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실상

[스크랩] 이것이 바로 제법실상(諸法實相)이다. 4

수선님 2018. 6. 24. 11:38

인연 따라 나는 모든 것은 <남이 없음>(無生)을 철저히 깨쳐야 합니다.

만약 이 <남이 없는 도리>(無生法忍)를 밝히지 못했으면,

그 밖의 것은 전혀 건드릴 필요도 없으니, 
왜냐 하면 만법의 무생(無生)을 알아서 만법이 성품 없음(無性)을 깨치고, 
나아가 <법의 평등>을 얻는 것이야말로 <마음의 눈>(心眼)이 떠서 
<걸림 없는 지혜>(無碍智)를 얻는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엔 인연으로 말미암지 않고 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니, 
그러므로 이 세상 모든 것은 꿈과 같고 환(幻)과 같아서 
전혀 집착할 것이 못된다는 것이 바로 연기설(緣起說)의 뼈대입니다. 
따라서 그것이 심리현상(心理現象)이건 물리현상(物理現像)이건 
지금 현재 면전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은 
사실은 전혀 생멸(生滅)하거나 왕래(往來)하는 일이 없는 게 제법실상(諸法實相)입니다.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만약 모든 형상(形相)이 모습이 아닌 줄로 보면 바로 여래(如來)를 보리라」고 했던 것이며, 
'여래'란 부처님의 별호(別號)인 동시에 법(法)의 존재하고 운동하는 양태(樣態)가
바로 그렇다는 ― 오되 옴이 없고, 가되 감이 없다는 ― 것입니다. 
요컨대, 범부들이 어리석어서, 지금 이 순간의 '한 생각'이 나(生)는 일이 없음을 알지 못하고, 
한 생각이 문득 일어나기 무섭게 그 속으로 뛰어들어서는 한 바탕 법석을 부리던가, 
아니면 이것을 찍어눌러서 일어나지 못하게 하려고 애쓰던가 하면서
전혀 쓸데없는 조작(造作)을 일삼기 때문에 쉴 겨를이 없는 겁니다. 
만약 누군가가 이 일념연기(一念緣起)의 허망함을 알아서, 
일어나는 생각 
― 그것이 무슨 생각이건 ― 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 마음은 저절로 잠잠해지리니, 이것을 무심(無心)이라 하는 것이요, 
먼저 일어나는 생각을 억눌러서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을 무심이라 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금 이 순간에도 좌선을 한답시고 우뚝우뚝 그럴싸하게 위의(威儀)를 갖추고 앉아서는 
산란한 마음을 조복해서 고요한 마음으로 하는 것을 선(禪)인 줄 아는 무리들이 
판을 치고 있으니, 참 딱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 마음(眞心)은 본래 움직이는 일이 없고, 
<망령된 마음>(妄心)은 나는 일이 없으니, 
― 그러기에 고인이 이르기를, 
「한 순간이라도 <조작 없는 마음>에 맡길 수만 있으면 온갖 것으로부터 일시에 해탈하여 
천지간을 소요함에 거리낌이 없으리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 허망한 몸과 마음을 공연히 수고롭게 해서 유위(有爲)의 공덕을 얻으려고 헛애를 쓰지 말고, 
지금 당장 회심(廻心)하여, <나의 심성(心性)이 본래 상주(常住)함>을 본다면, 
이것이 바로 참 부처(眞佛)가 여여(如如)한 것이니, 다시 더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 * *
연생(緣生) 하는 일체만법은 자체의 성품이 없어서 
꿈과 같고 환(幻)과 같음을 철저히 밝혀야 합니다. 
안으로는 나는 마음이 없고, 밖으로는 티끌만한 한 법도 실다운 법이 없어서, 
안팎이 가지런히 공적(空寂)하여 아무일도 없는데, 
다만 어리석은 범부들이 인연 따라 생멸(生滅)하는 허망한 모습(相)을 실유(實有)로 오인하여 
집착하는 바람에 까닭 없이 그 <청정하고 맑고 고요한 본래 마음>이 어지럽게 흩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수행하는 사람이 어느 날 이와 같은 진실에 문득 눈을 뜨게 되면, 
진실로 면전에는 티끌 만한 한 법도 없음을 알게 될 것이며, 
그리하여 온갖 두렵고 끔찍하고 고약한 일들이 앞다투어 일어나도 
그것들이 모두 공(空)한 것임을 철저히 간파(看破)하여, 
전혀 그 마음이 움직이지 않게 되면 이것을 일러서 정(定)이라고 하는 것이며, 
이것들이 인연 따라 나는 꿈과 같고 환(幻)과 같은 허망한 모습에 지나지 않음을 
분명히 꿰뚫어 보면 이것을 혜(慧)라고 하는 겁니다. 
공부하는 사람이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이 정·혜(定慧)를 가지런히 닦기를 그치지 않으면 
마침내 그 마음은 만법 밖으로 훤칠하게 벗어나서, 
일상에서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가운데 전혀 자취가 없으며,
물들거나 휘둘리는 일이 영원히 없을 것입니다. 
물론 몸도 마음도 이 세계도 몽땅 없으니, 병이 어디에 붙겠으며, 
이미 병이 없으니 약인들 어디에 소용 되겠어요? 
이렇게 문득 세간상(世間相)이 상주(常住)하는 것을 보면 
이것이 바로 참 부처(眞佛)가 여여한 것이니, 
모름지기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밝혀서 <마음의 눈>이 활짝 열리기를 기해야 할 것입니다. 
* * *
경에 이르기를, 
「환(幻)인 줄 알면 이미 여읜 것이요, 별달리 방편을 베풀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말씀이 아닙니까? 
여기서 꿈이니, 허깨비(幻)니 하는 말은, 
곧 「그런 것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남(生)이 없는 도리>를 깨치면 너무도 당연한 말일 텐데, 
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사람들은 너무 어렵고 심오(深奧)한 것으로 여겨서 
숫제 알아내려고 하는 마음도 내지 않으니, 참 딱한 일입니다. 
··· 여름철에 꼬마들이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놀고 있는 광경을 연상해 보세요. 
길도 만들고 '터널'도 만들고 모래성도 만들면서 말이에요, 
이 때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 길이나 '터널'이나 모래성 등이 새로 생겨났다고 하겠지만, 
지혜로운 사람이면 이것들이 그저 본래부터의 모래 벌의 모래일 뿐이요, 
실제로는 생겨나거나 사라지거나 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다만 사람들의 인식작용이 국소적(局所的)인 관찰만을 하도록 틀 지워져 있기 때문에 
늘 모래 벌 전체를 보는 눈이 열리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이 말이 갖는 함의(含意)는 대단히 크고도 중요합니다. 
마치 '코페르니쿠스'가 천동설(天動說)을 치워 버리고 지동설(地動說)을 내놓았을 때, 
당시의 사람들이 겪은 당혹스러움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충격적이지요. 생각해 보세요. 
― 지금 여러분의 면전에서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이 반복되면서 전개되고 있는 이 세상사가 
실제론 티끌만큼도 생멸(生滅)하거나 가고 오고 하는 일이 없다면, ― 
그 말이 그리 쉽게 믿어지겠어요? 
지구인들이 천동설 대신 지동설을 믿게 되는데는 4, 500 년이 결렸지만, 
이 <남(生)이 없는 도리>는 2500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믿는 사람을 찾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이와 같은 안목을 갖춘다면 이것이 바로 <마음의 눈>이 열리는 것이요, 
한 인간이 난생 처음으로 진실에 눈을 뜨게 되는 순간이며, 
이 사람을 일러서 달관(達觀)한 사람, 깨달은 사람(覺者)이라고 하는 것이니, 
모름지기 감당할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면 더는 지체하지 말고 
제법실상(諸法實相)을 깨치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 도리만 깨닫고 나면 그 밖의 일체의 논의(論議)는 저절로 쉬어질 것이니, 
다시 무슨 일이 남아 있어서 의증(疑症)을 일으키겠어요? 
* * *
불법(佛法)은, 진리(眞理)는 본래 생멸법(生滅法)이 아닙니다. 
이 여법(如法)을 미했기 때문에 헛되이 면전에서 
생멸상(生滅相)을 보고 왕래의 상(往來相)을 보게 된 것이니, 
따라서 성인의 가르침의 요체(要諦)는, 
이 오랜 미혹을 털어냄으로써 본래의 여여한 실상을 보게 하고자 하는 겁니다. 
요는, 본래 아무 일도 없는 가운데 여실(如實)한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미혹했기 때문에 
공연히 헐떡이게 된 것이니, 
그러기에 <불법>을 다른 이름으로 <무위>(無爲)라고도 하는 겁니다. 
예컨대, 저 해변가 백사장에 아이들이 장난으로 모래성을 쌓고, 
산과 강과 길 등을 만들었다고 칩시다. 
이 때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들 모래성이나 산과 길 등이 <새로 생겨났다>고 할 것이요, 
또 얼마 후에 이것들이 허물어져 사라지면 <다 사라졌다>고 하겠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이것들이 다 본래부터의 <모랫벌>의 모래일 뿐이요, 
조금도 새로 생겨나거나 사라지거나 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범부들이 사물을 관찰하는 안목도 이와 같아서, 
일체 존재의 근본 바탕은 까딱도 하지 않는데,
인연 따라 변하는 <겉모습>(相)만 좇기 때문에 
<여여해서 티끌 하나 움직인 조짐조차 없는 가운데> 헛되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아서 
분별하고 집착하기 때문에 공연히 그 마음이 시끄러운 겁니다. 
따라서 이 경지에 이르면, 부지런한 자도 게으른 자도 다 <함이 있는 자>이니, 
모두가 의지(依支)함이 없고 머무름 없는 성품(性品)을 어기는 짓이므로 
끝내 깨달을 분수가 없을 테니, 모름지기 잘 깨달아 살펴서 길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 * *
모름지기 제대로 된 수행자라면 
반드시 <참된 하나의 성품 바다>(一眞性海)에 들어가서 닦아야 합니다. 
저 바다는 인연 따라 종일토록 천파 만파(千波萬波)를 일으키지만 
그 모두가 항상 <한 맛>(一味)이 아니겠어요? 
그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천태만상(千態萬象)의 온갖 법이, 
― 그것이 존재이건, 일어나는 일이건, 또 유정(有情)이건 무정(無情)이건 막론하고 ― 
그 모두가 오직 '한 바탕'에 찍힌 여러 법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 외양(外樣)은 비록 각양 각색이지만, 
그 근본은 조금도 다를 게 없는 것임을 간파하는 것이 바로 공부의 첫 걸음인 겁니다. 
즉 다르면서도 항상 같고, 같으면서도 항상 다른, 이것이 바로 제법실상(諸法實相)인 겁니다. 
결국 불법 공부란, 
망정(妄情)에 홀려서 진실을 헷갈렸다가, 
허망을 깨달으면 그 허망이 몽땅 참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니, 
본래 이 세상엔 잘못된 게 하나도 없는 겁니다, 
다만 정식(情識)의 헛된 분별 때문에 온갖 법이 
마치 꿈인 양 허깨비인 양 나타나서 사람의 마음을 현혹하는 것이니, 
이에 홀리지만 않으면 만법은 스스로 당신의 손아귀에 들 것입니다. 
* * *
일체 만법이 마치 물체로 인하여 그림자가 생기고, 음성 따라 메아리가 나듯이, 
그 모두가 오직 인연으로 말미암을 뿐이요, 
업(業)을 짓는 자도 보(報)를 받는 자도 본래 없거늘, 
누가 있어서 무엇을 참회하며, 또 습기는 어디에 당한 겁니까? 
그모두가 다만 거짓 이름만 있을 뿐, 꿈이나 허깨비처럼 실체가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환(幻)인 줄을 알았으면 그것이 곧 여의는 것이니, 다시 무슨 방편을 필요로 하겠어요? 
그러기에 제대로 된 수행자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을 알아서, 
'마음'을 밝히고 '성품'을 볼 뿐이요, 
털고 닦고 하여 장애(障碍)를 제거함으로써 
해탈(解脫)을 도모하는 게 아니라는 걸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결국 본분납자(本分衲子)는 온갖 갈등(葛藤) 따위는 
손가락 하나 까딱 하지 않은 채, 곧장 구경의 땅을 밟는 겁니다. 
<참으로 여여한 법성>(眞如法性)은 본래 스스로 청정하여 물듦이 없건만, 
다만 범부의 정식(情識)이 분별을 일으키기 때문에 
온갖 갈등(葛藤)과 장애(障碍)가 있게 된 겁니다. 
따라서 일체 만법이 본래 성품이 공함을 보아서 조작(造作)함이 없고
의지(依支)함이 없는 본래 성품(本性)을 밝히도록 인도하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일대교화의 뜻임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범부의 망정(妄情)을 제할 뿐이요, 
달리 수승(殊勝)한 식견이나 특별한 재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닌 겁니다. 
더구나 「곧장 낙처(落處)를 밝히는 것으로는 자유롭지 못하다」는 요지의 말을 하는 것 같은데, 
낙처(落處)니, 당처(當處)니 하는 것은 학인(學人)에 의해 증득(證得)되는 것이 아닌 겁니다. 
그러기에 달마대사(達磨大師)도 양(梁) 나라 무제(武帝) 앞에서 「알 수 없습니다」고 했고, 
육조(六祖) 혜능대사(慧能大師)도 「나는 불법을 알지 못한다」고 했던 겁니다. 
<모르는 그것>,
― 이것은 <알고 모름의 양변>의 포섭이 아님 ― 이야말로 
선·악(善惡) 미·오(迷悟)등의 의지처(依支處)이며, 천 성인이 돌아가 쉴 곳임을 알아야 합니다. 
* * *
'마음 공부'는 학습이 아닙니다. 
아마도 '수행'이니, '공부'니 하는 세속적인 용어가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적잖이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게 사실인데, 
이 점을 특히 유의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금방 「'마음 공부'란 무엇이며, 어떻게 공부 해야 하는가?」 
하는 식으로 물을 게 뻔한데, 
이와 같은 질문 역시 '공부'의 참뜻을 알지 못하는 데서 오는 허물입니다. 
요컨대, 제법실상(諸法實相)을 깨달으면, 
지금의 모든 일이 어느 것 하나도 '불사'(佛事)가 아님이 없고, 
어떤 법도 '부처의 출흥(出興)'이 아님이 없는데, 
다만 중생이 본래 여여(如如)해서 물드는 일이 없는 
'청정한 제 성품'(淸淨自性)을 등졌기 때문에 
본래 공적(空寂)한 가운데서 망령되이 정식(情識)으로 
생멸(生滅)을 보고 거래(去來)를 보게 되는 거예요. 
따라서 누구라도 지금 당장에 <여실(如實)한 안목>이 열리기만 하면 
바로 '부처 지혜'를 갖추어서 성불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무엇이 '여실한 안목'인가? ··· 
"여실하다"란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만법이 인연 따라 날(生) 뿐이므로 
<'제 성품'이 없고>(無性), 
따라서 '모습이 없고'(無相) '작용도 없음'(無作)을 분명히 깨치고 나면, 
세상 만사는 항상 꼭두각시처럼 낫다가 꼭두각시처럼 사라져서 
시종일관 아무 일도 없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거예요. 
그러므로 종일토록 보아도 일찍이 본 일이 없고, 
종일토록 들어도 일찍이 들은 적이 없으며, 
종일토록 일을 해도 일찍이 일을 한적이 없는, 
― 이것이 바로 체(體)와 용(用)이 원융되어 걸림이 없는 경지이며, 
'여래'(如來)의 이름을 얻게 된 근거입니다. 
결국 만법이 '제 성품'이 없음으로 무력하여 작용이 없으며, 
따라서 본래 법이 법을 내는 일도 없고, 법이 법을 들이는 일도 없는 게 실상입니다. 
그러므로 인(因)이 과(果)를 내는 일도 없고 '과'가 '인'을 갚는(酬) 일도 없으니, 
요는 '불과'(佛果)란, 
바로 <인과 아닌 인과>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초발심(初發心)에 이 <인과 아닌 인과>를 깨치면 이것이 바로 '부처'인 것이요, 
다시 다른 도리가 있는 게 아닌 겁니다. 
'부처'가 다시 무엇 하러 '부처'가 될 일이 있겠어요?
* * *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미혹 때문에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보지 못하고, 
본래 여(如)한 법 가운데서 끊임없이 생멸하고 변화 변천하는 모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 여여한 법 가운데서는 본래 조그마한 생멸도 없는 게 실상입니다. 
그러니까 본래 아무 일도 없는 가운데서, <연기(緣起)의 이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온갖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見聞覺知) 일들이 꿈 같고 허깨비 같은 것인 줄 알지 못하고,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줄로 오인하고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에, 
전혀 까닭없이 번뇌에 휩싸인 채 나날이 허덕이면서 살아가고 있으니 참 딱한 일이죠. 
그러므로 <있는 그대로 보라>고 하는 말도 
이와 같은 세간사의 실상을 분명히 간파(看破)하고, 
그러는 가운데 조금도 물들거나 휘둘리는 일이 없는 안목을 갖추었을 때, 
저절로 밝은 안목이 열리면서,
지금 있는 이대로의 것을 조금도 바꿔치기 할 것 없이, 
즉 전혀 조작하거나 대처할 것 없이, 
문자 그대로 지금 있는 이대로가 곧 불사(佛事)라는 사실을 
분명히 꿰뚫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지혜가 마음 가운데 나타나면
성불은 바로 코 앞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무엇을 애쓸 일이 있겠어요? 더욱 분발하세요. 
출처 : 출리심 보리심 공
글쓴이 : - 삼매 -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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