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 임제록 강설-시중(示衆) 14-16. 14-17. 14-18
14-16 계율도 익히고 경론도 배웠다
道流(도류)야 出家兒(출가아)는 且要學道(차요학도)니라 祇如山僧(지여산승)은 往日(왕일)에 曾向毘尼中留心(증향비니중유심)하고 亦曾於經論尋討(역증어경론심토)라가 後方知是濟世藥(후방지시제세약)이며 表顯之說(표현지설)이라 遂乃一時抛却(수내일시포각)하고 卽訪道參禪(즉방도참선)하니라 後遇大善知識(후우대선지식)하야 方乃道眼分明(방내도안분명)하야 始識得天下老和尙(시식득천하노화상)하야 知其邪正(지기사정)하니 不是娘生下便會(불시낭생하편회)요 還是體究練磨(환시체구연마)하야 一朝自省(일조자성)하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출가한 사람은 무엇보다 도를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지난날 계율에 마음을 두기도 하였고, 경론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나중에서야 그것들이 세간을 구제하는 약이며 겉으로 드러내어 표현하는 것인 줄을 알았다.
드디어 몽땅 다 버려 버리고 도에 대해서 묻고 선을 참구하였다.
그런 뒤에 큰 선지식을 만나 뵙고 나서야 마침내 도안(道眼)이 분명해져서,
비로소 천하의 노화상들이 삿된지 바른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이것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나면서부터 바로 안 것이 아니다.
깊이 연구하고 갈고 닦아서 어느 날 아침에 스스로 살펴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강의)
짧은 글이지만 임제스님께서 수도의 길을 어떻게 걸어왔는가를 엿볼 수 있다.
도에 이르는 길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불교라는 오랜 전통과 체계 속에서
그 길을 모색해 온 사람들의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순서와 길은 있다.
그 길을 스님은 그대로 밟아온 것이다.
옛날대로 라면 승려가 되어서 5, 6년은 계율(戒律)을 공부하여
수행자로서 삼천 가지 위의(威儀)와 팔만 가지 세세한 행동들을 익힌다.
그 다음에는 경전과 논을 10여년 깊이 연찬하여 깊고 오묘한 불교교리들을 낱낱이 깨닫는다.
그리고는 사교입선(捨敎入禪)이라 하여 그동안 배우고 익힌 교학을 모두 버리고 참선에 들어가는 것이다.
일생을 통해서 바람직한 수행자가 되는 대는 이와 같은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임제스님은 그 코스를 하나도 빠짐없이 밟아왔다.
그리고 마침내 황벽이라는 큰 선지식을 만나서 도안(道眼)을 분명하게 뜨게 되었다.
눈을 뜬 뒤에는 천하의 노화상들이 삿된지 바른지를 한 눈에 알아보았다.
마치 밝은 거울이 붉은 것은 붉은 대로 비치고 푸른 것은 푸른 대로 비치는 것과 같다.
이 깨달음의 눈은 어머니가 낳아준 그대로 다 알아보는 그 눈이 아니다.
피나는 노력의 결과였다.
이러한 길을 모든 수행자가 다 같이 밟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육조 혜능 같은 이들은 나무를 팔려갔다가 금강경의 한 구절을 듣고 바로 깨닫기도 했다.
열반회상에 광액(廣額)이라는 소를 잡는 백정은 어느 한 순간에 깨달음을 얻고는
‘나도 천 부처님 중에 하나다.’라고 큰 소리를 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사례들은 특수한 경우다.
임제스님이 걸으신 길을 눈여겨 볼 일이다.
14-17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道流(도류)야 ?欲得如法見解?(이욕득여법견해)댄 但莫受人惑(단막스인혹)하고 向裏向外(향리향외)하야 逢著便殺(봉착편살)하라 逢佛殺佛(봉불살불)하며 逢祖殺祖(봉조살조)하며 逢羅漢殺羅漢(봉라한살나한)하며 逢父母殺父母(봉부모살부모)하며 逢親眷殺親眷(봉친권살친권)하야사 始得解脫(시득해탈)하야 不與物拘(불여물구)하고 透脫自在(두탈자재)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법다운 견해를 터득하려면 남에게 미혹[속임]을 당하지 말고
안에서나 밖에서나 마주치는 대로 곧바로 죽여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아라한을 만나면 아라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속을 만나면 친속을 죽여라.
그래야 비로소 해탈하여 사물에 구애되지 않고 투철히 벗어나서 자유 자재하게 된다.”
(강의)
여법한 견해나 진정견해나 모두가 같은 것이다. 수처작주도 같다.
모두가 다른 사람에게나, 나 아닌 다른 경계에 동요하지 말라는 것이다.
온갖 경계가 앞에 오거든 무조건 다 부정하고 끌려가거나 흔들리지 말라는 것이다.
나를 욕하고 나를 때리고 모함하고 손해를 입히고 하는 것뿐만 아니라
나를 유혹하는 순조로운 경계도 같은 것이다.
부처나 조사나 아라한이나 부모나 처자권속이나 모두가 다 나 아닌
경계고 내가 미혹을 당할 상대들이다.
다시 말해서 역경계나 순경계나 일체를 부정하고 벗어나라는 것이다.
거기에 끌려가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해탈이다.
어떤 사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다. 툭 터져서 자유자재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나 아라한이나 그 어떤 권위나 관념들로부터도 벗어나라.
인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깡그리 부정해 버리고 끌려가지 말라는 뜻에서 죽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불조에 대한 모든 잘못된 관념들을 때려 부셔라는 뜻이다.
이렇게 파격적이고 강도 높은 언어를 써도 강강(强剛)한,
억세고 미련한 중생들은 아무런 감동이 없다.
깊은 사유가 없어서이다. 경계는 경계의 일이고 나는 나의 일이다.
남이 나에게 어떻게 하든 나는 내 할 일 하면 된다.
내 자신을 굳게 지키고 타인의 잘잘못을 보지 말라.
흔들리고 따라가면 그 순간 내 생명은 벌써 상처를 입는다.
그가 부처든 조사든 부모든 칭찬이든 욕이든 마찬가지다.
자신을 자각하는 일은 그처럼 중요하다.
안에도 있지 말고 밖에도 있지 말고 중간에도 있지 말라.
참으로 수처작주(隨處作主)하고 입처개진(立處皆眞)하라.
불여물구(不與物拘)하고 투탈자재(透脫自在)하라.
제대로 사람답게 살려면 반드시 이 말대로 하라.
如諸方學道流(여제방학도류)는 未有不依物出來底(미유불의물출래거)라 山僧向此間(산승향차간)은 從頭打(종두타)하야 手上出來手上打(수상출래수상타)하고 口裏出來口裏打(구리출래구리타)하고 眼裏出來眼裏打(안리출래안리타)하나니 未有一箇獨脫出來底(미유일개독탈출래거)요 皆是上他古人閑機境(개시상타고인한기경)이니라
“제방에서 도를 배우는 벗들은 말이나 형상에 의지하지 않고 내 앞에 나온 자는 하나도 없었다.
산승은 여기에서 처음부터 그들을 쳐버린다.
손에서 나오면 손으로 치고, 입에서 나오면 입으로 치며, 눈에서 나오면 눈으로 쳐버린다.
다만 홀로 벗어나서 나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모두가 옛날 사람들의 부질없는
지식이나 언어나 행위들[閑機境(한기경)]을 숭상하고 받드는 것이었다.”
(강의)
임제스님이 법을 쓰는 것은 매우 독특하다. 그 표현이 독창적이다.
파격적이고 상상을 초월한다. 그야말로 불가사의하고 기상천외하다.
밝은 대낮에 청천벽력이다. 구름 한 점 없는데 태풍이 불고 폭우가 쏟아진다.
그 밝기로는 일 천 개의 태양이 동시에 떠서 수수만년을 비추고 있다.
어디에도 의지하거나 근거를 대어 나타내는 경우가 없다.
그런데 다른 모든 이들은 그동안 불교역사에서 축적되어진 표현들을
그대로 빌려오거나 변형을 시킨 것들이다.
원래로 법이 그렇지가 않은데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모두 쳐 없앤다.
어떤 입장에서 나오든지 모두 쓸어버린다.
옛 사람들의 부질없는 말이나 행위들을 흉내 내어 봐야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할”을 하고 방을 써 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느 큰 참선 법회에 가서 보고 온 사람이 왈,
‘외계인들이 와서 놀다 가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는 말을 했다. 매우 적절한 평이었다.
이제는 되지 않은 옛 스님들의 격외 법문을 문자로 적어서 그것을 다시 번역하고
떠듬떠듬 읽어서 법문이랍시고 토해내는 그런 것은 그만 하는 것이 좋다.
차라리 자신이 알고 있고 확신이 가는 것만 이야기 하자.
전설 따라 삼천리도 좋고 소를 팔러 다니던 이야기도 괜찮다.
진실하게 소신이 있는 말이면 되지 않는가.
공연히 옛 사람들의 흉내를 낸다고 자신이 옛 사람처럼 존귀하게 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14-18 그대는 무엇이 부족한가
山僧(산승)은 無一法與人(무일법여인)이요 祇是治病解縛(지시치병해박)이니 ?諸方道流(이제방도류)는 試不依物出來(시불의물출래)하라 我要共?商量(아요공이상량)이라 十年五歲(십년오세) ?無一人(병무일인)하고 皆是依艸附葉竹木精靈(개시의초부엽죽목정령)과 野狐精魅(야호정매)니 向一切糞塊上亂咬(향일체분괴상란교)로다
“산승은 남에게 줄 법이 하나도 없다.
다만 병에 따라 치료를 해주고 묶여있는 것을 풀어줄 뿐이다.
그대들 제방의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시험 삼아 사물에 전혀 의존하지 말고 나와 보아라.
나는 그대들과 법에 대해서 문답을 하고 싶구나.
15년이 지나도록 누구 한 사람 없었다.
모두가 풀이나 나무 잎사귀나 대나무나 나무에 붙어사는 귀신들이다.
또 여우나 도깨비 같은 것들이다.
모두 똥 덩어리에 달라붙어 어지럽게 씹어 먹는 것들이다.”
(강의)
이 법은 본래로 남에게 줄 수 있는 법이 아니다.
만약 줄 수 있는 법이라면 세존은 벌써 라후라에게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야수다라에게도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디에도 라후라에게나 야수다라에게 법을 주었다는 이야기는 없다.
왜냐? 줄 수 있는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법을 전해 준다느니, 법을 전해 받았다느니 하는 말은 단순한 인정에 불과하다.
그가 깨달은 것이 확실한가를 알아보고 확실하면 인정을 해 주는 일이다.
그와 같은 인정하는 일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오늘날까지 그 관례를 그대로 쓴다.
불교는 병에 따라 약을 쓰고 속박된 것을 풀어 주는 일이다.
8만 4천 법문이란 중생들의 8만 4천 가지의 병에 따라 약을 처방한 것에 불과하다.
또 병이란 다른 말로 하면 속박이요, 구속이다. 있음과 없음에 구속되고,
생과 사에 구속되고, 성인과 범부에 구속되고, 중생과 부처에 구속되고,
선과 악에 구속되고, 일체 차별과 편견과 양변과 변견과 비교하는데 구속되어 있다.
그래서 그것들로부터의 해탈을 희망한다.
간혹 선문답을 하는데서 들을 수 있는 말로서 ‘부처님의 말씀이나 조사들의 말씀을 떠나서 한 마디 일러보라.’
또는 ‘말과 행동을 쓰지 않고 한 마디 일러보라.’ 라고 주문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모두가 무엇엔가 의지해서 법을 말한다.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도 모두가 불조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표현한다.
과거의 선배들이 남겨둔 것을 대단한 보물로 생각하여 모든 삶을 거기에 걸고 있다.
그 기준과 그 사례에 어긋나면 크게 잘 못된 것으로 생각한다.
이점에 대해서 임제스님은 입에 담을 수 없을 만치 혹독하고 심한 표현을 쓴다.
“제발 누구 하나 아무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독창적인 법을 들고 나와서 같이 말 좀 해보자.
15년 동안 한 사람도 경계나 언구나 지금까지 표현한 것이 아닌 것으로 이야기를 나눠본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제 갈 길을 못가고 구천을 떠돌다가 풀섶이나 나무나 바위 등에 붙어있는 귀신 도깨비 같은 존재들이다.
모두가 남들이 싸 논 똥 덩어리를 씹어 먹고 있는 꼴이다.”라고 하였다.
참으로 전무후무한 극언이다. 누가 감히 그 흉내를 내겠는가.
그 용맹은 천 명의 조자룡이요 만 명의 관운장이다.
누구의 표현처럼 임제는 활화산이고, 천기누설이고, 지뢰밭이고, 산사태고, 태풍이고,
해일이고, 홍수고, 날벼락이고, 대지진이고, 전쟁이고, 폭발이고, 분출하는 용암이다.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일이다.
똥 덩어리란 산처럼 쌓여있는 교학들이 그것이다.
온갖 망상으로 펼쳐 둔 주의 주장들과 사상들이 그것이다.
닦아야 되느니 증득해야 되느니 3아승지겁 동안 6바라밀, 10바라밀을
실천해야만 된다고 하는 등등의 가르침들을 지적해서 하는 말이다.
천하의 선지식이라는 이들이 모두 거기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임제스님이 보기에는
갑갑하고 안타깝고 숨 막히고 몸살이 나서 죽을 맛이다.
활화산과 천기누설과 지뢰밭과 산사태와 태풍과 해일과 홍수와 날벼락과 대지진과
전쟁과 폭발과 분출하는 용암을 한꺼번에 쏟아 부어 다 쓸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임제의 적손(嫡孫) 조계종도들이여,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임제의 적손 조계종도들이여,
세계불교의 과거와 미래와 현재를 책임지고 있는 임제의 적손 조계종도들이여.
이 힘과 이 용기와 이 기백과 이 용맹으로 명실상부한 선의 종주국의 깃발을 온 세계에 힘차게 드날리자.
?漢(할한)이여 枉消他十方信施(왕소타시방신시)하고 道我是出家兒(도아시출가아)라하야 作如是見解(작여시견해)로다 向?道(향이도)하노니 無佛無法(무불무법)하며 無修無證(무수무증)하나니 祇與?傍家(지여마방가)에 擬求什?物(의구십마물)고 ?漢(할한)아 頭上安頭(두상안두)라 是?欠少什?(시이흠소십마)오
“야 이 눈 먼 놈들아,
저 시방의 신도들이 신심으로 시주한 물건을 마구 쓰면서
‘나는 출가한 사람이다’라고 하여 이와 같은 견해를 짓고 있구나.
나는 그대들에게 분명히 말하고자 한다.
부처도 없고 법도 없고 닦을 것도 없고 깨칠 것도 없는데,
어쩌면 그렇게들 옆집으로만 다니면서 무슨 물건을 구하는가?
야 이 눈멀고 어리석은 놈들아! 머리 위에 또 머리를 얹는구나.
너희들에게 무엇이 부족하단 말인가?”
(강의)
출가입산(出家入山)하여 수행 정진한다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온갖 호설난도(胡說亂道)로 펼쳐놓은 주의주장들을 의지해서
그것이 불교인양 하고 사는 사람들의 견해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뜻이다.
불교는 그런 것이 아닌데 헛되이 신도들의 시주 밥만 축내고 출가인 이라고 하다니.
불교를 사뭇 틀리게 말하는 사람, 그것마저 하지 않는 사람들은 차한에 부재다.
논할 대상이 아니다.
이미 우리들 자신이 완전무결한데, 그래서 부처도 법도 수행도 깨달음도 없다.
공연히 자기의 집을 버리고 남의 집으로 찾아 헤매고 있다.
자신의 집에 이미 무한한 보물이 있는데 남의 집에 가서 무엇을 구하자는 것인가.
야, 이 눈멀고 어리석은 놈아
그렇게 해서 찾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머리 위에 머리를 하나 더 올려놓는 격[頭上安頭]이다.
긁어서 부스럼 내는 일이다. 멀쩡한 사람을 병신으로 만드는 일이다.
머리 위에 머리를 올려놓고 어쩌자는 것인가? 무엇이 부족하여 그런 짓을 하는가?
지금 이 순간 글을 읽고 말하는 소리를 듣고 춥고 더운 것을 느끼고 하지 않는가?
거기서 다시 무엇이 더 필요한가?
진정한 신통묘용이요 무량대복인 것을. 참으로 천고의 명언이다. 촌철살인이다
더 이상 나아갈 데가 없는 최후 최고의 가르침이다. 수미산 꼭대기다.
두상안두(頭上安頭). 천고의 명언이다.
欠少什?(흠소십마). 명언중의 명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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