리의 삶에서 실현시켜야 하는 것이다. 탐진치가 소멸되어서 항상 자비희사(慈悲喜事)가 넘쳐 흐르고 지혜가 두루하는 환희로운 삶의 모습 그것이 바로 열반인 것이다. 이것이 부처가 설한 가르침의 핵심이다. 그래서 붓다는 ‘수보리야 이 세상에서 보살승에 굳게 나아가는 자는 이렇게 마음을 내어야 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無量)중생들을 완전히 열반에 들게 하고서도 어떤 중생도 열반에 든 자는 없다’고 한 것이다. 이 말은 다시말해 대중에게 ‘중생을 구제하려는 마음을 일으키라’고 한 것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려고 한다면, 중생을 구제하는 생각을 내야 하고 삶에서 이를 실천해야 한다는 말이다. 수보리는 대중들을 대신해서 질문을 하면서 붓다가 ‘마음을 고요히 가라 앉히고 명상이나 도덕적 수행을 하라고 하는 말을 기대했을지’모르지만, 붓다는 모든 생각을 끊기 위해서는 중생을 구제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자아, 인간, 중생, 목숨이라는 것 때문에 버려야 한다는 것인가?’그래서 이것은 그 자체가 모순이다라고.
그렇지만 이런 의문에 대해 수보리는 지혜의 눈이 생기고 난 후 이렇게 말한다. ‘왜냐하면 자아라는 생각은 생각이 아니고, 인간이라는 생각과 중생이라는 생각과 목숨이라는 생각도 생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나의 중생이라도 구제했다는 생각이 있으면 그 순간 자아가 있다는 생각에 집착하는 것이고, 인간, 중생, 목숨이라는 생각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래서 붓다는 ‘보살이 자아라는 생각, 인간이라는 생각, 중생이라는 생각, 목숨이라는 생각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중생을 구제할 생각을 내지 말아야 하는가?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바로 공에 집착하는 것이다. 붓다는 ‘일체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마음을 내라’고 했다. 그러면서 ‘보살이 수행하는 목적은 궁극적으로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라고 했다. 천상의 신에서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벌레들까지 모든 중생을 구제하라고 한다. 그러나 ‘구제했다는 생각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다’라고 가르친다. 다시 말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려고 한다면 일체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내되, 중생이라거나 중생을 제도했다는 생각이 없어야 한다’고 한다. 이것이 『금강경』에서 무엇보다 먼저 깨달아야 할 가르침이다.
4. 어떻게 살아야 할까? (妙行無住分-묘행무주분)
“그리고 수보리야! 보살은 대상에 머무르지 않고 보시해야 한다. 형상에 머무르지 않고 보시해야 하고, 소리·냄새·맛·촉감·마음(聲香味觸法)의 대상에 머무르지 않고 보시해야 한다. 수보리야, 보살은 이렇게 생각에 머무르지 않고 보시해야 한다. 왜 그리해야 하는가? 보살이 생각에 머무르지 않고 보시한다면 그 공덕을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어서 말한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쪽 허공을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남쪽, 서쪽, 북쪽, 허공과 서북·서남·동북·동남 허공과 상·하 허공을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보살이 생각에 머무르지 않고 보시하는 공덕도 이와 같아서 헤아릴 수 없다.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가르친 바 대로 살아야 한다.”
보시란 실천적인 수행으로 보시하는 것은 씨앗을 뿌리는 것이고 공덕은 그 열매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붓다는 보시(dana, 布施, 베품 또는 관용)에 대해 실천적인 측면에서 크게 세 가지를 말했다. (1)‘물질적인 보시’(음식 옷 재물 등)는 탐욕을 끊게 하고, (2)‘감정적인 보시’(편안, 배려, 평화)는 성냄을 끊게 하고, (3)‘정신적인 보시’(진리나 도리의 가르침)는 어리석음을 끊게 한다고 했다.
5.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다 (如來實見分-여래실견분)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몸의 형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몸의 형상으로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몸의 형상은 몸의 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붓다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다. 모든 형상을 형상 아닌 것으로 본다면 여래를 볼 것이다.”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다’는 이 말은 모든 것은 공(空)하다는 말이다. 형상이 공함을 보고, 모든 형상을 형상 아닌 것으로 보게 되면 여래를 보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6. 내 설법은 뗏목과 같은 것이다 (正信希有分-정신회유분)
붓다의 이야기를 들은 뒤 수보리가 다시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런 말씀을 듣고 참되다는 마음을 낼 중생이 혹 있겠습니까?”
붓다가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런 말 하지 마라. 미래세의 후오백세에 정법이 쇠퇴할 때에도 계를 지키고, 복을 짓고 지혜가 있어 이 말에 신뢰하는 마음을 내고, 이것을 참되다고 여길 것이다. 이 사람은 한 부처나 셋·넷·다섯 부처 곁에서만 선근(善根)을 심은 게 아니라 이미 한량없이 많은 부처의 처소에서 온갖 선근을 심었기 때문에 이 말을 듣고서 한 마음으로 참되다는 생각을 낼 것임을 알아야 한다.
수보리야, 여래는 중생들이 한량없는 복덕을 받을 줄 다 알고 다 본다. 왜 그런가? 이 중생들에게는 자아라는 생각, 인간이라는 생각, 중생이라는 생각, 목숨이라는 생각이 없고, 법이라는 생각도 없고 법이 아니라는 생각도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중생들이 마음에 생각을 갖게되면, 자아와 인간과 중생과 목숨에 집착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법이라는 생각을 갖더라도 자아와 인간과 중생과 목숨에 집착하는 것이 되고, 법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더라도 자아와 인간과 중생과 목숨에 집착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법에 집착해서도 안 되고, 법이 아닌 것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 이런 뜻에서 여래가 항상 ‘너희들 비구는 내 설법이 뗏목과 같은 것이라고 아는 자들이니, 법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이 아닌 것이랴!’고 말했다.”
‘내 설법은 뗏목과 같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법의 기본 의미는 ‘일이 경우에 맞게 잘 되어 가는 것’을 뜻하는데, ‘방편, 방법, 순서, 습관’등의 의미로 쓰이지만, 부처의 설법은 항상 설하여 지므로 가르침의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그래서 법은 고통의 바다를 건너 피안에 이르게 하는 하나의 방편이고, 그것이 또한 법의 유일한 목적이다. 그 법을 뗏목에 비유한 것은 내 가르침은 강 건너편으로 건너게 해주는 뗏목과 같다는 의미다. 그러나 붓다는 ‘내가 긴 세월 동안 설한 뗏목의 비유에 대해 잘 안다면 너희들은 마땅히 이 법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이 아닌 것이겠는가?’라며 뗏목에 비유한 가르침마저 버리라고 한다.
붓다는 ‘나를 믿으라’고 말한 적이 없다. 오히려 ‘나를 의심하라’고 말하고 있다. 붓다의 가르침은 믿음이 아니라, 체험이고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7. 무위법(無爲法)으로 차별을 두다 (無得無說分-무득무설분)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았다 할 법이 있는가? 여래가 설한 법이 있는가?”
수보리가 대답했다.
“제가 붓다께서 설하신 뜻을 이해하기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깨달았다 할 일정한 법도 없고, 또 여래께서 설하신 일정한 법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것은 모두 인식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고, 법도 아니고, 법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가하면 성자들은 다 무위(無爲)로써 차별을 두기 때문입니다.”
정해진 법이 있지 않다는 것은 법이 없다는 것과 다르다. 법이 없다가 아니라 법이 있다고 할 것이 없다 라고, 구마라집이 말한 무유정법(無有定法)은 ‘있다’는 상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없다’는 상에 빠지는 것도 경계한 것이다. 그래서 붓다는 수보리에게 ‘불법(佛法)도 불법이 아니다. 그래서 불법이라고 한다’라고 했다.
8. 모든 부처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이 경에서 나온다 (依法出生分-의법출생분)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 보시를 한다면, 그가 받을 복덕이 많겠느냐?”
수보리가 말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그 복덕은 복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그런데 수보리야! 다른 어떤 사람이 이 경에서 네 구절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남에게 설해준다면, 그 복이 저 복보다 나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부처와 모든 부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다 이 경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보리야, 불법(佛法)이라는 것도 불법이 아니다. 그래서 불법이라고 한다.”
9. 들어가고 나오는 것도 없고, 가고 오는 것도 없다 (一相無相分-일상무상분)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다원(須陀洹)이 ‘나는 수다원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하겠느냐?”
수보리가 말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수다원을 입류(入流)라고 하지만, 들어간 곳이 없으니, 형상·소리·냄새·맛·감촉·마음의 대상에도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다원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존이시여, 만약 수다원이 ‘나는 수다원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아라는 생각, 인간이라는 생각, 중생이라는 생각, 목숨이라는 생각에 집착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다함(斯陀含)이 ‘나는 사다함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하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사다함을 일왕래(一往來)라고 하지만 실은 가고 오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다함이라 하셨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나함(阿那含)이 ‘나는 아나함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하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아나함을 불래(不來)라고 하지만 실은 온다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나함이라 하셨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라한(阿羅漢)이 ‘나는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하겠느냐?
수보리가 말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실은 아라한이라 할 그 어떤 법도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아라한이 ‘나는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자아와 인간과 중생과 목숨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붓다께서는 저를 무쟁삼매를 증득한 사람 가운데 드뜸이라 하셨는데, 이는 아라한이고, 욕망을 여윈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저는 아라한이고, 욕망을 여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만약 ‘나는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면, 세존께서 ‘수보리는 다툼이 없이 머무는 자들 가운데서 제일이다. 수보리는 어떤 것에도 머물지 않으므로 다툼이 없이 머무는 자다’라고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여기서 수다원은 처음으로 성자의 흐름에 들었다(入流)는 자를 말하고, 그가 색성향미촉법에 들지 않았다는 것은 수다원은 그것이 공한 것임을 안다는 의미다. 그리고 한 번만 돌아올 자를 일래(一來) 혹은 일왕래라고 한 것인데 구마라집은 이를 사다함으로 음역하였다. 같은 의미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자는 아나함으로 음역되었는데 이것은 ‘들어가고 나오는 것도 없고 가고 오는 것도 없다. 또한 돌아 오지 않음을 증득할 그 어떤 법도 없다. 그것이 수다원이든, 사다함이든, 아나함이든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자아와 인간과 중생과 목숨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10. 어디에도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야 한다(莊嚴淨土分-장엄정토분)
붓다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옛적에 연등불(燃燈佛)처소에게 얻은 그 어떤 법이 있느냐?”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연등불 처소에서 얻은 그 어떤 법도 참으로 없습니다.”
“수보리야, 어떤 보살이 말하기를 ‘나는 불국토를 장엄하리라’라고 한다면 그는 거짓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불국토 장엄은 장엄이 아니라고 여래가 설했다. 그래서 불국토 장엄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이렇게 청정한 마음을 내야 한다. 형상에 머무르지 않고 마음을 내야 하고 소리·냄새·맛·감촉·마음의 대상에 머무르지 않고 마음을 내야 한다. 어디에도 머무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야 한다.
수보리야, 어떤 사람이 몸이 수미산왕만 하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몸이 크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말했다.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붓다께서 말씀하신 몸은 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큰 몸이라 하셨습니다.”
연등불은 석가모니에게 수기(受記)를 준 부처로 태어났을 때 등불처럼 빛이 났다고 한다. 연등불 역시 왕자로서 부처가 된 후 이름을 얻었다. 여기서는 석가모니가 연등불을 만날 때 자신의 예를 들면서 보살의 길을 깨우쳐주고 있다. 수기를 받을 때 석가모니의 이름은 수메다(sumedha)였는데 그는 이때 일체법이 태어남이 없음을 알았다. 과거에도 태어남이 없고, 미래에도 태어남이 없고, 현재에도 태어남이 없다는 지혜가 생긴 것이다. 보살이 태어남이 없는 법들을 인욕으로써 성취한 것이다. 태어남이 없는데 어떤 법인들 얻을 게 있을 것인가?
어떤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붓다가 말했는데 불국토란 무엇이고 장엄할 수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불국토(kseta)는 ‘사는 곳’을 뜻하고 ‘땅, 들판, 장소’의 의미로 ‘공덕을 자라게 하는 땅’즉 복전(福田)으로 추상화하여 쓰인다. 여기서 불국토는 물질적인 세계를 의미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되고 불국토 장엄은 물질로 치장하거나 장엄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사는 더럽혀진 세계와 대비해 모든 것이 아름답고 완벽하게 조화된 청정세계를 불국토라고 하는 것이다.
치장하거나 장엄한다는 것은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하는데 보살이 수행하는 목적은 중생을 구제하고 불국토를 건설하기 위함이므로 중생을 구제하고 불국토를 건설하되, 다만 아상, 인상, 중생상, 유자상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중생을 구제하고 불국토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현실 속에서 만들어 가는 행위가 곧 보살행인 것이다. 보살마하살은 보살의 존칭이다.
수미산은 Sumeru의 음역으로 여기서 수미산에 비유한 몸이란 보살이 공덕으로 얻게될 법신(法身)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법신은 시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허공과 같이 경계가 없이 거대한 몸을 말한다. 시공을 초월하고, 우리가 본적도 없고, 육안으로 볼 수도 없다. 그래서 법신은 말로 설명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고 들어도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다.
붓다의 이 가르침은 공덕으로 보살이 얻게 될 몸을 어렴풋이나마 상상할 수 있도록 상징적으로 산중의 왕, 수미산의 크기에 거인을 연상시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형상을 지니고 있는 것은 결코 크지 않다. 형상이 없는 것만이 실로 크다할 수 있다. 그래서 크다고 한 것이다.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중생 구제든, 불국토 장엄이든, 수미산왕만한 몸등, 그것이 무엇이든, 공덕에 집착하지 않고 어디에도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11. 이 경의 공덕은 헤아릴 수 없다 (無爲福勝分-무위복승분)
“수보리야! 겐지스 강에 있는 모래알만큼 많은 겐지스 강이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모든 겐지스 강의 모래알들이 많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말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모래알만큼의 겐지스 강만 해도 무수히 많은데 하물며 거기 있는 모래알이겠습니까.”
“수보리야! 내가 지금 사실대로 너에게 말하리라.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그 겐지스 강의 모래알만큼 많은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 보시 한다면, 그 선남자 선여인이 쌓은 공덕이 많겠느냐?”
수보리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이로 인해 측량할 수 없고, 셀 수도 없는 공덕을 쌓을 것입니다.”
붓다가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런데,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에서 네 구절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남에게 설해준다면 그 공덕이 앞의 공덕보다 측량할 수 없고, 셀 수도 없이 더 많을 것이다.”
겐지스 강은 산스크리트어로 Gangi라 하는데, 구마라집은 항하, 진제는 항가강 급다는 항하대하, 현장과 의정은 긍가하(殑伽河)로 옮겼다. 항하사, 즉 항하의 모래알에 대한 비유는 불교경전에 자주 등장하는데 이것은 ‘많다’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한 메타포(간접적·암시적)다. 소명태가가 무위라고 한데 대비한 유의(有爲)의 차원인 것이다. 이것은 선언적 문구로 ‘깨닫게 하리라’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겐지스 강의 모래알만큼 많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 보시를 하더라도 이 경의 네 구절을 반다 지니고 남에게 설하는 것만 못하다고 한 것은, 모든 부처와 깨달음이 이 경에서 나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2. 이 경이 있는 곳은 부처가 있는 곳과 같다 (尊重正敎分-존중정교분)
“그리고 수보리야! 이 경의 네 구절만이라도 설하는 곳이 어느 곳이든, 모든 세계의 천신과 인간과 아수라가 다 부처의 탑묘(塔廟)에 하듯이 이곳에 공양할 것이다. 하물며 이 경을 모두 받아 지녀서 읽고 외우고 남을 위해 설해주는 사람이야 다시 말해 무엇하겠느냐?
수보리야, 이 사람은 가장 높고 제일 귀한 법을 성취할 것이다. 경전이 있는 곳은 바로 부처와 존중할 만한 제자가 있는 곳과 같다.”
가만히 생각해 본다. ‘나는 지금 이 경을 마음에 간직하고 이해하려고 하고 있다. 이것을 독송할 수도, 남에게 설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곳이 도시든, 산골이든, 시장이든 그곳이 바로 부처가 있는 곳일 것이다. 나는 이 장을 읽고 있으므로 부처와 함께 있는 것이다.’라고 생각해도 될까...
14. 이 경은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 한다 (如法受持分-여법수지분)
수보리가 붓다에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경의 이름을 무엇이라 해야 하고, 저희들은 어떻게 마음에 간직해야 합니까?”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이 경의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이니, 너희들은 이 이름을 마음에 간직해야 한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여래가 말한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야바라밀이라 한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설한 그 어떤 법이 있느냐?”
수보리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설하신 그 어떤 법도 없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티끌이 많다고 하겠느냐?”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모든 티끌도 티끌이 아니라고 여래께서 설하셨기 때문에 티끌이라 하고, 여래께서 말씀한 세계도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세계라고 합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32상(三十二相)으로라면 여래를 볼 수 있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32상으로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32상은 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32상이라 하셨습니다.”
“수보리야!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겐지스 강의 모래알만큼 많은 겁(劫)* 동안 겐지스 강의 모래알만큼 많은 목숨(身命)을 바쳐 보시하더라도, 다른 어떤 사람이 이 경에서 네 구절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남에게 설해 준다면 이로 인해 측량할 수 없고, 셀 수도 없이 더 많은 공덕을 쌓은 것이다.”
*劫 : 큰 돌산은 가시(迦尸)국에서 생산되는 겁패(劫貝), 즉 무명으로 백 년에 한번씩 스쳐
마침내 다 닳아 없어지는 시간보다 더 길다고 하는 시간〈잠아함경〉
이 경의 이름이 「금강반야바라밀」으로 이것은 ‘벼락·번개·금강석’이란 의미와 ‘자른다’는 의미 그리고 ‘지혜(般若-반야)와 피안을 건너다. 피안에 도달하다’라는 의미를 합친 것으로 ‘지혜의 완성’을 뜻한다. 또 금강저(金剛杵)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금강저는 부처의 지혜를 상징한다. 이에 대해 구마라집은 자른다는 것을 생략하고 그냥 금강이라고 했으나, 현장은 능단금강(能斷金剛)이라 번역했다. 그리고 ‘32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느냐?’고 했는데 32상이란 무엇인가?
「다알리경」에는 32가지 대인상을 다음 순서로 적고 있다.
1. 발바닥이 평평하다.
2. 발바닥에 수레 무늬가 있다. 그 바닥에는 천 개의 바퀴살과 테가 있어 일체를 두루 갖추었다.
3. 속눈썹이 길다.
4. 손가락이 길다.
5. 손과 발이 부드럽고 섬세하다.
6. 손가락 발가락 사이마다 얇은 막이 있다.
7. 발꿈치가 넓고 원만하다.
8. 장딴지가 마치 사슴 장딴지와 같다.
9. 꼿꼿이 서서 굽히지 않고도 두 손바닥으로 두 무릎을 만지고 문지를 수 있다.
10. 음경이 감추어진 것이 마치 말의 그것과 같다.
11. 몸이 황금색으로서 자마금(紫磨金)과 같다.
12. 살과 피부가 부드러워서 더러운 것이 몸에 붙지 않는다.
13. 각각의 털구멍마다 하나의 털만 나 있다.
14. 몸의 털이 위로 향해 있고, 푸르고 검은 색이며 소라처럼 오른쪽으로 돌아 있다.
15. 몸이 넓고 곧다.
16 몸의 7처(두 손바닥, 두 발바닥, 두 어깨, 목 혹은 정수리)가 풍만하다.
17. 윗몸이 커서 마치 사자와 같다.
18. 어깨가 둥글고 풍만하다.
19. 니그로다 나무처럼 몸 모양이 둥굴고 균형 잡혔고, 신장과 두 팔을 벌린 길이가 같다.
20. 등이 편편하고 곧다.
21. 섬세한 미각을 가졌다.
22. 턱이 사자와 같다.
23. 이가 40개이다.
24. 이가 가지런하다.
25. 이가 성글지 않다.
26. 이가 아주 희다.
27. 혀가 아주 길다.
28. 범천의 목소리를 가져서 가릉빈가 새소리와 같다.
29. 눈동자가 검푸르다.
30. 속눈썹이 소와 같다.
31. 두 눈썹 사이에서 털이 나고, 희고 섬세한 솜을 닮았다.
32. 머리에 육계가 솟았다.
이 32상에 대해 한역과 원문은 다소 차이가 있다. ‘가슴에 만(卍)자 형상이 있다’는 번역도 있다.
‘32상’은 부처의 불가사의한 몸을 표현하기 위한 상징적인 숫자로서 이 숫자는 ‘수미산 하늘의 숫자로 수미산 가운데 도리천(忉利天)이 33천이고 도리천은 수미산 정상에 위치하며 그 중앙에 제석천(帝釋天)이 사는 선견성(善見城)이다. 수미산 정상에는 동서남북 4방으로 각각 8개씩 천인(天人)들이 사는 모두 32개의 천성(天城)이 있다. 여기서는 제석천이 사방 32성의 신들을 지배하고, 32개의 천상은 인간들 사이에서 보살이 신으로 태어나는 곳이다.
어떤 학자는 여기 13장을 끝으로 법문이 끝난 것으로 보았고 그러면서 ‘지금부터는 정말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누군가가 만족스러운 해설을 해주리라 기대한다’고 하기도 했다.
14. 지혜의 눈이 생기다 (離相寂滅分-이상적멸분)
그때 수보리가 이 경을 듣고 그 뜻을 깊이 이해하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붓다에게 말했다.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붓다께서는 이렇게 깊고 깊은 경전을 설하셨습니다. 이로부터 저에게는 지혜의 눈이 생겨났습니다. 세존이시여! 이런 경은 이전에는 듣지 못한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신뢰하고 마음이 청정해지면 참되다는 생각이 생길 것이니, 이 사람은 제일 귀한 공덕을 성취할 것임을 알겠습니다.
그러나 세존이시여, 이 참되다는 생각은 생각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래께서 참되다는 생각이라 하셨습니다.”
이어서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 이런 경전을 듣고서 신뢰하고 이해하고 마음에 새기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미래의 500년 뒤에도 어떤 중생이 이 경을 듣고서 신뢰하고 이해하고 받아 지닌다면, 그 사람은 제일 귀할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 사람에게는 자아라는 생각이 없고, 인간이라는 생각이 없고, 중생이라는 생각이 없고, 목숨이라는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아라는 생각은 생각이 아니고, 인간이라는 생각과 중생이라는 생각과 목숨이라는 생각도 생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생각을 여원 자를 부처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붓다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서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무서워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아주 귀한 제일바라밀을 성취한 줄 알아야 한다. 왜 그런가? 수보리야! 여래가 설한 제일바라밀은 제일바라밀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일바라밀이라고 한다.”
“수보리야! 인욕바라밀은 인욕바라밀이 아니라고 여래가 설했다. 그래서 인욕바라밀이라 한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내가 옛날 가리왕(歌利王)에게 몸을 갈기갈기 잘릴 때 나에게 자아라는 생각이 없었고, 인간이라는 생각이 없었고, 중생이라는 생각이 없었고, 목숨이라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내가 옛날 사지가 마디마디 잘릴 때 나에게 자아라는 생각과 인간이라는 생각과 중생이라는 생각과 목숨이라는 생각이 있었다면, 성내고 원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또 500생애 동안 인욕을 설하는 성자로 있었던 과거를 기억해 보니, 그때에도 자아라는 생각이 없었고, 인간이라는 생각이 없었고, 중생이라는 생각이 없었고, 목숨이라는 생각이 없었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은 모든 생각을 떠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려는 마음을 내야 한다. 형상에 머무르지 않고 마음을 내야 하고, 소리·향기·맛·감촉·마음의 대상에 머무르지 않고 마음을 내야 한다. 법에 머무는 마음도 내지 않아야 하며, 법 아닌 것에 머무는 마음도 내지 않아야 하며,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고 마음을 내야 한다. 마음에 머무름이 있어도 그것은 머무름이 아닌 것으로 된다. 그래서 여래는 보살은 형상·소리·향기·맛·감촉·마음의 대상에 머무르지 않고 보시해야 한다고 설한다.
수보리야! 보살은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이렇게 보시해야 한다. 여래가 말한 모든 생각은 생각이 아니고, 모든 중생도 중생이 아니다.
수보리야, 여래는 참되게 말하는 자이며, 사실대로 말하는 자이며, 있는 그대로 말하는 자이며, 거짓말하지 않는 자이며, 다르게 말하지 않는 자이다. 그러나 수보리야, 여래가 깨달은 법에는 참도 없고 거짓도 없다.”
“수보리야! 보살이 마음을 대상에 머무르고 보시하면, 어두운 곳에 들어간 사람이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고, 보살이 마음을 대상에 머무르지 않고 보시하면, 눈이 온전한 사람이 밝은 햇빛에서 갖가지 빛깔을 보는 것과 같다.
수보리야! 미래에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을 받아 지녀서 읽고 외운다면, 여래가 부처의 지혜로 이들을 다 알고 다 보나니, 이들은 한량없고 끝없는 공덕을 성취할 것이다.”
이 14장은 『금강경』에서 가장 길지만 수제자인 수보리가 세존의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는 감동을 자아내는 장이다. 산스크리트어의 원문에는 이 부분을 ‘세존이시여, 최고로 경이롭습니다. 최상승(最上乘)에 굳게 나아가는 자들의 이익을 위하여 여래께서는 이런 법문을 설해주셨습니다.’라고 되어 있고, 현장 등 모든 한역에서도 ‘이렇게 깊고 깊은 경전을 설하셨다’고 번안했다.
그렇다면 이 장의 핵심은 무엇인가? ‘모든 생각을 여윈 자를 부처라고 하는데, 부처는 자아라는 생각도 생각이 아니고 인간, 중생, 목숨이라는 생각도 생각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생각도 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생들은 자아, 인간, 중생, 목숨이라는 생각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맨 먼저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고, 다음에는 법도 공함을 아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공도 공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여래는 이러한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부처라고 불리는 것이다.’모두 성불하소서!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공포를 가지지 않게 되는 것’은 누구나 바라는 염원일지 모른다. 『반야심경』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다’(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 故心無罣碍 無罣碍故 無有恐怖)고 한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자아, 인간, 중생, 목숨이라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아무런 근심도 장애도 없으니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이 장에서는 갑자기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이 등장한다. 붓다는 이미 수보리가 반야로 시작해서 반야로 끝나는 이 경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반야바라밀·보시바라밀·인욕바라밀을 설하기 시작한 것이다. 『금강경』에는 육바라밀(보시·지혜·인욕·정진·선정·반야(지혜)가운데 세 개의 바라밀을 말하고 있는데, 세 개 바라밀은 삼독(三毒-貪瞋痴)와 대응하는 것으로 보시바라밀은 탐욕을 제거하고, 인욕바라밀은 성냄의 제거하고, 지혜바라밀은 어리석음을 제거한다. 그러나 이 세 개의 바라밀은 다른 바라밀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다음은 『열반경』에 나오는 이야기다.
옛날 깔리 왕이 후궁들을 데리고 사냥을 나갔다. 점심을 먹고 낮잠을 즐겼다. 그 사이 후궁들은 꽃을 따기 위해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금욕 고행 중이던 수도승 끄산띠를 만났다. 궁녀들은 그의 평온함에 감화되었고 그 앞에 꽃을 놓으며 공양을 드렸다. 그러자 그는 전에 들어본 적 없는 법을 설해주었고, 궁녀들은 더 많은 법을 듣고자 했다.
잠에서 깬 깔리 왕은 후궁들이 수도승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는 화가 치밀었다. 끄산띠는 아랑곳 하지 않고 인욕에 대해 설했다. 왕은 끄산띠를 시험하기로 결심하고, 그의 손을 잘라버렸다. 그런 다음 발을 자르고 마침내 귀와 코를 잘랐다. 왕은 끄산띠가 움직이지 못하는 모습을 보자 자신이 저지런 잔인한 행동을 깨닫고는 끄산띠에게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끄산띠는 화도 내지 않고,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러자 왕이 끄산띠에게 화가 나지 않았음을 증명해 보라고 했다. 끄산띠는 ‘만약 내 마음 속에 화가 없다면, 내 몸이 본래 상태로 돌아올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끄산띠는 수많은 생애동안 공덕을 쌓았기 때문에 그의 몸은 곧바로 본래 상태로 돌아왔다. 그는 왕에게 말했다. ‘그대는 내 몸을 자르기 위해 미혹의 칼을 사용했습니다. 제가 부처가 되면 나는 그대의 욕망을 자르기 위해 지혜의 칼을 사용할 것입니다.’
끄산띠는 석가모니의 전생의 화신이고, 깔리 왕은 나중에 까운디나로 태어나 붓다의 첫 번째 제자가 되었다.
15. 이 경은 불가사의하고 비교할 수가 없다 (持經功德分-지경공덕분)
“수보리야! 선남자 선여인이 아침에 겐지스 강의 모레알만큼 많은 몸을 보시하고, 낮에 또 겐지스 강의 모레알만큼 많은 몸을 보시하고, 저녁에도 겐지스 강의 모레알만큼 많은 몸을 보시하여, 이런 식으로 한량없는 백천만억 겁 동안 몸을 보시하더라도 다른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신뢰하는 마음을 거스르지 않는다면 이 복이 저 복보다 나을 것이다. 하물며 이 경을 받아 지녀서 베껴 쓰고 읽고 외우고 남에게 해설해 준다면 어떻겠느냐?
수보리야, 요컨대 이 경에는 불가사의하고 헤아릴 수도 없는, 끝없는 공덕이 있나니 여래는 큰 가르침을 구하려는 자를 위해 설했고, 가장 뛰어난 가르침을 구하려는 자를 위해 설했다.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받아 지녀서 읽고 외우고 널리 남에게 설해준다면, 여래가 이들을 다 알고 다 보나니, 모두 헤아릴 수 없고 가늠할 수 없고 끝없고 불가사의한 공덕을 성취할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짊어질 것이다. 왜 그런가? 수보리야, 작은 법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아라는 견해, 인간이라는 견해, 중생이라는 견해, 목숨이라는 견해에 집착하여 이 경을 듣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 남에게 해설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수보리아! 어는 곳이든 이 경이 있는 곳곳마다 모든 세계의 천신과 인간과 아수라에게 공양받을 것이다. 이곳이 탑이 되어 모두 공경하며 예배하고 주위를 돌면서 갖가지 꽃과 향을 그곳에 뿌릴 것임을 알아야 한다.”
보시에 대해 산스크리트어에는 ‘참으로 다시 수보리야, 여자나 남자나 오전 중에 겐지스 강의 모래알들처럼 [많은] 몸들을 바쳐고, 그와 같이 낮에도 겐지스 강의 모래알들처럼 [많은] 몸들을 바치고, 저녁에도 겐지스 강의 모래알들처럼 [많은] 몸들을 바치며 이런 방법으로 수많은 백천만억 겁동안 몸을 바친다하더라도 이 법문을 듣고서 비방하지 않으면, 이것이 참으로, 이로 인해서 측량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더 많은 공덕의 무더기를 쌓은 것이다. 하물며 이 법문을 베껴 쓰고 배우고 마음에 간직하고 독송하고 남들에게 자세히 설명해준다면 누가 다시 더 말을 하겠는가?’로 되어 있다.
이쯤에서 생각해 본다.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는 다른 종교들처럼 ‘나를 믿고 따르라’고는 하지 않지만, 자신이 설한 말씀에 대해서는 ‘믿고 의지하며 남들에게 설 해주라’고 한다. 그만큼 자만심이 강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 같은 중생이 ‘신앙’으로 삼아도 좋다고 생각했던 것이었을까? 의문이 든다. (ㅋㅋㅋ)
16. 이 경은 뜻도 과보도 헤아릴 수 없다 (能淨業障分-능정업장분)
“그런데 수보리야,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을 받아 지녀서 읽고 외우는데도 남에게 경멸과 천대를 받는다면 이 사람은 전생의 죄업으로 악도(惡道)에 떨어져야겠지만, 금생에 남에게 경멸과 천대를 받는 것으로 전생의 죄업이 바로 소멸되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수보리야, 내가 한량없는 아승기겁(阿僧祇劫)의 과거를 기억해 보니, 연등불을 뵙기 전에도 8백4천억 나유타(那由他)*의 많은 부처를 만났는데, 그냥 지나친 적 없이 모두에게 공양하고 받들어 섬겼다.
그런데 훗날 말세에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남들에게 자세히 설명해준다면 이 공덕은 내가 그 많은 부처에게 공양한 공덕으로는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천만억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어떤 계산이나 비유로도 미칠 수 없다.
수보리아, 훗날 말세에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서 얻을 공덕을 내가 일일이 다 말한다면 혹 어떤 사람은 그 말을 듣고서 마음이 몹시 혼란스러워 의심하고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수보리야, 이 경은 뜻도 헤아릴 수 없고 과보 또한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승기겁,나유타 : 아승기는 셀 수 없고 더 셀 수 없는의 산스크리트어의 음역으로 지극히 긴 시간의 겁을 말하고, 나유타는 산스크르트어 니유따의 음역으로 아주 큰 수를 나타내는 말이다.
업(業)은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신·구·의(身口意) 3업을 말하는 것인데, 우리가 죽으면 지은 업에 따라갈 뿐으로 올 때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았고 갈 때 또한 빈손으로 간다. 아무리 많이 가졌더라도 갈 때는 가져가지 못하고 오직 지은 업만 따라갈 뿐이다. 업은 산스크리트어로는 까르마(karma)인데 ‘하다, 만들다, 창조하다’의 파생어로 ‘행위’를 뜻한다. 그런데 이 업은 과보는 물론 의지적 행위, 즉 의도한 행위로 고의성이 없는 행위까지 과보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중아함경〉
우리의 미래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다. 선업을 지으면 선과를 거두고, 악업을 지으면 악과를 거두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 선업을 지으면 나쁜 업(惡業)을 좋은 업(善業)으로 지워버릴 수 있다. 따라서 지금 행복하다고 내일도 행복하리라는 보장이 없고 지금은 불행하지만 내일은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업을 소멸하는 것이다. 업을 소멸시키고 깨달음에 이르는 여정이 우리 인생의 여정일 수 있는 이유다.
17. 무아법을 통달하면 참된 보살이라 한다(究境無我分-구경무아분)
그때 수보리가 붓다에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려는 마음을 낸 선남자 선여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려는 선남자 선여인은 이런 마음을 내야 한다, 나는 모든 중생을 멸도(滅度=涅槃)*에 이르게 하겠다.
그러나 모든 중생을 멸도에 이르게 했어도 실은 멸도에 이른 중생은 하나도 없다. 왜 그런가? 수보리야, 보살에게 자아라는 생각, 인간이라는 생각, 중생이라는 생각, 목숨이라는 생각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 그러냐 하면 수보리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려고 할 그 어떤 법도 실은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연등불 처소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그 어떤 법이 있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붓다께서 설하신 뜻을 이해하기로는 붓다께서 연등불 처소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그 어떤 법도 없습니다.”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수보리야,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그 어떤 법도 실은 없다.
수보리야! 만약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그 어떤 법이 있었다면, 연등불께서 나에게 ‘너는 내세에 부처가 되어 석가모니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수기(受記-예언)를 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실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그 어떤 법이 없기 때문에 연들불께서 나에게 수기하시면서 ‘너는 내세에 부처가 되어 석가모니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하셨던 것이다.’왜냐하면 여래란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을 뜻하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어떤 사람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말한다면, 그는 거짓을 말하며 사실이 아닌 것에 집착하여 나를 비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그 어떤 법이 실은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여래가 깨달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는 참도 없고, 거짓도 없다. 그러므로 여래는 모든 현상이 다 불법(佛法)이라 설한다.
수보리야, 모든 현상이란 모든 현상이 아니다. 그래서 모든 현상이라 한다. 수보리야, 마치 사람의 몸이 크다는 것과 같다.”
수보리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신 사람의 몸이 크다는 것은 큰 몸이 아닙니다. 그래서 큰 몸이라 하셨습니다.”
“수보리야, 보살도 그리하여 ‘내가 한량없는 중생을 멸도에 이르게 하겠다’고 한다면 보살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보살이라할 그 어떤 법이 실은 없기 때문이다. 중생도 중생이 아니라고 여래가 설했다. 그래서 중생이라 한다. 그러므로 여래는 모든 현상에는 자아도 없고, 인간도 없고, 중생도 없고, 목숨도 없다고 설했다.
수보리야! 보살이 ‘내가 불국토를 장엄하겠다.’고 한다면 보살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여래가 설한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장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엄이라 한다.
수보리야, 보살이 무아법(無我法)을 통달한다면 여래는 그를 참된 보살이라 한다.”
붓다가 수보리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14가지 가운데, 8개는 우주에 관한 것이고(우주는 영원한가? 등), 2개는 목숨에 관한 것이고(목숨이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은 다른가?), 4개는 여래에 관한 것이다. 여래는 죽고 난 후 존재하는가? 죽고 난 후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는가? 죽고 난 후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가? 등
여래의 본뜻은 ‘오고 감’이라는 관념에서도 벗어난 것이 여래다. 여래는 과거, 미래, 현재의 ‘생겨남이 없음’이다. 생겨남이 없기 때문에 볼 수도 없고, 그 존재를 알 수도 없다. 아라한*은 생사의 윤회를 끊는 것이지만, 깨달음은 ‘생겨남이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여래는 참되고 ‘그러함’에 머물러 있다. 이해할 수 없지만, 이것이 모든 부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우리가 부처의 법(dharma)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거기에 여러 가지 뜻이 있기 때문인데, 법은 진리나 가르침을 뜻하기도 하고, 존재, 사물, 현상이나 마음의 대상 등 실체적 대상뿐 아니라 인식의 대상까지 그 쓰임이 다양하기 때문에 문맥에 따라 해석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다. 여기서 ‘일체법(一切法)이 불법(佛法)이다’라는 것은 ‘모든 현상이 다 불법이다’로 해석된다. 그렇지만 일체법이 무엇이든 사실은 모두 공한 것이다.
18. 이는 여래가 구족(具足)한 다섯 가지 눈이다 (一體同觀分-일체동관분)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육안(肉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에게 육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천안(天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에게 천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혜안(慧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에게 혜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법안(法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에게 법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불안(佛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에게 불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겐지스 강의 모래를 여래가 말한 적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그 모래를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겐지스 강의 모래알만큼 많은 겐지스 강이 있고, 이 모든 겐지스 강의 모래알만큼 부처의 세계가 있다면, 그것을 많다고 하겠느냐?”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붓다가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 국토에 있는 중생들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는 다 안다. 왜 그런가? 여래가 말한 갖가지 마음은 모두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이라 한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과거의 마음도 얻지 못하고 미래의 마음도 얻지 못하며 현재의 마음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이란 무엇인가? 대단히 어려운 질문이다. 마음에는 세 가지가 있다. 심의식(心意識)이 그것인데 우리의 사고나 생각 일반을 심(心), 그 사고를 주관하는 기관이나 기능을 의(意), 식(識)은 오온(五蘊)과 12연기 가운데 하나로 안의비설신의가 성향미촉법을 만나 느끼고(受), 인식하고(想), 의도적 행위(行)를 거쳐서, 쉴새 없이 현상과 이치를 파악하고 식별하는 인식작용이 일어나는 것을 ‘마음’이라 하기도 하고, 좁은 의미에서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 가운데 의(意)가 법(法)을 만나 생겨나는 인식작용을 말하기도 한다.
또한 넓은 의미에서는 안의비설신 등 5식을 제외한 의식(意識)을 제6식이라 하고, 이 제6식이 발전해 생긴 말라식(末那識=자아의식)을 제7식이라 하며,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이러한 의식들이 잠재되는 아뢰의식(阿賴意識=잠재의식)을 제8식이라 하는데, 제1식부터 제8식까지를 통털어 ‘생각’또는 ‘마음’이라고 하기도 한다.
마음은 공하기 때문에 잡을 수도 없고, 얻을 수도 없다. 마음은 바람 같고, 물거품 같다. 여래께서 ‘그것은 왜 그런가? 마음의 흐름, 마음의 흐름이라는 것, 그것은 수보리야, 마음의 흐름이 아니라고 여래는 설했다. 그래서 말하기를 마음의 흐름이라 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과거, 현재, 미래를 구분한다. 이런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과거, 현재, 매래나 전생, 금생, 내생이라는 말로 부르지만 편의상 그렇게 구분 지을 뿐, 그것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도 공간이 있기 때문으로 생이고 공간이 사라지면 시간도 사라진다. 시간은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공한 것이다. 따라서 시간의 흐름은 흐름이 아니다. 다시 말해 시간의 흐름도 흐름이 아니고 마음의 흐름도 흐름이 아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반야심경》한 구절을 옮겨 보자.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시고 공중무색 무 수상행식 무 안이비설신의 무 색성향미촉법 무 안계 내지 무 의식계(舍利子 是 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是故 空中無色 無 受想行識 無 眼耳鼻意舌身意 無 色聲香味觸法 無 眼界 乃至 無 意識界)’
‘사리자여 모든 법은 공하여 나지도 멸하지도 않고,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느니라. 그러므로 공 가운데는 색이 없고 수상행식도 없으며, 안의비설신의도 없고, 색성향미촉법도 없다. 눈의 경계도 없고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다.’
마음은 공하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19. 복덕이라는게 없기 때문에 받을 복덕이 많다(法界通化分-법계통화분)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 보시한다면 이 사람은 이 인연으로 받을 복이 많겠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은 이 인연으로 많은 복을 받을 것입니다.”
“수보리야, 복덕이라는 게 실제로 있다면, 받을 복덕이 많다고 여래가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복덕이라는 게 없기 때문에 받을 복덕이 많다고 여래가 말했다.”
여기서 여래는 ‘A는 A가 아니라고 하고는 그래서 A라고 한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오안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비유를 거듭하며 말하는 것은 법안을 갖게 하려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부처의 눈을 갖게 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 A는 존재로 여기는 육안이고 A가 아니다는 비존재는 공함을 보는 혜안이다. ‘그래서 A라고 한다’는 비존재에서 벗어나 쓰임의 연결성을 갖는 것, 즉 법안을 이름이다. ‘A가 아니다’고 말하는 것은 실재가 아니라는 것으로 이는 집착을 끊게 하기 위한 것이다.
붓다는 혜안으로 모든 것이 공한 것을 보고, 법안으로 근원적인 외형의 모습을 보고, 부처의 눈으로 중도를 본다. 공(空)과 현상(色)을 이원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보는 것이다. 불안(佛眼)으로 보면 중생도 부처이고, 한 생각이 청정심을 일으키면 중생이 곧 부처다. 모든 것이 별개가 아니다. 이것이 부처의 가르침이다.
20. 구족한 색신으로 여래를 볼 수 없다 (離色離相分-이색이상분)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구족한 몸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구족한 몸으로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구족한 몸은 구족한 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족한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구족한 여러 가지 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구족한 여러 가지 상으로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여러 가지 상을 구족했다는 것은 구족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상을 구족했다고 하셨습니다.”
부처의 세 가지 몸, 즉 법신(法身)·보신(報身)·화신(化身=應身)을 삼신(三身)이라고 하는데, 화신은 색신(몸·육체)을 의미이고, 보신은 구족한 몸인 구족색신(온전한 몸)을 의미하고, 법신은 육체의 개념이 아니라 정신적인 몸인 명신(名身)을 의미한다. 보신과 화신은 공한 것이다. 그래서 구족한 몸이 아니다. 그러나 색신을 지닌 부처가 부처가 아닌 것도 아니다. 그래서 구족한 몸이라 한 것이다. 중생들은 법신을 보지 못하고 구족한 색신을 보고 여래라 여길 수 있다. 이런 미혹을 떨쳐 주기 위해 구족색신을 여래라 여길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붓다는 이런 미혹을 떨쳐주기 위해 구족색신으로 여래라고 볼 수 있느냐?고 물었고, 수보리는 여래를 볼 수 없다고 답한 것이다.
또 ‘32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느냐?’고 물었는데, 수보리는 ‘상을 구족한 것으로 여래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며, ‘그것은 상을 구족했다고 여래께서 하더라도 상을 구족한 것이 아니라고 여래가 설하셨으니, 그래서 상을 구족했다고 한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곰곰히 읽어봐도 뜻을 이해하기가 정말 쉽지 않다)
21. 여래가 설한 법이 없다 (非說所說分-비설소설분)
“수보리야! 너는 여래가 ‘내가 설한 법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고는 하지 마라. 그런 생각하지 마라.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여래가 설한 법이 있다고 한다면 그는 거짓을 말하며 사실이 아닌 것에 집착하여 부처를 비방하는 것이니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설법이란 설할 만한 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설법이라 한다.”
그때 혜명(慧命)한 수보리가 붓다에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미래에 이 가르침을 두고 신뢰하는 마음을 낼 중생이 혹 있겠습니까?”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그들은 중생이 아니고 중생이 아닌 것도 아니다. 왜 그런가? 수보리야, 중생, 중생이라는 것은 중생이 아니라고 여래가 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생이라 한다.”
이때 다시 수보리가 ‘세존이시여, 이런 말씀을 듣고 참되다는 마음을 낼 중생이 혹 있겠습니까?’하고 물었는데, 이는 6장에서 한 질문을 반복한 것이다. 그러나 지혜의 눈이 생긴 후에 14장에서 이미 ‘미래 500년 뒤에도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신뢰하고 마음이 청정해지면 참되다는 생각이 생길 것이니 이 사람은 귀한 공덕을 성취할 것임을 알겠습니다.’고 답한 바 있다. 묻지 않아도 될 질문을 반복해서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도 수보리가 목숨(삶과 죽음)이라는 생각을 완전히 끊지 못했기 때문이고, 중생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 때문이다. 그래서 붓다는 ‘중생도 중생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고 ‘그들은 중생이 아니고’는 지혜의 눈으로 본 것이다. ‘중생이 아닌 것도 아니다’는 법안의 눈으로 본 것이다. 다시 말해 부처의 눈으로 보면 부처와 중생은 같지도 않지만 다르지도 않다는 말이다.
22.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할 어떤 법이 없다 (無法可得分-무법가득분)
수보리가 붓다에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붓다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셨다는 것이 얻으신 게 없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다. 그렇다. 수보리야!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조그마한 법도 얻은 게 없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한다.”
이것은 이 경에서 수보리의 여섯 번째 질문으로 이제 수보리는 보살의 길에 거의 다다르고 있다. 수보리는 ‘여래는 어떤 법도 얻은 바 없고 설한 바도 없다’고 할 뿐 아니라 이제 깨달았다고 할 법도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붓다는 ‘털끝만한 법도 있지 않으며 얻은 것이 없으니 그래서 말하기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무상정등각)라고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 세상에 공 아닌 그 어떤 것도 없으므로 무엇을 깨달았다고 할 게 없다고 하고 깨달아야 할 그 어떤 것도 없는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에 무상정등각이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선종의 제6조 혜능(慧能)은 ‘붓다는 깨달음을 구하려거나 혹은 얻으려는 어떤 생각도 갖지 않는다. 따라서 무상정등각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경이로운 자연은 본질적으로 공하다. 그래서 발견할 단 하나의 법도 없다. 발견할 단 하나의 법도 없기 때문에 이루어야 할 어떤 깨달음이 있을 수 있겠는가? 붓다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깨닫지 않았다.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이 없기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붓다는 무상정등각이라고 한 것이다’라고 했다.
23. 선법을 닦으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淨心行善分-정심행선분)
“그리고 수보리야,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한다. 자아도 없고 인간도 없고 중생도 없고 목숨도 없기 때문에 평등하나니 온갖 선법을 닦으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수보리야, 선법(善法)이라는 것은 선법이 아니라고 여래가 설했다. 그래서 선법이라 한다.”
선법(善法)의 산스크리트어는 ‘꾸살라’라고 하는데 꾸살은 ‘풀’, 라는 ‘자르다, 베다’의 합성어로 ‘꾸사풀을 꺾는 일’을 말한다. 풀은 아주 억세고 날카로워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잘못 꺾게 되면 손이 베이게 되는데 그래서 풀을 베려면 마음을 기울여서 조심해서 꺾어야 한다. 이와 같이 어떤 것이 선이기 위해서는 지혜로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뜻에서 이 말이 유래했다.
선법은 지혜로부터 생겨난다는 뜻이 담겨 있고, 마음을 기울이는 명상으로서 얻게 된다는 것이다. 즉 지혜나 선정(禪定-冥想)이라는 뜻도 담겨있는 것이다. 선법을 닦는다는 것은 자아를 버리고 차별이 없는 상태에 머물면서 탐진치를 없애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흔히 정진한다고 하는데 무엇을 위해 정진(精進)한다는 걸까?
이 말은 선법을 닦기 위해 정진하는 것이다. 꾸살라(善)를 증진시키고 아꾸살라(不善)를 소멸시키도록 노력하는 것이 ‘바른 정진(正精進)’인 것이다. 또한 선법은 소명태자가 제목에서 말한 것처럼 ‘정심행선(淨心行善)’풀면 ‘청정한 마음으로 선을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원천은 모든 중생은 평등하다는 것이다.
24. 반야바라밀 경의 공덕은 비교할 수 없다 (福智無比分-복지무비분)
“수보리야!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수미산왕 만큼의 칠보를 모아서 보시를 하더라도 다른 어떤 사람이 이 반야바라밀경에서 네 구절만이라도 받아 지녀서 읽고 외우고 남에게 설해준다면, 앞의 공덕은 이 공덕의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백천만 억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어떤 계산이나 비유로도 미칠 수 없을 것이다.”
《반야바라밀경》, 이 법문을 구마라집과 보리류지, 진제는 《반야바라밀경》, 급다는 《지혜피안도(智慧彼岸到)》, 현장은 《반야바라밀다경》, 의정은 《어차경중(於次經中)》으로 각각 옮겨 그 이름이 다르다.
이 경에는 보시에 대한 이야기가 아주 많이 등장한다. 4장에 ‘생각이 머무르지 않고 보시한다면, 그 복덕이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고 하는 등 모두 일곱 번 나오는데, 32장에서는 ‘한량없는 아승기 세계에 칠보를 가득채워 보시하더라도, 이 경에서 네 구절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남에게 가르쳐 준다면 그 복이 저 복보다 훨씬 낫다.’고 말했다. 또 이 24장은 칠보와 비유하고 있는데, 칠보는 무더기로 쌓더라도 한계가 있지만 지혜는 형상이 없기때문에 그 과보(果報-열매) 또한 한계가 없는 것이다.
25. 범부들은 자아가 있다고 여긴다 (化無所化分-화무소화분)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나는 중생을 제도했다’라는 생각을 하겠느냐?
수보리야! 그런 생각하지 마라. 왜냐하면 여래가 제도한 중생이 실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여래가 제도한 중생이 있다면, 여래에게 자아와 인간과 중생과 목숨이라는 생각이 있게 된다.
수보리야! 자아가 있다는 여래의 말은 자아가 있다는 뜻이 아닌데, 범부들은 그것을 자아가 있다고 여긴다.
수보리야! 범부라는 것도 범부가 아니라고 여래가 설했다. 그래서 범부라고 한다.”
범부는 ‘분리된 개개’라는 뜻이지만, 보통 ‘일반 사람, 개개의 인간’을 말한다. 집착을 벗어나야 부처가 될 수 있음에도 범부들은 집착한다. 그래서 어리석은 범부들이라 한 것이다. 그런데 범부들이 집착하는 것도 실은 집착이 아니다. 왜냐하면 비록 어리석어 자아에 집착하지만, 실재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때문에 이들의 집착도 사실은 공한 것이다. 그러나 범부들은 이를 알지 못한다. 범부의 집착도 [집착 자체가 공하기 때문에] 사실은 집착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구제할 중생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다만, 어리석은 범부들은 집착하는 대상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집착도 공한 줄을 모르고 끝없이 집착한다. 만약 어리석은 범부가 이런 집착이 어리석다는 것을 깨닫고 자아라는 생각, 인간, 중생, 목숨이라는 생각이 없다면 부처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않은 한 여전히 어리석은 범부로 남아 있는 것이다.
26. 법으로 여래를 보아야 한다 (法身非相分-법신비상문)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32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느냐?”
수보리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32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습니다.”
붓다가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32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다면 전륜성왕도 여래일 것이다.”
수보리가 붓다에게 말했다.
“세존이시여, 제가 붓다께서 설하신 뜻을 이해하기로는 당연히 32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습니다.”
그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설하셨다.
“형상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으면
그릇된 길을 가는 자이니
여래를 볼 수 없으리.
법으로 부처를 보니,
여래는 법이 그 몸이다.
그러나 법은 의식의 경계가 아니니,
법은 깊어서 보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 장은 반전(反轉)을 일으키고 있다. ‘32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다면, 전륜성왕(轉輪聖王)도 여래일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수보리는 자신이 잘 못 알았다는 것을 시인한다. 전륜성왕은 ‘바퀴(원반)을 가진(행하는)왕’을 말하는데, 형상으로 보면 부처와 전륜성왕은 다르지 않다. 그러나 깨달음으로 보면 부처는 바퀴를 굴리는 왕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32상으로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을 구족했다고 여래라고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게송(偈頌)으로 알려 준 것이다.
게송이라는 것을 구마라집, 보리류지, 진제는 게(偈)로, 급다는 가타(伽陀)로, 현장과 의정은 송(頌)으로 옮겼다. 게송은 설법을 요약하기 위한 것으로, 기억하기 쉽기때문에 자주 사용되는데, 여래는 형상이 아닌 법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으로 법신이 곧 여래다. 하지만 법신은 여간해서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법신은 인식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27. 모든 현상은 단멸하는 게 아니다 (無斷無滅分-무단무멸분)
“수보리야! 여래는 상을 구족했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생각하느냐? 수보리야, 그런 생각하지 마라. 여래는 상을 구족했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게 아니다.
그리고 수보리야! 네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려는 자는 모든 현상이 단멸한다는 것을 설했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생각하지 마라. 왜냐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려는 마음을 낸 자는 현상을 단멸하는 것으로 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멸(斷滅)은 소멸(消滅)과 비슷한 말로 ‘부서짐, 파멸·손실·잃음’을 뜻하는 것으로, 단견(斷見)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라는 가르침이다.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다’형상은 모두 공한 것이다 그래서 여래는 상을 구족했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게 아니라고 했다. 이것은 존재 자체가 허망하다는 것이 아니라, 실재라고 인식하는 것이 허망하다는 뜻이다. 상을 공한 것으로만 보면 단멸에 떨어지고 만다. 단멸은 있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고, 단견은 단멸이라는 견해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법을 단멸하는 것으로 설했다는 생각을 갖지 말라고 한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와 현상은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붓다가 단멸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법은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 무너지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의미다. 단멸이나 혹은 불멸이라는 견해로는 붙잡을 수 없는 것이다.
28. 자아도 없고 생겨남도 없는 법을 인욕으로 성취한다 (不受不貪分-불수불탐분)
“수보리야! 어떤 보살이 겐지스 강의 모래알만큼 많은 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 보시하더라도 다른 어떤 사람이 모든 것에는 자아가 없다는 것을 인욕으로써 성취한다면, 이 보살은 앞의 보살보다 측량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더 많은 공덕을 쌓은 것이다. 수보리야, 보살은 복덕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수보리가 붓다에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보살이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합니까?”
“수보리야! 보살은 복덕을 짓더라도 탐착하지 않는다. 그래서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탐착하지 않는다(不貪)’는 이 말을 이해하면 이 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탐착에 대해 산스크리트어는 ‘수보리야, 수용을 하더라도 국집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말하기를 수용한다고 한 것이다’로, 여기서 수용은 ‘반아 들인다(受)’는 뜻이고, 국집은 집착, 탐착한다는 뜻이다. 이를 보리류지는 ‘보살수복덕 불취복덕 시고보살취복덕(菩薩受福德 不取福德 是故菩薩聚福德)’으로 옮겼다. ‘보살은 복덕을 받드라도 복덕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래서 보살은 복덕을 받는다고 한 것이다.’한편 진제는 ‘차복덕취 가득섭지 불가집취 시고설차복덕지취 응가섭지(此福德聚 可得攝持 不可執取 是故說此福德之聚 應可攝持)’로 번역했는데, ‘복덕이 쌓임이란 그것을 받고 지닐 수 있지만 잡거나 가질 수 없는 것이므로 이 복덕이 쌓임을 받고 지닐 수 있다고 한 것이다’라고 옮겼다.
29. 여래란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고 어디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다 (威儀寂靜分-위의적정분)
“수보리야! 어떤 사람이 ‘여래는 오기도 하고 가기도 하고,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한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내가 말한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여래란 어디로부터 온 것도 아니고, 어디로 간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래라고 한다.”
간결하게 여래의 가르침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 하기 쉬운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래란 어디로부터 온 것도 아니고, 어디로 간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는 이 말 때문에 그렇게 생각된다. 여래는 산스크리트어 tathagata를 한역한 것으로 ‘如’와 ‘來’라는 뜻과 ‘去’와 ‘如去’라의 뜻을 가진다. 즉 여래는 來와 去의 뜻을 동시에 담은 문자다.
오고 감을 떠나 항상 여여(如如)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기도 하는데, 일체 법은 무아이고, 생멸이 없고 자아도 없다. 그런데 어떻게 오고 감이 있겠는가? 이것이 ‘형상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으면, 그릇된 길을 가는 자이니 여래를 볼 수 없으리, 법으로 부처를 보니 여래는 법이 그 몸이다. 그러나 법은 의식의 경계가 아니므로 법은 깊어서 보기가 어려운 것이다.’고 한 그대로다. (17장)
‘여래는 오지 않지만 오지 않는 것도 아니고, 가지 않지만 가지 않는 것도 아니고, 앉아 있지만 앉아 있는 것도 아니고, 눕지 않지만 눕지 않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서 고요히 머물러 있다. 그러함이 여래다’- 혜능
‘구름이 흘러가는가? 달이 움직이는가? 배가 떠가는가? 해변이 움직이는가? 달은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지만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해변은 움직이는 것도 아니지만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여래는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고요히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다. 나타남과 사라짐(生滅)은 시각적인 착각이다.’- 《원각경(圓覺經)》
‘물이 맑아지면 달이 비치지만 달이 실제 온 것은 아니다. 구름이 끼면 달이 사라지지만 달이 어디로 간 것은 아니다. 마음이 깨끗하면 부처를 보지만 부처가 실제 온 것은 아니다. 마음이 더러우면 부처를 보지 못하지만 부처가 어디로 간 것은 아니다. 부처는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다. 32상의 몸은 단지 여래의 화신일 뿐이다. 《화엄경(華嚴經)》
30. 모이나 흩어지나 한 모습이다 (一合離相分-일합이상분)
“수보리야! 선남자 선여인이 삼천대천세계를 부수어 티끌로 만든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티끌들이 많다고 하겠느냐?”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티끌들이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붓다께서 티끌들이라 하시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붓다께서 말씀하신 태끌은 티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티끌이라 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신 삼천대천세계도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세계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세계가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하나로 합쳐진 형상일 텐데, 여래께서 하나로 합쳐진 형상은 하나로 합쳐진 형상이 아니라고 설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로 합쳐진 형상이라 합니다.”
붓다가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하나로 합쳐진 형상이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인데, 다만 범부들이 그것에 탐착할 뿐이다.”
탐착은 앞에서 살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하나와 다수는 우리의 관념이다. 하나에 다수가 들어 있는 것이다. 마치 모래 한 알에 우주가 담겨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다수가 하나(一)이고, 하나가 다수(大)인 것이다. 이는 쪼개진 하나가 아니고 합해진다고 다수가 아닌 것이다.
크다 작다는 분별도 마찬가지다. 여러 원인과 조건들이 합해져 티끌이 되고, 티끌들이 합해져 세계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티끌도 공한 것이고 아무리 큰 세계도 공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고 말한 것이다.
31. 일체 법을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고, 이렇게 확신하라 (知見不生分-지견불생분)
“수보리야! 어떤 사람이 ‘붓다가 자아라는 견해, 인간이라는 견해, 중생이라는 견해, 목숨이라는 견해를 말했다.’고 한다면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사람은 내가 말한 뜻을 이해했느냐?”
“세존이시여, 그 사람은 여래가 말한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세존께서 말씀하신 자아라는 견해, 인간이라는 견해, 중생이라는 견해, 목숨이라는 견해는 자아라는 견해, 인간이라는 견해, 중생이라는 견해, 목숨이라는 견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아라는 견해, 인간이라는 견해, 중생이라는 견해, 목숨이라는 견해라고 하셨습니다.”
“수보리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려는 마음을 낸 자는 일체 법을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고, 어떻게 확신하고 이해하여 법이라는 생각을 내지 말아야 한다.
수보리야! 법이라는 생각은 법이라는 생각이 아니라고 여래가 설했다. 그래서 법이라는 생각이라 한다.”
‘일체 법’을 어떻게 알아야 하고, 어떻게 보아야 하고, 어떻게 확신을 가져야 할까? (이제 결론을 내리려고 한다)
첫째, 모든 법은 자아가 없고, 태어남이 없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려는 선남자 선여인은 이렇게 알아야 한다.
둘째, 형상으로 여래를 볼 수 없다. 여래는 법이 몸이라고 보아야 한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려는 선남자 선여인은 이렇게 보아야 한다. 일체 법이 반야지혜라고 보아야 한다.
셋째, 이 경은 반야바라밀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려는 선남자 선여인은 지혜의 완성에 이르는 이 가르침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지혜의 완성에 이르기 위해 반야바라밀로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결론적으로 모든 법은 자아가 없고, 태어남이 없는 것을 알아야 하고, 모든 것은 법이 몸이라고 보아야 한다. 지혜의 완성에 이르는 가르침에 대한 확신을 갖고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그러나 법이라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어떤 법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반야바라밀의 결론이다.
32. 모든 유위법은 꿈 같고 물거품 같다 (應化非眞分-응화비진분)
“수보리야! 어떤 사람이 한량없는 아승기 세계에 칠보를 채워 보시하더라도, 보살의 마음을 낸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에서 네 구절만이라도 받아 지녀서 읽고 외우고 남에게 가르쳐 준다면 그 공덕이 저 공덕보다 측량할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이 더 많은 공덕을 쌓은 것이다.
어떻게 남에게 가르쳐 주어야 하나? 가르쳐 준다는 생각을 갖지 말고, 여여(如如)하고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형성된 것(有爲法)은 꿈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번개같기 때문이니 이렇게 관찰해야 한다.
붓다께서 이 경을 설하시자 장로 수보리와 비구·비구니, 우바새·우바이, 모든 세상의 천신·인간·아수라가 붓다의 말씀을 듣고 매우 기뻐하면서 금강반야바라밀경을 신뢰하고 받아들이고 받들어 행하였다.”
이 마지막에서 붓다께서는 ‘일체 유위법은 꿈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번개 같기때문에’가르칠 게 없다고 하고, 그래서 ‘가르친다고 할 게 없으므로 가르친다고 한다.’고 하는데 이는 가르칠 게 없으므로 침묵하고 그 대신에 여여하고 흔들림없는 행동으로써 가르침을 주라는 뜻이다. 이는 붓다가 말했듯이 설한 바도 없고, 설할 법도 없기 때문이다. 제1장의 ‘가르치지 않고 가르친다’는 것과 맥락이 같다. 가사 한 벌, 발우 하나, 붓다의 삶에서, 수행하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보리류지 등 대부분 역자들은 ‘이렇게 고귀한 금강이요, 복덕 구족한 반아바라밀은 완결되었다’(iti Arya-Vajracchedika Bhagavati Prajhapa ramita Samapta – 산스크리트)고 하고 끝을 맺었다. 그러면서 구마라집은 이 경을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고 하고, 현장은 《금강반야바라밀다경》이라고 했다. 그리고 아래 진언은 구마라집은 번역했으나 보리류지·진제·현장, 의경은 진언을 생략했다. 한편 급다는 귀명일체보살해등(歸命一切菩薩海等)라 하여 ‘모든 불보살들의 세계에 귀의합니다’고 했다.
眞言(진언)
那謨婆伽跋帝 鉢喇壤 婆羅彌多曳
(나모바가발제 발라양 바라미다예)
唵 伊利底 伊室利 輸盧馱 毗舍耶 毗舍耶 娑婆訶
(옴 아지지 이실리 수로다 바사야 바사야 사바하)
진언은 ‘진리의 말’이라는 뜻으로 산스크르트어로 다라니(陀羅尼)라 하고 한역은 ‘모든 것을 지니고 있다’는 뜻에서 총지(總持)라고도 한다.
진언은 말 그대로 진언이기 때문에 굳이 해석이 필요치 않다. 진언은 염송하는 것이다. 굳이 해석한다면 이 진언은 나모로 시작해서 쓰와하로 끝이 난다. 니모는 나무(南無), 즉 귀의한다는 뜻이다.
첫 번째 구절은 ‘세존 반야바라밀에 귀의합니다’라는 뜻이다. 진언은 그 자체로 신성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된 것이다. 두 번째 구절은 그 뜻을 이해하기 보다 깨달음이나 서원을 비는 주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다만, 옴(o-u-m)은 합성어로서 각각 우주만물의 발생·유지·소멸, 즉 처음부터 끝까지라는 뜻을 함축하는 진언으로 신성한 ‘우주의 소리’이다.
또한, 맨 끝의 스와하(savihi)는 보통 진언 끝에 축복이 깃들기를 비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되기 바란다’는 원만성취 염원을 담고 있는 말이다.
이 《금강반야바라밀경》과 뗄 수 없는 연관성을 가진 《반야심경》을 사경해 보면서 줄인다. (불기* 2464년 11월 25일)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반야심경)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무의식계 무무명 역무무명진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菩提薩陀 依般若波羅蜜多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
故心無罣碍 無罣碍 故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고심무괘애 무괘애 고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無罣碍(무괘애) : 장애나 걸림이 없음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 故得阿縟多羅三邈三菩提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 고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故知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故說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고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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