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 임제록 강설-감변(勘辨) 15-1. 15-2. 16
감변(勘辨)
(강의)
감정하고 점검하여 분별해 내다. 헤아리고 조사하다. 라는 뜻이다.
공부하는 사람들의 수행의 깊고 얕음과 깨달음의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기 위한 문답들이 실여있다.
흔히 말하는 선문답이다.
법문의 격은 상당법어 이상으로 높이 본다.
온 우주가 전체로 작용하고 무위진인이 활발발하게 활개를 친다.
진도 100의 지진이 일어나고 활화산이 폭발한다.
산하대지가 요동치고 큰 바다가 1000미터 높이로 파도친다.
실재의 지진이 일어나고 화산이 폭발한다는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산하대지가 요동치고 큰 바다가 파도친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오온과 육근 육진과 십이처 십팔계가 그렇게 큰 충격을 받고
흔들리고 뒤집히고 찢어지고 부셔지고 무너져 내린다는 뜻이다.
15-1 호랑이 수염을 뽑다
黃檗(황벽)이 因入廚次(입인주차)에 問飯頭(문반두)호되 作什?(작십마)오 飯頭云(반두운), 揀衆僧米(간중승미)니다 黃檗云(황벽운), 一日喫多少(일일긱다소)오 飯頭云(반두운), 二石五(이석오)니다 黃壁云(황벽운), 莫太多?(막태다마)아 飯頭云(반두운), 猶恐少在(유공소재)니다 黃壁便打(황벽편타)하다
황벽스님께서 부엌에 들어갔을 때, 공양주에게 물었다.
“무얼 하느냐?”
“대중스님들이 먹을 쌀을 가리고 있습니다.”
“하루에 얼마를 먹느냐?”
“두 섬 닷 말을 먹습니다.”
“너무 많지 않느냐?”
“오히려 적을까 싶습니다.”
그러자 황벽스님이 공양주를 때렸다.
(강의)
이 내용은 임제스님이 아직은 황벽스님의 회상에 있을 때 있었던 일이다.
선문답 치고는 지나치게 순리로 오고 가는 대화다.
“너무 많지 않느냐?” “오히려 적습니다.” 그리고 황벽스님의 매질로 이어지는 거량이다.
마치 물 흐르듯 하여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전혀 낌새를 차릴 수가 없다.
그러나 폭풍전야 같은 고요 속의 떨림과 두려움이 있다.
飯頭却擧似師(반두각거사사)한대 師云(사운), 我爲汝勘這老漢(아위여간자노한)호리라 ?到侍立次(재도시립차)에 黃壁擧前話(황벽거전하)어늘 師云(사운), 飯頭不會(반두불회)하니 請和尙(청화상)은 代一轉語(대일전어)하소서하고 師便問(사편문) 莫太多?(막태다마)아 黃檗云(황벽운), 何不道來日(하부도래일)에 更喫一頓(갱긱일돈)고 師云(사운), 說什?來日(설십마래일)고 卽今便喫(즉금편긱)하소서 道了便掌(도료편장)하니 黃壁云(황벽운), 這風顚漢(자풍전한)이 又來這裏?虎鬚(우래자리날호수)로다 師便喝(사편할)하고 出去(출거)하니라
공양주가 이 일을 임제스님에게 말씀드리니,
임제스님이 “내가 그대를 위해 이 늙은이를 점검해 보리라.”하였다.
그리고는 곧 바로 가서 황벽스님을 뵈오니 황벽스님이 앞의 이야기를 먼저 하였다.
임제스님이 황벽스님께 “공양주가 알지 못하니 스님께서 대신 한 말씀 하십시오.”하고 물었다.
“너무 많지 않습니까?”
“내일 한 번 더 먹는다고 왜 말하지 못하느냐?”
“무엇 때문에 내일을 말씀하십니까? 지금 잡수십시오.”하고 곧 황벽스님을 손바닥으로 쳤다.
황벽스님께서 “이 미친놈이 또 여기 와서 호랑이 수염을 뽑는구나.” 하셨다.
그러자 임제스님이 “할!”하시고 나가 버렸다.
(강의)
임제스님의 전체작용과 대기대용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검객의 고수는 틈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상대의 틈을 놓치지 않는다.
“내일까지 갈게 뭐 있소. 지금 이렇게 갓 건져 올린 생선처럼 싱싱할 때 드시지.
그래야 활발발한 무위진인이지요.”
황벽은 호랑이지만 그 호랑이의 수염을 뽑는 사람. 그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다.
그때처럼 오늘도 수염을 뽑힌 호랑이는 마지막 “할”로써 확인 사살까지 당한다.
15-2 도적에게 집을 맡기는 격이다
後?山(후위산)이 問仰山(문앙산)호되 此二尊宿意作?生(차이존숙의자마생)고 仰山云(앙산운), 和尙作?生(화상자마생)고 ?山云(위산운), 養子(양자)에 方知父慈(방지부자)니라 仰山云(앙산운), 不然(불연)하니다 ?山云(위산운), 子又作?生(자우자마생)고 仰山云(앙산운), 大似勾賊破家(대사구적파가)니다
뒷날 위산스님(771-853)께서 앙산스님(803-887)에게 물었다.
“이 두 존숙들의 참뜻이 무엇이겠는가?”
“화상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식을 길러봐야 부모의 사랑을 아는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그대는 어떻게 보는가?”
“도적을 집에 두었다가 집안을 망쳐놓은 것과 흡사합니다.”
(강의)
위의 선문답에 대해서 위산스님은 “자식을 길러봐야 부모의 사랑을 아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앙산스님은 “도적을 집에 두었다가 집안을 망쳐놓은 것과 흡사합니다.”라고 하였다.
위산스님은 순리, 즉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앙산스님은 역리, 즉 부정적으로 해석하였다.
너저분하게 주해를 단다면 순리와 역리는 표현이 비록 다르지만
불교를 조금만 아는 사람이면 같은 것임을 안다.
쌍차(雙遮-부정)는 곧 쌍조(雙照-긍정)고 쌍조는 곧 쌍차이기 때문이다.
차조동시(遮照同時)와 기용제시(機用齊示)를 자유자재로 쓰는 이들은
부정 속에 긍정이 있고 긍정 속에 부정이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난 김에 지팡이는 몸을 의지하는데도 쓰이고 사람을 치는 데도 쓰인다.
물에 비친 달과 같이 실재하지 않는 도량(道場)이지만 우리는 열심히 건립한다.
그리고 거기서 산다.
환화(幻化)인 공양 거리를 불상 앞에 열심히 올린다.
일체법이 중도 아닌 것이 없다.
양변을 떠나기도 하고 양변을 수용하기도 하는 것을 이렇게 설명해야 한다.
16 스님 셋을 후려치다
師問僧(사문승)호되 什?處來(십마처래)오 僧便喝(승편할)이어늘 師便揖坐(사편읍좌)하니 僧擬議(승의의)라 師便打(사편타)하다 師見僧來(사견승래)하고 便竪起拂子(편수기불자)하니 僧禮拜(승예배)한대 師便打(사편타)하니라 又見僧來(우견승래)하고 亦竪起拂子(역수기불자)하니 僧不顧(승불고)어늘 師亦打(사역타)하니라
임제스님이 한 스님에게 “어디서 오는가?” 라고 물었다.
그 스님이 “할!”을 하였다.
임제스님이 허리를 공손히 굽히며 앉게 하였다.
그러자 그 스님이 머뭇거리므로 그대로 후려쳤다.
임제스님이 한 스님이 오는 것을 보고 곧 불자를 세우시니, 그 스님이 절을 하였다.
임제스님은 그대로 후려쳤다.
또 한 스님이 오는 것을 보고 마찬가지로 불자를 세우시니,
그 스님이 본 체도 하지 않았는데 임제스님이 이번에도 후려쳤다.
(강의)
깡패다. 3천년 불교역사에서 제일 무서운 깡패다.
차별도 없이 그대로 모두를 후려친다.
스승인 황벽도 수차례 얻어맞았다.
임제가풍은 근기의 상하를 따지지 않는다. 안목이 있고 없고를 따지지 않는다.
첫 번째 스님은 머뭇거렸기 때문에 그렇다 치고 두 번째 스님은 맞을 일이 아니다.
그리고 세 번째 스님은 오히려 임제를 먼저 한 주먹 먹인 격인데 그것도 아랑곳없다.
선방에 와서 3년 되던 해에 황벽스님에게 세 번에 걸쳐 60대를 호되게 얻어맞은 분풀이로 오해하게 한다.
나는 그렇게 오해하겠다.
그러나 그때의 그 三度發問(삼도발문)에 三度被打(삼도피타)한 그 일이
자신의 가풍이 될 줄은 임제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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