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망스리 자심을 취하기에
그러므로 마음이 나타나나니라.
외법(外法)은 보여짐도 없나니
그러므로 ‘유심(唯心)이라’ 말하노라.
근본식(本識)은 다만 마음이며
뜻은 능히 경계를 생각하여
능히 모든 경계를 취하나니
그러므로 나는 ‘유심이라’ 말하노라.
심(心)은 항상 무기(無記)인 법이며
의(意)는 두 갓으로 모양 취하네
현재 법을 취함은 이 식(識)이니
그는 선(善)과 불선(不善)이라네.
두 가지 식의 모양 떠난 것이
이가 제일의문(第一義門)이라네
三승(乘)의 차별을 말하였으나
고요함은 이러한 모양 없다네.
만일 마음이 고요함에 머무르고
부처님의 땅에서 행하는 것이라면
이는 과거 부처님의 말씀하신 것이요
현재와 미래도 또한 이와 같다네.
처음 七지(地)는 마음의 땅이며
고요함은 제八지(地)라네
二지(地)는 이 행(行)의 곳이요
그밖에 지위는 아(我)의 법이라네.
스스로 안의 몸이 청정한 것은
이 아(我)가 자재한 땅이다
자재하고 구경(究竟)인 곳의
아카니탁천에서 나타난다네.
여러 불꽃들이
광명을 내는 것과 같아서
가지가지 마음으로 좋아하기에
변화로 삼계를 지었나니라
혹 중생을 교화할 수 있으면
변화로 三유(有)를 지어내고
그 곳에서 모든 법 말하나니
이 나의 자재한 처지었네.
지위엔 시절도 없으며
국토의 전변(轉變)함 또한 그러하여
심지법(心地法)을 초과 하였나니
이는 고요한 과(果)에 머무름이네.
사실 없는데 사실이라 하여
그 가지가지를 보나니
어리석은 이의 전도한 취착이며
이가 가지가지 전도(顚倒)라네.
만일 분별이 없다면
사법 있어도 상응(相應)하지 않으리
심(心)은 모든 색(色)이 아니나니
그러므로 분별 없나니라.
모든 선(善)과 무량(無量)과
무색(無色)의 삼매임이여,
모든 상(相)은 필경 멸하나
그러므로 모음속엔 없나니라.
스로타판나[須陀洹]의 과(果)법과
오가고 돌아오지 않는 이[往來, 不還]와
또한 아라한의 과위들이여,
모두 마음 미(迷) 했다네.
공(空)과 무상(無常)과 찰나를
어리석은 이 유위(有爲)라 분별하네
강물과 종자의 비유로서
찰나의 뜻을 분별하나니
찰나는 분별이 없어서
모든 짓는 바 법을 떠났다
일체 법이 생김 아니기에
나는 찰나의(義)라 말하노라.
유(有)와 무(無)를 생김이라 말함은
상카야[僧法]등의 허망한 말이요
일체 법이 무기(無記)라 함도
또한 그이들의 말이었네.
네 가지 기법(記法)이 있나니
일왕답(一往答)과 반문(反問)이며
분별차별답(分別差別答)과 묵답(默答)인데
그는 외도를 막으려고 함이네.
세체(世諦)는 일체 유(有)이고
제일의체(第一義諦)는 무(無)이다.
실체(實諦)는 모양이 없나니
이 가 제일의체라네.
허망한 법임을 보았기에
그러므로 세체(世諦)를 말하였다.
언어(言語)에 인하여 생긴 것이니
이와 같은 실체는 없다네.
사법 없는데 말만이 있음이여,
세체(世諦) 가운데엔 실로 없나니
이 곧 전도(顚倒)인 사법이라
보여짐도 또한 없다네.
만일 사법이 전도로서 있다면
고요함엔 필경 없으리라
전도한 사법에 의하여
모든 법 생김을 본 것이라네.
필경엔 결정코 없나니
곧 체상이란 없나니라
보는바 가지가지 법은
훈습인 번뇌로 생긴 것이네.
마음이 바깥 경계에 미혹하여
전경(前境)을 취착하나니
분별이 분별 없어서
이 공(空)이며 실상(實相)법이라네.
눈홀림인 여러 모양 같고
나무잎을 금빛이라 함과 같아서
이 보여지는 사람은 보나니
마음의 무명(無明)으로 훈습함이니라.
성인[聖]은 미(迷)를 보지 않으며
중간에 진실도 보지 않아
미혹이 곧 진실이니
진실은 곧 중간이기 때문이다.
모든 미혹 멀리 떠나고서
만일 능히 모든 상(相)을 낸다면
곧 이 그 미혹이니
눈병 같아 깨끗함 아니라네.
눈병으로 털바퀴 보듯이
미혹에 의해 모든 법 취하나니
모든 경계 가운데에서
어리석게 이 법이라 취착하네.
모든 법이 털바퀴 같으며
아지랑이를 물로 미혹함이어서
三계(界)도 꿈과 눈홀림 같나니
수행하여 해탈 얻어야 하리.
분별과 가분별(可分別)이
능히 분별을 내며
박(縛)과 가박(可縛)과 인(因)이
여섯 가지 해탈의 인(因)이라네.
지위와 모든 체(諦)도 없으며
국토와 및 화불(化佛)도 없고
불(佛)과 벽지와 성문은
오직 마음에서 분별함이라네.
인체와 五음(陰)은
모든 인연과 미진(微塵)과
훌륭한 사람이 자재(自在)로 지었다 함은
오직 이 마음의 분별이라네.
마음은 일체 곳에 두루했나니
일체 곳이 모두 마음이다.
마음을 잘 관찰하지 못한 탓이요
심성(心性)은 모든 상(相)이 없나니라.
五음 가운데엔 아(我)가 없고
아(我) 가운데엔 五음이 없다.
이 법을 없다고 분별하나
저 법은 없는 것도 아니니라.
어리석은 이의 분별함과 같이
일체 법이 있다하여
이와 같이 실로 있다고 보나니
일체 진실임을 응당 보리라.
일체 법이 만일 없을진대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으리.
어리석은 이는 이와 같이 보나니
저 법은 이와 같지 않나니라.
미혹으로 분별하는 상(相)은
이 타력(他力)의 분별이니,
저 상(相)의 있는바 이름이란
이 분별상(分別相)이라 이름 하나니라.
명상(名相)은 이 분별이니
인연과 사법이 화합한 것이다
만일 저 마음을 내지 않으면
이가 제일의(第一義)인 모양이라네.
보신불(報身佛)과 실체불과
변화한 바 부처님의 모양과
중생과 또한 보살과
아울러 시방의 국토며
습기(習氣)와 법신과 화신불과
또한 화신불로 짓는 것은
이 모두 아미타불의
국토로부터 나온 것이라네.
응화(應化)의 설법하신 바와
보불(報佛)의 설법함은
수다라에서 널리 말했나니
그대는 응당 비밀인 뜻임을 알으리.
있는바 불자의 설법과
또한 여러 여래는
이 모두 화불의 말씀인 것이요,
순숙(淳熟)한 이[報佛]의 말씀 아니라네.
이 모든 법은 생김 아니며
저 법도 없는 것 아니어서
건달바 성(城)과 눈홀림이며
꿈과 변화인 것과 같은 것이라네.
가지가지가 마음 따라 구르나니
유심(惟心)이요, 다른 법 아니다.
마음이 생(生)하면 가지가지 생하며
마음이 멸(滅)하면 가지가지 멸하나니라.
중생이 허망스리 분별하여
물건 없는데 물건 보나니
없는 뜻은 오직 마음인 것이요
분별 없으면 해탈 얻으리라.
끝없는 세상에의 희론(戱論)은
번뇌에 의지했나니
모든 분별로 훈습하였였기에
그러므로 사견(邪見)이 나느니라
식(識)은 분별이 없는 뜻이요
진여(眞如)는 이 지혜의 경계니
저를 굴리면 이 고요함이라
이가 성인[聖]의 경계라네.
뜻을 관찰하는 사유(思惟)는
모든 범부의 사유함이요.
진여를 생각하는 사유는
부처님의 깨끗한 사유라네.
모든 법체를 분별하나
일체 법은 생김이 아니다
타력(他力)의 인연에 의하여
중생은 미혹으로 분별하나니라.
타력이 만일 청정하면
분별과 상응(相應)하는 것 떠나리라
저를 굴리면 바로 진여이요
분별을 떠나면 이 진여행(行)이니라.
분별하며 분별하지 말 것이니
분별은 사실이 없다.
미혹인 법을 분별함이란
취(取)와 가취(可取) 다하지 않으리라.
바깥 분별인 경계를 보고
이 실체라고 분별하여
마음을 분별하며 분별한다면
저 법은 인연으로 생긴 것이리라.
사견(邪見)으로 바깥 의(義)를 본 것이니
의(義)는 없고 다만 마음인 것이다.
양(量)을 관찰하여 상응하면
능히 취와 가취를 멸하리라
바깥 경계는 없는 것이언만
어리석은 이 괜히 분별하여
훈습으로 마음을 증장하기에
모든 법이 생긴 것 같나니라.
두 가지 분별을 멸하면
진여 지혜의 경계니
법 없는 모양에서 생김이란
부사의(不思議)인 성인의 경계라네.
명상(名相)과 분별과
실체와 두 가지 모양과
바른 지혜와 진여는
이 실체를 성취함이니라.
부모에 의하여 화합되며
아라야와 의(意)가 합하는 것이
타락과 병(甁)들과 쥐와 같이
한가지로 적(赤) 백(白)이 증장하네.
메시와 두터운 포창(泡瘡)인
부정(不淨)함이 절(節)에 의해 다하는데
업풍(業風)이 四대를 자라게 하는것이
과일이 성숙함과 같다네.
五와 및 五, 五에서
또한 아홉 가지 구멍이 있고
털과 껍질이 두루 덮어서
이와 같이 증장하여 자라나네.
생기는 것 똥 속의 벌레와 같고
사람이 잠 자다가 깨어남 같으며
눈으로 색(色)을 보고 생각 일으켜
증장하여 분별 내나니라.
분별과 또한 전념(專念)이
이[齒]와 입술이 화합한 것을 트고서
입으로 비로소 말하는 것이
앵무새가 소리를 희롱함 같나니라.
모든 외도는 정(定)을 말하나
대승(大乘)에는 결정 아닌 것이라,
중생의 마음에 의한 정(定)이며
사견(邪見)이기에 능히 가까히 할 수 없네.
나의 법은 안으로 증득한 지혜니
허망한 각(覺)은 그 경계가 아니다
여래가 세상에서 입멸한 후에는
누가 가지고 나를 위해 말하랴.
여래가 멸도한 후에는
미래에 응당 사람 있으리니,
대혜여, 그대는 잘 들으라
나의 법 지닐 사람은 있으리라.
남쪽의 큰 나라 가운데에
대덕(大德) 비구가 있으리니
이름은 용수(龍樹) 보살 일 것이요
유무(有無)의 소견 능히 깨트리고
사람을 위하여 나의 법인
대승, 위 없는 법을 말할 것이며
환희지(歡喜地)를 증득하고서
안락국(安樂國)에 왕생(往生)하리라.
지혜로 법을 관찰함에는
진실 법체를 볼 수 없나니
그러므로 말할 수 없으며
말함도 또한 체성 없나니라.
만일 인연으로 생겨진 법이라면
있다 없다 말하지 못하리
인연 가운데엔 물건 있다기에
어리석은 이, 있다 없다 분별하네.
사견(邪見)인 두 사뙨 소견이니
나는 아(我) 법(法) 떠남 알았노라.
일체 법의 명자를
한량없는 겁(劫)이 항상 배웠나니라.
배우고 또한 다시 배우고서
번갈아 서로 분별하나니
만일 명자를 말하지 않으면
세간 사람 미혹하리니
그러므로 명자를 지은 것은
마혹의 법을 없애기 위함이다
세 가지 분별에 의하여
어리석은 이 법을 분별하네.
명자에 의해 미혹한 분별이며
인연으로 능히 생겼다고 하나,
법은 멸함도 생김도 아니요
자성(自性)이 허공과 같나니라.
법은 체성 없는 것이 체성이요
분별하는 상(相)도 곧 체성이니
그림자와 눈홀림과
아지랑이와 꿈과 메아리며,
불 바퀴와 건달바 이어서
모든 법이 이와 같이 나나니
둘이 아닌 진여(眞如), 공(空)은
실제(實際)며 법의 체성이니라.
내가 말한 분별 없음이
저 법상을 성취하였네
입과 마음의 경계는 허망함이니
진실과 허망 세운 그것이네.
마음이 二변(邊)에 떨어지기에
그러므로 분별이 성립함이다
유(有)와 무(無)는 二변에 떨어진 것이니
마음 경계에 있기 때문인 것이네.
모든 경계 멀리 떠나서
그때엔 바로 마음 멸하고
취착하는 경계를 떠나면
저 멸(滅)은 유무(有無)가 아니니라.
만일 성인의 경계라면
어리석은 사람은 능히 아지 못하리
멸(滅)하고서 진여에 머무름이란
지혜 있는 이만 능히 보리라.
저 법과 같이 머무른다면
지혜 있는 이만 보리니
법체가 이와 같지 않음은
모든 법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쇠를 보고
분별하여 금이라고 하여
금 아닌 것을 금으로 보듯이
외도의 법을 취함도 그와 같느니라.
본래 없는데 처음 생겼다 말하여
처음 생긴 후 도로 없어지며
인연 따라 있다 없다 한다 함이여
이 말은 나의 교법 아니니라.
처음과 종말이 없는 법이여,
이와 같은 모양의 머무름 없나니
세간의 머무른 모양이란
사뙨 깨달음은 알지 못한 때문이네.
과거의 법도 있는 것이요
미래의 법도 없는 것 아니며
현재의 법도 또한 있나니
응당 법이 생긴다고 말하지 못하리.
전변[轉]하는 시간과 행상(行相)과
모든 대(大)와 여러 감관[根]으로
허망스리 중음(中陰) 취하나니
만일 각자(覺者)가 아니면
일체 불(佛), 세존께서는
‘인연으로 생긴다’고 말하지 않으리.
인연이 곧 세간인 것이니
건달바의 성(城)과 같은 것이라네
다만 법과 인연이 화합하여
이 법에 의해 법이 생기나니
모든 화합인 법을 떠나면
멸도 아니며 또한 생(生)도 아니라네.
거울과 물 가운데에서와
눈[眼]과 그릇과 마니(摩尼)에서
모든 거울인 모양 보이나
모든 그림자란 없는 것이라네.
짐승이 헛된 물을 사랑하듯이
가지가지 색(色)을 보고서
가지가지 있는 것 같으나
꿈과 돌 계집애와 같다네.
나의 법은 대승도 아니고
소리도 명자도 아니며
체(諦)도 해탈도 아니요
고요한 경계도 아니라네.
그러나 나의 법은 대승이며
모든 삼매로서 자재하고
뜻과 같은 가지가지 몸이
자재스럽게 꽃으로 장엄하였네.
일체(體)와 별체(別體)이면서
인연 가운데엔 없는 법이나
줄여 말하면 모든 법 생(生)함이요
널리 말하면 모든 법 멸함이라네.
불생공(不生空)이 이 하나[一]이며
그리고 생공(生空)이 이 둘[二]이다.
불생공은 수송함이요
생멸(生滅)은 바로 이 공(空)이라네
진여와 공과 실제(實際)와
열반과 법계(法界)와
몸과 뜻인 가지가지를
나는 ‘다른 이름인 법이라’ 말하였네
경(經)과 비니(毘尼)와 비담(毘曇)에서
아(我)가 청정함 분별하였나니
명자에 의지하고 뜻에 의하지 않으면
그는 무아(無我)를 알지 못하리라.
외도도 부처도 아니며
아(我)도 딴 것도 또한 아니요
인연 따라 유법(有法) 이룬 것이니
어찌 ‘모든 법 없다’고 하랴.
어떤 사람이 유(有)를 성취하였고
인연 따라서 무(無)를 말하느냐
설법함에 사견(邪見)을 내고서
유무(有無)로 괜히 분별함이었네.
만일 사람이 불생(不生)을 보며
또한 법의 불멸(不滅)을 본다면
그 사람은 유무를 떠나서
세간의 고요함 보리라.
중생의 분별인 소견으로
보여진 것은 토끼뿔 같나니
분별이란 이 미혹이어서
새가 아지랑이 사랑함 같다네.
허망스리 법을 분별하고
그에 의해서 분별하는 소견이었네.
인연과 분별은 없는 것이니
인(因) 없기에 응당 분별 않으리.
물 없는데서 물을 취하는
짐승과 같이 괜히 애착 내나니
어리석은 이는 이와 같이 보거니와
성인은 이러한 것 없다네.
성인은 견(見)이 청정하여
三해탈을 내었기에
생사(生死)의 법을 떠나고서
고요한 곳 수행하나니라.
깊고 묘한 방편으로
국토의 기묘한 일 알고서
내 모든 제자 위해 말함이이나
소승(小乘)을 위함은 아니라네.
三유(有)는 이 무상(無常)한 것이니
공(空)이요 무아(無我)며 아(我)를 떠났나니
같은 모양과 다른 모양인 것을
나는 성문을 위해 말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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