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 임제록 강설-시중(示衆) 14-4. 14-5. 14-6
14-4 마음 밖에 법이 없다
問(문), 如何是三眼國土(여하시삼안국토)오 師云(사운), 我共?入淨妙國土中(아공이입정묘국토중)하야 著淸淨衣(착청정의)하고 說法身佛(설법신불)하며 又入無差別國土中(우입무차별국토중)하야 著無差別衣(착무차별의)하고 說報身佛(설보신불)하며 又入解脫國土中(우입해탈국토중하야 著光明衣(착광명의)하고 說化身佛(설화신불)하나니 此三眼國土(차삼안국토)는 皆是依變(개시의변)이니라 約經論家(약경론가)하면 取法身爲根本(취법신위근본)하고 報化二身爲用(보화이신위용)하나 山僧見處(산승견처)는 法身卽不解說法(법신즉불해설법)이라 所以(소이)로 古人云(고인운), 身依義立(신의의립)이요 土據體論(토거체론)이라하니 法性身法性土(법성신법성토)는 明知是建立之法(명지시건립지법)이요 依通國土(의통국토)니 空拳黃葉(공권황엽)으로 用?小兒(용광소아)니라 ?藜菱刺(질여능자)와 枯骨上(고골상)에 覓什?汁(멱십마즙)고 心外無法(심외무법)이요 內亦不可得(내역불가득)이니 求什?物(구십마불)고
“무엇이 삼안국토입니까?”
“나는 그대들과 함께 청정하고 미묘한 국토에 들어가 청정한 옷을 입고 법신불을 설한다.
또 차별 없는 국토에 들어가 차별 없는 옷을 입고 보신불을 설한다.
또 해탈국토에 들어가 광명의 옷을 입고 화신불을 설한다.
이 삼안국토란 모두가 무엇에 의지하여 변화하는 것이다.
교학자(敎學者)들은 법신을 근본으로 하고 보신과 화신을 그 작용이라 하지만 산승이 보기에는 법신도 설법을 할 줄 모른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몸이란 의미에 입각하여 말하고 국토란 본체에 근거해서 논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법성신과 법성토는 건립 되어진 법이고 무엇에 의지해야만 통하는 국토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빈주먹과 누런 잎사귀로 어린아이들을 속이는 것이다.
찔레가시와 마른 뼈다귀에서 무슨 국물을 찾겠는가?
마음 밖에는 법이 없고 마음 안에서도 얻을 바가 없는데 무엇을 찾겠는가?”
(강의)
삼안국토를 임제스님은 법·보·화 삼신으로 해석하였다.
그 삼신은 모두 무엇에 의지하여 변화한 것이다.
그 삼신을 설명할 때는 삼신이 갖는 의미에 알맞은 모습을 나타내서 설한다고 하였다.
교리에서는 법신을 근본으로 보지만 임제스님은 법신마저 지엽으로 본다.
근본은 지금 이 순간 법을 듣는 그 사람이다.
그 사람 그 마음에 의지해서 나타난 것들이다.
그래서 법신도 보신도 화신도 모두 법문을 들을 줄을 모른다고 했다.
몸을 이야기 하면 그 몸이 의지하는 국토가 따라서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몸이니 국토니 하는 것은 모두가 조작으로 건립 되어진 것이고
무엇엔가 의지해야만 성립되는 존재들이다.
다 가짜다. 내용은 아무것도 없다.
마치 어린아이들에게 빈주먹을 보이고 주먹 안에 무엇이 있는 것처럼 속인다.
또 단풍이 든 나뭇잎으로 돈이라고 속인다.
그것들이 무슨 진실이 있겠는가.
교학에서 아무리 높고 높은 경지를 말한다 해도 그것들은 모두다 도무지 실다운 것이 없는 가짜들이다.
죽은 말들이다. 전혀 생명력이 없다.
그래서 “바짝 마른 찔레가시와 마른 뼈다귀에서 무슨 국물이 나오겠는가.” 라는
상당히 혹독한 표현을 하여 우리들을 경각시킨다.
대단히 강한 처방으로 병을 다스린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 말이다.
여기서 눈을 뜨지 못한다면 우리는 언제 어디 가서 눈을 뜨랴.
마음밖에 법이 없다. 마음 안에도 얻을 것이 없다. 어디서 무엇을 찾겠는가.
마음은 공적(空寂)한 것으로 그 체를 삼는다.
어찌 보면 허허롭지만 한편 너무도 시원하다.
마음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틀린다.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또한 틀린다.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면서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없는 것도 아니다.
있고 없음의 양변(兩邊, 偏見(편견))을 초월해야 조금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런대 무슨 법신이니 보신이니 화신이니 하는가?
모두가 일심에서 버러진 것이다.
心外無法(심외무법) 內亦不可得(내역불가득)이다.
14-5 수행이란 업을 짓는 일이다
?諸方言道(이제방언도)호대 有修有證(유수유증)이라하니 莫錯(막착)하라 設有修得者(설유수득자)라도 皆是生死業(개시생사업)이며 ?言六度萬行齊修(이언육도만행제수)라하나 我見皆是造業(아견개시조업)이니라 求佛求法(구불구법)은 卽是造地獄業(즉시조지옥업)이라 求菩薩亦是造業(구보살역시조업)이요 看經看敎(간경간교)도 亦是造業(역시조업)이니 佛與祖師(불여조사)는 是無事人(시무사인)이라 所以有漏有爲(소이유루유위)와 無漏無爲(무루무위)가 爲淸淨業(위청정업)이니라
“그대들이 제방에서 닦을 것도 있고 깨칠 것도 있다고 말하는데 착각하지 말아라.
설령 닦아서 얻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가 생사의 업이다.
그대들은 육도만행을 빠짐없이 닦는다고 하지만 내가보기에는 모두 업을 짓는 일이다.
그러므로 부처를 구하고 법을 구하는 것은 지옥의 업을 짓는 것이고,
보살을 구하는 것도 업을 짓는 것이며, 경을 보거나 가르침을 듣는 것도 또한 업을 짓는 것이다.
부처와 조사는 바로 일없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부처와 조사에게는 억지가 있고 조작이 있는 유루유위(有漏有爲)와
조작 없이 저절로 그러한 무루무위(無漏無爲)가 다 청정한 업이 된다.”
(강의)
불교역사에서 임제스님 등 몇몇만 빼고는 모두 수행을 강조한다.
열심히 닦아야 깨달음이 있다고 하여 별의 별 수행을 다 권한다.
참선, 염불, 간경, 주문, 육바라밀, 몸을 불사르고 절을 하는 등등이다.
그러나 임제스님은 위와 같이 수행해서 깨닫는다는 것은 잘못알고 있다고 한다.
수행이 전혀 필요 없는 일이다. 놀라운 말씀이다.
설사 수행을 해서 무엇인가 얻는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모두가 생사의 업이 될 뿐이다.
생사해탈을 위한 수행이 도리어 생사 속으로 빠져드는 길이란다.
육도만행을 빠짐없이 닦는 일도 다 업을 짓은 일이다.
불교는 성불이 목적이라고 하는데 부처를 구하고
법을 구하는 일이 모두 지옥의 업을 짓는 것이라고 한다.
구하는 그 사람이 곧 부처인데 그 사람을 버리고 따로 구하니 지옥 업이 될 수밖에 없다.
보살이 되기 위한 일도 경을 보거나 법문을 듣는 일도 모두가 업을 짓는 일이란다.
영가스님도 “부처가 되기 위해서 공덕을 베푸는 것은 부처될 기약이 없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본래로 닦아 깨닫는 부처란 없다[無修證佛(무수증불)].
닦아서 점차적으로 되는 부처도 없다[無漸次佛(무점차불)].
사다리 타듯이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서 히말라야산에라도 올라가자는 것인가.
위와 같은 가르침과 주장이 불교의 수많은 다른 가르침이나 주장보다 우선하기에
우리나라의 유수한 큰 스님들이 모두 임제스님의 법을 이었노라고 자랑한다.
위와 같은 임제스님의 사상을 이어받지 않으면 불교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위와 같은 사상이 불교의 바른 사상이다. 진짜 불교다.
그렇다면 부처란 무엇인가? 일없는 사람이다.
일없는 사람이 부처인데 무슨 업을 그리 많이 짓는가.
일이 없는 사람인 줄 알고 나면 그때에 가서는 조작이 있는 짓이나
조작이 없는 짓이나 모두가 업이라 할 것도 없는 청정한 업이 된다.
텅 빈[청정한] 업이 된다.
양변을 떠나 있으니 유나 무나, 선이나 악이나, 생이나 멸이나
어디에 있어도 그는 이제 상관없는 사람이다.
변견에 있어도 변견이 아니고, 편견에 있어도 편견이 아니다.
양변을 떠났으되 양변에 다 조화를 이루며 산다.
그래서 산은 다만 산이고 물은 다만 물일뿐이다.
求佛求法(구불구법) 卽是造地獄業(즉시조지옥업). 촌철살인의 말씀이다.
깊이깊이 사유하라.
有一般?禿子(유일반할독자)하야 飽喫飯了(포긱반요)하고 便坐禪觀行(편좌선관행)호대 把捉念漏하(파착년누)야 不令放起(불령방기)하며 厭喧求靜(염훤구정)하나니 是外道法(시외도법)이니라 祖師云(조사운), ?若住心看靜(이약주심간정)하며 擧心外照(거심외조)하고 攝心內澄(섭심내징)하며 凝心入定(응심입정)하면 如是之流(여시지류)는 皆是造作(개시조작)이라하니라
“어떤 눈멀고 머리 깎은 사람들이 밥을 배불리 먹고 나서
곧 좌선하거나 관법을 하되 생각이 새어나가는 것을 꽉 붙들어 달아나지 못하게 한다.
또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고 조용한 것만을 찾는데 이것은 다 외도의 법이다.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이 만약 마음을 안주시켜 고요함을 보고,
마음을 일으켜 밖으로 관조하며, 마음을 가다듬어 안으로 맑히며,
마음을 한 곳으로 모아 정(定)에 든다면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조작이다.’라고 하셨다.”
(강의)
좌선을 하고 관법을 수행하는 스님들을 비하해서 눈멀고 머리 깎은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들은 마음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있지 않고 꾸준히 새어나가는 것을 붙잡아서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
또는 시끄러운 것을 매우 싫어하고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편견에 떨어져 있다.
그래서 좌선하는 사람들은 선방 부근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리거나 일을 하는 소리가 들리면 기겁을 한다.
잡아먹을 듯이 화를 낸다.
또한 생각을 가라앉히거나 한 곳에 집중하거나 숨을 쉬는 것에 예의주시하거나
자신의 하나하나의 행위를 관찰하고 주시하는 따위의 수행을 하는 자도 있다.
이런 것은 불교가 아닌 외도(外道)의 법이라고 매도한다.
불교에서 가장 심한 욕이 불자를 외도라고 부르는 것이다.
임제스님은 그와 같은 공부를 하는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조사스님의 말을 인용하여 그따위 공부는 모두 조작이며 가짜라고 한다.
마음을 안주시켜 고요히 하는 것이 공부라면 일상생활에서 피치 못할 일,
즉 밥을 먹고 대소변을 보고 하는 일을 할 때는 공부가 아니지 않은가.
또 마음을 일으켜 밖을 비춰보거나, 마음을 가다듬어 안으로 맑히는 것이 공부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때는 또 무엇이라고 하는가.
또 마음을 한 곳에 모아 선정에 드는 것이 공부라면
선정에 들지 않고 옷을 입거나 목욕을 하거나 할 때는 역시 공부가 아닌 것이다.
공부가 그렇게 간단이 있고 틈이 있으면 그것을 어찌 출세간의 공부라 할 것인가.
도가(道家)에서도 “도란 한 순간도 떠나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한 순간이라도 떠나 있으면 도가 아니다.” 라고 하였다.
도교의 도도 이렇거늘 하물며 불교의 법이겠는가.
공부의 바른 길을 이렇게 확실하고도 명확하게 밝혔다.
최상의 수행을 한다고 하면서 길을 잘 못 든 사람이 비일비재하다.
천 원짜리 물건을 하나 사면서도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살피면서
인생을 걸고 도를 닦는 일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살피고 또 살피며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할 일이다.
무엇이 진짜인지 무엇이 가짜인지를 잘 가려야 한다.
그래서 정법(正法)을 찾아야 한다.
如是之流(여시지류) 皆是造作(개시조작). 조작이 아닌 것이 불교다.
是?如今與?聽法底人(시이여금여마정법저인)을 作?生擬修他證他莊嚴他(자마생의수타증타장엄타)리오 渠且不是修底物(거차불시수저물)이며 不是莊嚴得底物(불시장엄득저물)이니라 若敎他莊嚴(약교타장엄)하면 一切物(일체물)을 卽莊嚴得(즉장엄득)이니 ?且莫錯(이차막착하라
“그대들은 지금 이렇게 법문을 듣는 그 사람을 어떻게 그를 닦고,
어떻게 그를 증득하며, 어떻게 그를 장엄하려 하는가?
그것은 닦을 물건이 아니며 장엄할 수 있는 물건도 아니다.
만약 그것을 장엄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다 장엄할 수 있을 것이니 그대들은 잘못 알지 말아라.”
(강의)
이 사람은 본래로 완전무결하여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다.
내 주머니 속에 있는 물건이라 달리 어디서 가져올 일이 아니다.
너무나 잘 생겨서 더 이상 장엄하거나 꾸밀 것이 아니다.
꾸미거나 화장을 하면 오히려 더 추하게 만든다.
닦거나 꾸미거나 장엄을 하면 마치 머리위에 다시 머리를 하나 더 올려놓아서
멀쩡한 사람을 요귀를 만드는 격이 된다.
그 사람은 닦고 꾸미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일이 붙을 수가 없다.
그 사람이 보고 듣고 하는 일이란 그저 버드나무는 푸르고 꽃은 붉은 도리이다.
만약 그 사람을 장엄한다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장엄할 수 있으리라.
“꽃은 화사하게 피어 있고 새는 아름답게 지저귄다.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각각 완연하다.”라는 표현이 있다.
사람사람이 본래로 구족하였고 개개가 원만하게 이루어져 있는데 달리 무슨 장엄이 필요하겠는가.
또 저 산하대지를 어떻게 장엄하려고 하는가. 제발 그르치지 말라.
14-6 사자후 일성에 뇌가 찢어진다
道流(도류)야 ?取這一般老師口裏語(아취자일반노사구리어)하야 爲是眞道(위시진도)하야 是善知識(시선지식)은 不思議(부사의)요 我是凡夫心(아시범부심)이니 不敢測度他老宿(불감측탁타노숙)이라하나니 ?屢生(할누생)이여 ?一生(이일생)을 祇作這箇見解(지작자개견해)하야 辜負這一雙眼(고부자일쌍안)하니 冷??地(냉금금지)가 如凍凌上驢駒相似(여동릉상려구상사)로다 我不敢毁善知識(아불감훼선지식)이라 ?生口業(파생구업)이라하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그대들은 어떤 노스님들의 설법을 듣고 그것이 참된 도라고 여긴다.
이러한 선지식은 불가사의하다고 하면서
‘나는 범부의 마음이니 감히 그 노스님의 뜻을 헤아려 볼 수 없다.’고 한다.
이 눈멀고 어리석은 사람아!
그대들의 일생을 이러한 견해에 사로잡혀 멀쩡한 두 눈을 막아버리고 산다.
추워서 벌벌 떠는 모습이 마치 빙판 위를 걸어가는 당나귀의 새끼 같구나.
그리고 말하기를 ‘나는 감히 선지식을 비방하지 못한다. 입으로 짓는 업이 두렵다.’고하니라.”
(강의)
일반 불자들은 스님의 모습을 하고 있기만 하면 젊든 늙든 무조건 믿고 따르는 경향이 있다.
하물며 주지스님, 노스님, 큰스님이라고 하면 거의 맹목적으로 그들의 말을 믿는다.
좀 알려진 큰스님이라면 그를 믿는 것은 거의 절대적이다.
특별한 차원에 살고 있는 것으로 맹신한다.
그래서 그의 말은 어떤 말이든지 다 옳다고 생각하고 전전긍긍하면서 감히 비판할 생각을 갖지 못한다.
참으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마치 한 사람의 맹인이 많은 맹인들을 이끌고 위험한 길을 가는 격이다.
‘악지식(惡知識)을 비판하고 꾸짖을 수 있어야 비로소 불조의 은혜를 갚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자신의 확실한 소신을 가진 이라면 정법을 위해서 큰스님도 비판하고 도인도 꾸짖을 수 있어야 한다.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 보다는 차라리 그것이 위하는 길이다.
道流(도류)야 夫大善知識(부대선지식)이 始敢毁佛毁祖(시감훼불훼조)하며 是非天下(시비천하)하며 排斥三藏敎(배척삼장교)하며 罵辱諸小兒(매욕제소아)하야 向逆順中覓人(향역순중멱인)하나니 所以我於十二年中(소이아어십이념중)은 求一箇業性(구일개업성)을 如芥子許(여개자허)도 不可得(불가득)이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큰 선지식이라야 비로소 부처와 조사를 비방할 수 있고 천하의 선지식들을 옳다 그르다 할 수 있다.
그리고 경·율·논 삼장(三藏)의 가르침을 배척할 수도 있으며, 어린애 같은 모든 무리들을 꾸짖을 수 있다.
거슬리고 순종하는 경계 속에서 사람을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12년 동안 업의 성품을 찾았는데 겨자씨만큼도 찾을 수 없었다.”
(강의)
진짜 큰 선지식이라야 비로소 부처님을 훼방하고 조사님을 훼방할 수 있다.
천하 선지식들의 법을 시비할 수 있다.
또 부처님이 설한 경과 율과 논을 그르다고 배척하고 비판할 수 있다.
역행(逆行)이나 순행(順行)을 자유롭게 저지르면서 그 가운데서 좀 사람다운 사람을 찾는다.
따뜻한 자비의 손길로 어루만지기도 하고 매섭게 꾸짖기도 하며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한다.
모두가 학인들의 눈을 열어주기 위함이다.
솟을 아홉 번이나 걸게 했다는 구정(九鼎)조사도 있었다.
부처와 조사를 훼방하고 삼장을 배척하면 일반적으로는 큰 죄업을 짓는다고 한다.
당연하다. 어찌 함부로 부처님을 훼방하랴.
큰 죄업을 짓는 일이다. 하지만 임제스님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오랜 세월동안[12년] 업의 성품을 아무리 찾아야 찾을 길 없었다.
겨자씨만큼도 찾을 수 없었다.”라고 하였다.
마음이 텅 빈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천수경에도 “죄업이란 자성이 없다. 다만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것.
마음을 비우면 조업도 없다.”라고 하였다.
임제스님은 늘 그와 같은 경지에 있기 때문에 죄업이란 있을 수 없다.
일체 업성(業性)이 공(空)인 자리에서 생활한다.
한없이 당당하다. 하늘을 찌를 기상과 자존심이 있다.
수천만 불조(佛祖)가 한꺼번에 와서 질문을 하고 법을 거량하더라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다.
비바시불(毗婆尸佛)의 게송이 좋아서 소개한다.
[身從無相中受生(신종무상중수생) 猶如幻出諸形象(유여환출제형상)
幻人心識本來無(환인심식본래무) 罪福皆空無所住(죄복개공무소주)]
“몸이란 형상이 없는 곳으로부터 태어났다. 마치 요술쟁이가 여러 가지 형상을 만든 것과 같다.
요술쟁이가 만든 사람은 본래 마음이 없으며 죄도 복도 모두 공하여 머무는 곳이 없다.”
若似新婦子禪師(약사신부자선사)하면 便卽??出院(편즉파진출원)하야 不與飯喫(불여반긱)하야 不安不樂(불안불락)이어니와 自古先輩(자고선배)가 到處人不信(도처인불신)하고 被?出(피진출)하야 始知是貴(시지시귀)하나니 若到處人盡肯(약도처인진긍)하면 堪作什?(감작십마)오 所以師子一吼(소이사자일후)에 野干腦裂(야간뇌열)이니라
“만약 새색시 같은 선사라면 절에서 쫓겨나서 밥을 얻어먹지 못할까 두렵고 불안해한다.
그러나 예로부터 뛰어난 선배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믿지 않아 쫓겨났다.
그리고 나중에야 비로소 귀한 사람인줄 알았다.
만약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인정해 준다면, 이런 사람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한 번의 사자후에 여우의 머리통이 찢어지는 것이다.”
(강의)
새색시 같이 이제 막 조실이 된 선사가 있다.
새색시는 남편의 눈치도 시어머니의 눈치도 살펴야 한다.
시어머니 같은 대중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혹시라도 말을 잘못했다가는 선원에서 축출당한다.
밥을 굶을지 몰라 불안하기 이를데 없다. 그렇게 되면 개망신이다.
그래서 새색시 같은 선사라 한다. 대개가 그와 같은 선지식들이다.
소신도 없지만 그나마 대중들에게 아부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옛 선배들 중에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고 선원에서 축출을 당한 예가 있다.
대중들도 축출한 뒤에 그가 참으로 훌륭한 선지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달마대사가 그 좋은 예다.
그가 만약 양나라에서 쫓겨나지 않았다면 그의 성가가 오늘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만약 훌륭한 선지식을 가는 곳마다 알아준다면 그 또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유사한 예로 오늘날의 불교도 정법(正法)을 거론 하는 데는 파리를 날린다.
하지만 삿된 가르침이나 불교가 아닌 행사에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그래서 진정으로 정법에 소신을 가지고 법을 펴는 사람들은 매우 외롭다.
하지만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섭섭해 하거나 외로워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의인군자가 아닌가.
임제스님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할 말은 당당하게 한다.
그래서 임제가풍을 청천벽력이라고 한다.
청천벽력 같은 기상천외의 사자후 일성에 자질구레한 불교 상식으로
재산을 삼고 있는 사람들은 뇌가 찢어지거나 기절하고 만다.
지금까지의 법문이 기존의 불교 상식과는 전혀 다른 놀라운 말씀들이 많았다.
아마도 뇌가 찢어지거나 기절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혀를 내 둘렀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이것은 불교가 아니라고 책을 던져버렸을 것이다.
최상의 근기는 최상승법을 들으면 기쁜 마음으로 곧바로 받아드린다.
중간 근기는 과연 그러한가 아닌가 하고 망설인다.
그러나 소인배 하근기는 비웃어 버린다.
소인배 하근기가 비웃지 않으면 족히 최상의 도가 되지 못한다.
師子一吼(사자일후) 野干腦裂(야간뇌열). 사유해 볼만한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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