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반야심경

지견불생분(知見不生分 - 지견을 세우지 않음) / 진우 스님의 금강경 강설

수선님 2025. 1. 19. 11:52

극락이라는 분별이 생기면 곧 지옥이라는 인과가 생긴다

법상을 설하지만 중생을 일깨우기 위해 가명을 사용한 것일 뿐

법이 공하고 법을 듣는 중생이 또한 공하니 결국 말한 바도 없어

어떤 현상에서도 좋고 싫은 시비고락의 분별없이 여여부동해야

법에 대해서나, 설법에 머물러 집착하는 것 또한 분별을 짓는 것이니, 다만 설명하기 위해 이름을 붙인 것임을 알아야 한다. [법보신문DB]

수보리 소언법상자 여래설 즉비법상 시명법상(須菩提 所言法相者 如來說 卽非法相 是名法相) “수보리야! ‘법이라는 상’을 여래께서 곧 ‘법이라는 상’이 아니라고 설하시니, 그 이름이 ‘법이라는 상’이라고 말씀하심이다.”

부처님께서는 ‘일체법이 이러하니 법상(法相)을 내지 말지어다’라고 하셨으나, 이미 부처님부터 법상이라는 두 글자를 말씀하셨으니, 이 법상이라는 두 글자에 대해 부처님 자신이 법상지견(法相知見)을 가지셨다고 할 수 있을까? 수차례 반복했듯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상지견(四相知見)은 곧 사상지견(四相知見)이 아니요, 그 이름만이 사상지견(四相知見)이다. 따라서 이를 모르는 중생을 깨우치기 위해 ‘법상(法相)’이라는 가명을 사용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일체법을 그러히 알고, 그러히 보고, 그러히 믿어서 법상을 내지 말지니라’고 하시어 최종적인 결론을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중생이 혹여 또다시 집착하지 않을까, 또다시 본신(本身), 즉 분별하지 않는 본래의 모습에 대해 또 분별하지 않을까하여 끝까지 집착을 떼어 주심이다.

수보리야 내가 말한 법상이라는 것 역시 여래의 경계에서는 법상이라는 분별상을 내지 말아야 하느니, 곧 법상이 아니라 그 이름이 법상이라 하심에 최후까지 법상이라는 것에 집착할까 염려하시어, 중생의 경계에서 볼 때, 더 이상 분별하지 않는 곳까지 가게 하심이다. 그러니 더 이상, 그 어떤 말에도 머물러 집착하지 않고, 그 어떤 생각에서도 머물러 집착하지 않고, 그 어떤 것을 보고 듣고 부딪치는 것에도 머물러 집착하지 않는 것이 청정본성(淸淨本性)이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할 것이니, 이를 곧 적멸이라 하고 열반이라 하며, 해탈과 피안, 성불이라 하는 것이므로 고업(苦業-고통의업)을 완전히 끊어 영원히 평안하고 편안한 마음을 이루게 함이다.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 - 응화신(나투어진 몸)은 참된 것이 아님)

수보리 약유인 이만무량아승지세계칠보 지용보시(須菩提 若有人 以滿無量阿僧祇世界七寶 持用布施)약유선남자선여인 발보살심자 지어차경 내지사구게등 수지독송 위인연설 기복승피(若有善男子善女人 發菩薩心者 持於此經 乃至四句偈等 受持讀誦 爲人演說 其福勝彼)운하위인연설 불취어상 여여부동(云何爲人演說 不取於相 如如不動) “수보리야! 만일 어떤 사람이 한량없는 아승지 세계에 칠보로 가득히 채워서 보시한다 하더라도, 만일 어떤 선남자나 선여인이 보살심을 내어 이 경을 받아 지니되, 사구게 가운데 한 게송만이라도 읽고 외우며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잘 일러주면 그 복이야말로 저 보시의 복보다도 더 수승하리라. 어떻게 하는 것이 남을 위하여 잘 일러주는 것인가? 상을 취하지도 않으며, 여여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이니라.”

지금까지 경을 어떻게 해야 제대로 지니는가에 대해 부처님께서 여러 방편을 들어 말씀하시었다. 이제 더 이상 마음이 이를 데가 없는 곳까지 오게 되었으니, 지금부터는 스스로가 부처님이 되어 남을 위하여 최고의 수승한 복덕을 지을 일만 남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남을 위해 잘 일러줄 것인가? 이 경전의 진정한 뜻은 일체상(一切相)에 집착하지 않고 여여하며, 일체상을 여의었다고 단멸이 아니니, 즉 언어와 동작, 신구의 삼업에 걸림 없이 자유롭고, 적연(寂然)하여 공하며, 말과 행동에 있어서 찬연히 안다고 하여도 여여부동(如如不動)하여 머물고 집착함에 끌리지 아니하니, 이 법을 전함에 있어서도 여여부동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부동(不動)인가? 일체법 그 어떤 것에도 분별하지 않고 여여한 마음이니, 이를 듣는 이로 하여금 여여한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고, 듣는 이가 여여하니 듣는 상이 없고, 말하는 상, 듣는 상이 모두 공하였으니 아상, 인상이 공한 것이다. 또 법이 여여하고 얻는데 있어서의 득(得)도 여여한 것이다. 득이 여여하니 득의 모습이 공하고, 법이 여여하니 법상이 공하며, 법상과 득상이 공하니 중생상과 수자상이 공함이다.

이렇게 법상이 공하고 설법의 상이 공하였으니, 설법이 곧 설법이 아니고 그 이름이 설법이며, 또 듣는 상과 얻는 상이 공하였으니, 중생이 곧 중생이 아니요, 그 이름만이 중생일 따름이다. 이와 같이 법을 듣는 중생이 공하고, 따라서 설한 법이 공한 이상, 종일 설해도 설이 아니요, 육도중생이라 하더라도 중생이 아닐 것이요, 무진법문(無盡法門)이라 해도 법이 아닐 것이다. 이를 일러 여여하고 부동하다는 것이니, 이 같은 자세로 남을 위해 일러주라는 말이다. 능히 남을 위하여 전법(傳法)함에 있어 상에 취하지 아니하고 여여부동(如如不動)해야 함이다. 이 법이 이러하여 상에 취하지 아니하므로 여여부동이니, 이때 모든 세계와 티끌들로 법을 설할 것이요, 모든 중생들도 스스로 법을 설할 것이다. 법이 본래 이러하므로 설하는 것도 이러할 것이니, 이때 어떤 설상(說相)이나 법상(法相)에 있어서 취할 것이 어디 있을 것인가. 본래가 여여하여 부동일 뿐이다.

부처가 되려면 분별상을 없애야 한다. 이것이라는 분별이 생기면, 저것이라는 인과가 생기는 것을 말한다. 즉 극락이라는 분별이 생기면 지옥이라는 인과가 생긴다. 좋은 것을 구하려 하면 할수록 싫고 나쁜 인과가 생긴다. 그러니 반복 윤회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별심, 분별상을 업이라 한다. 이를 없애야 업이 멸하고 인과가 없어지며 윤회가 멈춘다. 이름하여 좋지 않은 일이 사라진다. 괴로움과 고통, 슬픔과 불행, 불만과 미움, 싫고 나쁜 모든 것이 멸해진다. 분별하는 이상, 지옥은 영원히 내 곁에 있다.

결국 분별심이 공이 되어야 부처를 이루게 된다. 이렇게 분별하지 않는 자세를 가지게만 된다면, 내가 하는 행동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다. 더 이상 분별하지 않으니, 내가 어떤 행동을 한들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연기의 모습일 뿐이다. 따라서 당연히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면 된다. 분별하지 않으면 더 이상의 집착과 미련을 갖지 않게 된다. 복덕이 없으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달하기 어렵다. 그 복덕이란, 세상에서 가장 크고 좋은 보시를 하는 것보다, 더 이상 복덕이 필요치 않을 정도로 완벽하고 완전한 것을 말한다. 이는 곧 이 경 가운데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지니고, 읽고 이해하여, 중생에게 잘 전법함으로써, 이를 알아들은 중생이 여여부동(如如不動)한 마음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일체상(一切相)이란, 글자 그대로 모든 대상에 대해 분별하는 모습을 가리킨다. 보이고 들리는 형상뿐만 아니라, 생각과 느낌까지도 상이라 이름한다.

여여와 여여부동(如如不動)이란, 마음에 동요가 전혀 없는 상태를 말함이다.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에 더 이상 분별하지 않으니, 좋고 싫은 고락이 없고, 마음이 고요하며 완전하고 완벽히 평온한 상태를 이름이다. 단멸은, 이제 더 이상 분별하지 않고 모든 상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멸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이 깨달아 멸했다고 하는 생각이 남아 있으므로, 아직도 완전한 단멸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본래 단멸이란 없는 것이고, 그 이름만이 단멸이기 때문이다.

법과 법상이란, 법에 대해 분별된 생각을 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모습을 법이라 하고, 이 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만, 연기법으로 완벽히 돌아가는 세상의 모습에 대해, 분별하는 나의 마음 모습을 법상이라 하고, 이보다 진짜 법상의 본질은, 법에 대해 더 이상 분별하지 않고 법을 완전히 깨달았다고 하는 또 하나의 분별상을 갖는 것이다. 이러한 분별 법상이 남아 있는 한, 아직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지 못함이다. 또한 법과 설법, 그리고 모든 상은 공하여 이러쿵저러쿵 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법에 대해서나, 설법에 머물러 집착하는 설상(說相) 등에 대해, 이런저런 분별을 짓는 것, 그 자체가 오류이니, 다만 설명을 하기 위해 그 이름을 부르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복덕이든, 법이든, 보리이든, 그 어떤 현상에서도 좋고 싫은 시비고락의 분별없이 항상 마음이 여여부동하여 평안해야 한다. 만약 옆에서 이를 지켜보는 이가 있다면, 이 역시 분별하지 않는 마음으로 여여부동해야 한다. 따라서 신구의(身口意-행동,말,생각) 삼업에 있어서 무조건 그 어느 것에도 분별하지만 않는다면, 이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한다. 대화를 나눌 때, 상대의 말에 대해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많을 것이다. 대부분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참으려 애는 쓴다. 상대가 나보다 강한 사람일수록 그렇다. 비교적 나보다 약하거나 아래 사람이라면 살짝 화를 내거나 충고를 하는 경우도 있다. 어느 경우든 다 좋다. 기분이 나쁘지 않고 화가 나지 않으면 말이다. 내가 기분이 나쁘고 화가 나는 것은 상대 때문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는 기분 나쁨과 진심(嗔心-화내는마음)이 상대라는 인연으로 나타난 것이다.

만약 내 마음 안에 기분 좋고 싫은, 또는 화나는 마음의 업이 없다면, 상대가 무슨 말을 한다 해도 동요되거나, 좋다 싫다 분별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상대 때문일까? 당연히 나의 업연이 상대의 말에 걸림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왜 이런 마음이 생긴 것일까? 누차 설명했듯이,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는 고락시비의 분별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좋은 것은 싫은 것의 고락 인과를 낳고, 옳은 것은 그르다는 시비의 인과를 낳으므로, 좋은 사람과 싫은 사람은 계속하여 인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인과에 따른 악연을 만나지 않고 평안한 사람만을 만나기를 원한다면, 분별심을 없애는 길밖에 없다. 모든 수행은 분별심을 없애는 것이다. 분별심을 완전히 없애게 되면 해탈 열반이다. 생사고락에서 영원히 벗어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좋지 않은 인연이나, 안 좋은 주변은 사라지게 된다. 내 마음 분별심의 크기에 따라 선연과 악연은 비례하여 나타난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이다.

진우 스님 조계종 총무원장 sansng@hanmail.net

[1755호 / 2024년 12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68. 지견불생분(知見不生分 - 지견을 세우지 않음)  - 법보신문

수보리 소언법상자 여래설 즉비법상 시명법상(須菩提 所言法相者 如來說 卽非法相 是名法相) “수보리야! ‘법이라는 상’을 여래께서 곧 ‘법이라는 상’이 아니라고 설하시니, 그 이름이 ‘

www.beop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