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 무명 (無無明)
사람들은 어떤 사물을 관찰할 때 그 모양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것에 대한 원인을 따져 본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
마치 과학자가 하나의 미생물을 연구 하듯이 하나하나 연구 분석해 들어 간다.
불교는 항상 지금 여기로 부터 출발한다.
지금 나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 무엇인가?
갈애 욕망이 일어나면 그것을 말과 행동으로 옮긴다.
이것을 "취"라 설명한다.
말과 행동으로 옮기면 그 결과가 남게된다.
결과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남게 된다.
결과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에 반드시 원인이 있게 되고 결과는 남게 된다.
그 결과의 원인은 열매가 되고 씨앗이 된다.
그것이 有다.
열매가 있으면 그 열매는 새로운 씨앗이 되어 때가 되면 새싹이 돋아 난다.
새로운 망상을 불러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는 말이다.
이것을 生이라 한다.
마음이 유지되고 사라졌다가 다시 일어나고 사라지는 윤회를 거듭 한다.
이것을 노사(老死)라 한다.
현재 일어 나고 있는 갈애는 저절로 일어난 것일까?
갈애가 일어나고 있는데는 어떤 원인이 있을 것이다.
무엇으로 인하여 갈애가 일아나는가?
그것은 受로 연하여 갈애가 일어난 것이다.
受는 느낌이다, 감정이다.
왜 수(受)가 일어나는가 그것은 눈과 귀, 코와 혀, 몸과 감촉으로 받아 들여 진 결과이다.
똑같은 사물을 보았다 하더라도 언니와 나는 다르게 감정한다.
그것은 언니와 나의 업식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나에게는 좋고
언니에게는 불쾌감을 준다.
업식(業識)은 씨앗이다.
씨앗이 다르기 때문에 한 밭에 심어도 콩은 콩 대로 팥은 팥 대로 싹이 트기 마련이다.
같은 밭에 자라도(인생) 언니의 삶과 나의 삶은 다르다는 말이다.
수(受)는 촉(觸)으로 반연하고 촉은 육입(六入)으로 반연하고
육입은 명색(明色)으로 반연하고 명색은 식(識)으로 반연한다.
識이 곧 씨앗이다.
識은 무엇으로 부터 일어나는가?
전생의 습관과 버릇의 원인으로 부터 진행 되어온
업식(業識)이다.
이러한 문제의 근본원인은 무명과 무지이다.
찰나 한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이 갈망과 갈애의 불타는 집착이 되어 버린다.
과거의 무명이란 부싯돌의 불티가 솜에 불이 붙어 버리는 엄청난 재화를 만든다.
과거의 원인의 업식의 성질머리가 불씨가 모든 재화의 원인을 만든다.
현재의 말과 행동으로 부터 내생의 원인을 만든다.
부처님법 만나서 현재의 선행과 바라밀 실천으로 미래세의 금자탑을 세운다.
전생관,현생관, 내생관이 불교의 교학적 가르침이다
현재의 한 생각이 가장 중요하다.
욕망과 갈애가 일어났을때 나에게 손실인가 이익인가 먼저 따진다.
나에게 좋은 것인가!
남에게 피해가 되는 것인가!
따져 봐야 한다. 판단의 지혜가 한 생각이다.
지혜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으면 저절로 스스로 자신의 지혜가 열린다.
순간의 충동을 잘 제어하는 것이 바라밀 실천이다.
자신의 과거의 업식을 잘 알아차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관수시고(觀受是苦) 느낌을 깊이 관하면 모든 것이 다 고의 원인임을 알수 있다.
깨어있으면 모든 괴로움은 고가 아니다.
선정을 닦는 것이 무명을 닦는 일이며 고를 건너가는 반야바라밀이다.
자신의 업식,성질머리를 잘 알아차리는 사람이 길을 잘 아는 사람이다.
무지 무명를 타파하면 존재의 본질을 확연히 꽤뚫어 본다.
연기법을 알면 무상과 무아를 체득하여 무명을 타파한다.
이것이 바른 반야지혜이다.
십이 연기법에서 나온 수행법이 계 정 혜 삼학(三學)이다.
계 정 혜 삼학을 닦아서 무명을 타파하면 아라한과을 얻을 수 있다.
무무명 역무 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 노사진 고집멸도 무지 역무득 이무 소득고
보리살타의 반야바리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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