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법이 인연으로 말미암을 뿐, 주재자(主宰者)가 없다」는 말은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밝히는 중요한 열쇠가 되는 말이므로,
공부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이 말의 참 뜻을 철저히 사무쳐 체달(體達)해야 합니다.
결코 입으로만 되뇌는 것으로 끝나선 안 됩니다.
세상에서는 일반적으로 <작용의 주체>가 있어서 <작용>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아 왔고,
지금도 그렇게 알고 있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지요.
그런데 사실은 그게 그렇지 않고, 모든 일어나는 일이 다 인연으로 말미암을 뿐,
<짓는 자>가 없다는 게 이 언명(言明)의 요점이고 보니,
그렇다면 현전하는 모든 일은 <짓는 자>가 없이 저절로 일어난다는 말이 되지 않겠어요.
<짓는 자>가 없는데 어떻게 <일>이 혼자서 일어나겠어요?
이것이 곧 <연기(緣起)는 무기(無起)라>는 말이 있게 된 근거입니다.
즉 「인연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모든 일은
비록 그 외양(外樣)은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일어나는 일이 없다」는 뜻이죠.
그런데 이 세상엔 인연으로 말미암지 않는 일은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당연히 현전하는 일체의 세간상(世間相)은 지금 있는 이대로가 적멸(寂滅)해서,
티끌 하나 움직인 조짐조차 없다는 말이 되는 겁니다.
요약하건대, 일여법계(一如法界)는 <지금 있는 이대로> 본래 아무 일도 없는데,
인연법(因緣法)에 미혹한 중생이 헛되이 면전에서 기멸(起滅)을 봄으로써
이 세상이 <있음>이 되었고,
그리하여 생멸(生滅) 거래(去來) 유무(有無) 등의 허망한 유동상(流動相)을 봄으로써
까닭 없이 윤회(輪回)하기에 이른 겁니다.
따라서 법성(法性)에서 보건대,
<행위의 주체>로서의 <나>란 본래 없는 건데,
이 움직이는 몸과 움직이는 마음을 붙잡아 <나>로 삼고,
이 <허망한 나>(妄我)를 고이고 섬기기 위해 온갖 유위의 공력(功力)을 들여서,
그 바람으로 훗날 좋은 과보(果報)가 있기를 바라고
허구한 날 허둥허둥하면서 쉴 날이 없는 게 바로,
가엾은 무명중생의 살림살이입니다.
거두절미하고,
― 출가(出家)하여 도(道)를 닦는 목적은
이 <허망한 나>를 수고롭게 해서 어떤 편의(便宜)함을 얻으려는 게 아니고,
이 망아(妄我)가 본래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 근본임을 알아야 합니다.
<나>라고 할만한 <나>가 본래 없음을 철저히 사무쳐서,
일체의 조작(造作)을 쉬고
오직 시절과 인연을 따를 뿐인,
이것이 바로 원기인(圓機人)의 살림살이요, 이것이 바로 무사도인(無事道人)이니,
그저 영겁토록 쉴 일이요, 다시 아무런 특별한 재간이나 별다른 도리가 있는 게 아니니,
부디 명심해야 합니다. * * * 중생이 본래 성품이 없고, 따라서 생사(生死)도 없어서 도무지 독립적인 개체(個體)라고 할 만한 실체(實體)가 없는 게 진실입니다. 그래서 환화공신(幻化空身)이고 하는 게 아니겠어요? 그런데 이 환과 같은 육신을 <나>로 삼고는, 이것을 사고(思考)나 행위(行爲)의 주체(主體)인 줄 알기 때문에 <나>와 <남>을 비교해서 능력의 우열(優劣)을 가리는 건 이것이 세속법(世俗法)인 겁니다. 따라서 경에 이르기를,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라」고 한 겁니다. 바꿔 말하면, 「<나>라는 실체가 있다는 생각」을 하면 참된 수행자도 아닐 뿐만 아니라, 지금의 범용(凡庸)한 <나>를 갈고 닦아서 훌륭한 재간이나 수승(殊勝)한 지견을 얻어서 상근기(上根機)가 되기를 바란다면 이야말로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좋고> <나쁨>, <귀하고><천함> 등을 추구하면서 이쪽 저쪽 하는 범부(凡夫) 사리의 전형이라 하겠습니다. 문득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밝혀서, 안으로 <나>도 없고, 밖으로 상대할 경계도 공하여 도무지 취사(取捨)하고 조작(造作)할 일이 없는 <신령한 성품>(靈性)에 계합(契合)한다면, 일체의 유위행(有爲行)이 몽땅 쉬고, 매사에 그저 시절과 인연을 따를 뿐이리니, 다시 무슨 일이 있겠어요? 그리하여 이른 바 <하려함이 없는 도>(不擬之道)에 든다면, <지금 있는 이대로의 나>가 바로 '부처'와 조금도 다름이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 * * <설봉(雪峰) 대사의 말씀>이 새삼스러운 대목이군요. 시간도 공간도 없다면서 이 질문은 어디서 한 거며, 또 누구에게 한 겁니까? 더구나 <이것뿐인가> 아닌가 하고 묻고, 생각이나 느낌이 일어났다 사라졌다 한다는데, 도대체 그런 일들이 언제, 어디서 일어나는 겁니까? 말을 들었거든 모름지기 그 뜻을 깊이 깨달아 살필지언정, 그저 남이 한 말을 입으로만 외이고 다닌다면 무슨 소용이겠어요? 경에 이르기를, 「생각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생각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한다」고 했어요. 그저 문득 무심(無心)에 들면 본래 아무 일도 없고, 없다는 것조차 없으니, 다시 헤아리고 더듬고 할 일이 무엇이겠어요? 행여 말이나 문자 속을 뒤지지 말고, 곧장 면전에 전개되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을 향하여 여실(如實)히 닦아야 합니다. <여실함>이란,
본래 여(如)한 법 가운데 도무지 한 법도 생멸이 있음을 보지 않는 것이니,
그렇게만 되면 세간상(世間相)이 지금 이대로 상주(常住)함을 보아서,
다시는 이쪽 저쪽 할 일이 영원히 쉴 것입니다.
* * *
이 세상 일체 만유는 인연으로 말미암지 않고 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때문에 이 세상의 온갖 존재는, 그것이 유정이건 무정이건 간에
<자체의 성품이 없다>(無有自性)고 말하는 겁니다.
마치 저 그림자나 메아리가 자체의 성품이 없기 때문에, 다른 것
― 물체나 음성 ― 에 의지 해서만 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만약 자체의 성품이 있는 거라면 다른 것에 의지할 필요가 어디 있겠어요?
「일체 존재는 <자체의 성품이 없다>(無有自性)」고 하는 이 말은
경전 도처에 나오는 말인데도 사람들은 이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아니면 그 말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냥 지나치기가 일수입니다.
<자체의 성품이 없다>는 말은 다시 말해서,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 입니다.
그러기에 경에 이르기를,
「이 세상 모든 존재는 꿈과 같고 환(幻)과 같고, ··· 마땅히 이렇게 볼지니라」
했던 게 아니겠어요?
실체(實體)로 존재하는 것도 아닌데 다시 <같은가> <다른가> 하고 따진다면
그야말로 설상가상이지요.
그러므로 일체 존재는, 있되 있음이 아니므로 <있음>에 머물 수도 없고,
없되 없음이 아니므로 <없음>에 머물 수도 없는,
이것이 바로 제법실상(諸法實相)인 것이며,
여래(如來)라는 이름이 생기게 된 근거이기도 한 겁니다.
* * *
당신은 매사에 그렇게 즐겁기만 합니까? 그것 참 이상하군요.
매사에 그렇게 즐겁기만 하다면 "즐겁다!"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 이 세상의 모든 언어는 서로 상반(相反)된 인자(因子)에 의지해서 세워지게 마련입니다.
예컨대, 고(苦)에 의지해 낙(樂)이 세워지고,
낙에 의지해서 고가 세워지며,
옳음(是)에 의지해서 그름(非)이 세워지고,
그름에 의지해서 옳음이 세워지는 등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 "이것" 있으므로 "이것"이 있고, "이것" 없으므로 "이것"이 없다.」고 했어요.
따라서 만약 즐거움 뿐이요, 고(苦)가 없다면 당연히 즐거움도 없을 것이며,
'그른 일'이 없다면 당연히 '옳은 일'도 없을 겁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범부들이 이 세상의 모든 악(惡)을 소멸하면 당연히 선(善)만 남을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은 낙원이 될 거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악이 없으면 선도 따라서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마땅한 '하나'만을 남겨두고,
마땅찮은 '다른 하나'를 없애야 하겠다> 는 치우친 마음
― 이것이 생사심(生死心)입니다 ―
이 항상 마음속에 갈등을 일으켜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 번뇌가 다하지 않는 게 우리들이 사는 세상의 실상입니다.
요약하건대, 우리들의 본래 마음(本心)은 선·악(善惡)도 고·락(苦樂)도 아니면서,
마치 빈 골짜기의 메아리처럼,
허망한 인연을 따라 선악(善惡)시비(是非) 득실(得失) 등의
분별심(分別心)을 낸다는 사실을 알아서,
― 이것을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 합니다 ―
종일토록 시비득실을 가리는 마음인 채로
전혀 끄달림도 얽매임도 없는 게 바로 무심도인(無心道人)의 일상입니다. * * * 모든 일은 진성연기(眞性緣起)일 뿐이요, <작용의 주체>도 없고 <수용(受用)의 주체>도 없이 이 세상은 다만 인연 따라 굴려지고 있는 것이 제법실상(諸法實相)입니다. <참 성품>(眞性)이란, 말 그대로 변하지 않고 옮기지 않아서 한결같다는 뜻이요, 이 불변의 참 성품이 그 자체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만 인연을 따르면서 천태만상의 형상을 내는 것이니,
마치 빈 골짜기가 온갖 음성에 응하여 메아리를 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저 바다는 종일토록 물결치지만,
그 모든 운동과 작용의 근본인 <물>이 본래 움직이는 일이 없기 때문에,
따라서 이 <부동의 본체>에 의지하여 나는 천파만파(千波萬波)는
비록 그 외양(外樣)은 치성하게 움직이는 것 같지만,
실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인식작용(認識作用)이 마치 붓대롱을 통해서 사물을 보듯이
― 불가(佛家)에선 이것을 관견(管見)이라 합니다 ―
국소적(局所的)인 관찰에 치우치기 때문에 항상 <부동의 본체>를 놓치고
부분에만 국집(局執)하다 보니까,
온갖 <이런 것>과 <이렇지 않은 것>을 분별하고 집착함으로써,
본래 <하나인 바탕> 위에 헛되이 숱한 차별상(差別相)을 세워서 갈등을 자초하게 된 겁니다.
그러므로 겉보기엔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이 이어지는 이 세상은
그 여여부동(如如不動)한 본체를 여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따라서 성인의 말처럼 「세간상(世間相)이 상주(常住)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이 몸은 말 그대로 환화공신(幻化空身)이요,
지각(知覺)도 작용(作用)도 없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작용의 주체>가 없는데 <작용>이 어찌 혼자서 일어나겠어요?
따라서 이 세상은 지금 이대로 적멸(寂滅)해서 아무 일도 없음을 알면
그것이 바로 <생사(生死)가 그대로 열반(涅槃)인 도리>이니,
천년 묵은 꿈에서 깨고 나면 머리는 여전히 베개 위라는 말이 있게 된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원만한 근기의 사람>(圓機人)은
함(爲)에 즉(卽)하여 함이 없고, 생각에 즉하여 생각이 없을 따름이니,
그저 한 생각이나마 조작 없는 마음에 맡길 수만 있으면
이것이 곧 해탈임을 알아야 합니다.
* * *
이 세상 온갖 법은, 유정(有情) 무정(無情)을 막론하고 모두가 인연으로 말미암을 뿐이요,
주재(主宰)가 없다는 사실은 이제 새삼 따져볼 필요도 없을 만큼 분명한 사실이 아닙니까?
만법이 자성(自性)이 없어서, 꿈과 같고 환과 같아서 작용이 없는데도,
사람들이 어리석어서 <짓는 자>(作者)가 있어서
작용을 일으키는 줄 잘못 알고 살아왔던 것뿐입니다.
따라서 정법이 드러나면 온갖 법이
― 이 몸도 마음도 세계도 ―
모두 사라져서 <오직 하나의 참되고 여여한 법계>가 우뚝할 뿐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심리적 물리적 온갖 작용은
그 모두가 범부의 정식(情識)으로 헛되이 분별된 것일 뿐,
실제(實際)는 티끌 하나도 움직인 조짐(兆朕) 조차 없는 게
제법실상(諸法實相)인 겁니다.
저 바다는 오늘도 바람 따라 종일토록 물결치지만,
낱낱의 물결들이 <나>를 집착하면서 이치나 도리를 따지고,
의미(意味)를 찾고 하는 따위의 허망한 짓은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저 큰 바다는 무시 이래로 인연을 따르면서 오늘도 여전히 출렁이고 있지요.
출처 : 출리심 보리심 공
글쓴이 : - 삼매 -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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