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지마 니까야(중)

[스크랩] M059. 많은 느낌 경(Bahuvedan?yasutta?)

수선님 2018. 3. 25. 11:18

많은 느낌 경 

Mn59 MAJJHIMA NIKâYA II 1. 9. Bahuvedanãyasuttaü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왓티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때 빤짜깡가 목수가 우다이 존자를 뵈러 갔다. 가서는 우다이 존자에게 절을 올리고 한곁에 앉았다. 한곁에 앉아서 빤짜깡가 목수는 우다이 존자에게 이렇게 여쭈었다. 

"우다이 존자시여, 세존께서는 몇 가지 느낌을 설하셨습니까?"

"목수여, 세존께서는 세 가지 느낌을 설하셨으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목수여, 세존께서는 이러한 세 가지 느낌을 설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빤짜깡가 목수는 우다이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다이 존자시여, 참으로 세존께서는 세 가지가 아니라 두 가지 느낌을 설하셨습니다. 즉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입니다. 

존자시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고요하고 수승한 즐거움이라고 세존께서는 설하셨습니다."

 

다시 우다이 존자는 빤짜깡가 목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목수여, 세존께서 설하신 느낌은 두 가지가 아닙니다. 

목수여, 세존께서는 세 가지 느낌을 설하셨으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두 번째에도 빤짜깡가 목수는 우다이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다이 존자시여, 참으로 세존께서는 세 가지가 아니라 두 가지 느낌을 설하셨습니다. 즉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입니다. 

우다이 존자시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고요하고 수승한 즐거움이라고 세존께서는 설하셨습니다."

 

세 번째에도 우다이 존자는 빤짜깡가 목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목수여, 세존께서 설하신 느낌은 두 가지가 아닙니다.

목수여, 세존께서는 세 가지 느낌을 설하셨으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세 번째에도 빤짜깡가 목수는 우다이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다이 존자시여, 참으로 세존께서는 세 가지가 아니라 두 가지 느낌을 설하셨습니다.

즉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입니다. 

우다이 존자시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고요하고 수승한 즐거움이라고 세존께서는 설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다이 장로는 빤짜깡가 목수를 설득시킬 수 없었고, 빤짜깡가 목수도 우다이 장로를 

설득시킬 수 없었다.

 

2. 아난다 존자가 우다이 장로와 빤짜깡가 목수 사이에 있었던 이 논쟁을 듣게 되었다. 그러자 

아난다 존자는 세존을 뵈러 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아난다 존자는 우다이 존자와 빤짜깡가 목수 사이에 있었던 논쟁의 전말을 세존께 말씀드렸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빤짜깡가 목수가 우다이에게 동의하지 않은 것은 이유가 있다. 마찬가지로 우다이가 

빤짜깡가 목수에게 동의하지 않은 것도 이유가 있다. 나는 방편에 따라 느낌들을 두 가지로 설 

했고, 느낌들을 세 가지로 설했으며, 다섯 가지로, 여섯 가지로, 열여덟 가지로, 서른여섯 가지로, 때로는 백여덟 가지로 설하기도 했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나는 방편에 따라 여러 가지로 법을 설했다.

 

참으로 아난다여, 이처럼 나는 법을 방편에 따라 다르게 설했는데, 그렇게 잘 설해지고 잘 말해진 법에 서로 동의하지 않고 수긍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에게는 논쟁이 

생기고 말다툼이 생기고 분쟁이 생기며 혀를 무기 삼아 서로를 찌르면서 지낼 것이 예상된다.

아난다여, 이처럼 나는 방편에 따라 법을 설했는데, 그렇게 잘 설해지고 잘 말해진 법에 서로 

동의하고 수긍하고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사이좋게 화합하고 정중하고 다투지 않고

물과 우유가 잘 섞이듯이 서로를 우정 어린 눈으로 보면서 지낼 것이 예상된다."

 

3. "아난다여, 여기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이 있다. 무엇이 다섯인가?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자극하고 매혹적인, 눈으로 인식되는 

형색들이 있다.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자극하고 매혹적인,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이 있다.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자극하고 매혹적인,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이 있다.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자극하고 매혹적인, 혀로 인식되는 맛들이 있다.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자극하고 매혹적인, 몸으로 인식되는 

감촉들이 있다.

아난다여, 이것이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이다.

아난다여, 이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을 조건으로 즐거움과 기쁨이 생기나니, 그것은 

관능적 쾌락이라 부른다."

 

7. "그런데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말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 즐거움보다 훨씬 고상하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이 즐거움보다 훨씬 고상하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욕망(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해로운 법[不善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멀어짐으로부터 생겨난 희열[喜.기쁨]과 행복[樂.즐거움]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이 참으로 그 즐거움보다 훨신 고상하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 즐거움보다 훨신 고상하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그 즐거움보다 훨씬 고상하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이 참으로 그 즐거움보다 훨씬 고상하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 즐거움보다 훨신 고상하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이 즐거움보다 훨씬 고상하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희열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행복을 몸으로 느끼는, 성자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행복하게 머문다.’고 하는 제3선(三禪)에 들어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이 참으로 그 즐거움보다 훨씬 고상하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 즐거움보다 훨신 고상하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이 즐거움보다 훨씬 고상하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행복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희열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捨念淸淨]을 지닌 제4선(四禪)에 들어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이 참으로 그 즐거움보다 훨씬 고상하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 즐거움보다 훨신 고상하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이 즐거움보다 훨씬 고상하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있어 일체의 물질적 현상에 대한 지각을 넘어서고, 장애에 대한 지각을 소멸하고, 갖가지 지각에 마음을 내지 않아 '끝이 없는 허공(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空無邊處)에 들어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으로 참으로 그 즐거움보다 훨씬 고상하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 즐거움보다 훨신 고상하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이 즐거움보다 훨씬 고상하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있어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무한한 의식'라고 하면서 

식무변처(識無邊處)를 구족하여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이 참으로 그 즐거움보다 훨씬 고상하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 즐거움보다 훨신 고상하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이 즐거움보다 훨씬 고상하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있어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무소유처

(無所有處)를 구족하여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이 참으로 그 즐거움보다 훨씬 고상하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 즐거움보다 훨신 고상하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이 즐거움보다 훨씬 고상하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무소유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구족하여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이 참으로 그 즐거움보다 훨씬 고상하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있어 일체 비상비비상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상수멸(想受滅)을 구족하여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이 참으로 그 즐거움조다 훨씬 고상하고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8. '아난다여, 그런데 다른 외도 유행승들이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사문 고따마는 인식과 느낌의 소멸[想受滅]을 설하고서는 그것을 다시 즐거움이라고 천명한다.

그런 것이 도대체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단 말인가?'라고.

 

아난다여, 이와 같이 말하는 다른 외도 유행승들에게 이렇게 말해줘야 한다.

'도반들이여, 세존께서는 즐거운 느낌만을 즐거움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도반들이여, 오히려 여래는 언제 어디서 얻어진 어떤 즐거움이든지 간에, 그것을 모두 

즐거움이라고 합니다.'라고."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설하셨다.

아난다 존자는 흡족한 마음으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했다.

 

Bahuvedanīyasuttaṃ niṭṭhitaṃ navamaṃ.

많은 느낌 경(M59)이 끝났다.

 

 

*본 경은 대림 스님이 번역하신 맛지마 니꺄야를 기초로하여 寫經한 것입니다.

*팔리 경 출처: http://www.tipitaka.org/romn/


출처 : 붓다의 옛길
글쓴이 : 실론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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