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대(宋代) 간화선(看話禪)의 발전은 북송과 남송 시대를 구별하여 이해할 수가 있다.
북송에서 임제종의 황룡파는 간화선의 사상적인 기본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황룡파는 당시대에 유행하는 선교일치적인 관점을 비판하고 교외별전의 사상을 확립하였다. 이런 교외별전의 사상에 힘입어서 간화선은 남송 때 임제종 양기파에 의해서 성립되었다.
선교일치와 교외별전은 북송과 남송의 시대적인 차별을 떠나서, 중국불교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이다. 선교일치가 말 그대로 선과 교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입장이라면, 교외별전은 경전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따로 전해지는 가르침을 전제하는 말이다. 부처님 당시의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는 경전의 가르침과 수행을 별개로 보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듣고, 사유하고, 연습하고, 체험하는’ 공부의 과정은 바로 경전의 가르침을 내면화시키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이런 전통은 대승불교에서 대체로 충실히 계승됐다.
이런 점에서 보조도 화엄의 가르침과 수행론을 ‘먼저 듣고 이해하여 믿음에 들어가고 뒤에 생각 없음(無思)으로 딱 들어맞게 된다’고 하였다. 여기서 먼저 듣는다고 하는 것은 바로 성문승(聲聞乘)을 말하는 것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다음에 비로소 이해하고 믿음에 들어가서 증득하게 된다. 기본적인 출발점은 어디까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것의 장점은 공부하는 길에서 분명한 기준점이 제시된다는 점에서 유리하다. 경전의 말씀은 삿된 믿음에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여 준다. 그리고 자신이 도달한 경지가 어디에 와 있으며, 경전에서 기술한 내용과 함께 대조하여 자신을 점검하는 도구로서도 활용할 수가 있다.
그러나 경전의 가르침도 여전히 개념이고 지식이란 체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측면이 있다. 강한 의미의 선교일치론은 수행 실천한다고는 하지만 끝내는 관행(觀行) 방법에 듣고, 이해하는 말길(語路)과 뜻길(義路)이 있다. 때문에 분별에 의지한 까닭에 분별이 없는 지혜(無分別智)를 얻지 못한다고 보조는 본다. 선교일치는 완전하게 개념의 흔적을 버리지 못한 결과를 가져온다. 반면에 교외별전은 경전의 가르침마저도 완전하게 벗어나는 자유의 길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장점이다. 교외(敎外)란 개념적인 지식을 벗어난 가르침을 의미한다.
이것은 결코 개념적인 지식의 체계가 아니다. 개념적인 관점이 사라진, 분별과 분석이 존재하지 않는 마음, 존재한 그대로의 실상을 의미한다. 별전(別傳)이란 어떤 가르침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언어적인 개념에 의지하지 않는 다른 방식으로 전해지는 가르침이다. 언어가 아닌 체험으로, 마음과 마음으로 전해지는 방식을 말한다. 여기에는 느림과 빠름이 없고, 순서와 절차가 없다. 이런 것들은 모두 분석적인 마음에 불과하다.
간화선에서 법계연기를 말하지만, 어디까지나 언어와 뜻 길이 끊어진, 그 자체로 알려지는 방식인데, 이것은 바로 화두를 통해서 성취된다. 부처님이 그렇게 했듯이, 경전의 가르침에 매이지 않고, 스스로의 법성과 자신의 의심을 결단하는 탐색에 의해서 깨우쳐가는 길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 경전적인 근거를 전제하지 않기 때문에 극단적인 경우는 불교와 불교 아닌 가르침을 구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간화선에서는 스승의 절대적인 점검과 지도가 절실하게 요청된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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