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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중론 제2권-7. 삼상을 관찰하는 장[觀三相品]

수선님 2018. 3. 11. 12:37

중론 제2-7. 삼상을 관찰하는 장[觀三相品]

 

[] 경전에서 유위법에는 발생머묾소멸의 3()이 있다고 말한다. 모든 사물은 발생에 의해 발생하고, 머묾에 의해 머물며, 소멸에 의해 소멸한다. 그러기에 모든 법이 있는 것이다.

[]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3()에는 확정된 것이 없기 때문이다. 3상은 유위(有爲)이면서 유위를 짓는 것인가, 무위(無爲)이면서 유위를 짓는 것인가?

 

만일 발생이 유위라면 3상이 있을 것이네.

만일 발생이 무위라면 어찌 유위의 상이라 하겠는가? (1)

 

만일 발생이 유위법이라면 발생머묾소멸의 3()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상반되기 때문이다. ‘상반된다,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발생은 발생하는 법()과 상응하고 머묾은 머무는 법과 상응하고 소멸은 소멸하는 법과 상응한다. 법이 발생할 때는 머묾과 소멸이 있어서는 안 된다. 마치 밝음과 어둠이 함께하지 않는 것과 같이 상반되는 법들이 일시에 있다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발생은 유위법일 수가 없다. 머묾과 소멸도 이와 같다.

[] 만일 발생이 유위법이 아니고 무위법이라면 어떤 과실이 있는가?

[] 만일 발생이 무위법이라면 어떻게 유위법을 위해 상()을 짓겠는가? 왜냐 하면, 무위법은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유위법이 멸한 것이기에 무위법이라고 한다. 그래서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 것을 무위의 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 자기의 상이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무[無法]는 법()을 위해서 상을 지을 수가 없다. 마치 토끼의 뿔거북이의 털 따위가 법을 위해 상을 지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발생은 무위법이 아니다. 머묾과 소멸도 이와 같다.

 

3()은 모여 있든 떨어져 있든 상을 띠는 일[所相]이 있을 수 없네.

어떻게 동일한 장소와 동일한 시간에 3상이 있겠는가? (2)

 

또 이 발생과 머묾과 소멸이 각각 유위법을 위해 상()을 짓든, 한데 뭉쳐서 유위법을 위해 상을 짓든 둘 모두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일 각각이 상을 짓는다고 말한다면 동일한 장소에 어떤 상은 있고 어떤 상은 없을 것이다. 발생할 때는 머묾과 소멸이 없고, 머물 때는 발생과 소멸이 없으며, 소멸할 때는 발생과 머묾이 없다. 만일 한데 뭉쳐서 상을 짓는다고 말한다면 서로 상반되는 법()인데 어떻게 동일한 시간에 함께하겠는가?

만일 3상에 다시 3상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일 발생과 머묾과 소멸에 다시 유위의 상()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무한이 되네. 없다면 유위가 아니네. (3)

 

만일 발생머묾소멸에 다시 유위의 상이 있다고 말한다면, 발생에 다시 발생이 있게 되고 머묾이 있게 되고 소멸이 있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3상은 다시 상이 있게 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무한이 된다. 만일 다시 (유위의) 상이 없다면, 이 삼상은 유위법이라 하지 못할 것이며 또 유위법을 위해 상을 짓지 못할 것이다.

[] 그대가 3상이 무한이 된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발생머묾소멸은 유위법이라 하더라도 무한이 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발생한 발생의 발생[生生]은 그 근본 발생[本生]을 발생하게 하고

발생한 근본 발생은 다시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하네. (4)

 

()이 발생할 때는 자체를 포함해서 일곱 법이 함께 발생한다. 첫째는 법, 둘째는 발생, 셋째는 머묾, 넷째는 소멸, 다섯째는 발생의 발생[生生], 여섯째는 머묾의 머묾[住住], 일곱째는 소멸의 소멸[滅滅]이다. 이 일곱 법 중 근본 발생은 그 자체를 제외한 여섯 법을 발생하게 한다. 발생의 발생은 근본 발생[本生]을 발생하게 하고 근본 발생은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 그러므로 3상은 유위법이라 하더라도 무한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만일 이 발생의 발생이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고 말한다면

발생의 발생은 근본 발생에서 발생하는데 어떻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5)

 

만일 이 발생의 발생[生生]이 근본 발생[本生]을 발생하게 한다면 이 발생의 발생은 근본 발생에서 발생한다고 할 수 없다. 왜 그러한가? 이 발생의 발생이 근본 발생에서 발생하는데 어떻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만일 이 근본 발생이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고 말한다면

근본 발생은 그것에서 발생하는데 어떻게 발생의 발생을 발생할 수 있겠는가? (6)

 

또 만일 근본 발생이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고 말한다면 이 근본 발생은 발생의 발생에서 발생한다고 할 수 없다. 왜 그러한가? 이 근본 발생은 발생의 발생에서 발생하는데 어떻게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발생의 발생의 법()은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지만 지금의 발생의 발생은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없다. 발생의 발생이 아직 자체가 없는데 어떻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근본 발생은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없다.

[] 이 발생의 발생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전에도 아니고 후에도 아니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다. 발생의 발생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을 뿐이다.

[]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일 발생의 발생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고 말한다면

발생의 발생도 아직 있지 않은데 어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7)

 

만일 발생의 발생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발생의 발생이) 아직 있지 않다. 그러므로 발생의 발생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없다.

 

만일 근본 발생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고 말한다면

근본 발생도 아직 있지 않은데 어찌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하겠는가? (8)

 

또 만일 이 근본 발생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직 (근본 발생이)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근본 발생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없다.

 

[] 등불이 자기를 비추고 다른 것도 비추듯이

발생도 이와 같이 자기를 발생하게 하고 다른 것도 발생하게 하네. (9)

 

등불이 어두운 방으로 들어올 때 사물들을 밝게 비추고 자기도 비추듯이, 발생도 이와 같이 다른 것을 발생하게 하고 자기도 발생하게 한다.

[]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등불 자체에 어둠이 없고 (등불이) 놓여 있는 곳에도 어둠이 없네.

어둠을 없애는 것을 비춤이라 하네. 어둠이 없다면 비춤도 없네.(10)

 

등불 자체에 어둠이 없고 밝음이 미치는 곳에도 어둠이 없다. 밝음과 어둠은 상반되기 때문이다. 어둠을 없애기에 비춤이라 한다. 어둠이 없다면 비춤도 없다. 어떻게 등불이 자기를 비추고 다른 것도 비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 이 등불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을 때는 비추지 않는다. 또한 이미 발생했을 때도 비추지 않는다. 오직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자기를 비출 수 있고 다른 것도 비출 수 있다.

 

[] 어떻게 등불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어둠을 없앨 수 있는 것일까?

이 등불이 처음 발생하고 있을 때는 어둠에 미칠 수 없네. (11)

 

등불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란 반은 이미 발생했지만 반은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등불 자체가 아직 성취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어둠을 없앨 수 있겠는가? 또 등불은 어둠에 미칠 수 없다. 마치 사람이 도둑을 마주쳤을 때 쫓아낸다고 하듯이. 만일 등불이 어둠에 다다르지 않았는데도 어둠을 없앨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일 등불이 아직 어둠에 미치지 않았는데 어둠을 없앨 수 있다면

등불이 이곳에 있을 때 모든 곳의 어둠을 없애리라. (12)

 

만일 등불이 힘을 갖고 있어서 어둠에 다다르지 않고서도 어둠을 없앨 수 있다면 이곳에서 타고 있는 등불이 모든 곳의 어둠을 없앨 것이다. (이곳의 어둠에든 모든 곳의 어둠에든) 두 곳에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등불은 자기를 비추고 다른 것을 비추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만일 등불이 자기를 비추고

다른 것도 비출 수 있다면

어둠도 자기를 어둡게 하고

다른 것도 어둡게 하리라. (13)

 

만일 등불이 어둠과 상반되기에 자기를 비추고 다른 것도 비출 수 있다면, 어둠 또한 등불과 상반되기에 자기를 덮고 다른 것도 덮을 것이다. 만일 어둠이 등불과 상반되는데도 자기를 덮고 다른 것도 덮을 수 없다면, 등불 또한 어둠과 상반되기에 자기를 비추고 다른 것도 비추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등불의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발생의 인연을 타파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설명하겠다.

 

만일 이 발생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자기를 발생하게 하겠는가?

만일 이미 발생한 것이 자기를 발생하게 한다면,

이미 발생했는데 어째서 발생하는 작용을 하겠는가? (14)

 

이 발생이 스스로 발생하고 있을 때 이미 발생한 것이 발생하는가,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하는가? 만일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한다면, ()이 없는 것인데 법이 없는 것이 어떻게 스스로 발생할 수 있겠는가? 만일 이미 발생한 것이 발생한다면, 이미 성립한 것이므로 다시 발생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는다. 마치 이미 만들어진 것은 다시 만들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 만일 이미 발생한 것과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한다면, 이 둘은 모두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이 있지 않다. 그대는 앞에서 발생은 등불처럼 자기를 발생하게 하고 다른 것도 발생하게 한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머묾과 소멸도 이와 같다.

발생은 이미 발생한 것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며,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하는 것도 아니며,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하는 것도 아니네.

감과 옴에서 이미 답했네. (15)

 

발생이란, 뭇 연이 화합해서 발생이 있는 것이다. 이미 발생한 것에는 지음[]이 없기에 발생이 없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에도 지음이 없기에 발생이 없다.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도 지음이 없기에 발생이 없다. 발생이 없이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을 얻을 수 없으며,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 없이 발생을 얻을 수도 없다. 어떻게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하겠는가? 이것은 감과 옴1)에서 이미 답했다.

이미 발생한 법()은 발생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이미 발생한 것이 다시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전개되면 무한이 된다. 마치 이미 지어진 것이 다시 지어지듯이. 또 이미 발생한 법이 다시 발생한다면 어떤 발생에 의해 발생하는 것인가? 이 발생[生相]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는데 이미 발생한 것을 발생하게 한다면, 말한 것을 스스로 어기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발생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는데 그대는 발생을 말했기 때문이다. 만일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을 발생이라 말한다면, ()은 발생한 것이 발생하는 것이거나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하는 것일 터인데, 그대는 앞에서 이미 발생한 것이 발생한다고 말했으니, 이것은 확정되지 않는다. 또 마치 이미 탄 것은 다시 타지 않고 이미 간 것은 다시 가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이미 발생한 것은 발생하지 않는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도 발생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만일 법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면 발생의 연()과 화합할 것이다. 만일 발생의 연과 화합하지 않는다면 법이 발생하지 않는다. 만일 법이 발생의 연과 아직 화합하지 않았는데 발생한다면, 지음[作法]이 없이 짓게 되고, 탐욕이 없이 탐욕을 내게 되고, 증오가 없이 증오하게 되고, 무지[癡法]가 없이 무지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다면 모두 세간의 법을 파괴한다. 그러므로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은 발생하지 않는다. 또 만일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이 발생한다면, 세간의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들이 모두 모든 범부를 생기게 할 것이며, 아직 발생하지 않은 보리(菩提)가 지금 보리의 괴멸하지 않는 법을 생기게 할 것이며, 아라한은 번뇌가 없는데 지금 번뇌를 생기게 할 것이며, 토끼 등은 뿔이 없는데 지금 모두 (뿔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도 발생하지 않는다.

[]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은 발생하지 않는다면, 아직 연[]이 없고 지음[]이 없고 짓는 자[作者]가 없고 시간이 없고 장소 등이 없기 때문에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연이 있고 지음이 있고 짓는 자가 있고 시간이 있고 장소 등이 있다면 화합하기 때문에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만일 모든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들은 다 발생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 만약 법에 연이 있고 시간이 있고 장소 등이 있어서 화합하기에 발생한다고 한다면, 미리 있어도 발생하지 않고 미리 없어도 발생하지 않고 (미리) 있으면서 없어도 발생하지 않는다. 세 가지는 앞에서 이미 타파한 바 있다. 그러므로 이미 발생한 것은 발생하지 않으며,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은 이미 발생한 부분과 아직 발생하지 않은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이 중) 이미 발생한 부분이 발생하지 않으며 아직 발생하지 않은 부분도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앞에서 답한 바와 같다. 또 만일 발생이 없이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할 것이다. 그러나 발생이 없이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또 만일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두 가지 발생의 과실이 있다. 하나는 발생한다할 때의 발생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라 할 때의 발생이다. 둘 모두 옳지 않다. 어찌 두 발생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또 발생[生法]이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면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없다.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없는데 발생이 어디에 의지하겠는가? 그러므로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한다고 말할 수 없다.

이렇게 궁구해 보아도 이미 발생한 것은 발생하지 않고, 아직 발생하지 발생하지 않은 것은 발생하지 않고, 지금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이 성립하지 않고, 발생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머묾과 소멸도 성립하지 않는다. 발생머묾소멸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유위법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이미 간 것아직 가지 않은 것지금 가고 있는 것에서 이미 답했네라고 말한 것이다.

[] 나는 이미 발생한 것이 발생한다거나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한다거나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한다고 단정해서 말하지 않았다. 그저 연들이 화합하기에 발생한다고 말했을 따름이다.

[] 그대가 비록 이렇게 말했을지라도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일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이미 성립하지 않는데

어떻게 연()들이 화합하는 그 때에 발생을 얻을 수 있겠는가? (16)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타파했다. 그대는 지금 무엇 하러 다시 연들이 화합하기에 발생한다고 말하는가? 뭇 연()이 다 갖추어졌든 다 갖추어지지 않았든 모두 발생과 동일하게 타파한다.

 

만일 법()이 뭇 연()에 의해 발생한다면 이는 적멸[寂滅性]이네.

그러므로 발생과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 이 둘은 모두 적멸이네. (17)

 

뭇 연()에서 발생한 법()은 자성(自性)이 없기에 적멸이다. 적멸이란 이것이 없고 저것이 없는, ()이 없는 것을 말한다. 언설의 길이 끊어져 있고 희론이 소멸해 있는 것이다. 뭇 연()이란 실을 연해서 베가 있고 왕골을 연해서 돗자리가 있는 것 같은 것을 말한다. 만일 실 자체에 확정된 자성[定相]이 있다면 삼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다. 만일 베 자체에 확정된 자성 있다면 실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실에서 나와 베가 있으며 삼에서 나와 실이 있다. 그러므로 실에도 확정된 자성이 없고 베에도 확정된 자성이 없다. []과 장작[可燃] 같은 것도 연들이 화합해서 형성된 것이기에 자성(自性)이 없다. 장작이 있지 않기에 불도 있지 않다. 불이 있지 않기에 장작도 있지 않다. 모든 법()이 이와 같다. 그러므로 연들에서 발생하는 법은 자성이 없다. 자성이 없기에 공()하다. 아지랑이에 실체가 없는 것과 같다. 그러기에 게송에서 발생과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 이 둘은 모두 적멸이다고 말한 것이다.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비록 그대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발생[生相]을 성립시키고자 할지라도 모두 희론이지 적멸인 것은 아니다.

[] 삼세의 구별이 확정되어 존재한다. 미래세의 법()은 발생의 인과 연들을 얻으면 발생한다. 그런데 왜 발생하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 만일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이 있기에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이 법이 미리 이미 있는데 어찌 다시 발생을 쓰겠는가? (18)

 

만일 미래세에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이 있어서 발생한다면, 이 법은 미리 있는 것인데 어디에 다시 발생을 쓰겠는가? 법이 (미리) 있다면 다시 발생하지 않는다.

[] 비록 미래세에 있어서 현재의 상()과 같지 않을지라도 그래도 현재의 상이기에 발생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 현재의 상은 미래세에는 없다. (현재의 상이) 없는데 어떻게 미래세의 발생이 발생하게 한다고 말하겠는가? (현재의 상이) 있다면 미래세의 법이 아니라 현재세의 법이라 해야 할 것이다. 현재세의 법은 다시 발생하지 않는다. 두 가지 모두 발생이 없기에 발생하지 않는다.

또 그대는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하며 또한 다른 것을 발생하게 한다고 말한다. 이제 다시 설명하겠다.

 

 

만일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하며 이것이 발생할 것을 갖는다면

어떻게 다시 발생이 있어서 이 발생을 발생할 수 있겠는가? (19)

 

만일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을 발생하게 하며 다른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면, 이 발생을 어떤 것이 다시 발생할 수 있겠는가?

 

만일 다시 발생이 있어서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면 무한이네.

발생을 발생하게 하는 것 없이 발생이 있다면 법()은 모두 스스로 발생하는 것이네. (20)

 

만일 발생이 다시 발생한다면 발생은 무한이다. 만일 이 발생이 다시 발생하게 하지 않아서 스스로 발생한다면, 모든 법들 또한 다 스스로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존재하는 법()은 발생하지 않네. 존재하지 않는 법도 발생하지 않네.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법도 발생하지 않네. 이 이치는 앞에서 설명했네. (21)

 

무릇 발생이 있다 하면, 존재하는 법()에 발생이 있든가 존재하지 않는 법에 발생이 있든가,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법에 발생이 있든가이다. 이것은 모두 옳지 않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했다. 이 세 가지 외에 다시 발생이 있지 않다. 그러므로 발생하지 않는다.

 

만일 법()이 소멸하는 때라면 이 때에는 발생하지 않네.

만일 법이 소멸하지 않는다면 이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네. (22)

 

또 만일 멸상(滅相)의 법이라면 이 법은 발생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두 상()은 상반되기 때문이다. 하나는 멸상이니, ()이 소멸한다는 것을 안다. 다른 하나는 생상(生相)이니, 법이 발생한다는 것을 안다. 두 상은 상반되는 법이므로 동시에 있다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멸상의 법은 발생하지 않는다.

[] 만약 멸상의 법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멸상이 없는 법이 발생할 것이다.

[] 모든 유위법은 찰나찰나에 소멸하기에 소멸하지 않는 법이란 없다. 유위법 없는, 확정된 자성의 무위법은 없다. 무위법은 단지 이름[名字]만이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소멸하지 않는 법()을 말한다면 절대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 만약 법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머물고 있을 것이다.

 

[] 아직 머물지 않은 법()은 머물지 않네. 이미 머문 법도 머물지 않네.

지금 머물고 있는 법도 머물지 않네. 발생이 없는데 어떻게 머묾이 있겠는가? (23)

 

아직 머물지 않은 법()은 머물지 않는다. 아직 머묾[住相]이 없기 때문이다. 이미 머문 법도 머물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이미 머묾이 있었기 때문이다. 감이 있기에 머묾이 있다. 만일 머묾이 이미 있었다면 다시 머물지 않는다. 지금 머물고 있는 것도 머물지 않는다. 이미 머문 것과 아직 머물지 않은 것 없이 다시 지금 머물고 있는 것은 있지 않다. 그러므로 또한 머물지 않는다. 이와 같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머묾을 구해 보아도 머묾을 얻을 수 없다. 그러니 발생이 없다. 발생이 없는데 어떻게 머묾이 있겠는가?

 

만일 법()이 소멸하고 있을 때라면 이것은 머물지 않네.

만일 법이 소멸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네. (24)

 

또 만일 멸상의 법이라면 이 법에는 주상(住相)이 없다. 왜 그러한가? 한 법에 상반되는 두 상()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멸상(滅相)이고 또 하나는 주상(住相)이다. 동일한 시간 동일한 장소에 주상과 멸상이 있다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멸상의 법()에 주상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 만일 법이 소멸하지 않는다면 머물고 있을 것이다.

[] 소멸하지 않는 법은 없다. 왜 그러한가?

 

존재하는 모든 법()들은 모두 늙음과 죽음의 상()을 갖고 있네.

존재하는 법이 늙음과 죽음이 없이 머물고 있는 것은 정녕 볼 수 없네. (25)

 

모든 법은 발생할 때 무상(無常)이 항상 쫒아 다닌다. 무상에 둘이 있다. 늙음과 죽음이다. 이와 같이 모든 법에는 항상 늙음과 죽음이 있기에 머물고 있을 때가 없다.

 

머묾은 자기에 의해서 머물지 않네. 다른 것에 의해서도 머물지 않네.

발생이 자기에 의해서 발생하지 않고 다른 것에 의해서도 발생하지 않듯이. (26)

 

또 머무는 법()이 있다면 자기에 의해서 머무는가, 다른 것에 의해서 머무는가? 두 가지 모두 옳지 않다. 자기에 의해서 머문다면 상주하는 것이다. 모든 유위법은 연()들에서 발생한다. 만일 머무는 법()이 자기에 의해서 머문다면 유위라고 할 수 없다. 만일 머묾이 자기에 의해서 머문다면 법()도 자기에 의해서 머물 것이다. 마치 눈이 자기를 볼 수 없듯이 머묾도 그러하다. 만약 다른 것에 의해서 머문다면, 머묾에 다시 머묾이 있는 것이

니 이것은 무한이 된다. 또 다른 법()에서 다른 것[異相]이 생기는 것을 본다. 다른 법을 연하지 않고서는 다른 것을 얻을 수 없다. 다른 것은 확정된 자성[定性]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것에 의해서 머문다는 것은 옳지 않다.

[] 만일 머물지 않는다면 소멸할 것이다.

[] 소멸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이미 소멸한 법()은 소멸하지 않네. 아직 소멸하지 않은 법도 소멸하지 않네.

지금 소멸하고 있는 법도 소멸하지 않네. 발생이 없는데 어떻게 소멸이 있겠는가? (27)

 

이미 소멸한 법()은 소멸하지 않는다. 이미 소멸했기 때문이다. 아직 소멸하지 않은 법도 소멸하지 않는다. 멸상(滅相)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소멸하고 있는 것도 소멸하지 않는다. 둘 없이 다시 소멸하고 있는 것은 없다. 이와 같이 궁구해 보아도 소멸하는 법()에는 발생이 없다. 발생이 없는데 어떻게 소멸이 있겠는가?

 

만일 법이 머문다면 이것은 소멸하지 않을 것이네.

만일 법이 머물지 않는다면 이것도 소멸하지 않을 것이네. (28)

 

또 만일 법이 머문다면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주상(住相)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머무는 법이 소멸한다면 두 상이 있게 될 것이다. 주상(住相)과 멸상(滅相)이다. 그러므로 머묾 속에 소멸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마치 태어남과 죽음이 동시에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만약 법이 머물지 않는다면 또한 소멸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주상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주상이 없다면 법이 없다. 법이 없는데 어떻게 소멸이 있을 것인가?

이 법은 이 때에, 이 때에 있는 대로 소멸하지 않네.

이 법은 다른 때에, 다른 때에 있는 대로 소멸하지 않네. (29)

 

법에 멸상이 있다면 이 법은 자기 상태에 의해서 소멸하는가, 다른 상태에 의해서 소멸하는가? 두 가지 모두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예를 들어 우유는 우유일 때에 소멸하지 않는다. 우유일 때 있는 대로 우유의 상태가 정해져서 머물기 때문이다. 우유가 아닐 때에도 소멸하지 않는다. 우유가 아니라면 우유가 소멸한다고 말할 수 없다.

 

모든 법들의 생상을 얻을 수 없네.

생상이 있지 않으니 멸상도 있지 않네. (30)

또 앞에서 궁구한 바와 같이 모든 법()의 생상(生相)은 얻을 수가 없다. 그 때에 멸상이 없다. 발생을 타파했기에 발생이 없다. 발생이 없는데 어떻게 소멸이 있겠는가?

만약 그대가 주장하기를 여전히 그치지 않는다면, 이제 다시 설명해서 인과 연들을 파괴하는 것을 타파하겠다.

 

만일 법()이 존재한다면 이것에는 소멸이 없네.

한 법에 존재와 비존재가 있을 수 없네. (31)

 

법이 존재할 때 멸상을 구할 수 없다. 왜 그러한가? 어떻게 한 법에 존재와 비존재가 있을 수 있겠는가? 마치 빛과 그림자는 장소를 같이하지 않는 것과 같다.

 

만일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것에는 소멸이 없네.

마치 제2의 머리가 없기에 자를 수 없는 것처럼. (32)

 

또 만약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멸상이 없다.

마치 제2의 머리와 제3의 손이 없기에 자를 수 없는 것처럼.

 

법은 자기에 의해서 소멸하지 않네.

다른 것에 의해서도 소멸하지 않네.

자기에 의해서 발생하지 않고

다른 것에 의해서도 발생하지 않듯이. (33)

 

또 앞에서 생상(生相)에 관해 말할 때 발생은 자기로부터 발생하지 않고 다른 것으로부터도 발생하지 않는다고 한 것과 같다. 만일 자기로부터 발생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모든 사물은 뭇 연()에서 발생한다. 손가락 끝이 자기를 만질 수 없듯이, 그렇듯이 발생은 자기로부터 발생할 수 없다. 다른 것으로부터 발생한다는 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발생이 아직 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부터 발생하지 않는다. 이 발생이 있지 않기 때문에 자체(自體)가 없다. 자체가 없기에 다른 것도 없다. 그러므로 다른 것으로부터 발생한다는 것도 옳지 않다. 소멸 또한 그와 같다. 자기에 의해서 소멸하지 않고 다른 것에 의해서도 소멸하지 않는다.

 

발생과 머묾과 소멸이 성립하지 않기에 유위가 있지 않네.

유위법이 없는데 어떻게 무위가 있을 수 있겠는가? (34)

 

또 그대는 앞에서 발생과 머묾과 소멸이 있기에 유위법이 있으며 유위법이 있기에 무위법이 있다고 말했다. 이제 이치에 맞게 궁구해 보건대 3()은 얻을 수가 없다. 어떻게 유위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앞에서 상()이 없는 법()은 없다고 말한 바와 같다. 유위법이 없는데 어떻게 무위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무위의 상은 발생하지 않음머물지 않음소멸하지 않음이다. 유위의 상이 그쳤기에 무위의 상이라 한다. 무위 자체에는 별도의 상이 없다.

이 세 가지 상3)에 의지해서 무위의 상이 있는 것이다. 가령 불[]에는 뜨거움의 상이 있고 땅[]에는 단단함의 상이 있고 물[]에는 차가움의 상이 있지만 무위는 그렇지 못하다.

[] 만일 이 발생머묾소멸이 필경 있지 않은 것이라면 어떻게 논서에서 이름을 얻을 수 있는가?

 

[] 환영과 같고 꿈과 같고 건달바성(乾闥婆城)과 같이

말한바 발생과 머묾과 소멸은 그 상()이 또한 이와 같네. (35)

 

생상과 주상과 멸상은 확정된 것[決定]이 없다. 범인(凡人)은 탐착(貪著)해서 확정된 것이 있다고 말한다. 성인들께서는 연민을 품고 그 전도(顚倒)를 그치게 하고자 다시 그 탐착된 이름[名字]을 갖고서 말한다. [語言]은 동일하지만 그 의도[]가 다르다. 이와 같이 발생과 머묾과 소멸의 상()을 말하는 것이기에 논박이 있을 수 없다. 마치 환영이나 화작(化作)된 것과 같으니, 그 유래하는 바를 물어 따질 수 없으며, 그 속에 슬픔과 기쁨의 표상[]이 있을 수 없다.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일 따름이다. 꿈에 보이는 것과 같은 것은 실체를 구할 수 없다. 건달바성과 같은 것은 해가 떠오를 때 나타나는 것이기에 실체가 없다. 그저 실체가 없이 이름을 쓰는 것일 뿐이니 오래지 않아 소멸한다. 발생과 머묾과 소멸도 이와 같다. 범부는 분별해서 있다고 하지만 지혜로운 이는 구하고자 하여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출처 : 청산백운
글쓴이 : mangu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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