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 임제록 강설-시중(示衆) 13-9. 13-10. 13-11
13-9 인생이 무상함을 알라
道流(도류)야 ?莫認著箇夢幻伴子(이막인착개몽환반자)하라 遲晩中間(지만중간)에 便歸無常(편귀무상)하나니 ?向此世界中(이향차세계중)하야 覓箇什?物作解脫(멱개십마물작해탈)고 覓取一口飯喫(멱취일구반긱)하고 補?過時(보취과시)하야 且要訪尋知識(차요방심지식)이요 莫因循逐樂(막인순축낙)하라 光陰可惜(광음가석)이니 念念無常(염념무상)하야 ?則被地水火風(추즉피지수화풍)이요 細則被生住異滅四相所逼(세즉피생주이멸사상소핍)이니라 道流(도류)야 今時(금시)에 且要識取四種無相境(차요식취사종무상경)하야 免被境擺撲(면피경파박)이어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그대들은 이 꿈 같고 허깨비 같은 몸뚱이를 잘못 알지 말라.
머지않아 머뭇거리는 사이에 곧 덧없음[無常,죽음]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대들은 이 세계 속에서 무엇을 찾아 해탈을 하겠느냐?
그저 밥 한술 찾아먹고 누더기를 꿰매며 시간을 보내는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선지식을 찾아 참문(參問)하는 일이다.
그럭저럭 즐거운 일이나 쫓아 지내지 말라.
시간을 아껴라.
순간순간 덧없이 흘러가서 크게 보면 지·수·화·풍이 흩어지는 것이고,
미세하게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의 네 가지 변화에 쫒기고 있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지금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네 가지 지수화풍과 생주이멸의
형상 없는 경계를 잘 알아서 그 경계에 휘말리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강의)
삶의 주체는 무엇인가. 이 육신이다.
육신을 근거로 해서 우리들의 삶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육신이란 꿈같고 허깨비 같다. 잠간 있다가 없지는 것이 이 육신이다.
어제까지 아무렇지도 않던 사람이 오늘 갑자기 병이 나서 사경을 헤매는 경우가 있다.
또는 순식간에 저승의 사람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기도 한다.
그래서 인생무상의 문제는 불교의 가르침 같이 철저하게 말한 종교도 없을 것이다.
불교의 출발이 세존께서 인생무상을 깨닫고 출가하고 고행하고 깨달음을 성취했기 때문이다.
불교가 이 문제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불교적 수행을 하려는 모든 일은
인생무상을 느끼지 못하면 불가능하다.
인생무상을 모르고 세속적 가치에 연연하면서 불교수행을 한다는 것은
토끼의 뿔을 구하려는 일과 같고 거북의 털을 찾는 일과 같다.
그래서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은 최초일구자(最初一句子)나
향상사(向上事)를 거론하시면서도 인생무상을 자주 강조하신다.
불생불멸을 주로 거량하면서 눈앞에 보이는 현실의 제행무상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수행자로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선지식을 찾아가서 불교를 묻고 인생을 묻는 일이다.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새싹이 돋는 것을 보고 봄인가 한 것이 어제 같은데 벌써 가을바람이 스산하다.
앞산에는 물이 들고 나뭇잎도 흩날린다.
이 글을 다시 읽을 때는 어느새 겨울의 한가운데에 와 있다.
한시 바삐 선지식을 찾아야 한다. 인생을 묻고 깨달아야 한다.
실로 선지식이란 나의 스승이다.
나에게 모든 깨달은 사람들의 가르침으로 인도하여 보여준다.
선지식이란 나의 안목이다. 나에게 부처님이 허공과 같음을 보여준다.
선지식이란 항구다. 나에게 모든 깨달은 사람들의 연못으로 들어가게 해준다.
선지식이란 어디 있는가.
화엄경에는 선재동자가 53인의 선지식을 찾아다니는 것을 이야기 했다.
지금으로서는 그런 석지식이 없다.
석가 달마도 없다. 오조 육조도 없다. 황벽 임제도 없다. 원오 대혜도 없다.
그러면 그런 선지식들을 어디서 만날 것인가?
3천 년 전의 부처님을 우리는 어디서 만나는가.
그가 남긴 가르침에서 만난다. 달마대사도 그가 남긴 가르침에서 만난다.
오조스님, 육조스님, 황벽스님, 임제스님, 원오스님, 대혜스님도 모두 그들이 남긴 가르침에서 만난다.
지금도 생생히 살아계신다.
부처님은 열반을 앞두고 “내가 더 이상 살아 있은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는 나의 가르침 속에 다 있다. 나의 가르침은 곧 나다.
가르침을 의지하는 것이 곧 나를 의지하는 것이다.
더 이상 나에게서 바라지 말라. ”라고 하셨다.
13-10 사종(四種)의 무상경(無相境)
問(문), 如何是四種無相境(여하시사종무상경)고 師云(사운), ?一念心疑(이일념심의)가 被地來?(피지래애)하며 ?一念心愛(이일념심해)가 被水來溺(피수래익)하며 ?一念心瞋(이일념심진)이 被火來燒하(피화내소)며 ?一念心喜(이일념심희)가 被風來飄(피풍래표)하나니 若能如是辨得(약능여시변득)하면 不被境轉(불피경전)하고 處處用境(처처용경)이라 東涌西沒(동용서몰)하며 南涌北沒(남용북몰)하고 中涌邊沒(중용변몰)하며 邊涌中沒(변용중몰)하야 履水如地(이수여지)하며 履地如水(이지여수)하니라 緣何如此(연하여차)오 爲達四大如夢如幻故(위달사대여몽여환고)니라
“무엇이 네 가지 형상이 없는 경계입니까?”
“그대들의 한 생각 의심하는 마음이 흙이 되어 가로 막으며,
한 생각 애착하는 마음이 물이 되어 빠지게 하며,
한 생각 성내는 마음이 불이 되어 타게 하며,
한 생각 기뻐하는 마음이 바람이 되어 흔들리게 하는 것이다.
만약 이렇게 알아낼 수 있다면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가는 곳마다 경계를 활용 할 것이다.
동쪽에서 나타났다가 서쪽으로 사라지고, 남쪽에서 나타났다가 북쪽에서 사라지고,
가운데서 나타났다가 가장자리에서 사라지고, 가장자리에서 나타났다가 가운데서 사라진다.
땅을 밟듯 물을 밟고, 물을 밟듯 땅을 밟는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사대육신(四大肉身)은 꿈과 같고 허깨비 같은 줄 통달하였기 때문이다.”
(강의)
사람의 몸을 위시해서 물질을 형성하고 있는 네 가지요소인 지수화풍 사대(四大)란 무엇인가?
임제스님의 독특한 해석이다.
의심하는 마음과 애착하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과 기뻐하는 마음이다.
이것이 곧 사대를 만들었다.
이 네 가지 마음은 우리들의 한 생각에서 일어 난 것이다.
한 생각 일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가면 그 네 가지 마음에서 일어난 지수화풍이라는 경계도
내가 끌려 다니지 않고 마음대로 자유자재하게 활용할 수 있다.
한 생각에서 일어난 팔만사천 번뇌가 헛것이듯이 그 번뇌에 의해서 생긴 지수화풍과
삼라만상도 꿈과 같고 허깨비 같은 줄 통달하였기 때문이다.
사대육신과 육신에서 일어나는 의심하고 애착하고 성내고 기뻐하는 등등의
인간의 감정들은 어째서 꿈과 같고 허깨비 같은가?
아는 이야기로 하면, 나를 형성하고 있는 몸과 마음이라는 오온은 왜 허망한가?
왜 공인가? 범소유상은 왜 개시허망인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들도 홀로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물질도 마음도 다 같다.
모두가 이것과 저것이 서로 의지해서 하나의 존재를 형성한다.
마치 갈대 묶음이 둘이 있을 때 서로 의지해서 서 있을 수 있듯이 물질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인
쿼크도 끝내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다른 무엇과의 결합체이다.
이와 같이 물질이든 정신이든 모두가 서로 서로 의지했을 때만 존재한다.
의지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연생기(因緣生起)하는 것이다.
이것과 저것인 원인과 조건, 곧 연기에 의해서 존재한다.
그렇게 존재하는 것은 분과 초를 다투는 시한부 존재다.
시한부 존재는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을 공(空)이라고 한다.
어떤 감정과 어떤 물질이든 다 같다.
사랑도 미움도 본래로 공인데 시한부 인연에 의하여 한순간 존재하는 것처럼 착각을 일으킨다.
그래서 공이고 허망이고 무상이다.
그래서 연기가 곧 공이고 공이 곧 연기며 연기가 곧 여래의 큰 깨달음이다
[諸行無常一切空(제행무상일체공) 卽是如來大圓覺(즉시여래대원각)].
또 중도(中道)다.
이 원칙에는 부처도 중생도, 미진도 우주도, 정신도 물질도 예외일 수 없다.
하물며 생노병사와 우비고뇌이겠는가.
이와 같이 모든 존재의 실상은 공이기 때문에 공으로만 보면
모든 고통과 일체의 문제를 해결한다고 반야심경에서는 말하고 있다.
몸과 마음을 텅 비어 없는 것으로 보면 “동쪽에서 나타나서 서쪽으로 사라지고,
남쪽에서 나타나서 북쪽에서 사라지고, 가운데서 나타나서 가장자리에서 사라지고,
가장자리에서 나타나서 가운데서 사라진다.
땅을 밟듯 물을 밟고, 물을 밟듯 땅을 밟는다.”고 자유자재한 대해탈의 삶을 말하고 있다.
이 한 구절로 결론짓자. 四大如夢如幻(사대여몽여환)
13-11 그대가 살아있는 문수다
道流(도류)야 ?祇今聽法者(이지금청법사)가 不是?四大(불시이사대)로대 能用?四大(능용이사대)하나니 若能如是見得(약능여시견득)하면 便乃去住自由(편내거주자유)니라 約山僧見處(약산승견처)하면 勿嫌底法(물혐저법)이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지금 법문을 듣고 있는 것은 그대들의 사대육신이 아니지만
그대들의 사대육신을 능숙하게 활용할 줄 안다.
만약 이와 같이 볼 수만 있다면 가고 머무름에 자유자재가 될 것이다.
나의 견해에 의하면 아무것도 꺼려할 것이 없는 이치다.”
(강의)
그대들 지금 법문을 듣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은 사대육신이 아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 사대육신을 마음대로 능수능란하게 활용한다.
이 이치를 제대로 알면 생사에 자유롭고, 가고 옴에 자유롭다.
사대육신을 꺼려할 것이 아니다.
내 견해대로라면 허망한 사대육신이라 하더라도 하등 싫어할 것이 아니다.
사대육신에 구애받을 것이 아니고 그 사대육신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다.
왜냐하면 상(相)도 없고 조작도 없고 원하는 바도 없다.
무엇이든지 다 수용한다.
차를 만나면 차를 마시고 밥을 만나면 밥을 먹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짜 불교다. 불교는 이래야 한다.
사대육신을 가지고 지금 법문을 듣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을 잘 아는 일이다.
그 자신을 두고 달리 밖을 향해 찾을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모든 문제해결의 답이다.
부처님과 조사들의 가르침을 팔만대장경이라 한다.
그 팔만대장경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요약하여 해인사 장경각에 걸어두었다.
“부처님이 원만하게 깨달으신 그 경지가 무엇인가?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사실 바로 이것이다.
[圓覺道場何處(원각도장하처) 現今生死卽是(현금생사즉시)].”
?若愛聖(이약애성)하면 聖者聖之名(성자성지명)이니라 有一般學人(유일반학인)이 向五臺山裏求文殊(향오대산리구문수)하나니 早錯了也(조착요야)라 五臺山無文殊(오대산무문수)니라 ?欲識文殊?(이욕식문수마)아 祇?目前用處(지이목전용처)가 始終不異(시종불이)하며 處處不疑(처처불의)가 此箇是活文殊(차개시활문수)니라
“그대들이 성인을 좋아하지만 성인이란 성인이라는 이름일 뿐이다.
어떤 수행하는 이들은 모두 오대산에 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하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벌써 틀린 일이다. 오대산에는 문수가 없다.
문수를 알고 싶은가?
다만 그대들의 눈앞에서 작용하는 그것,
처음과 끝이 다르지 않고 어딜 가든지 의심할 것 없는 그것이 바로 살아 있는 문수다.”
(강의)
우선 이 말이 맞나? 틀렸나?
맞고 틀린 것은 차치하고 이러한 말씀은 자비심이 지극한데서 나온 것이다.
대개 일이란 간절한 마음에서 생긴다.
필자의 지나친 해설도 마찬가지다.
각설하고, 불교에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당연히 성인을 좋아한다.
천불(千佛) 만불(萬佛)을 찾고 천보살 만보살을 부른다.
열광적으로 그 이름을 부르고 천배 만배 절을 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인생을 걸고 목숨을 걸고 있다.
아름답게도 보이지만 측은하게도 보인다.
성인이라고 해서 그토록 좋아하면 반대로 범부는 아주 싫어할 것이다.
선을 좋아하면 악을 싫어할 것이다.
증애심과 취사심이 그렇게 끓고 있으면 도와는 멀다.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다.
오직 가려내고 선택하지만 말라. 다만 증애심만 없애면 환하게 밝으리라.
성인이란 단지 성인이라는 이름뿐이다. 천보살 만보살, 천불 만불이 모두 이름뿐이다.
단지 사람이 있을 뿐이다. 부처님이 있다면 사람이 부처님이다.
앞에서 임제삼구의 설명에서도 있었다.
무착스님 뿐만 아니라 수많은 불자들이 오대산에 문수보살을 친견하러 간다.
몇 년에 걸쳐 일보 일배(一步一拜)의 고행을 하면서 찾아간다.
하지만 벌써 틀린 짓이다. 오대산에는 문수보살이 없다.
청천 벽력같은 말씀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말씀이다.
가슴이 천 조각 만 조각나는 말씀이다.
기존의 일반적인 신앙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저 넓은 바다의 끝없는 파도처럼 출렁대는 그 마음들을 어쩌란 말인가.
진실은 물과 같이 까딱도 하지 않는데.
그대들은 정말 문수보살을 알고 싶은가?
그대들의 목전에서 지금 활용하고 있는 그것, 시간적으로 시종일관 다르지 않고 한결 같은 그것,
공간적으로 어느 곳에서든지 분명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는 그래서 너무도 구체적인 그것,
추상적이거나 애매모호한 점이라고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너무도 확실한 그 사람,
그대가 참으로 살아있는 문수보살이다.
그대가 참으로 성인이다. 그대가 참으로 부처님이다.
다시 한 번 말하면 일체처가 문수다. 삼계유심이고 만목청산(滿目靑山)이다.
이것이 진짜 불교다. 임제스님만이 가르칠 수 있는 불교다.
임제스님은 수 천 년의 인류사에 떠오른 천개의 태양이다.
수 억만 가지의 방편을 다 걷어치우고 진실만 드러낸 말씀이다.
하늘땅만큼 많은 불교의 거품을 다 걷어내는 가르침이다.
온갖 이름과 모양에 목을 매고 살아가는 멀쩡한 사람들에게, 속박과 구속과 저주를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토록 시원스런 해방의 묘책을 확실하게 제시한 예는 일찍이 없었다.
이것이 진짜 불교다. 임제록은 인간해방의 대선언서(大宣言書)다.
그래서 일본의 어느 선사는 일본열도가 다 불에 타는 일이 있어도
이 임제록 한권만 남아 있으면 된다고 까지 하였던가.
오대산무문수(五臺山無文殊). 여기서는 이 구절을 한번 더 생각하자.
조주스님이 행각할 때 어떤 작은 암자에서 며칠 묵었다.
떠나면서 원주에게 하직인사를 하였다.
원주가 묻기를, “어디로 갑니까?” “오대산으로 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게송이 하나 있으니 들어보시오.”
어느 청산인들 도량이 아니랴. 그런데 하필 오대산에 가서 참례하려하는가.
구름 속에 비록 문수보살이 나타나더라도 바른 안목으로 보면 좋은 것이 아니요.
[何處靑山不道場(하처청산부도장) 何須策杖禮淸?(하수책장예청?)
雲中縱有金毛現(운중종유김모현) 正眼觀時非吉祥(정안관시비길상)]
?一念心無差別光(이일염심무차별광)이 處處總是眞普賢(처처총시진보현)이요 ?一念心自能解縛(이일념심자승해박)하야 隨處解脫(수처해탈)은 此是觀音三?法(차시관음삼매법)이니라 互爲主伴(호위주반)하야 出則一時出(출즉일시출)하나니 一卽三三卽一(일즉삼삼즉일)이라 如是解得(여시해득)하면 始好看敎(시호간교)니라
“그대들의 한 생각 차별 없는 빛이 어디에나 두루 비치는 것이 진짜 보현보살이고,
그대들의 한 생각 마음이 스스로 결박을 풀 줄 알아서 어딜 가나 해탈하는 그것이 바로 관음보살의 삼매법이다.
서로 주인도 되고 벗도 되어 나올 때는 한꺼번에 나오니 하나가 셋이고 셋이 하나다.
이와 같이 알 수 있다면 비로소 경전에 설해져 있는 가르침을 잘 보는 것이다.”
(강의)
문수보살만 그렇겠는가. 보현보살과 관세음보살이 다 그렇다.
우리들의 한 마음이 어느 곳에서든지 차별 없이 빛나고 있다.
그 활동이 눈부시다.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달이 지고 별이 뜨는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일일이 다 살피고 감지한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가을이면 단풍 드는 것을 잘 느낀다.
그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차별 없이 작용한다.
이것이 보현보살이 아니고 또 다른 어떤 보현보살이 있겠는가.
한국의 불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관세음보살도 그렇다.
우리들의 한 마음이 스스로 능히 자신의 속박을 풀고 곳곳을 다니며
다른 사람들의 속박도 벗어주는 그러한 자비행이 관세음보살의 자비삼매다.
관음삼매란 바로 그와 같은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위한 뜨거운 사랑의 활동이다.
연민의 실천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한 마음과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은 셋이면서 하나고, 하나이면서 셋이다.
한 마음을 떠나서 무엇이 있겠는가.
불교의 경전을 이렇게 알아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임제스님은 지적하신다.
간경자(看經者) 혜안통투(慧眼通透) 라는 축원이 있다.
경전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모름지기 경전을 보는 지혜의 눈이 환하게 열리게 해 달라는 뜻이다.
그렇지 않으면 글자나 쫒아가고 글줄이나 헤아리는 꼴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청매(靑梅)조사의 십종무익(十種無益)에도 심불반조간경무익(心不返照看經無益)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경전의 말씀을 우리들의 마음에 비춰보지 않으면 경전을 읽어도 아무런 이익이 없다는 뜻이다.
모든 경전은 마음이 마음에 의하여 마음을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떠나서 해석하면 모두 틀려버린다.
반조란 사유한다는 뜻이다.
불교인은 명상하고 사유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법화경에는 설법을 마치고 선정에 들어 사유하였다는 말이 있다.
경전이나 어록을 읽고 깊이 사유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선(禪)은 번역하면 사유수(思惟修)다.
옛날 약산(藥山)화상이 일생동안 열반경을 읽고 있었다.
학인이 물었다.
“화상께서는 평소에 학인들이 경전 읽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면서 스님은 왜 보십니까?”
“나야 다만 눈을 가리고 있을 뿐이다.”
“그르면 학인들도 봐도 되겠습니까?”
“안되지. 그대들은 경을 보기를 쇠가죽을 보듯이 하므로 꼭 뚫으려고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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