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 임제록 강설-감변(勘辨) 36. 37. 38. 39
36 비구니를 점검하다
師問一尼(사문일니)호되 善來(선래)아 惡來(악래)아 尼便喝(니편할)하니 師拈棒云(사염방운), 更道更道(갱도갱도)하라 尼又喝(니우할)이어늘 師便打(사편타)하다
임제스님이 어느 비구니에게 물었다.
“잘 왔는가? 잘못 왔는가?”
비구니가 “할”을 하자 임제스님이 주장자를 집어 들고 말씀하였다.
“다시 일러보아라. 다시 일러보아.”
비구니가 또 “할”을 하자 임제스님이 곧 바로 후려쳤다.
(강의)
임제의 할이 얼마나 유명했으면 이렇게까지 할이 흔한가.
임제스님은 비구니를 점검하려다가 할만 뒤집어썼다.
비구니도 내친김에 임제스님이 방을 들고 치려고 하는데도 또 할을 하고는 얻어맞는다.
해제소감을 나누는 자리에서 “나는 ‘할’이요”라고 했다는 어느 비구니의 말이 생각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아무리 임제가풍을 표방하는
조계종의 종도들이라 하더라도 남의 영결식에 가서 조사를 하면서는 “할”을 하지는 말라.
비록 축원은 “속히 사바에 돌아오시어 임제문중에서 길이 인천의 안목이 도어 주소서.”
라고 하더라도 “할”은 맞지를 않다.
37 아직 조사의 뜻은 없다
龍牙問(용아문), 如何是祖師西來意(여하시조사서래의)오 師云(사운), 與我過禪版來(여아과선판래)하라 牙便過禪版與師(아편과선판여사)한대 師接得便打(사접득편타)라 牙云(아운), 打卽任打(타즉임타)나 要且無祖師意(요차무조사의)로다 牙後到翠微(아후도취미)하야 問如何是祖師西來意(문여하시조사서래의)오 微云(미운), 與我過蒲團來(여아과포단래)하라 牙便過蒲團與翠微(아편과포단여취미)한대 翠微接得便打(취미접득편타)라 牙云(아운), 打卽任打(타즉임타)나 要且無祖師意(요차무조사의)로다 牙住院後(아주원후)에 有僧(유승)이 入室請益云(입실청익운), 和尙行脚時(화상행각시)에 參二尊宿因緣(참이존숙인연)을 還肯他也無(환긍타야무)아 牙云(아운), 肯卽深肯(긍즉심긍)이나 要且無祖師意(요차무조사의)로다
용아스님이 임제스님께 물었다.
“무엇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나에게 선판을 건네주게.” 하니 용아스님이 바로 선판을 건네 드렸다.
임제스님이 받아서 그대로 내리치시므로 용아스님이 말하였다.
“치기는 마음대로 치십시오. 그러나 아직은 조사의 뜻은 없습니다.”
용아스님이 뒤에 취미스님에게 물었다.
“무엇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나에게 좌복을 건네주게.” 하니 바로 좌복을 건네주었다.
취미스님이 받아들고 그대로 후려치므로 용아스님이 말하였다.
“치기는 마음대로 치십시오. 그러나 아직은 조사의 뜻은 없습니다.”
용아스님이 임제원에 머무르고 있을 때 어떤 스님이 방에 들어와 법문을 청하였다.
“스님께서 행각하실 때 두 큰스님을 찾아뵈었던 일에 대하여 그 분들을 옳다고 인정하십니까?”
“인정한다면 깊이 인정 하지만 아직 조사의 뜻은 없었네.”
(강의)
용아스님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을 가지고 두 분의 큰스님을 점검하였다.
똑 같은 모습이 나타났다. 질문도 대답도 같다.
용아스님이 두 분을 평하는 말이 좋다.
“둘 다 훌륭하긴 하지만 내가 물은 달마가 서쪽에서 오신 뜻과는 거리가 멀다.” 라는 말이다.
관중들에게 달마가 서쪽에서 오신 뜻을 깊이 새겨주었다.
38 경산스님을 점검하다
徑山有五百衆경산유오백중)호되 少人參請(소인참청)이어늘 黃檗令師(황벽영사)로 到徑山(도경산)하고 乃謂師曰(내위사왈), 汝到彼作?生(여도피자마생)고 師云(사운), 某甲到彼(모갑도피)하야 自有方便(자유방편)이니다 師到徑山(사도경산)하야 裝腰上法堂(장요상법당)하야 見徑山(견경산)하니 徑山方擧頭(경산벙거두)라 師便喝(사편할)한대 徑山擬開口(경산의개구)어늘 師拂袖便行(사불수편행)하다 尋有僧問徑山(심유승문경산)호되 這僧適來(자승적래)에 有什?言句(유십마언구)관대 便喝和尙(편할화상)이닛고 徑山云(경산운), 這僧從黃檗會裡來(자승종황벽해리래)하니 ?要知?(이요지마)아 且問取他(차문취타)하라 經山五百衆(경산오백중)이 太半分散(태반분산)하니라
경산문하에 5백 대중이 있었으나 법을 묻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황벽스님이 임제스님을 경산에 가서 보게 하였다.
“그대는 거기에 가서 어떻게 하겠느냐?”
“저가 거기에 가면 저절로 방편이 있겠지요.”
임제스님이 경산에 이르러 걸망도 풀지 않은 채 법당으로 올라가 경산스님을 뵈었다.
경산스님이 막 고개를 들려고 하는데 임제스님이 “할”을 하였다.
경산스님이 무어라고 말하려 하자. 임제스님이 소매를 떨치고 그대로 가 버렸다.
그 즉시 어떤 스님이 경산스님에게
“저 스님이 왔을 때 무슨 말씀이 있었기에 스님에게 대뜸 ‘할’을 하십니까?” 라고 물었다.
“그 스님은 황벽스님 회하에서 왔는데 그대가 알고 싶으면 그에게 직접 물어보아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난 후 경산의 5백 명 대중이 절반이상 흩어져 버렸다.
(강의)
이것은 큰 사건이다. 당시 경산에 누가 살았는지는 모른다.
이쯤 되면 누가 살다가 당한 사건인지 별 의미는 없지만 그렇더라도 보통 일은 아니다.
절강성 항주부에 있는 산이다.
전등록에 기록되어 있는 명안종사들이 많이 주석하였던 곳이다.
그리고 임제선을 많이 드날린 곳이기도 한데 당시에는 눈 밝은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
그곳에 살던 대중의 입장이 되어 그 광경을 본다면 어떤가.
어떤 낯모르는 중이 뜬금없이 나타나서는 “할”을 한 번 하였다.
그러자 5백 명의 대중들이 수런수런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는
삼삼오오로 나뉘어져 서로 서로 상황을 확인한다.
여기 가서 확인하고 저기 가서 확인을 해도 대답은 한결같다.
그렇다면 앞으로 취해야 할 행동은 뻔하다.
모두 주섬주섬 걸망을 챙긴다.
그날로 떠나는 사람이 있고 하루 이틀 머뭇거리는 사람도 있다.
일주일이 지나자 5백 명 중에 절반이상이 흩어져 버렸다.
눈 밝은 사람의 한 번의 “할”은 큰 지진이다. 무서운 태풍이다.
산을 온통 날리는 회오리바람이다.
선종사에도 이런 사건은 없다.
임제할의 위력은 참으로 대단하다.
독자들에게 임제스님의 “할”도 약간 시들해 갈 무렵 큰 폭탄을 하나 터뜨려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임제록을 편찬한 사람의 절묘한 솜씨가 엿보인다.
예술이다. 환상적이다.
39 보화스님의 열반
普化一日(보화일일) 於街市中(어가시중)에 就人乞直?(취인걸직철)하니 人皆與之(인개여지)호대 普化俱不要(보화구불요)라 師令院主(사령원주)로 買棺一具(매관일구)하고 普化歸來(보화귀래)에 師云(사운), 我與汝做得箇直?了也(아여여주득개직철요야)로다 普化便自擔去(보화편좌담거)하야 繞街市叫云(요가시규운), 臨濟與我做直?了也(임제여아주직철요야)니 我往東門遷化去(아왕동문천화거)하리라 市人競隨看之(시인경수간지)하니 普化云(보화운), 我今日未(아금일미)요 來日往南門遷化去(내일왕남문천화거)하리라 如是三日(여시삼일)하니 人皆不信(인개불신)이라 至第四日(지제사일)하야 無人隨看(무인수간)이어늘 獨出城外(독출성외)하야 自入棺內(자입관내)하야 ?路行人釘之(청로행인정지)하니라 卽時傳布(즉시전포)하야 市人(시인)이 競往開棺(경왕개관)하니 乃見全身脫去(내견전신탈거)하고 祇聞空中鈴響(지문공중영향)이 隱隱而去(은은이거)하니라
보화스님이 어느 날 거리에 나가 사람들에게 장삼[直?] 한 벌을 달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매번 장삼을 주었으나 보화스님은 그때마다 필요 없다고 하였다.
임제스님이 원주를 시켜 관을 하나 사오게 한 뒤 보화스님이 들어오자 말씀하였다.
“내가 그대를 위해 장삼을 장만해 두었네.”
보화스님이 관을 짊어지고 나가서 온 거리를 돌면서 “임제스님이 나에게 장삼을 만들어 주셨다.
나는 동문으로 가서 열반에 들겠다.”하고 외쳤다.
사람들이 너도 나도 따라가서 보니 보화스님이 “오늘은 아니다. 내일 남문에서 열반에 들리라.”
이렇게 사흘을 하니 사람들이 아무도 믿지 않았다.
나흘째 되던 날은 따라와서 보려는 사람이 없었다.
혼자 성 밖으로 나가 스스로 관 속으로 들어가서 길가는 행인에게 관 뚜껑에 못을 치게 하였다.
삽시간에 말이 퍼져서 시내 사람들이 쫓아가서 관을 열고 보았다.
그런데 몸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다만 공중에서 요령소리만 은은히 울릴 뿐이었다.
(강의)
보화스님은 정말 불가사의한 인물이다.
인류역사상 이렇게 살다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멋있는 열반은 없을 것이다.
본래 출신성분도 묘연하고 평소에 이상한 행동으로 이름이 나 있는 스님이다.
다른 데 기록이 있어도 임제록의 내용 그대로다.
이 단락은 열 번 스무 번을 읽어도 재미가 있고 신기하다.
마음대로 살다가 마음대로 갔다.
법을 쓰는데도 천하의 임제마저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자유자재하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얼마나 활발발하고 활달무애한가.
원효의 무애가(無碍歌)와 무애행(無碍行)이 어찌 보화를 따를 수 있겠는가.
그렇게 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죽을 때 아프지도 않고, 죽고 나서도 그 거추장스러운 몸뚱이를 감쪽같이 해결해 버렸다.
사람이 죽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또 죽고 나서는 또 얼마나 복잡한가.
참으로 부럽다. 부처님보다도 더 부럽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사람이다.
삼국지에는 장비가 있어서 재미가 있고 수호지에는 흑선풍 이규가 있어서 재미가 있다.
임제록에는 보화스님이 있어서 그 재미와 깊이를 더한다.
그리고 임제스님을 더욱 환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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