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차제정九次第定과 칠식주이처七識住二處 1
2. 구차제정九次第定과 칠식주이처七識住二處
구차제정이 진리를 인식하는 단계적 성찰이라는 것은 상술한 바와 같다. 따라서 이제 그 내용과 구조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구차제정을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함경>의 모든 교리를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멸진정이 진리를 인식하게 되는 구경의 경지이고, 사선, 사무색정은 멸진정에 이르는 단계적 과정이라고 할 때, <아함경>의 여러 교리들은 이같은 구차제정을 통해 드러난 사실이거나, 멸진정에서 발견된 진리를 설한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장에서는 이들은 모두 다룰 수는 없으므로 구차제정을 단계적으로 행할 때 도달하게 되는 의식 상태를 설명하고 있는 七識住二處를 통해 구차제정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칠식주이처는 삼계(욕계, 색계, 무색계)의 중생들이 소위 구중생거九衆生居라고 하는 그들의 세계에서 세계와 자아를 인식하는 의식 상태를 설명한 것이다.
이에 대한 <중아함 대인경大因經>의 설명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第一識住; 色衆生, 若干身 若干想, 人及欲天 -----> 욕계중생
第二識住; 色衆生, 若干身 一想, 梵天(초선천) ------> 색계중생
第三識住; 色衆生, 一身 若干想 晃昱天(이선천) ------> 색계중생
第四識住; 色衆生, 一身 一想, 遍淨天(삼선천) ------> 색계중생
<第一處>; 色衆生, 無想 無覺, 無想天(사선천) ------> 색계중생
第五識住: 無色衆生, 度一切色想 滅有對想 不念若干想
無量空處 是空處成就遊, 無量空處天 ---------> 무색계중생
第六識住: 無色衆生, 度一切無量空處 無量識處 是識處成就遊,
無量識處天 ---------> 무색계중생
第七識住: 無色衆生, 度一切無量識處 無所有處 是無所有處成就遊,
無所有處天 ----------> 무색계중생
<第二處>: 無色衆生, 度一切無所有處 非有想非無想處 是非有想非無想處成就遊,
非有想非無想處天 ----------> 무색계중생
멸진정은 이같은 중생들의 의식 상태에서 완전히 해탈한 경지이다.
칠식주이처가 어떤 것인지를 알고, 그것의 집, 멸, 미, 환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바르게 알아서 마음이 이들 의식상태에 물들거나 붙잡히지 않고 해탈한 경지가 멸진정이다.
<대인경>에서는 멸진정에 이르는 해탈에 다음과 같은 여덟 단계, 즉 팔해탈이 있다고 하고 있다.
제일해탈; 色觀色
제이해탈; 內無色想 外觀色
제삼해탈; 淨解脫身作證成就遊
제사해탈; 度一切色想 無量空處成就遊
제오해탈; 度一切無量空處, 무량식처성취유
제육해탈; 도일체무량식처, 무소유처성취유
제칠해탈; 도일체무소유처, 비유상비무상처성취유
제팔해탈; 도일체비유상비무상처상 지멸해탈신작증성취유
급혜관자누진지
이 팔해탈은 중생들의 세계(칠식주이처)에서의 해탈을 의미한다.
칠식주이처를 참되게 알아 마음이 칠식주이처에 염착染著되지 않을 때 팔해탈이 있게 되며, 멸진정은 제팔해탈을 얻게 되는 경지인 것이다.
따라서 구차제정과 칠식주이처 그리고 팔해탈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칠식주이처라는 중생계의 본질을 사유하는 것이 구차제정이고, 구차제정을 통해 그 본질을 앎으로써 단계적으로 그 세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팔해탈인 것이다.
이들의 관계를 간단히 정리하여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도표생략)
1) 第一識住는 욕계 중생의 의식이 머무는 상태이다.
욕계 중생의 의식은 欲에 머물고 있다. 욕계 중생은 안, 이, 비, 설, 신 등 몇 가지의 감관(若干身)에 지각된 색,성,향,미,촉 등을 존재로 인식하면서 그 존재를 욕탐으로 분별하여 갖가지 분별상(若干想)을 일으킨다.
예를 들면 욕계 중생인 인간은 감관에 지각된 내용에 대하여 그것을 책상이나 의자라고 분별하여 인식하는 것이다.
2) 초선初禪은 이같은 욕계 중생이 인식한 존재의 본질을 반성적으로 사유하는 선정이다.
즉 책상이나 의자와 같은 존재의 본질이 추구되는 것이다. 당시의 사문들은 이같은 존재의 본질을 사대와 같은 불변의 요소라고 주장했고, 바라문들은 Brahman 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현상적 존재의 본질을 어떤 불변의 실체라고 생각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지각하는 존재의 배후에 브라만이라는 불멸의 실체가 있으며 그것이 변해서 현실세계의 다양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바라문 사상의 전변설이고, 몇 가지 불멸의 요소가 있어서 그것들이 모여서 다양한 현실적 존재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 사문들의 적취설인 것이다.
이들은 이와 같이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지만 현상적 존재의 배후에 불멸하고 불변하는 어떤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그들의 사상은 다같이 현실적으로 인식되지 않는 불멸의 실체를 전제로 하고 있는 독단론인 것이다.
이와 같이 외도들은 존재의 본질을 존재를 구성하고 잇는 질료나 재료로 보고 있다. 그러나 존재의 본질을 질료나 재료로 보아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어떤 존재의 질료나 재료도 존재이므로 우리는 다시 그 존재의 본질을 문제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이같은 본질의 추구는 결국 순환론에 빠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존재의 본질은 결코 질료나 재료가 아니다. 왜냐하면 존재는 질료나 재료로 규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책상을 예로 들면, 책상이라는 존재는 재료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 책상은 나무로 된 것도 있고, 강철이나 플라스틱으로 된 것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존재의 본질은 무엇일까? 책상은 그것이 나무로 된 것이건 강철로 된 것이건 책을 놓고 보려는 욕구나 의지를 가지고 대상을 인식할 때 그 욕구를 충족시키는 대상이 책상인 것이다.
따라서 책상의 본질은 질료나 재료가 아니라 우리의 욕구나 의지라 할 수 있는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불타는 <중아함 제법본경>에서 모든 존재(一切諸法)는 欲(chanda:will, desire, for, wish for)을 본질로 한다(以欲爲本)고 하고 있다.
초선에서는 이와 같이 욕계에서 인식되는 존재의 본질이 욕구임이 드러난다. 따라서 초선에서는 의식이 욕탐을 떠나서 대상을 관찰, 사유함으로써 욕계에서 벗어나게 되며, 이것이 지각의 대상(色)을 욕구없이 관찰하는(色觀色) 제일해탈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의식은 오관(若干身)으로 대상을 인식하되 그것에 대하여 차별상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이곳을 '若干身一想'의 第二識住라고 한다.
구차제정九次第定과 칠식주이처七識住二處 2
제二식주는 色界 初禪의 경지에 의식이 머무는 상태이다.
욕계의 본질이 욕탐임을 자각하여 욕탐에서 벗어남으로써 생긴 喜樂에 의식이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희락은 모든 색을 욕탐 없이 一想으로 觀함으로써 생긴 것이다.
즉 의식이 비록 욕탐은 벗어나 있으나 대상을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3) 二禪에서는 이같은 의식 상태를 반성적으로 사유한다.
色을 一想으로 관함으로써 생긴 희락의 본질을 추구하는 것이다. 희락은 우리의 마음에서 생긴 것이지 지각된 색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따라서 오관에 의한 지각과 사유를 멈추고 자신의 마음을 관조함으로써 새로운 희락을 느끼게 되며, 이것이 '無覺無觀 定生喜樂'의 二禪이다.
그리고 이같은 二禪의 성취를 통해 우리의 의식이 지각의 대상, 즉 색으로터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이것을 '內無色想 外觀色'의 제二해탈이라 하고, 이 경지에서는 의식이 오관에서 벗어나 마음 속에 생긴 다양한 희락에 머문다는 의미에서 '一身 若干想'의 제三식주라고 한다.
4) 三禪에서는 제三식주에 머물고 있는 의식상태를 반성적으로 사유한다.
즉 의식이 희락에 머물고 있는 까닭을 사유하는 것이다.
그 결과 자신이 그 희락을 바라기 때문에 의식이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자각하여 희락에 대한 욕구(喜欲)를 버림으로써 三禪을 성취하게 된다.
그리고 삼선의 성취를 통해 우리의 의식이 욕탐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이것을 '정해탈신작증성취유淨解脫身作證成就遊'의 제三해탈이라 하며, 이 경지에서는 의식이 마음에 머물면서 모든 희락에 차별상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一身 一想'의 제四식주라고 한다.
5) 제사식주의 상태에서 희락에 대한 차별상은 없어졌지만 희락에 대한 一想은 남아 있다. 四禪에서는 이 一想을 관조한다.
그 결과 이 일상이 모든 고락과 喜憂의 근본임을 자각하여, 의식은 상을 떠나 無住의 상태가 된다.
이 경지가 '사념청정捨念淸淨'의 사선을 성취한 경지이며, 이곳은 외부의 대상에 대한 욕탐과 의식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고락 희우 등의 모든 감정을 떠나 의식이 이것들에 머물고 있지 않으므로 (無想無覺) 識住라 하지 않고, 대상에 대한 욕탐과 의식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고락 등의 감정이 이곳을 바탕으로 생긴다는 의미에서 이곳을 處(ayatana) 라고 한다.
그리고 맨처음 도달한 처라는 의미에서 제일처라고 한다.
이상과 같은 사선을 차례로 닦아 제일처에 이름으로써 얻게 되는 해탈이 욕탐에서 마음이 벗어난 심해탈心解脫이다.
외부의 대상에 대한 욕탐은 초선을 통해 극복하고, 내부에서 생긴 감정은 삼선을 통해 극복하여 사선에서는 일체의 욕탐이나 감정에 의식이 머물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제일처에서는 대상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인식하는 주관과 인식되는 객관이 대립하고 있는 가운데 대상에 대한 욕탐과 주관의 감정만 멸했을 뿐이다.
따라서 이 세계는 욕망이나 감정을 떠나 대상이 순수하게 인식되고 있는 색계이다. 색계의 마지막 단계인 사선 즉 제일처에서는 이같은 색계의 본질이 반성적으로 사유된다.
구차제정九次第定과 칠식주이처七識住二處 3
6)
주관적 존재와 객관적 존재는 공간 속에서 대립하고 있다.
즉 색계의 모든 존재는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 만약 공간이 없다면 색계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공간은 색계의 바탕이 된다고 할 수 있으므로 공간에도 처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공처空處라고 한다. 그리고 이같은 자각을 통해 의식은 제일처에서 벗어나 공간을 대상으로 머물게 되며, 이것이 제五식주이다.
그렇다면 공간은 무엇인가? 공간은 色의 無다. 뿐만 아니라 색계의 모든 존재를 포함하고 있으며 무량 무변한 것이다.
이렇게 의식이 다시 공간을 대상으로 머무는 것이 제오식주인 공처이며, 이 공간은 색이 없는 곳이기 때문에 일체의 색상을 초월하고 감관에 대립하고 있는 것에 대한 지각을 멸함으로써 (度一切色想 滅有對想) 무량공처無量空處를 성취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공처를 성취함으로써 색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제四해탈이다.
7)
제五식주인 공처는 공간을 무량무변한 존재라고 인식하는 의식상태이다. 空處定은 이같은 의식상태에 대한 반성적 사유이다.
공간이란 전술한 바와 같이 '색의 없음' 이다. 즉 감각적으로 지각되지 않는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무량무변한 존재이다. 이와 같은 공간에 대한 인식의 내용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공간은 지각되지 않는 존재이므로 공간에 대한 지식은 지각을 통해 성립된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리고 공간이 무량무변한 존재라면 이같은 지식은 경험을 통해 성립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경험은 유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색이 지각되지 않을 때 우리가 갖게 되는 관념(想)이다. 즉 우리는 색이 지각되지 않을 때 공간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며 색을 유한하다고 생각함으로써 '색의 없음' 즉 색과 대립되는 개념에 대하여 무량무변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공간의 바탕은 이같은 관념을 일으키는 의식이라 할 수 있으며, 이같은 자각을 통해 공간에 대한 일체의 관념에서 벗어나(度一切空處想) 의식의 영역에 머무는 것이 제五해탈의 경지인 識處의 성취이다. 이곳에도 처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이곳이 공간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같은 식처에 의식이 머무는 것을 제六식주라고 한다.
8)
識處定에서는 의식의 모든 영역이 반성적으로 사유된다. 의식은 대상에 대한 의식이다. 그런데 감각적 지각의 대상인 색은 공간으로 환원되었고, 공간이라는 대상은 의식으로 환원되었기 때문에 의식은 대상을 상실한다. 그렇다면 대상이 없는 의식이 있을 수 있을까?
이같은 사유의 결과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을 함으로써 無所有處를 성취하게 되며, 이것이 '도일체식처상 무소유처성취유'의 제六해탈이고, 의식이 이같은 생각에 머물고 있는 상태를 제七식주라 한다. 그리고 이곳도 역시 식의 바탕이 되는 영역이라는 의미에서 처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9)
제칠식주 즉 무소유처에서 행하여지는 사유가 무소유처定이다. 만약 존재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없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의식에 인식되지는 않지만 이같은 사유의 주체는 없다는 할 수 없다.
따라서 식이 있다는 것은 유에 대한 관념(有想)이 있다는 것이고,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은 무에 대한 관념(無想)이 있다는 것이며, 이와 같은 유상과 무상은 유상도 무상도 아닌 어떤 미묘한 본질적 존재에서 생긴 관념(想)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은 생각을 통해 무소유처상을 초월하여 非有想非無想處를 성취하게 되며, 이것을 제七해탈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곳은 무소유처의 바탕이 된다는 의미에서 처라는 개념을 사용하며, 이 비유상비무상처는 모든 존재가 의지하고 있는 바탕이라는 의미에서 제二처(ayatana)라고 한다.
제일처는 감정이나 욕망의 바탕이 되는 영역이고, 제이처는 물질적 존재(色)와 정신적 존재(無色)의 바탕이 되는 영역인 것이다.
10)
第一處 즉 四禪의 성취를 통해서 대상에 대한 욕탐이나 감정을 멸진하고서, 즉 욕계의 존재가 고락, 희우 등의 감정에서 비롯된 허구적인 존재임을 깨닫고서,
감정이나 욕탐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지각을 통해 인식되는 존재(色)의 본질을 추구한 결과 비유상비무상처에 도달하게 되며,
第二處 즉 비유상비무상처의 성취를 통해 모든 존재의 본질이 비유상비무상이라는 미묘한 본질적 존재임이 드러난다.
비유상비무상처정에서는 이같이 모든 존재의 본질이 되는 비유상비무상이라는 본질적 존재가 반성적으로 사유된다. 그 결과 이것은 유상과 무상으로부터 상정된 관념일 뿐 그것이 결코 실재하는 존재가 아님이 자각된다.
공간이 '色의 부정(無)'에 대한 관념이고, 무소유가 '識의 부정(無)'에 대한 관념이듯이 비유상비무상도 유상과 무상을 동시에 부정하는 관념일 뿐 실재하는 존재는 아닌 것이다. 즉 조작된 것이며 생각해낸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비유상비무상처가 유위이며 무상하고 苦임을 여실하게 알아서 이것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얻게 되는 것이 제八해탈이며 滅盡定이다. 그리고 이같은 멸진정을 성취함으로써 모든 해탈이 완성된다.
제일처에서 欲漏로부터 벗어나고, 제이처에서 有漏로부터 벗어나며, 멸진정에서 無明漏로부터 마음이 해탈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번뇌(漏)에서 벗어나 모든 해탈이 함께 하는 경지가 멸진졍이며, 이것을 俱解脫이라고 한다.
이상이 칠식주이처, 팔해탈과의 관계를 통해 살펴본 구차제정의 내용이다. 이같은 구차제정을 통해 무명으로부터 해탈하게 된다면, 무명에서 생노병사가 연기하는 것을 설명하는 십이연기설은 구차제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십이연기의 환멸문이 무명의 멸진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것은 환멸문이 멸진정을 성취한 결과 시설된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며, 노사의 근본을 사유하여 무명에 이르는 십이연기의 역관과 삼계의 본질을 추구하여 멸진정에 이르는 구차제정의 사유방법은 그 형식이 동일한 것이다.
이같은 점에 비추어 볼 때 연기법은 구차제정을 통해 깨달은 진리이고 십이연기설은 구차제정을 통해 드러난 사실들을 체계화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제 이들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구차제정과 십이연기설 4
4) 멸진정과 십이연기설
무명의 자각은 무명의 滅盡을 요구한다. 불타가 스승을 떠나 보리수 아래로 가게 된 것은 무명을 멸진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불타는 어떻게 하여 무명을 멸진하고 정각을 성취할 수 있었을까?
전술한 바와 같이 불타는 존재의 유무나 생성을 문제삼는 것은 모순된 생각임을 자각하게 되며, 이것이 무명의 자각이다. 그렇다면 불타는 존재의 문제를 포기한 것일까? 불타는 이 문제를 포기하거나 회의론에 빠지지 않았다. 그는 회의론도 모순된 생각(무명)임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후일 회의론자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고 있다.
"고타마여, 나는 '모든 견해는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견해를 주장합니다"
"모든 견해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그대의 견해도 그대를 만족시키지 못하는가?"
"만약 나의 견해가 나에게 만족스러운 것이라면 나의 견해 역시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겠나이다."
" 그렇다. 세상사람 대부분은 '이것은 그와 같다'고 주장할 때 그들은 바로 그 견해를 버리지 않기 때문에 '그것 역시 그와 같다'는 모순되 견해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것 역시 그와 같고 그것 역시 그와 같다'는 모순된 주장을 하게 될 때 곧 그 견해를 버림으로써 그와 모순된 견해도 버리게 되는 사람은 세상에 드물다."
이와 같이 불타는 회의론도 모순된 생각임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모든 모순된 생각을 버려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中道이다. 그의 중도는 바로 모순된 생각을 떠나서 사물을 관찰하고 사유하는 것이다. 불타는 중도를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세간이 邪見에 전도되어 있는 것은 有無 二見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여러 경계를 취하여 마음으로 計著한다. 가전연이여, 만약 取하지 않고, 住하지 않고, 我를 計度하지 않으면 苦가 생길 때 생기는 것에 대하여, 멸할 때 멸하는 것에 대하여 의혹이 없이, 타인을 의지하지 않고도 능히 알 수가 있느니라. 이것을 正見이라고 하며, 여래가 설하는 것은 이것이니라.
왜냐하면 가전연이여, 만약 세간의 集을 여실하게 正觀하면 세간의 無見은 생기지 않고, 세간의 滅을 여실하게 정관하면 세간의 有見은 생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니라. 가전연이여, 여래는 이변을 떠나 중도에서 설하나니 소위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불타는 유무라는 모순된 생각이 집과 멸을 여실하게 정관하지 않음으로써 생긴 사견이라고 하고 있다. 존재의 문제는 유무의 문제가 아니라 집멸의 문제라고 본 것이다.
集은 의식의 내용들이 함께(sam; with, together) 표출(udaya;rise, growth)하는 것을 의미한다. 불타가 본 세계는 이같이 의식이 집멸하는 세계다. 중생들은 이같은 사실을 모르고 의식이 집하면 有라 하고, 의식이 멸하면 無라고 생각한다. 집한 의식을 취하여 존재라는 생각을 구성하는 것이다. 존재는 이와 같이 무지한 상태(무명)에서 허구적으로 조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무명의 상태에서 허구적으로 조작된 존재가 유위이며, 유위를 조작하는 행위가 십이연기설의 行이다.
우리의 인식은 행에 의해 조작된 유위법에 대한 분별이다. 따라서 유위법이 조작되지 않으면 이를 인식하는 識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식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던 불타는 이렇게 무명을 자각함으로써 식의 緣이 行임을 알게 되고, 나아가 행의 연이 무명임을 알게 된다. 십이연기설은 이와 같이 무명의 자각을 통해 완성된다.
그러나 이것은 생각일 뿐이다. 무명의 자각은 '존재의 유무를 문제삼는 것은 잘못된 것'이리라는 생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 생각은 참으로 그럴듯한 생각이다.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아무리 그럴 듯한 생각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진리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 불타의 생각이다. 불타에게 있어서 진리는 실천적 체험으로 입증될 때 비로소 진정한 진리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무명의 자각은 그것이 진리의 승인은 될지언정 진리의 성취, 바꾸어 말하면 무명의 멸진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무명의 자각을 통해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토대일 뿐이다. 불타가 더 이상 스승을 구하지 않고 혼자 명상할 곳을 찾아 보리수 아래로 나아간 것은 이렇게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토대를 얻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불타는 보리수 아래서 구체적으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불타가 처음 녹야원에서 오비구에게 설했다고 하는 소위 <초전법륜경>에서는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세존께서 5비구에게 이르시되,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는 고성제(집, 멸, 도성제)를 정사유했을 때 안목과 지혜와 明覺이 생겼다.
고성제에 대한 지혜가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는 법임을 알고 정사유했을 때 안목과 지혜와 명각이 생겼고, 고집성제를 알고서 이를 끊으리라고 정사유했을 때 안목과 지혜와 명각이 생겼으며, 고집이 멸하면 이것이 고멸성제라는 것을 이를 작증하리라고 정사유했을 때 안목과 지혜와 명각이 생겼다.
그리고 이 고멸도적성제를 알았으니 이를 수행하리라고 정사유했을 때 안목과 지혜와 명각이 생겼다.
이 고성제를 알고 벗어났음을 알아 정사유했을 때, 이 고집성제를 알아 끊고서(고에서) 벗어나 정사유했을 때, 고멸제를 알고 작증하여 (고에서) 벗어나 정사유했을 때, 고멸도적성제를 알고 수행하여 (고에서)벗어나 정사유했을 때 안목과 지혜와 명각이 생겼다.
비구들이여, 내가 이 사성제의 삼전십이행에서 안목과 지혜와 명각이 생기지 않았다면 나는 결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무상정등정각)를 이루었음을 자증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상이 소위 삼전십이행이라고 하는 불타의 성도 과정이다. 불타는 먼저 사성제라 진리라는 사실을 발견했고(見道), 그와 같은 진리에 입각하여 수행했으며(修道), 그 결과 사성제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진리임을 확인함으로써(無學道) 자신이 정각을 성취했음을 자증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불타가 깨달은 진리가 십이연기설이라는 이론체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불타가 깨달은 진리는 사성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성제와 십이연기설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사성제와 십이연기설은 별개의 교리가 아니다.
전술한 바와 같이 불타가 무명을 자각하여 무명에서 노사에 이르는 연기법을 깨달았다는 것은 사성제를 깨달았음을 의미한다. 생사가 苦이고 그 고는 무명에서 연기한 의식의 集이라는 사실의 자각이 무명의 자각이다. 이같은 자각은 무명을 멸하면 생사도 멸하리라는 사실의 자각이기도 한 것이며, 그것을 멸하는 데는 어떤 방법이 있을 것이라는 자각도 아울러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명의 자각은 견도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으며, 문제는 불타가 어떤 방법으로 수도했는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생사가 무명에서 연기한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그리고 무명이 멸하면 생사가 멸한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생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같은 사실의 자각은 우리에게 무명을 멸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여 무명을 멸할 수 있을까? 무명은 잘못된 생각이다. 잘못된 생각은 그것이 잘못된 생각임이 입증되면 사라진다. 그렇다면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행은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만약 행을 멸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곧 무명의 멸이 될 것이다.
불타는 행을 멸진하는 방법으로 다음과 같이 구차제정을 설하고 있다.
初禪正受時 언어적멸
제이선정수시 覺觀적멸
제삼선정수시 喜心적멸
제사선정수시 出入息적멸
공입처정수시 色相적멸
식입처정수시 공입처상적멸
무소유처정수시 식입처상적멸
비유상비무상처정수시 무소유처상적멸
想受滅正受時 相受적멸
이것을 점차로 모든 행이 적멸한다고 한다.
구차제정은 이와 같이 행을 멸함으로써 무명이 무명임을 자각하는 수행법임과 동시에 모든 법은 무명에서 연기한다는 진리를 자증하는 수행법이다. 그런데 이 행의 적멸법이 무명을 자각하기까지의 선정과 동일하다는데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무명을 자각하기까지의 선정은 존재가 있다는 생각에서 존재의 본질을 추구한 가운데 모든 존재의 본질이 비유상비무상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다음, 그것이 무명이라는 자각을 통해 이를 반성적으로 다시 사유하면서 비유상비무상처를 벗어나 멸진정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유를 통해 진리의 승인, 즉 견도일 뿐 진리의 성취는 아니다.
불타는 이것을 명증적으로 체험하기 위하여 이를 실천해보았던 것이며, 그것이 팔정도이다. 따라서 점차행적멸의 구차제정은 팔정도의 正定의 구체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고, 이같은 실천적 수행을 통해 연기법은 작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할 때 불타의 견도는 사유를 통해 연기법이 진리임을 승인한 단계이고, 수도는 팔정도라는 십이연기의 환멸문을 직접 실천한 단계라 할 수 있으며, 무학도는 그 실천을 통해 무명의 멸진, 즉 열반을 성취한 경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십이연기설과 그에 바탕을 둔 사성제는 이같은 과정을 통해 인식되고 입증된 진리라 할 수 있다.
이중표, 아함의 중도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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