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재동자는 자행동녀로부터 남쪽 삼안국(三眼國)에 있는 선견(善見)비구를 찾아가 법을 물으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삼안국에 이르러 이곳 저곳 선견비구를 찾아다니다가 숲 속에서 오가며 거닐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선견비구는 한창 나이에 용모가 아름답고 단정하며, 지혜가 넓어 큰 바다와 같아 여러 경계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며 쓸데없는 움직임과 부질없는 말이 모두 쉬었고 부처님이 행하시던 평등한 경계를 얻었으며, 대비심으로 중생들을 교화하여 잠깐도 버리지 않으며, 일체중생을 이익케하기 위하며, 여래의 법눈을 열어보이기 위하며, 여래가 행하시던 길을 가기 위하여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자세히 살피며 지나가는 것이다.
이 때 선재동자가 선견비구에게 나아가 엎드려 절하고 보살행을 배우고 닦는 법을 가르쳐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선견비구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써 대답하였다.
“선남자여, 나는 나이도 젊었고 출가한 지도 오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이승에서 삼십팔 항하의 모래 숫자만큼이나 되는 부처님 처소에서 청정한 범행(梵行)을 닦았다. 어떤 부처님 처소에서는 하루낮 하루밤 동안, 어떤 부처님 처소에서는 칠일 칠야 동안, 어떤 부처님 처소에서는 반 달·한 달·일년·백 년·만 년·억 년 ·일 겁·불가설 불가설 대겁(大劫)을 지냈다. 그 동안에 묘한 법을 듣고, 그 가르침을 받들어 행하며 모든 서원을 장엄하고, 증득할 곳에 들어가 모든 행을 닦아서 여섯 가지 바라밀다를 만족하였다.
선남자여, 내가 이곳 저곳을 거닐 적에 잠깐 동안에 모든 방위와 세계가 나타났으니 지혜가 청정한 때문이며, 잠깐 동안에 불국토가 깨끗이 장엄되었으니 큰 서원을 성취한 때문이다. 잠깐 동안에 중생의 차별한 행이 나타났으니 십력(十力)의 지혜를 만족한 때문이며, 잠깐 동안에 불가설 불가설 부처님들의 청정한 몸이 앞에 나타났으니 보현의 행원(行願)을 성취한 때문이다. 그리고 잠깐 동안에 세계의 티끌 수와 같은 부처님께 공경 공양하고, 부처님을 법을 받으며, 보살의 수행바다가 앞에 나타나며, 삼매바다가 앞에 나타나게 하는 것 등등은 모두 지혜광명의 서원(誓願)을 성취한 힘 때문이다.
선남자여, 나는 다만 이 ‘보살이 중생의 경계에 따라서 지혜의 등을 밝혀 가는 해탈문(菩薩隨順燈解脫門)’만을 알 뿐이다.”
이와 같이 선견비구가 선재동자에게 설하고 있는 법문은 ‘지혜로써 끊임없이 중생을 교화하는 보살수순등해탈문’이다. 우선 선견비구가 머무르고 있는 국토의 이름이 삼안국(三眼國)인 것은 선견비구가 지혜를 근본으로 해서 살아가고 있음을 나타낸다. 삼안은 지안(智眼)·법안(法眼)·혜안(慧眼)으로서, 모든 것을 분명하게 관하고, 법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판단하는 안목을 가지고 중생을 이롭게 하는 삶을 비유한 것이다. 여기에 비구의 이름이 선견인 것은 삼안으로써 모든 법을 잘 보고 일체중생의 근기를 잘 알아서 시기적절하게 거기에 응해서 교화하여 해탈케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선견비구가 숲속에서 이리저리 오가면서 거닐고 있는 것은 생사의 현실세계에 들어가 중생을 제도하고 있는 뜻을 밝힌 것이다. 이와 같이 현실세계 속에서 지혜를 활용하여 끊임없이 중생의 무명을 밝히는 것이 마치 하나의 등(火登)이 무수한 등에 불을 밝혀 어둠을 몰아내고 광명세계를 열어주는 것과 같기 때문에 보살의 수순등해탈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이도 젊고 출가한 지 오래지 않은 선견비구가 이승에서 무량한 부처님 처소에서 청정한 범행을 닦았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것은 발심할 때에 올바른 지혜가 나타나고, 무명을 타파할 때에 한량없는 악업이 소멸하고 한량없는 지혜가 나타나기 때문에 갠지스강(恒河)의 모래 숫자만큼이나 되는 부처님이라고 하고, 청정한 범행을 닦는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보살행은 이와 같이 청정한 범행을 근본으로 하고 부처님의 행을 본받아 육바라밀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곳 저곳을 거닐 적에 잠깐 동안(一念)에 모든 방위와 세계 내지 불가설 불가설 삼매바다가 앞에 나게 하는 것 등등은 모두 지혜광명의 서원을 성취한 힘 때문이다.”라고 하는 것은 일념중에 일체의 세계를 나타나게 할 수가 있고, 그것을 실제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이 원력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일념은 어떠한 분별이나 차별이 없고 미혹도 없는 지혜의 경계이다. 그러므로 생각 생각(念念)으로 수지(受持)하는 보현의 원력에 의해 지혜로운 경계가 펼쳐지고 깨달음의 밝은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권탄준/금강대 불교문화학부 교수
'화엄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입법계품 30. 구족 우바이의 법문 (0) | 2018.02.18 |
---|---|
[스크랩] 입법계품 29. 자재주 동자의 법문 (0) | 2018.02.18 |
[스크랩] 입법계품 27. 자행동녀의 법문 (0) | 2018.02.18 |
[스크랩] 입법계품 26. 승열 바라문의 법문 (0) | 2018.02.18 |
[스크랩] 입법계품 25. 비목구사 선인의 법문 (0) | 2018.0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