湯田豊『인도사상사』에서
나가르주나(Naagaarjuna,ca.150-250), 즉 龍樹의 대표적인 저술인『中論(Maadhyamika$aastra)』에 나타난 사상을 宣揚한 일군의 학파인 中觀派(M?dhyamika)의 사상을 말한다. 이 중관파는 唯識派와 더불어 대승불교철학의 2대 지주가 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중관파는 용수이후 그의 직제자인 아리야데바(AAryadeva)를 비롯하여 라후라바드라(Raahulabhadra), 바바비베카(Bhaavaviveka), 찬드라키르티(Candrakiirti), 즈냐나가르바(JNYaanagarbha), 샨타라크시타($aantarakSita)등으로 이어져 인도 대승불교사상의 큰 흐름을 형성시켜간다.
이러한 사상적 흐름을 시대적인 추이와 함께 고찰하여 오늘날 학자들은 중관파를 초기·중기·후기의 중관파로 구분한다. 곧 용수를 비롯한 직제자인 아리야데바등을 초기중관파로 구분하며, 용수의 『중론』에 주석을 가한 일군의 사상가를 중기중관파, 그리고 유식파를 비롯한 타학파와의 대립 가운데 중관의 입장에서 사상체계를 펼쳐나간 사상가들이 후기중관파이다.
이와같이 중관파의 역사적 전개에 있어 출발이 된 것이 다름아닌 용수의 『중론』으로, 용수는 이 『중론』외에도 10종이상의 저술을 남기고 있다. 따라서 그의 영향은 대승불교사상사에서 「8宗의 祖師」「제2의 佛陀」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거대한 足跡을 남기고 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큰 영향을 남긴 용수의 사상을 그의 주저인『중론』을 통해 살펴보고, 아울러 그 사상의 역사적 배경과 중관파의 역사적 전개에 대하여는 다음 절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용수의 『중론』은 기본적으로 二諦說에 근거한 中道思想으로서 緣起·空의 도리를 설하고 있다. 즉 勝義諦(Paramaartha-satya)와 世俗諦(saMvRiti-satya)의 이제설에 의거하여 부처님의 근본입장인 중도의 입장을 밝히고 있는 것으로, 이 중도의 입장을 연기·공의 용어로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용수는 이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여러 부처님은 二諦에 의거해 법을 설하시는데, 첫째는 世俗諦이고, 둘째는 第一義諦이다.(중론, 24-8) 二諦의 구별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있어 깊고 진실한 뜻을 알지 못한다.(24-9)
世俗諦에 의하지 않으면 第一義諦는 설해지지 않고 第一義諦에 의하지 않으면 涅槃을 얻을 수 없다.(24-10) 이와같이 용수는 세속제와 제일의제--즉 승의제--를 설해, 이 둘의 구별을 모르면 부처님의 깊고 진실한 뜻을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이제의 올바른 구별은『중론』의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하는 근본 전제로서, 따라서 용수 이후 중관파의 사상가들은 이 이제의 올바른 구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중론』의 주석가들에 의하면 승의제란 궁극적으로 「言說을 떠나 戱論(prapaNYca)이 寂滅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특히 후기중관파의 즈냐나가르바는 유마거사의 침묵이야 말로 진정한 승의제의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듯 승의제는 궁극적으로 언표 불가능한 것이긴 하지만, 바바비베카와 같은 주석가는 언설을 통해 승의제가 간접적으로도 표현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용수에 있어서 구체적인 이제의 설명은 그다지 자세히는 나타나지 않지만, 열반을 證得한 근거가 되는 승의제는 세속제를 통하여 표현되어진다고 명확히 언급되고 있다.
이 세속제란 世間에서 인정되어지는 言說이나 慣習등으로, 곧 세간 일반에서 승인되어지는 까닭에 진리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 언설의 세간 진리로서 용수가 『중론』에서 나타내고 있는 것이 다름아닌 緣起·空의 용어이며, 이 연기와 공의 용어를 사용해 용수는 자신의 사상을 전개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 연기와 공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개념임을 용수는 三諦偈로 일컬어지는 제24장 18게에서 말하고 있다. 곧 다음과 같다. 緣起하고 있는 것, 그것을 空性이라 설한다. 그것은 임으로 施設된 것이며, 곧 그것은 中道이다.
이와같이 연기와 공성은 동일하며 더우기 그것은 임으로 시설된 것(prajNYapti, 언어에 의한 표시, 假名)으로, 이렇게 아는 것이 곧 중도(madhyamaa pratipad)인 것이다. 따라서 이 연기로서의 중도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해 가는 것이『중론』의 전체적인 내용이지만, 그러면 왜 용수는 이러한 연기의 논리를 전개했던 것일까. 그것은 용수 在世시대의 사상적 동향과 관련하는 것으로, 이러한 동향은 그의 저술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즉 『중론』에서는 반대자의 견해를 먼저 든 뒤 용수 자신의 비판적 입장을 서술하고 있으며, 다른 저술인『廻諍論』에서는 인도 제학파 가운데 실재론자로서 니야야(Nyaya) 학파를 비판하고 또 동시에 같은 불교내의 說一切有部(Sarvaastivaadin) 견해를 비판하고 있다. 특히 이 有部에 대한 비판은 『중론』에서도 중심을 이루는 것으로, 용수는 유부의 사상적 특성으로서 「法有」 사상의 근저를 이루는 自性(svabhaava)의 개념을 철저히 비판하고 있다. 이 자성이란 연기·공의 개념과는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유부는 일체 현상의 근본인 법이 자성으로서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용수는 이 자성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성이 緣과 因에서 생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자성이 연과 인에서 생긴다면 그것은 만들어진 것이 될 것이다.(15-1) 그런데 어찌하여 자성이 실로 만들어진 것이 될까. 자성은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고, 또한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것인 까닭이다.(15-2) 이처럼 자성이란 因緣에 의하지 않고, 다른 것에 의하지 않는 것이라고 용수는 말하고 있다. 따라서 자성의 개념은 연기의 입장과 위배되는 것이며 공의 개념과도 배치되는 것으로, 이러한 자성의 개념을 용수는『중론』 전체에 걸쳐 철저하게 비판하고 있다.
곧 유부에서는 일체 현상의 작용을 가능케하는 근본 실체로서 법의 자성을 인정한 것에 대하여, 용수는 모든 사물에 그러한 실체적 성질은 없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은 모든 사물이 실체적 자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연기하고 있는 것으로, 곧 공인 까닭에 緣由하는 것이다. 따라서 연기와 공의 입장에 서서 자성의 개념을 비판하며, 아울러 사물이 연기, 공성의 존재임을 분명히 하고자 한 것이『중론』의 근본 의도이었던 것이다.
이 연기에 대하여 『중론』 歸敬偈에서는 유명한 八不의 부정사로서 다음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緣起는 不滅·不生·不斷·不常·不來·不去·不異·不一하며, 戱論이 寂滅한 것이며, 吉祥한 것임을 가르쳐 주신 正等覺者, 說法者 가운데 최고인 그에게 나는 歸依합니다.
곧 이 귀경게는 연기의 이법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거나 생겨난 것이 아님을 여덟가지 부정으로서 보여주는 유명한 팔불의 연기를 설하는 것으로, 따라서 용수는 이 귀경게에 이어 제1장 觀緣品에서 일체는 생겨남이 없다는 불생(anutpaada)의 이치를 밝히고 있다. 곧 일체는 스스로든, 다른 것으로 부터든, 무엇인가 실체적인 존재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님을 밝히며, 일체는 다름아닌 연기는 도리에 의거하고 있음을 나타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의 삶이 가능한 것은 연기의 삶인 까닭이며, 이 연기의 삶인 까닭에 일체의 삶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리고 「무릇 이 緣起를 보는 자야 말로, 실로 苦·集·滅·道를 본다(24-40)」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용수는 연기의 이치를 바로 볼 때 우리들의 근본 번뇌인 고통도 없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고통에 가득찬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삶을 연기의 도리가 아니라, 자성의 개념등으로서 잘못 보는데 기인함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연기의 이치를 바로 보는 것은 곧 자성의 허구를 아는 것이며, 곧 그것은 無自性·空의 이치를 아는 것으로서 중도의 입장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중론』에서의 연기는 공·무자성·중도와 동일하게 표현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연기의 이치를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것은 言說에 의한 言表의 세계, 즉 世俗諦에 의거하는 것으로, 달리 말하면 세속의 언설인 연기의 용어를 빌려 무자성·공성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 연기라는 용어는 비록 세간의 언설로 표현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연기의 이치는 佛陀 覺證의 세계에서 획득된 진리로서, 곧 승의의 진리가 언설로 표현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각증의 세계를 체득한뒤 그러한 상태에서 보여진 진실된 세계의 모습이 언설에 의지해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진 것이 연기·공인 것이다.
따라서 연기·공으로 표현된 세속제에는 승의의 진리가 간접적으로 함축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용수는 고통으로 가득찬 윤회의 세계도 실은 연기의 세계로서 열반과 다르지 않다(25-19)고 말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용수의 『중론』은 이상과 같이 세속제에 의거해 구체적으로 표현된 연기의 용어로서 자성의 개념을 비판하고 일체세계가 연기의 이법에 따르고 있음을 논증한 저술이다. 따라서 『중론』 저술의 의도는 연기의 이치를 바로 나타내 보임으로서 일반 중생을 승의의 열반세계로 이끌고자 한 것이라 생각된다.
즉 언설로서 연기의 이치를 나타내 보이지만, 실은 승의의 세계를 나타내 보인 것이 『중론』이라고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말해, 용수는 佛陀의 중도사상을 二諦說에 의거해 재정립하고, 세속제의 연기로서 승의의 세계를 밝히고자 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용수에서 출발하는 중관사상은 불타가 설한 중도의 이치를 二諦說을 통해 재조명하고, 자성을 주장한 유부등과 관련한 시대적 변화에 대응해 연기의 이치를 재확립하고자 한 것이다. 이 용수의 사상에 의해 출발점이 된 중관사상은 대승불교사상의 체계를 공고히 하고, 또 그 내용을 深遠化시키는 계기가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