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윳따 니까야(잡)

[스크랩] [상윳따 니까야] 사밋디 경(S1:20) 일부 - 세존의 법

수선님 2018. 3. 4. 13:34

"그러면 어째서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이란 시간이 걸리는 것이고 괴로움과 절망이 가득하며 거기에는 많은 위험이 따른다고 하셨습니까?

그리고 어째서 이 법은 세존에 의해서 잘 설해졌고,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인도하고,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입니까?"

 

(1)

"표현할 수 있는 것(오온)을 인식하는 중생들은

표현할 수 있는 것에 머물러 있나니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철저하게 알지 못하면

죽음의 굴레에 매이게 되도다.

 

그러나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철저하게 알면

표현하는 자를 (더 이상 개념적 존재로) 여기지 않나니

(번뇌 다한) 그에게는 그런 것이 존해하지 않기 때문에

그를 표현할 그 어떤 것도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도다."

 

(2)

"동등하다거나 뛰어나다거나 못하다고 여기는 자

그 때문에 사람들과 논쟁하게 되노라.

이 세 가지 자만심에 흔들리지 않는 자

동등하다거나 뛰어나다는 것 존재하지 않도다."

 

(3)

"헤아림을 버리고 자만심도 버린 그는

여기 (이 세상에서) 정신 물질에 대한 갈애를 자르고

매듭 끊고 근심이 없어 바라는 것 없으니

신들이나 인간들이 여기서나 저 너머서나

천상서나 그 모든 거처에서

그를 찾아보지만 발견하지 못하도다."

 

주)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인식하는 자'에서 '신, 인간, 재가자, 출가자, 중생, 개인, 띳사, 풋사' 등으로 일컬어지는 모든 명칭들이나 모든 말들의 대상인 오온을 두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중생, 사람, 개인, 여자, 남자'라는 이런 인식들을 중생들이 갖고 있기 때문에 '인식하는 자'라 했다.

그래서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을 인식하는 자라 한다.

그러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인식하는 자란 오온에 대해 중생이나 개인 등으로 인식하는 자를 뜻한다.

 

'표현할 수 있는 것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중생은 오온에 여덟 가지 모습으로 머물러 있다는 말이다.

즉 애욕에 물든 자는 애욕을 통해서 머물러 있고, 분노하는 자는 성냄을 통해서,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음을 통해서, 전도된 자는 견해를 통해서, 고질적인 자는 잠재성향을 통해서, 속박된 자는 자만을 통해서, 확고하지 못한 자는 의심을 통해서, 흔들리는 자는 들뜸을 통해 머물러 있다는 뜻이다.

 

"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철저하게 알지 못한다.'는 것은 오온에 대해 세가지 통찰지로 철저하게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세 가지 통찰지는 (1) 안 것의 통달지 (2) 조사의 통달지 (3) 버림의 통달지이다.

무엇이 안 것의 통달지인가? 오온에 대해 철저히 아는 것이다.

무엇이 조사의 통달지인가? 이렇게 안 뒤에 오온에 대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병이라는 등의 42가지 방법으로 조사하는 것을 말한다.

무엇이 버림의 통달지인가? 이렇게 조사한 뒤에 으뜸가는 도에 의해 욕탐을 제거하는 것을 말한다."(주석서 내용)

 

" 이렇게 철저하게 알지 못하는 자는 죽음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이 게송으로 감각적 욕망은 시간이 걸리는 것임을 드러내신 것이다." (주석서 내용)

시간이 걸리는 것과 시간이 걸리지 않는 것은 질문에 나타나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명칭이나 말에 속게 되면 죽음의 굴레에 매이게 된다고 본 게송(1)에서 부처님께서는 강조하신다.

명칭이나 말에 속지 않고 이런 것들은 단지 오온일 뿐임에 사무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오온으로 해체해서 보는 것이 수행의 핵심이다.

이렇게 볼 때 오온 각각의 무상이나 고나 무아가 드러나게 되고, 이처럼 오온의 무상이나 고나 무아에 사무칠 때 염오-이욕-소멸 혹은 염오-이욕-해탈-구경해탈지가 드러나서 깨달음을 실현하고 해탈 열반을 실현하게 된다.

 

" '표현하는 자를 (더 이상 개념적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이렇게 세 가지 통찰지로 오온을 철저하게 알게 된 번뇌 다한 비구는 표현하는 자를 두고 인간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표현하는 자를 두고 띳사라거나 풋사라는 등의 이름이나 족성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번뇌 다한 '그에게는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를 표현할 그 어떤 것도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그를 두고 애욕에 물들었다거나 성냄에 휩싸였다거나 어리석음에 빠졌다는 등으로 말 할 수 있는 그런 근거가 번뇌 다한 자에게는 없다는 말이다." (주석서 내용)

 

'뛰어나다', '동등하다', '못하다'라는 이 세 가지는 세 가지 자만이라 불리고 본 게송에서 처럼 '자만심'이라고도 불린다.

 

주석서에 의하면 '헤아림'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통찰지를 뜻하고 둘째는 산수 계산을 뜻하고 셋째는 개념을 뜻한다고 한다.

본 게송에서는 개념의 뜻으로 쓰였다고 주석서는 설명하고 있다.

" '헤아림을 버렸다'는 것은 아라한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개념을 제거하고 버렸다는 뜻이다."

여기서 헤아림은 '사량 분별하는 인식이라는 헤아림'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 '여기서나 저 너머서나'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나라는 뜻이다." (주석서 내용)

 

- '상윳따 니가야(각묵 스님 옮김, 초기불전연구원)' 제1권의 <천신 상윳따>(S1) 중에서 -

출처 : 붓다 담마
글쓴이 : 호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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