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 임제록 강설-시중(示衆) 14-13. 14-14. 14-15
14-13 불 속에서도 타지 않는다
唯有道流(유유도류)의 目前現今聽法底人(목전현금청법저인)하야 入火不燒(입화불소)하며 入水不溺(입수불익)하며 入三塗地獄(입삼도지옥)호대 如遊園觀(여유원관)하며 入餓鬼畜生而不受報(입아귀축생이불수보)하나니 緣何如此(연하여차)오 無嫌底法(무혐저법)일새니라 ?若愛聖憎凡(이약애성증범)하면 生死海裏沈浮(생사해리침부)하리니 煩惱由心故有(번뇌유심고유)라 無心煩惱何拘(무심번뇌하구)리오 不勞分別取相(불노분별취상)하면 自然得道須臾(자연득도수유)니라 ?擬傍家波波地學得(이의방가파파지학득)하면 於三祇劫中(어삼지겁중)에 終歸生死(종귀생사)하리니 不如無事(불여무사)하야 向叢林中(향총림중)하야 牀角頭交脚坐(상각두교각좌)니라
“오직 도를 배우는 벗들의 눈앞에 법을 듣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으며,
삼악도의 지옥에 들어가도 마치 정원을 구경하며 노는 듯하고,
아귀 축생에 들어가도 그 업보를 받지 않는다.
어째서 그런가하면 꺼려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만약 성인은 좋아하고 범부를 싫어한다면 생사의 바다에 떴다 잠겼다 할 것이다.
번뇌는 마음을 말미암아서 생겨나는 것이니 마음이 없다면 번뇌가 어찌 사람을 구속하겠는가?
분별하여 모양을 취하느라 헛수고하지 않으면 저절로 잠깐 사이에 도를 얻을 것이다.
그대들이 분주하게 옆 사람에게 배워서 얻으려 한다면
삼 아승지겁 동안 애를 써도 결국은 생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아무런 일 없이 총림의 선상 구석에서 두 다리를 틀고 않아 있느니만 못하리라.”
(강의)
모든 사물은 불에 타지 않는 것이 없다. 물에 빠지지 않는 것이 없다.
하지만 말을 하고 말을 듣는 이 사람은 불에도 타지 않고 물에도 빠지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지옥에서도 정원을 거니며 구경하는 것처럼 편안하고 행복하다.
축생이나 아귀에 들어가도 그 축생이나 아귀가 되지 않는다.
진정한 도는 꺼려할 것이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無嫌底法(무혐저법)].
물론 좋아할 것도 없는 법이다.
보고 듣는 이 자리에 무슨 차별이 있는가. 좋아하고 싫어할게 어디 있는가.
그래서 혜능조사는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다.
취사선택하지 말고 사랑하고 미워하지 않으면 훤하게 밝다.
완전한 평화와 행복이다. 성불이고 견성이고 열반이고 깨달음이고 조사고 부처님이다.
말을 듣고 있는 이 사람이다. 너고 나다. 삼라만상이고 우주만유다.
선이라고 좋아하고 악이라고 싫어한다면 좋고 싫고 취하고 버리고 하는 일이 벌어진다.
성인이다 법부다 하는 분별이 있게 되어 사랑과 미움이 있게 된다.
편견과 치우침이 있게 되어 양변에 떨어진다.
편견과 치우침으로 양변에 떨어지면 그것이 곧 삼악도다.
지옥이다. 윤회다. 불에 타고 물에 빠지는 일이다.
분노의 불길에 휩싸이고 탐욕의 물결에 떠내려간다.
물과 불에 반복하여 윤회하게 되며, 아귀와 축생에 끌려 다니며 윤회하게 된다.
무위진인(無位眞人)을 잃어버린 것이다.
어느 곳에서든지 주체가 되지 못하고 종이 되어 끌려 다닌다.
타인이 손해를 입히고 비방을 하고 욕을 하고 때리고 모함하는 일에 휘말린다.
그런 일에 따라다니며 윤회하게 된다. 하루 종일 시시비비에 떠다닌다.
그래서 나는 없다. 온통 남이다. 경계뿐이다.
산은 산, 물은 물대로 그대로 두고 보라.
장미는 장미 목련은 목련 그대로 두고 보라.
밤나무는 밤나무 감나무는 감나무 그대로 두고 보라.
눈앞에 버러진 온갖 현상들에 쫒아 다니지 말고 주인이 되라.
그러면 어디서나 행복하리라. 이것이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다.
상대적 편견에 떨어진 온갖 이론들을 애써 배우느라고 삼 아승지겁 동안 돌아다니느니 보다는
차라리 아무런 일 없이 총림의 선상 구석에서 두 다리를 틀고 않아 있느니만 못하리라.
14-14 주객이 서로 만나다
道流(도류)야 如諸方有學人來(여제방유학인래)하야 主客相見了(주객상견요)하고 便有一句子語(편유일구자어)하야 辨前頭善知識(변전두선지식)이라 被學人拈出箇機權語路(피학인염출개기권어로)하야 向善知識口角頭?過(향선지식구각두찬과)하야 看?識不識(간이식불식)이어든 ?若識得是境(이약식득시경)이면 把得(파득)하야 便抛向坑子裏(편포향갱자리)하나니라 學人(학인)이 便卽尋常然後(편즉심상연후)에 便索善知識語(편색선지식의)하나니 依前奪之(의전탈지)하면 學人云(학인운), 上智哉(상지재)라 是大善知識(시대선지식)이여하리니 卽云(즉운), ?大不識好惡(이대불식호오)로다하고 如善知識(여선지식)이 把出箇境塊子(파출개경괴자)하야 向學人面前弄(향학인면전농)하면 前人辨得(전인변득)하야 下下作主(하하작주)하야 不受境惑(불수경혹)이라 善知識(선지식)이 便卽現半身(편즉현반신)에 學人便喝(학인편할)한대 善知識(선지식)이 又入一切差別語路中擺撲(우입일체차별의로중파학)하면 學人云(학인운), 不識好惡(불식호오)로다 老禿奴(노독노)여하야 善知識(선지식)이 歎曰(탄왈), 眞正道流(진정도류)로다하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예컨대 여러 곳에서 학인이 찾아왔을 때 주인과 객이 인사를 나눈 뒤
학인이 대뜸 한마디를 던져 앞에 있는 선지식을 알아보려고 한다.
이를테면 학인으로부터 한 가지[箇(개)] 시험하는 말[機權語路(기권어로)]을 끄집어내어
선지식을 향해서 입씨름하는 말[口角頭(구각두)]을 던져서,
‘보십시오! 스님께서는 이걸 아십니까?’라는 질문을 당하게 된다.
그 때 선지식이 만약 시험하는 말이라는 것[是境(시경)]을 알면
그 말을 잡아서 곧바로 학인을 궁지로 몰아넣는다[구덩이에 던져버린다].
그 때 학인은 곧 태도를 고치고 평상의 자세로 돌아간 뒤 곧 선지식의 말[가르침]을 찾는다.
그러면 선지식은 여전히 그를 부정해버린다.
학인이 말하기를 ‘참으로 지혜로우십니다. 큰 선지식이십니다.’라고 한다.
그 선지식은 곧 ‘이 녀석은 도대체 좋고 나쁜 것도 모르는 구나’라고 한다.
또 선지식이 하나의 시험하는 말[境塊子(경괴자)]을 학인 앞에 내놓고 희롱하면
그 학인이 알아차리고 하나하나 주제를 지어서 경계에 미혹함을 받지 않는다.
다시 선지식이 곧 진심을 조금[半身(반신)] 드러내 보이면 학인은 곧바로 “할!”하고 고함을 친다.
선지식이 다시 여러 가지 차별된 말로 시험해 보는데, 학인이 ‘좋고 나쁜 것도 모르는구나.
이 늙고 머리 깍은 중아.’ 하면 선지식은 찬탄하기를, ‘진정으로 도를 배우는 벗이로다.’라고 한다.”
(강의)
이 단락은 선지식과 학인이 만나서 오고가는 대화의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법을 거량하는 일은 늘 있어 왔다.
제대로 깨달은 사람들의 거량은 더 이상 논할 것이 없고
위와 같은 엉터리 가짜들의 거량은 문제가 많다.
필자도 선원에서 직접 많이 보아온 경험이 있다. 모두가 대개 일방적이다.
선지식도 학인이 법을 거량하거나 법을 거량하기 위해서
앞에 나와 절을 하면 다짜고짜 깔아뭉개는 식이다.
학인도 자신이 할 소리만 내뱉고 휙 일어서 버린다.
‘백골(白骨)이 만산(滿山)이다.’라고 하거나
또는 “할”을 하거나 주장자로 치거나 방바닥을 치거나 하고는 일어나 버린다.
단 두합을 가지 않는다. 서로 모르고 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
옛 검객들은 오십 합을 주고받는 경우가 많다.
옛 선지식들도 진지하게 학인을 위해서 몇 합을 주고받다가 성의 있게 일러준다.
학인도 성의를 다하여 지시를 따른다.
요즘도 선원에서 오고가는 질문이 있기는 하다.
어떤 곳에서는 불교에 대한 상식이 자기 수준과 엇비슷하면 인가해준다.
공부에 관심만 좀 있어도 인가해준다.
인가를 받은 사람이 어느 날 ‘인가는 받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아무 것도 아니고,
뭐가 뭔지 아무 것도 모르겠다.’고 하소연을 하는 사람도 있다.
공부에 관심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지금으로서는 좋게 생각해 줘야 할런지 잘 모르겠다.
불법에 관심을 유도하는 뜻에서 좌우간 좋은 현상이다.
14-15 귀신과 도깨비들
如諸方善知識(여제방선지식)은 不辨邪正(불변사정)하야 學人(학인)이 來問菩提涅槃三身境智(내문보리열반삼신경지)하면 ?老師(할노사)가 便與他解說(편여타해설)타가 被他學人罵著(피타학인매착)하고 便把棒打他言無禮度(편파봉타타언무례도)하나니 自是?善知識無眼(자시이언지식무안)이라 不得瞋他(부득진타)로다
“제방의 여러 선지식들은 삿된 것과 바른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학인이 찾아와서 보리와 열반과 삼신(三身)과 경계와 지혜 등을 묻는다.
눈이 먼 노사는 그에게 해설을 해 주다가 학인으로부터 꾸짖고 힐난함을 받게 되면
곧바로 몽둥이로 후려치면서 ‘이 예의와 법도도 모르는 놈아!’라고 한다.
그것은 스스로 그대들 선지식들이 안목이 없기 때문이다.
그 학인에게 화를 내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강의)
세상의 선지식들이 어찌 임제스님과 같겠는가.
대개가 눈 먼 이들이다. 사(邪)와 정(正)을 분별하지 못하는 이들이다.
학인의 지적을 받으면 그만 화부터 낸다. 아만은 있어서 채면이 깎이는 것은 못 참는다.
실은 화를 낼 일이 아니다. 자신이 안목이 없다는 사실을 시인하라.
자신이 안목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시인 할 줄 알면 그는 참으로 대단한 분이다.
존경을 받을 분이다. 자신을 비우고 꼬리를 내릴 줄 안다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살림에는 눈이 보배라는 말이 있듯이, 인생을 살아가는데도 안목이 제일이다.
불법을 공부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더욱 더 그렇다.
“그대의 행동은 문제 삼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의 안목은 반드시 점검하겠다.”라는 고인의 말이 있다.
안목은 참으로 중요하다.
有一般不識好惡禿奴(유일반불식호오독노)하야 卽指東劃西(즉시동획서)하며 好晴好雨(호청호우)하며 好燈籠露柱(호등롱로주)하나니 ?看(이간)하라 眉毛有幾莖(미모유기경)고 這箇具機緣(자개구기연)에 學人不會(학인불회)하고 便卽心狂(편즉심광)이라 如是之流(여시지류)는 總是野狐精魅??(총시야호정매망양)이니 被他好學人(피타호학인)의 ??微笑(익익미소)하야 言?老禿奴(언할노독노)여 惑亂他天下人(혹난타천하인)이로다
“좋고 나쁜 것을 모르는 머리 깍은 종들이 있어서 동쪽을 가리키다 서쪽을 가리키고,
맑은 날을 좋아하다가 비오는 날을 좋아하며, 등롱(燈籠,등불을 켜서 어둠을 밝히는 기구)과
노주(露柱,법당의 드러난 둥근 기둥)를 좋아한다.
그대들은 잘 보아라! 눈썹에 털이 몇 개가 남아 있는가?
이 일에는 기연(機緣)이 갖추어져 있는데 학인들은 알지 못하고 곧 미쳐버리는 것이다.
이런 무리들은 모조리 여우나 귀신 도깨비들이다.
그 좋은 학인들에게 ‘이 눈멀고 머리 깍은 늙은이가 온 천하 사람들을 미혹하고
어지럽게 만드는 구나’라는 비웃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이다.”
(강의)
온전하지 못한 선지식들은 학인이 무엇을 물으면
그 말을 따라 별의별 이야기를 어수선하게 다 늘어놓는다.
이야기가 갈팡질팡한다.
보리니 열반이니 삼신이니 관찰할 대상인 경계니
관찰하는 지혜니 하는 등등에 대하여 펼치는 이야기가 장관이다.
팔만장경을 다 동원한다.
모두가 삿된 이야기들이다.
그렇게 삿된 말만 어지럽게 늘어놓다가 눈썹이 남아나겠는가?
삿된 말을 좋아하면 눈썹이 빠진다.
동·서·남·북이니 맑고 흐림이니 등롱이니 노주니 구모(龜毛)니 토각(兎角)이니
석녀(石女)니 하는 말로 모두 선문답으로 여긴다.
선리(禪理)를 알지 못하고 허황된 망언만 늘어놓는다.
악지식들에게 보통 있는 관례다.
모두가 눈앞에 보이는 온갖 것들을 보이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어지럽게 늘어놓는다.
이 도리에는 반드시 기연(機緣)과 까닭이 있다.
함부로 늘어놓는다고 맞는 말이 아니다.
그런 것을 여우나 도깨비나 귀신들의 장난이라고 한다.
멀쩡한 사람이 그렇게 되어서야 옳겠는가.
선지식 그 자신이 잘못되는 것은 그렇지만
학인을 미치게 만들면 그 업을 어찌 하겠는가.
천하의 스승 된 모든 사람들은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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