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 임제록 강설-시중(示衆) 14-43. 14-44
14-43 철퇴를 맞을 날이 있으리라
大德(대덕)아 莫因循過日(막인순과일)하라 山僧往日(산승왕일) 未有見處時(미유견처시)에 黑漫漫地(흑만만지)라 光陰(광음)을 不可空過(불가공과)니 腹熱心忙(복열심망)하야 奔波訪道(분파방도)하야 後還得力(후환득력)하야 始到今日(시도금일)하야 共道流如是話度(공도류여시화도)니라 勸諸道流(권제도류)하노니 莫爲衣食(막위의식)하라 看世界易過(간세계이과)하며 善知識難遇(선지식난우)니 如優曇華(여우담화)가 時一現耳(시일현이)니라
“큰스님들이여!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지 말라.
산승이 지난날 견처가 없었을 때는 도무지 캄캄하고 답답하였다.
세월을 헛되이 보낼 수 없어서 속은 타고 마음은 바빠서 분주히 도를 물으려 다녔다.
그런 뒤에 힘을 얻고 나서야 비로소 오늘에 이르러 같이
도를 닦는 여러분들과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도를 닦는 그대들에게 권하노라.
옷과 밥을 생각하지 말라.
세월은 쉽게 지나가고 선지식은 만나가 어려워
우담바라 꽃이 때가 되어야 한번 피는 것과 같으니라.”
(강의)
불교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의식주에 끄달려서는 안된다.
사람 문제에 끄달려서도 안된다. 차원이 다르다.
학문을 하거나 예술을 하는 사람들도 의식주 문제에 얽매이지 않는다.
사람문제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하물며 불교를 공부하고 도를 닦는 사람이겠는가.
부와 지위와 명예에도 관심이 없어야 한다.
불교는 그와 같은 문제를 뛰어 넘은 일이다.
그리고 올바른 선지식을 찾아야 한다.
불교를 바르게 아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이 시대에는 없다고 생각이 들면
하는 수 없이 책자에서라도 찾아야 한다.
경전이나 어록에서 선지식을 찾아야 한다.
필자는 60년대, 70년대를 거치면서 회상을 운영하고 있는
당대의 선지식 회상을 모두 섭렵하며 한 두 철씩 다 모시고 살았다.
복이 없음인지 믿음이 부족함인지 이 몸을 맡길 선지식을 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일찍이 걸망 속의 선지식으로 의지하던 그대로 대혜스님의 서장과
고봉스님의 선요와 임제록을 아직도 선지식으로 모시고 있다.
그렇게라도 선지식이 있어야 한다.
옳은 선지식을 만나기란 우담바라 꽃이
3천년 만에 한번 피는 것과 같이 만나기 어렵다고 했다.
?諸方(이제방)이 聞道有箇臨濟老漢(문도유개임제노한)하고 出來便擬問難(출래편의문난)하야 敎語不得(교어부득)타가 被山僧全體作用(피산승전체작용)하야 學人空開得眼(학인공개득안)이나 口總動不得(구총동부득)하고 ?然不知以何答我(몽연부지이하답아)하니 我向伊道(아향이도)호되 龍象蹴踏(용상축답)은 非驢所堪(비려소감)이로다
“그대들 제방에서는 임제라는 노장이 있다는 말을 듣고
이곳으로 오자마자 곧 질문을 하여 말문이 막히게 하려고 한다.
그러다가 산승의 전체작용(全體作用)을 당하고 나서는
그 학인은 부질없이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입도 열지 못한다.
멍청하여져서 어떻게 대답할지를 모른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용과 코끼리가 힘껏 나아가는데 나귀 따위가 감당할 바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강의)
부처님은 일찍이 자신을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라고 했다.
깨달음에 자신이 있고 진리에 자신이 있는 사람은 모두가 유아독존이다.
이것은 자랑도 아니고 교만도 아니고 아만도 아니다.
당당한 자기주장일 뿐이다.
아만이나 교만이 남아 있다면 그는 결코 깨달은 사람도 아니고
도인도 아니고 수양이 된 사람도 아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다만 하늘을 찌를 듯한 진리의 대선언이다.
깨달음의 기치를 하늘 높이 드날리는 일일 뿐이다.
자신을 온전히 드날리는 전체작용이다.
용이 등천하는데 당나귀 따위가 명함을 낼 수 있겠는가.
?諸處(이제처)에 祇指胸點肋(지지흉점늑)하야 道我解禪解道(도아해선해도)하나 三箇兩箇(삼개양개)가 到這裏(도자리)하야 不奈何(불내하)하니 ?哉(돌재)라 ?將這箇身心(이장자개심신)하야 到處?兩片皮(도처파양편피)하야 ??閭閻(광하여염)하니 喫鐵棒有日在(긱철방유일재)로다 非出家兒(비출가아)요 盡向阿修羅界攝(진향아수라계섭)이니라
“그대들 제방에서는 가슴을 치고 옆구리를 치면서
‘나는 선을 알고 도를 안다.’고 하여 으스대지만, 두 사람이건 세 사람이건
여기에 와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구나. 애달다.
그대들은 이 훌륭한 몸과 마음을 가지고 가는 곳마다
두 조각 입술을 나불대면서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
철퇴를 얻어맞을 날이 있을 것이다.
출가한 사람이라 할 수 없다.
모두 아수라의 세계에 빠지게 될 것이다.”
(강의)
예나 지금이나 알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많다.
선지식이라고 남의 스승노릇을 하는 사람들은 많다.
마치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설치는 격이다.
특히 요즘 세상에는 엉터리 선지식들이 아무리 활개를 쳐도
누구하나 비판하고 말리는 사람도 없다.
마치 태양은 넘어가고 저녁노을이 질 무렵
갈가마귀 때가 시끄럽게 울며 어지럽게 설치는 것과 같다.
여염집의 멀쩡한 선남선녀들을 속이고 있다.
남도 속이고 자신도 속인다.
염라대왕 앞에 가서 철퇴를 맞을 날이 있을 것이다.
출가인은 고사하고 그대로 아수라다.
14-44 의심하지 말라
夫如至理之道(부여지리지도)는 非諍論而求激揚(비쟁논이구격양)이며 ??以?外道(견장이최외도)니라 至於佛祖相承(지어불조상승)하야는 更無別意(갱무별의)요 設有言敎(설유언교)라도 落在化儀三乘五性人天因果(낙재화의삼승오성인천인과)니라 如圓頓之敎(여원돈지교)는 又且不然(우차불연)하야 童子善財(동자선재)가 皆不求過(개불구과)니라
“대저 지극한 도는 논쟁을 하여 높이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큰 소리를 쳐서 외도를 꺾는 것도 아니다.
불조가 면면이 서로 이어오는 것조차 무슨 별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설혹 부처님의 말씀과 가르침이 있다 하더라도 교화하는 법도에 따른
삼승과 오성과 인천인과의 가르침에 떨어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원교 돈교는 또한 그런 것이 아니다.
선재동자도 남김없이 법을 구하고 선지식을 찾는 일을 마치지는 못하였다.”
(강의)
지극한 도에 눈을 뜬 사람들은 가슴을 치고 옆구리를 치면서
‘나는 선을 알고 도를 안다.’고 하면서 으스대지 않는다.
마이크를 들고 목이 터져라 외치지도 않는다.
설사 과거에 불불 조조가 면면히 이어온 사실이 있다 해도 무슨 특별한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가르침이 있다 하더라도 방편으로 부득이하여 펼쳐놓은 교화의식이다.
그래서 크게 눈을 뜨고도 종적을 감추고 숨어 사는 사람들을 가장 훌륭한 도인으로 친다.
다음은 광인 같은 역행보살로서 사람들이 측량할 수 없는 삶을 사는 도인을 친다.
가장 낮은 도인은 회상을 열고 사람들을 제접하며 천하에 이름을 떨치며 사는 도인을 친다.
그렇다면 무수한 도인들이 이름도 없이 종적도 없이 왔다가 갔을 것이다.
역사 속에서 이름을 남긴 도인들보다 훨씬 빼어난 분들이라 생각하면 매우 아쉽고 서운하다.
좀 더 몸을 낮추고 드러내어 사람들과 가까이 살았더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大德(대덕)아 莫錯用心(막착용심)하라 如大海不停死屍(여대해부정사시)니라 祇?擔却(지마담각)하야 擬天下走(의천하주)하나니 自起見障(자기견장)하야 以?於心(이애어심)이라 日上無雲(일상무운)하니 麗天普照(여천보조)요 眼中無?(안중무예)하니 空裏無花(공리무화)로다
“큰스님들이여! 마음을 잘못 쓰지 말라.
마치 큰 바다가 죽은 시체를 그냥 머물러 두지 않듯 하니라.
그렇게 한 짐 잔뜩 짊어지고 천하를 돌아다니니,
스스로 견해의 장애를 일으켜 마음을 막는 것이다.
해가 뜨고 구름 한 점 없으니 아름다운 하늘에 온통 햇빛이 비친다.
눈에 병이 없으니 허공에 꽃이 없다.”
(강의)
불법에 있어서 바르지 못한 소견은 끝내 남겨두지 않는다.
모두 다 걸러낸다.
바다는 죽은 시체들을 모두 밖으로 밀어내는 것과 같다.
되지 못한 안목을 짊어지고 천하를 돌아다녀봐야 자신의 공부에 방해만 될 뿐이다.
삿된 견해와 바르지 못한 안목은 설사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다가도 결국 도태되고 만다.
큰스님이요 훌륭한 선지식이라고 문전성시를 이루다가도 끝내 그 바닥이 드러나고야 만다.
참되고 바른 견해를 가진 사람은 인생사와 세상사에 있어서
마치 구름 없는 하늘에 태양이 떠서 온 천지를 환하게 비치는 것과 같다.
눈에 병이 없으면 헛꽃을 볼 까닭이 없다.
사람이 잠들지 않으면 모든 꿈은 저절로 사라진다.
마음에 이상이 없으면 모든 일에 문제가 없다.
道流(도류)야 ?欲得如法(이욕득여법)이면 但莫生疑(단막생의)하라 展則彌綸法界(전즉미륜법계)하고 收則絲髮不立(수즉사발불립)하야 歷歷孤明(역역고명)하야 未曾欠少(미중흠소)니라 眼不見耳不聞(안불견이불문)이니 喚作什?物(환작십마물)고 古人云(고인운), 說似一物(설사일물)이라도 則不中(즉부중)이라하니 ?但自家看(이단자가간)하라 更有什?(갱유십마)오 說亦無盡(설역무진)이니 各自著力(각자착력)하고 珍重(진중)하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그대들이 법답게 되기를 바란다면 오직 의심을 내지 말아라.
펼치면 온 법계를 싸고도 남는다.
거두면 실 끝도 세울 데가 없다. 뚜렷하고 호젓이 밝아 일찍이 조금도 모자란 적이 없었다.
눈으로도 볼 수도 없고 귀로도 들을 수도 없으니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겠는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설사 한 물건이라 하여도 맞지 않다.’하였다.
그대들은 다만 자기 스스로를 보아라. 더 이상 무엇이 있겠는가?
설명한다 해도 끝이 없다. 각자가 힘껏 노력하여라. 편히 쉬어라.”
(강의)
일물(一物), 즉 마음에 대한 설명이다.
자고로 불교에서 가장 많이 이야기 되어지는 것이다.
어쩌면 불교는 이 마음 하나 밝히자는 것인지도 모른다.
팔만대장경이 모두가 마음 하나 설명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청매조사는 경전 어록을 읽되 마음에 반조하지 않으면 아무런 이익이 없다고 하였다.
그것은 경전 어록들이 모두가 마음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라는 말도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한 물건이라는 말도 맞지 않다.
그러나 흔히 ‘여기에 한 물건이 있다’라고 한다.
보조스님은 우리들 한 마음의 다른 이름들을 진심직설에서 소개하고 있다.
경전에서는 심지(心地)· 보리(菩提)· 법계(法界)· 여래(如來)· 열반(涅槃)· 여여(如如)·
법신(法身)· 진여(眞如)· 불성(佛性)· 총지(摠持)· 여래장(如來藏)· 원각(圓覺) 등등이라 한다.
또 조사들의 어록에서는 자기(自己)· 정안(正眼)· 묘심(妙心)· 주인옹(主人翁)·
무저발(無底鉢· 몰현금(沒絃琴)· 무진등(無盡燈)· 무근수(無根樹)· 취모검(吹毛劍)·
무위국(無爲國)· 마니주(摩尼珠)· 니우(泥牛)· 목마(木馬)· 심원(心源)·
심인(心印)· 심경(心鏡)· 심월(心月)· 심주(心珠) 등등 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 한 마음을 직접 가리켜 설명하고 있는 어록도 많다.
심부주(心賦註)· 심요(心要)· 유심결(唯心訣)· 진심직설(眞心直說)·
무심합도송(無心合道頌)· 심왕명(心王銘)· 신심명(信心銘)· 심명(心銘)· 식심명(息心銘)·
완주음(玩珠吟)· 획주음(獲珠吟)· 심주가(心珠歌) 등등 다 열거할 수 없다.
설사 한 물건[一物(일물)]이라 하더라도 모두가 틀린 소리라는데 왜 이렇게 말이 많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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