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윳따 니까야(잡)

[스크랩] 제22상윳따 - 제9장 장로 품(Thera vagga. S22:83-S22:92)

수선님 2018. 4. 8. 11:51

                                        제9장 장로 품

                                         Theraa-vagga


아난다 경(S22:83)

Ānanda-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아난다 존자는 사왓티의 제따바나(제타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머물고 있었다.


2. 그곳에서 아난다 존자는 비구들에게 말했다. “도반 비구들이여.”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대답했다. “도반이여.”라고. 아난다 존자는 이와 같이 말했다.


3. “도반들이여, 뿐나 만따니뿟따 존자는 우리가 신참 비구였을 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는 우리들에게 이와 같이 교계를 하였습니다.”


4. “도반 아난다여, 취착하기 때문에 ‘나는 있다.’는 생각과 헤아림이 있으며 취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을 취착하기 때문에 ‘나는 있다.’는 생각과 헤아림이 있으며 취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까? 

물질을 취착하기 때문에 ‘나는 있다.’는 생각과 헤아림이 있으며 취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느낌을 취착하기 때문에 ‘나는 있다.’는 생각과 헤아림이 있으며 취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인식을 취착하기 때문에 ‘나는 있다.’는 생각과 헤아림이 있으며 취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형성을 취착하기 때문에 ‘나는 있다.’는 생각과 헤아림이 있으며 취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의식을 취착하기 때문에 ‘나는 있다.’는 생각과 헤아림이 있나니 취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도반 아난다여, 예를 들면 여인이나 남자가 젊으면 치장하기를 좋아하여 깨끗하고 흠 없는 거울이나 맑음 물에 자신의 얼굴 모습을 비추어 봅니다. 그때 그는 취착하면서 쳐다보는 것이지 취착하지 않으면서 보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물질을 취착하기 때문에 ‘나는 있다.’는 생각과 헤아림이 있으며 취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도반 아난다여, 예를 들면 여인이나 남자가 젊으면 치장하기를 좋아하여 깨끗하고 흠 없는 거울이나 맑음 물에 자신의 얼굴 모습을 비추어 봅니다. 그때 그는 취착하면서 쳐다보는 것이지 취착하지 않으면서 보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느낌을 취착하기 때문에 ‘나는 있다.’는 생각과 헤아림이 있으며 취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도반 아난다여, 예를 들면 여인이나 남자가 젊으면 치장하기를 좋아하여 깨끗하고 흠 없는 거울이나 맑음 물에 자신의 얼굴 모습을 비추어 봅니다. 그때 그는 취착하면서 쳐다보는 것이지 취착하지 않으면서 보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인식을 취착하기 때문에 ‘나는 있다.’는 생각과 헤아림이 있으며 취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도반 아난다여, 예를 들면 여인이나 남자가 젊으면 치장하기를 좋아하여 깨끗하고 흠 없는 거울이나 맑음 물에 자신의 얼굴 모습을 비추어 봅니다. 그때 그는 취착하면서 쳐다보는 것이지 취착하지 않으면서 보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형성을 취착하기 때문에 ‘나는 있다.’는 생각과 헤아림이 있으며 취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도반 아난다여, 예를 들면 여인이나 남자가 젊으면 치장하기를 좋아하여 깨끗하고 흠 없는 거울이나 맑음 물에 자신의 얼굴모습을 비추어 봅니다. 그때 그는 취착하면서 쳐다보는 것이지 취착하지 않으면서 보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의식을 취착하기 때문에 ‘나는 있다.’는 생각과 헤아림이 있으며 취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5. “도반 아난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물질은 항상합니까, 무상합니까?”

“무상합니다, 도반이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입니까, 즐거움입니까?”

“괴로움입니다, 도반이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도반 아난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느낌은 항상합니까, 무상합니까?”

“무상합니다, 도반이여.”

“그러면 무상한 겄은 괴로움입니까, 즐거움입니까?”

“괴로움입니다, 도반이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도반 아난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인식은 항상합니까, 무상합니까?”

“무상합니다, 도반이여.”

“그러면 무상한 겄은 괴로움입니까, 즐거움입니까?”

“괴로움입니다, 도반이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도반 아난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형성은 항상합니까, 무상합니까?”

“무상합니다, 도반이여.”

“그러면 무상한 겄은 괴로움입니까, 즐거움입니까?”

“괴로움입니다, 도반이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도반 아난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의식은 항상합니까, 무상합니까?”

“무상합니다, 도반이여.”

“그러면 무상한 겄은 괴로움입니까, 즐거움입니까?”

“괴로움입니다, 도반이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6. “도반 아난다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물질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열등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통찰지(지혜)로 보아야 합니다.


도반 아난다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느낌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열등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통찰지(지혜)로 보아야 합니다.


도반 아난다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인식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열등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통찰지(지혜)로 보아야 합니다.”


도반 아난다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형성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열등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통찰지(지혜)로 보아야 합니다.”  


도반 아난다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의식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열등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통찰지(지혜)로 보아야 합니다.”


7. “도반 아난다여, 이와 같이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느낌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인식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형성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의식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납니다. 싫어하여 떠나서 탐욕이 사라지고, 탐욕이 사라지기 때문에 해탈합니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습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梵行)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압니다.”


8. “도반들이여, 뿐나 만따니뿟따 존자는 우리가 신참비구였을 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는 우리들에게 이와 같이 교계를 하였습니다. 나는 뿐나 만따니뿟따 존자의 설법을 듣고 법을 알고 이해하였습니다. 


띳사 경(S22:84)

Tissa-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밧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2. 그 무렵 세존의 고종사촌인 띳사 존자가 많은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들이여, 요즘 저의 몸은 무겁고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법들도 제게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해태와 혼침이 저의 마음을 사로잡아버립니다. 아무런 즐거움 없이 청정범행을 닦고 있고 법들에 대한 의심이 있습니다.”


3. 그러자 많은 비구들이 세존께 찾아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비구들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띳사 존자가 많은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도반들이여, 요즘 저의 몸은 무겁고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법들도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해태와 혼침이 저의 마음을 사로잡아버립니다. 아무런 즐거움 없이 청정범행을 닦고 있고 법들에 대한 의심이 있습니다.’라고.


4. 세존께서는 어떤 비구를 불러서 말씀하셨다.

“오라, 비구여. 그대는 내 이름으로 ‘도반 띳사여, 스승께서 그대를 부르십니다.’라고 띳사 비구를 불러오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는 세존께 대답한 뒤 띳사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띳사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띳사여, 스승께서 그대를 부르십니다.”

“알겠습니다, 도반이여.”라고 띳사 존자는 비구에게 대답한 뒤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띳사 존자에게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5. “띳사여, 그대가 많은 비구들에게 ‘도반들이여, 요즘 저의 몸은 무겁고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법들도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해태와 혼침이 저의 마음을 사로잡아버립니다. 아무런 즐거움 없이 청정범행을 닦고 있고 법들에 대한 의심이 있습니다.’라고 말한 것이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띳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물질적 요소)에 대한 탐욕을 여의지 못하고 욕구를 여의지 못하고 애정을 여의지 못하고 갈증을 여의지 못하고 열기를 여의지 못하고 갈애를 여의지 못하는 자의 물질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기 때문에 그에게는 근심∙절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일어나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훌륭하고 장하구나, 띳사여. 띳사여, 물질에 대한 탐욕을 여의지 못한 자는 이와 같이 된다."


"띳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느낌(감수작용)에 대한 탐욕을 여의지 못하고 욕구를 여의지 못하고 애정을 여의지 못하고 갈증을 여의지 못하고 열기를 여의지 못하고 갈애를 여의지 못하는 자의 느낌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기 때문에 그에게는 근심∙절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일어나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훌륭하고 장하구나, 띳사여. 띳사여, 느낌에 대한 탐욕을 여의지 못한 자는 이와 같이 된다.


"띳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인식(지각작용)에 대한 탐욕을 여의지 못하고 욕구를 여의지 못하고 애정을 여의지 못하고 갈증을 여의지 못하고 열기를 여의지 못하고 갈애를 여의지 못하는 자의 인식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기 때문에 그에게는 근심∙절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일어나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훌륭하고 장하구나, 띳사여. 띳사여, 인식에 대한 탐욕을 여의지 못한 자는 이와 같이 된다.


"띳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형성(형성작용)에 대한 탐욕을 여의지 못하고 욕구를 여의지 못하고 애정을 여의지 못하고 갈증을 여의지 못하고 열기를 여의지 못하고 갈애를 여의지 못하는 자의 형성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기 때문에 그에게는 근심∙절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일어나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훌륭하고 장하구나, 띳사여. 띳사여, 형성에 대한 탐욕을 여의지 못한 자는 이와 같이 된다.


"띳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의식(식별작용)에 대한 탐욕을 여의지 못하고 욕구를 여의지 못하고 애정을 여의지 못하고 갈증을 여의지 못하고 열기를 여의지 못하고 갈애를 여의지 못하는 자의 의식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기 때문에 그에게는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일어나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훌륭하고 장하구나, 띳사여. 띳사여, 알음알이에 대한 탐욕을 여의지 못한 자는 이와 같이 된다.”


6. “띳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에 대한 탐욕을 여의고 욕구를 여의고 애정을 여의고 갈증을 여의고 열기를 여의고 갈애를 여읜 자의 물질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지만 그 때문에 그에게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일어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장하고 장하구나, 띳사여. 띳사여, 물질에 대한 탐욕을 여읜 자는 이와 같이 된다.


"띳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느낌에 대한 탐욕을 여의고 욕구를 여의고 애정을 여의고 갈증을 여의고 열기를 여의고 갈애를 여읜 자의 느낌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지만 그 때문에 그에게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일어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장하고 장하구나, 띳사여. 띳사여, 느낌에 대한 탐욕을 여읜 자는 이와 같이 된다."


"띳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인식에 대한 탐욕을 여의고 욕구를 여의고 애정을 여의고 갈증을 여의고 열기를 여의고 갈애를 여읜 자의 인식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지만 그 때문에 그에게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일어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장하고 장하구나, 띳사여. 띳사여, 인식에 대한 탐욕을 여읜 자는 이와 같이 된다."


"띳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형성에 대한 탐욕을 여의고 욕구를 여의고 애정을 여의고 갈증을 여의고 열기를 여의고 갈애를 여읜 자의 형성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지만 그 때문에 그에게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일어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장하고 장하구나, 띳사여. 띳사여, 형성에 대한 탐욕을 여읜 자는 이와 같이 된다."


"띳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의식에 대한 탐욕을 여의고 욕구를 여의고 애정을 여의고 갈증을 여의고 열기를 여의고 갈애를 여읜 자의 알음알이는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지만 그 때문에 그에게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일어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훌륭하고 장하구나, 띳사여. 띳사여, 의식에 대한 탐욕을 여읜 자는 이와 같이 된다.”


7. “띳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띳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느낌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띳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인식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띳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형성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띳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의식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8. “띳사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물질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열등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통찰지(지혜)로 봐야 한다.


띳사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느낌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열등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통찰지(지혜)로 봐야 한다.


띳사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인식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열등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통찰지(지혜)로 봐야 한다.


띳사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형성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열등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통찰지(지혜)로 봐야 한다.


띳사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의식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열등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통찰지(지혜)로 봐야 한다.”


9. “띳사여, 이와 같이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느낌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인식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형성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의식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난다. 싫어하여 떠나서 탐욕이 사라지고, 탐욕이 사라지기 때문에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梵行)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10. “띳사여, 예를 들면 여기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길을 잘 알지 못하고 다른 한 사람은 길을 잘 안다고 하자. 길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길을 잘 아는 사람에게 길을 물으면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여보시오, 이 길을 따라 잠시 가시오. 이 길을 따라 잠시 가면 두 갈래 길이 나타날 것이오. 그러면 왼쪽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가시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잠시 가시오. 그 길을 따라 잠시 가면 깊은 밀림이 나타날 것이오. 그러면 그 길을 따라 잠시 가시오. 그 길을 따라 잠시 가면 넓은 늪지대가 나타날 것이오. 그러면 그 길을 따라 잠시 가시오. 그 길을 따라 잠시 가면 험한 낭떠러지가 나타날 것이오. 그러면 그 길을 따라 잠시 가시오. 그 길을 따라 잠시 가면 넓고 큰 아름다운 평원이 나타날 것이오.’라고.”


11. “띳사여, 이 비유는 뜻을 바르게 전달하기 위해서 내가 만든 것이다. 그 뜻은 이와 같다.

 띳사여, 길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범부를 두고 한 말이고, 길을 잘 아는 사람은 여래∙아라한∙정등각자를 두고 한 말이다.


두 갈래 길은 의심을 두고 한 말이고, 왼쪽 길은 여덟 가지로 된 그릇된 도를 두고 한 말이니 그릇된 견해, 그릇된 사유, 그릇된 언어, 그릇된 행위, 그릇된 생활, 그릇된 정진, 그릇된 마음챙김, 그릇된 삼매이며, 오른쪽 길은 여덟 가지로 된 성스러운 도를 두고 한 말이니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언어, 바른 행위, 바른 생활,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이다.


깊은 밀림은 무명을 두고 한 말이고, 늪지대는 감각적 욕망들을 두고 한 말이며, 험한 낭떠러지는 절망과 분노를 두고 한 말이고, 아름다운 평원은 열반을 두고 한 말이다.


기뻐하라, 띳사여. 즐거워하라, 띳사여. 나는 교계하기 위해서 있고 나는 보호하기 위해서 있고 나는 가르치기 위해서 있다.”


12.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띳사 존자는 마음이 흡족해져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하였다.


야마까 경(S22:85)

Yamaka-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밧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2. 그 무렵 야마까라는 비구에게 ‘내가 세존이 설하신 법을 깊이 이해하기로는 번뇌 다한 비구는 몸이 무너지면 단멸하고 파멸하여 죽은 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이러한 나쁜 견해가 생겼다.


3. 많은 비구들이 야마까라는 비구에게 ‘내가 세존이 설하신 법을 깊이 이해하기로는 번뇌 다한 비구는 몸이 무너지면 단멸하고 파멸하여 죽은 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이러한 나쁜 견해가 생겼다고 들었다.


그러자 많은 비구들이 야마까 존자게 찾아갔다. 가서는 야마까 존자와 함께 환담을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나누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비구들은 야마까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4. “도반 야마까여, 그대에게 ‘내가 세존이 설하신 법을 깊이 이해하기로는 번뇌 다한 비구는 몸이 무너지면 단멸하고 파멸하여 죽은 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이러한 삿된 견해가 일어난 것이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도반들이여, 내가 세존이 설하신 법을 깊이 이해하기로는 번뇌 다한 비구는 몸이 무너지면 단멸하고 파멸하여 죽은 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도반 야마까여,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세존을 비방하지 마시오. 세존을 비방하는 것은 좋은 일이 못됩니다. 세존께서는 ‘번뇌 다한 비구는 몸이 무너지면 단멸하고 파멸하여 죽은 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5. 비구들은 이렇게 말했지만 야마까 존자는 더욱더 고집스럽게 집착하여 이렇게 주장하였다.

“내가 세존이 설하신 법을 깊이 이해하기로는 번뇌 다한 비구는 몸이 무너지면 단멸하고 파멸하여 죽은 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6. “이처럼 비구들은 야마까 존자가 이러한 나쁜 견해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비구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리뿟따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사리뿟따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사리뿟따여, 야마까라는 비구에게 ‘내가 세존이 설하신 법을 깊이 이해하기로는 번뇌 다한 비구는 몸이 무너지면 단멸하고 파멸하여 죽은 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이러한 나쁜 견해가 생겼습니다. 그러니 사리뿟따 존자는 연민을 일으켜 야마까 비구에게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7. “사리뿟따 존자는 침묵으로 허락하였다. 그러자 사리뿟따 존자는 저녁 무렵에 삼매에서 깨어나 일어나 야마까 존자에게 찾아갔다. 가서는 야마까 존자와 함께 환담을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하고서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사리뿟따 존자는 야마까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야마까여, 그대에게 ‘내가 세존이 설하신 법을 깊이 이해하기로는 번뇌 다한 비구는 몸이 무너지면 단멸하고 파멸하여 죽은 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이러한 삿된 견해가 일어난 것이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도반사리뿟따여. 내가 세존이 설하신 법을 깊이 이해하기로는 번뇌 다한 비구는 몸이 무너지면 단멸하고 파멸하여 죽은 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8. “도반 야마까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물질은 항상합니까, 무상합니까?”

“무상합니다, 도반이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입니까, 즐거움입니까?”

“괴로움입니다, 도반이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도반 야마까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느낌은 항상합니까, 무상합니까?”

“무상합니다, 도반이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입니까, 즐거움입니까?”

“괴로움입니다, 도반이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도반 야마까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인식은 항상합니까, 무상합니까?”

“무상합니다, 도반이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입니까, 즐거움입니까?”

“괴로움입니다, 도반이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도반 야마까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형성은 항상합니까, 무상합니까?”

“무상합니다, 도반이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입니까, 즐거움입니까?”

“괴로움입니다, 도반이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도반 야마까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의식은 항상합니까, 무상합니까?”

“무상합니다, 도반이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입니까, 즐거움입니까?”

“괴로움입니다, 도반이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9. “도반 야마까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물질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열등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통찰지로 보아야 합니다.


도반 야마까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느낌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열등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통찰지로 보아야 합니다.


도반 야마까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인식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열등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통찰지로 보아야 합니다.


도반 야마까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형성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열등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통찰지로 보아야 합니다.


도반 야마까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의식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열등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통찰지로 보아야 합니다.”


10. “도반 야마까여, 이와 같이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느낌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인식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형성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의식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납니다. 싫어하여 떠나서 탐욕이 사라지고, 탐욕이 사라지기 때문에 해탈합니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습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梵行)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압니다.”

 

11. “도반 야마까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대는 물질을 여래라고 관찰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도반 야마까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대는 느낌을 여래라고 관찰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도반 야마까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대는 인식을 여래라고 관찰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도반 야마까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대는 형성을 여래라고 관찰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도반 야마까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대는 의식을 여래라고 관찰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12. “도반 야마까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대는 물질 안에 여래가 있다고 관찰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도반 야마까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대는 느낌 안에 여래가 있다고 관찰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도반 야마까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대는 인식 안에 여래가 있다고 관찰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도반 야마까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대는 형성 안에 여래가 있다고 관찰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도반 야마까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대는 의식 안에 여래가 있다고 관찰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도반 야마까여, 그러면 그대는 여래는 물질과 다르다고 관찰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도반 야마까여, 그러면 그대는 여래는 느낌과 다르다고 관찰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도반 야마까여, 그러면 그대는 여래는 인식과 다르다고 관찰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도반 야마까여, 그러면 그대는 여래는 형성과 다르다고 관찰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도반 야마까여, 그러면 그대는 여래는 의식과 다르다고 관찰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13. “도반 야마까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대는 물질과 느낌과 인식과 형성과 의식이 모두 합쳐진 것이 여래라고 관찰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14. “도반 야마까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러면 그대는 물질도 아니요 느낌도 아니요 인식도 아니요 형성도 아니요 의식도 아닌 것이 여래라고 관찰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15. “도반 야마까여, 이처럼 그대는 지금∙현재에서도 여래에 대해 진실함과 확고함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대가 ‘내가 세존이 설하신 법을 깊이 이해하기로는 번뇌 다한 비구는 몸이 무너지면 단멸하고 파멸하여 죽은 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설명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도반 사리뿟따여, 저는 전에 현명하지 못하여 나쁜 견해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리뿟따 존자께서 법을 설하는 것을 듣고 나쁜 견해를 제거하고 법을 올바르게 보고 이해하였습니다.”


16. “도반 야마까여, 만일 그대에게 묻기를 ‘도반 야마까여, 번뇌 다한 비구는 몸이 무너져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됩니까?’라고 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도반 사리뿟따여, 만일 제게 묻기를 ‘도반 야마까여, 번뇌 다한 비구는 몸이 무너져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됩니까?’라고 한다면 저는 이렇게 설명하겠습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물질은 무상합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요 괴로움인 것은 소멸되었고 사라졌습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느낌은 무상합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요 괴로움인 것은 소멸되었고 사라졌습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인식은 무상합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요 괴로움인 것은 소멸되었고 사라졌습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형성은 무상합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요 괴로움인 것은 소멸되었고 사라졌습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의식은 무상합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요 괴로움인 것은 소멸되었고 사라졌습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저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17. “훌륭하고 장합니다, 도반 야마까여. 그렇다면 나는 그대를 위해서 비유를 들겠습니다. 그러면 이 뜻에 대한 지혜가 분명하게 될 것입니다.


도반 야마까여, 예를 들면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 부자여서 큰 재물과 큰 재산을 가졌는데 호위무사들이 잘 보호하고 있다 합시다. 그런데 그의 이로움을 바라지 않고 이익을 바라지 않고 열반을 바라지 않고 그의 목숨을 빼앗아버리려는 어떤 사람이 온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는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 부자여서 큰 재물과 큰 재산을 가졌는데 호위무사들이 잘 보호하고 있다. 그러니 힘으로 그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 쉽지 않겠구나. 그러니 나는 그의 측근이 되어서 목숨을 빼앗아야겠다.’라고.


그래서 그는 장자나 장자의 아들에게 다가가서 ‘주인이시여, 저는 당신을 섬기고자 합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 그렇게 하도록 할 것이고 그는 그를 섬길 것입니다. 그는 먼저 일어나고 나중에 자고 시중을 잘 들고 행실이 훌륭하고 좋은 말을 할 것입니다. 그러면 장자나 장자의 아들은 그 사람을 친구로 여기고 속마음을 털어놓는 사이로 대하고 그에게 큰 신뢰를 가질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 나에게 큰 신뢰를 가지고 있구나.’라고 알게 되고 그가 혼자 있을 때 시퍼런 칼로 그의 목숨을 빼앗아버릴 것입니다.”


18. “도반 야마까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사람이 장자나 장자의 아들에게 다가가서 ‘주인이시여, 저는 당신을 섬기고자 합니다.’라고 말할 때 비록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 ‘이 사람은 나를 죽일 사람이다.’라고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살인자는 살인자이지 않습니까?

그가 먼저 일어나고 나중에 자고 시중을 잘 들고 행실이 훌륭하고 좋은 말을 할 때에도 비록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 ‘이 사람은 나를 죽일 사람이다.’라고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살인자는 살인자이지 않습니까?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 혼자 있는 것을 알고 시퍼런 칼로 그의 목숨을 빼앗을 때에도 비록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 ‘이 사람은 나를 죽일 사람이다.’라고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살인자는 살인자이지 않습니까?”

“참으로 그렇습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19. “도반 야마까여, 그와 같이 배우지 못한 범부는 성자들을 보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가르침에 인도되지 못하고 참된 사람들을 보지 못하고 참된 사람의 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참된 사람의 가르침에 인도되지 못하여, 물질을 자아라고 여기고, 물질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여기고, 물질이 자아 안에 있다고 여기고, 물질 안에 자아가 있다고 여깁니다. 


도반 야마까여, 그와 같이 배우지 못한 범부는 성자들을 보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가르침에 인도되지 못하고 참된 사람들을 보지 못하고 참된 사람의 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참된 사람의 가르침에 인도되지 못하여, 느낌을 자아라고 여기고, 느낌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여기고, 느낌이 자아 안에 있다고 여기고, 느낌 안에 자아가 있다고 여깁니다. 


도반 야마까여, 그와 같이 배우지 못한 범부는 성자들을 보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가르침에 인도되지 못하고 참된 사람들을 보지 못하고 참된 사람의 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참된 사람의 가르침에 인도되지 못하여, 인식을 자아라고 여기고, 인식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여기고, 인식이 자아 안에 있다고 여기고, 인식 안에 자아가 있다고 여깁니다. 


도반 야마까여, 그와 같이 배우지 못한 범부는 성자들을 보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가르침에 인도되지 못하고 참된 사람들을 보지 못하고 참된 사람의 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참된 사람의 가르침에 인도되지 못하여, 형성을 자아라고 여기고, 형성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여기고, 형성이 자아 안에 있다고 여기고, 형성 안에 자아가 있다고 여깁니다. 


도반 야마까여, 그와 같이 배우지 못한 범부는 성자들을 보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가르침에 인도되지 못하고 참된 사람들을 보지 못하고 참된 사람의 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참된 사람의 가르침에 인도되지 못하여, 의식을 자아라고 여기고 의식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여기고 의식이 자아 안에 있다고 여기고, 의식 안에 자아가 있다고 여깁니다.”


20. “도반 야마까여, 그는 ‘물질은 무상하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느낌은 무상하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인식은 무상하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형성은 무상하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의식은 무상하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합니다.”


21. “도반 야마까여, 그는 ‘물질은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느낌은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인식은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형성은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의식은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합니다.”


22. “도반 야마까여, 그는 ‘물질은 무아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느낌은 무아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인식은 무아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형성은 무아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의식은 무아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합니다.”


23. “도반 야마까여, 그는 ‘물질은 형성되었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느낌은 형성되었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인식은 형성되었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형성은 형성되었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의식은 형성되었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합니다.”


24. “도반 야마까여, 그는 ‘물질은 살인자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느낌은 살인자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인식은 살인자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형성은 살인자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의식은 살인자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합니다.”


25. “도반 야마까여, 그는 물질을 가까이하고 취착하고 ‘나의 자아다.’라고 고집합니다. 그는 느낌을 가까이하고 취착하고 ‘나의 자아다.’라고 고집합니다. 그는 인식을 가까이하고 취착하고 ‘나의 자아다.’라고 고집합니다. 그는 형성을 가까이하고 취착하고 ‘나의 자아다.’라고 고집합니다. 그는 의식을 가까이하고 취착하고 ‘나의 자아다.’라고 고수합니다. 


이처럼 취착의 다섯 가지 무더기를 가까이하고 취착하여 그에게는 오랜 세월 손해가 있고 괴로움이 있게 됩니다.”


26. “도반 야마까여, 그러나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성자들을 보고 성스러운 법을 알고 성스러운 가르침에 인도되고 참된 사람들을 보고 참된 사람의 법을 알고 참된 사람의 가르침에 인도되어, 물질을 자아라고 여기지 않고, 물질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여기지 않고, 물질이 자아 안에 있다고 여기지 않고, 물질 안에 자아가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도반 야마까여, 그러나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성자들을 보고 성스러운 법을 알고 성스러운 가르침에 인도되고 참된 사람들을 보고 참된 사람의 법을 알고 참된 사람의 가르침에 인도되어, 느낌을 자아라고 여기지 않고, 느낌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여기지 않고, 느낌이 자아 안에 있다고 여기지 않고, 느낌 안에 자아가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도반 야마까여, 그러나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성자들을 보고 성스러운 법을 알고 성스러운 가르침에 인도되고 참된 사람들을 보고 참된 사람의 법을 알고 참된 사람의 가르침에 인도되어, 인식을 자아라고 여기지 않고, 인식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여기지 않고, 인식이 자아 안에 있다고 여기지 않고, 인식 안에 자아가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도반 야마까여, 그러나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성자들을 보고 성스러운 법을 알고 성스러운 가르침에 인도되고 참된 사람들을 보고 참된 사람의 법을 알고 참된 사람의 가르침에 인도되어, 형성을 자아라고 여기지 않고, 형성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여기지 않고, 형성이 자아 안에 있다고 여기지 않고, 형성 안에 자아가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도반 야마까여, 그러나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성자들을 보고 성스러운 법을 알고 성스러운 가르침에 인도되고 참된 사람들을 보고 참된 사람의 법을 알고 참된 사람의 가르침에 인도되어, 의식을 자아라고 여기지 않고, 의식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여기지 않고, 의식이 자아 안에 있다고 관찰하지 않고, 의식 안에 자아가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27. “도반 야마까여, 그는 ‘물질은 무상하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느낌은 무상하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인식은 무상하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형성은 무상하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의식은 무상하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압니다.”


28. “도반 야마까여, 그는 ‘물질은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느낌은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인식은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형성은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의식은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압니다.”


29. “도반 야마까여, 그는 ‘물질은 무아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느낌은 무아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인식은 무아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형성은 무아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의식은 무아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압니다.”


30. “도반 야마까여, 그는 ‘물질은 형성되었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느낌은 형성되었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인식은 형성되었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형성은 형성되었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의식은 형성되었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압니다.”


31. “도반 야마까여, 그는 ‘물질은 살인자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느낌은 살인자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인식은 살인자다’라고 있는 그래도 꿰뚫어 알고, ‘형성은 살인자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의식은 살인자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압니다.”


32. “도반 야마까여, 그는 물질을 가까이 하지 않고 취착하지 않고 ‘나의 자아다.’라고 고집하지 않습니다. 

도반 야마까여, 그는 느낌을 가까이 하지 않고 취착하지 않고 ‘나의 자아다.’라고 고집하지 않습니다. 

도반 야마까여, 그는 인식을 가까이 하지 않고 취착하지 않고 ‘나의 자아다.’라고 고집하지 않습니다. 

도반 야마까여, 그는 형성을 가까이 하지 않고 취착하지 않고 ‘나의 자아다.’라고 고집하지 않습니다. 그는 의식을 가까이 하지 않고 취착하지 않고 ‘나의 자아다.’라고 고수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취착의 다섯 가지 무더기를 가까이 하지 않고 취착하지 않기 때문에 그에게는 오랜 세월 이익이 있고 행복이 있게 됩니다.”


33. “도반 사리뿟따여, 참으로 존자들은 이처럼 동료 수행자를 연민하고 동료 수행자의 이로움을 원하여 교계하고 가르침을 베푸는 그런 분들입니다. 저는 사리뿟따 존자가 베푸신 이러한 설법을 듣고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하였습니다.”


34. “사리뿟따 존자는 이렇게 설하였고 야마까 존자는 마음이 흡족해져서 사리뿟따 존자의 가르침을 크게 기뻐하였다.


아누라다 경(S22:86)

Anurādha-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웨살리의 큰 숲[大林]에 있는 중각강당에 머물고 계셨다.


2. 그 무렵 아누라다 존자는 세존으로부터 멀지 않은 숲 속의 토굴에 머물고 있었다. 그때 많은 외도 유행승들이 아누라다 존자에게 찾아갔다. 가서는 아누라다 존자와 함께 환담을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나누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외도 유행승들은 아누라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3. “벗이여, 아누라다여, 그분 여래는 최상의 사람이며, 최고의 사람이며, 최고에 도달한 분입니다. 여래는 이러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여래는 죽고 난 후에도 존재한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이러한 네 가지 경우로 천명하십니다.”


4. “이렇게 말하자 아누라다 존자는 외도 유행승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벗들이여, 그분 여래는 최상의 사람이며, 최고의 사람이며, 최고에 도달한 분입니다. 그러나 여래는 이러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여래는 죽고 난 후에도 존재한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이러한 네 가지 경우로 천명하시지 않습니다.”


5. 이렇게 말하자 외도 유행승들은 아누라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비구는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신참인 모양이다. 만일 장로라면 어리석고 우둔한 자일 것이다.”


6. 외도 유행승들은 이렇게 아누라다 존자에게 신참이라는 말과 어리석다는 말로 모욕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갔다.

외도 유행승들이 나간 지 오래지 않아서 아누라다 존자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 외도 유행승들이 나에게 더 질문을 했더라면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세존께서 설하신 것과 일치하여, 세존을 거짓으로 헐뜯지 않고 세존께서 설하신 것을 반복하여 설한 것이 될까? 세존께서 설했다고 전해진 이것을 반복하더라도 어떤 동료수행자도 나쁜 견해에 빠져 비난의 조건을 만나지 않게 될까?’라고.


7. 그러자 아누라다 존자는 세존께 찾아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누라다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으로부터 멀지 않은 숲속의 토굴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때 많은 외도 유행승들이 제게 찾아 왔습니다. 함께 환담을 나누고 유쾌하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나누고 한 곁에 앉았습니다. 한 곁에 앉은 외도 유행승들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벗이여, 아누라다여, 그분 여래는 최상의 사람이며, 최고의 사람이며, 최고에 도달한 분입니다. 여래는 이러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여래는 죽고 난 후에도 존재한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이러한 네 가지 경우로 천명하십니다.’


이렇게 말하자 저는 외도 유행승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벗들이여, 그분 여래는 최상의 사람이며, 최고의 사람이며, 최고에 도달한 분입니다. 여래는 이러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여래는 죽고 난 후에도 존재한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이러한 네 가지 경우로 천명하시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자 외도 유행승들은 제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비구는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신참인 모양이다. 만일 장로라면 어리석고 우둔한 자일 것이다.’


외도 유행승들은 이렇게 제게 신참이라는 말과 어리석다는 말로 모욕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습니다. 외도 유행승들이 나간 지 오래지 않아서 제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일 그 외도 유행승들이 나에게 더 질문을 했더라면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세존께서 설하신 것과 일치하여, 세존을 거짓으로 헐뜯지 않고 세존께서 설하신 것을 반복하여 설한 것이 될까? 세존께서 설했다고 전해진 이것을 반복하더라도 어떤 동료수행자도 나쁜 견해에 빠져 비난의 조건을 만나지 않게 될까?’라고.”


8. “아누라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누라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느낌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누라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인식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누라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형성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누라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의식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9. “아누라다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물질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열등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통찰지(지혜)로 보아야 한다.


아누라다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느낌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열등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통찰지(지혜)로 보아야 한다.


아누라다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인식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열등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통찰지(지혜)로 보아야 한다.


아누라다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형성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열등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통찰지(지혜)로 보아야 한다.


아누라다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의식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열등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통찰지(지혜)로 보아야 한다.”


10. “아누라다여, 이와 같이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염오하고) 느낌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인식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심리현상들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알음알이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염오하면서 탐욕이 사라지고, 탐욕이 사라지기 때문에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梵行)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11. “아누라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는 물질을 여래라고 관찰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누라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는 느낌을 여래라고 관찰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누라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는 인식을 여래라고 관찰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누라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는 형성을 여래라고 관찰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누라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는 의식을 여래라고 관찰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12. “아누라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는 물질 안에 여래가 있다고 관찰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누라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는 느낌 안에 여래가 있다고 관찰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누라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는  인식 안에 여래가 있다고 관찰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누라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는 형성 안에 여래가 있다고 관찰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누라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는 의식 안에 여래가 있다고 관찰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13. “아누라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는 물질과 느낌과 인식과 형성과 의식이 모두 합해진 것이 여래라고 관찰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14. “아누라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러면 그대는 물질도 아니요 느낌도 아니요 인식도 아니요 형성도 아니요 의식도 아닌 것이 여래라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15. “아누라다여, 이처럼 그대는 지금∙여기(현재)에서도 여래는 실재하고 견고하다고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대가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즉 ‘도반들이여, 그분 여래는 최상의 사람이며, 최고의 사람이며, 최고에 도달한 분입니다. 여래께서는 이러한 자신에 대해서 ‘여래는 죽고 난 후에도 존재한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이러한 네 가지 경우 가운데 하나로 천명하십니다.’라고.”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16. “훌륭하고 장하구나, 아누라다여. 아누라다여, 나는 이전에도 지금에도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을 가르치고 천명할 뿐이다.”


왁깔리 경(S22:87)

Vakkali-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의 대나무 숲에 있는 다람쥐 보호구역에 머물고 계셨다.


2. 그 무렵 왁깔리 존자는 도기공의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중병에 걸려 아픔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왁깔리 존자는 간병하는 비구들을 불러서 말했다.


3. “이리 오시오, 도반들이여, 그대들은 세존께 가시오. 가서는 나의 이름으로 세존의 발에 머리 조아려 절을 올리고 ‘세존이시여, 왁깔리 비구가 중병에 걸려 아픔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지금 그가 세존의 발에 머리 조아려 절을 올립니다.’라고 말씀드려 주시오. 그리고 다시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연민을 일으키시어 왁깔리 비구에게로 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여쭈어 주시오.”


4. “알겠습니다, 도반이여.”라고 그 비구들은 왁깔리 존자에게 대답한 뒤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비구들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왁깔리 비구가 중병에 걸려 아픔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지금 그가 세존의 발에 머리 조아려 절을 올립니다. 그리고 다시 말씀드립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연민을 일으키시어 왁깔리 비구에게로 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세존께서는 침묵으로 허락하셨다.


5. 세존께서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시고 왁깔리 존자에게로 가셨다. 왁깔리 존자는 세존께서 멀리서 오시는 것을 보고 침상에서 몸을 움직이며 일어날려고 하였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왁깔리 존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만 가만히 있거라, 왁깔리여. 침상에서 움직이지 말라. 여기에 마련된 자리가 있구나. 나는 앉아야겠다.”


6. “세존께서는 마련된 자리에 앉으셨다. 자리에 앉으신 뒤 세존께서는 왁깔리 존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왁깔리여, 어떻게 견딜만한가? 그대는 편안한가? 괴로운 느낌이 물러가고 더 심하지는 않는가? 차도가 있고 더 심하지 않다는 것을 알겠는가?”

“세존이시여, 저는 견디기가 힘듭니다. 편안하지 않습니다. 괴로운 느낌은 더 심하기만 하고 물러가지 않습니다. 더 심하기만 하고 차도가 없다고 알아질 뿐입니다.”


7. “왁깔리여, 그대는 후회할 일이 있는가? 그대는 자책할 일이 있는가?”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후회할 일이 적지 않고 자책할 일이 적지 않습니다.”

“왁깔리여, 그러면 그대는 계행에 대해서 자신을 비난할 일을 하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계행에 대해서 자신을 비난할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왁깔리여, 만일 계행에 대해서 자신을 비난할 일을 하지 않았다면 그대는 무엇을 후회하고 무엇을 자책하는가?”

“세존이시여, 저는 오랫동안 세존을 친견하러 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몸은 이제 세존을 친견하러 갈만한 힘마저도 없습니다.”


8. “왁깔리여, 그만 하여라. 그대가 썩어문드러질 이 몸을 봐서 무엇 하겠는가? 왁깔리여,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왁깔리여, 법을 볼 때 나를 보고 나를 볼 때 법을 보기 때문이다.”


9. “왁깔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왁깔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느낌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왁깔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인식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왁깔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형성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왁깔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의식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10. “왁깔리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물질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열등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통찰지(지혜)로 보아야 한다.


왁깔리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느낌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열등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통찰지(지혜)로 보아야 한다.


왁깔리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인식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열등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통찰지(지혜)로 보아야 한다.


왁깔리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형성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열등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통찰지(지혜)로 보아야 한다.


왁깔리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의식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열등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통찰지(지혜)로 보아야 한다.”


11. “왁깔리여, 이와 같이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에 대해서도 염오(싫어하여 떠나고)하고느낌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인식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형성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의식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염오하면서 탐욕이 사라지고, 탐욕이 사라지기 때문에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梵行)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12. 세존께서는 왁깔리 존자에게 법을 설하시고 격려하시고 분발하게 하시고 기쁘게 하신 뒤 자리에서 일어나 독수리봉 산으로 가시었다. 그러자 왁깔리 존자는 세존께서 나가신지 오래되지 않아 간병하는 비구들을 불러서 말했다.

“이리 오시오, 도반들이여. 나를 침상째 들어서 이시길리 산비탈의 검은 바위로 옮겨다 주시오. 어찌 나와 같은 자가 집안에서 임종할 생각을 하겠소”

“그렇게 하겠습니다, 도반이여.”라고 비구들은 왁깔리 존자에게 대답한 뒤 왁깔리 존자를 침상째 들어서 이시길리 산비탈의 검은 바위로 옮겨다 놓았다.


13. 세존께서는 그날 밤을 독수리봉 산에서 머무셨다. 그날 두 천신이 밤이 깊었을 때 아주 멋진 모습을 하고 온 독수리봉 산을 환하게 밝히면서 세존께 다가갔다. 다가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린 뒤 한 곁에 섰다. 한 곁에 서서 한 신이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왁깔리 비구는 해탈하고자 의도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다른 신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그는 반드시 원만하게 해탈한 사람으로 해탈할 것입니다.”

두 신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이렇게 말씀드린 뒤 세존께 절을 올리고 오른쪽으로 돌아 경의를 표한 뒤에 거기서 사라졌다.


14. 세존께서는 그 밤이 지나자 비구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왁깔리 비구에게 가라. 가서는 왁깔리 비구에게 이렇게 말하라. 

‘도반 왁깔리여, 세존의 말씀과 두 천신의 말을 들으시오. 

도반 왁깔리여, 어젯밤에 두 천신이 밤이 깊었을 때 아주 멋진 모습을 하고 온 독수리봉 산을 환하게 밝히면서 세존께 다가갔습니다. 다가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린 뒤 한 곁에 서서 한 신이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왁깔리 비구는 해탈하고자 의도하고 있습니다.’라고. 그러자 다른 신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는 반드시 원만하게 해탈한 자로 해탈할 것입니다.’라고. 

그리고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왁깔리여, 두려워하지 말라. 왁깔리여, 두려워하지 말라. 그대의 죽음은 죄악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죄짓는 자로 임종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16.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대답한 뒤 왁깔리 비구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왁깔리 비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왁깔리여, 세존의 말씀과 두 천신의 말을 들으시오.”

그러자 왁깔리 존자는 간병하는 비구들을 불러서 말했다. 

“오시오, 도반들이여. 나를 침상에서 내려 주시오. 어찌 나와 같은 사람이 높은 자리에 앉아서 그분 세존의 교법을 들을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도반이여.”라고 비구들은 왁깔리 존자에게 대답한 뒤 왁깔리 존자를 침상에서 내려놓았다.


16. “도반이여, 어젯밤에 두 천신이 밤이 깊었을 때 아주 멋진 모습을 하고 온 독수리봉 산을 환하게 밝히면서 세존께 다가갔습니다. 다가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린 뒤 한 곁에 서서 한 신이 세존꼐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왁깔리 비구는 해탈하고자 의도하고 있습니다.’라고. 그러자 다른 신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는 반드시 원만하게 해탈한 자로 해탈할 것입니다.’라고. 

그리고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왁깔리여, 두려워하지 말라. 왁깔리여, 두려워하지 말라. 그대의 죽음은 죄악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죄짓는 자로 임종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17. “도반들이여, 그렇다면 나의 이름으로 세존의 발에 머리를 조아려 절을 올려주시고, ‘세존이시여, 왁깔리 비구가 중병에 걸려 아픔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지금 그가 세존의 발에 머리 조아려 절을 올립니다.’라고 말씀드려 주십시오. 그리고 다시 이렇게 말씀드려주십시오.

‘세존이시여, 저는 물질은 무상하다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라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저는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법에 대해서 제 자신이 욕구나 탐욕이나 애정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느낌은 무상하다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라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저는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법에 대해서 제 자신이 욕구나 탐욕이나 애정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인식은 무상하다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라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저는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법에 대해서 제 자신이 욕구나 탐욕이나 애정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형성은 무상하다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라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저는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법에 대해서 제 자신이 욕구나 탐욕이나 애정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의식은 무상하다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라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저는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법에 대해서 제 자신이 욕구나 탐욕이나 애정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습니다.’라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도반이여.”라고 비구들은 왁깔리 존자에게 대답한 뒤 물러갔다.


18. 왁깔리 존자는 비구들이 물러간 지 오래지 않아서 칼을 사용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 그러자 비구들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린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비구들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왁깔리 비구가 중병에 걸려 아픔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지금 그가 세존의 발에 머리 조아려 절을 올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물질이 무상하다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라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저는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법에 대해서 제 자신이 욕구나 탐욕이나 애정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느낌은 무상하다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라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저는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법에 대해서 제 자신이 욕구나 탐욕이나 애정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인식은 무상하다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라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저는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법에 대해서 제 자신이 욕구나 탐욕이나 애정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형성은 무상하다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라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저는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법에 대해서 제 자신이 욕구나 탐욕이나 애정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의식은 무상하다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라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저는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법에 대해서 제 자신이 욕구나 탐욕이나 애정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습니다.’”


20.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이시길리 산비탈의 검은 바위로 가자. 거기서 좋은 가문의 아들 왁깔리가 칼을 사용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많은 비구들과 함께 이시길리 산비탈의 검은 바위로 가셨다. 거기서 세존께서는 왁깔리 존자가 침상 위에서 몸통이 거꾸로 된 채로 엎드려 있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자욱한 연기와 어둠의 소용돌이가 동쪽으로 움직이고 서쪽으로 움직이고 북쪽으로 움직이고 남쪽으로 움직이고 위로 움직이고 아래로 움직이고 각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21. 그러자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여기 자욱한 연기와 어둠의 소용돌이가 동쪽으로 움직이고 북쪽으로 움직이고 남쪽으로 움직이고 위로 움직이고 아래로 움직이고 각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이것은 사악한 마라가 ‘좋은 가문의 아들 왁깔리의 의식은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라고 좋은 가문의 아들 왁깔리의 의식을 찾고 있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좋은 가문의 아들 왁깔리는 의식은 그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앗사지 경(S22:88)

Assaji-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의 대나무 숲에 있는 다람쥐 보호구역에 머물고 계셨다.


2. 그 무렵 앗사지 존자는 깟사빠까 원림에 머물고 있었는데 중병에 걸려 아픔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앗사지 존자는 간병하는 비구들을 불러서 말했다. 


3. “이리 오시오, 도반들이여. 그대들은 세존께 가시오. 가서는 나의 이름으로 세존의 발에 머리 조아려 절을 올리고 ‘세존이시여, 앗사지 비구가 중병에 걸려 아픔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지금 그가 세존의 발에 머리 조아려 절을 올립니다.’라고 말씀드려 주시오. 그리고 다시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연민을 일으키시어 앗사지 비구에게로 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여쭈어 주시오.”

“알겠습니다, 도반이여.”라고 그 비구들은 앗사지 존자에게 대답한 뒤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비구들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4. “세존이시여, 앗사지 비구가 중병에 걸려 아픔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지금 그가 세존의 발에 머리 조아려 절을 올립니다. 그리고 다시 말씀드립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연민을 일으키시어 앗사지 비구에게로 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세존께서는 침묵으로 허락하셨다.


5. 세존께서는 해거름에 낮 동안의 홀로 선정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나 앗사지 존자에게로 가셨다. 앗사지 존자는 세존께서 멀리서 오시는 것을 보고 침상에서 몸을 움직여 일어 날려고 하였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앗사지 존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만히 있어라, 앗사지여. 침상에서 움직이지 말라. 여기에 마련된 자리가 있구나. 나는 앉아야겠다.”

세존께서는 마련된 자리에 앉으셨다. 자리에 앉으신 뒤 세존께서는 앗사지 존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6. “앗사지여, 어떻게 견딜만한가? 그대는 편안한가? 괴로운 느낌이 물러가고 더 심하지는 않는가? 차도가 있고 더 심하지 않다는 것을 알겠는가?”

“세존이시여, 저는 견디기가 힘듭니다. 편안하지 않습니다. 괴로운 느낌은 더 심하기만 하고 물러가지 않습니다. 더 심하기만 하고 물러가지 않는다고 알아질 뿐입니다.”

“앗사지여, 그대는 후회할 일이 있는가? 그대는 자책할 일이 있는가?”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후회할 일이 적지 않고 자책할 일이 적지 않습니다.”

“앗사지여, 그러면 그대는 계행에 대해서 자신을 비난할 일을 하였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계행에 대해서 자신을 비난할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7. “앗사지여, 만일 계행에 대해서 자신을 비난할 일을 하지 않았다면 그대는 무엇을 후회하고 무엇을 자책하는가?”

“세존이시여, 전에 제가 아팠을 때는 몸의 작용을 계속적으로 고요하게 하면서 제4선에 들어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삼매에 들지 못합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그런 삼매에 들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쇠퇴하지 않기를’이라는 생각이 일어납니다.”

“앗사지여, 삼매를 수행의 중심으로 여기고 삼매를 사문의 결실이라 여기는 사문이나 바라문들은 삼매에 들지 못하면 그들에게 ‘우리는 쇠퇴하지 않기를.’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8. “앗사지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앗사지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느낌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앗사지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인식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앗사지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형성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앗사지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의식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9. “앗사지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물질이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열등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통찰지로 보아야 한다.


앗사지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느낌이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열등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통찰지로 보아야 한다.


앗사지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인식이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열등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통찰지로 보아야 한다.


앗사지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형성이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열등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통찰지로 보아야 한다.


앗사지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의식이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열등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통찰지로 보아야 한다.”


10. “앗사지여, 이와 같이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염오하고) 느낌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인식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심리현상들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알음알이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염오하면서 탐욕이 사라지고, 탐욕이 사라지기 때문에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梵行)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11. “앗사지여, 만일 그가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 그는 그것이 무상한 줄 꿰뚫어 안다. 그것이 연연할 것이 못되는 줄 꿰뚫어 안다. 그것이 즐길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꿰뚫어 안다. 

앗사지여, 만일 그가 괴로운 느낌을 느끼면 그는 그것이 무상한 줄 꿰뚫어 안다. 그것이 연연할 것이 못되는 줄 꿰뚫어 안다. 그것이 즐길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꿰뚫어 안다. 

앗사지여, 만일 그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 그는 그것이 무상한 줄 꿰뚫어 안다. 그것이 연연할 것이 못되는 줄 꿰뚫어 안다. 그것이 즐길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꿰뚫어 안다.

앗사지여, 만일 그가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 그는 그것에 묶이지 않고 그것을 느낀다. 만일 괴로운 느낌을 느끼면 그것에 묶이지 않고 그것을 느낀다. 만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 그것에묶이지 않고 그것을 느낀다.”


12. “그는 몸이 무너지는 느낌을 느끼면서는 ‘나는 지금 몸이 무너지는 느낌을 느낀다.’라고 꿰뚫어 안다. 목숨이 끊어지는 느낌을 느끼면서는 ‘나는 지금 목숨이 끊어지는 느낌을 느낀다.’라고 꿰뚫어 안다. 그리고 그는 ‘지금 곧 이 몸 무너져 목숨이 끊어지면, 즐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모든 느낌들도 싸늘하게 식고 말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13. “앗사지여, 예를 들면 기름을 조건(원인)으로 심지를 조건하여 기름 등불이 탄다 하자. 거기에다 어떤 사람이 시시때때로 기름을 부어넣지 않고 심지를 올려주지 않으면 그 기름 등불은 꺼질 것이다. 

앗사지여, 그와 같이 비구는 몸이 무너지는 느낌을 느끼면서는 ‘나는 몸이 무너지는 느낌을 느낀다.’라고 꿰뚫어 안다. 목숨이 끊어지는 느낌을 느끼면서는 ‘나는 지금 목숨이 끊어지는 느낌을 느낀다.’라고 꿰뚫어 안다. 그리고 그는 ‘지금 몸이 무너져 목숨이 끊어지면, 즐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모든 느낌들도 싸늘하게 식고 말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케마까 경(S22:89)

Khemaka-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많은 장로 비구들이 꼬삼비에서 고시따 원림에 머물렀다.


2. 그 무렵 케마까 존자는 도기공의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중병에 걸려 아픔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장로 비구들은 저녁 무렵에 삼매에서 깨어나 일어나 다사까 존자를 불러서 말했다.


3. “이리 오시오, 도반 다사까여. 그대는 케마까 비구에게 가시오. 가서는 케마까 비구에게 이렇게 말하시오. ‘도반이여, 장로 비구들이 그대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도반이여, 어떻게 견딜만합니까? 그대는 편안합니까? 괴로운 느낌이 물러가고 더 심하지는 않습니까? 차도가 있고 더 심하지 않다는 것을 알겠습니까?’’라고.”


4. “그렇게 하겠습니다, 도반들이여.”라고 다사까 존자는 장로 비구들에게 대답한 뒤 케마까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케마까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이여, 장로 비구들이 그대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도반이여, 어떻게 견딜만합니까? 그대는 편안합니까? 괴로운 느낌이 물러가고 더 심하지는 않습니까? 차도가 있고 더 심하지 않다는 것을 알겠습니까?’라고.”

“도반이여, 나는 견디기가 힘듭니다. 편안하지 않습니다. 괴로운 느낌은 더 심하기만 하고 물러가지 않습니다. 더 심하기만 하고 물러가지 않는다고 알아질 뿐입니다.”


5. 그러자 다사까 존자는 장로 비구들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장로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들이여, 케마까 비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도반들이여, 나는 견디기가 힘듭니다. 편안하지 않습니다. 괴로움이 더 심하기만 하고 물러가지 않습니다. 더 심하기만 하고 물러가지 않는다고 알아질 뿐입니다.’라고.”


그러자 장로 비구들은 다사까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리 오시오, 다사까여. 그대는 케마까 비구에게 가시오. 가서는 케마까 비구에게 이렇게 말하시오. ‘도반 케마까여, 장로 비구들이 그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도반 케마까여, 세존께서는 취착의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를 설하셨나니 취착의 물질의 무더기, 취착의 느낌의 무더기, 취착의 인식의 무더기, 취착의  형성의 무더기, 취착의 의식의 무더기입니다. 그런데 케마까 존자는 이러한 취착의 다섯 가지 무더기 가운데 어떤 것을 자아라거나 자아에 속하는 것이라고 관찰합니까?’라고”


6. “그렇게 하겠습니다, 도반들이여.”라고 다사까 존자는 장로 비구들에게 대답한 뒤 케마까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케마까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케마까여, 장로 비구들이 그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도반 케마까여, 세존께서는 취착의 다섯 가지 무더기를 설하셨나니 취착의 물질의 무더기, 취착의 느낌의 무더기, 취착의 인식의 무더기, 취착의  형성의 무더기, 취착의 의식의 무더기입니다. 그런데 케마까 존자는 이러한 취착의 다섯 가지 무더기 가운데 어떤 것을 자아라거나 자아에 속하는 것이라고 관찰합니까?’라고.”


“도반 다사까여, 세존께서는 취착의 다섯 가지 무더기를 설하셨나니 취착의 물질의 무더기, 취착의 느낌의 무더기, 취착의 인식의 무더기, 취착의  형성의 무더기, 취착의 의식의 무더기입니다. 그런데 나는 이러한 취착의 다섯 가지 무더기 가운데 어떤 것도 자아라거나 자아에 속하는 것이라고 관찰하지 않습니다.”


7. 다사까 존자는 장로 비구들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장로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들이여, 케마까 비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도반 다사까여여, 세존께서는 취착의 다섯 가지 무더기를 설하셨나니 취착의 물질의 무더기, 취착의 느낌의 무더기, 취착의 인식의 무더기, 취착의  형성의 무더기, 취착의 의식의 무더기입니다. 그런데 나는 이러한 취착의 다섯 가지 무더기 가운데 어떤 것도 자아라거나 자아에 속하는 것이라고 관찰하지 않습니다.’라고.”


“이리 오시오, 도반 다사까여. 그대는 케마까 비구에게 가시오. 가서는 케마까 비구에게 이렇게 말하시오. 

‘도반 케마까여, 장로 비구들이 그대에게 말합니다. 

‘도반 케마까여, 세존께서는 취착의 다섯 가지 무더기를 설하셨나니 취착의 물질의 무더기, 취착의 느낌의 무더기, 취착의 인식의 무더기, 취착의  형성의 무더기, 취착의 의식의 무더기입니다. 그런데 만일 케마까 존자가 이러한 취착의 다섯 가지 무더기 가운데 어떤 것도 자아라거나 자아에 속하는 것이라고 관찰하지 않는다면 케마까 존자는 번뇌 다한 아라한입니까?’라고.”


8. “그렇게 하겠습니다, 도반들이여.”라고 다사까 존자는 장로 비구들에게 대답한 뒤 케마까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케마까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케마까여, 장로 비구들이 그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도반 케마까여, 세존께서는 취착의 다섯 가지 무더기를 설하셨나니, 취착의 물질의 무더기, 취착의 느낌의 무더기, 취착의 인식의 무더기, 취착의 형성의 무더기, 취착의 의식의 무더기입니다. 그런데 만일 케마까 존자가 이러한 취착의 다섯 가지 무더기 가운데 어떤 것도 자아라거나 자아에 속하는 것이라고 관찰하지 않는다면 케마까 존자는 번뇌 다한 아라한입니까?’라고.”


“도반 다사까여, 세존께서는 취착의 다섯 가지 무더기를 설하셨나니, 취착의 물질의 무더기, 취착의 느낌의 무더기, 취착의 인식의 무더기, 취착의  형성의 무더기, 취착의 의식의 무더기입니다. 그런데 나는 이렇나 취착의 다섯 가지 무더기 가운데 어떤 것도 자아라거나 자아에 속한 것일고 관찰하지 않지만 나는 번뇌 다한 아라한은 아닙니다.

도반 다사까여, 그러나 나는 취착의 다섯 가지 무더기에 대해서 ‘나는 있다.’라는 헤아림과 분별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이들 가운데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이것이 나다.’라고는 관찰하지 않습니다.”


9. 다사까 존자는 장로 비구들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장로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들이여, 케마까 비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도반 다사까여, 세존께서는 취착의 다섯 가지 무더기를 설하셨나니 취착의 물질의 무더기, 취착의 느낌의 무더기, 취착의 인식의 무더기, 취착의 형성의 무더기, 취착의 의식의 무더기입니다. 그런데 나는 취착의 다섯 가지 무더기에 대해서 ‘나는 있다.’라는 헤아림과 분별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이들 가운데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이것이 나다.’라고는 관찰하지 않습니다.’라고.”


그러자 장로 비구들은 다사까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리 오시오, 도반 다사까여. 그대는 케마까 비구에게 가시오. 가서는 케마까 비구에게 이렇게 말하시오. 

‘도반 케마까여, 장로 비구들이 그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도반 케마까여, 그대는 ‘나는 있다.’라는 헤아림과 분별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물질을 두고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아니면 물질을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도반 케마까여, 장로 비구들이 그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도반 케마까여, 그대는 ‘나는 있다.’라는 헤아림과 분별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느낌을 두고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아니면 느낌을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도반 케마까여, 장로 비구들이 그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도반 케마까여, 그대는 ‘나는 있다.’라는 헤아림과 분별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인식을 두고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아니면 인식을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도반 케마까여, 장로 비구들이 그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도반 케마까여, 그대는 ‘나는 있다.’라는 헤아림과 분별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형성을 두고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아니면 형성을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도반 케마까여, 장로 비구들이 그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도반 케마까여, 그대는 ‘나는 있다.’라는 헤아림과 분별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의식을 두고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아니면 의식을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라고."


10. “그렇게 하겠습니다, 도반들이여.”라고 다사까 존자는 장로 비구들에게 대답한 뒤 케마까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케마까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케마까여, 장로 비구들이 그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도반 케마까여, 그대는 ‘나는 있다.’라는 헤아림과 분별이 사라지지는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물질을 두고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아니면 물질을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도반 케마까여, 그대는 ‘나는 있다.’라는 헤아림과 분별이 사라지지는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느낌을 두고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아니면 느낌을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도반 케마까여, 그대는 ‘나는 있다.’라는 헤아림과 분별이 사라지지는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인식을 두고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아니면 인식을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도반 케마까여, 그대는 ‘나는 있다.’라는 헤아림과 분별이 사라지지는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형성을 두고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아니면 형성을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도반 케마까여, 그대는 ‘나는 있다.’라는 헤아림과 분별이 사라지지는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의식을 두고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아니면 의식을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라고."


“도반 다사까여, 이 정도로 충분합니다. 왜 그대가 이 일로 왔다갔다해야 합니까? 

도반 다사까여, 지팡이를 주십시오. 내가 장로 비구들에게 직접 가겠습니다.”


11. 케마까 존자는 지팡이를 짚고 장로 비구들에게 찾아갔다. 가서는 장로 비구들과 환담을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나누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케마까 존자에게 장로 비구들은 이렇게 말했다.


“도반 케마까여, 그대는 ‘나는 있다.’라는 헤아림과 분별이 사라지지는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물질을 두고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아니면 물질을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그렇다면 그대는 느낌을 두고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아니면 물질을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그렇다면 그대는 인식을 두고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아니면 물질을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그대는 그대는 형성을 두고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아니면 물질을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그대는 그대는 의식을 두고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아니면 의식을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도반 케마까여, 그대가 ‘나는 있다.’라고 말할 때는 어떤 것을 두고 ‘나는 있다.’라고 합니까?”


12. 장로 비구들이 이렇게 말하자 케마까 존자는 장로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들이여, 나는 물질을 두고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고, 물질을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도반들이여, 나는 느낌을 두고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고, 물질을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도반들이여, 나는 인식을 두고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고, 물질을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도반들이여, 나는 형성을 두고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고, 물질을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도반들이여, 나는 의식을 두고 ‘나는 있다.’라고 말하지 않고, 의식을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도반들이여, 나는 취착의 다섯 가지 무더기에 대해서 ‘나는 있다.’라는 헤아림과 분별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이들 가운데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이것이 나다.’라고는 관찰하지 않습니다.


도반들이여, 예를 들면 청련이나 홍련이나 백련의 향기가 난다고 합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향기는 꽃잎에서 난다고 하거나 꽃자루에서 난다고 하거나 암술에서 난다고 한다면 그는 바르게 말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 께마까여.”

“도반들이여, 그렇다면 어떻게 설명해야 바르게 설명하는 것입니까?”

“도반 케마까여, 꽃에서 향기가 난다고 설명해야 바르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도반들이여, 그와 같이 나는 물질을 두고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고, 물질을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도반들이여, 그와 같이 나는 느낌을 두고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고, 물질을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도반들이여, 그와 같이 나는 인식을 두고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고, 물질을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도반들이여, 그와 같이 나는 형성을 두고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고, 물질을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도반들이여, 그와 같이 나는 의식을 두고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고, 의식을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도반들이여, 나는 취착의 다섯 가지무더기에 대해서 ‘나는 있다.’라는 헤아림과 분별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이들 가운데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이것이 나다.’라고는 관찰하지 않습니다.”


13.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에게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下分結]가 제거되었다 하더라도, 취착의 다섯 가지 무더기에 대한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자만과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욕구와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번뇌는 완전히 뿌리 뽑히지는 않습니다. 


도반들이여, 그는 나중에 취착의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들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하며 머뭅니다. ‘이것이 물질이다. 이것이 물질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물질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느낌이다. 이것이 느낌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느낌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인식이다. 이것이 인식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인식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형성이다. 이것이 형성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형성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의식이다. 이것이 의식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의식의 사라짐이다.’라고.


도반들이여, 그가 취착의 다섯 가지 무더기들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하며 머물 때 취착의 다섯 가지 무더기에 대한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자만과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욕구와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번뇌는 완전히 뿌리 뽑히게 됩니다.”


14. “도반들이여, 예를 들면 더럽고 때가 묻은 천이 있는데 주인이 그것을 세탁업자에게 맡긴다 합시다. 그러면 세탁업자는 그것을 소금물이나 잿물이나 쇠똥에 고루 비벼서 빤 뒤 맑은 물에 행굴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 천은 청정하고 깨끗하게 되었지만 미세한 소금물 냄새나 잿물 냄새나 쇠똥 냄새는 뿌리 뽑히지 않을 것입니다. 세탁업자가 이런 천을 주인에게 돌려주면 주인은 그 천을 냄새를 제거하는 상자에다 넣을 것입니다. 그러면 뿌리 뽑히지 않고 남아있던 미세한 소금물 냄새나 잿물 냄새나 쇠똥 냄새는 모두 뿌리 뽑히게 될 것입니다.”


도반들이여, 그와 같이 성스러운 제자에게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下分結]가 제거 되었다 하더라도, 취착의 다섯 가지 무더기에 대한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자만과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욕구와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번뇌는 완전히 뿌리 뽑히지는 않습니다. 


도반들이여, 그는 나중에 취착의 다섯 가지 무더기들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하며 머뭅니다. ‘이것이 물질이다. 이것이 물질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물질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느낌이다. 이것이 느낌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느낌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인식이다. 이것이 인식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인식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형성이다. 이것이 형성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형성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의식이다. 이것이 의식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의식의 사라짐이다.’라고.


도반들이여, 그가 취착의  다섯 가지 무더기들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하며 머물 때 취착의 다섯 가지 무더기에 대한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자만과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욕구와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번뇌는 완전히 뿌리 뽑히게 됩니다.”


15. 이렇게 말하자 장로 비구들은 케마까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케마까 존자를 성가시게 하려고 이런 질문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케마까 존자는 그분 세존의 교법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가르치고 천명하고 확립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명확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케마까 존자는 그분 세존의 교법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가르치고 천명하고 확립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명확하게 하였습니다.”


16. 케마까 존자의 말을 들은 장로 비구들은 이처럼 마음이 흡족해져서 케마까 존자의 말을 크게 기뻐하였다.


17. 이 상세한 설명이 설해졌을 때 60명의 장로 비구와 케마까 존자는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하였다.


찬나 경(S22:90)

Channa-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많은 장로 비구들이 바라나시의 이시빠따나에 있는 사슴동산에 머물고 있었다.


2. 그 무렵 찬나 존자는 저녁 무렵에 삼매에서 깨어나 장로들이 모여 있는 곳을 찾아 다녔다.


3. “장로 존자들께서는 저를 가르쳐 주십시오.장로 존자들께서는 제가 법을 볼 수 있도록 제게 가르침을 설해 주십시오.”


4. 이렇게 말하자 장로 비구들은 찬나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찬나여, 물질은 무상하고 느낌은 무상하고 인식은 무상하고 형성은 무상하고 의식은 무상합니다. 물질은 무아고 느낌은 무아고 인식은 무아고 형성은 무아고 의식은 무아입니다.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상[諸行無常] 모든 법들은 무아입니다.[諸法無我]. 


5. 찬나 존자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물질은 무상하고 느낌은 무상하고 인식은 무상하고 형성은 무상하고 의식은 무상하다. 

물질은 무아고 느낌은 무아고 인식은 무아고 형성은 무아고 의식은 무아다.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상하고[諸行無常] 모든 법들은 무아다[諸法無我]’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모든 형성된 것들이 끊어짐, 모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림, 갈애의 멸진, 탐욕의 사라짐, 소멸, 열반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확신하지 못한다. 대신에 초조함에 기인한 취착이 생겨서 나의 마음은 ‘그런데 도대체 누가 나의 자아인가?’라는 것으로 다시 되돌아오고 더 이상 넘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법을 본 사람에게는 이런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누가 나로 하여금 법을 볼 수 있도록 나에게 법을 설해줄 것인가?’


6. 그러자 찬나 존자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난다 존자는 스승께서 칭찬하셨고 지혜로운 동료 수행자들이 존중한다. 지금 아난다 존자는 꼬삼비에서 고시따 원림에 머물고 있다. 아난다 존자는 나로 하여금 법을 볼 수 있도록 나에게 법을 설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난다 존자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있다. 그러니 나는 아난다 존자에게 가야겠다.’


찬나 존자는 거처를 잘 정리한 뒤에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꼬삼비에 있는 고시따 원림으로 아난다 존자를 찾아갔다. 가서는 아난다 존자와 함께 환담을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나누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찬나 존자는 아난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7. “도반 아난다여, 한 때에 나는 바라나시에서 이시빠따나의 승원에서 머물렀습니다. 나는 저녁 무렵에 삼매에서 장로들이 모여있는 곳을 찾아다니면서 ‘장로 존자들께서는 장로 존자들께서는 저를 가르쳐 주십시오. 장로 존자들께서는 제가 법을 볼 수 있도록 제게 가르침을설해주소서.’라고.


이렇게 말하자 장로 비구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도반 찬나여, 물질은 무상하고 느낌은 무상하고 인식은 무상하고 형성은 무상하고 의식은 무상합니다. 물질은 무아고 느낌은 무아고 인식은 무아고 형성은 무아고 의식은 무아입니다.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상하고[諸行無常] 모든 법들은 무아입니다[諸法無我].’라고.


그러자 나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도 ‘물질은 무상하고 느낌은 무상하고 인식은 무상하고 형성은 무상하고 의식은 무상하다. 물질은 무아고 느낌은 무아고 인식은 무아고 형성은 무아고 의식은 무아다.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상하고[諸行無常] 모든 법들은 무아다[諸法無我]’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모든 형성된 것들이 끊어짐, 모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림, 갈애의 멸진, 탐욕의 사라짐, 소멸, 열반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확신하지 못한다. 대신에 초조함에 기인한 취착이 생겨서 나의 마음은 ‘그런데 도대체 누가 나의 자아인가?’라는 것으로 다시 되돌아오고 더 이상 넘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법은 본 사람에게는 이런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누가 나로 하여금 법을 볼 수 있도록 나에게 법을 설해줄 것인가?’라고.


그러자 나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난다 존자는 스승께서 칭찬하셨고 지혜로운 동료 수행자들이 존중한다. 지금 아난다 존자는 꼬삼비에서 고시따 원림에 머물고 있다. 아난다 존자는 나로 하여금 법을 볼 수 있도록 나에게 법을 설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난다 존자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있다. 그러니 나는 아난다 존자에게 가야겠다.’라고.


아난다 존자께서는 저를 가르쳐 주십시오. 아난다 존자께서는 제가 법을 볼 수 있도록 제게 가르침을 설해 주십시오.”


8. “나는 찬나 존자의 말을 듣고 수행의 깊이 때문에 기쁩니다. 그러니 찬나 존자는 이제 스스로를 활짝 열었고 자신의 의심을 부수었습니다. 도반 찬나여,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대는 법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찬나 존자에게는 ‘내가 법을 알 수 있다고 하는구나!’라는 크고 광대한 희열과 환희가 생겼다.


9. “도반 찬나여, 나는 세존의 면전에서 깟짜나곳따 비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고 그것을 받아 지녔습니다.

‘깟짜야나여, 이 세상은 대부분 두 가지를 의지하고 있나니 그것은 있다는 관념과 없다는 관념이다.

깟짜야나여, 세상의 일어남을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는 자에게는 세상에 대한 없다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깟짜야나여, 세상의 소멸을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는 자에게는 세상에 대한 있다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깟짜야나여, 세상은 대부분 집착과 취착과 천착에 묶여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집착과 취착과 마음의 입각처와 번뇌에 속박되지 않기 때문에, ‘나의 자아’라고 가까이하지 않고 취착하지 않고 속박되지 않는다. 그는 ‘단지 괴로움이 일어날 뿐이고, 단지 괴로움이 소멸할 뿐이다.’라는데 대해서 의문을 가지지 않고 의심하지 않는다. 여기에 대한 그의 지혜는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다. 깟짜야나여, 이렇게 해서 바른 견해가 있게 된다. 


깟짜야나여, ‘모든 것은 있다.’는 이것이 하나의 극단이고 ‘모든 것은 없다.’는 이것이 두 번째 극단이다. 

깟짜야나여, 이러한 양 극단을 벗어나서 중도(바른 길. 팔정도)에 의해서 여래는 법을 설한다.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의도적 행위(행))이,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의식을 조건으로 정신∙물질(명색)이, 정신∙물질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가,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이,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과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있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발생한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하기 때문에 형성이 소멸하고, 형성이 소멸하기 때문에 의식이 소멸하고, 의식이 소멸하기 때문에 정신∙물질(명색)이 소멸하고, 정신∙물질이 소멸하기 때문에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고,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기 때문에 감각접촉이 소멸하고, 감각접촉이 소멸하기 때문에 느낌이 소멸하고, 느낌이 소멸하기 때문에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기 때문에 취착이 소멸하고, 취착이 소멸하기 때문에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기 때문에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하기 때문에 늙음∙죽음과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소멸한다.’”


10. “도반 아난다여, 참으로 그러합니다. 참으로 존자들은 이처럼 동료 수행자를 연민하고 그의 이로움을 원하여 충고하고 가르침을 베푸는 그런 분들입니다. 저는 아난다 존자가 베푸신 이러한 설법을 듣고 법을 올바로 알고 보았습니다.”


라훌라 경1(S22:91)

Rāhula-sutta  

1.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밧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2. 그 무렵 라훌라 존자가 세존께 찾아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라훌라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3. “세존이시여,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면 의식(지각)을 가진 이 몸과 밖의 모든 표상들에 대해 ‘나’라는 생각과 ‘내 것’이라는 생각과 자만의 번뇌들이 일어나지 않게 됩니까?”


4. “라훌라여, 그것이 어떠한 물질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열등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지혜)로 보아야 한다.


라훌라여, 그것이 어떠한 느낌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열등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아야 한다.


라훌라여, 그것이 어떠한 인식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열등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아야 한다.


라훌라여, 그것이 어떠한 형성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열등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아야 한다.


라훌라여, 그것이 어떠한 의식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열등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아야 한다.”


5. “라훌라여,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아야 의식을 가진 이 몸과 밖의 모든 표상들에 대하여 ‘나’라는 생각과 ‘내 것’이라는 생각과 자만의 번뇌들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


라훌라 경2(S22:92)

1.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밧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2. 그 무렵 라훌라 존자가 세존께 찾아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라훌라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3. “세존이시여,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아야  마음은 의식을 가진 이 몸과 밖의 모든 표상들에 대하여 ‘나’라는 생각과 ‘내 것’이라는 생각과 자만을 제거하게 되고, 여러 가지 차별된 생각을 뛰어넘어 원만하게 잘 해탈하게 됩니까?”


4. “라훌라여, 그것이 어떠한 물질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열등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본 뒤에 취착 없이 해탈한다.


라훌라여, 그것이 어떠한 느낌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열등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본 뒤에 취착 없이 해탈한다.


라훌라여, 그것이 어떠한 인식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열등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본 뒤에 취착 없이 해탈한다.


라훌라여, 그것이 어떠한 형성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열등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본 뒤에 취착 없이 해탈한다.


라훌라여, 그것이 어떠한 의식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열등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본 뒤에 취착 없이 해탈한다.”


5. “라훌라여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아야 마음은 의식을 가진 이 몸과 밖의 모든 표상들에 대하여 ‘나’라는 생각과 ‘내 것’이라는 생각과 자만을 제거하게 되고, 여러 가지 차별된 생각을 뛰어넘어 원만하게 잘 해탈하게 된다.”



제9장 장로 품이 끝났다. 아홉 번째 품에 포함된 경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① 아난다 ② 띳사 ③ 야마까 ④ 아누라다. ⑤ 왁깔리 ⑥ 앗사지 ⑦ 케마까 ⑧ 찬나 ⑨ ~ ⑩ 라훌라이다.



출처 : 붓다의 옛길
글쓴이 : 실론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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