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마음이 사라진 즉 해골도 없어지니

수선님 2018. 6. 10. 12:53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창조력을 지닌 이는 곧 어머니입니다. 생명을 가진 사람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우주의 생명력을 사랑으로 빚어 탄생시킵니다. 이런 창조의 능력을 지닌 어머니이므로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일도 어머니들의 차지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의 중심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어머니이지요. 어머니가 계시지 않으면 집에 훈기가 없습니다. 집은 아버지가 가꾸지만 집안은 어머니가 다스립니다. 어머니는 당초부터 어머니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을 낳아 기르는 과정에서 어머니가 됩니다.

 

한 사람의 어진 어머니는 백 사람의 교사에 견줄 만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분들도 그 원천을 따져보면 어머니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예절과 덕성을 길러 주고, 작은 일에서부터 책임감을 심어 주는 일이 긴요합니다.

 

작은 풀꽃의 아름다움에 눈길이 가도록, 그래서 자연의 신비에 마음이 열리도록 이끄는 것도 어머니들의 할 일입니다. 문제는 어떤 상황 아래서건 한 인간으로서, 대지의 어머니로서 자신의 영혼과 함께 성숙해지는 일입니다.

 

어머니들, 감사합니다.

 

 

6 바라밀다

대승불교 보살 수행의 긍극적 목표로서 우리는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바라밀다 등 6바라밀다를 들 수 있게 된다. 또한 보살이 6바라밀다의 행(行)을 성취키 위해 수행하는 6가지 방법으로서 우리는 6사성취(六事成就)라는 것을 들 수 있는데, 이는 <보시에 대한 공양(供養)>을 <지계에 대한 계율의 배움(學戒)>을 <인욕에 대한 자비의 닦음(修悲)>을 <정진에 대한 선에 힘씀(勤善)>을 <선정에 대한 번거로움을 멀리함>을 <지혜에 대한 법의 즐김(樂法)>을 이야기하고 있어, 이 각각에 대한 실천을 통해 우리는 6바라밀다 수행에 그 깊이를 더할 수 있게 되어진다.

한편 우리는 이렇듯 6가지 바라밀다의 덕목에 대한 완성을 통하여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를 성취할 수 있게 되어, 대품반야경에 의하면 “반야바라밀다는 모든 보살의 어머니이니 능히 모든 법을 생겨나게 하는 것”으로서, “세존 즉 반야바라밀다요 반야바라밀다 즉 세존이다”라는 표현을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각각의 바라밀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통해 그 세세한 의미성을 파악해 보기로 한다.



1)보시 바라밀다(布施波羅蜜多,dana-paramita)
단(檀) 또는 단나(檀那) 바라밀다라 음역(音譯)되며, 보시 바라밀다라고 번역한다. 보시(布施)란 자신의 것을 남에게 주는 것으로, 금강경에 “보살은 마땅히 법에 머뭄이 없이 보시할지니 소위 색(소리), 냄새, 맛, 촉감, 법에 머문 바 없이 베풀어 주어야 한다”고 했듯이 자신의 공덕을 바라고 남에게 주는 것이 아닌,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주는 행위 곧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말한다. 이렇듯 <무주상보시>를 행함은 타인의 가난함을 돕는 행위의 실천이며,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 마음의 탐욕을 제거할 수 있다고도 하였다.

그럼에도 보시를 행함에 조차 하나의 원칙이 있어, 우리는 이것을 <삼륜청정(三輪淸淨)>이라 말한다. 대품반야경에 씌여져 있는 바, 즉 보시를 행함에 있어 세가지 요소가 깨끗해야 한다는 것으로, ‘보시하는 자’와 ‘보시받는 자’, 그리고 ‘보시하는 물건’ 모두가 청정해야 함을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삼륜청정>의 보시(布施)는 곧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 나의 마음을 공양하는 것과 다를 바 없나니, 이에 우리는 다음의 게송을 상기해 볼 수 있게도 된다.

능시소시급시물(能施所施及施物)
어삼계중불가득(於三界中不可得)
아등안주최승심(我等安住最勝心)
공양시방제여래(供養十方諸如來)

보시하는 자, 보시받는 자, 보시하는 물건이
저 삼계 가운데 가히 얻을 수 없음이라
우리 최고의 수승한 마음에 머물러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리라



한편 그러한 보시를 행하는 방법에도 세가지가 있다고 하니,<법보시(法布施)>와 <재보시(財布施) <무외시(無畏施)>를 들 수 있다.


<법보시>란 부처님 법(法), 즉 우주 만유의 진리를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 주는 것을 말한다. 그 중에서도 연기의 진리에 기초한 ‘제법개공(諸法皆空)’ 및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이치를 스스로 깨달은 채 남을 위해 말할 수 있다면, 그러한 마음의 보시는 기타의 것을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금강경에서도 “갠지스강 모래알과 같은 수많은 재물을 사람들어게 나누어 준다고 해도 금강경의 한구절을 남을 위해 설한 공덕에 미치지 않는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또한 남을 위한다는 것은 나를 위하는 것이니, 스스로 공(空)의 이치를 깨달아 마음을 보시하면 만법이 유심소조(唯心所造)임을 알게 된다고도 하였다.

한편 <재보시>란 자신의 물건을 남에게 아낌없이 주는 것을 말한다. 상(相)에 집착한 채 보시하면 유루복(有漏福)이요, 상에 집착하지 않는 무주상(無住相) 보시는 무루복(無漏福)이니 냉수나 걸레처럼 자기의 것을 나눠 주는 것을 말한다.

또한 <무외시>란 ‘중생들을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것’을 말한다. 내 스스로의 마음에 살해심을 내면 주변의 중생들이 두려움에 떨게 될 것이니, 마음을 다스려 자비로움을 갖고 중생들 고기를 먹지 않는다면 많은 중생들이 ‘나뭇가지에 집을 마련하듯’ 공포에서 벗어나 내 주변에 머물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불교의 많은 전생담(前生譚)들은 이렇듯 ‘보시의 실천자’로서의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는데, 이에 그중 하나만을 소개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옛날 시비국이라는 나라에 ‘벳산타라’라 불리우는 태자가 있었다. 그는 나이 8세에 “나는 내 자신의 무엇이라도 남에게 주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내 심장을 원하는 이가 있다면 나는 그것을 내어 주리라. 또 눈을 원하는 이에게는 눈을, 살을 원하는 이에게는 살을 베어 주리라”고 서원을 했던 바, 16세에는 ‘맛디’라 이름하는 여인을 얻어 부인을 삼고 ‘사리’라 이름하는 왕자와 ‘한하사리’라는 공주를 낳았다.

그때 태자에게는 <비를 내리게 하는 흰 코끼리>가 한마리 있었는데, 마침 이웃나라 카링가국에 극심한 가뭄이 들어 그 나라의 한 브라흐만이 태자를 찾아와 흰 코끼리를 달라고 청하였던 바, “내 몸도 보시할 것이거늘 하물며 내 몸 이외의 것이랴” 하면서 흰 코끼리를 내주게 된다. 그러나 시비국의 많은 백성들은 태자의 행위에 분노를 느껴 그를 쫓아내기 원하였던 바, 태자는 그의 부인과 아이들을 데리고 히말라야의 깊숙한 완카산으로 떠나 그곳에 머물게 되었다.

그때 또 카링가국에는 주파카라 불리우는 브라흐만이 있어, 자기 집에 한 사람의 여종을 두고자 했으나 돈이 없어 ‘벳산타라’의 보시의 마음을 이용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날을 걸어 완카산에 이르른 브라흐만은,


“저 큰 강물이 언제나 목마른 사람들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는 것과 같이 태자께서는 반드시 우리에게 두 아이를 주시겠지요?” 하면서 두 아이들을 자기의 종으로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태자는 두 아이를 불러,
“이 브라흐만과 함께 산을 내려가 그들의 심부름꾼이 되어다오. 나로 하여금 피안(彼岸)에 이르는 행(行)을 만족하게 하고 나를 위하여 나고 죽는 생사(生死)의 바다를 건너는 배가 되어다오. 아들 딸은 사랑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일체의 지혜는 자식에 대한 사랑보다 백천억 곱이나 더 훌륭한 것이다” 하면서 아이들을 내어 주자, 브라흐만은 태자가 보는 앞에서 아이들을 칡넝굴로 묶어 끌고 가며 심하게 매질을 해대었다.

아이들의 살갖이 벗겨지고 피가 흐르는 모습을 보면서 태자의 온몸은 떨려지고, 크나큰 슬픔 속에 칼을 들고 쫓아가 브라흐만을 죽이고도 싶었다. 그러나 태자의 지혜는 대자의 정(情)을 억눌렀다. ‘고통은 모두 애정의 목마름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사랑을 없애 버리는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면서.

이러한 태자의 <보시의 행>에 놀란 하늘의 제석천은 또다시 태자의 뜻을 시험해 보기 위해 스스로 브라흐만으로 변장하여 그의 아내를 청했다. 태자는 천금 뭉치를 던져 주듯이 조금도 집착 없이 물항아리에서 물을 떠서 사람의 손에 붓듯이 그의 아내를 내주었다.
-(경전 본생담 참조) -

이렇듯 태자의 마음에 감동한 하늘 제석천은 아이들과 아내를 다시금 태자에게 되돌려 주었다고 하는 바, 이렇듯의 보시의 마음을 닦은 부처님 전생의 삶의 이야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귀감이 되어지기도 한다.



2)지계 바라밀다(持戒波羅蜜多,sila-paramita)
시라(尸羅) 바라밀다라 음역(音譯)되며, 지계 바라밀다라고 번역한다. 불교 수행인으로서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바 <각 행위들의 규범적 원리(Vinaya;律)들>에 따라 ‘적합한 행위를 실행함(Sila;戒)’을 뜻한다고 말할 수 있다.

지계(持戒) 즉 계(戒)를 지킴으로서,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바 각 행위들의 규범적 원리에 따른 적합한 원리들을 실천함으로서, 우리는 온갖 악업(惡業)을 멸하고 몸과 마음의 청정을 유지할 수 있으리니 이것이야 말로 ‘열반’의 또다른 표현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근세의 선지식 중 한분이셨던 구산(九山) 선사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계(戒)는 어둠을 밝혀 주는 등불이며, 바다를 건너는 배이며,
병자에게 좋은 약이며, 진리의 양식이며, 성현(聖賢)이 되는
사다리입니다. 또 비오는 날의 우산이며, 자성을 깨우치는
길이며, 자신의 칠보장엄(七寶莊嚴)이며, 생사해탈의 길잡이
입니다”

하셨으니, 우리는 계(戒)를 의지하여 현세의 생사열반을 벗어난 해탈의 세계로 나아가야 할 것이라 하겠다.

불교 교리 가운데 계(戒)라 함은 다양하고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는 바, 그중 중요한 두가지만을 열거한다면 <성문계(聲聞戒) 즉 소승계(小乘戒)>와 <보살계(菩薩戒) 즉 대승계(大乘戒)>를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소승, 성문계>라 함은 재가출가 및 남녀의 구별에 따라 5계 6법계 8계 10계 구족계 등의 구분을 할 수 있으니, 그 각각을 간략해 보면 다음과 같다.



5계는 재가신자들이 지켜야 할 덕목으로서,

 

(1)살생하지 말라(不殺生戒)

(2)도적질하지 말라(不偸盜戒)

(3)정한 부부관계 이외의 사음을 하지 말라(不邪戒)

(4)거짓말하지 말라(不妄語戒)

(5)술을 마시지 말라(不飮酒戒)

 

등 5가지의 금지사항으로서 이것은 또한 <재가 5계>라 불리우기도 한다.

6법계(六法戒)는 사미니(沙彌尼)가 구족계(具足戒)를 받기 전 2년 동안 칙차마나(式叉摩那;正學女)로서의 생활을 하는 가운데 지계야 할 6가지 계율을 말한다.

또한 8계는 일반 재가신자들이 하루 혹은 짧은 기간 동안의 제한된 출가생활을 하면서 지켜야 할 <잠정적 출가계>로서, 이는 달리 팔재계(八齋戒)라 불리우기도 한다.

 

이것은 고대 인도에서 6재일(六齋日)에 목욕 단식을 하며 경건한 하루를 보냈던 관습에서 유래된 것으로, 앞서 오계의 항목 중 불사음(不邪)을 불음으로 고친 채 그 모두를 포함하여 거기에 ‘높은 자리에 앉거나 호화로운 침대에 눕지 말라’, ‘몸에 향유를 바르거나 장신구를 달지 말 것이며, 연극 등의 오락물을 보지 말라’, 그리고 ‘정오가 지나면 식사를 하지 말라’는 등의 세가지 항목이 추가된 것을 말한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절을 찾아 머무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사항이라 하겠다.

그리고 10계는 20세 미만의 출가자, 즉 사미(沙彌)와 사미니(沙彌尼)들이 지켜야 할 사항을 말한다. 그리고 구족계는 비구(比丘) 또는 비구니(比丘尼) 스님들이 지켜야 할 계(戒)의 항목으로서, 비구 250계와 비구니 340계가 이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듯 모든 계(戒)의 항목들은 탐(貪), 진(瞋), 치(癡) 삼독(三毒)의 번뇌에 대한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의 수행 중 <탐욕(貪)에 대한 계(戒)>의 수행을 말하는 바, 이 지계(持戒)의 닦음을 통해 우리는 계 정 혜 삼학 즉 소승 수행의 궁극적 단계에 이르를 수 있게 되어진다.


이상 <소승 성문계>에 대한 대승불교의 계율 항목이 있으니 우리는 이것을 <대승 보살계>라 불러 말한다. 이는 출가 및 재가, 남녀를 막론한 모든 대승불교의 실천자들이 지녀야 할 항목으로서, 대승불교의 율전(律典)인 범망경(梵網經)에 소개된 바 ‘10가지의 무거운 계 즉 10중계(十重戒)와 48가지의 가벼운 계 즉 48경계(四十八輕戒)’가 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볼 수 있는 바, 대승 수행의 보살들은 <소승 성문계>라 말할 수 있는 <재가오계> 등을 능히 받아 지닌 채, 필경에는 그것을 넘어서 <대승 보살계>를 받아 수행의 밑거름을 삼아야 할지니, 그 계를 지킴으로 말미암아 궁극적으로 우리는 불, 법, 승 삼보께 대한 진정한 귀의 즉 <삼귀의계(三歸依戒)>를 행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모든 수행인들은 계를 지켜나감에 있어 삼취정계(三聚淨戒)의 뜻을 되새겨야 할 것이니, 삼취정계라 함은

 

(1)‘윤리적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는 등의 모든 일을 하지 말것’을 뜻하는 <섭율의계(攝律儀戒)>

(2)‘모든 착한 일을 능동적으로 실천할 것’을 뜻하는 <섭선법계(攝善法戒)>,

(3)‘모든 생명을 가진 중생들을 이익되게 할 것’을 말하는 <섭중생계(攝衆生戒)>

 

의 세가지 항목으로서, 이 모든 것에 의존해 삶을 살아나갈 때 우리는 궁극적 생사해탈의 길에 들어선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경전을 인용하는 가운데 지계 바라밀다의 참뜻을 되새겨 보기로 하겠는 바, 다음에 인용되는 내용은 열반경(涅槃經) 가운데의 것을 추린 것이다.

"보살은 집을 나오면 금계(禁戒)를 받들어 위의를 잃지 않고 나아가나 들어오나 항상 행동이 세밀하여 작은 죄를 두려워하고, 계(戒)를 지키는 마음을 가지되 마치 금강(金剛)과 같이 굳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가섭(迦葉)아, 어떤 사람이 한 개의 부낭(浮囊;튜브)을 가지고 큰 바다를 건너려 하는데 바다 가운데서 한 나찰 귀신이 그 부낭을 달라고 말하였다. 그 사람은 그것을 주면 자기는 물속에 가라앉을 것임을 생각하고 ‘설사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이것을 줄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나찰은 ‘네가 그 전부를 주기가 어렵거든 그 반이라도, 아니면 손바닥 만큼이라도 나누어 주면 어떻겠는가?’ 하고 말하였다."

"이에 그 사람은 강경하게 거절하여 말하기를,


‘네가 구하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 작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큰 바다를 건너려 하는데 앞길이 먼지 가까운지 알 수 없다. 만약 너에게 조그만큼이라도 덜어 주면 공기가 차차 없어지고 말 것이며, 큰 바다를 건널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죽을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고 거절하였다."

"가섭(迦葉)아, 보살이 금계(禁戒)를 가지는 것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보살이 계(戒)를 지킬 때에는 번뇌의 나찰 귀신이 와서 ‘너는 나를 믿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는 결코 너를 속이지 않는다. 네가 <중금계(重禁戒)>를 파하기만 하면 편안히 니르바나(열반)에 들 것이다’라고 꼬인다. 보살은 이때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내가 설사 계행(戒行)을 갖기 때문에 아비지옥에 떨어질 지라도 이것을 범하여 천상(天上)에 날 생각은 없다.’

보살은 이렇게 굳게 계법(戒法)을 지키고 마음을 금강(金剛)과 같이 단단하게 가져 대소승(大小乘)의 계(戒)를 중하게 여겨서 차별이 없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와같이 함으로써 곧 근본의 정계(淨戒)를 구족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성행(聖行)이라 이르는 것으로서, 이렇게 하여야만 신(信), 진(進), 계(戒) 참회(懺悔), 다문(多聞), 지혜(智慧), 사리(捨離)의 일곱 재물을 가지고 성인(聖人)이 될 수 있는 것이다."



3)인욕 바라밀다(忍辱波羅蜜多,ksanti-paramita)
찬제 바라밀다라 음역(音譯)하며, 인욕 바라밀다라고 번역된다. 인욕(忍辱)이란 타인으로부터 받는 모든 박해나 고통을 잘 참고 견디며 성내지 않는 것을 말한다. 또한 스스로의 괴로움에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며, 도리어 그것으로 인해 원한과 노여움을 없앤 채 모든 법의 진리를 깨달아 마음을 편안히 안주하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인욕 바라밀다를 수행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상(相)을 여의게 된다. 곧 <‘나(我)는 나’라는 거짓된 나(我)>의 관념을 벗어나 자신 스스로가 본래 공(空)한 존재임을 깨달아 그릇된 견해에 떨어지지 않는 것, 그리하여 온갖 공(空)의 실상을 깨달아 마음을 편안히 하고 정적 가운데 머무는 것. 이것을 우리는 <무생법인(無生法忍)>이라 말하는 바, 대지도론(大智度論)에 의하면 이렇듯 참된 인욕 바라밀다를 수행하므로서 초지(初地) 보살은 7, 8, 9지(地) 수행 정도의 <무생법인>을 증득할 수 있다고도 하였다.



한편 불설연도속업경(佛說演道俗業經)에 의하면 부처님께서는 급고독(給孤獨) 장자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 적이 있기도 하다.

“인욕(忍辱)하는 네가지 일로서 빨리 대승(大乘)을 성취하느니,

 


(1)비록 꾸짖고 나무라는 자가 있더라도 말을 노여워하지 않고,
(2)설사 때리는 자가 있더라도 대항하지 않으며,
(3)훼방하고 욕하는 자가 있더라도 귀에 바람 지나가듯 생각하고,
(4)나를 해치는 자를 항상 불쌍히 여기는 것이 그것이다.”

이와같이 우리가 인욕의 수행을 해나갈 수 있는 것은 ‘나’를 ‘나’로서 인식하는 것이 아닌 연기의 법칙에 의거한 존재로서, 그리고 마침내는 <공(空)>한 존재로서 자신을 인식하는 것을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금강경 가운데의 다음 구절의 참뜻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수보리야 내가 옛적에 가리왕(歌利王)에게 몸을 베이고 잘리고
할 때 그때에 나에게는 아상(我相)도 없고 인상(人相)도 중생상
수자상도 없었다. 그때 만일 나에게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이 있었다면 응당 성내고 원한의 마음을 일으켰을 것이다.“


이제 위의 금강경에 소개된 바 의미성을 좀더 자세히 살펴 보기 위해, 또한 인욕 바라밀다의 참뜻을 돌이켜 보기 위해 경전의 내용을 인용해 보기로 하겠는데, 다음의 내용은 현우경(賢愚經) 가운데 씌여 있는 부처님의 인욕에 얽힌 전생담 이야기이다.



과거 헤아릴 수 없는 아승지겁 이전에 남섬부주에 큰 나라가 있어 이름이 바라나시라 하였고, 당시 국왕의 이름은 가리왕(歌利王)이라 하였다. 그때 그 나라에는 큰 선인(仙人)이 있어 이름을 찬제파리(提波梨)라 하였는데, 그는 500 제자들과 함께 숲속에 머물며 인욕(忍辱)을 수행하고 있었다.

어느 때 국왕은 신하들과 함께 부인과 궁녀들을 데리고 산에 들어가 놀게 되었다. 때에 왕은 피로해 누워 쉬고 있었는 바, 여러 궁녀들은 두루 돌아다니며 여러 곳을 다니다가 찬제파리 선인이 단정히 앉아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는 공경하는 마음이 생겨 꽃을 따서 그의 위에 흩뿌리고 그 앞에 앉아 그의 설법을 듣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난 왕은 여인들이 보이지 않자 네 신하들을 데리고 여러 곳을 찾아 다니다 그 여인들이 선인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선인에게 물었다.

 


“너는 네가지 공(空)의 선정을 얻었는가?”

“얻지 못했읍니다.”


“네가지 무량심(無量心)을 얻었는가?”

“얻지 못했읍니다.”


“네가지 선정을 얻었는가?”

“얻지 못했읍니다.”


이에 왕은 화를 내며 묻기를,
“너는 그런 공덕 모두를 얻지 못하였으니 한낮 범부에 지나지 않건만, 혼자 여인들과 그윽한 곳에 머물러 있으니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너는 항상 여기 머물러 있으니 어떤 사람인가, 또 무었을 수행하는가?”

이에 선인이 “인욕(忍辱)을 수행하고 있읍니다”라고 대답하자 왕은 칼을 빼들며 말하였다. “만일 인욕을 수행한다면 나는 너를 시험해 능히 참는가를 알아 보리라” 하면서 선인의 두 손과 두 다리, 귀와 코를 잘라 내었다.

그때 온 천지가 진동하였고, 그 선인의 500 제자가 하늘을 날아와 선인에게 묻기를,

“그런 고통을 당하고도 인욕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읍니까?”

이에 선인은 “마음을 잃지 않았도다” 하면서,

“만약 나의 인욕하는 마음이 진실이라면 피는 젖이 되고 몸은 전처럼 회복될 것이다.”

라고 말하는 순간 선인의 몸이 원상태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에 선인은 또다시 말하기를,
“나는 지금 이 인욕을 수행하며 중생들을 위해 쉬지 않고 행하리니, 이후 어느 땐가는 반드시 부처가 되어 너희 모두를 구원할 것이다. 법(法)의 물로서 너희들 티끌과 때를 씻고 탐욕의 더러움을 없애어 영원히 청정케 할 것이다.”

이렇듯 이야기를 마치신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그때의 찬제파리는 나요, 가리왕과 4명의 대신은 다섯비구(최초의 설법을 들은 제자들)들이다”라고 하셨는 바, 이처럼 과거 부처님의 모범을 따라 우리 모두 인욕 바라밀다를 행한다면 필경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하여 현실 고통을 벗어난 열반의 저언덕에 이르를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4)정진 바라밀다(精進波羅蜜多,virya-paramita)
비리야(毘梨耶) 바라밀다라 음역(音譯)되며, 정진 바라밀다라고 번역한다. 애초 소승불교 <8정도(八正道)>의 항목 중 정정진(正精進)을 바라밀다 수행에 받아들인 것으로서, 심신(心身)을 가다듬고 힘써 선(善)을 행하여 불도(佛道)를 향해 나아가는 지속적인 힘을 말한다.

정진이란 앞서 말한 바 보시 지계 인욕을 행함에 있어 노력하고 방일하지 않는 것을 말하며, 부처님께서 열반에 즈음하여 남기셨던 다음의 말을 통해 우리는 정진의 참뜻을 헤아려 볼 수 있게도 된다.



“생한 것은 반드시 멸하는 것이니, 방일하지 말라.

방일하지 않으므로써 나는 정각(正覺)에 이르렀으며,

무량한 선(善)을 낳는 것도 방일치 않음을 말미암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부처님께서는 몸소 실천을 통해서도 정진 바라밀다의 모범을 보이셨으니, 카필라바스투 성을 떠나 출가한 고타마 싯달타 태자는 오랜 편력을 거듭한 끝에 니련선하 강가의 고행림(苦行林)을 찾아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고행림에 이르른 태자는,



몸은 방일하지 않고

마음은 탐욕과 번뇌를 여의어

늘 고요한 선정에 머물렀던 바,

모든 고행자들이 경험치 못한 고행을 닦기로 결심을 하였다.

 

 

태자는 고요히 숲속에 앉아 고요히 선정을 닦되, 하루 쌀 한알과 참깨 한알을 먹으며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렇게 한두 해를 지나니 살갖 속의 살과 피는 다 말라 버리고 오직 종이장 같은 살갖만이 뼈를 싸고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오랜 선정의 모습에 마을 사람들은 “이제 태자가 죽는다”고 외쳤으며, 카필라바스투 왕국의 신하 우다아인이 태자를 찾아와 고향에 되돌아 가자고 요구하였을 때 태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던 것이다.

 


“우다아인이여, 내 몸이 이 땅에 부딪쳐 가루가 될지라도 내가 맹세한 처음 마음은 부서지지 않을 것이오. 만일 내가 도(道)를 이루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거든 당신은 내 시체를 메고 카필라바스투 성에 들어가 ‘이 사람은 끝까지 정진(精進)하던 사람이며, 처음 마음을 버리지 않고 큰 서원(誓願)을 세운, 바른 마음 바른 뜻을 지닌 이의 해골이다’라고 말해 주시오.”



이렇듯 정진 바라밀다를 수행한 고타마 싯달타 태자는 필경에 크나큰 깨달음을 얻어 해탈에 이르게 된 것이니, 이처럼 하나의 올바른 서원(誓願)을 세워둔 채 그를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그 궁극의 끝에 이르를 수 있음을 경전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5)선정 바라밀다(禪定波羅蜜多,dhyana-paramita)
선나(禪那) 바라밀다라 음역(音譯)되며, 선정 바라밀다라고 번역한다. 진리를 바르게 사유하며, 조용히 생각하여 마음을 한곳에 모아 산란치 않게 하는 것을 선정(禪定)이라고 하는 바, 궁극적으로는 존재의 실상을 밝혀 인간의 마음 속에 깃든 무지(無知) 곧 무명(無明)을 타파하고자 하는 것을 말한다.

이제 이렇듯 존재의 실상을 밝혀 구하고자 했던 한 인물이 있어, 그를 통해 선정 바라밀다의 참뜻을 새겨 보고자 한다. 그의 이름은 고타마 싯달타, 그는 한 나라의 태자로서의 지위를 버린 채 출가한 후 많은 스승을 찾아 참된 구법(求法)의 노정을 걷는다. 그리하여 첫번째 스승인 아라라 가라마(阿羅邏迦羅摩,Arada-kalama)를 방문한 고타마 싯달타는 묻는다.



“나고 죽음의 근본을 끊고자 한다면 어떤 방법이 있읍니까?”


“만일 나고 죽음의 근본을 끊고자 하거든 먼저 세속을 떠나 계행을 지키어 마음을 잘 조복(調服)받고, 욕심과 고통을 참고 고요하고 한적한 곳에 머물러 선정(禪定)을 닦아 모든 세속적인 욕심과 좋지 못한 것을 여의고 마음을 살펴 보아 <초선(初禪)>의 경지에 들어가며, 다음 모든 생각을 가라앉히어 감각 지각의 분별을 없애고 <제2선>에 들어가며, <제2선>에서 얻은 기쁜 마음을 여의고 한 생각 고요함을 얻어 <제3선>에 들어가며, 다음 그 한 생각도 놓아 모두 고요하고 맑은 경계에 도달하여 <제4선>에 들어가게 되오. 어떤 사람은 이것을 해탈이라 하나, 이것은 참된 해탈이 될 수 없오."

"이 <제4선>에서 다시 모든 상대의 경계를 여의고 <공처정(空處定)>에 들어가며, 다시 상대의 주관경계를 여의고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에 들어가며, 그 경계를 뛰어넘어 다시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에 들어가오. 존자여 나는 이 <무소유처정>에 머물러 있오."



이에 고타마 싯달타는 오랜 동안 그곳에 머무른 끝에 <무소유처정>을 깨닫고 나서 또다시 스승 아라라 가라마에게 묻는다.



“이 <무소유처정>에 나(我)라는 것이 있읍니까, 없읍니까? 만일 나가 있다면 그 나는 앎이 있읍니까? 만일 앎이 있다면 그것은 다시 생각을 일으킬 것이요, 생각을 일으키면 다시 번뇌가 생길 것입니다. 만일 생각이 없다면 목석(木石)과 같을 것인 즉, 목석과 같다면 무엇이 열반을 체득할 것인가요?”



이에 스승은 대답할 바를 몰랐다. 이에 태자는 또다시 우드라카 라마푸트라(鬱頭藍弗,Udraka-ramaputra)라 불리우는 스승을 아 <무소유처정>을 넘어서는, 즉 모든 인식을 초월한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의 가르침을 익히게 되었는 바, 그 역시 번뇌가 다한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성취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 <비상비비상처정>이란 오직 84,000천 겁 동안 나고 죽음을 면할 수 있는 길만을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외에도 몇몇 스승들을 찾았으나 그들의 가르침에 만족하지 못한 채 고타마 싯달타는 말하였다.



“이 세상에 진정한 도를 얻은 자는 없다. 이 도는 내 스스로 판단할 것이요, 사람을 쫓아 얻을 것이 아니다. 세상 사람은 애욕 번뇌에 탐착하지 않으면 사견(邪見)과 아집(我執)에 얽매어 있다. 이 모든 사견과 아집을 여의고 애욕 번뇌의 뿌리를 뽑아 길이 나고 죽는 괴로움을 벗어나 가장 높은 정각(正覺)을 이룸은 오직 나에게 있을 뿐이다."



"또한 많은 사문(沙門,Sramana)들과 브라흐만들이 그 몸과 마음을 잘 단속하여 몸으로 탐욕에 끌려가지 않고, 5욕락의 경계에 애착하지 않으며, 모든 번뇌를 여의고 그 마음이 가장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으면서 고행을 닦는다면 곧 세간을 뛰어나는 큰 지혜를 얻을 것이다. 마치 그것은 불(火)을 구하는 사람이 마른 나무를 마른 땅에 두고 서로 비비면 결정코 불을 얻는 것과 같으리라."



이렇듯 생각한 고타마 싯달타는 스승 없이 홀로 도를 닦아 해탈의 법을 구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모든 세속의 탐욕과 번뇌를 끊어 버리는 <이욕행(離欲行)>과 한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적정(寂靜)한 <선정(禪定)>과, 몸과 마음의 고(苦)의 원인이 되는 탐착심을 떨쳐 버리기 위한 적절한 <중도(中道)의 수행>이 요구되는 것이었다.

이제 고타마 싯달타는 보드가야(Bodhgaya)의 금강좌(金剛座)에 자리한 채, 또다시 이렇게 말하였다.



“이 자리에서 나의 육체가 소멸되어도 좋다. 다만 어느 시대에도, 그 누구도 얻기 어려운 일체지(一切智)를 얻지 못한다면 나는 결코 이 자리를 뜨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고타마 싯달타는 참된 선정 속에 잠기게 되었는 바, 이러한 선정이란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임이요 세상 모든 사물들에 대한 정확한 직관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6)지혜 바라밀다(智慧波羅蜜多,prajna-paramita)
반야(般若) 바라밀다라 음역(音譯)하며, 지혜 바라밀다라 번역한다. 어리석음을 돌이켜 모든 진리를 밝게 아는 예지(銳智) 또는 일체제법을 통달하여 득(得)과 실(失),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대지도론(大智度論)에 의하면 반야(지혜) 바라밀다는

 

 

“실상(實相)을 비추어 아는 지혜로서, 생사의 이 언덕에서 열반의 저 언덕에로 이르는 배(船)와 같다”

 

 

고 하였으며, 소품반야경(小品般若經)에서는

 

 

“마치 대지에 씨앗을 뿌리면 인연화합에 의하여 생장(生長)이 있게 되는데, 땅을 의지하지 않고는 모든 것이 생장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다섯 바라밀다는 반야(지혜) 바라밀다 속에 머물러 증장함을 얻는다”

 

 

고도 하였다.


이렇듯 지혜(반야) 바라밀다는 모든 바라밀다 중의 으뜸으로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바라밀다>를 의지해 있으며, <지혜 바라밀다>를 통해 앞의 다섯 바라밀다는 완성이 되어진다고도 말한다.

반야(지혜) 바라밀다에서 말하는 바, <반야> 즉 Prajna는 ‘최고의 인식’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곧 Pra는 ‘최고의 우수한’이란 뜻을 가지며, jna는 ‘알다 인식하다’는 뜻을 가지는 바, 주관과 객관을 나누어 인식하고자 하는 ‘분별인식’이 아닌 ‘분별인식을 넘어선 관조(觀照)’의 입장을 말한다.

이에 대해 기존 소승불교에서는 ‘무명(無明)과 반야(般若)를 별개의 것으로 설명’하였으나, 대승불교에서는 ‘그러한 소승의 인식 자체가 무명(無明)이며, 그 둘을 하나로 이해함이 반야(般若)’라는 입장을 말하기도 한다. 즉 이것은 <이것과 저것> <주관과 객관> 등을 이분법적으로 인식했던 기존 사고에 대한 획기적 전환이라 할 수 있으며, 우리는 이러한 전환의 결론 속에 연기의 법칙에 기초한 공(空)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이렇듯 공(空)의 사상을 기초해 있는 반야, 반야 바라밀다 이에 모든 부처님들께서도 이러한 지혜를 얻고서야 부처를 이루었다는 까닭에 이를 달리 <불모(佛母)> 즉 ’부처님의 어머니’라 표현하며, 이 반야 바라밀다의 이치를 인식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생사고해의 이 언덕[此岸] 넘어 해탈 열반의 저언덕[彼岸]에 이르를 수 있을 것이나, 그럼에도 조차 <저 언덕이란 이 언덕에 다름아닌> 것을 알게 되며, 그러므로 우리는 <생사 즉 열반>이라는 ‘대승불교의 위대한 슬로건’의 참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제 위에 설명한 바 반야 바라밀다의 참뜻을 이해키 위해 우리는 하나의 설화를 들어볼 수 있는데, 이것은 우리 한국의 고승 원효(元曉)대사의 깨달음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타오르는 구도심을 잠재울 수 없었던 원효(元曉)대사와 의상(義湘)대사는 함께 당나라로 구법(求法)의 길을 떠났다. 그러던 어느날, 원효와 의상은 날이 저물어 인적이 없는 산중에서 노숙을 하게 되었다. 두 스님은 바람을 피하여 무덤 사이에 잠자리를 구하고 잠을 청하였던 바, 한 밤중 심한 갈증을 느껴 잠에서 깨어난 원효는 주위를 살폈다. 마침 옆 어둠 속에서 바가지 같은 것이 눈에 띠었는데, 다가가니 물이 고여 있었다. 맛을 보니 달콤하였고, 이내 원효대사는 그 물을 단숨에 들이키고 만족한 듯 잠이 들었다.



이 날 아침, 간밤에 물을 떠 마신 바가지를 찾고자 했던 원효대사은 그 바가지가 다름아닌 해골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리도 달콤하게 생각하며 마셨던 물 역시 해골 안에 고여진 썩은 빗물이었음을 알게 된 원효대사는 갑짜기 속이 매스꺼워 토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순간, 원효대사는 문득 깨닫게 되었다. ‘간밤에 아무 것도 모르고 마실 때는 그토록 감미롭게 느껴지던 것이, 해골에 고인 썩은 빗물임을 알자 온갖 좋지 않은 생각과 함께 구역질이 일어나다니 그리하여 원효대사는 순간적인 깨달음을 얻었고, 그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심생즉 종종법생(心生卽種種法生)
심멸즉 촉루불이(心滅卽髑髏不二)
삼계유심 만법유식(三界唯心萬法唯識)
심외무법 호용별구(心外無法胡用別求)

마음이 일어나면 온갖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진 즉 해골도 없어지니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이 오직 인식인 것을
마음 밖에 법이 없으니, 어찌 따로 법을 구하겠는가“



이와 같은 게송을 남긴 원효대사는 더이상의 구법(求法) 여행을 포기한 채, 의상대사와 헤어졌다. 그 길로 신라(新羅) 땅으로 되돌아온 원효대사는 무덤가에서 깨달았던 바 ‘참다운 법’을 중생들에게 설하였다. 그에게는 더 이상의 ‘열반의 땅’이 또다른 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곧 ‘저 언덕’이란 ‘이 언덕’에 다름아닌 것을 인식한 원효대사는 자신 업(業)의 잔재로서 요석공주와의 사이에 아들을 낳았으니, 그는 이두문자를 집대성한 신라의 대학자 설총(薛聰)이었다.



원효대사는 그때부터 머리를 기르고, 아래 하(下) 보다도 자신을 낮추어 복(卜)이라 칭한 채, 즉 <복성거사(卜性居士)>라 이름하였다.

 

또한 광대들이 지니는 박을 갖고 화엄경에 나오는 “일체의 거리낌이 없는 사람은 ‘오롯한 진리(一道)’로서 생사(生死)를 벗어난다(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는 구절 중 ‘무애(無碍)’라는 말로서 박의 이름을 삼고 정토(淨土) 사상에 기초한 무애가(無碍歌)를 불렀으니, 그야말로 현실 속에 정토, 열반을 구현코자 한 대승불교의 참된 실천자, 반야 바라밀다의 참된 실천자, 즉 <대승 보살(菩薩)>로서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라 말할 수 있다.

 

정승석교수

 

 

출처 : 수보리
글쓴이 : 아침이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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