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빠사나.5온.12처.18계

[스크랩] 위빠싸나로 법관찰을 한다는 것

수선님 2018. 2. 4. 12:34

 

법에는 관념적인 법과 실재하는 법 두 가지가 있습니다.

실재하는 법은 지금여기에서 경험할 수 있는 자연스런 것으로,

이런 법은  궁극적인 법입니다.

그래서 생각하는 것은 실재하는 법이 아닙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법은 모두 관념적인 법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법념처의 법은 관념적인 법이 아니라,

몸과 마음(물질과 정신)에서

이 순간에 실제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이 법(담마)입니다.

그래서 법은 경험을 통해서 알고 바르게 이해됩니다.


아무리 말로 여러 측면에서 실재(법)를 설명해도

이것을 읽는 분은 자기의 관념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바르게 전달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권하는 것이

실제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현재 이 순간(지금 여기)에 일어나는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림을 해본 다면

실재하는 법에 대한 이해가 빠르게 될 것입니다.


우선 위빠사나(vipassana. 대상을 분리해서(vi)

있는 그대로 주시하는 것이 지속되는 것(passna))의

대상이 되는 신수심법 사념처 중에서


신념처는

자기 몸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물질적 현상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호흡이나 몸의 움직임, 행주좌와 에서 느껴지는

단단하고 부드러운, 따뜻하고 차가운, 무겁고 가벼운,

떨리고 움직이고 지탱하는 물질이 가진 성품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수념처는 6문을 통해 들어온 대상에 대하여

자신 안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느낌(좋아하고 싫어하고 무덤덤한 느낌)을

즉, 정신적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심념처는  지금 촉하는 대상에 대하여

자신 안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탐심, 성냄, 어리석음, 관용, 자애 지혜의 마음 상태를

즉, 정신적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법념처는 이렇게 몸과 마음 안에서 이 순간 실제로 일어나는

물질적 현상이나 정신적 현상을 알아차릴 대상인 법(法)으로 맞이하여

그것이 나, 나의 것, 나의 자아가 아닌,

그냥 알아차릴 대상인 법(실재. 빠라마타)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실재(담마. 다르마. 법)들은

조건에 의해 생멸하며, 끊임없이 흐른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통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번 일어난 법(실재. 담마)은

두 순간을 지탱하지 못하고, 그 찰나에 사라지는 무상과


이렇게 찰나찰나 생멸하는 법(물질적 정신적 현상)이

바로 불만족이라는 고(苦)와


이렇게 무상하여 괴로운 것을 괴롭지 않게 조절할 수 있는

'나'라는 실체가 없다는 무아를 통찰하는 것이


법을 있는 그대로 통찰하는 법념처에서 나오는 통찰 지혜입니다.


이러한 통찰 지혜는

바로 몸과 마음의 물질적 정신적 현상에 대한

집착(탐진치)을 일으키지 않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오온의 무상, 고, 무아의 법을 통찰한 사람은

오온(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한 탐진치가 소멸되어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떤 괴로움도, 어떤 행복도 조건에 의해서

그냥 일어났다 사라지는 법으로 보는 안목이 있으므로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아 모든 괴로움(번뇌)으로부터

해탈하는 힘이 있습니다.


참고로 상좌불교의 논장인

아비담마에는 실재(實在)하는 법은 모두 82가지로 나옵니다.


이 법은 관념적인 법이 아니라

찰나 생멸하며, 그 찰나에만 실제로 존재하는

실재하는 법(빠라마타)입니다.


색법(28가지)

심법(1가지)

심소법(수상행, 52가지)

열반법(1가지)입니다.


여기서 무위법인 열반 법을 제외한

색법, 심소법, 심법은 유위법이며, 연기하며 찰나 생멸하는 법입니다.


색법, 심소법, 심법은 바로 현재 자신의 오온이며

물질과 정신, 몸과 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실재하는 법의 성품을 보려면

시제로는 현재(지금 여기)이며

대상은 자신의 물질적 정신적 현상입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벗어난 밖의 대상은

경험할 수 없고, 그래서 유추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유추한다는 것은 이미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고정관념을 가지고 대상을 판단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자기 관념에 오염된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경험할 수 있는 실재를 법으로 하는 것은

오직 자신의 몸과 마음만이 스스로 경험하여

있는 그대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출처 : 흐르는 강물처럼
글쓴이 : 네란자라 강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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