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불교 Early Buddhism

[스크랩] 삶의 기술 : 위빠사나 명상

수선님 2018. 4. 15. 13:11

삶의 기술 : 위빠사나 명상


번역 : 정은성



우리 모두는 평화와 조화를 원한다. 아마도 우리의 인생에서 평화와 조화를 찾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자주 우리 모두는 혼란과 짜증, 부조화와 고통을 경험한다. 그리고 누군가 혼란으로 괴로울 때 그는 이 고통을 스스로에게만 한정시키지 않는다. 그는 그가 괴로운 만큼 다른 사람도 괴롭힌다. 이 불행한 사람의 주변 환경으로 혼란은 전염된다. 누구나 이 사람과 만나는 사람 역시 갑갑하고 혼란스러워진다. 분명한 건 이것은 잘 사는 길이 아니다.


누구나 스스로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는 다른 모든 이들과도 평화로워야 한다. 결국,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다. 그는 살기 위해서 그리고 다른 이들과 나누기 위해서 사회 안에서 살아야만 한다. 어떻게 우리는 평화롭게 살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는 우리들 스스로 조화로움을 유지하고 우리들 주위에 평화와 조화를 만들 수 있을까,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역시 평화롭고 조화롭게 살 수 있을까?


누군가 혼란스럽다면 혼란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 그는 고통의 원인이 되는 근본 원인을 알아야만 한다. 만약 그가 문제를 파헤친다면 분명해 질 것이다. 언제라도 그가 어떤 부정성과 번뇌를 마음속에서 일으키기 시작한다면 그는 혼란스러움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마음속의 부정성이나 정신적 더러움 혹은 불결은 평화와 조화와 함께 존재할 수 없다.


어떻게 부정성을 일으키기 시작하는가? 다시 한번 문제를 파헤쳐 보면 그것은 분명해진다. 누군가 내가 좋아하지 않는 방식의 행동을 할 때, 내가 좋아하지 않는 어떤 일이 일어날 때 나는 불행하게 된다. 원하지 않는 것들이 일어나면 나는 스스로 긴장하게 된다. 원하는 것들이 일어나지 않으면 불안이 생기게 되고, 그러면 다시 스스로 긴장을 만든다. 내 스스로 난관을 만들기 시작한다. 인생을 통해서 원하지 않는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원하는 일들은 생기거나 생기지 않는다. 연속해서 짓게 되는 이런 일련의 과정과 반응, 난제가 모든 정신적 육체적 구조를 매우 긴장되게 하고 지나치게 부정성으로 가득하게 만든다. 그 인생은 불행하게 된다.


자, 이제 이 문제를 푸는 하나의 방법은 나의 인생에서 원하지 않는 일은 일어나지 않게 준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들을 내가 원하는 바로 그대로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반드시 이 그런 힘을 키우거나 아니면 그런 힘을 가진 누군가가 내 인생에 나타나 원하지 않는 일은 일어나지 않게 하고 내가 원하는 모든 것만 일어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하다.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인생을 통틀어서 항상 모든 소원이 이루어지고 원하지 않는 어떤 것도 생기지 않는 삶을 살 수는 없다. 우리들의 욕망과 소원에 반대되는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래서 의문이 생긴다. 어떻게 하면 내가 원하지 않는 이런 것들을 대했을 때 맹목적으로 반응하지 않게 될까? 어떻게 하면 불안하지 않게 될까? 어떻게 평화로움과 조화로움을 유지할 수 있을까?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인도에서도 현명한 성스러운 사람들은 이 문제-인간의 고통의 문제-를 연구했다. 그리고 해결 방법을 발견했다. 만약 어떤 원하지 않는 것이 일어나 성냄과 두려움 혹은 어떤 부정성을 일으키기 시작했다면 그는 그 밖의 다른 어떤 것으로 주위를 돌려야만 한다. 예를 들어, 일어나 한 잔의 물을 들고 들이키기 시작한다면 당신의 분노는 더 이상 커지지 않고 가라앉게 될 것이다. 혹은 숫자를 세어본다. 하나, 둘, 셋, 넷. 혹은 한 단어나 경구, 아니면 어떤 주문이나 당신이 귀의하는 신이나 성자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를 수도 있다. 그러면 기분이 전환되거나 마음이 풀리게 될 것이다. 당신은 부정성과 성냄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이 방법은 도움이 된다. 효력이 있다. 지금도 계속해서 쓰인다. 이 방법을 수행하면 혼란으로부터 마음이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이 해결방법은 의식의 수준에서만 작용한다. 사실은 주의를 돌려 부정성을 무의식의 단계로 밀어 넣는 것이다. 그래서 무의식 단계에서 더러움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증가하는 것이다. 표면에서는 평화와 화합이 생긴다. 그러나 마음 깊숙한 곳에는 눌려져 있던, 곧 혹은 조금 뒤에 격렬한 폭발을 일으키게 될, 부정성의 화산이 잠들어 있는 것이다.


내면의 진리에 대한 다른 탐구자들은 계속해서 좀 더 다른 방법을 찾는다. 그들 스스로가 겪은 마음과 물질의 현실에 대한 경험으로, 문제로부터 오직 도망가는 길은 주위를 다른 데로 돌리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한다. 도망가는 것은 해결 방법이 아니다. 그는 문제에 맞서야만 한다. 언제든지 부정성이 마음속에서 일어 날 때 단지 그것을 관찰하고 정면으로 맞서라. 그런 정신적인 번뇌를 관찰하기 시작하자마자 그것은 힘을 잃게 될 것이다. 서서히 그것은 힘을 잃게 되고 뿌리가 뽑히게 될 것이다.


하나의 좋은 방법은 극단과 억제를 둘 다 피하고, 자유로움을 얻는 것이다. 무의식 속에 부정성을 가둬두는 것은 그것을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육체적으로나 말로써 부정성을 표출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더 많은 문제를 만들뿐이다. 그러나 만약에 그가 단지 바라본다면 번뇌는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가 부정성을 뿌리 뽑아버린다면 번뇌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근사하게 들린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로 도움이 될까? 평범한 사람에게 자신의 번뇌를 직면하는 일이 과연 쉬울까? 분노가 일어날 때, 그것은 너무나 빨리 우리를 지배해 버려 알아차리지도 못하게 된다. 그래서 분노에 지배당해 우리는 스스로와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는 육체적이거나 말로 확실한 행동을 저지르게 된다. 나중에 분노가 가라앉으면 우리는 울거나 뉘우친다. 잘못에 대한 용서를 타인이나 신에게 애걸하게 된다. '아,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나 다음에 이런 비슷한 경우가 생기면 우리는 또다시 같은 반응을 보인다. 후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문제의 어려움은 번뇌가 시작 될 때 내가 깨어 있지 못하는데 있다. 그것은 마음 깊숙이 무의식의 단계에 있다가 때가 되면 의식 수준으로 치고 올라오기 시작한다. 그것은 너무나 강렬한 힘이 되어 나를 압도해 버린다. 나는 그것을 관찰할 수 없다.


그렇다면 개인 비서를 둬야만 하겠다. 그래서 분노가 일어나면, 비서가 말할 것이다. '보세요. 선생님, 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분노가 언제 일어날지 알 수 없으므로 시간에 따라 세 명의 비서를 나눠서 둬야만 한다. 분노가 일어나기 시작했을 때 이런 노력을 들인다면, '선생님 보세요. 분노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면 먼저 나는 그를 찰싹 때리고 욕설을 퍼부을 것이다. '이 바보 같은 놈아, 나를 가르치라고 네게 돈을 지불하는 줄 아냐?' 그런 충고가 오히려 나를 너무나 화나게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어떻게 화를 참고 그를 때리는 대신에, "아주 고맙네. 이제 앉아서 내 분노를 관찰해야겠네." 라고 말한다. 그런다고 될까? 내가 두 눈을 감는 즉시 분노를 바라보기 시작하면, 나를 화나게 만들었던 사람이나 사건의 대상이 마음속에 바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분노 그 자체를 관찰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저 감정의 표피적인 자극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분노를 더 크게 만드는데 도움을 줄뿐이다. 이것은 해결 방법이 아니다. 분노를 일어나게 하는 외부적인 대상으로부터 추상적인 부정성이나 감정을 따로 떼어내어 그저 바라본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한 사람이 진정한 해결 방법을 찾아 완전한 진리에 이르렀다. 그는 마음속에 어떤 번뇌가 일어 날 때는 육체적 수준에서 동시에 두 종류가 같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하나는 호흡이 정상 리듬을 잃는다는 것이다. 언제라도 마음속에 부정성이 일어나면 우리의 호흡은 거칠어진다. 이것은 쉽게 관찰할 수가 있다. 다른 하나는 좀 더 미묘한 수준에서 어떤 종류의 생화학적인 반응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 어떤 감각. 모든 번뇌는 몸의 한 부분이나 다른 곳에서 어떤 감각이나 다른 감각들을 신체 내부에서 일으키게 될 것이다.


이것은 실용적인 해결방법이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마음속의 추상적인 번뇌 - 추상적인 공포, 분노, 열정 -를 관찰할 수가 없다. 그러나 올바른 훈련과 연습으로 호흡의 움직임과 육체적인 감각을 관찰하는 것은 매우 쉽다. 이 두 가지는 직접적으로 정신적 번뇌와 연결되어 있다.


호흡의 움직임과 감각은 두 가지 방법으로 나를 도울 것이다. 첫째는 이것들은 나의 개인 비서처럼 될 것이다. 번뇌가 마음에 일어나기 시작하자마자 내 호흡은 정상을 잃을 것이다. 그것은 외칠 것이다. '이것 봐, 뭔가 잘못되었잖아.' 나는 내 호흡을 때릴 수는 없다. 경고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비슷하게 감각도 내게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줄 것이다. 바로 이것이 경고다. 나의 호흡의 움직임과 감각을 바라보기 시작하자마자 매우 빨리 번뇌가 사라진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 육체와 정신의 현상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한 면에는, 마음속에 어떤 생각과 감정들이 일어나고 있다. 다른 면에는, 육체에 호흡의 움직임과 감각이 일어나고 있다. 어떤 생각이나 감정, 어떤 정신적 번뇌도 그 순간 호흡과 감각으로 명백히 드러난다. 비록 내가 호흡의 움직임과 감각을 관찰하고 있지만 사실은 정신적 번뇌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문제로부터 도망가는 대신에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번뇌가 힘을 잃는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더 이상 과거에 그랬듯이 번뇌가 나를 지배할 수 없다. 만약 내가 끝까지 이 방법을 지속한다면 번뇌는 자연스럽게 모두 사라져 평화와 행복만 남을 것이다.


이에 따르면, 자아 관찰의 이 방법은 정신적인 그리고 육체적인 두 양상의 진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전에는 항상 외부만 관찰했으므로 내면의 진실을 잊었다. 나는 항상 내가 불행한 이유를 밖에서 찾았다. 나는 항상 외부의 현실을 탓하고 변화시키려 했다. 내면의 진실을 무시했기 때문에 나는 결코 고통의 원인이 좋은 감각과 그렇지 못한 감각들에 대한 닥치는 대로의 반응 때문이란 걸 알지 못했다.


이제 훈련을 통해, 나는 동전의 다른 면도 볼 수가 있다. 나는 내 호흡에 대해서 깨어 있을 수 있고, 역시 내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이 호흡이든 감각이든 간에 마음의 균형을 잃지 않고 단지 그것을 바라보는 것을 배운다. 반응을 멈추고, 고통이 증가하는 것을 멈춘다. 대신에 번뇌가 명백해지고 사라지게 내버려둔다.


좀 더 이 방법을 연습한다면 조금 더 빨리 그는 부정성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알 것이다. 차차 마음은 번뇌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이다. 마음은 순수해질 것이다. 순수한 마음은, 모두를 위한 사심 없는 사랑과 실패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큰 자비심과 그들의 성공과 행복에 대해서 완전히 기뻐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완전히 평정한 모습을 항상 지킬 수 있는, 가득한 사랑을 갖게 한다.


누군가 이 단계에 이르면 그의 삶의 모습은 바뀐다. 더 이상 누군가의 평화와 행복을 방해하는 말이나 육체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대신, 평정한 마음은 단순히 평화로움 그 자체로 머물지 않고 다른 이들도 평화로울 수 있도록 돕는다. 그 사람 주위의 분위기는 평화와 조화로움이 스며들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이들도 감동시키게 된다.


내면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들을 직면했을 때 평정을 유지하는 것을 배움으로 해서 외부 상황에서 충돌하게 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초연함을 계발한다. 그러나 이 초연함은 세상의 문제에 대한 도피나 무관심은 아니다. 위빠사나 명상가는 세상의 고통으로부터 좀 더 예민해진다. 그리고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통해 어떤 혼란도 없이, 가득한 사랑의 마음과 자비와 평정심으로 그들의 고통을 줄이는데 최선을 다한다. 그는 성스러운 중립을 - 어떻게 하면 완전히 헌신적이며, 완전히 다른 이들을 도울 수 있는가를, 또한 그와 동시에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가를 배운다. 이렇게 그는 다른 사람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일하면서 그 스스로 평화와 행복 속에 머문다.


삶의 기술,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는 결코 어떤 종교나 어떤 '주의'도 만들거나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결코 그의 제자들에게 관습이나 의식, 어떤 맹목적이고 무의미한 형식들을 행하라고 지시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내면의 진실을 바라보는 것으로서, 단지 있는 그대로의 본질을 관찰하라고 가르쳤다. 자신과 다른 이를 괴롭히는 끊임없는 이러한 반응들의 무지에서 벗어나라.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바라보는 지혜가 시작될 때 반응하는 습관에서 벗어 날 수 있다. 맹목적인 반응을 멈추면, 평정된 마음과 진실을 알고 이해하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올바른 행동이 가능해 진다. 그러한 행동은 자신과 다른 이들을 위해 오직 긍정적이고 창조적이며 도움이 될 수 있다. 어떻게 해야 가능할까?


그것은 모든 현명한 사람들이 가르친 조언- '너 자신을 알라' 이다. 단지 지적인 수준이나 생각과 이론으로서가 아닌 스스로를 알아야만 한다. 또한 이 의미는 감정적이거나 헌신적인 뜻으로, 단순히 무조건 듣거나 읽어서 받아들여 아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런 지식은 충분하지가 않다. 그보다는 실제로 일어나는 진실을 알아야만 한다. 이 정신적 육체적 현상의 진실을 직접 경험해야만 한다. 이것만이 우리를 번뇌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도와줄 것이다.


스스로의 내면의 진실을 직접 경험하는 것, 자아를 바라보는 이 방법을 우리는 '위빠사나(Vipassana)' 명상이라고 부른다. 부처님이 살아 계실 때의 당시의 인도 언어로, 일반적인 의미로 빠사나passana는 두 눈을 뜨고 바라보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위빠사나의 의미는 단지 그것들이 보여지는 대로의 의미가 아니라, 그것들의 실체를 관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분명한 사실은 완전한 정신적 육체적 구조의 궁극의 진실에 도달할 때까지 뚫고 들어가야 한다. 이 진실을 경험했을 때, 맹목적인 반응과 번뇌를 멈추는 방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오래된 번뇌들도 점차 뿌리 뽑히게 될 것이다. 그는 모든 불행에서 벗어나 행복을 경험할 것이다.


위빠사나 코스를 통해서 세 가지 단계를 훈련한다. 첫째는 다른 사람들의 평화와 조화를 방해하는 어떤 육체적, 언어를 통한 행위도 금한다. 스스로 마음속에 번뇌를 가지고는 해탈하기 위해 일할 수 없다. 그와 동시에 단지 그러한 번뇌를 증가시키는 신체와 말을 통한 행위를 하면서 계속 해탈을 위해 일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도덕적 규범은 훈련의 기본적인 첫 번째 단계다. 살생하지 않기, 도둑질하지 않기, 잘못된 성행위를 하지 않기, 거짓말하지 않기, 그리고 중독성 물질을 섭취하지 않는 규범을 지킨다. 이런 행위의 절제에 의해서, 마음은 매우 충분히 가라앉게 되고, 힘든 일을 손아귀에 쥐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길들지 않은 마음을 '호흡'이라는 하나의 대상에 잡아매어 유지하는 훈련을 통해, 마음을 다스리는 단계로 발전한다. 숨이 들고 나는 것에 가능한 오래 동안 주의를 집중하도록 노력한다. 이것은 호흡훈련이 아니다. 규칙적으로 호흡을 할 필요는 없다. 대신에 들이쉬고 내쉬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런 호흡을 바라본다. 이 방법으로 마음은 좀 더 차분해져 더 이상 폭력적인 부정성에 지배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마음이 집중되어 내면의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예리하고 통찰력 있게 만들 것이다.


도의적인 삶을 사는 것과 마음의 집중인 처음의 이 두 단계는 매우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 자체로 유익하다. 그러나 스스로의 내면의 통찰력을 계발하여 번뇌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세 번째의 단계를 밟기 전에는 자기 억제로 이끌 뿐이다. 항상 - 변하는 마음 - 이 물질의 현상이, 명백히 자신의 내부 감각 그 자체로 나타남을 계획적이고 냉정히 바라보는 방법을 통해서, 스스로의 내면의 진실을 경험하는 이것이 '위빠사나' 이다. 스스로를 바라봄으로써 스스로를 정화해 가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극치이다.


이것은 나와 모두가 실행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고통의 문제를 안고 있다. 그것은 우주적인 질병이며, 종파를 떠난 우주적 치료가 필요하다. 누군가 분노로 괴로울 때, 그것은 불자의 분노도, 힌두의 분노도, 기독교인의 분노도 아니다. 분노는 분노일 뿐이다. 이 분노의 결과로 흥분하게 되었을 때, 이 흥분이 기독교인이거나, 힌두나, 불자는 아니다. 질병은 우주적이다. 치료도 역시 우주적이어야만 한다.


위빠사나는 그러한 치료법이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평화와 조화를 존중하는 삶의 규범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도 마음의 통제를 발전시키는 걸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도 부정성의 마음이 자유로울 수 있도록, 스스로의 내면의 진실을 통찰하도록 발전시키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위빠사나는 우주적인 길이다.


내면의 진실을 바라봄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바라보는 것은 - 이것은 스스로를 실질적으로, 경험적 차원에서 아는 것이다. 이것을 연습함으로써 번뇌의 불행으로부터 벗어나게 될 것이다. 무디고 외부적이며 눈에 보이는 진실로부터 마음과 물질의 명백한 진실을 꿰뚫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초월한다면 모든 번뇌로부터, 모든 불순물과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해탈한 진리, 마음과 물질의 너머에 있는, 시간과 공간의 너머에 있는, 연기법칙의 너머에 있는 진실을 경험할 것이다. 이 명백한 진리에 무슨 이름이 붙여지던지 아무 의미가 없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마지막 목표 지점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 완전한 진리를 경험하게 되기를.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번뇌와 불행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모든 사람들이 진정한 행복과, 진정한 평화와, 진정한 조화를 누리기를.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 위의 법문은 스위스 베른에서 고엔카지가 하신 것입니다.

 

출처 : 미주현대불교
글쓴이 : 별빛아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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