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그릇 속에 눈을 담는다 - 벽암록(碧巖錄)
"한 점 녹슬지 않은 은그릇에 깨끗한 눈을 담는다[銀椀裏盛雪]"
참으로 그림같이 아름다운 글귀입니다.
파릉(巴陵)선사는 호남성 파릉현 신개원(新開院)에 살면서 선을 크게 드높인 고승이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에 대한 사적인 기록은 전혀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 파릉선사에게 한 수행자가 찾아와 물었습니다.
"선이란 무엇입니까?"
파릉선사가 대답한 말이 이것입니다.
"은그릇에 눈을 담는 것이지."
흰 은그릇에 흰 눈을 담는 것. 이것이 어떻게 '선의 마음'이 될까요? 논리적인 해석은 이미 옛사람이 해놓았는데, "비슷하면서도 같지 않고, 섞이면서도 구별된다"거나 "비슷하면서도 아니다", "물과 기름은 섞여도 곧 알 수 있다"는 표현들이 그것입니다. 같은 말에 "밝은 달빛으로 백로를 감춘다[明月藏鷺]"와 앞서 소개한 "뱍마가 흰꽃으로 들어간다[白馬入芦花]"가 있습니다.
은그릇과 흰눈은 모두 깨끗합니다. 그런데 이 '깨끗함'은 '깨끗하지 못함'을 염두에 둔 대비적인 가치입니다. 깨끗하지 못한 것을 싫어하고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아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벽암록(碧巖錄)>을 쓴 원오(圓悟)선사는 '칠화팔렬(七花八裂)'이라는 간단한 말로 평을 하여 후대의 사람들에게 오해가 없게 했습니다. '칠화팔렬'이란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조각내어 버리라는 뜻입니다. 깨끗하다는 생각마저도 없애버리하는 것입니다.
흰색을 부정하기 위해 다른 색깔을 사용하는 것은 상대적인 인식입니다. 흰색을 흰색자체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부정을 부정하면 뒤에 남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같은 뜻을 전하는 말에 "산호지 탱착월(珊瑚枝 撑着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달 밝은 밤에 산호 가지들이 이슬을 머금고 있는데, 그 이슬을 달이 비추고 있다는 아름다운 말입니다. 이 아름다운 경치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 그리고 집착하지 않는 마음조차 고집하지 않는 텅 빈 그대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松原泰道
출처 : 忍土에서 淨土로
글쓴이 : 느린 걸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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