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종에서는 왜 경전 공부를 ‘한눈팔기’라고 비난할까?
그 사정에 대한 이야기의 일환으로, 선종이 일어나기 전 중국 불교계에서 오랫동안 경전 공부에 주력하였던 양상을 더듬어보자.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려면 경전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다. 그래서 자연히 중국에서도 불교가 전래된 뒤 내내 경전 공부가 중시되었고, 경전 해석을 중심이자 바탕으로 해서 불교사상이 매우 깊이 있고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불교가 새로운 지역에 소개되어 뿌리를 내리는 과정에는 대체로 비슷한 양상이 있다. 대개 외국의 승려가 불상(佛像)과 경전을 가지고 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또한 왕족 등 높은 신분의 사람이 병으로 고생할 때 승려가 이를 치유해주는 등 신통력을 발휘하는 이른바 신이(神異) 현상을 통하여 신망을 얻는다는 이야기가 많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소개되던 사정에 대해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적혀있는 기사들도 대개 그런 내용이다. 그것은 중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에 불교가 소개된 것은 한(漢)나라 때, 서력 기원 전후가 바뀔 즈음이었다고 한다.
불상은 종교적인 신앙 대상의 대표적인 상징이며 경전은 종교적인 신념 내용, 즉 교리와 사상을 담고 있다. 그리고 신이한 힘은 그 종교의 신빙성을 증명해주는 역할을 한다. 새로운 종교를 접하고 그 신이한 힘을 신뢰하게 되면, 한편으로는 자연히 그 교리와 사상의 내용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경전 공부를 하게 되는데, 우선은 자기 나라 글로 번역할 필요가 있다. 열의 있는 인도 승려가 중국말과 글을 배워서, 또는 중국 지식인이 인도의 글을 배워서 경전 번역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번역이라는 것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언어와 문자를 바꾸는 일만은 아니다. 예를 들어 “Father called mother.”라는 영어 문장에 대해, father를 아버지, mother를 어머니, call을 부른다로 바꾸면 “아버지가 어머니를 불렀다.”고 번역하게 된다. 여기에 한국의 경어법을 적용해서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부르셨다.”고 손질을 하면 훌륭해진다. 그런데 문맥에 따라서는 그게 아닐 수도 있다. “아버지께서 어머니께 전화를 하셨다.”는 뜻이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간단한 문장 하나도 번역이 제대로 되려면 전후 사정을 간파해야 한다. 더욱이,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개념으로 가득 찬 종교 문헌을 번역하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낯선 다른 문화의 세계관을 담은 종교 문헌을 번역할 때에는 어차피 어느 정도 왜곡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자기 문화에 있는 기존의 익숙한 개념과 관념에 맞추어서 번역을 하고 해석을 하게 되는 것이다.
중국에서 처음에 불교 경전을 번역하고 해석할 때에도 그런 현상이 일어났다. 당시 중국 종교사상 가운데 그래도 불교에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는 것이 도가(道家)사상이었다. 그래서 중국에서 불교사상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던 초기에는 도가의 개념과 사상이 많이 동원되고 큰 영향을 끼쳤다. 이를테면 무(無)라든가 도(道)라는 말로 번역된 불교사상의 개념들을 도가적인 의미의 무, 도로 이해하곤 했던 것이다. 이처럼 불교에 대한 이해를 중국적인 틀, 특히 도가 사상의 틀에다가 짜 맞춘 것을 두고 격의불교(格義佛敎)라고 부른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곧 불교 사상에 대한 보다 깊이 있고 본격적인 이해의 노력이 펼쳐지게 된다. 그것은 역시 경전 공부가 무르익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이번 회는 어느새 지면이 다 차서 다음 회로 이야기를 넘겨야 하겠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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