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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님 2018. 6. 10. 12:52

《실천수행을 위한 四聖諦의 바른 이해》
智雲(松廣寺 講院/講主)


 


1. 최상의 가르침.
2. 苦를 초월하는 수행의 체계.
3. 실천적 수행체계


 


1) 열반(滅)이라는 목적지에 대하여.
2) 結果(苦)라는 출발점에 대하여.
3) 原因(集)이라는 방향에 대하여.
4) 길(道)이라는 방법에 대하여.

 



4. 견줄 수 없는 최상의 수행체계.




1. 최상의 가르침.

 

 


四聖諦는 네가지의 성서로운 진리로 녹야원에서 成道후 최초로 교진여등의 다섯 수행자를 위해 부처님께서 설파하여 진리를 깨닫게 하였다는 데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사성제라는 최초의 가르침을 편 부처님의 本意는 중생들이 겪고 있는 온갖 괴로움을 제거하는 데에 있다는 사실을 주지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직 한 가지를 알려줄 따름이니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이니라”(중부경 22)라고 역설하시는 것이다. 이렇듯 명쾌하게 일러주신 말씀이 곧 苦 · 集 · 滅 · 道의 四聖諦이다.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오직 괴로움의 소멸에 있을 뿐이며, 누구든 궁극의 깨달음으로 발견하는 바가 있다면 사성제뿐일 것이다. 이유는 이 사성제야말로 괴로움의 소멸을 가져다 주는 최상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當知經》에서는

 

 


“괴로움의 진리는 마땅히 알고 이해하여야 한다.
괴로움의 원인의 진리는 마땅히 알고 끊어야 한다.
괴로움의 사라지는 진리는 마땅히 알고 증득하여야 한다.
괴로움이 사라지는 길의 진리는 마땅히 알고 닦아야 하느니라.”

 

 


라고 설하고 있다. 부처님 스스로 부처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이 사성제를 통해 완전한 지혜를 갖추었기 때문에 고통받는 중생이 고통에서 벗어나 부처가 되는 길이 이 사성제에 있는 것이다. 한 바라문이 부처님께 ‘스승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부처님이라고 불리우십니까?’ 하고 여쭈었을 때 바로 ‘사성제에 대해 완전한 지혜를 갖췄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나는 알아야 할 것을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닦았으며,
버려야 할 것을 버렸노라.
바라문이여, 그래서 나는 붇다,
곧 깨달은 사람이니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사성제를 이해하고 끊고 닦아 증득했다면 그를 아라한이라 부른다. 그는 이미 애욕을 끊었으며, 모든 번뇌가 이미 다하였으며, 거만과 무명 등의 괴로움을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이다. 즉 할 일을 이미 마치고 모든 무거운 짐을 버려 자기의 이익을 얻고 모든 존재의 얽힘을 없애고 바른 지혜로 잘 해탈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사성제의 가르침은 어떤 부처님이라해도 한결같이 가르쳤을 핵심적인 수행체계이며, 직접 수행을 통해 체험한 것으로 사실성과 실증성을 갖춘 불교교리의 대표가 되는 가르침이며, 이는 곧 중생이 부처되는 가르침인 것이다.


 

 


2. 苦를 초월하는 수행의 체계.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모든 존재가 緣起한다는 것을 깨달으신후 다섯 수행자에게 최초로 진리를 설하신 初轉法輪의 내용은 연기가 아닌 사성제를 설하셨을까? 하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으나, 緣起法은 순수원리이며, 四聖諦을 비롯한 中道, 五蘊, 無常, 無我, 空, 業, 輪廻, 十二處, 十八界  등의 모든 가르침은 연기법을 응용하여 설한 진리이기 때문인 것이다.

 

 


최초로 四聖諦를 설하신 진정한 뜻은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사성제가 아닌 다른 가르침으로도 가능했을 텐데 굳이 사성제를 설한 이유는 무엇일까? 《中阿含 象跡喩經》에 보면 “비록 한량이 없는 善法이 있더라도 그 모든 法은 다 四聖諦에 包攝되고 사성제에 귀결된다.”라고 말하고, 비유를 들어 모든 동물의 발자국이 코끼리 발자국에 포섭되듯이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이 사성제에 포섭된다라고 하고 있다.

 


사성제가 연기법 등을 응용하여 설한 모든 法을 포섭한다는 것은 苦를 초월하는 수행 실천체계라 할 수 있다.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곧 진리를 깨달아 苦에서 해탈하는 것이며, 사성제에 모두 포섭된다는 것은 깨달아 해탈하게 하는 완벽한 구조를 갖춘 최상의 가르침인 것이다. 즉 깨달음이란 고에서 벗어나는 길을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며, 벗어나는 길이란 바로 八正道 등의 실천수행(道聖諦)으로 이를 통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현실의 고통을 직시(苦聖諦)하고 그 고통의 원인(集聖諦)과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할 열반(滅聖諦)이 있는 것을 모른다면 수행이 존재할 수 없다. 설령 수행하더라도 맹목적인 헛된 노력만 하게 되어 信心이 증장되지 않고 오래지 않아 회의에 휩사여 물러서게 된다.

 

 


이와 같이 苦와 苦의 原因과 고에서 벗어난 열반을 잘 알더라도 이를 실천하여 구현할 수행의 길이 없다면 苦에서 벗어날 수 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고와 고의 원인과 열반이 깨침의 수행도와는 相補關係 관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완벽한 깨침을 실현하기 위해 苦에서 벗어나는 체계를 설한 것이 사성제이다.

 

 


그런데 도성제(팔정도)의 첫머리인 正見의 내용이 사성제를 잘 이해하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어 모순 처럼 여겨진다. 팔정도의 正見은 도성제인 팔정도이므로 고성제, 집성제, 멸성제를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도성제의 정견 속에 고성제, 집성제, 멸성제와 함께 도성제 마저도 잘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도성제의 正見이 도성제를 잘 이해해야 한다는 말로써 모순처럼 여겨 지지만 이는 모순이 아니다.

 

 

 

이 둘의 관계는 수행의 길을 제시한 고성제 및 도성제의 수행체계라는 地圖와 그 지도를 따라 실천해 가는 도성제의 正見이라는 수행이다. 즉 실천수행은 늘 修行地圖의 引導를 받지 않으면 그 수행은 옆길을 가게되는 邪道를 행하는 사람이 된다.

 



따라서 수행하더라도 수행의 체계를 모른다면 그 수행은 더 진전이 있을 수 없다. 즉 苦聖諦의 이해, 集聖諦의 끊어야할 대상, 滅聖諦의 증득인 道聖諦의 修行道가 없으면 수행할 수 없다. 苦聖諦 및 道聖諦라는 修行의 체계를 잘 알아야만 修行地圖의 引導에 따라 고집멸도의 진리를 수행할 수 있기 때문에 수행의 길을 바르게 이해하는 正見속에 고성제, 집성제, 멸성제 뿐만아니라 도성제까지 포함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즉 正見은 사성제의 수행체계를 언제나 놓치지 않고 알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 正見이 無明을 타파하고 明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견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도성제(八正道)의 첫머리인 정견의 내용이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 먼저 地圖를 보듯이 사성제라는 수행체계를 잘 이해하는 것이라면 수행체계라는 지도를 따라 실행의 결과로 팔정도의 마지막에 있는 三昧(正定)의 성취는 사성제가 참답게 밝게 나타난다고 《선사경》이나 《삼마제경》에서 설하고 있다.
이와 같이 사성제는 괴로움의 소멸을 위한 최상의 수행체계인 것이다.


 


3. 실천적 수행체계

 

 


부처님께서는 사성제를 의사의 진료방법에 응용하여 말씀하시고 있다. 의사는 먼저 환자의 병을 진단하고, 그 병의 원인과 발생과정을 찾아낸 다음 병을 제거할 방법을 검토한 후 처방을 내린다. 이는 醫師의 診斷에 정확도가 요구된다. 어떤 醫師는 疾病을 과장해서 希望을 포기하라고 嚴肅하게 宣言하며, 또 어떤 醫師는 誤診으로 病이 없다고 斷言하면서 아무런 治療도 필요치 않다고 거짓 慰安으로 患者를 安心 시킨다. 前者는 悲觀論者, 後者는 樂觀論者로써 모두 현명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현명한 의사는 疾病의 徵候를 바르게 診斷하고 질병의 原因과 發生을 理解하고 그 병이 치유 될 수 있다고 確信한 다음 환자를 治療하여 구해낸다. 이러한 醫師가 바로 부처님이다. 그는 세상의 모든 질병에 대한 현명하고 科學的인 醫師이다.

 

 


이처럼 괴로움은 병이다(苦). 渴愛는 병의 발생원인이다(集). 갈애를 없앰으로써 병이 제거된다. 이것이 치유이다(滅). 여덟가지 고귀한 길은 그 치료법이다(道). 그러나 이것은 부처님의 입장에서 본 사성제의 가르침이지 우리 중생의 입장에서는 우리들 스스로 걸어가야 할 현실苦라는 출발점에서 괴로움의 해결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하는 길을 제시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말하자면 우리들이 어떤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어떤 준비도 없이 무작정 갈 수는 없다. 이와 같이 우리의 괴로움인 죽고 사는 生死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다.

 

 

 

첫째, 목적지를 정하는 일과,

둘째, 그 목적지를 향하여 어디에서부터 출발할 것인가 라는 출발점의 문제,

셋째, 그 출발점에서 어느 방향으로 향할 것인가라는 방향에 대한 문제이다.

 

 

 

이러한 세가지 조건이 구비되어야 비로소 목적지에 도달하는 방법으로써의 수행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 가운데 하나가 해결되는 것이다.


 


만약 우리들이 가야할 바르고 정확한 목적지가 없다면 그 목적지로 향할 출발점과 방향및 수단이 필요 없을 뿐아니라 올바른 목적지가 설정되었더라도 출발점이 정해져 있지 않으면 목적지에 도달하는 방법에 대해 혼란을 일으킬 것이다.

 

 

 

또, 출발점이 설정되었더라도 어디서 부터 그 출발의 선을 정할 것인가하는 문제가 발생하며 출발선이 설정되었더라도 방향을 올바르게 잡지 않으면 그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다. 그리고 이미 방향이 정해졌지만 그 도달하는 수단이 바르지 못하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출발점과 방향및 목적지, 그리고 도달하는 방법을 정확히 제시하는 가르침이 바로 사성제인 것이다. 이 사성제를 부처님께서 의사의 診療와 치료방법으로 비유한 진료방법을, 여행자가 목적지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응용해 보면 다음과 같이 대별할 수 있다.

 

 


《四聖諦》           《良醫經》       《의사의 진단》     《수행실천 체계》
苦聖諦--苦---------善知病--------病의 牀態----------출발점
集聖諦--苦의 原因--善知病源------病의 原因----------방향
滅聖諦--苦의 消滅--善知治病已, 當來更不動發--健康回復---목적지
道聖諦--八正道-----善知病大治-----治療方法-----------방법

 


다음은 세간에 대한 의사의 진료방법과 여행자가 목적지에 도달하는 방법을 응용하여 사성제의 수행실천 체계를 살펴보자.

 

 


1) 열반(滅)이라는 목적지에 대하여.

 


가령 어떤 장소를 목적지로 설정했다면 목적지의 성격에 따라서 나아갈 출발점과 방향, 수행방법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목표가 과연 우리들이 나아가야할 구경의 곳인지 정확하게 판단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여행을 하거나 어떤 일로 인하여 목적지에 갈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수행자에게 있어서 목적지는 반드시 苦를 초월한 不生不滅의 세계이어야 하는 것이다. 수행의 목적이 생멸하는 괴로움에서의 해탈하기 위해서라면 그 목적지는 당연히 고에서 해탈하는 不生不滅인 열반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지가 분명하다면 불생멸의 열반을 구하기 위해 수행이라는 여행을 떠나는 것이 당연하고 또 수행를 하게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열반을 증득하기 위해 마음을 내는 發菩提心으로 이 발보리심이 일어나지 않으면 수행을 할 수 없다. 때문에 제일 먼저 사성제중 滅聖諦라는 목적지를 기술하는 것이다. 물론 목적지의 성격에 따라 수행방법은 달라질 수 있으나 열반에 나아가는 모든 방법에 해당하는 것은 팔정도인 것이다.

 


수행의 목적으로는 보통 [존재의 실상]을 밝히는 것과 [인생고를 해결]하는 두 가지를 설정할 수 있다. 둘 중에 불교수행의 목적은 인생고의 해결을 그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만일 단지 존재의 실상만을 밝히는 것에만 주력한다면, 그것은 철학 등의 형이상학적인 학문에 빠질 가능성이 있으므로 인생고의 해결과는 무관할 수 있다.

 

 

 

그러나 존재의 참모습을 찾는 것이 괴로움의 소멸을 가져다 주는 것이라면 당연히 밝혀져야 할 것이다. 만일 존재의 비밀을 알아서 그것이 진리라고 할지라도 인생고의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존재의 본질를 추구한 그 진리는 마치 거북의 털이나 토끼의 뿔과 같이 허망한 것에 불과하다. 불교에서는 진리가 우리들의 여러 가지 괴로움을 해결할 수 있을 때 그것을 진리로 인정하고 그러치 못할 경우 그 진리는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상상력으로 간주하거나 無記라고 한다.

 

 


이러한 문제를 극명하게 밝히고 있는 箭喩經(中阿含卷第60)에서 “자신이 처하여 있는 老病死의 苦에 허덕이는 상황을 되돌아 보지않는 학자가 화살에 맞아 치료를 받기 전에, 어떤 종류의 화살이, 어디서 날아왔으며, 누가 쏘았는지를 알고싶어 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질문에 만족할만한 대답을 듣기도 전에 죽는다”라고 부처님은 독화살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말하자면 이 경전에서는 실상을 밝히는 것이 괴로움의 해결에 아무 도움도 되지않는 불필요한 것으로 이러한 질문은 곧 늚음과 병과 죽음에서 벗어나는 직접 해결책에 해당하지 않음을 설한 것이다.

 

 


자신과 상관없는 문제라는 것은 “自我와 세계는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는가?”라는 등의 열 가지 내지 열네가지 문제를 말하고 있으며 이 경전의 끝부분에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부정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것은 利益이 없고, 梵行에 나아갈 수 없고, 出離, 無欲, 寂滅, 止息, 智, 覺, 涅槃에 향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상응부경전에는) 설하고 있고, 같은 漢譯경전에는 “법에 상응하지 않는다(非法相應).”라고 덧붙여 설하고 있다. 그러나 오직 긍정할 수 있은 것은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단정하여 설하는가! ‘이것은 고다.’ ‘이것은 고가 일어나는 원인이다.’ ‘이것은 고의 소멸이다’ ‘이것은 고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다’ 라고 하는 것을 나는 단정하여 설한다. ‘무엇 때문에 나는 이것을 단정하여 설하는가’ 이것은 目的에 맞고, 청정한 수행의 기초가 되고, 세속적인 것을 厭離하는 것, 欲情에서 떠나는 것, 煩惱를 制滅하는 것, 마음의 平安, 智, 正覺, 涅槃에 安住하는 까닭에 나는 이것을 단정하여 설한다.”

 


라고 하고 있다. 결국 존재의 본질을 추구하는 괴로움과 연관이 없는 형이상학적인 문제는 인생의 고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목적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존재의 실상이 무엇일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은 왜 괴로워야 하는가 이것이 문제의 초점이 되어야 한다.

 

 


불교의 모든 교리는 그 방법에 있어서 苦의 소멸에 있다. 때문에 사실에서 벗어난 苦의 해결과는 관계없는 形而上學的 즉, 十 내지 十四無記에 대해 佛陀는 論할 가치가 없다고 沈을 지키는 立場을 취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교리는 철저히 현실적 事實性을 벗어나지 않으며 覺 또한 그러한 것이다.

 


부처님이 사위성의 기원정사에 계실 때 비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전부(一切)를 이루고 있는가? 그것은 눈과 빛(물체)이고,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감촉, 생각과 현상(관념)이다. 이것들을 이름하여 일체라고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는 이것을 제외한 다른 일체를 말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단지 말 뿐이며, 다른 사람의 질문을 받으면 설명할 수 없어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있지도 않은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그와 같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혀로 맛볼 수 있는 것 등을 전부라고 단정한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세상의 종교인들은 흔히 현실 밖에 있는 추상적인 세계에 대해 논하려는 경향이 짙다. 그런데 부처님은 여기에서 관념적이고, 비현실적인 세계에 관계된 것을 거부하고 있다. 독묻은 화살의 비유를 설한 경전에서도 나오듯이, 부처님은 와서 보라고 하여 철저히 현실에 증명이 되지않는 것에 대해서는 無益함을 설하고 계신다. 小部經典 중 《如是語經》102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나는 아는 것, 보는 것과 번뇌의 소멸에 대해서만 설할 뿐이며 알려지지 않는것,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반드시 현실에 처해 있는 苦로부터 출발하므로 불교의 모든 교리는 事實性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존재의 참다운 모습에 대하여 등외시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와 전혀 관계 없는 존재의 비밀이 진리라면 그러한 진리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허구일 뿐이다. 그러므로 아함부의 여러 경전에는 이 진리(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다섯가지 조건을 설하고 있다.

 


①눈 앞에 볼 수 있으며, 눈 앞에서 증명된다.
②때를 가리지 않고 효과가 있는 것.
③와서 보라라고 말할 수 있는 것.
④능히 涅槃으로 잘 인도하는 것.
⑤智者에 의해 연기법을 깨닫는 것.

 

 


라고 하여 이와 같은 다섯가지 조건에 맞지 않는 진리라면 그것은 진리라고 할 수 없으며 존재의 본질이 우리의 人生苦를 해결해 줄 때만이 진리로 인정 되는 것이다. 존재의 실상을 규명하는 것은 고를 직접해결하는 것이 아닌 해결하기 위한 작업에 불과하며, 존재의 문제는 바로 苦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열쇠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전유경에서도 이러한 진리(법)에 맞는(是法相應) 가르침이 四聖諦의 가르침이며, 사성제야말로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설하고 있다. 사실 사성제의 목적은 苦가 소멸된 열반에 있기 때문에 중부경전에서 “나는 오직 한 가지를 알려줄 따름이니,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이니라” 라고 명쾌하게 일러주시고 있으며 《大乘起信論》에서는 造論의 이유를 “衆生으로 하여금 一切의 괴로움을 여의게 하기 위해서다” 라고 하고 있다. 따라서 목적지는 苦가 소멸된 그곳에 있는 것이다.

 

 


2) 結果(苦)라는 출발점에 대하여.

 


열반이라는 목적지가 결정되었으면 發菩提心의 첫걸음은 당연히 현실에서 겪고 있는 우리들의 苦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현실에서 벗어난 존재의 근원에서 도출된 진리라는 틀을 설정하여, 그 진리라는 것으로부터 고를 해결하는 것은 현실성이 없는 오류에 빠질 위험이 있다. 마치 어떤 씨앗를 가지고 이 씨앗이 나무가 된다라고 판단를 내리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왜냐하면, 씨앗은 나무로 자라기 전에 썩거나 새의 모이가 된다면 그 씨앗은 발아할 수가 없다. 따라서 씨앗으로부터 나무를 추론하는 것은 현실성이 결여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나무로부터 씨앗이 있음을 판단하는 것은 나무라는 현실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에서 판단하기 때문에 씨앗이 있다고 단정하는 것은 틀림이 없는 것이다.

 

 


이와같이 현실에서 직면하는 苦에서 출발하는 것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첩경인 것이다. 부처님의 출가한 동기도 이러한 生 · 老 · 病 · 死의 괴로움에서 출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苦行林의 보리수 아래에서 正覺을 이룬 내용도 고의 소멸을 목적으로 그 출발을 삼고 있다.

 

 

 

즉 정각의 내용은 十二緣起로 無明, 行, 識, 名色, 六入, 觸, 受, 愛, 取, 有, 生, 老死憂悲苦惱인데 이 십이연기의 觀察은 항상 무명에서 시작하여 노사우비고뇌까지 逆順으로 觀하여 최종으로 노사우비고뇌의 소멸인 還滅緣起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세존께서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사성제의 법륜을 굴리실 때에도 사성제의 고집멸도 가운데 먼저 고를 설하고 있으며 중아함 상적유경에서 이 사성제를 일체법 가운데 최고의 가르침임을 설하고 있다. 이는 단적으로 불법의 모든 교리체계는 고에서 출발하여 고의 해결에서 끝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苦(Dukkha)는 보통 生老病死와 怨憎會苦, 愛別離苦, 求不得苦, 五盛陰苦를 의미한다. 그러나 인생은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이라는 오해의 해석의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이것은 불교를 염세주의로 잘못 판단하게 하는 주요 이유이기도 하다.

 


불교는 비관주의도 낙관주의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불교는 합리적인 人生觀과 世界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현실적인 종교이다. 불교는 사물을 客觀的으로 있는 그대로(여시, yathabbutam) 보게한다. 《相應部經典》쟌부카다카(閻浮車)라는 外道思想家가 사리풋타를 찾아 와서, 말했다.

 

 


(問)“벗 사리풋타여 ‘苦다’‘苦다’ 하지만, 벗이여 어떤 것이 苦입니까.”
(답)“벗이여, 이런 세 가지가 苦입니다. 그것은 苦苦性, 壞苦性, 行苦性입니다. 이 세가지가 苦입니다.”

 


라고 하는데 ‘괴로움’라는 苦의 성질[苦苦性(dukkha-dukkha)]은 물질적, 정신적 모든 일반적인 괴로움을 《大拘絺羅經》第九 에는 生老病死 愛別離苦 怨憎會苦 求不得苦 五盛陰苦의 八苦로써 說하고 있다.
‘壞’라는 苦의 성질[壞苦性(viparinama-dukkha)]은 變化에 의한 괴로움으로 삶의 행복한 느낌, 행복한 조건 등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언젠가는 변하기 마련이며, 이것이 변할 때 고통, 괴로움, 불행을 낳는다. 이처럼 수많은 변화가 고의 괴고성이다.

 

 


‘行’이라는 고의 성질[行苦性(samkhara-dukkha)]은 條件지어진 고로움을 말하는데 苦苦性과 壞苦性은 일상생활에서 흔히 경험되는 사실이다. 그러나 고의 세번째 형태인 행고성은 고성제의 가장 중요한 理致的 측면으로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존재>, <개체> 또는 <나>로 여겨지는 것에 대한 분석적 설명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아함경에 의하면, <존재>, <개체> 또는 <나>라고 불리우는 것은 五蘊으로 구성되어 끊임없이 변화하는 물질적, 정신적 힘 또는 에너지의 조합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님께서는 “이 五蘊에 집착하는 것이 바로 苦이다”라고 설하셨다. 다른 곳에서도 불타는 명백하게 “비구여 고란 무엇인가? 그것은 ‘五蘊의 집착이다.’”라고 설하셨다. 여기서 苦와 五蘊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五蘊 그 자체가 바로 苦인 것을 알 수 있다. 소위 <存在>를 構成하는 五蘊의 槪念을 알게되면 苦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밖에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別業에 의해 발생하는 苦와 社會나 國家, 또는 人類가 가지고 있는 共業에 의하여 생기는 苦 등의 모든 苦를 의미한다. 이러한 고를 해결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불교이며, 부처님의 가르침에 고의 가르침이 없다면 불교의 존재가치가 상실될 것이다. 때문에 부처님은 ‘이것은 고이고, 이것은 고의 해결이다’ 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법화경에서 “중생의 고를 제거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하신 것이다. 말하자면 중생이 없으면 부처도 없다는 것으로, 이 세상을 떠나서 불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維摩經》文殊師利問疾品에 유마거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중생이 병들어 있으므로 나도 병이 들어있다. 중생의 병이 사라지면, 나의 병도 사라질 것이다.”라고 하였듯이 참으로 불교수행의 출발은 중생의 고에서 시작하며 중생의 고가 사라질 때에 비로소 불교가 해야 할 일을 다 마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原因(集)이라는 방향에 대하여.

 


수행의 출발점이 정해지면 방향은 참으로 중요하다. 방향을 잘못 설정하면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많은 노력만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수행도 이와 같아서《大本經》第一에서는 다음과 같이 수행해 가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바로 지금부터 그리고 혹은 내가 떠난 후에도 자기 자신에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되,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 수행자가 자기 자신에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되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안으로 자기의 몸을 응시하고 언제나 마음을 하나로하여 지혜를 닦고, 힘써 수행하고 정진하여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도록 하여라.

 

 

 

외부의 몸, 안팎의 몸에 대해서도 위와 같이 그렇게 하여라(身念處). 受念處, 心念處, 法念處도 이와 같이 하라. 이것이 수행자가 자기 자신을 의지하고 법을 의지하되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수행자는 ‘안으로 자기를 보라’고 한다. 이것이 바른 수행의 방향이다. 왜 자신의 내면을 보는 것이 바른 방향일까? 그 전제가 자신을 의지하고 法에 의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내면을 본다는 것은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법을 의지해야 된다는 것은 법의 현현은 자신의 고요한 마음에서만이 나타나기 때문에 자신의 내부를 관조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왜 자신과 법에 의지해야만 하는가? 그것은 괴로움을 깨뜨려 正覺을 이루는 것은 남이 아니라 자신이요. 禪定의 場에서 법의 나타남에 의해서만이 깨달음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는 《自說經》 第一品 菩提品의 偈頌을 보면 자명해 진다.

 

 


“실로 열심히 禪定에 들어 있는 바라문에게 諸法이 顯現하게 될 때, 그때 그의 一切 疑惑은 消失한다. 라고 하신 것은 그는 緣起의 法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의 내면이 바른 방향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제거해야 할 苦가 主觀的인 것이지 客觀的인 것이 아니므로 苦의 원인도 主觀的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설령 客觀的인 외부의 힘에 의해서 苦가 생겼다 하더라도 그 苦의 원인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피해자가 격는 괴로움이라는 결과는 이 주관적 苦의 원인인 욕망의 投射일뿐이며, 때문에 修行의 方向을 안으로 向하는 것이 몸과 마음 밖에서 수행의 대상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의 본질을 통찰하는 것에서 수행의 방향을 잡는 것이다.

 

 


苦는 個人的이고 主觀的이다. 어떠한 성격의 苦이든 관계 없이 누구나 가지고 있으므로 普遍的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러한 개인적, 主觀的, 보편적인 苦가 형성 되는 원인을 四聖諦의 가르침에 의하면 渴愛 즉 貪, 瞋, 癡의 慾望에 의해서 苦가 발생한다고 간파하고 있다.

 

 

 

誡初心學人文에는 “財色之禍 甚於毒蛇”라고 하는 구절이 있다. 이는 재물과 여색(남색도 포함)은 毒蛇의 毒보다 甚하다는 것으로, 탐진치의 대상이 재물과 색이라 하고 있다. 즉 먹고 가지는 것과 성욕을 가르키는 것으로 이러한 욕망에 의해 경제, 문화, 조직, 정치, 풍속등을 이루고 있는데 이 구조속에서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자 등의 모순이 발생하므로 苦가 조직, 제도, 정치 등의 외부적인 힘에 의해서 발생한다고 인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외부적인 힘이라고 여겨지는 제도 등이 모두 財色 즉, 탐진치라는 主觀的인 慾望의 産物임을 철저하게 알게 될 때, 앞서말한 제도 등의 苦의 원인이 어떻게 외부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결국 외부적이라고 여기고 있던 것이 사실 욕망이라는 主觀的인 마음에서 문제가 파생된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加害를 받고있는 자의 苦와 가해자의 苦도 그 原因은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보조스님께서 “밖으로 찾지말고 안으로 구해야 한다.”하신 것은 바른 방향을 말씀하신 것이었다.

 

 


4) 길(道)이라는 방법에 대하여.

 

 


이상과 같이 목적지와 출발점의 방향이 정해지면, 목적지인 열반에 어떠한 방법으로 나아갈 것인가하는 문제가 남는다. 부처님께서《中阿含 拘樓瘦無諍經》에 中道를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범부들이 행하는 극히 下賤한 업인 欲樂을 추구하지도 말고, 聖者의 행이 아닌 아무런 의미없는 괴로움뿐인 스스로의 고행을 추구하지도 말라. 이 二邊을 떠나면, 안목과 지혜를 이루고 自在하게 禪定에 들어 智로 나아가고, 覺으로 나아가며, 열반으로 나아가는 中道가 있나니 正見에서 正定에 이르는 聖道 八支가 있나니라”

 


여기에서 수행의 요체는 苦行과 放逸의 두 극단을 떠나 중도를 취해야함을 설하고 있다. 고행과 방일의 두 극단을 떠난 중도는 곧 苦樂의 中道를 말한다. 중도는 中庸이나 중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인할 수 있으나 중도의 참된 의미는 내면을 觀照하는 지혜에 의해서만 나타나는 實相이므로 중용이나 중간과 다르다.

 

 


부처님 당시에는 바라문의 修定主義와 沙門의 苦行主義의 수행방법과 快樂主義가 유행하고 있었다. 수정주의는 바라문의 轉變說에 근거를 두고 있다. 말하자면 太初에 유일한 有가 있어서 그것이 欲心을 일으켜 地, 水, 火, 風의 四大元素를 발생하고 그것이 화합하여 복합물을 만들고 이 속에 그 有가 命我의 상태로 들어가 名色이 되고 일체가 형성되었다는 것으로 그것은 하나가 轉變하여 많은 것이 되고 그 하나가 또 그 많은 것 속에 들어가 본질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이것을 印度哲學에서는 轉變說이라 부르며, 原因(一)속에 結果(多)가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뜻에서 因中有果論이라고도 부른다. 현대의 철학적 용어로는 一元論的 汎神論이라고 한다.

 

 


이러한 전변설의 입장에서 인간에게 가장 귀중한 것은 梵과 인간의 自我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梵我一如의 앎을 주장하고 그러한 앎에 입각한 禪定을 닦음으로써, 인간이 생사윤회의 괴로움에서 해탈할 수 있다고 설하고 있다.

 

 

 

말하자면 브라흐만이라는 神에 자신의 자아를 일치 시키기 위하여 禪定을 목적으로 삼는 수정주의이다. 이들는 禪定에 들어 있을 때는 괴로움이 없으나 선정에서 깨어나면 곧 바로 현실적 괴로움이 피박하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즉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수행방법은 불교의 모든 존재 상호간의 일치가 아닌 상호관계성으로 보는 緣起說과 이 연기법을 깨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과는 상반되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緣起法을 깨치면 굳이 선정을 필요로하지 않는다. 일상생활 그대로가 緣起이므로 연기를 모르는 無知의 번잡함이 사라지기 때문에 일상 그대로가 禪定이 될 수밖에 없다.

 

 


한편 사문들은 이러한 전변설과 수정주의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새로운 인생관과 우주관을 제시하여 당시의 변천된 사회의 시대적 요청에 응하고자 하였다. 우주의 궁극적 실재를 물질적 요소로 보고, 그러한 요소들이 취합하여 자연과 인간과 모든 것이 성립되었다고 하는 積聚說이라는 공통된 기반위에 서 있다.

 

 

 

 파쿠다 카차야나의 경우는 인간의 존재가 地, 水, 火, 風의 四大要素와 苦, 樂, 靈魂 등의 일곱가지 不滅의 요소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하고, 아지타 케사캄발린은 단지 地,水, 火, 風의 四大要素만이 참된 실재이며 獨立常住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善惡의 果報나 死後의 영혼과 같은 것은 없다고 하면서 生의 價値는 쾌락에 있다는 快樂主義의 입장이며 唯物論者였다.

 

 


이와 반대로 자이나교의 니간타 나타풋타는 二元論的 우주관을 제시하는데 모든 존재는 명과 비명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命은 地, 水, 火, 風의 四大要素와 草木 動物 人天 등의 모든 것에 하나 하나 존재하는 생명을 實體視한다. 非命은 命 이외의 것을 총칭하여 虛空, 物質, 法(運動의 條件)과 非法(靜止의 조건)의 네가지를 포함하고 있다. 이 네가지와 命을 합하여 五實在身이라고 한다.

 


이러한 이원론적 우주관에 입각하여 그 수행도 苦行主義를 표방하고 있다. 즉, 命은 물질의 業에 속박되어 현실과 같은 비참한 상태에 빠져 있으므로 거기에서 벗어나 영원한 안식처인 至福의 상태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 또 도달하기 위해서는 고행을 해야 하는데 과거의 업을 소멸하는 한편 새로운 業의 流入을 방지하여 命을 淨化하는 방법으로 肉體(물질)에 고통을 주는 고행을 가장 바람직한 수행법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바라문은 轉變說에 근거한 修定主義, 沙門은 積聚說에 바탕을 둔 쾌락주의나 고행주의라는 수행방법을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佛敎의 수행법은 바라문이나 사문의 전변설이나 적취설과는 달리 緣起說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에 따르는 수행법도 中道인 것이다. 주지하였듯이 연기법은 神이나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며, 無始以來로부터 존재할 뿐이다.

 

 

 

그것은 有도 無도 아닌 中道라고 하고, 모든 존재가 상호관계하면서 現在의 進行的인 상태로써 존재한다는 뜻이며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므로 空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진리는 思想이나 철학, 이념이 아닌 모든 존재의 참모습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에 근거한 수행방법이 中道의 방법이고, 곧 八正道에 해당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팔정도의 첫머리에 나오는 正見의 내용은 四聖諦를 아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四聖諦의 가르침은 바라문과 같이 절대적 有나 梵과 같은 神을 미리 상정하거나 일반 사문들이 말하는 물질적 원소의 집합으로 보지 않고 단지 인간 현실의 苦에서 출발하고 있다.

 

 

 

만일 무엇인가 전제한다면 그에 의하여 도출된 결과는 바르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아무 전제 없이 있는 그대로 현실에서 격고 있는 온갖 괴로움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八正道의 正이라 하는 것이다. 적취설이나 전변설과 같은 전제하에 이루어진 수정주의나 쾌락주의, 고행주의가 아닌 이러한 극단을 떠난 어떠한 사상이나 철학 등의 관념에 치우침이 없으므로 中道라고 하며, 그에 의한 수행법을 正見이라 한다. 즉. 전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 불교 수행법이다.

 

 


팔정도의 내용을 三學과 대조하여 보기로하자.

 

 


正見-----바른 견해, 소위 반야라는 지혜로써 四聖諦의 하나 하나에 대한 분명한 앎(수행체계의 바른 이해)과 無明이 멸한 明의 상태를 뜻함.

 

 


正思惟---바른 생각과 의욕, 즉 부처님의 가르침(法)에 의거하여 사유함을 뜻한다. 그리하여 번뇌를 떠나고, 화내지 않으며, 해치지 않는 세 가지 바른 생각. (出要志, 無志, 不害志.)

 

 


正語-----바른 말(거짓말, 헐뜯는 말, 거칠은 말, 꾸미는 말 등 네 가지 말을 하지 않는 것).

 

 


正業-----바른 업, 행위와 그 축적, 그 결과와 책임(殺生, 도둑질, 愛欲에 관한 邪行 등 세 가지를 끊는 것).

 

 


正命-----바른 생활(법에 맞는 의식주의 삶).

 

 


正精進---바른 노력, 수양, 정진(未生의 惡이 생기지 않게 努力하는 것, 已生의 惡은 그것을 버리려고 노력하는 것, 未生의 善은 일어나게 노력하는 것, 已生의 善은 더욱더 增大하려고 노력하는 것의 四種(四正勤)을 행하는 일. 四正斷, 欲精進 方便出離 勤競堪能 常行不退)

 

 


正念-----바른 주의, 즉 身.受.心.法의 그 본질이, 無常. 苦. 無我의 특성을 가 지고 있음을 체득하기 위한 쉼 없는 관찰(四念處)을 말한다. 그리하여 세간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떠나는 것. (念隨順 念不妄不虛)

 

 


正定-----올바른 정신 통일, 집중(四禪에 住하는 것이다. 住心不亂 堅固攝持 寂止三昧心)

 


4. 견줄 수 없는 최상의 수행체계.

 


초기불교로부터 大小乘과 祖師禪에 이르기까지 근본 수행체계는 戒 · 定 · 慧  三學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다. 그러나 무작정 戒 · 定 · 慧  三學을 수행한다고 해서 궁극의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고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계정혜 삼학을 닦기에 앞서 늘 겪는 현실의 고통에 대한 절실한 자각, 그리고 이와 같은 고통이 일어나는 원인인 탐진치의 번뇌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여 몸과 마음의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이루어야할 목적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자각하는 發菩提心이 전제가 되어 있지 않으면 계·정·혜 삼학의 八正道 수행이라는 길에 나아갈수 없는 한낱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와같은 수행을 위한 修行地圖의 이해와 각성이 없다면 계 · 정 · 혜  삼학의 수행이 바를 수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수행의 전제조건이 갖추어진 완벽한 가르침이 사성제 뿐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 사성제의 가르침이 대승불교로 이어지면서 경전에 大乘四聖諦가 설해지고 있으며 심지어 초기불교시대부터 대소승의 智慧를 함축하고 그 배경으로 하는 祖師禪도 例外일 수 없다. 따라서 전불교의 전형적 수행체계는 초기불교의 사성제에서 부터라고 단언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初轉法輪이었던 사성제의 가르침은 수행체계로써 모든 불교에 시종일관하고 있으며 모든 가르침이 여기에서 한치도 벗어남이 없는 것이다. 사실 大小乘의 모든 가르침도 이 四聖諦의 연장에 불과할 뿐만아니라. 부처님께서 열반할 즈음에도 모든 제자들 앞에서 사성제를 다음과 같이 설하였던 것이다.

 

 

 

“너희들이 만약 苦등의 四聖諦에 대하여 의심이 있으면 속히 질문하여 의심하는 것에 대한 더 이상의 의문이 없게하라”라고 간곡히 말씀하셨던 것을 想起해 보면 이 가르침이 최초로 설해졌었고 최후의 가르침이었던 것을 알수 있다.







수보리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haha723/13382068 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