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 임제록 강설-시중(示衆) 14-19. 14-20. 14-21
14-19 삼계는 삼독심이다
道流(도류)야 是?目前用底(시이목전용저)가 與祖佛不別(여조불불별)이어늘 祇?不信(지마불신)하고 便向外求(편향외구)로다 莫錯(막착)하라 向外無法(향외무법)이요 內亦不可得(내역불가득)이니라 ?取山僧口裏語(이취산승구리어)는 不如休歇無事去(불여휴헐무사거)니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그대들 눈앞에서 작용하는 이놈이 바로 할아버지 부처님과 다르지 않다.
왜 믿지 않고 밖에서 찾는가? 착각하지 말라.
밖에도 법이 없으며 안에도 또한 얻을 것이 없다.
그대들은 산승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는 것보다는 모든 생각을 쉬어서 아무 일 없이 지내는 것이 차라리 낫다.”
(강의)
불교란 무엇인가? 도란 무엇인가? 도를 이룬 부처님이나 조사는 또 무엇인가?
그대들이 지금 이 자리에서 보고 듣고 알고 느끼고 하면서 작용하는 그 사실이다.
지금 이 순간 작용하는 그놈이 부처님과 조사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단지 그것을 믿지 못하고 그 외의 것들을 찾아 밖으로 법을 구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안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안에서 얻을 수도 없다.
내가 하는 이 말은 이 지상에서 제일가는 법문이다. 이보다 더 위대한 법문은 없다.
팔만사천법문과 온갖 시시비비를 다 쓸어버리는 어마 어마한 태풍과도 같은 말씀이다.
하지만 산승의 이 말을 듣는 것 보다는 한 생각 쉬는 것이 더 낫다.
한 생각 쉬고 아무 일 없이 지내는 것이 훨씬 훌륭하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지만 나는 놈보다는 아예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는 놈이 백배 훌륭하다.
已起者莫續(이기자막속)하고 未起者不要放起(미기자불요방기)하라 便勝?十年行脚(편승이십년행각)이니라 約山僧見處(약산승견처)하면 無如許多般(무여허더반)이요 祇是平常(지시평상)이니 著衣喫飯(착의긱반)하고 無事過時(무사과시)니라
“이미 일어난 것은 계속하지 말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은 일어나지 않도록 하여라.
이렇게 한다면 10년을 행각하는 것보다 더 나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런 허다한 일[소승, 대승, 출가, 속가, 수행의 단계 등]은 없는 것이니
다만 평소대로 옷 입고 밥 먹으며 아무런 일없이 세월을 보내는 것뿐이니라.”
(강의)
스승을 잘못 만나고 한 생각 잘못하여 부처를 구하고
조사를 구하려고 어쩔 수 없이 마음을 일으켰다면 더 이상 지속하지는 말라.
만약 일어나지 않았거든 어떤 좋은 생각도 일으키지 말라.
그렇게만 하면 그대들이 공부를 위해서 10년을 행각한 것 보다 훨씬 낳으리라.
산승의 소견으로는 그 허다한 5위 75법이니, 5위 100법이니 하는 것이 없다.
5온 12처 18계니, 4성제 8정도 12인연도 없다.
3승 4과도 없다.
보살의 수행계위인 10신, 10주, 10행, 10회향, 10지, 등각, 묘각도 없다.
6바라밀, 10바라밀도 없다.
참선 염불도 없다. 간경 주력 기도도 없다.
다만 평소대로 옷 입고 밥 먹으며 아무런 일없이 인연 따라 세월을 보내는 것뿐이다.
만약 산승의 소견이 틀린다고 생각이 들거든 맞는 길을 찾아서 알아서 살아라.
한국의 모든 선지식들은 이 정신 이 가르침이 좋아서 모두들 임제스님 밑으로 줄을 대고 있다.
?諸方來者(이제방래자)가 皆是有心(개시유심)이라 求佛求法(구불구법)하며 求解脫求出離三界(구해탈구출리삼계)하나니 癡人(치인)이여 ?要出三界(이요출삼계)하야 什?處去(십마처거)오 佛祖是賞繫底名句(불조시상계저명구)니라 ?欲識三界?(이욕식삼계마)아 不離?今聽法底心地(불리이금청법저심지)니 ?一念心貪(이일념심탐)은 是欲界(시욕계)요 ?一念心瞋(이일염심진)은 是色界(시색계)며 ?一念心癡(이일염심치)는 是無色界(시무색계)라 是?屋裏家具子(시이옥리가구자)니라 三界不自道我是三界(삼계불자도아지삼계)요 還是道流(환시도류)의 目前靈靈地照燭萬般(목전령령지조촉만반)하야 酌度世界底人(작탁세계저인)이 與三界安名(여삼계안명)하나니라
“제방에서 온 그대들은 모두가 마음이 있다.
부처를 구하려고 하며, 법을 구하려고 하며, 해탈을 구하여 삼계를 벗어나려고 한다.
어리석은 이들아! 그대들이 삼계를 벗어나서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부처와 조사란 보기 좋은 올가미로 만든 이름과 글귀일 뿐이다.
그대들은 삼계가 무엇인지 알고 싶은가?
지금 그대들이 법문을 듣고 있는 그 마음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들의 한 생각 탐내는 마음이 욕계(欲界)고, 한 생각 성내는 마음이 색계(色界)며,
한 생각 어리석은 마음이 무색계(無色界)니라.
이 삼계는 바로 그대들의 집속에 있는 살림살이들인 것이다.
삼계가 스스로 ‘내가 바로 이 삼계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눈앞에서 아주 분명하게 만물을 비추어 보고 세계를 가늠하는 그 사람이 삼계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강의)
모든 사람들은 다 마음이란 것이 있어서 그 마음으로 부처를 구하고
법을 구하고 해탈을 구하여 삼계를 벗어나려고 한다.
다 옳은 일이다. 그런데 삼계를 벗어나서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삼계라는 것이 진실로 있기나 한가? 참으로 있어서 벗어나려 하는가?
가나오나 지금 있는 이 자리뿐인 것을.
동쪽 사람들은 염불을 해서 서방으로 간다지만 서방 사람들은 염불을 해서 어디로 가는가?
동쪽으로 오는가? 그대들이 참으로 삼계가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가?
그대들이 지금 이 순간 법문을 듣고 있는 그 마음자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대들 한 생각 탐욕하는 마음과 분노하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들이 곧 욕계, 색계, 무색계다.
이 삼계란 그대들의 집에서 쓰는 가구들이다.
삼계 25유(有)를 모두 그대들의 목전에서 역역한 그것이 이름 붙인 것이다.
온갖 만물을 살피고 온 세계를 헤아리는 바로 그 사람이 이름을 지어 붙인 것이다.
또 그대들이 오매불망 구하려고 하는 부처나 조사라는 것도 모두가 금이나 은 같은
그럴듯한 좋은 올가미를 만들어 사람들을 얽어매는 것에 불과하다.
부처니 조사니 하는 말이 얼마나 근사하고 얼마나 아름답고 훌륭한가?
사람들을 얽어매기 아주 좋은 금과 은으로 만든 올가미다.
그 올가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매여 속박을 당하는가.
금이 아니라 다이아몬드로 만들어도 올가미는 사람들을 구속하는 올가미일 뿐이다.
그 외에 다른 것은 아니다.
대 해탈, 대 자유인이 곧 그대 자신이거늘 왜 올가미에 걸려드는가.
14-20 무명은 없다
大德(대덕)아 四大色身是無常(사대색신시무상)이라 乃至脾胃肝膽(내지비위간담)과 髮毛爪齒(발모조치)도 唯見諸法空相(유견제법공상)이니 ?一念心歇得處(이일념심헐득처)를 喚作菩提樹(환작보리수)요 ?一念心不能歇得處(이일념심불능헐득처)를 喚作無明樹(환작무명수)니라 無明無住處(무명무주처)요 無明無始終(무명무시종)이라 ?若念念心歇不得(이약념념심헐불득)하면 便上他無明樹(편상타무명수)하야 便入六道四生(편입육도사생)하야 披毛戴角(피모대각)이요
“큰스님들이여! 사대로 되어있는 이 몸뚱이는 덧없는 것이다.
비장과 위와 간과 쓸개와 머리카락과 털과 손톱과 이빨마저도
오직 모든 것이 텅 비어있는 모양임을 보여줄 뿐이다.
그대들의 한 생각 마음이 쉰 곳을 보리수라 하고,
한 생각 마음이 쉬지 못하는 곳을 무명수라 한다.
무명은 머무는 곳이 없으며, 처음과 끝이 없다.
그러므로 그대들이 만약 순간순간의 마음이 쉬지 못한다면 곧 무명수 위에 올라가서
곧바로 사생육도(四生六道)에 들어가서 털이 나고 뿔이 달리는 짐승이 될 것이다.”
(강의)
‘나는 없다.’ 이 말은 반야심경을 한 마디로 표현한 것이다.
5온이 모두 텅 비어 없다. 안, 이, 비, 설, 신, 의도 텅 비어 없다.
색, 성, 향, 미, 촉, 법도 모두 텅 비어 없다. 4성제, 8정도, 12인연도 텅 비어 없다.
일체가 다 텅 비어 없다는 것이 반야심경의 요점이다.
그래서 필자는 반야심경을 주력삼아 외우다가 깨달은 것이 ‘나는 없다.’이다.
내가 없는데 다시 무엇을 위하여 헐떡거리겠는가. 생로병사와 일체 문제의 해결이다.
그대들 한 생각 쉬어버린 곳이 보리수다. 그대들이 한 생각 쉬지 못한 곳이 무명수다.
그런데 무명이란 말 뿐이지 실은 없는 것이다.
무엇인가 찾으려고 헐떡거리는 마음 때문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온갖 4생(生(생)) 6도(途(도))가 다 벌어진다. 다종다양한 삶이 펼쳐진다.
천태학(天台學)에 일념삼천(一念三千)이라는 말이 있다.
한 순간에 삼천 가지의 삶의 양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우리가 살며 느끼고 있는 일체 현실이 모두 한 생각 쉬지 못해서 무명이 있고,
그 무명으로 인하여 환영처럼 펼쳐진 것들이다.
?若歇得(이약헐득)하면 便是淸淨身界(편시청정신계)니라 ?一念不生(이일념불생)하면 便是上菩提樹(편시상보리수)라 三界神通變化(삼계신통변화)하야 意生化身(의생화신)하야 法喜禪悅(법희선열)하며 身光自照(신광자조)니 思衣羅綺千重(사의나기천중)이요 思食百味具足(사식백미구족)하야 更無橫病(갱무횡병)이니라 菩提無住處(보리무주처)라 是故無得者(시고무득자)니라
“그대들이 만약 쉬기만 하면 그대로가 곧 청정법신의 세계다.
그대들이 한 생각도 나지 않으면 곧 보리수에 올라
삼계에서 신통 변화하여 마음대로 화신의 몸을 나타내리라.
그래서 법의 기쁨과 선의 즐거움[法喜禪悅]으로 몸의 광명이 저절로 빛날 것이다.
옷을 생각하면 비단 옷이 천 겹으로 걸쳐지고, 밥을 생각하면 백 가지 진수성찬이 그득히 차려지며,
다시는 뜻밖의 병이나 가난으로 오는 병에 걸리는 일도 없을 것이다.
보리는 어떤 주처가 없다. 그러므로 얻을 것도 없느니라.”
(강의)
한 생각 쉬는 것이 곧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며,
한 생각 일어나지 않은 것이 곧 한 생각 쉰 것이다.
그 경지가 되면 이 현실 그대로가 청정법신의 세계며
곧 보리수에 올라 삼계에서 신통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뜻대로 몸을 나타내며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누리리라.
비단 옷이 넘쳐나고 온갖 진수성찬이 구족하여 병도 없으리라.
한 생각 쉬는 것이 무엇인가?
자신에게 모든 것이 구족하여 더 이상 밖을 향해서 찾을 것이 없는 이치를 깨닫는 것이다.
설사 부처와 조사라 하더라도 자신 밖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밖을 향해 찾지 않는 것이다.
신통묘용과 복덕 지혜도 그렇다.
그것이 쉬는 것이며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法喜禪悅(법희선열)이란 말은 삶의 극치다.
가만히 읊조리기만 해도 그 희열이 샘솟는다.
14-21 보고 듣는 이가 누구인가
道流(도류)야 大丈夫漢(대장부한)이 更疑箇什?(갱의개십마)며 目前用處(목전용처)가 更是阿誰(갱시옥수)오 把得便用(파득편용)하야 莫著名字(막착명자)를 號爲玄旨(호위현지)니 與?見得(여마견득)하면 勿嫌底法(물험저법)이니라 古人云(고인운), 心隨萬境轉(심수만경전)이나 轉處實能幽(전처실능유)라 隨流認得性(수류인득성)하면 無喜亦無憂(무희역무우)라하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대장부가 또 무엇을 의심하는가?
눈앞에서 작용하는 이가 다시 또 누구인가?
잡히는 대로 쓰며 이름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심오한 뜻이다.
이와 같이 볼 수 있다면 싫어할 것이 없는 도리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마음은 만 가지 경계를 따라 흘러가지만 흘러가는 그곳이 참으로 그윽하여라.
마음이 흘러가는 그곳을 따라 성품을 깨달으니 기쁨도 없고 근심도 없도다.’라고 하였다.”
(강의)
사람들의 마음은 참으로 미묘한 것이다. 매우 심오하고 불가사의한 것이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그 높이 그 넓이에 미칠 수가 없다.
그 헤아릴 수 없는 작용은 신묘불측(神妙不測)이다.
그래서 언어로써 표현할 길이 없고 생각으로 따를 수 없다.
그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지금 이 순간 보아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보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가운데 들으며 작용하고 있는 그것이다.
그러한 이치를 잘 알아서 추호의 의심도 없고 양변에 떨어지거나 편견이 없으면 대장부다.
옛 인도의 23조(祖)인 학륵나 존자가 아직 법을 깨닫기 전에 학의 무리들이 항상 따라다녔다.
그래서 22조 마라나 존자를 만나 그 까닭을 물었더니,
‘그대가 옛날 제자들을 데리고 용궁에 가서 공양을 받았는데
그 제자들이 박복하여 학의 몸을 받은지 5겁이나 되었다. 바로 그들이다.’라고 하였다.
그들이 해탈할 수 있는 길을 물으니 위와 같은 게송을 설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유명한 게송이다.
‘마음이 흘러가는 그곳을 따라 성품을 깨닫는다.’는 말은 수처작주(隨處作主),
즉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그 상황의 주인이 된다는 뜻이다.
텅 빈 마음자리를 잘 누리어 남이 나를 어떻게 취급하든 나는 나의 자리를 잃지 않고,
동요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끌려 다니지 않는다는 뜻이다.
남이 나를 때렸다. 남이 나를 욕했다. 모함했다. 비방했다. 손해를 입혔다.
망신을 주었다. 내 것을 빼앗아 갔다. 등등에 흔들리지 않고 의연히 대처하는 것이다.
나아가서, 온갖 몹쓸 병들이 나를 괴롭게 한다. 몸이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
세월이 나를 늙게 한다. 는 등등에도 소요자재(逍遙自在)하고 여여무심(如如無心)하면
기쁨도 없고 근심도 없으리라.
본래로 그런 것이 없는 텅 빈 마음의 세계에서 자유자재하게 노닐 뿐이다.
그것은 그들의 일이고 나는 나이기 때문이다.
이 금쪽같은 구절은 반드시 외워야 한다.
心隨萬境轉(심수만경전) 轉處實能幽(전처실능유)
隨流認得性(수류인득성) 無喜亦無憂(무희역무우).
잘 이해하면 평생의 좋은 양식이 될 것이다.
'임제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무비스님, 임제록 강설-시중(示衆) 14-25. 14-26. 14-27 (0) | 2018.02.04 |
---|---|
[스크랩] 무비스님, 임제록 강설-시중(示衆) 14-22. 14-23. 14-24 (0) | 2018.02.04 |
[스크랩] 무비스님, 임제록 강설-시중(示衆) 14-16. 14-17. 14-18 (0) | 2018.01.21 |
[스크랩] 무비스님, 임제록 강설-시중(示衆) 14-13. 14-14. 14-15 (0) | 2018.01.21 |
[스크랩] 무비스님, 임제록 강설-시중(示衆) 14-10. 14-11. 14-12 (0) | 2018.0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