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 임제록 강설-시중(示衆) 14-22. 14-23. 14-24
14-22 주인과 객이 서로 보다
道流(도류)야 如禪宗見解(여선종견해)는 死活循然(사활순연)하니 參學之人(참학지인)이 大須子細(대수자세)어다 如主客相見(여주객상견)할새 便有言論往來(편유언론왕래)호대 或應物現形(혹응물현형)하며 或全體作用(혹전체작용)하며 或把機權喜怒(혹파기권희노)하며 或現半身(혹현반신)하며 或乘獅子(혹승사자)하며 或乘象王(혹승상왕)이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선종의 견해로는 삶과 죽음이 돌고 도는 것이니, 참선을 하는 사람들은 매우 자세히 살펴야 한다.
주인과 손님이 서로 만나면 곧 말들을 주고받는데, 혹은 사람에게 맞추어서 모습을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전체작용(全體作用)을 하기도 하며, 혹은 기연과 방편으로 기뻐하거나 성내기도 하며,
혹은 몸을 반쯤 나타내 보이기도 하며, 혹은 사자를 타기도 하고, 혹은 코끼리를 타기도 한다.”
(강의)
선문답의 사례들을 소개하고 있다.
정신을 똑똑히 차리고 진검승부 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장난삼아, 또는 소영웅심리에서 선문답을 해서는 안된다.
여기서 삶과 죽음이란 주객이 서로 만나 법을 거량하는 경우에
이기거나 지는 일을 표현한 것이다.
이기는 것은 살아나는 것을, 지는 것은 죽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말로써 주고받는데 이기고 지는 일이 돌고 돈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여섯 가지의 사례를 들고 있다.
혹 사자를 타기도 한다는 것은 문수보살의 역할을 뜻한다.
언제나 보현보살과 대비가 된다.
집안의 일을 맡은 사람이며 지혜를 상징한다.
코끼리를 타기도 한다는 것은 보현보살의 역할을 뜻한다.
바깥의 일을 맡은 사람이며 실천을 상징한다.
여섯 가지 예들이 모두 그와 같은 입장에 서서
사람을 제접한다는 것을 다 들어 보인 것이다.
如有眞正學人(여유진정학인)이 便喝(편할)하야 先拈出一箇膠盆子(선염출일개교분자)하면 善知識(선지식)이 不辨是境(불변시경)하고 便上他境上(편상타경상)하야 作模作樣(작모작양)하면 學人便喝(학인편할)에 前人不肯放(전인불긍방)하나니 此是膏盲之病(차시고맹지병)이라 不堪醫(불감의)니 喚作客看主(환작객간주)니라
“만약 진정한 학인이 있어서 대뜸 “할”을 하여 아교풀을 담은 단지를 하나 내놓으면
선지식은 그것이 경계[미끼]인 줄 모르고 곧 그 경계에서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지어 낸다.
이것을 본 학인이 다시 “할”을 하여도 앞의 선지식은 이를 놓아버리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의사도 고칠 수 없는 불치[膏盲(고맹)]의 병이다.
이런 경우를 ‘객이 주인을 본[看破(간파)]다.’라고 한다.”
(강의)
선문답을 할 경우 주인과 객, 즉 선지식과 학인이 만났을 때 눈이 밝은 학인이
곧 “할”을 하여 마치 아교풀을 담은 단지를 앞에 내어 놓는 것과 같다.
그러면 선지식은 그것이 고기를 낚는 미끼인 줄을 모르고 덥석 물고는 이리 저리 헤아린다.
그 때 학인은 곧 “할”을 하면 선지식은 그 미끼를 놓지 않고 물고 늘어지는 예가 있다.
이것은 치료할 수 없는 병이다.
학인이 선지식을 간파하고 선지식은 간파를 당한 것이다.
이야기가 좀 옆길로 나가보자면, 집안이 이렇게 되면 곤란하다.
한 집안이 잘 되려면 어른들이 모법이 되어야한다.
그런데 그 반대가 되면 문제가 많다. 나라에도 마찬가지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너무도 평범한 진리다.
나라의 모든 언론매체들은 매일 매시간 부정과 부패를 소개하느라고 정신이 없다.
부정부패가 왜 그토록 많은가? 윗사람들이 부정부패를 저지르기 때문이다.
어느 물줄기도 맑은 곳은 없는가보다.
특히 상부층 지도층에 있는 정치인들, 기업인들, 공직자들, 종교인들, 교육자들이 맑아야 한다.
이런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맑지 않으면 하층에 있는 사람들은 맑을 길이 전혀 없다.
윗물이 흐린데 아랫물이 맑을 수 있겠는가? 세상에 그런 이치는 없다.
나라가 잘되려면 모든 공장을 멈추더라도 위에서부터 정직하고 검소한 생활을 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노력이 다 허사다. 도로 아미타불이다.
위에 있는 정치인들은 하루빨리 깨달아야 한다.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인도하고 선지식은 학인을 가르치는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或是善知識(혹시선지식)이 不拈出物(불염출물)하고 隨學人問處(수학인문처)하야 卽奪(즉탈)이라 學人被奪(학인피탈)에 抵死不放(저사불방)하나니 此是主看客(차시주간객)이니라
“혹은 또 다른 경우는, 선지식이 아무 것도 내놓지 않고 학인이 물으면 묻는 대로 곧 빼앗아 버린다.
학인이 빼앗기고는 한사코 놓아버리려 하지 않으면 이것을 ‘주인이 객을 간파한다.’라고 한다.”
(강의)
선문답의 또 한 예로서, 선지식은 찾아 온 학인을 두고 보다가 학인이 무엇을 물으면
선지식은 곧 그 질문을 부정해 버린다.
그 때 학인은 인정을 받기위해서 죽자고 놓치지 않는다.
고인의 말씀을 빌리자면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았을 때 어떻습니까?”
“놓아버려라.”
“한물건도 가져오지 않았는데 무엇을 놓으란 말입니까?”
“놓아버리기 싫거든 가져가거라.” 이와 같은 예다.
이런 경우는 선지식이 학인을 간파하고 학인은 간파를 당한 것이다.
이런 예도 크게 바람직하지는 않다. 아름답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미 선문답이 오고가는 사이라면
학인도 한 칼이 있어야 하는데 물고 늘어지기만 한다.
그러나 모든 학인이 다 그러리라는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14-23 삿되고 바른 것을 알라
或有學人(혹유학인)이 應一箇淸淨境(응일개청정경)하야 出善知識前(출선지식전)이어든 善知識(선지식)이 辨得是境(변득시경)하고 把得抛向坑裏(파득포향갱리)하면 學人言(학인언), 大好善知識(대호선지식)이로다 卽云(즉운), ?哉(돌재)라 不識好惡(불식호오)로다 學人便禮拜(학인편예배)하나니 此喚作主看主(차환작주간주)니라
“혹 어떤 학인이 일개 청정한 경계를 선지식 앞에 내놓으면
선지식이 그것이 경계인 줄을 알아차리고 집어다가 구덩이 속에 던져버린다.
그래서 학인이 ‘참으로 훌륭한 선지식이십니다’라고 하면
선지식은 곧 ‘쯧쯧, 좋고 나쁜 것도 모르는 구나’라고 한다.
그러면 학인이 절을 하는데 이것을 ‘주인이 주인을 간파한다.’고 한다.”
(강의)
이것은 선지식과 학인 모두 눈이 밝아서 함께 간파하고 문답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진 예다.
마치 세존이 영산회상에서 꽃을 드니 가섭존자가 미소를 보내고,
다시 ‘세존은 나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을 그대에게 부촉하노라.’ 하면
가섭은 그 말을 기꺼이 받아드리는 광경이라고나 할까?
법을 인가하는 일과 함께 서로 주인이 되어 동시에 간파한 것이다.
임제록에서 공부를 점검하는 감변장(勘辨章)에 많이 있는 예다.
매우 바람직하고 아름다운 선문답이다.
或有學人(혹유학인)이 披枷帶鎖(피가대쇄)하야 出善知識前(출선지식전)하면 善知識(선지식)이 更與安一重枷鎖(갱여안일중가쇄)라 學人歡喜(학인환희)하야 彼此不辨(피차불변)하나니 呼爲客看客(호위객간객)이니라 大德(대덕)아 山僧如是所擧(산승여시소거)는 皆是辨魔揀異(개시변마간의)하야 知其邪正(지기사정)이니라
“혹 또 어떤 학인이 목에 칼을 쓰고 발에 족쇄를 찬 채 선지식 앞에 나타나면,
선지식이 그 위에다 다시 칼과 족쇄를 한 겹 더 씌워버리는데도 학인이 기뻐하여
피차가 서로 분간하지 못하면, 이것을 ‘객이 객을 간파한다.’고 한다.
큰스님들이여, 산승이 이와 같이 예를 든 것은 모두가 마군과 이단을 가려내서
삿된 것과 바른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강의)
이 단락에서 간파한다는 것은 위의 사례와 비교해 볼 때 말이 좀 일정하지 않다.
객이라는 말이 학인이라는 뜻이었는데 여기서는 눈을 뜨지 못한 사람을 두고 한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인도 객이 되어버린 것이다.
서로가 눈이 어두운 처지이기 때문에 이리 저리 뒤엉킨 것이다.
학인이 기뻐함도 진정한 기쁨이 아니다. 동반의식에서 온 기쁨이다.
근래의 선문답을 보면 한마디로 엉망진창이다.
대개 자신을 높이고 자랑을 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제대로 눈을 뜬 사람이라면 어찌 자랑을 하겠는가?
자랑을 하거나 아상을 내세운다면 어찌 눈을 뜬 사람이겠는가?
그 사람됨을 알만하다.
어릴 때 치기나 객기로 선배스님들과 일방적인 말 한마디 주고받은 것을 가지고 평생 떠들고 있는 사람이 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니까 그 선지식이 대답을 못하더라.’는 등. ‘
옛 공안을 못 이르더라.’는 등. 입만 열면 아무 것도 모르는 시장 아낙네들에게 그런 자랑을 늘어놓는다.
임제록을 강설하면서 이런 말을 하는 필자도 실은 한없이 부끄럽다.
혹 학인과 문답을 한다 하더라도 서로 모르고 하니 제대로 될 리가 없는 것은 불을 보듯 뻔 한 노릇이다.
흉내만 내는 것이다. 그런 것도 기록해 두었다가 책이 되어 돌아다닌다.
지금도 또 어디선가 자랑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하니 참으로 아득하다.
이 법에 눈을 제대로 뜬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알아내는 기준이 있다.
여덟 가지 바람[八風(팔풍)]이다.
이익· 손해· 훼방· 추켜세움· 칭찬· 놀림· 고통· 즐거움이다.
이 여덟 가지의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면 그 위인이 어지간하다고 할 수 있다.
안팎으로 모두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밖으로는 아무런 동요가 없는 것 같으나 속마음이 흔들리면 그는 아니다.
지사나 의인이나 호걸도 이익이나 손해, 명예나 칭찬, 비방 등에 흔들리지 않는다.
하물며 마음공부에 달통한 도인이겠는가?
그런 까닭에 임제스님은 마와 이단을 잘 가리고 사와 정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14-24 신 값을 갚을 날이 있을 것이다
道流(도류)야 寔情大難(식전대난)이요 佛法幽玄(불법유현)이나 解得可可地(해득가가지)니라 山僧竟日(산승경일)에 與他說破(여타설파)나 學者總不在意(학자총불재의)하고 千?萬?(천변만변)을 脚底踏過(각저덥가)하야 黑沒焌地(흑몰준지)로다 無一箇形段(무일개형단)하야 歷歷孤明(역역고명)이언만 學人信不及(학인신불급)하고 便向名句上生解(편향명구상생해)하야 年登半百(연득반백)토록 祇管傍家負死屍行(지관방가부사시행)하며 擔却擔子天下走(담각담자천하주)하나니 索草鞋錢有日在(색초혜전유일재)로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진실한 마음을 내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고
불법은 심오하지만 알고 보면 별것이 아닌 당연한 일[可可(가가)]이다.
산승은 온종일 그들로 더불어 설파해주지만 공부하는 이들은 도대체 마음을 쓰지 않는다.
천 번 만 번 밟고 다니면서도 도무지 깜깜하다.
아무런 형체도 없으면서 밝고 뚜렷한 이것을 학인들은 믿지 못하고
명자와 글귀위에서 이해하려 한다.
나이가 오십이 넘도록 단지 송장을 짊어지고 밖으로만 다니는구나.
이렇게 짐을 지고 천하를 돌아다녔으니 짚신 값을 받을 날이 있으리라.”
(강의)
이 지구상에서 불교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단히 많다.
그러나 불교에 대해서 진실로 발심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진실한 발심은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교란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문제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를 추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생 최고의 가치인 도를 깨닫는 일이 만만치가 않다.
소인들은 도에 대해서 설명을 들면 비웃는다. 보통 사람들은 그런가 저런가 망설인다.
하지만 대인은 흔쾌히 받아드린다.
소인들이 비웃지 않으면 족히 도가 될 수 없다.
보통 사람들이, 더구나 대부분 소인의 성향을 가진 말세의 인간들이
도에 대해서 진정으로 마음을 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오욕락과 세상사 인간사에 홀딱 반하고 깊이 빠져서 벗어나올
길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무슨 도에 관심이 있겠는가?
무슨 진정한 불교에 뜻이 있겠는가?
불법을 공부한다는 것은 가치관의 문제다.
삶에 대한 가치관이 바뀌지 않는 한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임제스님은 진실한 마음을 내기가, 진정으로 발심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불교는 깊고 오묘하다.
설사 깊고 오묘하더라도 알고 보면 별 것이 아니다. 작은 일이다.
쉽고 간단한 일이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임제스님은 처음 대우스님에게 가서 불법을 깨닫고 나서
‘황벽의 불법이 간단하구나.’라고 하지 않았던가.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옷 입고 밥 먹고 보고 듣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인들은 그 쉬운 것을 믿지 않는다.
한 걸음도 옮기지 않은 그 자리, 곧 자기 자신이지만
문자나 이론을 따라가며 사량 분별을 하고 머리를 굴린다.
옆길로 옆길로 생명 없는 송장을 매고 천하를 돌아다닌다.
짚신은 얼마나 달았을까? 짚신 값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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